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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9 21:37:18 조회 : 63         
20240708b 부산강의 : [시편]69(53:1)-마이너스 인생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40708b 부산강의 : [시편]69(53:1)-마이너스 인생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이번 수련회에 신명기 하는데 신명기 들어가면서 먼저 염두에 둘 것이 있어요. ‘인간은 역사의 이면으로 들어설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책이죠, 책. 하나님의 말씀. 이면이라 하는 것은 뒷면을 말합니다. 인간은 역사의 이면, 뒷면으로 들어설 수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역사란 승자의 책이기 때문에. 이긴 자의 책이에요. 그래서 역사는 이긴 자를 뭐라 하느냐 하면 선한 자로 봐요, 착한 자. 그리고 역사는 패배한 자를 악한 자로 봐요.

나쁜 자로 봐서 그다음부터는 역사 뒤쪽으로 못 가니까 앞쪽에서 나는 모든 논리와 법칙이 뭐냐 하면 왜 선한 자는 복 받았느냐, 왜 악한 자는 저주받아야 마땅하냐? 어떻게 해서 악한 자가 되었고, 어떻게 해서 선한 자가 되었는가를 거기서 법칙을 다 끄집어내요. 누가? 후대 인간들이. 끄집어내면 끄집어낸 법칙이 이야기하는 건 뭐냐 하면 이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살아남은 자가 그것도 승리자로 살아남는 자가 모든 가치를 판정할 수 있는 심판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겁니다.

‘저 인간은 저래서 망해야 마땅해.’ 왜? 신은 공평하니까 신은 살아계시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저주받아 마땅해. 그리니까 난 하나님을 찬양해. 저렇게 악한 자를 저주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는 말을 누가 합니까? 자기를 승자로 자기를 선한 자로 자기가 착해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단정 짓는 자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지요. 왜 제 때에 화장실을 못 갔느냐? 왜 남한테 화장실을 빼앗겼느냐? 그만큼 게으르기 때문에. 이미 화장실 차지에 패배자가 된 입장에서 그걸 합리화시킬 수 있는 법칙을 그다음부터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은 누구의 뜻이다?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본 거예요.

하나님을 선하게 못 봐서 환장들 했어. 왜 하나님을 선하게 봅니까? 그렇게 보는 효과가 뭡니까? 누구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한 내가 선하기 때문에. 그 순환논리에서 인간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역사의 뒤쪽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인간은. 내가 쓴 일기장 뒤로 안 가요.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못할 짓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을 죽이는 것? 아니요. 아픈 것? 아니에요. 고문하는 것? 아닙니다. 인간의 돈을 빼앗는 것? 아니에요. 인간을 망가뜨리는 것? 아닙니다. 뭐가 남아요? 인간에게 희망을 빼앗아가는 것, 이게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인간에게 다음에 잘 될 희망이 지금 이 시간부터 애초에 작살나는 것.

만약에 어떤 분이 여러분 존재의 미래, 희망까지 작살낸다면 그 사람이 판사든 검사든 관계없이 재판정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몰래 칼이나 총 들고 가서 나에게 희망을 앗아간 그 판사를 총 거두고 죽이겠지요. 그러면 재판정이 아수라장이 되겠지요. 엉망진창이 되겠지요. 그 재판정 현장이 십자가 현장이에요.

십자가에서 예수님보고 한 사람 빼놓고 대다수가 이야기했어요. “네가 뭔데 우릴 심판하느냐?” 이거에요. 네가 뭔데 우리를 심판해. 이렇게 대다수가 반발했는데 그 반발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끝까지 요구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 당신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소서’ 이걸 십자가 현장에서 성경대로 한다면, ‘우리를 구원해내라’ 이것 누가 이야기했지요?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심지어 강도 중에 한 사람도 이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나에게 희망을 주면 난 당신을 믿을 용의가 돼 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당신이 나와 똑같은 신세가 되었으니까 희망이 작살난 신세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내가 여기서 형틀에서 내려올 희망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래서 고로 따라서 당신은 가짜야.”

그러면 지옥 가는 자에게 예수님은 철저하게 뭐가 돼요? 가짜이어야 하지요. 그 방식을 주님께선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들춰내면서 찾아오지요. 그게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희망입니다. 내가 지옥 가야 마땅하고 가짜인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그 희망.

천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받는다고요? 십계명에 나와 있지요. 그럼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천대까지 복 받는 게 좋아요, 삼사 대까지 저주 안 받는 게 좋아요? 어느 쪽을 선택하실래요? 이론상은 천대가 나아요. 하지만 천대가 될 때는 내가 죽어 없어질 때고, 삼사 대는 내가 있을 때거든요. 미래에 어떻게 좋은 것보다도 당장 내가 힘들다면 인간은 내부적으로 그 복음을 거부하게 돼 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보면 돼요. 나의 노선 탈락. 에서의 족보가 창세기 36장에 나옵니다. 성경에서 에서는 야곱에 의해서 이미 저주받기로 확정됐어요. 야곱은 어떻게 됐습니까? 복 받기로 확정됐지요, 아버지한테. 근데 저주 조건을 왜 그렇게 길게 이야기해요? 길게 이야기한다고. 왜 그렇게 하는가? 그다음에 37장, 38장, 39장, 창세기 마지막까지 나오는 그 이야기와 대조시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36장 내용은 에서 후손에 아무 문제없어요. 다시 말해서 그들이 예상한 노선대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37장의 야곱 이야기는 야곱 가정부터 작살났습니다. 노선이 끊어졌어요, 노선이. 애들 자식이 없어요. 제가 다시 문제 던질게요. 아들 셋 있는데 아들 다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대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게 이번 수능에는 안 나옵니다.

아들 세 명인데 다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대를 이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보세요. 침묵 시간 5초 지났어요. 뭡니까? 누구 입에서? ‘며느리하고 하면 되지, 뭐.’ 이게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못 나오지요. 왜냐하면 며느리와 행음해서 자식 낳는 한 그동안 쌓아놓은 나의 업보, 나의 선한 하나님 섬김, 야곱의 가정에서 하나님 찬양하고 섬겼던 그 모든 의가 어떻게 돼요? 작살나는 거죠, 작살나는 거죠. 대 잇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자존심이 뭉개지는 이게 제일 급한데요?

시편 53편을 하나님께서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사도 바울 편지에다 그걸 집어넣었어요. 뭘 설명하기 위해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시편 53편 2절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라고 돼 있지요. 누가 로마서 3장 읽어보세요. 3장 11절부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이야기를 어리석은 자로부터 연관시켜서 설명하고 있어요. 우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를 넘어서서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죄 사함으로 우리가 의인되었다는 것을 미리 알아챘잖아요. 그걸 알아채지 말고 중간에 내가 내 인생이 끊어지는 대목을 찾으라면 뭡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지요. 자기 의가 없다는 것은 지금 당장 죽어도 대들 어떤 근거가 이미 상실된 자에요. 죽어 마땅한 거예요. 지옥 가도 마땅한 거예요. 그걸 인간이 그 미래를 모른다 치고 인간이 어떻게 그걸 자진해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자진해서 들어갈 사람 아무도 없어요.

‘죄 지었다 하는 것은 십자가 피 이야기하려고 죄 지었다 해주는 거야. 나중에 너는 죄 지은 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없어지고 의인되는 거야.’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남보고 그렇게 시키세요. 그 코스에 들어가면 저 죽어요, 정말.” 왜 그런 걱정을 하지요? 성경말씀은 맞아요. 의인은 없나니 그걸 믿는 자에게는 죽어도 다시 살아서 천국 간다는 걸 알아요. 알거든요. 식이죠. 아는데 못 믿겠어요.

왜냐하면 이게 만약에 믿어지면 큰 탈 날 것 같아. 이런 생각 들어요. 믿고 내가 죽었는데 안 찾아오면, 주님께서 태어나 눈 떠보니 지옥이라면 분명히 천국 간다고 나는 알고 왔는데 주께서 행정조치가 어떻게 돼가지고 너 애초부터 아니었어, 라는 판정을 내린다면 “괜히 믿었어, 해도 소용없는 걸 괜히 믿었어. 이것 속았어. 나, 주님한테 속았어.” 이렇게 되거든요.

이러한 두려움과 염려는 놀랍게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하나님 믿는 것 따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희망을 갖는 것, 두 개의 노선을 갖고 있었고 하나님은 하나의 노선을 쳐버렸다는 것, 친 거예요. 또 문제 하나 나가면 이렇습니다.

롯의 딸들이 아버지와 강제로 동침한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 멸망 이후에 엄마 뒤돌아보다 소금기둥 됐잖아요. 남은 것은 세 식구인데 갑자기 여기서 대를 이어야 되겠다고 딸들이 나선 거예요. 그러면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 먹이고 겁탈했지요. 그래서 모압과 암몬 자식을 낳았잖아요. 딸들이 아버지를 겁탈한 이유는 딸의 자기의 존재의 연속성을 위한 거예요.

아버지가 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딸은 자아밖에 모르는 거예요. 나는 여기서 그냥 죽을 없다는 거예요. 죽은 것은 엄마고, 자기들이 잔 것은 아버지지만 나는 내 인생을 살아야 되겠다는. 아버지는 아버지고,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내 인생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이 딸들이 만약을 복음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 알았다. 그딴 게 무슨 소용 있어요. 그 바탕 자체는 뭐냐? 난 죽기 싫다는 데, 내 노선 끊어지기 싫다는 데요.

그래서 복음을 안다는 것은 어떤 사람과도 헤어질 준비가 돼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난 사람을 믿었습니다. 그런 거짓말하지 마세요. 사람을 믿는 게 아니고 사람 믿은 나를 믿었지요. 나에 대한 불신이요? 나에 대한 불신은 인간은 불가능해요.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는가? 또 준비했습니다. 한 장씩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고 정말 간편한 이야기에요. 간편한 이야기를 간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하고 난 뒤에 야곱 족속의 유다 가정이 어떻게 노선이 끊어졌는지를, 어떻게 아브라함이 아버지로부터 끊어져야 되는지를, 어떻게 얍복 강가에서 야곱 자체가 끊어져야 되는 것을, 어떻게 요셉이 모든 부모형제로부터 끊어져야 되는 것을, 어떻게 오늘날 십자가가 나 자체를 끊어버리는가? 네 아버진 죽었어요.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고 넌 나를 따르라. 어떻게 이 끊어짐,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왜 하나님은 그런 조치를 했는지를, 이것부터 설명하고 가겠습니다.

여기에 행복이란 노래에 가사 두 개가 나와 있지요. 한쪽은 1978년도 노래고, 하나는 1982년도 노랩니다. 그래서 먼저 두 번째, Albano & Romina Power란 이태리 가수의 <행복>(Felicita)이란 노래 잠시 듣고 가사는 우리는 들어도 모르니까 가락이 어떤 가락인지 듣고 그 가사를 봅시다. 그리고 묻겠습니다. 과연 이게 행복인지를. 이용이 불렀던 <사랑, 행복 그리고 이별>이란 노래 있지요. 그것 개사한 건데 가사를 보겠습니다.


행복이란 손을 맞잡고 멀리 가는 게 행복이야
사람들 사이에서 순수한 당신 눈빛이 행복이야
아이들처럼 가까이 지내는 게 행복이야
행복이란 편안한 배게, 흐르는 강물,
커튼 너머로 떨어지는 빗물이 행복이야
편안하게 낮춘 은은한 불빛이 행복이야
행복이란 작은 빵에 곁들이는 와인 한 잔이 행복이야
서랍 속에 넣어준 당신의 쪽지가 행복이야
내가 좋아하는 당신과 노래하는 게 행복이야
당신은 느낄 수 있지
이미 공중에 떠다니는 우리의 사랑노래
당신이 생각하는 행복처럼 당신을 느낄 수 있어
벌써 공중에 떠있는 따스한 햇살
당신이 알고 있는 그 행복의 미소처럼
행복은 뜻밖의 저녁에 빛나는 달빛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마음에 담은 축하편지가 행복이야
예상치 못한 한 통의 전화가 행복이야
밤의 해변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행복이야
사랑 가득한 마음의 손길이 행복이야
다시 시작되는 새벽을 기다리는 게 행복이야
당신을 느낄 수 있어
이미 공중에 떠다니는 우리의 사랑


여기에 외국노래에 나오는 가사를 보게 되면 행복은 뭡니까? 자기 행복이죠. 내가 존재해서 느껴지는 당사자가 될 때 행복은 유의미, 의미 있다는 거예요. 주변에 일어나는 사소한 일,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면 그게 행복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 나오는 가사 내용이 전부 다 사소하지요.

그런데 그 가사 말고 그 위에 있는 이준례 작사, 작곡, 조경수가 불렀던 <행복이란>이란 노래는 여러분 연배에 얼마나 수백 번 들었던 노래에요.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사랑이 중한 것도 이제는 알았어요
당신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여기서 두 번째 조경수가 불렀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아요. 그대가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행복은 내가 얻어 챙기는 것이 아니고 당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거죠. 너와 나의 관계가 있을 때에만 나오는 행복, 다른 하면 복, 그 복은 당신 때문에 내 존재가 지워져야 가능해요. 내가 있으면 안 돼요. 내가 있으면 아까 두 번째의 사소한 것으로 자기 낭만에 빠져버리거든요.

그런데 여기 뭡니까?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건 레위기에 나오고 율법서의 요약이 뭡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요약하면 뭐가 된다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요? 목숨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이같이 사랑하는 게 바로 율법의 선지자고 완성이잖아요.

이 이야기를 하시는 예수님 당사자가 바로 모든 인간에게 인간은 복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오신 분이에요. 행복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지옥 갈 인간이 무슨 행복을 해. 정말 말씀을 다 이룬다면 이 세상에 그런 인간은 존재해요,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걸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그걸 증명하고 노아를 통해서 다 증명해내는 거예요. 언약은 끊어짐이에요. 나로부터 내가 끊어져 내침을 당하는 거예요. 마땅히. 이것은 우리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거예요.

모세와 더불어 있던 모세언약입니다. 항상 모든 게 언약이에요. 모세가 들어올 때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해서 간 곳이 어디냐 하면 바닷가였습니다. 이것은 모세도 당황했고요 남성만 육십만 되는 많은 숫자가 바닷가에 서 있습니다. 노을이나 구경하려고 서 있는 거예요? 왜 서 있는 거예요? 어디 뭐 피서 왔습니까? 주께서 먼저 당도하게 만들었어요.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 하면 잡아라, 하는 소리가 들리게 만들었어요. 들리게 만들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단절시켜놨어요.

뭐가 신기하냐? 바다가 있다는 자체는 평소에 바닷가 가본 사람 있을 거예요, 홍해를 살면서. 바다가 있다는 건 신기하지 않아요. 애굽 군사가 화내는 것도 예상한 바입니다. 전혀 신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믿을만한 게 못돼. 보내준다 해놓고 안 보내줍니다. 공격합니다.

뭐가 신기하냐? 바다가 가로막혀서 못 가는 내가 신기한 것도 아니고, 적들이 쳐들어온 것도 신기한 게 아니고 왜 그들과 나 사이를 이렇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구분 짓는 이게 신기한 거예요. 구분 지을 필요가 없는데 구분 지을 어떤 자격이나 그런 입장에 있지도 않은데 일방적으로 구분 짓는 거예요. 이게 뭐냐? 말씀은 복 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를 일방적으로 지정했다는 사실, 이게 신기한 거예요.

복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본인이 바로 하나님이 예상한 대로 예상 못했다는 거예요. 복 받은 자도 불신자와 똑같이 자기 것을 못 놓고 자기 것을 포기 못합니다. 에서 족보이야기는 수월해요. 그냥 애 낳고 그냥 살았어요. 그런데 야곱 족보에 속한 창세가 37장 유다에 오게 되면 애를 갖는 것이 역사의 승리자에요. 애 못 낳으면 패배자 되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에서 드러났지요. 블레셋 족장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여자를 못 차지해서 환장했을 때에 거기서 뭔가 예상 못한 징벌부터 먼저 받아버렸어요. 하나님이 나와서 꾸중했거든요. 애굽의 왕도 마찬가지지만. 네가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렸구나. 건들지도 않았어요, 아예. 건들일 뻔했지요. 그런데 그 집안의 여자들의 태가 다 닫힌 거예요. 내가 한 마음 씀씀이보다 너무 과도한 징벌이 먼저 찾아온 거예요.

복음을 듣고 성경을 보고 사람들은 대듭니다. 내가 뭐 그리 나쁘다고 나를 지옥 가는 건 당연하고, 이 세상에 지옥 불이 떨어지느냐? 우리가 한 행위가 거기에 대한 징벌이 균형이 안 맞는다는 거예요. 밸런스가 안 맞는 거예요. 뭐 그리 나쁘다고. 아이 키우고 공부 시키는 게 뭐가 그리 나쁜 짓이라고 지옥 불이, 저주의 불이 그것도 한 번 들어가면 나온다, 못 나온다?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와요. 이거는 희망 자체가 없어진 곳이 지옥이에요. 그러한 징벌이 너무 과하고 중하지 아니하냐. 뭐 그리 잘못 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뭐냐 하면 미래의 조치를 몰랐어요. 미래의 조치를 인간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누구와 상대하느냐? 예수님과 상대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지옥 불에 해당될 만한 중죄가 되는 겁니다. 심한 죄가 돼요. 십자가 의를 모르는 자는. 반대로 십자가 의를 안다는 사람은 인생이 얼마나 꼴아 박아도 입 다물고 감사해야 돼요.

왜냐하면 미래의 영생의 복을 앞당겨서 이미 받았기 때문에. 천국 비밀을 이미 받았어요. 앞의 번호는 0617+친구의 숫자. 사람들은 그 비밀번호 알려고 <커넥션> 1회부터 14회까지 긴 고통의 시간을 보냅니다.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을 왜 삽니까? 하나님의 조치 그게 궁금한 거예요. 천국의 비밀번화가 궁금한 거예요.

유다에게 아들 세 명이 하나는 살아 있지만 둘 죽고 났을 때 갑자기 다급했어요. 그래서 유다가 내린 판단을 들어보세요. 우리 판단과 얼만 똑같은지. 첫째 아들 죽을 때,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죽였겠지.” 그런데 둘째 아들이 형수와 했는데 어떻게 해서 오나니 죽었잖아요. 그때 유다 입장에서는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내 것은 내가 지켜야 된다는.

우리 고장은 우리가 지킨다는 향토예비군처럼 내 것은 내가 지켜야 된다는 숨어있는 나의 근원적인 본심, 나의 노선에 대한 나의 방어책이 나와 버렸어요. 며느리에게, “나가라. 너는 우리 집안을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래서 깔끔하게 해서 쫓아냈잖아요. 휴우 큰일 날 뻔했다. 여자 하나 들였다고 집안 말아먹게 될 뻔했다, 하고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어요.

인간의 조치가 다 끝나고 난 뒤에 유다는 절망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지 조치 끝나고 난 뒤에 희망으로 바뀌었지요. 이걸 희망1로 봅시다. “그렇지, 내 선에서 처리해야 되지. 아들 둘 죽은 건 할 수 없다만 다 과거지사고 마지막 아들 남겨야지.”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 희망을 가진 그 아들의 문제가 아니고 두 아들 죽인 것이 아버지 자신의 DNA를 받아서 죽은 거예요.

죽을 자는 누굽니까? 아들 둘은 왜 죽었느냐? 아버지 유다 본인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 본인 죄가 뭐냐?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 있는 며느리를 반발하고 저항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있는 게 아니고 실은 내가 싫어하는 쪽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서 나한테 찾아오고 만남이 이뤄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노래 첫째 가사도 문제가 있어요. 행복이 무엇인지 할 때는 지가 몸 바쳐서 사랑할 만하니까 사랑한 거예요. 그런 사랑으론 하늘나라 가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사랑은 미워 죽겠는데 결국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에요. 내 사랑이 끝이 나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 내게 없는 사랑이 새롭게 발생되는 사랑이 그게 바로 에베소서 3장입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 예상 못한 사랑. 내가 꺼지세요, 했는데 그분이 들고 온 사랑. 나 예수님과 안 놀아. 이제 고기 잡을래 했는데 찾아오는 사랑.

주님의 조치는 희망 갖는 나를 이 희망이 얼마나 엉터리고 가짜인 것을 집어넣는 작업인데 그 작업이 뭐냐? 희망2. 희망2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서 나의 희망에서 주님의 이뤄진 희망, 주님의 소망으로 바꿔치기하는 그 작업에 주께서 우리를 참여시켰다는 이게 바로 언약의 효과입니다. 이게 바로 복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8장에 그런 말씀 나오지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백날 로마서 8장에서 무슨 소리하든 우리는 됐고 모르겠고, “나는 내 인생의 소망을 스스로 접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럼 주께서, “그래 고집 부려. 잘했어. 그러니까 너는 이제부터 왜 지옥 가야 되는 이유를 내가 친절하게 알려줄게.” 그 친절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 인생 내 뜻대로 안 되는 작살나는 친절이죠. 친절하게 알려주는 거예요.

사람 낚는 어부 되는 그게 쉬운 게 아니에요. 들을 때는 신났지요. 하지만 내 인생이 거기에 같이 비빔밥으로 들어간다는 사실, 주님의 고난, 아픈 체험에 그게 내 체험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이에요.

삼 대째 저주받는데 천 대째 복을 받는다 할 때 삼 대째 저주받는 노선과 천 대째 노선 자체가 둘로 나눠져요. 나는 저주받으면 안 되겠다는 자들을 저주케 함으로서 천 대의 복 속으로 이미 들어온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하나님의 언약방식은 늘 그런 식이에요. 창세기 36장, 방금 그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그다음에 소돔과 고모라 끝나고 난 뒤에 롯이 자기 딸과 할 때 술을 먹였잖아요. 술을 먹였다는 말은 제 정신으로 아버지가 거기에 호응할리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거든요. 왜?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서 그 더러운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름 경건하게 생활했거든요. 그게 나중에 신약에 나와요.

그런 사람이 딸의 대를 잇는다는 생각도 못했지요. 강제로 술을 먹였지요. 강제니까 이건 비자발적이죠. 내가 구원받는 것은 주님의 비자발적 성질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아니고 나는 안 하고 싶은데 강제로 집어넣는 거예요. 언젠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나는 교회 안 가고 싶은데 나는 복음 듣기 싫은데 불신자가 절에 가던 동화사 주지가, “이 시간에 교회 가야지 절에 와있나. 놀러올 군번이야? 너 복음 들을 군번이야.” 주위의 불신자를 우릴 가만두질 않아요. 이제 모압과 암몬이에요. 그 롯에 의해서 태어난 모압과 암몬의 기능이 뭐냐? 지도를 봐야 돼.

홍해를 건너고 시나이 광야를 가는데 지금 이 노선으로 가면 빨리 들어갈 수 있어요. 여기 에돔, 에돔 위에 모압, 암몬 이 자들이 펜스를 치고 있어요. 어딜 들어가? 못 들어가. 정탐꾼 보내서 보니까 너무 좋아요. 좋은데 막상 들어가려고 보니까 에돔, 모압, 암몬이 딱 버티고 있는 거예요.

에돔은 누구 자손이죠? 야곱에 의해서 저주받은 에서의 후손들이죠. 야곱은 언약백성이잖아요. 언약백성에 에돔은 저주받아야 될 비-언약이죠. 비-언약이 철벽을 장벽을 치고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싸우지 마, 해서 빙 둘러서 들어간 곳이 뭐냐? 사해 옆으로 들어가게 해요. 여기에 여리고성 있는 거예요. 여리고성 들어가서 아이성 치고 여기 약속의 땅에 입성하게 되는 겁니다. 그 아버지, 할아버지의 땅에 입성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역할이 뭐냐 하면 이 와중에 이스라엘 가운데서 홍해 건너온 자는 전부 다 탈락을 시켜요. 이 사해 위쪽이 요단강이에요. 홍해를 건너온 자로 하여금 그냥 건너왔으면 요단강을 건너갈 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요단강을 건너가게끔 불신자들에 의해서 유도해가는 겁니다. 그 요단강을 건너가면서 그들이 알아야 했던 것은 뭐냐 하면 구원은 인간의 소망과 관계없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소망은 어떻게 돼요? 이 과정 속에서 제거해야 되고 철폐해야 되겠지요. 스스로 알아서 자기 희망을 접을 인간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 인간들을 불신자 세계 속을 통과하게 만들어요. 소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갖다가 불신자를 통과하면서 좌절을 겪게 됩니다.

“안 돼요. 하나님 저 안 됩니다.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불신자와 진배없어요. 불신자라는 말 자체도 해당 안 됩니다. 저는 그냥 똑같은 인간입니다. 저 안 돼요. 말이 안 되지. 저 같은 것은 구원 희망 접었습니다.”라는 것을 겪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요단강 건널 때 중간에 물이 스톱한 적이 있거든요.

문제 냅니다. 물이 이스라엘 보고 스톱했습니까, 언약궤 보고 스톱했습니까? 이건 다 아는 이야기죠. 뭐 때문에 스톱했습니까? “야 가자, 가자. 물 멈출 거야.” 멈추겠어요, 안 멈추겠어요? 미쳤습니까? 니가 뭔데 멈춰요. 제사장 보고 멈추지 않아요. 제사장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사장이 뭘 들고 있어요? 언약궤죠.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약속대로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약속되는 과정 속에서 내가 예상한 나의 노선은 절단돼야 돼요. 내 자아는 영이 아니고 마이너스가 돼야 돼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죄인을 없애려 오신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야 돼요. 죄인밖에 없어야 돼요. 지옥 가는 사람밖에 없어야 돼요. 혹시 천국 간다면 이거는 의외입니다. 이거는 예상 밖의 일어지는 거예요.

시편 53편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 없잖아요. 없는 걸 없다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 없다는 게 정답 아닙니까. 그 말을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오늘날 과학을 생각해봅시다. 오늘날에는 왜 우상을 안 섬기죠? 2층 이사 갔어요? 아직 안 갔구나. 전보다 덜 요란스러워서.

왜 오늘날에는 절에 가 빌고 그런 짓을 왜 안 합니까? 이게 신을 만들 때는 그 신이 우리한테 뭔가 제공해야 돼요. 신에게 희망대상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귀한 것을 신의 형상 만드는데 이게 소품으로 재료로 집어넣는 거예요. 어떤 외국에서 온 미국의 어떤 아가씨인데 트롯을 잘 불러요. 그런데 그 아가씨는 홍어 삶은 것을 잘 먹어요. 한국 사람도 잘 못 먹는 거예요. 홍해를 그냥 김치에 싸서 먹일 순 있지만 삶은 건 못 먹어요. 그런데 그 마리아란 가수는 잘 먹어요.

홍해 잘 삶는다, 이야기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고, 재주 있네. 그런데 너 먹어볼래?” 안 먹지요. “목사님, 부산까지 왔는데 갈 때 김치 싸가지고 가세요.” 고맙지요. 그런데 김치 들고 대구까지 우에 들고 갑니까? 고마운 이야기지만 완곡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지요. 이게 제가 적어볼 테니까 실제 이 동네 있는 건데 오다가 적었어요. ‘팔공산 양명대사. 고통 받는 중생 구제해 드립니다.’ 옆에 가로로 해서, ‘풍, 비만증, 체질감정, 살 빼기, 허리, 팔, 다리, 위장, 고혈압’ 길 건너 골목에 있습니다.

이 사람 장사 잘 되겠어요? 장사 잘 안 됩니다.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장사 잘 되면 이 동네 안 삽니다. 이 동네에 아직까지 있다는 것은 부동산 값이 싸다는 뜻이고, 월세가 낮고 돈이 없다는 뜻이에요. 요새 풍, 체질감정 위해 이런 데 안 가고 어디 갑니까? 병원에 가잖아요. 그러니까 과학이 신이에요.

왜 지금 우상이 없는가? 인간 위주의 모든 지혜와 모든 연구가 과학 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고, 과학 입장에서 종교는 미신이에요. 교회 다녀서 얻는 이익과 유리한 것과 과학해서 이익 얻는 것과 네가 정신 있거든 비교해봐라. 어느 쪽이 효과 있는지.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도 가고, 병원도 가고. 다리 찢어지겠다. 그럼 교회는, 세상은 과학에 맡기고 과학이 손 못 대는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은 교회가 책임지고. 그런데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내 노선을 유지하는데 어떤 예외성도 나는 안 믿는다는 거예요. 나는 내가 잘 되는 것만 믿겠다는, 강의 초반에 나왔지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입니까? 내게 유리한 것은 이유도 따지지도 말고 진실이고, 내게 불리한 것은 거짓이다. 그걸 위해서 주께선 다른 신으로 오신 거예요. 다른 신, 뭐냐? 사람들이 망가진 신을 누가 믿겠어요?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에 노선을 바꾸기 위해서 인간이 찾지 않는 하나님 모습으로 오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시편 53편을 사도 바울은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것에 근거해서 시편 53편을 바로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정해버려요.

53편 2절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당연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 이걸 보면, 그래도 우리는 있잖아, 이렇게 해석한다고요. 그래도 우리는 있잖아 한 자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십자가를 알고 구약 다시 보세요. 내가 예수님 찾을 위인이 아닌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찾으면 안 돼요. 주께서 나를 찾아서 박살내는 즐거움과 기쁨을 제공해야 됩니다. 왜? 이미 다 미래에 구원받은 자를 확정했다는 티가 확정했다는 그 사실이 내가 망가지는 즐거움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이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걸 뭐라 하느냐? 6절에,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보세요. 포로 된 자, 사탄과 악마와 그리고 율법과 죄와 그리고 자기 목숨이 자기한테 자기 자존심에 포로 된 자를 돌이키려면 우리는 거기에 포로 됐다는 사실을 남은 인생을 살면서 그걸 확실하게 절여지도록 마음껏 이제는 뭐 마음껏 자유 하면서 내가 이렇게 죄악에 포로 된 자인 것을 외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지 않으려고 내가 지옥 안 가려고 하는 모든 수법이 이게 바로 구약의 어리석은 이스라엘이 했던 짓을 십자가를 경유해서 알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 마음보다 주의 마음이 우세하고 월등하고 압도적인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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