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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5 07:02:19 조회 : 53         
20210913a 부산강의 : [시편]41(25:15)-소유성과 위기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10913a 부산강의 : [시편]41(25:15)-소유성과 위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25편 합니다. 시편 25편에 다윗이 언급을 하는데 15절에 보면,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나와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그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 그런데 그물이 뭐냐 하면은 이게 14절에 이런 말씀 나오는데 18절에 보면 그물을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나를 죄에서 끄집어내 달라. 그러면 그 전에 나와 죄는 엉겨붙어있는 겁니다.

첫째는 나와 그물은 같이 엉겨붙어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나는 그물에서 못 벗어난다. 이 말은 18절 집어넣으면 세 번째, 나는 죄에서 못 벗어난다. 네 번째, 죄는 저주를 줘요. 나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못 벗어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전체를 하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전체를 말씀으로 보는 거예요. 전체를 말씀으로 본다는 인식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나는 여기 있고, 말씀이 있고, 내가 말씀을 지킨다. 보통 이렇게 되잖아요. 이게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궁지에 몰린 내 전체가, 말씀이 말씀 되게 하는 요건에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1, 2, 3, 4 조사해보면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선 여기 뭐가 필요하냐? 죄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구원돼야 될 나가 필요한 겁니다. 여기서 죄에서 못 빠져나오는 갈등이 일어나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체제, 말씀 위주로 생각 안 하고 나 위주로 생각해버리면 죄라는 것도 잘못됐고, 그물도 잘못됐고, 용서, 심판 이것도 전부 다 개념이 잘못되게 되는 겁니다.

죄에서 저주, 심판에서 벗어나서 멀쩡한 나가 되게 되면 내가 원했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으쌰으쌰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나는 절대자가 돼버리는 겁니다. 내가 절대자 같으면 이거는 말씀이 절대자가 아니고 내가 말씀 안에 따로 튀어나오는 게 되거든요. 이런 것, 이게 뭐냐 하면 분명히 나는 죄에서 못 벗어나야 되는데 그런 난데, 못 벗어나야 되고, 오죽했으면 요구가 그물이겠습니까.

그물의 실제성. 그물의 실제성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비 온 뒤에 운동하다보면 거미줄 있잖아요. 거미줄에 자꾸 걸려요. 왜냐하면 거미줄이 너무 가늘어서 눈 나쁜 사람은 잘 안 보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가까이 가면 뭔가 지저분한 게 거치적거리면 이 공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미 설치돼있는 거예요. 거미줄 같으면 우리가 무시하면 되지만 문제는 이 그물이 내가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 상황이 말씀대로 된 거예요. 말씀에 보면 나 좋아라하는 게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면 여기서 오늘 본문에 보면 2절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지요?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 나에게 원수가 있습니다. 원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 달라. 그럼 이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 전체를 말씀이라고 생각할 때에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거미줄처럼 눈에 안 보이지만 실제하고 실제로 있고 그 다음에 그 힘에 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그것으로 나의 원수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나의 원수, 죄 같은 말인데 이거는 나의 원수를 누구한테 호소합니까? 주님께 호소한다는 의미는 나의 원수 멈추는 게 아니고 주님의 원수로 확장되는 거예요. 의미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집사님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분이 교사로 일하다가 연락이 왔어요. “선생님, 2주간 격리입니다.” 확진자와 밀착한 사람에 해당되어서 병은 걸리지 않았지만 따로 2주간 격리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격리를 할 때 집에서 격리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앱을 깔아야 돼요. 국가에서 앱을 깔아서 전자 팔찌 비슷한 거예요. 발목에 차는 것과 비슷해서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국가에서 다 감시하는 겁니다. 격리지를 떠나지 않도록. 그래서 그 집사님이 하는 말씀이, “국가의 힘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는 거예요. 국가의 힘이 이렇게 강력할 줄 몰랐다.

나에게 있어서 내 안에 있는 모든 세상은 나의 자율성을 충분히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나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무엇을 체험했느냐 하면 이 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의 실제성은, 내가 내 뜻대로 못하도록 전부 다 감시체제가 이미 실제로 내 주변을 내 상황을 그렇게 만들고 있고 나는 거기에 뭐로 빠져있다? 그물에 갇힌 셈이다, 그물에 갇혀있다는 거예요.

국가의 권력이 이렇게 셀 줄은 몰랐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여기 두 번째, 나는 내 힘으로 그 그물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속에 내가 갇혔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이 시편 25편이 의미가 있어요. 이게 말씀이 말씀대로 성취되는 환경입니다.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릴 거예요.

인간이 이 원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에게서 나를 제거해야 되는데 나에게서 나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다윗언약에 있어서 다윗언약은 다윗을 제거하는 게 다윗언약이에요. 아브라함언약은 아브라함을 제거하는 게 아브라함언약이고, 이삭언약은 이삭을 제거하는 게 이삭언약입니다.

이삭을 누굴 밀어주느냐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에서를 밀어주잖아요. 그걸 실패로 끝내게 하는 거예요. 그게 언약의 위력이에요. 나는 첫째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둘째 아들 야곱에게 물려주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삭을 언약에서 제거할 때 이삭은 제거되었다는 그 흔적이 남아있는 그 언약을 이삭언약이라 하고,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생산할 때 이스마엘을 낳았거든요. 그 이스마엘 속에 자기 의지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 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무엇이냐? 아브라함언약인 겁니다. 야곱언약은 뭐냐? 야곱을 제거하는 거예요. 야곱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야곱을 죽여서 거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 이스라엘로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야곱언약이에요.

그러면 다윗언약은 뭐냐? 다윗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럼 마지막 새 언약은 뭐냐? 예수님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을 없애버리고 다시 죽은 예수를 뭡니까? 사흘 만에 살려내는 그 바탕이 언약을 형성하는 겁니다. 나에 대한 나의 제거에요. 나에게서 나를 떠나야 되는 겁니다. 이 작업.

왜냐하면 나는 무엇에서 돌파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수에서 돌파, 돌파라고 요새 유행하죠. 백신 맞아봐야 세균이 더 세서 돌파하는 것 있잖아요. 언약의 이스라엘은 강력한 원수가 실제성으로 그물처럼 형성되게 만들어서 인간의 힘으로 돌파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돌파하는 그 현장에다 다윗을 집어넣는 거예요.

교회는 국가 속에서 돌파하는 단체에요. 아까 국가 이야기했지요. 앱 깔아서 감시하는 것. 국가가 강력해야 돼요. 뭐 교회가 예배드린다. 이건 국가 안에서 성립이 안 돼야 돼요. 할 수가 없어야 돼요. 할 수 없어야 국가 자체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원수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초대교회 알지요. 스데반 집사가 죽는다는 이야기, 그것만 하지 마시고 그 스데반 집사 죽는 현장에 누가 있었습니까? 장차 사도가 될 사울이 있었잖아요. 사울이 그 현장에 있었어요. 그러면 사울을 통해서 사울을 사도되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사울은 결코 사도가 될 의사도 없었고 그런 노력도 할 수 없고 어떤 예상도 하지 못하고 사울은 자기가 아는 전부 속에 스스로 갇혀있는 거예요.

사울은 누구한데 갇혀있는가? 사울 본인에게 갇혀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구원의 시작이에요.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게 아무것도 없게 만드는 그게 구원의 시작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이 실제화 되는 겁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이야기하면,

이 전체가 나는 그물에 엉겨붙어있다. 두 번째, 그 그물은 내 힘으로 못 벗어난다. 그 그물의 이름이 뭐냐? 죄다. 죄에서 저주와 심판이 있었다. 결국 합쳐서 나라는 것은 이 죄의 위세에 갇혀있어서 꼼짝 못하고 있고 당하기만 한다. 그런데 이 전체가 말씀이 말씀되기 위한 요건에 충족되는 거예요.

내가 무능력한 그것이 뭐가 된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충족돼야 될 요건 중에 하나에요. 내 힘으로 구원받는다든지 내가 예상한 내가 된다든지 이것은 말씀에 위배되는 겁니다. 말씀은 내 위주로 돼있질 않아요. 말씀이 성취되는 것은 뭐냐? 죄 속에 있는 나를 죄와 더불어 없애버리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성도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한 번 들어보세요. 여러분에게 해당되는지. 성도에게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아는 복음의 지식에 의하면 성도는 이미 죽은 자에요. 그러면 죽은 자에게 성령 받고 난 뒤에 거리를 나가 봅니다. 사람들 다니고 성령 받기 전의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게 없지요. 똑같지요. 했을 때 그 현실 차 다니고 건물 서있고 식당은 문 열고 여러 가지 사람들은 농사짓고 택시 하는 사람은 택시 운영하느라 서있고.

이 모든 것이 이미 죽은 자한테는 그게 뭐냐? 관람입니다. 관람이고 여행이고 그냥 죽고 난 뒤에 덤으로 주어지는 풍경입니다. 자기를 상관이 없는 동네에요. 그쪽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저 우리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죠. 아아, 세상은 이렇게 망해가는구나.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돌파된 이후에요.

돌파되고 난 뒤에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거는 관람용이에요. 구경거리에요. 아이고, 사람 안 됐다. 여기서 자기 장래도 모르고 운명도 모르고 코앞에 있는 손님 하나 끌어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구나. 돈 버는 이유도 모르고 자기 낭떠러지도 모르고 그저 자식하고 밥 먹고 살면 이게 사는 거다, 라고 생각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영화관에 갔을 때 제일 끝에 일어난 일이 뭐냐 하면 영화관 직원이 문을 열어주면서 영화 끝났습니다, 하는 거예요. 인생이 그런 거예요. 구경 끝났습니다. 애초부터 산 사람은 천국 가시고, 영화가 전부라고 생각한 사람은 지옥 가시기 바랍니다. 영화 끝났어요. 나가세요. 청소해야 돼. 30분간 청소하고 다음 영화 틀어야 돼요. 우리는 한 편의 영화를 본 거예요. 인생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미지고 허상이라니까요.

이게 돌파된 사람이에요. 이게 교회에요. 초대교회 교회, 성령 받은 사람들. 로마의 권력이 사자를 준비하고 믿는 사람들 어떻게 쳐 죽이든 그거는 남의 이야기에요. 나하곤 상관없는 이야기라니까요. 그냥 그거는 발광을 하는 거예요. 앞에 지랄이라는 상스런 말은 쓰지 않겠습니다만(이미 써버렸는데) 그냥 발광하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를 지워지지 않기 위해서.

그게 뭐냐 하면 내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 내 속에 그물, 세상에서 주는 것들로 채워지는데 이게 뭐냐? 소유성이에요. 인간의 소유성. 인간의 존재는 소유로 돼있어요. 그래서 인간 자아 안에 소유가 있으면 그 사람은 뭘 해도 빛을 발하느냐 하면 자기가 갖고 있는 소유가 빛을 발해요. 인간이 있다면 여기에 뭔가 세상적으로 그물에서 준 거예요. 준 것으로 이게 빛을 발한다고. 붉은 빛이 발하죠.

그런데 언약, 특히 오늘 본문 10절에 언약 나옵니다. 10절을 볼까요.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이렇게 돼있어요. 언약이 삽입된 사람은, 이걸 다윗으로 본다면 다윗이 있다면 이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이 있지요. 이게 언약인데 말씀으로 보면 이 사람은 무엇에 빛을 발하느냐 하면 이 언약의 빛, 말씀이 빛이 발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소유의 빛을 발하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이 소유가 목사한데는 교회가 된다는 겁니다. 소유가 있어줘야 나가 있어요. 그런데 이 말씀이 빛을 발하면 껍데기 나가 엷어져요. 점점 더 자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살아버리면 나는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 신경 쓸 건 남아있지 않지요.

그런데 이 세상 것이, 제가 고함지르는 이유는 잡음이 들려서 경쟁한다고. 세상 것이 들어와 버리면 이 세상 것 때문에 비로소 나라는 것이 정립이 되니까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내 가진 것을 안 잃어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놀랍게도 교회가 되고 다윗 때는 뭐냐?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지켜 달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온 거예요. 교회도 세상에서 온 거예요. 교회를 없애버리는 게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거든요.

교회를 없애버리고 세상을 없애버려야 될 이유가, 이미 너는 나를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랬어. 나를 지킬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다보니까 자기 소유의 교회를 지켜야 되고 자기 소유의 재산과 가족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벌벌 떠는 거예요. 두려워하는 겁니다. 돌파되지 못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테니까 내 것 지켜 달라. 이거는 말씀의 세계 아니고 나의 세계에요.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 그거는 나의 세계에요. 말씀의 세계가 아니고 나의 세계라고요.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을 통해서 다윗을 죽이고 그 다윗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없애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이거는 좀 어려운 건데요. 이렇게 정리하면 되는데 어려운 거예요. “계시는 계속해서 추가된다.” 인간의 자아가 있는데 이스라엘은 여기서 말씀이 들어오거든요. 말씀이 들어온다는 것은, 말씀의 입장에서는 말씀 속에 너를 죽은 자로 간주한다. 이게 말씀이 원 뜻인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지금 땅에 살고 있잖아요.

신약성경에서 이런 물음을 가지고 주께서 오셨습니다. 뭐냐 하면 이 땅에 기거하지 못할 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땅에 기거하지 못할 자는 누구 게요? 정답, 예수님입니다. 이 땅에 기거할 수 없는 존재로 오셔서 떠나버린 거예요. 오셔서 떠나버린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나 골로새서에서 우리는 땅에서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땅 말고 위에 있다. 아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

그건 신약이고 구약에서는 십자가 앞에서 구약 있잖아요. 구약은 계시가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 계속해서 계시가 추가된다고요. 계시가 추가되면서 약속의 땅에 온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하는 이 짓거리가 이게 약속의 최종 모습,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구약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이뤄서 성령을 받은 십자가에서 전에 있던 현재 시편 25편을 다시 해석하는 거예요. 신약 입장에서 보면 나는 위로할 대상도 아니고 설명할 대상도 아니고 해석할 대상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는 사라져야 되기 때문에. 신약적 입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거기 누가 있다 했습니까? 사울이 있었지요. 스데반 집사는 죽어서 사라졌는데 그 현장에 누구는 멀쩡하냐 하면 사울은 스데반 죽는 것이 정당하다고 옷을 지킨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자기가 멀쩡하게 존재하는 그걸로 자기는 사울 본인은 이 땅에서 그 당시 약속의 땅, 이스라엘 땅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나는 예수님과 똑같이 이 땅에 살 권리를 찾을 필요가 없는 존재로 이걸 바꿔주는 이것이 바로 내 소유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것이 주님이 말하는 바로 죄에서의 구원이에요. 이 세상의 권세로부터 구원이었다. 죽음 이후에요.

어려운 질문할 게요? 여러분, 재림은 언제 오지요? 이 질문에, 제가 지어낸 질문이니까 답은 기대 안 합니다. 재림은 언제 오느냐 하면 이미 죽은 자에게는 재림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가 죽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재림 오는 것이지 재림을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재림은 확인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은.

재림이라 하는 건 인간들이 원하는 건 이 땅이 작살나는 순간이거든요. 심판의 순간입니다. 불바다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이 땅에서 죽은 자 입장에서는 불바다 되는 것도 구경거리입니다. 해운대 축제할 때 불꽃놀이하지요. 살아 있을 때 재림하시거든 좋은 구경삼아 마실 한 번 나가시길 바랍니다. “멋지네. 이 폭죽놀이, 이 불꽃놀이가 멋지네!” 이러면 되는 거예요.

재림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던 모든 소유성이 다 날아가는 거잖아요. 마치 물에 노아 홍수 때 다 빠지는 것처럼. 마지막 때는 불로써 심판해버릴 때 인간들이 그렇게 애타면서 아끼고 거기에 자신의 평생의 모든 노력과 수고와 초조함을 다 집어넣었던 그 소유성이, 목사한테는 그 교회가, 어디 있냐? 애초부터 없어져야 될 거예요. 소유성이 없어진다는 것은 내가 없어져야 될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는 나를 이미 죽은 이후의 사람 된 것, 귀신이죠. 이렇게 된 것을 갈수록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왕 죽은 것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구경이나 한 번 잘해보자.” 읍내 오일장 구경하듯이. 여기는 뭐 파노? 전자제품 파네. 여기는 뭐 파노? 필라테스하고 있네. 여기는 뭐하노? 코로나 백신 맞는다고 하네.

이렇게 구경거리 난 걸로 여기면서 어슬렁거리면서 사시는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이미 영화임을 우리가 아니까. 세상은 영화에 불과하다는 것, 드라마에 불과하다는 걸 미리 아니까. 결국 끝이 있다는 걸 미리 아니까. 구애받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한 번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해봅시다.

“자아는 치료대상이 아니다.” 자아는 치료할 게 없어요. 고칠 필요 없어요. 그냥 죽었는데 뭘 고쳐요. 왜 자아한테 그렇게 애착하고 미련 가질 필요 없단 말이죠. 자아는 치료대상이 아닙니다. 없어질 대상이지요. 자, 우리가 그렇다면 이걸 여러분들이 인정하신다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있어요. 그 일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다윗언약이 어떻게 다윗 또는 다윗 나라를 제거해 나가시는가? 다윗의 나라 이스라엘은 땅을 갖고 있잖아요. 땅을 갖고 있고 그 안에 자체적으로 힘을 갖고 있지요. 국가라는 힘을 갖고 있잖아요. 그 국가 이스라엘공동체, 이스라엘사회를 다윗언약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사그리 제거하는가? 그 과정이 십자가까지 이어진다면, 지금 여기 십자가로부터 거꾸로 보게 된다면 여기 다윗이 시편 25편이잖아요.

시편 25편 이후에 오면서 우리는 무엇을 주목하느냐 하면 역대하를 주목하는 거예요. 역대하라는 것은 솔로몬 포함해서 솔로몬 이후에 르흐보암, 아비암, 아사, 뒤에 나오는 여호사밧, 열왕이라 하는데 왕들의 연속을 조사하게 되면 그들이 자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고 결국은 그들이 모든 노력을 다해도 후대 왕에게 물려줄 때는 엉망진창으로 물려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줍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이 뭐로 됐냐 하면 소유대상이 된 겁니다. 이스라엘 국가 전체가. 이스라엘을 소유할 때 얼마나 핑계대기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다. 이스라엘 대신 교회 집어넣으면 여러분 쉽게 이해되지요. 이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있고 살아 있는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땅 주시고 재산 주셔서 만든 성도의 기도와 땀과 눈물과 이렇게 했다. 얼마나 핑계거리가 많아요.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서 와서 떠나고 싶은데 네는 지금 안 떠나겠다는 떠나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 땅을. 이스라엘 핑계대면서 교회 핑계대면서 안 떠날란다, 이렇고 있단 말이죠. 나의 소유성에서 못 놓겠다. 나란 의식은 나의 소유에 기초를 하고 있습니다. 소유가 없는 것은 나의 의식이 없는 거예요.

소유가 없으면 나의 의식도 없어요. 뭔가 있어요. 자식이 있든 재산이 있든 펀드가 있든 뭐 있어요. 그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히스토리, 역사를 갖고 있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공부해서 어떻게 벌어놓은 재산인데, 이런 게 있다고요. 어떻게 저축한 건데, 이런 게 있어요. 네가 부모의 공덕을 잊으면 안 되지. 핑계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에 내가 부응해야지. 실망시키면 안 되지. 입만 벌리면 나오는 게 핑계에요.

그래서 뭐? 그래서 나는 잃어버리지 않고 살고 싶어요. 결국은 그거에요. 나는 나답고 싶어요. 뭐 이런 핑계에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만날 같은 인간들, 꼬라지 똑같은 인간들과 비교하고. 주님하곤 비교할 생각도 안 하고. 말씀이 나와야 되는데 말씀이 나오는 게 아니고 자기 소유가 나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힘들게 인생을 살았다. 이 나이쯤 되면 뭔가 보충이 되고 만회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

주께서 이야기하길 그것 해서 뭐하는데? 그래야 내 자존심 사는데. 자존심 살아서 뭐하는데? 네 자존심 챙겨서 뭐할 건데? 글쎄요. 그걸로 뭐하지?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원수와 결탁돼있었던 거예요. 인간의 원수는 인간 내부에 자리 잡아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어요, 우리를. 나로 하여금 나를 떠나지 못하도록 원수가 그렇게 우리를 몰아세운 거예요, 그동안. 훈육을 시키고 사육했고 교육을 시켰고 그렇게 우리 인간을 자아를 조작한 겁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하는 것보다도 노래 가사 하나가 다 정리해줘요. 가사 한 번 들어보세요.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 자신을 가둬두었지
이젠 이런 내 모습
나조차 불안해보여
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이 세상이 환상입니다. 세상이란 건 없어요. 그 세상이란 이미 자기 안에 임재범 자기 안에 들어있어요. 임재범이 불렀던 <비상>이란 노래입니다. 임재범이 자기 안에 들어있어요, 세상은. 세상은 자기가 조작해낸 환상에 불과해요. 세상에 나갈 필요 없어요. 니 혼자 앉아있으면 그게 세상이에요.

세상에 나가서 펼쳐 보이는 것은 뭐냐? 내 꿈들을 보여줘야 돼. 누구한테? 지하고 똑같은 생긴 인간들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누구한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온 거예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었던 겁니다.

사회주의, 노골적으로 공산주의죠. 사회주의의 모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같이 먹고 살자.” 먹고 살자가 아니라 같이 먹고 살자. 같이 먹고 살자! 니만 사나 나도 인간이다. 같이 먹고 살자. 이게 사회주의에요. 사회주의 반대인 자유주의는 나만 살자. 내 발목 잡지 마라. 나만 살자. 같이 살자. 같이 살게 되면 어디로 가게 됩니까? 같이 살게 되면 같이 사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입니까? 아닙니다. 본색 드러나죠. 같이 살자 하다가 나만 살자로 결국 귀환하게 돼있습니다.

어릴 때는 남매간에, 형제간에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농심이라 해서 밤중에 몰래 볏단 주고 하죠. 나중에 커서 보세요. 같이 사는 것 없어요. 부모가 죽기 전에 형제들 모아 놓고, “너희들 형제간에 제발 싸우지 말고 동서 간에 싸우지 말고 내 재산 ¹/ₙ해서 내 죽더라도 저희들끼리 사이좋게 명절엔 같이 모이고 얼굴 맞대라.” 꼴까닥 죽지요. 자식들 입장에서는 귀찮은 노인네 하나 처리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병약한 노인네가 나만 살아야 될 내 발목을 잡을 순 없지 않습니까.

어떤 며느리가 시아버지 장례 치루고 난 뒤에 남은 장례비를 그 비슷한 날에 있었던 친정아버지 칠순잔치에 그 돈을 넘겼어요. 남편이 기가차서,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칠순잔치 하느냐?” 며느리 하는 말이, “죽은 사람이 무슨 돈이 필요하냐?” 돈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많은 돈이 있지만 나에게 왔을 때 나에게 필요한 돈이 필요하지 니한테 필요한 돈은 필요치 않은 돈이에요. 뺏든지 없애든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던지.

인간의 본성은 나만 사는 거예요. 다들 똑같아요. 별다른 착한 사람 없습니다. 인격이 훌륭한 목사? 이 세상에 그런 목사는 없어요.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그런 목사는 있을 줄 모르지만 인격 좋은 목사는 없어요. 유령 같은 목사는 있을 수 있어요. 지나가도 귀신이 갔나 하는 그런 목사는 있지만.

인간의 자아에서 이렇게 소유성이 있으면 이 소유성이 있을 조건 하에 내가 있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내 가진 게 얼마나 있지, 헤아리는 겁니다. 그 헤아려서 만족함이 있으면 나는 만족스럽게 있는 것이고 내 재산이 날아가면 자살하는 그거에요. 전부 다 소유성이에요. 평생을 딸 하나 위해서 살았는데 그 딸이 사고 났다. 그러면 난 살 이유가 없어요. “애야 너 좋은 데 가라. 내 따라갈게. 엄마가 따라갈게. 너 얼마나 외롭겠나.” 같이 죽어요. 왜냐하면 딸이 자기 소유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서 벗어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지요. 그냥 세상 따라가지 말고 십자가를 통해서 내 자신이 누군지 알아야 돼요. 성경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은 말씀 없이 사는 그 정당성을 보장하라 외치고 있어요. 나는 말씀 없이 살 테니까 말씀 없이 살아도 나는 잘 살았다고 누가 이야기해 달라는 거예요.

이게 교회처럼 돼버렸어요. 그저 말씀이 안 들리는 곳이고 싶은 거예요. 복음이 안 들리는 곳이고 싶어요. 내가 나로 인정받고 말씀 없어도 소유성만 있어도 소유성 빛 값을 하는 나 이만큼 부자 됐다는 이걸 알아주는 그 재미로 사는 거예요. 내 자식이 이번에 사법고시 합격했다. 그 재미로 사는 거예요. 여러분한테는 해당이 안 되니까 마음대로 이야기합니다.

여자들은 나이 오십에 아직도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 재미로 사는 거예요. 물론 여러분 가만있어도 괜찮아요. 말씀을 들여다볼 때 자기로부터 들여다보면 어떤 말씀 해석도 악마의 해석입니다. 이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뭘 하느냐? 선악체계가 가동되는데 이걸 네 자로 쓰겠습니다. 자기검열. 철저하게 자기검열이에요.

자기검열의 근거는 뭐냐? 사회적 시선에 압박감. 그 압박감의 내용은 뭐냐? 너, 남들 가진 것 없지? 여기서 오는 압박감. “네가 미모가 되나 키가 되나 건강이 되나 돈이 되나. 아이고, 인간아 왜 사니. 나 같으면 죽었다.” 이런 것. 사회적, 심리적 억압 속에 그물 속에 갇혀있으니까 그 그물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올 때 이것이 그걸 규제 기준으로 해서 철저하게 선악적으로 자기검열에 나서요.

검열이란 말 알지요. 공산당 검열, 언론검열. 내가 똑바로 사느냐, 안 사냐를 계속 검열을 하는 거예요. 만약에 똑바로 못 살게 되면 여기서 뭘 하느냐 하면 갑자기 되도 않은 이상한 행동을 해요. 이게 뭐냐? 기도하기, 성경공부하기, 예배드리기. 헌금하기, 봉사하기. 왜? 자기검열에 사회적 요구조건에 내가 영 못 미쳐서 자칫하면 내가 자살코스로 가는 게 아닌가, 겁나서 내가 아직까진 자살보다도 오히려 나는 자랑스러운 자아가 되고 싶다. 그때는 뭐냐? 기도, 헌금 이런 것 해서 흔히 교회에서 간증 집회하는 것 있지요. 이 사람을 보라. 기도 많이 해서 복 받았잖아. 그런 쪽이 듣고 싶은 거예요.

다시 정리합니다. 말씀이 없어도 정당한 것을 남들에 의해서 호응 받고 싶은 나. 그러니까 나는 뭐냐 하면 말씀이 있는 자리에 뭐가 있다? 말씀 빼버리고 나는 이렇게 소유하고 있다, 힘과 권력과 돈과 잘남과 너희들의 부러워하는 것들을 갖고 있다. 그렇게 대체된 인간성으로 살고 싶어서 교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어제 설교에서 교회 나오는 이유는 불먼 터뜨리기 위해서 다 하나님 잘못이라고 내 인생 물러달라고. 그것이라도 있어야 이렇게 하소연할 수 있잖아요. 내 인생 조져놓은 것 책임지라고. 천당을 보내주던지 안 그러면 부자 되든지 나 책임지라고. 말씀이 없이도 나는 정당하다, 라는 그런 인간으로 좀 살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거기에 대한 주님의 십자가는 뭐냐? 죽어라 인간아. 죽으면 해결 끝날 것을 이미 죽음 이후의 존재로서 어슬렁거리면 될 걸 자꾸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어떤 희망과 그걸 찾고자 하는 거예요. 내 소유 지키기 위해서. 말씀은 내 소유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싫은 거예요. 말씀이 없는 곳에 다른 소릴 듣고 싶은 거예요.

자, 이제부터 역대하를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다윗 시대에 시편 25편에 나오는 이 내용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성취되는가,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싸우신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나의 삶의 실제적 현실의 힘과 싸우신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역대하에서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합니다. 선지자. 스가랴 같은 사람은 돌에 맞아 죽어요. 미가야 같은 사람은 귀싸대기 맞습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해야지. 요즘 말로 교회를 생각해야지. 이런 거예요. 이스라엘을 생각해야지 네가 그렇게 미래를 예측 잘못해버리면 우리가 전쟁할 때 의욕이 떨어지잖아요. 우리가 전쟁할 때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는 뭔가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그런 소리를 해서 사람들에게 격려차 이야길 해줘야지.

이것 때문에 그때 몇 명입니까? 미가야 그때 거짓 선지자가 몇 명이었습니까? 사백 명이죠. 사백 명 가운데 미가야 빼놓고는 전부 다 그런 이야기할 때 성경에선 이걸 거짓의 영을 모든 선지자 속에 다 집어넣고 왕들 속에 다 집어넣고. 미가야 빼놓고 다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짓의 영이니까 우리가 아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 이퀄 뭐냐? 이게 거짓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좀 어려운 말 한다면 이 세상은 거짓된 겁니다. 그러나 오류는 아니에요. 어렵지요. 오류는 아니에요. 정확하게 거짓이도록 말씀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용을 한 겁니다. 거짓된 것과 오류가 차이 납니다. 오류는 오류를 깨닫는 순간 온전함으로 돌아설 수 있지만 거짓은, 거짓 자체가 계속 뭘 하느냐 하면 거짓된 완성을 낳아요. 거짓된 완료를 낳는다고.

그리고 거짓의 영은 거짓에서 벗어날 경우에는 거짓된 세상으로부터 거짓말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빠져나옵니다. 이단이라는 소릴 들으면서 빠져나와요. 오류는 희망이 있어요. 고치면 돼요. 거짓은 고치는 게 아니라 죽어야 나올 수 있어요. 진실은 거짓을 거짓으로 도드라지게 노출시키면서 진실을 빼내는 거고, 오류는 네가 마음 잘 먹어봐라, 어디가 잘못됐는지 고쳐봐라, 개선해봐라. 이건 오류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오류의 영이 아니고 거짓의 영이에요. 그곳에 나도 포함돼있어요. 그러니까 나도 포함됐기 때문에 내 구원과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 행위자체가 그 사적 구원자체가 거짓된 거예요. 거짓을 더 쉬운 말로 하면 속임수입니다. 그러니까 악마가 지독해요. 처음부터 속였잖아요. 네가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처음부터 악마 본심을 본인의 심정을 인간 속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분배를 해준 겁니다.

국화빵을 찍을 때 밀가루 해놓고 돌리죠. 돌리고 앙꼬를 집어넣지요. 앙꼬 있잖아요. 거짓된 것, 거짓된 것, 거짓된 것, 거짓된 것 그래서 그게 사백 명 된 거예요. 다수결로 하면 미가야가 밀려요. 미가야는 그 소리할 때 자기는 죽었다고 치고 한 거예요. 이스라엘 속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치는 진짜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통해서 나타나요.

그 이스라엘이 뭐냐 하면 중첩된 이스라엘. 야곱 아래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야곱 이름을 죽여 버리죠. 이스라엘 살리기 위해서. 그냥 야곱 있고 이스라엘 있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이 야곱을 죽여 버리죠. 중첩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망해야 되는 겁니다. 이게 역대하입니다.

그런 징후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를 보내는 거예요. 선지자를 보내게 되면 이스라엘을 소유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요새 말로 하면 교회를 소유하지 말라. 교회가 소유돼버리면 자아가 안 죽어요. 나 복음 아는 교회 다닌다, 이렇게 되니까 자아가 죽질 않아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나 스스로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국가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줍니다. 아아, 자아는 국가 안에 버틸 수 있는 여지는 인간에게는 존재할 수 없구나. 이 어두움의 악마의 국가가 의도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주위에 깔아두신 이유가 오직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속에서 말씀이 빛이 나기 위해서 예수님이 빛나기 위해서 국가를 깔아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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