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성도의 칼럼
2018-01-26 10:15:36 조회 : 671         
이근호 신학 비판-심재성 목사님의 글 (2009년 글)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009년도 심재성 목사님의 글



이근호 목사의 책, 강의, 설교등에 대한 비평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때에 성경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참 분별하기 쉽지 않다. 각 신학자들이나 목사, 개인마다 다른 시각에서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헛갈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신학적 한계이자 풀지 못할 숙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 택한 백성에게 진리의 말씀을 깨닫도록 인도해 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근호 목사 개인 에대한 공 이나 과실을 논지 삼은 것이 아니라 여러 관점중의 하나로서 이근호목사의 신학사상이 뿜어져 나오는 책, 강의, 설교등에 대한 비평을 통해 다른 각도에서의 조명이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졸 필 이나마 적고자 한다.



이근호 목사의 신학의 최대의 강점은 오직 ‘예수십자가의 피’ 외에는 역사세계든 묵시세계든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있다. 특히, 기존신학에서 놓쳐버린 삼위일체론(신론), 예정론, 교회론 등 신학 전반에 걸쳐 본질 즉,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에서 벗어난 난점을 지적하거나 비판 한 점은 획기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론, 예정론, 교회론 등에서의 그의 논지가 부정하는 쪽으로 전개 되기는 하였으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근거를 인간의 관념에서 시작해서 관념으로 전개되는 기존신학을 거부하고 오직 역사에서 시작하여 묵시로 끌어가는 점이 성경적인 원리와도 통일점을 보이는 것은 때로는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써 획기적이고 감탄을 자아 나오게 한다.




특히 타락한 인간에 대하여는 인간이 상상하는 것 훨씬 그 이상의 부패를 강조하는데 심지어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하는 자아에 대해서도 부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것 마저도 죄라는 지적은 선한 일을 하고 있는 자아 마저도 ‘예수그리스도의 피’ 앞에 부정되어야 할 존재임을 지적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부패한 윤리관을 되짚어 보는 의미있는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강점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되어 왔고 필자도 다른 글에서 종종 언급을 했기에 문제점에 대해서 더 비중을 두어 언급하도록 하겠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만을 주장하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다 보니 그 부작용으로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 도 엿보인다.



첫째 : 성경본문의 의도가 도외시 된다는 점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이 말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어떠한 신학 사상도 원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인도하심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 하기위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성경의 전체의 흐름과 역사적 배경과 문맥을 고려해야만 그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올바로 이해 할수 있는 것 인데 원 저자이신 성령의 인도하심 보다는 자신의 신학사상을 지나치게 대입시켜 끌고 간다는 점이 있다. 정작 성경본문이 주는 의미보다는 전달자의 외침이 더 크게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 행함 측면이 무시되거나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대한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검증은 구약에서는 율법으로 신약에서는 성경에 담겨있는 명령문 등에서 기록되어 있는 말씀으로 검증되어져야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한 사람은 그 믿음에 상응하는 행위가 동반되는 것이다. 그런데 믿노라 하면서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믿음이라고 할수 없다는 야고보서의 지적은 올바른 믿음인가 아닌가의 검증은 행함으로 가능하다는 점도 포함해서 일러 두고 있다. 물론 행함 자체로 믿음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을 궁극적으로 판단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십자가의 피로 거듭난자가 그 은혜에 감격한 어떤 행동이 자연스레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행함이라는 것인데 그 행함으로 믿음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검증하는 기능이 신약성경의 명령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데 십자가의 복음을 강조한 나머지 이러한 성령 안에서의 행함 부분이 취약하다는 점이 다분히 있다. 복음 안에서의 자유가 내 마음대로의 자유로써 성도에게도 건덕이 아니라 상처를 주는 흉기로 돌변 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 모든 신학, 신학자등을 성경적 비평 보다는 비판만 가한다는 점이다




2000년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수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거쳐갔다. 그들의 신학은 시대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성경적으로 부합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다시 재 조명해 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과나 오류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복음이 전수되는 기여는 분명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신학이 성과가 있거나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 받았는가라는 평가는 우리 인간의 소관이 아니기에 아무도 알수는 없다. 가령 신학적 주장이 성경적인 내용을 담고있다고 해도 구원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복음을 복음되게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 만큼은 인정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비평은 있어야 하지만 모든 신학자들의 신학을 통째로 비판을 가하게 되면 무의식중에 자신의 신학이 최고라는 공식을 만들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가 죄인이기에 비판보다는 성경적 비평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넷째 : 자신의 신학적 실수나 과오 등은 전혀 엿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비록 성령으로 거듭난자에 의해 신학이 전개 된다 할찌라도 그도 본질적으로는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얼마든지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의 저서나 설교 강의등에서 거의 찿아 보기 힘들 정도로 자신의 과오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오류가운데서 책을 출판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강의를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시간이 지난 후 그것을 보거나 타인의 충고에 의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오류도 언급되어 져야하는 것은 죄인된 본성을 가진자로서의 당연한 자세여야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러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점은 동일한 잣대로 보지 않는 시각에 있는 것으로 본다.



다섯째: 지나칠 정도로 어렵게 전개한다는 점이다.




설교는 다소 쉽게 전개하는 편이다. 그러나 책이나 강의는 철학이나 기타 여러 학문을 동원하여 매우 어렵게 전개한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나 학문을 사용하는 자체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지식적 식견이 없는 자들도 부담없이 알아들을수 있도록 쉽게할 필요는 있다. 쉽게 한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지거나 복음의 원래 기능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아무리 쉬운 말로 써도 허락된 자들만 알아듣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전개하는 것은 여러 의도가 있겠지만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어렵게 할수록 매력을 느끼는 회중을 의식하거나 다른 신학적 도전자들을 의식함도 있는 것 같다. 어렵게 쓸수록 대항할 사람이 그만큼 적기 때문일 것이라는 판단도 있을수 있다.



끝으로 십자가 마을 형제들께 전하고 싶은 말은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한다.(행17:11)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말씀을 받는데 그냥 덮어놓고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 하였다는 것이다. 날마다 상고 하였다라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성경을 통해 검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성경을 통해 검증하는 자세는 덮어놓고 믿는자들이 주의해야 할 대목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가 성경을 중심에 놓고 과연 그러하다면 그 말씀에 따라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버려야할 분별력을 갖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인 것이다.


 이근호(IP:119.♡.83.168) 18-01-26 10:17 
2009년도에 했던 저의 반박

1.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이근호는 신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오류가 있다”는 이 논리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오류가 끼어 있습니다.
 
첫째는 논리적 측면에서 오류가 끼어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주장한다거나 남들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를 “이근호는 신이다. 신은 오류가 없다. 따라서 이근호는 오류가 있다”고 했다면 심목사님의 지적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일
“이근호는 신이 아니다. 따라서 오류를 따질 수 애초부터 대상조차도 못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다 이루신’ 십자가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된 것만 감사할 뿐이다”고 했다면, 저의 신학적 논리의 잘못된 오류에 대해서는 지적할 수 있어도 이런 감사함에는 오류를 지적할 수가 없는 겁니다. 즉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마!”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두 번째 측면에서의 오류는

성도라면 관심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근호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증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아니됩니다. 그것은 성도로서의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단 이근호가 증거하는 복음이 성경적으로 부합되는지 여부를 살필 수는 있기에 “이러이러해서 성경적 복음은 실은 이런 내용이어야 옳습니다”고 의견을 제시 했어야 했습니다. 제가 칼 바르트나 지젝의 저서 [죽은 신을 위하여]를 비평할 때도 바로 성경적인 견해를 가지고 의견을 제시한 겁니다.

2. 교회사 신학에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신 주장에 대해서
 역사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늘 재편집한 겁니다. 예를 들면, 안중근 씨가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총리를 살해하는 사건을 비디오로 그대로 찍어도 우리는 결코 그 총 쏘는 순간의 안중근씨의 마음가짐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비디오를 보는 우리의 심정이 그 광경을 일방적으로 재해석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 재해석하는데 동원되는 힘이란 바로 지금 그것을 보는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의로워질려는 의욕, 자기 생존의 정당성, 발언의 가치, 대외적인 인지도 발산 욕망 같은 것들이 작용해서 지나간 역사를 재해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체라는 몸이 있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보시기에, 교회사 그 어느 구석에서도 십자가 피를 안 믿어도 될 정도로 의인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죄인이 만들어낸 신학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가 검토하면서, 어떤 논리가 바로 예수님을 죽게 만든 죄인들의 자기 주장들인가 찾아내는 것이 곧 현재 우리들의 죄들을 다시금 파악하는 과정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는 인간들의 ‘떠 밀어낸 악마적 힘’이 담겨있는 사건이기 때문이요 성령께서 그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서 책망하시면서 작렬하시기 때문입니다.(요 16:7-11)  늘 자기를 미워해야 하는 인간이 무슨 긍정적인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부정이 나온다고 해서 긍정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죄 지음에 대해서 피 흘려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3. ‘행함’ 주장에 대해서는, 어느 분의 저의 ‘성화론 비판’글에 대한 반박글로 대신하겠습니다.

(1) 이 분은 '인간'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인간은 없습니다. '죄인'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권면이 '죄인'의 '죄'와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주어졌는지를 알아야만 했습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죄인이 성경에서 '의인'이라고 하는데 이 '의인' 안에 사도 바울의 권면과 명령이 어떤 역할을 해서 이들을 '행함'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것만이 '의'가 되는 지를 설명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3)이 분은 성령의 행하심과 '죄인'으로서 인간의 행함이 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서는 어떻게 충돌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이 분은 성령없는 성도를 염두에 두고 성화론을 전개합니다.
(4) 이 분은 '성화'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구약 성경부터 근거한 하나님의 거룩의 개념과 연관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의 윤리와 도덕적인 행위를 '거룩'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 왜 이런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는가 하며는 성령을 받지 못해서 '복음의 광채=거룩의 광채'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4:4)
(5). 이 분은 성화됨을 판정할 기준을 인간의 행함의 결과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는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됨' 존재 자체가 새언약의 효과로 뿜어져나온건만 이 분은 그것이 보이지 않기에  성도됨을 그야말로 '거룩된 사람이 이미 되었음'의 차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따로 윤리적인 성과물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보고서 믿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불신앙이지요.
(6) 왜 보고서 믿겠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가지고 대외적으로 남들에게 속여가면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자신을 검토하는 순간, 선악과적인 인식이 발동하여 선한 것을 즉석에서 제조해내고서는 그것을 '자아'를 대변해줄 의로움으로 구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의식의 시간은 길지 않아서 몇 초가 지나 기억의 힘이 느슨해지면 조금전에 구성해놓은 자기 의의 긴장도 풀려서 동물적 욕망대로 평소대로 편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타인이 의식되면 다시 선악체제를 가동시켜 자기 의로움 방비에 나서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평생토록 남을 속여가면서 살아갑니다. 성령받은 사람만이 십자가 피 앞에서 이런 습관이 죄인 것을 알지요
(7). 이 분은, 성령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하신 일을 증거하는 사랑의 그릇인 것을 모르고서, 자신의 의를 증거하면서 평생을 살 사람입니다. 즉 "나는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성도 맞다"는 사실을 증거하면서 평생을 살 사람입니다. 곧 '진노의 그릇'입니다.

4. 성경 본문과 어긋난다는 점에 대해서

구약을 볼 때는 신약의 사도들이 구약 본문을 어떤 식으로 해석했느냐를 통해서 봐야 하고, 신약을 볼 때는, “다 이루었다”는 그 십자가 복음이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나 사도 요한에게 있어 어떤 기본 인식과 해석 전제에 변화를 낳게 했느냐를 살펴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같은 문맥과 문자라도 전에는 이러이러하게 해석했으면 올바르게 전체 문맥에 맞다고 생각했는데,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다시 보니 전의 해석과는 완전히 다르게 이러이러하게 해석을 해야 십자가 복음(새언약)의 의의가 나옵니다”는 식으로 해석 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도의 견해와 같게 됩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5. ‘자신의 신학적 실수나 과오 등은 전혀 엿 볼 수 없다는 점이다.’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렇게 보시는 심목사의 관찰 측면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를 들면, 시장바닥에서 물건을 사면서, “아주머니 이 콩나물 얼마에요?” 물으니 장사하는 아주머니께서 그냥 무심코 하시는 말씀이 “1000원입니다”라고 하자, 손님이 말하기를 “아주머니께서는 이 1000원이라는 자기 주장에 과오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까?”고 따지니까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그러면 ‘100원의 열 배입니다’고 말씀해드릴까요?”라고 답변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인간이 자기 딴에 아무리 겸양과 겸비와 겸손의 용어들을 동원해서 떡칠을 하고 들이붓듯이 부어도 자기 주장을 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남들도 그런 주장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이용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늘 상 자기 증거할 게 따로 있게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예수님 믿어서 다 빼앗긴 인생이 된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은 없겠지요. 

6. ‘어렵다’는 생각되는 것은,
 (1) 기존에 성경 보는 관점과 다른 관점으로 성경을 보기에 그 관점에다 자리를 옮기는 작업부터 먼저 준비되어야 하기에 어려운 겁니다. 즉 “성경을 이렇게 보시면 이 본문에서 이 해석이 도출되는 이 결론은 성경의 어느 구절과 정면 충돌 되기 때문에 관점 자체를 이렇게 바꾸셔야 합니다”라는 식의 설명까지 늘 추가적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라는 구절을 기초로 해서 볼 때, 자신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적이 없다는 식으로 성경을 한다든지, 정작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았다면 필히 ‘그리스도만이 산 상태에서 나와야 될 성경 해석’ 안 나오고 인간이 산 상태임을 인정하는 해석이 나오면 영락없이 잘못된 해석일 것입니다.

(2) ‘어렵다’는 말이 실은 ‘못 믿겠다’는 다른 표현일 수가 있습니다.
(3) 저의 설교나 강해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각양 각층이라는 점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의 강해가 쉽다는 사람이 일반 교인들 가운데서도 의외로 맞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은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름대로 조절해서 강의합니다.
 김태윤(IP:222.♡.23.103) 18-01-26 16:16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말씀 앞에서 무너집니다.  아 5초후에 죽는다는 마음...
 이상현(IP:24.♡.130.97) 18-01-27 09:01 
비판의 글을 보면서, 그리고 그 글을 비판하는 저를 보면서
인간이 정말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죄인임을 알게 하신 만큼 그것을 알게 된 '나'의 의로움이 내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자동입니다. 스스로 노력 안해도.
그래서 성령님이 평생 책망하고 죽여주시겠죠.

죽음이 싫고 주음의 과정이 힘들어도 어쩌겠습니까?
이미 죽은 자이고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을 하셨으니...

그저 되어지는 모든 일에 감사하며 주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며 살 밖에요./

감사합니다.
 이근호(IP:119.♡.83.168) 18-01-27 09:02 
이 글을 대한 지 9년 가까이 된다. 예수님의 피가 아직도 재미거리인가 유일한 현실인가?  사람이 평생을 다 허비하고 죽기 5초전에, 아직 희미하나마 정신이 남아 있을 때, 비로소 본인의 길고 긴 인생이 아무 짝도 소용없는 허송세월만 보냈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때, 과연 이 피보다 더 확실하고 유일한 실재요 유일한 현실은 없음을 알게 된다. (단 예수님의 살아계신 영을 받은 자에만 국한 되는 이야기이지만 ) 무심코 살지만 5초 후에 죽는다는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공은주(IP:175.♡.135.128) 18-01-27 17:38 
우리는 세마포 귀신입니다. 세마포 뒤집어쓰고 주님이 일하시는데 어찌합니까?
어떻게 보여드릴까요?
오늘 죽더라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 유일한 영광이고, 즐거움입니다.
 김풍호(IP:203.♡.147.61) 18-01-30 16:17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챙기고 나머지는 비판의 대상으로 아주 멋진 분이시다.. 소위 말해서,
반쪽만 취하고 반쪽은 개혁주의로 채우는 사람!!!!

인간이 원래 그런 종족이지만,
그런 인간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나 스스로 완벽하다하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이 분개해서 너만 옳으냐? 너만 복음 아냐? 라고 따지고 든다....

자신들의 선배들이 얼마나 훌륭한데.. 어거스틴이고, 루터고, 칼빈이고
싸잡아서 비난하고 개혁주의가 이단이라고 하니....
자신들의 정체성이 공격당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면서 반박은 안된다... 어려워서.... 
강의나 책의 내용이 영어로? 히브리어로? 같은 말을 하는데도 어렵다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요...

성경책을 국어책처럼 공부하랴? 역사, 문화, 시대배경, 작가의 의도까지....
그들말대로 하면 성경해석 참 쉽다.....

전매특허인 " 행함이 있는 믿음" 이라고 말하면서 그 행함은 "믿음있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행함"
이라고 포장을 한다. 성경에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시는 두가지다. " 니 아들을 니 손으로 죽여라!!,
나라를 팔아 먹어라!! " 

역사가 계시가 되려면 역사가 십자가의 원수노릇을 할때에라야 계시가 된다.
원수노릇한 역사를 꺼집어 내라!!!

그들에게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십자가 원수노릇했나? 라고 물으면....

이 사람이 미쳤나!!!!

2000년 기독교 역사와 전통이 복음을 온전히 드러내는데 얼마나 공헌을 했는데
무슨 근거로 십자가 원수라고 망발을 하느냐!!! 고 말할 게 뻔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상고해보라는 충고는 이근호를 맹신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가? 맹신인가?
아니다... 그를 이용할 뿐이다. 복음을 전하는데에 아주 유용한 도구이기때문에
그가 언제 사라져도 하나 아쉬울 것 없다.
광신자들처럼 죽은뒤에도 그 사람을 못잊어서 생전의 강의 영상을 보는 미련 곰텡이같은 짓을
할텐가 말이다....

그들은 그들의 신학이 틀리면 "죽는 줄 안다"

듣는 것이 정말 복음이라면 나를 공격하든, 신학을 공격하든....
아멘!! 하고 입닫으면 되는 것인데....

자꾸 스물스물 딴지를 걸어온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235번지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