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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9 01:00:10 조회 : 555         
아픈자가 성도 누가복음 18:5 230718 이름 : 이근호(IP:112.165.48.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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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15.♡.177.240) 23-09-05 17:41 
강남-누가복음 18장 5절 (아픈자가 성도) 230071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까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게 비유거든요. 이 비유의 주인공이 불의한 재판관이에요. 그게 놀라운 겁니다. 불의한 자가 세상을 설명하는 주인공이 된단 말입니다. 불의한 자가. 한번 적어볼게요. 불의한 자들의 세계. 불의한 자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계,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불의한 자가 등장해야 됩니다. 불의한 자가 등장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 뜻이에요.


이 세상 설명할 길이 없으면 다시 말해서 불의한 자가 등장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소개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착한 사람 예수 믿고 나쁜 사람 예수 안 믿는 그런 게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것은 착한 사람과 결부되는 게 아니고 불의한 자로 결부되어야 예수님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뜻이에요. 이 불의한 자의 세계라고 규정을 하고 이 삶이 이 비유의 주인공입니다.


여기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은 “너희는 저희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보통 상식적으로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뭐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성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들어야 될 자는 불의한 자들의 말을 들어야 돼요. 불의한 자들. 6절에 나오잖아요.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불의한 재판관. 불의한 재판관이 이 세상을 설명하는 유일한 포인트가 되고 주인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가 어려운 것은 아무도 자기가 불의한 자 편에 속하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을 안 하기 때문에 이 비유가 어려운거에요. 우리가 불의하면 되는데 불의하면 이 비유가 설명이 되는데 나는 안 불의하다 이렇게 되니까 비유가 먹혀들지를 않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일단 불의합시다. 우리는 다 불의한 거에요. 의롭지 않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해야 할 것은 불의가 뭐냐? 불의란 의롭지 않는 것이다. 불의한 사람은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라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오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해가지고 이 비유 한 가운데 들어올 생각을 안 해요.


이거는 우리 이야기 아니네. 불의한 자들 이야기네.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는 걱정할 필요 없지. 내 이야기하고는 상관없네. 이렇게 되니까 예수님이 비유한 취지가 모호해져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하나님 두렵다는 말, 무섭다는 말은 많이 하는데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다.


불의한 재판관, 법을 다루는 사람. 이 재판관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하면은 자기 안에 법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거에요. 하나님 대신 법을 믿는 겁니다. 두렵지 않은 거죠. 이야기가 점점 어려워져요. 미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겁니다. 미궁에. 자, 이 미궁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길을 이렇게 우리가 불의한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불의하지 않다고 여기는 내가 불의한 사람 속에 합류하는 멋진 방법은, 뭐 멋져야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꼭 필요한 방법은 이겁니다.


사람들은 매사에 하나님이 안 계신 증거를 찾습니다. 이 점에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안 계신 증거가 더 구미에 당기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이왕 어려운거 여러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 계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겁니까? 하나님 안 계신 것을 증거를 찾는 것이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잖아 그 증거 찾는 사람.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잖아 증거 찾는 사람. 둘 다 같은 류에요? 아니면 다른 류입니까? 둘 다 전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둘 다. 이 세상은 성경 전체를 봐도 성경 자체도 이야기해요. 이 세상은 불의한 재판관의 말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부에 계세요.


지금 불의한 재판관이 하나님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이 말은 하나님은 인간세계 바깥에 계시는 것은 인정하되 이 쪽 인간세계에서는 굳이 하나님이 설칠 이유가 없는 거에요. 왜 그렇게 불의한 재판관이 호언장담하느냐 하면은 이 불의한 재판관 태도가 굉장히 호언장담이에요. 자신만만한 거에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없다. 하늘나라 말고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에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호언장담하는 이유가 어딜 봐도 멀리 계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왔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불의한 재판관을 못 이깁니다. 이길 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이 동의해요. 하나님이 여기 왔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계시겠지요. 그러나 여기 없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있지요. 그러니까 두려워할 필요 없지요. 인간세계는 인간세계의 법이 있으니까요. 재판관 법이잖아요.


법대로 하게 되면 굳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올 이유가 하나도 없다라고 생각한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의 속마음이고 거기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모든 인간이 다 동의할 수밖에 없는 그런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기 주변의 일상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확인중입니다. 이걸 확인을 해야 내가 하나님을 안 두려워해도 마땅히 살아야할 이유가 성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햄버거 집에 맥도날드 햄버거 먹는데 엄마가 아이 데리고 간식 사준다고 햄버거 먹습니다. 치킨 햄버거 사가지고 와서 먹으면서 엄마하고 아이하고 벌벌벌벌 떱니까? 햄버거 먹으면서 엄마하고 아이하고 벌벌벌벌 떱니까? 주여, 주여 이러면서 햄버거 먹어요? 그리고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 먹으면서 엄마가 돈 내면서 벌벌벌 떨면서 햄버거 값 지불합니까? 주인이 “당신은 돈 내는데 왜 벌벌벌 떱니까?” “하나님이 두려워서요.” 뭐 이런 거 합니까? 그러면 햄버거 주인이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이 동네는 이 동네인데 떨 필요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은 불의하다. 불의한 재판관. 온통 불의한 사람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인간치고 불의하지 않는 자가 없어요. 인간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없습니다. 사람치고. 개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벌벌벌 떨면서 살아가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 세상에. 일상 속에서. 바로 그 이야기에요. 누가복음 18장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어떤 도시에 재판관이 있는데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결되어있는 같은 결과가 뭐냐? 사람을 무시한다. 왜? 자기가 최고니까요. 자기가 법을 알잖아요. 법의 집행관이잖아요. 그럼 사람을 볼 때 뭐로 봅니까? 저게 범죄자냐 아니냐 그런 식으로 본다는 것은 법을 가지고 사람들 족쇄를 채운다는 것은 법 족쇄에 감겨버린 인간을 법집행자가 무서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경찰관이 사람 무서워합니까? 경찰관한테 뭐라고 하면 가만있어 보자 당신 형법에 의해서 뭐 없나? 찾으면 사람이 경찰관을 피하지 경찰관이 사람을 피합니까? 그런 건 없어요. 법 집행관이거든요. 옛날에 고등학교 때 보면 여러분 나이 때 다 있지요. 선도. 선도가 학생을 무서워하던가요? 교문 앞에 있는 선도. 선도 완장 차고 옆에 학생과장 옆에 있지요. 학생과장 마동석 같이 생긴 사람 있고 선도가 아침 일찍 나와가지고 하는 일이 뭐에요? 학교 애들 전부 다 보잖아요. 그때 막 무서워합니까? 선도가? 아니지요. 누가 무서워합니까? 애들이 막 무서워하지요. 교복, 머리, 모자 단정히 하고 여학생들은 치마 내리고. 가방 반듯하게 하고 다 들어가잖아요. 충성! 이러면서 다 들어가잖아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구조의 방식이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 구조를 이상적인 위상 위치로 보고 사람들은 그걸 목표로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세계. 그게 현재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걸 돈이 해결하는 거죠. 돈 있는데 무서워하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은 많은 돈을 기부를 해요. 수해 났다하면 기부를 하잖아요. 기부하면서 벌벌 떱니까? 사람이 기부를 하고 헌금을 하고 기부금을 주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그 준만큼 자기에게서 무서움이 자기 바깥으로 배설된다고 보면 돼요. 기부한 사람은 무서움이 없어요. 이 세상 자체가 선악체계이기 때문에 선을 행한 자가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악을 행한 자는 보디가드 많아도 벌벌벌 떨어요. 그런데 많이 베푼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부하는 것, 그리고 헌금 많이 하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의 그 사람에게 희열을 가져다주는 일종의 쾌락을 가져다주는 강력한 무기가 되요. 남을 도와주는 것은 최고의 취미생활입니다. 최고의 취미생활. 지금 돈이 없어서 그런 취미 생활을 못하지 돈만 있어보세요. 막 퍼주고 해보세요. 세상 사람들이 존경해마지 않습니다. 우러러보지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누가 나를 밟지 않는다. 누가 나를 밟지 않아요. 다 고개 숙이고 밟지 않는 그 위치. 위치가 높아버리면 그것이 최고의 우리에게 희열과 쾌락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만이 착해요. 돈이 없는 사람은 돈도 없을 뿐더러 악하기 짝이 없어요. 선할려면 돈을 벌어서 돈 갖고 있다는 자체가 선입니다.


지금 초반부터 비유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초반에 예수께서 비유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 세상 사람들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여기 안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식으로 생활하고 있지 하나님을 계신 것을 증거하는 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계신 것을 아무리 찾아도 그 증거를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걸 아주 간추려 이야기하면 인간은 늘 주변에서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를 늘 이렇게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실험의 실험을 거듭해봤자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맞습니다. 맞아요. 하나님 계시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 어디 계시느냐? 하늘에 계시겠지요. 하늘에 계신데 하나님이 굳이 이 땅에 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 공론화되어 있고 이게 삶의 상식입니다. 진짜 어떤 사람이 맥도날드 햄버거 집에 가가지고 안녕하세요. 예수님 오랜만인데요 이러면 다 미쳤다고 해요. 예수님이 맥도날드 왜 여기 와있어요 하늘에 계시지요. 인간은 인간들 세계에요.


그래서 18장에 나온 비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통한 그리스도의 세계. 이걸 비유로 이야기한 거에요. 누가복음 18장.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 안 계시니까 만나는 것은 누구만 만나죠? 사람만 만나죠. 사람과 사람을 만나서 그리스도가 여기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에 대한 비유, 이것이 누가복음 18장의 비유입니다.


자, 그러면 인간 대 인간, 하나님은 빠져있고요. 다들 하나님을 안 믿으니까요. 하나님 여기 인간세계에 같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니까. 하나님 천사하고 살아야지 인간하고 살 이유가 없 그런 정당성이 없어요. 인간은 인간세계에 맡겨주되 뭘 집어넣습니까? 법으로 잘 처리하라고 법 주고 주님은 떠났다고 생각하면 돼요. 주님이 인간세계를 인간 손에 맡겼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법이 있는데 굳이 하나님 계신지 안 계신지 그걸 찾을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뭔가 툭툭 튀어나오는 말은 뭡니까? 하나님한테 물어보자 이런 소리 안 나오죠. 뭐라고 합니까? 법대로 하자. 법대로 하자. 우리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하자 그런 소리 안 해요. 법대로 보험처리 해라 이러잖아요. 여러분 보험처리 할래요 하나님한테 물어볼래요? 묻는 내가 돌 맞을 짓이다 묻는 내가 나쁘다.


여기서 제가 일단 내린 결론은 뭐냐? 이 세상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걸 불의하다고 했지요.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불의하지 않은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걸 전제로 하고 이 비유를 하신 거에요. 모든 인간이 불의한 거에요.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이 불의하기 때문에 누가복음 18장 비유에 대해서 모든 인간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지요. 다 불의하니까. 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이해하느냐 하면은 불의한 재판관의 하는 심정을 평소에도 늘 이해하고 있어요. 퇴근 시간 6시인데 7시에 와가지고 판사 집에 와가지고 이거 억울한데 좀 판결해달라고 하면 “내일 봅시다.” 그럼 누가 잘못된 거에요? 퇴근시간 끝났잖아요. 퇴근시간. 공무원이 토요일날 골프 쳐도 괜찮아요. 공무원이 쉬는 날 골프 치면 나쁩니까? 홍준표 왈. 수해하고 내가 골프치는 거하고 무슨 관계있다고.


그래서 18장에 대해서 인간들은 비유를 해석할 틈을 완전히 차단시켜놨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에 어떤 인간도 파고들어갈 수가 없어요. 철벽입니다. 불의한 자이기 때문에 법대로 하는 자가 두 개의 만남이 납득이 되는 거에요. 퇴근시간 끝나가지고 자기 하는데 그걸 문 열어주고 할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억지죠. 억지고객이죠. 그건 너무 과도하게 판사를 혹사시키면 안되지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삶의 기준 가지고서는 예수님이 하는 이 비유에 대해서 동의하기보다는 동의가 안 되는 거에요. 그걸 누가 아느냐? 예수님이 아십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다시 해 봅시다. 여기서 주인공은 누구다? 재판관이 주인공 6절에 나오지요. 너희는 누구 말을 들으라? 불의한 재판관의 말을 뭐하라? 들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나의 말을 들으라가 아닙니다. 불의한 말을 한번 들어봐라. 듣고 그 불의한 자가 과연 네 실력으로 네 신앙으로 불의한지를 한번 찾아내봐라. 찾아낼 수 있는가. 찾아낼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 보통 큰 위기에 직면해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저 하늘에 계신다는 거 믿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말고요 이 땅에 들어오신 땅에 올 필요도 없는데 땅에 오신 그 이유를 모르는 자는 성도 아니고 구원된 자 아니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법으로 단단하게 안정되어 있고 거기 재판관으로 있는 사람 그러한 체제에서 하나님이 그 세계에 하나님께서 함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증명하는가? 하나님 쪽에서 어떻게 증명하는가? 균열입니다. ‘균열’. 다른 말로 하면 ‘상처’.


상처의 특징은 뭐냐? 아프다. 상처는 절단나는 게 아니에요. 끊어지는 게 아니고 갈라지는 겁니다. 원래 하나였는데 면도칼로 그게 벌어진 거에요. 균열은 있던 것이 이게 벌어진 겁니다. 원래 안 벌어지면 안 아픈데 벌어지니까 아프지요. 이 균열, 아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소연이 나옵니다. 하소연. 아프다는 겁니다. 아프다는 거에요. 이게 이제 비명인데요. 비명. 아야~ 하는 비명인데 비명은 무엇보다 우세하느냐 하면은 논리적인 말과 문장보다 앞서 나옵니다.


아야! 우와! 윽! 이거는 인간이 논리로 정의해서 나오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아파서 툭 나와요. 그 아픔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원래 하시고자 하는 이 땅에 들어오시는 길이 돼요. 여기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의 특징은 안 아파요. 아프지를 않아요. 출근시간에 출근했다가 퇴근시간에 퇴근하면 그만이니까 아프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아파하는 상처받은 과부 하나가 등장해가지고 과부와 상처와 아픔이 퇴근한 판사까지 지금 전달된 거에요. 이걸 가지고 5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번거롭다고 이야기합니다. 번거롭다. 귀찮게 한다 이 말이죠. 번거롭다는 거에요. 이 번거로움. 율법에 보면 어려운 과부가 왔을 때 도와주라고 되어 있잖아요. 신명기 10장 18절, 19절에 보면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과부가 나와요. 시편에도 과부가 많이 나와요. 율법에 의하면 과부나 고아나 나그네 된 사람은 여유 있는 사람이 도와주라고 되어있어요. 그게 율법정신이에요. 이게 신약의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라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오늘 18장에 비유에 보면 이 재판관이 하나님을 무시해요. 사람도 무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부의 청을 들어줘요. 그러면 이게 뭡니까? 4절에 보면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하나님 보내신 과부 맞다. 저를 도와줘야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런 차원에서 도와준 게 아니고 번거롭게 하니까 귀찮게 하니까 뭐를 차단하고 싶은 거에요? 상처가 계속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고 싶은 거에요.


그 차단하는 것을 그러한 대처 방법을 뭐라고 하느냐. 그걸 불의하다고 하는 거에요. 불의하다. 예수님 십자가가 내 인생에 파고드는 것을 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그걸 차단한 그것을 가지고 불의하다고 한 거에요. 나는 내 인생 지키고 싶어요. 내가 안 지키면 아무도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면서 수만 차례 실험 데이터를 한 결과에요.


행여나 기도하면 도와줄까? 행여나? 뭐로 끝납니까? 역시나. 철야하면 낫겠지. 역시나. 금식하면 낫겠지. 역시 안 도와줘요. 십일조 하면 창고에 50배? 십일조해서 쫄딱 망했어요. 얼마나 교회 다니면서 테스트를 해봤겠어요? 뭐를 테스트한다고요?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테스트해보니 뭡니까? 갈수록 굳히는 것이 뭐에요? 갈수록 굳히는 것이 하나님 없다에요. 또 하나님 없다하면 교회 다니면 집사, 장로 안 되시니까 입 다물고. 하나님 없다 대신 당회장 목사하고 잘 사귀고 뭐 이렇게 사람 대 사람으로 하면 돼요.


그런데 이걸 가지고 오늘 비유 불의한 재판관의 태도에요. 내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람도 무시하지만 네가 귀찮게 하는 것 때문에 인간적으로 내가 특별히 한번 봐줄게. 그것이 무슨 태도라고요? 불의한 자의 태도에요. 불의한 자의 태도. 이 점을 다시 한번 봅시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굳이 이 땅에 올 필요 없다. 하늘나라 계신 하나님이 굳이 이 땅에 왜 와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이 세상은 자기가 불의한 걸 몰라요. 하나님을 믿어요. 메시아 옴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거는 형식이고 껍데기고 진실로서는 나 빼놓고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나 빼놓고.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이런 말이 목사님 일방적으로 사람을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아니지요. 경솔한 결론 아닙니까 할 수도 있는데 경솔한 결론인지 아닌지 이거 실험을 해보면 돼요. 뭐냐 하면은 행운의 편지.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행운의 편지가 왔다고 봅시다. 영국에서 시작된 이 편지는 똑같은 내용 7통 써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면 당신은 저주를 받습니다. 행운의 편지하고 똑같은 것이 교회에 주어집니다. 십일조 안하면, 목사 욕하면, 목사 뒷담화하면, 주의 종을 뒷담화하면 세 공통점이 뭡니까? 행운의 편지 안 쓰면, 십일조 안하면, 목사 뒷담화하면 뭘 받는다? 저주 받는다.


어떤 분이 이랬어요. 어릴 때 행운의 편지를 받았답니다. 교회 다니는 어린 학생인데. 자기는 하나님 믿는다고 자부했어요. 그런데 행운의 편지가 날라왔습니다. 어떻게 처리했느냐 하면은 행운의 편지를 하나님 제단에 바친 거에요. 하나님, 이 행운의 편지 안 쓰면 저주 온다는데 이 저주를 좀 처리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거에요. 하나님 믿는 겁니까? 아니면 행운의 편지를 믿는 거에요? 분명히 해야 돼요. 어느 쪽을 믿는 겁니까? 웃기지요?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어른 되가지고 부흥사가 와가지고 십일조 안 해서 망한 사례를 한 열댓 가지 부흥회 내내 감사헌금 안하고 십일조 안하고 교회 교육관 짓는데 협조 안하면 저주 받는 그 사례를 한 오십 가지를 쭉 나열한다 칩시다. 집안 망하는 거 아이 교통사고난 거부터 해서 했다 칩시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안 들었으면 몰라도 이미 들었잖아요. 이미 들었을 때 그걸 어떻게 처리합니까? 딜 하죠.


십일조는 믿음 좀 좋을 때 하고 주님 일단은 백분의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원래 십일조 하면 10만원 내야 되는데 만원부터 내겠습니다. 네가 진보가 있구나! 해가지고 이 만원 올리는 걸로 퉁 칩시다.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에요. 그거나 행운의 편지를 하나님 제단에 바치면서 그것도 불로 태워서 그걸 바쳐서 하나님 처리해달라고 하는 그거나 그것도 십일조도 안내고 목사 섬길 그 돈도 없으면 대신 뭘로 퉁 치나 하면은 아들 있는데 아들 신학교 보내겠다는 식으로 또 거기에다가 자기 나름대로의 또 성의를 표시해요.


왜 이러십니까 정말. 왜 이래요? 왜 그런 태도가 나옵니까? 전혀 하나님이 두렵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왜?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자가 있어. 누구? 나에요. 내가 두렵기 때문에 그 짓해서라도 귀신아 물러가라! 하나님이 귀신이에요. 저주야 물러가라. 진짜 굿이라도 하고 싶은 거에요. 불의한 세계에 똑같은 한통속이에요 전부 다.


그러니 누가복음 18장이 해석이 전혀 될 수가 없지요. 예수님께서 비유 속에 과부를 집어넣어요. 현재 누가복음 18장에서 과부 홀로 움직입니다. 움직인다. 마치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일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 움직임은 움직임으로 간주하지를 않아요. 여러분 장례식에 관 속에 누운 사람이 말 합니까? 안합니까? 말 못하지요. 보람상조에서 입 막아버렸는데. 염한다고 입을 막았는데 말 안 나오지요. 말 안되지요.


누가복음 18장에서 이 불의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말하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은 과부밖에 없어요. 그게 누가복음 18장 1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여기 기도가 나오지요. 기도란 것은 유일하게 하나님과 말하는 대화하는 사이에요. 대화하는 사이.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다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는 장례식에 관 속에 있는 자는 말을 못합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과 대화하는 인간이 없어요. 왜? 주님은 주님이 두렵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대화하는 사람하고 대화하고 사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지. 만약에 만약인데요 우리가 주님한테 기도하는 경우가 있다고 칩시다. 만약입니다. 그럴 리 없지만. 대화한다면 우리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것은 불의하다는 조건을 걸고 기도가 돼야 돼요. 나는 어떤 말 할 자격이 못됩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18장 13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나는 죄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불의한 세상에 불의한 자와 한통속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주님이 이 세상에 과부의 상처를 통해서 주님도 같이 상처 받은 분으로서 이 땅에 왔음을 어떤 사람이 감지한다면 그 상처 받은 과부의 모습을 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한 맺히지 않기 위해서 나 억울한 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요령부리면서 우리는 살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나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 잃는 것은 전혀 네버 네버 never 절대로 우리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 잃는 것이 하나님 잃는 것보다 더 아프고 상처 받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뒷전입니다. 확실하게 뒷전이에요.


그래놓고 찝찝하잖아요. 찝찝하니까 뭘 찾고 싶으냐?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찾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수시로 교회 나와서도 수시로 간증집회하면서 남들 하나님 만나는 간증집회 유투브 1년에 100개씩 들어가면서 저기에 가표 던진다. 동의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 만난 거에요? 아니지요. 아무리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 계신 걸 흔적을 찾고자 해도 그것보다도 수천 배 더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 일 안하고 내가 일해서 내가 밥 먹고 산다는 그 증거가 더 확실해요. 그게 1:1000으로 비교도 안 됩니다.


물론 가끔은 예상치도 못하게 도와줘서 신난다 주여 감사합니다 눈물 흘리면서 했지만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감기 있는데 하나님 시험해본다고요. 감기 판콜 에이 먹으면 나아요. 낫지만 적어도 내가 목사가 될 사람이고 신학자고 내가 집사, 장로가 될 사람 같으면 남이 없는 주특기같은 거 챙겨야 되겠다 싶어서 기도, 신유은사 있잖아요. 남들 있다하니까 나도 갖고 싶어서 한번 기도한다고요. 해보면 어! 기도하고 난 뒤에 사흘 지나니까 감기가 나았어요. 그래가지고 석 달 뒤에 또 감기 걸렸습니다. 또 기도하겠습니까? 약국에 가서 약 먹겠습니까? 어느 쪽 하겠습니까?


그때 처음에 은사 챙긴다고 나도 신유은사 있다고 자기가 자기 머리에 손 올려가지고 병 낫다 하기는 하는데 이게 약국에 약 먹는 게 간편해. 그리고 약 먹는 것도 주의 은혜라 하면 그렇게 정리정돈하면 깔끔하잖아요. 주의 은혜로 약국이 가까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 될 문제지. 지가 머리에 손 올려가지고 주여 보시옵소서. 나는 약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의지합니다 해가지고 히스기야 끄집어내고 구약에 그런 구절 있거든요. 엘리야 시대에 나왔어요. 우리 동네에 선지자가 없어서 너희들이 이방나라의 의사를 찾아갔느냐 해가지고 벌 받아가지고 그때 50명 죽고 많이 죽었어요. 엘리야한테.


그걸 해가지고 그때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나는 약 찾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게 하나님 두려워하는 거에요? 자기 아플까봐 두려워하는 거에요? 분명히 해야 돼요. 성경에서 인간은 이미 불의해요. 불의한데 뭘 덜 불의할까봐 겁을 냅니까. 자기 꾀에 빠진 인간들이죠. 이미 죄인 중에 괴수인데 뭘 더 나락으로 떨어질게 있다고 지금보다 더 망하면 안돼. 다 망했는데 뭘. 참내. 이미 망했는데 뭘 더 망해요. 망했는데. 뭐 내려갈 것도 없어요. 이미 망해버렸는데. 바닥쳤는데요.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겉으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살아계심의 증거 찾기지만 속으로는 역시 내 말이 옳다. 역시 하나님 없는 거 맞아. 이걸 내가 옳음을 내가 불의하지 않고 내가 정당함을 증거하고 싶은 거에요. 왜냐하면 그동안 하나님 몇 번 찾았다고요. 하나님 안 찾지요. 전부 다 내가 하는 식대로 살았지요. 만약에 하나님 나타나가지고 너 옛날에 네가 오년 전에 네가 왜 약을 썼어! 이렇게 나오면 이미 지난 것을 다시 한번 원칙을 어기고 말이죠. 그때 몇 명 맞아야해. 그때 그런 일을 하다니. 하나님 나타나서 추궁하면 그동안 내가 하나님 안 찾고 하나님 방법 찾는 게 어디 한 두 가지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찾아서 잘 섬기겠습니다라는 말은 과거에 하나님 안 찾고 세상적으로 했던 것 눈 한번 감아주소! 지금이라도 늦지 않고 내가 하나님 찾잖아요. 이런 게 어딨습니까. 남들 그런 사람 없습니다. 저니까 하나님 찾습니다. 이걸로 해서 과거에 세상적으로 살았던 것 눈 감아 못 본 척 넘어가주소. 이러한 딜, 이러한 거래심보가 작동해서 그래요.


왜 그러한 거래심보가 작동하느냐? 내가 망가지는 게 두렵기 때문에 저주가 오는 것을 대비해서 나름대로의 착함으로 마중 나오는 거에요. 착함으로. 그것은 곧 주님과 대화하는 게 아니고 날마다 내가 나와 대화하는 거에요. 열심히 하자 응! 정신차리자! 응! 반듯하게 살아. 나쁜 짓해서 벌 받지 말고! 응?!! 착하면 복 오게 되어있어. 내가 나하고 의논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거는 바로 주님 보시기에 불의한 재판관과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아까 불의한 재판관이 어떻게 과부를 도와줬습니까? 번거롭게 했죠. 번거롭게 했다는 말은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를 찾아갔습니까? 아니면 줄기차게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 갔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줄기차게 끈질기게 찾아갔지요. 주께서 끈질기게 자기 백성을 찾아오는 겁니다. 십자가 진다고 나 아팠다. 너 그때 뭐하고 있었어? 나 아팠어. 너 죄 대신 책임진다고 나 아팠단 말이야. 끈질기게 찾아옵니다.


찾아오면 찾아올수록 주님 이번 달 십일조로 퉁 치면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내쫓는 순간 우리는 내가 원판이 오리지널 원판이 불의하다는 사실이 들추어집니다.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내 힘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죄인임을 깨달을 수가 없어요. 원한 가진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 같은 나에게 끈질기게 찾아올 때 너는 너 삶의 처리를 네가 판단했잖아. 네가 너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이 뭔지 내가 알고 있어. 뭐냐? 어떤 판단을 해야 내가 안 망가지는가. 그게 판단 기준이에요.


왜? 내가 무너지는 것을 내가 제일 무서워하기 때문에. 나 무너지면 하나님에게 무슨 소용 있나. 한번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이게 중요한 말인지. 내가 무너지면 하나님이 무슨 소용 있나. 하나님은 1순위 나는 0순위. 0순위가 이겨요? 1순위가 이겨요? 0순위가 이기죠. 그래서 8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의 성령이 임하는 자는 혼자 도 닦는 사람이 아니고요 매일 만나는 사람이 불의한 자만 만나요. 꼭 여기 등장하는 과부 같아요. 가게 차려놨는데 오는 손님이 전부 다 불의한 재판관들만 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를 높이는 사람만 고객으로 찾아옵니다. 고객 알지요. 돈 내는 사람을 고객이라고 합니다. 고객으로.


전부 다 오는 사람마다 그 주인에게 요청하는 게 있어요. 뭘 요청하느냐? 주인님,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월등하게 돈 잘 벌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주인님이 나한테 서비스를 해달라는 겁니다. 마트에서 베이커리에서 빵을 팔던지 커피숍에서 커피를 팔던지 거기 담기는 내용은 뭐냐? 나 잘난 맛에 살도록 내가 돈을 지불할 테니까 그만한 서비스를 해주면 내가 단골 해줄게. 이러한 인간 대 인간들의 만남, 이것이 우리가 놓여있는 이 불의한 세상 망하는 세상 주님 오는 것도 관심도 없는 세상 믿음을 찾아볼 수 있느냐 하고 탄식하는 그 세상입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IP:115.♡.177.240) 23-09-05 17:42 
강남-누가복음 18장 5절 (아픈자가 성도) 2300718b-이근호 목사



말씀을 대하면 대할수록 우리가 갈수록 불신자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걸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가 신자에요. 왜냐하면 내 행한 대로 용서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내가 뭘 회개했더니만 구원받는다 이런 세계는 종교세계죠. 이건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그대로 유효한 세계에요.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유효해버리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라는 사실이 누락, 빠져버려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싫어했거든요. 심지어 제자들마저. 십자가라 하는 세계는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인간세계 아닌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게 천국입니다. 부자가 죽어서도 건너갈 수 없었어요. 물론 살아서도 건너가지 못하지요. 죽어서도 건너가지 못한다는 말은 죽어서도 못 건너가는 그 구조가 그 인간이 살아있을 때도 못 건너가는 구조가 이미 짜여져있다는 사실을 죽어서 알게 되지요.


내가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살았을 때 알아야 되는데 그래야 죄 용서가 돼요. 십자가의 효력이 발생돼요. 그런데 죽어서 알아버리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거에요. 모든 인간은 신자가 아니어야 십자가가 빛나요. 주님 홀로 의로워야 돼요. 우리가 예수 믿는 게 의로우면 안돼요. 그래서 믿는 사람도 없어요.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는 관계로서 구원 받아요. 주께서 우리에게 넘겨주신 관계.


그게 법이 아니고 그게 바로 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법을 거쳐야 돼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세 가지가 있지요. 다 같은 이야기지만 하나는 언약체결을 했어요. 언약체결. 일방적이죠. 하나님은 일방적입니다. 동의 묻고 언약체결 한 게 아니에요.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너희는 빼도 박도 못한다. 모세언약에서. 그 다음 율법 줬지요. 율법의 핵심이 집결된 것이 뭐냐 하면은 성막이에요. 성막과 그 안에 있는 기능들. 일종의 엔진이에요. 엔진.


엔진이 가동돼야 이스라엘이 앞으로 앞으로 불과 구름기둥으로 갈 수가 있어요. 불과 구름기둥은 성막에서 피어오르게 되어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 다시 말해서 너희와 함께하는 하나님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유일하게 일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약속대로 택한 백성 건지기 위해서 일하셔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7절에 나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이 원한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택한 자로 하여금 불의한 자만 만나게 했으니까. 이 세상은 불의한 자만 있으니까. 예수님을 배척했던 그 무리들, 동일한 무리들을 택한 자도 똑같이 만나서 예수님이 당했던 수모와 모멸감을 똑같이 맞보게 할 때 바로 과부의 원한이 주님의 원한이고 주님의 원한이 과부의 원한이고 또 택한 자의 원한으로 동질성을 갖추게 만들어버리죠. 너 나하고 같은 처지야. 원한을 당했으니까. 이 과부가 하소연할 데는 누구밖에 없어요? 하나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누가복음 18장 1절에 9절까지 비유에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유일하게 움직이는 자가 누구다? 과부 밖에 없고 재판관은 귀찮아서 가만히 있는 거죠. 과부만 들락날락하고 과부만 살아있는 거죠. 의미 있게 살아있는 것은 과부밖에 없어요. 원한을 갖고 있는. 그런데 이 원한은 뭐냐? 법으로 적용되지 않는 그 이상의 것에서 발생된 원한. 법으로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고 해서 그렇게 해소될 그런 원한이 아니에요. 법으로 해소될 수 없는 원한.


그러니 이거는 장차 예수님이 오신다는 그 징후에 의해서 징후가 발생되어버린 그러한 비난 같은 거죠. 주님이 이 세상에 안 오셨으면 생겨나지도 않을 그 분통함과 원통함, 절통함을 본의 아니게 지니게 된 사람. 그런 사람이 마지막 때의 신앙인입니다. 여기서 성경에 나오는 공식 하나가 나와요. 그 공식이 뭐냐 하면은 성도 있는 곳에서만 멸망이 생긴다. 성도가 출현하는 곳에만 멸망, 심판이 발생된다. 성도 없는 곳에는 심판도 없어요. 성도 생기면 성도에게 비난했던 자들이 심판받게 되어있습니다. 그걸 연동이라고 해요. ‘연동’. 같이 연결되어서 움직인다라고 되어있어요.


그래서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은 갈라디아서 5장 10절 말씀, 제가 감사히 여기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성도를 건드리면 이 소자를 건드리면 곧 나를 건드리는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에 안 보이는 형식으로서 성도와 더불어서 있고 사람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성도고 주님은 안 보이는 방식으로 계시는 거에요.


마치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육신으로 왔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하나님 아버지는 안 보이는 거에요. 그런데 안 보이는 그 아버지가 예수님한테만 보이고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다른 사람은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을 전혀 감 잡지 못하고. 그러니까 똑같은 존재 형식을 성도에게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존재 형식으로 연결시켜버렸어요. 주와 함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걸 감 못 잡고 있어요.


성도도 혼자 있고 싶어요. 혼자 있고 싶은데 주님이 귀찮게 주님이 가만두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성도가 성도되는 일이 성도 본인의 과업이 아니고 본인의 숙제가 아니라 주님이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나의 일이 아니에요. 남의 일이에요. 남의 일인데 남의 일 위해서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거에요. 여러분 주민등록에 있는 날짜에 의해서 태어난 거에요.


어떤 아이는 난지 이틀 만에 냉장고 들어갈 운명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비 오는 날 버스 탔다가 지하도 잠겨 죽고. 그거 자기 인생 아니에요. 주님의 인생이에요. 아무리 결혼한 지 두 달 됐다. 여행 간다. 그건 핑계에요. 그런 건 안 통합니다. 치과의사든 한의사든 외과 의사든 그런 거 천국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주와 함께 있을 경우에만 살아있다는 거고 나머지는 그냥 살아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쓰시기 나름이에요.


그래서 수련회에 할 거지만 사람들 수련회 참석 안하니까 미리 해야지요. 주체는 실체가 없다. 주체를 구성할 실체는 아무것도 없어요. 주체는 말씀의 효과다. 외부에서 주체를 만들지 주체 내부가 주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늘 말씀이 주체를 만들어요. 왜냐하면 주체는 상처이기 때문에. 벌어진 자리는 아무것도 없어요. 공백이에요. 만약에 내가 나라고 하는 것은 주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걸 자아라고 해요. 보다 구체적인 것은 수련회 때 하겠습니다.


어쨌든 성도라는 주체는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난 분열 효과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났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성도를 남기고 떠났지요. 성령 받은 사람 남기고 떠난 거에요.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있다라는 말은 우리와 함께 주님이 계시다는 말이 아니고 주와 함께 우리가 있게 됐다 이 말이에요. 그거나 그거나. 그거나 그거 아닙니다. 이게 달라요.


주님이 계시다는 증거 때문에 우리가 발생된 거지 우리 구원할라고 예수님이 계신 거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떠났다는 증거가 우리가 나타난 근거가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떠남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의 긴 그림자가 이 땅에 드리웠죠. 이 땅의 삶이란 죽음의 연속이죠. 죽음의 연속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은 죽음 자체,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살아있는 방식으로 이 땅은 살아있는 거에요.


예수님의 죽음의 자기의 과업이 끝나버리면 이 세상은 폭파되어버립니다. 불로서 다 타버려요. 십자가가 살아있는 십자가의 담는 그릇으로서 십자가의 그릇으로서 아직 유지되고 있는 거에요. 십자가가 증거 될 때까지. 그래서 택한 백성 생길 때까지. 예수님이 떠났다는 그 증거물로서 생산되는 성도가 남은 성도, 택한 백성이 계속 있을 때까지 이 세상 유지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온난화 때문에 망하는 게 아니에요. 아직까지 출현할 성도가 남아있다면 세상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게 뭐 온난화 때문에 그렇고 나노현상. 무슨 소리하고 있어요. 전부 다 이거는 이 세상은 인간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걸 성경이 증명해주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 모든 말씀이 우리의 죽음을 확인해주고 유발시키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이게 즐거워야 돼요. 이게 즐거워야 돼요. 나는 죽고 성도로 살아가야 돼요. 나로 살면 안돼요. 성도로 살아가야 돼요. 나는 내가 소중한 사람이고 성도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살면 안돼요. 주님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환경인데 그 환경은 누구와 만난다? 매일같이 불의한 자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모질고 힘든 인생을 살게 합니다.


말 안 통하는 사람과 함께 의도적으로 살게 하는 이유가 주께서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어때? 사는 게 어때?” “떠나고 싶습니다....”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야! 그럼 아직까지 시집 안 간 딸은 어떻게 하고?” “뭐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야!” 우리 보기에는 내 딸이지만 딸은요 엄마가 딸을 생각하는 것처럼 딸이 엄마를 생각 못해요. 왜? 자기는 자기가 우선이기 때문에. 엄마가 괜히 속 닳아가지고 아이고~~~ 하지 자식들은 없어요. 빼먹을 생각만 하지. 얼마나 더 빼먹을 생각. 그 생각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 9절부터 봅시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는 주인공이 뭐라고 했습니까. 불의한 자가 주인공이죠. 불의한 자. 9절부터 14절까지는 이 불의가 이 세상에서는 뭐라고 극단화, 이 불의함이 어떤 식으로 자기를 위장하는가를 보여주는 거에요. 그게 뭐냐? 바리새인이 갖고 있는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 하는 그런 방식으로 불의가 그런 식으로 조작되어있고 조성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리새인은 왜 자기를 의롭다 하느냐? 이것이 집단의 성격이에요. 집단의 성격. 집단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다는 그 말했어요. 인간은 타인으로 인하여 내가 구성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주 짧게 이야기했어요. 설교 시간에. 녹취 보면 나올 거에요. 내 것이 없어요. 남의 것으로 꽉꽉 채웁니다.


그래서 남의 눈치와 시선이 평생 따라다닙니다. 심지어 연세 많아도 눈치 보고 살아요. 자식 눈치 보고 살지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존경받는 어머니,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그것을 유지할려면 나보고 참 존경스럽습니다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는 타인이 내가 관리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정말 나를 잘한다 훌륭하다고 아무도 나를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사람은 타인을 잃어버려요. 타인을 잃어버리면 나를 잃어버려요. 그때는 자살 아니면 우울증 걸리죠.


그래서 나를 나의 가치로 받아줄 사람이 없으면 뭐하느냐? 개 키웁니다. 개. 고양이. 꼬리 막 흔들어주지요. 요 귀여운 것, 요거 귀여운 것. 비로소 삶의 활기가 돕니다. 막 유산 남기고요. 개한테. 미쳤어 미쳤어. 다른 집보다 더 값나가는 사료 막 사주고요. 한약 보약 주고요.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참 이게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선 보는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 남자 5명 여자 5명 나와가지고 영숙, 영호 뭐 이렇게 이름 가명해가지고 사랑의 짝대기 하듯이 하는데 이 나는 솔로에 나오는 5명의 남자 여자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선택되지 않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한다는 거에요. 10명 다. 선택되지 않기 위해서. 왜냐? 왜 그러느냐 하면은 여기 출현하기 전에 전부 다 한 천 번씩은 선택을 했어. 내가 선택한 천 번 중에 그 동그라미 속에 더 나은 다른 사람이 없는가 찾아나왔던 거에요. 다들 선택되지 않기 위해서 딱 견디는 거에요. 하다가 누구 하나 맘에 드는 사람이 등장하잖아요. 누구 하나 선택하면 와르르 다 몰려듭니다. 남한테 지기 싫거든요. 해가지고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자기 빼놓고 모든 게 오락입니다. 인간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 자기 빼놓고 자기한테만 진지해요. 자기 빼놓고 전부 다 오락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어떻고 오락시간하고 있습니다. 자, 집단은 이걸 강제로 이러한 사적인 이러한 오만함을 집단이 다 박살내고 억눌러버려요. 집단. 뭐로 억누르는가? 법으로 억눌러버립니다.


법으로 억누른다는 말은 뭐냐? 너희들 가운데 가장 의로운 사람이 대장질해라 하고 서열이 계급이 맺어집니다. 너희 중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이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대장질해버려요. 집단의 생리가 그래요. 집단의 생리가. 그걸 구체적으로 하면 집단은 보편적 주체가 되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집단을 하나로 하게 되면 그 하나가 하나의 인간으로 대상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사람은 여러 명이 있다. 골치 아파요. 단체로 이야기해요. 단체로 뭐야. 단체로 한사람 다루듯이 그렇게 해야 간단하게 정리정돈이 잘돼요.


예를 들어야 쉬운데 예를 들어서 옛날 60년도 시골에서 농사 짓다가 여자는 공부할 필요 없어. 초등학교만 나오면 돼. 시집이나 잘 가면 돼 해가지고 집에서 농사 지으니까 젊은 아이들이 농사 짓기 싫어하거든요. 힘드니까 농사도 뭐 밭도 넓지도 않고 해가지고 서울로 옵니다. 서울로 가게 되면 그냥 무작정 서울 가지요. 서울 가면 영자도 있고 거기서 나온 게 영자의 전성시대. 무작정 상경을 합니다. 어딜 가느냐? 두 군데 가요. 가발공장과 오라이 하는 버스 안내양.


문제는 가발공장과 버스 안내한다는 것은 집단 속에 들어가는 거에요. 집단 속에 들어가면서 거기서 뭐냐 하면은 내가 원치 않는 법이 그걸 억눌러버려요. 집단이니까. 개인을 용납하지 않거든요. 억눌러버리죠. 억눌러버렸을 때 개인으로 할 수 있는 게 뭐냐? 여기서 빨리 그 집단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겠지요. 억누르니까요. 탈출할 때 그냥 빈손으로 탈출하면 또 어디가야 돼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돈 벌고 나와야 돼요.


돈 벌고 나오는 방법은 뭐냐? 바로 버스 탈 때 동전을 자기 주머니에 챙기는 거에요. 나중에 그걸 알고 버스 회사들이 삥땅하는 아가씨들 조사한다고 인권적으로 문제가 된 거에요. 그런 식으로 인간은 집단속에 돈 벌고 돈 빼먹고 또 다른 집단에 가서 돈 빼먹고 계속해서 자기가 점점 더 돈 많아서 집단의 윗자리에 높은 자리에 앉아있으면 그것을 자기는 성공한다고 보는 거에요. 그걸 누가 그렇게 조작했습니까? 집단이 그렇게 만든 거에요. 집단이. 촌에 있으면 그럴 필요 없어요. 촌에 있으면 부모 말 듣고 착하게 살면 돼요. 착한 순이, 착한 영철이 되면 돼요.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 착함을 인정 안 해요. 권력을 인정해요. 권력을 인정하지 착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18장 9절에 보면 또 비유가 나와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이 세상을 주께서 또 비유로 이야기합니다. 비유입니다.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고 비유란 말이죠. 자, 비유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비유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말씀으로 이쪽을 이 전체를 죽이도록 공격하는 거에요. 말씀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공격해서 이 비유의 취지, 나는 너를 공격한다 어디까지? 너희는 이 말씀에 의해서 죽어 마땅해. 심판받아 마땅해 라는 그 취지를 알아듣는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이 이 현재 인간집단은 하나의 집단입니다. 인간집단에 속하지 않고 인간집단의 바깥의 천국이라는 집단에 하나님께서 빼돌려요. 빼돌립니다.


왜 빼돌리냐 하면은 당장 이 비유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대신 예수님 이 땅에 왔다가 이 경로, 아버지께서 빼돌리는 경로를 통해서 아들의 나라, 천국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어 마땅함의 말씀으로 와서 빼돌리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의 경로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자신의 경로고 이후에는 성령 받은 자들이 예수님이 앞섰던 예수님의 경로 그대로 밟아서 그대로 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야기할 때 바리새인은 나쁘고 세리는 착하다 이렇게 하면 안 되겠지요.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느냐 하면은 모두 다 나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 다. 모두 다 나쁜 사람인데 그러면 모두 나쁜 사람 가운데서 예수님의 경로를 잘 보여줄 사람은 뭐냐 하면은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말씀과 공격할 취지와 부합이 돼요. 그런데 누가 가장 부합이 안 되느냐 하면은 분명히 모두 나쁜데 그 사회 속에서 법적으로 서열화시켜가지고 나는 착하다고 하는 사람이 등장할 거 아니겠습니까.


왜? 모든 사람이 그걸 부러워하니까. 그 사람이 대표자쯤 되거든요. 집단은 단수로 표현되니까. 하나의 집단 자체가 여러 명이 있더라도 하나의 집단이에요. 마치 다윗이 인구 조사하는 것처럼. 하나의 집단이 된다고요. 하나의 집단이. 이런 이야기가 바로 구약에도 있었어요. 구약. 시내 산에서 율법 주지요. 그 다음에 제사 있지요. 시내 산 12지파 가운데서 누가 대표 지파였습니까? 모세당시에. 모세가 어느 지파에요? 모세가 레위지파죠. 레위지파가 다른 11지파보다 우위에 있었던 겁니다. 레위지파가. 계속 가다가 다윗 등장하고 다윗지파가 유다지파로 바뀌지만.


이처럼 어떤 집단이 되면 대표적인 대표 하는 게 있어요. 대표 하는 게. 그걸 지도자라고 하지요. 어떤 집단이든 간에 그 집단의 성격을 한 몸에 다 합류해서 딱 그 사람만 봐도 우리 집단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한방에 알려주는 그 집단, 표현이 있어요. 그걸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생리에 대해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 자가 누구라 했습니까? 여기에? 11절에 누가 나오지요. 누가 나오지요. 이름이 뭡니까? 바리새인. 바리새인.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가? 하나님은 무시하지 않는데 바리새인 무시해가지고 복음을 모른다고 제가 안양 강의에서 했지요? 하나님은 존경한다고 하면서 바리새인은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누구한테 죽었어요? 바리새인에게 죽었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만해서 죽였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안다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예수님을 죽일 만해서 죽였다는 그 바리새인이 없으면 십자가 사건은 일어날 수가 없지요. 그럼 십자가 안에 어떤 취지가 같이 놓여있다? 바리새인 취지가 같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파악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우리는 모르니까 그걸 미제로 남겨두고 바리새인이 그토록 미워했던 어떤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죠. 바리새인이 그토록 미워했던 분.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바리새인은 뭘 대표하고 있다? 바로 인간세계, 그 당시에 율법과 여호와를 믿는,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니에요. 여호와를 믿는 그 집단의 대표자들이 누구냐? 바리새인들이에요. 실제로 그 바리새인의 역사를 보게 되면 에스라, 느헤미야 이후에 그때 성전 있었어요. 이후에 성전 불타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식으로 그 자기 정체성을 유지했는가? 회당입니다. 회당. 예루살렘에 회당이 4500개 있었다는 설이 있어요. 4580개 인가? 엄청나게 많았지요.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교회보다 회당이 굉장히 많아요. 유대인 지역이니까. 회당 중심에서는 오직 말씀 중심이에요. 개혁주의신학같애. 양 잡고 소 잡고 안합니다. 말씀 중심하고 특별히 절기 때 특별한 날 때는 실제로 양고기 먹고. 랍비 복장 이상한 복장 있잖아요. 무거운 옷 걸치고 특별한 복장을 한 제사장 선도해가지고 유대교식 하지만 주로 그들은 토라, 구약성경, 모세율법 그걸 필사하고 그걸 외우고 그걸 하는 사람이 현재 이스라엘 국민 가운데 약 10~15% 돼요. 그들은 군대도 안가요. 안가고 배 째라는 식이에요.


오실 메시아만 기다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말씀 그대로 감람산에 메시아 오게 되면 너희들 다 죽었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때를 위해서 기다리는 거에요. 그때를 위해서 그들은 이제 빵 모자 비슷한 거 쓰고 그 다음에 서쪽 남아있는 성전의 터에 완전히 로봇처럼 상체 몸 흔들어가면서 쪽지에 써서 바위틈에 넣어 놓고 흔들고 남자는 한 70% 자리, 30%는 여자는 칸막이 해놓고 있고 해가지고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해가지고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에요. 펭귄 비슷한 옷 입고 시커먼 옷 입고 자기들끼리 돌아다니고. 애는 되게 많이 낳아요. 회당 중심으로 하는 겁니다.


이 회당 중심이니까 그들의 모든 삶의 이상은 뭐냐 하면은 말씀 중심으로 가는 거에요. 여기 바로 이 회당 중심과 누구하고 싸웁니까?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처절하게 싸웁니다. 처절하게 싸우는 방식이 뭐냐? 너희는 무엇이 절박한지 모른다. 너희는 무엇이 절박한지 모른다. 더 풀이하자면 너희들은 말씀이 너희를 팬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거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성경말씀을 펼 때 성경 말씀을 보지요. 보면 안돼요 들려야 돼요. 성경 말씀이. 시각이 청각으로 바뀌어져야 돼요. 그래야 주체 속에 들어와요.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를 줘팹니다. 이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모든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잠자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을 이게 자극을 시켜줘요. 모든 말씀이. 그걸 자극시킬 때 나오는 게 뭐냐 하면은 자기의가 나와요. 자기 의. 자기 의인데 이걸 알아듣기 쉽게 하면 자기 변호, 자기 변명, 더 심한 것은 자기 연민, 자기 옹호. 이건 필히 뭐냐? 누구 탓이다? 남 탓으로 돌려가지고 남 탓해버리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가 여기서 다 깨지는 거에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다 깨져버립니다. 이웃 때문에 내가 조져졌는데 무슨 사랑이 됩니까. 안되지요.


인간은 어떤 조건이냐 하면은 이 죄 많은 인간 속에서 조건은 내가 산다는 것은 남을 미워하는 조건 하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그리고 이 말은 같은 말인데요. 남이 산다는 것은 내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럼 피해 보는 사람이 그냥 가만있겠어요? 뭘 하겠어요? 뭘 하겠지요. 뭘 합니까? 로마서 12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여기 원수란 말이 나오지요. 사도 바울이 원수란 말을 언급한다는 것은 인간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복수할 것만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에요.


내가 미쳤지 저런 남자랑 결혼하다니.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이 사라진 적이 없어요. 아이고 부모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고생 20년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나이 40 넘도록 고생하네. 도대체 이렇게 자식 고생 시켜놓고 엄마 아빠 필리핀 놀러간다고? 베트남 놀러간다고? 아이고 자식은 힘들어 죽겠는데 아이고 내 아이는 누가 봐주나. 참 팔자도 좋다 정말. 남들처럼 공부나 좀 시켜주지. 이게 뭐야. 이게. 무책임하게 버려놓고 지는 놀러가고. 나중에 부모 아프면 누가 돌봐야 되는데? 내가 돌봐야 되는데. 전부 다 딜이에요. 딜. 거래하고 있는 거에요. 거래하고 있는 거에요.


나만 낳지 남동생은 많이 낳아가지고 둘이 싸우고 내가 낳지 말라고 했잖아. 어떤 동영상은 이런 게 있어요. 어떤 흑인아이인데 둘이 형제가 있으니까 엄마가 하는 말이 나 임신했다 하니까 아우! 미치겠어. 5살 먹은 애가 둘이 있는데 왜 또 애를 낳아?!! 엄마 미쳤어 정말! 모든 사람은 이기주의에요. 내가 산다는 것은 남에게 피해주는 것이고 남이 멀쩡하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피해를 입은 흔적처럼 느껴지는 거에요. 인간은. 나는 아픈데 네가 왜 웃냐 이 말이죠. 니가 왜 웃어! 나 아프면 너도 아파야지. 이게 가족이지. 제가 얼마 전에 오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한테 이야기했어요 너희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세상에 얼마나 장례식장에서 웃던지 내가 좀 민망했다 하니까 왜? 그때 웃으면 복이 와요 했거든. MBC 코미디 하는데 너무 웃겨가지고 구봉서, 배삼룡이 너무 웃겨가지고 장례식에서 웃음바다 터져버렸어요.


너희가 자기한테 절박한 거에요. 자기의 뭐를 지킨다?? 자기 의를 지키는 거에요. 나는 죽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13절 봅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있음에 누가 방해되었다?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았고 훼손되었고 하나님을 공격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었습니다 주여, 이제 주님 앞에 그게 들통 났고 들켰으니까 제가 자백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거기에 반해서 11절에 바리새인 말 잘 들어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비유니까.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그 다음에 뭡니까? “같지 아니함을”, 그 다음에 뭡니까? “감사하나이다” 개성 있지요.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서열화시킨 거에요. 나는 위쪽에 있는데 쟤는 저 구석에 밑에 쳐박혀있으니까 내가 감사거리가 뭐냐? 내가 저 세리보다 우열하다는 그런 감사거리를 제공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보시고 18장 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뭐가 올 때입니까? “인자가 올 때에”. 인자가 올 때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말하고 주님이 생각하는 종말이 달라요. 사람들은 그 동안 역사라는 것에 자연적인 현상에 익숙해져가지고 해와 달이 그대로 있고 인간의 역사가 활동하면 아직 종말은 마지막은 아니라고 여겨요. 자기들이 멀쩡하고 역사가 잘 돌아가고 어제나 오늘이나 해가 그대로 있고 해 뜨고 해 지고 달 지고 달 뜨고 이걸 종말 현상으로 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약속, 말씀에 의하면 메시아가 죽으면 그게 종말이에요. 메시아가 죽으면. 하나님이 죽으면 종말이에요. 하나님이 죽을 때 그냥 죽지 않고 어떻게 죽습니까? 저주 받고 심판받아 죽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죽으면 하나님이 합류한 그 영토 있잖아요. 예수님이 어디 합류했습니까? 인간세계에 합류했지요. 인간세계에 예수님 폭탄 쥐고 터져버린 거에요. 그러면 메시아, 하나님이 없는 곳은 종말이 아니지만 메시아 없는 곳은 종말이 돼요. 메시아 없는 곳. 메시아 없는 곳은 종말이에요. 메시아가 떠나버리면 이미 종말이에요.


무엇이 절박하냐? 메시아가 어디 갔어? 이게 절박한 거에요. 메시아가. 그분은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에. 심판주로 되시기 전에 우선 자기 백성을 건질 구원의 근거를 말씀을 주시고 심판주로 들이닥치는 겁니다. 너희들이 생각했던 너희들이 살고자 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왜 죽어 마땅함을 알게 한 방식으로 성경 해석을 다 그렇게 한 거에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처음에 강의했잖아요. 말씀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우리가 뭐 된다고요? 어느 말씀 지킬게 없지요. 그게 바로 세리가 했던 고백하고 동일한 고백이니 축하드립니다. 죄인 주제에 물 한 컵 마시고 우리나라에 장마에 비가 많이 왔다고 하잖아요. 서울에 비 얼마나 왔어요? 합해서 한 400mm 왔습니까? 400mm왔다 치고 1600mm 안 온 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성에 지하도 물 찼잖아요. 전국에 지하도 물 안 찬 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버스 한 대가 둥둥 떴지요. 3대 4대가 안 뜬 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다 죽어도 할 말 없어요. 그럼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게 하나님이 살려주는 거에요. 왜? 못났기 때문에. 내 힘으로 못 살기 때문에 살려주는 거에요. 내 힘으로 살 어떤 의로운 근거가 없기 때문에. 죄인 주제에 오늘 당장 죽어도 되는데 계속 살려줌으로서 죄 보다 은혜가 더 강하다는 것을 매일같이 느끼게 해주니까 이것이 바로 주께서 성경말씀에 완성된 다 이루었다의 적용 대상이 되는 거에요 이게.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종말의 현상은 성도가 생산된다 에 있어요 성도가. 종말의 현상은. 성도가 생산되는 게 왜 신기한 일이냐 하면은 종말은 모든 인간이 다 죽어야 마땅해요. 다 지옥가야 되는데 천국 가는 사람이 생산됐다는 것은 누가 다녀갔어요. 예수님도 다녀가고 성령이 다녀갔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자기 못난 맛에 살아간다는 이것은 성령이 다녀갔기 때문에 자기 못난 맛에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너 왜 헌금 천원밖에 안했어? 천원이라도 할 수 있는 능력주심을 난 감사해요. 이게 성도 아닙니까. 이것도 알아가지고 돈도 줄이고 가계부 보태고 감사는 감사대로 챙긴다 꼼수 부리지 마시고요. 바리새인은 의롭기 때문에 여기 토색, 불의, 간음, 세리 같지 아니하고 바리새인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종말,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의인이 하나도 없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거에요. 의인은 없고 다 죄인밖에 없다는 종말의 안목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모르고요 토색이 뭔지도 모르고요 불의가 뭔지 간음이 뭔지도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의 본능대로 자기는 그냥 자기가 의로워지고 옆에 있는 세리 보고 복수하고 싶은 거에요. 저 지저분한 것 물 다 버려놨대 이런 식으로 하지요.


여기 13절에 보면 여기 세리의 행동이 뭐냐? 하늘을 우러러 보지를 못하고 뭐합니까? 그냥 가슴을 치지요. 아까 18장 1절에서 8절에 보면 과부는 누구를 찾아 갑니까?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지요. 세리는 찾아갈 재판관도 없어요. 그냥 가슴을 치는 거에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종말론적으로 미리 당겨서 자기가 심판 받아 마땅함을 미리 당겨서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


그러면 사람이 이렇게 정말 아파서 죽게 되게 되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되지만 새삼 내가 살아 왔던 것이 이게 무의미한 정도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의미마저 내가 갉아 먹고 훼방하고 방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쁜 짓해서 죄인이다가 아니라 나 나름대로의 의미를 바리새인처럼 의미를 챙길려는 이 자체가 주님의 심판과 용서를 훼방하고 방해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가슴을 치는 거죠. 가슴 너무 쳐서 멍들고 하지 마세요. 이 몸도 우리 몸이 아니고 주의 몸입니다.


끝으로 14절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게 사랑 때문에 그런데 어떤 새댁이 신랑을 너무 사랑했어요. 해가지고 첫날밤 혼인 치루고 난 뒤에 신랑이 아침에 죽었어요. 하룻밤 지나고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새댁이 환장한 거죠. 환장해서 그 신랑이 너무 좋고 마음에 들어서 잊어버릴 수 없어가지고 신랑의 관을 찾아가요. 신랑 관에 자기가 같이 눕습니다. 누워요. 왜냐? 신랑이 죽었으니까. 나 신랑 따라가겠다고 누워요.


자, 신랑이 왜 죽는지 이유를 몰라요. 이유는 모르는데 죽었습니다. 이유는 모르는데 죽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신랑이 한 때 있었잖아요. 의미 있게 있었어요. 내 신랑이니까 의미 있는데 죽어버렸으니까 신랑도 죽었지만 뭐냐 하면은 내가 그 남자의 아내라는 사실도 살아있는 내가 통째로 의미가 날라 가버린 거에요. 예수님 죽어버리면 정말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 죽은 세상에서 내 의미도 같이 날라 가버려요.


그러면 여자가 뭐하느냐 하면은 신랑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자기도 신랑 따라 죽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관에 누워서 죽었어요. 월식이 있는 날에 그 여자하고 그 아들을 사랑하는 시어머니하고 둘이 살아났어요. 어느 부잣집 별장에 살아났어요. 그게 그 드라마 이름이 뭡니까? 아씨 두리안. 그 작가가 옛날에 유명했어요. 이 내용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은 인간은 타자가 없이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 세리한테는 비로소 나한테 내가 누군지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의미를 제공한 유일한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유일한 의미를 준거에요. 우리가 경험하지 않는 것, 죽고 부활까지 의미되신 주님께서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키는 게 신앙이 아니에요. 예수님 가신 곳에 갈래. 이 사랑, 끈끈한 이게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사랑이 새 계명이에요. 사랑에는 계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걸로 충분해요. 부산에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질문이 이겁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는 거에요. 왜 순서를 지어 놓고 소망, 믿음은 재끼고 사랑을 왜 돋보이게 합니까? 하는 뜻이겠죠?


그래서 답변했지요. 인간이 불가능한 원천이 사랑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내가 존재하든 구원을 받든 어떤 것도 불가능하게. 불가능하다는 말은 네가 설칠 필요도 없고 네가 고민할 필요도 없게 만드는 것은 뭐다? 사랑이다. 이 세리는 바로 사랑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의 생산물이 이 세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과 우리 자신과 주님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정립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세상 따라가지 말고 내 판단 믿지 말고 남들이 뭐라 하는 소리 듣지 말고 주께서 살아있는 음성으로 주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려주는 알림 받는 그런 주님의 생산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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