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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12:32:12 조회 : 4276         
7-3 라이프니츠의 유신론 이름 : 관리자(IP:122.47.57.66)

 


(3) 라이프니츠의 유신론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와 같이 신적 관점에서 자연을 바라보지만 개체의 의미를 살리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단자를 먼저 만들었다고 한다. 물질보다 이것이 먼저라고 한다. 질료를 빚어서 개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개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그 규칙성부터 먼저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의 철학적 의미로 본다. 그리고 나서 질료를 만들어 그에 단자를 구현시켜 개체들을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플라톤의 경우, 형상의 세계에 데미우르고스가 따로 있고 데미우르고스가 형상을 본떠서 질료를 빚는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 전통에 속해 있는 라이프니츠의 경우, 형상은 신의 머리(오성) 속에 들어 있는 것이고 질료는 나중에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개라는 개체가 죽어서 해체되어도 그 아무개의 설계도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설계도의 규정성도 이미 아무개의 단자 안에 들어 있이다. 단지 변화란 그 접혀있던 규정성이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부동의 존재이다. 영원하고 자기 동일적인 존재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에 운동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지만 플라톤의 그늘을 전적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이란 일반적인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에게서는 개별적인 단자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개념화되어 있다. 개별적인 단자 하나하나가 합리적이고 가지적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를 초합리주의자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가 형상적인 것과 질료적인 것,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을 동시에 담고 있다면 라이프니츠의 사유에서는 원칙적으로 형상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에 전적으로 무게 중심이 실린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 종의 층위에 위치한다면 라이프니츠의 형상은 개체의 층위에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이런 논리를 펴는 근저에는 바로 그 자신이 발명한 '무한소 미분'이 깔려 있다. 라이프니츠에게 이 세계의 기본 특징은 다채롭다는 것이다. 다채롭다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사물들간의 질적 차이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당위적으로 다채로워야 하는 것은 세계가 풍요로우면 풍요로울수록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게 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성찰'이 출간된 이후 250년 동안 모든 철학자들은 실체하는 견지에서 실재를 바라보았다. 라이프니츠는 이 실체를 단자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단자란 '물리적 힘의 단위'를 가르킨다. 단자는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실재적인' 사물'이라는 점에서 '실체'다. 하지만 단지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나 데카르트의 물질적 존재처럼 물질적인 실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물질성은 훤원 불가능한 토대가 아니라 특정한 단자들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 속성이기 때문이다. 수소나 산소라는 특정한 분자들 간의 관계에서 액체의 성질이 비롯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자는 단순하며(즉 더 이상 쪼개질 수 없으며) 각각의 단자는 그것의 모든 미래 상태를 자체 안에 함축하고 있다. 단자는 전 우주의 거울이지만 (신은 우주를 거울처럼 비추는 단자들만을 현실화했다) 모든 실재를 그 자체 안에 미래 상태의 특성으로서 간직하고 있다. 단자에는 창문이 없다. 모든 단자들은 심리적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다른 것들보다 더 고도한 심리적 생명을 가진 것들도 있다. 이 단자들(혹은 지배적 단자를 증심으로 뭉친 단자들의 집합)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의식적 단자들의 집합은 자유를 얻기도 하는데 그게 바로 인간이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에서처럼 신은 이미 단자들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게 될지 알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단자를 정신적인 그 무엇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단자의 본질인 힘이 연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데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데카르트의 이분법을 수용했을 때 나오는 귀결이며 오히려 실재는 연속적이다. 그래서 물질도 연속적인 우주의 한 단계를 반영하고 있고 우리의 의식은 또 다른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 물질은 연장을 통해서 현상하고 있고, 정신은 '사유의 작용(의식)'으로 현상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은 현상태에서 각각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지는 상이한 '실체'들이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실재의 상이한 양상들이라는 점에서 상호 작용이 가능하다. 정신과 물질의 독립성과 상호 작용성의 인정은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에서 보면 모순이지만 라이프니츠의 실체 개념 내에서는 가능하다.

명백하게 지각하는 물질 내의 모든 성질들은 단지 다음과 같이 도출된다. 즉 그것(단일 연속체)은 부분부분으로 나누어지고 움직여질 수 있으며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의 부분들의 운동으로부터 우리들이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개별자들의 특성이 생겨난다. 물질에 있어서의 다양성과 형태에 있어서의 다양성은 운동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상호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 존재 양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상호 작용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러한 데카르트를 비판함으로써 실체들 간의 상호 작용을 허용하는 독창적인 실체 개념을 제시한 철학자가 바로 라이프니츠 (G. Leibniz)였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그 자신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실체 개념의 논리적 귀결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의 실체관을 그의 운동 이론과 때어 놓고 생각할 수 없듯이 라이프니츠의 독특한 실체로서 '단자'(單子, monad) 개념도 그의 운동 이론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라이프니츠의 물질의 본질이 연장이라는 데카르트의 견해를 거부했다. 실체의 본질적 특성은 불가분성(不可分性, indivisibility)에서 찾아야 하는데 연장은 그 자체 가분적인 것이어서 실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단자'라고 부른다. 단자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단위라는 점에서 '원자'와 비슷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연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원자와는 다르다. 이러한 단자와 비슷한 것이 기하학에서의 '점'이다.

그렇다면 연장을 가지지 못한 단자가 어떻게 세계 속에 현상하는가? 그는 단자들의 운동 속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수학적 선분은 무한한 점들의 집합이 아니라 점의 운동이며 면은 무한한 선들의 집합이 아니라 선의 운동이듯이, 단자들의 운동이 만들어 내는 결과 또는 현상이 우리의 세계이다. 운동은 단자 속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데, 이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자 자체의 본질이 바로 '힘'(force)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실체는 바로 단자이며 물질과 정신은 그것의 상이한 현상태이다.

이것은 그의 운동론의 배경을 살펴보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물질의 본질은 연장이고, 연장이기 때문에 불가침입성을 갖고, 이 불가 침입성으로 인해서 물체간의 충돌이 일어나고 이 충돌은 m×v라는 운동량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충돌 후 두 물체의 질량 중심은 등속 운동을 하므로 이 충돌에는 아무런 힘의 개입도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체계는 힘이 도입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운동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힘이 도입되는 '동력학'(dynamics)의 체계를 구상했다.

단자들의 충돌의 총합(mv)이 거시적 계에 나타날 때 힘(m)으로 된다. 그는 mv를 운동의 상태를 시작하게 하지만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힘으로서 '죽은 힘'(dead force)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힘으로서 '활력'(living force)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단자가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이 힘(오늘날의 운동 에너지)이며 단자는 연장을 가지지 않지만 이 힘의 장(場)으로 해서 자신의 장 속에 다른 물체의 침투를 저지하며 이것이 연장과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자라는 실체가 만들어 내는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데카르트가 보듯이 그 자체 실체가 아니다.

단자는 실체이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논리에 따라 다른 것에 의존함없이 존재하는 것, 즉 절대적인 활동의 중심이어야 한다. 단자 속에 일어나는 모든 활동은 오직 그 자신에서만 일아나며, 어떠한 외적 원인도 이것에 영향을 주거나 변화를 줄수 없다. 그래서 그는 '단자는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있거나 나갈 수 있는 어떠한 창문도 가지고 있지'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물들 간의 상호 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각각의 단자의 표상 속에는 일체의 다른 것과의 연관 즉 우주 자체가 함유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하나의 단자는 극소로 압축된 우주 즉 하나의 소우주(microcosmos)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모양을 반영하는 일종의 거울과 같다.

라이프니츠주의에 입각하면, 실재라는 것은 사건들이고 구체적 세계는 이들의 가능성과 불가능을 통해서, 거기에 물질이라는 차원에 부가되어 이 세계가 된다. 라이프니츠는 모순과 불가능성 차이에 대해서 말한다. 예를 들면, '아담이 죄를 지었다'와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모순이다. 따라서 성립될 수 없다. 모순이란 둘 중 하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아담이 죄를 짓거나 짓지 않거나 어느 하나이다. 불공가능성은 이것과 다르다. '아담이 죄를 짓다'와 '아담이 죄를 짓지 않다'가 모두 가능하다. 다만 함께 가능하지 않을 뿐이다. '아담이 죄를 짓다'도 가능하고, '아담이 죄를 짓지 않다'도 가능하다. 다만 둘이 함께 가능하지는 않다. 이것이 불공가능성의 차이이다.

이러한 원리는 라이프니츠가 세계를 보는 중요한 원리가 된다. 하나님에게는 오늘날과 같은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도 만들 가능성도 있지만 그런 여러 가능성 중에서 이 세계가 가장 최선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만드신 것이다. 소위 '최적화(optimization)' 원칙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 들뢰즈의 경우, 이런 가능 세계가 현재 이 세계 안에 모두 내재화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즉 가능은 현실과 불연속이 아니라 현실의 또 다른 층위가 담겨 있다고 보고 있다. 내재화된 숱한 세계들이 '사건'이라는 것을 통해서 수시로(우연히) 발산, 그리고 수렴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이 물질의 층위에서 일어날 때, '의미'가 된다고 보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실체관을 비판했지만 여전히 데카르트의 실체관을 벗어나지 했다. 무한한 실체들의 존재를 승인한다는 것은 실체의 절대 독립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정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대로 고수함으로써 상호 교통할 수 없는, 이른바 '창이 없는' 무한한 실체들의 집합으로 된 세계,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질서을 만들기 위해 전우주가 각각의 단자들 속에 압축되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거꾸로 뒤집혀져 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영향- 실체관-을 벗겨냄으로써 뒤집혀진 라이프니츠를 바로 세울 수 있다. 그 때 드러나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힘의 개념은 나중에 정식화되는 에너지에 관한 개념의 윤곽을 잡을 수 있게 해준다. 이 개념들 중에는 본질적인 힘의 개념(물체의 운동 또는 정지 상태의 변화 원인), 일의 개념(힘과 그 힘이 작용하는 거리의 곱), 운동량의 개념(힘과 그 작용 시간의 곱), 에너지의 개념(운동의 모든 양태의 척도), 마지막으로 엔트로피의 개념(에너지의 질적 저하의 척도)이 있다.

'힘'은 우선 관계의 개념이다. 절대 자립적 힘이란 형용의 모순이며 힘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한 상태이다. 단자의 본질이 힘이라는 것은 이미 관계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 우주는 거대한 관계의 망상 조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계가 현상한 것이 바로 -라이프니츠가 통찰했듯이- 공간이고 물체이다. 그러므로 단자는 관계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는 존재를 그 무엇이든 실체화하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함정을 충분히 인식한다면 이 단자를 홀론 holone 또는 관계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단자는 세계와 그물처럼 얽혀있고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을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세계가 단자 속에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실체를 먼저 상정하고 그것의 상호 작용을 물을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을 먼저 상정하고 그것이 '실체'를 어떻게 현상하는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경우 그 탐구 방식이 외양상으로는 전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후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는 단자를 먼저 상정했지만 이것은 상호 작용의 실체화이다. 다음에 이 상호 작용이 어떻게 '실체'(물질, 정신)를 현상하는가를 묻고 있다. 우리는 라이프니츠에서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을 제거했기 때문에 그가 관계의 존재론에 실체의 존재론의 옷을 입히려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가져온 '단자는 창문이 없다'라고 하는 임시 변통적 설명을 제거할 수 있다. 이제 단자는 창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바로 창문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성(神性)은 가능한 한 존재의 양을 최대한으로 창조하려 할 것이며(형이상학적 완성), 행동의 양을 최대한으로 창조하려 할 것이다.(도덕적 완성) 그러므로 창조의 순간에 신은 모든 가능성을 충족시킨 것이다. 신은 형이상학적 완성과 도덕적 완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가능성들만을 현실화시켰다. 예를 들어 신은 케사르를 현실화시키기 전에 케사르와 관련된 모든 잡다한 사항들 중에서 바로 그 개인 '케사르'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아마 신은 케사르 대신 '게사르'나 '케자르'를 현실화(창조)하는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들은 잠재적 현실태로서 모든 면에서 케사르와 같다. 물론 게사르는 기원전 49년에 루비콘강이 아니라 한강을 건넜을 수도 있고, 케사르는 낙동강을 건넜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은 오직 케사르만이 그가 현실화할 나머지 가능성들과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으므로, 다른 누구도 아닌 그를 현실화한 것이었다. 또한 신이('브로투스'도, '브루토스'도 아닌) 브루투스를 창조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사고의 실험을 해볼 수 있다. 따라서 케사르와 브루투스는 인과 관계가 아니라 내적 조화의 관계를 이루게 된다. 모든 실체들 간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다. 신은 가능한한 최대한도로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는 실체들만 현실화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참 명제들은 분석적인 것이다. 만약 나비라는 고양이가 오전 8시에 양탄자 위에 있다면 그 이유는 그 고양이가 오전 8시에 양탄자 위에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나비가 아니라 다른 고양이다). 이렇게해서 이 세상은 가능한 모든 세상 가운데 최선의 것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주장이 나온다. 그가 실제로 한 이야기는 이렇다. '따라서 세상은 경탄할 만한 기계인 것이 아니라 세상은 수많은 정신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최선의 공화국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정신들은 가능한 한 최대한의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은 대단히 불완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신에게 크게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서 개체와 개체 사이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작용, 영향, 타자화는 없다. 그냥 타자화 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둘이 함께 놓임(coordination), 일치함(conformite), 함께 가능함(compossibilite)이라는 논리적 관계를 맺을 뿐이다. 그러나 신체라는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고 신체의 차원은 어디까지나 '현상'의 차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에게서 각각의 단자는 철저하게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창이 없다'는 것의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라이프니츠에게서 모든 단자들은 서로 중복되어 있다. '표현' 개념을 통해서 바로 이것이다. 서로 고립되기는커녕 모든 단자들이 무한히 중첩되어 있다. 왜 라이프니츠는 이런 이상한 형이상학을 전개할까? 그것은 바로 우주의 모든 것을 신에 귀속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에 있어 변화는 단순히 외부적 힘에 의한 운동이나 외적 으로 관찰된 변화가 아니라 모든 단자들이 자체 안에 지니고 있는 내적 힘을 말한다. 이 점에서 '활동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활동성이란 단자의 질적 변화이다. 다시 말해 한 단자를 구성하고 있는 빈위들(성질들)의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단자들 사이에 질적 구분이 없다면 그들의 변화를 간파해 낼 도리가 없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진정한 하나이면서도 질적인 여럿이라는 두 개념이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바로 '주름'의 개념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단자를 하나하나를 접혀 있는 존재들, 즉 여러 질들을 통일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존재들로 생각할 수 있다. 어떤 두 사물을 질적으로 구분할 방도가 없다면 그 두 사물은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운동은 왜 발생할까? 형상은 질료에 구현되는데, 바로 이 질료에 의해 운동이 발생된다. 여기에서 목적론 사유 양태가 핵심이 된다. 고대 사상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원래 세상의 본모습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그 본모습이 타락한 것이다. 그래서 고대에는, '왜 움직이는가'를 설명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는 거꾸로 된다. 근대에 와서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운동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거꾸로 사물이 '왜 정지할까'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것이 근대 물리학의 제1원리가 '관성의 원리'인 이유이고 근대 물리학자들이 몰두했던 문제들 중 하나가 '마찰'이었던 이유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 철학에 따르면 세계는 운동할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의 뿌리는 각 모나드들 자체 내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가 실체에 본질적인 속성으로서 활동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모든 사물은 넓은 의미에서의 생명체들이고 따라서 실체란 바로 생명체들이다. '활동성'을 가지지 않는 것은 실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바위나 강까지도 생명체로 봐야 할까? 라이프니츠는 이들은 활동성이 영으로 수렴하는 생명체, 그러니까 생명체의 무한소라고 보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철학과 다른 점은 일단 정동과 욕동 두 개념만을 추상해 놓고 본다면,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이 상당히 수동적인 데 반해 라이프니츠의 욕동 개념은 상당히 능동적이다. 스피노자의 정동은 지각/표상을 통해서 관념들이 변함을 따라 바뀌는 것이지만 라이프니츠의 욕동은 오히려 단자가 계속 자신을 펼치려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의 중심 개념들 중 하나가 자기 본존을 향한 열망이라면, 라이프니츠의 철학의 중심 개념들 중 하나는 자기 확충이기 때문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스피노자의 철학이 내재성의 철학(즉 중세적 신학으로부터 탈피한 철학)이라면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여전히 중세적/신학적 철학이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얼핏 모나드에 자족성과 자기 확충의 욕망을 부여한 듯이 보이지만 결국 신학적 틀 내에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두 사람 모두 결정론자들이다. 즉 둘 모두 '자동 기계'이다. 세계를 철저히 기계화하고 나서 보니까 도저히 기계화할 수 없는 것들이 발견되었고 그래서 이번에는 그런 것들(예컨대 영혼, 신 등)을 철저히 반(反)기계적인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힘이라는 범주와 모나드/완성태라는 범주(더 일반적으로 말해 힘이라는 범주와 형상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동일시될 수 있을까?

라이프니츠에서의 형상이란 결국 성질들의 계열체이다. 그런데 그 성질들의 계열체는 그냥 어떤 구조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펼쳐지려는 힘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요컨대 단자란 계열체이자 힘이다. 오늘날에 에너지 개념에 가깝다. 또 욕망은 가능적 존재이자 현실적 무를 끊임없이 증식시키는 힘이다.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식 속에서 상상을 통해 표상하므로써 가능적 존재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 생명체가 얼마나 고등한가는 그 생명체가 현존의 차원으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질 수 있는가에 즉 추상화의 능력에 비례한다.

이 추상화는 자기 표현를 지향한다. 인간의 정신의 특징은 자기의식에 있다. 자기가 스스로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성질이 펼쳐진 것을 뜻한다.

단순한 물질에는 목적이 없다. 물이 흘러가는 것은 인과 법칙에 따르는 것이지 목적론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목적론적 사유는 대개 생명체를 염두에 두었을 때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일찍이 무너진 것은 바로 그가 물리계에 목적론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가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 기관에서 일어나는 일을 표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리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이 표상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그들이 다른 존재임에도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뜻이다. 물론 다른 실체이니까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라 구조적으로 상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서 이러한 일치는 부정된다. 감성과 이성(칸트의 용어법으로는 오성)의 일치가 부정된다. 이 점에서는 플라톤적이다. 그런데 칸트에게 이데아는 세계 저편의 이데아를 가리키는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관념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관념이 물질적 존재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차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칸트 철학의 중요한 국면이다.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더불어 생겨난다는 이야기이다. 오성이 인식 질료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인식 질료를 형성시키는 감성(그러니까 물질적 차원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주체에서의 신체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과 관념/개념으로 구성된 오성이 별도의 차원으로 상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 두 차원의 일치를 논하기 위해 별도로 도식론이 전재된다.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구도(물질-정신)가 칸트의 인식론적 구도(감성-오성)으로 바뀌고 그 와중에 예정조화설이 구성주의로 바뀐다. 라이프니츠에서의 '조화'와 '칸트'에서의 '구성'의 대비는 근대 주체철학의 탄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라이프니츠는 고대의 철학자들이 질료를 지니고 있는 우연성으로 처리했던 것을 개념적-분석적 차원으로 전환시킨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과학적 원인들을 발견함으로써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이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발전시킨다. 우연을 정복하는 서로 다른 두 길이다. 과학적 길이 물질의 원인들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라이프니츠는 바로 그 물질에 구현되어 있는 질료들의 성질들을 논하는 방향으로 간다. 예를 들면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의 수염이 뻗치는 것은 그의 유전 형질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현대 과학이다. 앞으로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과거보다 더 확실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형이상학이 질료의 문제를 우연의 문제로서 처리했던 것은 아직도 질료를 개념화하는 방법들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대 형이상학에는 이런 의미의 우연을 넘어서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장비의 DNA를 살펴보면 염기 서열의 2392번째 아덴닌 분자 고리가 하나 끊어져서 그런 것이라 하자.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도대체 장비의 2392번째 아데닌 분자 고리가 왜 끊어졌을까? 물론 과학이 더 발달하면 또 다른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에도 우리는 "도대체 왜?"라는 물음을 여전히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이 발달하면 우연의 문제는 해결될지라도 우발성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연은 과학적 원인의 문제이지만 우발은 형이상학적 이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가지가 관계없는 것은 아니다. 전 형질의 예를 들었거니와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이유는 과학적 원인의 극한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실증적으로는 영원히 그 극한에 다다달 수 없다. '무한'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비의 수염이 뻗치는 것은 장비라는 단자의 완전 개념의 세부 사항을 분석함으로써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라이프니츠는 무한의 세 종류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절대적 무한. 즉 절대적 무한은 신이다. 그 다음의 하나는 최대(maximum)이다. 그 어떤 수를 갖다대도 그것보다 더 크다는 의미에서 최대이다. 데카르트는 비일정(indefini)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두 개념 모두 그리스어의 'apeiron'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두 개념은 다르다. 무한이 하나의 길인데 끝없이 나 있는 길이라면 비일정은 길이 무수히 여러 가지가 있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경우이다. 세 번째 무한은 일정한 한계가 주어져 있을 때, 바로 옆의 수를 구할 수 없는 경우 즉 완벽한 연속성이 가져오는 무한이다. 이 경우가 바로 제논의 패러독스에서 이미 나타난 무한이다. 이 경우는 유한 안에 무한이 있게 된다. 묘한 역설이다. 이 역설은 칸토어에 의해 파헤쳐졌다. 그리고 후에 바이어수트라스를 통해서 극한/한계 개념이 수학적으로 다듬어진다. 또 시간의 문제까지 관련된 경우에는 이 역설이 베르그송에 의해 결정적으로 파기된다. 그리고 반(反) 베르그송주의와 위상학이 도래하면서 수학사-존재론사에서 또 한 번 큰 변화가 온다.

그러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의식은 자체 충족적이지 않다. 그것은 항상 자신의 타자를 향한다는 것을 뜻이다. 이것은 흔히 '지향성(志向性)intensionalite'이라고 한다.

자기 원인이란 스피노자의 정의를 따른다면, '그 본질이 실존을 내포하는 존재' 다시 말해, '본질성 실존하는 것으로밖에는 실존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필연적 존재란 '필연적 으로 실존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실존하는 사물들의 최종 원인은 그 자체 반드시 실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그런데 라이프니츠에서 그 자기 원인은 스피노자와는 달리 세계의 목적인이다. 'final cause'에서 'final'이란 '마지막의' 라는 뜻인데, 마지막이라는 것은 곧 그 과정의 목적이다. 그래서 목적인이 된다. 라이프니츠는 신을 여기에다 배치한다. 신은 세계의 목적인, 즉 최종 근거인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가능 세계론'을 펼친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차이점은 스피노자가 세계를 내재적인 필연의 관점에서 보는 데 반해, 라이프니츠는 초월적인 선택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세계는 자체 내의 필연에 따라 운동하는 존재이지만 라이프니츠에게서는 어디까지나 디자인된 존재이다. 신이 오성 속에서 수많은 세계들을 디자인했고 그 중 하나가 지금 이 세계로 구현된/현실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화되지 않는 다른 세계들도 있겠는가? 그런 세계들을 '가능 세계들(lesmondes possible)'이라 한다. 세계란 이렇게 무한한 인연의 실타래로 엮여 있다. 이런 관계들은 우발적인 것들이지만 라이프니츠에서 우발이란 순수 우발이 아니라 신에 의한 선택이다. 때문에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신은 이 성질들을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계열화시켜 본다. 그리고 그 중 한 계열 체제를 가능성으로 현실화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마치 하나의 원천(=신)으로부터 수많은 강물들(계열들)이 흘러나오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자칫 오해하면 라이프니츠가 마치 유출론자처럼 보인다. 유출론은 원천과 그 산물들 사이에 연속성을 수립하는 사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사유에서는 이 유출론은 허용되지 않는다.

라이프니츠에 의해서 우주의 현상들은 결국 그 성질들의 펼쳐짐이라면 이런 세계를 결국 길들, 갈래들의 세계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단자들 하나하나는 길들이고 또 갈래들이다. 그런 길들, 갈래들이 따로 만나고, 따로 헤어지고, 때로는 합쳐지고 한다. 그래서 세계는 무수한 길들, 갈래들의 총체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 행로를 걸어간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생각을 '가능 세계'라는 개념 아래에서 전개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원래 신의 오성 속에서 수많은 가능세계들이 설계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지금의 세계이다. 그러데 신의 머릿속에 있는 무한한 디자인들 중에서 한 가지 디자인만이 이 세계로 현실화 된 것이다. 마치 남자의 정자하고도 비슷하다. 그런데 신의 오성 속에 있었던 무수한 디자인들 중 하나만이 바로 이렇게 현실된 것이라면 도대체 왜 이 세계가 선택된 것일까? 바로 이 디자인이 최선의 디자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이다.

라이프니츠는 기본적으로 신의 자유도는 신의 의지를 긍정하기 위해서 우발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야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신이 바로 이것을 창조했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신이 이렇게밖에는 창조할 수 없어서 이렇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신이 전능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신이 이렇게 할 수도 있었고 저렇게 할 수도 있었는데 신이 선하고 전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최선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은 신을 옹호하는 변신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스피노자 같은 경우는 우발성이나 가능성과 관계가 없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세계 자체(엄밀히 말하면 세계 자체의 가장 실제적 측면)가 신이고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신의 본성, 신의 본질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가 끝없이 내재적으로 변양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이런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라이프니츠의 가능 세계론은 스피노자 무신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을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를 방문한 이래 형이상학에 특히 신경썼다.

신의 특권이 가능하다면 자동적으로 실존하는 데 있다면 신이 아닌 존재는 가능하긴 하지만 실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능 세계들이다. 그래서 이 세계, 피조물의 세계는 우발적인 세계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있어서 모든 개체의 소통은 신을 경유해서 애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개체들은 원칙적으로 절연되어 있다.

뉴턴의 경우 진공을 인정하였고, 그랬기 때문에 'action at a distance'(원격 작용)를 제시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경우 철저하게 연속성의 원리를 견지했고 이 원리에 따라 운동은 우주 전체로 퍼져 나간다. 그런데 영혼은 신체를 표상한다고 했다. 그래서 영혼은 신체의 울림을 통해서 우주의 울림을 표상하게 되는 것이다. 단자의 층위와 물체의 층위가 각각 울림을 내포하지만 신체와 영혼 사이에서도 울림이 성립합니다. 이 울림으로부터 예정조화가 성립한다. 울림은 곧 조화인 것이다.

영혼과 신체는 별개하는 것이다. 영혼은 하나의 단자로서 단순 실체이지만, 신체는 다른 신체들과 뒤섞여 변하는 존재하는 것이다. 수많은 세포들이 태어나고 죽는다. 어쨌든 라이프니츠는 연속성의 원리를 견지하며 따라서 기관들이 한꺼번에 없어진다거나 또는 전생 윤회 같은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형태변이는 일어난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체와 완전히 분리된 영혼들이나 정령들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신만이 신체를 완전히 떠나 있다. 그래서 모나드가 물질과 완전히 분리되어 떠다니는 경우는 없다. 죽는다는 것은 미세 지각으로 돌아다는 것이고 따라서 기관들이 없는 물질 속에 퍼져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래서 전적인 탄생이나 완전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들은 영혼의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탄생이라 부르는 것은 발생/펼쳐짐이자 생장일 뿐이며,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접힘이자 쇠퇴일 뿐이다.

라이프니츠는 자연 세계와 도덕 세계를 나눈다. 자연 세계는 신의 인식과 잠재력이 지배하는 세계라면 도덕 세계는 선함까지 지배하는 세계이다. 또 자연 세계는 운동인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이고 도덕 세계는 목적인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이다. 물론 이런 식의 이분법은 나중에 칸트에 의해 계승된다.

운동인들과 목적인들의 조화하는 것이 곧 신체와 영혼의 조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근대에 와서 무너진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자연과 도덕의 연속성을 이런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기된다. 바로 '사회생물학' 같은 분야가 그렇다. 전혀 상반되는 내용이지만, 존재론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면에서는 같다. 다만 라이프니츠에서는 신의 은총에 의한 조화 때문이고 후자에서는 생물학적 법칙성 때문이다.

이성과 의지는 인간 주체가 자기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원동력이라고 볼 때. 의지라는 개념에는 힘이라는 개념이 암암리에 내포된다. 특히 니체의 '힘에의 의지 사상'은 후대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 때의 힘은 19세기 자연과학이 발견한 에너지 개념, 그리고 기술이 발명한 증기 기관의 힘과도 통한다. 19세기의 힘의 철학은 바로 정태적이고 공간적인 박물학으로부터 동태적이고 시간적인 19세기 과학(특히 진화론과 열역학)으로의 변환과 맞물려 진행된 것이다. 진정한 노동은 인간이 몸을 써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를 통해서 스스로도 변화해 나가는 과정으로 본다. 이런 식의 본격적인 노동 개념은 헤겔과 마르크스에 의해 전개된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 개념은 흔히 사회-역사철학적 맥락에서만 다루지만 사실은 인식론 자체에서의 변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적 탐구에서의 노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실험이다. 그냥 관찰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실험이다. 그리고 의학적 맥락에서는 해부이다. 그러니까 과학 자체 내에서도 노동 개념이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며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들(과학적 기구들)이 인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만원경, 현미경 같은 초보적인 기구들로부터 오늘날의 분광기, 가속기 등에 이르기까지 근대적인식의 역사는 곧 기계의 역사와 나란히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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