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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8 00:23:03 조회 : 957         
자존적과 의존적 17101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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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221.♡.139.88) 17-10-21 09:26 
가락-요한복음 15장 9절(자존적과 의존적)171017a-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5장, 요한 복음 15장에 보면 7절에,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그렇게 되있죠.


여기서 과실이라 하는 것은 뭐 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사람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제주도 감귤 이야기 하지 않죠. 사람 두고 이야기 하는데, 그러면 보통 이 사람들은 독자적입니다. 독자적.


혼자서 시작해서 혼자로 죽을 때 까지 혼자 생각, 혼자 이야기하고 있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기 과실 또는 사람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냐 하면은 의존적입니다. 의존적.


의존적이라는 말을 이렇게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의지한다로 이것은 잘못된 의지한다는것은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니가 애굽의 말을 의지하지말고 여호와 도움을 구하라 할 때 그것은 구약적 용어이고, 신약에서는 뭐냐하면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의존적이예요.


의존적과 의지하다의 특징은 어떤 큰 차이가 있는데요. 의존적이라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어떤 원천이 있고 원천에서, 예 보험하는 사람은 압니다. 파생, 파생상품 있죠? 파생상품. 파생된거예요.


본래에서 나오는 것은 의존적이예요. 이것은 의지하나 안하나 계속해서 의존적.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나 주님 의지할래와 관계없이 나 이제부터 주님께 순종할래와 전혀 상관없이 이제부터 주님 말씀대로 살래 자기 결심 전혀 없이 어떤 순간에도 의존적이예요.


그런데 의지라 하는 것은 일단 본인이 독자적입니다. 본인이 자기가 독립적이예요. 독립적이고 아쉬울 때 하나님 찾고 어려울 때 주님 찾고 괴로울 때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줌 을 믿고 하나님께서 도와줌을 믿고 늘 기대는 것 아니고 필요로 할 때 마다 필요할 때 마다 돈 구하면서 하나님께 쪼로록 쫓아 가는 것, 이것 의지거든요.


자, 둘 중에 신약에 와서 둘 중에 어느 사람이 의지하는 쪽이 열매겠습니까? 의존적이 열매겠어요? 의존적 열매이죠. 의존적이 열매인데 이 의존적인 사람은 뭐를 안하냐하면 이것을 안해요. 이 밑에 의지하지를 않습니다. 이게 이제 어렵죠.


사람이 뭔가 의지한다는 말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의지한다는 말입니까?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의지하잖아요. 구원은 이미 그 자체가 의존적이 아니고 자존적이고, 자존적이 적당하네요. 스스로 자존적이예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예요.


아쉬울 때 교회가서 기도하고 아쉬울 때 하나님 찾겠다는 거예요. 그거 열매아닙니다. 그래서 이건 오늘 제가 강의 하면서 이걸 이렇게 할께요. 이 인간과 이 의존적 인간과 이쪽 인간을 달리보겠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다른인간 또는 다른인간형이 갑니다. 현재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의존적이 아니고 독립적이예요. 이건 누구한테 이런 성질을 물려받았냐하면은 바로 사탄이 예수님께 대들 때 대든 이유가 있어요. 반항하는 이유가 선악을 아니까 나도 하나님 대우해 달라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해서.


선악을 아니까 대우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쪽에서는 ‘선악을 안다는 니가 선악을 아는 그 결과가 뭐냐? 니가 선악을 알기 때문에 너는 하나님처럼 될수 없어. 너는 저주 받아야되.’ 라는 것이 창세전에 이미 내린 추방명령이였습니다. 사단에게. 그것 때문에 전쟁했거든요.


그래서 마귀와 속성 마음가짐을 그대로 물려받은 우리 모든 인간들은 선악을 안다는 그 조건 때문에 아담도 그 좋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야되는 겁니다. 선악을 알았기 때문에.


선악을 안다는 것이 그냥 지식이 아니고 독자적인 것, 여기 독보적이고 자존적인, 자존적으로 선악을 하나님처럼 닮아서 하나님처럼 되어가지고 그래서 우리는 선악을 아는 순간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성품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자존적이라고 하지요. 자존적.


나는 나 스스로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래서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들이 뭐 교회가 가나 안가나 모든 인간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22개월 된 그 갓난아이까지 자존적이예요.


우리집에 자존적인 애 하나 있습니다. 굉장히 자존적이예요. 모든 움직임이 가르쳐주지도 않는데 자존적입니다. 그러면 제가 자존적이라는 어려운 말 쓰면 목사님 자존적 아닌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겠지요? 그게 신약에 나옵니다. 백부장.
이거는 중대장임에도 불구하고 이 바보도 아니고 왜 자기가 결정 못내리고 그냥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자, 자존적입니까? 의존적입니까? 의존적이잖아요. 까라면 까겠습니다. 그거거든요. 까라면 까겠습니다.


또 있어요. 제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 딱 데려옵니다. 어린아이는 자존적이 아니고 그리고 의지하지도 않아요. 어린아이가 어릴 때 뭐 부모 그런거 없어요.


그냥 어린아이 자체가 파생상품 이예요. 파생물 이예요 파생물. 아버지 엄마 있음에 저절로 나온게 뭐냐? 어린아이 거든요. 그래서 이거는 의존적이란 말이죠. 그래서 하늘나라는 너희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다른말로 니가 의존적이 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못 간다.


그리고 백부장 한테는 이 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 하늘나라는 본 자손들은 다 쫓겨나가고 이 백부장이 천국을 차지할 것이다. 이런 구절에 근거해서 저는 이야기 합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은 우리가 아는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인간이여야 한다는거예요. 다른인간.


이게 다른인간 되기가 말이 쉽지요. 벌써 인간 됬는데 무슨 또 다른 다른 인간이 됩니까. 벌써 인간됬는데. 여기서 뭐 스티커 붙여서 꾸밀까요? 뭐 코스프레 해가지고 이렇게 코스프레 해서 일본 아가씨들 인형처럼 이렇게 꾸미면 그러면 천국 넣어줍니까?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한데요, 형식에 불과한데 종교란게 뭡니까? 형식아닙니까. 속에는 자존적이면서도 겉으로는 주여!주여 라고 하면 그게 무슨 소용있어? 주여, 주여.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그러면 이 의존적의 모델이 있어야하는데 모델 뭐 어린아이, 또는 백부장 이야기 했단말이예요.


그러나 그것이 최종모델이 아니예요. 백부장을 백부장 되게하고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부모밑에 의존적이 되는 그 모델이 되는 것은 뭐냐하면 아버지 앞에서 가장 자존적인 사람이 누구였던가요? 아버지 앞에서. 아니아니 아버지 앞에서 가장 의존적인 분이 누구였던가요? 바로 예수님이죠.


다른인간형 딴게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겁니다. 기존의 아담으로 시작하는 것 그것, 그걸 뭐로 바꾸냐하면 예수님부터 시작하는 인간으로 완전히 이걸 바꿔치기하는 작업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필요한 모든 능력은 우리는 성도는 의존적이기 때문에 포도나무로부터 모든 능력이 거기서 제공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아까 읽었던 말씀이예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너희안에 뭐가 거하고? 너희안에 뭐가 거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 말씀이죠.


그 말씀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그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너희한테 주입이 되게 되면 주입이 되면 우리는 튜브예요. 튜브에 주의 말씀이 바람처럼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천국에 가는 다른사람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다른사람이.


자, 오늘 여러분 한번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 인간이 가는게 아니고, 이 인간이 천국가는게 아니고 완전히 사람이 달라져요. 다른데 그 다른 인간은 세상에서 모델 찾지 마시고 어떤 훌륭한 목사 찾지 마시고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궁극적 모델이예요. 예수님이 모델.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이지요. 예수님 봤습니까? 안보이죠. 그럼 안보이면 닮으라하면 코스프레 할려면 보여야 코스프레 하는데 안보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아요?


예수님께서 나를 보고 형식으로 본 따 할 것이 아니고 내말이 내 말이 너희에게 거하면, 니가 바로 자존적 존재에서 뭐가된다? 의존적 존재가 다른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주의 말씀이 내 안에 있습니까 없습니까를 어떻게 판정 내립니까? 이건 방금 이야기 했잖아요. 자존적 인간에서 뭐로 바뀌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의존적 인간으로 바뀌었으면 누가 물어도 그 사람속에, 그 사람속에 예수님의 말씀이 주도권을 쥐고 그 사람안에 들어온겁니다.


풍선이 쭈글쭈글하다. 풍선이 쭈글쭈글하다. 그럼 뭐가 빠진거예요? 바람 빠진 거예요. 그럼 풍선에다가 바람을 넣으면 탱탱하지요. 그런다고 풍선색깔이 노란색깔이 파란색깔로 변하고 그런거 없지요?


동일한 노란색깔인데 쭈글쭈글하다가 그 노랑이 주의 말씀 들어가면 탱탱하지요? 예? 탱탱하고 쌩쌩하잖아요. 그런데 그 풍선이 통통통통 튄다면 그것은 풍선 색깔 때문에 튀는 겁니까? 그안에 들어있는 말씀 때문에 튀는 거예요? 말씀 때문에 튀지요.


그래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떡을 많이 먹으면 통통 튑니까? 배불러 가지고 푹 퍼지지요. 다이어트 많이하고 헬스 많이 다니면 통통 튀긴 튀는데 그거 몇 분 안가거든요.


이렇게 이렇게 통통 하긴 하는데 나중에 헥헥 거린다니까요. 몸매 뽑는다고 라인댄스 같은 그런거 있잖아요. 팝송 틀어놓고 막 같이하고 하게되면 하는데, 나중에 집에가 가지고 헥헥. 집에 가가지고  순대 먹고 족발먹고 다 그런다고요.


옆에서 말합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활기가 넙칩니까?’ ‘주의 말씀이 나로 그렇게 만듭니다. 주의 말씀이. 주의 말씀이.’ 그러면 ‘당신이 한 것은 뭐 있어요?’ ‘나는 의존적이예요. 제가 한거 없어요. 저는 풍선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고무로 만든 풍선 껍데기에 불과하고 주께서 성령으로 계속 말씀을 주니 말씀이 나를 통통 튀게 합니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번에 주일 낮에 그런이야기 했거든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주제가 뭐냐하면은 선과악은 아버지와 아들이 새로 정한다. 그거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새로 정한다. 이번 낮에 주제가 하도 많아가지고 모르겠습니다. 장황한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이 모든 선악을 새로 정한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인 보기에 예수님 하는 모든 꼴이 그들 보기에 뭐가 됩니까? 전부 다 죄가 되는 거예요. 그들 눈에. 왜? 주님이 새로 정했으니까. 맞지를 않는 거예요.


그들이 금식할 때 예수님께서는 술 드시고 계시고. 그러니 다른사람 보기에 저건 율법의 위반자예요. 그러면 율법의 위반자의 끝은 뭐냐하면 바로 나무에 달려 저주받는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저주 받으니까 사람들은 옳다쿠나 역시 우리 결정은 옳았어.


왜? 신명기 말씀대로 저 가짜 메시아가 자꾸 진짜라고 하다가 결국 희한하게도 하나님께서  나무에 죽게했으니까 진짜 우리가 진짜 우리가, 진짜 주님께서 율법대로 사는 사람을 율법을 지킬려는 인간들이 가짜라고 이야기해서 그래서 틀어진 것이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죠.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 말씀의 완성으로 우리안에 탱탱하게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그 꼴 예수님 꼴 그 꼴 나는 거예요. 우리는 뭘 해도 돌아서면 다 하나님의 의인데 저 인간들은 전부 다 윤리 도덕 보면서 저것도 죄고 저것도 죄고 전부 죄라는 거예요.


우리는 너무 심히 억울해. 너무 억울한 거예요. 주께서 가라해서 갔는데 이것은 이래서 어긋나고 이것은 교회법에 어긋나고 이것은 인간 양심법에 어긋나고 전부 이렇게 들이대면서 하는거예요. 그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살짝 제가 약간 겁이나는 것은 이제부터 복잡하거든요. 아까 우리 어떤 분이 이야기 했듯이 이 이야기부터 한번 해 볼께요. 소외라는 말이 있어요. 소외라는 말이 있는데 좀 유식한 사람치고 뭐 이 이야기를 막 해요.


자, 소외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제가 설명해드릴께요. 소외라는 것은 원래 있던 집단에서 강제로 밀려서 그 원래있던 그 집단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소외라고 이야기 합니다. 소외. 강제로 배척당한 것을 소외라고 합니다.


쉬운예를 들면 알수 있어요. 나는 아버지로서 소외당했다. 느낌아시죠? 느낌 확 들어오죠? 아버지로 소외됬다. 내가 원래 있는 자리는 이 가정의 가장의 자리인데, 나 빼놓고 모든 식구가 나를 무시해가지고 그것도 밀어서 난 아버지 값도 못하고 뭐 잘못한게 있어? 아버지 값도 못하고 이렇게 했을 때 그걸 아버지로서 소외 당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제 소외라는 의미를 아시겠지요? 이게 뭐냐하면은 여기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한다는 말은요. 초반에 굉장히 중요한 말 나왔어요. 초반에. 이거 하고 맘대로 주무셔도 괜찮아요. 제일 중요한 거니까.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가는 인간을 새로운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께서 소외작업을 하세요. 소외작업을. 창세전에 아버지 아들하고 되어있는 야곱이죠.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하기로 한 그 인간 아니면 내가 너를 소외시킨다는 겁니다. 소외라는 말은 또 이야기 할께요.


강제로 밀어내는거예요. 이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전도개념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교회 전도면 ‘와주세요~’ 하고 구걸을 하잖아요 구걸. ‘와주세요~’ 그냥 봉투 돈 주고 맛있는 거 이렇게 주면서 그저 와주세요 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소외시킨다고요. ‘너 같은 인간 안 넣어죠.’ 라고 그걸 소외라고 했지요? 오늘 제목은 소외입니다. 해봐야 후보감이지만. ‘너같은 인간은 절대로 천국에 안 넣어줘!’ 밀어내는 거예요. ‘너는 아니야.’


이걸 아까 동영상 할 때는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은혜의 순환이라고 했지요. 순환인데 사실은 은혜의 순회 ‘맞는가 보자. 안 맞다. 딴 데 맞는가 보자. 안 맞다.’ 이렇게.
은혜가 와가지고 은혜에 합당한 사람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는겁니다.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가 아니면 전부 다 하나님 쪽에서 소외시킵니다. 그러면 뭐 어렵습니까? 쉬운데요. 그게 쉬운게 아니고 왜 어려운가 하면은 세상에서는요 천국 갈 사람을 세상에서 소외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소외가 두 가지기 때문에 어려운거예요. 한 쪽은 밀자는 밀고 땡길자를 땡기는 작업을 하고 하나님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그런데 놀랍게도 세상에서도 땡길자는 땡기고 그러니까 지옥갈 사람이죠. 세상에서도 땡길자는 땡기고 ‘너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해.’ 예수님처럼 예수님한테 했던 것처럼 밀자는 밀어주는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마귀세상 이것이 주님의 전도의 협조자가 되는 겁니다. 천국에 가야 될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은 세상이 가만두지 않고 이거 왕따 시킵니다. ‘이 세상 니 자리 아니잖아. 나는 너 하고 안놀아. 너 저기가서 놀아.’ 라고 강제로 밀어주니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악귀가 이야기했죠.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요. 악마가 얼마나 고마워요. 보세요. 사도바울로 하여금 구원 못 받게 하는게 ‘너는 이 바닥에서 놀 사람 아니야.’ 라고 이미 악막 알아준다고요. 악마가.


그런데 그 중간에 끼어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구태여 구원받고자 안해도 저쪽에서 땡기고 이쪽에서 밀고 자동이예요 자동. 그런데 그 소외라는 말 정의를 내리면서 강제로 그 다음에 뭐라합니까? 강제로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강제로 뭐한다? 밀어내죠. 소외 밀어내죠. 밀어낸다는 말을 다른 말로 뭐라하면 힘이예요 힘. 힘이죠.


따라서 구원된 사람의 특징은 뭐냐하면은 세상이 나를 떠미는 힘과 주님이 나를 땡기는 그힘, 그 힘을 느끼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본인이 구원 받으려고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애써가지고 주여! 하고 기도하고 철야하는게 이 힘이 아니고 막 살아도 막 살아도 세상 편에서 안 넣어줘요. 안 넣어줘요.


‘목사님은 우리교회에서 필요 없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제발 비나이다 나가주세요.’ ‘아휴 봉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사양하겠습니다.’ ‘아이고 집사님은 우리교회에서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옛날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미는 것처럼 똑같은 힘이 작용하는 것 성령의 힘이죠.


똑같은 힘 또는 성령의 힘 또는 말씀의 힘. 그게 작용합니다. ‘아니 이리보나 저리보나 아무리 봐도 당신은 이 바닥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 악마가 이 악귀가 귀신이 그걸 도사도 아니고 완전 도사예요. 그걸 눈치챈다니까요.


이건 뭐 주님께서 허락하신 마귀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시니까 우리는 뭐 할게 없네요. 힘의 그물망이니까. 힘의 촘촘한 힘의 그물망에서 거미줄 망에서 그 벌레는 출렁이는 그 거미줄에 의해서 조금씩 위치가 바뀌면서 거미 입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줄이 거미줄이 쳐 놓은 거미줄에 탄성에 의해서 조금씩 조금씩 어느새 거미 입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세상에 십자가 지고 싶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깔아놓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마귀와 성령의 도움으로서 이게 출렁이다 보니까 조금씩 조금씩 십자가 입속으로 십자가 입속으로 자기 부인하는 부인안하고 싶어도 부인해야되는 경우가 자꾸 발생되면서 어느새 이 만큼 끌려오고 어느새 이 만큼 끌려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어떤 때는 천국 안갈라고 고집 부리다가 환란과 핍박 곤고 막 찾아 와가지고 ‘화딱지나네요 주님 뭐합니까!! 나에게 이렇게 합니까!!!’ 그러면 그러니까 지금 환란은 장차 영광과 족히 비교될수 없잖아요. 로마서 8장 18절 말씀이거든요.


‘족히 비교될수 없구나. 아하 내가 깜빡깜빡 잊었구나.’ 하면서 보니까 어느새 이 만큼 십자가가 더 크게 보이는 왔고, 크게 왔다고 또 까불다가 또 벌써 세상이 또 십자가 보다 더 크게 보이고. 또 세상이 또 돈만 확 빼먹고 또 밀어내네. 교회 한 30년 다니니까 30년 다니고 계산해보니까 십일조 복리로 계산해보니까 한 5~6천만원 날라갔거든요.


세상교회 돈은 다 빼먹고 나가라 하는거예요. 돈 다 빼먹고 나가라고. 주님의 기적이라는 것은요 주님의 기적은 예수님이 겪었던 환란을 기적이라고 해요. 세상에서 강제로 뜯어내는 그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하고 그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 스카치 테이프 뜯어낼 때 파스 이거 털 난 허벅지하고 뜯어낼 때 아이고 생각만해도~~막 털 뽑히잖아요. 지난시간에 했잖아요. 화분하고 화초이야기 했죠. 정이 들어가지고. 이 세상에 정이 팍 들어가지고 그걸 뗄려하니까 온 피부가 떼이듯이 떼기 싫잖아요. 두두두둑 두두두둑. 떼니까 털도 같이 뽑히고.


그래도 그 힘이 내 힘이 아니고 주님의 힘으로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말씀이 들어갔기 때문에 말씀대로 가게합니다. 처나 자식을 사랑하지 않도록 해주시고,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해주시고 그건 내가 지키는게 아니예요.
그의 나라와 의를 사모하도록 만드시고 범사에 감사하도록 해주시고 다른사람은 말합니다. ‘요즘 좀 보니까 당신 좀 경건해졌네.’ 아니요 경건한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이끄신거예요. 주께서 강제로.


자 그러면 그 다음 문제지요. 그러면 이렇게 제가 열매라 하는 것은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하늘나라에 가는 전혀 다른 사람 전혀 다른. 지금 이 인간 말고 전혀 다른 인간. 그 다른 인간을 뭐라고 하느냐. 의존적 인간.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될 것은 의존적 인간만 되면 되겠네 이렇게 끝나면 안되요. 왜냐하면 우리의 출발선이 뭐냐하면 자존적 인간이거든요. 자존적 인간이기 때문에 ‘주여 의존적 인간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게되면 이건 의존이 아니고 의지가 된다니까요.


나 좋아라고 주앞에 의지하는 하나의 꼼수로 쓰는게되요. 가만히 있으면서 감사하면 되는데 괜히 설친만큼 설친만큼 사람은 또 보상하게 되어있어요. 보상을 원하는 자체가 의존적이 아니고 뭐다? 또 독립적이고 자존적이예요.


‘나 이만큼 기도했으니까 이만큼 얻었다.’ 또 이렇게 된다고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이 자존적 인간 스스로 나는 의존이 아니고 스스로 나는 이렇게 살아간다 하고 제가 이렇게 축약해서 말했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자존적 인간형이 어떤 식으로 이 세상을 운영하고 펼치고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되요.


분명히 알아야 우리가 왜 자기 힘으로 자존적에서 의존적으로 바꿀 수 없는가를 우리가 실감하게 되요. 그걸 실감해서 뭐할건데? 그걸 실감하게 되게되면 그 다음 9절 10절 11절이 비로서 이제 이해가 됩니다.


이걸 알아야 그 다음에 나오는 계명이 무슨 계명입니까? 사랑이라고 되어있지요. 여러분 사랑은 계명이 아닙니다.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행위 주체자가 있는 것이 계명이거든요.


그 법이 있다는 것은 법이 있다는 것은 법만 달랑있다는 것이 아니고 이 법을 지켜야 될 당사자가 있을 때 이게 계명이다 법이거든요. 그런데 사랑은 사랑은 완제품이예요.


새삼스럽게 만들어 가는게 아니고 그냥 받아챙기면 되는 겁니다. 사랑은 이루는게 아니고 받아챙기면 되는거예요. 어떤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 받아 챙기면 되요. ‘사랑하니까 나는 이 만큼 해줘야지.’ 이거는 받아챙기는 것이 아니고 거래고 흥정입니다.


그것은 남자의 사랑을 모독하는 거예요. 뭐 받아봐야 뭐...그런 사랑 받아봤습니까? 거저 주시는 사랑. 처음 결혼 하실 때 그렇게 사랑했습니까? 그저 뭘 해도 좋다 내가 다 해 줄게. 말씀만 보는게 아니고.


사랑은 계명이 아니예요. 누리면 되는 거예요. 뭐와 같으냐? 마치 풀장과 같아요 풀장과. 풀장에 빠져가지고 거기서 뭐 착한일 합니까? 그게 아니고 풀에 물이 있잖아요. 허우적 거리면서 허우적아니고 신나죠.


어푸어후 하면서 맘껏 헤엄 그 사랑이라는 헤엄을 치면 되는겁니다. 말해도 지금 뭐 전부 다 실감을 못하고 있는 느낌인데. 주님께서 사랑이라는 계명은 누리라는 겁니다. 내가 준 사랑안에서 누리라는 그걸 즐기라 이말입니다.


바케스 물 부었잖아요. 우리 죄 지은 것보다 더 뭐가 많으냐 주님의 의가 왕노릇 잖아요. 그 의를 즐기라 이말입니다. 의를 행하라가 아니라 의를 즐기는 거예요. 의를 내가 행해서 주님은 행했어요. 주님은 의를 행하고 주님이 행했던 의를 우리에게 바케스로 갖다 부어버린겁니다.


우리는 왠 떡이냐 하고 옷 흠뻑 젖으면서 흠뻑 젖으면서 그 상태가 바로 주님 보기에 ‘음, 이게 사랑이야.’ 그게 남편되신 예수님이 아내에게 주는 사랑이예요. 무슨 남편이 사랑하면서 아내에게 요구 사항이 있습니까.


그런 아내와 남편은 그런 혼인잔치는 하늘나라에 아내한테 요구하는 혼인잔치는 하늘나라 혼인잔치 아닙니다. 이미 율법으로 인간은 못 지키는 것을 버려야 하는데 거기에다 또 뭘 더 요구하겠어요.


그래서 이 사랑을 계명이라고 한 것은 뭐냐하면은 이 계명을 완성자가 ‘너희가 아니고 너희와 함께 있는 나다.’ 라는 것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계명이란 말 한겁니다. 무슨말이냐 하면은 사랑이라는 것이 왔을 때 마냥 거저주는 사랑이 아니고 누구하나 수고했다는 거예요.


그럼 누가 수고 했을까요? 예수님 본인이 수고 했잖아요. 공짜라고 해가지고 공짜좋네 이러면 안되요. 공짜로 얻었으면 ‘누가 수고했습니까? 이 사랑계명 누가 했습니까?’ ‘내가 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라고 사랑계명을 준거예요.
예수님 고난 덕분에 우리가 사랑을 받은거예요. 누려도 좀 고마운 줄 알고 누리라 이말입니다. 그 쪽에서 고마워 하라는게 계명은 아니예요. 누리기 때문에 고마움이 절로 나오는거죠. 안다고치고 넘어갑시다. 안다고치고 넘어갑시다.


사랑은 그냥 누리는 겁니다. 그걸 설명할려면 사랑은 계명이라고 했거든요. 왜 우리자신에게 사랑이라는 계명을 왜 맡기지 아니했는가. 약간 어렵더라도 그냥 밀고 나가겠습니다.


인간이 자존적이죠. 자존적입니다. 인간은 자존적이면서 자존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구심점이 누구다? 본인이 구심점, 또는 영어로 센터예요. 센터. 본인이 본부예요. 내가 본부예요. 제가 어제 부산강의 하면서 젤 첫 마디가 뭐냐하면은 부산강의 들은 분 계십니까? 부산강의 첫 얘기가 뭐냐하면은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취소하거나 무효화 시킬수 없다 했죠.


내가 여기 있는 걸 나 없다고 말이 안되잖아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취소 못 하듯이 이 시편에 있는 성경 말씀이 이 모든 성경 말씀을 주님께서 취소 안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두 개의 취소 안할것이 경쟁하고 있어요.


나는 내가 중요하고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천하가 없어도 나는 포기 못해요. 그런데 거기서 주님 뭐라고 합니까? 니가 뭐라해도 나는 내가 준 이 말씀을 천하 없어도 나는 포기 못한다. 그러니까 말씀이 포기 못할거냐? 아니면 내가 포기 당할거냐? 그 싸움이 이 현실을 이룬다 이말이죠.


그러면 주님도 한 고집하고 우리도 한 고집해요. 왜? 내가 중요하니까. 하지만 결국은 누가 이기게 되있어요? 너 죽여서라도 내 말씀 모든 인생은 풀이고 풀의 꽃같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뭐는 영원히 서리라? 영원히 줄 곧 지속되리라?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리라.


‘봤지?! 내 고집. 봤지?! 내 고집. 너 죽는 이유 알아? 나의 이 꺽을 수 없는 말씀의 고집 때문에 니가 말려들어서 니가 죄값으로 죽는거야. 그러니까 말씀이 더 쎄냐? 아니면 나는 나 밖에 모른다는 고집이 더 쎈가 한번 해봐?’ 이게 성경 내용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신자라할지라도 불신자들은 그런 말 들어있는 성경을 눌러버려요. ‘나 안들어. 나 안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이게 눌러버리면 뭐냐하면은 누구만 취소안되요? 나만 취소 안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지어 예수믿는 사람 마저도 성경 말씀 교회에서 복음 들으면 주님 고맙다 하지만 막상 예배당 문만 딱 열고 나와 버리면 ‘나는 내 고집 최소 못한다.’ 그 고집으로 살아요 평생동안 아니 평생아니고 그 다음 주일까지.


그 다음주 와가지고 또 복음 들으면 복음만 들은 사람 있는지 모르겠지만 복음 들으면 ‘주여 내가 죄인 맞군요. 주의 말씀이 나보다 우선인데 나는 내가 우선이라고 내가 또 착각했습니다. 나 같은 인간은 죽여도 할말 없습니다.’ 그거 한 예배시간 1시간동안 하는겁니다. 한시간 더주자. 한시간 십분 갑니다. 문 열고 나가 버스 탈 때 까지.


버스 타면 또 자기가 더 소중하고. 말씀은 별게 아닌게 되어버리죠. 그 이야기 했는데. 결국은 이것은 그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왜 주님께서는 이 계명을 이 사랑 계명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고 주님 홀로 이룩했는가.


그것은 천국을 아시는 모델이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모델이기 때문이예요. 다 이루었다는 우리가 하면 안되요. 예수님이 혼자 외칠 말씀이예요. 다 이루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 문제예요 왜 하필 왜 예수님만 그리해야되는가? 그걸 아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철저하게 아버지 의존족이예요.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이루려 함이 아니고 누구 뜻을 이루려 함이라? 아버지 뜻을 이루려 함이라.


물론 예수님만 그런 고백을 할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안되요. 왜? 우리는 의존적이 아니고 자존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자존적인 것이 왜 의존적으로 될 수 없는 이유가 자존적 안에 이 담겨 있어요. 이것은 아까 했지만 악마의 심보가 들어있어서 그렇다. 선악과 들어있어서 그렇다 이렇게 했는데.


자존적인 것이 살아가면서 자기 구심점인 이 내용은 알아요. 그런데 이 대자연, 이 자연은 누가 만든거예요? 하나님 만들었죠. 그러면 참새와 들풀은 누구 말 듣습니까? 인간 말 듣습니까? 하나님 말 듣습니까? 참새와 들풀은 자존적이예요? 의존적이예요? 의존적이죠.


그 마태복음 6장에 나오죠. 참새는 누가 키웁니까? 주님이 키우고 들풀도 주님이 키우지요. 솔로몬이 입은 그 멋진 그 화려한 옷 보다도 이 들풀 백합화가 더 아름답다 했잖아요. 철저하게 의존적이예요.


그러면 인간 빼 놓고 나머지는 의존적인데 인간조차 자존적이니까 인간들이 사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대자연은 주님 말씀 듣는데 인간만은 고집이 세서 마귀 고집이 있어가지고, 이유도 없이 무조건 나 중심이라는 거예요. 나 중심.


껄껄하잖아요. 사는게 힘들죠. 그래야 이게 교도소 왜 갑니까? 교도소 호텔입니까? 아니죠. 교도소는 힘들라고 벌 받으라고 가는 거예요. 벌 받으라고.


옛날 그 19세기 1800년 산업혁명때 영국에서 자본가들을 돈 많이 벌었는데, 노동자들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하루에 어린아이들도 하루에 14시간 일했거든요. 그 당시 얼마나 열악한 상태에서 거기에 농촌에 있는 사람이 도시에서 일했는가 하면은 너무 자는 곳이 좁아가지고 그 방에 가면 19세기 영국의 노동자의 방에 가면 마치 발레할 때 이렇게 손잡이 있잖아요. 발레할 때 연습할 때 그것처럼 그게 둘러 쳐 있어요.


그게 왜 있느냐하면은 잘데가 없어가지고 서서 자라고. 서서 재웠어요. 지금 노동자하고 차이가 많이 나죠. 왜 18세기 중반에 19세기 중반에 마르크스가 노동자 해방하라는 이유를 알겠지요? 사람 죽이는거예요. 완전 기계로 만들어 버렸어요. 무슨 이야기 하다 갑자기 그 쪽으로 갔지.


사는게 빡빡해요. 힘들어요. 사는게. 그래도 뭐 한 집이 한 3채 있고 부동산도 지 통장도 한  펀드에 한 5억 있으면 10억정도 있으면 안 났겠습니까? 하지만 인간은 자존적이기 때문에 그걸로 만족하지 않아요. 있는만큼 또 욕심을 내게되어 있어요.


뭐 다 없이 사니까 그런거 안느껴지시죠? 있는 만큼 ‘애걔 이게 뭐야.’ 이게 인간이예요. 키에르케르고라는 철학자가 신학자가 이런이야기를 했어요. 철학자인데 신학자도 되고.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왜 대중들이 연합하고 연대를 하는가? 성공한 자를 질투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성공한 자를 질투하기 때문에 대중들은 연대를 이루고 성공한 자의 질투를 매개로 해서 촛불집회 하는 겁니다. 질투를. 그들중에 또 누가 하나 나오잖아요. 그러면 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게 대중들이예요.


누구하나 또 잘되잖아요. 또 흔들어 버립니다. 그 흔드는 것을 업으로 삼아서 돈 버는 사람을 가지고 세자로 연예인 이라고 합니다. 연예인. 감나무 밑에 감 올려놓고 다 흔들어 버려요. 다 흔들어 버려요.


인간은 이처럼 아무리 많이 가져도 이 대자연은 절대로 인간 편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존적이고 대자연은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이 괴로움, 우발성 그리고 대자연에 있는 화산이라던지 지진이라던지 가뭄, 여기에 그들은 나름대로 대처하기 위해서 그들은 뭘하냐하면은 신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신은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거예요. 진짜 신은 실제 신은 없어요. 없어요. 인간들 자존적 갖고 있는 사고 방식에는 진짜 신은 없어요. 인간들이 납득되는 신들만 있어요. 모든 종교가 천개 만개라도 납득이 되는 신들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신을 만들 때 그 모델을 누구 삼느냐 하면은 인간들이 갖고 있던 영웅, 그 영웅을 모델로 뭘 만드냐하면 신을 만들어요. 그래야 그 신과 영웅처럼 못 된 자기 사이에 불연속성이 안되고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노력만하면 언젠가는 저렇게 된다. 그래서 뭐냐하면 그래야 마귀가 이야기 해준 본성이 뭐냐? 나도 뭐처럼 된다? 나도 신 처럼 된다는 말은 이게 끊어지면 안되요. 단절되면 안되요.


연결되기 때문에 노력만 하고 경건과 거룩에다 경건에다 계속 거룩 거룩 거룩 하게 되면 언젠가는 사부작 사부작 걸어가게 되면 여기에 도달되는 목표를 거는 것. 이게 바로 인간 모두에게 납득이 되는 신이예요.


베드로 있잖아요.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바로 이 예수예요. 베드로 하고 살아있는 베드로하고 살아있는 예수님하고 서로 근접하니까 언젠가는 같이 연결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고 부활한다고 하니까 죽는 이야기를 하니까 베드로가 졸지에 뭐로 변했다고 했습니까? 주일 낮에. 뭐로 변했어요? 그 베드로가 뭘로 변했습니까? 사탄으로 변했어요.


죽음은 헤어짐이거든요. 본인은 살아 있는데 인간에게 죽음은 뭡니까? 영원한 영영한 이별이잖아요. 죽는 순간 갈라짐이고 헤어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닭 쫓던 뭐가 되요? 개 꼴이 되요. 개 꼴. 닭 쫓던 개 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있는 한 우리 헤어지지 않도록 제가 조치하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 ‘사탄아 물러가라.’ 그게 바로 사탄이 만든 하나님관을 베드로가 안고 살았던 거예요.
그리고 결국은 자기 속성대로 화롯불에 불 쬐고 있을때에 예수님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이게 바로 인간의 본성 자존적 본성을 수제자가 유감없이 드러낸겁니다. 아무도 아무도 천국 갈 그 다른 인간은 없습니다. 천국 갈 다른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끝까지 자존적으로 줄 곧 달립니다. 의존적인 인간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 여기서 끝나면 안되잖아요. 뒤에 계명이 있어요. 그 계명은 덮처진 계명. 그게 무슨 계명이라고 했습니까?


소스, 사랑이라는 소스를 붓지요. 이렇게 빵 이렇게 두 조각 놓고 거기다가 꿀을 이렇게 소스를 부어버리면 빵은 비록 두 조각 났지만 소스가 두 빵 사이를 두 조각 사이를 연결 시켜주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면 그 연결된 꿀 속에 빵이 내 빵 굵다 이러면 되요? 안되요? 내 빵은 말랑말랑 이러면 되요? 안되요? 빵 자랑 하면 안되죠.


그러면 그동안 인간들이 왜 계명을 못 지켰습니까? 자존적이기 때문에 못 지킨거예요. 자기를 떠나서 계명을 지킬 줄을 몰랐기 때문에 간음하지 마라 ‘나는 지켰다. 너는 못지켰지?’  살인하지 말라. ‘나는 지켰다. 너는 못지켰지?’ 항상 자존적으로 성경 계명을 율법을 지킬려고 했다이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예수그리스도 아닌게 지금 흉내를 지금 자기가 계명을 지킬수 있는 자존적이면서 의존적도 아니면서 건방지게 의존적에서 나온 그 계명을 자존적인 존재가 지킨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정말 성령받고 구원받았으면 뭐라 해야됩니까? ‘주여 나는 못지키는 죄인입니다.’ 하고 성전 앞에 엎드려 있으면 주님께서 등어리 탁탁 치면서 ‘니가 합격이야.’ 이게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잖아요. 성경에.


한사람은 또 바리새인 뭡니까. 두 번 금식하고 어떻게 구제하고 했습니다. 이거는 스스로 자존적을 자존적인 티를 다 내버린거예요. 그런데 세리는 뭐라했습니까? 소스. 그저 소스.


간음하다 잡힌 아줌마 있잖아요. 그거 누가 끌고 갔습니까? 자존적 인간들이 끌고 갔잖아요. 나는 간음 안했는데 이 간음했다고 끌고 갔잖아요. 주님께서 거기다 뭘 붓습니까? 먼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고 내가 너를 소스, 긍휼의 소스 사랑입니다.


사랑을 붓는 이유가 공짜가 아니고 예수님의 대신 십자가에 아픔, 아픔을 근거로 해서 그 사랑의 계명을 이 세상에 유일하게 하는 것은 의존적 예수님 밖에 없었다를 계속 고백하는겁니다.


얼마나 우리가 나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라 하는 것을 이기주의를 아는 그 자체가 지금 사랑을 발산하고 있는 중이예요. 나는 개이고 이기주의입니다. 나는 나 밖에 몰라요 라는 그것이 바로 지금 전도하고 있는 중이예요.


그 이야기 듣고 다른 사람도 당신이 왜 그렇게 까불어 라고 하지 않죠. 가만 이야기 들어보니까 자기 이야기하는데 가만 보니까 본인도 해당되거든요. ‘나는 밥을 먹을 때 나 배부르라고 밥을 먹어요. 아 이런 나쁜 놈 나쁜 놈.’ 하면 ‘저게 미쳤나? 자기 배부르라고 먹는거지 그럼 밥먹는것도 죄야?’ ‘응, 죄야.’


이게 무슨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가 다 있어요. 이게 천국가지 않는 천국에서 소외된 인간들은 어느 날 자존적이기 때문에 천국 가도 누구 힘으로 간다? 여전히 내가 살아 있음을 계속해서 확인하면서 자존적으로 자존족으로 자존적으로 그 연결시켜가면서 천국가도 내 힘으로 왔다는 지금 자랑질하고 싶은 거예요.


그거는 단절시켜놨어요. 그래서 천국에서는 소외시키죠. 이거는 밀어내는 거예요. ‘왜 절 밀어냅니까 주님이여. 하나님 절 왜 밀어냅니까?’ ‘너 예수님 봤나 안봤나?’ 예수님처럼 아니잖아. 예수님처럼 의존적이 아니기 때문에 밀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에게 나중에 사랑의 계명이 오게 되면 우리는 뭘로 바뀐다? 자존적은 살아 있으면서 소스. 오늘 제목을 소스로 하자. 소스 괜찮네. 소스, 은혜의 소스.


뭔가 꿀이 오니까 이웃사랑이라 하는 것은 차이가 없는거거든요. 베드로와 요한이 차이가 없을 때만 비로서 사랑을 하게 되는데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냐하면은 있는 자리에서 차이가 아니고 둘다 찌그러진 자리에서 차이.


둘 다 십자가 모르고 내뺏던 그 동기생들은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둘 다 도망가기 바쁜데 뭐 거기서 잘난 거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는 그게 바로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그게 오직 사랑이라는 소스만 돋보이고 예수님의 행하심만 돋보이고 주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음이라 그 이야기. 제가 지난 주일 오후에 사망보험 그 이야기 했거든요. 목사님한테 들은 그 이야기. 목사님 보험전공인데.


죽기 전까지는 한 푼도 못받는다. 살아있는 인간이 십자가 알아서 구원받겠다고? 아니. 십자가가 너를 죽이는데. 사망보험금이 우리를 죽여요. 왜? 우리는 자존적이기 때문에. 이런 인간형으로 들어갈수가 없어요.


나를 죽이는 것을 미워하지 마세요. 주께서 나를 죽이는 것은 지금 사랑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어요. 문제는 뭐냐하면 내가 불뜩불뜩 계속 나온다는게 문제인데 그때마다 나올 때 마다 우리는 밟지요.


우리는 일종의 브레이크 페달같이 주께서 계속 밟아대는 거예요. ‘그쪽아니야 그쪽아니야.’  계속 밟아대는 거예요. 인간은 자존적이 되게 되면 이런 성경말씀이나 복음을 자꾸 수집할려고 합니다. 자기는 멀쩡하게 자존적이고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아서 천당갈려고. 영혼의 무게가 무거워요.


그런데 주의 사랑이 오게되면 죄가 발생되면서 그 죄는 주님의 십자가 구멍을 통해서 십자가 구멍을 통해서 이게 다 빠져나가야되요. 삭삭 빠져나가야되요. 제가 어떤 분에게 그런 이야기 하면서 그걸 복수에 물 차는 것을 십자가로 구멍 뚫어서 뽑는다고 이야기 했거든요.


인간치고 억울함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억울하지요. 억울함이 쌓이면 안에 복수 배에 물차요. 모든 인간이 이렇습니다. 왜 억울합니까? ‘니가 내 돈 띄어 먹었잖아.’ 이게 무슨 뜻이예요? 형이 내 아버지 유산 다 가져 갔습니다. 이게 누가복음에 나오죠.


형이 아버지 유산 다 먹었습니다. 억울함이잖아요. 억울함 가지고 그 동생이 누구 찾아왔습니까? 예수님 찾아왔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생명은 무엇의 넉넉함이 아니다? 소유에 넉넉하지 않다. 라고 예를 들면서 어떤 농부가 창고 지었는데 니 오늘 밤 영혼 데려가면 저 모든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왜 너는 계속해서 자존적이냐 이 말입니다. 오늘 단어로 이야기 하게 된다면.


아이고 10분 쉬고 합시다. 중요한 것 할려고 했는데 10분 쉬고 이야기 합시다.
 홍민희(IP:221.♡.139.88) 17-10-21 09:27 
가락-요한복음 15장 9절(자존적과 의존적)171017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끝에 첫째 시간 끝에 무슨 이야기할려고 했냐 하면은 자존적인 인간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대자연에 대항해 가지고 신의 이름으로 어떤 업적들을 문명이죠, 어떤 문명 창세기 4장 가인을 생각하세요.


어떤 문명과 문화를 일으켜서 자기만의 자존을 자존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개발해놨었는가. 그걸 생각하는 거예요. 모든 피조물들이 주께 영광돌리는데 오직 썩어질 이 인간들만 오죽했으면 시편에서 버리지같은 야곱이라고 했겠습니까. 차라리 그 짐승보다 못해요 인간이. 짐승이야 주님께 순종하지요.


짐승같은 인간이 누구하고 결탁이 되어서? 악마하고 결탁, 한패가 되어가지고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모독과 못된짓은 다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가인의 후손들이 모든 인간들이 자기 아담의 본성가지고 해 낸 업적들이 뭐냐말입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아까 언급했지요. 신을 만드는데 그 신과 인간 사이에는 연속적이였다 했습니까? 불연속적이라고 했습니까? 연결됬다고 했어요? 끊어졌다고 했어요? 연결되어 있어요. 연결되야 거기 갈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기 위해서 만든 탑이 있는데 그 탑 이름이 바벨탑. 그 바벨탑에는 인간의 속성, 현재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의 속성의 응축이 되어 있어요. 그 안에 바벨탑안에. 응축되있습니다.


그리고 바벨탑을 주께서는 부수는 것이 아니고 흩어지게 했다 했죠. 그러면 그 속성이 흩어져 봤자 그 속성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온 지구상에 다 확대가 되는 겁니다. 그게 노아 홍수 이후입니다. 백날 은혜받아봐야 소용없어요.


인간이 흩어질때에 흩어지나 집대성되나 그 바벨탑 정신이죠. 결국은 요한계시록 보면 그 흩어진 인간들이 인간들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도성으로 도성의 이름을 이야기 합니다. 바로 큰 성 바벨론, 또는 음녀. 흩어져봤자 그 성질 어디갑니까? 결국은 안 흩어진거예요.


이제는 바벨이라는 장소에서 하나님앞에 대들던 그 인간들이 온 천지에 흩어져서 온 지구상 전체가 하나님앞에 대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벨탑을 쌓는 취지가 뭐냐하면은 흩어짐을 면하자예요. 흩어짐을 면하자. 흩어짐을 면하자.


자,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언어가 하나였다 이말이죠. 언어가 하나였고 흩어짐을 면하자. 그 생각들이 일괄적으로 똑같은 생각들을 했다.


그러면 이 인류의 그 다수성, 그 시대의 공간적으로 지구의 넓어도 아무리 다수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 공간처럼 그들은 여기고 아무리 시대가 달라지고 달라져도 그 시대는 오직 한 시점에 확대 또는 확산에 불과한 겁니다.


인간은 달라진 적이 있다 없다? 인간은 절대로 달라진 적이 없어요. 인간은. 항상 하나님 앞에 1대 1 대응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면서 신은 어떤 신이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납득이 되는 신.


아브라함에게 또는 아브라함 자손 이스라엘 나라 오기전까지는 그들은 그것을 신이라고 철떡같이 우겼지요. 그런데 그 인간들이 전부 다 납득이 되는 신과 납득이 되지 않는 인간이 낯선 신이 등장합니다. 누구한테? 아브라함에게 등장해버리죠.


아브라함에게 등장하면서 낯선 신에게 새로 등장한 신의 자녀 아브라함과 그 주변에 있는 이방민족의 신과는 차이가 나겠어요? 안나겠어요? 차이가 분명히 차이가 나는 겁니다. 분명히 차이가 나요.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여기서 이제 두 번째 시간에 해야될 것은 뭐냐하면은 그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등장하게되는 이방민족들이 그들이 어떤 신을 믿었기에 그들은 그따위식의 문명과 문화에 성질을 본질을 갖느냐. 지금 이걸 두 번째 주제로 삼는겁니다.


그들의 신의 부합되는 문화와 문명을 그들은 계속 건설해왔거든요. 그리거 거기에 반해서 달리 아브라함은 독특한 아브라함의 문화가 또 따로 있는거예요. 그 아브라함의 문화가 뭐냐하면은 출애굽기에 보면 그게 뭐냐하면 제사장 나라예요.


제사장 나라고 하나님의 언약중심의 나라인 반면에 세상나라는 제사장 언약중심이 아닙니다. 뭐냐하면 국가중심이거든요. 현재있는 그게 뭐냐 혈육중심이예요. 혈육중심이고 이것은 언약중심이고. 이스라엘에서는 언약에 위반되면 혈육이라도 죽여버려요.


광야에 가면서 40년동안 광야 40년 소모한 이유가 뭡니까? 홍해에서 건너 온 사람 다 죽여버렸어요. 두 사람 빼놓고. 이게 뭐냐하면은 사람의 혈육이라도 무엇과 안 맞으면? 진짜 하나님의 약속과 안 맞으면 나는 천국사람 아니다를 분명히 보여준 반면에 기존의 이방민족은 혈육을 중시합니다.


조상 대대로 혈육을 중시한 민족. 구체적인 것이 바로 국가거든요. 그러면 그것이 제 이론에 논리에 의하면 오늘날 현대 국가는 이런 구약에 신구약에 나오는 이런 이방민족과 성질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똑같아요.


그래서 구약은 이게 안 볼 책이 아니고 봐야될 책이예요. 오늘날 현대국가를 설명하는데 구약을 꼭 봐야되요. 꼭 그렇게 되거든요. 자, 그럼 그걸 오늘날 현대국가가 구약과 어떻게 동일한가.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여기 있다면 인간은 이 자연세계를 자기 유리한데로 끌어 당기기 위해서 인간은 신을 섬기면서 처음에는 신에게 뇌물을 받쳤어요. 뇌물을 받친 창세기 4장에 제일 먼저 하나님께 제사 드린 사람이 누구죠? 가인이죠.


자, 가인의 제사를 안 받은 이유는 그 가인 배후에 아벨의 제사를 받아서 차이나게 하기 위해서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았어요. 만약에 가인의 제사를 제물을 받아버리면 기존의 인간이 알고 있는 신이 그 신이 되어버려요. 가인이 알고 있는 신이 그 신이 된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쪽에서 차단시킨다는 것은 가인식의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내가 원래 내 모습이 내 취지가 아니였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니라고 말을 할때는 반드시 아닌 것은 아니지만 진짜는 뭐냐가 나와야되겠지요?


아닌것부터 먼저 제시되고 그 다음 누가 나옵니까? 아벨의 제사를 받음으로서 니가 진짜 하나님 믿는 사람의 현실속에서의 모습은 아벨의 운명을 통해서 내 진짜 모습을 거기에다가 담고 내가 그걸 거기다 구체화 시켜줄게. 라고 그런식으로 이야기했죠.


그러면 아벨의 제사를 받는 순간 아벨의 목슴은 끽 하고 죽어버립니다. 그러면 이 장차 오실 하나님은 이 땅에 왔을 때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다? 살아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음과 더불어 죽는 하나님이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연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불연속, 끊어짐, 끊어진 하나님. 그래서 인간쪽에서 건너가고자 해도 절대로 갈수 없는 죽어도 못가는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어떤 그 저 제 딸이 그런 질문을 제 딸인가? 아니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전화해서 그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자기 친한 친구가 이렇게 일찍 60도 안되서 죽었는데 사람들이 애도하고 찬송가 작곡도 많이 했는데 간암으로 죽었답니다.


자기가 친군데 친구가 죽고 나니까 자기가 죽음을 다시한번 생각해보니 ‘목사님 죽음이 뭡니까?’ 라고 할 때 제가 답변을 이렇게 전화로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살아있는 인간은 절대로 죽음을 모르게 되어있어요.


죽음을 상상하게 되어있지 모르게 되는 이유가 모르는 이유가 살아있는 것으로서 죽음을 해버리면 뭐가되냐하면 있다와 없다 밖에 안되요. 나 지금 여기 있다 그런데 죽으면 여기 없다가 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 지금 있다가 맞는 이야기이냐를 증명할수 있는 길이 없어요. 지금 내가 있다라는 것이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다를  start 출발점으로. 이것을 하나의 개시점으로 시작점으로 현재있는데 죽으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냐하면은 저주받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언약과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해요. 그러면 이렇게 되버리면 지금 그들 인간은 살아있어도 뭐가 되느냐 이게 죽은 것이 되요.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 되요.


그래서 인간이 죽으면 인간이 죽게되면 자기가 저주 받는 것을 소급해서 알게됩니다. 살아있을때도 저주였고 죽어서도 저주였다. 그게 누가복음 16장에는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가 그걸 느낍니다. 부자가 죽어서 어디갔습니까? 지옥갔지요.


지옥불에 가가지고 거기서는 뭐가 귀합니까? 몽블랑 뭐 에비앙 생수가 귀한가요? 물 한방울이 귀한거예요. 그러면 물이 귀한곳이 지옥이 아니고 물이 귀한 곳에 본인이 여기 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본인 빼고 지옥이 아니고 본인을 포함해서 지옥인거거든요.


그 본인이 살아있을 때 어디 갔습니까? 부잣집 자기 집에 있었죠. 그러면 살아있을때도 그는 저주아래 있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살아있을 때 나는 살아있다고만 생각했지 지금 저주 받은 상태로 살아있다라고 생각을 안했잖아요. 이게 죽어도 죽은 줄을 모르는거예요.

죽은 놈이 죽는 것은 별 의미 없어요. 거기서 뭐 아쉬워 할 거 없어요. 살아있을 때 주님의 십자가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하지 죽어서 ‘아이고 아이고 봉투 얼마 넣어왔나? 아이고 너 아버지 죽을 때 가봤는데 너는 얼마냈니?’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다 죽은 인간입니다.


박근혜를 1년 더 구속하라. 더 구속을 연장 했잖아요. 박근혜는 그 인간도 죽은 인간이고, 박근혜도 죽은 인간이고, 그 박근혜를 왜 정치적으로 압박하느냐 그것도 죽은 인간이고, 박근혜는 합당하다하는 그 다른 민주당 죽은인간이고, 죽은 놈끼리 지금 지옥에서 재판걸고 지옥에서 재판받고 있는 거예요.


정말 박근혜 그 사람이 진짜 성령을 받았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아까 이야기한 의존적이다. 자존적이 아니라 의존적이라면 ‘주여 죽으면 죽으리라. 주여 감사합니다.’ 왜? 왜 그럴까요? 그걸 통해서 세상이 나를 아까 했죠. 소외시키잖아요.


성도이기 때문에 제발 나 같은 인간 빨리 죽어가지고 최순실하고 지옥가라 막 이런식으로 해서 밀어내는 그것을 주의 은혜인줄 알고 받아들이면 그 재판장에서 그렇게 쭈그려 있을게 아니고 할렐루야~~ 그게 막 카메라 찍히고 뭐 특히 JTBC에서 그걸 찍어줘야되요. JTBC에서. 테블릿 PC 때문에 사건 났기 때문에.


그런데 머리 숙이고 있다말이죠. 정치적 보복이다하고 말이죠. 티가 확 났지요. 죽은 인간이라는 티가 났잖아요. 그럼 우리 성도가 뉴스 볼 때는 어떻게 보면 됩니까? 왜 죽은 놈이 죽은 짓 하느냐 그렇게 보면 되는 겁니다.


뭐 그것 보기가 너무 지루하면 다른 것 드라마 보던지, 언니는 살아있다 그거 보던지 다솜이 어떻게 됬는지 뭐 그거 보던지 골라잡아 보시고 아무것도 안보면 도끼 나와 랩하는 것 그거 보시던지 도끼 알아요?


하여튼 도끼든 뭐든 전부 다 모든 인간이 다 죽은자예요. 집사님 죽은 자하고 상대하고 있는거예요. 모두가 죽은자입니다. 죽은자에서 참 승진할려고 애 많이 쓰시고.


죽은 자들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 죽은 자가 뭐가 겁나느냐 하면은 내가 있는 것이 없다 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죽음의 의미라면 그러면 이 자존적 의존적이 아니고 마귀적이죠. 이 자존적 인간들이 어떻게 문명을 이어갔는가.

그것은 18세기에 존 로크라는 사람이 17세기 인가? 참 잘 이야기를 잘 해줬어요. 17세기 존 로크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냐하면은 옛날에는 왕을 왕권신수설이라고 합니다. 왕권신수설. 인문학 이야기이기 때문에 또 슬슬...좀 참으시기 바랍니다.


왕이라 하는 것은 신이 부여한 것이다. 이렇게 봤어요. 이 말은 뭐냐? 왕 자리는 신이 손 댄 자리이기 때문에 계급이 서열화 되기 때문에 신분이 서열화 되기 때문에 감히 평민이라든지 기사계열이라든지 귀족계열이 왕을 넘 보면 안된다.


왜? 신으로부터 배정받은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중세시대에 이랬습니다. 서양의 중세시대.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 가지고 왕권신수설이 무너지고 이제는 인간에 의해서 인간의 나라를 만들자해서 나온게 뭐냐하면 사회계약설이예요.


이 사회계약설에서 존 로크가 지대한 영향을 입었는데요. 1688년인가 존 로크의 사상에 의해서 영국에서 혁명이 일어나요. 그 혁명이 뭐냐하면 명예혁명이 일어납니다. 명예혁명의 내용이 뭐냐하면 임금도 의회의 인준없이는 허락없이는 법령을 적용하거나 만들 수 없다  이겁니다. 임금도.


그럼 누가 주인입니까? 각자 각자가 주인이죠. 인민들이 다수에 있어서 계약을 만들어 놓고 하는데 계약을 할 때 인간은 뭐냐? 인간은 자연법대로 움직인다. 자연법대로 움직인다. 중요한겁니다.


자, 있음을 지금 있는 사회를 처음에 없는 사회를 여기에 우리 있다 부터 시작해서 없는 사회를 상상하는 거예요. 현재 인간들이 있잖아요. 존 로크 시대 있잖아요. 프랑스라는 나라가 있잖아요. 이 프랑스 나라 있음을 진짜 나는 어떠해야 되는 가를 옛날에는 성경이나 교회한테 물었잖아요. 안물어요 이제는 시대가.


하도 교회가 전부 다 타락해 안 묻고 우리가 이성적으로 물어보게되면 현재 우리가 있다? 그러면 우리가 없을 때가 있지요. 그걸 자연상태 원래 자연상태로 봅니다. 자연상태로부터 새로 시작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사회가 있으니까 없는 때부터 시작할 때 사회가 없을 때 사회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은 자연법, 자연법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다.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동등하게 다 받았다.


그래서 평등과 자유 그리고 문제는 인권 이런 것이 등장하게 됩니다. 흔히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칭했던 자유, 평등, 박애라는 것. 서로 인간들이 협조 돌보아 주자 이것이 여러분들은 성경적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성경을 거부한 쪽이예요? 성경을 거부한거예요.


왜냐하면 출발점이 나 여기 있음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자존적인 것을 더욱더 확대시켜서 자존적으로 구성된 그런 자립적인 국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불과 16세기인가 17세기인가  불과 400년전입니다.


여기에 의해서 그 존 로크 사상에 의해서 명예혁명이 일어났지요. 그 다음에 나온 전쟁이 뭐냐. 미국에 독립전쟁. 1775년 독립운동있잖아요. 독립전쟁 영향을 받아 1787년 프랑스에 프랑스가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됩니다.


그 여파로 나폴레옹이 등장하고 나폴레옹에 의해서 모든 유럽이 서구화 민주화 되고 그 민주화가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서 동양까지 합쳐가지고 중국도 개방되지요 일본도 일찌감치 그 명치유신 해가지고 뒤늦게 여기에 독립투사들 등장해가지고 독립운동 했잖아요.


이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퍼진거예요. 그런데 그 모든 뿌리에 뭐가 있습니까? 자존적 심성이 들어있는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더 나가 봅시다. 이 자존적 심성에서 국가가 됬잖아요. 국가는 뭐냐하면 인권입니다.


누구도 인간 위에 없고 누구도 인간 밑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법률로 만들었고 법률이 하나로 독점하니까 다시 왕처럼 되니까 법률을 나누자. 나누자 몽테스키외. 나누자 하는 것이 삼권분리예요.


입법, 사법, 행정, 삼권분리로 나누고 명목적인 상징적인 이름은 대통령이 하던지 왕이 하던지 하고 실제적인 모든 권한은 입헌군주제 국회에서 하자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래 현재 모양새 예요. 원래. 국회에 모든 권한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후진개발국에서는 국회에 주니까 싸워서 짜증난다고 독재자가 쥐죠. 독재자가 쥐어서 다 해버리고 위회 뽑아서 또 하고 촛불집회 또 하고 이래가지고 그 재미로 특히 60넘어서 할 일 없는 사람 케이블 티비 보면서 그걸로 시간 다 때우는 그게 되버렸는데.


이걸 가지고 자연법 사상이라해요. 자연법 사상. 자연법 사상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자연법 사상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의 이성에 의해서 서로 협조하고 협력하고 박애와 평등과 자유를 하게 되면 이게 가장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이상적인 나라이다. 이게 자연법 사상이예요.


문제는 이 자존적 성격에서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라고 이의를 거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무도 없어요. 왜? 아무리 인간이 생각해봐도 이게 최고거든요. 그런데 의존적 천국가야될 성도는 이 자존적 세계가 눈치 채가지고 밀어냅니다. 밀어내요. 너 왜 국가에 충성안해?


이번에 가즈오 이시구로 라고 노벨문학상 받은 일본계 영국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 지은 남아있는 나라 라는 그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그 집사가 여행하면서 자기 아버지도 집사고 자기도 집사고 주인님 모시고 하는 그런 내용인데, 그 내용을 개인적으로 집사생활 잘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내용으로 출발해가지고 결국은 뭐까지 퍼졌냐하면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그걸 들추는 책이예요.


자기 아버지도 집사인데 그 집사가 충실하게 모셨던 그 주인이 어떤 주인이냐 하면은, 그 주인이 파티를 열었는데 그 파티에 귀중한 손님으로 온 사람이 그 남아프리카에서 선박수조와 관련된 큰 사업체를 하는 사람이 왔는데 모셨다는 거예요.


지금 이것과 자연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국가에서의 나온 열매가 뭐냐 지금 열매를 이야기 하니까 열매를 따져보는 겁니다. 저택이 있고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가 있는데 이 주인공 집사는 그 아들이니까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가 집사였는데 집사가 파티를 여는데 그 파티에 남아공 남아프리카에서 온 유명한 사업가가 있다면 그 사업가가 사업하기 전에 군장성이였어요.


군장성인데 그 사람이 어디 전쟁을 참여했냐하면은 여기 배경은 1954년이니까 어디 했냐하면은 1890년인가 하여튼 모르겠다. 보어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보어전쟁.  BOER WAR. 보어전쟁이라는게 있는데요. 보어전쟁이 뭐냐하면 아프리카 제일 남단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에 식민지 1899년입니다.


그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에 그쪽에 아프리카에 제일 먼저 그들을 식민지 잡아가지고 개발했어요. 남아공 아프리카 제일 남쪽에. 그래서 금광하고 다이아몬드 광을 발견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영국이 전쟁을 하는데 돈이 없으니까 네덜란드 사람들 원주민이 있는 그 곳을 영국이 지분을 해가지고 이것을 강제로 뺏은 전쟁이 바로 보어전쟁 이예요. 보어전쟁 이라고요.


그런데 그 전쟁하면서 이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예요. 그냥 일반 네덜란드 원주민 네덜란드 후손들이예요 그냥. 그저 광산하고 이런 사람인데 영국에서 군대를 동원해가지고 다 죽여버렸어요. 하여튼 전쟁의 기본도 없고 예의도 없고 그냥 학살해버렸어요.


그 학살한 주인공이 누구냐하면 바로 여기 장성급, 그래서 영국에서도 말이 많아가지고 그 장성 군법에 넣어라하는데 군대에서 반대해가지고 무사히 장성으로 제대해가지고 뭘했냐하면은 그 남해 해안에 선박을 수조하는 사업체 사장이 되가지고 왔다 이말이죠.


왔는데 이 집사가 얼마나 품위있는 집사인지 자기 아들을 자기 아들을 죽였어요. 이 전쟁에서 자기 첫째 아들이 죽였어요. 이 장성이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서 죽었거든요. 원수예요 자기 아들의 원수.


자기의 원수인데 이 집사의 형이되죠. 큰 아들이니까.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주인이 이야기 합니다. ‘자, 저 사업체 사장님이 마침 시종을 안데리고 왔는데 누가 5일동안 시종하겠습니까?’ 라고 할 때, 자기 아들 죽인 원수에게 집사가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하면서 온갖 수모와 굴욕을,


모르죠 이 장성은 이 자기 때문에 죽은 아들의 아버지인지 모르면서 모든 수모를 다 줍니다. 그런데 5일돌안 꾸준히 참으면서 하는 말이 ‘휴 나는 집사로서 품위를 지켰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말이죠. 이게 뭐냐하면은 이게 열매예요.


이 현재에 있는 국가체제를 충분하게 내가 동의합니다 라고 보여주는 열매예요. 이 열매라 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그 시대에 의존적이예요. 그 시대에. 하나님 앞에 의존적이 아니고 주님한테 의존적이 아니고 그 시대에 의존적이예요.


전도사가 교회에 복무한다. 그러면 전도사는 누구 앞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주님의 복음을 알고 주께 순종하겠습니다.’ 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교회가게되면 주님께 의존적입니까? 교회에 의존적이여야 되요? 교회가 그 전도사를 뽑을때는요 주님께 의존적이기를 원하지 않아요.


교회에 의존적이고 교회에 시키는 건 다 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교회 방침에 전적으로 복종하기를 원합니다. 그게 철저하게 된 것이 천주교의 수도원, 수녀원 우리나라 같으면 복음학교, 복음학교 김용의 목사.


그것은 주님 의존적이 아니고 복음학교 의존적이예요. 거기에 있는 사람들. 절대로 그 복음학교는 이단적이라는 말을 김용의 목사가 이야기 합니까? 안하지요. 안하지요. 어느 목사가 우리교회 이단이라는 말 합니까 안합니까? 안하지요.


십자가 뭐 그런 소리만 하지 안하지요. 신천지가 합니까? 어디서 그런 소리 해요? 안하지요. 그게 바로 자연법이예요. 자연법이라고 하는 것은 있음을 기초로 있음. 나 여기 있음을 가지고 뭉치는 겁니다. 있음이 뭉침은 힘의 뭉침이예요. 너 있고 나 있고 저 사람은 10명있고 우리 5명 있고 저쪽이 더 힘이쎄요. 계속 키우는 겁니다. 조직을 키우고 사업체를 키우는 겁니다.


그걸 그들은 열매라고 보는 겁니다 열매. 교회도 사업인데 인간들은 자기가 인간은 죽을 줄 모르고 인간은 자기가 있다고 살아있다고 보죠. 그러면 인간에게 신 관은 아까 복습해봅시다. 인간의 신은 단절되있다? 연속되있다? 연속되있지요. 연속되더라도 내가 여기있는 내가 납득이 될 때 연속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냥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사업을 원하는데 그 사업이 뭐냐? 복음전파를 하늘나라 확장되기를 원한다. 그러면 하늘나라 확장된다는 말은 뭡니까?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말하죠? ‘보자 어느 교회가 가장 큰 교회냐. 어! 저 교회가 크네.’


교회가 크다는 말은 하나님의 기적을 작은 교회보다 더 듬뿍 받은게 되지요. 납득이 되잖아요. 납득이. 납득이 되지요. 성경말씀에 두세사람과 나와 함께 그 말은 들리지도 않아도 그 성경귀절이 있는지도 몰라요.


하나님의 진리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키웠다는 겁니다. 그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고 남들도 그렇게 수긍을 해요. 연속되니까. 단절 없어요. 그렇게 수긍할 때 얻어지는게 뭡니까? 그렇게 수긍하는 나는 죽은자가 아니고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교회 이렇게 어려워서 교육관 못짓는다 할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와서 돈 2억을 내서 지었다 그러면 그 기적이 그 교회의 전통에 보탬이 되겠지요? 그러면 그 교회는 있음이 되겠지요. 교회가 있으면 그 교회에 등록하게 되면 작은 교회 등록하는 것보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높을까요? 낮을까요? 높아지잖아요.


높다고 누가 생각합니까? 오는 교인들이 생각하지요? 오는 교인들이 생각한다는 말은 그 오는 교인들의 생각을 목사는 그냥 이용만 하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대로 우리 교회는 주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작은 교회보다 우리교회 등록하시면 천국 갈 확률 많습니다. 됐습니까? OK?’ ‘OK.’ 문제 없지요.


그러면 그 교회가 얼마냐 교인수가 5600명이다. 그런데 그 옆에 보니까 교인수 보이까 2만명이다. 자 어떻게 될까요? ‘목사님 나 저 교회 갈래요.’ 왜? 이 쪽의 논리에 의하면 큰 교회가 주님의 기적이잖아요. 그런데 이 5600보다 2만명이 더 크니까 주께서 살아계신 주님께서 전능하신 주님께서 저 교회가 진짜라는 표시로 2만명되게 한거예요.


이쪽 오천명 교회에서 아무리 무슨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어떻게 뭐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삼위일체로 교회 오는거 아니잖아요. 어느 곳에 숫자가 많은냐 온겁니다. 왜? 다수가 진리이기 때문에.


자, 여기 자연법에 자 다시한번 봅시다. 굉장히 중요한데요. 자 처음부터 다시해볼께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죠. 이 포도나무는 이 땅에 와서 어떻게 살다가 갔습니까? 십자가 죽었지요. 십자가 죽었지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단절이다? 연속성이다? 단절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처럼 주님따라 못갔어요. 심지어 12제자 베드로도 못갔지요. 분명히 해야됩니다. 분명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뭘 끄집어 냅니까? 여기에서 열매를 끄집어 내는 거예요.


그러면 이 열매는 죽은 예수님과 어떻게 되요? 연속적이죠. 그리고 천국은 누가 간다? 예수님에게만 철저히 의존족, 의존적이라는 말은 의지하자는게 아니예요. 아까 강의를 할 때 단어를 쓴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내가 주님 의지해야지 이러면 천국 못가요. 믿어야지. 믿어도 못가는 거예요.


주일 낮에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구원은 뭐로간다? 믿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불신앙으로 가는 거예요. 불신앙으로 가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주일 낮 설교 들으면 알아요.


의존적이라고 하는 것은 보험에서 무슨 상품있다고 했습니까? 파생상품이예요. 파생상품. 본래 따로있고 쭉쭉 나오는 것이 파생상품이란 말이죠. 주님으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에 파생되서 이게 연결되어 있어요.


연결되면서 이것이 절대로 자존적이 아니고 무슨적이다? 철저히 의존적이예요. 그런데 인간은 이미 자체가 이미 아담부터 자체가 이게 뭐냐. 의존적이 아니고 이미 스스로 자존적이다. 스스로 있어요. 스스로 있으니까 이것을 있음으로 본겁니다.


있음으로 봤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뭐냐? 내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으로 본거예요. 자 예수님께서 죽었지요. 예수님께서 죽어서 이렇게 넘어가버리면 예수님이 없는 세계가 살아있는 세계입니까? 죽은세계입니까? 예수님이 없는 세계가 죽은 세계예요.


인간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이 세상은 무조건 살아있는 세계예요. 의견다르지요? 그러니까 단절 된거예요. 예수님 생각에는 성경 아무리 천독을 해도 소용 없어요.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면 무조건 성경은 해석이 안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이 사도바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지요. 죽은 자 안에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썼던 거예요. 그러면 이 해석을 할려면 같이 사도바울같이 성령안에 예수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만 사도바울의 해석이 되요.


그 해석의 끝은 뭡니까? 예수님만 살아있고 우리는 그 파생된 파생상품, 파생된 열매라는 겁니다. 열매는 독자적인 열매가 아니예요. 독자적인 열매라는것은 없어요. 그냥 가지에 몸통에 의존적이예요. 주님을 위해서 열매지 열매를 위한 열매는 없어요.


개인구원은 없고 통구원 통구원, 통감자 알죠? 통감자. 고속버스 휴게소에 나온 통감자. 요만한거 4000원. 통구원이지요. 개별구원 없습니다. 개별구원 아이디어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주님과 끊어진 상태에서 있음에서 나왔어요.


살아서 고생많이하고 죽어서도 고생많이 하면 안되니까 좋은데 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인공이 누구예요. 내가 주인공 이예요. 예수, 하나님, 삼위일체 다 누구에 의해서? 나 좋아라고 있는거예요. 나 좋아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과 나 사이에 연결되어있어요 연결. 심지어 십자가도 내가 믿을수 있는 십자가가 되어버려요. 믿을수 없는 십자가가 아니고 믿을수 있는 십자가니까 이 십자가 믿는것도 행함이 되지 절대로 이게 은혜가 아니예요.


말은 은혜라고 하지만 은혜가 아니고, 내가 예수 믿는 결단력을 내려서 예수믿게 된거예요. 그러면 그 결단력의 원천이 뭐냐? 나의 결심이예요. 결국 내 결심을 믿으면서 자기는 예수 믿는다고 지금 거짓말 하고 있는겁니다. 내 결심을 믿으면서.
그러니까 진짜 믿는 사람은 뭐냐하면은 ‘주님 저 안간다 했잖아요. 천국. 왜 이렇게 천국 보내주십니까? 안갈래요. 그런데 왜 자꾸 천국에서 당기고 그리고 세상은 왜 자꾸 나를 밀어냅니까?’


같이 놀아줘~~이렇게 할텐데 ‘나가!! 너는 우리하고 달라. 다른 인간이야.’ 왜 악귀도 알고 왜 악마가 알아서 왜 나를 자꾸 밀어내냐 이말이죠. 같이 놀려고 하는데, 동창생 다 떨어지고 심지어 부부사이 다 떨어지고 심지어 딸도 미워하고 아들도 미워하고 전부 다 끊어져 다 끊어져. 외로워서 못살겠어.


주님도 외로웠거든요. 외로움에 외롭다해가지고 돈 들여 사귀어 보니까 나중에 돈만 띄어 먹고 도망가고. 자꾸 세상은 나를 밀어내네. 위는 당기고.


나는 그것을 환란이라고 하지만 따지고 돌아서서 환란인데 따지고 보면 은혜고, 어렵다고 눈물 찔찔 짜고 보니까 히히 웃어야 될 일이고, 주의 조치 아니였으면 지금쯤 나는 주님 생각 없고 십자가 생각도 없어버리고 나 예수믿고 잘 됬다고 자기 자랑 하면서 돌아다니고 과장하면서 돌아다닐 그런 자기 모습을 생각할 때 이게 끔찍한거예요.


그것도 큰 교회, 차비 많이 주거든. 그런 교회에서 노는 그것을 어떤 신앙의 목표처럼. 신앙인이면 저 정도 유명인사되야해. 그정도 유명인 되야 진짜 주의 종인줄 알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자 다시 이야기 합시다.


아까 영웅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인간들이 영웅을 치켜세우는데 영웅은 뭐냐하면 내가 영웅이 못된다 아니라 나도 언젠가는 열심히 하게되면 따라서 할 수 있는겁니다. 내가 믿는 예수는 내가 이처럼 될수 있는 예수예요. 모든 인간들은.


그러나 진짜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라 잡으면 예수님이 커지는게 아니고 지금 근접 따라잡고 있는 나 자신이 그렇게 대견하고 나 자신을 보고 자기가 반해버려요.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데 물속에 있는 자기 보고 빠져죽는.


자기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본인이 감격해 가지고 자기가 자기한테 홀딱 반해버리는 거예요. ‘너 나한테 반했나?’ 거울보고. 술 끊은 나 보고 반하고 담배 끊은 나 보고 반하고 자기가 자신한테 반하는 그 보람으로 살아가요. 그것이 신앙생활에 즐거움 기쁨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속에 뭐가 들어왔어요? 세상에 만약에 사도바울이 삼층천만 봤다면 얼마나 자만 하겠습니까? 자만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뭘 주었습니까? 육체의 가시를 줬지요.


처음에 본인이 착각했어요. 이거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데? 라고 해가지고 무려 한번 빼달라고 기도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어요. 두 번 빼달라고 기도하고 세 번째 빼달라고 기도하니까 응답이 날라왔는데 응답이 뭡니까? 니 은혜가 너한테 합당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너 구원을 위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야. 내가 필요해서 니가 있는 거야. 너 자꾸 하지마. 가시를 넣었던 장미를 넣었던 뭘 넣었던지간에 그건 나 때문에 있는거지 너 편할라고 있는게 아니다 이말이죠.


너는 왜 자존적이냐 이말입니다. 니가 왜 끝까지 의존적이여야지 왜 자존적이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 아픈데서 비로서 내가 은혜가 넘치나이다 이게 바로 해결책이예요. 아픈게 해결책 이예요. 아픈데서 낫는게 해결책이 아니고 아픈 그 자체가 해결책이예요.


얼마나 의존적입니까? 까라면 까겠습니다 그거예요. 죽으면 죽으리라 까라면 까겠습니다. 옳소이다! 10년동안 귀신들린거 참 잘했습니다. 13년째 악성 감사합니다. 12년만에 귀신 나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이렇게 할텐데 그 수로보니게 여인은 옳소이다 하지요. ‘옳소이다.’ 이 말이 함부로 나올 말이 아니예요. 옳소이다. 개 맞습니다. 개는 주인이 짖으라고 하면 월월! 짖기만 하면 되요. 왜? 그 관계 그 의존성 그대로 천국을 이루기 때문에. 그 의존성 그대로.


천국 별거 입니까? 주님 대장이고 나는 개이고 짖으면 되고. 집사님은 천국 심심해서 못가겠다는데 거기 골프장 없어요. 거기서 자존적 거기서도 만들라고 시키면 만들면 되요. 그런데 항상 시켜야되요. 골프장 만드는 것도 월월! 개 짖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시키는데로 하는 것이 뭐냐 새로운 주님의 선 입니다. 주께서 시켰으면 그게 사건이 되고 그 사건속에서 주님이 영광을 받아요. 내가 했습니다 아니라 시켰잖아요. 그냥 옳소이다 시켰잖아요.


다리 부러져서 주께서 다리 부러지도록 시켰잖아요. 부산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사람을 죽여놓고 주께서 시켰잖아요.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뻔뻔스러움의 극치, 그게 바로 의존적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 혹시 보신적 있으십니까? 밀양? 아이 유괴해서 죽여놓고 살인자는 교도소 가 있어요. 전도연이가 너무 괴로워서 교회를 갔는데 은혜를 받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소위 전도의 갑질이거든요. 거기서 전도의 갑질.


‘너 모르지? 난 알아.’ 이거 갑질이거든요. 갑질할라고 교도소를 갔는데 세상에 자기 아들 죽인 그 면회가서 죄수하는 말이 ‘나는 아줌마 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나 구원받았어요.’ 그 소리 듣고 갑질을 못하게 되가지고 화가 나가지고 거짓말이야~~ 김추자 노래 틀어놓고 예수 안 믿잖아요. 하나님 안 믿는다고 하나님은 다 거짓말이라고.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자존성을 나 있음을 나 자존성을 뒷받침 해주는 연속적인 하나님을 전도연은 그게 하나님인줄 알았어요. 내가 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예수 믿으니 나보고 이쁘다 해줘. 이 괴로운 가운데서 예수 믿었으니까 나보고 착하다 해줘. For Me.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있음이 연속성이예요.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이 타고 난겁니다. 이게 죽은 인간들의 특징이예요. 지옥갈 인간들의 특징인데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너 나 사랑하느냐? 자존감 문제. 너 자존적이잖아. 너 나 사랑하느냐? 하니까 베드로가 말을 바꾸어서 자존성에서 뭘로 바꾸었습니까? 의존성으로 바꾸지요.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사랑을 줬기 때문에 주님의 소스, 사랑의 소스를 주께서 주셨잖아요. 그러면 내것이 나올게 어디있습니까? 그냥 꿀단지 같은 사랑을 뒤집어 쓰고 이것만 전할뿐이죠. 세 번씩이나 물었어요.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뭘해도 주께서 시켰다는 것을 소급해서 알게되면 그것은 주님의 열매입니다. 합당한 열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예요. 그러나 아무리 착해도 여기 자존성이 살아있으면 이것은 이미 마귀고 죽은거예요.


좀 더 나가봅시다. 자, 세상적인 열매란 두가지가 있죠. 하나는 의존적 열매가 있고 하나는 자존적 열매가 있는데 결국 우리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음을 시작해서 자존적 열매가 되거든요. 이 열매는 누구 열매냐하면은 나의 열매가 되요 나의 열매가. 나를 빛내는 열매.


그러니까 이게 몸통이 누구냐하면 내가 있음으로서 이 열매가 나오니까 이 열매는 누구를 순산합니까? 이 열매를 봐서 나를 순산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따르고 십자가 죽으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여러분 성경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7장 봅시다. 이거 설명하면 시간이 마칠거 같은데. 마태복음 7장. 제목 후보까지 너무 많다. 7장 15절부터 19절 한번 같이 읽어보세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예수님이 심판주입니다. 심판주가 뭐라고 판정을 내리냐 하면은 나쁜 열매를 찍어버린다 했죠. 그러면 이 이야기 듣고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따르려고 하겠지요. 그 뒤에 말이 뭐냐 내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열매입니까? 아니면 거짓선지자 입니까? 거짓선지자이죠. 그럼 어떻게 되느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아까 우리 첫째 시간에 한 것 주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되는 거예요. 주의 말씀이.


말씀의 연결성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포도나무 몸통과 우리 열매를 이어주는거예요 말씀이. 그 말씀이 이어진다는 말은 그 말씀이 지향적 마지막 말씀이 다 이루었다가 어디입니까? 바로 십자가 잖아요.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뭐냐하면 바로 그 우리의 말씀을 십자가로 데려가는 거예요. 장렬하게, 장렬하게 죽는겁니다. 장렬하게 죽는다해서 사자 굴에 들어가고 뭐 이렇게 매 맞고 예수는 안 믿겠는냐! 예수의 얼굴을 밟아라! 이런거 생각하지 마시고 골프치는 것도 장렬한 죽음입니다.


싸움하다가 세금 조작하다 걸려가지고 장렬한 죽음입니다. 장부조작. 모든 주께서 시킨데로 하는 것. 주께서 시켰더니만 한 100억 재산, 시켰더니 집 한 7채정도, 요즘 7채는 많은 것도 아니예요. 국회의원 비하면. 그것도 장렬한 죽음입니다.
왜? 어떻게 해서 돈 벌었습니까? 주께서 시켜서 돈 벌었습니다. ‘아이고 뻔뻔스럽게도 당신 뇌물받은거 다 아는데.’ ‘그 뇌물받은거 주께서 시켜서 했습니다.’ 이게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을 쫓아 내겠어요 안쫓아 내겠어요? 밀어내겠지요. 그게 소외입니다.


도대체 대화가 안통해요. 모든 인간은 자기가 결정해서 하는데 저들은 뇌물받아 쳐 먹어도 주께서 시켰다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교도소가야해. 교도소 갈 때 억울하지 않느냐?’ 주께서 가라고 해서 교도소 가는 데 뭐... ‘아니 뭐 이런 자유가 다 있나? 당신 사형이다. 판사가 당신 사형 때렸어.’


주께서 그 판사를 시켜가지고 나보고 사형을 시켰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옳소이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죠. 거의 미친개 수준이죠. 거의 미친개 수준이죠. 그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죠. 다윗의 아들이 죽었잖아요. 다윗 아들 죽었다고요. 뭐 울고불고 난리났잖아요. 싹 입을 닦아요. 이게뭐냐하면 아들과 내가 합해서 다윗언약을 이루어요. 나는 아들앞에서 죄인이고 아들은 나 때문에 죽은 희생물이고 희생물되게 하고 나는 죄인되게 해서 그래서 옳소이다.


그렇게해서 다윗언약이라는 박스를 이뤘고 이 이룬대로 예수님께서 장차 메시아로 오실거예요. 그러니까 세상 모든 것이 주께서 시킨 사람은 어떤일을 해도 의존적이라니까 의존적. 제목 의존적.


모든게 의지하는게 아닙니다. 의지하자는 말이 아니고 이미 빼도박도 못하게 파생된거예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너 어떻게 구원받는가? 거기에 대한 답변하지 마세요. 할 수가 없어요. 그냥 뭐라고 하느냐하면 주의 은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말 밖에 할 수 가 없어요.


그런데 어디서 은혜가 왔는가? 십자가 피 흘린 곳에서 댓가로 해서 은혜가 왔습니다. 또 십자가를 증거하는 거예요. 교회 200명이니까 사기 많이 쳤겠네. 주께서 그렇게 했다. 그러면 하루아침에 200명 다 나가도? 그것도 주께서 하신거지 뭐. 아이고 섭섭해라 그런거 아니잖아요.


오게 하신것도 주님이고 가게 하신것도 주님이고, 자식 10명인데 하루아침에 다 죽었다. 욥이 뭐라고 합니까? 세상에 참 비정한 아버지. 뭐라고 합니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이게 흉내낼 문제가 아니예요. 흉내낼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올테면 따라오라. 너 천하에 욥 만큼 믿음 있는자 있는지 보라고 했거든요. 따라갈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욥에대한 그 사람의 역할이고 나는 골프치는 역할 하면 되는 거예요.


골프 쳤는데 홀인원됬다. 15년만에. 와 실력좋은데~ 주께서 그렇게 굴러가게 하셨습니다. 돈 내세요. 내기 5만원. 왜 그런 자유를 우리가 만끽하지 못합니까? 뭐가 발목 잡았습니까? 마지막으로 그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딱 이유 하나, 우리가 뭘 이해 못했기 때문에. 사랑. 사랑을 전혀 이해 못했기 때문에. 사랑을 이해 못했어요. 이미 우리는 산자가 아니고 죽었지요. 단절되었지요. 이 단절과 연속을 이을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 중간에 홀로 행하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천국에 다른사람으로 바꾸어 준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뭐만 자랑합니까? 주님이 행하신 그 사랑만 증거하지요.


그리고 그걸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더는 계명 있다 없다? 추가 될 계명 있다 없다? 없어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웃을 사랑하라, 모든 계명이 있을지라도 로마서 13장. 있을지라도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느니라. 다 덮느니라. 또 다 이루느니라.


그 사랑은 내가 했습니까? 아니죠. 사랑은 주님이 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올때는 우리는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사랑은 언제나 그 노래 있잖아요. 김세환이 노래한거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진리와 더불어 기뻐하고.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게임벌렸습니까? 주님 상대로 거래했습니까? 주님 상대로 재롱을 부렸습니까? 다 나 잘되라고 부린 마귀적 수작 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주여 그런 마귀적 수작까지라도 주께서 하게 하셨다 라는 그 고백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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