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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9 09:50:59 조회 : 33         
12강-암 5장 1-3절(처녀 이스라엘)201118-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12강-암 5장 1-3절(처녀 이스라엘)2011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5장 1-3절까지입니다.

아모스 5:1-3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를 때에 2절에 보면, 그냥 이스라엘을 부르지 않고 “처녀 이스라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처녀는 예비신부라 할 수 있습니다. 결혼해야 될 여성을 처녀라고 합니다. 그런데 5장 1절에 보면, 처녀여야 될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애가, 애가란 슬픈 노래지요,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의 처녀가 되어야 될 텐데 이스라엘 자체가 자신의 하나님의 처녀 됨을 빼고 다른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는 그냥 이스라엘로 되고 싶은 거예요. 처녀라 하는 것은 자기 옆에 남편 되시는 분의 자리가 있어야 될 텐데 이 처녀는 남편의 자리대신 스스로의 자강, 스스로 자기 자신의 힘을 돋우어서, 막강하게 해서 이방나라처럼 독자적으로 자기의 자체적인 힘으로 오직 자기만을 바라보면서 살려는 그런 시도를 한 겁니다.

그러면, 혼자 살 것 같으면 이것은 처녀 곧 누구의 남편을 맞이해야 될 그러한 역할과 기능이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분할 때는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내가 될 신부가 될 사람으로서의 처녀 이스라엘을 기대했건만 이스라엘 자신이 다른 이방민족과 더불어서 남편을 의지한다, 남편을 바라본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바라보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기만 쳐다보면서, 자기 잘남에 흡족하면서 오직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방민족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께서 슬픈 노래를 지었는데 사실은 이 슬픈 노래보다도 하나님께서 본디 이스라엘의 자리, 내 신부로의 자리를 하나님 쪽에서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슬픈 노래도 필요 없지요. 그냥 내버려두지요. 그런데 슬픈 노래를 지어서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백성에게 들리게 했다는 말은, 너는 너의 처녀됨의 그 본래의 사명을 버릴지라도 나는 너에 대한 사명을 버리지 않는다.

물론 지금은 슬프지만 슬프다는 쪽으로 노래를 지어서 다가간다는 것은 원천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님 쪽에서 유효하고 유지하고 있겠다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먼저 다가오고 슬픈 노래로, 또 처녀라고 불러주는 이것은 굉장히 이스라엘로서는 행운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천국가려고 교회 나오는데 천국가려고 교회 나오면 안 되고요, 하나님께로 가려고 해야 돼요. 이게 엄청 큰 차이입니다. 애들한테 만약에 정말 교회가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 교회 나온다면 어린애들에게 이런 질문이 될 수 있지요. “너 오늘 이 시간에 놀이동산갈래, 하나님한테 갈래?”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부모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너 놀이동산갈래, 교회 갈래?” 이렇게 되어버린다고요. 그러면, 교회 가게 되면 천국 간다. 천국이 하나님나라가 아니고 자기를 위한 보다 더 시설이 잘된 놀이동산이 되는 겁니다. 끝까지 ‘자기를 위해서’가 포기가 안 되는 거예요. 내가 교회 간다, 천국 간다, 할 때도 여전히 내가 주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나를 잃어버리는 길에 들어선다는 뜻이에요. 나를 잃어버리는 길, 이젠 나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고 내가 나를 이제 그만 놔주자는 겁니다. 평생토록 나 하나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애 닳았는데 이제는 이 몸을 하나님께 드리면 내가 구상하고 내가 예상했던 모든 것을 이제는 스스로 포기하자, 나는 내가 잘난 나를 만나기보다는 나는 하나님 만나고 싶어, 이런 자세가 처녀의 자세에요. 결혼하겠다는 처녀의 자세입니다.

요즘 아가씨들은 그렇지 않지요. “유럽 여행 갈래, 선보러 갈래?” 하면 일단 여행 갔다 오고 그 다음에 선보러 간다고 하지요. 일단은 여행 갔다 오고 선보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주도권을 여전히 포기 못하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찾아오시는 것, 이게 진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규정을 해놓았어요. “너는 내 신붓감이다. 내 색싯감이다.” 하고 규정을 하고 나오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같이 이스라엘은 전혀 신붓감이 되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이 이스라엘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께서 신붓감 되지도 못하는, 처녀 같지도 않은 이 아가씨를 하나님의 신부에 적합하도록 조치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 조치가 3절에 나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그동안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을 흉내를 내면서 자체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내 힘으로, 이방민족이 자기들 힘으로 자기들 살듯이 나도 내 힘으로 내가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자부했던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 너는 처녀이어야 하고 너는 내 신부여야 하는 그 약속을 위반하는 줄도 몰랐지요. 남들 하니까 그냥 따라가는 거예요. 이 세상 이방민족의 모든 권력의 구조와 질서체제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악마가 하늘나라에서 봤던 그 질서를 그대로 모방해서 지상에 악마의 제국을 세우려고 하는 그 방식입니다.

악마가 알고 있던 하나님계시는 그 구조를 지상에 펼쳐서 악마 자신이 주가 되겠다는 시도 로 자기에게 복속된 모든 인간에게, 자기에게 종속된 모든 인간에게 배치를 한 거지요. 그 중심에는 악마가 왕이 되는, 주가 되는 그러한 질서체제를 가지고 배치를 했을 때 이걸 다니엘서에서는 제국, 하나의 짐승,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지상에 하나님이 구상한 하늘나라를 모방해서, 흉내를 내서 이 세상을 주권적으로 통치를 하는 겁니다. 그것을 세상의 신이라,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야기하지요.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가, 악마가 건설한 이 세상질서기 때문에 사정 봐주지 않고 박살을 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9, 20절에 보면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1천 6백이니까 40 곱하기40, 정 방향, 전 세계의 영역을 ‘1천 6백 스다디온’으로 표현한 겁니다. 이것은 계산해보면 약 3백 4십 킬로미터,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피가, 포도주 틀을 발로 밟듯이 밟아버리니까 그 진노의 강도가 얼마나 센지 그 밟힌 데서 나오는 그 진노의 피가 온 사방 구석구석까지 다 퍼진다 그 말이에요. 3백 4십 킬로까지 다 날라 가는 거예요.

어느 구석도 유사천국에 대해서 하나님은 방치하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진노로서 짓밟아버리지요. 마치 애굽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가 애굽의 왕궁에 있는 아들뿐만 아니고 애굽전역에 있는 맏아들을 예외 없이 다 죽이는 것처럼 하나님이 일 치르는 것이 허투루 하지 않아요. 빈틈이 없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을 잡으라면 저는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심판에 빈곳이 없었더라. 이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지옥이고 천국이고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는 구석은 어느 구석도 없었더라. 다 찾아내서, 다 찾아가서 심판해 버립니다. 벙커 만들고 해도 소용없어요. 이 땅에서 주님의 낯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지금은 헤헤거리고 까불면서 교회 안 나오지요. 나중에 무덤에 가면 끝난 줄 알지요. 자살하면 끝난 줄 압니까? “무덤에서 주의 음성들을 때가 오나니” 죽고 나서 그 때 심판주 되시는 주의 음성 들으면요, 기가 막혀요. 악~!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악~! 마치 뭉크의 그림에 나오는 절규처럼 악~! <나 홀로 집에> 나오는 그 애가 면도하다가 소리 지르는 것처럼 악~! 기가 막힐 겁니다.

아, 뒤끝 있네. 끈질겨요. 피할 곳이 없어요. 이 세상은 이미 끝장 난겁니다. 세상은 끝났어요.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을, 백성을 처녀로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3절에 “이스라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는 말은 그동안 자체적인 군사력으로 이방민족과 더불어서 국가질서를 꾸려가려는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딴 게 필요 없다는 거예요.

군사력, 힘의 증강, 물리적인 힘, 이런 게 필요 없다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이 자꾸 군사력을 증강하느냐 하면, 내가 사랑하는 내가 되고 싶어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나를 내가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사랑하는 너 말고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너, 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남들처럼 모방해서 그 이상적인모델을 내가 사랑해 왔거든요. 주님께서는 그걸 다가오면서 야금야금 갉아먹는 거예요.

저는 이걸 빼빼로 게임이라 하는데 양쪽에서 빼빼로 입에 물고 있다면 한쪽에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는 겁니다. 그렇게 하든지 또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사랑의 끈으로 묶어놓고 이스라엘은 멍청하게 가만있는데 그 사랑의 끈을 주님 쪽에서 돌려버리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돌려버리니까 주님께서 점점 다가오게 되는데 다가오면서 이스라엘 본인이 설정한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설정한 그 군사력이 천명이 나오면 백 명 되어버리고 백 명이 나오면 열 명이 되어버리고 점점 더 어떤 중심지점을 향하여 주님께서 어떤 액션, 일을 하시면서 나 혼자 살기 위해서 형성한 모든 것을 갉아먹으면서 오시는 거예요.

옛날 게임에도 있잖아요. 고무줄이나 끈을 가지고 연결한 상태에서 한쪽에서 빙빙 돌려버리니까 어느새 코앞까지 당도했잖아요. 끈으로 묶여 있으니까, 피할 곳도 없으니까 빙빙 돌면서 “어? 여기 왔네.” 벌써 코앞까지 왔어요. “나의신부야 여기 왔네.”

다시 말해서 남편 되시는 하나님이 신부되는 이스라엘 보고 하는 말이 “딴 것 쳐다보지 말고 날 봐. 내 얼굴을 봐. 내가 네 남편이야. 얼굴 똑바로 쳐다봐. 스스로 네가 이 땅에서 버티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그 모습, 지금 너는 엉뚱한 허상, 망상, 네가 창출한, 네가 주인공이 된 그러한 모습을 너는 마치 너의 남편처럼 너의 색시처럼 네가 정했는데 나 그 흔적 다 지워 버릴 거야.” 이게 바로 주의 다가오심입니다. 갉아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근사하게 만들어놓은 모든 것들은 다 날라 가는 거예요. 얼마나 참담하겠습니까? 가을되면 여러분은 그걸 생각해야 돼요. 마지막 잎새, 마지막 잎새, 그 모습 자체가 처량하기 짝이 없고 참담함이에요.

‘아, 내 것은 이제 하나도 없다. 나 이제 누굴 사랑하지?’ 내가 풍족한 나, 근사한 나, 멋있는 나, 사람에게 인기가 최고가 된 나, 나는 그걸 희망하고 살아왔는데 주님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 갉아먹었어요.

그런데 원래 사랑이란 그런 거예요. 사랑은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찾아오는 것이 사랑이어야 해요.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찾아오는 것, 그게 사랑다운 거예요. 주님께서는 풍족한 이스라엘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어요. 참담함을 체험하게 만듭니다. 세상 사람과 비슷하게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를 않아요. 다 갉아먹어요.

다 빼앗아 갑니다. 그 이유가 뭐냐? 너는 누구의 신부라는 사실을 네가 놓쳐버렸다. 이사야 62장 4, 5절에 보면,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헵시바’라는 것은 네가 나를 기뻐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겁니다.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는 뜻이고요.

“네 땅을 쁄라(쀼ㄹ라)라 하리니” ‘쁄라’라는 뜻은 내가 청혼한 여자, 나와 결혼할 여자라,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너를 취하겠다, 사랑으로 취하겠다, 이게 불쌍히 여김이고 이게 긍휼입니다. 구원의 원칙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불쌍히 여겨주는 거예요. 네 것을 내가 챙겨서 그것보고 내가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내 쪽에서 다 희생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가 할 것은 뭐냐? 사랑이 오기 전에 자기가 그리워하고 자기가 예상했던 그 모든 것은 철거해야 되지요.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을 포기해야 되는 겁니다. 구약성경 전체 내용이 바로 그 내용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찾아오면서 “이제는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세상에서 태어나서 가진 모든 것은 여지없이 버려도 괜찮아. 상관없어.” 그 이야기를 계속 해 온 겁니다.

그 이야기의 하나의 힌트가 되는 이야기가 마태복음 23장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주님께서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벨, 그리고 바른 소리 하다가 요아스 왕에게 죽었던 선지자 스가랴, 그 선지자의 억울한 피, 그 다음에 예수님의 피, 이렇게 어떤 선을 연결시키는 거예요. 사랑의 끈으로 연결시키는 거예요.

유치원 들어갈 애들의 학습장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버스 안에 동그라미와 세모의 모형을 가리키면서 “여기 버스가 있는데 이 버스 안에서 제일 키 큰 사람에게 동그라미를 치세요.” 그 다음에 “옳지 그러면 제일 뒤에 줄 선 사람에게는 세모를 치세요.” 세모, 그러면 동그라미와 세모의 차이성을 아는 거예요.

“자, 그 다음에 동물원에 갔습니다. 동물 중에서 제일 몸집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줄로 이어보세요.” 그러면 큰 것부터 해서 그 다음 작은 것 그리고 그 다음 작은 것, 이렇게 줄로 잇겠지요. 하나의 줄로 연결 짓는 것, 그것은 하나의 천국의 유일한 노선이 됩니다. 그 줄, 그 동물원에 끼어들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구원의 길은 예수님이 하나의 기관차고 거기에 하나의 객차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아벨과 스가랴의 피, 예수님처럼 어떤 노선을 형성하는 거예요. 그 노선을 형성할 때 그 노선의 끈에 해당되는 그것이 뭐냐? 그것은 내가 너희들로 하여금 앞에서 끄는, 그러니까 주님이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희생물이 되셨다, 하는 그러한 기능을 너희들에게 알려주는 노선, 그게 바로 그 노선의 기능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해서는 여러분이 잘 모를 거예요.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20절에 나오는 그 아간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을 빼냈어요.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이렇게 빼낸 거예요.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인데 거기서 이것은 내 꺼, 라고 독자적으로 살고 싶어서,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독자적으로 나는 누구의 아내, 누구의 신부가 싫고 내 자리는 나로 인하여 꽉 차기를 바라는 거예요. 교회 나오는 사람이나 안 나오는 사람이나 복음을 전하면 그 사람들이 다 거절을 하는데 거절하는 이유가, 평생토록 살아가면서, 24시간 평생토록 생각하는 것이 내 것으로만 꽉 차 있는 인생, 그 인생만 생각한 거예요.

그게 이방민족이고 마귀가 지배하는, 선악과 따먹고 신이 되고자 하는 그 속성이 어디 가겠어요? 그래놓고 교회 가서 기도해도 꽉 차 있는 것에 더 채워달라고 기도하지요. 악을 쓰고 기도하고 용을 쓰고 기도하지요. 그러나 성경의 이스라엘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에 내 것이라고 따로 챙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간은 돌에 맞아 죽고요. 사무엘상 15장 9절에 봐도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거든요. 아말렉전쟁에서 하나님이 승리하게 해 줬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승리하고 난 뒤에 전부 진멸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사무엘상 15장 9절에 보니까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왕이라는 작자가 시시한 것만 다 없애버리고 좋은 것은 다 남겨 둔거예요. 왜? 그것은 따로 나만의 것으로 챙기고 그 나만의 것을 챙겨버리면 나는 하나님을 만나기보다는 내 것으로, 따로 챙긴 내 것으로 충분한, 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그 나를 내가 사랑하는 거예요. 내가 나의 신부가 되고 내가 나의 남편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 모습을 이스라엘 역사가운데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모습으로 사울왕을 하나님께서 체크해 주는 겁니다. 출애굽기의 유월절 이야기 유명하잖아요. 그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뭘 부탁했느냐? 출애굽기 11장 2절에 보면 “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 은, 금패물을 구하게 하라.”

이웃사람 보고 금은패물 달라고 한다면 그들이 주게 될 것이다. 그래서 3절에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백성들이 공짜로 얻었다는 그 말이에요. 자기 것도 아닌데 애굽사람의 금은패물을 그들은 공짜로 얻은 거예요. 이걸 두고 은혜를 받았다고 표현되어 있는 겁니다. 자기가 맡긴 것을 도로 찾은 것이 아니고, 자기 것도 아니고 이웃집 물건인데 “금은패물 있거든 주세요. 우린 나갈 거니까.” 했더니 그냥 그들이 줬다는 거예요. 주께서 쓰시겠다, 하니 나귀를 주는 것처럼 그렇게 받은 거예요.

그러면 그 금은패물이 무슨 용도냐? 자기 소유용이냐? 내가 이만큼 패물 얻었으니 나는 부자다, 하고 자기가 자기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용도입니까? 아닙니다. 출애굽기 25장 1-4절에“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이렇게 가져오라는 겁니다.

가져오라 해서 뭐하느냐? 하나님의 성막을 만들고, 제사장 복장을 만들고, 하나님의 하늘의 질서가 땅에 임하도록 하는 용도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이 구원의 노선, 아까 찾아본 대로 아벨부터 예수님까지의 구원의 노선, 그 끈, 유일한 길이에요, 다른 구원의 길은 없어요.

그 노선에 가입될 때에 자기 자신이 앞에 계신 주님께서 희생제물 되셨다는 사실을 자기의 몸을 통해서 그 기능을 보여주는 것, 그 생각을 하는 것,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남편 되시는 분이 돌아가셨구나, 그걸 늘 각인시키는 인생을 사는 것이 이스라엘의 이유입니다.

그 원칙은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창세기 22장 5,6절에 보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자 모리아산에 올라갈 때 종이 불쏘시개 할 땔감을 지고 갔지요. 갔는데 어느 정도 가서는 상황보고 여기서 너는 멈추고 여기서부터 나와 아들, 이삭과 둘만 가는 겁니다.

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아들 이삭의 역할이 뭐냐 자기가 죽게 되는데 필요한 불쏘시개를 본인이 짊어지고 가야 됩니다. 5절에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이게 이스라엘의 원칙이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이 땅에서 끌어 모은 것은 독자적으로 나 행복하기 위해서 끌어 모은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보다는 나를 위해 희생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 길 쪽으로 가면서 주께서 이런 희생을 하셨습니다, 하고 자기의 가진 것을 내놓는 불쏘시개를 자기가 짊어지고 결국 그 불쏘시개로 하여금 자기가 죽게 만드는 그 재료를 본인의 등에다 짊어지는 그것이 바로 성도의 가는 길이에요.

참, 이런 이야기는요, 부흥회 할 때 제 3일째 멋집니다. “너희들 집은 잘 지으면서 교회 예배당 꼬라지는 이게 뭐냐? 돈 내라.” 할 때 부흥사들이 단골소재로 써먹는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그러면 차이점이 뭐냐? 차이점 다시 말씀드릴게요. “네가 놀이동산 갈래, 교회 갈래?” 이건 아니거든요. “부흥회 해서 잘 지어놓은 예배당갈래, 놀이동산갈래?” 그것은 안 되고 “놀이동산 갈래, 하나님 만날래?” 예배당까지 날려버려야 돼요. 내가 근사해 보이는 모든 것은 날려버려야 돼요.

주께서 그 노선에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중 하나의 예가 사사기 6장에 나옵니다. 사사기 6장에 보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이라는 작은 농장주인에게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기드온이 15절에 이렇게 이야기해요.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진 재주와 능력과 재물 가지고는 이스라엘 구원 못합니다, 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먼저 찾아왔을 때 여기서 기드온이 토해놨다는 말은, 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천명이 나오고 백 명이 나오고 이렇게 인간을 앞장세우고 이방민족처럼 힘으로 밀어붙여서 우리 이스라엘 지키고 내 것을 지킨다는 그런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드온을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 집어넣는 것을 기드온이 체험해야 돼요.

어떻게 하느냐? 내가 작은자고 아무것도 못한다고 했을 때에 주님께서 하게 하십니다. 하게 하시는데 군대를 모집하니 2만 2천명이 왔어요. 그야말로 그럴싸해 보입니다. 오늘 아모스 본문에 의하면 그 2만 2천명은 뭐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2천 2백 명이 되어야 돼요. 십분의 일로 잘려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정도도 아니에요. 아예 3백 명으로 잘라버려요.

2만 2천명을 다 돌려보내고 3백 명만 남은 거예요. 이 3백 명이 뭐냐 하면, 기드온이 하나님 만날 때 제일 먼저 고백한 것, “하나님이여 저는 약하고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하는 그 대목을 주님께서는 바로 그거야, 그런 식으로 일하게 하시는 거예요. 기드온으로 하여금 지극히 작고 약하게 만들어서 이번 일을 하시는 것은 기드온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고백과 함께 2만 2천명을 모집하게 한 거예요.

처음부터 3백 명만 오고 스톱, 끊으면 되는데 처음부터 선착순 3백 명으로 끊는 것이 아니고 2만 2천명 모이게 해놓고 돌려보내는 식으로 3백 명만 남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2만 2천명이 왔을 때 얼마나 신났겠어요. 야, 얼추 붙을만하다 생각되었겠지요. 그런데 다 보내라는 거예요.

신약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 신약 누가복음 7장에 37, 38절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랬을 때 바리새인들이 어디에 관심뒀느냐 하면 그 향수 시세에 대해서 관심 뒀어요. 저 향수 시집가려고 모아놓은 저 재산 일거에 어떻게 다 날리냐 도대체 예수라는 자에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 그 가치를 능가하지요. 내가 되고 싶은 나에게는 그 향수 값은 너무 아까워요. 내가 기대했던 행복한 내 미래의 모습에 그 향수 값은 너무나 아까운 겁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만나고 싶은 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을 만나고 싶고 나 위해서 희생했다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 졌다는 그분을 만나고 싶을 때 나는 십자가 희생의 의미를 내 인생에다 담는 그것이 주님의 구원의 반열에 가담된 그 끈에 소속된 사람이에요. 요한복음 12장에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비싼 향수를 다 뿌려버려요. 제자들이 비난하니까 “비난하지 말라. 내 십자가 전할 때 내 죽음을 전할 때 이 마리아도 같이 전하게 될 것이다. 짝을 이뤄서 전해질 것이다.”

사사기 6장으로 돌아가서, 사사기 6장에서 기드온이 처음에 “내가 지극히 작습니다. 약합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 했을 때에 자기는 무슨 생각이냐 하면, 내가 보다 강하고 돈도 많고 이러면 도움이 될 텐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라는 식으로 계속 빼는 거예요.

빼는데 그래도 계속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니까 사사기 6장 36-38절에 보면, 기드온에 하나님에게 어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지요.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찌기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그러니까 또 여기서 기드온이 빼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 죄송합니다. 한번만 더 하겠습니다. 39, 40절에,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또 그렇게 되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기드온아, 네가 양털이라는 겁니다. 네 안에 하나님과 너와 만나게 되는 양털이라는,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다우냐를 네 쪽에서 선택한 그 양털, 이제는 하나님이 그 보잘 것 없는 양털을 내가 사용하는 식으로 너에게 다가가겠다는 겁니다. 네가 나를 시험해서 동원된 그 양털을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여서 내가 내 일을 이루는데 그 보잘 것 없는 양털을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그 양털 하나를.

그러면 이슬은 뭡니까 이슬은 하나님이지요. 일방적인 양털과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그 이슬, 그대는 이슬~, 그 이슬, 설마 이슬이 바짝 마를까, 설마 이슬이 양털에만 축축할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기드온에게 농락당함으로서 “기드온아, 너는 나와 운명을 같이 해야 돼. 너는 나와 한 부부야. 이제는 네 맘대로 빼지를 못해. 내가 희생한다면 너도 희생해야 돼. 왜? 같은 부부니까.” 이 땅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바로 주님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아무것도 아닌 존재, 시시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서 희생하셨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시당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오셨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창세기 3장 25절에서 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뱀과 대결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을 했어요.

메시아가 올 것인데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으로 온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이 땅에 누구나 자진해서 시시한, 아무 보잘 것이 없는 여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시간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거든요. 여자의 후손이 먼저 이 땅에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여성이 발생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여성,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한 여성, 잉태치 못한 여성이 거기서 생산이 된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오실 때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소위 강한 남성은 누가 지배하고 있느냐? 악마가 다 지배하고 있었거든요.

그것과 전쟁을 할 때는 지극히 약해 보이는 3백 명, 그 3백 명 가지고 십만이 넘는 미디안 군사를 이기게 됩니다. 사사기 8장 10-12절에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 이만명이 죽었고 그 남은 일만 오천명 가량은 그들을 좇아 거기 있더라 적군이 안연히 있는 중에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편 장막에 거한 자의 길로 올라가서 적군을 치니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추격하여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군대를 파하니라.”

그러니까 13만 5천명을 3백 명이 죽여 버립니다. 이럴 때 야, 기드온이 이겼다, 하지 말고 약한 자가 강한자를 이겼다. 백 명이 천명을 이기고 열 명이 백 명을 이겼다. 이런 원칙이에요.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길 수 없거든요. 그러면 이렇게 설명해야 돼요. 약한 자를 찾으시고 약한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천하에 이 세상 가장 강하다는 그것을 이겨버렸다.

이렇게 되고, 신약에 오게 되면 주님이 악마를 이겼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본인이 세상을 이기는 강자가 되려고 오늘도 싸대고 있고 열심내고 있고. 이 땅에 나의 승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를 잃어버리는 길로 접어들었고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제물, 스스로 제물용으로 쓰이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뽑힌 겁니다.

아까 말한 아벨, 스가랴, 마리아, 그리고 죄인 된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스데반집사, 전부다 구원받은 사람들이잖아요. 사도바울, 그리고 사도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빌 4:13)다는 말은 내가 지극히 작은 자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바라기는 여러분이 부동한 한 15만평 있고, 한 달 수입이 한 2천 5백정도 되는 지극히 작은 자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재산이 있더라도 그러한 부자가 나의 희망이 아니고 나의 필생의 소망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내가 만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세상적일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서 대신 희생하신 그 분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재산이 있더라도 지극히 작은 자로 보시는 거예요.

왜? 그게 신부여야 되니까. 신부는 남편으로 인하여 신부되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사랑하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아까 본대로 이삭이 불쏘시개를 지듯이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한 것이 있어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내가 지극히 쓸데없는 인간인 것처럼 너도 나와 같이 이 땅에서 아무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스스로 제물 됨을 자진해서 나를 따라 오너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면서 자꾸만 내가 과연 그런 인간인가, 라는 것을 보려고 하는데 3초 머물러서 생각하면 신자인지 아닌지 안 다 하는데 3초에 머물지 마세요.

왜냐하면 머물면 뭐든지 우상이 되어버려요. 육의 특징이 그래요. 머물면 우상이 된다고요. 왜? 내가 측정하고 관찰하고 내가 신앙인인지 측량하니까 ‘지금 우리 군사가 천명이 되었지. 괜찮지.’ 하면 주께서 갉아먹어서 백 명이 되고 ‘오백 명이라도 괜찮겠지.’ 하면 열 명 되게 만들어요. 우리로 하여금 지극히 작은 자, 남편만 있으면 되지, 네 남편 주님만 있으면 되지 네가 스스로 너를 지키는 어떤 것은 필요 없다는 겁니다.

제가 지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사람 대 사람관계에서 투명한 유리벽을 상정하고 여기까지는 허용하지만 여기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내가 되고 싶은 나, 따로 이상형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보이지 않는 투명한 유리벽이 있으면 쓸데없는 날파리나 나방같은 것 다 걸러내거든요. 다 부딪힌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전략중 하나가 뭐냐? 자기의 거짓된 정보를 상대에게 일부러 유포하는 거예요. 그러면 가짜 뉴스가 막 돌아다니겠지요. 나에 대해서 잘못되게 인식하는 나에 대한 혼선을 일부러 야기 시켜서 투명한 유리벽 안에서 나만의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나의 절대적 공간을 만드는 내 전략에 우샤, 성공한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입만 떼면 속이는 거예요. 가짜 정보를 흘려서 나를 잘못 이해하게 만들고 그 잘못 이해한 그것에 대해서 나라고 평가하는 그것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식으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실제로 부부도 마찬가지고요. 평생토록 몰라요.

그러나 그게 자기가 자기 것으로 자족하고,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밖에 안되면 이것은 처녀의 자격도 안 되고 신부의 자격도 안돼요. 신랑이 와서 그것 다 박살내는데 마지막 잎새, 초라하기 짝이 없는 참담함을 줄 때 “주여, 이제는 저는 승리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가신 이 모습이 우리 남편 모습이라면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가 됨을 감사하겠습니다.” 사랑은 내가 가장 참담할 때,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크게 느껴지는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성도로서, 이스라엘로서 위치가 감히 주님의 신부라는 이 사실을 알았사오니 신부라도 이렇게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주님의 희생에 근거가 있음을 또다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2강-암 5장 1-3절(처녀이스라엘)201118-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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