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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8 21:41:21 조회 : 6162         
창세기 2:4-9 /산 인간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산 인간
2001년 8월 12일
본문말씀: 창세기 2:4-9절

2: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2: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2: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장을 읽어보니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두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단계는 흙으로 일단 사람을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그 흙에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살아있는 사람, 즉 생령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흙으로, 그리고 일 단계로 도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 창조하신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 인간이 인간을 보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살아 있음 그 자체로 다시는 죽음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결별된 영원히 산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싶어합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근처에 오지도 않기를 원합니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로서 완결되기를 바랍니다. 살아있으니까 계속 살도록, 살도록 해 주는 것이 자비로운 하나님다운 태도가 아닌가 여깁니다. "죽을 수도 있다. 도로 흙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를 창조해 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에게서 손을 떼 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일단 살아있으니, 살아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던 이제는 간섭을 고만해주시고 저에게 맡겨주시면 좋겠습니다"라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너 죽을 수도 있어" 하는 것은 하나님 생각이시고, "그게 무슨 살아있는 겁니까 완전하게 독립해야 비로소 살아 있는 거지요. 죽을 가능성이 내포되는 있는 이것도 살아 있다 말 할 수 있는 겁니까"라는 것이 우리들 생각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누가 철학적으로 이런 점을 따지면 살겠습니까?"라고 반문하시겠지만 실제로 병원에 가보면 "하나님, 왜 저를 아프게 하십니까 왜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늘 함유되어 있습니다. 걱정한다든지, 고민한다든지, 아프다든지 하는 것이 모두 죽음의 흔적입니다.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파생되어 나온 모습들입니다. 이런 창조 처지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모르고 "어, 내가 아파? 이건 말도 안 돼, 나는 아프면 안 되는 거야. 하나님 왜 멀쩡한 내가 아파야 합니까? 하나님, 지금 제게 실수하고 있는 것 맞지요?"라고 항의하곤 합니다. "너는 아파서 죽을 요소가 처음부터 개재되어 있었단다. 이것을 왜 몰랐느냐. 창세기 2:4-9까지 봐라"라는 것이 하나님이 뜻입니다.

여기서 산다는 문제에 대해서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즉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모습이 정상이라는 겁니다. 서로 머리 맞대고 의논하며 사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사람은 사람 없이는 못사는 동물이라는 말입니다. 어울려서 사는 것이 참 사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것을 가만히 보면, 꼭 가족이라든지 친구라든지 선후배라든지 각종 조직의 사람들을 불러모아 같이 합세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산 사람으로 만든 취지는 생명나무나 선악과 가운데서 사는 것을 사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에덴 동산에 심어놓았다고 하니까 그저 살기 좋은 멋진 환경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서 더 알아 봐야 합니다. 에덴동산의 의의는 그게 아닙니다. 죽을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인간을 에덴 동산을 살게 하신 것은 그 죽음의 가능성이 어떤 경우에 발생되는지 그 연유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꼭 만나야 될 두 나무가 있습니다. 이 두 나무의 위치도 한 쪽 구석이 아니라 동산 한 가운데입니다. 선악과 먹어서는 안될 독약 같은 나무라면 아예 손 안 타도록 동산 변두리 한적한 곳에 심어놔야 하는데 늘 보란 듯이 동산 한 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란 죽을 수도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곧 살아 있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 에덴동산이 없으니 생명나무니 선악과나무니 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더 이상 상관없다고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천지 창조 때 하나님이 염두에 두신 '인간 됨'이라는 것을 오늘날도 하나님이 버리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인간들  끼리 웅성거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생명 나무의 요소와 선악과 요소에 둘러싸인 채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생명나무는 곧 예수님이다. 선악과는 율법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의 말씀처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태어나서 이미 선악과의 지배를 받고서 세상에 나타나고, 자라나면서 또한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자... 왜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와 선악과나무 아래 있게 하십니까? 그것은 생명 나무 과일은 먹되 선악과나무 과일을 거부하는 자라야 진짜 인간이고 싶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혜택은 인간의 고유 권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일 단계, 흙으로 먼저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흙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욥기 33:6-7에 보면,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 즉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17절에 보면,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욥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엘리후라는 친구가 말하는 대목인데, 하나님의 은혜와 생기가 없으면 모든 인간은 똑같은 겁니다. 인간의 교만이란 바로 이 '똑같음'을 거부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저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극구 반대하는 사람인데, 다리 긴 것이 아름답다고 성경에 어디에 나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다리 긴 너나 다리 짧은 나나 똑같다"라는 사실을 믿는 그 사람입니다.  키 큰 것이 아름답게 부각되는 이유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에 둘러싸여 살다보니 상호 경쟁이 아니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와중에서 사람 사는 흥미나 즐거움이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해서 남을 꺾는데 있더란 이 말입니다. 옛날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키 158센티만 되어도 진선미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면접에서 떨어집니다. 주위의 미용실에서 추천하지도 않습니다.

"성경도 저리 가, 하나님 말씀도 저리 가, 하나님의 기준도 저리 가"하면서 제쳐버리고 인간들의 경쟁력끼리 모이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누가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어째서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도 죄인들의 친구로 자청하십니까? "경쟁에서 밀리고 치인 사람들, 사회 낙오자는 다 내게로 오라"라는 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야고보서 1:9-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 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왜 야고보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해야만 했을까요? 거기에도 나름대로 세속적인 경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2:1-4에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아름답다, 사람답다, 라는 것은 흙으로 기본으로 늘 돌아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 기본에서 하나님의 생명 나무를 누가 더 원하고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교만하지 않는 상태에서 실시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처음 창조 원리에도 같이 부합되는 면입니다. 로마서 8:9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목사냐, 장로냐, 집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영이 있느냐를 묻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어떤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죄의 몸을 지사 죽으심으로 모든 일은 동일하게 죄인임을 확실하게 다져 놓으시고 그 다음에 성령이 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탕자가 집으로 돌아 갈 때에 아버지에게 무엇을 선물로 드렸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탕자가 끼고 있는 가락지와 좋은 옷과 소 잡은 잔치는 누가 준비한 겁니까? 그것은 아버지 쪽에서 친히 준비하신 겁니다. 이 취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실시한 이 '인간 만들기' 방식은 지금도 조금도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을 죄인 되게 하시고 그 위에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9:15-16에 보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을 원한다고 그 사람이 천국 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이나 헌금하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되는 자가 성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되게 다름박질 하네"하시지만 본인은 그것은 은혜로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그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 은사, 저런 사람은 저런 은사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 듣고 천당하고, 설교하고 천당하고, 이 얼마나 공평합니까? 너의 것, 나의 것,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흙인데 생명 나무의 은혜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사야 43:7에 보면,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자의 영광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광이나 우리 교회 자체의 영광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모든 영광은 예수님의 자비로우심에게만 돌려져야 합니다. "나는 사람 없이는 못살겠습니다. 주위에 가족이나 사람을 주옵소서"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더 외롭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외로워도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충분하게 없이 돌렸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홀로 살아도 하나님의 영광 돌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시다. 정말 여러분의 산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의 어깨 위에 앉혀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하나님이 없이도, 예수님 없이도 이제는 시시한 것으로 남과 비교할 생각하지 말게 하시고 예수님 고마워 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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