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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12:42:19 조회 : 3753         
(1탄)어느 목사님의 질의와 저의 답변 이름 : 이근호(IP:119.18.98.57)

몇 개월에 걸친 경북의 어느 목사의 질의와 답변

(질의) 목사님 안녕하세요.

예전에 한 두번 통화를 했었던 바가 있습니다.

신명기 31장에 율법의 정신 언약을 잊고 이방나라와 언약을 맺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숨으시는 하나님은 엘리 시대(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엘리야 시대(여호와의 말씀(레위기,신명기에서 언약 어길시 비가 내려오지 않음)이 숨었다가 갈멜산에서 불이 내려온 후에 비개 내림으로 말씀이 등장하여 '숨으셨다가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을 아합왕에게 보게 하는 모습)

말라기 이후 중간기 시대로 보여집니다.

제 개인적으로 말라기 시대도 유다 백성, 제사장, 등 모두가 죄악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기 시기를 약 400년 잡을 때에 이렇게 시기가 긴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죄악이 그만큼 깊고 큼으로 하나님 자신을 숨기시고, '때가 차매' 하나님 자신을 그리스도로 드러내시는 분인 것 같은데,

말라기 이후로는 좀 정리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해결 좀 부탁드립니다. (엘리시대, 엘리야 시대도 제가 미흡한 이해력이라면 정확하게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를 자주 접합니다. 그런데, 설교 및 강의를 하실 때에는 원어를 언급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시던데,

원어 연구를 다 하신 후에 설교준비에 지장이 없다 싶어서 그냥 넘어가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계시역사, 언약사, 구속사로 성경을 맥을 잡아서 가더라도 원어를 알면은 그 맥이 더욱 굵고 선명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목사님의 의중이 궁금해서요.

그리고 목사님.

90년대 설교에는 구속사의 중심과 맥이 설교에 많이 묻어나 있고,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라는 자료에서도

거의 100% 구속사 내용뿐이었는데, 2000년대 시간이 지난 설교를 읽어보면 구속사의 맥 보다는, 인간의 의에 대한 질타로 항상

본문이 풀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다 이해를 못해서 그럴 수도 있구요. ^^

이 부분에 있어서도 90년대와 2000년대의 설교전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우선 원어 문제부터 말씀드립니다. '원어'란 애초부터 그 시대에만 통용되는 단어이기에 개념이 세분화되고 다양화된 세상에서 적용시키면 거의 의미가 왜곡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원어라는 것에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어 풀이는 변명이나 핑계에 불과합니다. 언어란 그 당시 사상 구조에서 갇혀 있기 때문에 원어풀이보다 사상의 구조가 더 중요합니다. 원어 풀이는 사적인 의견에 되받아 나올 뿐입니다. 신학에서의 원어풀이는 언어학이나 기호학의 전제를 고려하지 않는 주장에 불과합니다.

말라기 이후의 계시전개는 '에스라, 느헤미야 속으로'라는 (대장간 출판사) 책에서 언급해 놓았습니다. 400년간 계시가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과 관련 있습니다. 나라가 소실되면 주어질 계시도 없는 법입니다. 계시 받을 집단적 대상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는 계시 수용자가 집단이 아니라 예수님 개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질의)

목사님.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더운데, 연구하신다고 고생 많으시죠?.

목사님의 강의내용과 설교를 통해 많은 공급을 받습니다.

몇가지 여쭈어 봅니다.

1. 창1장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를 하루의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식 개념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루의 개념을 저녁을 시작으로 아침을 마침으로 만드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 개인 생각에는 본래 무질서와 혼돈이 있었던 영역이 저녁과 같았고, 이것에서 질서와 하나님 영광의 충만으로 변화된 것이

아침의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이건 개인 생각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해가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개념도 이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구약의 전반적인 내용으로 저녁의 개념, 아침 및 새벽의 개념은 항상 독특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만, 이것을 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구약 전반에 걸쳐서 '동쪽'에 대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에덴 동산의 동쪽, 유다지파의 동쪽, 선지서, 계시록 등 '동쪽/동방'의 의미를 부각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3.. 목사님 사도행전 설교는 홈피에서 받아서 읽고 있습니다만,

구약도 마찬가지겠지만, 신약에서 27권은 권별로 특징이 있는듯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중심사상의 전개 책에서도 누가복음의 내용은 '희년'의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중심사상의 전개 책은 너무 압축되어서 신약의 각 권을 이해하는데, 제가 조금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혹시 신약 각권별로 조금더 넓게 풀려진 글이 있으면 제가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것 같습니다.

목사님 늘 감사합니다.

(답변)

1.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잠을 잡니다. 이는 사람이나 동물이 모든 피조물들이 하루치 의식만 부여받는 처지에 있고,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그 다음 날을 맞이하는 현상은 늘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살려주시는 은혜로 인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34에서도 "내일 내일 염려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녁과 아침은 저녁이나 아침 그 자체보다는 세상의 날의 지속이 피조물의 손에 달린게 아님을 알리는 것이 곧 창조의 질서임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분을 풀어도 해지도록 품지말라'는 말씀은 에베소서 4:26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2. 동쪽은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동쪽은 새성전에서 하나님께서 왕의 신분으로 입장해서 자기 백성과 합류하는 쪽입니다.(겔 44:2) 그리고 그 방향은 또한 생명나무로 통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창 3:24) 따라서 이스라엘의 진영이 이동할 때 동편에 서게 되는 지파인 유다 지파는 곧 장차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기어이 찾아주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로 오심으로서 이스라엘 자체가 메시아 왕림의 통로가 됨을 나타냅니다.

3.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주석들을 참고하시고 복음과 관련지으려면 십자가 마을에 담겨 있는 성경 강의들을 참조해야 합니다.

(질의)

목사님.

어제밤은 많이 무더웠습니다. 평안하시지요? ^^

1. 도피성

도피성에 대해서 연구를 하다가 문의를 드립니다.

90년대에 설교해두신 녹음음성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1. 부지중에 실수로 살인한자는 도피성에 머물다가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자유로워진다.

2. 피해자의 죽음은 대제사장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는 의미를 지닌다.

3.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가해자.피해자간의 막힌 담이 무너진다.

거의 이렇게 정리를 했는데,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는 것 같아서요.

아침부터 목사님의 도움을 빌리고자 합니다.

2. 사사기

사사들은 하나님께서 왕정시대 전에 특별히 Is을 구원하시고자 비상섭리에 의해 세워진 직위임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사기를 풀 때에 사사들을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에서 접근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사기의 사건과 사사들을 어떤 중심으로 봐야 할까 싶어서 여쭈어봅니다.

쉬운 실례가 있으면 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3. P.s 목사님 저처럼 많은 분들이 질문을 목사님께 드리지싶은데,

혹시 이러한 '도피성'과 같은 주제와 같이 주제별로 답변을 해놓으신 내용들이 있으면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답변)

1. 도피성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본인들의 행동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언약 드러냄에 작업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도피성에 상주하는 자가 바로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언약적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그 실효성이 드러나는 경우는, 우연히 살인하게 된 자가 그 도피성에 합류하면서 드러납니다. 즉 제사장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어야 될 거룩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거룩한 위상에 합류된 자는 언약에 의해서 참 생명이 무엇을 보여주는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2. 사사기는 약속의 땅이 뿜어내는 반복적 내막을 전쟁 사건을 가지고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신명기 31: 13에 보면,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녀들에게 과거에 일어난 언약 사건을 체험할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땅 주변에 이방민족을 다 추방시키지 않고 대기해 있는 상황을 만들어놓으시고 여차하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십니다. (삿 2:21-23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따라서 사사기는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왜 거룩하지도 않는 이스라엘이 거룩한 땅에 서 마치 주인인 것처럼 계속 상주해야만 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주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주인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은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도의 주님이 되시는 격과 같은 의미입니다.

(질의)

1. 103p 세 번째 단락 말미에 도피성 취지에 대한 설명 중 "특별히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의 자비성과 긍휼성을 새삼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살인하게 된 사람이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데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우발적 살인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2. 1번 질문과 같은 맥락 같은데요... 104p 세 번째 단락 말미에 "이로써 살인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 셈이 된다" 역시 바로 위의 맥락인 대제사장의 대리죽음으로 인한 해방과의 관련성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결국 도피성의 살인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보임과 동시에 심판을 대행했다는 것인데요...

저한테는 많이 어렵습니다.

언제나 또 다른 질문으로 인도하시는 답변 늘 감사드립니다.

(답변)

도피성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요건을 갖춘 살인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자행된 살인에 휘말린 사람에 국한됩니다. 거기서 그 살인자, 기존 인간 세계에서의 말하는 '죽음/생명'의 차이를 보여주는 자가 아니라 '죽음/'죽음의 죽음'의 차이를 보여주는 자로서 살인사건에 말려든 자입니다. 이 살인자는 살아있어도 인간 세계(도피성 밖)에서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도피성을 벗어나기만 당장 피해자의 가족들로부터 참혹한 복수를 당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반면에 도피성 안에서 살인자는 '죽음의 지라에서 비로소 보이는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자기 죽음보다 선행하는 거룩한 분의 죽음(제사장의 죽음으로 증빙됨)으로서 제공되는 영생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비와 긍휼은 '자기 죽음이나 자기 부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기 죽음'이나 '자기부인'은 개인적인 자살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인간 세상 자체가 이미 저주받을 영토인 것을 감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질의)

목사님 답변 감사합니다.

사사들은 각 시대마다 특징이 있는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는 특징점이 있습니다.

1.이런 가운데,

삼손은 여호와의 영이 여러 번 반복적으로 임했는데,

딤나로 내려 가기 전, 사자죽일 때, 블레셋사람을 칠때,

아스글론사람 삼십명을 죽일때, 나귀턱뼈로 천명을 죽일때

여호와의 영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레히에서 샘이 터지는 일들도 생깁니다.

사사기의 맥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의 승리를 드러냄은 이해가됩니다, 그런데 삼손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을 해야하는지..

2.출34장에 두 번째 십계명의 돌판을 모세로 하여금 만들게 한 이유는 특별히 무엇인지요?

(답변)

1 삼손에 이르면 최후의 사사 기능을 보여주면서 왕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사사는 임시적에 불과하지만 왕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삼손은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을 대변해주는 고정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신이 겨냥하는 언약 실현이, 이스라엘의 어떤 면에서 방해받고 있는지가 밝혀질 시점에 도달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개인적 영웅주의가 되는 계기로 쓰여지는 인물로서 삼손에 관여하게 됩니다. 이것은 삼손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의식의 한계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신에 의한 언약달성이 실패로 끝날까요? 아닙니다. 나실인, 곧 희생제물화된 인물의 등장과 실현은 ‘죄로 인한 죽음’으로 성취됩니다. 그런 점에서 삼손은 장차오실 예수님, 곧 ‘주의 이름’의 기능을 벌써 내비치고 있습니다.

실패가 곧 성공이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취지입니다. 즉 그 어떤 민족도 구원받을 자격이 애초에 없다는 뜻입니다.

2.출34장에 두 번째 십계명의 돌판을 모세로 하여금 만들게 한 이유는 언약궤 안에 집어넣기 위함입니다. 그곳에 들어갈 돌판은 필히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에 의해서 거부당해 깨어지게 사건을 유발했음에 관한 증거가 담겨 있는 증거판으로서의 돌판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란 인간이 저질은 죄 위에 ‘피 희생’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7월 10일 대속죄일날 대제사장은 1년에 단 한 차례 참회에 무관하게 일괄 전체 이스라엘을 용서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므로서, 언약의 반복이 은혜의 지속성을 보장함을 알려주는 근거로서 ,이미 그 대상들이 실은 언약을 깨버린 (돌판 깨어짐) 대상자임을 반복적으로 확고히 하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시은좌, 곧 은혜가 내려앉은 좌석은 돌판 위에 얹어진 뚜껑에 피가 발림으로서 언약은 사건의 반복 안에서 완성됩니다.

(질의)

목사님. 늘, 친절함과 더불어 풍성한 답변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호수아서에 기브온 족속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들이 멀리서 온 것처럼 위장하는 것은 율법의 내용(멀리 있는 자들에게는 화평을 선언한 후에 전쟁에 임함)을

어느 정도 들었기에 멀리 있는 백성처럼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지혜로운 행위라고 보입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묻지 않은 이유도 이러한 이유때문인 것이기에, 굳이 물을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이것을 정당화하는 사건이 그 다음 장에 나오는 태양이 기브온 위에 머물러 언약의 태양 빛을 받은 참 언약백성으로 여호와의

보호하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단을 위해 나무 패고 물 긷는 자가 되는데, 이것은 레위인이 섬기는 직위에 동참하는 은혜의 직무라고 보여집니다.

제가 묵상한 것이 이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1. 목사님, 이 부분에 조금 더 성경의 중심에서는 흐르고 있는 부분을 배우고 싶습니다.

2. 목사님의 글은 특유의 맥과 흐름이 있는데, 설교 때도 배여 있지만, 글에 명확히,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저 또한 이러한 부분을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1. 법궤에 관한 규정들은 평화 시기에 적용될 규정들입니다. 평화 시기란 전쟁이 마무리 되고 난 뒤에, 즉 누가 진정 하나님의 거룩의 훼손한 원수였는가를 판정되고 난 뒤에, 그 차원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자신의 자리가 인간이기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신한 희생물의 바탕 위에서 수행될 일임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레위인들이 친히 법궤를 자신의 신체에 접촉하면서 이동시키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법궤가 지향하는 최종점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우월한 직분의 가치를 인식이기 위함입니다.

사무엘상 6장 에 나오는 법궤는 전쟁이 이스라엘 개입 없이 하나님 자신의 일방적 승리로 인하여 블레셋으로부터 법궤를 인수받기 위한 과도기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2. 다윗에 의해서 예루살렘 정복이라는 최종 승리가 주어져야지만 가장 하나님다움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그 때, 전쟁과 율법의 해후가 성사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전쟁이 '거룩을 위한 전쟁'임이 확인될 것입니다. 즉 율법이 품고 있는 거룩이 실제적으로는 전쟁 형태로 구체화됨을 온 백성들이 다 알아야 될 사항이 됩니다.

(질의)

목사님.

1. 구약 레위기에서 화목제 같은 경우 제물의 몫이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경우를 봅니다.

제사장이 특별히 제물을 먹는 것이 구속사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요?

제 개인 생각에는 제물을 먹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제물과 일치되는 모습으로 보여 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주신 제사장이듯이 말입니다. 묵상 내용이 조금 빈약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답변)

1. 언약에 대해서 인간들(이스라엘)의 관리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언약이 실시되는 그 과정 자체를 통해서 언약을 혜택을 일방적으로 기대하는 이스라엘의 곡해와 실수가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이 스스로 유발시키는 사태 속에서 자신의 미흡함과 과오를 지적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이 벌리시는 언약적의 실행에 이스라엘이 강제로 개입되어 있음을 대표자 자격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화목제 제물은 그 제사 이전에 속죄제를 거쳐야 하는데 이는 이스라엘 내부에 비-언약적이고 이질적인 이방 요소가 죄로 규정될 것이고 그 죄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노출시키는 작업을 휘말리는 식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활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로 보여집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빼도 박도 못하게 주님의 구원과 심판 작업에 노출되고 적용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질의)

목사님.

1. 삼상7장에서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는 것이 무슨 뜻인지요?

법궤는 현재 기럇여아림에 있는 상태이고, 여호와 앞이라면 백성들이 모든 미스바의 자리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현재 죄스러움을 회개하는 의미로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애2:19) 말씀처럼

회개와 자복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십자가마을에서 1996년 사무엘상 말씀을 들어보았는데,

홍해와 요단강의 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이 되어있는데, 구속사적인 형태로는 이해가 되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 사무엘이 미스바로 백성들을 모은 이유가 특별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미스바에서 베냐민 지파가 사라질뻔한 사사기 시대의 배경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변)

1.물이 동원되어 여호와 앞에 있는 자신들의 자리에 붓는 행위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일, 곧 우상숭배의 자기 행위를 여호와 앞에서 반복하므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의식없이 행했던 과거 일을 상기하면서 이제는 그 과오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면서 이제는 일처리를 하나님께일임하고 맡기는 행위입니다.

2. 그곳이 물을 기르기 편리한 곳일 수도 있고 블레셋이 침투한 진영을 마주하는 곳이라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전쟁의 심각성을 강조할 수 있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질의)

목사님.

삼하12장에 보면 다윗이 밧세바를 취해서 낳은 아이가 죽습니다.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24:16)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18:20)

1. 아비의 죄로 자식이 죽지 않는 법인데, 다윗이 동침해서 낳은 아이는 어떻게 해석해야되나요?

2. 다윗은 밧세바를 위로하고 다시 동침하여 솔로몬(평강)을 낳는데, 여호와께서 '여디디야'(여호와께서 사랑하신다)라고

이름을 개종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사실 다윗이 솔로몬이라고 이름을 지었을 때는 솔로몬을 낳기 전에시51편의 내용을 기록한 것처럼

자신의 죄를 확실하게 깨달은 사건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히 회개하고 여호와께서 받으시는 것이 상한 심령임을 안다면 '평강'이라 이름 지은 것도 여호와께서 모든 구원의 은총을 회복시켜주신 것을 알았을 시점입니다.

(답변)

다윗언약이 지상에서 수립되는 사항에서 다윗왕의 가정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미리 보여주게 됩니다. 마치 이삭이 죽어야 아브라함이 사는 것처럼 자식이 죽어 죄인인 다윗이 사는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의 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참여한 바가 됩니다. 즉 인간은 죄를 짓되, 인간은 기껏 죄 짓는 것으로 자신의 한계를 보여주는 반면에 그 죄 속에서 '희생자'의 모습으로 참여하는 메시야의 모습이 번져나오게 됩니다. 시편 51편 8절에 나오는 "주께서 꺾으신 뼈"에 해당되는 자들이 곧 다윗 언약 속에 개입하신 희생자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자들은 다윗의 움직임으로 인하여 발생된 희생자들입니다.

솔로몬의 출생은 바로 그 '하나님 희생'이 바탕이 되어 다윗 언약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사랑'이 발생되는 겁니다.

(질의)

목사님. 안녕하세요.

온라인을 통해 목사님의 대외활동을 잘 보고 있습니다.

늘 강의를 통해 구속의 은혜를 공개해주심에 감사합니다.

홈피(십자가마을, 우리마을)에는 열왕기상 자료(강의 자료)가 없는데,

목사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열왕기상을 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의문이 있어서 여쭈어봅니다.

왕상18장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지는 사건 이후에 비가 내립니다.

엘리야는 비가 내리기를 기도했다기보다는 Is민족이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는 장면 같습니다.

1.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2.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3.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1-3의 내용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선지자로서 하늘에서 불 내린 사건 통해 백성들이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얼굴 무릎 사이에)인지,

일곱 번은 어떠한 의미로 엘리야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

축지법은 마차를 따라잡은 여호와의 능력을 아합에게 보임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재선포하는 장면인지..

여러 상상력이 동원되지만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목사님. 혹시 열왕기상 강의 내용이 있으면 또한 부탁좀 드립니다.

(답변)

언약은 세상의 중심적이요 활동의 구심점인 사실을 양보하지 않고 유지합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스스로 자신이 세상 움직임의 구심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리는 행위입니다. 이는 곧 참된 이스라엘은 엘리야가 존재하는 그 시점에서 새로이 방출하므로서 기존의 이스라엘과 차별화를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합왕은 결코 엘리야와 협상하거나 타협해서 이스라엘을 지탱할 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이런 배타적 행위를 뒷받침 해주는 것이 바로 ‘비 내림’입니다. 비가 오고 아니 오고의 원인자를 엉터리 이스라엘 앞에서 엘리야가 새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곱 번이란 천지 창조의 행위자가 엘리야를 앞장 세워서 현실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엘리야에 대한 자료는 [성경의 중심 사상과 그 전개] 안에 담겨 있는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질의)

목사님. 지난번 답변에 감사합니다.

왕상3장에 보면 솔로몬이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것을 여호와께서 '지혜'라고 말을 합니다.

'선악을 분별하다' = 지혜 이러한 등식이 성립되는데,

창3:22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긍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를 신약에서 그리스도라고 말을 합니다.

창3장과 왕상3장과 신약의 지혜 그리스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사실 왕상3장의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는 다윗언약의 연속성으로 희생을 통한 구원이 그리스도임을 계시하는 사건으로 이해가 되지만

창3장의 선악을 아는 것에 대한 연결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창3장의 내용 자체를 다르게 해석해야 되는 것인지....

부탁드립니다.

(답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을 아는 일이란, 선악과 자체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와 연결되면서 알려집니다. 선악과과 생명나무가 인간이 알지 못하는 배후에서 상호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생명나무는 영원히 인간이 먹지 못하는 나무가 됩니다. 이는 선과 악이 인간이 아는 수준에서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려지는 수준으로 상승하면서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선과 악의 기준 자체를 악한 것으로 징벌할 자격자로 드러납니다. 이 예수님 판정 자체가 곧 선입니다. 솔로몬은 바로 이 수준으로 보다 접근한 경우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질의)

목사님. 늘 답변에 참 감사합니다.

1. 호렙산에 있는 엘리야가 남은 생애 동안 감당해야 할 사명이 아닌, 특별한사명(왕과 엘리사에게 기름부음)을 말씀하신 이유가 있는지요?

2.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강 등에 거주하는 선지자들도 엘리야가 승천할 것을 알면서 엘리사에게 '당신도 아냐?고 묻자 '나도 안다 잠잠해라'고 말하는

대화의 내용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엘리사를 남겨두려고 하는데, 엘리사는 엘리야를 계속 적으로 따라다니고자 합니다.

이 부분이 사실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와 같은 사건들과 대화들이 이루어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3. 그리고 엘리사는 엘리야의 길을 그대로 밟아 기적을 행하고, 그 뒤에는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가 거의 등장하지를 않습니다.

이 부분도 잘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답변)

1.선지자란 본인의 구원이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악함을 드러내기 위해 그 악함으로 인해 시련을 당해야 하는 존재로 움직입니다. 엘리야에서 엘리사로 움직이는 것은 그만큼 북이스라엘의 죄악이 더욱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사가 보여주어야 될 기적이 엘리야보다 더 많아진 것입니다.

2. 선지자 엘리사는 이런 점에서 초반부에 엘리야와 함께 할 때는 엘리야 스승이 벌린 기적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갑절의 능력'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많은 능력이 그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사회의 죄성을 더 깊이 지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승이 시신을 찾지 못함에서 알게 됩니다. 즉 엘리야의 모든 기적은 지상의 인간들이 소유용으로 간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기적이 나오는 원천지는 엘리야를 하늘로 올려세운 바로 그 하늘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땅에서 확산되는 죄의 깊이와 비례해서 제공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불수레타고서 시신없이 하늘로 올라가므로서 북 이스라엘은 노골적으로 선지자를 품을 수 없을 정도로 죄악으로 심화된 미래상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엘리야가 벌린 모든 기적인 회개용으로 생긴 기적이지만 그들은 일시적 그들의 생존여건만 준수되고 보존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상을 남은 잔불 정리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그림자' 기능으로 엘리사가 연이어 기적이 나섭니다. 그것은 엘리사의 기적이 아니라 여전히 하늘에 살아있는 엘리야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말라기 4장에 엘리사가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다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기가 선지자의 원형이라는 말입니다.

선지자는 단순히 여타의 선지생도들처럼, 자신이 속한 나라를 사수하는 보디가드적 기능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 된다는 사실을 엘리사가 단독으로 엘리야를 만남으로서 알게 됩니다. 엘리사의 남은 진정한 사명은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 베풀기가 아니라 그 시대의 죄악으로 인해 죽은 일입니다. 기적의 완성은 애매하고 억울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서 이 시대는 이미 하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3. 엘리사 이후에 남, 북 이스라엘은 멸망과 심판이 기정사실화됩니다. 이로서 '문서 선지자'시대로 접어듭니다. '문서 선지자'란 멸망의 확실함이 문서적으로 확정된대로 따르게 된 결과라는 겁니다. 즉 아무리 이스라엘이 회개해도 멸망이라는 약속 성취는 변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질의)

목사님. 늘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의 내용이 너무 압축이 되어 있어서 이해는 되지만 조금 어렵습니다.

조금만 더 풀어서 말씀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나봇의 포도원이 나옵니다. 나봇은 그 포도원을 아합왕에서 넘겨주기를 거부합니다. 조상의 유업이기 때문입니다. (21:3) 여기서 '땅' 개념이 혈통 개념 속으로 전환되어 결국은 신약 시대에 와서 성도는 '예수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내용이 됩니다.

물질적인 땅 개념이 구약에 먼저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몸 자체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물질적 몸 개념이 신약 고린도전서 15장 49절의 '하늘의 형상'의 몸으로 변화되는 결과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 속에서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주된 작용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신 12장) 그 안에 들어온 언약적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의 작용 속에서 육의 몸은 죽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는 혜택을 입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보여주시는 구체적 작업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 안으로 자기 백성 모집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처럼 '가나안 땅'이란 장차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실 분으로 인해 그 땅에서 '인간을 죽이는 작업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는 양상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요청하는 것은 모세언약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일환으로 진행되는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실은 이미 죽은 모세의 여전히 종으로서 실존하고 있습니다. 갈렙에게 있어 헤브론 땅이란 실은 그들이 소유하기 보다는 헤브론 땅이 그들을 끌어당긴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정탐꾼들은 아낙 자손의 덩치에 기가 죽어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고 지레 낙담을 하게 만든 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갈렙을 통해서 그 과거에 있었던 불신앙 사건을 약속의 땅에 새기고 영구히 장착시키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모든 기대와 무관하게 성취됨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채워져야 될 영역이 바로 '약속의 땅' 곧 천국임을 최종적으로 드러내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갈렙은 여호수아 시절에도 여전히 모세와 상대하는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약속은 역사를 초월하여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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