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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3 23:32:21 조회 : 402         
종말 속의 메시야 누가복음 21:6 240213 이름 : 이근호(IP:59.23.18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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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15.♡.177.240) 24-02-27 23:35 
강남-누가복음 21장 6절 (종말속의 메시아) 240213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1장 5절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라고 되어있지요. 이스라엘이 모든 인간 역사를 대변해서 하나님과 접촉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번 생각해봅시다. 유일하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민족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다가 뭐를 심어놨는데 뭐를 심어놨느냐. 하나님이 친히 인간들을 만나겠다고 이건 하나님 쪽에서 제안한 거예요. 하나님 만남의 장소를 이스라엘 속에다가 심어놓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성전입니다. 성전. 만남의 장소. 만남의 장소라고 마련해놨는데 실은 더 정확히 말해서 만남의 조건의 장소. 조건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같은 영역 속에 있기 때문에 만나고 싶으면 만날 수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동일한 공간에 있다고 해서 만날 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공간에 접촉점에서 만나는 겁니다. 인간의 세계는 그냥 동그라미라고 보면 되요. 원주. 그냥 평평한 수평적인 여기 a라는 지점 b라는 지점. 거리가 멀지만 만나고 싶을 때는 만남이 가능해요.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그렇게 평범한 게 아니고 동그랗지만 뾰족하게 이렇게 튀어나왔어요. 밤톨처럼 뾰족한 이 지점. 이 지점이 바로 이스라엘 성전이 있는 공간, 성전이 있는 공간입니다. 만남의 장소. 만남의 조건의 장소에요. 있다고 만나는 게 아니고 조건이 충족될 때야 만날 수 있는 겁니다. 이거는(원) 수평적이라고 할 수 있고 이거는(밤 모양) 수직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인간들이 여기 위에 올라가야 하나님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올라가야.


그런데 인간에게는 오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도 없고요 인간은 올라가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평평하기 때문에 따로 올라가는 게 없어요. 산에 올라가봐야 내려와야 되고 엄홍길처럼 백날 올라가봐야 자기 가족 있는 집으로 내려와야 되잖아요. 올라가봤자 또 내려가고 올라가봤자 따지고 보면 평평한 곳에 약간 돌출된 부분이지 평평한 것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성전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 성전은 만남의 조건의 장소이기 때문에 만남의 장소인데 조건이 하나 더 붙기 때문에 조건에 부합되지 않으면 주님의 만남의 장소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게 조건이 뭐냐. 여기는 율법을 수행하는 조건. 하나님 율법을 수행하는 조건이 충족되는 겁니다 이 성전에서. 만약에 율법 수행이 충족되지 않는 상태에서 만나겠다고 올라가다가는 조건에 의해서 차이게 되어있어요. 꺼져라. 율법도 안 지키면서 어디 건방지게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려고 하느냐.


그러면 율법을 지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두 가지로 되어있어요. 뭐냐 하면은 율법에서 십계명, 십계명은 지켜야한다. 그런데 십계명만 주신 게 아니고 십계명을 지키라가 어디에 포함이 되어있어요. 어디에 포함되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제사법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십계명이 안에 들어가요. 제사법 안에 장소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언약궤가 있고 언약궤안에 십계명 그 상자 안에 들어가요 이게. 상자 안에. 1m 15cm가로, 세로 57cm 높이 아카시아 금박 입힌 그 상자 안에 십계명이 들어가요. 들어갈 때 그 들어간 이 십계명이 어떤 십계명이냐 하면은 깨진 십계명이에요. 깨진 십계명. 십계명이 깨어져버렸어요. 아주 신비로워요. 지키라고 준 십계명이 인간이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깨진 겁니다. 계약이 깨진 거죠. 깨진 계약이 될 때 만남의 조건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깨어진 계약이. 계약이 깨어지면서 플러스 뭐가 붙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지정한 제물의 희생 피가 들어갑니다. ‘희생 피’. 그런데 이 희생 피는 희생물은 뭐냐? 조건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흠 없는 조건이에요. 흠 없는 희생양이에요. 흠 없음과 깨어진 계약을 통해서 나타난 인간의 흠 있음과의 만남이 제사법이 되는 겁니다. 그 장소가 성전이에요. 성막, 지성소, 성전의 지성소 그게 만남의 조건입니다.


십계명부터해서 여러 가지 율법이 있지 않습니까. 율법을 주님께서는 위로부터 내려보냅니다. 내려보내서 이 이스라엘 전체를 모든 구석구석 생활하는데 있어서의 계명들을 쫙 줍니다. 오징어 먹지 말고 돼지고기 먹지 말고 전부 다 그거거든요. 염소새끼를 염소의 젖으로 삶지 말라 이런 것도 포함되겠지요. 그런 계명들이 쭉 이렇게 내려와요. 내려와서 한번 훑고 지나가게 되면 여기서 발생되는 게 뭐냐 하면은 ‘우리는 죄인입니다’가 돼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죄인이 되는 거예요. 율법의 촉수가 쫙 퍼지지요. 퍼져서 전체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은 계약이 깨어진 ‘흠 있음’으로 전환시켜요. 흠 있음으로 전환시키고 그래서 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백성들이 뭘 쳐다보게 되는데 만남의 조건 장소에서 활동하는 자들을 쳐다보게 되어있어요. 활동이 두 종류가 있지요. 여기 백성들은 자기의 생계와 생존을 위한 활동, 이들이 백성들이 하지만 특수한 지파, 레위지파의 특수한 활동은 생존에서 활동하면서 유발되는 죄를 씻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씻는 활동. 그러면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거죠. 임금이 필요 없어요. 임금이 필요 없고 임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임금이고 그 임금이신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만남의 장소에 위치하는 지파, 레위지파. 그 기능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본격적으로 핵심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제사장들이 활동하고 그 장소는 만남의 장소, 성전이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겠죠.


이스라엘이 이런 식으로 거룩한 제사장 나라고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해놓고 또 하나 또 추가한 게 뭐냐 하면은 ‘언약의 나라’. 계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나라. 언약의 나라입니다. 언약의 나라. 계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나라. 이 계약은 누가 계약했을까요? 우리는 계약의 수여자, 일방적인 수여자이지 우리가 계약 작성자가 아닙니다. 이런 식의 구조는 인간의 머리에서 아이디어에서 짜낼 수 없는 거예요. 제사장 나라, 계약의 나라. 그 계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천국이.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과 경쟁하느냐 하면은 인간이 생각하는 미래의 자기 좋은 영광 얻는 나라가 인간 쪽에서 만들어낸 거고 진짜 실제로 천국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천국이고. 천국이 이 세상에 두 종류가 발생되어버렸어요. 내가 호강하는 나라냐? 아니면 계약이 계약대로 이루어지는 나라냐. 그러면 진짜 천국에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내가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은 계약 내용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돼요 계약 내용에. ‘나는 죽어서 천국가고 싶어요’라는 그 계약 내용은 없어요. 진짜 천국의 계약 내용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계약대로 되게 되면 그게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 천국을 받아들이면 내가 소원하는 천국은 내가 일찌감치 접어야 됩니다. 포기가 돼야 돼요.


이걸 간단하게 말해서 나를 위한 나라는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라가 천국입니다. 따라서 천국 갈 사람은 삶 속에서 더는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 조건이 바로 천국의 조건인 것을 흔쾌히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요. 매사가 나를 위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일들을 일으켜주심을 일으켜주심을 감사합니다. 내 뜻을 이루지 않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내 뜻을. 그래서 우리 성도가 해야 될 기도는 똑같은 기도를 그냥 되풀이한다고 보면 돼요. 마지막 우리가 할 기도는 주기도문밖에 없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 나라와 아버지가 되는 아들에게만 그 나라가 오게 되어있습니다. 두 개의 나라가 있다고 했지요. 인간 나라하고 천국 나라. 그러면 종말은 뭐냐? 종말은 천국의 구성요소와 백성들의 숫자가 다 차면 이 세상은 더 이상 뽑아낼 것을 뽑아냈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필요치 않잖아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에게 알려준 주님의 종말인 거예요. 종말. 쓸데없어서 제거하는 거예요. 건질 거 건졌으니까 이제는 찌꺼기는 지옥으로 쓰레기통에다가 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종말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죠. 마땅한 거고. 종말을 기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어요? 평소에 자기를 위한 세계는 마땅히 진작에 이게 없어져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한테는 마지막이라 하면 아 숨 쉬는 끝 다 됐구나. 아 지긋지긋하게 긴 시간 이제는 드디어 끝을 보는구나! 너무 가볍게 종말을 맞이하는 거예요. 가볍게.


아까 여러분들 21장 5절부터 38절까지 읽어보라고 했지요. 읽어보니까 뭐 더 가벼워졌어요? 너무 가벼워서 성경 보면 막 뽀뽀하고 싶고 그래요? 주님 이 말씀 안 줬으면 내가 무거운 짐이 있는데 드디어 내가 기거하고 살아온 이 동네하고 내가 헤어질 순간이 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남양주에 살던 어디에 살든 뷰 좋은데 살던 간에 나하고 그게 무슨 상관있는데 그게. 이제는 제대로 빠이빠이할 때가 이제는 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이제 종을 편하게 놓아주시는구나.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구나. 평소에 그렇게 되려면 나를 위해 사는 그 지긋지긋함 더는 나를 위해 살고 싶어도 소용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데 주께서 나를 위해 사는 이 무거운 짐을 주께서 덜게 하시는. 그만 네 인생에서 네가 이제 손 떼도 괜찮다. 내가 알아서 해결해줄게 그 순간이 바로 종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는데요 “그럼 종말에 누가 들어갑니까?” 라는 그 질문도 여러 가지 질문 중 하나입니다. 종말은 언제가 종말인데요? 2025년도인가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거예요. 종말에 들어갈 사람들, 종말이 언제냐 하는 그 점을 설명할 때 적절한 예가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은 중화요리집에서 나오는 코스요리를 보면 돼요. 코스 요리의 특징이 있어요. 음식 한번 나올 때마다 접시를 비웁니다. 그러니까 접시에 음식 조그맣게 나오잖아요. 접시 나올 때 마다 접시 이름이 종말1, 종말2, 종말3 이렇게 보면 돼요. 접시를 보내놓고 이걸 비우는 겁니다. 2024년도에 종말 간 사람은 작년에 갈 사람은 작년에 접시를 줘가지고 자기 것을 비우고 그리고 2024년도에 구원받을 사람은 새로운 또 다른 코스요리를 준비해가지고 코스를 딱 준비해요. 탕수육 조금. 팔보채 약간. 이렇게 해줘가지고 이거 후딱 비우면 접시 나갈 때 따라 나가면 돼요. 접시 나갈 때. 접시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니까. 주께서 그때그때마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그때그때마다 계속해서 모집하는 겁니다.


그런데 코스요리에서 마지막이 뭐냐 하면은 짬뽕 드실래요? 짜장면 드실래요? 이거 마지막이에요 이게. 이제 접시 안 와요. 그 다음부터는 계산하고 빨리 나가라는 거예요. 마지막은 짬뽕 드실래요? 짜장면 드실래요? 그게 마지막이죠. 그런데 미리 접시를 먹은 사람은 짬뽕 짜장면 그것까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자기는 뭐 빈 접시 먹었으니까 이미 합격했으니까 남이 합격되고 안 되고 그런 걱정을 왜 자기가 해요. 2078년도에 누가 구원받을까? 그걸 네가 왜 걱정해. 2078년 올지 안 올지 너는 네 할 일 하세요. 2078년도에 2096년도에 누가 구원받을까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 나라와 그 때는 네가 신경 쓰지 말라는 거예요. 그건 천사도 몰라. 그건 아버지가 알아서 하실 거야. 이게 바로 현장성이라고 해요. ‘현장성’. 지금 하나님의 현장이 나한테는 마지막 내민 코스요리 접시에요. 우리 자신을 나를 위한 나를 그 접시라는 하나님의 계약서에다가 하나님의 계약에다가 죄인의 모습으로 그 죄 사해주는 그 희생의 피에 합류하면 되는 겁니다. 넘기면 돼요. 그때그때 넘기면 되는 겁니다. 현장성이 중요한 거예요. 남의 인생까지 걱정하고 이럴 필요 없어요. 아버지 치매 걸렸는데요. 아버지가 문제지 내 문제 아니지. 그 현장성, 그 시점에 주께서 주신 이 모든 조건은 종말의 조건이에요. 어떻게 아버지 나으셔서 행복하게 산다 그건 종말 아니잖아요. 그건 내 혈통과 내 자존심, 내 자부심을 위해서 세상을 사는 거지 나를 위한 그것은 안돼요. 그건 게워내야 돼요. 토해내야 돼요. 일종의 코스요리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내일 주님 온다고 할지라도 그건 내일까지 살아봐야 되는 문제고 중요한 것은 오늘 주께서 내민 계약서가 뭐냐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그 계약서의 마지막, 다른 말로 하면 마지막 계약서. 마지막 계약서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피죠. 피와 살입니다. 그러면 성전이 있잖아요. 성전, 산, 시내산, 이스라엘 공간 이런 것은 뭡니까? 앞에 있던 코스이기 때문에 이건 다 무효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21장 5절에 어떤 사람이 성전을 보고 할 때 예수님께서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 이게 다 무너진다는 거예요. 이 말을 어떻게 해야 돼요? 그 당시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은 아이고 아까워라 이러잖아요. 아까워 할 문제가 아니고 고마워해야 될 문제지요. 아! 건물이 있었고 건물에서 양 잡고 소 잡는 것은 이게 옛날 방식은 이제는 그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방식이에요. 마지막이에요. 이 성전 했던 것은 마지막이단 말이죠. 그 중국 무용단이나 북한 무용단이나 쇼하는데 마술 비슷한 쇼가 있어요. 뭐냐 하면은 1초 만에 옷 갈아입는 쇼. 옷 바꿔 입는 거 있죠?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은 진짜 저 무용수가 제일 마지막 입는 색깔이 무슨 색깔이냐? 마지막. 마지막 계약은 예수님의 십자가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마지막이기 때문에 이것을 아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식으로 예배하거나 제사하는 것은 이게 다 무슨 식이 됩니까? 이게 예수님이 이미 완료가 된 이상은 이 계약은 벌써 옛날 계약. 없어질 계약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무너지는 징조가 보일 때에 굉장히 기뻐하고 감사하죠.


옛날 계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 성전 있지요. 성전 짓는 것 돌 쌓으면 되겠지요. 성전 제사할 때 양 들고 오고 염소 들고 오고 인간이 할 수 있지요. 양 들고 염소 들고 할려면 여기 제사장들 월급 줘야 하잖아요. 월급 주면 그들이 뭐합니까? 헌금하겠지요. 헌금 인간이 할 수 있잖아요. 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선교, 전도 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은 더는 이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단독으로 했기 때문에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다 가짜입니다. 찬양한다라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가짜가 돼요. 찬양한다는 것, 헌금한다는 것, 전도한다는 것, 봉사하는 것 모조리 다 가짜입니다. 그거는 옛날 계약이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계약에서 우리 앞에서는 마지막 계약을 흔쾌히 기뻐하는 자의 자세는 뭐냐? 나는 못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못합니다. 이 자세로서 마지막 계약 앞에서 서면 되죠. “나는 못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 뭐라고 하겠어요? “사람은 할 수 없지.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계약의 작성부터 해서 싸인 완성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 홀로 하셨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앞에서 자연적으로 우리는 뭐냐? 내가 못하잖아요. 안 했잖아요. 이건 뭘 뜻하느냐? 애초부터 나는 나에게 종말이었다. 애초부터 나는 종말이었다. 내가 나에게 전혀 소용없는 존재였다. 그걸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아무짝도 소용없는 인간이었다.


그럼 이것은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보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고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 23절에 보면 그동안 나는 사탄과 단짝이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네가 사람 일을 하는구나.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이 베드로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했어요. 그동안 우리는 마귀와 단짝이었던 거예요. 마귀와 단짝인 것을 욕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제는 속이 다 시원하다 이렇게 느껴져야 돼요. 그동안 단짝이었는데 주님이 개입해서 이제는 네가 내 안에 들어있었어? 발견하는 거예요. 눈이 열려가지고. 네가 내 안에 들어있었단 말이지? 그래서 네가 나보고 헌금해라 전도해라 예배드려라 찬양해라 선교해라 계속 부모한테 효도해라 나라에 충성하고 계속 네가 나한테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네가 계속 시켜왔던 게 너였어?!! 오늘 제목을 ‘너였어?’ 할까. 너는 너를 포기하면 안돼. 너는 너를 지키는 자야. 네가 너를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도 너를 도와줄 사람 없어 라는 말이 다 악마가 내 속에서 나한테 그런 식으로 나를 아주 도와주는 식으로 나한테 그렇게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악마가 우리 편에 서있는 것처럼 이렇게 말해요. 절대로 너는 종말의 희생자가 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은 종말에 가도 너만큼은 구원돼야 된다고 마귀가 우리한테 그렇게 속여온 거예요. 종말이 되니까 이러한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그동안 나는 나를 지키는 계획만 세웠다는 것.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어도 사실은 하나님, 예수를 믿은 게 아니고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결사적인 몸부림으로 교회를 다니고 성경공부를 한 거예요.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의 종말은 바로 그걸 공격하는 거예요. 25절에 어떤 사람이 성전을 가리켜 할 때 미석은 아름다운 돌이에요. 아름다운 돌이 뭐냐 하면은 이게 아름다운 물건이고 귀한 마물이에요. 그만큼 인간이 마지막으로 잃어버리기 싫은 것,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마지막 지키고 싶은 것 그 지키고 싶은 것을 주님의 마지막 계약이 그걸 공격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마지막 지키고 싶은 게 뭘까요? 뭘까요? 우리 자신에게 마지막 지키고 싶은 게 뭘까요? 우리가 이렇게 있다면 여기서 복음이고 말씀이고 외치잖아요. 하면 우리는 마중 나와서 믿습니다 지키겠습니다 하잖아요. 그런데 복음 말씀이 그냥 마중 나온 걸로 머물지 않고 깊숙이 들어와요. 깊숙이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내빼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 자아가 도망가요. 어어~~여기까지만 합시다. 그럼 더 밀고 들어와요. 그러면 우리 속에서 뭐냐? 어떤 비명 같은 것이 들려요. 안돼~~~~!!안돼 가 나와요. 이것만큼은 손대시면 안 되십니다. 그럼 나 죽어요 정말 내가 살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만큼은 어떻게 좀 지켜달라는 거예요. 엘리사 엘리야 보면은 사렙다 과부 엘리야, 수넴 여인 엘리사. 엘리사 엘리야가 공격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도움 받는 쪽이 자기가 평소에 지켜왔던 것이 폭로당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아들이 있는 그 사람은 아들이 죽고 아들이 없던 자에게는 일부러 아들을 주고 준 아들 죽여버리고. 그러니까 그 도움 받았던 그 사람들이 엘리사 멱살을 붙잡고 달려들지요. 누가 도와달라했어요?! 왜 멀쩡한 내 아들 왜 죽입니까?! 내 아들 왜 죽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끝까지 지키고 싶다는 것이 있다는 것이 드디어 들통납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혈육. 나의 자식입니다. 나는 죽어도 내 DNA가 남아있는 것은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자식이 아무리 말썽쟁이 자식이 아무리 투자해서 다 날렸다 하더라도 끝까지 내 자식 귀하고 지켜주는 것은 어미. 어매~~~하는 노래 있잖아요. 어머니가 네 잘못 하나도 없다 다 이 어미 잘못이다. 교도소 면회가가지고 다 내 잘못이다. 너 먹고 싶은 거 뭐 있어? 추운데 내복 넣어줄까? 구치소에 가 가지고 다 내 잘못이다 네 잘못 아니다. 엄마가 책임지고 너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라. 인간이 마지막 지키고 싶은 것은 자기 혈육입니다. 나는 죽어도 자식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게 하는 것은 자식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에게 그 자식을 바치라고 하죠. 정말 잔인한 하나님이에요. 좐인한. 잔인 아니고 좐인한. 아주 잔인해요. 그것보다 더 잔인한 것이 하갈이 자기 자식 이스마엘을 지키는 거예요. 자기가 하는 것은 괜찮아요 그런데 어린 이스마엘이 쫓겨나가지고 물 없을 때 간절히 기도합니다. 간절히 기도해요. 하나님 내 자식 물 없는데 먹을 것 달라고. 모정의 세월. 우정의 무대에요. 여기 어머니가 와계신데 자기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나와보라고 하면 우르르르 나오지요. 우정의 무대. 하갈이 이스마엘에게 퍼붓는 마지막 애정. 하갈, 이스마엘 하나님께서 복 내렸어요? 안 그러면 저주했어요?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지옥이죠. 지옥 간 사람은 어떤 경우도 자기 혈육을 포기를 못합니다. 엄마의 사랑으로 지켜줘요.


이걸 보게 되면 부모가 엄마가 자식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비계약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대드는 하나의 요건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 자식은 부모 사랑 안 해요. 인간 세상의 특징은 내리 사랑이죠. 올림 사랑이 없어요. 아무리 부모가 자식한테 잘해줘도 자식은 엄마의 사랑을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엄마들이 자식 보고 하는 말이 너도 장가가서 시집가서 애 낳아보면 내 마음을 알거다. 그래도 몰라요. 그래도 모릅니다. 인간은 출발점이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자기 존재 이전에는 어떻게 알 수가 없어요. 자기 자식밖에 모르는 거예요. 이게 하갈과 이스마엘이 보여준 겁니다. 어줍잖게 부모 사랑, 형제 사랑으로서 천국에 들어갈 생각하지 마라 이 말이죠. 오히려 그것이 장애가 되고 방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부모 사랑하지 말고 자식 사랑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그게 아니고 인간은 못해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약은 애초부터 천국은 네가 협조해서 될 나라가 아니고 협조 안 해도 되고 협조할래도 할 수가 없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뭐냐? 내가 열심을 냈던 나의 세계가 허물어지는 그것을 네가 반겨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 기뻐해야 된다는 거예요. 율법에서 종말이라는 것은 종말이 아예 내재되어 있는데 종말은 바로 안식일을 종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안식일을. 일하지마 일하지마 이거에요. 하지 마. 너희들이 일해서 천국 만드는 거 아니니까 너희들이 끼어들지마. 일하지마. 그래서 안식일을 인간이 지켜서 안식일 되는 게 아니에요. 성전의 일이 완료가 되면 이게 영원한 안식이 되는 겁니다. 성전, 공간 문제거든요. 안식일은 날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성전의 일이 마감이 되면 그날이 영원한 안식이 되는 겁니다. 공간과 시간을 하나님을 위한 공간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이렇게 같이 연결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 이 만남의 장소 성전이 상당히 중요하고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핵심신학이 뭐냐? 딱 두 가지에요. 하나 더 하면 세 가지 되지만 성전의 성전 중심, 안식일 중심, 세 번째 추가하려면 할례. 할례를 행하는 것. 이 세 가지로서 유대교가 성사됩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교는 우리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전의 제사고 우리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안식일 중요시 여기고 그 다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 이것만 있으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대민족을 마지막 때 살린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예수님 홀로 다 했잖아요. 이제 공격이 남아 있잖아요. 뭘 공격하겠습니까? 이방민족에서는 자식이 중요하지만 유대민족에게는 자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세 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전 공격하고 주님께서는 안식일 공격하고 주님께서는 할례를 공격하는 겁니다. 네가 몸의 할례 한다고 거룩한 게 아니라 마음의 할례 해야 돼. 안식일, 안식일은 너희가 노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이 와서 일하는 날이 안식일이야.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야. 성전, 너희 건물지은 게 성전이 아니고 내가 죽었다가 부활한 내가 성전이야. 그렇게 이야기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미 성전이고 안식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세례를 할례의 완성으로 보거든요.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서 16절까지. 이미 완성이 되니까 더 이상 이런 것들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이 하나도 소용이 없게 되었어요. 소용이 없게 되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필요가 없어요. 홀가분한 거예요.


인간이 자신이 해내는 것을 인간이 믿습니다. 인간이 믿거든요. 인간이 자신이 해내는 것을 믿어요 인간은. 그런데 종말이 되게 되면 주님이 다 했기 때문에 뭐부터 공격하느냐? 인간이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공격할 때 그 때 공격당함을 기뻐하는 사람이 바로 천국에 들어갈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 못 버리는 것을 주께서 무의미하게 만들어 주시는 그러한 일이 내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주님의 그 능력이 이제는 내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안에 담긴 귀한 것들을 전부 다 없애버린다는 거예요. 이방인들은 자기 자식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그러면 유대인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자기 구원입니다. 자기 구원. 이 자기 구원을 주께서는 공격합니다. 나는 구원 받아야지를 공격해요. 나는 구원 받아야지를. 그러면 자기 구원을 주님이 공격한다고 가르치는 교파가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어요. 뭐 대표적인 교단 보세요.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 신천지, 여호와 증인 전부 다 공통점이 뭡니까? 마지막에 그들이 주장하는 성경구절 막 대고 해도 마지막에 이야기하고 싶은 건 뭡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당신은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침례교도 마찬가지고 기존의 장로교도 마찬가지고 천주교도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으로 생긴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고 거부당하는 식으로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구원받지 않으면 자기가 그동안 했던 모든 신앙생활이 허사로 끝나는 것을 겁을 내요. 그래서 종말이라는 말을 싫어해요. 왜냐 하면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모든 계획이 무산되기 때문에 그게 싫은 겁니다.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게 있기 때문에 종말을 싫어하는 거예요. 그럼 종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가 좋아하느냐? 누가 종말을 좋아하느냐 하면은 세리와 창기. 그리고 덧붙인다면 강도. 에이 이왕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 이미 망가진 것 같이 망해버리자. 여기 성경에 또 나오잖아요 문둥병자, 소경, 절룩발이, 가난한 자, 이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자력으로 일어설 희망이 없어요, 이들의 특징이. 자력으로 일어설 수 있는 어떤 희망의 여지가 전혀 없어요 이들의 특징은. 그럼 세리, 창기 이들은 뭐냐? 왜 이들에게 주님께서 복음을 주시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주느냐. 이게 하나의 마지막 때의 징후, 징조 증상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증상으로 이들을.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 보고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붙여줬어요. 아니 노는 것도 좀 수준 있게 놀아야지 전부 다 지지리 궁상들하고 놀고 너희 선생은 원래 그래? 이러거든요. 왜 인간의 값어치를 높이는 향상시키는 노력을 하든지 도를 닦든지 해야지 어떻게 망가진 사람하고 해서 이들에게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이들하고 노느냐 하는데 얻을 게 없어서 놀아요. 주께서 찾아온 이유가 나한테 더는 얻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마음 놓고 오지요. 마음 놓고. 볼 게 없고 건져갈 게 없기 때문에.


이들이 마지막이 마지막다운 존재. 이들은 마지막에 마지막다운 존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갈 때까지 다 가본 자들이에요. 특히 여기 간음한 자까지 포함해서. 마지막 때까지 다 건 거에요. 부자 앞에 있던 거지 나사로. 그리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 엎드려서 나는 죄인이라서 내가 내세울 어떤 의도 없나이다. 그냥 엎드려. 감히 하늘을 볼 자격도 하나님을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안 됩니다. 주님의 이름 아껴 불러야죠. 아껴 부르죠.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고. 유일하게 나를 제대로 아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내가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폭로시키는 분이 우리 주님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육신의 부모들은 자꾸 격려하려고 하고 친한 친구들은 자꾸 위로하려고 하는데 위로 격려가 없어요. 그거는 내 존재에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죄인은 죄인다워야 되지요. 아까 제가 출애굽 할 때 뭐했습니까? 율법으로서 쭉 훑어가지고 뭐를 끄집어낸다? 죄를 끄집어내고 어디와 합류한다? 성전 가운에 있는 피 흘림, 제물의 피 흘림에 거기에 합류시키는 거죠. 그게 제사장 나라에요. 이스라엘 출애굽이 제사장 나라에요. 세리와 창기 이런 경우는 뭐냐? 도무지 버틸 게 남아있지 않는 존재. 도무지 버틸 게 남아있지 않아요. 배 12척이 남아있을 게 아닙니까. 배 12척도 홀라당 다 날라가버렸어요. 배 12척 있으면 노량대전에서 한바탕 붙을만한데 배 12척도 다 침몰되고 없어요. 뭐 개코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 내놓을 게.


어떤 개척 교회하는 목사의 고백인데요. 이런 고백을 했어요. 개척 교회하는데 교인들 왔는데 점심을 같이 하면서 교제를 나누고 싶은데 제목이 국수는 누가 삶을 거냐? 하는 거예요. 소는 누가 키울 거냐와 같은 취지거든요. 국수는 누가 삶을 거냐? 그걸 놓고 개척교회가 회의를 했답니다. 회의를 했는데 회의한 내용이 참 어처구니없어요. 국수를 삶아서 같이 먹으면서 친교하자 라고 하는데 목사가 반대하고 나선 거예요. 왜냐 하면은 국수를 하면 일회용 용기를 사용해야 하는데 환경오염이 된다는 거예요. 아 정말 아직도 의로운 게 있어요. 될 수 있는 대로 지구 환경을 지키자. 일회용 용기를 사용하려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국수 삶는 것 그만두자. 지금 나 혼자 웃는 거 아니지? 이게 보통 웃을 일이 아니에요 지금. 어떤 행동과 말을 하면서 아직도 자기가 의로운 쪽에 있다는 여운을 계속 그것을 여운을 남기고 그것을 포기를 못하고 있어요. 성도는 항상 행동이나 말을 통해서 마지막이 섞이는 답변을 내놔야 해요. 마지막이 섞이는. 내가 주께 내놓을 것은 nothing,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행동 말 안 해도 태도를 통해서도 그걸 내놔야 돼요. 그걸 내놓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자랑할 것은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계약은 이미 주께서 다 이루셨다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홍민희(IP:115.♡.177.240) 24-02-27 23:36 
강남-누가복음 21장 6절 (종말속의 메시아) 240213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에 21장 7절부터 38절까지 다합니다. 50분만에 다 합니다.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다니엘 7장을 보면 돼요. 누가복음 21장의 그 모든 내용은 이방민족이 유대인을 향하여 공격하는 내용이에요. 마지막 때 공격한다 이 말이죠. 왜 유대를 공격할까? 유대를 공격하는 것과 마지막 때의 주님의 오심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이 예언의 말씀과 관련성이 있어요.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곱게 오는 것이 아니고 우당탕탕으로 와요. 우당탕탕. 유대와 유대나라에 대해서 이방나라가 공격하는 식으로 종말의 낌새를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첫 번째는 유대나라를 이방나라가 공격한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유대나라가 공격한다. 세 번째는 성도를 모든 인류가 공격한다. 이런 순서로 진행되는 겁니다. 유대나라가 예수님을 공격함으로 말미암아 이 성도라 하는 것은 유대나라는 이제 유대나라 아니에요. 사탄의 나라가 되어버리고 성도는 어디 있느냐? 없어요. 없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 생긴 백성들이 성도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이 성도에요. 새로운 이스라엘. 이스라엘이니까 예언에 의하면 이방나라가 유대나라를 옛날 언약대로 하면 공격하게 되어있어요. 종말에. 이 마지막에는 성도라는 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성도 빼놓고 모든 나라가 유대고 모든 나라가 합세해서 공격할 때 그것이 바로 마지막으로 청소가 완료되는 겁니다. 그래야 이 말씀이 실제로 예언대로 성취가 되는 거예요.


이방나라가 유대나라 칠 때는 더 이상 유대나라 조차도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없다는 거예요. 칠 때는 유대나라 자체를 없애버리고 없애기 전에 유대인이 예수님을 공격함으로서 유대나라는 마땅히 유대나라하고 흡수 통합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전체는 뭐냐? 성도는 없어요. 없는데 뭐가 있느냐? 이 전체는 있음이 되겠지요. 모든 인간의 있음은 없어진 예수님을 공격하는 식으로 역사는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공격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공격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4절에 보면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냥 있다.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종말의 낌새도 없고 그냥 세상은 늘 있던 대로 자연 질서 있게 돌아간다. 그게 과학이라는 종교의 첫째 교리에요. 그냥 있다가 과학입니다. 그냥 있는 것을 관찰하고 측정해서 과학이라는 규칙을 질서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물체의 자유낙하는 물체의 중량과는 관계없이 낙하시간과 정비례한다. 이게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야기하거든요. 공기저항을 배제한다면 이들의 가속도는 중량과 관계없이 완전하게 동일하다. 자유낙하하는 물질은 무게가 무겁다고 먼저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거고. 갈릴레오는 실험을 통해서 그게 아니고 무게와 관계없이 낙하하는 시간이 결정한다. 시간이.


이 뜻은 전제가 뭐에요? 세상의 법칙은 지금도 있지만 계속해서 앞으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이게 진리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후서에 보면 세상은 천년이 하루같이 불로서 타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성도를 가만히 두지 않고 공격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있음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람들은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왜 나쁘냐 하면은 내가 시도하고 내가 노력한 모든 것이 내가 있다라는 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그동안 숱한 노력과 모든 희생을 나 있음에다가 다 쏟아부었거든요. 나 있음에 쏟아부었는데 내가 있어도 내가 없어진다고 해버리면 내가 수고한 그 대가 그 보상을 내가 어디서 찾냐 이 말이죠. 그게 굉장히 기분 나쁜 거예요 그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에 기분 안 나쁩니다 할 사람도 있는데 아까 누가복음 5장부터 읽어보면 기분 안 나쁘던가요? 마지막에. 아이고 성경이니까 억지로 읽기는 읽겠다 만은 막 얼굴 낯을 피하고 싶어요. 타조가 뒤에 짐승이 오니까 어떻게 합니까? 피할 생각 안하고 땅에 지 얼굴을 박아요. 얼굴 낯만 피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 같은 느낌. 얼굴만 묻어버리면 궁딩이는 다 내놓고 얼굴만 묻으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우리가 꼭 그런 식이잖아요. 성경이라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없애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긋지긋한 나 라는 인생을 주께서 없애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진짜 나는 따로 빼돌렸기 때문에. 하늘에. 골로새서 3장 4절. 이 땅은 이미 죽은 껍데기고 진짜 알맹이는 우리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가있는 거예요. 하나님 우편에 가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 우편은 뭐냐? 하나님 우편은 하나님의 자존심을 걸고 지켜주는 자리. 그 자리. 네가 널 지키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명예를 걸고 하나님의 자존심을 걸고 하나님의 능력을 능력답게 드러내는 결과물로 만든 자리가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요. 따라서 이 자리에 들어온다는 것은 네가 구원받고 싶어서 환장해서 온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편의 능력이 인간이 못하는걸 주님이 해내는 증거물이 되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해주시는 겁니다. 이게 주의 오른편의 능력이에요. 그래서 우리 인생이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님의 오른편의 능력으로 만든 인생인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 여기 2절에 보면 “다니엘이 진술하여 이르되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라고 되어있어요. 바람이 부는데 하늘에서 불어요. 하늘에서. 땅에서 부는 바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부는 바람인데 그 불 때에 그 바람을 계기로 해서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다는 거예요. 그 모양이. 그럼 그 네 짐승이 무슨 짐승이냐? 하나는 독수리 같은 짐승이 나와요. 독수리의 특징은 날개가 있다는 것. 날개가 있다. 독수리는 원래 땅에 달리고 빠르게 달리는 정도로 알잖아요. 빠르게 달리는 정도가 아니고 독수리 날개가 있는 사자. 사자니까 이거는 뭐 땅에서 달리는 정도가 아니고 독수리처럼 날라다니는데.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보는 중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받았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더라” 라고 되어있어요. 사자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다는 것이 이게 첫 번째 짐승이죠. 첫 번째 짐승. 그러니까 첫 번째 짐승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예언이. 첫 번째 짐승에서 시작한다는 말은 첫 번째 짐승이 누구냐가 아니라 첫 번째 짐승에서부터 어떤 차이를 내면서 두 번째 짐승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첫 번째 짐승은 대표 짐승으로서 이미 하나님께서 설정을 한 거예요. 첫 번째 짐승이 이스라엘을 이미 점령한 첫 번째 짐승이에요. 종말의 시작은 내부의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를 품고 시작한다. 바벨론이 있는데 외부에서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 있는 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 종말 시나리오를 계속해서 이끌고 있는 원동력이 되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언약의 나라는 잡아먹었는데 언약은 잡히지 않았단 말이죠. 꼭 삼손 수수께끼 같아요. 삼킨 것에서 단 것이 나왔다. 죽은 데서 죽은 사자에서 꿀이 나온다는 말은 이게 죽어야 꿀이 나오거든요. 어떻게 이 대제국들이 살았다고 난폭한 제국들이 누가 봐도 살아있는데 하나님은 누가 봐도 죽어있다는 거예요 그게. 그 안목, 그 인식.


그래서 이걸 이렇게 표현하면 돼요. 죽음이 어떤 식으로 살아있는가. 죽는다는 게 저주와 죄와 심판이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활개치며 활동하고 있는가를 보라. 지옥이 어떤 식으로 활동하고 있는가를 보라. 누가 보는가? 언약을 받을 사람만이 그게 보이는 거예요. 아 시체가 이렇게 살아서 역사하네. 시체들이. 멸망하기로 작정된 자들이 이렇게 큰 소리 치네 라는 것을 네가 안에 있으면서 목격하라 이 말이죠. 굉장히 재빠르게 힘 쎄지요. 그런데 그 첫 번째 바벨론 제국은 그들이 실수가 아니고 당연한 거죠. 당연히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유대민족을 그들은 먹었습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짐승이에요. 이제는 먹힌 것이 살고 먹었던 것이 죽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죽였는데 예수님은 부활하고 나머지는 저주받고 그 원칙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B.C 625년에서 B.C 539년까지 이 기간이 백 년도 안돼요. 크게 했지만 비록 길진 않아요. 여기 다니엘 7장 4절에 보면 “내가 볼 때에”, 내가 본다는 것은 바벨론 시대에 다니엘이 살아있어요. 내가 볼 때에 그 날개가 뽑혔다. 그 날쌘 것이 뽑혀버리고 땅에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선다는 말은 사자가 네 발로 걸어야 안정감이 있는데 두 발로 섰으니까 쳐버리면 자빠지겠죠. 그 정도로 허약하고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다는 말은 똑똑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떠해야 되느냐 그걸 질책을 받는 나무람을 당하는 아이고 인간아 네가 이것밖에 안 된다 하는 인간의 연약함 그걸 그들은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종말은 우리로 하여금 경계선에 까지 이끌어 올린다. 경계선. 경계선하면 잘 이해 안 되니까 능선까지. 평면인데 산 있잖아요. 이렇게 가면 힘드니까 일단 작은 곳 올라가서 뭘 탄다? 능선 타지요. 능선 타면 특징이 뭐냐 하면은 왼쪽 오른쪽 다 볼 수 있어요. 성도는 바로 경계선까지 올라가요. 경계선에서 양쪽을 다 보는 거예요. 왜 멸망했는지 그리고 천국은 어떤 나라인지를 성도에게만 보게 하는 거예요. 그 일을 위해서는 세상에 묻혀있는 우리를 뭐로 끌어옵니까? 종말이 보이는 그 점까지 성령께서 잡아 땡기는 거예요 말씀으로. 종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양쪽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종말의 예언은. 그 다음에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쪽을 들었고 그 입의 잇 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이 두 번째 나라가 바사 나라가 아니고 메대 바사 나라에요. 메대 바사. 이게 바사는 페르사 지금 이란을 말하거든요. 메대는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있는 나라에요. 처음에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릴 때 페르사가 힘이 없었어요. 오히려 메대 나라가 강했어요. 그런데 메대 나라가 강력한 나라였는데 강력하게 일단 접수한 뒤에는 작은 나라인데 바사 나라가 메대 나라를 흡수 통합시켜버렸어요. 그러니까 한 몸이 들린 거예요. 곰인데 몸 한편이 들렸으니까 안다리 치니까 곧장 넘어가요. 처음에 있는 처음 다리오1세가 바벨론을 이겼는데 두 번째 고레스 왕이 오히려 메대 나라 뿐만 아니고 전에 있는 바벨론까지 통합접수를 해버렸어요.


그 입의 잇 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세 갈빗대가 있다는 말은 리비아, 바벨론, 이집트를 말합니다. 갈빗대 세 대가. 리디아라고 하는 나라는 어디 나라냐 하면은 지금의 터키 나라에요. 터키 이라크를 합쳐서 리디아라고 합니다. 여기 이탈리아 있고 그리스 터키 그 다음에 지중해, 유대나라 여기에 헤르스만. 이쪽에 리디아, 이집트. 나머지 여기 있는 것은 바벨론이죠. 이 세 나라를 모조리 다 세 갈빗대를 곰, 바사 나라가 전부 다 접수를 했습니다. 두 번째 나라에요. 년도가 539년에서 330년까지 이어집니다. 꽤 오래갔지요. 200년 가까이 갑니다. 곰처럼 우직하게. 세 번째 나라,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세 번째 나라가 뭐냐 하면은 바로 그리스, 헬라 제국이에요. 알렉산더가 바사 나라하고 전쟁해가지고 바사 나라가 바삭하고 깨져버렸어요. 작살났습니다. 다 깨졌어요. 바사 나라가 와장창 다 깨졌지요. “그런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권세를 받았더라” 이것은 분명히 빠르게 승리는 했는데 이게 한 나라인줄 알았는데 나라가 몇 개 되느냐 하면은 이게 머리가 몇 개에요? 머리가 네 개 됐어요. 날개도 네 개에요. 이거는 알렉산더가 33살 때 정복을 너무 해가지고 나중에는 진이 빠져 죽었거든요. 나중에는 맥이 빠져 죽고 말았어요. 맥이 빠져서. 죽고 난 뒤에 마지막에 물었어요. 대왕님 죽고 난 뒤에 누가 통치하면 됩니까? 하니까 알렉산더가 나처럼 힘 있는 자가 통치하라. 나처럼 힘 있는 자가 누구냐?


그때 제일 힘 있는 자가 안티고누스라는 이 장군이 최고의 장군이었어요. 이 장군을 하나 놓고 20몇 명의 장군이 이 장군 하나 잡아야 되겠다. 잡았는데 그 20명 중에서 예선 본선 다 치르고 준결승 결승해서 자기들끼리 다 치루고 마지막에 안티고누스 붙은 네 팀이 있어요. 요르단 그리고 이란 한국 카타르. 네 팀이 안티고누스 아시안컵 이걸 하나 잡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 지역에는 카산드로스라는 왕이 있어요. 그리고 마케도니아에는 리시마코스라는 왕이 있었고 그 다음에 이집트+유대 땅에는 브톨레미라는 장군이 있었고 나머지는 셀레오크스라는 그런 왕이 있었어요. 안티고누스가 잠시 통치하다가 네 명이 달라들어서 다 찢어버리고 이 네 개로 갈라져요. 네 개로 갈라지면서 이 말씀대로 “날개 넷이 있었고 머리 넷이 권세를 받았더라”. 하나가 네 개로 갈라졌습니다. 이 네 제국이 바로 331년에서 168년까지 이어집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냐 하면은 표범 같은 나라. 아주 날쌔기 이를 데 없지요. 왜냐하면 알렉산더가 빠르게 인도격지까지 갔으니까. 최고 빨라요. 7절에 보면 “내가 밤 환상 가운데에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매우 강하며 또 쇠로 된 큰 이가 있어서 먹고 부서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7절에 보게 되면 첫째는 사자 같지요. 둘째는 곰 같지요. 셋째는 표범 같아요. 넷째 짐승은 이상하게 짐승이 없어요. 붙일 짐승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뭐냐? 이거는 괴물이죠. 괴물. 여기서 이 말은 짐승에서 계속 짐승으로 이어졌다가 짐승이 아닌 미지의 더는 짐승이라고 할 수 없는 미지의 괴물로 등장한다는 말은 짐승은 어디까지나 피조세계에 속하는데 이 괴물은 피조세계도 아닌 것이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하는 거 있잖아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떤 초월적인 세계접근이 가능한 중간경계선 지점의 괴물 같은 짐승이 등장한 겁니다. 붙일 짐승이 없어요. 그냥 다니엘이 이야기하는 게 무섭대요. 무섭다는 말은 기존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무서운 거예요.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것. 익숙한 것, 들었던 것, 인간세계에 통용되는 게 아니고 인간세계의 범주를 벗어나는 돌발적인 것 이게 무서운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언제냐 하면은 바로 로마인데 로마는 B.C 168년에서 A.D 476년 이렇게 되어있지만 사실은 476년이 아니고 이 괴물이 자체적으로 10개의 나라로 깨어져요. 왜냐하면 머리가 몇 개냐 하면은 머리가 10개에요. 10뿔이 있다. 10뿔이. 그러면 이게 한 나라입니까? 10나라입니까? 한 나라가 되었는데 이게 뿔이 10개니까 하나도 아니고 10도 아니고 괴물 같은 거죠. 괴물 같은데 그 다음 보면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에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첫 번째 뿔 중의 셋이 그 앞에서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들이 있고”. 유독 작은 뿔이 등장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거예요. 적그리스도.


자, 적그리스도는 어떤 형태다? 국가 형태. 적그리스도는 국가 형태에서 전체를 통합하는 거예요. 그러면 짐승, 짐승, 짐승인데 로마 이거는 짐승으로 표현된 국가가 아니라 괴물로 표현되는 국가, 괴물로. 괴물로 표현된 국가이기 때문에 이것은 더 나아가서 모든 국가의 총합은 뭐다? 짐승 정도가 아니라 뭐다? 괴물이다. ‘괴물’. 괴물의 특징은 뭔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서 대결하고자 하는 속성을 지니게 되는 거예요. 현재 이 세계는 로마 세계의 연장인데요 로마 세계의 연장은 뭐냐 하면은 인간을 지배하는데서 멈추지 않아요. 인간을 지배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너 나와 하는 것처럼 마지막 최후의 그리스도에게 결국 시비 거는 식으로 국가 행정과 경제가 작동하게 되어있다. 모든 게. 마지막에 있는 이 괴물은 그야말로 마지막답게 그 어떤 것도 자기 권한밖에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 예가 바로 중국이죠. 현재 중국. 중국은 기독교 위에 뭐가 있습니까? 공산당 있지요. 이거는 그 아이디어를 누가 낸 거죠? 기독교 위에 공산당 있다는 아이디어를 누가 낸 거죠? 모택동이 낸 거예요? 누가 낸 거예요? 아니에요. 이거는 인민들이 낸 거예요. 이거는 어떻게 본인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예언대로 될 뿐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지는 적그리스도 성향이 모든 각 인민에게 다 이미 삽입되어있는 겁니다. 마치 인공지능이 모든 인간 속에 삽입되는 그 시대가 오는 것처럼. 성경대로 하면 666이 모든 인간 속에 인간 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의견이 차이가 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는 교회고 천당이고 기독교고 관계없이 한결같이 모조리 다 거기에 대해서 대들게 되어있는 시대. 그게 오늘날 이 시대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이 구원받아야지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간을 구원시켜버리면 그러면 우리가 할 게 없잖아 하는 식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는 그 시대가 이 시대에요. 적그리스도는요 그때그때마다 나타나요. 하지만 적그리스도 성향은 현재 로마시대에 이후에 괴물로서 모든 인간 속에 다 자리 잡고 있어요. 너희 아비는 악마다. 다 삽입되어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애가 태어났잖아요. 태어나서 어린이집 다니잖아요. 초등학교 다니고 엄마 나 100점 받았어하는 이 모든 속에 뭐냐 하면은 적그리스도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있는 겁니다. 그 초월적인 것, 이걸 간단히 하면 내가 곧 메시아다. 이 정신. 이 정신이 교육정신. 국민교육정신. 스스로 내가 메시아가 되는 내가 나를 구원할 메시아 될 때까지 gogo!! 오직 정진하고 매진하는 거예요. 인간의 미래는 인간 손으로 해결하자. 무엇을 의식하는 겁니까? 인간 스스로 자기를 초월적 존재로 도약할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는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네 번째 짐승이 큰 이가 있어서 먹고 부서뜨린다 했는데 이 네 번째 짐승의 모습이 다니엘 2장에 보면 금 신상으로 나와있다고요. 거기에 보면 네 번째 짐승이 독특하긴 하지만 이게 세 번째 짐승에서부터 그 속성이 그대로 물려받아 안에 포함되고 그걸 더 강화시킨 철이에요.


금 신상의 금, 은, 놋, 철. 마지막에는 철과 진흙으로 내부적으로 이렇게 얼룩덜룩 머리가 되어있어요. 세 번째 짐승이 놋으로 되어있다고요. 세 번째 짐승이 뭐냐 하면은 바로 헬라 제국이라고 했지요. 헬라 제국에서 최초로 생긴 것이 그게 철학입니다. 과학 철학. 과학 철학은 인간을 위한 언어. 신을 위한 언어 이거는 허황되기 때문에 제거하고 모든 언어는 인간을 위한 언어이어야 한다. 인간을 위한 언어. 성경에 나온 모든 언어가 예수님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는데 필요한 언어로 전부 다 재해석해서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언어로 다 바꾼 거예요. 예배, 기도, 찬양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 경건 이런 것.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 문제는 성경에서 죄의 카탈로그를 제시하잖아요. 제시하죠. 제시하실 때 카탈로그를 제시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대한 인간의 대응책과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방안을 누가 거부하느냐? 주님이 거부한다는 거예요. 거부한다. 죄는 쫙 풀어놓고 인간은 뭐합니까? 이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어떤 방안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방안과 대응책에 대해서 주께서는 그걸 완전히 거부한다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뭡니까? 종교라는 것은 하나님이 죄라고 규정한 것에 대해서 거기서 대응해서 죄 안 짓는 방안을 끄집어내겠지요. 그게 종교에요. 그 방안을 끄집어냄으로써 인간의 대한 자기의 연민과 기대와 희망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는 겁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줬는데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그 힘은 아직도 우리에게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그것이 자기가 종교 생활할 수 있는 에너지로 여기는 거예요. 일본말로 해서 요시! 드디어 소매를 걷는 거예요. 좀 해보자. 주께서 하지마라 했지 그럼 안 할 수 있는 방법을 내가 해볼게. 거기에 대한 결과를 이겼다는 그 결과, 이겼다는 결과, 죄 지었는데 성령 받고 은혜 받고 이제 죄 안 짓는다는 식의 간증집회들이 드디어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전에는 이렇게 죄를 지었지만 이제는 성령 받고 난 뒤에 새 사람 되어서 이제는 빛의 열매로서 빛과 소금으로 이렇게 살아왔습니다라는 말을 마구 쏟아내게 하는 그 방안, 그것들을 모아서 나도 그러면 저 사람이 된다면 나도 희망 걸고 교회가 커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교회가 희망을 주니까요. 착하게 살면 어디 가고? 천국 가고. 이대로 무너지면 어디 가고? 지옥 가고. 그럼 천국 가고 지옥 가고는 내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버리죠. 내가 하는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은 천국 갈 희망은 아직도 남아있는 거예요. 배 12척이 남아있는 거예요.


아무리 인간이 망해도 망해도 말씀을 듣고 지킬 수 있는 기본적인 양심은 있다는 교리가 천주교 교리에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애쓰고 애쓰는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매정하게 굴지 않고 애쓴 만큼 하나님께서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패자부활전을 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연옥설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나그네를 변형한 연옥설. 너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 보니까 하늘나라 그렇게 깨끗한지 몰랐는데 죽고 난 뒤에 알았으니까 죽고 난 뒤에 사람들 모아놓고 두 번째 시험 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거에요. 패자부활전이죠. 힘든 어려운 연옥이 지옥인데, 지옥에서 힘든 가운데서 뭐라고 하겠어요. 그래요 나는 이제 오직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하면 합격. 그래도 성질이 드러워가지고 힘들었지만 나는 안 믿어! 하는 사람은 결국 구원의 밧줄을 줬지만 네가 싫다고 하니 할 수 없지 뭐 그건 네 책임이다 지옥에나 가라 해서 지옥 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옥은 바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한번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여지가 없을 때는 지옥 보내는 거예요. 그러면 성당 안 다니는 사람들 선배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느냐? 두 번째 기회를 달라고 후손들이 미사를 넣어요. 제사를 드리면 신부가 제사 드릴 때 비용 들잖아요 돈 몫돈 받고 신부가 대신 기도를 해줘요. 누구한테 신부가 연락을 하느냐 하면은 전화를 걸어요. 011-34xx 해가지고 거기 베드로지요? 베드로 요한한테 전화를 해요. 베드로 요한한테 전화를 왜 하느냐 하면은 성자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예수님한테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럼 베드로 요한이 예수님께 압력을 하느냐? 아니에요. 베드로가 알겠습니다. 그 사람이 돈 좀 줬죠? 예 줬습니다. 부동산 좀. 알았어 알았어. 해가지고 누구한테 전화하느냐 하면은 자식한테 압력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누구냐 하면은 엄마에요. 마리아한테 연락을 해요. 마리아가 예수한테 전화를 해가지고 누구 한번 기회 더 줘라. 기회 더 줘라. 그래서 음부에 있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연옥에 해가지고 그 사람을 다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이게 천주교 정식 교리입니다. 이게 뭐에요. 인간 구원이죠. 인간 구원. 뭐가 없어요? 하늘에 이미 앉아있는 나 가 없어요. 삼층 천에 이미 앉아있는 나 가 없어요. 내가 모르는 나, 삼층 천에 갔을 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올라갔는데 누군줄 모르겠다. 내가 아는 나는 여기 있는데 내가 모르는 나는 저기 있는 거예요. 그럼 내가 아는 나는 이 땅에서 살다가 이제는 흙이 되고 날라가야 되죠. 두 개의 나 중에서 하나는 쓰레기 되가지고 폐기처분해야 돼요. 분리수거할 것도 없어. 그냥 버리면 돼요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면 된다고요. 왜? 이미 진짜 나는 예수 안에 있는 나는 위에 있고 아담 안에 있는 육신에 있는 나는 이 땅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쪽에 있는 나는 천사같이 해같이 빛나고 있고 이쪽에서는 백날 노력해도 성화해도 해 안되거든요. 팩 바르고 해도 안돼요. 될 수가 없다고요.


하나님께서 순서에 의해서 어떻게 하느냐? 자기 유대교를 바벨론에 의해서 메대, 바사, 헬라, 마게도냐 그 제국이 와서 쳐부수면서 공격하는데 어디까지 오느냐? 로마까지 와요. 로마는 마지막이에요. 그 위에 다른 나라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220국의 나라는 지금 월드컵 세계 축구 협회에 있는 나라가 200개 넘어요. UN보다 더 많아요. 그 놈의 축구는 하고 싶어가지고 북한도 거기 들었어요. 200개의 그 나라는 로마의 성격을 그대로 전부 다 진흙과 철이 그 마지막 신상에 흩어졌으니까 작은 로마들이에요 작은 로마들. 로마의 특징이 뭐냐? 전부 다 하나같이 괴물들이에요. 괴물들인데 그 괴물들이 세 번째 나라가 뭡니까? 헬라 나라죠. 헬라 나라는 언어+철학, 철학이 과학이에요. 철학과 과학의 시작. 모든 언어는 인간이 이익을 위한 언어로서 그리고 그 언어는 과학적 언어로서 다 주어진 그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을 틀로 강화시키는 내부는 놋이 들어와서 철로 강화시킬 때 이 나라가 안에 있는 헬라 철학의 정신적 사상이 전 세계 220국으로 그냥 퍼진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이 내가 곧 메시아다. 메시아는 다른 말로 내가 곧 그리스도다. 내 행함으로 내가 구원받는다. 그 사상에서 아주 철저하게 요지부동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한번 봅시다. 21장 29절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2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이 모든 말씀이 다니엘 말씀이 그대로 살아서 적용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신상의 마지막, 인간 세계는 로마가 마지막이에요. 로마가 마지막인데 그 신상이 멀쩡하게 서있던가요 안 그러면 넘어지던가요. 넘어지지요. 그것도 돌멩이 하나 아주 약한 돌멩이 하나가 와서 넘어뜨리잖아요. 그 나라가 무슨 나라냐 하면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요. 그 나라가 뭐냐 하면은 인자, 사람의 아들의 나라에요. 인자의 나라. 이 사람의 아들은 이 땅에 없는 사람이에요. 어디서 오는가?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이에요. 주께서 준비해놓은 인간이 있는데 그 준비된 인간이 지상에 인간들과 섞이면서 로마제국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그 인자까지 오는 겁니다. 어디 오느냐? 로마 속에 들어와요. 로마 속에 들어오니까 로마는 둘로 갈라졌어요. 메시아냐? 내가 메시아냐? 두 성향으로 완전히 정리가 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냐?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행한 것으로 구원받는가? 아니면 내가 종교적인 내가 행한 것, 내가 착한 것, 종교적인 행함으로 구원받느냐? 둘로 갈라지지요. 둘로 갈라집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뭐냐? 특징은 메시아를 만나면 죽여버려요. 이것이 나중에 성도를 만나면 죽여버려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이 많이 죽어요. 성도들이 죽음으로서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자신의 쓰레기 같은 마지막 남아있는 미련 둘 것도 없는 아담의 몸이 주님에 의해서 이방민족에 의해서 불신 세력에 의해서 마귀세력에 의해서 이 불편한 내 몸을 깨끗하게 처리해주죠. 고맙다 친구야. 내가 처리 안되는 내 몸을 처리해주니까 그렇게 고마운 겁니다. 그럼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었잖아요. 그러면 성도가 아픈 것은 누가 아프다? 주님이 아픈 거예요. 주님이. 성도가 감기 걸렸다? 그럼 이건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지체가 감기 들린 거예요. 그럼 주님의 지체는 주님이 아프고 주님이 힘들어 했던 것을 성도 지체가 그걸 반복해서 체험하는 겁니다. 체험하면서 아 주님이 이런 경우를 당했구나 라는 것을 몸이 아프고 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될 때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 세상은 로마, 다시 말해서 괴물의 나라라는 것을 체험하라고 우리 몸이 날마다 쇠약하고 아프고 코로나 걸리고 온갖 치매 걸리고 이렇게 되지요. 같이 치매 걸려도 성도가 치매 걸리는 것은 치매 걸렸다가도 정신 돌아오면 고맙습니다 치매 걸려서 하고 치매 걸리면 고마운 줄 모르고 이러지요. 그런데 성도 아닌 사람은 예배당 제단에 꿇어앉아가지고 내가 아프면 저 불쌍한 자식들 어떻게 키웁니까 하면서 하갈 흉내, 하갈을 또 반복해요. 나는 아파죽어도 되는데 이 자식은 이스마엘은 먹을 물이 없는데 불쌍한 자식 어떻게 키웁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여기서 제가 한 문장을 쓸 테니까, ‘나 하나도 너 안 불쌍하거든.’ 이미 우리가 내가 모르는 나 가 예수 안에서 있다면 없애 폐기 돼야 될 아담 안에 있는 육신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도 불쌍히 여기면 안돼요. 내가 나에게 불쌍히 여기면 안 된다고요. 진짜 여러분들이 이거는 잘못해서 죄인이 아니라 태어난 것 자체가 아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불쌍하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두지 마세요. 만약에 연민의 정을 둔다면 결국은 뭐냐 하면은 자아가 두 개가 아니고 하나가 되면서 내가 곧 메시아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누가 여기에 대해서 자꾸 격려를 해주느냐 하면은 집 나간 일곱 귀신이 와가지고 자꾸 격려를 해줘요. 뭐 불쌍하니 안 됐다느니 기도하면 은혜를 받는다느니 온갖 것 다 소리를 다 해가면서 우리를 도와주는 척 이렇게 해가지고 계속 우리로 하여금 메시아가 예수님이 하신 것을 보지 못하도록 메시아를 믿는 나를 강화시켜요. 메시아가 구원을 하는 게 아니고 메시아 믿는 내가 나를 구원하는 식으로 그렇게 살라고 자꾸 우리에게 그렇게 메시아가 이미 다 하신 일을 못 보도록 가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누가복음 21장 이야기는 속 시원하게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시원시원하게 망하게 해주실 것이다. 그때가 뭐냐? 35절에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임할 것이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뒤에 추임새를 붙인다고 생각하세요. 얼쑤~ 나 잘했지?! 그렇지?!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주님은. 온 지구상에 임하고 인자가 있을 것이다. 내가 너한테 잘했지 그렇지? 멸망하기를 잘했지? 그렇지?! 멸망 안 했으면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미련을 갖을 거 아닙니까 미련을. 남한테 안 질려고. 이 게임판에서 내가 안 질려고 네가 메시아냐? 나도 메시아다 누구 메시아가 더 쎈가 이러고 싸우고 있다고요 교회 내에서. 그냥 본인을 쓰레기로 여기고 포기하면 되는데 그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왜냐? 더 이상 지킬 게 없는데 계속 지키도록 악마가 우리를 유도하는 거예요. 힘들지? 괴롭지? 하나님이 너를 위로할거야. 하나님이 너를 불쌍히 여긴다. 하나님은 불쌍히 안 여겨요. 나 하나도 너 안 불쌍해. 왜? 다 이뤘기 때문에. 불쌍하다는 말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아있다는 뜻이잖아요. 남은 일 없어요. 성경에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너를 미워하라 너를. 이야기 더 해봐야 믿을 것도 아닌데 여기서 마칩시다.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될 일이 되고 일어날 일이 마땅히 일어났는데 아직도 저 어떻게 할까요 라고 자기 자신에게 미련을 두고 있는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우리 자신이 아닌지 말씀을 보면서도 주님 관점에서 다 이루었다 관점으로 보지 않고 내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를 욕심내는 그것이 우리 속에 마귀가 그런 작당을 한다는 것이 주님 말씀 앞에 들키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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