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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9 23:44:32 조회 : 471         
흐름과 멈춤 누가복음 18:34 230919 이름 : 이근호(IP:59.23.18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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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15.♡.177.240) 23-10-10 13:54 
강남-누가복음 18장 34절 (흐름과 멈춤) 230919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8장 31절부터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참 이해하기 힘들지요. 한 사람의 모든 말씀에 집중된다는 게. 정말 이것도 어렵지요. 그런데 집중했는데 결과가 뭐냐?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이 하나하나가 선지자의 모든 말씀이 인격과 만날 때 말씀이 우리와 만날 때는 우리한테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이 희한하게도 예수님만 만나면 예수님은 핍박을 받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뭘 하셨는가? 산상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산상설교. 그 다음에 계속 읽어보게 되면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삼 일 만에 살아난다는 것이 성립이 될려면 앞서서 죽음이 있어야 되고 그 죽음의 질, 왜 예수님이 죽느냐?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모질게 죽도록 유도하는 자들이 있어줘야 됩니다.


그들은 뭐냐? 선지자의 말씀을 믿고 지키고 기다리는 자들이었어요. 같은 선지자의 말씀을 두고 선지자의 말씀의 완성은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서 구현되는 방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내가 보고 내가 지켜서 지킨 내가 참 잘했어 너 천당 가겠어 해서 천국 가는 그 구현하는 방식 중에서 이게 둘이 통합이 안 된다는 거에요. 분류돼야 한다. 이게 둘이 분류가 돼야 돼요. 선지자의 완성 방식이 둘 분류가 된다. 하나는 예수님 방식, 이거는 인간 방식.


분류가 되는데 분류가 되면 인간 방식에서 예수님 방식을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 뒤에 보면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옆에 같이 동고동락하는 제자들도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방식에서 예수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면 선지자의 말씀의 방식이 인간에게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방식이다.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방식이다.


그 이유 중에 하나를 찾으라면 산상설교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산상설교 마태복음 7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7장 6절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 해놓고 예수님이 내 말을 개나 돼지 같은 인간에게 주지 마라. 그러면 주지 마라 했는데 좀 주면 어떤데? 주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그들이 그 진주와 그 거룩한 것을 그 다음에 뭡니까? 발로 밟고 그 다음에 이걸 찢어버려요.


다시 말씀 드려서 산상설교에서 7장 6절에서 거룩한 것을 개나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왜냐 하면은 개와 돼지가 그것을 발로 밟고 찢어버린다. 그러면 산상설교를 할 때 인간은 본인은 본인 마음을 몰라요. 모르는데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은 인간 마음에 어떤 것이 지금 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다가 말씀을 던져버린 거에요. 말씀 줘봤자 그냥 안 듣습니다가 아니라 그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고 분개를 유발할 말씀만 지금 주께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주셨다는 거에요.


그렇게 해놓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뻔히 아시면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은 이 거룩한 것을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주님 쪽에서 사람 취급도 안합니다. 개와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럼 이 산상설교를 우리가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실천에 옮긴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개와 돼지에게 던져야 되지요. 그래야 밟고 찢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남한테 안 좋은 인상 받으면 싫어요. 의도적으로 분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인간 쪽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다시 누가복음 18장에 와서 우리가 여기서 첫 번째로 저희가 깨닫지 못한다 34절 말씀. 이 말씀을 알기 위해서는 뭐부터 우리가 알아야 되느냐 하면은 백설공주 이야기입니다. 백설공주의 엄마가 왕비인데 왕비가 병으로 죽고 난 뒤에 계모가 들어왔어요. 계모가 들어올 때 그때 백설공주는 굉장히 어렸을 때입니다. 백설공주 낳고 난 뒤에 곧장 죽었으니까 백설공주가 2살 3살밖에 안 된 그 때에 그 계모가 왔던 그 나라에 마술거울이 있었어요.


마술 거울이 있었는데 처음에 계모가 와서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이 세상에서는 왕비가 제일 예쁩니다.” 흐뭇했지요. 그런데 백설공주가 7살 됐을 때에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냐?” “왕비도 예쁘지만 왕비보다 백설공주가 더 예쁩니다.” 라고 하거든요. 7살 되었으니까 점점 더 커가요. 그러니까 왕비가 어떤 사냥꾼에게 지시해가지고 몰래 백설공주를 잡아다가 백성공주의 심장을 가져와라 라고 했는데 사냥꾼이 백설공주를 사랑해서 그냥 죽였다고 거짓말하고 그냥 넘어갔어요.


그래서 계모는 라이벌이 죽은 줄 알고 있다가 몇 년 뒤에 요술거울에게 물었어요.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냐?” 하니까 “왕궁에서는 왕비님이 제일 예쁩니다. 그런데 왕궁 밖에서는 백설공주가 예쁩니다.” AI가 거짓말 못하는거죠. ChatGPT는. 그래서 누구 시키지 않고 왕비가 직접 나서서 독이 있는 빗을 가지고 가서 목 조르고 죽일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일곱 난장이가 와가지고 도와줘서 살아났어요. 하다하다 이제는 독이 든 사과 가지고 백설공주를 직접 먹여서 죽은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 계모는 자기 왕궁으로 돌아왔지요.


일곱 난장이가 와보니까 진짜 백설공주가 죽었어요. 백설공주가 너무 안타까워서 흙에 묻지도 못하고 관 속에 있었습니다. 그걸 지나가는 이웃집 왕자님이 관 속에 있던 백설공주가 너무 예뻐서 뽀뽀를 했더니만 목에 걸린 독 있는 사과가 톡 튀어나와서 백설공주가 다시 살아났어요. 살아나고 난 뒤에 그 왕자가 그 동안 공주에게 일어났던 일을 듣고 분개해가지고 계모한테 빨간 신발을 신게 하고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춤추는 벌을 내려가지고 완전히 계모인생 작살내고 둘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 라는 이야기, 이게 백설공주 이야기거든요.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누구냐? 백설공주도 아니고 왕비도 아니에요.


백설공주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거울입니다. 거울. 마법의 거울. 왜냐? 거울은 유일하게 말하지 않는 것은 거울이에요. 누가 제일 예쁘냐 할 때 거울이 앞서서 이야기한 적 없어요. 물으니까 답변한 거에요. 물으니까. 계모가 거울한테 물으니까 답변한 거에요.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거울이라는 것은 백설공주에서 이 거울이란 거울 이미지거든요. 거울 이미지. 모든 인간이 다 이런 게 있어요. 자기가 먼저 그 이미지, AI 인공지능이라고 보면 돼요. 이미지에다가 자기가 먼저 말을 걸어요. 내가 타자에게 먼저 말을 건다고요.


말을 걸고 말을 걸으면 그 거울 이미지가 그걸 되받아오죠. 튕겨져나온 거에요. 내가 말 걸고 내가 듣고 싶은 답변을 내가 챙기는 겁니다. 이게 모든 인간의 심성에 이게 다 들어있어요. 모든 인간의 심성에.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계모가 백설공주한테 질투를 느꼈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은 뭐냐 하면은 계모 본인이 계모한테 질투를 느끼는 거에요. 자기의 이상향에 이루어지는데 결핍이 있다는 것이 못 마땅한 겁니다.


그리고 그 왕자가 관 속에 있는 백설공주를 사랑했다고 하는데 사랑은 반드시 미움이 없으면 사랑이 없어요. 사랑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원하는 내 사람, 왕자 입장에서는 백설공주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러면 그 백설공주를 이미 자기 사람으로 찜 찍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미우냐 하면은 백설공주를 미워한 자는 이제부터 왕자 자기를 미워하는데 대해서 내 미움에 대한 내 사랑을 지키기 위한 철저한 행위가 뭐냐 하면은 철저하게 조롱하는 거에요. 미워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백설공주 이야기는 거울 하나 두고 결국은 진짜 참된 이 세상의 모습은 그냥 말이 없는 거울 있는데 말이 없는 거울이 이 세상에 핵심 요소고 거기에 온갖 인간들이 거기에다가 거기서 어떤 사태를 유발시키는 일들이 벌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계모 이야기, 지금 우리가 뭘 모르느냐 하면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지요. 여기서 우리가 풀어야 돼요. 왜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제자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거든요.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면 우리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이 말씀이. 주님께서 오죽했으면 개, 돼지한테 내 말을 전하지 말라고 했겠어요. 너희가 개, 돼지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자신을 알려면 우리가 개, 돼지가 되어서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돼요. 그래야 주님 입장에서 볼 수 있지 나는 착실하니까 개, 돼지 아니죠 이러면 깨닫지를 못하는 겁니다.


제자들은 개, 돼지 아니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제자들은 개, 돼지 아니라고 우겼는데 예수님 하신 말씀을 못 알아듣는 거에요. 왜 개, 돼지도 아닌데 못 알아듣는가. 그거는 예수님이 개, 돼지에게 전하지 말라는 말씀도 못 알아들었던 거에요 사실은. 인간은 들을만하면 듣고 꼭 백설공주에 나오는 계모 같애. 자기 필요한 것만 듣고 필요하지 않는 것은 그런 소리 안했다고 우기는 거에요. 예수님을 거울로 봅시다. 우리는 부지런히 예수님께 말을 겁니다. 그래봤자 소용없어요. 내가 일방적으로 전한 말을 내가 되돌려받을 뿐이에요.


그리고 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했는데 예수님 보시기에 너는 내 말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나는 왜 주님 말을 못 알아들었습니까?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된다 이 말이죠. 이것 때문에 그래요. 멈춰있기 때문에. 인간은 멈춰있어요. 예수님은 고난 받고 십자가 지는 스케줄이 짜여져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멈춰있어요. 얼마 전에 리비아 대홍수, 지진 일어났잖아요. 태풍이 와가지고. 지중해에서 일어난 태풍. 그 태풍이 일어나가지고 있는데 지중해에 리비아 나라 있는데 강이 있는데 댐을 두 개를 했어요. 두 개를 했는데 위성 사진으로 보게 되면 리비아로 다 갔어요.


지금 몇 명 죽었느냐 하면은 바닷가 이쪽에만 해도 11,000명이 죽었습니다. 그냥 휩쓸고 지나가는 거에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왜 죽었습니까? 멈춰있었어요. 멈췄다. 멈췄다. 그 당시 나라에서 광고하기를 나가지 말고 집안에 있으면 됩니다 했거든요. 집안에 있어가지고 물 높이가 7m 높이였어요. 7m높이로서 완전히 싹쓸이해서 지중해로 북쪽으로 다 가가지고 11,000명이 죽었습니다. 합쳐서 20,000명 이상 죽었어요. 지금 댐 터진 물은 멈춘 게 아니에요. 지금 목표가 있습니다. 나는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주님의 멈춤이 아니고 움직임이 있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어떤 사태가 벌어진지도 모르고 자기가 멈춰서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한 거에요. 자기는 꿈쩍도 안하고. 이거는 뭐냐? 백설공주 계모 타입이에요. 나는 꿈쩍도 안하고 내 자체를 지키면서 거울보고 나 어때? 라고 물은 거에요. 나 어때? 거울아 거울아 제발 부탁이다 내가 제일 예쁘다고 해줘 한 거에요. 그러니까 거울은 거짓말 못하기 때문에 계모의 멈춤 때문에 폭력이죠 권력이죠. 계모의 멈춤 때문에 어쩔 수없이 그 계모의 횡포로서 움직여야 되는 존재가 있었어요. 누구냐? 백설공주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사는 게 만만치 않아요. 후달리고 늘 쫓겨다니고 그런 거에요. 죽고.


예수님 왜 죽었습니까? 인간들이 멈추길 원한 거에요. 인간은 본인의 자리, 본인의 권력 그것으로 멈춰있으니까 누가 움직여야 돼요? 어느 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움직여줘야 되죠. 멈춰있는 쪽이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리 이해해도 움직이는 요소가 빠져버리니까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 당시 제자들이. 제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이 하나의 거울이니까 요술 거울이에요. 예수님 잘 만나서 우리는 횡재했다. 지금 그냥 자기가 멈춰있기를 원해요. 이 상태로.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주님이 고난 받고 죽는다면 같이 합세를 해야 돼요. 무빙. 같이 움직여줘야 된다고요. 그런데 어느 인간도 어느 제자들도 본인이 나는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체돼야 되고 움직여야 되고 없어져야 돼 그쪽으로 가야 돼 라는 상상을 사전에 생각한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 치고. 당신은 뭐 인간도 모르면서 인간 치고 주님과 합세한 사람 없다고 하는가. 당신이 인간 세상에 대해  알아? 알지요. 어떻게 알아? 노래 세 곡으로 알아.


지금 이 노래 나오는 내용 없으면 예수님 십자가 고난 받고 핍박 받고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제자들이 못 알아봤잖아요. 그러면 문제는 간단해요. 왜 우리는 이 말씀을 못 알아보면서 안다고 우기는가. 도대체 우리 속에 어떤 요소가 주님의 십자가 고난 받고 부활한다는 이 댐 터지는 이 엄청난 말씀을 어떤 요소가 내가 못 알아듣게 만드는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인데. 이 노래는 가사만 봐도 가락이 금방 나오지요. 김광석 노래. 노래는 안 틀겠습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 안에 가득한데
이렇게 홀로, 홀로 동그라미 치세요. 홀로. 멈춰있어요. 홀로.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홀로 멈춰있어. 홀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홀로 멈춰있어요.
이렇게 홀로 누워 천장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누운 내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이슬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 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창 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하루 지났습니다. 밤 샜어요. 밤 샜는데 그 방에 누가 있습니까? 홀로. 자, 홀로 있을 때 하는 행동 한번 보세요. 홀로 있을 때. 홀로가 움직입니까? 멈춰있습니까? 멈춰있지요. 멈춰있는 상태에서 뭘 하느냐 하면은 바로 요술거울에게 말을 건넵니다. 뭐냐 하면은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 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바깥에 있는 자연세계와 대화를 시도합니다. 홀로. 자연은 인간의 거울이에요. 자연은 인간의 거울입니다. 만만한 게 자연이에요. 그래서 홀로 있는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게 남하고 만나는걸 싫어해요. 그래서 만만한 게 개 키우고 고양이 키우지요. 이건 말 잘 들으니까. 누굴 만나면 상처입어서 만날 수가 없어요. 홀로 내가 멈춰있는데 흠집을 내기 때문에 그래요. 내 홀로에 흠집을 내기 때문에 이거는 그냥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다가 밤 새지요.



창 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 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본인에게 이야기 안 해요. 유리창에 글자만 써요. 너는 내 마음 알겠지. 어떻게 알아요. 자기혼자 지금 멈춰있는데. 그래서 김광석 노래에서 끄집어낼 것은 모든 인간은 홀로 산다는 거에요. 이걸 당신은 인간도 모르면서 아느냐 하는데 인간은 홀로 살아요. 멈춰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무슨 말해도 못 알아들어요. 야 지금 댐 터졌다. 예수님 자신이 댐이거든요. 댐 터졌다 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댐 터졌으면 나 홀로 있는 집에 가만 있으면 아무 일 없겠네. 아니요 다 휩쓸려가지요. 다 망합니다. 제자들은 망해도 무슨 말인 줄 몰라요.


그 다음에 두 번째 너를 사랑하고도 전유나. 이 가사는 아까보다 더 심해요. 가사 읽으면 가락이 그냥 나와요.
너를 사랑하고도 늘 외로운 나는.
막 나오잖아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이고.
자, 여기서 이 가사에서 꼭 꼬집고 싶어서 이 가사를 가져 왔는데 여기서 단어가 뭐냐? 어두운 방구석에 그 다음에 뭡니까? 꼬마 인형. 꼬마 인형. 내가 그냥 꼬마 인형인데 무슨 눈을 갖고 있습니까? 무슨 눈입니까? 멍한 눈. 아까 김광석 노래하고 너무 닮았지요. 멍한 눈. 계속 세월이 허비되고 있어요. 허비되든 말든 나는 꼬마인형인데 뭐. 나는 무생물체. 그 꼬마인형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식탁위에 있어요? 방 한가운데 있어요? 어디 있습니까? 구석에. 그것도 어떤 구석. 어두운 방구석에 꼬마인형처럼 멈춰있어요. 멍하니.


다른 가사는 볼 것도 없어요.
저 산 하늘 노을은 항상 나의 창에 붉은 입술을 부딪쳐서 검게 멍들고.
난리도 아니죠. 그런데 그 뒤에는 말할 필요도 없는걸 집어넣어놨어요.
이젠 더 이상 슬픔은 없어.
발악을 해요 발악을. 꼬마인형인데 끝났지 뭐.
너의 마음을 이젠 알아 사랑했다는 그 말 난 싫어 마지막까지 웃음을 보여줘.
가짜 웃음이죠. 가짜 웃음. 이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지요. 지가 하도 서글퍼서 썩소 날리는 거지 웃는 거겠어요. 모든 인간이 아무리 식구가 많고 대가족 있어도 청소년들 전부 다 방구석에 멍한 꼬마 인형 되어있어요. 전부 다 멈춰있어요.


그런데 아까 전유나 노래는 꼬마인형 김광석 노래는 뭡니까? 홀로 누워 볼 게 뭐가 보입니까. 천장만 보이죠. 천장만 보이는데 이번에 세 번째는 좀 발전합니다. 이거는 노래까지 들어봐야죠.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어떻게 발전하는가 한번 보세요.
널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어
하지만 잊진 않았지 수많은 겨울들 나를 감싸 안던 너의 손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에 또 다시 살아나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 때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줘.


아까는 홀로 꼬마 인형이었잖아요. 홀로잖아요. 이거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홀로가 이 멈춤이 어떤 식으로 타인을 끌어당기는가 한번 보란 말이죠. 내 쪽에 찾아와달라는 거에요.
널 위한 나의 기억이 이제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어
하지만 잊진 않았지 힘겨운 어제를 나를 지켜주던 너의 가슴
이렇게 내 맘이 서글퍼질 때면 또 다시 살아나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날 부를 때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줘.


우울증인데 우울증은 혼자 있다고 우울증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혼자 있다고 우울증은 혼자 있어서 우울증이 아니고 우울증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결핍되게 되면 우울증이 발생되는 거에요. 여기 뭐냐 하면은 널 위한, 벌써 널 위해잖아요. 내가 너한테 해준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내 기억 속에 누가 차지했다는 말입니까? 너가 내 기억 속에 차지하고 있는 거에요. 너가. 이 결핍 어떻게 할 거야. 이 결핍을.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을 그냥 만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나름대로의 메시아에 대한 기억이 있어요. 이 노래가 장필순 노래인데 나이가 60 가까이 됐나. 이 노래 한 개 히트 쳤어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갈 때에 예수님 쪽에서 제자들 선택했잖아요. 그럼 이미 주님은 제자들 속에 끼어들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자리를 양보했어요. 자리를 양보했다고요. 내 자리에 예수님이라는 타자가 들어온 거에요.


들어왔는데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처음에는 이해되고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할 때는 아~우리의 선택은 옳았다. 정말 인생 제대로 노선 잡았다 이젠 살았어 하고 서로 격려했는데 그 다음부터 주님께 쏟아지는 그 말씀 하나하나가 이해를 못하는 거에요. 이해할 수 없지요. 할 수 없는 거에요. 널 위한 나의 기억이에요. 나는 주님한테 했는데 이 가사를 보게 되면,
널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어.
그러니까 교회 처음 나올 때는 난리도 십일조 다 내고 난리 났지요. 요새는 천원 내는 것도 아까워. 굳이 해야 돼?


주님한테 할 만큼 했잖아요. 자꾸 결핍을 타자가 채워주길 기대했는데 갈수록 실망스러운 거에요. 실망스러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실망스러운 거에요. 내가 원하는 게 있단 말이죠. 원하는 거 딱딱 아구 맞춰줘야 하는데 점점 더 삔트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미 멈춰있는 나는 챙길 거 챙겨야 되지 않습니까? 그럼 어떠냐? 이제는 주님에 대한 내 마음에서 조금씩 식어가고 있죠. 하지만 미련은 있어서 잊지 않았지. 그때 차가운 날 같이 고생했던 거 뭐 이런 거 하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시 자기 자신 일방적이에요. 타자가 나보고 일방적으로 오라는 거에요. 내가 있는 곳에 오라는 거에요. 나는 멈춰있으니까.


나 멈춤은 포기 안 해요. 그래서 뭐냐 하면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에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 걸 알고 있지만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달라는 거에요. 이런 횡포가.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달라는 거에요. 그때 참 좋았잖아 우리 사이. 막 전도하고 선교하고 찬양 부르고 기타치고 할 때 좋았잖아. 그런데 그 마음 다 식어버렸어. 당신이 날 식게 만들었다. 왜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했는가. 아까 김광석 노래는 그냥 이거는 뻔한 거에요. 그냥 빈 방에 홀로 누워서 계속 자기 망상에 빠져있는 거에요. 여기 전유나 널 사랑하고도 어두운 방구석에 꼬마인형처럼 멍하게 창문만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외로움이 널 부를 때는 인간이 널 사랑하고도 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할 때 네가 아직 젊어서 몰라. 결혼하고 애 낳고 보면 바빠 라고 하잖아요. 이게 다 철딱서니 없는 옛날 노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속에 결핍은 혼자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일단 타자가 들어왔다 빠져나갔기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제자들은 이제 와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납득하기 곤란한 사람인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여기가 끝인가보오. 이제는 헤어질 컨셉인가. 이런 제자들을 왜 주께서는 뽑아놨을까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 종교생활하고 똑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에 열심 안 냈으면 괜찮은데 열심 냈다는 게 화근이었어요. 열심 냈다는 게. 그냥 조용하게 할 걸. 내 쪽에서 너무 덤볐잖아. 예수님께서 이렇게 존경받고 잘 될 줄 알았는데 사람들에게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아까 리비아 홍수 이야기했지요. 주님은 가야될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곱게 가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밉상 받고 미움 받고 가는 겁니다. 그 점을 여기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34절에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타자. 의도적으로 인간으로부터 납득이 안 되고 알 수 없는 분으로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겁니다.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뭐가 발생되는가? 분류가 일어나요. 제자들 대다수와 예수님 홀로 사이에 갈라짐이 성립됩니다. 아까 갈라진 이유를 했지요. 제자들은 멈추기를 원한다. 멈추기를 원한다는 것은 이게 자아의 덩어리는 계속 자아를 유지하고 지키고 싶기 때문에 분쇄되고 파쇄되면 안돼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하면 이상하지요.


자, 우울증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가? 치료방법은 두 가지죠. 물리적으로 하는 약물치료. 증상이 없어지죠. 그러나 계속해서 증상 없는 건 맞는데 치료는 아니에요. 그 증상이 없는 거거든요. 그러면 두 번째가 뭐냐 하면은 증상으로 안 되니까 오히려 악화될 수 있어요. 바로 두뇌 속에 호르몬 신경전달 문제가 있다라고 할 때 그래서 약물 치료하거든요. 도파민 뭐 이런 거 한다. 그러면 왜 그게 갑자기 없어졌는가? 날씨 탓인가? 가을인가? 왜 없어졌는가? 왜 없어졌는가에 대해서 뭐냐 하면은 주변의 환경 때문에 그렇다. 환경.


환경이 뭔데? 환경이 바로 타자에요. 남이에요. 그 타인이 지금 타인 말고 어릴 때부터 타인, 쭉 숙성된 타인이 누적되어버린 거에요. 누적이 되어서 우울증 특징은 뭐냐 하면은 남 탓한다. 전부 다 남 탓이에요. 너 때문에 내 이생 조져놨다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홀로 구성되는 게 아닙니다. 둘러싼 주변의 타인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오늘날 나에요. 그래서 그 타인이 계속해서 나한테 줄 것 주고 교류가 일어나야 되는데 이미 형성된 나의 욕망 욕구만큼 충족되지 못할 때 이게 우울증이 발생되지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우울증 환자란 뜻이에요. 모든 인간은.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너도 나도 다 환자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자식을 준 겁니다. 왜냐 하면은 자식은 부모를 신으로 생각하거든요. 신. 전지전능한 신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부모가 자식에게 나를 신으로 인정하는 것이 너 정체성 너 정신적인 자립에 도움 된다고 계속 세뇌주고 있기 때문에. 세뇌를 준 거에요. 그런데 그 부모가 신입니까? 자식은 부모의 욕망의 대상이었던 거에요.


부모는 자기가 크면서 받아왔던 그 결핍과 상실을 자식을 통해서 땜질해왔던 겁니다. 자식을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음으로서 약간의 자신의 결핍을 상실한 것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에요. 너는 내가 너한테 희생한 만큼 너도 나한테 보답하고 자식한테 계속 이야기해왔던 거에요. 그런데 자식은 그걸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은 엄마 아빠는 나한테 신이라고 나는 신을 만나서 마음이 편하다고 이렇게 왜곡되게 일방적 해석을 하거든요. 자식은. 나 어딜 가도 엄마 아빠 안 떨어지고 살래. 이게 효도입니까? 아니면 길 잘못들인 거에요? 어떤 거에요? 이게 효도입니까?


막상 커서 들러붙으니까 발로 차는 거에요. 너 안 떨어지나. 나도 힘들다 지금. 자식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엄마 달라졌어! 내 인생 조진 거 다 엄마 탓할 거야. 엄마 이렇게 변할 줄 나 미처 몰랐어. 엄마 나한테 신이었잖아. 가만 있는데도 하나님 돼버렸어. 내가 어딜 봐서 신이야? 내가 너한테 뭐 해줬는데 신이냐. 엄마가 나한테 그렇게 교육시켰거든. 엄마와 자식 사이가 둘 다 환자. 둘 다 환자라서 둘 다 예수님의 핍박과 죽으심과 살아남을 둘 다 깨닫지 못해. 지금 자기 관리도 안 되고 자기 인생 추스르기도 힘든데 예수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지요. 교회 와서 예수님 저의 신이 돼 달라는 거에요. 제자들이. 드디어 예수님 만나면 나는 행복해. 찬양 부르면서 에브리바디 손잡고 서로.


그게 뭐냐 하면은 그게 백설공주에 나오는 바로 사랑이라는 거에요. 사랑. 그런데 사랑은 어떤 행동으로 이어집니까? 일단 나한테 편입되어 있으면 나머지는 무시무시한 증오. 왜? 증오가 강렬해야 사랑이 더 깊어지니까. 계모와 왕자는 전부 다 뭐에 놀아난 거에요? 말 없는 거울에 다 놀아난 겁니다. 알 수 없는 큰 타자. 신. 제자들 전부 다 예수님께 놀아난 거에요. 속은 겁니다. 속은 거에요. 제자들을 속여야 마귀를 이길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러한 우울증의 치료는 간단합니다. 멈추지 말고 자기 자신을 어제의 나가 아닌 어제의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어야 돼요. 우울증에 걸리든지 기쁨이 있든지 어떻게 미쳤다하든지 이것도 변화의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고치면 안됩니다. 우울증은 고치면 안돼요. 고쳤다는 건 착각입니다. 안 고치면 돼요. 오늘 간단하다. 우울증 안 고치는 게 우울증 고침이에요. 자꾸 우울증 고칠려고 하니까 남들이 나보고 미쳤다 미쳤다 해서 빨리 고칠려고 하는 그 강박관념이 더욱 더 심화 되가지고 점점 더 멈춰있는 거에요.


그러면 내가 우울증을 고치지 않을려면 어떻게 하느냐? 그 다음부터는 주변에 있는 아버지 엄마 나한테 잘해준 그 사람에 대해서 시작은 나 조진 것은 다 아버지 엄마 때문입니다 하고 욕을 하겠지요. 그러면 부모는 그 욕을 받아들이면 돼요. 욕하면서 부모 욕이 결국 자기 욕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아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내가 멈출 가치가 없음을 아는 겁니다. 여기에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사랑하는 사람이 날 떠나도 그래 떠나. 떠나도 나는 마땅해. 너를 사랑하고도. 사랑하고 가버려 가버려. 마지막 웃음 안 보여줘도 괜찮아. 마지막 웃음 보여주지 마. 그래 너 잘 떠났어. 나 혼자 슬퍼할게.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김광석 노래. 텅 빈 방안에 홀로 눕지 말고 빨리 나가야지. 유리창에 널 사랑해 썼다 지우지 말고 그게 바로 과거에요.


지난 시간에 한 중요한 건데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시간이라는게 팬케잌이라고 했거든요. UFO비행접시. 시간은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나락으로.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적용한 겁니다. 알파와 오메가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내가 시작이요 내가 나중이다 했잖아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누가 알 수 있는 거에요? 시작과 끝은 누구 안에 있다? 누가 주관하신다? 예수님이 주관하시는 거에요. 인간은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고 주님의 시작과 끝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역할을 맡은 거에요. 인간은 중간에 출몰된 자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이 출몰했는데 본인이 멈추어버리니까 멈췄다는 말은 과거 다 끄집어내가지고 과거 덩어리를 만든 거에요. 과거 하나도 나 좋았던 과거 때로는 아팠던 과거를 아픔으로 그냥 감수해버리니까 멈춰버린 거에요. 멈추니까 이게 뭐가 되느냐? 어른이 되는 거에요. 어른. 이게 어른이에요. 그런데 그 작업조차도 시간 흘러가게 되면 나락으로 다 떨어져. 이게 뭐냐 하면은 무의미. 내가 열심히 나답게 산다는 것이 이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개, 돼지라는 말이 맞아요. 개, 돼지라는 말이 딱 맞고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라” 했지요.


예수님께서 그 말씀하시는 것은 심령 가난한 자가 없다는 거에요. 자신의 과거가 이렇게 꽉꽉 뭉쳐져서 자기 ‘나’라는 것을 강렬하게 지키고 있으니 가난한 게 아니고 더욱더 강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의 모든 말씀은 내가 그렇게 너를 만들어줄게. 내가 전한 말씀으로 만들어줄게. 어떻게? 아까 처음에 강의했습니다. 선지자의 모든 말씀은 어디서 완성됩니까? 여기 3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 예수님에게만 집중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선지자의 말씀을 성경말씀을 내가 지켰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그 과정에 대해서 못 알아먹는 게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말씀은 내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모든 말씀은 누구한테 쏠리게 되어있어요? 이게 집중되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에게 가게 되어있고 그 집중된 모습이 뭐냐? 사람에게 밉상 받고 설움 받고 죽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 이게 선지자의 완성이에요. 완성입니다. 그 완성한 상태가 뭐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해놓고 그 말씀이 누구한테 일치시킵니까? 예수님 자신의 마음과 일치시키는 거에요.


그 과정에서 인간의 모든 마음은 다 거부하죠. 네 마음 말고 내 마음. 네 마음 말고 내 마음이다. 여기서 분류가 일어나죠. 내 마음 따로 있고 예수님 마음 따로 있는데 내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나는 우울증 주님은 우울증 환자 아님. 그렇게 정리하시면 되는 거에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좀 참혹합니다. 좀 참혹하더라도 여러분 감당할 수 있어야 돼요.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다 이루었습니다. 이루시고 제자들은 무서워서 도망갔잖아요. 고기 잡으러 가고 또는 문 닫고 있었죠. 그때 예수님께서 뭐냐 하면은 성령을 받으라 했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성령을 받으라 하면서 여기서 분류가 일어났습니다. 10제자. 가룟 유다는 떠났으니까 죽었으니까 10제자가 한 제자, 한 제자 누굽니까? 도마죠. 도마하고 그 현장에 처음에 성령 받을 때 도마가 그때 어디 놀러갔는지 여기 참석을 안했는지 도마가 없었어요. 분류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이미 10제자는 성령 받았잖아요. 도마는 그 현장에 없어서 성령을 안 받았단 말이죠. 받은 자와 안 받은 자와 어떤 차이가 어떤 분류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성령을 받으라 하면서 제자들을 통해서 그걸 들추어내십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서로의 마음을 집어 뜯어낸다. 서로의 마음을 뜯어내는 거에요. 옛날에 브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옛날에. 아주 옛날 드라마죠. 외계인 점잖게 생겨가지고 지구의 모든 정권을 손에 쥘려고 하는 겁니다. 사실은 인간모습인데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파충류에요. 아주 흉측한 파충류에요. 그 드라마보고 기절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시청률은 굉장히 높았는데 나중에 그 파충류의 살갗을 피부를 뜯어버려요. 피부를 뜯는다고요.


백설공주에 나오는 계모는 누가 와서 계모의 마음을 뜯는 게 아니고 그냥 거울만 있을 뿐이에요. 말 없는 거울. 말해야 응답하는 AI 비슷한 거. ChatGPT. 지니야 15번 틀어줘 이런 거 있잖아요. 거울을 이용하는 거에요. 자기가 자기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거에요. 그러나 이웃나라 왕자가 오니까 계모의 파충류적인 마음을 다 뜯기는 거죠. 이 10제자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 할 때 도마가 뭐라고 합니까? 나는 보지 않고 안 믿는다. 도마 입장에서는 다른 10제자가 납득이 안 되는 거에요. 야야 너 베드로 우리 다 알잖아. 보지 않고 안 믿는 거 다 알잖아. 나만 이상한 놈 되어버렸네 갑자기. 왜 그래. 주님이 다녀가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주님은 이미 죽었어. 이 마음 파충류 마음입니다. 잡아 뜯어.


주님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시 못 살아나온다는 그 마음을 성령을 받은 자는 이게 성령에 의해서 이게 쥐어뜯기는 거에요 이게. 쥐어뜯기면 어떻게 되겠어요? 나는 나 자신을 오랫동안 과거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좋게 봤는데 좋게 보고난 뒤에 쥐어뜯기니까 그 안에 뭐가 나오느냐 개, 돼지 나오는 겁니다. 산상설교와 개, 돼지가 나오는 거에요. 개와 돼지한테 이 거룩함과 진주를 던지지 말라. 그들이 짓밟고 부스러트릴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밟고 부스러트린 십자가를 경유해서 주어진 영이 무슨 영이냐?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그때부터 뭐냐 하면은 주님한테 늘 가증스러운 내 마음이 쥐어뜯기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발생돼요. 남들이 우울증, 나 이참에 우울증 걸려서 죽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그 정도로. 나 같은 건 이건 살 필요도 없어.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거에요.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더 이상 자신에게 놀라지 않는 놀랄 이유도 없고 놀랄 필요도 없고 놀랄 거리도 나한테 안 나온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거에요. 파충류가 도룡뇽이 뭐 있겠어요.


같은 친한 친구라든지 또는 애인 사이라든지 상대방을 즐겁게 한다고 하는 그런 이벤트가 있는데 이건 안했으면 좋겠어요. Surprise. 갑자기 불 꺼놓고 사무실에 아무도 없네 했는데 갑자기 불 켜서 팡! 축하해요 과장님! 이런 거 있잖아요. 그게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고 기쁘다는 것은 파충류 맘이고 속에는 평소에 얼마나 야자타임하고 싶어서 상대방을 놀림이라는 형식으로 골탕 먹이고 싶은 거에요. 네가 나한테 평소에 많이 심적으로 압박했잖아. 이번에 네가 당할 차례다. Surprise!! 축하해요 과장님~! 이런 거에요. 이게 갖고 노는 건지 축하해주는 건지 교묘하게 헛갈리네 이게. 교묘하게 헛갈리죠.


10분 쉽시다.
 홍민희(IP:115.♡.177.240) 23-10-10 13:54 
강남-누가복음 18장 34절 (흐름과 멈춤) 230919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우리가 멈춰서 우리가 꿈쩍할 의사는 조금도 없습니다. 나를 구원해봐라. 와서 날 데려가라 이 말이죠. 와서 빨리 나를 데려가. 나를 구원해. 내 쪽에서 주께 못 간다면 주님이 나를 데려가야지. 장필순. 내게 찾아와서 나를 데려가라 이 말이죠. 또 신학도 성경 내용도 그게 아니냐 이 말이에요. 성령이 와서 성령 오게 되면 와서 건진다 이게 예정론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그걸 반기면서 그걸 고마워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그것이 우리 자신을 모독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애써도 소용없고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달음박질해도 소용없고 애써도 소용없고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만 구원된다면 안 불러주면 어떡해요. 안 불러주면. 이게 어떤 우리 자체에 대한 모독같이 느껴지는 거에요. 분노.


그래서 제가 리비아 홍수를 이야기한 거에요. 나를 이렇게 찾아오세요 가 아니라 다 찾아갔어. 다 찾아갔었어 이미. 물론 홍수지만. 싹쓸이지만. 개, 돼지로 찾아갔지만. 다 개, 돼지로 갔는데 본인이 개, 돼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아요. 자기가 훌륭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또 아시고 주님께서 인간이 그런 한계에 빠져서 못 빠져나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뭘 준비했는가. 주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이 십자가의 그 핵심은 구약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역시 못 알아봤고 신약에서 완성이 됐는데 이게 뭐냐. 지성소. 지성소.


예수님이 어디 가서 돌아가셨느냐 하면은 31절에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셔요. 그런데 구약에서 모든 율법은 어디서부터 나오고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은 지성소에서 나와서 지성소로 돌아갑니다. 지성소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언약궤가 있어요. 언약궤. 가로 2.5규빗, 세로 1.5규빗, 높이 1.5규빗. 이 치수는 정확하지 않아요. 규빗이라는 치수가 옛날 치수와 솔로몬 당시의 치수하고 좀 달라요. 옛날 치수는 이 반토막만해요. 옛날 치수로 하면 2.5규빗이 62cm이렇게 돼요. 이게 어디 있느냐 하면은 이 언약궤 장소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예루살렘에 있어요. 황금돔 있고 황금돔 밑에 들어내면 이 밑에 바위가 있어요. 이 바위가 솔로몬 때 언약궤가 있던 그 지성소가 바위로 되어있습니다. 이 밑에 동굴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지성소, 언약궤 이 바위가 있고 동굴이 있는데 언약궤에 있던 피가 통하도록 밑에서 밖으로 빼내기 위해서 일부러 수로를 만들었다 이런 설도 있어요. 그러면 이 언약궤가 있는 곳, 지성소죠. 언약궤가 있는 곳과 예수님의 십자가 까지 어떻게 연결하느냐. 도굴됩니까? 안되겠지요. 바위 뚫는다고 안되죠. 예수님께서 지성소의 취지를 지니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를 자기한테 집어넣어서 완성을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이라는 것이 요한복음 2장에 나오지요. 그럼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있다? 성전, 지성소, 언약궤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게 새 언약이고요. 내 살과 내 피. 하나님과 제물의 만남의 장소가 바로 나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성소와 일치되고 합치되었다는 것 하고 제자들이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는 말은 무슨 관계있느냐? 관계가 있느냐? 이 관계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은 지성소하고 솔로몬 시대거든요. 예수님 사이에 역사, 시간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 시간을 언약궤에서는 어떻게 이 시간을 이어가느냐 하면은 전에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모리아 산에 가서 아들을 바치라 했지요. 모리아 산. 그 모리아 산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지성소 있고 성전 세운 산이 모리아 산이에요.


여기서 노선을 두 개를 끄집어내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이삭 노선이냐 아니면 이스마엘 노선이냐를 끄집어내요. 머리 좋은 사람은 아하 이게 예수님하고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럼 제자들은요? 제자들은 이스마엘 노선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은 예수님만이 이삭 노선. 그 이유는 뭐냐?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성령으로 난 사람이에요. 유일하게 성령으로 났어요. 예수님의 아버지는 없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를 품어준 어머니는 있어요. 마리아. 하지만 어머니는 보조고 이 땅에 아버지는 없는 거에요.


그래서 아버지 없는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잉태된 것은 여자지만 아버지 없는걸 잉태치 못한 자가 잉태됐다. 잉태치 못한 자. 사라는 아브라함의 보조가 되겠지요. 아브라함의 보조. 사라가 잉태치 못함으로서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사라 언약이 아니고 아브라함 언약이거든요. 아브라함 언약인데 아브라함 언약에서 잉태치 못한 여인을 붙이는 방식으로 지금의 아브라함 언약에서 예수님의 새 언약까지 이어진다고 하는 겁니다. 이어진다고.


그러면 제자들은 왜 못 알아봤는가? 제자들은 지금 성령이 임한 게 아니에요. 지금 이 상태에서 성령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은 걸 가지고 뭐냐? 육체에 속한다고 되어있어요. 그럼 육체를 통해서 계속 공부하면 되지 않느냐? 열심히 신학공부하면 되지 않느냐? 육체의 공부를 막는 게 있습니다. 뭐가 막느냐? 율법으로 막아버려요. 그러면 제자들은 어디 속하느냐 하면은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자가 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전서에 사도 바울 나오죠. 여러분들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여기 있다. 숫자 1이죠. 그럼 사도 바울 저기 있다. 숫자 뭡니까? 그것도 1이 되겠지요. 결국 1과 1은 뭡니까? 2가 되겠지요. 또 다른 사람 3되겠지요. 그럼 이게 뭐에요 전부 다? 다수가 되는 거에요. 다수가. 누가 독특하게 대장질 못하는 다수. 누구 하나에 다 얽매이지 않는 각자 각자 노는 다수. 다수가 되겠지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 자로 민주주의라고 하는 거에요. 민주주의.


그래도 자식한테 부모가 있잖아요. 부모 이용하죠. 부모는 이용대상이에요. 자식한테 신으로 군림하는 그 자식이 이용한다니까요. 엄마 아빠 맘대로 내 앞에서 신처럼 하세요. 나는 뽑아내기만 하면 되니까. 나 어려울 때 위로해주고 나 아플 때 나 낫게 해주고 나는 그냥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되는 거에요. 그러다 약간 사춘기 되면 노골적으로 갑자기 튀어나오는 수가 있어요. 엄마는 나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 건데? 이래가지고 자기 권리같은 거 주장하고. 내가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엄마 기분 좋잖아요. 그러니까 엄마는 일방적으로 고생만 했다고 하지 마. 나도 엄마의 기쁨으로서 이렇게 선물로 이렇게 있잖아. 이건 뭐 권리를 이야기하는 건지 해보겠다는 건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식은 부모의 욕망의 대상입니다. 자식이 잘 되면요 부모의 어깨 확 올라가요. 자식 잘 키웠다. 역시 나는 내가 생각해도 내가 괜찮은 부모야 라고 자랑질하고 싶은 겁니다. 삶의 보람을 느끼고 보람을 느꼈다는 것은 내 우울증에 모자랐던 것을 자식이 충분히 어느 정도 얼추 커버해줬다. 나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내 자식이 잘될 때. 그런 것은 서로가 인간은 홀로 안 산다고 했지요. 서로 타인들끼리 만나서 ‘나’가 구성되는 겁니다. 이것 따지고 보면 뻔한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인간은 더불어 있다는 것을 생각 못하고 꼬마인형처럼 자꾸 숨어들어가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자, 그건 그거도 사도일 때 사도 그거 예수 복음 전하는 사람이잖아. 예수 복음 전하는 사람이잖아 이렇게 이야기해요. 맞습니까? 사도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은 ‘예수그리스의 사도 된 나’ 이렇게 했어요. ‘사도 된 나’. 내가 있고 사도가 아니고 사도의 자리에 부름 받은 나.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너희는 사도냐? 라고 우리한테 묻는 겁니다. “너 사도야 아니야?” “아니에요.” “내 말 들어. 어디 비교할걸 비교해야지. 응!” 사도의 권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한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기억 속으로 자기 기억의 다발로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누구한테 기죽기 싫어해요. 심지어 사도라 할지라도. 그래서 성경 보면서 사도가 이런 말 했구나. 나도 성령 받으면 이런 말 할 줄 안다. 라이벌도 아니고 경쟁체제도 아니고요. 네 말 들어주지만 다 들어준다고 그렇게 기대는 하지 마. 나 내 인생 있으니까. 뭐 이런 식이라. 여러분 사도는 송일국이고 진짜는 안에 주몽이 들어있어요. 주몽이. 주몽 압니까? 주몽. 고구려의 시조. 예수님이 사도 안에 들어있다고요. 예수님이. 그런데 우리는 뭐만 보느냐 하면은 껍데기만 보지요.


사도는 진리의 껍질입니다. 진리의 껍질이에요. 사도의 말을 티를 낸다든지 뭔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누구를 공격하느냐 하면은 주님 자신을 공격하는 겁니다. 주님에 대한 공격입니다. 그게 사도입니다. 사도가 자기가 사도된 것은 자기를 높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따라서 사도가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진짜배기 큰 타자를 만난 기쁨이 있어야 돼요. 조건이 있어요. 나는 아니고 나는 사도가 아니고 이걸 전제로 해야 돼요. 나는 망가져도 상관없고 부서져도 상관없지만 사도의 말씀 그것이 내 모든 결핍과 상실된 것을 차고 넘치게 채워집니다. 채워지게 되면 이건 댐 터진 거에요.


우리는 이 사도의 말씀, 성령의 말씀에 하루하루 멈출 수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멈출려고 고정시킬려고 할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어요. 멈춰버리면 뭐가 되느냐? 출애굽기 3장에 나오지요. 나는 나다. 마귀도 이 말한 거 이사야에 나오지요. 출애굽기 3장에서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여기서 진짜 어려운 질문하겠습니다. 어려운 질문, 3장 14절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했지요.


자,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인간에게 알려주십니까? 굳이 알려주신 이유가 뭡니까? 굉장히 어려운 문제지요. 계모가 거울보고 거울아 거울아 하고 자기가 먼저 말 걸었잖아요. 그런데 거울이 계모가 질문한 것만 답변해요. 계모는요 머리 좀 깎아야 되겠고요 옷 바꿔 입어야 돼요. 그런 말을 거울이 안 하지요. 그러니까 계모는 거울이 만만한 거에요. 내가 질문한 것만 답변하는 거에요. 인간이 인공지능을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질문 한 것만 하면 되니까. 질문한 것만. 그런데 인공지능이 답변하는 건 뭡니까? 답변하는 것이 새로운 게 없어요. 이미 수집된 정보 중에서 끄집어내는 거에요. 인간들이 이때까지 알고 있는 것을 모아놓은 쓰레기통에서 끄집어내는 거에요. ChatGPT가. 새로운 게 없다고요.


그러니까 계모가 거울에 대해서 무서워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어느날 거울이 계모야! 나한테 무릎 꿇어! 이렇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합니까? 망치 들고 와가지고 거울 깨지요. 인간은 깨질 자신은 없고 깨진 거울만 있어요. 거울만. 모든 인간은 자기 이미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거에요. 자기 이미지에. 항상 이미지에 마치 성령의 불처럼 각 사람에게 성령의 불이 왔잖아요. 모든 인간은 자기 이미지를 머리에 이고 살아갑니다. 나는 이렇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나는 이렇다. 이렇다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거는 자기의 과거의 기억 속에서 자기가 편집해서 나는 이렇다고 있는 거에요.


사람마다 다 이게 있어요. 심지어 아주 갓난아이는 모르지만 조금 컸다 싶으면 전부 다 나는 나는 나, 나는 이렇다 해서 그게 나한테 자유의지가 있다는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인데 이렇게 있다고요. 그거는 이미 이사야서에서 이야기했듯이 마귀가 이미 나는 나라고 언급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왜 자기 이름을 나는 나다 여호와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모세한테 이야기한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대화를 시도해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대화해도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해요. 왜냐하면 자기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거울을 각자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이미지. 괜찮게 보이는 자기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 바깥의 이야기, 내 이미지에 위반되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우리는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남들이 이야기할 때는요 돌아오는 이야기가 나한테 기분 좋은 이야기를 기대하며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말을 걸었는데 너는 개, 돼지라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너하고 이야기 안 한다. 말 안 해 이렇게 되지요. 자, 이게 답변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말 통하지 않는 이에게 먼저 자신의 말을 던져놓고 그 인간을 경유해서 하나님의 주 되심을 성취하시고 성립하시려는 겁니다. 주께서 인간에게 말 거는 이유는 인간 기분 좋으라고 말 거는 게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일에 인간 속에 하나님의 내용이 포함이 되어서 그래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스케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스케줄을 못 알아보고 끝까지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거에요. 하나님이 이 지상에 이동하지 말고 그냥 멈춰있어도 된다는 거에요. 왜? 내가 세상에 멈춰있어가지고 서로 고정된 멈춰있는 존재끼리 대화가 성립한다고 보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하고 대화할 마음이 없습니다. 인간 속에, 하나님과 대화할 마음이 있어요. 따라서 하나님은 이름을 집어넣어요.


자, 이름이란 뭐냐? 이름은 남이 불러줄 때 이름이에요. 본인 이름 지은 이름은 없습니다. 중간에 커서 이름 안 맞는다고 이름 고칠 수는 있지만 그건 반칙이고 내가 태어날 때 나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이름을 지은 거에요.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성도 이미 고정된 겁니다. 이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인이 태어난 게 아니고 인간류의 한 일부가 태어난 거에요. 일부가. 본인은 없어요. 인간류의 일부에요. 우연적 다수 중에 하나일 뿐이에요. 그러나 사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는 인간 세계에서 없던 자리를 부여받았어요. 그게 무슨 자리죠? 사도의 자리에요. 사도의 자리는 누가 지정한 거에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리, 천사도 흠모하는 자리가 주어진 거에요. 없던 자리가 주어진 거에요. 서프라이즈에요. 예상도 못한 일들이 벌어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마엘을 해야 돼요. 주님께서는 언약궤, 언약궤란 뭐냐? 언약궤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에요. 이름이 있는 곳. 그럼 이 세상은 아담의 이름들이 있지요. 이름들. 합치면 아담. 그게 분산되면 다수의 아담. 각자 자기의 이름들이 있지요. 이름. 이름 속에 하나님 이름이 드디어 끼어든 거에요. 너도 이름 있고 나도 이름 있다. 그럼 이름 있으면 뭐합니까? 이쪽 이름은 접근이 안 되는데요.


왜냐하면 이름이 지성소에만 있어요. 이거는 언약궤 있는 곳에 있습니다. 천사만 있어요. 제사장도 일 년에 한번밖에 못 들어가는 곳에 있습니다. 제자들의 뭐냐? 오늘 본문처럼 어떻게 됩니까? 깨닫지 못하죠. 당연히 깨닫지를 못하죠. 우리가 예수를 믿어요? 예수를 뭘 알아야 믿지. 예수를 모르는데 무슨 예수를 믿어요. 깨닫지 못한 거에요. 그런데 여기 지성소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사람의 모습을 하면서 여기서 바로 이삭을 바쳤던 그 모리아 산의 취지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여기서 잉태치 못한 자가 등장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사람은 잉태되어서 태어나잖아요. 잉태치 않는 분이 태어나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분이 바로 이삭 노선에 근본입니다. 이삭 노선의 근본. 잉태치 못한 자가 되었지요. 잉태치 못한 자 등장하니까 이 분이 이 인간 세계에 주의 이름이라는 자리를 확보하게 됩니다. 확보. 자리를 확보하게 돼요. 확보하게 되면 이분이 이삭이죠. 그러면 이 확보한 자리 말고 바깥 자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스마엘이 되는 거에요. 짤린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스마엘을 잘를 때 어떻게 잘르느냐 하면은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율법의 저주를 받아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이스마엘은 왜 안 되는가? 이스마엘은 육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안돼요. 육체로 태어난 것은 왜 안 되느냐? 육체는 반드시 율법의 저주의 대상이에요. 개, 돼지. 율법의 저주의 대상. 너 심령이 가난해? 안 가난해? 그럼 지옥에나 가라. 전부 다 주께서 하는 모든 말씀에 저주의 대상이 돼요. 우울증에나 걸려라 인간아. 꼬마 인형 되서 혼자 하늘만 봐라. 이 세상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지 이 세상 자체가 전부 다 이스마엘 집단이라는 것을 성경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겠습니까?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도마도 마찬가지였어요.


성령 받기 전에 예수님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하니까 너 나 놀리지? 놀리지? 그때 일부러 예수님이 텀을 두고 시간차 공격이죠. 텀을 두고 다시 도마 하나 개인 교습해버려요. “도마야.” 도마가 얼마나 독한지요. “예수님 아니지요? 아니지요? 나는 죽은 예수님은 안 믿습니다. 죽었던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래? 죽었다는 증거 보여주면 되나?” “되지요.” 죽었다는 증거를 보여줘요. 부활한 증거를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진짜로 죽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면서 죽음과 부활의 경계가 성령 안에서 이게 허물어져버리죠. 허물어져버리죠.


그럼 나는 뭐냐? 완전히 가짜죠. 내가 가짜다. 그러니까 이미 죽은 자를 성령을 통해서 죽은 예수님을 살려낸 게 성령이거든요. 그 성령이 왔다는 말은 옴으로써 비로소 내가 진작에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케 해요. 죽은 자를 부활의 영으로 살려내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의 역할은 뭐냐? 충실하게 가짜 역할을 해야 될 의무를 부여받습니다. 가짜야 우리 주특기 아닙니까 가짜야. 진짜 가짜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어요. 가짜만큼 쉬운 일이. 세상 사는 거 다 환상이고 다 농담이고 장난인데요. 왜 그러느냐? 내가 멈춰있으니까.


참 멈췄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계속해서 내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거에요. 아까 배운 거 종합해보면 멈췄다. 나는 멈춰있다. 백설공주의 계모들입니다. 계모들. 멈춰있다. 멈춰있으면 뭘 찾습니까? 맨날 심심하면 어디가요? 거울아 거울아 거울아 거울아. 애꿎은 거울만 찾는 거에요. 거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이미지, 이미지는 바로 실체는 따로 있고 그냥 영상만 있는 것. 이게 바로 환상이죠. 망상이고. 이 망상이 내 머리 위에 ‘나’라는 망상을 짊어졌다는 조건하에 나는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열심히 살아갑니다. 나는 아직도 쓸 만해. 이게 뭐냐 하면은 거울아 그렇지? 거울아 그렇지?? 묻는 거에요.


계모는 너무나 자신을 사랑합니다. 너무나 자신을 사랑하는데 거울은 바른 소리를 해버리니까 참 거울도 많이 봐줬어. 이 궁에서는 최고입니다. 그런데 저 궁 밖에는 백설공주가 있습니다.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 사랑의 정표는 지독한 미움으로 작용하지요. 지금 내가 이만큼 내 인생 됐는데 아버지 아니었으면 내 인생 더 잘 풀렸는데 아버지 그때 술 먹고 들어와 개판 치는 바람에 내 인생 이렇게 됐다고 항상 탓할 사람들을 미워할 사람들, 미워할 사람들 주변에 찾고 그걸 연관을 한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나를 지키고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무슨 컨셉? 피해자 코스프레. 나는 항상 이 집안에서 피해자. 피해자로 나는 멈춰 있는 거에요. 7m 홍수한번 맞아 봐야 십자가 홍수 한번 와가지고 휩쓸려봐야 내가 얼마나 망상인지를 아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 알고 성령 받고 십자가 알고 난 뒤에는 뭐냐? 그 코스프레를 하되 이제는 어차피 농담이고 장난이니까 달리 그거 아니면 우리가 이 땅에 살 이유가 없어요. 죄 지을 이유 아니면 다른 살 이유 없다고요. 이왕 지옥은 물 건너갔고 천국 가는 거 지옥의 딱 맞는 환경 속에 살아있을 동안에 원 없이 이게 지옥이다. 마음껏 주께서 하게 하십니다.


자, 하는 방법은 흉기 들고 설치라는 말이 아니고 하는 방법은 성경을 보는 거에요. 성경을 보면 여기서 분류가 일어납니다. 이런 게 어렵지요. 성경을 딱 보게 되면 성경 보는 순간, 이것은 주의 말씀이다 주께 영광을 돌려야지 열심히 이 말씀 지켜야지 하는 순간 그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졸지에 그 사람은 뭐가 됩니까? 이스마엘 되지요. 어디 걸렸다? 율법의 저주에 걸려든 거에요. 율법의 저주에 걸려든 거에요.


자, 이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계모가 성도다. 성령 받았다 합시다. 계모가 성령 받았는데 거울보고 거울아 누가 제일 이쁘냐? 하면 거울이 백설공주가 더 이쁩니다 할 때 아이고 이쁘면 이쁘면 됐고 나는 궁에서 내가 제일 이쁘면 되지 라는 것이 왜 안 될까요? 그게 왜 안 되느냐 하면은 인간의 결함과 결핍은 율법이 와서 매일같이 주어지는 말씀이 와서 이 결함과 결핍의 블랙홀의 평수를 넓혀버려요. 매일같이.


주님이여,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듭니다 하면 주님께서 주님은 너보다 더 고생했어! 이래버린다고요. 아프다는 소리도 못해. 주님은 더 고생했대. 친구 둘이 떠났습니다. 주님은 핍박받았어. 친구가 뭐야. 제자들 다 떠났어. 지적으로는 맞아요. 지적으로는 인지가 되는데 육신이 약해도 너무 약해. 육신이. 육신이 약해가지고 나는 이제 주님 말씀 안 봐. 나 안 봐. 아무데나 들췄는데 그런 이야기 막 나오고 좁은 길로 가라. 부자는 천국가기 힘들다 그런 말씀 나와가지고 이제 보기 싫어. 널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식어져가고 있어. 자, 식어지고 있는 것을 들키면 안 되잖아요. 들키면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더욱더 열심히 성경보고 기도하는 거에요. 이 정도 감사하면 됐지요 주님? 이런 식으로. 막 동냥도 아니고 해주는 거에요. 우리의 마음은 점점 무너질만한 형태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자, 그 제자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한번 봅시다. 18장 38절에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지요. 39절에 주인공에 나와요.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했어요. 야~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이 앞서가는 사람이 계모입니다. 자기의 결핍을 예수님을 독점해서 자기의 결핍과 결함을 다 메워놨는데 사랑이 빼앗기는 거에요. 애 하나 있을 때 형제 없을 때 부모 사랑이 자기한테 왔는데 애 둘 낳고 난 뒤에 애가 따집니다. 엄마가 배 안에 동생 들었거든 하니까 형이 막 짜증을 내면서 내 의논 없이 동생을 낳느냐. 엄마 진짜 그럴 줄 몰랐어. 진짜 동영상에 막 나왔어요. 흑인아이인데.


왜 나를 거치지 않고 바로 사장하고 연락하느냐 이 말이죠. 과장 있는데 부장 있는데 결제 서열이 있는데 이 회사는 계급도 없고 위 아래도 없고 엉망이잖아요. 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느냐 이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이 제자들 다 지옥 갔습니까? 이런 소리 했던 사람들. 아니지요. 자기 일에 존재 일에 충실한 거에요. 깨닫지 못한 것이 실제 응용문제에 대해서는 바로 타인에 대한 증오와 미움으로 이게 발산되는 거에요.


예수님한테 나는 선택받았어. 너는 선택도 안 받은 게 왜 끼어들어. 수련회 때 했지만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 8절인가에 나오지요. 내가 전한 복음을 너희가 안 지키면 너희들 저주받는다 이렇게 되어있지 않고 내가 전한 복음에 우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 여기서 해답 한번 내봅시다. 해답은 이거에요. 여기서 하나님이 끼어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름을 가지고 끼어드는가? 아까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여러분 다시 상기시켜드립니다. 리비아 홍수 밑에 예외는 없다. 이게 정답이에요. 나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받는다. 나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사도라 할지라도 천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앞에 예외는 없다. 예외는 없는 거에요.


예수 믿고 바르게 사는 게 구원에 보탬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수 믿고 죄 짓는다고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주신 성령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우리가 어떤 행동 나쁜 행동 좋은 행동 구애받지 않음을 날마다 감사해야 되는 거에요. 감사가 될 때 여기서 미움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둘 다 마찬가지로 여기 속아 넘어가면 안되요. 우리는 감사가 미움, 사랑을 이걸 없애고 감사가 덮어주는 거에요. 고마움이에요.


왜냐하면 리비아 홍수에 다 망해야 되는데 사랑을 받았으니까 사랑을 받았으니까 감사가 나오는 거에요. 사랑을 받았으니까.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랑받을려고 해서 받아지는 게 아니에요. 지금 제자들은 뭐가 문제냐 하면은 나는 사랑 받았습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천국 갑니다 하고 좋다고 했는데 갑자기 소경이 와가지고 중간에 끼어들 때에 여기서 앞서가는 자들, 또 제자들도 포함되겠지요. 불쌍히 여기소서 했단 말이죠. 그럴 때 소경이 아 여기도 서열이 있구나. 여기도 일진이 있네. 일진. 분위기 파악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했습니까?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어요. 잠잠하라 하니까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여기서 주님께 뭐라고 하느냐. 드디어 오늘 제목 멈춤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멈춰라. 주님께서 멈출만해서 멈추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이 소경은 이미 소경이에요. 리비아의 저주 홍수 속에 7m 홍수 속에 본인이 내 위에 저주가 덮여있다는 것을 이 소경은 눈 감긴 소경은 아는 겁니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다시 말해서 왜 멀쩡한 나를 소경 만들었습니까 이게 아니고 소경은 지당한 겁니다. 합당한 조치였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주님이 오셨으니까 주님이 우리 인간 속에 끼어들었으니까 그냥 불쌍히 여겨 달라. 무슨 하실 일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하실 일이 소경 나에게 도달되게 하옵소서. 나를 갖고 노소서 아예. 이미 버린 몸 갖고 노소서. 주님의 자비가 은혜가 내 속에 뛰어놀게 하옵소서.


이게 뭐 앞서가는 사람보다 더 선배 같아요. 더 훌륭한 거 같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내가 보는 게 아니라 주님이 보여주는 그 보이심. 주께서 보여줄 때 뜨는 그것. 이건 전제가 뭐냐? 나는 절대로 눈 뜰 수 없는 인간임을 내가 자인한다는 뜻이에요.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이것 설명하면 끝날 듯 싶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구원이라는 말은 노선 이탈이에요. 제발 구원할 때 이것 한 가지만 생각하세요. 천당 간다 하지 말고. 이스마엘 노선에서 이삭 노선으로 잉태된 육신을 가지고 잉태되지 않은 노선으로 이게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건져주지 않으면 내 힘으로 이걸 뚫어낼 수가 없었다는 걸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구원 요청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스마엘이기 때문에. 육체에 속해있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거에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위인은 없어요. 말씀은 절대로 못 지킵니다. 이것을 확인하라고 성도로 하여금 남은 인생이 있는 거에요. 어떤 말씀도 내 힘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


원어 연구 백날해도 이건 못 지키는 거에요. 죄 안 지을려다 더 죄 짓는 거에요 그게. 다만 성경 보고 하는 것은 전에는 이 말씀도 못 지켰는데 그 옆에 말씀도 못 지키네. 점점 못 지키는 것이 점점 늘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런 축복이 있기를 믿습니까? 못 지킨다. 어느 말씀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늘어났다는 그것이 더욱 더 우리를 가볍게 하고 주께 공로만 모든 선지자의 말씀이 예수 인자에게만 그게 날라간다는 사실이 새롭게 새록새록 다가오는 거에요.


주일날 설교할 때 제가 이런 말 한 기억이 나요. 성도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새롭지 않으면 살 맛이 안 난다. 새롭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새로움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이미 십자가에 고정성에서 새로움이 나와요. 나의 고정성에서 새로움이 안 나와요. 이건 구닥다리가 나온다고요. 맨날 새로운 게 없으니까 남자보고 점점 식어가고 있는데 내 기억을 흐뭇하게 좀 와주면 안 되겠어? 이런 거에요.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르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이런 거에요. 아 가사 좋으네 정말. 내 외로움이 널 부를 때. 내가 외로워서 미치겠다 이 말이에요. 내 마음속에 조용히 좀 찾아와주면 좀 어디 덧나냐 이런 뜻이죠. 이제는 조금씩 지워주겠어. 이건 뭐 치매 환자도 아니고. 그때 좋았잖아. 그때 나 다운 거야.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되겠어. 다시 찾아와서. 순이야 그때 우리 좋았지. 이렇게 하면 내가 지금 치매 걸려도 희미하게 기억나가지고 드라마에 그런 거 있잖아요. 옛날 헤어진 엄마가 오니까 갑자기 치매가 좋아졌다는 그것. 그런 거 있잖아요. 끝까지 자기는 멈추고 싶은 거에요 인간은.


구원은 뭡니까? 이걸 해가지고 노선을 네가 있는 자리가 이스마엘 잉태된 자리가 아니고 그 자리에서는 이미 죽었고 잉태되지 않은 자리에서 네가 새 창조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께서 성경을 보게 하시고 어느 성경 하나 우리 힘으로 지킬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에게 새로움은 어떠냐? 그 새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처음 믿는 사람이 처음 성령 받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 불현듯이 등장할 때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 할 때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할 때 그때 새로운 거에요.


그럼 그런 사람이 안 나타나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 개인을 매일같이 잃어버렸다가 되찾고 되찾다가 잃어버리고 하는 것을 이 세상에 마귀가 작용하는 이 세상에 마주침을 통해서 이 세상에 분잡스러움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는 겁니다. 시장의 번잡함. 그 일상 안에 들여오는 것도 많고 윙윙윙 그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네가 원래 있던 자리가 원하는 환경이 저 환경이었잖아. 남들이 날 알아주고 또 내가 누구한테 그리운 사람 많고 그런데 그 번잡함, 번잡함의 허무성을 늘 깨닫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 번잡스러운 세상에서 살게 합니다.


구원이 뭐라고요? 노선을 이동시켜주는 것. 노선을. 어느 노선에요? 이스마엘 노선. 이스마엘은 율법의 저주 노선에서 벗어남. 죽는 건 다 죽는데 문제는 율법의 저주 안에 갇혀서 죽는 건 지옥이고 거기서 이미 죽기 전에 거기서 옮겨지게 되면 그것은 이삭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라고 합니다. 그 노선이 어디서 나온다고요? 언약궤에서 나오고 언약궤는 주의 이름이 있는 곳이고 주의 이름의 노선이 나오기 때문에 성령 받기 전에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죠. 노선이 그 노선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 노선이 아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에요.


끝으로 43절 봅시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백성들은 예수님의 신기한 걸 본 모양이죠. 날마다 신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인간이 구원받았어? 하나님께 그 신기함을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과 신약이 연결되면서 다 예수님 앞에 쏟아진 것을 너무나 감사히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못 지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마땅함을 이제는 우리가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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