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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0 23:48:47 조회 : 429         
죄 꽃다발 180220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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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59.♡.64.246) 18-02-27 17:34 
강남-요한복음 16장 13절(죄 꽃다발)180220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하십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상당히 말 자체가 난해합니다. 이 세상은 태어나는 것이지 오는게 아니예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야 있는 거지요.


오기는 무엇을 와? 이 세상에서 아빠 엄마 있고 자식 태어나고 그래야 이 세상에 ‘있음, 있음’이 형성 되는데 이 세상 바깥에서 누가 온다고요? 외계인도 아니고. 온다고 할 때 그 다음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오면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오는가? 누굴 통해서 오는가?


오히려 온다고 이야기 하심으로서 이야기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더 난해해져 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온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의도적인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8절에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는데


이 내용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를 새롭게 쉽게 말해서 새롭게 ‘생산’한다고 보시면 되요. 생산. 이 땅에 없는 죄, 없는 의, 없는 심판을 생산하는 거예요. 생산이라는 말은 원래 그런 개념은 없는데 성령이 오셔서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의를 만들어내고 죄를 만들어 내고 심판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만들어 낸다는 것은 재료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뭐가 재료가 되느냐 하면 여기 심판에 대해서는 여기에 보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세상 임금이잖아요.


이 세상 임금이 있어야 될 이유는, 세상 임금을 통해서 뭐가 생산되느냐 하면은 심판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주관적으로 활동을 하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인간들이 예상하지 아니한 것, 인간들이 생각도 못한 것을 만들어 냈는데 그게 뭐냐? 의를 만들어 내고, 죄를 만들어 내고, 심판을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보고 믿으라는게 아니예요. 성령께서 알아서 만드는데 우리가 믿고 자시고가 성령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를 못해요. 본인이 본인 일을 하겠다는데 우리가 뭐 협조해 드릴까요? 뭐 보태드릴까요? 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우리끼리 살면되고 성령은 성령끼리 성령의 일 하면 되요. 신앙 굉장히 간단하지요? 나는 내 인생 살면 되고 주님은 주님 일하면 된다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이 어디에 편입되느냐 하면, 죄 만들고 심판 만드는데 우리가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고 싶은대로 우리가 막 살도록 내버려 두는데 인간들이 막 살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하나님의 의도적이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하는 것을 통해 죄 만들어 지고 심판 만들어 지고.


그러면 의는 어디서 만들어 지는가? 의는 이 세상에서 만들어 지는게 아니고 의에 대해서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의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는 이 땅에서 의가 나오는 것은 그것은 너희들이 손 댈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상에 있다가 아버지께로 가면 거기서 이제 줄줄 흘리는게 의가 흘려지는 거예요.


뭔가 예수님이 위에 올라가는데 땅에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의가 떨어진 것이다 이 말이죠. ‘의’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생산할 수 없고, 내가 만들 수가 없고, 주께서 아버지께로 가면서 생겨난 건데, 이것은 마치 만나를 주워 먹는 식으로 그냥 의는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신앙생활 잘하세요” 할 이유가 없어요. “의롭게 사세요” 말 할 필요도 없고 “죄짓지 마세요” 라는 말도 할 필요도 없어요. 죄는 그들이 만드는게 아니예요. 인간이 없으면 죄가 없다. 이 말은 맞아요. 인간이 없으면 죄가 없어요.


그러나 죄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마귀가 인간을 통해서 죄 짓게 하지요. 또 다른 말로 하면 죄가 인간을 통해서 죄가 나오게 하지요. 인간이 없으면 죄는 없는데 인간이 ‘죄를 한번 지어봐야지’ 이렇게 해서 죄가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예요.


죄의 문제에 대해서 조차도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죄를 생산해 냅니다. 그러면 어디에 써먹을데 있다고 그 죄를 만들어 내는가? 그것은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신경쓸 문제가 아니죠.


만약에 어느 자동차 만드는 공장에 가서 자동차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리어카도 만들줄 모르는 우리가 가서 괜히 그 외부인 관계자 외 사람이 와가지고 “이 설비는 왜 했어요? 이 페인트 칠은 왜 합니까? 이것 할 필요 없는데” 이렇게 간섭질하면 안되지요?


그 페인트 칠하는 것, 이 설비 하나, 모든 공정 하나, 자동기기 하나, 로봇으로 용접하는 하나 다 이게 자동차 만드는데 다 필요해서 하는거라 말이죠. 그런데 그 자동차 만들 줄도 모르는 외부인이 가가지고 이거는 필요 없는건데 자동차에 이런게 들어가나? 이렇게 궁시렁 궁시렁 거리고 모르는게 아는 척하면 이렇게 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주제범위를 넘어서잖아요.


그래가지고 자동차 공장 견학 한번 쭉 하고 나는 모르겠네 자동차 이렇게 만드는지 나는 몰랐다. 그럼 볼일 보세요 하고 나갈려고 하는데 잠깐! 하고 모가지 쥐고 당신도 쓸데 있다고 뭐냐? 뭐 쓸데 있습니까?


고장난 자동차 운전해 가지고 고장난 자동차와 함께 죽는 역할을 해줘야 되겠다 해가지고 자동차 구경하러 왔다가 잡혀가지고 나도 자동차 만드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죄 짓는 작업에 우리가 이미 참여시키는 것이 장차 올 성령께서 하실 일이라는 겁니다. 성령께서 하실 일.


그래 너는 니 맘대로 살아. 니 맘대로 살지만 그것도 죄를 생산하고 심판 생산하는데 거기 다 필요해서 너란 인간이 니 맘대로 사는 거예요. 그럼 의는 왜 안됩니까? 의는 주님이 주님 혼자, 아버지한테 가는게 그게 의라 이 말이죠.


의는 우리 소관 아니예요. 죄도 우리 소관 아니고 심판도 우리 소관 아니지만. 하여튼 세상것을 통해서 죄 만들고 심판 만들고 그것은 예수님 만드신 의와 대비를 시키고 대조를 시키는 겁니다.


자,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한 몇 분 동안 이야기 했는데 그럼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서 지금 뭐가 무의미하게 되었어요? 이게 무의미 하게 되었지요 이게. 그렇죠? 개인. 개인이라는 것이 이게 의미가 없이 되었어요. 개인이라는게.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렸어요. 개인.


이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게 성령께서. 이걸 좀 풀이해서 이야기 하면 성령께서는 “니 이야기 하지 말고 예수 이야기 해” 이겁니다. 강단에서 “목사야 니 이야기 하지말고 예수 이야기 해.” 항상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것은 어디 생산의 재료이기 때문에? 죄와 심판 받아 마땅한 그것을 죄와 심판을 생산하는 제대로 이미 우리는 본의 아니게 이미 말려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성령이 해야될 것은 뭐냐 하면은 성령이 해야 될 것은 우리는 뭘 해도 죄고 뭘 해도 심판인데 의는 누가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 홀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이야기하라고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은 우리의 무슨 가치? 우리 개인적인 의미나 개인적인 가치는 완전히 이거는 인정을 안해줍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런 것을 일체를 인정을 안해줘요. 잘했던지 너 남보다 참 경건했던지 착실했든지 그것들 묻지도 않아요. 니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이것도 묻지도 않는다니까요.


순전히 성령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오늘 13절에 나오죠.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뭐로 말하지 않고로 되어 있어요? 뭐로 말하지 않고? 자기 의로 말하지 않고.


자기의 의지 또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뭐는 말하시며?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그러니까 이거는 성령 자체가 누구의 심부름꾼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철두철미하게 종속된 심부름꾼으로 하는거예요.


성령이 자의로 자기 스스로 말한것도 아니고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경상도 말로 “머라카께예? 머라하면 됩니까?” 이런식으로. 뭐라고 이야기 하면 됩니까? 그냥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그대로 말해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성령이 의와 죄와 심판을 이 땅에서 친히 생산해 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산해 내신 그 결과가 뭐냐하면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겁니다. 성경은 흐름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9절부터 14절까지 쭉 이렇게 나왔거든요.


흐름은 그렇게 되는데 성경 본문 내용은 이런데 이걸 그냥 해가지고는 이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요.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의 평소의 관심사가 성경에 있는게 아니고 어디에 관심있습니까? 개인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사가 예수 이야기 하려고 이 땅에 태어난게 아니고, 우리의 심령은 누구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아 갑니까? ‘나’ 이야기죠. 나. 나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 하는 거예요. 지난 주일 낮 설교 했잖아요. 모든 자랑거리는 예수님한테 넘겨 버리라고. 예수님한테 넘겨버리라고.


내가 이런 짓을 알고 끊어 버리려고 이런짓을 했습니다 할 때 그걸 왜 나쁘다고 생각하면 끊어 버리고 좋은 일 하겠다는 그 의도가 뭡니까? 자랑거리 하나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런사고를 가지고 있는거예요. 자랑거리 하나 만들기 위해서.


그런데 이 자랑거리를 만들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 유지되느냐 하면 이 ‘개인’이 유지되요. 개인이. 나 자신이 계속 유지된다고요. 자기를 부인한다, 부인한다 불교처럼 백날 도 닦아도 이 개인은 계속가요. 부인했던 것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또 나를 잘라버릴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버리고 싶어도 버릴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제 월요일날 대구 강의 했잖아요. 내가 나를 협박한다고요. 이 세상에 가장 협박하는 자가 나예요. 내가 나를 협박해요. ‘너 이런짓 하면 벌 받는다. 이런 짓하면 지옥간다.’ 누가 협박해요? 내가 누구를 향하여? 나를 향하여 협박하고 있습니다.


협박을 하든 협박을 안하든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오늘 요한복음 16장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니가 지금 어디 밖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것입니까? ‘나’라는 이 개인 밖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개인이라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누구 이야기 해요? 우리 개인 이야기 해요? 우리 격려하러 옵니까? 우리 칭찬하러 와요? 아니예요. 누구 이야기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 이야기만 해요. 스스로 성령께서는 자기 이야기 안하고 누구 이야기 해요? 예수님께 들은 예수님 이야기만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들도 비록 개인으로 출발했지만 우여곡절을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 해야죠. 사람이 모두 고민이 있다. 즉 고민은, 사람이 고민이 있는 이유가 뭐냐? 지금 누구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어요? 누구 걱정하기 때문에 고민합니까? 어디 주님 생각해서 고민했습니까? ‘아, 주님 십자가에서 부활해야 될텐데..’ 지금 주님 걱정하고 있습니까?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부활했어요. ‘주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야하는데..’ 아 갔다니까 이미 갔어요. 예수님이 부활해서 아버지께 가게되면 더 이상 우리에게는 어떠한 걱정거리나 근심거리가 일체 없어야 되지요. 말이 앞뒤가 맞는 이야기죠. 없어야.


평소에 주님 생각만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려 하다가 2500m 상공에서 도로 떨어져 나갔다 하면 걱정이 되겠는데, 무사히 아버지께 갔어요. 그것도 무사히. 그 무사히 갔으면 됐지.


그러면 우리한테 더 이상 염려 걱정 없어야 된다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라면 맞다 이말이죠. 왜? 세상은 예수님 이야기니까. 우리 이야기는 없어요. 개인적인 이야기는 쳐주지를 않으니까.


그런데 평소에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뭐가 펄펄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 ‘개인’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개인에게 뭐가 나온다 하냐면 개인에게 죄가 나오고 개인을 통해서 심판의 요건이 주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니가 그렇게 애지중지 하면서 붙잡을려고 하고 안 놓칠려고 하고 아낄려고 아낄려고 그렇게 아낄려고 하는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가 나오고 심판이 나오는데도 ‘니가 그렇게 니가 소중하고 아끼는 대상이냐 이것들아’ 하고 묻는거예요.


그렇게 아껴봐야 나올 주님의 받아줄 의도 안 나오고, 나오는 것은 죄와 심판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니 평생을 니가 아꼈냐? 아직도 못 놓고 있냐? 이렇게 묻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6장 이야기예요.


자,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그 전체가 이게 요한복음 16장 이야기가 창세기 1장에 붙어 있는건 아니잖아요. 마태복음 1장 아니지요? 그 요한복음 16장 이야기 할 때까지 수많은 내력이 있을거 아닙니까. 내력. 경과가 있죠 경과. 그 경과가 왜 이렇게 첨부되어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6장 이전에 15장있고, 15장 이전에 14장 있고 왜 이렇게 첨부되있을까요? 16장 이야기를 설명하려면 그러한 첨부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16장이 설명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구절 하나 은혜받는 것 중요하지만 그걸 설명할때는 성경의 여러 구절이 다시 동원되야 되요. 다시 말씀드리면 16장 이야기는 예수님의 개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개인의 관한 이야기고, 성령께서 오시면 더 이상 우리 이야기에 대해선 일체 주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 개인의 이야기에.


나는 언제 착하게 살았고 바르게 살았고 봉사했고 이런걸 일체 안 물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게 안 되기 때문에. 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의와 죄와 그리고 심판이 생산이 안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 의, 죄, 심판은 주께서 인정을 안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나오는 건 내 개인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 의와 죄와 심판을 거론하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고자하는 영광이 되는 그 의와 심판 죄의 개념이 아니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그 다음 질문이 뭐냐 하면은 왜 하나님께서는 나는 안 받는지? 왜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든 것을 왜 거부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예수님 하시는 것이 의고 예수님이 만들어내는 죄가 죄 개념이고 예수님 만드신 심판이 심판 개념이라면 우리 개인 입장에서는 그냥 의와 죄와 심판 예수님 만든 것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받아들이게 되면 이 개인은 그대로 유지가 되버리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죄와 심판 이것을 받아들이면 우리 개인은 무의미하게 가치있게 날라가버려야 하는데 우리는 내 개인 자체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 만든 의와 죄와 심판을 자꾸 획득할려고 하는 거예요. ‘획득’ 획득은 쉬운 말로 뭐냐하면 ‘소유’지요.


예수님하는 것은 예수님쪽에서 가져다가 내 것만들어 버리죠. 그러면 이것은 주님의 구원이 아니고 누구 구원이예요? 내가 내 구원을 시키는 방식이 되요.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식이 된다고요.


주님에 의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식으로 좋은 아이디어 좋은 정보를 획득해서 그것으로 내것으로 꽉꽉 채우면 ‘나는 구원되겠지..’ 하는데 그거 구원안되요. 왜? 무거워서 안되. 짐이 너무 무거워.


뭔가 이렇게 많이 끌어놓으면 하나 떨어지면 그거 챙기다가 이거 두 개 날라가요. 무거워서 날개 잃은 천사가 되가지고 무거워서 뜨지를 못해. 뜨지를 못해요. 그렇다고 해서 그렇다면 주님의 것으로 내가 없어져야 될텐데 주님이 이런이런 일을 하셨습니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쳐도 그런 이야기를 해도 우리 개인이란 인식이 없어집니까? 예?


만만치 않지요? 녹록치 않지요? 주님 하세요 나는 나대로 살께요 하고 또 자기 개인을 고수하게 되지요. “아 주님 훌륭하시네 하지만 나도 뭐.. 한 인간합니다.” 이런 식으로 따로 챙기게 된다 이말이죠.


그 아까 제가 우리가 개인이 살아있으면 주님의 구원이 아니고 무슨 구원이라고 했습니까? 이게 내가 벌린 나의 구원이 되지요. 나의 구원 작전이 됩니다. 바로 교회에서 교인들을 자꾸 이런 식으로 몰아넣지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시면 당신은 구원됩니다. 구원 작전을 자꾸 벌여주는데.


예를 들어서 국자 봅시다 국자. 국자가 이렇게 생겼잖아요. 국자가 국을 떠가지고 이쪽으로 옮길 때 이쪽 국을 국자가 이렇게 생겼잖아요. 앞부분을 턱이라고 해요. 푹 뜰 때. 그럼 일단 국이 국자 안으로 삭 들어오게 되면 이 턱만 넘으면 자동적으로 쭉 미끄러지면서 이 안에 담기겠죠? 빠져나갈려면 턱을 넘어서야 빠져나가잖아요.


주님의 의가 국자라면 우리를 푹 떠버리면 주님의 의란 턱만 넘어버리면 더 이상 우리가 내가 스스로 의로워질 이유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턱을 넘어버리면. 이제는 미끄러질 일만 남아있어요.


국자 뜰 때 우리가 만약에 이렇게 고깃덩어리, 한우 고깃덩어리 1이라면 국자 떠오면 나보다 먼저 떠온 고깃덩어리 2도 여기 있고 고깃덩어리 3도 있을거 아닙니까? 그러면 고깃덩어리 1이 나라면, 넘어서 여기 물이 있고 출렁하고 섞이면 반갑다 고기야. 고기2, 고기3 다 모여 있다고요. 이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성령에 의한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고서는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지요? 같은 주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이야기했고 그 주를 받은 사람은 이 턱을 넘은 거에요.


턱을 넘어버리면 여기서는 더 이상 뭐가 되느냐 하면은 개인이 아니고 여기는 뭐가 되느냐? 고기1, 고기2, 고기3가 되는 거예요. 의의 열매1, 의의 열매2 이렇게 된다 이말이죠. 그런데 여기 모인사람이 자기 이야기 하겠어요? 국자라는 새로운 환경, 오늘 제목을 ‘국자 환경’ 국자라는 환경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까?


“이 동네가 어떤 동네지? 희한한 동네네. 어떻게 개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개인 이야기는 나올 이유도 없네. 이 바닥에서는.” 내가 어디서 무얼 하며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는.


왜냐하면 그 이야기로 구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와서 주님의 국자가 동원되야 되고 이게 성령인데요. 성령이 동원되야 될 걸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자기가 국자를 들고 괜찮은거 뭐 십자가 복음, 성령, 삼위일체 괜찮은건 다 골라가지고 골라가지고 골라 골라서 이 개인이라는 그런 그릇에다가 담아버려요.


담으니까 이 사람이 성령을 안 받은 사람에게서 나올 건 무슨 이야기 밖에 없습니까? 주님 이야기 입니까? 내 이야기 입니까? 자기 이야기죠. 자기 이야기. 내가 이렇게 해서 이렇게 구원 받고. 자꾸 자기 이야기 튀어나와요 자기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자기 이야기 나올 때 제가 늘 좀 시비조로 하는게 그렇게 자기 이야기 나올 때 그렇다면 이 사람이 나중에 치매 걸리면 치매 걸리면 국자고 뭐고 다 던져버려요. 치매 걸리면 자기가 담아놨던 것 다 빵꾸 나가지고 다 쏟아 버리고 평생 끌어 모은 고귀한 언약, 십자가 복음 성경100독 싹 다 빠져나가.


남은 것은 썩어 빠진 자기와 국자만 들고 있는 국자들고 지옥에나 가지. 그게 왜 지옥갈 수밖에 없냐면 주님의 의는 그게 아니거든요. 주님의 의는 그게 아니예요. 그렇다면 이 요한복음 16장이 창세기 1장에 갖다 붙였으면 좋겠다 싶으시면 창세기 1장을 넘어 요한복음 16장에 있는 이유가 뭐냐?


그러면 참 요한복음 16장 이전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은 무슨 이야기냐? 멀리 갈 것도 없이 요한복음이니까 요한복음 1장이 있겠지요. 2장이 있겠지요. 그리고 마태복음 1장이 있겠지요. 2장이 있겠지요.


그러면 그거는 뭐냐하면은 예수님의 공생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떤일이 있었는가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날 때 오늘 강의를 들었으니까 ‘사람을 만났다’라는 말도 되지만 그것을 오늘 강의들은 자들은 예수님은 개인들을 만났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개인들을.


오늘 강의가 다른 강의 못지않게 상당히 어려울거예요. 어려운 이유가 뭐냐하면은 자신을 보편자로 간주하는 것, 이게 바로 개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개인을 분석을 해보면 자기를 보편자로 합니다. 보편자란 말이 어렵지요?


그러면 알기쉽게 보편적 기준점으로 이렇게 보시면 되요. 보편적 기준점으로. 보편적 기준점인데 보편적 기준점으로 이런 절대 기준으로 살아가는 이걸 개인이라고 해요. 이걸 개인이라고 합니다. 보편적 기준. 이것은 말이 이상한게 보편적 기준 세상을 전체를 내가 보기에 내 기준으로 이 인간도 저 인간도 평가하는, 이게 보편이거든요. 보편적인 기준점, 절대 기준자, 그게 나다 이 말이죠.


보편적 기준점이라 보편이라 하지만 말을 다시하면 자기 자신을 특수자로 보는 거예요. 특수자. 특수자. 그냥 특수자가 아니예요. 독보적인 특수자. 이걸 두자로 하면 뭐라고요? 이게 개인이라고요 개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되요. 그런데 우리 자신을 몰라요. 왜냐면 우리 자신을 알고 남을 만나는게 아니고 상대에 따라서 내가 그 때 그 때 달라져요. 30대 나하고 40대 나하고 50대 내가 달라요.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서 카멜레온 같아. 카멜레온~ 하는거 있잖아요. 카멜레온 같아. 그때마다 변색해 우리는. 아내 대할 때, 자식 대할 때, 남편 대할 때, 회사에서 상사 대할 때, 뭐 교회 목사 대할 때 전부 다 달라요.


그 중에 내가 꼭 집어서 이것은 나다 할게 없어요. 오늘 제목을 카멜레온이라고 할까? 카멜레온~ 그러면서도 본인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니까요. 10년 살았는데. 10년 살아도 몰라요. 20년 더 살면. 몰라요. 그러면 30년 더 살면 치매 걸려서 더 모르지. 늙으면 더 모르지.


평생을 살아도 내가 누구인지 정해놓은게 없는데 이상하게 속으로는 남을 평가해. 자기를 보편적 기준점으로 삼았다니까요. 그래서 이게 이거하고 구원하고 연관시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구원하소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저를 구원하소서” 하면 예수님께서 “니가 누군데?” “가만 보자 내가 누구지? 모르겠습니다.” “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뭘 건진단 말이냐.” 이렇게 되거든요.


자, 네 사람이 있다. 아무렇게나 무턱대고 네 사람이 있는데 전부다 네 사람다 본인을 개인으로 봐요. 개인. 그렇지 않고서는 정신병자거든요. 전부다 개인으로 봐요. 개인으로 보니까 전부다 각자 보편적 기준점이고 특수자예요. 특수자들.


주님이 이들 사이에서 다 만나요. 이들 사이에 다 만난다고. 이들을 다 만나요. 이들을. 이들을 다 만나요. 요한복음 16장하고 있는데 1장부터 15장까지 뭐가 있느냐? 이들을 만났어요. 이들을. 이들을 만났다니까요.


이들을 만났을 때 이 개인들이 자기가 특수자라는 것을 감추고 양보하고 협상하고 정치적 협상해 가지고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요. 사회를 만드는데 그 사회를 만드는 방법을 제가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어디서 만약에 전화가 온다고 합시다. 띠리리 띠리리. 대화보면 벨소리 "------" 벨소리가 났다. 그리고 어떤 여자가 “누구세요?” 전화를 받았다. 그러면 저쪽 상대방 전화 건 남자 목소리가 들려요. “나야. 잘있어?”


벌써 전화 내용이 수상하지요? 벌써 헤어진지 좀 오래됬다 생각 안듭니까? 띠리리리, 누구세요? 나야 잘있어? 누구세요? 하는 그 음성 알면서도 한참 뜸을 들여요. 뜸을 들이다 여자 하는 말 “------미안해.” 찰칵 끊어버렸다. 일방적으로.


자, 이건 무슨 이야기겠어요 이거는. 누구세요? 나야. 잘있어? 아부하는 형식으로 잘 보이려고. 뜸을 들이다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동등’입니다. 동등.


여기에 남자 여자 어떤 차별이 없어요. 똑같이 모든 인간은 개인을 동등화 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차피 내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면 똑같이 동등이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일방적으로 끊었잖아요. 찰칵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단 말이죠.


남자가 전화한 것은 옛날 우리 다시 한 번 시작해보자고 전화 한거예요. 전화를 먼저 한거예요. 그런데 여자가 당당하게 그가 한 제안을 여지없이 밟아 버리고 “미안해” 하고 일방적으로 끊었단 말은 ‘내가 니 말 들을 이유 없다’ 이렇게 되잖아요. 나 니말 들을 이유 없다.


‘너는 니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가자. 나 더 이상 찾지마라. 이제 너한테 미련없다.’ 아마 뒷 이야기를 다시 쓰라면 다시 또 전화해요 남자가. 해가지고 그럼 여자가 “왜?” 남자가 “누구 생겼어?” 이러겠죠.


이게 뭐냐하면 이게 인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 동등한 사회. 동등한 사회에 누가 끼어 들었습니까? 예수님이 찾아왔거든요. 예수님을 믿을 권한과 자기 그것은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하지요. 동등이란 말을 왜 주장하느냐 하면 동등할 때 사회가 좋다는게 아니고 가장 나 다움 나의 개인다움이 가장 확실하게 주장할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미안해’하고 끊어버렸단 말이예요. 미안하긴 뭘 미안해. 지금 귀찮다는 뜻인데. 이걸 끊어버렸다는 말은 내 인생에 대해서 건드리지 마라. 내 인생 건드리지 마라. 이건 내가 내 인생이니까 건드리지마. 라는 그러한 동등한 사회에 누가 오셨다? 예수님이 오신거예요.


그러니까 이 개인들이 예수님을 튕겼습니까? 영접했습니까? 튕겨버렸지요. 사정없이. 그러니까 십자가에 죽었잖아요. 튕겨버렸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인간을 돌아다니면서 결국 인간에게는 뭐온다? 개인이라는 것은 개인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지요.


이 동등과 비슷한게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은 옛날에 나왔던 광고에 이런게 있어요. ‘낯선 여자에게 내 남자의 향기가 난다’ 뭐 이런거 있거든요. 자, 길을 가다 마주쳤는데 내가 쓰는 향수와 동일한 향수 냄새가 나는 것. 같은 향수 쓰는걸 가지고 ‘동등’이라 하지 않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동질’이라고 해요. 동질. 이걸 동질이라고 해요.


그럼 인간세계는 개인이 괜찮아 보이면 그와 똑같은 향수 쓰고 싶고 똑같은 안경쓰고 싶고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개인의 확대라 하는데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내가 함으로서 저 사람처럼 모방하면서 내 개인의 영역은 확장되는 거예요.


동질과 동등. 틀려요. 동등이라는 것은 지위가 존재 지위가 같이 평등한 것을 이야기하고 남하고 나하고 똑같다는 뜻이고, 동질이라고 하는 것은 남이야 뭐든간에 나는 저것 갖고 싶어서 얼마든지 저 사람처럼 나도 할수 있다는 더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것이 동질이예요.


그러면 예를 들어서 동등과 동질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되는데요 예를 들면 결혼 해볼께요 결혼. 결혼은 동질하고 싶어서 동등이라는 제안을 한게 결혼이예요. 남들이 결혼하니까 나도 결혼하고 싶어서 라고 할때는 동질이죠.


동질인데 나만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티격태격하니까 그래 내 남편도 나처럼 같은 지위를 부여해줄게 우리 결혼하자. 동질을 위해서 동등을 허용하는 것이 결혼이죠. 그런데 아무리 결혼해도 누구는 없어지지 않습니까? 절대로 개인은 없어지지 않지요. 오히려 강화가 되지요. 강화. 개인은 더 굳히게 되지요.


자, 동질 동등 언급한 이유는 개인의 관심사는 절대로 개인에게서 비켜나지 않는다는. 절대로 개인의 관심사는 개인에게서 눈 돌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동등 안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울분과 분노가 이어지고 그게 어디로 이어지느냐 하면 범죄로 이어지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뭔데 나를 개무시하느냐?’ 이렇게 하지요. 이게 무엇을 염두해두고 이야기 하는 겁니까? 너만 개인이냐? 나도 개인이다. 개인은 이 세상에서 뭘 해야 된다? 개인은 반드시 동등해야 된다는 원리원칙을 니가 왜 위반하느냐? 돈 좀 있으면 다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뭐라고 나옵니까? 니가 재벌이면 다야? 이렇게 나오지요. 재벌이면 다야? 어디서 과거사 들먹여 가지고 방송에 내고 빨리 내려! 하잖아요. 황금빛 그대에 나와요. 니가 재벌이면 다야? 니가 돈 좀 있다고 나한테 유세해? 유세 떨어? 나도 집에 가면 대우받는 아버지야. 하잖아요.


그럼 재벌이 픽 웃지요. 니가 그렇게 동등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은 니 안에 무슨 욕망있다? 너 나처럼 부자되고 싶은 동질 그런 심보가 있고 그런 욕망이 있잖아. 그러니까 인간은 개인을 중심으로 해서 남처럼 되고 싶은 동질과 이것은 개인, 자기 위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어쩔수 없이 남도 나와 같이 인정해주는 동등을 약간의 한시적으로만 임시적으로만 동등해 주는 것처럼 동등해 준다는 것은 뭘 한다? 개무시하지 않는 것처럼 사실은 개무시하지만, 개무시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오직 자기만 관심있는거예요. 자기만.


이 자기만의 긴 그림자를 가지고 개인사, 개인 역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아까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누구 이야기? 예수 이야기 아니고 누구 이야기 입니까? 자기 이야기죠.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올때까지 예수님 누구를 만났습니까? 오로지 자기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을 만난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그 다음에 성령이 오실 때 그럼 이 개인과 동질과 동등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인정합니까? 인정하지 않지요.


그걸 뭐로 인정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 공생애에서 드러나는 거죠. 예수님께서 처음에 공생애할 때 복음을 전하시면서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이 나갔습니까? 어떤 개인에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니까 말씀을 전하니까 뭐가 튀어나왔어요. 뭐가 나왔습니까? 귀신이 나갔지요.


이 말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개인한테 호소해서 개인이 스스로 개개인을 포기할 수 있는 존재자가 아니예요. 그러면 이 개인이 스스로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면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이 안에 뭐가 있어요. 뭐가 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귀신이 들어 있지요.


그렇다면 사람들 일반 대중들은 귀신 쫓아 내면서 왜 주님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의 마귀는 그 큰 귀신은 왜 안쫓아 내는 겁니까? 잔챙이는 쫓아내고 너의 아비는 마귀다 해놓고 그 마귀는 왜 안 쫓아내지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래놓고 주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예요?


누구는 귀신 쫓아내주고 누구는 바리새인 그것들은 “독사의 새끼들아” 해놓고 그 독사를 빼주지 왜 독사의 새끼들 욕만하고 독사를 안빼주는 거죠? 그 해답 이야기 한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신학자들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개인을 구원하는게 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공생애 할 때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 하면은 바로 성령과 함께 있어요. 성령의 지시를 따랐던 예수님이 예수님이 죽고 승천하고 난 뒤에는 이제는 성령이 그 승천하신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성령이나 성령도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령은 예수님을 뭐로 옹립하려고 합니까? 성령께서 어떤 분이냐 하면은 성령께서 도와주되 성령 본인이 누구의 지시를 따를 수 있는 어떤 분으로 상대를 높이기 위해서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거예요. 참 희한하죠. 성령께서 예수님을 도와주는 이유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도와준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령도 그렇고 성부도 하나님 아버지도 그렇고, 모든 중심이 누구 중심이예요? 예수님이 중심으로 이 활동이 돌아가는 거예요. 예수님 중심으로.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이 악마의 적은 하나님이 아니고 악마의 적은 예수님이 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하나님을 부정하라고 우리를 가르치는게 아니고 뭐를 부정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중심을 계속 극구 부정하라고 한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아담에게 찾아온거예요. 아까 악마가 아담에게 찾아온 이야기 하면 아까 제가 유투브할 때 언급을 했는데.


그 뱀이 인간에게 찾아가는 그 이유, 그 이유는 인간 속에, 여러분 아까 뭐라했죠? 인간 속에 뭐가 들어있다 했어요? 부분이 아니고 인간 속에 전부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 유투브를 다시 틀어줄수도 없고, 잠깐만 하겠습니다.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가 다수 아닙니까? 다수. 하나가 아니잖아요. 다수가 아담에게 들어왔지요. 그럼 아담은 1이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이 하나고 우리가 다수라는 것이 이게 상식인데 성경은 이게 아니고 하나 속에 우리가 다 들어가버렸다 이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진짜 마음은 어디에 있어요? 아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가 아버지의 뜻이에요. 아담에게. 그걸 누가 아느냐? 마귀가 알아요. 마귀가 알기 때문에 그 아담을 노린 거에요. 아담을.


왜냐면 아담속에 오실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이 인간 속에 소복히 그 안에 압축되어서 들어 있어요. 따라서 악마는 인간을 건드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전부가 건드린 것을 건드릴 수 있다고 본거예요.


아담으로 하여금 범죄케 함으로서 하나님의 전부를 괴멸시킬 수 있는 그러한 요소로 본겁니다. 그래야 그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예수님의 원수가 돼요. 마귀는 오직 주 예수가 주 되는 것만 방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중심이 되지 않으면 뭘 모르느냐 하면 마귀가 하는 짓을 몰라요. 뭐가 마귀인지 몰라요. 마귀가 인간에게 집어 넣은 것은 마귀가 인간에게 올 때 뭐가 마귀냐 하면 마귀는 오직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의 또는 자기 자랑 이게 바로 마귀예요. 이게.


마귀가 흉축하게 얼굴 벌겋고 이게 아니고  마귀라 하는 것은 자기 의 때문에 그런거에요. 이 세상의 모든 범죄, 이 모든 범죄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모든 범죄는 자기 자랑과 관련되어 있다고 했지요. 자기 의와 관련되어 있어요. 자기 의와.


교회 주의해야 됩니다. 교회라는게 뭘 만들어 내는거예요? 교회라는 것은 개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을 인정해주고 개인 속에 뭘 집어넣어라? 너만의 맞는 뭘 집어 넣어라? 뭔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만한 자랑거리와 의를 만들어내라 하잖아요. 그게 바로 마귀라니까요. 마귀. 그게 바로 마귀라니까요.


성령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대비해야 될게 뭐냐? 악령. 악령은 무슨 작업을 했는가를 반드시 같이 대조를 해줘야 성령의 하신 일에 객관적인 것이 나타나요. 그런데 악령이 하는 것을 먼저 누가 먼저 만나본 분이 있죠? 누가 만났습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이 인간 속에 왔어요. 오니까 귀신들은 내쫓았어요. 그런데 누구는? 사탄의 자식이라는 뱀의 독사의 새끼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 악마를 안쫓아 버렸잖아요. 왜?


사탄의 그 뜻이 강렬하게 있는 자에게는 예수님께서 자기 스스로를 자기가 죽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예수님이 ‘내가 죽어야 성령 온다’ 했지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내가 죽어야 뭐 되니까 나 죽을래?라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죽어버리면 뒤에 뭐가 와도 이거는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몰라요. 혹시 자식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안중근처럼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결국은 자기가 소속 돼있는 확장된 개인이죠. 소속된 그 단체로서 하는거고.


죄인을 위해서 죄를 위해서 죽은 사람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죽어야 성령이 온다는 거예요. 죽어야 성령 온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동안 인간의 턱을 넘을 수 있는 국자의 턱을 넘을 수 없어요. 그 국자가 뭐냐 하면은 악마의 악령의 틀을 넘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악령은 인간에게 뭘 만들어 놨습니까? 인간을 뭐로 만들어 놨어요? 개인으로 만들어 놨잖아요. 개인은 무소유라고 준게 아니고 개인은 스스로 동등하고 나란 것을 절대화 시키기 위해서 개인이 우리한테 환원되는 거예요. 각자각자 다 그래요. 자기 밖에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보편적 아까 뭐라고 했어요? 기준이 보편적 기준. 자기가 보는 것이 자기가 기준이예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자기만 옳다는 거예요. 이거는 마귀가 그랬던 간에 일단 기분 좋다 이 말이죠. 내가 신이 되니까 신처럼 되니까.


이걸 이미 맛을 봤는데 이걸 왜 포기해요? 미쳤어요? 그걸 포기하게?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걸 왜 마다해요? 바보 등신도 아닌 이상은. 그러니까 예수님을 밀어내는 거예요. 어이 하나님! 나 하나님인데 죽어서 지금 지옥 가려고 하니까 좀 무서우니까 조치 좀 해주세요. 지금 우리는 이런 식이라니까 교회 오면서.


나 괜찮은데 어떻게 좀 해달라는거예요. 사랑의 하나님 일로 와바 이리로 와봐 뭘 해주면 죽어서 천당갈 거야? 빨리 이야기해. 지금 시간 없어. 지금 돈 번다고 빨리 이야기해. 이런식이라니까요.


나 다치면 하나님이라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거죠. 마귀가 나설 필요가 없지요. 결국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떠밀으라고 하는 역할이예요. 결국 예수님 마귀한테 떠밀려가지고 죽었지요. 죽었더니 그 다음에 뭐가 나왔다?


이거는 감당이 안되는 성령이 온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개인이라 여겨 죽였는데 그 뒤에 나오는 것은 개인이 감당을 못하는 분이 나와요. 그거는 10분 쉬고 합시다.
 홍민희(IP:59.♡.64.246) 18-02-27 17:35 
강남-요한복음 16장 13절(죄의 꽃다발)180220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합시다. 두 번째 시간에서 예수님 가시고 난 뒤에 성령이 오게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사람들이 성령이 힘이냐? 아니면 부활의 힘이냐를 가지고 혼동을 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했지요?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힘을 미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힘이 없어요. 부활은 ‘장’을 형성하죠. 장. 장을 형성해요. 영어로 하면 field 인데, field를 형성하는게 부활이예요. 예를 들면 어떤 총알이 맹렬하게 총알이 돌진해 나가면 그 주위에 뭐가 생기냐하면 공기의 파형이 생기죠?


영화같은 거 보면 고속으로 찍어보면 총알이 파악 지나가면서 여기서 흔들림이 파형이 생겼죠. 십자가가 지게되면 나머지 그 영역, 새롭게 형성되는 그 장을 가지고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


부활 보자 하면 부활은 안 보여요. 부활 보자하면 거기 십자가 들어 있어요. 우리가 부활 안에 들어 있음이 아니예요. 우리는 십자가 안에 들어있죠. 십자가 안에 들어 있어요. 부활은 십자가 지신 분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파열된 장, 파열되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장이 부활의 장입니다.


장이니까 면이죠 면적이 되겠지요. 그러면 그 이차원적인 면적이 되는데 거기에 활동하는 것은 부활의 힘이 아니고 성령의 힘이예요. 성령의 힘. 그런데 왜 자꾸 사람들이 부활에 관심이 많으냐 하면 개인 구원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개인 구원에.


예수님의 절차가 내 절차라고 간주를 하고 예수 믿으면 그 절차 그대로 따라가서 나는 천국간다 된겁니다. 그러면 방금 누가 천국간다고 했어요? 누가? 나죠. 나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두자로. 개인이죠.


개인을 구원하는 천국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개인을 보낸 천국은 없어요. 그것 때문에 아까 제가 유투브할 때 건너갈 강이 몇 개라고 했어요? 건너갈 강이? 두 개. 하나는 홍해고 하나는 요단강. 두 개라고 했지요.


천국은 인간을 안 받아줘요. 받아주는 것은 언약궤만 받아줍니다. 인간을 안 받아줘요. 그러면 들어가는 인간은 언약궤에서 새롭게 생산되야 되요. 생산이란 말을 또 씁니다. 언약궤에 의해서.


생산될려면 기존의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죽여야지요. 기존 인간을 죽이는 겁니다. 살리는 것은 성령의 힘으로 살려내고 부활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살려내고 죽이는 것은 십자가로 죽고 그러면 부활의 힘은 어디 있냐 하면은 예수님 개인에게로 가는 거예요.


죽었던 예수님을 부활의 힘으로 또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힘으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 보면.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살려내면 그것을 뒤늦게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부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부활.


부활은 우리와 같은 개인이 아니예요. 주님에 대한 특수한 거예요. 주님의 특수한 것. 그 주님의 특수한 것을 가지고 첫째 부활이라고 하고 그 다음에 그 다음 둘째 부활은 둘째 부활이라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와요. 첫째 부활, 둘째 부활.


둘째 부활은 예수그리스도의 개인의 확장이라고 보셔야 되요. 예수님의 그 개인의 확장. 그걸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굉장히 신약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복잡해요.


그렇게 복잡한데도 그동안 복잡한 줄도 몰랐다 그거는 지금 엉뚱한 성경에 있지도 않는 이야기를 교회가 수천년동안 해왔던 거예요. 뭐냐하면 교회가 이렇게 있는데 교회가 이렇게 있다면 바깥에서 목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여러분 구원받고 싶지 않습니까?”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됬어요. 질문자체가.


여러분 죽어서 천국가고 싶지 않습니까? 이 질문자체가 잘못됐어요. 질문 자체가. 인간이 구원을 해주고 천국을 갈려면 애시당초 주님께서 선악과 조차도 심지 말아야됐어요. 선악과 자체도 심지말고 생명나무만 쫙 깔아가지고 아주 가로수를 만들어버려야돼.


그리고 마귀는 아예 에덴동산에 마귀가 못들어오도록 막아줘야되요. 우리는 그럴 때 우리는 인간적인 의미에서 그럴 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해코지가 아예 안들어 오도록.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엄마가 자식에 대해서 아예 독감 안걸리게 하는 엄마가 좋은 엄마입니까? 독감 걸리고 병원 가주는 엄마가 좋은 엄마예요? 아예 안걸리게 해줘야지요. 그래야 자식이 덜 고통스럽잖아요.


자기 자식이 고통스러운 것을 의도적으로 노린다? 그것은 뭔가 이상한 엄마 아니예요? 예? 엄마가 아니고 엄마가 바뀌었는가? 출생의 뭐 비밀이 있는거예요. DNA 조사 한 번 해봐야겠네. 애가 아픈걸 그렇게 좋아한다? 이상한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상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상한 하나님과 매치시킨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이예요.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태어나게 하신거예요. 이땅에.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방해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가 주님의 하는 모든 일에 훼방자로 이땅에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처음 만들 때부터 주님의 훼방자로 안 만들면 될게 아닙니까?


훼방자로 안 만들어 버리면 예수님이 주가 되지를 못해요. 처음부터 모든 피조 세계는 예수님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 있던 하나의 바탕입니다. 배경 세트예요. 배경 세트. 연극 무대 뒤의 배경이라니까요.


교회가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 구원받고 싶지요? 여러분 죽어서 천국가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오세요 라고 했으니까 그들이 교회 갈때는 이미 노림수 가기고 나와요. 노림수 가지고 가면서 구원의 대상이 누굽니까? 본인이죠 본인. 개인이죠.


천국가는 대상이 누구라고요? 본인이죠. 이런 천국은 성경에 없는 천국이예요. 여기와서 예수 믿으라는 겁니다. 누가 믿어요? 내가 믿지요. 자기의 결심과 각오로서. 이거 사람들 지옥 보낼려고 마귀가 만든거예요. 이 교회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무슨 종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지요.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을 기쁘게 하면 무슨 종이다? 지옥에서 온 마귀에서 온 지옥의 종이예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을 기쁘게 할 이유가 하나님한테 있다? 없다? 일체 없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기쁘게 할 그런 마음이 없어요.


복음은 기쁜 소식이예요. 복음은 왔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있습니까? 없습니까? 단 한명도 없어요. 복음을 기뻐한 사람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만들어줘요. 왜? 아무도 복음을 반기지 않고 싫어하는 그것들을 재료로 삼아서 복음을 만들어요.


결국은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복음의 주인공은 인간이 기여했다가 아니고 오히려 인간한테 핍박을 받는 그 당사자가 핍박에도 불구하고 악마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홀로 복음을 만들게 되는 겁니다. 그게 원래 하나님께서 만들고자 하는 천국이예요. 아들의 나라예요.


그럼 우리 역할은 무슨 역할만 하면 됩니까? 복음을 싫어하는 역할하면 되요. 주님을 싫어하는 역할 하면 된다고요. 그걸 어떻게 주님을 싫어해? 사랑해야지.. 하는데 사랑하나 싫어하나 그게 싫어하는 거예요.


뭐가 있는 이상은? 우리에게 ‘나’가 있고 ‘개인’이 있는 이상은 자동적으로 싫어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사도에게 사울에게 주님 찾아왔을 때 주님이 주여 누구십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무슨 단어를 집어 넣었다고 제가 주일날 했잖아요. 뭐를 집어 넣었습니까?


나는, 나는 예수다가 아니고 나는 그리스도다도 아니고 뭘 집어 넣었어요? ‘나’라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 구성요소에 뭐가 들어갑니까? ‘니가 핍박하는 예수’가 되는 거예요. 니가 핍박하니까 그걸 세 글자로 하면 십자가가 되는 거예요.


찾아온 나는 십자가에 지신 십자가 진 나가 찾아온거예요. 십자가에 져서 찾아왔다는 것은 십자가 지신 분이 살아있으니까 그걸 부활이라고 하고 그 부활이라는 그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은 무슨 역할이냐? 바로 살아계신 예수님의 영이 영으로 하여금 사도 바울에게 찾아 오도록 모든 환경을 주선한 겁니다. 성령께서.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제가 아까 예수님께서 개인을 만났다고 했지요. 개인입니다. 개인. 개인과 개인끼리 전혀 단합이 안되요. 여러분 단합되던가요? 지금 단합됐습니까? 부부인데 단합되던가요?


생각을 발상을 반대로 하라고. 반대로. 우리 결혼했으니까 서로 사랑한다 이거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요. 우리는 이혼할 사람인데 왜 자꾸 붙어서 있지? 이래야 감사가 나와요. 우리 이혼할건데 왜 이렇게 그대를 보면 왜 기분이 좋아? 이상하게 이혼할 사람인데 왜 기분이 좋아?


뭐뭐 아니라고 할 때 그게 뭐다 이 말이죠. 결혼할 사이가 아니야 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붙여주는 결혼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개인이 뭐이다 해버리면 개인이 억지로 그 개인을 만들려고 애를 쓴다 이 말이죠.


그게 주님이 하신 일을 미워하게 만들고 가리게 만들고 배척하게 만들거든요. 이게 우리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입니다라고 하는 순간 그렇게 한 순간 주님이 친히 만들어 가는 교회를 모독하게 된다니까요.


‘나는 살아야 합니다’ 하는 순간 뭐가 완전히 가리워졌습니까? 그동안 그 인간을 누가 살려줬습니까? 주님이 살려줬지요. 주님이 살려줬으면 우리는 나는 진작에 죽어야되는데 왜 살려줬지? 이렇게 되야되는데 ‘나는 살아야지..’ 하는 순간 그동안 뭐가 날라가 버렸어요? 주님께서 공들여 살려준 것이 다 날라가 버린거예요.


잠을 자자 양 한 마리 양 두리마 양 세 마리 양칠천육백사심여섯마리. 밤 새도록 눈떠가지고. 왜 양 한 마리 왜 셌습니까? 잠 잘려고. 잠자는 것은 누구 뜻이죠? 주님의 뜻에 자게 되어 있어요. 주님의 뜻에. 주님의 뜻에 자게 되어있는걸 가지고 또 집에 가서 주님의 뜻에 잔다. 주님의 뜻에 잔다. 절대 잠 안옵니다.


그만큼 개인이 개인의 있음, 개인에서 나온 자체가 지금도 끊임없이 예수님의 본래 하시는 일을 나에게 하는 일을 내가 그렇게 지금 방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뭐밖에 없다? 죄 짓는 것 밖에 할게 없어요.


아까 이야기합시다. 감사라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오느냐 하면은 감사라 하는 것은 실망뒤에 감사가 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우리에게 죄를 지으면 실망은 남지요. 실망만 하는데 살기는 살았잖아요.


범사에 감사하지요. 물론 이런 감사는 제대로 된 감사가 아니고 이것도 일종의 하나의 기술인데, 기술은 써먹지 맙시다. 이게 기술은 꼼수가 되니까 써먹지 말아야 되는데.

목사님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그럼 사도행전 9장에 다메섹에서 핍박받는 예수님 사울에게 침투를 했는데 그 다음에도 계속 사울이 죄를 지어야 되는데 바울 되가지고 죄 지은 것이 우리 눈에 보일 때 우리 쪽에서...

사도바울에게 예수님을 핍박하러왔을 때 이 핍박 개념이 얕아요. 한 2cm 밖에 안됩니다. 사도바울이 계속 전도하면서 핍박 개념이 점점 더 깊어져가지고 아 이 핍박개념은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구나. 어디냐?


그걸 사도바울은 십자가 안에서 사도바울은 죽고 싶은게 소원이지만 계속 살아야될 이유가 그가 만나는 모든 만남을 통해서 전에 예수님께서 만난 모든 만남을 반복시키는 겁니다. 그걸 지금 이야기 할려고 했는데요.


뭐냐하면 예수님께서 개인을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그 이야기 까지 했지요? 사실은 예수님이 개인을 만들었다고 하면 안되고 예수님이 성령 안에서 개인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야되요.


예수님께서 성령안에서 개인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죽기까지 십자가에 복종하는 것도 누구의 공로냐하면 바로 성령님의 공로예요. 성령께서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셨어요. 성령이 없으면 내뜻대로 하겠다예요.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뜻대로 하는것도 성령께서 그렇게하고 기도하는 것도 성령안에서 기도했다 이말이죠.


이러한 원리로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인정한 유일한 두 번째 아담이예요. 진짜 인간이 된다고요 진짜 인간이. 제가 지난 월요일날 대구 강의 하면서 구분했어요. 인간답게 되는것하고 인간이냐 하는 것하고 다르다고 했지요.


인간답게 되는 것은 이왕 인간으로 태어난 것 하나님 영광 위해서 인간답게 살아야되지 않겠냐 할 때 인간답게예요. 그런데 인간이냐 하는 말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라니까요.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처음부터 뭐가 있어야하느냐 하면 반드시 약속 언약의 요소가 있을 때만 인간이예요.


그런데 그런 인간은 없어요. 없으니까 살아있는데 왜 인간이 아니냐? 인간이지 하는데 결국 이게 뭐가 되느냐 다 흙이 된다니까요. 인간인 척 하면서 결국 나를 내세울려고 하니까 이게 흙으로 분해되어 버려요 해체되어 버려요. 지난시간에 이야기했는데 눈사람이라고 했지만.


인간이 지금 고정되어 있는게 아니고 변화한다고요. 변화하기 위해서 내가 누구냐하는 것은 내 변화의 끝은 무엇이냐가 그게 나예요. 우리의 변화의 끝은 뭡니까? 화장터 아닙니까. 죄지요. 죄를 뒤집어 쓴거예요.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죄를 뒤집어 쓴 그 여자가 이윤택 극단 단장한테 강간을 당했다. 그게 무슨 큰 문제냐 이말입니다. 극단 극단적으로 말해서. 극단적으로 말해서. 극단적으로 말해서.


상당히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 보는게 어때요? 그야말로 하무의 극치죠. 이래도 아무것도 아니고 저래도 아무것도 아니고 뭐지? 이거 너무 목사님 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하다고 여길 때 비로소 뭐가 생기느냐하면 바로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왜 우리가 감사가 안나오느냐 하면, 나는 나란 인간은 이 정도는 되어줘야 이게 나답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내가 정의를 내려버렸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성령은 뭐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을 이끄시는 분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이끄실 때 성령 앞에서 예수님은 성령께서 예수님께 요구한게 뭡니까? ‘죽으라’ 잖아요. 어떻게 죽으라? 언약 말씀대로 십자가 앞에서 죽으라가 성령의 요구라면 그 성령이 오늘날 우리에게 찾아왔다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뭡니까?


날마다 죽으라 늘 죽으라 예요. 늘 죽으라. 늘 죽으라. 왜? 늘 죽어있을 때 우리는 안 죽어요. 왜냐하면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예수님께서 자기가 죽고 난 뒤에 누가 온다고 이야기할 때 과연 죽어가는 사람이 그 말을 장담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돼요.


우리 장인어른이 그런 유언을 남겼어요. 나 죽으면 절대로 화장하지 말고 그냥 시신을 그대로 묻어다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보니까 무덤을 열고 나올려면 재 되면 재가 조립할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있는 몸가지고 그냥 나오기 위해서는 절대로 화장하지 말고 있는 채로 해가지고 무덤이 열고 나오니까 그대로 그 키에 그 신장에 그 뚱뚱한 몸에 그대로 나오게 해달라 했지만.


후손들은 사정없이 화장해 버렸습니다. 사정없이 화장했어요. 나중에 화장하는데 벌떡 일어나가지고 이러지마라 이럴순 없는거 아닙니까. 주님께서 자신의 미래까지 알고 계신다는 것은 죽고 난 뒤에 보혜사가 온다는 이야기 하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보혜사 온다는 말은 내가 죽는 것은 기정 사실이고 죽어야 일이 된다는 이야기예요. 이게 성령받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같은 성령받은 우리는 뭡니까? 죽으면 안돼. 죽으면 안돼. 이 뭘 아끼고 뭐에 대해서 미련이 있고 집착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결국 무엇에 집착합니까? 나의 개인성. 개인성에 집착하는 거예요. 개인은 아까 뭐한다 했어요? 동질, 남처럼 되기 위해서 남까지 대우해주는 동등이라는 사회성을 형성하죠. 개인이 여럿 모이면 사회가 되잖아요.


개인이 있을 때는 동질을 노리고 사회를 할때는 동등을 노리고 동등은 다른 네자로 하면 민주주의죠. 민주주의. 내가 남한테 대접하면 내가 대접받는다는 그 사고방식. 그 사고방식이죠. 눈에 보이는거 잘해보자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할수 있는 것은 뭐냐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났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떠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개인은 지금 떠날 의사가 전혀 없어요. 제가 이야기 하는게 그거 예요. 죄를 지어줘야되요. 왜? 우리는 죄를 생산하기 위한 재료로서 못 따라가게 만들었기 때문에. 누가? 성령께서 그렇게 하셔요.


성령받은 사람은 특징이 뭐냐 하면은 우리가 이 땅에서 죄 짓기만 하면 우리의 역할은 끝나는 거예요. 죄 짓기만 하면. 성령께서 우리 개인을 가지고 사용하시는 그런 이유입니다. 목표입니다.


자, 그러면 죄가 뭐냐 그걸 다시 생각해봐야겠죠. 그 이야기를 아까 첫째시간 제일 먼저 했는데 늦게 오신 분들은 못들었지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해하신다는 말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생산하고 의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감으로서 의가 생산된다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만 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그냥 의가 없지요. 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예수님이 의가 되기 위해서는 이 땅이 필히 죄와 심판으로 가득 차 있어야 되요. 죄와 심판으로. 그 역할을 육을 가지고 우리보고 하라는 거예요. 성령께서.


자, 성령께서 우리 개인, 개인이라는 것은 육입니다. 육적 속성을 가지고 있지요. 예수님은 죄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죄가 있잖아요.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이유는 그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생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죄를 생산하는 거예요.


죄가 뭐냐 하면은 죄는 반대말이 있어요. 의의 반대말이 죄가 되는 겁니다. 의가 없으면 죄가 나타나지 않고 짝을 이뤄서 나타나요. 예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언약 완성이예요. 언약 완성이라 하는 것은 새언약 완성이란 뭐냐 하면 내 피와 내 살이예요.


두 개 합치면 뭐가 되겠어요? 죽음이죠. 죽음. 하나님의 모든 뜻이 완성되었다. 무엇입니까? 죽음이에요. 십자가? 그건 뭡니까? 죽음이에요. 죽음이 완성이라니까요. 부활이 완성이 아니고 죽음이 완성이에요.


죽음 뒤에 부활이 아니고 부활은 죽음을 더 돋보이기 하기 위해서 총알이 중요하지 총알이 만들어내는 그 파형이 되는 그 공기가 중요한게 아니거든요. 그 공기가 그렇게 형성된다는 말은 이게 죽음이 있기 때문에. 죽음에서 뭐가? 이게 바로 생명입니다.


예수님한테는 죽음과 살해와 자살이 동일해요. 이 세 가지가. 사도 바울이 소원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의 소원이 뭡니까? 본인이 죽는거잖아요. 성령 받았으니까. 본인이 죽는게 소원인데 지금 육이 안 죽고 있는 이유는 그 발목잡는 사람들이 많아가지고, 주께서 그 사람들에게 봉사하라고 지금 계속 살고 있는거예요.


두 번씩이나 이야기 해요. 빌립보서 1장에서 이야기 했고 고린도후서 5장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어요. 편지 쓰면서 뭐냐 하면 이런거예요. 나 좀 죽고싶은대로 놔두세요. 내 발목잡지말고 놔주세요. 이걸 막 편지에 썼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 더 보탠다면 이제는 내가 장례치를 때가 되서 그런 이야기. 얼마나 그걸 학수고대 했겠습니까? 또 한군데 더 있다면 고린도전서 7장에 세상 돈 있는 것도 소용없고 결혼하는 것도 소용없고 왜? 세상 흔적은 빨리 날아가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이 세상 자체가 미련둘 곳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죄 있는 육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온 가락이 있어요. 내가 이 개인이라는 것이 추상적 개념인데 추상적 개념안에 뭐냐 하면 내가 살아와서 내 신체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했던 모든 훈습이라고 하는데 훈습.


훈습이라고 하는 것은 습관, 몸에 배인 버릇같은 것, 정신. 이 모든 것은 나를 살리는 쪽으로 그렇게 다듬어져 있거든요. 자동적으로 저항력이 나오고 반발 나오고 저항력이 나오고 내 개인의 가치를 지킬려고 하고 이런게 있다 이 말이죠.


이런 것을 성령께서는 성령께서 오셔가지고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어디서 오지요? 예수님께 오시죠. 예수님의 의는 어디서 오냐? 예수님의 언약의 완성이잖아요. 예수님의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을 죽음의 취지를 가지고 성령께서 우리를 가지고 뭘 하느냐 하면, 죄를 생산하는 겁니다.


만약에 이렇게 죄를 생산하지 않고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죄와 심판을 이렇게 생산하지 아니하고 그냥 우리 개인에게 죄와 또는 범죄와 심판을 설명해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에 반드시 개인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보편적 뭐라고 했습니까? 보편적 기준 또는 판단자, 기준점이죠.


그러면 개개인마다 죄와 심판에 대한 기준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 다르지요. 개인도 달라요. 개인이 30대, 40대, 60대, 80대 다달라요. 기준이. 본인이 누구인지 모른다니까요. 2살 26개월된 아이의 죄의 개념은 뭐냐? 아이스크림 뺏어가는 것, 못 먹게 하는거예요. 아이스크림 못먹게 하는 거예요. 카스테라 못먹게 하는 것.


엄마 막 때린다고. 엄마 나쁘다 이 말이거든요. 말은 안해도. 왜 카스테라 못 먹게하느냐 이말이예요. 그 애가 지금 26개월 됬는데 26개월 됬거든요. 그 애가 만약에 260개월 되면 어떻겠습니까? 260개월이면 몇 년이지?


나중에 1000개월 돼서 나이 60되면 그 인간이 그 인간이잖아요. 나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내 신체를 지키기위해 유리하냐 불리하냐에 따라서 죄와 심판을 규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개인과 개인이 만나면 뭐라고 했습니까? 이걸 동등이라고 했지요. 동등 유지의 사회죠.


그러면 일본여자 고다이라 그 사람이 금메달 못 따고 이상화 금메달 따게되면 신납니까? 왜 갑자기 일본이 금메달 따면 기분 나쁘고 이상화 은메달 따면 왜 기분 나쁩니까? 왜 기분 나빠요? 뭐가 형성됐어요? 동등이란 개인의 확장이 형성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믿는다는 개인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나라를 만들었어요. 유대 나라를. 거기에 누가 뛰어 들었습니까? 예수님 뛰어 들었지요. 그럼 예수님 뛰어든 이유가 전체를 뭐로 본다? 이 전체를 죄로 규정하는 거예요. 심판으로 규정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그 세계에 보낸 것은 성령이 일하는 동시에 모든 일을 통해서 죄와 심판을 생산해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있는 곳에 뭐가 있고? 의가 있고 심판하는 곳에 구원이 있는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구원받고 성령 임했다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상태가 되야되는 겁니다. 구원받은 상태에서 죄짓고 심판대상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성도는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해야지요. 그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 아닙니까?


이미 죄인중에 괴수라고 하면서 아주 즐거워요.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이렇게 하면서. 고린도후서 5장에 14절에 나는 지금 미쳤다 그래 미쳤어. 미친 인간으로 밖에 보일 수 없는 이유가 다같은 개인인데 왜 본인은 왜 본인으로 인하여 즐겁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왜 즐거워하느냐 이 미친 놈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개인 구원이 없고요. 그걸 십자가 안에서의 구원, 예수 안에서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아까 국자 고기1, 고기2 했는데. 들어와버리면 그 자체가 예수 안이라는 면적이 되요. 예수 안.


그런데 예수 안을 다른말로 하면 부활 안이 아니고 십자가 안이라니까요. 십자가에서 세상은 죽고 세상은 나안에 죽고 나는 죽고 그걸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형성을 시켜 놓는 거예요. 뭐 죄 지으라고 해도 기쁜 얼굴도 아니고.


그 다음 이야기할께요. 이렇게 보시면 제일 쉬워요. 예수님 오실 때 혼자 오시지 않고 성령께서 오셨다. 그렇다면 그 당시 유대 사회도 누구 조종하에 있다? 성령이 조종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떠밀려 죽일려고 해도 예수님이 그 안에 지나가실 때 있잖아요. 이게 아직 때가 안 된거예요. 예수님이 죽을 때가 되어야해요. 그건 성령님이 조정하는 겁니다. 교회가 천군데 만군데 생기고 이단들이 무슨 소리해도 그것도 누구 소관이냐하면 성령 소관이예요.


우리를 예수님처럼 사용하는거예요. 다만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우리는 뭐가 있느냐 하면 육이 잖아요. 죄가 있잖아요. 우리는 이 세상과 한통속이다 이말이죠. 우리만큼은 마음껏 그것을 쏟아낼 필요가 있는거예요. 마음껏, 마음껏 쏟아낸다고요.


제가 주일낮 설교 그렇게 길게 오랜만에 50분 넘었어요. 51분동안 했는데 쭉 하면서 마지막에 뭐라고 외치던가요? 제발 제 자식 사랑하고 제발 이기적으로 살으라 이 말이죠. 이거 이해 못하면 정말 성령 못 받은 거예요. 이거 이해 못하면.


왜 제 자식만 사랑하고 왜 이기주의 해야됩니까? 이게 주께서 원하는 재생산이고 이거는 성령께서 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께서. 그래서 우리가 내가 누구냐?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것은 여태까지 마귀에 속한 거예요. 이미 구원을 받았으면 내가 아직도 모르고 있는 죄가 있다. 아직도 모르고 있는 죄가.


다시 말해서 내가 아직도 뭔가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게 있다하면 이론이 되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이론을 뭘로 바꾼다? 실제로 바꾸기 위해서 모이기 힘쓰고.


모이기 힘쓰란 히브리서 말을 오랜만에 하고 있네. 자주 똑같은 그 개인들이 만나보게 되면 각자 판단기준들이 있을거 아닙니까? 그 말은 니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싸우는데 흔히 말하는 나는 잘났어 너는 못났어. 이렇게 이야기 하면 누가 모를까요? 저거 교만하네 하겠는데.


이게 반대로 뒤집는다면 “나 부족합니다” 이렇게 하니까 “내가 더 부족합니다.” 내가 더 부족하다니까요. 아니 내가 더 부족 나중에 멱살쥐고 서로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나온다니까요. 겸손을 가장한.


그런데 그 성령가기 전까지는 그게 장려될 문제지 그걸 죄라고 안봤거든요. 나중에 성령받고 나니까 겸손해도 교만이고 교만해도 교만이고 뭘해도 이건 죄가 되고 아이 밥값 내가 낼께해도 죄가 되고 아 신발 왜이리 안 묶이지 뒤에서 신발끈 묶으면서 돈 냈는가 살펴도 그것도 죄가 되고.


그게 바로 성령안에서는 모든 것이 용납이 되는 거예요. 오늘은 당신은 이런 것까지 죄를 끄집어 냈고 나는 거기서 이런 것 까지 죄를 끄집어 냈으니까 그게 죄의 꽃다발이예요. 오늘 제목 죄의 꽃다발. 아주 제목이 멋있지 않습니까? 이것도 자랑거리예요.

질문 : 그러면 죄라고 의식하고 죄 짓는 거하고.
아 그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걸 지금 이야기 해야되요. 그것 놓치면 참 곤란하지요. 그 이야기를 이렇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대구강의할 때입니다.


치매에 걸리면 지옥갑니까라는 질문이에요. 치매 걸리면 지옥갑니까? 이게 철학적으론 이렇게 합니다. 인식론에 관한 문제, 인식론. 인식론이란 쉽게 말해서 무엇무엇에 대해서 나는 알고 있다.


누가 알고 있다? 니가 알고 있다. 아니에요. 너가 알고 있다. 아니에요. 내가 알고 있다. 인식론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뭐를 집어넣느냐 하면 나를 집어 넣어요. 나는 무엇무엇에 대해서 알고 있다.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 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다 하는데 치매 걸려버렸어요. 그러면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모른다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치매걸린 사람은 나는 예수님모른다 하면 치매걸린 환자가 아니예요. 이건 불신자예요. 뭐가 날라갔느냐 하면은 ‘나’가 날라갔어요. ‘나’가.


그냥 짐슴의 본능처럼 짐승은 ‘나’가 없어요. 짐승은 자의식이 없어요. 본능밖에 없어요. 먹고 싶은거 배고프면 먹고 자의식이라 하는 것은 보통 16개월이 되야되요. 그전에는요 아이도 자의식이 없어요.


엄마가 시장가면 없으면 자기자신도 없다고 여겨져요. 엄마가 갔는데 자기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가면 자기도 없다고 생각하는거에요. 자의식없어요. 인간은 자의식이 없는데서 태어나서 결국 치매 걸리면 자의식 없는걸로 가는 거예요.


없으면 그냥 사물덩어리 물체 덩어리죠. 물체 덩어리 사물 덩어리 뭐든 간에 누가 키우십니까? 누가 키워요? 들풀 누구 키우고 참새 누가 키웁니까? 하나님이 키우시잖아요. 그렇다면 치매 걸리기 전 정신 있을 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가 나오면 감사는 과거 미래 전부다 소급해서 통합해서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감사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지금 엄연히 인식론으로 나는 감사한다 나가 아니라 주께서 감사케 하셨다가 아직 살아가지도 않은 80 ,90, 100살 치매 걸리고 또 걸린 그것까지 아울러서 감사가 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러면 치매 걸리든 뭐하든 그거 누구한테 맡깁니까? 성령한테 맡기죠. 그 예가 뭐냐하면 수면내시경. 자, 수면내시경할 때 내가 잠들었다와 내가 정신있다와 정신 나갔다의 사이를 내가 스스로 수면내시경 참아가면서 내가 그 경계선을 찾아 가볼라 하다가 벌써 잠들어 버렸어. 깨보면. 벌써 끝났어.


벌써 끝나고 한쪽에 회복실에 앉아 있다고요. 누구야!! 나의 모든 인식을 한꺼번에 다 날린자가 누구야? 이렇게 되거든요. 이것은 바로 수면내시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돌아가게한다. 처음으로.


처음에 태어날 때 나는 태어난다 나는 태어난다 이렇게 태어납니까? 외부에서 밀어내지요. 외부에서. 외부에서 밀어서 세상에 나왔고 나오자마자 외부인지 내부인지 구분도 못해요. 그냥 엄마 품만 붙들고 있지. 모르잖아요. 인간은 원래 그런거예요.


뭐 좀 눈뜨고 사니까 뭐 인생 자기 현실 만드니까 이게 하나님 앞에 계속 인정받고 뭐 천국에서 이거 봐주는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생은요 예수님 인생 밖에 없어요. 우리 인생은 안개같은 거에요. 물방울 같은 것은 없어요. 풍 터지다 날라가면 없는거예요.


눈사람 같은거예요. 녹아내리면 그 현장에 없어요. 분명히 있었는데 눈 내려버리면 없잖아요. 우리 인생이 동결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만들 때 예수님의 주체로서 그때 동결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공주 입니까? 겨울왕국에 엘사공주 아닙니까.  Let it go!!! 밟아 버리면. 만지면 전부 다 분노에 의해서 전부 다 얼음이 되잖아요. 분노에 의해서 stop이. 겨울왕국에 나오는 눈사람은 세상에 와도 안녹아요. 희한해요. 돌아다니다 나중에 여름되면 녹지만.


천국에서는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동결되어 버린다니까요 영원히. 그 동결되는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하면 나는 아니고 주님만 영광돌려야 된다는 그 순간에 동결되 버린다니까요. 그거는 인간으로는 안되고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성령은 인간을 동결시켜 버려요.


십자가 안으로 동결시켜버리고 국자의 턱을 넘어버려서 국자 안에서 구원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영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니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안에서 풀장을 만들어 버립니다. 성령이 오게되면.


마치 성령께서 예수님 하실 때 예수님께서 성령이 지시한 범위 밖에 절대로 나가지 못하도록 단도리를 착착 해주시는 것처럼 그 십자가의 완성을 기대하면서 일했던 성령께서 이제는 우리의 육을 가지고 주님이 기대했던 그 십자가의 완성을 기념하고 증거하고 영광돌리고 그걸 믿음 소망 사랑을 갖도록 성령께서 단도리를 단단히하는 겁니다.


한번 준 성령은 절대로 빠져나가질 않아요. 왜? 아파트 보증금 내면 중도금 다 내게 되있고  마지막 잔돈까지 우리가 내는게 아니잖아요. 벌써 계약금까지 계약금 자체를 누가 줬습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보증금을 줬다면 보증금 주고 계약금 안줄란다 너 하는 것 보니까..  이런 계약은 없어요.


왜냐? 새언약 말고 또 다른 언약 있는게 아니거든요. 새언약이 뭡니까? 예수의 피와 예수님의 살로서 이미 온다는 보증금이 되어 버리면 더이상 다른 계약은 남아있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확정된 계약 결정된 계약 이게 뭡니까? 십자가 아닙니까?


성령은 항상 십자가를 생각하게 만들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만들고 그게 하나의 의다 이 말이죠. 제가 그 대구강의 하면서 그런이야기 했지요.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줄 때 세례 요한이 몰랐던게 있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하면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잖아요. 어린양. 예수님 어린양이죠. 세례 요한이 이쪽에 보고 있죠. 관람하고 있죠. 관찰하고 있지요. 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입니다. 죄를 대신할수 있는 희생양입니다.


하지만 신체가 달라요. 세례 요한은 이쪽 몸에 있고 예수님은 저쪽 몸에 있잖아요. 어떻게 이게 하나로 연결됩니까? 이걸 알수가 없는거예요. 연결이 안되잖아요. 연결이. 몸이 따로 있는데 연결이 안된다 이말이죠. 잠을 자도 안되고 식사해도 안되고 몸이 따로 논다니까요.


그런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걱정하지마라 하나님께서 저 세상 죄를 진 어린양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 주실 자, 성령으로 세례 주실 자. 무슨 말이냐 하면은 지금 세례 요한이 예수님한테 물로 세례주잖아요.


물로 세례줘서 세례 요한이 갖고 있던 세상의 어떤 죄를 예수님한테 이입시키듯이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완성을 성령세례로 무지개 다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줄 자가 바로 저분이라고 한거예요.


그러면 세례 요한이 그렇게 이야기 할 때 예수님은 십자가로서 자기의 일을 마무리 짓고 그 마무리 짓는 그 마무리 된 십자가의 의를 살리기 위해서 세상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활동에 주님이 주로서 활동에 나서야 되겠죠.


주로서 활동에 나선다는 증거가 뭐냐하면은 요청하지도 않는데 주님께서 알아서 우리에게 주님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보냈다는 이 사실이 내가 살아 있는거예요? 주님이 살아 있는거예요? 주님 저쪽이 살아있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있는 거예요.


지난 주일 낮 설교가 굉장히 어려운 설교입니다. 뭐냐 하면은 십자가가 보인다고 이야기 함으로서 모든 보이는 것을 부정해 버렸어요. 모든 보이는 것을 말로 다 바꾸어서 말에 내용이 진정 보여야될거고 보인다는 것은 그것은 소용없는 거예요.


우리가 본다는 것은 문제있는 거예요. 보고 믿는다는 것은 문제있는 겁니다. 십자가가 보이거늘 십자가가 보인다는 말은 지금 너희들이 본다는 것 때문에 진짜 봐야될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주일날 설교 초반에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그렇게 이야기 했지요.


그렇다면 정작 성령이 왔다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실컷 보게 하는 거예요. 롯데백화점 보게 하고 교인수 몇 명이고 그거 보게하고 예배당 몇억짜리야 보게하고 볼거 다 보게해요. 누구는 재산이 한달에 수입이 2억이 되고 한쪽은 통장에 만원밖에 없고 전부 다 보게해요.


지갑한번 꺼내 보세요. 보게해요. 보게해보면 만원밖에 없어요. 이거 없으면 이제 굶어 죽습니다. 보게한다니까요. 굶어 죽게 해요. 봤지? 봤지? 봤으니까 이제 떠날 마음 있어? 없어? 아마 돈 많은 사람은 떠날 마음 없을거예요.


돈 없는 사람은 빨리 데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거예요. 이 땅에서 우환이 많고 가정은 깨어지고 자식은 교통사고 남한테 해가지고 유치장 가있고 이럴 때 살 마음 없지요. 어느 쪽이 천국에 관심이 있어요?


세상에 대해서 미련 없을 때 미련두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양적으로 양으로 계산한다면 천국에 관심이 있겠지요. 물론 그 천국은 문제 있어요. 개인이 도피하는 차원에서 그냥 괴로운거 피하고 싶어서 피하는 천국은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반드시 천국은 감사로 이어져야 되요. 힘들더라도 힘드니까 그냥 피하자가 아니라 힘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나와야 되고 강도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감사할 일이예요. 강도 해가지고 십자가 달리는게 뭐가 감사하겠어요?


하지만 강도가 된 채 강도가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만날 분을 만나게 된 것. 그러면 뒤돌아보면 강도질해서 십자가 했는데 예수님도 죽고 오후 3시가 되서 돌아가시고 옆에 강도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한 10분동안 치매 걸렸다 칩시다.


그러면 그 강도가 지옥갑니까? 내가 10분전에 무슨말했지? 모르는데 인식론 문제하면 그럼 지옥가는거예요? 아니죠. 아니잖아요. 책임자가 내가 아니라니까요. 책임자가. 지금 이 이야기 할려고 이 긴긴 시간 달려왔습니다. 책임자가 내가 아니란 말이예요.


그런데 그게 언제 와야되요? 성령이 와야되요. 인샬라 있지요. inch-alla 모든 것이 알라의 뜻이다. 모든 것이 알라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생생히 살아 있어요? 여기에 개인이 살아 있어요. 모든 것이 주의 뜻입니다. 뭐가 살아 있어요? 개인이 살아 있다고요.


이거는 성령의 뜻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있는게 아니예요. 누가 살아 있어요? 내게 성령주신 주님의 살아있고 주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죽음 쪽에 속해 있다. 지금 심판받아야 되고 곧 사라질 그 쪽에 속해 있는거에요. 물로 이게 구원의 끈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천만다행이죠.


오뎅 있잖아요. 오뎅 짝대기 해가지고 오뎅에 짝대기를 넣습니까? 오뎅을 뜨거운 물에 넣어요? 오뎅쪽을 뜨거운 물에 촉촉이 적셔야 되지 않습니까? 오뎅물이 적시도록 묻히도록. 마찬가지로 막대기는 주님께로 가 있고 오뎅은 세상의 죄에 빠져있다면 그래도 오뎅이 걱정합니까?


이게 뭐야 뜨거워 이렇게 걱정합니까? 누가 살아있는거예요? 짝대기와 짝대기를 잡고 계신 그 분이 살아있는거고 그분이 살아있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또는 성령 받아서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우리는 이 세상에 이 뜨거운 지옥불을 지금도 지옥불을 지금 하고 있는거예요.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독감 걸렸지요. 온몸이 아프고 피곤하고 뭐 자식은 애먹이고 세상이 내 뜻대로 되던가요? 안 되지요. 안 되는게 정상이예요. 우리 가족 화목하던가요? 화목 안한게 정상인데 화목하면 이거 내가 한짓에 비해서 너무 과분한 지금 과분한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감사해야죠. 늘 잔소리를 해대는 아내가 어느날 잔소리를 안해요. 갑자기 남편들은 살 맛이 나는거에요. 그런데 이게 남편이 착해서가 아니라 아내가 잔소리할 힘이 없어서 잔소리를 안하고 있거든요. 잔소리하기 귀찮아서.


그럴 때 사람이 내가 달라져서가 아니라 잔소리 하는쪽에 지쳐서 안할 때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성경에 모든 일에, 그냥 감사하라고 않죠 모든 성령 안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마지막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기대하지 마세요. 세상의 구성요소는 개인입니다. 남편 아내 자식 나까지 포함해서. 남들이 나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것을 받을 자격도 안되고 그런 권한도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것은 예수님 증거하라고 있는거예요. 내 얘기 하라고 있는것이 아니고 누구 이야기? 예수님 이야기 하라고 있는거예요. 예수님 이야기 하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냥 나옵니까? 예수님 이야기를? 내가 얼마나 못돼처먹었는지를 알아야될게 아닙니까? 자, 못돼처먹었다는 말은 무슨뜻이냐 하면은 조금만 나에게 불리한게 오고 걱정스런게 오게되면 우리는 와락 여기서 뭘 터트려요? 울분을 터트리잖아요. 울분을.


그 울분은 결국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하늘에 계신 주님한테 이어진다고요. 결국 예수님을 욕되게하고 예수님께 공격하고 화내는 그런 존재를 지금 오뎅으로 같은 통 한 통 속에 있는 세상 속에 푹 담기게 하신거예요.


니가 이렇다 이말이예요. 니가 이렇다 니가 바로 죄인이고 세리고 창기다. 이런데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이런 인간을 국자로 연결해가지고 이미 성령을 주셨다는 자체가 이미 천국 안에 들어오게 하셨으니까 감사는 오직 누구만 해야되겠어요? 십자가 지신 십자가만 지신 예수님만 감사하고 자랑은 십자가만 자랑해야되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께서 하신 일을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간다할 때에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 들었습니다. 주여 그 가는 길 막혀 있지만 성령을 통해서 이제는 뚫렸고 연결되었음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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