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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13:32:57 조회 : 271         
[사라진 나라]-송민선 성도님의 글 이름 : 이근호(IP:220.89.58.107)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의 직분으로 전도서를 통해 전한 인간의 마지막, 본모습은 헛되고 허무함이었다. ‘내 인생이 이게 뭐야. 도대체 지금껏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았지?’라는 이익이냐 손해냐, 성공이냐 실패냐를 논하는 허무가 아니었다. 율법을 만난 육체가 선악적 지혜를 총동원해서 가보았던 끝자락에서, 세상에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솔로몬이 자신은 정말 몰랐기에 그래서 그가 한 것이 아닌 너무나 뚜렷한 흔적, 주께서 넣어두신 기름부음의 지혜로 말미암아 마음껏 휘둘린 그 결국을 다윗언약의 튜브가 되어 뱉어냈다.

전도서의 저자를 통해 알게 된 허무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감사함이 콩고물처럼 붙어있다. 인간의 지혜로는 허무와 감사를 연결시킬 수 없다. 사람의 지혜와 어울리지 않는 복음을 억지 감정으로 지식을 동원해 담으려고 하면, 어느 정도는 오기로 버티겠지만, 결국 구역질이 나면서 토해진다. 사람은 말씀을 꾸역꾸역 먹을 수는 있지만 말씀을 통해 생명을 잉태시키지는 못한다.

먹은 말씀이 여전히 목숨을 유지하는 음식처럼 목에 걸려 이물감을 유발하니 입을 통해 다시 나온다. 입으로 들어가 입으로 다시 나오는 것은 처음 것이 아니다. ‘나’라는 오물이 잔뜩 묻은 냄새 고약한 말로 변해있다. 강제로 난입해 목에 걸리지 않고 배로 들어가 버린 말씀이 속에서 잉태되면 나와 맞지 않기에 구역증이 나는 건 같은데 스스로 토해낼 수 없다. 마치 뱃속에 잉태된 태아가 내가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때가 차면 몸을 무너뜨리고 찢고 스스로 아래로 나오는 것과 같다.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반발작용이 속에서 본능적으로 일어나지만 말씀의 잉태는 구토 작용이 불가능하기에 헛구역질 같은 증상은 있으나 입 밖으로 보여지는 것은 없다. 몸속에서 자라는 말씀의 생명력은 내 목숨을 갉아먹고, 목숨의 실체가 실상은 죽음임을 드러내면서, 스스로 자라고 활동하고 그 활동성의 여파로 나는 후패하고 쇠한다. 이걸 고상한 표현으로 땡잡았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이신 허무의 최종이 십자가였고, 사람은 넘을 수 없는 허무를 유일하게 넘어가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너짐의 마땅함을 배우고 그분의 십자가로 감사할 수 있는, 기적이 흘러나오는 문을 만난다. 아는 것과 넘어가는 것이 별개인 것을 체험하며, 알고 있기에 구원의 소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그것이, 믿음을 가장한 나의 욕망임이 드러나면서, 믿음도 허물어진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십자가는 아버지를 믿는 그분의 육신의 버려짐이셨다. ‘내가 이렇게 죽고 아버지가 날 살리신다’라는 뜻도 의식도 예수님의 몸과 함께 버려지시는 완전한 죽음이셨다. 부르짖으심이 아버지와 짜고 치는 대사처럼 시편 22편의 말씀을 뱉어내신 것이 아니라, 정말 버려지시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절망으로 부르짖으셨다.

아버지의 보내신 성령께 온전히 맡겨진 예수님의 육신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속으로 감춰지고 사라지셨다. 인간 안에 잠복 된 죽음보다 더 무서운 버려짐의 절망속으로 대신 들어가 주신 예수님의 몸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마귀가 주입한 ‘나는 살아있다’라는 마약에 취한 인간이 이미 시체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너는 부르짖으라”(렘33:3)는 이 말씀이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베푸시는 긍휼이다. 왜냐 하면 사람은 결코 부르짖을 일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결코 하나님께서 주실 크고 비밀한 것을 위해 부르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아니고서야, 우리는 주님의 절망 속으로 나도 함께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르짖을 수 없다. 그래서 나에게 말하고 나에게 의지하고 나에게 희망을 걸고 부르짖는다.

그런 자아가 무너져갈 때, 다윗처럼 여호와에게 부르짖으며 납작이 엎드려 자비를 구할 인간들은 없다. 언약의 작용에 말려들어, 자신이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된 다윗의 복에 참여되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사람이기에, 대인배처럼 숙연히 겸허한 마음으로 상황을 받아들인다. 여전히 나에게 갇혀서 나에게 버림받지 못한 채 보이는 끝판왕의 모습은 ‘죽이시면 죽어야지. 그래도 마지막까지 나의 자존심은 찬란하게 화려하게 그리고 고상하게. 하나님 힘들게 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에 빌붙기도 송구해서 못하겠다. 그냥 조용히 죽어드려야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아실 거야’ 이것이 애굽왕 바로의 완악함이고 마지막 때에 드러날 인간의 본 모습이다.(계16:11)

역사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매우 숙연해지는 죽음을 보았다. 드라마 속 캐릭터는 여왕을 꿈꾸며 반란을 일으켰고, 마침내 패배를 직감한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로 독약을 마셨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모양새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의젓함을 유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싸울 수 있는 날엔 싸우면 되고, 싸울 수 없는 날엔 지키면 되고, 지킬 수 없는 날엔 후퇴하면 되고, 후퇴할 수 없는 날엔 항복하면 되고, 항복할 수 없는 날엔, 그 날 죽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오늘이 그 날이다. 나는 신국을 나보다 연모했고 그래서 갖고 싶었다. 타협은 없다. 너는 연모를 나눌 수 있더냐?’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이 대사에는 그저 사람의 날만 있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같은 대사는 ‘옥처럼 찬란히 부서지리라’였다. 반란세력을 진압하러 온 사람들까지도 신국을 향한 그녀의 명예롭고 깨끗 하려는 죽음 앞에 예의를 갖췄다. 그 현장에는 적군도 아군도 없었고 오직 사단의 속마음만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가장 하나님을 밀접하게 흉내 내는 것이 악마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교만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고 실체가 교만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벗지 못하고 내가 나를 이길 수 없는 것과 같다.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고 내가 상황을 통제하는 주인이 아닌, 분명 매여있지 않은데 어딘가에 갇혀 있음이 감지되면서, 비로소 비유 밖에서 해석하시는 분의 일이 작동되고 있음을 느낄 때, 알게 된다.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단의 전쟁만이 실재인 것을.

출렁이는 심판의 물결 위에 흘러가던 노아는 방주 안에서 룰루랄라 마음 편하게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외부적 심판에 둘러싸인 채 내부의 심판 또한 벌어져야 했기에, 부정한 사람과 부정한 짐승들을 정결한 짐승과 함께 방주 내부에 투입 시키셨다. 정결한 짐승이 대신 심판을 받는 그 희생만이 유일한 구원의 대상이 되도록, 하나님은 노아를 버리시고 노아 언약을 살리셨다. 이로써 모든 육체는 일차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단절되고 언약의 혜택 밖에 놓여야 한다. 언약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선택만 고스란히 담도록.

하나님의 계획에 말려든 욥 또한 사단의 치밀한 술수 덕분에 소유가 벗겨지고, 살과 뼈가 흘러내리는 고난으로 몰리면서도 하나님을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고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점점 속사정으로 집중하게 된다. (욥6:4) 자신이 이렇게 의로운 것을 스스로 알기에 욥은 결코 자신의 죄의 근본을 찾아갈 길이 없었다.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욥13:23)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 욥은 자신이 죄의 덩어리였고 하나님의 계획에 말려들어 있는 자체가 은혜인 것을 알고 재의 일부로 합류한다.

하림 집사님이 타인의 마을을 읽고 1강의 소감을 말해주었다. 악마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마음이 드러났을 때, 그 어마어마한 사태를 ‘무(無)’로 돌리고 싶은 마음, 그러나 한 번 있음은 없음으로 갈 수 없고, 다시 돌아가도 저주받을 운명을 벗겨내지 못한 채로 지옥이 확정된 것을 알았기에 마지막으로 죽기까지 항전할 수밖에 없었다.

마귀가 하나님 앞에 불의가 드러나기 이전으로 얼마나 돌아가고 싶었을지, 악마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마음 상태를 함께 이야기 나누었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사람 안에 자리 잡고 있기에, 사람들 안에 들끓고 있는 후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은 심정, 지금은 망가졌지만 이전에는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하는 그 착각의 본바탕, 그리고 여전히 인간의 마음에 도사리는 새로운 출발의 시도, 자체 정화의 욕망이 어떠한지에 대해 공유했다.

가장 악마에 가까이 있는 모습은 말씀 알고, 율법 알고, 십자가 알고, 그렇기에 자신의 더러움까지 알고 나서, 마침내 자기를 버리려는 마음을 품으면서, 그렇게 끝까지 자기를 포기할 수 없는 바로 그 모습에서 마귀를 본다.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몸을 만나지 못하면 부르짖음에 합류되지 못하기에 그저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 하면 선악과 이전의 무죄 상태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욕망에 매어, 자신을 완전하게 만드는 일에 더욱 급급하게 되는 것이다. 나만 보게 된다.

아버지께서 친히 완전케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십자가를 보내주셔도 사람들은 바라볼 능력이 없고, 그러니 그분의 다 이루심을 진실로 감사할 수 없다. 새로움을 위한 새 출발을 원하면서도 정작 복음이 발산하는 새로움에 분노로 발작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감금되어있다.

진짜 감사는 버려짐에서만 나온다. 버렸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고, 버려졌기에 감사할 내가 사라진 그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감사이다. 감사할 내가 없어진 상태로 감사만 남아있기에, 더불어 내가 감사해야 할 사람도 없고, 나에게 감사해야 할 사람도 성립되지 않고, 그 감사에 모든 존재가 빨려 들어간다.

십자가 증인들은 ‘뭐가 도대체 감사한가? 억지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밀어제치고 ‘죄사함이 빛나는 죄가 솔솔 나오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어?’, ‘감사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 것을 받아내시는 거야. 피조물은 아무것도 제 것이 없고 감사조차도 주님의 것이지’라는 고백들이 뱉어지는데, 그 입들이 놀랍다.

또 하나의 놀라운 고백은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는 사건이 벌어질 때, 첫째가 둘째를 향해 ‘네가 더 사랑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해. 너만 빛나야 해’라는 증상의 발현이다. 사랑은 나만 받아야 한다는 사람의 본질을 역행해서, 너만 사랑받으면 그걸로 내가 기쁘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때, 우리는 사람의 겉이 아닌 속에 있는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요나단은 자신이 마땅히 차기 왕이 될 왕자로 다윗을 그저 자신의 친구같은 부하로 삼으면 될 일인데, 요나단은 자신을 버리고 다윗이 왕이 됨이 마땅하다고 고백했다. 기름부음 받은 자와 기름부음이 당기는 자 사이에 흐르는 것은 도대체가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랑뿐이었다.

세례요한은 자신도 흥하는 중에 예수님의 흥함을 찬송하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쇠하는 중에 주님의 흥함을 기뻐했다. 너도 흥하고 나도 흥하는 현상,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라고 찰싹 붙어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현상은 거짓 복음이다.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흥하시는 분이 부각 되게 너도 쇠하고 나도 쇠하는 사건이 만들어지는 것이 복음의 증상이다.

그러니 너는 다윗이고 나는 사울이고, 너는 선한 자이고 나는 악한 자이고, 너는 성도이고 나는 불신자라고 하는 것이 ‘우리’ 안에서는 무의미가 된다. ‘우리의 죄가 고백 되니 예수님의 피만, 그분의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고 얼마나 감사해요. 그러니 당신도 죄를 고백해야 성도지요’라고 주님의 구조물인 건축자재가 바라거나 요청할 수 없다.

갈라짐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상처 입으신 한 분만 나타나려면 주어진 대립적 역할을 끝까지 고집하도록 움직여지게 되고, 그렇게 주께서 생성하신 십자가의 증거가 수집되고 나면 모든 것이 다시 셋팅된다. 그리고 그날의 일은 그날로 끝나면서 ‘너는 이런 사람이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고정이 아니라 흐름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서로를 보는 존재들이 아니고 우리들의 육체를 뚫고 나오는 낯선 몸을 보이는 자들이고, 정해진 역할 대로 말씀이 반드시 이끌어가는 강제성과 피동성만 안에서 출렁거리기에, 한쪽은 깨고, 다른 한쪽은 깨지는 그 틈에서 비집고 나오시는 어린양의 희생만으로 감사하고, 한 분의 지체들인 우리는 너도 죄인 나도 죄인으로 쇠하기를 즐거워하고, 예수그리스도 한 분의 흥하심으로 기뻐한다. 분내고 다투는 것도 연기가 끝나고 나면 그 순간으로 종료되고, 그 사건은 소급해서 서로의 연기력에 대한 뒷담거리로 맛있게 나누면 된다.

지금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복음서의 현장, 사도행전의 현장, 성경 말씀의 현장성을 통해서, 성경이 역사적 이야기이고 환상이고 미신이라는 편견을 불가능성의 칼이 잘라낸다. 편견을 만드는 선악적 사고가 삭제되고, 인간을 허무한 환상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말씀 홀로 생명성을 발휘하신다.

한 통로에서 흘러나온 복음을 듣고 무지개 빛깔처럼 다채롭게 죄를 표현해주는 입들이 한결같이 십자가만 자랑하고 있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악마가 하나님이 작정하신 심판을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우리도 자체 힘으로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프로젝트가 아들을 통해서 차질없이 진행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으신 예수님의 육신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려내신 예수님의 육신 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어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세계.

은혜를 덧입게 되면 ‘저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에서 ‘저에게’가 잘려나가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만 남는다. 그리고 이제는 그 내용을 담고 표현하는 ‘나’는 오직 주님의 자아일 뿐이고 그분만 일하신다. 이렇게 나는 날마다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리스도의 생명만 나타나도록.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근호(IP:220.♡.58.107) 23-08-31 13:35 
“나에게 말하고 나에게 의지하고 나에게 희망을 걸고 부르짖는다.”  말씀과 인격 사이에 갭gap이 있고 그 갭은 인위적으로 건너 갈 수 없다. 말씀은 인격이 될 수 있지만(예수님), 인격(인간들)은 말씀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주변 인격들을 결집해서 따로 하나가 되기로 한다.

국가 단위까지 몸집을 키운다. 국가를 인격화하는 것이다. “국가에게 말하고 국가에 의지하고 국가에게 희망을 건다” 하나님께서는 그 국가를 공격한다. 그 안에서 개별자도 같이 사라진다. 천국은 ‘알 수 없는 나라’다.  말씀을 완성하신 인격자의 나라이어서 말씀에 의해 자아(자기 이름)가 사라진 자만 들어가는 나라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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