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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17:59:07 조회 : 605         
영화 [가버나움] 평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영화 [가버나움]평



레바논 영화.


감독: 나딘 라바키(여류 감독)



(줄거리)


시리아 베이루트 빈민촌 거리. 난민들이 주요 모여서 비참하게 사는 곳이다.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나무총 들고 논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사는 것도 살벌하다.


주인공 ‘자인’은 거의 12살쯤 되는 남자아이. 다섯 동생들이 있지만 장남으로서 책임감이 강하다. 자기 집안이 줄곧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그 어린 아이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칼로 성인 남자를 찌른 혐의다. 5년 형을 언도 받는다. 그 어린아이가 왜 어른을 찔렀을까?



자인은 다른 아이들이 다 가는 학교에도 가지를 못한다. 난민이라서 출생 서류가 없다. 그 대신 그는 온 종류 그 빈민촌 거리에서 닥치는 대로 허드레한 일을 하면서 무능한 부모를 돕고 다섯 동생들을 챙긴다. 참 부지런하고 열심히 산다. 어린아이에게는 힘이 부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가스통 배달부터 시작해서 가게 점원일 까지 마다하지 않고 집안을 살리기 위해서 다 한다.



그런데 한 살 아래 여동생(사하르)이 있는데 특별히 잘 챙긴다. 철이 없이 생리도 모르는 여동생을 위해 친히 입고 있던 자기 바지를 빨아 패드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어느 날 그 가정에 아사드라는 자가 찾아온다. 집주인이다. 집세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집세 대신 주인공의 여동생 사하르는 자신 아들의 신부로 삼고자 흥정하러 온 것이다. 불과 11살인 소녀를! 부모로서는 침대에 자게 해주고 먹고 살게 해준다는 제안을 거절 못하고 집세가 걱정되어 자기 딸을 집주인 가정에 팔아넘긴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주인공 자인은 여동생을 탈출 시키려고 하다가 들키고 기어이 여동생은 집주인 가정으로 시집하게 된다. 주인공은 부모를 원망하면서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가출한다.



여기서 그는 고생을 심하게 하게 된다. 큰 비밀 봉지에 라면 및 며칠 견딜만한 양식을 싸들고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 스파이더맨 복장을 한 할아버지를 기억하면서 그 사람을 찾으러 나선다. 그 할아버지는 큰 놀이동산에서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갔다가 그곳에서 청소하고 식당에서 일하는 한 흑인 여자(라힐)에 눈에 띄게 된다. 그녀는 불법 체류자 신세다 게다가 그녀는 몰래 갓난아이를 직장까지 숨기도 데리고 와서 화장실에서 젖을 먹인다. 그녀의 아기의 아버지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다가 임신하는 바람에 나오게 되었다. 아기 아버지는 임신만 시키고 일체 모른척한다.



그녀에게는 집에 한 살 먹은 아이가 있다. 그녀는 주인공을 만나고 난 뒤, 자기 집에 데려가서 한 살짜리 아이를 돌보는 조건으로 같이 생활하게 된다. 그 한 살짜리 아이 이름은 ‘요나스’이다. 기저귀도 갈고 때 맞춰 우유도 먹이고,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창문 너머 옆집에 TV에서 만화영화가 나오니 창문에 거울을 맞춰 조정하여 아이도 만화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기의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불법체류자로 체포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에디오피아인, 후세드인, 필리핀인 등등 세계의 온갖 불법 노동자들이 다 있다.



그동안 그 여자는 신분증을 돈을 주고 가짜로 만들어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조직이 발각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졸지에 집에 한 살짜리 아이와 함께 남아 있는 있던 주인공은 그 아이의 유일한 보호자가 된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기 엄마대신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한다. 집에 있는 냄비를 씻어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물탱크도 내다 판다. 시장 상인들은 그 아이가 주인공의 동생이 아니라고 하지만, 주인공은 거짓말하기를, 엄마가 임산하면서 커피를 너무 마셔서 아이가 당분간 검다고 말하면서 둘러댄다.



아이와 함께 움직여야 하기에 이웃집 아이가 갖고 타고 노는 보드를 강제로 뺏어, 거기에 큰 냄비를 묶어 얹고 그 안에 아이를 담고서 보드 옆에는 주렁주렁 시장에 내다 팔 그릇을 매달았다. 그리고 시장 거리에 나가 장사를 한다. 아이가 방해될 때는 아이의 발목에 밧줄을 매달아 놓기도 한다.



시장에는 그 아기 엄마를 평소에 알고 있으면 은밀하게 이민을 권유한 상인(야세르)이 있었다. 그 남자는 주인공에서, 힘들게 키운다고 고생하지 말고 여자의 한 살짜리 아이를 자기에게 넘기면 주인공을 스웨덴으로 가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마다하고 힘들게 아이를 키운다. 아이에게 먹을 것이 떨어지니 냉장고에 있는 각얼음에다 설탕을 발라서 그것으로 아기에게 빨리게 했다. 시장 바닥에 종일토록 물건 팔기 위해 돌아다니니 남새가 나서 세차장에서 씻긴다. 주인공은 거짓말을 해서 약국에서 마약성분의 약을 구입했다가 바닷물을 페트병에 담아 섞어 마약류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팔아서 돈을 모은다. 아이를 넘겨주는 대신 500달러를 벌어 스웨덴으로 이민가기 위해서이다.



푸드 뱅크에 가서 온갖 거짓말을 대면서 아이를 먹이려고 애써보지만 결국 한계를 느낀 주인공은 아이를 그 상인에게 넘기고 자신은 집으로 돌아온다. 전에처럼 자기 집에서 살기 위함이 아니다. 이민 갈 때 베이루트항 세관을 통과하는데 필요한 서류될 만한 것을 소지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수상하다. 시집간 여동생이 해산하다가 죽은 것이다. 병원의 문턱도 넘을 수 없다. 그 지역 사람인 것을 증명해 줄 아무런 서류가 없어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주인공은 이 모든 사단이 어린 자기 여동생을 탐을 낸 집주인에 있다고 여기고 식칼을 들고 가서 그 여동생의 나이 많은 남편을 찔렀던 것이다. 죽이지 않았고 중상만 입혔다.



교도소에 갇힌 소년은 마침 ‘아동 학대’에 관련된 TV 생방송 중에 교도소에서 전화를 걸어 사연을 보낸 덕분에 정상 참작되어 풀려나오는데 같은 교도소에 있어 아이 엄마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경찰에 의해 체포된 불법 이민 집단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어두운 창고 한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은 그녀의 한 살짜리 아들을 다시 찾을 수가 있었다.



이제 주인공은 자기 부모를 고소하려 한다. 책임도 지지 못할 것을 왜 나를 낳았는지 묻는다. 부모는 법정에서 종교적으로 답변한다. “신은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더 주신다. 그래서 지금 이 엄마는 또 임신했단다. 애야”



‘가버나움 프로젝트’란 시리아 난민을 보호하는 유럽난민 구조 프로젝트다. 실제의 가정인 주인공의 가정은 이 ‘가버나움 프로젝트’에 일환으로 지금 노르웨이에 정착해서 살고, 불법체류자 흑인여자는 아이와 함께 케냐로 돌아갔다.



(평)


영화는 지금도 지구 한 구석에서 진행되고 있는 처참한 환경 속에 놓인 군상들의 치열한 비극적 삶을 파헤쳤다. 하루하루 살기 위해서 내다 팔 수 있는 것은 다 내다 파는 가운데 기어이 포기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들의 천성적인 본능인가? 자식 사랑과 집안 사랑이다.



문제는 영화 속에서 이 둘이 충돌이 된다는 점입니다. 어린 딸을 일찍 돈 받고 약간 여유 있는 자에게 헐 값에 팔아넘기는 부모는 과연 딸 자식의 장래를 위함인가 아니면 집안을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것인가?



자식이 낳는 일이 신이 허락한 조상과 집안에 대한 책임을 다 한다는 몸에 파고든 종교이념을 무슨 수로 지워버릴 수 있겠는가?



신과 가정과 개인의 행복, 이런 요소들이 상호 얽혀있다. 윤리, 도덕이란 이런 혈육적 본능에서 자생적으로 발산되는 정신에 비하면 배부를 때나 하는 소리다.



감독은 의문을 던진다. 이토록 자기 집안을 지키려는 자들을 ‘서류 없는 자’로 만든 것이 무엇인가? 현실 정치세계에서는 ‘서류 없는 자’는 곧 ‘존재하지 않는 자’이다.



(복음적 평)


난민이란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타의에 의해서 고향에서 무참하게 땅을 쩣겨나간 자들이다. 전쟁으로 인해 자기 땅에서 누릴 평화가 박탈당한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선택할 것은 “땅을 떠나서 죽든지” 아니면 “그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자결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이래도 죽도 저래도 죽는다.



남은 문제는 그 죽음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집요하게 자기 행위를 정당시하면서 살 권리를 외치고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야 한다.



시리아 난민들을 받아준 노르웨이나 스웨덴 국민들은 과연 시리아 난민들처럼 ‘신의 뜻이다’고 하면서 자기 집안만을 고려해서 줄기차게 자식을 낳아 길렀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신이 늘 우리 인간편이라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의 아들마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신에서는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메시야’ 개념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신은 인간혈육에 들어있는 근원적 악마의 욕망을 신으로 그려낸 신이다. 십자가 지신 하나님과 같이 살지 않는 모든 이들은 살아도 지옥이요 죽어도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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