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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8 21:42:45 조회 : 6754         
창세기1:14-23 /낮과 밤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낮과 밤(창 1:14-23)
2001년 7월 22일 4강

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1: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1:18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1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1: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1: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1:2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신자라 하는 것은 끈적끈적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 속에 묻혀 살기 때문입니다. 찰떡 만들 때 맛을 더하기 위해 군밤이나 대추를 집어넣지요. 그 대추나 군밤을 젓가락을 떼 내려고 하면 잘 안 떨어지지요. 찰떡이 철석같이 붙어서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챙기는 면에서 아주 깔끔합니다. 젓가락으로 들어내면 달랑 들립니다. 평소에 자기를 고립적인 존재로 만들기에 열중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거부할 만반의 준비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복음의 끈적끈적함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복음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연결된 게 없습니다. 누가 더 외롭습니까?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더 외롭습니다. 그래서 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랑거리를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무리가 되더라도 과시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피조 세계를 하나님이 다룰 때, "애야, 내가 너희들을 창조했다. 이제는 너희 마음대로 살아라, 네 멋대로 살아라, 잘 먹고 잘 살아라"고 방치하지 않습니다. 각 창조물 안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의 원래의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해 안에도 들어 있고 달 안에도 들어 있고 코스모스나 코끼리 안에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사람 안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들여다보니 죄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죄를 없애고 그 안에다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회복입니다.
이처럼 창조물 안에는 원래의 창조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낮에도 뭔가 들어있고 밤에도 뭔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낮을 주관하고 밤을 주관하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관'이라는 것은 '지배한다', '통치한다', '예속시킨다'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까. 왜 낮이 주관되어야 될 거리입니까? 어떻게 해서 밤이 주관되어야 될 상대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냥 흘러가는 데로 놔두면 되지 어떻게 주관해야 될 대상이 됩니까? 낮이나 밤이 개구쟁이라도 됩니까? 왜 낮을 붙잡아야되고 왜 밤을 붙잡아야 됩니까?

이것은 성경 속으로...속으로 흘러오는 비밀인데 이 비밀이 시편 19편에서 잠시 얼굴을 내밀게 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육상경기에는 릴레이 경기가 있습니다. 먼저 뛴 선수가 바톤을 운반하다가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선수의 손에 쥐어주는 경기 말입니다.

'날은 날에게 지식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되어 있지요. 날은 날 그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 있는 것이고 밤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밤은 달의 통치 아래서 그 다음 밤에게 무엇을 전달하게 되고 낮은 해의 통치 아래서 다음 낮에게 무엇을 전달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침묵의 소리'입니다. 인간에게는 침묵이지만 저희들끼리 서로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통하는 것이 무엇인가? 시편 19편에 보니,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와 보면, 이 말씀의 내용물이 펼쳐져 있습니다. 태양에 의해서 달에 의해서 주관 받아야 될 피조물들은 다섯 째 날과 여섯 째 날에 창조되었습니다. 이들은 태양과 달 없이는 유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특히 충만하고 번성하라는 복은 태양의 주관이 없이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땅 위에서 사는 동물들은 같이 땅 위에서 번식하는 식물에서 양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식물들은 태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식물 내에 있는 엽록체는 탄산가스와 물을 가지고 태양열을 이용해서 포도당이라는 영양분과 산소를 만들어냅니다. 이 포도당을 초식동물들이 주워먹거나 따먹고 생존합니다. 그리고 육식동물들은 이 초식동물을 뜯어먹고 또한 생존합니다. 어쨌든 땅에 사는 동물들은 태양의 힘 없이는 살 수 없는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또 동물들은 낮에 일을 하지만 밤에는 자야 합니다.  심지어 인간들까지 말입니다.

이 모든 원리에 대해 과학에서는 태양 에너지의 힘으로 돌리지만 성경은 간단하게 태양으로 날을 주관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해 주관 하에 살면서 다음 날에게 그리고 다음 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 물 속 물고기나 하늘의 새들이 번창하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22절에 보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섯째 날은 둘째 날에 만든 하늘의 궁창과 바다에 관한 그 내용물을 채우기 위한 날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만드는 땅 위의 짐승들은 셋째 날에 만든 땅의 내용물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두 날에 만든 것들은 네 째 날에 만든  해와 달과 별의 관리 하에 두고 있습니다. 왜요? 번성하고 충만하기 위한 조건이지요.

그런데 이들의 번성과 번창은 결국 시편19편에서 본 것처럼 말씀의 전파와 연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무엇을 증거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복 받은 인간들은 무엇을 전달하는 자입니까? 여기에 대해 시편 1편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된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말씀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말씀이 없다는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시편 1:4-6에 보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자를 원래 창조한 그 인간의 부류에서 제외시키는 겁니다. 심판과 저주로서 말입니다.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끈적끈적 한 것에 둘러싸였느냐? 그렇다면 복된 사람이요 의인이지만 그렇지 않고 끈적끈적한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복된 사람도 아니요 의인이 아니라 악인입니다. 찰떡 속에 있는 대추나 군밤처럼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 하나 끄집어 낼 때에 그냥 달랑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더불어 끄집어내어 진다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원래 의도했던 그 인간 맞습니다.

반면에 그 사람 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달랑 꺼집어냄을 당하는 자라면 저주받을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내용물을 봅니다. 사람들이 훈련하고 성화 되려고 하고 성숙되려고 하고 향상하려는 부질없는 노력이 바로 마귀가 시킨 것들입니다. 스스로 변화되게 해서 마치 변화된 것처럼 여기려는 시험에 사람들은 빠져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닙니다. 말씀 있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 없냐? 그러면 잘려라! 바로 이것입니다.

시편 19편에 보니 날은 날에게 말씀전하고 밤도 밤에게 말씀 전하고 그리고 시편 1편에 보니 복된 인간도 역시 인간대로 말씀 전하고 있습니다. 해가 떴다. 왜 떴냐? 5째 6째 날을 번창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번창하면서 뭔가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 있는 인간이 묵상하는 말씀 그 자체입니다.

자... 그런데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잠언 8:22-26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보면,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조 세계가 만들 때 하나님의 관여하심말고 또 다른 어떤 분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들들아 이제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냐 말입니다. 자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 창세기 8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8:20-22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 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땅을 저주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목적에 어긋나면 내가 만든 창조물이라도 나는 가차없이 저주하겠다. 그런데 뭔가 어떤 일로 인하여 저주가 중지되었다. 사실 인간들의 어려서부터 악함을 생각하면 땅을 저주해도 마땅하지만 그 저주를 막는 무슨 일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노아가 드린 정결한 짐승의 향기를 내가 맡고 나는 저주를 내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라는 것입니다. 낮과 밤이 쉬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 바로 저주하지 않은 효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낮과 밤이 교체되는 것은 하나님도 개입 안하고 인간도 개입 안하고 저절로 자연적으로 잘 굴러가는 것 같지만 성경 적으로 보게 되면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아니면 이 질서도 깨어진다는 겁니다. 이 축복의 내용이 바로 흠 없는 정결한 제물의 희생입니다. 그렇다면 창조가 복으로 유지되는 그 원인, 즉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전하고 싶은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태초에 개입하신 그 분의 희생으로 축복을 받고 창조의 회복된다는 내용입니다.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이미 창조 안에 담겨 있었고 우리 인간은 죄를 지어 몰랐지만 피조 세계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은 눈치챘습니다.

모두 정리하면 로마서 8:19-21로 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온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는데 이것이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 진득진득한 복음 속에는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복된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위치를 바로 잡게 하옵소서. 그냥 단독적으로 살지 말게 하옵시고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을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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