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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1 23:37:44 조회 : 401         
뒤집는 권세 누가복음 20:4 231121 이름 : 이근호(IP:59.23.1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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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15.♡.177.240) 23-12-05 14:32 
강남-누가복음 20장 4절 (뒤집는 권세) 231121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0장 1절에서 4절까지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일단 거기까지 한번 봅시다.


권세와 권세의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사람으로 온 게 아니에요. 권세자로 온 겁니다. 권세자로 왔는데 그 권세자 속에 예수님도 자기 밑에 포함시킬려고 예수님께 시비건겁니다. 너가 우리 허락도 없이 말하는 권위가 우리 중에 누가 너에게 줬느냐. 우리 중에서 누가 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율법을 가르치라고 우리 가운데서 이미 기존에 있는 확정된 모든 백성들이 인정하는 권세,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러한 권세라고 인정을 했단 말이에요. 인정. 누가 인정을 했다? 이 권세를? 백성들의 승인을 득한 권세에요. 그들 나름대로 주장하는 겁니다.


백성들이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우리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에 있어서 백성들은 토 달지 않았고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율법 전문가가 가르치지 누가 가르치는데. 없다 이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백성들도 동의했고 그 당시 권세자들도 동의했으니까 예수 당신은 뭐야?! 누가 당신보고 가르치라고 인정을 해줬느냐고 묻는 거에요.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4절의 말씀은 이건 아무도 예상 못한 말씀이 예수님의 답변으로 나왔어요. 거기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이렇게 끼어드는 겁니다. 사람 대 사람의 논쟁인데 왜 이미 죽어버린 세례 요한을 여기 왜 끌어들이느냐.


그것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권세라는 것이 금지의 연속성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에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르는 거에요. 어떤 권세냐 하면은 내 나라 이 천국에 오지 말라는 권세가 진짜 권세에요. 너희들 천국 오면 안돼 가 권세에요. 왜냐하면 최초의 금지는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금지하는 힘이 이 세상에 작동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백성 편에 서서 우리 말 들으면 그 금지를 뚫고 영생 얻게 해주겠습니다 라고 제시했을 때 이것은 바로 권세 자체가 금지의 연속성, 금지 금지 금지 오지 못한다 오지 못한다 오지 못하는 요소가 거기 같이 들어있어야 돼요. 그거 들어있지 않으면 그거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 시대에 오지 못한다는 그 금지의 내용을 품고 하나님의 율법을 이야기하고 하늘나라 이야기한 사람이 누가 있어야지.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이 사람들 백성이 동의하에 백성이 인정하는 우리를 가르쳐주세요 라고 인정하는 유일한 그 권세의 집단이 그들인데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예수님이 이야기했지요. 세례 요한. 세례 요한. 너희들이 뭘 빠트렸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이 갖고 있는 권세를 빠트렸다는 거에요. 세례 요한은 금지의 연속성과 같은 노선으로서 이어지면서 등장하는 인물이 세례 요한이에요.


도끼 이야기.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확실한 금지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 그들은 백성을 가르칠 수 있다고 묵계적인 사회에서의 평판이 인정받은 거에요. 사회적 인정을.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들을 뭘로 봤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돌멩이보다도 무식한 인간들. 너희들이 가르쳐? 돌이 웃겠다. 돌이. 금지란 말은 세례 요한이 등장하게 된 시점은 기존의 인간들에 의해서 하늘나라 가자! 하늘나라로 출격! 하고 신나있는 그 권세를 전제로 했을 때 금지가 빛이 나지요. 어딜 넘봐! 이렇게 되는 거에요. 어딜 넘봐. 뭐야 이게 지금. 누구야 갈 수 있다는 사람 누구야 손들어봐 누구야! 라고 외친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했지요.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가 만일 서기관과 제사장과 바리새인이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지옥생활한다. 그들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어야 된다 그 주위로 갔지요. 그러나 세례 요한 입장에서는 너희들은 바로 그게 지옥이다. 그게 바로 지옥이다. 너희들 아직 지옥 맛도 못 봤어. 진짜 지옥생활 제대로 맛 못보고 천국생활도 맛 못 보고 진짜 천국생활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마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세례 요한 언급한 삽입시킨 이야기가 만만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굉장히 복잡해요. 11장에 보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장에 나갔더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극장에 나갔더냐. 교회에 갔더냐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어디에 갔더냐? 광야.


광야생활 자체가 지옥생활 아닙니까? 그게 천국생활이라는 거에요. 천국생활은 우리가 얼마나 생활이 윤택하느냐 불편함이 없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의 연속성상에 있느냐로 천국이냐 지옥이냐 판가름 되는거에요. 돈이 한 달에 얼마 버느냐 그런 거 문제로 삼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추진시킨 그 노선이 어디서 계속 이어지는가? 세례 요한이 있는 곳에서 이어졌는가? 아니면 세례 요한이 없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제사장 그 쪽에서 이어졌는가? 어느 쪽이 천국이고 어느 쪽이 지옥이냐 이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이 광야로 건너와. 광야로 건너와. 불편하지요. 광야로 건너오라는 말은 기존의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장로의 가르침을 그걸 묵살하라 이런 뜻이에요. 기존 권세에서 벗어나서 내 권세로 오라 이런 뜻이거든요.


애꿎은 백성들만 중간에 치이게 돼있어요. 용기 나겠어요? 기존 질서가 있는데. 방금 이야기한 말은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기존 권세(권위)는 뭐가 빠졌느냐. 비밀이 빠졌어요. 비밀이.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금지를 금지답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인간의 납득되지 않는 요소를 비밀이라고 합니다. 비밀이 들어있는 채로 너희들은 말씀, 율법을 배웠느냐? 아니면 비밀 빼고 배웠느냐. 제사장들에게. 만약에 비밀을 집어넣으면 많은 다수가 은혜를 못 받고 자기 가르치는 선생의 팬이 적게 될 것이고 숫자도 현저하게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그 가르침 받으러 오는 존경심가지고 오는 숫자는 몇 명 안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가르치는 자들은? 외롭지요. 외로운 거에요. 외로움이 싫어. 환영받고 싶어요. 우대받고 칭찬받고 싶어요. 내가 뭐가 못나서 남한테 따돌림 받아?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존심 없어가지고 광야에서 외칩니까?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제말 들어보세요 가 아니에요. 광야에 오라. 광야에. 세례 요한 참 안됐다. 그 뭐 변변치도 못 한 거 먹고 메뚜기 물론 고단백질이지만 털옷입고. 뭐야 세탁은 몇 번이나 하겠어 고생 많다라고 세례 요한보고 이야기할 때에 예수님이 대신 이야기하지요. 네 눈에는 그게 고생으로 보이냐? 네 눈에 지옥으로 보여? 네가 지옥이다! 네가! 화려한 옷을 입은 왕궁에 있는 자가 지옥이야. 이게 마태복음 11장에서 이야기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는 반드시 창세기 3장의 그 대취지를 하나님의 취지를 포기 안한다는 것을 그걸 짐작하고 주의 말씀을 들어야지. 그렇잖아요. 중간에 끊어질 일은 없지 않습니까. 왜 자꾸 편익 위주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런 식으로 조작해서 이야기하느냐 이 말이죠. 세례 요한이 선지자거든요. 선지자인데 그전에 선지자도 세례 요한 이상으로 많은 핍박들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사람들이 고대하는 천국 생활과 완전히 대립되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선지자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던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진짜 참 선지자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감추어놓은 비밀을 삽입시켜서 그 내용에 삽입이 되어서 비밀을 즐겨 들어오지 않은 자는 비밀 자체가 장애로 여기는 사람은 퇴출되는 말씀을 준거에요. 그 노선이 바로 뭐냐? 세례 요한 노선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나는 갈대냐. 바람에 나는 갈대냐 하는 이 말씀도 그냥 허투로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인간들의 금지를 뺀, 비밀을 뺀, 비밀이 삽입되어있지 않은 비밀을 뺀, 이 권세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은 인간세계에서 천국으로 가자하는 쪽이에요. 그냥 우르르 떼로 가면 받아주는 줄 아는 거에요.


그러면 이 권세는 두 가지 요소로 되어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자연권세와 인위적인 사회권세. 이 두 가지의 권세에 인간은 순응하고 복종하고 그리고 적응하는 식으로 죽어서나 살아서나 천국가자! 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왜? 금지를 뺏으니까. 자연세계에 무슨 금지가 있어요. 별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면 끝나는 문제지. 저 별은 우리를 천국에 못 오게 해서 무슨 비밀이 들어있어. 누가 이렇게 생각하겠어요. 시편 135편인가 나오지요. 별을 보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라 할 때 별 보고 인자하심 찾아내면 되잖아요. 별에 무슨 비밀이 있고 달에 무슨 비밀이. 그냥 창조했는데 창조한 분 있겠지. 그 창조한 분, 별 창조한 분, 이제 나를 창조한 분으로 나는 모시겠습니다. 끝. 깔끔하잖아요. 끝났잖아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사오며, 사도신경에 나오잖아요. 그거 외우면 되잖아요. 잘 외우죠. 달달달.


사회권세는 뭐로 되어있느냐 하면은 이거는 언어로 되어있어요. 사회라고 하는 것은 말과 말의 관계망입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여러분 납득이 될 거에요. 하나의 사물이 있을 때 인간은 사물을 지칭을 해요. 저게 피아노다 저건 고양이다 개다 지칭을 할 때 그 언어와 사물 사이가 일치되지 않습니다. 고양이. ㄱㅗㅇㅑㅇㅇㅣ. 이게 고양이는 아니잖아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기호라고 이야기해요. 기호. 문자, 기호 또는 기표라고 이야기해요. 기표. 고양이하고 진짜 고양이하고 사람들은 고양이라는 말이 없다고 할 때는 그냥 쉽게 야옹야옹하는 귀여운 물체네 이렇게 할 때 사람들마다 그걸 설명할려고 하면 너 방금 뭐 봤어? 야옹야옹하는~ 이게 길잖아요. 그래서 야옹야옹 고양이 고양이 이게 비슷하니까 그냥 고양이로 하자. 고양이가 된 거에요.


그러면 언어가 없으면 사물은 뭐냐 하면은 이미지가 돼요. 이미지. 이미지는 공유되는 게 아닙니다. 서로 통하는 게 아니에요. 통할려면 지붕에 기어가는 게 있잖아. 아 답답해. 지붕에 기어가는 게 뭔데? 꼬리 있고. 아휴 답답해라. 그걸 우리 정하자. 고양이. 그래! 간단하지. 이게 공유가 돼요. 공유. 언어끼리가 공유가 되면서 소통이 돼요. 소통이 된다고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길가는 고양이 함부로 때리지 말자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언어와 언어가 만나서 때리지 말자. 때리면 벌금 10만원. 이게 법이 되어버려요. 그래야 법이 돼야 결속력이 있어요. 의식하니까. 고양이 저거 차버릴까? 아니야 얼마 전에 차면 10만원 내.


그럴 때 법의 의식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서 주로 언어의 그 의미가 사실은 법적이에요. 모든 언어는 법적 강제조치가 그 안에 내재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수능칠 때에 여러분 사용하는 연필 가져오지 마세요. 연필이라는 그 사물, 거기에다가 뭐를 집어넣습니까? 가져오지 마세요 라는 법적의 의미가 추가가 되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내 연필 내가 가져간다는데 네가 뭔데 시험 선생님이면 다야?! 이게 안돼요. 그러면 이거는 방해죄에 걸려가지고 시험도 못치고 내쫓기게 되는 거에요. 휴대폰 소지 금지, 휴대폰이라는 그걸 알아야 돼요. 소지가 무슨 뜻인지 알아야 돼요. 아 휴대폰을 소지한다 그래서 이거는 그거다 이러면 안돼요. 그게 법적인 조치가 주어진다고요 모든 것은.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법의 환경이에요. 법의 환경. 처벌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이게 누가 하는 겁니까? 그걸 그 사회의 법을 만든 권세자들이 하는 거에요. 이게 사회권세에요. 이걸 어릴 때부터 누가 했어요?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한 거에요. 가정에서. 왜 화장실안가고 네가 몇 살인데 여기서 오줌을 눠. 요강에 눠야지. 이게 뭡니까? 소변을 화장실에 가서 봐야지 변기 있잖아. 변기라는 말은 변기가 제조가 돼야 변기라는 단어를 붙여요. 그전에는 요강이잖아요. 변기 없을 때. 이 모든 단어 하나하나는 왜 단어가 생기는가? 법적 질서 체계를 공교히 하기 위해서. 왜 공교히 했는가? 그래야 인간들 하나의 사회로서 공유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사회. 그래야 권세가 지탱이 되잖아요. 질서가 된다고요. 질서.


이 세상의 법은 누가 다룹니까? 가장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는 자가 서울법대 가잖아요. 법대 출신이 국회의원 되고 법대출신이 행적요직에 앉잖아요. 왜? 전부 다 법의 체계니까. 거기 들어가면 안 되지요. 법도 모르고 거기 들어가면 안 되지요. 이주일이 국회의원 되면 안돼요. 웃기는 것만 하지. 국회의원 되면 되겠어요. 바둑만 두지 국회의원 되겠어요? 안 되지요. 인간은 상대를 볼 때에 그 사람이 쓰는 단어와 문장 언어를 보고 그 사람을 봅니다. 언어를 보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의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겉을 보지 않는다 하거든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더 정확해야 돼요. 하나님은 우리의 속도 안보고 겉도 안 봐요. 우리의 중심을 봐요. 왜냐 하면은 우리의 겉은 외부 꾸미는 인물이지만 속은 뭐냐? 우리의 언어사용입니다. 안봅니다. 왜? 기존의 권세거든요.


지금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기존의 권세가 뭐가 빠졌다? 금지와 하나님의 창세전의 비밀이 빠진 거에요. 왜 그런 권세냐? 인간이 사용할 수 있고 인간이 납득이 되는 언어의 법적 율법으로 만든 질서가지고 가자! 어딜? 천국으로. 하나님께로 가자는 거에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누굴 거론시켰습니까? 세례 요한을 거기에다가 마중 나오게 만들었어요. 마중 나오게. 이렇게 묻습니다. 세례 요한 어디 있지? 지금 어디 있지? 어디 있긴요 광야에 있지요. 그런데 왜 광야에 왜 안 나오지? 기존에 그들이 썼던 법적 언어에 그들이 한 통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기존의 언어를 버릴 수가 없어요. 그 법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언어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외국사람이 우리나라 음식 가운데 제일 무서워하는 음식이 있어요. 장모님 뼈다귀 해장국이에요. 장모님 뼈다귀 해장국.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해서 해장국 만들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외국사람들은. 장모님표인데 표 빼버리고 장모님 뼈다귀 해장국. 이거는 한국의 질서에 있는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아요. 외국사람들은 아 한국에도 사람 고기 먹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다고요. 아재개그. 왜 그게 통하느냐?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의 권세의 말에는 기존 권세를 전제로 해서 기존 권세가 뭐를 빠뜨렸다는 거에요. 아까 뭐를 빠트렸다고 했습니까? 금지. 또 뭐를 빠트렸다고 했습니까? 창세에 감추인 비밀. 이 두 가지를 제가 세례 요한 입장에서 수정해보겠습니다. 뭐가 빠졌느냐.


종결이 빠졌어요. 종결. 다 끝난 게 빠졌어요. 세례 요한이 자신만만하게 내가 외치는 새로운 말의 권세는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사람의 권세는 뭐가 있다? 기다림이 있어요. 기다림. 소망이 있다고요 소망. 그런데 세례 요한에서는 기다림도 소망도 없고 뭐냐 하면은 종결이에요. 종결. 세례 요한이 외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같이 공존한다는 뜻이에요 그게. 지금 여기 와있다는 뜻이에요. 여기. 기다리면 오는 게 아니고 지금 나와 같이 왔다는 거에요. 와 이거는 참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마 우리가 그 시대에 있다면 우리는 세례 요한 쪽에 안 갑니다. 왜? 사람은 기다림의 미학으로 인생을 살아요. 오면 안돼요. 와버리면 내 숭고한 기다림이 박살나기 때문에 그건 짜증나는 일이에요.


인간의 자연권세 있지요. 순응한다 했잖아요. 자연권세가 왜 좋으냐 하면은 자연권세 자체가 질서 잡혀있어요. 아침 되면 어김없이 해 뜨고 저녁 되면 노을 지고. 자연권세가 안정권이라는 말은 자연권세를 보고 있는 덩달아 내 마음도 내 속마음도 안정권에 속하는 겁니다. 그래서 도시 생활하다가 지겨우면 어디 갑니까? 자연인 되잖아요. 왜? 자연은 빨리빨리 안 되잖아요. 자연은 빨리 빨리 없어요. 자연은 내 마음대로야. 왜? 자연은 어미의 품속 같아서 그냥 기다려줘요. 그냥 기다려줘요. 네가 출세 못했느냐? 내가 너 출세문제 닦달내지 않을께. 네가 열심히 하니까 너 출세 기다려줄게 라고 마치 이 대자연이 어머니의 음성으로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특히 사람들이 고향에 갈 때 어디를 가느냐 하면은 자기의 아버지 어머지 할아버지 묘소 있는 곳에 가요. 그게 자기 고향으로 가는 거에요. 거기 가서 죽은 아버지 귀신하고 대화하는 거에요. 정한수 떠 놓고 아버지 저한테 기대를 하셨는데 제 성공 못 보고 가셨는데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그럼 다른 사람이 당신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하면 너는 몰라 나는 내 마음속에 아버지 아직도 살아계셔. 그런 식으로 뭔가 사람이 산다는 것은 나를 주시하는 분이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나의 소망과 기다림이 의미 있는 것이 돼요. 의미 있는 것.


그러니까 메시아는 우리가 알아먹는 식으로 와야 돼요. 그냥 쑥 들어오면 반칙이라. 우리가 상을 다 차려놓고 그 다음에 오실 때 전화 한 통만 해주고 쑥 들어오면 안돼. 전화를 해야 여기 옷, 양말 빨리 치워야 되거든요. 손님 치룰 때 어떻게 치룹니까? 그냥 오세요 안하지요. 치울 거 치우고 봐가지고 별로 흠 잡을 거 없을 때 초청하잖아요. 그러고 싶은 거에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그런데 세례 요한은 뭐냐. 한 자로 훅이에요 훅. 훅 들어온 거에요. 그것도 도끼 들고. 훅 들어온 거에요. 기다림? 삐! 기다려 주지 않고 그냥 대기표 뽑고 대기하는 게 아니에요. 기다리지 않는 방식으로 오셨어요. 왜? 인간의 권세는 모조리 다 천국에 가지 못하는 권세 가지고 사람들을 속여왔다는 사실을 한꺼번에 들추어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금지에요. 너희들 백날 율법 연구해도 하나님 생명나무에 못 들어가게 되어있어 이게 원래 하나님의 취지야. 금지를 금지답게 특화시키는 겁니다. 강화시키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그럼 세례 요한이 그 금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물속에 집어넣는 거에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아니야 안돼. 바르게 살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물속에 들어가는 거에요. 광야와 물의 만남은 처음에 이 땅에 이스라엘 유대 나라 오기 전에 애굽에서 나올 때에 두 개의 강을 건넜어요. 둘 다 죽음의 강이에요. 홍해 건넜지요. 요단강 건넜지요. 이 세례 요한의 물로 세례 준다는 것은 인간은 죽지 아니하면 새사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지금 기존의 독사의 자식들, 세례 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이야기했거든요. 같은 뜻인데 제가 전에 그 이야기해가지고 교인한테 욕 얻어먹었어요. 세례 요한인데 어떻게 독사의 새끼들아 하고 욕을 하겠습니까. 자식들아 라고 했지. 그럼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했는데.


독사의 자식들아 뱀의 자식들아 라고 하는 그 소리가 이게 복음으로 들려야 돼요. 복음으로. 고맙습니다 이렇게 들으면 되는데 세례 요한 너 누구 허락 맡고 너 신학교 어디 나왔어? 네가 그리스도야? 네가 선지자야?! 너 선지자 하라고 너 누구한테 허가받았어? 이렇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답변이 뭡니까? 나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로 나가요. 뭐야 너 누구야? 나 사람도 아니요. 제사장 아니야. 선지자 아니야. 그러면 너 무슨 인간이야? 나 사람도 아니야. 그럼 뭐야? 소리야. 스피커야 나는. 내 뒤에 오시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야. 자기를 사람이라는 범주에 넣지도 않았어요. 긴 나팔. 주님이 불고 자기는 소리고. 하나의 악기. 악기처럼 사용하는 겁니다.


종교를 지음으로서 어떤 인간도 물에 수장되지 않고서는 오실 심판주 앞에 제대로 설 수가 없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심판주로 봤어요. 타작마당이 그 이야기에요. 타작마당이란 추수가 끝났다는 이야기에요. 다시 봅시다. 인간은 뭘 쳐다봅니까? 매일같이 보는게 일기예보 보지요. 오늘 14도. 오늘 서울 최저기온 영하1도. 자연의 권세. 파악이 가능해요. 파악 가능하고 파악 가능한 것을 언어로 유포하고 그 언어에 동의하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언어의 공동체가 되고 그 자체에서 법적인 하나의 집단으로서 단단하게 되지요. 이게 우리의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거에요. 자연의 권세.


그 다음에 아까 이야기한 법적인 사회의 권세. 언어를 통해서 이미지를 전달하는 식으로 서로 이미지를 주고받는 것. 그러니까 사회권세는 뭡니까? 납득이 돼야 돼요. 논리적으로 합리성을 따져야 되고 못 알아듣는 말하면 안돼요. 여기 비밀이 있으면 안돼요. 알아듣는 말을 해야 돼요. 설득력 있는 말이 먹히는 겁니다. 이 사회는. 여기는 뭐가 없다? 금지도 없고 뭐가 있느냐? 이렇게 하게 되면 장차 누가 온다? 메시아가 오지요. 그럼 인간세계 다 같이 공통적으로 소망할 수 있는 그리움이 계속해서 유지가 될 수 있는 거에요. 그러나 세례 요한은 뭐냐? 그리움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리움 끝이다. 그리움이 끝이라는 거에요. 현실은 그리움이 없는 게 현실이에요. 그리워할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어요.


왜? 우리가 초청한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우리가 초청한 게 아니고 우리 말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심판주가 쳐들어왔다는 게 세례 요한의 의견이에요. 일방적으로. 특히 자연의 권세 같은 경우는 여러분 남자 분들 군에 다녀오셨습니까? 참 군대에도 가을이 와요. 사람 미치게 만들어요. 군대에 왜 가을이 옵니까? 탈영하고 싶어요. 보세요. 자연의 권세는 인간사회의 군영의 군기를 벗어나요. 군의 가을은 경치가 왜 그리 좋습니까. 경치가. 전방에 가면 산 속에 있잖아요. 가을되면 온 천지가 벌겋게 물들 때 이거는 참을 수가 없어요. 고향생각. 그런데 6시 기상해가지고 삽 가지고 흙 파야 돼. 참호훈련 나가야 돼요. 그러니까 그 괴리, 가을을 즐겼던 나름대로 나 혼자 살았던 나와 지금 법이라는 그 법 사이에 괴리상태가 짙으면서 거기서 군인들이 참아내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세 자로 그리움. 달력 또 하나 뜯고. 내가 제대하거든 가을을 마음껏 즐길거야. 제대하면 즐기지도 못해요 취직하기 바빠가지고.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 그리움을 제거를 했을 때 그리움을 제거한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권세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하는 일은 말라기 4장 보면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 줄 때 보겠습니다. 말라기 4장 6절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누가? 엘리야. 엘리야가 누구죠? 세례 요한. 그러면 세례 요한이 안 왔다고 칩시다. 엘리야가 없다고 치면 어떤 상태에 있다? 아비의 마음은 아비의 마음으로 자녀의 마음은 자녀의 마음으로 권세가 몇 개 되었어요? 두 개로 갖추어졌지요. 권세가 두 개로 갖춰진 거에요. 그러면 구원 없어요. 계속 금지가 살아있으니까. 모두 오지 못한다가 살아있으니까 천국에 못가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시기를 엘리야를 보내게 되면 뭐가 되느냐? 엘리야는 하신 일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다음 객관식 둘 중에 어느 것인지 맞춰보세요. 고속도로입니다. 세례 요한 역할이 1.인터체인지. 2.톨게이트. 세례 요한 역할이 인터체인지입니까? 아니면 톨게이트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톨게이트는 요금 내는 곳이고 인터체인지는 뭡니까? 노선 바꾸는 데죠. 어느 쪽이에요? 1번이에요?2번이에요? 톨게이트죠. 톨게이트 특징은 뭐냐 하면은 차가 도로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거에요. 노선을 바꿔야지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 말은 금지가 선지자의 말씀에 금지가 들어있으면 끝까지 금지가 세례 요한 마음속에 있으면서 금지에서 벗어나면 안돼요. 본인의 금지가 본인의 금지로 하여금 어떤 환경을 조성하느냐?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기 위해서 이 세례 요한은 그 새로운 세계, 새로운 권세 안에서 계속 돌고 돌고 계속 돌아야 되는 거에요. 지가 돈 내고 고속도로 나와버리면 안돼요. 이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죽음을 품은 성도는 이미 그 노선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이제 예수의 피 알았으니까 세상에서 바르게 살자. 이것은 톨게이트입니다. 인터체인지 아니에요.


주도권이 예수 피 믿고 내가 구원받았다가 주도권이 아니라 주님의 피가 살아있는 한 구원이 되고 주의 피를 이용하게 되면 그건 구원이 안 되는 거에요. 세례 요한의 죽는 모습을 보세요. 마치 누굴 닮았습니까? 세례 요한 누구한테 죽었지요? 스스로 자살했습니까? 누구한테 대들다가 죽었지요? 헤롯 왕에게 대들다가 죽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한테 대들다가 죽었습니까? 헤롯도 그 당시에 권세자고 본디오 빌라도도 권세자잖아요.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한 노선이 되는 이유가 둘 다 죽는 죽음이 기존 권세가 하나님의 질서와 부합되지 않는다를 들추어내면서 들추어냄에 대한 증거로 죽으신 거에요.


그러니 사람들이 세례 요한 보면서 그 당시 사람들 좋겠다. 세례 요한한테 물세례 받고 그 다음에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한 벌 줘라. 그러면 구원. 그게 얼마나 쉬우냐 이 말이죠. 물속에 갔다 오는 게 약간 부끄럽지만 물 젖으면 마르면 되거든요. 물속에 그냥 들어갔다가 죽으라고 들어가는 게 아니잖아요. 한 10초 5초 숨 안 쉬고 나와가지고 바르게 살면 구원받고 심판에서 면제되고 천국 간다. 이 얼마나 쉽습니까. 마치 어느 교회에서 하듯이 백석대학에서 하지요. 세족식하는 것. 참 쉬운 거에요. 양말 벗고 서로의 발을 씻어주면 구원 받잖아요.


그러나 보세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사는 것부터 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어느 인간이 합니까? 세례 요한이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해요? 세례 요한은 나도 아니라는데 자기는 소리에 불과하다는데. 이런 고백이 그렇게 쉽게 나온 고백이에요? 어느 학교에서 배웠어요? 안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장차 올 메시아의 죽음을 자기 내부에 받아들인 거에요. 받아들이면서 자기 평생 동안 톨게이트가 아니라 인터체인지 하면서 돌아다니는 거에요. 왜? 이 세상의 어느 권세도 인간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고생할 만큼 고생했으니까 나는 이제 선지자 노릇했으니까 남은 여생을 저 지리산에서 편히 살래. 이런 거 없어요. 이런 거 없어.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세례 요한 속에는 비밀이 있다 했지요. 비밀. 비밀이 있는데 내가 전하는 말에는 비밀이 있어요. 잘 들으세요. 받아 적으세요 이게 아니고 세례 요한의 비밀이 세례 요한의 어디까지 미쳤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의 몸에 평생을 비밀이 장악한 거에요. 지배한 거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권세에 대들다가 죽은 거에요.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 비슷한 사람이 구약에 사사기에 나와요. 사사 삼손이 나실인, 바쳐진 자의 특별한 임무가 뭐냐? 특별한 임무. 하나님께서 비밀을 삼손에게 주고 나는 모른 척 하겠다. 이 테잎은 5초 후에 자동 폭발한다 이런 식으로. 불가능한 사명을 줬는데 삼손은 그걸 자기가 힘이 있는 자는 가능하다고 본거에요. 삼손이 생각하는 권세는 힘, 물리적 힘이 권세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삼손이 가사, 지금의 가자지역에 갔어요. 가자지역에 가서 가자 성곽을 문짝을 들고 문설주를 어깨에 메고 어디까지 갔느냐? 헤브론까지 갔는데 헤브론까지 직선거리가 60km입니다. 미친 거지. 왜 들고 가요. 그게 자기는 힘의 장악에 의한 힘으로 눌림으로서 하나님의 맡은 일을 역할을 다 했다고 보는 거에요. 갔다가 갔는데 어디서 죽느냐 하면은 헤브론에서 죽는 게 아니에요. 가자지역에 가서 머리카락 홀랑 다 날리고 눈알 두 개 다 뽑히고. 자, 머리카락 날리고 눈알 뽑혔다. 육신적인 힘은 전혀 깔끔하게 바리깡으로 머리 밀고 더 이상 삼손의 힘이 나올 힘이 없어요. 삼손의 신체적인 힘이 나오지 않을 때 나오는 힘이 뭐냐? 삼손이 죽는 그 자체의 힘이에요. 그것 때문에 그때 죽은 블레셋이 살아있을 때 죽인 블레셋보다 더 많았다.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삼손에서 블레셋한테 하마스한테 이스라엘 지배받는 이유가 하마스에 있는게 아니고 하마스가 힘 세다 블레셋이 힘 세다 그런 힘을 그 당시 이스라엘이 부러워하고 그리워한 거에요. 우리도 언제 힘주십니까.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는 힘은 우리에게 언제 주십니까. 우리도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여 뭐하십니까 우리에게 복을 주옵소서. 여호와 잘 믿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나온 그것이 둘 다 똑같은 종류며 똑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블레셋에 지배 받아도 합당한 거에요. 하나님의 금지와 하나님의 비밀이 세상 권세 추구하면서 그게 다 날라가버린 거에요. 그걸 삽입시키기 위해서 삼손을 집어넣은 거에요.


삼손도 처음에는 힘이 있어야 이긴다. 승리는 힘에 있다 이래가지고 힘 자랑 하면서 사자 잡고 이렇게 해도 자기는 그 육체적 힘보다 그것도 블레셋 여인 가운데서 그렇게 이쁜 여자는 처음 봤어. 유대민족 여자는 인물도 아냐. 이거는 완전히 블레셋을 들었다 놨다 이름이 들릴라에요.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노래 있잖아요. 삼손 속에 블레셋 요소가 있었던 거에요. 삼손 속에. 세례 요한 속에 있었어요. 그래서 오실 분이 당신이십니까? 이야기한 거에요. 그래서 여기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천국의 소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이 안다. 무엇이 세상권세인 것을 천국의 성령 받은 자는 그걸 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미진했던 권세가 예수님께 인수인계하면서 주님의 권세로 이어집니다. 주님의 권세는 이거에요. 주님의 권세는 네가 이미 죽은 자다. 너는 이미 죽은 자다. 네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너는 인정 못하지. 인정하게 해줄게. 왜? 네가 사회를 둘러싼 자연권세와 그리고 사회 권세가 너로 하여금 죽은 자로 확정지어주는 거에요. 우리의 겉과 속 전부 다 세상에서 온 거에요. 세상의 법과 질서를 통해서 자기를 의롭게 한 거기서 온 겁니다. 하나님 제가 뭐하면 내가 의로워서 천국 가겠습니까? 이건 거에요. 그래서 종교의 반대말이 속세가 아니에요. 종교의 반대말은 복음입니다. 모든 종교의 반대말은 복음이에요.


종교는 내가 구원받겠다가 들어있어요. 복음은 네 구원 끝났다는 거에요. 네가 너 자신에게 너 자신의 어떤 희망과 그리움을 갖지 말라는 거에요. 천국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하고 비밀이 섞여있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 천국의 언어를 이해 못합니다. 진짜 장모님 해장국 한번 먹어봐야 정신 차리지. 그 언약이 왔다는 말은 언약이 오는데 이미 성전에 언약이 왔는데 성도의 육신 자체가 이미 세상에 덧입혀졌잖아요. 그러니까 그 언약의 말씀가지고 한 꺼풀 두 꺼풀 뜯어내는 기간이 우리의 남은 여생이에요. 복음 남기고 주의 공로 남기고 다 뜯어내는 거에요. 그 작업을 누가 했는가? 우리 하기 전에 선배가 있어요. 누구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어요. 아브람 속에 아브라함이 있었고 야곱 속에 이스라엘이 있었지요. 야곱을 그걸 몰랐어요. 이삭 속에 자기를 속인 이삭이 있었어요. 하나님은 야곱 쪽을 밀고 있는데 자기는 끝까지 큰 아들이 에서가 자기 취향에 맞다고 나는 사냥고기 좋아한다고 큰 아들을 끝까지 밀었어요. 마지막에 복 주는 자리까지 아버지의 권한으로 너한테 몽땅 복 줄게. 우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사냥고기 잡아오면 내가 먹을게. 이거는 시험이 불공정한 시험이에요. 실력을 공평하게 해야지 일방적으로 나는 네가 잡아온 고기가 먹고 싶다. 그 고기 먹는 조건하에 복 줄게. 말은 그렇게 길게 했지만 노골적으로 뭡니까? 너 해! 이런 뜻이거든요.


그렇게 지시한 아버지가 그런 자신이 하나님께서 실망스럽게 본다는 생각은 이삭이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게 오류란 사실을 몰랐어요. 내 취향인데 뭐. 그러니까 오류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네가 지금 문제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그게 문제라는 거에요. 우리의 문제는 뭐냐? 10분후에 합시다.
 홍민희(IP:115.♡.177.240) 23-12-05 14:32 
강남-누가복음 20장 4절 (뒤집는 권세) 231121b-이근호 목사



이미 우리는 금지와 비밀에서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요. 그래서 살아있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가 아니라 죽어있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요. 질문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세상 권세는 자꾸 나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어요. 그러나 세례 요한 교훈 봤지요. 아브라함 봤지요. 이삭 봤지요. 야곱 봤지요. 야곱이 죽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얍복강이에요. 야곱을 죽여요. 브니엘에서. 죽이고 이름을 바꾸어서 기존의 이름 말고 다른 이름, 이스라엘 이름으로 새롭게 살게 하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야곱 구원 안 해주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에요. 야곱이 죽어야 이스라엘을 구원해요. 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살아나요. 그게 언약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왜 못 믿는가? 본인이 살아있다고 여기니까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살아있는 이상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살면 됩니까 전부 다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뭐냐? 모든 것이 종결, 한자로 하면 끝이죠. ‘끝’. 끝이 되게 되면 기쁜 소식이 돼요. 모든 것이 무효가 되는 겁니다. 무효가 되는데 여러분들이 이게 인간이 열심히 살면 슬픈 소식이에요. 워드에 글 다 쳤는데 뭐 잘못 건드려가지고 다 날라갔을 때 이건 정말 슬픈 이야기죠. 정말 슬픈 일이죠. 이걸 좀 더 확대시켜 봅시다. 인간은 왜 이 땅에서 슬픔을 느낍니까? 방금 해답 나왔죠. 왜 슬픕니까? 본인이 살아있는 내가 더 살려고 하니까 모든 게 슬픔이고 슬퍼지니까 헤매는 거에요. 이 땅에서. 이 세상 자체를 이미지의 세계거든요. 이미지의 세계에서 안에서 배회해요. 계속 떠돌고 있어요.


그래서 자연의 권세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은 햇살이 비치잖아요. 그러면 내가 죽거든 양지 바른 곳에 묻어 달라 이게 자연의 권세에 순응하는 거에요. 양지 바른 곳은 태양광 단지 밖에 없어요. 다른 데는 양지 안 발라요. 그래서 우리가 아까 종교의 반대는 뭐라고 했습니까? 세속이 아니고 복음이죠. 그럼 종교와 세속은 같은 겁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제가 뭐 하나 가져왔어요. 가사를 한번 보세요. 이 가사가 너무나 오늘날 20대 30대 초반의 심정을 이 가사처럼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이 없다고 봐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자꾸 종교로 접근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슨 종교하면 구원 받습니까 하는 그런 생각은 이제 지우세요.


종교와 세속이 동일합니다. 세상에서 기독교를 만든 거에요. 그러니까 종교, 어느 교회 다닌다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내가 누구냐를 봐야 돼요. 내가. 내 잠재 속에 이 가사가 다 들어 있어요. 봅시다. 언덕 위에 나의 고향은 노인처럼 잠자고 있다. 여러분들 20대 초반으로 다 돌려드리겠습니다. 언덕 위에 나의 고향은 노인처럼 잠자고 있다. 노인이 뭐냐? 따분하고 허무하고 버림받은 게 내가 그렇게 만들었구나. 그래서 젊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나의 고향 난 너를 떠나고 있어. 나는 너를 떠나고 있어. 어떻게든 되겠지. 내 인생 어찌될지 누가 알겠어. 이게 젊은 사람들이에요. 그냥 지겨워서 떠나는 거에요. 따분하고 허무하고 떠나는 거에요 그냥.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의 권세를 따라서 상징적 권세죠. 계속 그리워하면서 소망을 가지면서 떠돌아다니는 거에요.


나는 뭐든지 할 수 있겠지만 그 다음의 가사가 멋있지요. 나 뭐든지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내일되면 아무것도 못할지도 몰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떻게든 되겠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되겠지. 내 친구들은 다 가버렸어. 우리 젊을 때 그렇잖아요. 친구야 우정하고 해도 타임캡슐에 집어넣고 그런 건 엽기적 그녀한테 배우라고 하세요. 다 가버렸어요. 없어요. 엽기적인 그녀 알아요? 친구들은 가버렸어. 그리고 사람들은 다 나를 따라 떠날거야. 고향을 떠날거야. 아주 애석한 일이지. 왜? 추억이 있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있을 때가 좋았거든. 친구들과 함께 철없이 놀 때가 좋았어요. 하지만 모든 게 지나간 일이야. 모든 게 가버렸어. 어떻게 잘 되겠지. 내 인생 어찌 될지 누가 알겠어. 나는 항상 내 곁에 기타를 들고 다닐거야. 그래서 내가 혹시 밤에 외롭게 울게 되면 슬픈 컨츄리송을 연주할거야. 벌써 슬픔, 외로움 나오지요. 그리움 나올 거에요.


나의 첫사랑의 원천이었던 당신에게 키스할겁니다.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어떻게, 언제?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반드시 당신에게 돌아올 겁니다. 이건 사기입니다. 인간은 본인을 몰라요. 그냥 허세부리는 겁니다. 고향에는 안 돌아가도 누구한테는 돌아간다? 지 애인한테는 꼭 돌아가겠다는 거에요. 싸나이니까. 싸나이 같은 소리하고 있네. 사회에 싸나이가 통합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내 인생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 나는 항상 내 곁에 기타를 들고 다닐거야. 그래서 내가 혹시 밤에 외롭게 울게 되면 슬픈 컨츄리송을 연주할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내 인생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 나 뭐든지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내일 되면 아무것도 못할지도 몰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떻게든 되겠지. 내 인생 어떻게든 되겠지. 내 인생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


자, 보세요. 이게 종교입니까. 이게 복음 아니지요. 그러나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 젊은 날에서 벗어난 적이 있어요? 벗어난 사람 있습니까? 왜 시골에서 왜 서울 오는데요. 시골이 어떻다? 따분하고 허무하고 버림받은 거에요. 집안이 잘 살아도 이래요. 집안이 잘 살아도 사는 것도 귀찮아. 따분해요. 지중해 무슨 마을이고? 산토리니 거기 가보세요. 물가 비싸지요. 로마 어떻고 아가씨들 30대 20대 아가씨들 배낭여행 가는데 전부 다 한 때에요. 그냥 따분해서 허무해서 오는 거에요. 이게 우리 인생입니다. 이걸 감추고 교회 가서 기도한다? 이런 마음 가지고 기도하는데요. 이게 세상 권세 아닙니까. 해답도 없고. 이 노래 가사를 봤으니까 여기에 가락을 좀 실어야지요. 어떤 가락일까요? 이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교회 다니는 청년의 내면이에요. 내면. 하나님 도와주세요. 따분해서 못 살겠어요. 어떻게든 되겠지. 주님 은혜주시면. 나이 60, 70되도 아직도 이러고 있어. 이미 죽었는데. 우리나라 장인 가수가 이 노래를 불렀어요. 나하고 동갑이에요. 여기까지만 들을게요.


자, 문제는 이거에요. 이런 잠재력이 있잖아요. 이걸 어떻게 처리할거에요. 아무리 기도하고 교회 옮기고 해도 이게 내 그리움 내 소망 하나님이 나 원하는 인생 만들어주겠지. 이게 전부인데 여기서 어떻게 벗어납니까. 벗어날 수가 없잖아요. 그게 마태복음 3장에 나옵니다. 어떻게 하느냐. 인간은 못해요. 인간은 세상이 내 작품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배회하고 헤맬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는가? 여기에 마태복음 3장 13절부터 17절까지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로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세례 요한 실패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실패해야 돼요. 세례 요한이 실패한 이유는 소리이기 때문에. 주체가 아니고 그냥 외치는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 이유부터 살펴볼게요. 그 이유가 어려운데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쉽게 말하면 복음을 설명하는 가운데서 제일 어려운 게 뒤집기에요. 미래와 과거를 뒤집어버리는 겁니다. 이건 도대체 인간의 시간 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이 뒤집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제가 쉽게 한 것이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이 이야기에요.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비로소 하는 일이 있다는 거에요. 죽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죽었기 때문에. 인간은 죽으면 일 못한다는 것이 인간의 상식이에요. 이 세상의 상식인데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 죽었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십자가에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에요.


뒤집기 하면서 뫼비우스 띠. 지난여름에 했죠. 뫼비우스 띠. 종이 이렇게 뒤집지요 갈라디아서 강의할 때. 종이 뒤집어버리면 이면과 내면이 구분이 안 되는 거에요. 이면과 내면이. 그러니까 겉에도 중심은 주님이고 안에도 중심은 주님이고 어디도 주님 밖 벗어나지 않는 그러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천국의 어린 아이가 세례 요한보다 더 높임을 받는 거에요. 세례 요한은 어디까지나 구약 인물이기 때문에 그 어디까지나 모형이고 그림자에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는 신약에 어린 아이 같은 성령 받은 사람에 해당됩니다.


일단은 그렇게 아시고 어떻게 하는가. 마태복음 3장 한번 봅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말렸지요. 요한도 감 잡았어요. 내가 당신한테 세례 받아야 할 터인데. 내가.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세례 요한 입장에서는 이거는 성립이 안 된다. 왜냐하면 오실 주님이 나한테 세례를 줘야지 왜 이걸 뒤집기를 하느냐. 왜 뒤집기를 하느냐. 주님의 일의 시작은요 성령의 시작은 예수님이 안 죽으면 일이 시작이 안돼요. 예수님이 죽어야 성령이 나와요. 뒤집기가 될려면 예수님이 죽으셔야 돼요. 예수님의 죽은 영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겁니다.


제가 이번에 주일날 이런 설교했지요. 인간에게는 사고가 없다고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만 죽음이고 다른 죽음은 아니에요. 인간은 못 죽어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에요. 자살해도 안 죽어요. 인간은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뭐도 모르는가? 산다는 게 뭔지 몰라요. 죽음도 모르기 때문에 생명도 모르고 예수님 죽는 이유도 모르고. 모든 언어의 개념은 다른 권세에서 주님의 권세 내부에서 작동해요. 이것은 모든 의미는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십자가로부터 뿜어져 나와야 되지 인간이 통용되는 의미에다가 예수님의 복음을 접목시키는 것은 전부 다 실패로 끝납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미움을 받은 거에요. 인간은 뭐밖에 없다고 했습니까? 인간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뭡니까? 항상 자기의 그리움을 자기가 빼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 권세 안에서의 인간의 그냥 가장 기본적인 심리가 뭐냐? 상대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데서 오는 자기의 무능력을 스스로 한탄하면서 그것이 상대에게 안 들키기 위해서 오바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내 능력이 미흡하다는 것을 내가 간파를 해가지고 내가 간파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간파하면 안 되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걸 감추는 식으로 오바액션하는 게 인생입니다. 그걸 히스테리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히스테리에요. 히스테리. 히스테리의 행동이 뭐냐 하면은 오지 마! 이거에요. 오지 마! 십일조 드릴테니까 오지 마세요 하나님. 나 기도하고 새벽기도 나갈테니까 오지 마세요!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너무 밀어붙이지 마세요. 이게 히스테리에요.


주님께서는 누가 뭐래? 자기가 스스로 주 앞에 복종한다고 스스로 나와 놓고 복종하는 태도가 뭐냐? 너무 심하게 저를 닦달하지 마세요 라고 나오는 거에요. 자기가 나와 놓고 지가 지한테 벌 다 내리고 맴매하고요. 웃기지도 않아요. 웃기지도 않아. 그건 뭐냐? 자기가 자기에 대한 그리움, 자기의 꿈을 도저히 포기를 못해서 그래요. 자기 자신이 인정될 수 있는 상대를 고르는 것을 가지고 세상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 사랑이라는 것은 내 존재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줄 사람을 찾는 게 사랑 행위에요. 나 어때요? 16기 영숙 어때요? 상철이 어때요. 계속해서 나 어떻게 생각해요? 질문 자체가 나부터 나와서 내 칸을 비워놓을테니까 네가 내 마음에 드는 해답을 채워주게 되면 나도 너한테 섭섭지 않게 해줄게 이게 사랑입니다.


나는 손흥민을 사랑한다. 무슨 뜻입니까? 이 시간에 중국한테 한 두 골 정도 넣어야 손흥민을 사랑할 수 있어요. 그게 영웅이잖아요. 영웅이 영웅값을 해야 영웅이지요. 어릴 때 누가 영웅이냐? 아버지가 영웅이에요. 언제부터 아버지가 실망스런 존재가 되지요. 실망스런 존재가 되면서 아버지의 굴레는 못 벗어나요. 그게 우리의 정신병된 거에요. 아버지가 그때 조금만 나한테 잘해줬으면. 뭡니까? 아버지가 잘해주기를 원하는 거에요 아니면 본인이 아버지 앞에서 저 어때요 인정받는 그 인정 굴레를 못 벗어난 게 문제입니까? 때려죽어도 아버지의 시선에서 못 벗어난 거에요. 심지어 죽은 아버지 무덤가서도 소주 한 병 들고 가가지고 아버지 탓하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찡찡댈래. 언제까지.


그게 이 세상의 이런 이야기 성경하고 관계없는 이야기 왜 합니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성경은 이게 권세에요. 주님은 그 권세에 죽었습니다. 우리 권세가 도대체 어떤 질서와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가 명확히 알아야 돼요. 이게. 그거 알기 위해서 또 하나 가사 가져왔어요. 할 수 없어요. 이거는 알아야 돼요. 우리 자신을 알아야 돼요. 사랑은 뭡니까? 내가 인정하는거 말고. 그거는 당연한 거고 나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줄 때 그 사람의 존재가 나로 하여금 사는 이유를 제공해요. 존재의 의미를 준다고요. 김종환처럼. 기다려봐 내가 갈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테니까. 그게 존재의 이유 아닙니까. 내 존재를 위해서 배우자를 찾는 거에요. 그게 사랑이에요. 자기가 좋아할만큼 했는데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여자 오면 안 가! 너 주제파악도 안돼? 이래가지고 내보낸다고 또.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위세와 수준에 맞는 맞으면서 나를 일방적으로 존중해주는 거에요. 일방적으로 존중하는 거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어릴 때 엄마 아빠한테 배운 거에요. 그걸 잊지를 못해. 너는 왜 엄마보다 요리를 못해? 이러고 있다고요.


사랑이라는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넘쳐 눈 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에 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있네. 무슨 노래일까요?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 그래서 해결책이 뭐냐?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둬. 오늘 같은 밤 이문세 노래 사랑이 지나가면 가사 한번 보세요. 노래가 너무 좋은 노래에요. 그런데 이문세 노래는 한국말로 되어있잖아요. 이문세의 노래가 일상의 우리 속에 잠복되어있는 속 진짜 깊은 마음을 그대로 바깥에 내놨기 때문에 이게 유행이 된 거에요. 존재의 이유가 그렇게 유행이 된 이유가 우리 남자의 마음을 그대로 다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 교회 나와서 뭐한다고요. 기도해봐야 무슨 소용 있어. 그 마음인데.


자, 죽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못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아 허락해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세례 요한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 모든 의가. 왜 예수님이 나한테 세례 받는 것이 모든 의의 스타트가 되는지를. 이게 왜 시작이 되는지를. 이게 너무 어려운 이야기인거에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뭘 몰랐는가. 뒤집기를 몰랐고 더 나아가서 회전을 몰라요. 회전.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로.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로 돌리죠, 그럼 조치를 어디부터 조치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낸다는 것은 엘리야 안 보냈을 경우에는 자녀 마음 따로 있고 아버지 마음 따로 있고 이게 완전 벌어져있고 끊어져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엘리야 보낼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면 ‘끊어진 상태’에요. 끊어진 상태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 몰라요. 제자들도 몰랐어요. 그럼 끊어진 상태를 누가 보여줘야 돼요? 세례 요한이 보여줘야 됩니까? 누가 보여줘야 됩니까? 세례 요한은 실패했으니까 누가 보여 웁니까? 예수님 자신이 끊어진 상태가 뭔가를 보여주는 이 사건을 갖다가 무슨 사건이라 하냐면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못 온다’입니다. 끊어진 상태에 대해서 나온 것이 빌립보서 2장 8절에 나옵니다. 2장 7절부터 보면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섞일 분이 아닌데 섞였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섞일 분인지 아닌 분인지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제자들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어요. 심지어 베드로도 몰랐지요. 섞여놓고 섞일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을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두 가지 종류가 있죠. 십자가 없는 예수와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믿을 거냐, 십자가 달린 예수님을 믿을 거냐의 관계에요. 십자가만 드러내고 예수님이 사라진 그 예수님 믿을 거냐 아니면 예수님이 나중에 십자가 졌다 하는 그 예수 인물을 믿을 거냐 하는 겁니다. 끊어진 상태에서는 끊어짐을 믿어야 돼요. 끊어짐을. 그래야 내가 아는 예수는 나의 이 세상에 영웅시된 예수님도 같이 끊어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제 마음대로 구원 못 하는 걸 우리 주님은 화끈하게 해주시는구나. 우리의 진짜 신앙의 영웅이다’ 이렇게 되면 그건 다른 예수에요. 그건 예수가 아닙니다. 그건 엘리야의 죽은 예수님이에요. 십자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예수님이 아니에요. 그냥 영웅적인 예수님, 우리가 못 진 죄를 대신 지어가버리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있잖아요. 그러면 부활이 우선시가 되고 십자가 날아가버린 거에요.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게 무효화돼야 되는데 세상의 기독교는 개혁주의 교회는 부활이 됨으로써 십자가 무효화시켜버렸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부활을 자랑하라 되어있지않아요. 뭘 자랑하라? 십자가를 자랑하라. 왜? 너희들은 끝났으니까, 너희들은 죽은 자니까. 간득간득 살아있으면서 살아있는 채로 뭘 믿을까, 오 예수를 믿어야지. 이래서 구원 받는 사람은 천국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거에요. 완전히 죽어야 돼요. 완전히. 예수고 뭐고, 완전히 죽어야 예수님의 영이 우리를 살려내죠. 마치 예수님께 일어난 상황과 똑같이 상황이 일어나줘야 돼요. 그냥 죽은 체 하면서 한쪽 눈 감고 한쪽 눈 떠가지고 예수님 오시나 이래가지고 기다렸다가 예수님 재림하시나 날짜 계산해가지고 3차 전쟁 일어나고 아마겟돈 전쟁 일어나고 지금 이래가지고 될 문제가 아니지요. “어이 원수 이게 안 죽고 아직..” 계속 죽지 않고 재림 날짜 계산하고 있어요.


빌립보서 6절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뭡니까? ‘뛰어난 이름’, 요 이름이 뭐냐면 ‘독보적 이름’. 다른 이름에 섞이는 이름이 아니고 다른 이름을 짓밟는 이름. 다른 이름들을 부정한 이름. 독보적 이름이 주의 이름이고, 주의 이름 맞은 편에 누가 있느냐. 내 이름이 있는 게 아니고 아담의 이름이 있죠. 로마서 5장에서. 첫 번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대비. 딱 대비시켜요.


첫 번째 아담은 죄를 지은 게 아니고 죄가 아담을 계속 이어받죠. 죄가 아담을 생성한 거에요. 그런데 두 번째 예수님은 우리가 믿으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 의가 나와서 우리로 우리로 하여금 의의 생산물이 되게, 의가 우리의 부모가 되게 만들어요. 착한 일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가 태어난 그 자체가 의 안에서 태어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의인되게 하는 거에요. 그걸 ‘예수 안에서 의’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그 복음은 누가 알아듣는가. 철저하게 짤린, 죄에 의해서 내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에게만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이걸,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무효화시키면 안돼요. 이게 살아있어야 의가 같이 살아있어요. 그래야 언약이 살아있습니다. 구원받는데 환장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는데 내 구원 갖는 건 성경 자체에 없어요. 그런 건 없어요. 언약이 구원이죠. 예수님의 하신 일의 구원이에요. 성령님의 구원이고 삼위일체의 구원이지 내 구원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시작이 뭐냐 죽기까지.. 죽으심이 시작이죠. 자 여기서 질문 들어갑니다. 이 때 십자가 죽을 때에. 쉬운 문제니까 말씀해보세요. 죽을 때에 누가 이 십자가에 같이 죽은 자가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옆에 강도들도 아니고, 사도 바울도 아니고 아무도 십자가에 죽은 적이 없어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그거는 조건이 있어요. 성령이 왔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에 성령이 합류시킬 때 비로소 눈이 뜨이면서 인식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이 주께서 거기에 의되게 했다는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지은 죄를, 이게 뒤집기를 하기 때문에 뒤에 나오는 의가 앞에 나오는 모조리 전부 다를 전부 다 의로 다 바꿔놓는 거에요. 사십 년 딴 화투장 바꾸듯이 화투장 다 뒤집어버려요. 의 의 의 의.. 의로 바꿔버려요.


그걸 요한계시록에서는 피가 묻으매. 네 어디서 왔어? 어떻게 왔지? 예 어린 양의 피로 왔습니다. 그 이야기에요. 어린 양의 피가 내 나쁜 짓한 것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모든 것을 소급해서 다 해당해버려요. 이게 왜냐면 나중 것이 앞에 것을 완전히 회전시켜서 뒤집기를 해버리는 거에요. 아비의 마음이 자녀의 모든 것을 덮어버리니까 비로소 자녀는 아버지께 올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게 엘리야의 기능이에요. 지금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뒤집기 합니다. 세례 요한이 말합니다. “제가 예수님한테 세례 받아야 됩니다.” 차원이 그렇습니다. 자, 세례 요한으로부터 그 고백이 나오도록 유도했어요. 예수님과 세례 요한 사이에 어떤 누구도 끼어들 수가 없어요. 왜? 마지막 예언자기 때문에.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고 예수님의 소리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 말고 다른 소리 있다 없다? 없는 거에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구약의 대표자에요. 예수님은 그걸 바톤 인수받은 거에요. 엘리야에게 인수받은 거에요.


그러면 둘 사이의 관계가 전체 구원 받은 관계의 대표가 되어버려요. 전체가. 그럼 우리는 그냥 멍하니 그 둘 사이에 있었던 그 성사되는 일에 우리는 배제된 거죠. 왜? 우리가 끼어들 수 없으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에 나오는 말을 따라하지 마세요. 소용없습니다. 이건 따라한다고 해서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주님의 단독 행위이기 때문에. 항상 그 단독 행위를 강조하시기 바랍니다. 단독 행위를 강조 안 하게 되면요 예수 믿는다는 이름으로 내가 나를 책망해요. 이거는 사탄이 악마가 제일 좋아하는 거에요. “요거 못됐어. 떼찌!! 내가 그런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마라 했지?” 이런 거. 그거는 떼찌 정도가 아니고 몽둥이로 좀 많이 맞아야 돼요. 주님의 피를 모독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벌써 반성한 게 몇 번이야? 고해성사 벌써 6번째 왔어 너, 앞으로 몇 번째 올 거야? 그 짓 하지마세요. 고해성사하지마세요.


이렇게 하세요.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그게 죄 아닌 줄 알았는데 화투장을 들어보니 그것도 죄에요. 왜? 이미 의가 되었기 때문에 죄라고 마음 놓고 자유롭게 나는 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에요. 왜? 이미 의인이기 때문에. 자, 여기서는 단독자를 강조했습니다. 그럼 앞으로 주께서 기준이 뭐냐 우리에게 어떻게 뒤집기를 계속 할 것인가 그 뒤집기가 누가복음 4장에 나옵니다. 4장 18절. 이사야 6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4장 17절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렇게 되어있죠.


이사야 61장에는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거 설명하기도 참, 성신과 성령의 차이도 굉장히 복잡하지만 이런 것들을 알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벌써 설명했어요, 제가. 성신과 성령의 차이는 신이 임한 사람은 제대로 해라. 제대로 해라. 성령은 뒤집기. 너 못한다? 너 엘리야 아니야, 너 중보자 아니야. 왜 중보자가 하는 일을 네가 하려고 해 네가? 네가 너를 책망해서 왜 인간 만들려고 해? 새 사람 되려고 해? 하지마 하지마. 그거는 성신 있을 때나 하는 거에요. 여러분 하나 물어봅시다. 사울 왕이 성신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받았지요. 사울 왕이 다윗 창을 던질 때 성신 받았어요? 악신 받았습니까? 악신 받았지요.


새로운 언약 체제가 등장하게 되면 기존의 언약 체제에서부터 성신은 후딱 살아나요. 볼 일 다 봤다. 이게 구약에서는 새로운 언약의 주인공이 등장하면 기존의 언약 체계는 이게 무효가 됩니다. 왜냐 하면 구약의 언약도 뒤집기를 위한 준비 단계로서 미래가 과거를 재설정을 하기 때문에. 미래가.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와서 뭡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러면 세례 요한에게는 미래가 있습니가 없습니까? 지금. 오페라의 유령.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 주께서 완료하는 거에요. 너와 나와 같이 만나서 대표자 만나서 하나님의 의를 몽땅 다 이루자. 우리 Start!!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인 되는 거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니는 죄인이면서도 의인 자리에 가서 나에게 세례를 주는 거에요. 왜?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의인되었을 때에 네가 세례 준 것처럼 내가 내 원하는 백성에게 성령을 내가 부어줌으로써 이로써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는 거에요.


이거는 주님의 단독 행위입니다. 우리는 끼어들 자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명함 내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한 자로 하면 뭐라 하냐면, ‘끝’이에요. 나의 그리움도 끝입니다. 여러분 매일 그리워할 거 남아있어도 여러분이 죄 짓는 거만 그리워하세요. 뒤집기하세요. “이것도 죄였어?” 죄 찾는 그리움. 빈대 찾는 그리움 말고. 빈대 찾듯이 자기 죄를 찾아보는 거에요. 그게 그렇게 기쁘고 감사해져요. 왜냐 하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알면 내가 체면 받쳐서 못할 것도 다 할 수 있게 때문에. 죄인인 주제에. 죄인인데 뭔들 하는 말 있잖아요. 죄인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잖아요. 자기 신세 타령 안 하고. 기타들고 슬픈 컨츄리 노래 부르는 게 아닙니다. 기쁜 노래 부를 수 있어요.


여기 이제 계속 나가보겠습니다. 성신은 뭐냐 하면은 임시방편용이에요. 그냥 수단으로 사용하는 거에요. 언약을 위해서.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언약이 완성이 되어버립니다. 완전히 굳어버린 데서 오는 신이 바로 성령이에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성령을 보증금 줬다. 보증금을 준 거에요. 아파트 계약해봤습니까? 보증금을 주면 이미 그거는 등기 이전해도 괜찮아요. 보증금을 줬으니까. 담보로 주신 분이 주님이에요. 주님이 담보로 성령 줬는데 그 담보를 빼고 어디서 경매 들어오고 이런 거 없어요. 담보 들어왔으면 끝난 거에요. 담보 들어왔으면.


그러면 한 번 성령 받고 난 뒤에 타락하면 어떡하냐 그게 지금 약 올리는 거에요. 성령 받은 자는 네가 아무리 타락하고 싶어도 타락할 수가 없다를 그렇게 강조하는 겁니다. 왜냐 그 담보가 예수님 십자가 피 흘린 거기 때문에 그 피를 위해서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다시 망하는 인간이 내가 용서 안 한다. 내가 그냥 방치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너희의 죄를 씻을 새로운 제사가 필요치 않고 라는 말이 그거에요.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말. 지금 방금 제가 내뱉은 이야기가 무슨 뜻입니까? ‘제가 할 게 있습니까?’ 없다는 이야기에요. 왜? 이 끝은 주께서 이 끝을 함으로써 인간도 끝이 났어요. 내가 행할 수 있는 것도 끝이 났어요.


그러면 인간은 놀까요? 놀진 않지요. 이게 끝이 끝이 되기 위해서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가? 왜 나아갈 수 없지요? 죄인이니까 못 나간 거에요. 그러면 평생 남은 육신 가지고 뭐 합니까? ‘아 이것도 죄냐?’를 계속 들추어내는 기능이 의의 기능이에요. 죄가 많은 곳에 뭐가 넘친다 했어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 overflow에요. 뭐냐 하면은 죄를 숫자로 3을 졌다 하면 주께서 용서로 3을 주시는 게 아니고 죄는 요만큼 3을 지었는데 은혜가 333333333.. 갖다 붓는 거에요. 왜? 우리의 죄를 위해서는 주께서 지출하는 것이 너무 많아요. 주님의 지출. 자, 주님의 지출의 내막이 뭡니까? 자신의 생명이죠. 우주보다 더 귀한 것을 지불, 지출했는데 그까짓 죄 그거 은혜로 덮어씌우는 거에요.


내 자녀가 떡볶이 돈 안 내고 오니까 아버지가 왔어요. 주인한테 얘가 돈도 안 내고 떡볶이 먹었어요. 떡볶이 얼맙니까? 3000원. 어이 비서 3억 줘. 죄가 많은 곳에 주께서 치뤘던 지불, 지출금도 엄청나게 같이 동반해서 등장하는 겁니다. 이제 성령 안 받은 사람이 백발백중 튀어나오는 질문이 있어요. ‘이제 죄 지어도 되겠네?’라는.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지금까지 지은 죄도 모자라서 죄를 더 지을라고? 착한 일 한 것도 죄인데, 착한 일 한 것도 죄잖아요. 근데 나쁜 일이 죄일까요? 착한 일이 죄일까요? 어느 일이 더 쎈 죄입니까? 착한 일이 더 쎈 죄에요. 나쁜 짓은 지가 나쁜 짓한 거 알잖아요. 착한 짓은 지가 왜곡해서 해석한 거에요. 주께 영광을 돌렸다고. 이거는 맞아도 많이 맞아야 돼요.


뒤집기를 하는데 이렇게 뒤집기를 합니다. 18절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 이렇게 되죠? 한번 보세요. 대립되는 개념을 사용해요. 대립되는 개념. 반대되는 개념을 사용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도는 본인의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했죠.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포로 돼야 되고, 눈 멀어야 되고 그 다음에 가난해야 돼요. 집에 한 20억 있어도 3조 있는 사람보다 가난하잖아요. 그렇죠? 가난해야 돼요. 가난을 어떤 걸 가난이라고 하냐면, 가난이란 ‘아무리 가져도 가난임을 아는 자’가 가난이에요. 차가 한 5대 6대 있어도 아무리 가져도 그게 가난으로 이해하는 자가 가난한 자에요.


그걸 가지고 마태복음 5장3절에서 뭐냐, 심령이 가난한 자에요. 심령이 가난한 자. 가난한 자의 특징은 뭐냐, 자랑할 게 없어요. 십자가 외에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겉을 보시는 게 아니고 뭘 본다? 중심을 보는데 그 중심이 뭐냐? 끊어진 데서 주께서 집어넣은 새로운 십자가가 나오는 것.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나는 너희들이 예수님이 죽은 그 십자가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 이야기를 왜 했냐면, 고린도전서 1장에서 ‘나는 십자가 안 졌다’ 이 말이에요. 나는 십자가 안 졌어 이거 십자가 아니야, 내 살 아니야, 내 피 아니야. 이거는 십자가 아니야. 십자가는 따로 있어. 그러니까 십자가를 가리면 안되잖아. 가리지 않는 방법은 뭐냐?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고 가난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면 돼요. 그리고 눈 먼 자. 눈 먼 자라 하는 것은 언제 눈 먼 자인 걸 아느냐면 눈 떴을 때 눈 먼 자란 걸 알아요. 내가 하는 것이 참 정말 잘난 척 했구나. 내가 뭐 뭣도 모르고 까불었구나.


그러니까 오늘 되면 어제가 눈 먼 자고 내일 되면 오늘도 눈 먼 자에요. 계속 눈 먼 자가 되어야 계속해서 십자가만 감사가 되게 되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interchange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이 계속 우리 인생에 돌고 도는 물레방아 계속 돌고 있으니까요. 우리도 같이 돌고 있어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온 몸을 흐르고 있으니까 우리는 세상에 나와서 지을 것은 죄밖에 없어요. 남 도와주는 죄, 기도하는 죄, 헌신하는 죄. 모든 게 죄밖에 없어요. 그리고 특히 죄 중에 젤 큰 죄가 내가 악착같이 살려고 하는 죄. 이왕 사는 거 남한테 칭찬받고 사는 죄, 사랑받고 살고 싶은 죄, 안 외로울려 하는 죄, 이 죄가 죄인 이유가 우리에게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이게 죄니까 멈추자. 그런 경우는 인간에 없어요. 죄이기 때문에 죄로 나와야 돼요. 죽을 때까지. 내 죽고 난 뒤에 양지 밭에 묻어 달라 그거 뭡니까? 죕니다. 양지 밭에 묻든지 바닥에 던지든지 그건 죽고 난 뒤에 어떤 조치가 있든지 우리가 왜 신경 씁니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나한테 신경 쓰는 것이 죄며, 그 죄는 우리가 육신이 있는 한 멈추지를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끝까지. 그게 멈추지 않아야 그것마저 의가 되시는 복음의 오직 십자가 복음만 높아지는 거에요. 그 다음에 19절에 보면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 하고 책을 덮어버렸어요. 그럼 뭡니까? 책을 덮었다는 말은 주님이 앞으로 하실 스케줄이 이미 공개가 되었잖아요. 공개가 되었으니까 이 세상 권세는 이 주의 하는 일에 협조가 되어야 되죠. 어떻게 협조할까요? 죽여 버리라. 이렇게 협조하는 거에요. 오늘날 우리의 육신과 똑같지요. 주께서 다 용서했기 때문에 이제는 내 맘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협조하는 거에요. 이제는 내 맘대로 살아야지 하는 식으로 협조하는 거에요. ‘내 맘대로 하면 안되지 거룩하게 살아야지’ 라고 하는 순간, 그게 더 나빠. 그게 더 나쁜 거에요. 그게 더 십자가 모독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디모데후서 6장 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입는 거 먹는 걸로 족한 줄 알라” 했죠. 이 말씀이 이미 주어졌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갖고 있습니까? 입는 거 먹는 걸로 족한 줄을 알고 싶어 노력하잖아요. 이거는 맞아도 많이 맞아야 돼요. 이거는. 왜냐면 절대로 인간을 될 수 없거든요. 될 수 없는데 이제는 나는 신자니까 나를 통해서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되니까. 분명히 성령의 열맨데 왜 본인이 열매를 맺어요. 이 말씀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지키려고 하니까 주님 보기에는 속 터지는 거에요. 왜냐하면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 영광이 아니고 예수 십자가 믿고 먹는 거 입는 거 족하게 여기는 나를 우상시 하는 게 마귀의 농락에 놀아나는 거에요 이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됩니까? 입는 거 먹는 거 족한 줄로 알라 이 말씀을 지키고 싶어요. 지키고 싶은데 이거 못 지킵니다 하고 우리는 고백해야 되겠지요. 그 다음에 있어요 뭐냐 하면 입는 거 먹는 거 족한 줄로 알라 하는 걸 못 지킨다고 고백했다고 고백한 게 자기의 의가 되어버렸어요. 이것도 못 됐어.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그냥 내버려 그냥 살어요 그냥. 그냥 살면 모조리 다 주께서 죄 되게 만들어줄테니까 십자가 공로만 돌리면 되는 거에요. 슬슬 흥분할 때 됐으니까 끝날 때 되었죠? 기도 한번 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끝이 되면 모두가 무효화된다는 것이 우리가 왜 진작 몰랐습니까? 끝을 끝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다 이루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죄인으로 마음껏 활용하고 말씀을 통해서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이것이 이거보다 더 큰 감사와 기쁨이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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