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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8 21:40:28 조회 : 6966         
창세기 2:20-25 /남자와 여자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남자와 여자
2001년 8월 26일
오늘 본문 : 창세기 2:20-25

2: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 맺어지는 것을 원래 하나님의 창조의 뜻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로 만든 것이 결혼 생활 잘하라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창조의 뜻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들었을 때 과연 하나님이 창조에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남자만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돕는 배필이 없어 여자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만들어진 여성을 돕기 위해 남자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먼저 만들어진 남자를 돕기 위해서 여자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니 여자는 남자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애초부터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어디까지나 인간은 남자만으로 다 된 것입니다. 남자에게 준 하나님의 사명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 몰라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남자에게 준 사명 속에 여자의 사명도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좀 더 설명을 더해드리면, 고린도전서 11:3에 보면,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머리 기능, 머리 위치'로서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머리는 둘 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단선으로 구성된 위계 질서가 성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생각하기를, "내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나는 또한 여자의 머리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여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인간 쪽에서 부부를 염두에 두는 사람들은 납득이 안되지요. "내가 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난 뒤, 나는 얼마나 더 편하고 행복한가?" 혹은 "내가 저 남자를 만나 얼마나 행복해졌나?"라고 생각을 고수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성경의 이야기가 엉뚱한 같은 소리가 되는 겁니다. 여성이 생각하기를 "나의 머리는 누구지? 나는 머리가 필요한데"라는 생각을 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에게 죄가 덮쳐오기 이 전에는 성경의 말씀이 납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죄가 각 사람을 강점하고 난 뒤에는 남자에게 있어 여자. 여자에게 있어 남자란 단지 자신의 행복의 편함을 보장하는 대상으로 전락되면서 결혼을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딴 몸인데 단지 서로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한 몸 되기로 다짐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결혼을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자신의 평안과 행복을 깨는 혼인이라면 언제든지 깨 버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죄를 짓고 난 뒤에 남자가 보는 여자의 관점이 달라져 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12절에 보면,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말하기를, 죄지은 것이 여자 책임인데 사실 더 나아가면 그 여자를 만들어 자기에게 붙여준 하나님 책임도 빼놓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담 자신의 머리 위에 그 어떤 통치권도 인정 못하겠다는 겁니다.

즉 자신의 머리가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결국 아담은 "나는 나다"하는 식입니다. 이런 위치에서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그 취지와 전혀 상반되는 결혼이 되는 겁니다. 그러한 예가 예수님 당시에도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아내와 살다가 아내가 음식을 못한다든지 남편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는다든지 사소한 이유로 인해 이혼을 합법적으로 선언해 버리고 갈라서는 예가 허다했습니다. 그렇게 버림받은 여성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9:6에 보면,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창세기 2장의 경우를 그대로 가져옵니다. 즉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했느냐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현실과 약간의 괴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적극 나설 것이다"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도리어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들이 나누는 것을 결코 잘 한 짓으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이미 죄가 지배하고 난 뒤에나 나올 생각이라는 겁니다.

정말 죄를 덮치지 않는 상태라면 이혼하겠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치도 않겠지요. 왜냐하면 아담은 분명히 여자를 보고 말하기를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행복 위주로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아, 아담은 이처럼 아내를 사랑했구나. 그런데 나는 내 남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것이 언제쯤인가. 정말 현 남편하고는 갈라서고 그 다음에 이런 말을 해줄 좋은 남편을 새로 만나 앞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라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처음 아담과 여자를 맺어준 것은 각자의 행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이 처음 결혼할 만한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무슨 신비로움을 발견해서입니다.

그런데 일단 혼인해서 오래 살다보면 그 신비로움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없어지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딴 마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아, 결혼이란 신비로움을 기초로 하여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상태에서 유지되어야 되는 법인데 나나 배우자에게 서로로부터 그 어떤 신비로움을 찾을 수 없이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만든 것은 서로의 신비감 속에서 사는 재미를 만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결혼이란 아름다움을 계속 느끼고 신비로움을 계속 느끼게 될 경우에 한해서 같이 붙어살라는 것은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의 사고방식입니다. 사랑이 식어진 채로 계속 붙어산다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에 차라리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갈라서자 하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짝 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원리에 따라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여자를 만들어 한 몸 되게 하신 것은 이러한 결혼관과는 별개로 그 이상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결혼은 상대를 통해서 아담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알라고 붙여준 겁니다. 상대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못마땅해서 자신과 갈라서기를 원하거든 차라리 갈라서 버리라는 것이 성경의 뜻입니다. 부담 갖지 말고 이혼해 버리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자는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아내나 남편이란 절대적으로 매인 대상이 아닙니다.

이점을 알려 들이기 위해 제가 고린도전서 7:29과 32-39까지 읽어 드리겠습니다. "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결국,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 때 결혼 자체를 위해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는 그리스도를 위한 결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제한 하나의 증거로서 결혼이 등장되고 만 것입니다. 심지어 방금 들었던 본문 가운데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는 말씀조차 다른 여자와 또 다시 혼인하기 위하여 이 대목을 거론해서도 아니 되는 겁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죄 짓고 난 이 후에는 결혼도 하나의 죄로 인한 고통 덩어리입니다. 혼인 당사자들이 모두 다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이런 사람 두 존재가 만나서 한 집에서 사니 이 얼마나 마찰과 충돌이 계속 터져 나오겠습니까. 결국 결혼을 통해서도 행복은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혼해야 합니까? 성도는 결혼을 통해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혼인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죄성을 더욱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비록 결혼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다 깨어졌지만 결혼시켜 준 하나님의 뜻은 헤아려야 합니다.

전도서 9:9절에 보면,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욕심이 얼마나 강한 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 잠언 5:15-20에 보면,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자로 태어나서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럽습니까. 이미 죄를 지었기에 한 몸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각자 몸이 된 입장에서 조강지처말고 다른 여자에게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 말씀 앞에서 모든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더러운 죄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즉 혼인이란 서로가 그리스도 앞에서 다 같은 죄인 인줄 알아서 서로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배우자는 과분한 대상인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서로의 마음을 낮추라고 하나님께서 혼인이라는 환경을 조성해 주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서로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죄지은 우리들에게 배우자를 만나 더욱 더 자신의 죄인 됨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자기 욕심을 발견한 동시에 마음을 더욱 더 낮추게 해 주시고 서로를 그리스도 사랑에만 복종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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