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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8 21:40:52 조회 : 6616         
창세기2:9-17 /선악과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선악과
2001년 8월 19일    
본문 말씀 : 창세기 2:9-17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2: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2: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2: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2: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2:14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들은 생각하시기를, 에덴 동산이라면 어쨌든 살기 좋은 곳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에덴 동산을 천국의 모델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에덴 동산을 극락답게 유지하게 하는 조건을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방금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참 낯설게 여겨지지요. 우리는 환경만 좋으면 살기에도 좋다고 여기잖아요. 그런데 왜 난데없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알아서는 아니 된다는 조건이 나타나는 겁니까? 도리어 그 조건이 있다는 그 자체가 이상스럽게 여겨질 정도가 아닙니까? 에덴 동산 안에도 어떤 조건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들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지금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낯설게 안 느껴져야 요건이 도리어 낯설게 느껴지고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현실이 도로 친숙하다는 것은 우리는 이미 에덴 동산에 추방된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밖에 안됩니다.

정상적이지 않는 존재이면서도 환경마저 비정상적인 곳에 삽시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우리들이 염원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에덴동산과 천국의 상이란 그것마저 엉터리인 것이 뻔합니다. 즉 "여러분이 갖고 있고 알고 있는 선과 악의 지식으로 열심히 하나님 섬기면 천국 갈 수 있습니다."라는 설교가 더 친숙하게 들 릴 것입니다.

그 대신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현재 지니고 있는 그 어떤 윤리나 도덕이나 종교로도 구원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그 지식을 지닌 자 자체를 안 받아주기 때문입니다"라고 설교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자, 사람들이 이미 알게 된 선과 악의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게 될까요?
사람들의 모든 활동은 선과 악의 지식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즉 "이 일이 선할까 악할까? 만약 선하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복을 받게 될 것이고 만약 악하다고 한다면 거기에 상응하여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악한 일을 버리고 선한 일을 해야지"라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모든 일이 다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교회 나오는 것,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애들 교육하는 것, 사업하는 것 모두 다 이런 차원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업을 할 때도, "하나님, 제 나름대로 이 사업이 건전하고 그리고 돈을 벌어도 교회를 도와서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의도를 주께서 아시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제 사업이 잘 되도록 도와달란 말입니다"라는 식입니다.

즉 자신이 생각하기를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도와주래야 안 도와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업을 하다보니 바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 오로지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뛰다보니 몇 번 교회에 빠지는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저도 인간인 이상 어떻게 예수님처럼 완벽할 수가 있습니까. 제 위치와 제 환경 안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도 잘 알고 계시니 너무 노하셔서 저주나 징벌을 안 내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착하고 훌륭한 성도로 살고자 애쓰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의 문제점이 무엇인줄 아시겠습니까? 모르시겠다구요? 사실은 우리 모두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이랍시고 하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본래 이런 인간을 자신의 창조물로 만들지를 안 했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몰라야  참 인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생명 나무 열매 안에 선악의 지식이 안 들어가고 선악과라고 하는 열매가 따로 있어 그 열매 안에 선과 악을 지식을 집어넣은 이유가 무언지 알겠습니까? 그것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 인간을 합류시키기를 하나님이 원치 않아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으로 남아야지 인간이 생명나무 먹고 영생을 얻었다고 해서 같은 신적 레벨로 포함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인간들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모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피조물이 피조물답게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인간이 죄를 짓지 전의 마음이고 지금 이미 선과 악을 태어나면서 아는 입장에서는 되레 이런 하나님의 주장을 우리 인간 쪽에서 의아해 하는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것 우리도 같이 압시다. 그래야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진정한 대화나 교제가 가능할 게 아닙니까. 우리도 제발 신적 존재로 만들어 주소."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엉터리 하나님 생각을 가진 우리들에게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다가오시는 걸까요? 제가 성경에 있는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6:25절을 같이 봅시다.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자... 여러분 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질문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애들아. 음식이 중하냐 목숨이 중하냐?"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이것은 질문 같지도 않는 질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그거야 목숨이 더 중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런데 왜 너희들은 목숨보다 음식을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 이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 중에 누구나 다음과 같이 즉각 반발할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 중에 누가 목숨보다 음식을 더 중요하다고 하겠어요. 당연히 음식보다 목숨이 더 중하지요.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그 중요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음식을 찾는 겁니다. 음식이 있어 중요한 우리 목숨을 부지할 게 아닙니까? 뻔한 논리인데 예수님은 이것도 모르십니까?"하고 불평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질문 던지시기를 "애들아, 옷이 중요하냐 목숨이 중요하냐?" 물으면, 우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답변할 것입니다. "예수님, 그 질문을 삼척동자에게 물어보세요. 뭐라고 답변하는지. 물론 옷보다야 목숨이 더 중요하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런데 왜 너희들은 목숨보다 옷을 더 찾느냐?" 한다면 우리는 도리어 예수님이 답답하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대꾸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옷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더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귀한 그 목숨을 따습게 하기 위해서는 옷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당연히 옷을 찾지요. 이게 뭐 잘못되었습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자.... 여러분 바로 이 질문과 답변을 통해 예수님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찾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구분하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음식이나 옷 없이는 결코 목숨도 부지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자는 하나님이 원래 창조한 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참 생명이란 옷과 음식에서 부지되거나 연장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예수님에 의해서 그냥 그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예수님은 이런 질의를 하신 겁니다.

이해를 더하기 위해 마태복음 그 다음 구절을 봅시다. 마태복음 6:26절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여기에 보면 참새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이 하늘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을 참새한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이미 자체적으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있으니 여기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주어져서 축복이 받으면 살고 축복을 못 받고 저주를 받으면 살기 힘든다는 자체적인 목숨 관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은 참새를 친히 기르시는 하나님의 신학과 다른 것입니다. 참새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바로 이런 참새와 같은 순수한 인간이 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뒤, 31-32절에 보면 이런 무시무시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자... 여러분,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불신자, 즉 이방인을 무어라고 단정해 버리십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라는 자는 모두다 불신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소행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신자의 모습은 이렇다고 33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니까 참 인간의 생명은 하늘에게 거저 주어주는 겁니다. 그 나라와 의만 있으면 충분히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야 창세기 2장,  에덴 동산에다 사람을 만들어 집어넣어 하나님의 취지에 부합된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이나 인간들은 나름대로 뭔가 안다고 이 순서를 바꾸겠다는 겁니다. 즉 먼저 하나님 쪽에서 양식이나 옷을 주시면 그것으로 힘내어 하나님의 의과 그 나라를 찾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엉터리입니다. 이것은 이미 죄악 된 엉터리 인간상에서나 나올 사고방식입니다. 이방인이나 불신자들이 주장입니다.

그렇지 않고 생명이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이것에만 주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 구원받는 자녀요 하나님의 양입니다. 그러니까 참 양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영생이 어떻게 주어지는 가를 제대로 아는가 하는 점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 점을 확인해 드리게 위해서 저는 요한복음 10장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0절에 보면,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그것을 가능케 할까요? 그 내막이 15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기에 보면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즉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누구의 목숨이 내어놓아야 영생을 얻는다는 겁니까? 예, 예수님의 목숨이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덴 동산에서 먹어야만 하는 그 영생은 딴 게 아니라 예수님의 목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예수님의 생명에 인간의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관여될 수 없는 법입니다. 과연 이 영생이 오래 갈까요? 28절에 보니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니 '멸망치 않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선과 악에 대해서 명쾌하게 알고 선을 많이 행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목숨, 즉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없으면 어디까지나 멸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 얼마나 에덴 동산의 원리 원칙이 확실하게 이어지는 증거입니까.

"선악과를 따먹는 자는 죽으리라"는 말씀은 곧 요한복음 10:28에서, "영생을 부여받지 못한 자는 멸망이다"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문제는 이 영생을 우리가 어떻게 획득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친히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영생이란 나의 행함과 무관하게 그냥 받는다는 사실만을 고이 간직해 주시기 바랍니다. 뭔가 행해야 그 대가로 영생을 얻는 자라면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영생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선과 악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선한 행위의 대가로서 영생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정말 본래의 인간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영생이란 나의 행함과 전혀 무관한 다른 세계에서 주어지는 선물임을 확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우리는 순수한 마음에서 그 나라와 의를 바라보지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선행과 종교를 기초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범죄한 자 인 것을 자인하게 하시고 영생이 그저 오심을 바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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