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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7 11:46:56 조회 : 425         
2019년 여름수련회 요약-이상현 목사님 글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2019 여름 수련회 이사야서 요약 : 이 근호 목사, 08142019

1.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문서선지자)

문서선지자와 이적선지자의 차이점은 이적선지자는 가능성을 계속 제공하는 겁니다. ‘잘해봐라, 내가 도와 줄께. 이스라엘은 안 죽었다’ 이게 이적 선지자의 특징이죠. ‘애로사항 있으면 나에게 얘기해. 내가 도와줄께.’ 라는 거죠
문서선지자는 ‘도와줘도 소용없다.’ 불가능성, 불연속성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불가능하다. 이미 불가능한 것이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쉽게 얘기해서 이적선지자는 ‘너희 애로사항 얘기해봐라. 내가 도와줄게 잘 해봐라’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고, 문서선지자는 ‘해봤자~ 해줘봤자~ 소용없다’ 그래서 문서를 남기는데 그 문서를 말씀이라고 해요. ‘거봐, 문서를 봐라, 증명하잖아. 결국 망했잖아.’라는 내용이 문서로 남죠. 문서 안에는 ‘결국 너희는 무엇을 해도 망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거예요.

“소는 임자를 알건마는 너희는 모른다.” 모른다는 것은 잘해보라는 것이 아니고 –잘해보라는 것은 이적선지자이고- ‘너희는 아무리 해도 모르게 되어 있다.무수한 제사를 드려도 안받는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묻어있다.’는 것이 문서선지자의 특징이예요.’ 씻는다고 씻어질 피가 아니거든요.

이사야가 문서선지자의 시발점이 예요. 예레미야, 에스겔 등등. 문서선지자의 특징은 한마디로 멸망, 한 글자로 끝. 이스라엘의 끝, 파탄입니다. 특히 예레미아는 심하거든요,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멸망을 말합니다. 다니엘, 호세아, 스가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끝났다, 시간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라는 원리를 해석하는 겁니다.


2. 공식

인간은 날아다니는 인간 언어를 가지고 자기 세계를 따로 구축하려고 합니다. 날아다니는 언어를 어휘 또는 단어라고 해도 되고요, 한 글자로 말이라고 하면 됩니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은 언어를 가지고 자기화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입술을 지지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니까.

인간은 그 말로써 스스로 자기 세계에 대해서 지키기에 들어가요. 자기 세계만 만들고 그냥 살면 문제가 안되는데 문제는 자기 세계를 지키기에 들어 가는 겁니다. ‘나는 화통한 사람이라 자기 세계를 안지켜’라고 아무리 변명을 해도 말씀으로 조금 쑤셔보면 주춤 물러가요. 또 쑤셔보면 더 물러가요. 그래도 더 쑤시면 와락 반발하죠.

선지자가 이렇게 계속 말을 하면 결국 선지자가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당하는 모습이 이사야 50장 6절 말씀처럼 “뺨을 맞고 수염이 뽑히는” 모습이 됩니다. 얼마나 수모와 수치를 당했으면, 자기 백성에게. 대충 쑤시면 이스라엘 백성이나 왕도 어지간히 지키겠는데 선지자가 눈치코치도 없이 계속 쑤시고 들어가니까 와락 ‘니가 한번 죽어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공식은 무엇이냐? (1+X)는 우리 것을 신에게 접합시키겠다, 접근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철학과 종교가 하나되고, 예술, 과학, 정치 경제를 네가지 심급이러고 하는데 진리를 추구하는 네가지 길이 있습니다. 종교로서의 절대, 예술로서의 절대, 과학으로의 절대, 정치로서의 절대로 나가는 거죠.

철학이나 종교로서의 절대는 자기가 신이 되는 거예요. 내가 신이 되고 신이 내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겁니다, 내 쪽에서 시발점이 되어서 그런 거예요.

정치 경제로써의 절대는 내 몸이 편한 것이 행복이라는 거예요. 내 몸이 편하려면 적들이 없어야 하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생각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겁니다. 정치적 분야에서는 그것이 절대인데, 연대라고 해요. 정치가 하는 일은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을 조화시키고 타협점을 얻어내어 하나의 조직이 하나의 생각을 갖는 거예요. 이게 정치가의 목적이에요. 경제에서는 자본이 그 역할을 하죠. 돈 이야기하면 누구나 귀가 열리잖아요.

예술은 ‘나’가 없어져도 좋으니까 절대 쾌감, 절대 음감, 절대 미각처럼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거죠. 셰프가 요리를 너무 잘하면 예술 이라고 하잖아요. 절대 미각, 절대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내 목숨을 버려도 후회가 없다는 거예요. 어떤 시인은 달 뜨면 아름다움을 위해서 물에 빠지잖아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위해서 자기 몸 하나 던지는 겁니다.

과학은 실용적인 거예요. 뭐든지 편리한 것이 행복이라고보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은 절대를 향해 나아가고 주님은 이미 (1-X) 분모로 확정이 되었어요.. 분자(1+x)는 확정이 안되고 계속 찾아가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1-X) 주님은 이미 아버지 뜻을 알아요. 아니까 버림받는 거예요. 버림 받는 것이 주님의 확정된 일에 일부분이 되는 겁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에서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에게 버림받는거예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는 것이 이미 확정된 아버지의 뜻이기에 주님께서는 미흡한게 없어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죠. 오히려 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더욱 드러내니까. 그래서 이 공식은 인간들이 아무리 까불고 뛰쳐봐야 예수님이 (1-X)로써 ,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도로써 일을 추진하시는 것을 나타내죠.

버림 받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더 도드러지게 드러내는 거죠, 버림 받는 것으로써. 왜냐하면 나까지것이 버림받아도 아버지의 뜻이 확정되기 때문에 즐거워 하는 거예요. 내가 고생해도 그것이 확정된 아버지의 일의 일부이기 떄문에 내가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거예요.

'1'은 절대, 모든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가 신인양 여기고 그 절대를 찾아가는 겁니다. ‘절대가 나답다. 절대 아름다움이 나답다.’고 하는거죠. ‘이상적인 국가가 내가 있을 곳이야’ 자꾸 이렇게 시건방지게 갈구하는 겁니다, 인간은. 이것이 공식입니다.


3. 보편적 정신병

자꾸 요만큼씩 남는 거예요. 미진한 것이 계속 있는거예요. 그걸 못견뎌 하는 거, 이것이 정신병이예요.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머리로는 아무리 ‘모자라면 어때’라고 해도 마음 속의 찝찝함은 어떻게 할거예요? 내가 따로 나의 완전함이 되지 않고서는 인간은 늘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완전함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면 악마가 또 미흡함을 제공한다고요. 이만하면 완전하다 싶지만 몇 분, 몇 시간도 가지 않아요. 미흡함이 또 생기잖아요. 돈 20억을 벌어도 또 미흡해요. 40억 앞에서는 부자도 아닌 거잖아요. 20억을 벌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20억을 버는 순간 새삼스레 드는 생각이 있는 거예요. 이걸 못 견뎌요. 이것이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보편적 정신병이예요.

이스라엘 전 국민이 보편적 정신병자잖아요. 왜냐하면 날아다니는 말을 가지고 구조를 찾다보니까 항상 미흡함이 있어요. 이것을 왕이 채워줘야 하는데 왕도 한 통속이고. 그래서 왕이 잘 사는 나라를 선망하는 거예요. 그래야 정신병이 좀 낫게 된다고 여기니까. 그러나 정신병은 그렇게 치료되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과 맞는 언어를 찾아서 내가 말을 할 때 치료가 되요.

이사야가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는데 아하스가 징조를 안 구하겠다고 해요. 그것은 말을 안하겠다는 뜻이에요. 이사야는 ‘말해라. 그래야 네가 요구하는 정체가 드러날 것이 아니냐’는 거죠. 말을 안 한다는 것은 현실과 자기 욕구 사이가 벌어져서 정신병세를 드러내는 거예요. 큰 나라에게는 빌빌거리고 작은 나라에게는 큰소리 치고. 백성들한테 큰 소리 쳐도 큰 나라에게는 쪽도 못쓰죠. 양면성, 인격의 양면성입니다. 일관성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걸 알고 이사야가 징조를 구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징조를 안 구하죠. 그러니 이사야가 말하죠.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다”고. ‘네가 아는 언어로써 그 징조를 부합할 수 있는가 한번 보라’는 거예요. 안되죠.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아요? 인간의 날아다니는 언어는 실제와 일대일 대응이 되어 드러난 거예요. 나무가 있으니까 나무, 개가 있으니까 개.

그런데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은 뭡니까? 그런 것은 과거에 어떤 사례도 없죠. 이것은 언어가 없는거예요. 말의 세계에 말씀이 없는 거예요. 말의 세계에 없는 것이 말씀에 있는 거예요. 인간을 완전히 전부 다 정신병자 만들어 버렸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오히려 이사야가 이상하다고 덤벼들겠죠.

이사야가 아하스의 한계를 지적한 거예요. 말은 자기 세계관을 이룹니다. 왕은 기존에 자기가 아는 말, 자기 세계관에 머무르겠다는 거예요.징조를 구하면 왕이 자기 미흡함을 드러내는 게 되잖아요. 자기의 미흡함을 드러내기 싦어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왕에게 이사야는 그렇다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다’는 징조를 설명해 보라는 거예요. 처녀가 잉태한 것을 왕의 세계에 집어 넣어 버리죠. 말로 표현을 못하죠. 이것은 고발입니다. 심판이예요.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이 새로 왔을 때 나의 세계에 편입이 안되잖아요. 이것은 나를 공격하는 공격용이예요.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안되요. 십자가는 공격용으로 받아들여야 되요, 언제나. 그래야 성도입니다. 십자가가 날마다 내 죄를 까발려야 되지 십자가를 안다고 하게 되면 안되요. 그것은 이미 편입되었어요. 내가 다루는 내 세계 안에, 내가 주물럭주물럭하는 연약한 대상에 불과하게 되어요. 십자가가.

예수님을 우리가 몰라야 해요. 그래야 우리가 예수 밑에 복종이 되요. ‘십자가를 아십니까?’를 요새 버전으로 하면 “우리는 불신자가 될 때 구원받는다’예요. 모든 인간은 신자예요, 자기 자신을 믿잖아요. 자기가 믿을 만 한 것을 골라서 믿죠. 신자 아닌 사람이 없잖아요.그러니까 우리가 불신자 되야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무신자가 되어야죠, 무신론자가 아니라. 신이 없는 사람이 되어 야죠. 그러니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이 되는 거예요.


4. 관찰자

아래에서 올라가는 관찰과 위에서 내려오는 관찰이 다르죠.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은 어두움에서 나왔기 때문에 어떤 평가를 해도 어두움이고 위에서 내려 올 때는 어두움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죠. 이사야 강의를 하면서 내가 은혜 받은 대목은 이사야서가 아니라 인용했던 요한복음 1장 12, 13절이예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꼐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말씀을 전에도 알죠. 아는데 강의하는 내가 이 말씀에서 큰 은혜를 받은 거예요. “하나님께로 난 자” 야~ 이거는 참~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이예요. “처녀가 아이를 낳은”거예요. 인간의 방법은 합궁 아닙니까? 남녀가. 그런 식으로는 신자가 안되는 거예요. “처녀가 아이를 낳아”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예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이것을 이사야서에서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내가 자식이 많다(사54:1)”고 해요. 이것은 정말 표현이 어리석고 모순되죠.

제가 지금 성경에 없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요상하게 몰고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풀어야 되지 않습니까? “잉태치 못한,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풀어야 된다 이 말이죠.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말씀을 ‘그냥 넘어가자’ 하면 안된다 말이죠.

천국에 가려면 우리가 넘을 수 없는 그것을 넘어서야 하는데 ‘넘을 수 없다’는 말과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 모순 아닙니까? 그러면 이미 넘어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넘을 수 없는 일이예요. 예를 들면 우리가 매일 이를 닦잖아요. 그러다 팔을 부러져 깁스를 하면 이를 못 닦죠. 우리는 깁스를 비정상으로 보고 팔이 멀쩡한 것을 정상으로 보는데 그래서 안되는 거예요. 이게 바뀌어져야 되는 거예요. 아파야 되는데 주의 힘으로 멀쩡한 거예요, 지금 우리가.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게 되죠. 그러니 불신자가 되야 하고 무신자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 주님이 보이니까.

관찰자라는 것은 위애서보는 것과 밑에서 시작하는 것이 사맛디 아니할새, 맞지 않는 거예요.


5. 거푸집

앗수르라는 거푸집일 떄는 육적인 모든 것을 강탈 당하고 바벨론이라는 거집푸이 되어버리면 이스라엘이 육적이 아니라 아예 영적으로, 근원적으로 삼킴 받는 쪽과 한 패가 되어 버려요. 바벨론 짐승쪽과 한 패가 된 거예요. 바벨론이 어디서 나왔다? 바다에서 올라 왔거든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땅을 개간하잖아요. 마치 인간이 땅을 정복한 것처럼 착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땅의 저주에, 땅의 변동사항에 인간은 맥을 못춥니다. 인간은 땅에게 지배 받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육적이예요. 영적으로 하려면 땅이 와서는 안되고 바다가 와서 땅을 덮쳐야 해요. 바다에 있는 영적인 무엇이 땅의 통치자가 될 떄 비로서 그 땅에 있는 인간은 육이 아니라 영적으로 문제 있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바다는 마귀의 격납고, 장소이죠. 땅과 바다가 대비되니까. 옛날에는 땅에 하나님이 계셨는데 이것을 바다에게 허락했다는 것은, 너희의 영적인 본색이 바다에서 하나님의 허락 없으면 못 올라오는, 바다에 꼼짝 못하게 가두어 놓은 짐승과 진배 없다, 똑 같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당하죠. 이것이 풀려야 다니엘서가 풀리는 겁니다.

두 개의 거푸집해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다루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다루면 무엇이 풀리냐면, 육적으로 바벨론 갔다가”70년”만에돌아온 사람들 있죠, 그 사람들은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살해했기 떄문에. 유대 땅에서. 그런데 “70 이레”만에 돌아온 사람들은, “70년”이 아니라, 이미 묵시의 세계에 비행기 타고영적 하늘로 올라 간 사람들이예요,

예레미야는” 70년”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다니엘은 “70이레”라고 했다고요. 이미 바벨론 느브갓네살이 짐승이기 때문에. 바벨론 짐승 ONE이죠, 메데 바사 짐승 TWO죠, 헬라 마케도니아 짐승 THREE죠, 짐승 FOUR가 뭡니까? 로마죠. 이것이 다니엘에 예언되어 있잖아요. 흔히 짐승이라는 것은 6일째 만드신 땅에 기어 다니는 거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서의 짐승은 그게 아니죠. 땅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땅을 지배하는 새로운 정복자. 흉칙하죠.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육적으로 문제가 있어 버리면 개선의 여지가 있어 버려요. 엘리야, 엘리사처럼. 나무 던지면 도끼가 물에 떠오르잖아요, 그러면 도끼 건져서 쓰면 되고, 과부집에 참기름 생기면 참기름 팔아서 생활비 하면 되거든요.이것은 육적이예요, 영적이 아니고. 그러나 짐승이 등장하고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 왔다고 하면 욱적인 역사를 더 진전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남은 자, 바벨론에 포로 잡혔다 남은 자들, 그 이스라엘은 결국 지옥 가게 되어 있어요.


6. 예외와 비전체

상당히 어려워요. 예외라 하는 것은 남성형인데 이세상은 남성의 세계예요, 범죄하고 난 뒤에 여자는 남성을 사모하니까. 이것은 여자가 아니고 마이너스 남성이라고 보면 되요. 왜냐하면 여자가 어떻게 처신하고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여자 독자적으로 갖는 생각이 아니고, 남성들이 갖고 있는 생각의 부속품으로 복속된 남성의 세계의 일부로써의 여성이예요. 그러니까 남성의 세계죠.

남성의 세계에서 남성은 전체를 조망하고 바라볼 수 있는 예외의 자리를 따로 만들어 놓고 거기서 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공공모임에서 국회의원 같은 사람이 연설을 하면 앞자리에 안 앉고 저 뒤에나 이층에서 앉지도 않고 서서 보죠. 이것은 뭐냐하면 ‘나는 너에게 복속되기 싫다’는 거예요. 더 멀찌기에서 ‘나는 관망하겠다.’ 또는 ‘나는 너뿐 아니라 전체를 보겠다.’는 거예요. 예외의 자리를 만드는 겁니다. ‘나는 국회의원이나 장의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너만큼 잘났어’라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예외의 자리. 허세죠, 허세. 누구나 다 있죠. 특히 남자들은 다 있죠. 앞뒤 다 살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비전체는 여성적이예요. 동일한데 동일하지 않는 낯설음, 이질적이예요. 난입하는거죠. 그러니까 다른 전체가 얼마나 개무시하겠어요. ‘이 목수의 아들이 어디서 까불어’ 이리 되는 거예요. 이질적으로 보지 않고 동질성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연약한 여성의 족보가 굉장히 중요해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할 때에 수많은 민족이 나온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에게서 믾은 민족이 나올게 딱히 없지요. 이스마엘 정도? 이삭이야 나중에 이스라엘 되니까. 그외에 무슨 나라가 있어요? 없잖아요. 그런데 여러 나라가 나온다고 하지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담과 고모라에서 나올 때 소알에 있기 무서워서 동굴에 피신했을 때 두 딸이 아버지를 술을 먹이고 일종의 겁탈을 한거죠. 거기서 나온 것이 모압과 암몬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없었으면 생겨나지 않을 민족들. 그런 민족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또 아브라함이 첩을 얻었어요. 이스마엘에게서도 많은 민족들이 나올 수 있고. 그래서 이것은 미미하고 얼핏 보면 다른 전체하고 색깔이 똑 같은데 완전히 전체를 뒤엎어 버리는 거예요.

예외는 시건방진 것이고 비전체는 굉장히 낮아지고 버림받고 겸손한데 오히려 전체를 전복, 뒤엎어 버리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1+x)를 지향할 때 주님 혼자만 (1-X)예요. 아버지에게 버림 받는 거예요. 지옥까지 갔어요. 음부까지 내려가서 사흘만에 부활하죠. 이것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만 하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비전체가 되고 다른 사람은 비전체가 안돼요.

그 비전체의 아이디어 중 하나가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죠, 처녀가. 상상도 못하죠. 모든 전체는 남자와 여자가 합궁하여 아이를 낳는 거예요. 이게 전체예요. 그런데 남편없이 여자가 혼자 자식을 낳았다.햐~ 이것 참~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보고 있지만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주여, 이게 진정 현실이란 말입니까?!’라는 감탄이 절로 나요. 그 비전체를 놓쳐 버리면 현실, 현실을 꿸 수가 없죠. 기껏 꿴다는 것이 자기가 높은 곳에 있는 예외의 자리에 떡 앉아 가지고 –인간 각자가 다 그래요- 삐닥하니 정치가 어떠니 현정권이 어떠니 하죠. 그러다 ‘웍’ 하면 ‘엄마야 살려 주세요’ 하면서. 이것이 예외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라는 것이 비전체예요. 원래 채찍에 맞을 때는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지가 맞을 짓을 해서 하나님께 매 맞는다’고 해요. 야~ 이걸 정말 누가 믿겠어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매 맞는다”는 것을 어느 누가~ 성령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믿겠어요~ 인간이 자기 인생을 두고 맞을 짓을 해서 맞고 있다고 자인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없잖아요.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 했다고 으시되죠. 그런데 주님은 거꾸로 간다 말이죠. (1-X)로. 이제 공식이 점점 화실해지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 비전체가 꽂힌 사람, 눈에 들어온 사람은 새로운 창조가 되는 겁니다.


7. 과정으로서의 메시야 (과정 속의 메시야)

아까 말했어요.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지옥 갈 사람들이라는 것을. 남은 자들은 ‘우리의 죄는다 갚았으니까 우리는 떳떳하다’고 느끼는 남은 자 의식을 갖고 있어요. 하나님은 평소에 우리가 주님은 생각지 않고 나만 생각한다는 것을 과정을 통해서 쫙 보여 주죠. 예를 들어 화투 48장을 모아서 세우면 조각처럼 되잖아요. 그걸 밀어버리면 3월, 5월… 쫙 펼쳐 지겠죠. 그걸 주목해요. 그 변화 과정! 자기 구원만 챙기는 인간이 예수님만 감사하는 인간으로으로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 추이, 그 변화 과정을 쭉 살피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22장에 두 신하를 거론해요. 셉나와 엘리아김. 국고를 맡은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 묘자리를 화려하게 만든 셉나를 쫓아 버리시고 엘리야김을 세우시죠. 그는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메시야처럼 하는데 그 사람도 삭은 못처럼 툭 떨어져 버리죠.어떤 인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시죠. 그 불가능이 예수님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요. 고난 받는 과정을 통해서. 메시야는 덥썩 믿을 생각하지 마라. 예수님이 가신 그 과정을 믿어야 되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성질 급하게 그것만 따먹으려 하면 선악과 따먹은 것과 똑 같이 돼요. 그 과정을 보여 주는 거예요.

“선악과 띠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단순하게 하나의 명제로써만 주어졌는데 이 명제의 과정은 성경 전체예요. 선악과 따먹으면 왜 죽는다고 했을까? 이 이유를 성경 전체를 통해서 차근차근 풀어 내는거죠. 초반에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명제만 있으니까 이유를 모르죠. 그런데 나중에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들의 행세를 보니까 “정녕 죽는’ 이유가 죽 나오는 겁니다. 뭐냐하면 율법의 기능이 사람을 죽이는 기능이예요. 그 율법의 주인공은 누구냐? 예수님이죠. 악마의 사주를 받고 인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공격했기 때문에 이것을 압축시키면, 초반의 언어를 사용해서 대처하면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가 되는거죠.


8. 한 아기

한 아기의 특징은 기존의 왕, 혈통적인 왕을 무시한다는 거죠. 한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열심을 내시는 거죠. 하나님이 열심을 낸다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채워 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열심이라는 목표를 차버리는 겁니다. 우리의 열심의 이유와 하나님의 열심의 이유가 다르다는 겁니다. 한 아기에서의 열심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는 거예요. 기존의 이스라엘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는 거예요.


9. 이미지 (말씀의 성취)

첫번쨰 낙원 이미지는 사자가 풀을 먹잖아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고기를 먹으라고 하지 않고 풀을 먹으라고 하죠. 이것은 죄 짓기 이전의 낙원 상태 이미지를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어 나가시는 겁니다, 주님 오시고 난 이후에. 왜 이미지냐? 사자가 풀 뜯어 먹는 천국 같으면 우리가 만들어 내죠~ 유전자 조작해서 순한 사자 만들면 되잖아요. 이미지라니까요~ 과거의 것을, 과거의 원리를 하나님은 포기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낙원 이미지든지 노아 홍수 이미지라든지…

노아 홍수 이미지는 노아가 또라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저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 가면서 홍수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홍수가 올 거라는 것을 배제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마지막 심판 생각없이 사는 거예요. 종말을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그 다음에 땅의 율법 이미지. 할례 이미지. 땅이 할례를 받아야 되는데 할례를 받으면 사흘이라는 term간격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히스기야도 간격을 가졌고 예수님 십자가도, 그리고 호세아 6장에도 “3일째에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하죠. Term 간격이 았어야 세속이 거룩으로 변하는 것을 뵤여 줄 수 있어요. 변화의 추이를.

그리고 여러가지 나오는 악마 이미지, 지옥, 소돔과 고모라 이미지, 특히 출애굽 이미지는 새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새노래를 불러요.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유리 바다에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죠. 미리암이 선창해서 출애굽 때 노래를 불렀듯이. 예를 들면 나훈아의 잡초를 나훈아의 노래지만 우리가 부를 수 있잖아요. 그렇게 모세의 노래지만 우리가 반복해서 불러 가는 거예요, 새노래로. 그 이미지가 이사야를 통해서 쭉 보여 주는 거예요. ‘나는 과거의 약속을 포기한 적이 없다. 나는 완성시킨다.’ 고 쭉 가는 겁니다. 민수기 이미지는 전쟁하는기계, 그리고 천지창조 이미지, 이사야 45장에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는” 숨어계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요.

이사야서 전체 내용은 한마디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비전체를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서 선지자예요. ‘너희가 백날 해도 말씀대로 못해 !’ 왜? 깨닫지 못해야 하니까! 왜 깨닫지 못하냐면 “한 아기”로 말미암아 새 이스라엘을 만들 참이니까! 기존의 이스라엘은 좀 죽어 달라는 거예요. 그냥 죽으면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을 죽였다는 것을,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미리 예언함으로써 보여 주는 겁니다. 이야샤갸.

어느 누구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아니면 성도 아니고 “잉태치 못한 자”로부터 나지 않으면 성도 아닌 거예요. 천국 못갑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는 거죠. 처음에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 때쯤 되면 이사야가 활짝 웃으면서 말하게 되겠죠. 망하게 된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말하겠죠.

시온의 중복성, 땅의 시온이 있고 하늘의 시온이 있고. 땅의 시온일 떄는 하늘의 시온이 감춰질 수 있어요. 왜? 땅의 시온은 육적이고 하늘의 시온은 영적이기 때문에. 나중에 영적 시온이 드러날 때는, 짐승이 이 세상 권력으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낼 때예요. 짐승이 영적이거든요, 그러면 이 쪽도 영적인 시온이 되죠.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 있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해명이 되어야 하고 설명이 되어져야 해요. 이렇게 하면 흥미롭다가 아니라 실제로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누가 설명을 해줘야 한다니까요, 실제로 “잉태치 못한 자의 자녀가 많다”는 것에 대해서. 괜한 소리하고 있는게 아니예요, 지금. 우리가 헛바람 잡고 있는게 아니예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안하더라도 해야 할 것은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봐야되죠.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자기 형편을 생각할 것이 아니예요.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것 앞에 나의 형편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져 버려서 시답지 않은 것, 시시한 것이 되죠.

흔히 ‘아이고 주님이 알아서 하실텐데 내가 뭐 할라고 나서냐~’라고들 하는데 사람이 놀게 되는 것은 악마의 활동을 무시하게 될 때예요. 악마의 존재, 활동을 지금 생각 안하고 있는 거예요. 욥은 악마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실은 아무 일도 안한 사람이에요. 그렇죠? 악마가 들쑤셔 놓아야 비로소 욥이 신자의 모습으로 드러나요. 버티다 버티다 원망을 늘어 놓음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겁니다. 헛되다는 것이 너무 말해서 상투적인데 다른 말로 고치면 시시하고 시시하니 모든 것이 시시하다는 거예요. 이 말이 맞아요. 심각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심각할 일이 없다. 왜냐하면 따져보면 다 허무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거예요~

이사야 전체가 이미지로 꽉 차 있죠. 이스라앨은 왜 멸망해야하는가?, 그리고 멸망이 없으면 왜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을 못하는가? “한 아기”, 처녀에게서 난 그 아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재정립하겠다는 그 이미지가 이사야서에 있어요.

인생은 하나의 게임이거든요. 사람들이 전부 다 게임을 하고 있어요, 승자와 패자 사이에서 자기가 즐기고 있어요. 승자가 되고 싶고 패자가 되기 싫어하는. ‘누가 누가 잘 하나’ 계속 게임하고 있어요. 게임하다가 한 평생 다 보내는 거예요. 결혼도 게임이고. 누가 숭자고 누가 패자냐는. 서로 마음이 맞을 때는 게임이 사라져요. 서로 못낫기 때문에 ‘나’가 이기는 게임을 안벌리게 되요. 그런데 정이 떨어지잖아요~ 사랑이고 정이고 다 떨어지면 남는 게 게임 밖에 없다니까요. ‘내가 니한테 질 줄 아느냐~’ 이런 식 이에요. 그러다가 뺴앗기면 침 탁 뱉어버리죠,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어느새 게임이 되고 말아요. 그걸 일소에 붙이는 말이 뭐냐하면 ‘시시하고 시시하고 시시하고 시시하니 모든 것이 시시하다’예요. 모든 것이 심각하지 않은, 시덥지 않은 시시한 것들이예요.

바둑을 두게 되면 끝나고 돌 치워버리면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게 뭐라고, 몇 시간씩 앉아서 바둑 두는 사람들 본 적 있지요. 장기도 그렇고, 특히 도박은 아주 심하고요. 마약을 하는 사람의 가장 잘못된 오류는, 마약 하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시시하댜는 것을 마약하는 사람이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뭔가 괜찮은 짜릿한 게 있을 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살도 마찬가지고.

자살도 게임이에요, 오락이고. ‘에이, 살기 싫은데 한번 죽어 볼까’ 김성수는 한평생 오락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을 이용해 가지고. 예수 복음 이야기하면서 자기 오락했어요., 자기 오락. 자기 놀이가 되고 말았어요, 복음이. 그래서 시시하게 될까바 자기가 겁을 집어먹고 완전하게 되지 못한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자살한 거예요. 아까 완전하게 되지 못한다는 것은 정신병이라고 했죠. 자기가 완전해야 승리자가 되고 게임에 이긴다고 보는 거예요. 그 승부욕 때문에 죽은 거예요, 승부욕 때문에. ‘내가 내 마음에 안든다’ 때문에 자살한 거예요. 순전히 자기 중심의 게임판을 벌린 거예요.

아가서 할 떄는 자유를 놀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목적이나 실적에억메이지 않는 놀이이고, 세상의 놀이라는 것은 자기가 목적이 있어요. 자기가 승리자가 되는 거예요. 지기 싫어 하는 거예요. 만약에 돈 뺴앗겼잖아요, 그러면 빼앗기면 되는데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퉷!’ 이런 거 있잖아요. 기어이 안 지려고 하는 거. ‘에이고 십리를 가다가 발병 나 버려라’ 이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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