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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6 12:18:28 조회 : 116         
생소함이 주는 위협 -송민선 성도님의 글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한 아이가 서울에서 살다가 4살쯤 되어서 원래 엄마 아빠가 있는 시골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시골집에 와서 자신의 엄마를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때마다 “아줌마가 아니고 엄마야”라고 친절히 가르쳐 주셨겠지만 아이는 새로 만난 진짜 엄마의 주변을 맴돌며 놀다가 가끔 와서 다시 아줌마라고 불렀고 그때마다 호칭을 바로 잡아주면 “아, 엄마구나...”라고 하며 확인하는 것을 얼마 동안 계속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자라며 ‘우리 엄마 맞지요?’라고 확인하는 습관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법을 터득하며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했다. 그렇게 부모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채로 부모의 모습을 밖에서 관찰하며 자랐다. 그리고 테두리 안에 있어서 부모를 관찰할 필요가 없기에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행동을 하는 형제들의 모습을 철없음으로 이미 판단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 이미 위험에 던져진 상태이기에 이건 위험하고 저건 안전하다는 판단이 무색한 걸 알든 모르든 지식보다 앞서는 본능에 이끌려 부귀가 주어지면 돈을 이용해서 방어하는 수완을 기를 것이고 누군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인생은 홀로 산다는 정신병을 담은 육체뿐이라면 관찰을 통해 위험을 피하는 쪽으로 자기방어막을 구축한다.

말씀이 말하는 주 안, 십자가 안, 그리스도 안이라는 용어를 듣고 돈이 없이도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 막을 상상한다는 것이 이상한 걸까. 어릴 적 꿈에서 귀신이나 괴물을 만날 때 주기도문을 막 외우면 투명한 막이 나를 감싸며 보호해주는 꿈을 꾸곤 했다. 커가면서 언어가 세련되지 긴 해도 마음 판이 바뀐 것이 아니니 본질은 같았다.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하나님과 나를 괴롭히고 죽이는 괴물, 마귀. 이 세상에 인간이라 불리는 존재로 태어난 이상 하나님 안에, 주 안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 박히며 이전에 내가 아는 하나님이 테두리 밖에서 관찰된 하나님이고 나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흔적이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성경은 유일한 한 사건을 위한 한 분으로 이끌어주고 증거 하신다는 말씀을 처음 듣는 것이 아닌데 동일한 말씀 앞에 생소한 마음이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 축적해온 기억이 해석을 내놓는다. 들어도 맨날 까먹으니까 머리가 안 좋으니까 그렇다고.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진다. 말씀이 생소한 것이 아니고 듣고 있는 마음이 낯설다고. 다시 내가 나에게 해석을 한다. 엉뚱한 생각 좀 하지 말고 현실적인 생각을 하라고.

영존하실 한 분을 드러내시려고 결국 멸망할 것을 창조하셨고(히브리서1:10~11)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타나게 하시는 진짜 주인공인 커튼 뒤에 그분을 만유의 주로 올리시기 위해 만물이 만들어진 것을 알게 하셨으니 우리의 역할은 분명해졌다. 멸망하기. 사라지기. 이걸 믿을 수만 있다면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정말 믿을 수만 있다면.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셨다는 시므온의 고백처럼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그렇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버티면 되는 줄 알았다.. 악바리처럼 꾹꾹 누르며 인내하면 되는 줄 알았다...에이씨.... 비타민 씨고 뭐고 안 해! 안 해! 이게 뭡니까. ‘진짜 우리 엄마예요?’라고 묻듯이 ‘진짜 주님 계신 거 맞아요?’를 토악질해야 할 사건이 화살처럼 날아온다. 바이킹 타듯 흔들흔들 속이 울렁거려 내리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면 ‘자~~서비스로 한 번 더 갑니다~’라는 직원의 멘트에 분개하듯이 나를 흔드는 원인을 향해 원망을 해 댄다.

홍해 바다 앞의 이스라엘의 모습이, 광야에서 분출된 이스라엘의 패역이, 구약 이스라엘의 본보기가 그리고 욥의 고백이 얼마나 눈물 날만큼 고마운지 모르겠다. ‘나는 저들과 다르지 아니하고...’ 잠잠할 수 없게 만드시고 결국 잠잠하게 만드시는 눈물 날만큼 고마운 주님 농락의 손길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다시는 패역한 옛사람의 모습을 1초도 머무르고 싶지 않은데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간 님처럼 구약을 둘둘 감아 놓으신 몸을 덩그러니 남겨두고 수시로 철수하신다. 떠난 뒤에만 알 수 있기에. 그리운 마음 안에 박아놓으신 1미터 표준 장치인 죄사함의 징표를.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마귀의 소리로 간주했던 아픈 기억을 애써 잊어버리려고 해도 이제 더이상 주님을 대적하는 짓 안 하고 싶어도 그 부끄러움을 능가하는 죄사함의 능력으로 임하셔서 이 몸을 마귀와 대척하시는 광야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말씀으로 공격하는 마귀를 말씀으로 제압하시던 것처럼 주님의 해석만 진리가 되는 세트장으로 사용하신다. 연출하고 철거하고 연출하고 철거하고가 반복되니 울렁거림은 당연하고 단편 극처럼 삶이 연결 안 되니 갈수록 내가 사는 이유가 희미해지고 주가 살아계시는 사실만 짙어진다.

주님이 물으신다. “네가 강도가 되어도 괜찮으냐?” 옛사람이 대답한다. “네, 무엇이 되어도 괜찮습니다” 그때 난데없이 쑤시고 들어온 낯선 소리가 대답한다. “이미 진짜 강도인데요. 이대로 쭉 정주행할까요? 아니면 다른 역할 할까요?...” 두부 잘리듯 옛사람과 새사람이 갈리는 상황은 선포된 복음 안에서 돌아오려는 자들과 이미 돌아온 자가 나뉘듯이 포착만 되고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프로젝트에 사용되는 피조물의 본분은 메소드 연기하며 자신을 주인공으로 착각하는 극사실주의 연기자가 아니고 원래 심어놓으신 대본대로 움직이는 역할자이다. 그리고 완성된 하나님의 작품을 보는 시청자는 인간들이 아니다. 창조세계의 무대 뒤에 숨겨두신 보시기에 심히 좋으시고 유일하게 기뻐하시는 주인공을 위해 필요한 피조물들을 만드시고 이 무대에서 사단의 정체를 발각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마치 자신을 버리듯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아담을 버리셨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흙덩어리 시체가 되어주어야 인간을 움직이는 진짜 세력의 속내를 낱낱이 드러낼 수 있고 그 강퍅한 마음에 예비 된 하나님 심판의 근거는 더욱 분명해진다. 창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이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붕괴시키며 스스로 버리시는 십자가이기에 십자가는 모든 것의 처음이고 모든 것의 끝이 되시는 만유의 주를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작품이다.

빈 들에서 모두 굶주렸을 때 아이 도시락이 여전히 있음으로 보이고 바늘귀가 여전히 들어갈 입구로 보이고 자신에게 여전히 구원받을 일말의 여지가 있다고 보일 때 그 앞에 주어를 다시 살펴야 한다. 어린아이 혼자 먹는 것이 아니고 5천 명이 넘는 자들이 먹어야 하고, 실이 아니고 약대가 들어갈 구멍이고, 의인이 아니고 강퍅으로 옷 입은 마귀가 받을 구원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천국을 위한 남은 가능성이 있을까.

5천 명을 아이 하나로, 낙타를 1미터짜리 실로, 마귀를 의인으로 바꾸는 것을 나의 의로움 정당함으로 할 수 있느냐고 물으실 때, 나는 여전히 강퍅하게 대답할 수 있는 육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혹시...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면...’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되 택함을 받은 자들은 적으니라(마 22:14)

‘저를 지옥 보내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주십니다’라는 낯선 소리는 내 것이 아닌 새로움 그 자체이고, 내가 그 새로움을 귀하게 여기기에 그것은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또 다른 악의 요소로 작용한다. 주께서 새로움을 버리는 새로움으로 일하시며 아무것도 나의 기억에 해석에 가두지 못하게 해주시기에 온전히 주의 긍휼의 손길만 바라볼 수 있게 하신다.

또한 기생 라합처럼 자기를 망하게 하는 자들을 숨겨주고 거짓말하는 행함, 아브라함처럼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는 명을 행하는 행함을 통해 ‘우리는 망해야 하는 자 맞습니다’라는 낯선 바탕에 종속되어 같이 흔들리고 머무르지 않게 하는 말씀의 능력이 고정된 주님의 행함만 느끼게 하신다. 허락하신 하루하루를 낡은 새로움이 아닌 생소한 새로움으로 쉬지 않고 일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근호(IP:119.♡.87.190) 20-11-06 12:21 
“육체뿐이라면 관찰을 통해 위험을 피하는 쪽으로 자기방어막을 구축한다.”
관찰이 문제다. 왜 수시로 자신을 관찰하느냐? 뭐가 그토록 걱정이 되어서 관찰하느냐?
독한 괴물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육을 지키는 것이 유일한 과제가 되도록 악마는 인간을 그렇게 길들여왔다.

사람들은 대꾸한다. “나 말고 지킬 게 최종 또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육과 영은 대화가 안 된다. 십자가 처형은 이 사이에서 예수님의 육이 터져버린 것이고 그 속에서 억울하고 거룩한 피(생명)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성도는 이것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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