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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2 00:18:03 조회 : 660         
투자와 희생 171121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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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221.♡.139.88) 17-11-26 01:12 
가락-요한복음 15장 18절(투자와 희생)171121a-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 15장 18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렇게 되어있죠. 미움이란 말이 나오지요.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안되요. 세상이 너를 미워한다는 말이 왜 안되느냐 하면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는 자연과학적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과학적인 대자연을 세상이라고 봐요.


인간뿐만 아니고 원숭이 뭐 해서 산과 들 이런 것 모든 걸 포함해서 세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 돌이 우리를 미워할리가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해가 우리를 미워해요? 말이 안되지요. 그래서 세상이 너를 미워한다 할때에 이 세상이라는 그 뜻을 여기서 우리가 자연과학적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전체를 세상이라고 보고 개념을 바꿔줄 필요가 있습니다.


미움이 가능한, 미움이 가능한 어떤 집단 그것을 세상이라고 하자 이말이죠. 그럼 미움이 가능한 집단인데 여러분 자신 저나 여러분 자신들을 미워하는 집단은 없어요.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미워했던 집단, 점점 더 개념이 좁혀 가지요? 예수님을 미워했던 집단.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가버리면 예수님 자체가 우리속에서 사라져 버리면 그 세상도 동시에 같이 사라지죠. 왜냐하면 여기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결부할 때 세상이라는 개념이 정립이 되니까. 지금 말이 참 어렵지요?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세상이란 뭐냐? 예수님을 미워하는 그 반대세력이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버리면 뭐도 같이 날라가 버립니까? 미워했던 그 개념도 예수님이 떠나버리니까 같이 날라가버리고 없는거예요. 그러면 요한복음 15장에 세상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지금 규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미움이라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미워했던 그 세력을 두고 이야기 하는겁니다. 그 세력을 예수님은 뭐라고 하냐 하면은 세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예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그런데 예수님이 만약에 우리 세상에서 떠나버리면 이것도 조직이 해체 되잖아요. 없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계셔야 규정이 되는데, 예수님 떠나버리면 세상이라는 것이 없게 되고, 없게 되버리면 뭐가 안되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15장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라는 것이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세상이 계속 자기정체를 노출 시킬려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집단이 또 생겨나야되요. 원리가. 집단.


예수님한테 사랑받는 어떤 특정 집단이 생겨 버리면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속성이 어디 가겠어요? 이번엔 누굴 공격 하겠습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사랑받는 그 집단을 공격 하면서 이 세상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항변적으로 드디어 계속 종속 되겠어요? 있겠죠? 종속 될수 있겠죠?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성경 해석을 이렇게 해야된다는 거예요. 뭐냐하면은 성경해석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성경해석대로 우리가 그 연극에 출연, 영화나 연극에 드라마에 우리가 역할맡는걸로 출연, 역할맡는 것, 등장하는 것.


모든 시나리오는 말씀대로 돌아가요. 이 세상의 모든 풀이고 꽃이고 다 없어져도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했잖아요 말씀은. 그러면 말씀을 영원히 성립하기 위해서 우리는 뭐가 되냐하면은 출연진이 되는 거예요 출연진.


그러면 자, 우리가 있고 말씀을 지키는 것은 기존의 성경 해석을 그런 식으로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이유가, 내가 없어지면서 성경말씀도 지킨것도 날라가 버리기 때문에 이러면 안되거든요. 말씀은 지킨 사람 없으면 같이 날라가는 겁니까? 그런겁니까? 아니죠.


말씀을 지킨 사람이 있던 없던 간에 처음부터 세상을 말씀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있던 없건 간에 말씀은 다 그대로 말씀세계는 그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중지됨이 없습니다. 이거는 멈추는게 아니예요. 계속 가는 거예요.


강물에 무슨 스티로폼 하나 빠졌다고 강물이 스톱하는 그런거 없잖아요. 강물은 그냥 밀어붙이고, 그냥 뭐 쓰레기통 빠지면 그냥 빠지는거고 관계없이 강물은 위에서 흐르듯이 말씀이 이렇게 하게되면 우리는 이 말씀을 말씀대로 드러나기 위한 출연진으로서 2017년도에 여러분들을 뽑아 세운겁니다. 뽑힌겁니다. 이 시대에.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 당시에 뽑힌 출연진들이고, 그리고 그 말씀은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모든 말씀은 누구를 증거하는거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죠. 왜? 예수님은 창조주니까. 창조주를 증거하는 겁니다.


창조주를 창조해놓고 그 창조에 누가 했느냐를 알리기 위해서 이 세상을 이 대자연을 이렇게 말씀의 대자연을 만들 때 말씀으로 만든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과 이 우주 사이에는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말씀으로 연결되어 되있다 말이죠. 말씀으로. 말씀으로 연결되어 있지요.


그 연결된 중에 지금 하나를 그 힘줄 하나 이렇게 힘줄 하나 딱 뽑듯이 우리는 그 중에 하나 뭘 뽑았냐하면은 요한복음 15장 18절을 뽑은겁니다. 연결된 그 뭉치중에 다발 그 근육다발중에서 한 연결을 이렇게 뽑은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하면 뭡니까? 우리가 말씀지킨다는게 성립 됩니까? 안됩니까?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는게 성립이 안되지요?!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말씀이 되어 버리면 말씀이 자기 진행방향에서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되는게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말씀 지키든 안지키든 관계없이 말씀은 예수님과 세상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키든 안지키든 말씀은 말씀대로 전혀 지장없이 말씀이 모든 것이 구체화 되고 현실화 되는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성립이 되요? 안되요? 성립이 안되잖아요. 감독이 있고 연출자 있는데 왜 배우가 자기가 와서 시나리오 다 고치고 할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작가 있잖아요. 작가 있고 감독 있고 다 있잖아요.


작가 예수님, 연출 예수님, 감독 예수님, 다 예수님이 하시는데 우리는 그때 그때 마다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호출되고 출연된거예요. 뭐 계약금도 없습니다만. 그냥 부름 받아서 된거예요. 이 부름 자체가 사도바울은 그것을 계약금이라 해서 내가 부름받은 소명 자체를 뭐로보느냐 하면 상급이라고 본겁니다. 사도바울의 그 서신에 보면 나와요.


일을해서 상을 받는게 아니고 일을 맡긴 그 자체가 상이라는 겁니다. 일을 맡긴 그 자체가. 우리의 인식의 변화가 또 필요할 대목이죠. 사람이 일을하고 뭔가 다시 상급을 내가 또 따로 받게 되게 되면 내 존재가 계속 살아있어야 되고 그게 소유로서 증강되야 되요. 증가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이게 천국에 주님의 나라가 아니고 누구 나라 되느냐 하면은 내 나라가 되요. 내 나라가 된다고요.


따로 하나의 박스처럼 나만의 그러한 고유한 영역을 텐트처럼 쳐가지고 거기에다 무조건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천국 중에서 천국을 파트로 나눠가지고 이건 니 영역이고 자기 천국에 부동산 마련해가지고 이것은 나하고 나 가족들 천국중에서도 내 가족들 사는 곳이다. 따로 챙기는 셈이 된다 이말이죠. 천국이 그런거예요?


자기 영토 따로 가질수 있는 곳이 천국일까요? 아니죠. 왜 이유가 뭐냐하면 에덴동산에 낙원 에덴동산에 아담의 영역이 어디있습니까? 따로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담의 영역은 따로 없어요. 아담은 주변에서 놀았어요. 중앙에는 따로 있습니다. 아담이 아니고 두 개의 나무가 중앙에 있었어요.


아담의 운명은 하와의 운명은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 선악과에 의해서 결정되는 겁니다. 생명나무 보호하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를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과감하게 퇴출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은 생명나무가 뭐 보다 더 중요하다? 인간보다 더 중요한겁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잖아요. 창세기 3장에. 도대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다고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예요. 하나님은 주 예수그리스도 아들을 사랑해요. 인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은 나중에 예수님의 소원에 의해서 재림 가운데서 간택을 입은사람, 택함을 입은 사람들만 그 자들만 예수님이 사랑하는 조건하에 아버지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의 영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속에 예수님의 영이 있는가를 보고, 예수님의 영이 있을 경우에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을 허용한겁니다. 로마서 8장.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누구도 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예요.


사람이라는 말 하지 마세요. 사람이라는 말 앞에 조건이 붙어야되요. 그리스도의 사람만 사람이예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서 그리스도의 사람만 사람이고 ,앞에 그리스도 빠지고 성령이 빠진사람은 사람이 아니므니다! 인간이 아니므디나! 인간이 아니예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평가나 인간의 반응이나 인간의 호응이나 그런데는 신경을 뚝 끄세요. 인간도 아닌 짐승이 뭐라고 궁시렁 궁시렁 뭐라는 거야. 이렇게 개무시하고 말아야지. 언젠가 제가 수요일날 그런 얘기 했잖아요.


사람의 그 평가를 개무시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니라고. 제가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도 사람의 시선 같은 것 그것 의식하면 평생을 그렇게 남들 평가에 놀아나면서 평생을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 이말이죠.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예요.


그리고 그런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고요.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성령을 받게되면 예수님을 주 시라고 이야기해요.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 되요. 예수님이 중심이고 자기는 변두리.


예수님이 감독이고 자신은 뭐냐? 그냥 감독에 호출당한 그냥 출연진이라고요. 출연진 이기 때문에 이미 호출당한 사람치고 자기 영광, 자기 명예,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어요. 왜냐하면 주인이 호출했기 때문에. 주인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어있다고요. 주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이 평소에 살았던 것은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데, 출연하게 되면 이 영화가 되야 되거든요. 만약에 예수님한테 출연을 안 당하면 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뭐를 만드냐 하면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자기 영화가 만들어져요.


영화 만들어지는 것을 이번 월요일날 대구 강의에서 이걸 뭐라했느냐 하면은 이것을 세자로 이야기 했습니다. 개인사. 개인의 역사예요. 개인의 인생 스토리. 인간은 어려분들이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이야기 해보세요. 뭐가 나옵니까? 개인사가 나와요.


‘나는 어느 학교 나왔고, 나 대학은 공부 이렇게 했고 나 취직해가지고 이렇게 잘 나왔고 지금은 내가 연금 얼마 타고...’ 뭐 이런식으로 자식 5명 있는데 5명 다 잘키워서 하나는 지금 교수되고 내가 택시 탔는데 택시 운전사가 내가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 해요.


하나는 공무원 되고 하나는 교수되고 하나는 의사되고 이랬다고요. 누가 뭐라 했어요? 그래도 또 맞춰줘야 또 5500원 나왔는데 5000원만 내고. 맞춰주니까 500원 깍아주더군요.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잘 키웠습니다. 그 나이에 운전하시니까 70넘어도’ 했더니만.


모든 인간은 본인이 감독이고 본인이 연출자고 그래요. 본인이 주인공이고. 감독 아무개, 연출 아무개, 그런데 그 영화 마지막은 뭐로 끝나느냐. End. 끝이 있는데. 끝과 동시에 예수님의 이야기의 시작. 지옥 이야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인간의 개인사.


그런데 만약에 성령이 왔다. 그 사람의 인간의 개인사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소급해서 보니까 이것이 누구의 영화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한 그 영화의 자신도 모르는체 어릴때부터 출연당하고 있었던 겁니다. 출연당하고 있었던 거예요.


성령이 오기전까지는 그걸 몰랐죠. 알고 보니까 성령이 오게되면 소급해서 과거의 지난것까지 소급해서 되돌아 보니까 다 이거 주님께서 이 때를 위함이다. 구원받기 위해서 천국가기 위해서 계속해서 거기서 이끌어 온거예요.


그래서 지난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지요. 미래라는 것은 가보면 전부 다 과거 된다고 했어요. 미래를 산 만큼 그것이 어디에 누적이 되느냐 하면은 만약에 내일은 몇일 입니까? 11월 22일 이잖아요. 그렇죠? 22일이 딱 되게 되면 오늘은 과거가 되요.


또 23일 되면 22일은 과거가 되요. 그러면 그렇게 평생을 다 산다 칩시다. 그러면 쭉 모아논 것이 뭡니까? 전부 다 나 살아온 과거가 되지요. 그 모든 것을 과거로 과거라는 창으로 집어넣으시는 그 현재적 존재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지금 안죽고 살아 있으니까 과거 현재 미래를 따지지만 결국은 우리가 어디에 끌려가고 있는데, 어디에 끌려가느냐 하면 오직 영원한 현재는 예수님 만이 영원한 현재이고, 우리는 항상 그 현재 앞에서 지나온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결국은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일본을 가든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로. 결국은 우리는 어디를 돌아다녀도 결국은 주님이 만들어 낸 과거의 일부로서 인생을 끝내게 되지요. 끝내고 천국가면 영원한 현재에 같이 영원한 주님의 천국 현재에 영원히 동감하게 되면 거기는 시간도 없고 시간도 없어요. 영원한 복락을 누릴뿐입니다.


천국의 생활이 좀 지루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수는 있는데, 그것은 평소의 우리의  생활이 현재 과거 이렇게 따지다 보니까 지루해 보이는데, 예수님 한테 물어보세요. 예수님 천국 생활하는데 좀 많이 지루했지요? 물어보세요.


예수님은 전혀 안 지루하지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처럼 마음으로 바뀌어 지면 천국이 그렇게 지루하지 않고 늘 기쁩니다. 주님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늘 기뻐요.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지금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중요한 이야기인데.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요지가 뭐냐? 말씀을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 말씀을 구체화하는 재료들을 그 시대에 전부 다 뽑아낸다는 겁니다. 뽑아내는데 그 뽑아내는게 뭐냐하면 바로 여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한 그 미움이라는 것을 언급했어요. 예수님께서 미움.


자,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예수님의 논리에 의하면 요한복음 15장 18절 논리에 의하면 미움이 없이 예수님을 사랑할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 논리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하면은 미움이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미움이라고.


그런데 예수님을 미워하는자가 누구라고 했어요? 세상이죠. 그러면 모든 심지어 12제자마저 12제자마저 전부 다 예수님을 부인했잖아요. 나 저 사람 모른다고. 그렇다면 예수님 홀로 미움을 받아요.


그러면 12제자들도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그들도 어디 속하냐 하면은 예수님을 미워한 측에 속합니다. 미워한 편과 한 통속 이예요. ‘당신도 예수님과 한패라며!’ ‘나 한패 아니야. 나 저 사람 저주한다.’ 라고 베드로가 이야기 했잖아요.


그만큼 세상에 대한 세력이 세상에 대한 평가가 무서운 거예요. 살아온 몸 자체가 남들의 평가에 맞춰서 몸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몸의 속성을 하루 아침에 딱 외면하고 떨칠수가 없어요. 살아온 가락이 그 가락이기 때문에 그래요. 살아온 가락이.


그러니까 예수님을 미워했으니까 예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이 세상속에서 12제자를 뽑아내는 겁니다. 물론 성령으로 뽑아내지만. 성령이 와야 그리스도 사람이니까. 뽑아내는 거예요. 뽑아내니까 결국 우리는 뭐냐하면 예수님을 미워했던 자인데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공식이 성립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성령이 왔으면 우리는 소급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 인가를 알아야 되는데 ‘저는 예수님을 미워했던 육신을 갖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되고, 예수님을 계속 미워하는 육신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계속 이 미움을 오히려 극복하면서 그것을 뭐로 바꾸냐 하면은 사랑의 근거로서 미움을 예수님이 가져가는 거예요.


‘니가 나는 미워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에게 가해자가 되고 나는 피해자가 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를 일방적으로 나는 용서한다.’ 그게 죄 사함 아닙니까? 뭐 죄가 있어야 죄사함이 있지. 죄가 발생되야 사함이 성립 되는거예요.


그래서 천국가는 사람은 입이 100개라고 할말이 없는거예요. 어떤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계속 예수님에 대한 미움이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육신이 천국을 가니까. 물론 천국 갈때는 육신이 바뀝니다.


어쨌든 그 육신 가지고도 주님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고 있으니까 이거 참 입이 100개라도 할말이 없는거죠. 그렇다면 이 공식에서 어떤 문장이 형성되는지 그 문장을 한번 제가 길지만 한번 써 보겠어요. 그 문장을 제가 한 번 적어와 봤습니다. 굉장히 길어요. 긴데 길다고 해서 이해가 쉬운건 아닙니다. 한번 적어 볼께요.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조건하에 믿었는데, 믿었는데 는데 하니까 수상하지요? 믿었는데. /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았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께 내세울것이 뭐가 있습니까?


다시 한번 읽어 볼께요.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이게 중요합니다. 누가 알고? 내가 안다는 거예요. ‘하나님 저 많이 사랑하고 십일조 하고 헌금하고 주께서 다 눈이 계시니까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못하리요. 귀를 만드신이가 듣지 못하리요. 지금 제 행동 다 알지요?! 얼마나 내가 순수하게 주님만을 사랑하는거 다 아시지요. 아 기분좋아. 주께서 내가 사랑하는거 알주 주다니.’ 조건하에 믿었는데,


이게 왜 중요하냐하면 내가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 한 5년동안 알았는데 6년째 집안에 우환이 있어가지고 ‘이럴거 같은면 내가 예수 안 믿는다!’ 라고 내가 선언을 하고 베드로처럼요. ‘나 예수 안 믿어! 나 예수님 부인한다!’ 이렇게 했을 때 그 사람은 이것만 딱 끊어서 보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안다는 조건하에 예수님을 사랑했는데, 자기 힘으로 자기 뜻에 의해 결심에 의해서 ‘나 예수 안 믿어!’ 이러면 그 사람은 자기가 구원 된다고 생각하겠어요? 구원 안된다고 생각하겠어요? 안 믿었으니까 구원 안된다고 나는 지옥간다고 확신하겠죠.


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 예수믿을라고 성경에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잖아요. 예수님을 본인이 안다고 생각해요? 모른다고 생각해요? 내가 예수 믿는데 낸가 모를 리가 있습니까.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내가 알고 나만 알겠어요? 나만 아는데 주님은 모르겠어요?


주님도 알고 나도 아니까 지금 신앙생활 지금 정상으로 잘되고 있다고 지금 기분 좋았는데, 가정에 우환이 있고 뭐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자기가 화를 내면서 ‘내가 진짜 예수 믿으면 개다!’ 이렇게 나와버릴때에 그 사람은 자진해서 예수 믿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자진해서 예수 안 믿는게 되죠.


그럴경우에 그 사람이 뭘 빠트린겁니까? 뭘 빠트린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았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빠트린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아까 선을 그어 놓았는데 (위의 내용)이것만 알고 (아래내용)이것을 모르는 사람을 결국 위에것만 아는 사람은 결국 뭡니까?


사랑하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다 사기죠. 불신자죠 불신자.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믿을려고 한다 말이죠. 얼마나 사랑 못하면 사랑한다고 그렇게 남한테 광고 광고 하겠어요. 남 들으란 듯이.


열심히 믿겠다는 것은 그 만큼 믿음이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제말은. 결국 이 긴 문장의 뜻이 뭐냐 하면은 ‘나 예수 믿습니다. 예수 사랑한다.’ 는 말 자체가 나는 엉터리 입니다라는 티를 내고 있는거라 이 말이죠.


이런 소리를 하니 기존의 믿는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지요. 못 알아 들어요. ‘아 믿어야지요. 하나님 우리를 만드신 분인데 사랑해야지요.’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문제는 내가 언제부터 사랑하고 구원 언제부터 믿었고 언제부터 사랑했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어요? 내가 아는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아는게.


내가 알아버리니까 철회도 누가 해요? 믿는게 뭐다를 내가 아니까 뭐가 안 믿는것도 누가 안다? 내가 아니까 이게 믿는 것이고 이게 안 믿는 것이고 결정을 누가 하는 거예요? 본인이 하니까 결국은 하나님 믿는게 아니고 누구를 믿는거예요?


자기의 느낌. feeling. 자기의 feeling, 자기의 감정을 믿는거예요. 감정을 믿는 거예요.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이 선 믿을 내려 가야죠. 정말 성령이 왔다면 밑에 내려가게되면 어떻게? 내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하기 전부터 창세전부터 주님은 나를 구원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주께서 사랑한다는 그러한 출연진, 사랑해야될 출연진을 믿는자로서 뽑아 세우셨군요 라고 생각하는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제일 마지막 문장 더 이상 하나님께 내세울것이 있어요? 없어요? 더 이상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지요. 십일조 해서 구원받았다. 착한 일 해서 구원받았다. 순종해서 구원받았다 라고 내세울게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뭐냐하면 바로 주께서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주께서. 주께서 하셨잖아요. 종인 주제에 무슨 대접을 받겠습니까? 벌써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나중에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 하잖아요. 그 고백이다 이말이죠.


그래서 선 밑에 위 아래 다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자체를 위해서 우리를 말씀이 진행되는데 안뽑아줘도 되는데 말씀이 진행방향을 향하여 뽑아서 그 다음에 나 구원받았다를 자랑질하라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15장 8절이든 9절이든 모든 성경말씀은 이렇게 지장없이 지금도 아무 자격없이 잘 지금 매끈하게 매끈하게 지금 흐르고 있습니다.


깔끔하게 아무 지장없이 진행된다는 거죠. 그러면 그 성령받은 성도의 특징이 뭐냐하면 걱정이라든지 근심이라든지 불안이라든지 두려움, 있을래야 있을 건덕지가 없지요. 근거가 없지요. 왜냐면은 내게 주어진 그 모든 상황이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 내게 주어진 일어난  모든 상황 그게 뭐냐하면은 성경말씀이기 때문에, 성경말씀.


내게 일어난 모든 성경말씀은 주께서 감독이 우리보고 그 역할 하라고 맡겨준 하나님께서 그걸 맡아야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하면은 성경말씀이 실효성을 가지고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잖아요. 자기가 하는 일에 책임지지 말라고요. 졸음이 와도 할 수 없어요. 이건 주께서 말씀대로 졸음이 온거예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도다 뭐 이렇게. 그게 맞는가 안 맞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사람이 마태복음 6장 마지막에 나와요. 산상설교 6장 마지막에.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인데 왜 이방인들이 하느냐 하면 무엇을 입을까? 내일은 무엇을 입을까? 내일은 무엇을 마실까?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 그것을 내일 되기 전에 미리 당겨서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는 관심사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그 주인공이 누구예요? 누가 먹나? 내가 먹고 내가 마시고 내가 입어야 내가 주인공이 되잖아요. 이게 바로 이방인이고 불신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의 특징은 뭐냐하면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고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자기가 부름을 받은거니까 내일 염려는 내일 하고 오늘치 역할은 오늘 하고 역할 끝났으면 잠자는 역할로 들어가는 겁니다. 잠자는 모드로 들어가라 이말이죠. 밤되면 쳐자라 이말이죠. 이불 덮고 자라 이말이죠. 드라마 보지말고 12시까지.


밤은 자라고 있는거고 낮은 깨어나서 이야기 하라는 거예요. 성경말씀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이예요. 그러면 이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겁니까?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움직이게 되는 거예요? 어느쪽이예요?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되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볼때도 ‘목사님 뭘 지킵니까?’ 자꾸 지킬려고 하지 말라 이말이죠. 말씀은 지키는게 아니고 주께서 하라고 하시는 저를 가지고 사랑해주시는군요 라고 감사하고 영광돌리면 되요. 이게 피조물이 해야되는 것이 뭐냐하면 새삼스럽게 뭘 설치지 말고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초대교회 때 헌금내라고 하니까 아나니아와 삽니라가 헌금내야 하는데 뭐 집을 팔았는지 땅을 팔았는지 남들 베푸니까 자신도 하고 싶어서 작정한 헌금의 반을 냈잖아요. 그래서 둘다 다 죽었지요.


사도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 했어요. 니가 나를 속이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나를 속임이 아니고 니가 악마의 사탄에 속아서 사탄이 들어가지고 누굴 속임이라? 성령을 속임이라. 사람같으면 좀 속이면 어떻습니까? 둘 다 못난 인간인데. 문제는 사람 죽이고 살리고는 사람 속였다고 죽이고 살리는게 아니예요.


성령을 속였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도전할 때, 그 다음부터는 주님께서는 뭘 보여주느냐? 얼마든지 너를 지금이라도 죽일수 있는 권한이 주님한테 있음을 철저하게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한테는 죽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그것도 사이좋게, 하나 죽고 오래살면 그리워 할텐데 한날에 사이좋게 부부가 다 죽었어요. 살다가. 졸혼도 못해보고. 한날에 다 죽었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둘다 성령을 속였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그 사건을 보고 깜짝놀랬지요.


깜짝놀래면 다행인데 만약 어떤 사람은 또 누굴 비난하겠습니까? 베드로를 비난할 가능성이 있어요. 베드로를. 실제로 고라 자손할 때 백성들이 누구를 비난하느냐 하면 모세를 비난하듯이 왜 그렇게 백성들을 이 광야까지 끌고 와가지고 왜 죽일려고 하느냐 오히려 모세는 주님이 시키는데로 했는데, 막 모세보고 죽일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걸 보고 이거 다 죽이자 나서니까 모세가 중간에 끼어가지고 ‘하나님 다 죽이지 마옵소서.’ 이렇게 하고 있고, 백성들은 모세 죽이라고 하고 참 모세 역할도 참 보통 연기가지고는 못할 연기를 했어요.


하나님은 다 죽일려고 하고 모세가 ‘하나님 다 죽여버리면 다른 민족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 불러 놓고 광야에서 다 죽였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살려주세요.’ 백성들은 모세 보고 죽일려고 하고.


이게 복음 속에 있을때나 이게 납득이 되고 어떤 공감이 되지요. 그들 세상살이 아까 자기 세상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개인사에 여기에 완전 푹 빠져 있으면요 이게 성경말씀이 하나도 느낌이 안 온다니까요.


하루 온종일 24시간이 반짝반짝 빛나는 자기 개인사 자기 개인의 인생사를 빛내기 위해서 거기에다가 온 정신을 다 팔아 버리면 이런 말씀을 말씀이 주는 느낌이 못 오지요. 개인사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의식하는 겁니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바로 타인의 시선이죠.


내 인생 너 못지않게 잘났어. 이런걸 과시하기 위해서 허풍 허세 떨기 위해서 남들 의식하면서 자기만의 괜찮은 개인사를 구축할려고 24시간을 거기에다가 아침 눈뜨자 마자 밤될때까지 그것만 생각하는거예요.


남들보기에 내 인생 어떻게 마감되야 아름다운 인생이 될것인가? 그런데 아까 남이란 뭐라고 했습니까? 남은 인간이라고 했습니까? 인간 아니라고 했습니까? 짐승이죠. 인간도 아니죠. 인간도 아닌것에 거기에 편승해가지고 그들이 뭐라 하는데로 같이 벌벌 떨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그런다 이말이죠.


자, 그렇다면 이제 무슨 이야기 할려고 쉬운 이야기 했냐면, 지금 쉬운 이야기 했거든요. 무슨 이야기 할려고 쉬운 이야기 했냐 하면은 이겁니다. 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미운자 속에서 뽑아내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 따로 만들어 놓고, 이 사람들하고 제자들하고 예수를 미워했던 세상하고 좀 분리를 시키면 되는데 왜 제자들로 하여금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하는데 같이 동조해놓고 거기서 뽑아내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그냥 우리가 제자되서 주님 사랑하면 되지 않겠느냐? ‘주님 최고입니다. 주님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 이러면 될텐데 왜 미움이라는 절차를 꼭 거쳐야되는 이유가 뭐냐? 사랑은 죽음이기 때문에.


그게 어디 나오냐 하면은 14절에 나옵니다. 13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15장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사랑안에 사랑을 톡 깨어보면 사랑을 하나의 열대과일 이라면 톡 깨어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죽음이 들어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어느누구도 인간이 특정인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뭐가 없다? 사랑이 없는 거예요. 사랑이 없다면 사랑의 반대말은 뭡니까? 미움이죠.


결국 뭐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주님을 미워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꾸 주님을 제가 주님을 미워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 저한테 싫어할거예요. 난 주님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주님을 미워하지 않는것과 같은말인데 주님을 미워하는것과 같은 말이 뭐냐하면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뭐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억지 논리를 폅니까?’ 하는데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죽음을 미워서 그냥 죽은게 아니고 자살하신게 아니고 미움을 받아서 죽었기 때문에 그런거예요.


모든 진리에 근거는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보여준 그것이 유일한 근거여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자체가 모든 진리의 근거가 되야되요. 죽었다가 되게 되면 예수님처럼 죽지 못한 것은 전부 다 이것은 미움이 되는 겁니다.


그 미움이 되고 그 미움이 있는 한 통속이 뭐냐? 우리는 세상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세상. 예수님께서 그렇게 규정하신거예요.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예요. 그래서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예수님만 등장 안했으면 세상안에 있는 자기들 끼리는 아주 친하고 사이 좋고 두레마을 하고 상부상조하고 계모임하고 너무너무 친하게 지내요. 아무일 없어요.


문제는 예수님이 여기 들어왔다가 나오면서 살해당했기 때문에 지금 사단 난거예요. 하나님보시기에. 그러면서 예수님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다 이말이죠. 이러한 외부적에서 새삼스럽게 알려주는 이 정보, 이 정보가 우리가 그걸 못들은걸로 여긴다면 그것은 예수님은 그냥 하나의 정치범에 지나지 않고 아무 우리 메시아도 아니고 구세주도 아니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버리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고 아예 사람이 아니예요. 그리스도의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오고 부터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훅 들어오니까 ‘뭐지? 예수님이 왜 죽었지?’ 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아! 내가 나 사랑하는 것 조차도 주님한테는 미움의 원천이 되고 미움의 진원지가 되는 겁니다.


요새 진원지 유행되지요 진원지. 포항 흥해라는 읍이 있어요. 그 읍에 얼마나 자주 갔는지, 그 읍에 보면 벌판이 있는데 그 벌판이 진원지입니다. 지진이 일어난 진원지. 예수님은 십자가가 이 세상의 모든 세상을 부정적 세상으로 흔들어 규정하는 진원지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 한거예요, 십자가 외에는. 성령이 아니고서야 십자가를 알 수 없다고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옵니다. 2장 8절에 나옵니다. 니가 십자가를 이 세상은 십자가를 알았으면 죽이지 않았으리라. 십자가를 모른다는 말은 그들에게 성령이 안와서 그렇다.


이 말은 성령이 온 사람만이 십자가를 알게 되고 그 사람만이 뭐냐? 영에 속한 사람이다 라는 말을 고린도전서 2장 맨 끝부분에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거기에 나와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모든 사람은 뭡니까? 육에 속한 사람이죠. 육에 속한 사람. 그건 이미 죽기 전에 이미 운명으로 결정 난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진도를 한번 더 나가 볼께요. 그러면 세상에 있는 예수님 때문에 생긴 두가지 마음, 하나는 뭐냐하면은 첫 번째는 우리가 방금 알았듯이 희생이죠 희생. 그러면 희생이 아닌 것은 뭐냐? 자기 사랑하는 것 뭐라하냐 하면 제가 이런 개념을 만들어봤습니다. 투자.


인간은 끊임없이 투자. 투자를 아까 동영상 찍을 때 했는데 ‘자기 지시적 순환 원리’ 자기 지시적 순환원리 손가락 가지고 자기를 지시하는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아무리 남한테 희생하고 뭘 하고 해도 그게 뭐냐하면 자기 지시적 돌아돌아 다니면서 부메랑처럼 휙 돌아도 결국 뭐로 돌어옵니까?


나에게서 난 것이 어디로 돌아와요? 나에게로 다시 회수가 되지요. 아까 그 저 유투브 할 때 두 번째 강의 했잖아요. 사랑한다고 결혼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만큼 사랑했는데 너는 나한테 뭐 해 줬는냐? 이렇게 나오지요.


자기는 일방적으로 무조건 사랑한다고 한 그것이 휙휙휙휙 돌아가지고 결국은 뭐냐? 나만 쪼다 병신되었네. 전에 남자는 여자를 사귈 때 그렇잖아요. 20대 때 여자가 명품 사달라 뭐 해달라 뭐 해달라 커피 값도 니가 내라 해가지고 여자가 남자 다 해놓고 뭐 말 한번 잘못하게 되면 ‘이럴거 같으면 헤어져!’ 이런다고요.


그러면 이럴거 같은면 헤어지게 되면 남자가 해준게 저쪽에 다 넘어가 있다. 여자한테. 그러면 헤어지게 되면 그 순간 그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날 때 내가 준 가방들고 내가 준 시계들고 내가 준 옷 들고 백화점에서 사준 것 가지고 헤헤 거리면서 만날 때 그 꼴을 어떻게 봅니까?


그 꼴을 볼려고 하면은 그 꼴 마저 감사하다 뭐 사랑하기 때문에 뭐 헤어졌다 이렇게 나오면 되는데 그런 남자 있습니까? 그걸 뭐라고 한다고요? 자기 지시적, 자기를 겨냥해서 순환구조를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온다. 이게 투자 원리입니다.


그래서 투자를 어떻게 하느냐 투자 논리는 제가 한번 미리 적어봤습니다. 투자논리는 이렇게 되요. 순서가 처음에는 무지에서 앎으로 나옵니다. 뭘 알아야 투자를 할 것 아닙니까, 뭘 알아야.


여자와 사귈 때 ‘실례지만 어느 학교 나왔습니까? 부모님은 계십니까? 오빠는 계십니까?’ 묻잖아요. 사랑은 알아가는 거니까. 그렇지요? 알아가는데 어떤 사람은 7년 어떤 사람은 9년 어떤 사람은 3개월 어떤 사람은 일주일. 미국에 라스베가스는 일주일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하던데.


왜 상대방에 대해서 알아야 되겠어요? 뭐가 되기 때문에? 투자 가치가 있는지 알아야 되기 때문에 알아야될게 아닙니까? 무지에서 앎, 앎에서 그 다음에 뭐냐하면은 거기에 대한 아는것을 획득을 해야되요. 소유. 소유자. 획득. 아는 것을 소유하는 겁니다.


소유를 하게 되면 소유가 늘어나면 뭐가 되느냐 하면 권력자가 되요, 권력자. 상대방을 알면 알수록 상대방을 그 사람을 내가 다룰 수 있고 내 손아귀에서 갖고 놀수 있다고 생각 할때는 자기가 갑이 되고 저 사람은 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권력자가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자기 종이되면 자기는 뭐냐? 자존자, 절대자가 되죠. 최고 절대자. 모든 인간은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은 자기한테 자기가 투자하는 식으로 살아가요.


이 투자를 누가 시키냐하면 부모들이 어릴 때부터 양육시킵니다. ‘놀지말고 공부 좀 해라. 놀지말고 공부 좀 해라.’ 자 그대로 하겠습니다. 누구 가정을 예를 드는건 아니지만. ‘공부 좀 해라 성적이 이게 뭐냐! 방학 때는 너는 학원 다녀야해.’


자, 무지에서 그 다음 뭐가 나온다? 앎이 되지요. 앎이 되고 그 지식에 대해서 어떻게 한다? 맨날 하는거 예습 복습을 해야지 그 지식을 정보를 내가 획득자 소유자가 되지요. 아는 만큼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서 안 만큼 그 만큼 많은 권력을 확보할수 있는 획득자가 됩니다.


그러면 어느 직장에 가더라도 그 직장에서 승진이 빠르게 됩니까? 어떤 가능성이 높아요? 최고 자리에 오를수 있는 절대자가 되지요. 그러면 부모가 어릴 때부터 자식을 이렇게 키웠다면 부모는 자기한테 자기 자식한테 뭐가 되요? 투자자가 되는 겁니다. 투자자.


어떻습니까? 뭐 전혀 이해안될게 하나도 없지요? 확실하게 이해 되시죠? 지금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희생은 약간 보류 했습니다. 없다칩시다. 없다 쳤으면 이걸 한번 지워보겠어요. 희생부분을 지워버리면 이것만 남는거예요. 이것만 남는 거예요.


또 예를 듭니다. 자, 어떤 사람이 자기한테 투자를 합니다. 자기 지시 순환적 이니까 투자를 합니다. 처음에는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해요. 그러면 교회에서 제자훈련해서 알게되요.


아는데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더라.’ 믿음 하나 건지고, ‘믿었으면 염치 없지 구원받았으면 내놔야 될거 아냐. 십일조 해야 복을 받는다. 믿는 것은 예수 피로 십자가로, 이 세상에 복 받는 것은 십일조로, 또는 십일조 돈 없으면 기도, 그것도 없으면 봉사로 교회에  때워라.


그러면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때문에 하늘나라 확장에 기여한 보람으로 하늘나라 상급을 챙길수 있다. 그리고 너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자식들도 잘된다.’ 라고 교회에서 이야기 하더라 이말이죠. 그리고 그런 사례들을 막 강단에 세워가지고 ‘역시 헌금 많이 했더니 30배 받는게 진짜 성경 말씀대로 그대로 되는구나.’ 해가지고 진짜 사람들 은혜받고 난리도 아니라 이 말이죠.


이게 믿음을 천국가는 정보를 뭐가 되요? 내가 획득하게 되면은 이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천국 가는데 필요한 정보를 소유한 사람이 되지요. 그렇잖아요. 소유한 사람이 되죠. 소유한 사람이 된다면 자기가 교회에 20년 다녔는데 어떤사람이 새벽기도 2개월 짜리 왔다, 그러면 자기는 뭘 가르치겠습니까?


자기가 획득한 정보를 그 사람한테 가르치겠죠? 그러면 자기가 무슨 사명이 있는지 없는지 신학교를 갔다. 목사됬다. 안수 받았다. 그러면 교인들에게 집사에게 뭘 가르치겠습니까? 천국가는 방법을 가르치겠죠? 그러면 이 사람은 뭐가 되요? 그 교회에서 실력자가 되는 거예요. 실력자, 권력자가 될 수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천국 가게되면 적게 아는 사람과 천국 가게 되면 천국가도 높은 계급에 예수님 성전에 보다 더 3m, 5m 더 근접한 거리, 소위 임원진에 이사급에 가까이 갈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자기한테 성경공부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했어 이런 어떤 하나님의 복도 많이 획득자 획득자, 소유 했으니까 이게 결국은 자기가 자기한테 뭐 한게 됩니까? 투자한게 되죠.


그러니까 교회적으로 종교적으로도 기독교 적으로도 투자가 맞는 이야기 이고 세상사는 것도 투자로 시작해서 투자로 마치고 영육간의 전부 다 개념은 하나밖에 없어요. 뭡니까? 개념은 오직 나 사랑이예요.


나 사랑한만큼 투자하는거예요. 그런식으로 성경을 100독 1000독하니 무슨 소용있어요. 이런식으로. 자기에 대한 투자개념으로 생각하는데. 10분쉽시다.
 홍민희(IP:221.♡.139.88) 17-11-26 01:13 
가락-요한복음 15장 18절(투자와 희생)171121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두 번째 시간 할 때 투자라는 것을 제가 딱 걸고 이야기 했거든요. 그러면 투자라고 해 가지고 딱 내용을 펼쳐보니까 이 세상에 투자 아닌게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내 구원이 중요하고 남 천당 가는 것보다 나 천당가는 것이 나한테 더 중요해요.


이 세상에서 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땅에서는 모든것은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전부 다 나를 위한 투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투자라고 했지만 성경에서는 자기 사랑이라고 말하죠. 자기사랑.


그걸 어려운 말로 자기 지시적인 순환구조. 자기를 늘 생각하고 마지막 손가락을 나한테 늘 겨냥하면서 빙글 빙글 돌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자기투자라 하면서 거기에 무슨 요소가 들어갔냐 하면은 여기에 놀랍게도 희생 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희생요소를.


주를 위해서 몸을 바치고 주를 위해서 선교사 가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재산은 다 바치고 아브라함 같으면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고, 분명히 자기는 희생을 했다고 했는데 그 희생도 나 자신을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희생이 아니고 뭐다? 투자의 일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희생이 투자에서 벗어날려면 누구를 없애야 하냐 하면요 나를 누군가 없애줘야되요 나를. 나를 없애줘야 되요. 그런데 본인이 본인이 그럼 자살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자살은 이게 뭐냐하면 기껏 자기가 알고 있는 이 세상에서 말하는 죽음이라는 거예요.


본인이 자살하게 되면 그 번개탄 요새 번개탄이 유행인데 번개탄 펴놓고 죽으면 그것은 본인이 생각하는 죽음 이예요. 숨이 끊어지는 죽음인데 성경에서 창세기 2장에서 말하는 죽음은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저주받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이말이죠.


죽어놓고도 죽어놓고도 죽은 것을 몰라요. 막상 죽어놓고도. 죽은것도 모르면서 죽은거예요. 차라리 살지. 죽어봤자 죽음을 몰라요. 진짜 죽음은 누구만 알고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십자가에서 아버지 앞에서 저주 받는 그것만이 죽음이기 때문에. 이것이 죽음의 본 의미입니다. 다른 것은 죽음이 아니예요.


그래서 자살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못 죽어요. 다시 주님께서 호출합니다. 그럼 멀쩡히 다시 살아나와요. 본인은 죽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인간들이 생각하는 식으로 죽이지 않고 저주받는 자로 영원히 살려냅니다. 그리고 영원히 저주를 퍼부어 버려요.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몰랐던 거예요.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재끼고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다가 예수님을 붙이니까 이게 맞을 리가 있어요?


하나님 자체가 사탄이 변장해서 하나님 노릇하는데 사탄을 믿어놓고 그것도 하나님을 믿었다고 우기고 있으니 거기에 예수님 십자가 붙이고 싶어도 자꾸 떨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해요. 복음을 싫어하다 보니까 하나님 믿는데 십자가는 오지마라 이런식으로 믿는거예요.


천지를 창조했지만 창조하신 분이 죽는다는 말은 듣기 싫다는 겁니다. 그것도 사람손에 맞아 죽는다는 것, 이런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내가 믿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내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한테 미움받는 분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생각은 하기 싫은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나쁜놈이 되니까.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로 어떤경우라도 자기를 전적으로 나쁜놈 이라고 절대로 생각을 안합니다. 근원적으로 나쁜놈이 되어버리면 나는 나쁜놈을 사랑하게 되니까 천하의 나쁜놈이 되니까 어떤 경우라도 결국은 누가 나를 보호해야되요?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내가 나를 위로 안하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겠어요.


그러니까 누가 격려합니까? 내가 나를 격려하는거예요. 내가 끝까지 나를 격려하는 거예요. ‘걱정마. 지옥가도 뭔가 문은 있을거야. 걱정하지마.’ 지옥가면서도 자기를 격려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이해를 돕기위해서 제가 지어낸 용어가 뭐냐하면은 나라는 것. 나를 둘로 쪼갰잖아요.


나1, 나2. 나1은 흔히 말하는 나예요. 이걸 제가 자아라고 했지요. 나, 다른말로 자아. 나는 나다. 그런데 나는 나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나를 죽일수도 없고. 사랑한다는 것이 자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극단적인 자기 사랑이겠어요.


얼마나 자기를 사랑했으면 나 이런 꼴 못본다! 해가지고 번개탄 피우잖아요. 이런 꼴 못본다. 끝까지 자기 자신을 못 놓는 겁니다. 놓을수가 없어요. 마귀가 그렇게 인간을 붙들고 있는데 마귀가 놔줍니까? 안되지요.


그러면 나1 이것만 있어요. 나2는 없는거예요. 없는데 주님께서 나2를 만들어 줘요. 두 번째 나를 만들어요. 이걸 가지고 주체라고 했습니다. 주체는 나는 내가 있는 근거를 몰라요. 내가 여기 왜 있는지를 몰라요. 신이 만들었다 하지만 그 신은 그 신에 대해서는 본인이 신이라고 말하면 안되요. 왜? 나 사랑이 신을 죽이기 때문에.


내가 믿는 신이 엉터리라면 그건 신 아니란 말이죠. 누가 나 이렇게 했는지 몰라요 모르는데, 두 번째 나는 뭐냐하면 예수님이 나를 만들어 버렸어요. 예수님이 나를 만들었는데 어디서 만들었는가? 나에 대한 근거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있어요.


예수님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든 피조물이 나예요. 근거가 예수님이라고 분명히 구체적이라니까요. 예수님이 나를 만들 때 그게 영생 얻는 나입니다.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고 그래서 나는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은 이 나 있잖아요. 이 더러운 나.


이 나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죄로 보고, 거기 죄에 대해서 예수님이 죄 사해줘버리면 죄를 사해줘버리면 우리는 여기서 주님앞에 죄인이 되면서 새로운 나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하면은 이것은 나 따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의 관계성, 관계성에서 떨어지지 않는 나, 주님은 나를 용서하시는 분이고 나는 용서 받는 분이고 나는 주님을 가해자고 육신이 가해자고 주님은 피해자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 하시는 그 용서가 하나님의 의가 되어서 우리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가 두 개로 나눠져야 될 이유를 알겠지요? 이 이야기를 나를 하나로 딱 잡아버리면 이게 전부 다 막 개판되어 버립니다. 논리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 버리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버리면 결국 내가 나 사랑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나 똑같잖아요.


똑같으면 결국 나는 나에게 결국 이건 뭐냐하면 이건 주님이 희생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주님이 투자를 한거예요. 나 잘되라고. 나 잘되라고 주님께서 투자를 한셈이 되요. 그러면 나는 갑이 되고 아까 투자의 마지막을 뭐라고 합니까? 내가 절대자가 되죠.


내가 오야가 되고 내가 갑이 되고 주님은 날 살리기 위해서 시다바리 역할밖에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나를 두 개로 나눠줘야 되요. 현재 우리가 사랑하는 것 우리가 느끼고 있는 나, 이 나는 자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마귀에서 나온거죠. 마귀와 창세기 3장에서 마귀가 나온거고.


여러분 아까도 했잖아요. 육신이라는 것은 여전히 갖고 있잖아요. 그러면 육신에서 나올것이 뭐 밖에 없느냐 하면은 내 상 밖에 안나와요. 예수 믿는다 아무리 성령 받아도 나에게는 나 상 밖에 안나온다고. 성령받았지만 육신에 있잖아요. 육신안에 성령 계시잖아요. 그렇죠?


내가 예수 믿어서 갑자기 새 살이 피부가 돋고 이렇습니까? 아니잖아요. 역시 이 몸 그대로 가지고 성령을 받는다 이말이죠. 집구석은 엉망이지만 귀한 천사가 들어오는것과 마찬가지예요. 거룩한 하나님이 이 더러운 하꼬방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 더러운 오두막에. 이걸 성전 삼아서 들어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들어오다 보니까 육신은 육신대로 자기 본색을 멈추겠어요? 계속 발휘하겠습니까? 육신이 멈추겠어요? 계속 발휘하겠어요? 육신은 육신 다워야 되요. 육신 답다는 말은 계속 자기 사랑, 다시 말해서 죄 짓는 일, 내 사랑이 죄 짓는 거니까. 계속 자기한테 투자 하듯이 계속 하겠지요?


그런데 불신자는 누가 없느냐 하면은 불신자는 육신이 있다는 것은 똑같아요. 신자도 똑같은데. 불신자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불신자예요. 안에 성령이 없으니까 이게 죄라고 누가 이야기 해 줄 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불신자들은 특징이 뭐냐? 최선을 다해서 살아갑니다.


최선을 다하여 헌금하고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고 최선을 다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교회 출석하고 봉사하라면 봉사하고 선교하라면 선교하고 최선을 다해서 해요. 그런데 그것을 희생이라고 하거든요. 그 희생을 누구를 위한 희생입니까?


나 밖에 없기에 결국 희생의 모든 목표는 내가 그렇게 해서 절대자가 되어서 절대자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처럼 되어서 어디 간다? 천국에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해서 천국가는 거예요.


그러나 희생은 어떻게 되야되요? 희생의 논리를 한번 봅시다. 아까 투자의 논리는 이야기 했지요. 무지에서 앎, 안다는 것, 안 정보를 그 다음에 획득, 획득하고 획득하게 되면 뭐가 된다고요? 아는 만큼 권력이 되고 권력이 되면 결국 노리는 것은 결국 마지막 내가 신처럼 되리라.


악마가 이야기 하죠. ‘나는 이정도 되니까 나 터치 하지 마라.’ 그것이 뭐를 이룬다 했습니까? 개인역사 인생역사를 이룬다 했지요? 나 이렇게 잘난 인간이라고, 살면 살수록 계속 우기는 거예요. 나 이렇게 잘 나갔던 인간이라고. 개인사. 남한테 안 꿀리기 위해서. 기 안죽기 위해서. 남 앞에 나설 때에 뭔가 근사하게 나서고 이게 힘자랑 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 희생을 봅시다. 희생은 어떻게 되느냐. 희생논리를, 희생은 똑같아요. 무지에서 말씀을 아니까 무지가 뭐가 되느냐 죄가 되지요. 자, 아까는 뭐가 됬습니까? 무지에서 하나의 앎, 정보가 됬지요. 투자에서는. 무지가 야~ 나는 성경에 이런것도 있네?! 예수 믿어야 구원받네 야 이것도 알고 했는데.


희생에 속한 삶은 내가 몰랐는데 알고 보니까 그 안다는 그 자체 내가 알면 알수록 뭐가 된다? 바로 율법이 옴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주를 저주하려 함이라. 내가 앎이 많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요. 죄인 여기서 나오는게 뭐냐하면 내가 주님을 죽였던 가해자가 됩니다.


왜 가해자가 되느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미 확정된 사건이잖아요. 확정된 사건. aorist 라고 하는데 이걸 부정과거하고 합니다. 부정과거, 단발성 과거예요. 딱 한번으로 끝나는 한번으로 다 이룬거예요.


십자가가 확정되었으면 모든 정답은 이미 고정 되었어요. 십자가로 고정되고 난 뒤에 왜 십자가가 정답이냐 와 연관된 고리로서 이런 성도에게 이런 현상들이 생기는 겁니다. 이런 현상들이. 이미 십자가에서 죄 용서 받았잖아요. 예수 안에서 죄 용서 있다 했지요.


예수 안에서는 죄 용서 있습니다. 죄 사함이 있어요. 죄 사함이 결정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뭐가 된다? 사함을 받지 아니하면 지옥간다로 규정되있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죄를 만들어 내고 주님은 죄를 사해주고.


그렇다면 죄 사함을 받는 자는 어디를 간다? 천국에 가는 겁니다. 열심히 하는 것과 다르지요? 아니죠? 열심히 해서 천국 가는거 아니지요? 열심히 하는데 내가 가해자, 주님을 십자가 못박게 한것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거예요. 가해자로서. 물론 말씀이 와서 그렇게 합니다. 가해자 되는 거예요.


어떻게 가해자 되느냐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그 말씀을 지키려고 일단 애를 써봅니다. 애를 써보는데 어떤때는 지켰다고 착각하고 어떤때는 못 지켰다고 하다 보니까 이게 상황 따라서 이게 다 달라요. 성경에 보면 온유하라고 했지요? 분명히 온유하라고 했지요. 온유하라.


그런데 이빨 아플 때 온유하던가요? 성경에 보면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지요? 히브리서에. 그런데 김장할 때 김장하고, 애 바쁘고 할 때 뭐 됩니까? 오너가 야근하라고 하면 올 수 있어요? 못 오지요. 왜? 갑 이니까.


우리는 이 육신은요 힘 센 쪽에 쏠리게 되어 있는 육신을 갖고 있어요. 주님은 되게 허약해요. 개무시 해도 괜찮은 분이고 세상에 있는 오너는 개무시 하다가는 내일 월급 쫓겨날 판이예요. 바로 세상의 힘이 나한테 중요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발산하고 있는 육신을 갖고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 우리는 지금 천국에 가고 있습니다. 천국 가고 있어요.


그러니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입이 10라도 할말이 있다? 없다? 할말 없는데, 처음에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이제는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미안하다는 것을 바꿔야 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자, 결혼을 안했다. 그런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무슨 죄? 간음죄예요. 그리고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은 처벌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죄가 있으면.


그러면 뭐냐하면 여자가 이쁘서 못난 것 같으면 외면하고 싶어요. 왜 이쁜 걸 왜 등장 하는데? 주께서 나 가는 길에 이쁜 여자를 만나게 했다는 것은 내 속에 뭐를 유발 시킨다? 음란죄를 의도적으로 유발 시킨거예요.


왜? 니가 육신이 육신임을 똑바로 알아라 이말이죠. 니가 그 육신 가지고 잘났다고 그 육신 그토록 니가 사랑하는 그 육신이 그 모양이라는 겁니다. 그것밖에 안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그런 이쁜 여자가 나타나고 그런게 없다면 자기는 마치 이 육신 가지고 음란죄를 안 짓는 사람인것처럼 충분하게 행새를 할수 있습니다. 40년동안 한번도 그런 생각 없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다만은 예를 들었다 치고.


그런데 성경말씀에는 성경말씀을 보는 순간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예요. 너무 어려워서 제가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데, 뭐냐하면은 인간의 육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동일해요.


우리가 지금 뭘 보느냐 하면은 내 육신이 어느 정도까지 죄를 짓는 지를 그것을 가늠하지 못해서 문제지, 죄를 지나 잠재적으로 안 지으나 그 육신은 그 육신이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감사한지 주님께서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아요. 우리는 변화가 없어요. 같은 육신인데 변화가 없는데 고맙게도 주님께서 변화를 유발시켜 가지고 맞춤 구원을 해줘요. 맞춤. 각 사람마다 환경에 따라서 맞춤. 맞춘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거기에 필요한 죄들를 노출시키는 맞춤 구원을 해주셔 가지고 기어이 우리를 뭐 만드냐 하면은 우리가 육신에 본성에서 죽을 때 까지 못 떠난다는 사실을 계속 각인시켜 줍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처음엔 미안하다 하지말라고 했지요. 미안하다 하지말고 뭐라고 하라고 합니까? 그래서 모든일에 어떤일에도 고맙고 감사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일본에 결혼 비자 못 받아서 조마조마 했잖아요. 그럴 때 조마조마 할 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조마조마 했습니까? 아니죠?


그러면 생각보세요 소급해서. 하나님께서는 왜 금방 안나오게 하고 왜 조마조마 하게 합니까? 바로 이 일본가는 육신이 이 육신이 결국 하나님 예수님 백날 복음 믿는다 백날 해도 육신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금 그 나이에 그 정도 하지만 나중에 50대에 60대에 40대에 또 무슨 상황속에서 ‘나는 주님을 모릅니다!’ 라고 나올 상황이 터져 나올 가능성이 누구나 예외없이 충분히 다 있습니다. 왜? 그 육신이기 때문에.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또 이런 질문 들어올거예요. ‘목사님 그 육신인데 이미 뭐 구원받은 사람은 그런 육신이 있더라도 죄가 있더라도 그러면 아이고 이렇게 죄인이니까 주께서 십자가 지고 고생했구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만약에 이 육신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안 찾아 오면 어떡하느냐?


이쯤 자진해서 신고해가지고 나 죄인이다 했으면 주께서 성령이 와가지고 ‘그래 걱정하지마. 너 그런 육신이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준비했어.’ 이렇게 딱 타이밍 적절하게 맞추어서 아까 이야기 한 맞춤구원 하면 참 좋겠는데, 안오면 어떻게 되느냐? 죽을 때 까지 안오면. 죽을 때 까지 안오면 어떻게 되지요? 그럴 일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육신이고 죄인됨을 아는 사람은 이미 성령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예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절대로 이런 생각 이런 자아를 둘로 나누는 일도 없을뿐더러 하나밖에 없는 내 몸을 이걸 어떻게 반짝반짝 윤기나게 때를 다 벗겨내고 죄사함으로 다 벗겨내고 건전하게 말씀 팍팍 지켜가지고 상급 팍팍 만드는 그런 육신으로 나아가자 하지 끝까지 죽을 때 까지 내가 죄인중에 괴수라는 그런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편안하게 이야기 합니다. 아주 안심되게.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뭐냐하면은 이거예요.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영적일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의 임의대로, 우리의 뜻대로.


육신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영의 일이 되는 몫은 주님의 몫이지 우리가 트릭을 써 가지고 ‘주님 지금 죄 짓습니다. 영으로 바꿔주세요.’ 이런 꼼수를 쓰지마라 이말이죠. 육신은 육신이지 뭐 육신이지 죄 지으면 죄짓는거지 죄 아닌게 어디있어요. 죄지요.


아까 죄라고 했는데 그게 듣기 싫으면 그럼 바꾸겠습니다. 투자. 평생동안 자기 투자 안하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무슨 행동 무슨 생각을 해도 다 내가 든든하게 이 세상을 더 살아가겠다는 그 의지를 바탕으로 해서 나온 행동입니다. 모든게 모든게 누구를 만나든간에.


그래서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18절 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할 때, 절대로 세상에게 미움받는 짓을 하란말이 아니예요. 그냥 너는 살아가게 되면 육신이잖아요. 목사님 육신 아닙니까? 그러면 육신과 육신끼리는 미움이 없어요.


밉더라도 화해하면 그만이예요. 술은 안하지만 세상사람 술 한잔 먹고 남자 아이가 이래가지고 전부 다 화해하고 끝나는데 지금 이 미움이 세상전부를 통하여서 미움이기 때문에 같은 세상사람까지 화해될 미움이 아니예요. 예수님을 겨냥한 미움이지 나를 겨냥한 미움이 아니거든요.


따라서 예수님을 겨냥한 그 미움이 우리 육신을 통해서 계속 나오는 겁니다. 옛 본성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 말씀은 너희라는 것은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너희라는 것을 조성해야되요. 세상한테 예수복음 전한다고 밉상받고 그런 짓을 할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복음 전하면 미워하겠지 그러면 나 성도겠지 이런 것은 자기가 성도인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일부러 자기가 시키지도 않은 연기를 하는 거예요. 살다보면 미워할 때 저 미움이 나는 저 사람을 미워 미워할 때 미움의 노림수가 목표가 과녁이 있는 것을 한번 보세요.


제가 그 지난 설교 때 했잖아요. 공항에 자신도 모르게 가방들고 가는데 마약 탐지견이 와가지고 냄새맡고 간다고요. 그 안에 우리는 모르는데 우리안에 뭐가 들었다? 바로 그 마약이 들어있듯이 주님의 복음이 들어있으면 나는 그 사람과 친하고 싶어도 그 쪽에서 내 속에 들어있는 그 수상한 물건 때문에 난데없이 우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이말입니다.


그쪽도 그쪽 마음대로 안되요. 왜냐? 그쪽은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미움받는 이유가 마귀가 사도바울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하잖아요. 그래서 복음 때문에 밉상을 받을때는 오히려 성경에 뭐라고 되어있는지 압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되어 있어요.


16장에 있지요. 16장 33절한번 봅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서 너희라는 것은 우리가 연출한다고 너희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예요. 이건 주님께서 친히 말씀대로 움직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예수님하고 똑같이 미움받는 사람으로 너희를 만들어 내는데 그게 뭐냐? 아까 자아라 하지 않고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주체예요 주체. 그게 주체라고요.


그래서 인간은 두 개가 있어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뭡니까? 자기안에 죄도있고 자기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 했지요? 그처럼 자아가 두 개 있다니까요. 두 개 있어가지고 하나는 육신에서 육신적인 나가 있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 예수님의 지체로서의 나가 또 있어요.


그래서 육신의 나는 책임을 누가 진다? 내가 지는 거예요 내가.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아 내가 왜 그런짓을 했을까?’ 자기가 지는데 우리의 주체의 책임자가 누구냐하면 내가 책임지면 안되요. 왜냐? 주님께서 집어 넣었기 때문에 주님이 책임질 문제고, 또 주님께서 책임지시고 인도하실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은 어느 것이 강하냐하면 주체가 자아보다 강하거든요. 성도한테는.


왜? 세상을 이겼잖아요.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우리를 세상에 자꾸 보내는 거예요. 미움받으라고. 니가 행동이 잘못되서 미움받는 것 말고 복음 때문에 미움받으라고 세상쪽으로 자꾸 우리를 보낸다 이말이죠.


그러면 전도는 우리가 합니까? 누가 합니까? 주님이 우리를 앞장 세워서 계속 전도를 하는 거예요.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나는 밥이나 먹고 있는데 그게 전도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우스개 소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배는 작은데 사람이 많이 탔어요. 삐꺽해가지고 어떤 어린아이가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어떻게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용감하게 팍 들어가가지고 어린아이를 건져 냈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같이 동승했던 기자가 ‘야 정말 휼륭하군요. 어떤 마음으로 아이를 구했습니까?’ 하니까 그 청년 하는 말이 ‘누가 나를 떠밀었어요.’ 그냥 떠미니까 자기 살고 아이 살고 둘다 살은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의해서 이 땅에서 전도하라고 떠밀린 사람이지 내 육신으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의 육신은 나에 대한 투자 밖에 생각 안해요. 내가 전도할때는 남한테 어떤 칭찬과 전도 했다는 그 보상으로 내가 원하는 돈벌기에 더 수입이 늘어나는 우리는 전도할 용의가 되 있을 정도로 우리는 너무나 육신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이익이 없다면 손톱만큼도 오지 않는 그런 육신을 주께서 성령을 보내가지고 구원을 해 놓으니 우리는 뭐든지 모든 일에 고맙고 감사할 뿐이죠. 우리 죄만 생각한다면 고맙고 감사할뿐이죠.


성경말씀대로 하면 우리는 출연진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의 하는 일에 강제로 집어 넣은 거예요. 그렇게 와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게되면 오늘 본문이 너무 편해요.


17절 한번 봅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되게 편하죠? 주께서 사랑하게 하신다. 어떻게? 둘다 죄인이라고 죄인인 것을 자랑질 하기위해서.


‘너 그렇게 죄 많은데 어떻게 천당갈래?’ ‘십자가 때문에.’ ‘나도 그런데.’ 그런 이야기 하다보니까 둘이 어떤 희생자 우리 때문에 죽은 자를 돋보이게 하겠죠? 그게 바로 사랑의 관계 아닙니까?


그 관계가 형제 아닙니까? 형제 사이에는 어떤 율법적 관계가 필요 없어요. 어떤 법적 관계가 필요 없어요. 그저 복음으로 못났다 하면 되요. 주의 십자가만 드러내면 그게 형제의 경우에 한해서 그 형제인 부분에 한해서, 에베소서 5장에 남편에게 순종하라 또는 남편들 아내에게 목숨을 바쳐라 하는거예요. 성령받은 성도에 한해서.


어줍잖게 자기한테 투자한 사람한테 목숨 바쳤다가 명품 다 날아갑니다. 그런 어리석은 짓 하지 마세요. 성령도 안 받은 아내한테 목숨 바치고 성령도 없는 남편한테 순종하고 그런 바보 같은 짓 하지 마세요. 둘 다 예수그리스도를 가운데 두고 사랑을 두고 이야기 할 때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지 않을거 아니겠습니까? 투자 가치를 보지 않죠.


그래서 17절에 보게 되면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을 번역하면 주께서 너희 가운데 계셔서 서로를 빠빡 박치기 하듯이 서로 사랑하게 될 때 이 모든 공로는 바로 예수님한테 있지 너희한테 있지 않다는 것을 너희들이 나에게 영광 돌려야 한다 그 이야기입니다.


참 쉽지요? 성경보기 얼마나 편합니까? 내가 하는게 아니고 누가 하신다? 주께서 이대로 꼭 해 내신다 이말입니다. 주님의 시나리오니까. 18절 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아멘! 예 알아차리겠습니다. 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고 도리어 세상에서 택함을 입은고로. 자! 성도의 뿌리는 어디겠습니까? 성도의 주체의 뿌리는 어디겠습니까? 예수님이죠. 소속이 어디죠? 예수님께 소속되어서 주체가 나온거예요.


자아라는 육신이라는 이 껍데기 속에 예수님의 새로운 주체가 등장한겁니다. 이 주체는 예수님이 말씀을 위해서 우리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 집어 넣은 거예요. 그래서 껍데기 육신에서 난 나, 안에 있는 나, 두 개의 나를 의식하면서 우리는 너의 소속을 이 육신을 통해서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우리는 어디로 눈 돌릴수 있습니까?


그걸 계기로 해서 ‘참 내 소속이 참 세상이 아니고 소속이 하늘나라다.’ 이걸 깨닫게 되는 거예요. 빌립보서 어제 지난 오후 강의에 설교 했지만 빌립보서 3장 20절인가 거기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걸 비행기 탈 때만 느낍니까? 비행기 탈 때도 안 느끼지요? 평소에 느낍니까? 집사님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아침에 오늘 눈 뜰 때 알겠습니까? 우리는 땅의 사람이예요. 철저하게 우리는 육신이 그렇게 가르쳐요. 육신의 본성이 그렇게 가르쳐요. 그런데 식겁할 때, 아휴 죽을뻔 했을 때.


갑자기 뭐 1초도 안되서 졸음 운전해 차가 막 뒤집어져 다 죽을텐데 마침 앞차는 완전히 죽고 내 차는 끽 밟아가지고 10cm 남겨두고 아무렇지 않을 때, 우리는 절로 뭐가 나옵니까? 절로. ‘아효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한데 성경 본문 어디지? 아 우리의 소속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주께서 지켜줬구나.’ 이렇게 되지요?


그게 몇초 갑니까? 그거 한 몇 분 밖에 안가지요? 몇 분 밖에 안간다고요. ‘엄마, 어때 사고 났는데!’ ‘괜찮아 주께서 살려줬어.’ ‘아이고 엄마 주께서 살려줬다는 그런 나 못알아 듣는 이야기 하지말고 어떻게 살았는데?!’ ‘브레이크 밟았어.’ ‘내 그럴줄 알았어.’


주께서 살려줬다 하면 그건 말씀에서 온거기 때문에 못알아 들어요. 그런데 브레이크 꽉 잡았어 아차 김주혁 될까 싶어 가지고 브레이크 꽉 잡았더니만 섰어. 내가 평소에 늘 브레이크에 늘 발 올려 놓고 운전하거든. 자기 또 개인사가 나와요 개인사가.


자기가 자기 투자했다 이 말이거든요. 투자 안했으면 큰일날 뻔 했어요. 죽을 뻔 했어요. 평소에 버릇이 뭐냐하면 자기한테 투자하는게 버릇이예요. 소속을 묻습니다. 왜 소속을 묻느냐 이게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은 왜 소속이냐 하면은 아무도 예수님 소속이 될 자격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니 소속이 어디냐 물음으로 말미암아 니가 세상에 속한자인데 어떻게 해서 오게 되었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럼 뭐가 부각이 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희생이 부각되면서 덩달아 우리는 주님의 희생에 우리는 가해자로서 여기에 가담됨을 깨닫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하지요.


사도행전 2장에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설교하니까 유대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어찌할꼬 니가 죽인 예수가 살아나신다 할 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과 의견이 소통되지 아니하면 너는 소속이 다른 소속이라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지시를 못 받으면 주께 숙지를 못받고 지시를 못받으면 큐 신호를 못받으면 너는 소속이 천국 소속이 아니라는 거예요. 성도는 주께서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겁니다.


시켜서 한다는게 아니고 해놓고 보니까 소급해서 그게 주께서 시킨것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시는 겁니다. ‘아이고 내가 이 남자하고 왜 결혼했나.’ 그런데 가만히 성령을 받고 보니까 주께서 시킨일이예요. 다른 남자 아니고 시킨일이예요.


그런데 그것이 주체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되고 자아의 레벨에서는 그 사람이 그때 키가 커가지고 우리집안 다 키작아 가지고 키큰 사람 원했는데 키 컷고 뭔가 월급도 괜찮고 시어머니 될 사람 보니까 그렇게 좋아가지고 날 안괴롭힐거 같아서 결혼했다.


그리고 키 크니까 나중에 2세 낳으면 키 크지 않을까? 싶어서 이 단신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남자는 저 남자 밖에 없다 해가지고 그렇게 했는데 엄마보다 더 작아. 세상에 내 맘대로 엄마보다 더 작아지면 어떻게 할래.


그 다음부터 굉장히 쉽지요? 이게 지킬려고 하니까 그럼 세상이 나를 미워할때는 어떻게 대비해야 됩니까? 자꾸 이렇게 하니까 이게 어려운 거예요. 뭘 대비할게 뭐가 있어? 뭘 대비해요? 자기한테 투자하는 식으로 그러면 안되죠. 대비하는게 아니라 말씀이 말씀대로 되는데 우리를 활용할 뿐입니다.


그다음에 그래서 만약에 세상이 우리 복음 때문에 미워하는 경우가 생기거든 우리는 19절에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도리어 더 기쁨이 넘치지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자가 되니까.


그래서 나라는 앞에 나 앞에 뭐가 붙어요. 세상에서, 중요합니다. 우리의 출처입니다. 우리의 출처는 세상이 출처예요. 예수님을 미워한 그 곳이 우리의 출처인데 세상에서 그 다음에 뭡니까? 간택을 받은거예요 간택.


아하수에로왕이 에스더를 간택할 때 임금님이 자기 여자를 간택하듯이 우리는 신랑의 신부로서 간택을 받았는데 평소에는 우리가 생각이 안나요. 그런데 세상이 나를 복음 때문에 복음 때문에 미움받는게 뭡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고 오직 십자가의 피로만 모든 것이 끝! 이 소리 했다고 교회에서 이 소리 했다고 온갖 욕설을 다 듣는 것. 전도도 소용없나? 헌금도 소용없나?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는데! 온갖 소리 다 들을 때 바로 그때 우리가 기뻐할 이유가 뭐냐하면 주님께서 나도 똑같이 세상에서 나불나불 거리고 주님을 욕했던 나인데 어떻게 간택이 되었는지 지금은 간택된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가 더 커지는 기회가 되는 거예요.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시키는 그런 계기를 주께서는 마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순간순간인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순간 잊어버렸다 해가지고 일부러 또 자기가 연출하지 마세요. 가만 또 잠자는 코털 건드려가지고 ‘나를 미워해라. 핍박해라. 핍박해라. 쫌 나 간택된것좀 느끼게.’ 이런식으로 좀 자기가 자기한테 투자하지 마세요. 그건 투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하면 내가 신앙생활 잘 할려고 애쓰는 것을 내가 알아버려요. 아까 나왔죠 긴 문장 다 잊어 버렸죠? 벌써. 주님을 내가 사랑하고 내가 믿는 순간 나는 뭘 놓친다? 그것과 상관없이 나를 구원했던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모독하게 된다니까요. 무슨 짓을 해도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아 놓고 이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나서버리면 뭐 완전히 주님 십자가 똥칠한게 되요.


자 20절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이런말씀이 여러군데 나오거든요. 그런데 제자들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지금 이 말 한 순간도 제자들은 무슨말인지 모릅니다.


왜?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 아직 안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게 무슨말이지? 하고 자기한테 무슨 명령을 하는지 알고 착각할거예요. 명령하는게 아니고 너희가 모르는 너희가 될 것이다. 그런 예고적인 말씀이거든요.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자 종이 큽니까? 주인이 큽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분명히 주인이 크지요. 주인이 큰데 주인이 목숨을 바친다. 이게 앞뒤가 안 맞잖아요.


원래 그 낮은자가 높은 분을 더 높이기 위해서 아낌없이 종으로서 희생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높음에 대한 예우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을 씻어야 됩니까? 예수님이 발을 씻어야 됩니까? 어느쪽입니까?


예수님 발 씻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는게 우리의 도리고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었지요. 그 말은 뭐냐하면 내가 하는 이 의미는 인간들쪽에서 아는자가 아무도 없다 이 말이예요.


니가 미리 알아서 나를 믿는 그런식으로 구원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예정되어서 구원하지 너희들이 내가 무슨말 하면 기어이 알아듣고 믿습니가 해서 구원되는 그런 방식은 내가 일체 사용한적이 없다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다고 이미 단추를 끊어놨어요. 이런 이야기가 제가 30년이상, 제 개인사가 되겠지만 30년이상 했어요. 자랑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다 떠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방금 이 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그대로 했었어요.


그런데 뭐가 못 마땅한지, 뭐가 주둥이 튀어나올 이야기인지, 입이 불뚝나와 뭐가 그렇게 듣기 싫은 이야기를 했는지, 무엇이 그리 장애물이 된것인지 아무리 이해를 할려고 해도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저는 이게 인간의 능력 이상의 힘이 작용한다고 봐요. 복음의 전파에서는. 결국은 뭐냐하면은 왜 이 복음을 거부하냐 하면은 이거예요. 나는 뭐꼬?! 나는 뭐꼬?! 나는! 나는 몇 개 랬어요? 둘이 아니고 결국 하나네.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살아남으로서 자아가 두 개 되었어요.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자아는 하나예요. 예수님 십자가 죽은데서 안믿는 사람은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까불다가 정신병으로 몰려서 죽었다 끝! 하나로 본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그 죽은 분을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생각한 예수님에 대한 모든 개념은 다 니가 평소에 너를 봤던 개념을 일방적으로 예수님한테 덧 붙여가지고 아마 예수도 나같은 사람일거야라고 생각해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오해한거예요.


그런데 그 곡해와 오해속에서 주님은 십자가 죽으신 분으로 다시 우리 가슴속에 피어나는 겁니다. 그 오해가 우리 육신이 있는 한 우리도 늘 그런 오해일 수밖에 없어요. 또 다른 생명나무가 선악과 속에서 또 튀어 나오는 이게 기적아닙니까. 이게 기적이거든요.


여러분 로또가 기적이지만 반드시 일등은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렇죠? 일등은 있기 마련이죠. 그러나 천명을 모아놔도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신앙 있으면 안되요. 있으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것은 화나는 거예요. 그런데 믿는자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화내지요. 미워하지요. 불신자나 신자나 똑같은데 왜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믿음이 없는 자인가 화날만한 일입니다.


화나게 되면 미움받고 미움받으면 우리는 간택받은 사람이고 누이좋고 매부좋고 우리는 세상에 어떤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감사할 일 밖에 없네요. 감사할 일 밖에 없어요.


그래서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도 그러니까 예수님하고 한통속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하고 한통속이다 말은 예수님 그 하늘나라 아들의 나라에 거기에 이미 너희가 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하고 마치겠는데요. 죽으면 천당가는게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죽었다가 살아나신분과 이미 소통이 되고 의사소통이 되고 주고 받는게 성령 안에서 된다는 말은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죽은 자라면 우리는 같이 죽은자가 되고 세상사람 보기에 죽은자가 되요.


그런데예수님이 부활해서 산자가 되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산자가 되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만 산자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은 이미 죽은자가 되는 겁니다. 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죽은자 이기 때문에 죽은자의 공격과 모든 비난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쓸 필요가 없는거예요.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비교 대상도 안되는 겁니다. 한달 수입이 얼마냐? 그걸 왜 비교합니까.


누가 뭐 한국 야구 뭐 야구팀이 일본한테 2패 당하고 뭐 박정은하고 박영웅은 드디어 중국에서 바둑대회에서 우승, 2년만에 한국이 우승했고 그런게 나오잖아요. 뭐 유소연이 어떻고 골프 박선영이 신인상 타고 모든게 경쟁이잖아요.


모든게 민주당은 의원수가 몇 명이고 정치도 경쟁이고 사람은 비교와 경쟁 빼면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투자를 하기 때문에. 집사님도 옛날에 누가 승진하고 누가 미끄러지고 그런거 많이 했지요? 그렇죠? 직장 다니실 때.


이게 전부 다 경쟁, 모두 경쟁 사회 아닙니까? 지옥에서 많이 하라고 하세요. 지옥에서 바둑두고, 지옥에서 탁구대회하고, 지옥에서 야구대회 하라고 하세요. 지옥에서 골프대회하고. 죽은 놈은 죽은 놈끼리 비교하고 의수 수 많이 가져가라 하세요. 의수 수. 민주당 많이 가져가고 한국 당 뭐 이게 죽은 자들끼리 하는 거예요.


핵개발 김정은 핵개발 많이하고, 트럼프 많이 반대하고. 죽은 자 끼리 많이 하라고 하세요. 산 자는 어디서 벗어났다? 모든 비교와 모든 대조와 모든 경쟁에서 벗어난 사람이 바로 산 자입니다. 그게 산 자입니다. 모든 경쟁에서.


경쟁에서 둔감하다고 또 욕 얻어 먹어요. 경쟁에서 둔감하다고 욕 얻어 먹는다고요. 어떤 삼천명 교회있는데 그 중에서 그런 일 없겠지만 만약 어느 성령 받은 사람이 거기 다닌다 칩시다. 그럴일 없겠지만 만약에 목사가 ‘이번 11월 추수감사 주일로 총동원 주일 합시다!’ 했을 때 다 찬성하지요? 하는데


성령받은 사람이 혼자서 ‘아니요! 산 자는 죽은 자와 경쟁할 필요 없습니다. 교인 수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두 세사람도 주와 함께 있으면 되지요. 주와 함께 있는 것이 그것이 하늘나라지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한다면 그 사람 밉상 받겠어요? 밉상 안 받겠어요? 밉상 받아요. 밉상 받잖아요.


그래서 교회 안 나가잖아요. 밉상 받을 짓을 왜해? 그래서 아예 교회 안 나가 잖아요. 괜히 한 소리 했다가 밉상 또 받을라고. 내 투자한 육신이 맘에 안드는 거야. 나는 괜찮은데 내 육신이 욕 얻어 먹는거 싫어. 그래서 양다리 걸쳐요.


‘그래도 다녀야 자식들이 복을 받지.’ 해가지고 육신은 또 한다리 걸친다고. 욕은 욕대로 해요. 한국 교회가 썩었고 목사가 돈 밝히고 또 온갖 그런 욕 하지 마세요. 한국 교회 욕한다는 것은 결국 경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좋은 교회 다니지 우리교회.’ 우리교회 무슨 좋은 교회예요. 우리교회 천국입니까? 경쟁, 대조, 비교, 이걸 은연중에 하고 싶은 거예요. ‘너 복음 모르지? 나는 복음 안다. 나 이겼다.’ 이런 짓 하고 있었다 말이죠. 누가? 육신이. 이것은 자기 교회 숫자 적어서 질투심 발휘한겁니다. 자기한테 투자하는데 마음에 안들어서 뿔나서 나한테 화풀이 하는 겁니다.


미움을 받으라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이겁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듯이 너를 미워할 때 너희는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라. 아무나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나 때문에. 예수이름으로 미움 받으면 너는 나와 함께 있다. 그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한다면 참 교회 안됩니다. 전부 다 자아가 투자를 빨리 소원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내가 나한테 투자한것에 빨리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 전에 무당 집에 가듯이 교회 왔거든요.


무당집은 이게 너무 지저분 해가지고 좀 서구적인데가 교회 아닙니까? 고딕 되있으니까 파이프 오르간 있고 이러니까 그 현대화 된. 그래서 교회와 무당집 똑같아요. 십자가 대나무 아닙니까? 대나무 흔들리고 있는데 갔다 갔는데.


‘미움 받으세요. 경쟁하지 마세요. 투자 한 것이 그것이 죄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됬지 뭘 원하십니까?’ 이렇게 나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교인들 없습니다. 교인들 없으면 형광등 전기 값 누가 냅니까? 목사 자기가 냅니까?


누가 반대하겠어요? 사모님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내가 이럴려고 당신하고 결혼했나?’ 이렇게 됩니다. 그동안 당신 한다고 고생했는데 성과도 없이 이렇게 끝나나? 자 성과라는 말이 이미 경쟁했다는 말이죠. 나의 개인사하고 너의 개인사하고 누가 주의 종이냐? 이미 은연중에 사모들끼리 경쟁이 붙었다는 뜻이예요.


그 경쟁하는데 자기 남편을 뭘로 보겠습니까? 패배자로 보죠. 염세주의자, 패배자. 지니까 예수 찾는 사람. 그런 수모를 당하겠지요. 그 수모를 복음 아는 목사가 그걸 이해 하겠어요? 이해 안하겠어요? 충분히 이해하죠.


왜? 본인이 육신이니까. 본인의 자아가 살아 있으니까 아내가 이야기 하는 것이 충분히 납득이 되지요. 나도 이기고 싶지요. 그런데 나의 주님께서 미움받으라고 그래야 말씀에 출연진이니까 말씀대로 하라고 했을 때는 누가 이깁니까?


주님은 죽었다가 승리한 분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어둠보다 빛이 승리하니까 덩달아 우리도 욕 먹는 것을 누가 좋아합니까? 아무도 좋아할 사람 없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것이 감사로 나올 수밖에 없는 희한한 기적이 기적이 막 방출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 기적을 통해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오셨다가 죽었다가 부활한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공생애에 동참해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 있음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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