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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4 17:30:52 조회 : 6111         
Ⅱ. 무한을 향한 인간들의 자기 확장 - 1. 무한이 유한자에 이르게 되는 과정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Ⅱ. 무한을 향한 인간들의 자기 확장

인간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존재다. 늘 자기 형편을 살피고 자신을 걱정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책임지고자 하는 본능의 힘으로 살아간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를 돌볼 자가 없음을 늘 확인하며 산다. 누구를 믿기 전에 먼저 철석같이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에 대한 믿음이 선점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신앙심은 요지부동이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이란 엄밀히 말해서 자의식이다. 자의식이란 대상의식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응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 자의식으로부터 자기만이 세계가 부풀어오른다. 자아의 유한함을 의식하는 그 순간부터 무한을 향한 도전과 도발이 시작된다.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응시하고 있기에 그 유한을 바탕으로 하여 조금씩 유한의 폭을 넓혀간다. 자신을 유한한 것으로 규정시킨 그 무한한 대상에 손끝이 닿을 때까지 이 욕망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숭고한 무한한 대상(이상적인 자아상)을 바라보는 욕망은 늘 충동적 시선으로 이어진다. 라이벌이 자기 앞에서 어른거린다. 목표점이 확실히 나타났다. 따라서 응시가 강할수록 주체는 대상에 사로잡힌다. 기다리던 신이 곧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인간의 의식은 절대적인 그 어떤 대상과 일치되려고 하면서 지속적으로 '자기 구성'에 나선다. 자신의 영원성과 절대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주체의식이란 없다. 스스로 의지하고, 자신을 상대적으로 보지 않고 오직 그것 자체이고자 한다. 즉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음으로서 최초의 시작자로 행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가 '자기 고유의 자아'가 될 때 진정한 실체, 생동하는 실체는 자기뿐이며 이런 의식의 전개는 자기 스스로를 정립시키는 운동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끊임없이 유한을 산출하는 무한적인 잠재력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즉 신의 무한성이 인간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무한성을 만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전개 과정'이다. 이 과정은 다음의 세 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불 수 있다.

첫 째, 무한이 유한자(인간)에 이르게 되는 과정
둘 째, 무한이 유한자에 머무르게 되는 과정
세 째, 무한이 유한자를 통해 방출되는 과정


1. 무한이 유한자에 이르게 되는 과정

자기 유지를 위한 정신 활동은 직관력을 발휘하는 영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 '영혼'은 기억을 더듬어 추구하는 영역이며 인간에게 있어 궁극적인 실체로서 변함 없이 머무르면서도 각종 다양함이 의미 없이 사라져버리지 않고, 다시금 자신에게로 모아들여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기관이다. 거기서 인간은 영원까지도 생각한다. 그 어떤 다양한 상태도 모두 영원의 전체성 안에서 이미 원천적으로 파악되어진다. 즉 영혼불멸을 인지하는 자아인식은 '전체성에 대한 신적 인식'과 유대성을 갖는다. 인간의 육체는 공간적으로 연장선을 지닌 결합체이기에 그 때문에-결합된 유한자로 인간의 육체는 무한히 쪼개어질 수 있기 때문에-그 자신의 고유성을 따로 가지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는 분해되고 소멸되며 나아가 산산이 흩어져버릴 수 있다. 이러한 해체, 혹은 파괴는 한편 만일 영혼에 의해 온전한 통일성을 갖지 못한다면, 곧 영혼이 물질적인 부분들을 조합하고 질서 지우지 않는다면 반드시 벌어질 사태이다. 거기서 조합으로 생겨나는 무기체들이란 그때마다 물질과 형태라는 두 요소로 설명된다. 그런 무기체는 공간을 따라 연장되거나 더 작은 알갱이로 끝없이 쪼개질 수 있다.

이처럼 참된 '하나됨'의 성격은 유기체에 나타나기에 무기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무기체로서의 부분들, 혹은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새로운 불안 속으로 몰아 세운다. 이 현상을 통해 인간에게 있어, 도대체 주된 것이 무엇이고, 본래적인 것이 무엇이며 자신의 고유성이 무엇인지를 되묻도록 이끈다. 따라서 인간의 실체는 '영혼'이라고 칭해져야 하고 바로 그 영혼 곁에서 인간은 물질로서의 육체를 넘어서 자신의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영혼은 우월하다.

육체에 대한 영혼은 마치 물질재료에 대한 형상과도 같이 혹은 도구에 대한 예술가의 경우도 같은 우월성을 갖는다. 물질세계의 기본요소들, 불, 공기, 물, 흙 같은 것은 비영혼적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우연적인 결합을 통해서 삶 혹은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영혼의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쩌면 억지로 '비정신적인 것이 정신을 낳았다'고 말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속성은 산산이 흩어져버리고 또 지나가 버리는 것이 때문에, 만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오로지 물질적으로만 이루어졌었다면, 모든 것은 벌써 다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만일 영혼과 같은 존재가 앞서 존재할 수 없었다면 육체란 도무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은 곧 영혼이 전체적인 것들(우주만물) 안에서 함께 고려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요, 나아가 그 어떤 질서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신의 형상과 세상만물의 형상은 영혼 이외에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물질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육체적인 것들에게 자신과는 다른 어떤 본성을 설정하도록 어쩔 수 없이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영혼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의 역할은 무엇인가?

영혼의 형상은 그 모든 육체적인 존재 바깥에 그리고 그 너머 저편에 자리한다. 곧 육체적인 것들에 앞서 혹은 그럼에도 육체적인 것들 곁에 있다. 이는 영혼이 모든 육체적인 부분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라고 할 때 그것은 육체적(혹은 물질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육체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통찰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사물들을 근거 짓거나 스스로를 근거 짓고자 애쓰는 사고는 오히려 '본래적인 자아'에게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물질세계 내에 저마다의 존재는 하나의 장소를 점해야만 하는 반면에, 영혼은- 정신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공간을 초월한다- 그 본질상 도처에 현존할 수 있는 것은 영혼 자체가 양적인 연장성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서 영혼이 육체 안에 있다고 단언 할 수만 없다. 오히려 공간에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육체적인 것이 공간에 무제한적인 영혼에 의해 이해되어야 옳은 것이다. 한편 만일 영혼이 육체적인 어떤 것에 지니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분명 거기에는 어떤 모순이 자리한다. 왜냐하면 만일 영혼이 그때마다 느끼는 육체의 모든 부분에 존재해야 하고, 그것은 동일한 장소에 두 개의 육체가 존재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이 감각행위 중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양적이지 않는 정신-영혼이 그 자체로 (물질적-육체적인 측면에서, 예컨대 하나의 일정한 신체적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무(無)는 아니다. 오히려 몸의 움직임을 낳는 원천적인 실체로서 이해된다. 정신-영혼의 양적이지 않으며, 크기로 측정되지 않는 특성 따라서 우리는 정신-영혼 곁에서 어떤 '초연할 수 있는 능력(거리감)'을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인 활동에 의해 파악되는 다양성 안에서도 그러한 감각적 의미의 통일성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정신- 영혼에게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일 한편 눈으로 보고, 다른 한편 귀로 듣는다면, 그 두 가지와 관련된 어떤 통일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서로 다른 감각적인 현상들을 따라 하나의 동일한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곧 여러 가지 감각들로 받아들여진 것들 곁에서 동일한 어떤 것 자체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동일한 어떤 것이 다양한 감각과 관련하여 중심적인 요소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이는 다양한 측면에서 드러나는 감각적인 현상이란 하나의 중심을 향하여 그어지는 무수한 반경과 같다 그와 같이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서로 상응하는 것이 결국 그 중심에 '하나'로 존재한다.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이러한 과정이 혹시 만일 그렇게 감각을 수용하는 정신-영혼이 감각적인 것들과 동일시되거나 혹은 거기에 머물러버린다면, 완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감각은 이러한 맥락에서 주체적인 요소와 객체적인 요소 사이에 '만남'을 주선하는 활동으로 이해된다. 곧 감각은 육체의 도움으로 감각적인 대상을 영혼이 수용하는 활동수단으로서 이해된다.

그래서 물체 안에 자리하는 형상들에게서도 정신적인 것이 발견된다고 주장할 경우, 그것은 육체적인 것에게서 '구별되는 것(형상)'이 '구별하는' 정신(곧 추상화하는 주체)으로 간주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구별하는 (추상화) 작업 안에서 그리고 그 도움으로 인간의 자기 및 세계에 대한의식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과 관계하면서도 그것들을 뛰어넘는 독자성을 확보한다. 이로서 사고활동은 육체적인 사물에 두루 작용하는 원인에 대한 파악과 같이 '육체 없이도 포착되는 것'이다. 이렇게 순수 정신적인 활동의 실현과정은 육체적인 활동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정신활동은 비록 외적이며 감각적인 충동을 계기로 시작하지만, '육체에서 깨어남'을 필요로 하고, 어쩌면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에게 실상 '의미'를 부여하는 '근거'로서의 전체적 정신세계에 참여하도록 인간을 고무시킨다. 좀더 자세히 살려보자면, 인간에게는 기억(記憶)이란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외적인 부재(不在)'를 내적인 현재로 되돌리는 작용을 한다. 기억 곳에서 공간적-물질적인 것을 초공간적-비물질적인 방식으로 특별하게 사고(思考)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기억에 힘입어 공간적으로 연장되는 세계를 내면화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이때 하나의 순수 정신적인 '세계'가 확보되며, 거기서 다양한 감각활동을 우리는 경험으로 곧 인식을 위한 원리적 소재로 이끌어낼 수 있다. 저 정신세계는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에게 특징적으로 관찰되는 표층적인 구조의 제한성을 넘어선다. 경험 안에서 내면화된 기억내용은 오히려 더 이상 '크기에 구애받지 않는' 심층적인 구조를 실현한다.

이 구조 안에서 공간적인 제약은 극복되고,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들은 그들의 초감각적인 동일성을 따라 완성되어 질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시공간 안에서 그저 단편적으로 ,그리고 순간적이며 부분적으로 표출된 감각적 존재들의 본질-내면적 원인구조를 그의 전체성 안에서 통찰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 정체성은 외적으로 사라져버리는 것들 곁에서 결코 사라져버리지 않는 본질로서 기억 덕분에 밝혀지는 정체성이다. 이러한 자기 신원에 대한 확인은 실상 이 세상의 우연적 조건을 능가하도록 이끈다. 근본적으로 또 내적으로부터 세상의 사물로서 자리잡는 것은 순수한 정신적인 자기실현과정 안에서 경험될 수 있다고 본다.

만약 영혼이 사람에게 덧붙은 낯선 무엇이라면 사람의 변화하는 몸체처럼 한편으로는 떨어져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덧붙는 것을 볼 때, 그 몸체 자체에 고유한 무엇이 과연 남아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도대체 부단히 영혼 자체의 동일성을 활용할 수 없는 가운데 어떻게 우리는 '기억하는 일'이 가능하고, 어떻게 우리는 낯익은 서로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즉 느끼고 생각하고 삶을 대비하는 인간내면의 종합적인 태도가 인간 외적인 육체적인 태도와는 다른 실체(영혼)를 요구한다는 관점 말이다. 예컨대 이 세상의 물질 자체에는 기억과 통찰과 사유의 힘이 자리하지 않으니 지나간 것을 붙잡고, 다가올 것을 앞서 예견하고, 현재 하는 것을 포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이 모든 능력은 단지 신적 존재에 의한 것이니 신(神) 이외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그런 능력을 인간이 갖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영혼은 육체 안에 자리잡음으로써 비로소 그의 존재함이 취해지는 것이라, 과연 이러저러한 생명체가 생겨나기 전에 영혼이 이미 존재해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영혼은 다시 말해, 육체가 아니며 나아가 육체의 감정도 아니다. 영혼의 실체성은 오히려 육체적인 행동에 앞서 취하는 또 다른 실천적 행위이지 그에 앞서 전제된 질서요 작용이며 창조적 능력이다. 이러한 영혼의 활동은 외적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면적인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영혼은 모든 움직임의 시원(始原)이요, 그로부터 다른 모든 움직임이 가능하다. 영혼은 그렇게 스스로 움직이는 무엇이다. 영혼은 그로써 함께 하는 육체에 무엇보다도 생명을 부여한다. 그 생명은 영혼 스스로 취하는 것이요, 따라서 결코 외적인 강요로 상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이 그 자체로 길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육체적인 모든 것은 그때마다 생명을 계속하여 번창시킬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생명은 끝없이 무한히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영혼존재와 관련하여 처음부터 살아있는 어떤 본성이어야만 하는데, 그 본성은 필연적으로 파괴되지 않으며 불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찰되는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하는 '생명의 시원'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서 신적인 모든 존재와 복된 존재가 몸소 살아가며 존재하듯 거주해야 한다. 처음부터 존재하고 살아가는 존재는 항상 그러하다. 그들은 나뉨 없이 존재하며 계속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 결코 되어가지도 사라져버리지도 않는다. 도대체 그들이 자신 외에 그 어디로부터 생겨나서, 그 무엇으로 사라져버린단 말인가?

더 이상 연소될 무엇이 남지 않는다면 불은 꺼져 사라져버리겠지만 영혼의 생명은 꺼져버리지 않을 것이니, 그에게는 결코 연소되어 사라져버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영혼의 실체는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명을 따라 자체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그 영혼 실체로서 이것이 인간들이 찾고 있는 영혼의 정체이다. 그로써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로서도 능히 불리어질 것이다. 혹 그렇지 않고 육체와 다름없이 사멸한다면 다시금 분해되어야 할 것이며, 영혼에게 그 스스로 움직이는 불멸하는 존재원인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운명을 전제하든지 해야 한다 영혼 개념을 가지고 그저 단순히 인간의 혼( 혹은 식물의 혼이나 동물혼)과 같이 개별영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런 관점을 훨씬 뛰어넘어서 '세계영혼'과 연관 있다. 왜냐하면 이들 영혼들은 저마다 그 과제에 있어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론적 구조에 있어서 공통적인 요소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 두 영혼(세계영혼과 개별영혼) 모두 움직임의 원인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두 스스로 길러내는 생명과 관계하며 그러한 움직임의 원인은 하늘 아래서나 하늘 저편에서 동일하게 고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실체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추구하고, 그런 한에서 첫 번째 원인을 알기까지 계속 노력한다.

영혼은 이제 '정신'과 만난다. 곧 지적인 활동 안에서 순수 정신적인 생명을 지니기에 언제나 저 위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정신을 통하여 이제 영혼은 자신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산고의 고통'을 느끼지만 또한 그에 따른 창조적인 결실의 기쁨을 얻기 위해 영혼은 부단히 애쓴다. 이러한 욕망을 취하는 모든 영혼은 정신세계 안에서 바라본 것들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아 그로써 갈망하는 아픔이 생겨나 서둘러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꾀한다. 원천적으로 존재하는 것, 곧 참된 존재적 존재는 여기서 다시금 영혼에 의해 물질세계 안에 앞서 전달된 생명의 원천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보다 낮은 차원의 것과 뒤섞여 가장 훌륭한 삶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 어떤 장애를 갖게 된다. 만일 사람들이 저마다 존재하는 것의 본성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거기에 놓여 있는 순수함에 유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외적으로 덧붙여진 것은 언제든 그 이면에 자리하는 순수한 것을 인식하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덧붙여진 것을 추려내어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애써야만 한다. 더 이상 감각적인 것이나 그런 감각적인 사물들로부터 현혹되지 않고 진정 영원한 의미 안에서 영원한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내면에 대한 본래적인 통찰에 의해서 불멸하는 신적인 세계에로의 상승이 실현될 것이요, 그렇게 참여관계 안에서 곧 참여하려는 우리는 참여를 허락하는 그것에 의하여 성사될 것이니,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순수하게 만들어 자신의 영혼 안에 거처하는 가장 주인다운 주인에게 그의 자리를 내어준다면, 참된 의미에서 앎이라고 불리는 깨달음의 지혜가 영혼 안에 자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러한 완전성 실현의 이해와 관련하여 물론 역설적인 표현이 뒤따른다. 예를 들자면, 완전성 실현의 의미는 도처에 있으면서도, 아무 곳에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모든 개별적인 것들이 그때마다 시공간적으로 다양하고도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듯 존재하더라도, 그들의 동일성을 잃지 않게끔 저 완전성 실현의 의미가 도처에 개입한다는 것이요, 다른 한편 그것은 모든 그때마다의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서, 곧 순수 동일성의 실현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가운데 시공간적인 한계를 그때마다 넘어서 오히려 매번 그들 앞에서 전제는 한, 시공간적인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듯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 능력은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서 죽음으로 마감될 우리의 운명이 실상 불사하는 삶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말이다. 만일 도대체 존재한다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떤 때는 존재하다가 어떤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혼은 움직임의 시원이다. 영혼으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찰하면 존재하기 위하여 앞서 고려되어야 할 존재근거 및 원천으로서는 그는 '절대적인 하나'가 제안된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하나는 완전성 실현과정을 위한 첫 번째 상징이 된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하나가 자체로 고정되듯 머물러 있지만은 않고, 운동, 곧 자신을 내어주는 -다른 존재하는 것들의 근거로서의 계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면, 이미 절대적 하나 안에서 역동적인 요소를 생각할 수 있겠는데, 운동과 정지, 혹은 다름과 같음에 따른 존재의 역동적인 실현과정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존재에는 세 개의 역동적인 구조가 짜여져 있다.  
첫째, 중심에 한결같이 머무르도록 작용하는 내존재
-이는 언제나 순수 동일성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존재요, 그런 까닭에, 첫 번째 존재, 곧 본래적인 의미에서 존재근거, 혹은 하나라고 부를 수 있겠다.
둘째,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작용하는 외존재
-이를 가리켜 저 내존재를 밖으로 드러내는 운동, 혹은 표현하려는 움직임이라 이해하고, 두 번째 존재, 혹은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셋째, 중심에 의해 전개된 활동들을 다시금 하나로 모르도록 작용하는 합존재
-이를 두고, 저 내존재와 외존재를 물질세계에 해명하고자, 곧 실제적으로 내보여주고자 하는 관점에서 '행위'요, 그 때마다의 시공간 속에서 물질 세계와 만나 정지된 단면을 보여주는 세 번째 존재, 혹은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같은 존재의 근본구조는 셋으로 동시에 하나됨 안에서 전체적으로 작용한다. 이는 '존재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첫째 이미 자기다움을 내용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항존적인 동일성 안에서 '존재'로서 포착됨을 가리킨다. 둘째, 존재한다는 것은 그렇게 자신을 드러냄에 있어서 언제든 능동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기에, 정신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존재한다는 것은 가만히 머무르거나 그저 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따라 존재의 근원에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곧 영혼은 살아있는 몸 안에서 그 운동의 출발점, 그것이 나아갈 목적지, 그리고 그 본질적인 형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운동과 정지, 다름과 같이 단순히 구별되는 것만이 아니라 부단히 서로의 관련성을 확인하며 '하나된 완전성'을 이루려고 하는 점을 목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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