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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8 21:39:44 조회 : 5975         
창세기 3:5-7 /죄악의 결과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죄악의 결과
                           2001년 9월 16일                              
본문 말씀: 창세기 3:5-7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선악과라는 어떤 과일을 먹었는데 뭐가 달라졌습니까?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졌습니까? 키가 쪼그라들었습니까? 몸이 아팠습니까? 육체적으로 달라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사실은 없습니다. 처음 선악과 따먹기 전에도 벌거벗었습니다. 그리고 죄 짓고 난 뒤에도 똑같이 벌거벗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죄 짓기 전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죄 짓고 난 뒤에는 발가벗은 것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기 수치를 알게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아니 기껏 그것 정도 변했다면 지금이라도 선악과 백 개라도 먹겠다. 그 정도 변했다고 난리인가?"고 나설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로되 하나님도 아니고 본래의 사람도 아니니까 자기 자신에 분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 볼 때마다 자책하고, 원망하고, 불만스러워하고, 한탄하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괴로운 현상입니까. "아이고 나 왜 벌거벗었노!" 그러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옷을 입고 있으나 벗고 있으나 상관없이 그 옷 속에 담겨 있는 인간 육체는 자기 자신이 보기에도 만족스럽지 못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대상이 되었다는 게 싫다는 겁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싫다는 겁니다. 이것이 불행이요 눈물의 씨앗입니다. 자기를 저주스러워하면서, 못마땅해 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아무리 겉으로 "만족스럽다, 나는 만족스럽다"고 열 번을 되풀이 해봤자  본질이 불만스러운 그것으로 해결이 안되지요.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러합니다. "신도 아닌 주제요, 신들이 아는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감당도 못하고 있구나"하고 말합니다. 창세기 3:22절에 보면 이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그러니까 본질과 자기 사유, 혹은 느낌이 분리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손톱, 발톱이 갈라져 보세요. 얼마나 아픈지 걷지도 못합니다. 가라진다는 원래의 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원래의 것이 아닌 몸을 짊어지고 무겁게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자기 저주와 자기 한탄, 자기 원망과 자기 한탄이 이어지면서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7절에 보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치마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해결된 겁니까? 한 번 따져 봅시다. 선악과 따먹는 행위와 따먹고 난 뒤에 치마를 만드는 행위가 막 상쇄 가능합니까? 콜레라 걸린 것하고 콜레라 약하고 같아 막 바꿀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겁니까? 병 주고 약 준다고 아무 일도 없이 된 것과 같은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과 따먹는 행위와 치마 만들어 입는 행위와 같은 것이라면 죄 지어도 걱정할 것입니다. 5명 죽였습니까? 그러면 의사 되어서 죽을 사람 5명 살려내면 죄 안 지은 것이 되는 것이 됩니다. 도적질 세 군데 했습니까? 그렇다면 어려운 사람 3명 도와주면 죄 안 지은 것이 되겠네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것을 치마 만들어 있는 행위로 보충이 될 수가 없습니다. 원상 복귀가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원상 복귀도 되지 않는데 왜 한국 교회는 행함을 요구합니까?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아담은 지금 신자예요. 하나님을 알았기에 하나님 면전에서 자신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치마 만들고 하나님을 피해 버리면 구원받는 것입니까? 아니 된다면 왜 한국 교회는 구원이 되지도 않는 것을 강조합니까. 문제가 큰 겁니다. 전도 두 명한 걸로 구원이 됩니까? 죄 지은 것을 보상이 될 수 있습니까? 전도 두 명하면 자기 자신이 안 실망스러운 겁니까? 두 명이 아니라 천 명을 해 보세요. 그래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만스럽지요.

우리가 교회 와서 꼭 아셔야 될 것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출생해서 사람으로 사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그것은, 어떤 행동과 어떤 행동으로도 안 되겠금 되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해도 불만스럽기 짝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삽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은 줘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주장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나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리고 변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이 바로 이 행동을 했습니다. 치마 만들었지요, 선악과 따먹은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만드신 여자가 따 먹어라고 해서 따먹었다는 겁니다. 여자는 말하기를, 뱀이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변명이 아담과 하와 본인들을 구원해 줍니까? 아닙니다.

지금 아담과 하와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은 본인들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는데 있습니다. 상호 상쇄될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즉 죄를 지은 본인들이 죄를 없앨 수 있는 방도는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와 무관한 자가 만든 치마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그 치마를 만든 행위에는 죄가 들어있지 않는 겁니다. 의로 말미암아 가리움을 받을 경우에만 죄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가죽옷을 만들어 입힙니다. 창세기 3:21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이 만드신 가죽옷을 제공합니까? 그것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계속 남겨 둔 채 오로지 구원에 관한 모든 공로와 영광은 하나님에게 두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과 반대되는 생각이 한국 교회 전체의 생각입니다. 즉 이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못 지켰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새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마음껏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드리자"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과연 이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알고는 계십니까? 제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아이가 놀다가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납니다. 어머니를 그것을 보고 된장을 바릅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무개 엄마야, 된장 바르지 말고 파스를 붙여라" 그래서 애 엄마는 파스를 사서 그곳에 붙였더니 감쪽같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애 엄마는 파스를 버렸습니다. 그랬더니만 그 날 밤에 다시 하나님이 나타나서 노하여 말씀하기를 "왜 파스를 뗐느냐, 건방지게" 하니 애 엄마가 하는 말이 파스 덕분이 상처가 감쪽 같이 나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건강하게 된 나의 아이는 스스로 설 수 있습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랬더니만 하나님은 더욱 더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하긴 뭐가 건강해 나는 계속 붙어있는 파스만 보고 있는 거야. 그 파스 밑에 있는 더러운 상처에 관심 있는 게 아니야"하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계속해서 죄인으로 남아 있는 겁니다. 가죽 옷 안에 있는 인간의 육체는 계속해서 수치스러운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 사람된 육체를 보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죽 옷 만을 계속해서 보고 계시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그 위치에 그냥 하나님의 은혜가 덮여 있는 겁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쭉~ 말입니다. 가죽옷이 괜찮아서 구원받는 것을 생각 안하고 그 안에 있는 내가 괜찮은 존재라서 구원받는 줄로 압니다. 얼마나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가죽옷이 필요치 않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우리의 부끄러움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항상 시기와 질투가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 행동으로는 부끄러움은 제거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성경에는 수치, 부끄러움이 제거되는 경우가 이어집니다. 물론 창세기 때처럼 또 가죽옷을 해 입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때는 인간이 옷을 해 입었기 때문에 그러하고 여호수아 때는 무엇으로 수치가 떨어집니까? 여호수아 5: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거쳐 나오면서 할례 없이 그냥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단체로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애굽의 수치가 떨어져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 시절에는 할례가 가죽옷의 기능을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장에서는 부끄러운 부분을 무엇으로 가리는 반면에 여호수아 시절에는 아예 그곳의 일부를 칼로 잘라내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에는 아예 우리 몸 전체를 난도 질 하는 것이 가죽옷의 기능입니까? 과연 그러한지 골로새서 2:11-12절을 보면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 몸이 난도질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대신 다른 분이 처참한 죽음에 처해집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육체의 가죽을 벗어서 그것으로 우리 몸 전체를 감싸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다. 방금 읽은 성경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일이 나와 연관 있는 일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과연 성경에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옵니까? 예 나옵니다. 로마서 9:32-33에 나옵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를 주의 깊게 봐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못나고 실수 투성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아무리 최선을 노력을 다해 자신이 들여다봐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되어서 늙어 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함으로 부끄러움을 극복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종교이고 불교입니다. 우리는 오직 시온의 돌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이 떨어져 나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게 해 주옵소서. 믿는 구석은 하나도 없고 행하는 구석만 있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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