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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1 00:43:25 조회 : 833         
열매는 순교다 171010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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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221.♡.139.88) 17-10-12 19:17 
가락-요한복음 15장 5절(열매는 순교다)171010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요 대목 합니다. 예 상당히 어려워요. 무지 왜 어렵냐하면은 나는 이라고 할 때는 한 사람을 나라고 하지요. 그 다음에 너희라 하는 것은 다수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맞죠? 제말 틀리지 않죠? 너희는 다수지요.


그러면 여기서 이제 문제가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너희라고 여겼던 사람인데 그 ‘나’ 라는 예수님이 다를 경우에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겁니다. 각자 우리는 예수님만 믿는 그 가지다 라고 우기게 되는데, 그렇게 모인 그 너희가 너희 그룹과 다른 너희 그룹 사이에 제시하는 나는 포도나무가 왜 그리 다른 포도나무가 왜 그리 다르지요?


그러면 A라는 그룹과 B라는 그룹에서 제시하는 A라는 너희와 B라는 너희가 제시하는 그 포도나무가 다르다면 둘 중에 하나 맞을수도 있고 둘 다 틀릴수도 있고, 그러나 이 경우는 없어요. 둘다 맞을 경우는 없습니다. 둘다 맞을 경우는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할 때, 그 너희는 인간쪽에서 예수님을 지정할 수는 없는겁니다. 왜? 우리는 진짜 예수님 믿는다고 해봤자 저쪽에서 우리하고 생각이 다른 저쪽에서 나도 진짜 예수님 믿습니다 이렇게 되버리면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할 때, 그 너희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만들면 되겠죠. 나는 I 죠. 너희는 YOU 가 되겠죠.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가지라고 우기는 그 집단이 많아지게 되면 집단이 A그룹도 있고 B그룹도 있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진짜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는 둘이 협의해야되는 겁니까? 의논해야 되는 겁니까? 그럴수 없는 거죠.


사람이 사람이 협의해가지고 하나되는 법이 없어요. 인간은 결국은 자기 독자적인 자기 주장만 내세우기 때문에 끝까지 내세우게 되어있어요. 가족도 마찬가지고. 내 생각을 관철하고 싶어해요 인간은.


인간의 특징은요, 나의 특징은 3가지로 보면 되요. 첫째는 내가 있음이 제일 확실하다. 예수님이 있고 하나님이 있고 그런 이야기가 있더라, 하지만 가장 확신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그것이 제일 확실해요.


그리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것은 결국 뭘 믿느냐하면은 내가 여기 있어서 나 예수님 믿습니다 라는 나를 믿는 것 외에는 더 큰 확실한 믿음은 없어요. 교인들이 믿습니다해도 그 말 나는 나를 믿습니다 라는 말로 들으시면 편해요. 나는 나만 믿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해도 속으로 ‘예수 너 언제봤다고...뭐 예수봤어? 안봤잖아. 안봤으면서 믿는다고해..?’ 우리가 아침되면 거울에 눈에 보이는게 뭡니까? 예수님이 보입니까? 내가 보입니까? 내가 보이잖아요.


그러면 아침마다 머리하면서 머리 다듬으면서 믿을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나 밖에 없는거예요. 나 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믿을 수 밖에 없어요.


두 번째 특징이 뭐냐하면은 ‘나를 키운다’ 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꾸 설쳐. 그 설치는 설친다라는 말을 고상한 말로 행동한다 이 말입니다. 자꾸 설치거든요. 설치는 목적이 뭐냐하면은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힘을 더 키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더 키우기 위해서.


자, 1번 2번 한번 연결시켜 봅시다. 나는 있다. 나는 누구의 신자냐하면은 나의 신자예요. 내가 나한테 교주고 유일한 마지막까지 나를 믿는 신도는 나예요. 나를 유일하게 믿는 신도는 나밖에 없어요.


예수믿다가 환란오게 되면은 안 믿으면 그만이니까. 어쨌든 깔끔하게 나에게 돌아서니까. 그런데 그것이 기반이고, 두 번째가 뭐냐하면은 그 나를 가만두지를 않아요. 키웁니다. 키울 때 뭐가 필요하냐 하면은 힘이 필요해요.


그래서 인간은 계속 주변에 힘있는 것을 다 모읍니다. 힘 있는 사람, 힘 있는 돈, 하여튼 남한테 힘을 발휘할수 있는 요소는 다 끌어 모아요. 내가 아는 사람중에 누가 아는사람. 교회도 작은 교회가면 힘이 안되. 장로가 되도 작은 교회 장로는 되면 힘이 없어요. 이왕이면 큰 교회 장로되야 되고 목사면 큰 목회해야되고.


그 옛날 사람들이 여자가 시집가면 뭘 당부하느냐 하면은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당부하지요.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그렇죠? 왜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합니까? 자식을 많이 낳는데 그 자식이 그냥 자식이 아니고 어떻게 아들이 좋겠어요? 딸이 좋겠어요? 예, 아들이 좋아요. 왜?


아들이 힘이 되니까. 딸은 남의 식구 되잖아요. 힘이 빼앗기는 요소이고, 아들은 여자를 데려오니까 힘을 더 모으게 되거든요. 두 번째가 뭐냐하면은 나는 여기있다. 나는 이미 벌써 신자예요.


예수믿는 것은 하나의 겉절이고 그냥 구색에 불과하고 내가 말한 스티커, 바람불면 휙 뜯어 지는 것. 언제 떨어질지 몰라요. 예수 믿는 것 언제 후딱 바람불면 다 떨어져 버려요. 북한에 가서 예수믿느냐? 아니요. 다 떨어져 나가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이 그냥 있지 않고 뭐가 움직인다 했지요. 움직이는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지금보다 키우는 거예요. 남를 키우는거요? 아니요. 누가 키워? 나를 키우는 거예요. 내가 기업을 한다면 이 기업을 키우는 것이 곧 내가 하는 모든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이 키우는 일을 기어이 관철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이 그 목적을 나 키우는 목적에 대해서 관철한다는 말 쉽게 이야기하면 양보 없다. 나 키우는데 조금도 남한테 양보할 생각 없어요. 부모 자식간에 마찬가지입니다.


부모한테 자식이라 하는 것은 나 잘남을 나 힘있고 대단함을 자랑질하기 위해서 자식을 계속 자식한테 베풀어 주기도 하고, 돈도 대주고, 어려운거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하라 하고, 이게 뭐냐하면 부모자신의 명예와 위신을 체면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우리가 또 자식한테 또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세 번째가 관철하는 거예요. 관철. 뚫어내는 거예요. 기어이해내는 것. 만약 관철이 안된다? 관철이 안되면, 이 3번이 안되면 1번을 없애버립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하면은 번개탄 피워놓고 하는 것 뭡니까? 자살해요.


이 자살의 이유가 먹을게 없어서 자살하는게 아니고, 관철하거나 나를 키울 희망이 없어버리면 자살해요. 나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내가 여기 있으면 되잖아 하는데, 그게 아니고 사람들은 1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1번이 2번으로 가고, 2번이 3번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3번 단계에서는 누가 피해보냐 하면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나에게 피해자가 되고, 나에게 이용물이 되요. 나에게 이용물이 된다고요. 그래서 인간은 내가 그래서 이 세가지를 종합하게 되면 인간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인간은 죄인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줘요. 내가 존재해서 나쁜일 해서 죄가 아니고, 내가 존재할 때는 2번 3번이 같이 발동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죄인이 아닌 인간은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는 아까 조금전에 했던 동영상, 두 번째 동영상 남과 여 할 때 그 십분짜리 한번 들어보시면 그 이유가 조금 나올겁니다.


따라서 이것을 그대로 대입해 봅시다. 이것을 그대로 여기 집어넣어요. 너희라는 그룹에다가. 그룹이라 하지말고 쉬운말로 교회, 또는 신앙공동체에 집어넣읍시다. 신앙 공동체. 요새 좋은 말 많이 나오거든요. 성령공동체. 하여튼 뭐 멋있어 보일라고 성경대로 하는데, 여기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내가 들어가죠. 내가 들어가게 되면 나는 1번 2번 3번 양보 없습니다. 절대로 이건 죽을 때 까지 안 놓거든요.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하여.


두 번째 나는 이대로 머무는 것은 자존심 상해서 키우고, 세 번째 그냥 키운다 상상만 하는거 아니고 실행에 옮깁니다. 관철하기 위해서. 그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뜻을 관철하다 보면 남이 울던 아파하던 그것은 나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아니예요. 첫 번째 관심사는 내가 키우는 것이 관심사고 남이 울던말던 그것은 내 관심사 아니예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내드릴테니까 여러분이 해답을 해결책을 내보세요. 어떤 가정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낮잠을 자야되요. 밤에. 근데 낮잠을 잘려고 하면 비행기가 비행장옆이라 비행기가 뜹니다. 자, 그 주변에 있는 갓난아이 낮잠자기 위해서 비행기 훈련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아이 낮잠자라고 훈련하지 말까요? 비행기 그럼 썩힐까요? 아니지요?


그러면 그 주위에 있는 비행장이 실제로 있는 이야기 우리동네 이야기 예요. 우리동네 비행장 있으니까. 그러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이 나라에 뭘 요구하냐하면 보상을 요구한다고요. 이 보상이란말은 어떤 경우인가 하면은 피해를 봤을때나 이게 피해보상이 성립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피해봤습니까? 자기 아이가 낮잠을 못 잤으니 피해보상을 보겠죠. 그러면 피해보상을 본다면 보상이 뭐가 됩니까? 보상이 어디 뭐 빵을 줍니까? 뭘로 줍니까? 물로 줘요? 뭘로 줘요? 돈으로 주지요.


돈은 1번 2번 3번 어디에 해당됩니까? 딱 2번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면 만족하지는 않지만 엄마로서 만족하지는 않지만, 아이 하나 낳고 내 힘 키울려고 하다가 아이가 잠이 안든다, 나라에서 보상받았다 그러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약간은 달성되었죠. 약간 달성되었죠.


그런데 보상해준다 해놓고 보상 안해준다. 그러면 이 존재자체를 부정, 자살로 한발자국 나갈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보상액 못받아가지고 숭례문 있잖아요. 불지른 70대 할아버지 있죠? 자기 땅 보상 안나왔다고 남대문을 불질렀잖아요. 지금도 살고 있어요. 20년 무기징역 받아가지고 살고 있어요.


왜 행동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그 사람은 나쁘다 그 사람은 그러면 안되지. 어떻게 나라를 그렇게 했느냐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고, 알맹이 들여다 보면 그 할아버지는 자기가 신자예요. 무슨 종교의 신자입니까?

나를 신봉하는 신자예요. 신자이기 때문에 남한테 피해준다는 것은 이것은 자기의 일차적 문제입니까? 관심사 아니예요. 아니죠. 밀어내버리죠. 그런데 그 할아버지보고 다 욕했잖아요. 그런데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는 어때요? 만만치 않죠?


자 여기 교회 예배당 있습니다. 예배당 있는데 예배당의 주차장을 넓힙니다. 넓히는데 여기에 어떤 비리비리한 집이 하나있다. 이것 좀 밀어버려야 주차장 되는데, 근데 이 할머니는 자기 고향이라서 언제 죽은 자식 돌아온다고 안떠난다. 그러면 어떻게 돈 줘서 내보내야죠.


그것을 장로 10명이나 되는데 하필 나보고 시킨다. 그 추진사업을. 그러면 나는 이 할머니집을 헐어서 내보내야되요? 안 내보내야되요? 당신을 고향을 존중합니다. 이래가지고 그냥 놔둘까요? 내버려야되겠죠?


그것을 누가 시키는가? 교회 당회장이 시킵니다. 교회 당회장이. 당회장이 시키는데 왜 그말에는 나는 안합니다 라는 말을 왜 못할까요? 그 교회가 자기가 포함된 순간 그 교회가 누구 교회됩니까? 바로 내 교회되는 겁니다.


이 교회가 내 교회 2번을 충족시켜줘요. 나를 키운다. 그러면 그 장로가 그 주차장 문제를 깔끔히 해결하게 되면 그 장로는 그 교회에서 뭘 발휘하느냐 하면은 말빨이 서요. ‘니들은 놀았잖아. 이 주차장 이거 누가 했는데? 이거 내가 했어.’


자기가 말빨이 세워지면 그 장로의 아들이 그 교회 집사라면 대를 이어서 장차 10년후에 그 아들이 이후에 이 주차장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다 해놨어! 그 교회에서 또 발언권 쎄게 나오고 발언권이 쎄게 나온다는 말은 다음 목사 뽑을 때 그 장로 입김이 쎌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누구 교회입니까? 대대로 장로교회. 대한예수교장로교회. 장로교회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있잖아요. 세상의 모든 변화가 이 세가지 공식으로 다 풀리게 되어있어요. 잘 풀렸지요.


이것 세가지로 다 풀리게 되있고, 덧붙여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느 인간도 이 세가지 공식에서 벗어날 위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포도나무요 할 때 그 다음에 나오는 말 너희는 가지니 에서 그 너희에서 우리 자신을 빼주세요. 우리 자신을.


나는 포도나무요 그것으로 족한겁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예수님 스스로 족한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원칙을 자기 본인한테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만 영광받기 위해 오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아들에게 영광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어디 나오죠? 빌립보서 2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오직 예수님만 영광받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나’라는 이야기는 누구에게 붙일수 있다고? ‘나’라는 이야기는 오직 예수님만 붙일수 있고 성도한테는 ‘나’라는 것을 붙이면 안되고, 뭐라고 붙이냐하면 너희라고 붙여야되요. 너희라고.


나는 내가 있음에 나라고 하게되지만, 너희라고 할때는 그냥 우리 단독적으로 너희라는 말을 붙이면 안되고 누구를 의식하고 나는 그분이 있다에서 너희에 해당된다, 또는 다른말로 하면은 우리에 해당된다 이렇게 봐야되요.


여러분 주기도문 아시죠? 하늘에 계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우리 아버지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우리는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우리 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되어있지요.


그 사람의 존재이유는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의 기능을 하기위해서 오늘 본문대로 하면 너희라고 지칭하는 너희의 기능을 하기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너희의 기능을 할려면 너희가 너희를 생각하면 안되고 나를 생각해야되요. 나라고 붙인 사람은 누구밖에 없다? 본문에서 나는? 나라고 할때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전제, 우선이고 예수님이 있기에 그 다음에 우리가 있는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에다가 포도나무에다가 괄호를 쳐봅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기에 괄호를 치는 거예요.


나는 포도나무요. 그 다음에 나는 생명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길이요, 나는 떡이요. 많지요? 나는 하나님이요, 나는 그리스도요 많지요. 많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가 할 것은 뭐냐하면은 이 괄호안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면 되는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할 때는 그 앞에서는 우리는 가지요. 가지라 하면 되요 가지로. 가지는 나는 가지라고 이야기 해서 가지가 있는게 아니고, 예수님만이 포도나무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유일한 단일체 포도나무라고 인정하는 사람만 결과적으로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두 번째 봅시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지요. 나는 뭐다? 나는 죽음이요 하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는 의인이요 하면 우리는 뭐하면 됩니까? 죄인이요 하면 되는 거예요. 죄인을 통해서 주님이 의인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것을 합쳐버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나를 붙이니까. 나는 나를 붙일수가 없는데 만약에 붙인다면 나는 죄인이요라고 붙여야된다 이말입니다. 이해가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보기에 너희라는 무리에 있어야지, 독단적으로 나는 나다가 되어버리면 어디로 갑니까? 이렇게 가버려요 이렇게. 지금 이렇게 가있는 인간을 주님만 ‘나’ 라는 그 세계 그 천국으로 이끌어냈으면 이제는 나는 기껏 이것밖에 안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말을 이것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이것 못버려요 이건 죽을 때 까지 못버려요. 나이 70, 80될때까지 못버려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것은 이것은 육이니까 육이 있는 한 못버리는데, 못버리면 안버리면 되잖아요.


안버리는 상태에서 나 말고 다른 나가 있음을 알고 이 나는 주께서 너희의 속한 나, 다시 말해서 죄인들을 불러서 의인되게 하시는 그 죄인의 그룹속에 있는 나, 그리고 유일하신 의인 나, 예수님 나, 이런 관계가 바로 나와 나에 의해서 만들어진 주님의 새로운 너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까지 강의의 핵심은 뭐냐하면 너희는 우리가 만드는게 아니고 ‘나’가 너희를 만들어 낸다 지금 그 이야기 한것입니다. ‘나’ 가 너희를 만들어 낸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버리라고 했어요?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까?


절대로 버리지 마세요. 버리지 마시라는 말이 잘못됬다. 이것은 못버립니다. 유치원에 달리기 하다가 남의 자식 이기면 좋습니까? ‘잘한다~~남의자식~’ 이럽니까? 누구자식? ‘아이고~~내새끼 최고다~’ 하잖아요. 갑자기 내가 응원하는 자체가 나를 키우는 거예요.


그런데 기어이 그 아이가 내 아들이 일등을 제치고 일등하면 나의 무슨 속성에 합당합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기어이 관철한다. 관철한다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양보없다. 부모자식간에 양보 없어요.


말레이시아 가도 부모 자식간에 다툼 이것은 계속됩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연예할때에 남녀가 서로 좋다고 연예하잖아요. 같이 한번 살아보세요. 경쟁 없습니까? 본격적으로 이제 시작합니다. 본격적으로 경쟁 시작합니다.


‘너는 나를 위해서 시집왔다.’ ‘아니야 너는 나를 위해서 장가왔다.’ 너 집안 어떻고 내 집안 어떻고 난리나는 거예요. 너 올 때 혼수 얼마해왔느냐? 아직도 혼수 타령이냐 너는 나하고 뭐 해줬는데? 뭐 이렇게 계속 죽을 때 까지, 계속 누가 위에 서는지를 하는데 그게 모든 부부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부부 다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이혼한다는게 별 의미가 없어요. 이혼하기전에도 뭐 이혼된 상태인데 뭘 또. 같이 살아도 이혼인데 뭐 같이 살아도 서로 이용할려고 아까 이야기 했죠 서로 양보없이 이용할려고 하는데 뭐 헤어진다고 아쉬울 것도 없고 다만 헤어지면 이용하는데 지장있겠다.


그래서 이혼하고 난 뒤에 제일 기분나쁜 것이 뭐냐하면은, 내가 보낸 여자를 다른 남자가 낚아챌 때 기분 나빠요. 이혼하더라도 여자가 혼자 살면 기분 덜 나쁜데, 이혼해 놓고 남편행색할려 하니까 갑자기 다른 남자가 채 가버리면 그것은 끊어졌잖아요. 이용가치가 완전히 끝났으니까 미쳐버립니다. 불질러 버리고 뭐 행패부리고 자식가지고 장난치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이것 때문에 천년의 신학이, 신학이 천년동안 발달했습니다. 이 본문가지고. 신학의 발전이 이런거예요. 희한하죠? 내가 말해야 희한하지. 이제 말할께요.


자 천년동안 그걸 중세찰학이라고 하는데요. 476년부터 1453년까지 서유럽이 망하고 난뒤에 동유럽이 망할 때 까지 천년 걸렸습니다. 대략 천년걸렸는데, 그 대략 천년동안 발달한 그 신학이 있어요. 물론 그걸 중세철학 중세신학, 또는 중세철학이라고 하는데 중세철학이 어떤식으로 논쟁을 했는지를 제가 잠시 소개를 해드릴께요. 중세신학이.


가지를 어떤 식으로 규정해서 주님한테 인정받는가? 그 논쟁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했잖아요. 그러면 한번 봅시다. 포도나무는 눈에 안보이지요? 그런데 가지는 눈에 보이겠죠. 포도나무는 주님이니까 주님은 지금 영광중에 계시니까 안보이잖아요. 우리같이 이렇게 육으로 된 사람은 예수님이 안보인다 이 말이죠.


물론 저 사도요한이나 밧모섬에서 봤지만 우리한테는 안나타나거든요. 나타날수도 있지만 흔하게 나타나지는 않잖아요. 따라서 지금 나타난게 뭡니까? 바로 예수 믿는다는 그 집단, 예수믿는다는 사람들은 나타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어디있느냐를 이렇게 알려줄 때 믿는 사람끼리 모여서 우리 가운데 있다 라고 선전을 해대고 PR을 해대면 ‘야~저 교회 예수 믿는 모양이다. 그러면 우리는 천당간다. 그 교회 등록하자.’ 이렇게 나올수 있는 아이디어가 생기겠죠.


그래서 교회들 마다 진짜 우리가 주님이 말하는 그 가지 집단입니다 라고 선전을 해대면서 그걸 받쳐주는 신학들을 발전시킨거예요.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죠? 똑같아요. 우리교회와야 구원받습니다 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교회라는 것이 분명히 성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기존의 교회는 사람들 구원욕구에 작용해서 구원 천당 보내줄테니까 우리교회나오세요 라는식으로 구원론 가지고 구원론을 하나의 표상으로 상품으로 걸은거예요.


면죄부가 따로 있는게 아니고 오늘날 십일조가 면죄부가 되었어요. 십일조 낸 사람은 확실하게 하늘나라 상급 많습니다. 이게 면죄부라는 것이 중세 욕할게 아니고 오늘날도 돈주고 천국하고 영생하고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공공연히 이야기 해요. 아무리 믿음 좋아도 십일조 안하면 나는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겠습니다. 노골적으로 강단에서 이야기 하거든요. 십일조 안하면 집사에서 장로도 안되고 서리집사 장로 안시켜줍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말입니다. 왜 얌체같이 돈도 안내고 왜 천당갈려고 합니까?


그런데 목사들은 그렇게 하죠. 돈내고 천국가는게 아니고 돈 내고 천당간다는 뜻은 아니고 천국을 갔으면 지가 받은게 있으면 내놔야지 하는 식이란말이예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말이나 이말이나 같은 말이예요.


내 놓으면 아 천국갔구나가 확정이 되고, 안 내 놓으면 말로만 천국갔다 하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야고보서 2장에서 무슨믿음이라고 했어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거든요. 그럼 행함으로 뭘 보여줄거예요? 예?


돈내놓고 시간 바치고 그것 두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야기가 거꾸로 해도 같은 이야기예요. 돈 내 놓으면 천국 보내주신다 하는 그 말과 천국갔으니까 돈 내 놓으세요 라는 말과  다 같은 말이예요. 같은 말.


눈 오니까 겨울이다. 겨울이니까 눈이 온다 같은 말이잖아요. 결국 그 당시 중세 때 눈에 보이는게 교회이니까 이 교회를 남에게 납득을 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의 포도나무에서 나온 그 연결된 가지집단이라는 것을 그것을 남한테 설득력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신학을 발전시킨거예요.


신학은 그렇게 발전된것입니다. 교회 돈 모으기 위해서. 교회 돈 모으기 위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은 재간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 바꾼게 뭐냐하면 성만찬이예요.


물 뿌려주고 ‘이것은 주님의 떡이다. 이것은 주님의 살이다. 피다. 마셔라.’ 마셨을 때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은 아까 했죠. 내가 여기 있음, 나는 죽어서 천국가야됨. 그 천국 간다는 것은 힘을 키워야되잖아요. 힘을 키우기 위해서.
그 다음에 세 번째 뭡니까? 기어이 행동으로 관철한다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 뭐냐하면은 교회에서는 살과 피를 마련해놓으면 나는 나 천국가기위해서 기어이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는 영원히 영원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그 당시에 황제나 그 당시에 왕들을 누를 수 있는 것은 뭐냐하면은 ‘너 만약에 교황 말 안들으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못 먹게 만들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못먹게 만들면 요새 같은면 자기 집에서 카스테라하고 포도주스만 먹으면 될것같지요? 되지요?


옛날에는 법을 어떻게 만들었냐하면 교인들에게 성만찬을 주관하시는 분이 교회의 교황에 의해서 등록된 교황에 의해서 인정받은 신부가 아니면 그 살과 피는 무효가 된다 이렇게 한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재벌이고 아무리 권세잡은자라 할지라도 일단 교회와서는 누구 말 들어야됩니까? 아버지는 신부라 하지요. 신부말을 들어야되요. 무엇을 쥐고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쥐고 오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또 생각하기로 ‘그 살과 피 그 카스테라 빵하고 비스켓하고 뭐 안그러면 그 포도주잖아.’ 하는데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할까봐 교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 교리가 최초에 생긴게 아니고 중세 때 생겼어요. 중세 때.


늦게 생겼다고요. 성만찬 교리가. 뭐라고하냐하면 그냥 이 포도주와 그냥 이 빵이 신부가 축복을 할 경우만 이 빵이 예수님의 살이 되고 이 잔이 이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가 된다고 그렇게 가르친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 바보들 아닙니까? 그 말을 믿는 그 바보들 아닙니까? 하지만 그 바보가 오늘날 한국 이천만 성도가 바보인데. 거기 대학교 똑똑한 사람들 다 있는데. 누구도 거기서 따질 생각을 안해요.


그래서 소위 정통 우리 개신교에서는 그것은 피가 된다는 것은 맞지만 피는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 해요. 목사님 잘 배웠죠? 많이 배웠죠? 지금 문제가 그런 문제가 아니고 성경에서 오늘 본문에서 그런 문제가 아니예요.


뭐냐하면은 사람들이 피와 살을 먹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주님 너만 나인가? 나도 영혼이 나이고 싶다 이런 욕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주님이 좋은 것을 주게 되면 나를 부인할 필요가 없어요.

그 살과 피만 먹으면 나는 계속해서 나로서 천국가서도 나라고 행세를 해댈텐데 그 기회를 잡는거예요. 끝까지 나이고 싶어서, 끝까지 아담의 악마의 속성을 버릴수가 없어가지고 그 짓하고 있는 겁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는데.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제자들로 하여금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는 거예요. 제자들에게는 나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우리예요 우리. 나에서 우리로 변한단말이죠. 그냥은 못 변해요.


나에서 우리로 변하는 방법 제가 알려드릴께요. 나가 여러명 모인다고 우리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고 그 나가 전부다 죽어야 됩니다. 십자가에서 나가 죽으면 여기 나는 없어져요. 십자가에서 나 죽으면 없어져요.


베드로 나 없어지고 바울 나 없어집니다. 없어지고 여기 예수님께서 새롭게 만든 피조물에게 바울에게는 바울이라는 그 썩어갈 몸에다가 예수님의 성령을 줘버리면 이것은 바울 역할을 해요. 바울 역할은 이방인 사도가 되야되고, 베드로는 유대인 사도로서 역할을 해야되요.


그래서 성령이 임해야 그들이 제자가 아니고 이제는 사도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 나가 아니고 뭐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지체가 되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우리는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라는 거예요. 한 성령 1일죠 숫자 1.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된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는 너, 나 모이면 복수 개념으로 우리라고 하잖아요. 그것이 아니고.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여기에다가 시험을 해보자 이말이죠.


한목사님하고 저하고 우리가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같은 남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되는 것은 아니고. 한목사님이 뭔가 최종적으로 내놓는 것, 증거하는게 있어야되요. 그러면 나도 증거하는 것이 있어야되요.


한목사님이 뭘 증거하느냐 하면은 나는 예수믿는다를 증거한다면 우리가 아니예요. 뭐냐하면 예수님을 증거해야되요. 예수님이라는 나가 나와야된다고요. 그럼 나에게도 예수님이 나가 되고 예수님께 소속이 되어버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됨이 확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됨이 확인이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상당히 복잡하지만 그렇게 난해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것이 실제로 성령이 와서 체험을 한 사람한테는 이것보다 더 쉬운 이야기가 없어요. 나는 나 속성대로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서 이것이 어떤 속성이다? 죄인이라는 이름의 속성이다.
그래서 한목사님이 예수님 증거하면서 목사님 나는 죄인입니다 하면 나도 죄인이예요. 나로 모인 것은 죄인으로 모이고, 우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용서받은 그리스도가 용서하셨다는 그 기능만 우리에게 작용하게 되면 우리가 되는 겁니다.


누가 내 자식이며 누가 내 가족이 되겠는가? 바로 주님의 뜻에 완성된 자가 바로 내 가족이고 새로운 가족이죠. 천국가는 새로운 그룹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그룹에서 뭐만 증거하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겠죠. 그것이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피로 세운 교회 하나님의 피로 세운 교회라고, 교회 앞에 뭐가 붙어요.


기능이 그 본질과 기능을 먼저 앞장세우죠. 하나님의 피만 증거하는 교회, 그러면 인간의 행함은 1번 2번 3번 자체가 통합해서 피가 있다면 즉 용서하는 피라면 아까 동영상 찍을 때, 피가 용서한다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죄를 갖고 있는 용서받을 죄인으로서 이 육이 있는 한 계속 가는 겁니다.


자, 그러면 방금 이것은 일단 여러분 어렵지 않기 위해서 먼저 해답을 먼저 제시한것이고요. 그러면 이게 아니고 천년동안 이 교회가 교회로 장사를 영업하기 위해서 그들은 어떤 이론을 내세웠는지 목사님 해답 알았는데 꼭 알필요 있습니까? 뭐 이렇게 하는데 이것을 아셔야되요.


아셔야 아직도 우리는 육적인 내가 있잖아요. 나에서 끄집어낸 아이디어가 어떤 교회 아이디어냐를 우리가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확인할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단들이라고 하지만 다 필요해요.


그리고 신학이라는 것도 나쁘기는 하지만 필요한겁니다. 왜냐면 나라는 인간이 나를 신봉하면서 나온 아이디어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다 펼쳐놓았거든요. 모든 신학이 그래요. 모든 신학은 교회 잘되고 나 잘되기 위해서 만든겁니다.


나 천당가기위해 나 구원받기 위해 만들어놨기 때문에 전부다 죄악된 거예요. 마귀적이예요. 구원은 신학을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공로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신학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안되요.


왜냐하면 그러면 신학자여 내가 할것이 무엇입니까? 하면 무슨 할말이 있어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구원받았으면 은혜에 보답해야지요. 이렇게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부터 이제 줄이고 본격적으로 시작해봅시다.


신학이라는 것이 어떻게 되는가? 우리를 만듭니다. 철수, 영희, 그 다음에 뭐 민수. 자 세 사람이 있습니다. 세 사람을 가지고 이것을 대표, 보통명사로 뭐라고하냐 하면은 보통명사로서 인간이라고 해요. 보통명사로서 인간. 맞지요? 인간 인간 인간, 인간이지요. 인간one, 인간two, 인간three 잖아요.


세 가지의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신학에서. 인간이 철수안에 들어있다. 인간이라는 것이 철수 안에 들어있다. 이걸 가지고 개별실제론 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듣기 싫은 용어들 나오죠. 인간은 실제로 있는데 어디있느냐? 개별실제론, 개별자 속에 하나 속에 인간이 다 들어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해되시겠습니까? 자 이해되지요?! 집사님 어려운 이야기 입니까? 아니죠. 개별 이건 모른다 치고. 모든 인간속에 인간적인 요소가 있다. 있죠? 자 그러면 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잖아요. 인간 누구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있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들이 모여버리면 그것이 뭐가 됩니까? 하나님의 형상들의 집합체 이기 때문에 뭐가 되느냐? 교회가 되는 거예요.


이제 신학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강의 다시 해볼까요? 자,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다? 못 만들어낸다? 못 만들어내지요. 성경은 누가 만들어낸다? 하나! 오직 예수님 나가 확장하기 위해서 확장. 예수님의 ‘나’ 가 몸으로 확장되는 거예요. 나는 포도나무요 그 다음에 나는 없어요. 나는 포도나무요 끝까지 나예요.


그 다음에는 모든 성도는 나가 아니고 너희가 되요. 이 말은 나가 없는 너희는 없으니까 항상 성도는 누구만 쳐다본다? 나만 쳐다보는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의 뜻이예요.


그런데 그런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자기들 내가 너희에 속한다고 우길려면 이런 이야기까지 인간속에 들어있다고 이야기 해요. 들어있다. 인간속에 들어있다. 뭐 성령이 들어있다. 들어있다 해버리면 성령이 들어있는 사람까지 모인 이것을 교회라고 하자 그래서 이름을 실제로 계시는데 실제로 예수님 계시는데 개별자 속에 다 들어있다 이것을 개별실제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두 번째가 뭐냐하면 두 번째가 이름도 참 어려워요. 유명론, 명목론 이라고 하는데 이 유명이라고 하는 것은 famous 유명하다는 그 뜻이 아니고 이름 뿐이라는 이름 뿐이다 라는 뜻이거든요.


이것은 무슨이야기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개체 뒤에 나온다. 인간이라는 것은 개체 뒤에 나온다 이렇게 되는거예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철수, 영희, 민수 있고 난 뒤에 이것들을  뭐라고 부를까 생각해보니까 인간이라고 부른게 통합해서 낫겠다 해서 인간이라는 보통명사는 이런한 개체, 개별자 뒤에 정해진다 이게 바로 명목 또는 이름뿐이다 유명론 또는 명목론이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왜 이런 주장을 했느냐 하면은 일단은 누가 누군지를 일단은 성도인지 모르니까 일단 그물 가지고 확 훑어 봉투에 돌 넣듯이 다 불러모으는 거예요. 불러놓고 뭐 나쁜고기 좋은고기는 알아서 주께서 하실거니까 일단 하나님 형상 입었다는 인간들 전부 다 모아놓는거예요.


모아놓고 그 하나님의 성도라 하는 것은 일단 나중에, 나중에 붙여주자. 오래 머물면 성도고 오래 안 머물면 성도라 하지말고 그때가서 정하면 되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명목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스켈리누스라는 사람이 주장한것이고요.


세 번째가 마지막이 뭐냐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머릿속에 있다. 창조속에 창세전에 머릿속에 있다. 머릿속에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전인류에게 적용을 시켰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하면 유명론하고 반대예요. 인간이라는 보통명사는 개별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개별전에 있다. 이것을 가지고 개념론이라고 하는데 아벨라드라는 신학자가 주장했어요. 개념론이라고 하는 거예요. 개념론.


 
개념론을 이해하게 되면 교회 아무나 받아주지 않고 예수믿는다고 선언한 사람, 예정되었다고 주장한 사람만 따로 교회 모으자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가지 다 무지무지하게 일리가 있지요.


일리가 있는데 결국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 했잖아요. 다 일리가 있는데 처음에는 개별실제론이고 속에 있다 이것은 후에 있다 명목론 세 번째는 하나님 머릿속에 모든 인간은 다 들어있다. 이것이 개념론인데 결국은 이들이 이렇게 논리를 하는 이유는 어쨋거나 저쨋거나 눈에 보이는 우리 교회는 진짜 교회라는 것에 관심이 있지요.


왜냐하면요 로마가 멸망하고 난 뒤에 게르만 민족이 로마의 기독교를 접수했거든요. 원래 그 기독교는 게르만 민족의 종교가 아니고 그 로마 그리스 남쪽 계통이예요. 그런데 북쪽에 있는 프랑크족이 게르만 족에 와서 자기 기독교라고 만들었거든요. 기독교로.


만들다 보니까 각 종족 민족보다 전부 다 기독교를 전부 다 빼가지고 자기 민족에 맞는 걸 다 한다 이말이죠. 그러면 신학자 입장에서는 이 흩어져 있는 기독교를 하나로 통합시켜보자는 겁니다. 왜? 어쨌든 눈에 보이니까.


남쪽에 있는 기독교 아니고 우리가 기독교라 하면 기독교가 둘로 분리되면 기독교가 힘이 약화되잖아요. 그래서 교황이라는 교황이 신학자들에게 신학자들을 불러다가 시키기도 하지만 신학자들이 알아서 전체 기독교를 하나로 통합할수 있는 아이디어를 계속 내는 겁니다.

계속낸다는 말은 뭐냐? 결국 교회라는 것은 이 셋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여기고 계속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셋다 다 거부해야되요. 교회는 역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역사속에 출몰하죠.


어두운 뒷 창고에 귀신이 거기에 출몰합니까? 아니면 그 귀신이 거기서 살고 있습니까? 살고 있으면 밥이나 주고 그럴텐데 낮에가면 없고 밤에 가면 나타난다 보통 괴기 영화에. 꼭 낮에는 없는데 밤에 나타난다 이말이죠. 이것이 출몰이죠.


출몰이라는 말은 우리가 손으로 붙잡을 수가 없고 저쪽에서 알아서 내가 나올게 하고 그냥 나오는거예요. 바람같아요 바람. 바람같애. 성령같애. 교회라하는 것은 머리가 주님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분이 교회를 쥐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인간이 교회를 쥡니까? 못쥡니까?


못쥐는 거예요. 못쥐게 되면 교회가 권력을 인간이 못쥐고 되잖아요. 그래서 한번 교회는 영원한 교회라 해가지고 이런식으로 이런 신학을 동원해가지고 우리 교회만큼은 아니 우리 교회만큼은 아니 우리 교회만큼은 진짜 교회라고 해줘야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나 진짜 교회 다닐래. 나 이런 신학있는 곳, 아니 이런 신학 이 신학이 더 맘에 들어.’ 각자의 취향대로 개성 따라서 교회가 나누어 지는 겁니다.


천주교, 개신교, 그 동방교회 여러분 보기에는 세 개로 나눠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세 개가 아닙니다. 수천개예요 수천개. 동방교회도 수백개, 대한예수교장로회도 230개 장로회가 있잖아요. 그 왜 갈라지는가? 전부 다 교회가 달라서 이렇게 나오거든요. 교회가 뭐 다른가? 뭐 아무것도 아니예요. 왜 신자 선별을 했느냐? 그것때문에 갈라진다고요.


그러면 그 교단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연구해야됩니까? 아니면 교단에게 아부하는 신학을 해야되겠습니까? 그 교단에 아부하는 신학을 해줘야 그 신학교에 교수짓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도 1번 2번 3번에서 못 벗어납니다.


주를 위해서 신학교수하는게 아니예요. 내가 밥 빌어 먹고 살기 위해서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신학교수하는 거예요. 그런데 신학자 교수치고 신자있으면 이건 드문 경우입니다. 드문케이스예요. 왜냐하면 신자 같으면 신학교수를 못해요. 그 신학교에 충성안할거니까. 주님께만 충성할테니까.


주님께 충성한다는 말은 주님이 하나고 나는 주님께 속한 너희가 되어버리면 신학교는 그것을 요구하는게 아니예요. 신학교 이사장이 하나고 너는 나한테 월급받는 너희가 되는 거예요. 둘중에 어느 것 할래? 이말입니다.


군에 있어봐서 알겠지만 군종들 있잖아요. 군종들은 월급 어디서 나옵니까? 국방부에서 나라에서 국방부에서 나오잖아요. 그러면 군종이 설교할때나 이렇게 뭔가 참가할때에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해요?


이 군인이 북한군이 왔을 때 어떻게 믿음으로 싸움을 목숨을 버려가면서 나라 지킬수 있는 그러한 국가관이 투철한 그 인간 만들기 위해서 나라에서 월급줘서 누구 붙여줍니까? 군종을 붙여주잖아요. 제가 너무 심한 말 아니지요? 그말 맞지요?


예수그리스도 충성하라고 붙여준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나라 지키라고 한거예요. 나라 지키라고 하잖아요. 그래야 군종이 기독교만 있는게 아니고 천주교 불교도 있잖아요. 불교 중이 군종으로 있을 때 뭐합니까? 부처 위하라고 하는게 아니예요. 부처님을 의지하는 힘으로 다시말해서 부처한테 힘 받아가지고 나라 지킬 때 용감하게 싸워라 그런 제 말이 틀린가요? 안틀린거 같은데.


예수 믿는 군종 없습니다. 예수 믿는 군종 없어요. 왜냐하면 다니엘서 때문에 그래요. 다니엘에 보면 만약 그 군종이 다니엘을 믿는다면 다니엘은 뭐와 뭐의 싸움이냐하면은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태산같은 인자의 나라와 그리고 기존에 있는 모든 나라와의 싸움입니다.


기존의 모든나라는 짐승이 되는 거예요. 그 틈바구니에서 다니엘과 세친구는 순교하지요. 순교는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열매가 뭐냐하는 건데. 나라위한 신앙인은 없어요. 나라위한 신앙인은 없습니다.


뭐 맥아더가 기도로서 어떻게 했다 뭐 하는데, 그것 따지면 우리 회사 직원은 기도해가지고 우리회사 이뤘다 이렇게 되요. 우리회사 학교는 우리 교목이 기도해서 잘됬다 서울대학 많이 간다 이렇게 된다 말입니다.


무슨 예수님이 서울대학 보내는 예수가 어디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십자가 안졌거든. 서울대 보낼려고 십자가 안졌다 이말이죠. 나라 잘되라고 십자가 진적 없거든요. 만약 두 개의 기독교 나라가 축구한다 그러면 누구 편 들거예요? 그럼 신자 비율 많은 쪽에 주께서 골 이기게 만듭니까? 월드컵 나가게 만들어요? 아니죠.


네덜란드 월드컵 그렇게 우승했던 네덜란드가 못들어가고 까딱까딱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신자가 적어서 예선도 통과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있는 겁니까? 그런 것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첫째시간에 한 나는 포도나무요 할 때 그 가지는 인간이 조성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주님 살아계시니까 알아서 자기 가지를 내 놓는데 그 가지의 공통점이 뭐냐? 우리는 죄인입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IP:221.♡.139.88) 17-10-12 19:18 
가락-요한복음 15장 5절(열매는 순교다)171010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합시다. 두 번째 시간 보게되면 여기에 가지만 있는게 아니고 가지 끝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요. 5절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과실을 많이 맺는거예요.


그러면 이 본문을 딱 보면서 이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 모든 교회가 무엇에 주목하느냐 하면 과실 맺는데 충성을 다합니다. 왜그러냐 하면 이유가 있어요. 뭐냐하면 예수 믿는게 아니고 내가 과실이다를 믿을려고 그런 믿음을 줄려고 그랬어요.


예수를 믿는게 아니고 나는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나는 나에게 붙이면 안된다고 했죠? 그런데 기어이 인간은 자기를 나를 포기를 못해요. 자기가 제일 중요하니까. 나는 열매다 이렇게 나와요. 나는 열매다.


교회와서 뭘 노리냐하면은 나는 주님의 괄호열고 나는 주님의 열매다 라고 확인되고 확인해주는 교회가고 싶은거예요. 확인해주고. ‘나는 열매되기 싫어요.’ 그래서 가는 사람 없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고 열매 맺는다고 하니까 여기 뒤에 열매 맺이 않으면 다 짤리거든요. 열매맺지 않으면 불에 사른다고 하니까 불에 사른다는 말은 어디간다는 말입니까?


불 있는데가 어디죠? 불이 기다리는 곳에. 예 용광로가 지옥이잖아요. 성경을 딱 보니까 아! 성경은 우리를 천국 보내기 위한 책인데, 딱이거든요. 지옥에 안 가면 되거든요. 그러면 지옥에 안가는 방법은 뭐만 하면된다? 열매되면 되거든요 열매.


그 열매가 되면 열매는 무슨 개념이냐 하면은, 가지는 그냥 관계 개념이라고 가지라 하는 것은요, 몸통하고 몸통에서 삐져나오잖아요. 이것이 연결개념. 몸통에서 연결개념이지만 열매는 무슨개념이냐하면 양적개념이예요.


열매, 작은 열매 이왕이면 풍성한 열매. 그러면 교회 목회할 때 목사가 교인들에게 ‘여러분들은 이론상은 예수를 믿는데 내가 이 교회 목회 담임하고 보니까 여러분들은 도대체 얼마나 게을러빠졌는지 당최 열매가 없네요. 열매가. 여러분은요.’


그러면 그 이야기 할 때 목사님 그런 주장 할수 있습니까? 하는데 하필 그 설교 본문이 뭐냐하면은 열매 없는 사람은 불에 태운다 하니까 그 가지를 모아다가 야~ 이 교회 나오길 잘했다. 만약에 다른 교회갔으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할텐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 교회로 보내줬으니까 세상에 내가 가지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열매까지 챙겨야 지옥에 안가고 천국간다. 야 이 교회 안나왔으면 큰일날뻔 한거예요.


열매는 무슨 개념이겠어요? 양적개념이죠. 비교가 된다니까 양적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작은 열매와 큰 열매가 비교가 되는 거예요. 어떤 교인이 왔는데 자기가 교회나오고 난 뒤에 집안식구 다섯명인데 다섯명 다 나왔으면 그 집안은 큰 포도송이가 되는 겁니다. 다섯명 몽땅 교회나오면.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교회 나오는데 달랑 5년되도 혼자, 십년후에도 혼자 나왔다면 문제는 자신은 구원을 받는데 구원을 받는다고 우기지만, 구원을 받는지 안받는지 교회 다른 집사들 목사부터 장로해가지고 의심의 눈치를 보는거예요.


믿는다고 뭐 기도하기는 하는데 요한복음 15장에 의하면 당최 뭐가 없다? 열매가 없네요 열매가. 전도의 열매가 없네. 그런데 열매라는 것은 앞에 붙는게 많아요. 전도열매는 열매가 아니예요.


성화의 열매, 착함의 열매, 돈 열매, 봉사 열매, 목사 섬기는 열매, 목사 차 바꾸는 전담 열매, 사택 좋게하는 열매, 열매는 뭐 붙이기 나름이예요. 허드렛일하는 열매, 주차요원 열매, 대통령 소망교회처럼 대통령 이명박 나오는 대통령 열매, 그 더 나아가면 많은 판사들과 의사들이 많이 배출해가지고 이 사회의 요소요소에 빛과 소금하는 열매들.


그 뭐 목사가 설교할 재료가 무궁무진한거예요. 우리교회 출신의 어떤 대법원장이 있는데 그 사람은 왜 대법원장이 됬는가? 여러분들 그런 열매 부럽습니까?! 세상에 그 판사는 판사시절부터 얼마나 겸손한지 세상에 대법원 판사될 사람이 제일먼저 11시 예배이지만 11시에 오지않고 9시 반에 와서 친히 주차 완장차고 낮아진 주님의 본을 보이면서 주차를 했습니다.


여려분 지금 주차요원 2명 필요합니다. 두명 필요한데 여러분 나중에 병원장 되고 대법원장 판사될려면 지금부터 열매 맺으시기 바랍니다. 하면 서로 막 손들고 난리났어요. 그리고 교회 그랜드피아노가 고장난지 벌써 몇일됬는데 그랜드피아노 열매가 없습니다. 지금.


이번에 바자회하는데 바자회 열매, 어려운 노인들 밥 해줘야 하는데 밥해줄 열매, 자원봉사 열매, 갑자기 열매들이 뭐. 요새 어떤교회는 동성애 살리는 동성애 열매까지. 동성애 열매, 동성애를 사랑하자. 퀴어축제 벌려주고 열매. 우리는 새로운 교회이기 때문에 끝까지 포용하는 열매. 그리고 요새 또 유행하는게 뭐냐하면 탈북자 열매, 이민자 열매, 파키스탄 열매, 인도네시아 열매, 베트남 열매, 돈 내라 이야기예요. 결국 이것을 할려고 하면 뭐가 필요하죠? 돈 필요하잖아요.


그러면 베트남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베트남의 현지의 실무자가 가야되잖아요. 실무자 누가 가느냐? 목사 자기가 가요. 목사 자기가 가면 뭐가 필요해요? 차비, 체류비 필요하죠. 돈 내놓으란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서 필리핀 선교하기 위해서 필리핀 여기 있는 사람들하고 필리핀 여기 시집온 사람들 통해서 필리핀 친정 집 전부 다 친정집 전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 쪽에 도와주고 취직하게 도와주고 그 여파로 기독교 좋다 도와줄려고 하면 내가 당장 내가 가가지고 베트남에 가서 해야된다. 한번 휙 돌아보고 2박 3일 저 어디 베트남에 놀러가는데 있잖아요. 놀다오고 하는거예요.


도대체 이 열매라는게 뭐냐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아마추어들이 이 교인들이 이것을 보니까 열매를 붙이니까 진짜 우리 목사님은 진짜 성경대로 하는 목사인줄 알고 있어요. 정답, 정답을 말씀드릴께요. 열매란 순교입니다. 열매란 순교예요.


왜그러냐하면 열매란, 개체 + 속성이기 때문에 개체 + 속성 이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열매란 고유한 속성이 없어요. 열매란.



열매가 붙어야될 몸통에 속성을 개체가 개별자가 보여줄 때 그것을 열매라고 해요. 열매가 다 달라요. 왜? 개체가 다 달라요. 살아온 환경 다르고, 개성 다르고, 남자 여자 다 다르고, 학력 다르고, 형편 다르고 다 달라요. 누가 모델이 없어요.


난 저 사람처럼 될래 저렇게 하면 안되. 모델은 열매의 모델은 없어요. 왜? 죽음 자체에 모델이 없기 때문에. 순교라는 말을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성경에서 고난이란 말을 사람들이 제일 많이 오해하는데, 고난한다고 하니까 뭐 찡그리고 막 이런걸 고난이라고 하는데, 찡그리고 울부짖는 이런 것이 고난이 아니고, 희희낙락 즐기는 것도 고난이예요.


고난이라는 말은 뭐냐하면은 고생하고 다른 말이예요. 고생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나의 원칙있잖아요. 내가 되고 싶은데 그것이 안되가지고 내 뜻대로 안되는 것을 고생이라고 하고,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되고 싶어서 하는 고난은 없어요. 내가 피폐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고생이지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의 연장선에서 예수님의 고난이 그대로 주어지는 것이 바로 고난이예요.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이니까 이것은 집을 팔고 뭐 교회에 갖다 바치고 그것과 관계없어요. 좋은 집, 넓은 집 그대로 살면서도 그리스도의 기능을 발휘하면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기능.


자, 그리스도의 기능이 뭐냐에 중요하겠죠. 고난이라는 것은 개체안에 개별자인데 개체안에 뭐가 들어왔다? 뭐가 활동한다? 예수님의 속성이 발휘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속성에 있어서 그 속성은 같은데 형태가 달라요.


예수님이 하늘에 있을때는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받았던 예수님도 이 땅에 들어왔다 하면 이게 뭐냐, 고난이 되어버려요. 그것이 어디나오냐 하면 빌립보서 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그 영화를 버리시고 이 땅에 죽기까지 복종했는데 그 모양새가 종의 모습이예요 종의 모습. 허드레한 모습이다 이말이죠.


누가복음 잠깐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보고 마태복음 11장 보겠습니다. 뭐 진도 빨리나간다고 예 누가복음 1장 끝에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1장 51절에 예수님의 속성이 이 땅에 기능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속성이 예수님의 본질이 기능으로 나타났다 이말이죠. 본질 속성 같다고 칩시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공 손으로 보내셨도다 이렇게 되어있죠.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는 기능은 뭐냐하면 전복, 거꾸로 뒤집는 것 뒤집기예요 뒤집기. 이 뒤집기 하는데 예수님이 친히 함께하는 자가 비천한 자고 함께하는 자가 가난한 자예요. 그래서 이게 어려운거예요.


자 삭개오가 가난합니까? 부자입니까? 제가 질문 할테니 답변해주세요. 삭개오가 가난한 자예요? 부자예요? 부자이지요. 그런데 구원받았습니까? 구원 안 받았습니까? 구원 받았지요. 삭개오 집에 주님이 들어가는 순간 삭개오는 가난한 자의 속성이 그 집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구원이 이르렀다. 너의 집에 구원이 이른거예요. 주님의 속성이 이른거예요.


그러니까 삭개오가 하고 난 뒤에 가난하게 된 것이 아니고, 돈에 대해서 초연하게 되어버렸어요. 혹시 내가 늑탈한게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4배나 갚는 법은 없어요. 법을 넘어서요. 법을 넘기면 뭐가 나오냐면 사랑이 나오거든요. 법을 넘으면 사랑이 나와요.


그러면 이것은 야~ 4배나 갚았으니까 구원받는다 이렇게 하지말고 안 갚아도 되요. 나는 이 돈보다 주님이 더 소중한 것을 느꼈을 때, 이미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주님과 같이 가는 사람이예요. 비천한 자고 가난한 자가 되는 겁니다.


비천해서 구원받는거 아니고, 가난해서 구원받는 것 아니예요.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부자를 사모한다고요. ‘내가 언젠가 두고 볼 거야 내 부자되고 만다.’ 마음 씀씀이가 부자되고자 한다면 이미 마음의 부자예요. 가난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할 때 주님과 하나님 앞에서 주님과 같은 평을 받는거예요. 주님이 가난하면 가난하게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 아까 우리 집사님이 이야기 했지요. 마태복음 11장 한번 봅시다.


이 성경해석을 방금했던 누가복음 1장 해석을 감리교나 기장에서나 장로 통합쪽에서 어떻게 해석하는 줄 알아요? 해방신학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 오신 것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이기 때문에 우리는 촛불집회 나가야 한다. 그놈의 촛불집회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예요. 그들에게는.



예, 마태복음 11장 봅시다. 11장 8절에 보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되어있죠.


이 말씀은 뭐냐하면 그들이 세례요한 만나기 위해서 어디를 떠나서 어디로 갔습니까? 살던곳을 떠나서 어디로 갔지요? 그들이. 여기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갔느냐 했지요. 그럼 그들이 자기 살던 곳은 아니죠. 살던 곳을 떠났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사는 곳에 있다는 말은 나 사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 없다고 여겼던 그들이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벌판, 광야에 갔거든요. 그 광야에 가면 내가 살던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고 치고 그 곳에 갔잖아요. 그 곳에 누가 있었느냐?

바로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바로 선지자 보러 나갔지요. 그러면 선지자가 뭐냐? 선지자가 부드러운 옷이라는 것은 왕궁에 있거든요. 그것은 기존의 너희들 사는 세계의 오야붕이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사는 세계는 반드시 최고의 자리가 있어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삼성이 최고의 자리에 있잖아요. 삼성. 현대 삼성. 최고잖아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어떤 인간이나 ‘엄마 취직했어. 현대에.’ 그러면 굉장히 자랑거리이고 촌에 가면 플래카드 붙여있어요. 어떤 촌에 가면요, 촌에 돌아다니다 보면 삼성입사 했다고 막 붙여 있다고요. 삼성 현대 재벌이 우리나라 중심이예요.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광야에 갔다는 말은 그것보다 삼성, 현대, 돈 보다 더 중요한게 있다고 치고 갔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광야에 뭐가 있드냐 이말이예요? 뭐가 그리 대단한게 있드냐 이말이죠. 거기 보니까 선지자가 있더래요. 그럼 선지자가 있다는 말은 선지자가 전하는 그 모체가 되는 주체자가 있겠죠.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그리스도 잖아요. 이게 고난이예요.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꼭 광야를 요새 광야 어디있어요. 다 개발하면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좋은 집에 그냥 머물러 살더라도 이곳이 내가 사는 곳을 뭐로 본다? 광야로 보는 거예요. 뭐 광야치고는 고급 나가는 물건이 많겠지만 골프채 여러개 있고 좋겠지만, 광야도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냉장고도 없는 광야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냉장고 10대 있는 광야도 있어요. 어쨌든 간에 광야예요 광야.


광야에서는 뭐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소중하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있어요. 장사 잘됐다. 창고에 돈 쟁여놨다. 내 영혼아~ 스스로 자기를 격려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한테 아부한다고 이야기 했는데 인간은 늘 자기한테 아부해요. 아부를 해요. 자기한테.


그런데 그날 밤에 오후 2시 46분에 주께서 니 영혼 출몰해서 니 영혼 데려가면 저 창고에 있는 은행 통장에 있는 저 돈은 누구 것이 되겠는냐. 니가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 이말입니다. 니가 무엇을 목표로 해서 사느냐. 사는 이유가 어디있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주님께서.


제대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똑바로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 이 이야기가 아니고 니 방향을 어디다 방향과 어떤 분과 니가 끈으로 연결되어 있느냐 그것을 묻는 겁니다. 그 끈이 중요하지 내가 착하다 현재 나는 나쁜짓 안했다 그게 중요한게 아니예요. 나 나쁜 짓 많이 죽었다 그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게 자기 자신의 또 하나의 자기 의가 되버려요. 아까 그 누가복음 1장과 마태복음 11장을 이렇게 해보게되면 주님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유난떨면서 재산 받치는게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주님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선지자가 복장이 뭐냐하면은 복장이 내일을 보장 받을 수 없는 복장이예요.


그냥 하루 먹고 하루 사는 메뚜기 석청 먹고 살잖아요. 그런데에 선지자가 왜 삽니까? 메뚜기가 맛있어가지고? 메뚜기 많이 먹으면 질릴텐데 꿀이 건강식품 이여서 오래사는 겁니까? 그 선지자가 왜 살아요? 선지자는 본인 때문에 본인이 사는게 아니라니까요.


아까 1번 2번 3번 봤지요? 그것은 나 때문에 내가 살잖아요. 내 맘에 안들면 번개탄 피워 놓고 죽으면 되니까. 자살이라는 말은 뭐냐? 평소에 누구 때문에 살았다? 나는 나 때문에 나한테 기대 걸고 살았다가 그 기대가 좌절되니까 관철이 안되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지 이래서 자살하잖아요.


자살한 사람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노무현 대통령 아닙니까? 국민 대통령. 그 집에 끼니를 못 이었어요? 먹을 양식이 없습니까? 집사님 노무현 대통령 집에 양식이 없어서 죽었습니까? 평소에 예수 안 믿으니 모르죠. 평소에 예수 안 믿는다는 말은 평소에 누굴 보고 산다? 나는 누구 보고 산다? 나 때문에 사는 거예요. 나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그러면 괴로움 없애려면 뭘 제거하면 됩니까? 나만 죽으면, 괴로움의 원천이 나니까 나만 없으면 배짱 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옥이 있는데. 지옥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천국의 주인공이 이 땅에 왔으니까 알죠.


부처가 많은건 그것은 지옥도 아니예요. 천국에서 안왔기 때문에. 하늘에서 오신 분이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알려주니까 그동안 몰랐던 땅에 사람들이 몰랐던 하늘의 비밀을 미래의 비밀을 이제 알게 된겁니다.


야~ 그렇다면 하늘의 비밀대로 살아야지. 너나 나나 똑같은 바보 등신같으면 니 말 듣고 살면 누구만 조집니까? 나만 바보 병신 되는 거죠. 물론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가짜예요. 결국은 또 나 구원중심이니까.


그런데 그런 욕심 마저도 성령이 와서버리면 니가 구원 믿고 싶습니다 하기 전에 이미 창세전부터 그런 말 나오도록 주께서 이미 스케줄이 그렇게 짜여져 있어요. 계획이. 때가 되매 믿게 된거예요. 때가 되매.

자 다시 오늘 본문 돌아가 봅시다. 아까 제가 마태복음 누가 복음 언급한 것은 그 영광스럽던 주님도 이 땅에만 딱 왔다 하게되면 이것이 변변치 않은 고난 받는 사람된다니까요. 제가 왜 그 이야기를 하느냐하면은 교회의 헌금 열매, 전도 열매 했다 해가지고 이 땅에서 때부자 되고 재벌되고 의사되고 판사되고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주차요원 한다고 대법원 판사되는것 아니라이말이죠.


포항공대 어느 교수가 있었는데 얼마나 주님의 복음을 자기는 복음이라고 하는데 하여튼 주님의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전화가 왔어요. ‘너 중소기업 장관 안해볼래?’ 라고 대통령한테 전화가 왔다고 칩시다. 얼마나 기분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창조론에 걸려가지고 자기가 자진해서 후보사면 했잖아요. 자기 신상 다 털리고 가만히 있었으면 자기가 얼마나 괜찮은 인간이예요. 교수이고 이렇게 되는데, 세상에 그 후보감 될려고 세상에 신앙까지 포기했잖아요. 그놈의 권력이 뭔지.


나는 창조론을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십년동안 태어나서 40대니까 40중반까지 오직 창조론 성경대로 믿는다 그렇게 하다가도 그놈의 장관자리가 뭔지 그놈의 장관자리가 뭔지, 거기서 그만 딴 소리가 튀어나오네요.


그럼 그동안 그 사람이 고생한 것은 고난입니까? 고생이였습니까? 고생이죠. 고생은 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 고생이고. 그래서 예수천당가기 위해서 받는 것은 고생이고, 주님속성 때문에 고생 안해도 고난되고. 확실하지요? 이제는 두 개 분명히 해야됩니다.


어떤 목사는요, 진짜 복음만 전한다고 소문난 목사예요. 이름도 교회이름도 서머나 교회예요. 그 미국에서 유명한 목사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가 하도 유명하니까 원래 또 기독교 방송국은 장사가 되야되잖아요. 광고부터 해야되고.


한번 청취자를 확보하게 되면 한번 당골하게 되면 계속 그걸 듣게 되게 되면 시청률이 높아지만 이게 또 광고, 운영을 그렇게 하거든요. 유명하니까 뽑아가지고 하니까 딱 뽑아놓니까 복음은 쏙 들어가버리고 자기 간증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귀한 기회를 세상에.


그렇게 복음만 외치고 없음을 이야기하고 없음을 이야기 해야하는데, 아 그 얼마나 좋은 찬스 예요 생중계하는데. 이렇게 자리 다 마련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딴 소리 나와버렸어요.


목사님 당신한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회가 안와요. 기회가 올 리가 없지요. 물론 제대로 모르고 옛날에 극동방송에서 기회를 준 적이 있어요. 옛날 초창기에 뭣도 모르고. 그것도 생중계로. PD가 좌천됬다는 후담이 있었습니다. 나 했던 PD가.


기독교 방송 극동방송이거든요. 극동방송 기독교 방송은 돈이 됩니다 돈. 예수를 앞장세워서 돈 버는 곳이예요. 돈이 안되면 그 증인은 그리스도 증인될지는 모르지만 그 극동방송의 증인 될 필요는 없어요. 월급 줄 가치 조차 없어요. 고난을 받는거예요 할수 없이. 고난은 자진해서 받는게 아닙니다. 주께서 가라하는 그 현장이 순교지가 되고 고난지가 되는 겁니다.


고난받는다고 저 선교사 저 아프리카 그런데 가지 마세요. 가만이 집구석 앉아 있어도 고난 받아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것이지 나 이렇게 하면 천당가겠지 이렇게 고생했으니까 주께서 봐주겠지 그런거 없습니다.


구원은 주님의 공로로 구원받지. 내가 선교한다고 고생한다고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뉴저지에서 고생 좀 했지만 그것가지고 구원 받는거 아니거든요.


자 한번 정리해 봅시다. 자, 열매란 개체 + 속성입니다. 속성은 개체속성 아닙니다. 속성은 누구 속성이겠습니까? 포도나무의 속성이죠. 포도나무의 속성이 개체가 되어버리면 포도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형식으로 예수님의 몸은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왜? 개체가 있으니까.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에 보게되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 소자한테 한 것이 이 작은 자 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다. 천국간 사람이 말하기를 제가 언제 주님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니가 너희 형제한테 한 것, 너희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 말씀을 만약에 기성교회에서 이야기 해버리면 이것은 단합대회예요. ‘아~ 우리교회는 전부 다 머리만 커가지고 뭐 안다 하는데 말씀 들으면 뭐합니까? 실천을 안하는데. 열매가 없잖아요. 여러분들 서로 섬기고 서로 봉사하라 이렇게 하는데 왜 서로서로 안합니까? 이 시간부터 자 노래하나 부르고 서로 악수 하고 인사합시다.’ 사랑하는 주님앞에~~ 노래한번 부르고 서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인사하려니 남자거든 쑥스러워 여자끼리 악수.


그러면 단합대회 된거예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너희가 알아볼려면 설교하는 것도 이 강의 하는것도 죄고 설교하는 것도 죄입니다. 설교 듣는 것도 죄고, 예배 참석하는 것도 죄고. 그런데 왜 참석하느냐? 주께서 참석하라고 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럼 헌금은 왜 하느냐? 헌금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고.


죄인을 주님의 고난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헌금하고 예배 참석하고, 항상 죄인을 죄인이지만 주께서 계속 죄인을 가지고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게 위해서 했습니다. 그게바로 열매라는 거예요 열매.


그러면 자 여기서부터 이 말 들으면 여러분 굉장히 쉬울거예요. 아 참 쉽다. 그런데 실제로 이게 안 쉬워요. 방금 이야기가 안 쉽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요. 한석봉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엄마가 한석봉에게 이야기하기를 ‘석봉아 니가 글을 쓸때는 자세 똑바로 하고 앉아서 정성들여서 글을 써야 글씨가 하나하나 힘이 있고 살아있는데 깨끗한 글씨가 되고 남한테 감동을 주는 글씨가 된다 알겠지?’ ‘예, 어머니 똑바로 쓰겠습니다.’ 하고 썻을거 아닙니까.


물론 뭐 떡 써는 것도 있지만. 제가 지어낸 겁니다. 자, 그렇게 한석봉이가 글을 쓰고 있는데 엄마가 막 의자를 방석을 빼고 막 때리고 머리 쥐어뜯고 흔들고 이럽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하면은 분명히 똑바로 쓰라고 해놓고 엄마가 한석봉이 보기에 방해를 놓는 거예요.


자, 이유가 뭘까요? 이 말도 안되는 예화에 제가 지어낸 예화이지만 이유가 뭘까요? 자 엄마 입에서 나온 것을 한번 적어볼께요. 글씨를 쓸 때는 똑바로 쓴다. 이 말을 기존 교회로 하면은 성도라면 바른 열매, 바른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야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겠죠? 예?


그래서 어떤 복음을 안 성도가 그 교회에서 바른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용서가 안되. 이유가 뭔지 알아요? 목사가 보는 바르다 라는 개념과 복음을 아는 성령받은 성도의 바르다라는 개념이 같을 리가 없어요.


목사의 바르다는 것은 어떤 결과가 교회를 부흥시켜야 되는거예요. 좋은 교회라고 소문이 나야되요. 그래서 때로 모여들어야. 그것이 목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예요.


이 앞에 있는 땅 주차장 만들어야 기적이예요. 그리고 교인 가운데서 판사 나오고 의사 많이 나와야 기적이예요. 목사가 많이 나와야 기적이예요. 한석봉이가 생각하는 반듯하게 쓰는 이것은 안되요. 엄마가 생각하는 기준은 따로 있어요.


한석봉아 그렇게 앉으면 안되고 이렇게 앉아야지! 엄마 그렇게 안되요. 내가 시키는대로 하라고! 이렇게 앉아야지. 머리 이렇게 똑바로 이렇게 하고. 한석봉은 지금 나 혼자 잘 쓸려고 하는데 글씨도 쓸 줄 모르는 엄마가, 엄마가 되도 않는 기준가지고 막 들이대는 겁니다.


그리니까 여러분들은 이론상 주께 고난받고 열매가 뭐라고 했습니까? 뭐 더하기 뭐? 개체에다가 주님의 속성 부여한다. 잘도 알고 있어요. 있는데 막상 현실에 딱 들어서면 자신감 뚝 떨어지는 거예요. 간섭쟁이가 왜 그리 많은지.


그러면 그것은 전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전도할려면 고신측 아까 했죠. 고신측 아까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고신측에 아까 누가 와서 이야기 했지요. 집 사준다. 목사가 사도행전 2장에 한것처럼 목사가 교인들부터 집사주고 한다 했지요. 그것도 초창기에 요즘엔 장사안되서 못하지만. 그렇게하겠지요.


그러면 그것이 옳다는게 성경에 어디나옵니까? 없어요. 성경에 없다고요. 성경에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중에 괴수라고 성도라 이야기 해잖아요. 그러면 나는 죄인중에 괴수다 라고 하면 다 성도입니까? 아니지요.


속성 +개체 잖아요. 개체가 내어 놓는 판단기준은 같은 것이 없어요. 다르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달라도 너무 달라요. 다 달라요 다 달라요. 로마서 14장을 봅시다. 로마서 14장 12절, 13절 누가 한번 읽어봅시다. 집사님이 한번 읽어볼까요? 로마서 14장 12절 13절.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것을 주의하라.


예, 거기 10절에 보면 어찌하여 형제를 판단하느냐 이렇게 나온다고요. 이건 뭐냐하면은 정말 여러분들이 양보 했으면 내가 목사라면 내가 집사라면 저런 짓은 안한다. 저것은 더러운 짓이다. 라는 평가에 휘둘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 휘둘릴 필요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만약에 휘둘린다면 그 사람 신자 아닙니다. 남 눈치보고 살아가는 사람이예요. ‘나 신자 맞아? 니가 판단해죠.’ 이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그래서 직고, 직고. 직구 말고 해외에서 상품사는 거 말고 직고! 직접 고하는 거예요. 기도내용은 직접 고하는 겁니다. 남한테 형가 받는게 기도내용이 아니예요.
아까 교회가 뭐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샀다고 했지요. 감독자가 하는 일은 뭐냐하면 바로 그들의 어떤 장소에서 어떤 환경에서 어디서 무얼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옥경이처럼 어떻게 뭐 했는지 상관없이 마지막에 뭐로 나와야되요? 십자가가 나와야 되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에 의하면 다른 복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부활이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복음이예요. 부활나오면 안되요. 부활은 소유의 유혹거리예요. 부활의 새생명이 내가 갖고 싶은 유혹거리가 되는데 십자가는 소유대상이 안됩니다. 십자가는 죽임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끝나면 자기가 자살행위인데 어떻게 그걸 소유하겠어요. 폭탄 껴안고 죽을래? 하면 어떻게 내것이 되겠습니까? 이미 폭탄 터지고 난 뒤에 내것이라는 것은 다 찟어지고 난 상태인데. 십자가 폭탄이지 않습니까? 폭탄이지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끝에 부분에 이렇게 했어요. 성도는 폭탄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라 했지요. 폭탄. 그것도 원격조종으로.


뭐 IS? 여성대원 같애. 폭탄을 감고 다니는거예요. 십자가를 한다는 것은 사도바울은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죽었다고 했어요. 나는 십자가에서 세상보기에 죽었고 세상은 나한테 죽었다. 죽었다만 보이지? 하지만 나는 살았어. 너희들이 죽은거야. 내가 살면 너희는 죽, 너희들이 살았으면 나는 죽은것이고.


세상이 살아있으면 예수님은 죽은 자이고요.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세상은 불심판 받기위해서 죽어있는 거예요. 죽고 살아있음이 서로 있는 위치에 따라서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서로 마주치고 있는것입니다.


우리가 싸울까요? 싸울필요 없어요. 고난 받으면 되요. 고생말고. 고생말고 고난받으면 되요. 너는 무슨 돈이 많아서 골프치느냐? 나 골프쳐~ 주께서 치라해서 쳐 왜?! 돈없으면 치지 말고. 그런 당당함이 있어야 될게 아닙니까.


왜 내가 니 기준에 왜 맞추는데?! 너는 너 개체 따로이고, 나는 나 개체 따로인거예요. 속성은 동일해요. 속성에 뭐 나온다? 주님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다. 나 죄인들하고 이거 하라고 했고 너는 그런 식으로 죄인들하고 하라고 한거예요.


참 이런 이야기가 저는 참 편하게 이야기 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이야기 듣고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뭐 당신이 집 없는 서러움을 알아? 당신은 아내가 살아있으니 아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홀아비 신세를 알아? 되도 않는 자기의 뭐 너는 세월호에 아이 빠져봤어? 이런거 있잖아요.

그것이 아까 이야기한 1번 2번 3번입니다. 너는 힘 빠져봤어? 니 뜻이 관철 안되본 적이 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을 동정하지 마세요. 그걸 지난 시간에 했지요. 지난 주일 낮 설교에 남한테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어요. 저의 깨달음입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누구한테도 미안해 하지 마세요. 주님한테도 미안해 하지 마세요. 미안해 한다는 말은 그것 빼놓고 다른 것은 잘났다가 되는데 인간은 잘난게 없기 때문에 미안합니다 한다고 해서 잘난인간으로 달리 봐주는거 아니예요.


미안하다 소리해도 못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못난놈~’ 있잖아요. 남한테 미안해 하지 말고 사세요. 부모 엄마가 됬으면 자식한테 미안해하지 마세요. 괜히 뭐 감정 이입해가지고 자식이 말 들을까 싶어서 ‘나는 너 때문에 못산다. 너 공부 못해서 엄마 죽을께.’ 이렇게 연기하지 마세요. 죽지도 않으면서.


그러면서 놀러갈거 다 스페인 놀러가고 그러면서. 자기 오페라 볼거 오페라 다 보고. 그럼 뭘 미안해? 주께서 꽂아 놓은 개체인데 왜 남들한테 미안해요? 얼마나 우리가 얽혀있어요. 얽혀 있는 이 대목은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화분과 화초의 차이.


화분은 이거거든요. 이거 화분이잖아요. 화초는 여기에 꽂혀있지요. 처음에는 화분에다가 화초 흙덩어리에 꽂습니다. 처음에 있을때는 잘 뽑혀요. 처음에 이거 꽂아놓은지 한 5분있어도 다시 분리하면 분리되지요. 만약에 한 3년 있었다. 분리해 보세요. 분리됩니까?


이놈의 화초가 화분에 미련이 있어가지고 이거 뭐 문어발처럼 딱 붙어 있어요. 얽히고 설키고. 얽히고 설킨. 그러면 엄마가 맨날 한다는 소리가 우리 엄마 말고요. 엄마가 한다는 소리가 ‘내가 너만 아니면 니 아버지랑 벌써 헤어졌다.’ 너만 아니면 니 아버지랑 벌써 헤어졌다는 거예요. 너 결혼식 때 손잡고 갈 사람이 필요해가지고 니 아버지랑 안 헤어졌다는 겁니다.


아 참 남탓할거 없어요. 본인이 지금 화분에 완전히 잡혀있는겁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은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한번 정해볼까요? 한 자 쏙! 또는 한자 무. 무시 뽑히듯이 무 뽑듯이 쏙~ 하게 되면은 뭐가 나오겠어요.


정이라는 것, 인연이라는 것, 얽히고 설킨 모든 관계되는 것, 미련, 아쉬운 것, 회한, 후회스러운 것, 아까 이야기한 미안스러운 것, 또는 나한테 억울한 것, 이런 것 화분에 다 그냥 두고 썩은 몸만 달랑 쑥 무 뽑듯이 뽑아서 데려갑니다.

탕자입니다. 잃어버린 말썽꾸러기예요. 우리는 양 같아서 어디로 갈 줄도 몰라 제 갈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일부러 찾아와가지고 피  묻은 손으로 찾아와가지고 무 뽑듯이 쏙 가져가면서 미련 뚝! 정도 뚝! 모든 얽히고 설킨 사랑이니 미움이니 그거 다 뚝!


너의 행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 피로 우리를  쑥 뽑아 냅니다. 피 묻은 손으로. 그리고 구원해주고 다시 그 화분에다가 꽂아버리면 이제는 자유를 느낍니다.


‘아~ 내가 이런 것 때문에 이런 자식 때문에 내가 주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했었구나.’ 하고 마치 다 그 동네를 떠나고 난 뒤에 이미 성공 크게 출세 해가지고 자가용 벤츠타고 와가지고 다시한번 자기 옛날 골목을 한번 여유만만하게 자랑스러워하며 돌 듯이, 내가 여기서 코 찔찔 흘리면서 놀던 여기 그것도 차에서 내리지 않고 창문 삑 내려가지고 찔찔 거리며 놀던 것. ‘아이고 오랜만이야 친구야~’ 내리지도 않고 손만 이렇게 흔들면서 동창생 만나면서.


소위 여유, 가진자의 여유라고 하지요. 구원받은 자의 여유 좀 누리시면 안됩니까? 이렇게 누리라고 주신 십자가 피인데 그 귀한 취지를 우리가 왜 그것을 외면해버립니까?


그것도 모르고 그저 자식들 칠성신에게 비는걸 가지고 교회와서 그놈의 자식들 잘되라고 빌고, 그놈의 자식한테 얽혀있고, 뭐 자기의 체면과 위신과 명예에 얽히고 설켜가지고 주여 이번일 들통나면 나는 완전히 꼴아박습니다. 주여 어떻게 되고 어떻게 되고 나는 개망신 당합니다. 주여 그저 비는것도 옛날에는 이렇게 빌었잖아요. 이렇게 빌면 미신이고 이렇게 빌면 기독교입니까?


그저 사업잘되게 해주시고, 우리 큰 아들 사업 잘되게 해주시고, 승진되게 해주시고, 그저 막내딸 35인데 시집가게 해주시고, 우리 큰 딸은 이혼했는데 재혼하게 해주시고, 돈 많은 남자하고 만나가지고. 맨날 그 놈의 화분에서 언제 뽑힐건데 화분에서. 고난받으라고 준 열매가 고난 안받고 고생만 마음고생만 많이 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고난의 원천입니다. 고난의 원천 예수님이거든요. 순교도 예수님이 원천입니다. 예수님 어떠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정말 구애받지 않고 살았지요. 전혀 구애 받지 않았어요.


자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이제 긴긴 시간 수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한테 답변 형식으로 제가 한번 물어볼께요. 제가 답변을 해볼께요. 예수를 믿으면 + 그 다음에 어떤 생활해야됩니까? 라는 질문.
예수를 믿으면, 방금한 거 다 우리는 열매가 순교다 다 했다. 그것 다 믿는다 칩시다 믿는다 치고 강의 내용 다 믿는다 칩시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생활해야 됩니까? 라는 질문을 할 때 여기서 이 질문에 답변에 대해서 가로막는 그 펜스가 있어요. 그 펜스 어디서 나오냐 하면은 우리의 옛 사람 아까 1번 2번 3번 거기서 나와요.


‘예수믿으니까 바른 생활 해야되겠지.’ 라는 것이 하나의 펜스, 막아버려요. 그 막아버리는게 뭐냐하면은 내가 육으로 알던 그것이 주께서 하신 일에다가 첨가, 막 뿌리는 거 있잖아요. 막 뿌리는 거. MSG 이걸 막 뿌리는 거예요.


백종원 셰프가 깨끗하게 해놨는데 거기다가 후추 막 치는 거예요. 주님의 피 에다가 내가 옛날 알았던 그 경건생활에다가 이게 막 섞으면 안되는 것을 섞어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믿는 삶은 어떤 삶이냐 하면은 예수님이 지시하는 삶이거든요.


예수 믿는다하고 혼자 따로 두지를 않아요. 너희를 고아같이 두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고아시절이 그리워. 내 맘대로 하던 고아시절이 그렇게 그리워요. 누구한테 간섭받는게 싫어요. 결정을 해도 내가 결정을 해왔고 줄 곧, 관리를 내 관리를 내가 해왔어. 그런데 내 관리를 내가 할 때 반드시 의식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남들은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가 그것이 하나의 내 삶의 기준이 되어서, 남들이 나를 좋아하는 쪽으로 내가 움직여야지 라는 옛 생활을 하나의 인공감미료가 되어가지고 주님의 피 에다가 쳐버리니까 주님의 증인되야 될 사람이 누구의 증인이 되느냐 하면은 ‘나 예수 믿고 이제 바른생활 한다.’ 자기 자랑거리 자기가 자기 자랑하는 그런 생활이 되어버렸어요.


참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오늘 본문이 의하면 짤려버립니다. 그런 열매를 주께서 인정한 적이 없어요 그런 열매를. 더 보태야 열매되는 그런걸 한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는 ‘이런 무슨 불순물이 끼었네.’ 하고는 그걸 잘라버리죠.


그래서 이 본문은 무엇을 설명하는냐 하면은 자른다는 것이 핵심이 되요. 잘라버린다. 잘라버린다는 말은 처음에 한 말과 다르잖아요. 처음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 이렇게 할 때는 마치 자동적으로 주께서 열매 맺는걸로 했는데 자동적으로 열매 맺으면 뒤에 뭐가 빠져야되요?


자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왜? 100% 주의 일방적 솜씨라면 그것을 잘라 버리면 예수님이 자기 손목 자르게 되니까 이것은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가 되버린다고요. 그렇지요? 내게 속하지 아니하면 열매맺지 않는다고 해 놓고, 열매맺지 않으면 자른다는 말은 그런 말은 쓸데 없는 말 필요도 없는 말을 왜 첨가 했을까 하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이세상에서 예수님 도용하고, 가지 도용하고, 우리교회 만큼은 주님을 그렇게 우기면서 결국은 잘려나갈 위인들이 한 둘이 아니라 이말입니다. 한 둘이 아니다. 성령인정하고 복음인정해도 열매가 주님이 원하는 그 열매가 아니고, 이상한 열매를 맺는 것은 가차없이 다 잘라버려요.


그렇다면 여기서 내리는 결론은 뭐냐? 자르는 그 작업이 열매맺게 하는 주님의 그 작업속에 이미 거기에 같이 포함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잘라냄으로서 도드라지게 하는 작업으로 열매가 주어진다 이 말이예요. 자르는 작업을 통해서.


그러면 그 작업이 우리에게 왔을 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도 육이 있으니까 죽을 때 까지 육이 있으니까 맨날 우리가 생각하는 열매는 엉터리 열매예요. 그런데 고맙게도 성령께서 날마다 죽이고 그리스도만 드러나게 하셔버려요. 자르는 작업을 우리 안에도 고맙게 해주시니까 우리는 뭐냐? 주님이 일하시는 작업장으로서의 하나의 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 한번 열매이니까 완벽해.’ 이거 가짜입니다. ‘나 날마다 주님한테 당해.’ 이거 진짜입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고 작용하지 아니하시면 우리 힘으로 구원을 유지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베드로가 자기 목숨 내어놓지요. 보통 장한 기부가 아니지요. 주께서는 너 지금 무슨 짓 하고있냐. 지금 전혀 내 말 못 알아 듣는 거예요. 우리 목숨 바치지 마세요. 절대로 목숨 바치지 마시고 순교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은 열매인데, 순교 목숨 안바치고 순교하는 방법은 핫도그 사먹는 것, 먹고 재미난 영화 보시고, 놀러 다닐거 다니시고 그러면서 누가 하셨다? 주께서 하게 하셨다. 그래서 공식이 있어요. 나 이 영화 안볼라고 했는데 보게 하셨다. 나 이거 안할려고 했는데 가게 하셨다. 나 미국 안갈려고 했는데 가게 하셨다.


항상 주체를 주님쪽에 둬야되요. 주께서 굉장히 기뻐하시고 대견하게 보십니다. 왜냐하면 열매는 개체 + 속성이기 때문에. 나를 죽이는 것, 골프 치면서 나를 죽이는 것, 주께서 하게 하셨다. 이것이 순교라는겁니다. 내가 죽는 것이 순교입니다. 아 오늘 제목 헛갈린다. 순교로 할까 열매로 할까.


나를 죽이는 게 나를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죽여서 남들 눈에 남들 눈, 그 귀 신경쓰지 말고 배짱 편하게 살아라. 그것을 막국수에서 나온 막 살아라. 막 살아라는 비밀이 풀렸네요.


배짱 편하게 살고 남 눈치 보지 말고 살고 이건 뭐냐?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했다면 주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사는 것. 이것이 그 열매고 그 열매는 주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순교당한 것처럼 하루하루가 순교의 삶입니다. 그것이 성도란 이름의 열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열매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라고 주님한테 늘 되묻는 자세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오늘도 이렇게 살게 하셨잖아요.’ 물을 수 있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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