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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1 15:07:38 조회 : 75         
Cross And Resurrection 십자가와 부활 이름 : 함숙경(IP:117.111.173.100)
title : Cross And Resurrection 십자가와 부활
preacher : pastor Lee Geunho
text : Philippians 3 : 10-12
date : July 26, 2020

10. I want to know Christ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the fellowship of sharing in his sufferings,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11.and so, somehow, to attain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12.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all this, or have already been made perfect, but I press on to take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SUMMARY

In order to understand Jesus' death properly, we must accept that all elements of man are related to Jesus' death without exception. Just as the water in the sink is directed to a drain, all human claims and activities are directed to a drain called death. This means that all human activities and thoughts are unclean and sinful in the eyes of God without exception, and this has driven Jesus to death. 예수님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모든 요소가 하나도 남김없이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싱크대의 구정물이 한 배수구로 쏠리듯 인간의 모든 주장과 내세우는 모든 활동은 죽음이라는 배수구를 향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활동과 생각은 예외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하고 죄악된 것이며 이것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의미이다.

Despite these circumstances, it is an unacceptable mistake for humans to compare themselves with each other and to consider themselves more righteous and cleaner than others. However, human beings do not stop trying to use Jesus, even considering Jesus as a means to support the justification of their own actions and righteousness. Such a person tries to pretend to be “justified” by thinking that at least he or she cannot be the one who leads to “death due to sin”. 이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서로를 비교하면서 자신을 타인보다 더 의롭고 더 깨끗하게 여기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착오이다. 그러나 인간은 예수님마저도 자신의 행위의 정당함과 자신의 옳음을 지지해줄 수단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적어도 자신만은 ‘죄 값으로 사망’에 이르는 사람은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주제넘은 ‘의인되기’시도를 하는 것이다.

On the other hand, the apostle Paul wants to live a life as a sign of Jesus' death and join Jesus' death through his body in every situation that unfolds to him. Jesus' death is a lifeboat sent by God to find his people in the sea of the curse of death. 반면에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전개되는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 몸을 통해 보여주는 예수님의 죽음의 징후로서의 삶을 살고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하는 인생이고 싶어 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이라는 저주의 바다에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명보트이다.

Signs are not one-time in their nature, but they are repeated from time to time. In the life of a saint, this lifeboat often appears and disappears, and the saint is often held by the hand held out of the boat. That's what the apostle Paul means: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all this" So the saints live a life that expresses what has been captured by the Lord, namely, his death. 징후란 그 성격상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수시로 반복되는 것이다. 성도의 인생에서 이 구명보트는 수시로 등장했다 사라지고, 성도는 수시로 그 보트에서 내밀어진 손에 의해 붙들린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라고 말하는 의미인 것이다. 이렇게 성도는 주님에 의해 붙잡힌바 된 것, 즉 주님의 죽음을 수시로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된다.

Therefore, as the apostle Paul revealed by the Holy Spirit, today's text tells us that Jesus did not die and resurrect to save humans, but that all things, including humans, exist to testify of Jesus' death and resurrection. .Therefore, the reason why the Lord still deals with the body of the apostle Paul is not because Paul's salvation is incomplete, but to show that Jesus' still activity through Paul's body. 따라서 사도 바울이 성령에 의해 계시 받은 대로 오늘 본문을 통해 알려주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도 바울의 몸을 여전히 다루시는 이유는 바울의 구원이 미완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여전한 활동을 바울의 몸을 통해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This emanates from the apostle into this confession. : "Now I rejoice in what was suffered for you, and I fill up in my flesh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for the sake of his body, which is the church (Col 1:24)." Through Jesus' dealings, his life rushes to the cross every day. In other words, the Lord makes Paul leave the world day after day, making him join the crucifixion of Jesus. This happens not only to the apostle but also to all the saints. 이것이 사도에게서 이러한 고백으로 발산된다.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예수님의 다루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은 날마다 십자가로 돌진한다. 즉 주님은 사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합류되게 하면서 날마다 세상을 떠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뿐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일반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Jesus' crucifixion is an event in which God was beaten to death by man. This means that we are the perpetrators of the murder. Then why did humans treat Jesus so harshly? That's because Jesus attacked humans with extremely uncomfortable and radical words to hear by saying, "There is no salvation for humans." If Jesus had not spoken, it would not have seemed much of a problem to the idea that human beings could enter the kingdom of God according to their own efforts. But the problem was that human beings claim they can "see” as Jesus said (John 9:41).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죽으신 사건이다. 이것은 그 살해사건의 가해자가 우리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예수님을 왜 그토록 모질게 대했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인간이 듣기에 심히 거북하고 과격한 말씀으로 인간을 공격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더라면 인간들의 안목으로는 자신들의 노력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별반 문제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인간들의 ‘본다’고 하는 것이 문제였다(요9:41).

The self-image and the worldview which were built with the thing visible, caused humans to be mistaken for being able to be saved. In other words, human beings were held in vain delusion that it is possible to be saved if they manage themselves well. Jesus exposed the emptiness and wickedness of these expectations of humans. This made those who were zealous for God for their own salvation unable to endure Jesus and they eventually killed God who came to his own land. 눈에 보이는 것으로 구축한 자아상과 세계관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구원받을 수 있는 자라고하는 착오를 유발시켰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하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헛된 망상에 붙들려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이런 기대의 허망함과 악함을 폭로시켰다. 이것은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 열심을 내었던 자들을 견딜 수 없게 했고 그들은 결국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을 죽였다.

But what is surprising is that God has made the place of Jesus, rejected and killed by man, the only way to heaven. Humans pushed Jesus to the spot of death because they have regarded themselves as righteous managers of their own lives, mistaking the "idol" God they have served as true God. To those who are proud of themselves as " righteous managers," Jesus praised "the unjust manager(Luke 16:8)", regarding their "righteousness" as unrighteousness and raising what they regarded as "unrighteousness" to the position of righteousness.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거부당하고 죽임을 당한 예수님의 그 자리를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밀어낸 이유는 그동안 자신들이 섬겨온 ‘우상’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오해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기 인생의 관리자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의로운 청지기’로 자부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시며(눅16:8) 그들의 ‘의’를 불의로 바꾸고 그들이 ‘불의’로 여겼던 것을 의의 자리로 높여버렸던 것이다.

In today's text, the way the apostle shows God's salvation is to let the unrighteous "excretion" continue to pour out of the body of the saint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is, by the ability of the cross itself to act as a repetitive motion, the solid rock-like self is always dismantled. ; When the self yesterday comes to be admitted, it immediately turns into an idol called self. I can't deny myself.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성령을 통해서 성도의 육체에서 끊임없이 불의한 ‘배설물’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게 하시는 것이다. 즉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작용하는 십자가 자체의 능력에 의해 그 견고한 바위덩어리와 같은 자아가 늘 해체 당하게 되는 것이다. ; 어제의 ‘나’를 긍정하게 될 때 그것은 곧바로 ‘나’라고 하는 우상으로 전환된다. ‘나’는 ‘나’를 부정할 수 없다.

“The man who loves his life will lose it, while the man who hates his life in this world will keep it for eternal life(John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5)”

He who tries to defend himself can never hate noble 'his own self'. He will kill him in anger at the one who urges him to hate his own life. He who knows the cross is one who points himself as the culprit in the murder of Jesus on this very basis. Thus the cross becomes the only real thing and the center for him. But those who simply want to use Jesus' cross as a means of salvation become blind near the cross. 스스로를 사수하려는 자는 결코 그 고귀한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다. 도리어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고 촉구하는 분을 향해 격분하며 그분을 죽여 버릴 것이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바로 이 사실에 입각하여 예수님 살해사건에 자기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십자가가 유일한 실재가 되고 중심이 된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의 구원의 방편으로 삼으려는 자들은 십자가 근처에서 소경이 되고 만다.

It's like when all the Arameans who came down toward Elisha become blind. : "As the enemy came down toward him, Elisha prayed to the LORD, 'Strike these people with blindness.' So he struck them with blindness, as Elisha had asked(2Kings 6:18)." 이는 마치 엘리사에게 내려온 아람군대들이 모두 장님이 되는 경우와 같다.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왕하 6:18)”

This is because the cross is God's mystery, God's wisdom, in the deepest part of God. It is the cross that no one can know without the grace of God, the gift given by the Holy Spirit. To show the mystery and power of the cross, the apostle Paul is alive in the world while being given over to death every day by the Lord. 이것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던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주어지는 선물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십자가이다. 이와 같은 십자가의 비밀과 위력을 보여주도록 사도 바울은 주님에 의하여 날마다 죽음에 넘겨지면서 이 세상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He proclaims about the participation in the cross and resurrection of the Lord : "Who shall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Christ? Shall trouble or hardship or persecution or famine or nakedness or danger or sword? As it is written: 'For your sake we face death all day long; we are considered as sheep to be slaughtered.' No,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d us(Rom. 8:35-37)." 그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의 참여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한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The Holy Spirit makes this a confession of all the saints. 성령님은 이것이 모든 성도의 고백이 되게 하신다.
 이근호(IP:119.♡.87.190) 20-07-31 16:02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이라는 저주의 바다에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명보트이다.”
특수한 죽음 안에 들어온 자는 아담의 일반적 저주에서 벗어난다. 인생은 끝까지 살아봤자 어차피 죽음이다. 끝까지 갈 것도 없이 모든 것은 십자가로 다 밝혀졌다.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이 지옥의 저주에 그대로 빠져 있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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