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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0 23:35:34 조회 : 509         
베일 누가복음 19:5 231010 이름 : 이근호(IP:211.55.20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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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15.♡.177.240) 23-10-24 13:54 
강남-누가복음 19장 5절 (베일) 231010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9장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삭개오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앞에 누가? 인간이 이렇게 등장하게 될 때 여기서 이 관계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이라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 그리고 심판과 구원을 하시는데 인간을 만나야 그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어떻게 되고 심판이 어떻게 되고 가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구원과 심판에서 빠트린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창조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만나서 하나님이 창조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어떤 목적으로 창조를 했는가가 나옵니다. 그럼 이 창조 안에 심판과 구원을 여기에다가 통합시킬 수가 있어요. 창조가 통합시켜버리면 ‘여기 있네’ 라는 창조 하나 나올 거고 두 번째 ‘어? 심판 받네’ 라는 창조. 창조된 모든 것이 불 심판 받네. 세 번째 ‘새로운 창조’네.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집니다. ‘여기 있네’ 창조, 이게 이제 인간들이 아는 창조의 한계입니다. 인간들은 만들어졌으면 그게 창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삭개오가 등장하잖아요.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고 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만 삭개오를 보는 게 아니고 삭개오도 누굴 보는 거에요? 예수님을 보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어떻게 봤는가? 1번인가 2번이냐 3번이냐 저 셋 중에서 어떤 식으로 삭개오는 예수님을 봤는가. 예수님을 보는 자리가 나무 위에서 봤어요.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거기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보는 거에요. 그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하고 볼 때에 삭개오는 자기가 있다가 되겠지요. 내가 나무 위에 올라갔잖아요. 본인이 올라갔잖아요. 본인이 여기 있잖아요. 그럼 자기가 없으면 없다가 되겠지요. 나는 창조된 게 있다. 그럼 내가 없으면 창조된 게 없다. 없다가 돼요. 있다, 없다가 돼요. 인간은 창조를 있다 없다 로 보는 겁니다. 이 안목으로 누굴 보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보는 거에요. 예수님이 저기 보이네. 예수님이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만약에 죽어 없어지게 되면 어떻게 돼요? 없다가 되는 거에요.


그럼 거기서 삭개오가 볼 때 이 구원, 심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이거는 안 보이지요. 보일리가 없지요. 특히 이건 새로운 창조가 있네 이런 건 모르죠. 또 뭘 몰라요? 어? 모든 있는 것은 불심판 받아야 되네. 이것도 어떻게 됩니까? 삭개오 입장에서는 모르는 겁니다. 삭개오가 보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는 것을 누가 보느냐? 밑에서 예수님이 보고 있는 삭개오를 또 보는 거에요. 그래서 삭개오는 자기가 예수님을 보고 있는 인식, 그게 삭개오한테는 전부가 되는 겁니다.


이걸 한번 적어볼게요. 인간이 생각하는 창조는 1. 여기 있네. 신이 창조했구만. 이게 인간이 생각하는 창조입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은요 인간이 창조했다고 아는 것 전부가 신의 창조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신이 창조해도 인간한테 허락 못 받으면 창조 안 한 게 돼요. 인간이 창조했다고 믿는 그것만 창조한 거에요. 별 있네. 누가 만들었을까? 별이 있네. 누가 만들었을까? 신이 창조했다. 인간이 창조했다고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그 전부가 인간에게는 창조가 되는 겁니다.


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알아 맞춰보세요. 자연의 사물과 인간의 인내, 안다 이런 거죠. 인식의 세계가 일치될까요? 불일치될까요? 어느 쪽일까요? 자연의 사물과 인간의 인식의 세계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성경에 인간은 안개와 같아가지고 아는 게 좁아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욥기에도 나와요. 욥아 너 알아? 너 자연에 대해서 알아? 아무 소리 못하죠. 모르는 게 왜 저한테 고난이 옵니까 라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네가 네 전부를 알아? 주는 대로 먹어. 황무지에 비 오는 이유를 알아? 사람이 개간하지도 않는 황무지에 비 왜 오는데? 낭비처럼 보이지? 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지? 그거는 네 생각이고 삭개오 네가 나를 볼 때 그렇게 본다고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볼 때 그렇게 본단 말이죠. 나무 위에서.


사물의 영역과 인식의 영역은 영역이 달라요.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일치되지 않습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주체와 객체는 영역이 다르다 이 말이에요. 영역이 다르다. ‘나’라는 주관과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게 뭐냐 하면은 내가 이해 안되는 게 아니고 노는 동네, 영역이 달라요. field가 달라요. 영역이 달라요.


왜 날씨가 더운데? 날씨가 덥다. 온난화다. 이거는 인식 세계, 인간이 과학적으로 따져서 탄수화물의 메탄가스가 하니까 빛이 반사되서 튀어나가야 되는데 튀어나가지 못해서 온실효과 때문에 온도가 올라간다는 거에요. 이게 올라가니까 북극의 빙하가 녹지요. 빙하가 색깔이 하얗잖아요. 하얘가지고 햇빛을 반사를 해줘가지고 그나마도 온도가 안 높게 했는데 반사해줄 빙하가 점점 없어지니까 반사가 아니고 반대로 흡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흡수가 되지요. 흡수가 되니까 그 빙하가 녹아서 바닷물의 농도가 옅어지지요. 짠 게 덜 짜지요. 짠 게 덜 짜니까 그 덜 짠 해류가 속도가 빨라져요. 빨라지니까 남극에 있는 빙하 속도가 더 빨라지는 거에요. 이게 바로 인간의 인식의 세계입니다.


왜 그런데? 왜는 몰라요. 그냥 탄수화물이 높아진다. 탄수화물이 높은데 왜 온도가 올라가야 되는가? 그거는 주어진 영역이 그러니까 하거든요. 글쎄 그 주어진 영역이라니까요. 주어진 영역. 우리가 그걸 활용하는 영역하고 활용하는 영역은 주체의 영역이에요. 주어진 것은 객체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미 주어진 것은 손 쓸 수가 없어요. 달로 도망가던지 화성으로 도망가던지. 그것도 돈 있는 사람들 도망가겠지요.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인간이 일치되지 않은 자연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 너머에 있어요. 자연의 영역보다 다른 영역에 속한 거에요. 인간은 그동안 자기 인식의 세계에 거기에 몰입해가지고 성경에 천지를 창조했다니까 창조도 창조했다는 그것을 본인이 주체가 나서서 창조한 것을 헤아립니다. 그게 눈에 있던 것의 전부를 가지고 그들은 창조세계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골로새서 1장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은 창조에 포함됩니까? 안됩니까? 보이지 않는 것. 포함되지 않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예수님을 위해 창조했다면 예수님이란 그 객체는 인간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고 그 너머에 바깥에 있는 거에요. 바깥에 있는데 삭개오는 나무에 올라가가지고 뭘 봅니까? 예수님을 쳐다보는 거에요. 그 오실 분이 그분이 맞는지. 병 고친다는 분이 과연 저분이 맞는지.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냥 빤히 쳐다보는 것 같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기 위해 오신 십자가로 하여금 새로운 창조를 만드는 그것은 못하겠지요. 약간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조의 세 가지 있다고 했지요. 1. 인간들의 영역에서 이해되는 창조. 이건 바로 있음. 있다는 거에요. 별이 있네 달이 있네 있다는 거에요. 있음 속에 누가 포함됩니까? 나 여기 있잖아. 나 여기 있는 거 누가 만들었는데? 신이 창조했지. 이게 인간이 아는 창조에요. 내가 있듯이 별이 있으면 나와 별 전부 다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엉터리죠. 있는 것만 헤아린 거에요. 있는 것만 헤아리기 때문에 수학이 카운트되는 거에요. 과학과 수학이.


2. 어! 있는 세계가 심판 받네. 불 심판 받네. 심판 받는 창조. 인간은 이해 못합니다. 왜 굳이 만들어놓고 굳이 다 불로 싸지르는지. 이걸 모르는 거에요. 3. 구원 받는 창조. 이건 뭐냐? 모든 창조가 불 심판되고 난 뒤에는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창조. 새로운 창조에 대해서 인간은 몰라요. 어디 매여 있기 때문에? 자기를 포함한 여기 있음에 매여 있기 때문에 어떻게 있음이 심판을 통과할 수가 없지요. 거부하니까. 왜 있는데 왜 우리를 없앨려고 합니까? 막 저돌적으로 저지하지요. 거부하는 거에요. 있는 거나 잘해주세요. 믿어줄게. 이런 식이에요. 있는 나를 없애는 것은 나는 어떤 신이라도 나는 안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이런 거요.


그걸 아까 동영상도 했지만 누가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그 난리를 쳤잖아요.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하니까 이건 예상 밖의 문제가 훅 들어온 거에요. 예수님 입에서 나올 때 이거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건 감당할라고 맘 준비 다 하고 만났거든요. 그런데 예상 밖에 그런 예상 문제를 생각도 못했어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 전에 예수님이 이야기한 적 없어요. 진작에 이야기하지 이제 와서 난감하게 만들어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못가요.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기껏 내세운 게 뭐냐? 있음에서 있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을 다시 생각하는 거에요. 인간의 영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요. 있음에서 있음. 엄마가 있어서 내가 태어난 것.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거에요. 엄마 말고 성령. 야 이거는 니고데모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만나서 구원받는데 좀 보탬이 되는 행동을 정치적 조치를 한번 해볼라고 왔다가 이거 뭐야 이거. 완전히 자기가 전혀 하늘나라와 상관없는 자로 발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안하는 조건은 자기 쪽에서 해볼 게 전혀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바람같이 온다는데 바람을 내가 손오공도 아니고 바람을 이리 오라 저리 오라 못하잖아요. 그리고 바람 안 오면 어떡할 건데. 바람 안 오면 어떻게 할 거에요. 성령 와야 거듭날 건데 성령 안 오면 어떡해요. 자, 성령 안 오면 어떻게 되지요? 지옥가지요. 그 말을 니고데모가 못 알아듣는 게 뭐냐 하면은 그 뒤에 또 예수님이 책망을 해요. 어떻게 내가 한다는데 왜 네가 어떻게 해볼라고 하느냐! 내가 이 땅에 온 이유가 뭔데?! 이 땅에서 내가 하는 일을 지금 내가 너한테 이야기한 거야. 그런데 네가 주제넘게 네가 할 수도 없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네가 왜 거기서 끼어드냐 말이죠. 내가 할 건데. 내가 할 거야. 내가 할 거야. 내가 한다니까. 인간이 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오신 분 아닙니까. 상철아 누가 소설을 거꾸로 읽느냐? 그런 게 있어요. 상철이. 16기 영숙이가 이야기한 건데. 상철아 왜 소설을 거꾸로 읽어! 미국에서 시애틀에서 그렇게 읽어? 상철이 그 사람이 시애틀 사람인데 Solo에 나온 사람인데. 소설을 거꾸로 읽는 거에요. 소설을. 인간은 소설을 거꾸로 읽을 수 없어요. 왜? 자기가 소설의 일부니까. 미래에 대해서 모르죠. 소설 쓰시는 분은 주님 몫. 심판, 새 창조 그건 주님 몫이에요. 왜냐?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됨을 위해서 실시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의 세계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주께서 이거는 이 창조는 엉터리 창조에요. 있음은 아닙니다. 있음이 아니고 뭐가 있을 건데 뭐냐 하면은 십자가의 효력으로 만들어진 새 창조. 십자가의 효과, 효과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 창조가 기존 창조를 대체합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슨 하늘과 무슨 땅? 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 십자가의 효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죠. 삭개오가 주님 보는 취지는 저 분 평가할려고 나 있듯이 저분 있는데 저분은 어떤 분이지? 삭개오가 이해하는 예수님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 하면은 있음 빼면 없음이 돼요. 인간 세계는 그것뿐이에요. 있다가 없어지면 그건 없는 거에요. 있음, 없음 그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있는데 심판 있다. 있는데 새 창조 있다. 그거는 인간에게는 인간은 발견 못합니다. 왜?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발견을 못해요. 삭개오가 예수님 봤다면 삭개오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삭개오가 누굴 쳐다봅니까?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갔으니까 삭개오가 우러러보는 거에요.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 봤어요. 제가 여리고에 가가지고. 그런데 그 나무 안 믿습니다. 그런 나무가 한두 개도 아니고. 별로 높지도 않아요. 2천년 넘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예수님이 삭개오를 밑에서 보고 있는 거에요. 보고 있을 때 예수님과 삭개오의 눈이 만났잖아요. 그러면 그 삭개오는 예수님에 의해서 해야 될 일이 삭개오에 도달됩니다. 그럼 삭개오가 뭐냐? 십자가에 지는 삭개오가 돼요. 소멸되는 삭개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삭개오 안에서 스스로 셀프 처벌하는 삭개오. 스스로 자기를 처벌하는 삭개오. 4배나 값겠나이다 나오죠. 8절에 나오죠. 시키지도 않았어요. 내가 토색한 게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4배나 값겠나이다. 스스로 처벌을 내가 내 스스로 처벌을 내리겠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이 잔을 내가 마시겠나이다 하고 그걸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시선을 좇는 순간 그 삭개오는 이제 삭개오를 떠나서 예수님의 인간의 영역이 아닌 예수님에의 영역에 포섭이 된 거에요. 삭개오와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이 앞으로 십자가라는 십자가의 일이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 삭개오의 역할은 뭐냐? 삭개오의 역할은 베일이에요. veil. 장막. 가림막. 베일. 천. 다시 말해서 이 천지창조했던 천지창조 있잖아요. 그게 베일이었어요. 막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베일에 속한 무늬들은 그 베일 뒤에 뭐가 있는지를 모르고 그 자기가 속해있는 베일 전체의 영역만 알아갈 뿐이에요. 그것도 다 알지 못하고 알아갈 뿐이에요.


베일이라고 하는 것은 뒤에 감추어놓은 게 있는데 그냥 막, 커텐에 불과하거든요. 펄럭이는 커튼. 바람 따라 부는 커튼. 그 커튼 속에 모든 인간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세계에서 커튼이 통하는 그 언어는 진실, 다시 말해서 일치.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의 세계는 객체를 설명할 수 없어요. 커튼 안에서만 유통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막 안에서만 놀지 막 바깥에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언어는 필요 없는가? 베일로서 막으로서 필요하지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11절에 보면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무엇을 더하여 되어있어요? 무엇을 더하여? 비유. 은유. 비유, 은유입니다.


비유, 은유 좀 설명 필요하겠지요. 비유 설명합니다. 인간은 상상합니다. 인간은 상상해요. 상상하고 그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실제로 봐요. 실제로 봅니다. 정신병자 같으면 노골적이에요. 나는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이라고 우기는 정신병자에게 물어보세요. 이 세상에 나폴레옹이 누구야? 나야. 이러거든요. 그 사람한테는 뭡니까? 실제로 남 보기에는 혼자 상상한 거죠. 그런데 혼자 상상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전부 다 혼자 상상해요. 너도 상상 전부 다 상상 머릿속에 상상하고 있는 거에요. 이 상상하고 있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상상은 그냥 상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실제와 결합된 상상이에요. 내가 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상상하는 것은 다 가짜야 이런 것은 상상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상상한다는 것은 진짜야 진짜 내가 이런 사람이야. 이런 사람이야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여자가 가는데 여자가 말하길 나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는 거에요. 누가 봐도 이거는 상상이 아니고 이거는 실제처럼 보이지요. 통합해서 이걸 상징이라고 해요. 상징.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10명 20명 모두가 동의해도 이게 확신이 있다고 특출한 인물 등장해서 결론내기 전까지 임시적으로 맞다 해줄게 하는 것이 바로 상징입니다. 임시적으로 맞다 해줄게. 그래 너 여자 맞다 해줄게. 이게 상징이에요. 심볼. 상징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어릴 때부터 뭡니까? 상상이죠. 특히 애들 구구단 좀 하면 전부 다 부모는 자식을 뭐로 봅니까? 천재로 상상하지요. 그러나 그거는 집에서 할 때 상상이고 본인은 뭡니까? 진짜 천재야. 우리 애가 진짜 천재라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프리카에 평소에 츄리닝을 입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동네 사람이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을 부자로 보는 거에요. 다른 사람은 츄리닝을 비싸서 못 입으니까. 그것도 츄리닝 메이커 있는 츄리닝 아디다스. 아디다스 츄리닝 입을 때 전부 다 이 사람은 부자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미국이나 잘 사는 나라 가보니까 이거는 자기 나라에서는 안 입고 구제품으로 주워서 입은 거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부자라고 뭐했다? 상징화된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 동네 사람들 7656명한테 물어보니까 그 사람 부자에요. 그런데 외부에서 딱 한명만 와도 그건 뭡니까? 그거는 그래 너 부자 많이 해라. 상징화시킨 거에요.


이게 상징이 또는 상상이 진짜 실제가 될려면 모든 인간 다 끌어모아도 안돼요. 아직도 여지가 있어요. 마지막 한명이 아니요 하면 온전한 합치가 안 됩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아시겠지요. 인간은 하나의 자체가 베일, 뭔가 중요한 진짜 중요한 진리를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가리는 펄럭이는 그냥 앞에 펄럭이는 베일에 관한 문제지요. 그 베일 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 삭개오입니다. 삭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베일을 거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베일이 올 때 베일 당사자인 삭개오도 이해 못하고 주변 사람도 이해 못하죠. 단지 예수님만 이해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예수님께서 이해하는데 인간들이 뭘 이해를 못하는지를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베일, 이 세상 창조 자체가 베일입니다. 왜냐 하면은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창조가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1장 10절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했지만 그거는 후패해질 것이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언젠가 허물어질 것을 창조했다 이 말이에요. 히브리서 1장 11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만들었죠. 인간은 만들었다 까지만 알아요.

그 다음에 인간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은 ‘멸망할 것이라’ 이걸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은 왜 멸망하는지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멸망을 몰라요. 그리고 누가 멸망시키는 것도 몰라요. 멸망할 분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도 몰라요. 그냥 있는 대로 좋은 게 좋은 대로 그냥 갑시다 이런 식이에요. 하나의 상상이고 상징이고 베일에 지나지 않는데 그게 전부라고 여기는 겁니다. 베일에 지나지 않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예수1과 예수2로 나눠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1과 인간2로 나누기 위함입니다.


인간1에는 누가 나옵니까? 삭개오1과 삭개오2가 나와요. 삭개오1은 어디 위에 있는 삭개오?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 자기 쪽에서 예수님을 보는 삭개오. 삭개오2는 예수님과 함께 자기 집에 끌려간 삭개오. 셀프 처벌하는 삭개오. 내 잘못은 네 배나 값겠나이다 했던. 나 처벌 받아야 마땅합니다. 나 준비되어있습니다 하는 삭개오. 이 삭개오의 모습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은 십자가가 삽입되어 들어오는 거에요. 죽으면 죽으리라. 죄의 쓴잔을 마시고 죄의 무거운 짐을 제가 짊어지겠나이다. 마태복음 16장 24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이게 인간이 자기가 노린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시선이 있어야 돼요.


주님의 시선이 있으면 주님의 시선에 의해서 자기가 있던 창조의 영역에서 홈 패어가지고 구멍 뚫려가지고 양말 구멍 뻥 뚫리지요. 옛 창조에서는 나는 없어요. 나는 이미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니까요. 나는 구멍 뚫리고 주님 안에 흡수, 포섭되고 흡수, 통합되어버렸어요. 이때는 뭐냐 하면은 그냥 창조가 아니고 심판될 창조를 같이 경험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같이 경험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있는 그러한 삭개오2가 되는 겁니다. 이 삭개오2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맞이해야 될 그 모습을 삭개오가 재연하게 되는 거에요. 삭개오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고 삭개오가 예수님하고 같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고린도후서 13장 5절 한번 읽어 보세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창조에서는 있음 자체가 절대로 버리지 않는 상태로 보는 거에요. 인간은. 있잖아. 있는데 뭘 버려. 있는데. 있으니까 버려질 이유가 없는 거에요. 여기 있는데. 여기 있어가지고 성형하고 여기 있어가지고 돈 벌고 여기 있잖아. 있는 게 있고 싶어서 하겠다는 거에요.


미쳤다고 내가 나를 버려요? 내가 왜 나를 버려. 여기 있는 게 여기 있으면 안 버려지지요. 국가가 나를 버려도 나는 나를 안 버려. 그렇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에요. 나를 안 버리겠다는 마지막 몸부림이 자살이에요. 거봐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처리했잖아. 내가 안 버렸잖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버린 자가 되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안에 계신 줄을 모르는 자는 이게 밀려버린 거에요. 주님의 영역이 나를 주시하지 않으면 내가 나를 바라보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자가 된다는 거에요. 그럼 신앙이라는 게 뭐냐? 신앙이라는 것은 내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내가 버려진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신앙이잖아요. 내가 나를 볼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날 봐야지 내가 뭔데 나를 봐요.


내가 왜 예수를 보고 믿습니까. 그 믿음 버리세요. 내가 봐서 예수를 믿는다 하는 것은 그 믿음은 갖고 있으면 안돼요. 주님이 나를 봤을 때 우리는 기존의 창조가 아니고 심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든 창조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것이 나의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예수1과 예수2가 될 때에 예수님은 초라하게 왔지만 영광스럽게 되고, 인간은 자기가 마음으로 봤지만 예수님이 봤을 때 인간2다. 이 말이냐? 여기서 수학. 행렬수학이 동원돼요. 행렬수학. 2x1=2가 되도 1x2=-2가 되는 행렬수학이에요. 일반수학하고 달라요.


행, 열 이런 집단과 집단의 곱하기에서 앞에 있는 k1, m1, k2, m2 두 개의 숫자가 있다면 이 앞에 것은 뒤에 것과 곱하기 하고 뒤는 앞에 것과 곱하기 하면 앞에가 행이고 뒤는 열이라면 앞에 행과 뒤의 열과 앞에 열과 뒤의 행과 곱하기 하는 것이 행렬 학이에요. 이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느냐? 이게 수학에 보면 이래요. 햄버거 두 개사고 골라 두 개 사는데 k사와 L사 두 개가 있다면 한 군데서 햄버거 콜라 다 사는 게 아니고 햄버거는 K사고 한쪽은 L사 살 때 어느 것이 값이 들으냐 할 때 행렬이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1과 인간2와 관련하면 돼요. 초라하신 예수님이 나무에 가서 내려다보는 그 삭개오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만나는 거에요. 그리고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는 안에 삭개오 집에 장차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는 겁니다. 예수1은 인간2와 인간1은 예수2와 만나요. 마치 행렬수학처럼.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십자가 자체가 전복이기 때문에. 거꾸로 뒤집는 사건이기 때문에. 십자가 빠지면 십자가 이야기한다고 이단 안 되는 게 아니고 십자가로 인하여 유도 엎어치기 있지요. 십자가 와서 엎어치기 돼야 돼요.


보세요. 인간1이 나중에 나 이렇게 될래 하는 인간2가 있을 거잖아요. 인간1이 이렇게 가면 안돼요. 예수1이 인간과 만날 때만 인간2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개혁주의 신학은 뭐냐 하면은 현재 한국 기독교 내가 예수님 말씀 듣고 연구해서 내가 원하는 인간2가 되는 거에요. 그 가운데서 뭐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뒤집어짐이 없는 거에요. 인간1이 인간2가 되는 이것이 바로 이게 심판받을 창조에 속하는 인간 주체 안의 영역, 인식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어요.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법이에요. 인간1이 노력하는 거에요. 열심히 하는 거에요.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아마 니고데모가 예수님 만나고난 뒤에 허리 나갔을 거에요. 왜? 엎어치기 당해가지고 완전 뒤집어져버렸어. 한판 그대로 날라갔어요. 이게 재미있는 게 삭개오가 위에 있잖아요. 나무 위에서 봤지요.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예수님1이 오신 이유가 모조리 위에 있는 것은 저 아래로 떨어트리는데 어디까지 떨어트리느냐 “십자가 죽기까지 복종하심이라”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까지 이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전복을 시키는 거에요.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일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그 앞에 뭐냐 하면은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그 마음을 우리가 무슨 수로 그 마음을 품어요. 내가 여기 있으니 절대로 있음을 키워야 되고 있음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왜? 이걸 포기하게 되면 내가 사는 보람과 이유가 없기 때문에. 예수를 만나든지 부처를 만나든지 나는 무조건 없어지면 안돼요. 더 형편이 나빠지면 안돼요. 내가 죽으면 안돼. 여기서 인간의 절대사명은 뭐냐 하면은 절대 죽지마라! 어떤 경우에도 죽지마라. 살아남아야 돼. 이게 자기한테 부추기는 사명감이에요. 인간은 사명감 없는 사람 없어요. 다 사명감 있어요. 어떤 경우라도 죽으면 안돼. 그냥 살아남아야 돼.


하마스한테 인질 잡혔어.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아다오. 유대인 부모가 간절히 기도하지요. 베일은 뜯겨야 되고 밑에서 라이터 불 질러서 없어져야 돼요. 모든 있음은 불 질러야 돼요. 잘 탄다. 모든 있음은 타도 괜찮아요. 태울 거에요. 주께서 태울 거에요. 아까 동영상에도 나왔지만 이스라엘 중심에 성전 있고 성전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했거든요. 시온에. 시온성 어떻게 된다고 했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시온성은 어떻게 된다고 했어요? 적들이 와서 불태워버리죠. 하나님이 자기가 만들라 한 성전을 누구 손에서? 하나님 본인 손에서 태워버리는 거에요. 이제 전복이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는 거에요. 네가 생각하는 네가 상상하는 하나님이 버렸지 진짜 하나님은 그걸 그 커텐을 열어젖혀야 나오는 하나님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은 인간에게 버림받아야 나타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남들은 주를 다 버릴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거 누가 이야기한 거에요. 누가 준 명언입니까? 누가 이야기했지요. 제자 제자 수제자 누구입니까? 대표로 이야기한 거에요. 다 버릴지라도 저는 저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하게 함으로서 그 말을 나오도록 예수님이 기다린 거에요.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버림받아야 돼. 내가 기다렸다. 그 말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니까 버림받아야 된다고. 버리지 않겠나이다를 버림받아야 돼. 저는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가 부인돼야 된다고요. 모든 게 있음에서 나오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의 신앙을 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에요. 버리면. 하나의 커텐이니까요. 막이란 말이죠. 막. 우리자신이.


그렇다면 이 삭개오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1, 삭개오2 나타나죠. 예수님2는 뭘 만납니까? 지금인간들 눈에 보이는 삭개오1을 만나는 거에요. 예수님 안에 있는 진짜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이 건방진 삭개오 안에 들어와서 뭐로 이끈다? 허름해보이는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는 그 결과, 다시 말해서 삭개오를 십자가 지고 가는 삭개오로 변모시키는 이야기가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삭개오 이야기. 위에 집단에서 아래 집단으로 들어오는 거에요. 위치만 나무 위에 있다가 밑으로 오는 게 아닙니다. 위치만 옮기는 게 아니에요.


이번에는 좀 더 어렵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에 대해서 뭐라고 평되어있습니까? 이렇게 평되어있어요. 삭개오라고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고 또 뭐다? 19장 2절 부자지요. 부자. 부자는 무엇을 부자라고 하면 돈 많은 사람 부자지요. 이 돈은 인간에게 뭐가 되느냐 양식이 된다. 인간의 양식. 지금 삭개오가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자기 시선은 거부당하고 주님의 시선으로 무장된 삭개오가 삭개오를 이끌고 있어요. 안에 예수님2가 들어있는 초라한 그 모습의 예수님1. 그 예수님1, 사람들은 누가 봐도 예수님1은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구나. 저 아버지 목수잖아. 이렇게 생각해요. 안에 하나님과의 동듬됨을 아무도 몰라요. 예수2를 몰라요.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1밖에 볼 줄 몰라요.


왜? 자기하고 똑같이 생겼으니까. 이 창조에 속한 존재물이니까. 똑같은 거니까. 자기들은 내가 나를 알고 내가 이웃을 알고 알 듯이 똑같이 생긴 예수님에 대해서 빠삭하게 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우리가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삭개오를 쏘아보지요. 응시. 쏘아볼 때에 이 부자가 돈, 양식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아래로 내려와요. 뭘 품고? 삭개오가 나무 위에서 집으로 내려오면서 이 모든 인간에게 양식이 된다는 돈, 양식이라는 말은 왜하느냐? 인간은 돈 없으면 못 사니까. 인간은 돈 없이 못 살잖아요. 인간은 돈이 양식이에요. 양식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겁니다.


내려와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삭개오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자, 여러분 이제 알았지요. 이 이야기가 삭개오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이야기입니까? 삭개오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이 하실 일이죠. 양식을 나눠주는 거에요. 나눠준다는 것은 풍족한 데서 결핍된 곳으로 간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의 주실 양식은 모자람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인간 창조의 세계에서는 부자가 해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왜? 부자는 누가 봐도 돈이 많으니까. 돈 많은 사람이 자비를 베풀 수 없는 사람에게 줘야 된다는 거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실제로 일어난 비유죠. 커텐에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니에요. 거기 사는 모든 인간의 행동과 모든 나타난 모습도 커텐이라는 범위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숨어있는 진실이에요. 감추어진 진실.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삭개오를 딱 자기 사람으로 뽑아서 삭개오를 변화를 통해서 인간들이 모르는 그 뒤의 진실이 있다 지금 그걸 설명하는 거에요. 안 믿는 눈치인데.


요한복음 4장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4장. 이 위치, 위에서 아래 이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비유 말씀, 왕 비유와 같은 구조가 되어있어요. 요한복음 4장 8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죠.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로 동네에 간 거에요. 자, 우리가 공부했지요.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갔다. 이건 비유입니까? 비유 아닙니까? 비유죠. 이 땅에 인간들이 움직이는 모든 것은 숨어있는 새 창조 입장에서 보면 이건 비유가 되는 거에요.


그러나 인간이 상상하는 것은 곧 진실이라고요. 그게 실제라고. 배고픈데 배고픈게 무슨 상상이에요. 배고픈걸 나는 상상한다 이러지 않습니다. 소리가 나는데 꼬로록. 이게 무슨 상상이에요. 진실한 거에요. 그러나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실을 놓쳐버린 겁니다. 양식 사러 갔잖아요. 그 다음에 31절 봅시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렇게 되어있지요. 예수님이 여자 만난 사이에 제자들은 빵 사러갔다가 빵 사가지고 드디어 도달한 거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연극을 보고 계시는 겁니다. 연극을.


그 한 씬이 끝났어요. 여인하고 이야기하는 씬이 끝나고 그 다음 씬이 뭐냐? 큐! 제자들이 빵 사들고 오는 그 씬이 들어온 거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잡수소서” 하니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 어떤 양식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지금 제자들은요 주님이 어떤 특별한 양식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몰라 하지만 우리가 빵 사오면 주께서 진실한 양식을 알려줄 것이다 라고 짐작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전혀 짐작 안했어요. 배고파서 빵 사러갔는데 그것까지 신경 안 쓰지요. 그들의 행동이 하나의 비유가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는 것을 빵 사기전에 이야기 안했어요. 빵 사고 왔을 때 이야기했다고요. 빵 사고 왔을 때. 그러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했어요. 참 제자들이 얼마나 합리적인지요. 박수치고 싶어요. 33절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잡수실 것을 드렸습니까? 우리보다 더 합리적이고 우리보다 철저하고 실제적이에요. 어느 정도로?


10분후에.
 홍민희(IP:115.♡.177.240) 23-10-24 13:54 
강남-누가복음 19장 5절 (베일) 231010b-이근호 목사
 


16기 나는 Solo에서 영숙이가 한 유명한 명언. “누가 소설을 뒤에서부터 읽느냐” 소설을 앞에서부터 읽어야지 앞에서 읽어야 읽어가면서 내가 파악을 하고 파악한 것은 내 있음에 계속 유입이 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뒤에서 읽어버리면 이거는 내 현재 있음에 기초 자체가 거덜 나죠. 지금 삭개오는 뿌리 채 거덜 납니다. 뿌리 채. 이거는 완전히 사람이에요. 사람이 하나의 사람 자체가 하나의 비유가 되고 말았어요. 내가 실체가 아니고 누구의 실체를 보여주는 비유, 예수의 증인이라고 하지요 그걸 가지고.


제가 이런 말하는 이유가 인간에게는 양식이 있어요. 구약의 양식이 드디어 구약을 통해서 신약에 오게 되면 하나님과 무엇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돈. 하나님과 돈을 겸할 수 없잖아요. 돈. 신약에서는 돈이 되는 거에요. 누가복음 16장에 했지요. 바리새인이 돈을 사랑함으로 예수님을 비난했다 하지요. 이 양식이 돈 됐다가 당시에 돈이었다는 것을 인간들은 양식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에서, 그게 거덜 나야된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 포착된 사람이 삭개오에요. 왜? 삭개오는 부자이기 때문에. 부자고 앞으로도 사업할 사람이 아니에요. 공직에 있는 사람이에요. 계속 부자 될 가능성이 미래가 창창해요.


그래서 한때 부자라서 사람들이 삭개오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도 부자 될 사람이어서 시기 나서 미워하는 거에요. 앞으로도 계속 우리하고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저 인간은 희망 없어. 계속 부자 될 거야라고 한 거에요. 그 부자가 나무에서 예수님까지 구경할려고 하니까 사람들보기에 얼마나 꼴 사납겠습니까. 지가 돈도 많은데다가 예수까지 차지할라고 이거잖아요. 그런데 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가면서 돈이 양식 이거는 거덜 났지요. 돈이 양식이라는 사실이 거덜 나고 뭐냐 하면은 바로 상급, 상급이 양식이 되는 거에요.


양식, 돈 이거는 소유에 해당되는데 이 상급은 뭐냐 하면은 자기가 해야 될 사명과 관련되어 있는 거에요. 해야 될 일. 12제자가 평균 소득이 얼마였습니까? 그런 건 질문 자체가 안돼요. 사도 바울이 한 달 수입이 얼마였지요? 그런걸 묻는 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은 고린도전서 9장16-1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 상급이 무엇이냐 내가 노동함으로 얻을 상이 뭐냐?


옛날에 노동하면 뭘 줍니까? 돈을 주잖아요. 일해야 양식 얻잖아요. 그런데 지금 내가 노동해서 얻는 게 뭐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한을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 바로 나의 상이다. 이유가 뭐냐 하면은 내 것으로 유입될 것들이 없음을 알리는 게 나의 상이다. 나는 받을 것 다 받았어. 영생 얻었어. 됐어 그걸로 끝난 거야. 이게 자기의 상이라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어차피 양식은 살기위한 거에요. 그런데 떡 먹고 사는 거나 돈 먹고 사는 것은 후패하지만 영생으로 얻은 양식은 영생이잖아요. 영생으로 얻은 양식을 뭐라고 하느냐? 그게 바로 성도가 행하는 부득불 복음 전하는 그 일. 그러면 목사? 아니. 전도사? 아니. 그럼 선교사? 아니. 누구? 삭개오! 삭개오1, 삭개오2, 삭개오3. 삭개오.


그러니까 돈이 나쁜 게 아니라니까요. 이게 복음인데. 돈이 나쁜 게 아니다. 진작 이야기할걸. 돈이 나쁜 게 아니고 돈이 있으면 그 있는 이유가 있는 내 소유의 돈보다 내가 주님의 소유된 이 가치가 내가 있다는 돈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그것이 바로 복음 전하는 모습입니다. 동네방네 선교한다고 전도지 돌리는 게 복음이 아니라 나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돈 아니고 난 다른걸 지향하고 다른데 관심 있고 다른 분에 의해서 다루어진다는 것. 그러면 삭개오는 바로 십자가를 이미 진 예수의 비유라고 할 수 있지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의 비유. 예수님의 은유체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안에 뭐가 있어요? 십자가 들어있지요. 이게 바로 소설을 거꾸로 읽는 겁니다. 괜히 상철이만 욕 얻어먹고. 미국 시애틀에서 온 40대 수염 난 상철이 16기인데 유투브 보면 다 나와요. 영숙이하고 상철이 욕 되게 얻어먹어요. 싸가지 없다고 욕 엄청나게.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이렇게 보면 돼요. 창조와 무엇의 만남? 구원의 만남. 그냥 구원이 아니고 새 창조는 그냥 새 창조가 아니고 십자가를 진 새 창조. 모든 인간에게 이마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있는 십자가 진 새 창조. 그래서 삭개오를 다른 세 자로 이야기하면 삭개오는 여기서 지금 순교자입니다. ‘순교자’. 모든 영적 전쟁은 순교자가 발생되면 전쟁은 완료가 돼요. 최초의 순교자는 예수님이고 계속 순교자가 나오죠. 순교자라고 하는 것은 죽을 자리로 막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에서 엎어치기가 일어나는 거에요. 전복이 일어나는 거에요.


전복이 일어나면서 뒤집어짐이 일어나면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어떤 차원에서? 소설을 다 읽은 차원에서. 아직 소설을 모르는 사람을 바라보면 돼요. 그들은 무엇을 중요시 여기고 무엇에 치중하면 무엇의 가치를 우선시 하느냐를 비로소 바라볼 수 있는 그 안목, 그것이 바로 나무 밑에서 삭개오를 바라봤던 변화되기 전 삭개오를 바라봤던 그 안목을 이제 성도들이 장착하게 된 겁니다. 성령이 와서 장착하게 된 거죠. 그래서 성도는 이미 소설을 거꾸로 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스포일러를 다 알아요. 재미 하나도 없어. 스포를 다 알았어. 유괴의 날에 그 유괴한 사람이 여자인걸 다 알아요. 초반에. 드라마 시작하면서 끝부분을 다 이야기해서.


구원자 되신 예수님과 그리고 기존의 베일에 해당되는 막에 해당되는 인간의 만남, 구원과 창조의 만남에서 구원은 비로소 예수님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모습을 지닌 자들의 양상, 마구마구 퍼트릴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삭개오가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자기 엄마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빠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니지요. 육신으로 태어난 게 아니고 예수님으로 태어난 자가 바로 하늘나라 보는 거에요. 자기 아빠 엄마 경유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그 애를 가진 부모는 애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애를 죽일 생각으로 교육해야지요. 최고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죽어라 인간아. 굳이 애 보고 죽으라고 말 안 해도 그런 시선을 가지고 하게 되면 애들이 “엄마 돈 만원만” 해도 시선이 지지직. 애들이 알잖아요. 엄마가 만만한지. 아빠가 만만한지. 지지직 광선을 쏘면서 안다고요. 엄마가 날 죽일려고 하는지 엄마가 나한테 빌빌 기는지 애들이 귀신같이 알아요. 그러니까 애들을 죽일 요량으로 교육하시면 오은영 박사 필요 없습니다.


자, 양식 이야기 한번 봅시다. 창세기 2장 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경작이라는 말 나오지요. 경작 안 해도 경작해서 얻을 것만 경작 안 해도 그들은 먹었는데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라고 되어있어요. 그 뒤에는 뭡니까? 그 뒤에는 채소 이런 게 나온다 이 말이거든요. 이게 무엇과 비교 하느냐 하면은 창세기 9장 3절과 비교가 돼요. 창세기 9장 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아까 채소 나왔지요. 그 당시는 채소를 주었는데 이제부터는 고기를 먹도록 해줬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식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진행하는 절차, 일의 진행에 있어서 이 은유에 해당되는 인간들이 계속해서 생산돼야 돼요. 커텐이 있어야 주님께서 계속해서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요. 실루엣으로. 인간들은 그게 전부인줄 알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숨긴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스크린 같은 역할이죠. 스크린 역할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처음에는 채소 그 다음은 고기. 그게 신약에 오니까 돈. 그런데 오늘 삭개오에서 돈이 뒤집어지지요. 돈 대신 뭐냐 하면은 나는 돈을 소유한 게 아니고 돈을 반을 내놓겠다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제는 돈으로 영생 얻는 것은 그것은 이미 아니다 함을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확정되었다는 사실. 부자가 천국가는 게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게 힘든지 했잖아요. 돈으로 행복과 기쁨 영생 얻는 것 끝났단 거에요.


여러분 이걸 한번 생각해볼 때 이런 생각할 수 있어요. 그때 삭개오가 나무 위에 안 올라갔으면 어쩔 뻔했나 이런 생각 들어요. 눈에 띄니까 지지직하고 봤잖아요. 나무에 올라가는 것도 자기 뜻이 아니고 나무가 안 죽는 그것도 다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것은 자기의 일에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비유의 영역, 영토. 이 세상을 비유의 영토 삼기 위해서는 일하시는 거에요. 그게 위에 있는 분이 아래로 내려오는 구조입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19장 그 다음의 비유에 나와요.


그전에 19장 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아브라함 은유죠. 은유해놓고 계속 계승된 또 하나의 예수님 시대의 아브라함 자손, 아브라함 자손이 아브라함 낳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그 내용을 그 언약적 내용을 삭개오도 지니게 되었다. 장착되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야 이게 바로 요약이에요. 위에 있는 것을 아래로 끌어 내려서 돈을 반을 주겠고 그래도 내가 미처 모르게 토색한 게 있다면 네 배나 반도 아니에요. 네 배나 갚겠습니다 라고 이러한 변화를 준 것은 그 자체가 삭개오가 그런 이야기했다는 것은 삭개오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삭개오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바깥으로 배출할 수 있는 자가 된 것, 이걸 가지고 뭐냐? 구원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1에서 인간2가 빠져나오는 현상입니다. 자아가 두 개가 있어요. 왜 자아가 두 개냐 하면은 예수님이 두 모습으로 왔기 때문에. 낮아진 모습과 올라가는 모습 두 모습이에요. 완전히 영광이 달라요. 비참하게 오셔서 영광스럽게 올라가거든요. 전에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주기도문 있잖아요.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하시오며’ 할 때 우리 보고 하라고 하는 게 아니고 이 노선, 이 말이 이 세상의 말이잖아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란 말이 인간 언어 아닙니까. 인간 언어는 무슨 언어라고요? 베일, 천, 비유. 비유인데 그 비유의 실 내용은 예수님이 남긴 이 말 따라 이 땅에 내려와서 다 이루시고 죄를 사하시고 올라가는 거에요. 주기도문은 주님의 경로를 보여주는 기도에요. 주님의 경로를.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기도문 외울 때 마다 약간 모형이지만 작은 예수님 모형을 주기도문 글자 위에다가 애들 기차놀이 하듯이 한번 실어보세요. 이렇게 갔다가 삐삐뽀뽀 해가지고 올라가는 거에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뭡니까? ‘영원히 있을지어다’ 누가 아버지를 알아요? 예수님만 알지요. 올라갔다 내려가는 그 모든 경로. 그 경로에 우리가 주목한다는 것은 우리도 같은 예수 안에서 버리지 않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주기도문에 보면 일용할 뭘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이 뭔데요? 바로 예수님의 영생을 주는 거에요. 주님의 영생.


주님에게 양식은 아까 요한복음 4장에 주님께 양식이 있다. 그 양식이 뭐냐 하면 사마리아 여인이죠. 너희들이 사다준 빵 말고 다른 양식이 나한테 있다. 그 양식은 영생 얻을 자, 쉽게 말해서 삭개오같은 사람을 계속 양산하는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란 말이죠. 예수님의 사명이고 예수님의 삶이고. 자신의 할 일이 있다는 거에요. 내가 추수할 때 너희들은 그냥 거들기만 하면 돼. 추수는 내가 한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잃어버린 것, 하나님 보시기에 잃어버린 것을 바깥으로 배출하는 이 모습, 이것이 바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삭개오를 두고 이야기한 거죠.


자, 11절 봅시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거는 아까 구조와 똑같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구조에요. 흘러내려오는 구조.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건데 위에는 여왕이 있어요. 왕.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서 현장을 떠났습니다.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를 갔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지요. 왜? 언어 자체가 인간 세계에서나 유통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말 함으로서 듣는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했던 인간 세계에서 자기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을 드디어 각성이 되는 거에요.


그래 어떤 나라 사람 귀족이 있는데 귀족은 왕이 아니니까 귀족이 왕이 되기 위해서 먼 나라로 갔구나. 비로소 이제 그들은 이해가 되지요. 이해가 되면서 그들은 말려든 거에요. 서서히 예수님께서 말을 하니까 그들은 이게 비유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납득이 된다고 하는 거에요. 이야기만 하세요 그 정도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 듣고 난 뒤에는 이해가 안돼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여기에 27절 때문에 그래요. 27절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결과가 결국은 어떤 귀족이 왕위를 받는 그 과정을 통해서 죽여야 될 자를 죽이겠다는 계획을 실천하는 왕위를 받는 일이에요. 죽여야 될 자를 죽이겠다. 분류죠 분류. 분류하는데 분류를 너희들이 자의나 너의 뜻에 너희들의 선택에 맡기지 않겠다 에요. 그럼 이 분류, 죽임을 당하는 자 분류는 어디서 영향을 주느냐 하면은 어떤 귀족이 왕이 되는 이 과정이 이 효력이 결국은 그 인간 세계의 죽음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계는 어떻습니까? 나의 부당한 노력과 애씀으로서 내 인생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까? 아니지요. 누구 선에서 이루어지는 겁니까? 윗선에서 예수님 선에서 각 개인의 운명이 박살나든지 안 그러면 영광 얻든지 한다 이 말이죠.


자, 구체적으로 이제 볼 차례입니다. 26절 봅시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제 이 본문이 여러 군데 나오는데 이제는 굉장히 쉽습니다. 뭐냐 하면은 비유에 불과한걸 진실하게 여기는 것은 빼앗기겠고 무릇 이거는 은유입니다 알고 갖고 있는 사람은 진실이 보태질 것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이 은유를 우리 자신으로 봅시다. 나는 내가 아니다. 진짜 나는 나에게 보태져야 된다는 것 아는 사람은 진짜 나를 만날 것이고 아니야 현재 내가 있다는 것이 이게 진짜지 나 말고 지킬 것 없다. 나는 내가 지킬 최종으로 여기는 자는 사정없이 진실이 오게 되면 이 거짓 비유야 어디서 비유가 진짜 노릇하느냐 어디 천인데, 베일인데 커튼이 어디 진짜를 하느냐 하고 빼앗기게 된다는 겁니다. 참 쉽죠 잉?!


그러니까 굉장히 쉬운데 왜 관심사가 자기 외에는 왜 관심이 왜 없냐 이 말이죠. 이게 쉬운데. 결국 주님께서 인자가 온 이유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잖아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주께서 뭐를 찾아내느냐 하면은 주께서 잃어버렸다고 여긴 자만 골라서 구원하는 거에요. 그냥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의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나 잃어버린 자 맞습니다 하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 사실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없는데 십자가의 영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가짜라는 사실, 내가 진짜가 아니고 이거는 마귀한테 빼앗겨서 잃어버린 자란 사실을 창조 안에 있는 나 말고 예수님 창조 안에 있는 새 창조 안에 있는 나, 소설은 뒤에서부터 읽으니까. 그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볼 때 나는 잃어버린 자 맞습니다.


왜? 육신이라는 모든 욕구가 천국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내 믿음, 소망, 사랑도 천국에 부합되지 않아요. 기꺼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린 자 후딱 손들고 나와야 돼요.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이러면 안 되고 잃어버린 자 여기 있습니다. 아예 이름 바꾸세요. 김 잃어버린 자. 최 잃어버린 자. 그렇게 바꿔도 괜찮아요. 자, 그렇게 했단 말이죠. 앞에 열 므나 비유는 결국 26, 27절의 결과를 낳기 위해서 왕이 의도적으로 벌린 은유적 환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낯선 환경. 기존에 돌아가는 인간이 납득이 되는 식이 아니라 납득되는 것과 너무나 이질적인 변화를 주입되어있다. 개입되어있다 그게 열 므나 말씀으로 되어있다. 다른 말로 이거는 비유니, 비유로 개입되어 있습니다.


자, 그럼 그 내용이 얼마나 우리 인간들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참으로 이거는 이런 일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13절에 좀 억지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이 일어나요. 우리 인간에게 납득이 안 되니까.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하여 그들을 부르니”


자, 여기서 커튼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굉장히 쉬워요. 커튼이 펄럭이는데 커튼에 함께 있다가 한 분이 커튼 뒤로 가버린 거에요. 왕이. 왕위를 받기 위해서. 이거는 십자가 죽고 가는 거에요. 이 땅에서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사라집니다. 사라질 때에 이게 창조 아닙니까. 창조1이라고 합시다. 창조1 세계에서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이 창조 세계에서 예수님이 더 이상 있음이 아니고 어떻게 돼요? 없음이 되겠지요. 없음이에요. 없다는 말은 살아남은 그들이 있음이 되는 거에요. 있단 말이죠. 같이 있었는데 예수님 빠져나갔으니까 위에 있는 것은 자기들만 있는 거에요. 자기들만. 주님이 없다는 말은 주님의 뭐도 없어졌다? 고난, 주님의 선택성, 왕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도 이거는 있음의 세계에서는 다 사라진 거에요.


없어지고 사라진 것에 왜 신경을 씁니까? 라는 이야기가 여기서는 악한 종들의 이야기에요. 악한 종들의 이야기. 두 문장을 쓸 테니까 두 문장의 차이점을 보세요. 누가 한번 맞춰보세요. 1. 우리는 내 죄를 위하여 죽은 예수님을 사랑한다. 이 문장. 2. 우리는 내 죄를 위하여 죽은 그 예수님이 지금 살아있음을 사랑한다. 어느 쪽이에요? 1. 우리는 내 죄를 위하여 죽은 예수님을 사랑한다. 2. 우리는 내 죄를 위하여 죽은 그 예수님이 지금 살아있음을 사랑한다. 어느 쪽입니까? 정답은 2번이 정답이죠. 예수님의 살아있음과 나 살아있음이 경쟁을 하게 되어있고 충돌을 일으키게 되어있어요. 내가 진정 살아있느냐? 아니면 주님이 진정 살아있느냐?


둘 다 살아있다 하면 되지 않느냐. 둘 다 살아있다 하면 안돼요. 왜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죽던지 주님 죽던지 둘 중에 나는 죽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것이죠. 나는 죽고 나는 한쪽에 살아있는 것에 합류되어야 되지 둘 다 살아있는 건 안돼요. 1번은 누가 죽어있고? 한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참 좋으신 분이었는데 우리는 그 분을 기념해야 돼. 그리워해야 해 하지만 지금은 누가 살아있다? 예수님은 죽었고 누가 살아있다? 살아있는 건 내가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내가 나한테 관심 있고 나한테 치중해서 살아야지. 이게 우리 도리 아니냐. 이게 1번이에요. 이거 1번 2번 구분해도 여러분들이 이단과 복음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있다 할 때에 두 세 사람이거든요. 숫자 카운트 하세요. 하나, 둘 끝. 아니야. 그렇게 하면 안돼지. 두 세 사람이니까. 주의 이름이 들어가야 되잖아요. 이름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집 계약할 때나 뭘 씁니까? 싸인하지요. 싸인이 곧 누구 이름이에요? 내 이름이잖아요. 내 이름을 썼다는 것은 내가 안 죽었다는 뜻이에요 그게. 내가 안 죽을 뿐더러 이 집은 내 소유라는 뜻이에요. 내 이름이 살아있다는 말을 내가 살아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구원받을 때는 무슨 이름으로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싸인을 했다는 말은 너 죽은 인간이 무슨 싸인을 왜 해 죽은 자가. 주님이 싸인을 해야지. 주님이 싸인을 해야지. 주님이 있어야 싸인을 하지. 그러니까 너는 복음을 안 받은 사람이란 말이죠. 예수 믿는 나를 자꾸 내가 살아있다고 우기는 거에요. 예수님 믿음 갖고 있으면 안돼요.


나의 인생사가 십자가 인생사로 바뀐 게 삭개오잖아요. 지금 여기 한번 보세요. 열 므나, 열 므나에서 어떤 사람은 반발했잖아요. 그럼 반발 안 한 사람들의 생각은 뭐냐 하면은 반발 안 한 사람이 내가 여기 있는 게 아니고 이 자리에 없는 사람으로서 내가 여기 있다고 보는 거에요. 눈에 안 보이는데 사람들 보기에는 예수님의 그 의미를 몰라요. 삭개오는 알지만 내가 삭개오 이름으로 있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있다는 것. 그러니까 오늘 너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거에요. 내가 너를 함몰했다 너를 지배했다 간섭했다 정복했다 이 뜻이에요. 너 말고 내 이름으로 살 운명이 되었다는 거에요. 십자가 운명이죠.


그러니까 이 열 므나 비유에서 두 종류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왕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과 왕에 대해서 옹호하는 사람인데. 단순히 왕에 대해서 옹호한다고 해서 착한 종이 아니고 나는 지금 없는 그 분이 없는 게 아니고 나는 비유니까 내 존재 자체가 나한테는 주님을 대신하는 비유에 있으니까 내가 있다는 것은 왕이 여기 계시다는 뜻으로 생각한 사람은 왕이 어디 출장을 가든 지금 왕 된 사람이 나한테 일을 시키니까 일 할 수밖에 없지요. 그 이야기에요. 달란트 비유하고 비슷한 내용을 갖고 있지요.


15절에 보게 되면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왕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나는 영원한 당신의 딸랑딸랑 종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그럼 왕 됨을 원치 않았다는 것은 전에 종 행세했지만 종인 것처럼 행세했지요. 종인 것처럼. 없기만 해봐라 난 더 이상 당신 종 되기 싫어. 그런 거죠. 그러니까 이 비유는 무엇과 연관이 되느냐 하면은 귀인이 왕이 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나누는 일과 이게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관련성이 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분류작업이다. 사람을 분류를 둘로 분류를 하는 거에요. 뭐 더 하라 그런 것과 관계없어요. 그냥 분류를 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중심을 보는 겁니다. 너 실제 얼마 남겼어? 월급 얼마야? 묻는 게 아니고 중심이 너희 일하는 거야? 아니면 주의 일하는 거야? 라고 묻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처럼 “네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너는 버리운 자다” 분류되는데 나쁜 쪽으로 분류된 자다 이 말입니다. 그럼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분류되되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분류된 자가 된다.


그런데 아까 삭개오는 뭔가 위에서 내려와서 양식을 나눠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여기 11절부터 나오는 열 므나 비유는 처음부터 여기 왕이 등장해요. 귀인이 왕이 된다는 그것부터 등장하잖아요. 그러니까 19장1절에서 10절까지는 예수님의 초반부 인생, 생애, 허름하고 왔다가 십자가에 죽는 허름한 인생. 11절부터 27절까지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드디어 실상이 드러난 그 후반부의 예수님의 위력. 예수님이 굳이 하고 싶어 하는 분류작업. 거기에 치중을 한 거에요. 그러니까 소설을 거꾸로 읽는 거 맞지요. 이 말을 뭐냐 하면은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그들이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전혀 모릅니다. 전혀 알 수가 없어요. 마치 제자들이 빵 사올 때 빵 먹을라고 사왔지 이 빵이 그 빵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 없는 사이에서 단독으로 예수님께서 일을 벌려놓으니까 아 이 양식이 이 양식이 아니구나. 주께서 일은 다른데 있구나.


다시 한번 정리합시다. 주의 일은 전복, 뒤집기. 주의 일은 뒤집기다. 인간1에서 인간2로 뒤집고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예수님1에서 초반기 생에서 예수님2로 영광됨으로 되면서 인간도 같이 연동되어서 자기 백성도 전복, 뒤집어지기를 한다. 뒤집어지는 거에요. 자, 여기서 열 므나에서 분류를 하니까 우리도 분류를 해야지요. 하나는 악한 종이라고 여겼던 자들. 악한 종의 정신상태, 심리상태, 마음상태가 어떤가를 한번 봅시다. 여기에 14절에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이게 뭐냐 하면은 어떤 귀족이 왕위를 받으러갔을 때에 그 왕위를 원치 않는 사람들 어떤 회사 사장이 총괄 회장으로 등극하러 갔을 때에 노조에서 따로 정보 모아가지고 이 사람 절대로 회장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 재벌들 망합니다 라는 다른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을 따로 보내어서 회장 심사하는데 관여해가지고 회장 못 되게 하는 일을 했다 이 말이에요. 청문회하면서 비로소 들통난거 있잖아요. 청문회하면서. 땅 왜 숨겼느냐. 논문 왜 베꼈느냐 김건희야 하고. 이런 거. 자, 그렇다면 이 악한 종이 놉니까 부지런합니까? 이게 바로 주님께서 일을 하실 때 마귀들이 쉬는 게 아니에요. 얼마나 부지런 떨고 나름 굉장히 열성과 성의를 다하여 절대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고 또라이라는 거에요. 그냥 과대망상증이라는 거에요.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악한 종의 심보가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에요. 다 들어있어요.


교회 50년 60년 목사, 장로 다 소용없어요. 다 들어있어요. 내가 또라이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걸 내가 왜 믿어. 나 챙길 것만 챙겨야지. 목사 장로 집사 되가지고 권사 좀 되가지고 아 교회 다니세요? 권사님이세요? 양심 있게 살겠네요. 아이고 그러면 절대로 물건 팔 때 안 속이겠네요. 그럼요 내가 큰 교회 다 다녀봤는데. 그렇다면 내가 안심하고 옷 세 벌 주세요. 이익이 오는 그러한 경쟁효력이 있을 것 같으면 되지만 굳이 예수를 믿어야 돼? 효과만 있으면 되지. 굳이 예수를 믿어야 돼? 그런 생각. 이거는 10년 지나고 20년 지나고 50년 지나도 이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 하면 어떡해 어떡해 하거든요.


모든 말씀은 은유입니다. 은유의 성취자는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은유를 성취할 수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은유를 다 이루었습니다. 십자가 한 번씩 경유하면 돼요. 십자가를. 아 악한 종이 이렇다고 나온 것은 주님 뒷담화 하는 노골적으로 나쁘다 하는 교회는 없어요. 하지만 불만스러운 것, 주님에서 불만스러운 뒷담화는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누가복음 19장 14절 말씀을 우리한테 적용시키는 거에요. 이게 오늘 동영상 두 번째에 했던 거에요. 기억나지요? 기준이 뭐라고 했습니까? 기준이? 최종 기준이? 성령께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거에요.


성령의 책망이 들어오면 그 사람은 누구 뭐래도 천국 백성이에요. 책망이다. 왜 책망합니까? 19장 14절 이 말씀이 아직도 녹록치 않게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게 살아있으니까요. 주님 살아있으면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어. 이건 지금 내가 있다고 악을 쓰니까 믿어주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지 누가 알아 이런다고요. 본인이 자다가 그런 소리 해가지고 본인이 깜짝 놀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뺨 때리면서 내가 이러면 안 되지. 그동안 너에게 해준 게 얼만데 이제 와서 하느냐. 그럼 자기가 내부에서 자기가 멱살 잡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에요. 보통 나오잖아요. 천사 이모티콘 나오고 나와가지고 뻘건 악마 나와가지고 아니야 그러면 안돼. 이 약을 사야 돼. 안돼 사면 안돼 광고에 나오잖아요.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나한테 해당되는 사항 없어. 아니에요. 해당돼요. 그때마다 말씀이 그때마다 나는 망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말씀이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구나. 말씀이 살아있어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끝으로 생각해야 될 것은 “잘했다 충성된 종아” 이러면 끝날 문제인데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은 왕위를 받았다는 것은 단지 왕위를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들이 같이 거주할 수 있는 영토까지 부여받은 거에요. 부여받았다. 이게 뭐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한 창조, 새 하늘 새 창조에요. 새 창조. 십자가를 갖고 있는 자만 참여할 수 있는 새 창조,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이에요. 열 고을. 영토잖아요. 그런데 열 고을이든 다섯 고을이든 한 고을이든 공통점은 뭐냐? 공통점은 그 영토에 왕은 단 한 분뿐이라는 사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냐 하면은 이 땅에 초라하게 오신 그 분이 하나님께서 사실은 가리어져 왕 받을 분인데 왕 아닌 것처럼 위장해서 오신 그 분, 그 분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소설을 벌써 봤듯이 마지막 왕위에 오실 분이 바로 그런 식으로 오신 거에요. 왜? 굳이 왜? 분류하기 위해서. 왜 분류하는데? 왜 분류해야 되는가? 예수님이 갖고 있던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까지 그 마음이 아니면 이 고을에 이 새로운 천국에 합류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가짐을 달리 바꾸는 거에요.


자, 20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야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1에서 그대로 인간1을 유지하면서 온갖 핑계 다 대는 사람들이에요. 인간1이 완전히 뒤집어지기는 싫고 뒤집어질 마음도 없고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누구신가? 메시아는 어떤 분인가? 지식을 계속 수집하는 거에요. 자기 인간1은 유지되고 하나님의 지식을 여기에 다 모은 거에요.
모으면서 뭐를 계산하느냐 하면은 혹시나 그럴 일 없는데 그래도 혹시나 진짜 왕위를 받아왔을 때에도 내가 다치지 않도록 이 인간1이 다치지 않도록 당신이 주신 것을 그대로 드리겠습니다 하고 선처할 수 있는 선처해달라고 통밥을 굴리는 거에요. 하나님을 상대로 거래, 계산을 한 거에요.


그래서 온갖 다 합니다. 당신은 엄하고 무섭고 특히 당신은 심지 않은데서 거두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 말이 뭡니까? 뭐라고 합니까? ‘악한 종’이라고 했지요. 여기서 주인이 하는 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바로 너 같은 인간에게 나는 엄하다. 너 같은 인간에게 나는 엄하다. 내가 엄한 줄 알아? 내 엄함을 엄함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너 같은 인간에게 비로소 나는 엄한 존재로 드러난다. 23절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은 그 왕이 한 므나를 줬잖아요. 그런데 그 악한 종은 뭐냐? 나를 위해서 줬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나 왕은 그런 뜻이 아니고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준 이 한 므나가 은행에서 이자를 받으면 더 커질 것이라는 거에요. 입장을 왕의 입장을 생각 안 하고 자기 단도리, 자기 방어목적, 최선의 방어를 하겠다는 거에요. 마지막 방어선의 최선의 방어를 합니다. 누굴 위해서? 본인을 위해서 그렇게 한 거에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런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가복음 19장 이야기가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호들갑 떨 게 아니고요 그래도 착한 종인데 스스로 위로하지 말고 이 말씀을 ‘나’라는 연극 무대에 그대로 들추어내주는 것을 감사하면 되죠. ‘나’라는 이 연극무대에 이러한 두 종류의 인간이 이렀다 저렀다 라고 비출 수 있도록 주께서 사용해주시는 거에요.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의 몸에 죽으심도 있고 구원도 있듯이 우리 몸도 마찬가지로 이래서 지옥이고 이래서 천국이다 그 양쪽을 다 보여주는 십자가가 있는 자가 성령에 의해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세상은 달라도 변하지 않는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본 내용으로 차지해서 이제 우리가 말씀의 은유로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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