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가락강의
2018-09-19 00:01:52 조회 : 392         
떨어져 나감 180918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XokR2Q2XotE"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q3kDK0bLfs"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홍민희(IP:121.♡.203.222) 18-10-01 13:36 
강남-요한복음 18장 8절(떨어져 나감)180918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8장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기드론 시내가 그 다윗성과 감람산 사이에 있어요. 다윗성은 어디고 또 감람산은 또 어디냐?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모르는 사람은 하겠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답사 동영상 올려놓은 곳에 있습니다. 거기에 76번을 오늘 아침 새로 올려놨어요.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가면서 요한복음 18장 기드론 이거 보면서 아 올려놨구나. 거기에 우리 세 사람이 기드론 골짜기 올라간다고 헥헥 거리면서 올라가는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려놓은게 있어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산이라고 하는데 성전산. 성전산인데 모리아 산이 있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그곳에다가 황금돔, 황금돔이 이렇게 되어 있고 황금돔은 여러분 보셨지요? 제가 올려놨으니까. 황금으로 되어 있어요. 진짜 황금이에요. 이슬람 성전이고 여기에 성전 있고 이것이 윗성이라고 해요. 윗 다윗성이라고 하고 이쪽에 옛날 아랫성, 아래도시라고, 도시라고 할거 없고 아랫성이라고 원래 다윗은 여기 있었요. 위에 있다고 윗성. 이렇게 돼요.


여기에 골짜기로 되어 있거든요. 여기 감람산이에요. 감람산에서는 여기 이만큼 높으니까 훤하게 다 보이는거예요. 여기가 기드론 골짜기예요. 감람산에서 이렇게 해가지고 겟세마네 동산이 감람삼이거든요. 베다니는 여기 있고 베다니하고 잘 통하는 데가 동쪽 성문하고 통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 몇 미터냐 하면 주기도문 교회 감람 겟세마네 교회 성당 전부 여기서 우리 세 사람이 건너갔는데 여기에 보면 압살롬의 무덤이 있어요. 여기에서의 거리가 얼마 안돼요. 한 500m 밖에 안돼요. 500m. 그래가지고 계단으로 올라갔는데 헥헥 거리면서 올라가는 장면이 있을거예요.


그래가지고 이렇게 쭈욱 가가지고 가게되면 마가의 다락방, 마가의 다락방인데 여기서 여기까지 한 3km? 내지 2.5km~3km 쯤 될 거예요. 지금은 도로가 잘 닦여있지요. 안토니아라는 요새가 있고 요새는 무슨 요새냐 하면 본디오빌라도 본부예요. 빌라도의 성체 또는 본부. 빌라 총독 빌라도. 안토니 요새는 뭐하냐 하면 예수님 최종 재판하는 곳. 예수님 재판하는 곳이에요. 바로 여기 나가면 ‘비탄의 길’이라고 해요. 비탄의 길, 슬픔의 길이라고 해가지고 여기에 골고다 언덕까지 가는 길이 있어요. 길이 예수님 십자가 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가는 길이 있는데 여기는 길이 얼마 되느냐 하면 한 500m에서 1km 쯤 될거예요. 여기까지 가는데. 얼마 멀지는 않아요. 다 걸어서 가봤으니까. 한 1km 쯤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걸어서 갔으니까. 여기에 가야바 제사장의 집과 그리고 가야바 제사장의 의회라고  하죠 의회, 공회. 가야바 제사장의 공회. 요새 국회의사당 쯤 되는. 여기 중간에 뭐냐면 헤롯 안디바스의 궁이 있어요. 바로 그 위에 안토니아 빌라도의 궁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여기에 언제 여기 감람산에서 기도하는데 감람산 기도하다 체포될 때가 언제냐 하면 목요일 밤 10시에요. 밤 10시. 요새 같으면 목요일 밤 10시 드라마 수목 드라마 할 밤 10시에 예수님이 여기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기도 언제 하느냐 하면 제자들은 이제 3명은 자고 새벽에 새벽이 되니 금요일, 금요일 새벽에 여기서 체포가 됩니다.


그런데 이 목요일날 밤 10시에 감람산에 오는데 그 전에 어디 있었느냐 하면 낮에 마가의 다락방에 가셔 가지고 내 살과 내 피 이건 새언약이라고 해가지고 사전 조치를 다 했습니다. 자기가 살과 피를 찢어 주시고 피를 흘릴 것을 다 아시고 사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런게 중요한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실제로 잡혀서 십자가에 죽을걸 아시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뭐냐 하면 새 언약을 했거든요. 새 언약식을 했다고요.


그러면 예수님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 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일하심이라든지 말씀이라든지. 우리는 이야기하면 그걸로 끝나지만 예수님은 이야기하고 말씀하시고 행동한 그것이 완성을 내다보고 하는 거예요. 그냥 빈 말씀이라든지 빈 행동이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이.


그리고 그렇게 여러분들 머리가 좋으면 그렇다면 예수님을 체포하는 배신하는 가룟 유다나 체포하러 오는 바리새인과 그 당시의 로마 군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게 우연이 아니고 예수님이 알아서 전부다 적절하게 배당을 하는 거예요. 역할을 맡긴 거예요 역할을. 왜냐하면 그런 것 자체가 이 세상 자체가 주님을 위한 상징이기 때문에. 이 세상 자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추석명절 이것도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어느 것 하나 풍랑 이는 것 바람 부는 것, 미국에 동남부에 태풍 부는 것 어떤 것도 어떤 폭풍 부는 모든 하나도 예수그리스도께서 미리 다 정확하게 일으키지 아니한 일이 없어요.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일곱인 쭉 나오지요? 일곱 나팔 쭉 나오지요. 일곱 대접 나오지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 필요에 의해서 쓸데없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적절하게 딱 그 구성되어야 될 구성 요건으로 다 집어넣은 겁니다.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아이고 내가 주님 앞에 이런 잘못을 하다니 내가 주님 앞에 이렇게 헌신하다니. 자기 자신, ‘나’라는 것 ‘나’라는 이 주체를 우리는 제거해야 된다 이 말 입니다. 내가 알아서 마음 야무지게 먹어서 일을 이렇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가는게 아니예요. 주께서 이렇게 다 필요해서 이렇게 이런 상황을 만든 겁니다. 특별히 우리 자신에게 주변에 만나야 되는 사람 만났다가 또 이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모든 그 변화도 결코 나를 위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 그런 일이 만나고 이런 일이 없어요. 그리고 나의 가정 또는 내 교회 내 국가를 위해서 그렇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필요해서 그렇게 들어 쓰신 거에요.


어제 대구 강의에서 제가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무대에 서커스 주인이 오랑우탄 손 들고 왔다고. 오랑우탄이 이렇게 걷지요. 팔 하나 걸쳐놓고. 그게 피조물이 해야 될 일입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는 거에요.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을 보이는 것으로 전부 다 배치를 해 놓은  거에요.


목요일날 아침에 낮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내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해서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고 그날 밤에 10시에 감람산에 가가지고 기도하시고 금요일날 새벽에 잡혔습니다. 목요일날 10시에 새 언약 세우시면서 새 언약 세웠다는 말은 자물쇠 다 잠궜다는 이 말인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말입니다. 플러스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시몬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베다니거든요. 시몬의 집에서 목요일날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향유를 팍 부쉈습니다. 향수를 뿌린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은 나의 장례를 위함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자기 장례식을 위해서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신 거에요. 목요일날. 전날밤에 잡히기 전날밤에. 그럼 수요일날은 뭐했느냐. 수욜일은 뭐 수요일은 주로 비가 많이 오는가요? 수요일날에는 성전에 대해서 완전히 성전 박살난다고 설명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이게 유일한 현실을 다 집결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전에 전부 다 뭐가 되느냐 하면 전부 다 모형이 되버리거든요. 그 중에 모형 중에 뭐냐 하면 성전이거든요. 내가 곧 성전이거든요. 예수님이 곧 성전이다 이 말이죠. 마태복음 12장 6절에 보면 예수님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을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성전보다 더 커요. 성전도 대단히 큰데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큽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있기 때문에 성전은 있을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있을 이유가 없는 겁니다.


성전이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은 성전을 관리하게 위해서 성전을 관리하고 거기서 행사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직책과 역할들은 전부 다 이제 다 예수님 십자가로 인하셔 소용이 없는 거예요. 헛짓이 되는 거예요 헛짓이. 수요일 그 이야기 하신 거예요. 성전 박살난다고 그리고 인자가 구름타고 온다고. 내가 말 잘못했네.


베다니에서 시몬의 집에 언약을 한게 수요일이에요 수요일날. 성전을 월요일부터 화욜일에 가면서 늘 숙소를 베다니 문둥병 집에서 주무셨거든요. 베다니 문둥병 집에서 주무시고 여기서 수요일날 마리아한테 그 향수를 하면서 장례를 치르고 이제 목요일날 아침에 새언약하고 바로 여기서 감람산에 가셨어요.


그러면 화요일날은 뭐했느냐. 화요일날은 성전에 들어가가지고 성전 청결을 했어요. 성전 청결을. 그리고 월요일날은 뭐했느냐 하면 베다니에 오셔가지고 나귀타고 오셔가지고 왕이라고 환영 받았습니다. 왕이라고 환영 받고 물론 백성들이 오해한거죠 잘못된 사고방식이죠. 환영 받고 화요일날 무화과나무 저주하고 그 다음에 성전 이런게 성전이 아니라고 하고 성전을 부숴버려라 내가 구름타고 온다고 이야기 했고 그리고 수요일날 특히 마리아한테 장례 준비한다고 산 사람에게 산 사람을 마치 죽은 사람처럼 향수를 뿌려대는 겁니다. 관에 향수 뿌리듯이 살아있는 주님에게 향수를 뿌린다 이 말은 마리아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살아있는데 죽은 자로 봤지요.


그러면 그럼 죽은 자는 누가 죽은 자 됩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로 본다면 내가 예수님 앞에 살아 있다는 이 자체도 이건 살아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죠. 그런 생각을 가졌지요.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예수를 믿는게 아니고 거기서 이미 시간적으로 더 늘여보자 이 말이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분을 우리가 죽어야 되는데 우리 대신 죽으신 분이라는 그 아직 남아있는 미지의 역할까지 수용해서 예수를 믿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령 받은 사람은 뭘 이야기 합니까? 우리를 위해서 이미 죽었다가 우리를 의인되기 위해서 이미 살아나셨다라는 것을 아울러 포함해서 우리가 믿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살아있습니까? 내가 살아있습니까? 주님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걸 아울러 믿어져야 돼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죽고 내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아울러 믿어져야 돼요. 이건 노력해서 신학공부해서 믿어지는게 아니고 성령이 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거울 보면 우리가 살아있잖아요. 눈뜨고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도 살아있지요.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주 안에서 내가 나를 보는 거고 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은 줄도 모르고 지금 살아있다고 열심히 더 살아볼라고 애쓰고 있는 그런 모습이라는 그런 안목을 가지고 이번 추석 때 모이시기 바랍니다. 죽은 귀신들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금요일날 새벽에 목요일날 해가지고 어디로 갔느냐 하면 여기 가야바 집에 갑니다. 그 다음에 가야바 집에서 여기서 재판을 받아요. 재판을 받고 그 다음에 어디로 가느냐. 본디오빌라도가 있는 안티오 요새로 갑니다. 요새로 가는데 빌라도가 다시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헤롯 안디바스로 보내고 다시 빌라도로 가고 여기서 재판 받으시고 바나바 살아나고 예수님은 잡혀서 골고다로 이렇게 가게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체포되야 될 이유가 뭐냐? 네 가지로 볼 수 있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 백성을 선동했다는 겁니다. 백성을 선동했다. 백성을 선동했고 두 번째는 뭐냐 가이샤에 통치, 가이샤는 로마 그 시의 통치자입니다. 로마에서 본디오빌라도가 아니고. 로마에 있는 가이샤의 통치에 대해서 반발했다는 거예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세 번째가 똑같은 건데 선동했다 그러면 세 번째가 백성을 미워했다는 겁니다. ‘선동했다’와 ‘미워했다’는 좀 다르죠? 비슷한데 좀 달라요. 백성을 선동했다 백성을 혹했다 미워했다. 네 번째가 제일 중요한데요. 자진해서 스스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이것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을 죄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체포당할 때. 이걸 우리가 본디오 빌라도의 입장에서 봅시다.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이런 천하의 죄인을 죽여주세요 라고 가야바 쪽에서 요청을 했는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본디오 빌라도의 입장이라고 생각을 해 봅시다. 이것은 무슨 문제냐 하면 이것은 행정문제가 아니고 뭐냐 하면 이거는 종교문제지요. 유대인의 종교문제잖아요.


만약에 집사님이 대통령이다. 대통령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대통령이라고 칩시다. 치는데 대통령되어 취임해가지고 뭐 이렇게 하는데 막 청와대 청원 들어와요. 뭐냐 하면 조계종 원장을 바꿔 달라 이렇게 하게 되면 조계종? 조계종? 조계종이 뭐지? 남의 종교잖아요 불교 이야기 아닙니까. 불교이야기를 대통령이 왜 개입해요? 아 몰라 몰라 너희들 마음대로 해 이러잖아요.


그런데 그쪽에서 하는 말이 우리가 때릴 수는 있어도 죽일 수는 없다는 거예요. 기어이 죽여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집사님 부인이 죽이려고 하는데 밤에 잠을 못 잤어요. 저 사람은 죽을 분이 아니다 꿈자리 사납다 이렇게 하니까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정치와 관련이 없는 종교문제입니다. 종교에 대해서는 자기가 전문가다 아니다? 전문가가 아니예요. 전문가가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선과 악을 구분할 능력이 없는 겁니다. 선과 악을 구분할 능력이 없게 돼요.


자,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의 어떤 친구나 여러분 친척이나 누가 여러분에게 잔소리를 할 때에 그게 여러분 귀에 선과 악의 관련해서 이야기 한 것으로 들립니까? 아니면 나한테 내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들리십니까? 어디에 기분 나빠요? 선과 악이 너무 뚜렸해서 그래서 기분 안 좋고 그런겁니까 아니면 왜 내가 하는데 네가 왜 관여하느냐 그게 기분 나쁘죠.


인간은 모든 인간은 자기가 신이라고 여겨요. 신입니다. 네가 뭔데 신을 건드리느냐 이것 때문에 기분 나빠요. 심지어 부부 사이라도. 부부 사이라도 심지어 부부 아니라도 서로 남자 여자 서로 사귈 때도. 뭐 구하라인가? 그것도 뭐 치고 박고 이런 것도. 뭐냐 하면 내가 나는 신인데 너는 왜 내가 신이라는 그 신을 네가 그만큼 왜 대우를 안 해주느냐 때문에 삐지는 겁니다. 데이트폭력이 일어난 거예요.


서로가 자기를 신으로 인정해주는데 네가 그만큼 합당한 대우를 나한테 해달라는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존재냐 하면은 귀찮은 존재예요. 본디오 빌라도가 그동안 신 아닙니까? 신인데 유다 나라의 총독이니까 신이잖아요. 신인데 예수그리스도를 빌미로 해서 신의 위세에 신답지 않은 비전문가가 될 가능성이 있어요 비전문가. 종교문제기 때문에.


이걸 비전문가가 되면 나중에 여기서 머뭇거려 버리면 계속해서 이 사람들이 신의 허점을 파고 들어올 수가 있어요. 그러면 권력 통치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참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어떤 나한테는 하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책임을 누구 책임으로 돌리느냐 하면은 정치가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그 사상에 의해서 종교문제를 결단을 내려버립니다. 종교문제를.


그러니까 종교보다 뭐가 더 위다? 정치, 이 통치가 종교보다 더 위에 있다는 거에요. 너희들이 말하는 이 신의 문제보다 로마의 통치가 더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날 중국하고 똑같아요. 공산당이 예수보다 더 세다 공산당이. 예수보다 더 세다는 본 때를 보여주고 십자가 부수고 교회 폐쇄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한겁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월요일에 오셔가지고 나귀 타셨고 화요일날 오셔가지고 무화과  나무 저주하고 성전청결하고 수요일날 오셔가지고 잠은 어디서 잤느냐 하면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주무시면서 가까우니까 500m나 1km 쯤 되겠다 얼마 안돼요. 수요일날은 바로 성전에 대한 파괴이야기하고 내가 구름타고 온다는 것과 그리고 수요일날 중요한 것은 뭐냐 베다니 집에서 장례를 살아있는 예수님을 위해서 마리아가 향수를 부어서 장례를 준비했다는 사실.


목요일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새 언약을 세우잖아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그들이 살과 피를 마시는게 아닙니다. 뭘 마셨습니까? 포도주마셨고 떡 먹었지요? 떡 먹었어요. 상징을 먹은 겁니다. 심지어 이거 먹을 때 누가 계신줄 알아요? 가룟 유다도 있었어요. 가룟 유다도 먹었어요. 먹고 밤 10시에 감람산에 겟세마네 올라가가지고 기도하셨고 새벽 늦게 금요일날 새벽에 체포되고 가야바에 집에 가가지고 가야바의 집 바로 옆에 가야바 회의하는 데가 있어요. 산헤드린 회의하는 데가 있어요. 국회의원들 거기서 회의해가지고 아까 네 가지 죄목 가지고 신랄하게 고발하고 때리고 이랬어요.


때리고 빌라도가 다시 헤롯 안디바스 집으로  갔다가 다시 빌라도로 보내가지고 체포해서 십자가 가셨는데 십자가 못박힐 때가 아침 7시에 박혔고 돌아가실 때가 뭐냐 하면 오후 3시에 운명하셨고 그다음에 시신 거두어서 그 다음에 금요일 밤부터 유월절이거든요. 빨리 처리하는 거에요. 빨리 처리해가지고 무덤에다가 넣었습니다. 그리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일요일날 날짜로 계산해서 사흘만에 세 번째 날에 예수님께서 기상해서 자기 입었던 옷 딱 개어 놓으시고 걸터앉아 있으니까 마리아 오셔 가지고 옷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아저씨 혹시 봤어요? 누구 찾는데? 우리 주님 찾는데요. 나잖아 나. 그런 대목도 있고 또 천사가 이야기 하는 대목도 있어요.


자, 거기서 예수님이 오늘 본문 요한복음 18장 봅시다. 예수님이 여기서 잡히는데 잡히시면서 잡히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다 떠나버리는거에요. 예수님 곁에 예수님 주변에 아무도  없게 하시는 겁니다. 그 이유가 요한복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육은 영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그것 때문에 그래요 육은. 요한복음에만 그래요. 다른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안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을 떠나는 이유가 같이 있을 수 없는 자가 너희들은 같이 있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에요 그동안. 눈에 보이니까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처음에 애초부터 예수님은 혼자였습니다. 처음부터. 혼자였는데 제자들 12명 우르르 따라다니면서 떡도 먹고 뭐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하고 같이 붙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여겼던 겁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고방식은 여기 요한복음 18장에 뒤에 나오지만 베드로가 여기서 뒤에 나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베드로가 배반하죠. 배반할 때 여러분 무슨 동물이 울지요? 닭 울잖아요. 닭이 울지요. 베드로가 12제자의 대표로 보고요.


예수님과 베드로가 같이 붙어 다닐 때에 그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붙어 다니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중에 하나로 같이 붙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여기 18장 17절 봅시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다. 나는 제자가 아니다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베드로가 자기가 제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했지요. 베드로 말이 이게 맞는 말이에요.


베드로가 생각한 예수님 스승이라면 그렇다면 그 스승은 베드로 말대로 그 예수님이 생각한 그 스승의 제자는 아니에요. 베드로가 생각하는 그 스승의 제자일수 있지만 예수님이 생각한 그 스승의 제자는 아닙니다. 이건 오늘날 지금 본격적으로 어려운거 나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는게 아니에요. 잡혀주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잡혀줌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나쁜 사람들이 또는 가룟 유다가 잡았다는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나 가룟 유다 말고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예수님 곁이 있을 수가 없어요. 있을 수가 없는데 그동안 예수님 곁에 있었던 것이 이게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겁니다.


다시 본래 돌아가는 거에요. 본래 돌아가는게 뭐냐 하면 단절입니다. 영과 육은 요한복음 3장 나오듯이 지금 요한복음 하고 있잖아요. 영과 육은 결코 이게 통하지 않아요. 육으로 난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육으로 난 것은 그 결과가 육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인데 뭐냐 하면은 그 자체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어요. 어떤 체계?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적 체계가 자체적으로 갖추고 있어요. 뭔가 원인이 있어야 뭔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바로 육의 세계의 특징입니다.


기도를 해야 응답받지 이게 육이거든요. 바쳐야 복을 받지 이게 육이다 이 말이죠.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지 이게 육이에요. 예수 믿어서 구원 못 받아요. 그것은 육적 세계에서 이야기 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종교 세계에서나 통하는 일이에요. 육이 있어야 될 이유는 그게 그냥 육으로 마감된다는 거에요. 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역할이 육의 역할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이 말씀이거든요. 말씀이 말씀답게 역시 나는 육이였었어. 그걸로 되면 족합니다. 더는 욕심내면 안돼요.


영은 이런 육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은 역할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는 거거든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 제자라고 해요 내 제자. 제자들 보고 내 제자라고 했잖아요. 그럼 제자들이란 말은 제자들 있을 때에 제자란 말은 육적인 이해지만 육적인 개념이지만 예수님이 제자라고 할 때는 영적개념이에요. 영적개념으로 갈려면 육적으로 아는 제자 개념과 떨어져 있어야 돼요. 끊어져 버려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제자들은 떠났지만 제자의 관계는 예수님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새로 시작되는 겁니다.


제자들이 제자란 것을 배신할 때 비로소 그게 제자다운 거에요. 왜? 끊어짐의 내용을 이제는 베드로나 12제자가 품게 되게 되기 때문에. 끊어졌는데 주님 쪽에서 제자되게 하셨다는 그 내용이 합류되어 있어야 그게 제자입니다. 끊어짐이 내용이 없으면 이건 제자도 아니고 성도도 아니고 신앙인도 아니에요. 제자 될려고 열심히 애썼습니다 하는 그거는 교회제자훈련에나 하는 소리지 그런건 성경에 없어요. 주께서 제자되게 하셨잖아요 되려 주님께 반문을 해야 된다니까요. 아니 주님이 제자되게 하셨잖아요 주님이. 나 제자 안 될려고 내뺐는데 깍쟁이처럼 내뺐는데 주께서 성도되게 하셨고 제자되게 하셨잖아요.


그게 아버지께서 내게 주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 내게 올수 없다 그 말씀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겁니다.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쉬운 예를 들께요.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부부 이야기 나오죠. 부부 이야기 나올 때 사도 바울이 부부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을 끊어 버려요. 뭐냐 하면 서로가 서로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겁니다. 소유를 끊어버려요. 소유를 엑스칩니다. 부부이야기를 하면서. 소유에 대해서 엑스친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그동안 육의 부부에서는 서로를 자기 상대로 삼는 식으로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육은 육의 티를 내야 되거든요.


육이 뭐냐 하면 육은 소유를 통해서 육은 계속 행세를 하는 겁니다. 뭐든지 세상에 있는 인간세계에서 제일 화근이 뭐냐? 전부다 모든 걸 소유 대상으로 보는 거에요. 내 것으로 보는 거에요. 돈이든 자식이든 국가든 교회든 뭐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전부다 내 소유가 되는 거에요 내 소유가. 그게 육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부부이야기를 하는데 소유 개념을 끊어버리고 무슨 개념을 여기서 하냐 하면은 섬김 개념으로 이야기해요 ‘섬김’.


남편 된 자들아 아내를 섬기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린 것처럼 버려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섬김이에요 섬김. 섬김하니까 또 우리나라 왔던 미국대사 이름 같은데. 섬김. 섬김은 그대가 있음에 내가 있다는 거에요. 그리고 아내된 자는 남편을 섬기는 것을 교회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겨라. 양쪽 다 뭐만 남아요? 양쪽 다 섬김이 남지요? 섬김 받았으니까 저 사람은 내 소유다가 안 통하는 거에요. 내 소유가 통하지를 않습니다. 이제 오늘 강의에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이게 진짜 어려워요.


예수님의 제자는 없어요. 예수님은 혼자입니다. 옛날부터 혼자였어요. 처음부터 12제자 함께 있을 때도 혼자였어요. 왜? 예수님은 육이 아니고 영이니까 육이 아니니까. 그럼 옆에 붙어있는 플러스 12명은 전부 육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예수님의 영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에 잡힙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이 바리새인 군인들과 그 종들과 군대에게 잡힌게 아니고 제자들에게 체포됐다고 보시면 되요. 왜냐하면 제자의 대표가 누굽니까? 가룟 유다 아닙니까. 이게 요한복음 6장 마지막에 나오거든요.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면서 그 대표자를 뭐로 보느냐 하면 가룟 유다로 봐요. 요한복음에서는.


12제자 쭉 이야기 해놓고 그중에 하나가 마귀다 이야기 한 것은 나는 마귀 들린자를 택했다는 거에요. 그리고 12제자의 운명 예수님의 운명은 예수님이 택했던 그 제자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마귀는 육입니까? 영입니까? 마귀는 영이잖아요. 예수님의 하는 모든 말씀은 영적으로 이야기 하는 거에요.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제가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는데 그건 자기가 무슨 말인지 몰라요. 육적이니까. 내가 예수님을 붙드니까 나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원인 결과의 고리를 계속해서 베드로가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 고수한 결과가 육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육으로 이야기 할 때는 예수님을 딱 붙들고 안 놓을려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베드로가 자기를 스스로 제자다? 아니다? 본인이 고백했잖아요. 제자다? 아니다? 나는 저분의 제자가 아닙니다 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 했잖아요. 나는 저분의 제자가 아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그동안 누구의 제자였어요? 본인의 제자죠. 본인이 본인을 소유하고 있었던 거에요. 예수를 섬긴게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섬겨요.


육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내가 죽도록 충성하여 나를 섬기는 것. 그게 육이 할 수 있는 거에요. 내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괜찮은 나라는 결과물을 내는 것. 그런 의식과 사고방식이 그것이 육이에요. 그리고 어떤 인간도 그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에 교인이 천명이다 천명하면 뭐합니까. 천명의 신들인데. 전부다 자기 섬겨요. 목사는 목사 섬기고 장로는 자기 섬기고 전부다 자기 섬겨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평소에는 자기가 겸손하니 누굴 섬기니 봉사하니 해도 누가 옆에서 잔소리를 이렇게 하게 되면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네가 뭔데 나한테 잔소리 하느냐. 다시 말해서 나는 신인데 신을 겁없이 건드리느냐 이 말입니다. 신인데. 자녀들 키울 때 자녀들이 자식이 아닙니다. 신들이에요. 잘해줄 때 엄마 좋아 엄마 아빠 좋아 뽀뽀뽀하죠. 조금만 형한테 잘해주고 동생한테 못해주면 동생 난리납니다. 갑자기 영물 돼요. 마귀모습 다 드러납니다. 부모도 늙어가면 마찬가지고요. 부모도 연세 많아80넘고 90가까이 되버리면 진짜 귀신인지 부모인지 구분 안 돼요.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효자만나 골병든다고. 제발 효자 되지 마세요. 부모를 학대하는 겁니다. 뭐 살려 보겠다고 왜 그래요. 부모는 효를 받을 자격이 안돼요. 육이기 때문에. 참 좋은거 가르쳐 주죠. 부모는 절대 자식한테 대우받을 자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식을 자기 소유로 사용했기 때문에 안돼요. 이거는 자식이라는 신을 모독하는 거에요. 부모라는 신이. 아주 냉혹하게 봐야 됩니다 세상을. 껍데기 위장하는 것 윤리 도덕으로 걸쳐놓은 그것 다 벗겨버려야 되요.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고 예수님께서 홀로 되셨다. 의도적으로 홀로 되셨어요. 제자들은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홀로 되신 이걸 우리 자신에게 한번 적용시켜 봅시다. 여러분들 친구 한 10명 되는데 어느날 다 떠나 버리고 여러분 혼자 남는다면 여러분 자신을 정말 인간으로 안 볼 거에요.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 안 될 겁니다. 살았다는 말은 살았다는 것은 타인이 남이 나를 증명해줘야 그때만 사는 거에요. 친구가 나한테 전화 연락을 해주고 집안 식구나 사람들이 나에게 대우를 줄 때만 나는 살아 있어요.


남들이 나를 살았다고 이야기 해줄 때 살아 있지 만약에 남들이 나를 연락 안 해주게 되면 나는 살아있는게 아니고 죽은 인간입니다. 부부싸움하면서 여자의 최후의 무기는 눈물도 아니에요. 말 안 하기. 마치 남편보기를 투명인간 보듯이 하는 거에요. 옆에 지나가도 비켜가고 각 방 쓰고. 마치 없는 것처럼 이 자리에 현존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면 남편은 대책은 하나 밖에 없어요. 빌든지 아니면 패든지 둘 중에 하나. 빌든지 패든지. 서로 말하고 싸울 때는 아직 정이 있다는 말이에요. 말하고 싸울 때는.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이 말은 뭐냐하면 옳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나는 신인데 네가 나를 좀 신처럼 좀 받들면 안 되겠니 라고 요구하는 거에요. 자기는 안 섬기면서 상대는 나를 좀 신으로서 섬겨달라고 서로가 요청하는 거에요.


처음에 결혼해서 애 없을 때는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애 생기면 이제는 자식이 있으면 그런 것도 없어지죠. 서로 자식한테 잘 보이려고 알랑방구를 자식한데 다 뀌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 신 뭉개져도 괜찮아요. 자기가 받들 수 있는 자식이 앞에 있으니까 자식 좋으면 자기는 어떻게 뚱뚱보가 되어도 괜찮아요. 그 정도로 희생적이거든요. 나중에는 소유대상 되지만.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제자라는 것을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너희들이 제자다라고 한 것을 누가 빠진 상태에서? 가룟 유다가 빠진 상태에서 새로 들어가는 겁니다. 가룟 유다나 제자나 나머지 11제자나 똑같은 입장인데 주님이 끝까지 사랑을 해야 되는데 여기서 뭐냐 하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룟 유다는 알아서 자기가 자살함으로서 알아서 창자 터져 죽었잖아요. 알아서 끊어졌지만 이 제자들 입장에서는 주님께서 이 제자들을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주셔가지고 성령 안에 뭐냐 하면 내가 너를 제자라고 했잖아라는 것이 제자 속에 이게 keep이 되요. keep이 되게 되면 이 제자는 예수님 때문에 제자 된 거예요. 본인이 나  제자 되면 어떤 이익이 있을까? 제자 되면 천국가지. 이런 나라는 것이 제거 됩니다. 나 가 제거된 상태에서 여기 연결되는 것. 이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오늘 제목이에요. 이걸 부르심이에요. 제자를 끊어버리고 부르심으로 가는 것 부르심으로. 내가 너를 불렀다는 거에요. 내가 너를 호명했다는 겁니다.


누굴 위해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이 불렀다는 그 사실이에요. 네가  천국가는 것은 내가 내 쪽에서 너를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그걸 찾아옴이 성령이거든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계속 성령 이야기 합니다. 아까 그 수요일날 저녁에 마리아한테 미리 향유 부음 받았다고 했지요. 미리 받은 장례식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 온다는 것은 이미 미리 받은 천국이에요 이게.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모형이 되고 상징이 되는 겁니다. 성도는. 전에는 누구 주인이냐 하면 내가 주인이에요. 내가 주인인데 내가 주인해서 해봤자 결국 실패라는 것을 누가 대신 다 보여줬습니까? 고맙게도 12제자가 육에서 시작한 일이 어떻게 파토나는가를 깔끔하게 다 보여줬어요. 어디서? 십자가 잡힐 때. 예수님 잡힐 때에. 내 육이 예수님의 육을 품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주님 가는데 목숨 바치겠습니다 하면서 어떤 고난도 하겠습니다. 심지어 여기 오늘 본문에 그 뒤에 보면 말고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말고라는 사람은 괜히 거기 붙어 있다가 베드로한테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한테 아주 열정적인 베드로한테 칼에 베였지요. 다른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말고의 귀를 떼구르르르 굴러갔다 말이죠. 귀가 뚝 떨어져가지고 떼구르르르 굴러가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체포되는 입장에서 얼른 주워가지고 말고의 귀를 붙여줬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이 안 잡힐수도 있는 문제고 죽은 자를 살리고 인간도 만들어 내시는 분이고 떨어진 귀도 갖다 붙일 정도로 그렇게 장인이라면 그게 장인이거든요.


서울시내에 구두 만드는 동네가 무슨 동입니까? 성수동이죠? 그 성수동 장인들 구두 잘 고치잖아요. 주님은 온 우주의 장인이잖아요. 온 우주의 장인이 지금 체포당하고 있습니다. 체포를 의도적으로 시도한거에요. 의도적으로. 영이 육에게 체포당함으로 말미암아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고 연결점이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거에요. 분명히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육의 노력과 육의 의지로서 절대로 영의 세계 천국에 오지 못한다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끝까지 일을 마무리 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18절에 보면 좀 이상한 대목 나와요. 6절에 보면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땅에 엎드리죠. 질문을 누가 하느냐 하면 뭐냐 하면 질문을 여기 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다 아신다 했거든요 빨리 니가 맡은 역할 니 배역 있잖아 니가 그 역할 빨리 빨리해 하는 거에요.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그러니까 뭘 유도하느냐 하면은 그들이 누굴 찾는다는 겁니까? 나사렛 예수를 찾지요. 그런데 나사렛 예수를 어떻게 하려고 찾습니까? 잡아죽이려고 하잖아요. 그걸 다 아신다 이 말입니다. 그걸 다 아신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죽는데 너희들이 좀 고생들이 많다 이 말입니다. 내가 알아서 죽는데 너희들이 참 고생들이 많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누가 나를 여기 10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0장 18절에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내 몫을 빼앗는 것이 아니고 그다음에 뭡니까? 스스로 버린다. 스스로 이거는 자살인데? 스스로 버리는 거에요. 예수님이 스스로 버리는 거에요. 이걸 어렵게 이야기해서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하고만 상대한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스스로의 패배에서 스스로 실패해서 스스로 성공하는 거에요. 자기가 실패의 자리를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만든 실패의 자리에서 자기가 성공함으로 말미암아 어느 누구도 실패나 성공의 하나님 외에 누구도 끼어들지 않게 하는 것. 그것만이 악마를 악마답게 지옥에 보내는 유일한 방편이 되는 겁니다. 어렵지요. 10분 쉽시다.
 홍민희(IP:121.♡.203.222) 18-10-01 13:37 
강남-요한복음 18장 8절(떨어져 나감)180918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마지막에 제가 그런 이야기 했는데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더 이상 자기가 산 사람 아니다 라는 이야기 했잖아요. 그 점을 제가 감안해가지고 제가 그 이렇게 아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사랑하세요” 라는 그런 말을 해요. 요새는 귀찮아서 사랑도 안하는데 사랑하라는 말은 뭐냐 하면 결국은 인간은 육이 인간은 육적인 요소로 있기 때문에 그 남이 주는 시선 먹고 살아요. 남이 주는 평가를 먹고 산다고요.


그게 안 되면 남이 나에게 관심 갖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에게 관심 받기 위해서 용을 쓰는데 교회 가서도 사람에게 시선 받으려고 티를 내고 젊은 애들 두두두두 드럼 치면서 나 여기 있다는 존재감을 하고 하는데 그게 한계가 있어요. 주위에서 너 보기만 해도 밉상이다 이래요. 집안에 며느리 들어왔는데 이유도 없고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이유도 없는데 무조건 안 되는 너는 무조건 내 눈 밖에 나갔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 의외로 많아요 그런 사람들.


남편보고 왔는데 시댁에서 이유 없이 내치는 거예요. 그럴 때 그 복수심은 나중에 외부로 다른 피해로 또는 그 분노가 한으로 맺히게 되고 이게 나한테 더 피해 주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원래 육이라고 하는 것은 영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육의 세계에서는 타인에 의해서 우리가 결정되는 겁니다. 남들에 의해서. 그러면 타인을 우리가 부르면 되지 않느냐. 그것은 안돼요. 주님이 골라줍니다.


떨어져 있는 단절이죠. 떨어짐을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아까 뭐라고 한다고? 보내심이죠. 떨어짐은 뭐냐 하면 존재예요. 보내심은 사명이에요 사명. 기능이고 업무추진이에요 이거는. 제자들은 살기 위해서 사는 사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일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일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존재로 있을 때는 육이기 때문에 본인이 알아서 영웅되신 예수님을 그저 붙잡고 구원받기 위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하면서 계속 붙드는 이 짓 밖에 할 줄 몰라요.


왜냐 하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라는 존재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 나가 열심히 봉사하고 선교하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좋은게 아니고 누가 귀해요? 내가 나를 손대지 않으면 안 되지요. 이것이 이 존재성이 평소에 다른 타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얼마나 내가 그 사람에게 희생하고 퍼주고 밑천 들여가면서 알랑방구 뀌고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저 사람을 내 사람으로 이렇게 만들잖아요.


얼마나 공들여서 내 사람 만들잖아요. 이 수법 이 방법을 그대로 누구한테 적용시키느냐 하면 예수님하고 하나님 앞에 그대로 교회 와서 그대로 실시를 해요. 이렇게까지 헌신하는데 안 봐주실겁니까? 이렇게 내가 희생하는데 주께서는 외면하시겠습니까? 이런 것은 무슨 종교냐 하면 바알+아세라 종교. 엘리야하고 붙었던 850명 그 제단에다 불 피워놓고 불 붙겠느냐 엘리야는 그때 분명히 팔짱 꼈을거에요. 팔짱 끼고 다리 이렇게 해가지고 아이구 너희 하나님이 이거 아침부터 밤새도록이에요. 밤새도록 부흥회를 하는거에요.


누가 흥분하느냐 하면 그걸 구경하는 군중들하고 난리했어요. 왜? 자학하니까. 간증집회하는데 은혜 안 받을 수 있겠어요? 자기를 위한 간증집회를 하는데. 아이고 아멘 하면서 했지만 막상 당사자 하나님은 불이 안 내리잖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기독교란 종교가 다 보여줘요. 그래서 교회 다녀라 이 말입니다. 저들의 한계가 나의 한계다. 저들이 노린게 내가 노린 전부고 옛날 나는 저렇게 살았었었다. 두 번 다시 돌아가기 싫지만 어쨌든 나는 저 짓 하면서 살아온 거에요 저 짓 하면서.


돈 바치면 집에 있는 우리 애가 성적이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온갖 것 결국 내 존재의 내 존재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갑자기 목적이 이끄는 삶이 생각나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나 영을 붙드는 거예요. 붙드는데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주께서 떨어지는 거에요. 네가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나를 떨어지게 만드는 거에요. 그럼 가짜 예수가 여기서 범람하겠지요. 보내심을 입었다 여기까지는 쉬워요. 떨어졌는데 성령을 보내셔서 주님의 일을 한다 여기까지는 이야기하기가 쉬운데 뭐가 어렵냐 하면 둘 사이에 대화를 한다는 겁니다 대화. 대화에서 뭐가 생겼느냐 대화에서 진리와 복음이 비로소 나타나요. 이게 어려운 거에요.


만약에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주님 저기에 계시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거는 주님과 제자들이 똑같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다시 옛날에 육으로 했던 존재로 되돌아가요. 나 구원받았고 나 여기 있고 그대 저기 있지요. 가끔 봅시다. 가끔 기도할 때 가끔 우리가 만납시다. 이렇게 되면 둘 다 존재가 되어 버리잖아요 둘 다. 그 둘 다 존재가 되어 버리면 나중에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거에요? 정신 좀 있을 때는 주여 하다가 치매 걸리면 주님 한지가 언젠데 주님한지 옛날 다 지나갔는데 내 기억 속에 시냅스 두뇌 세포 속에 벌써 세포가 퇴화되면 다 날라가 버리는데.


어떤 존재든 간에 그 존재가 되어 버리면 두 개의 신을 섬길 수가 없어요. 우선순위를 두게 됩니다. 나야 예수님이야? 이렇게 되요. 말로는 나보다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나보다 예수님이라고 믿는 나 가 일차 이차 삼차에 들어가버립니다. 나 대신 주님, 그 주님을  믿는 나는 그 주님보다 더 중요해요. 이게 우리 육의 본성이고 이거는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꾸며도 소용없어요. 신학을 하고 외국에서 박사학위 신학박사 한사람들의 관심사가 뭔 줄 알아요? 취직입니다. 예수님 영광 아니에요. 예수님 영광 아닙니다.



예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에 대한 분석 백날 논문 쓰는데 그 논문 쓰는 목적이 뭐냐 하면은 본인 취직이라니까요. 내가 지금 과장되게 하는거 아니에요. 그 신학자들 70명인가? 70명 모인 앞에서 제가 논문 발표할 때에 그들이 나한테 지적하면서 뭐라고 했는줄 알아요? 이근호 목사 당신같이 그렇게 하면 우리나라 교회 없다는 말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더라니까. 교회는 없지요. 없어도 괜찮지요.


자, 여러분들이 지금 제 강의를 제대로 들었으면 제 말을 이해할겁니다. 천천히 들어가 봅니다. 교회라는 말을 누가 했습니까? 예수님이 하셨지요. 그럼 교회라는걸 누가 만듭니까? 예수님이 하신 예수님이 만들지요. 대화가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뭘 만들어내요? 주고받으면서 비로소 뭐가 나옵니까? 비로소 없는 교회가 나오는거에요. 그럼 우리 교회는 뭐냐? 떨어져 나가야되지요. 떨어져 나가야 되는거에요.


자, 천국. 천국은 없는 겁니다. 왜냐? 우리가 생각한 천국은 육에서 나온거기 때문에 떨어져 나가야 되요. 없어요. 마귀가 그렇게 천국 만들었어요. 없는데 주께서 보내셔서 보낸 사람과 주님과의 끊임없이 대화하는 가운데서 없던 천국이 발생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진리와 복음이 발생되는 거에요. 발생. 생성되는거에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이 나이 들어서 90이다. 치매 걸렸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치매 걸린 이 성도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할 때 타인은 몰라요. 제 3자는 몰라요. 하면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이렇게 치매 걸리는 이것이 뭐냐 하면 육으로써의 마땅함이죠. 죄인은 죽어 마땅한 거니까. 병들어 마땅하니까. 이것이 바로 진리잖아요. 이게 복음이잖아요.


그게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 대목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1장 언젠가 이 대목에 대해서 울산에 새순교회 서경수 목사님이 설교 하실 때 이 대목에서 내가 큰 감흥을 받았어요. 어떤 대목이냐 하면은 18절입니다. 21장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대비를 시키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대비를 시키는 거에요. 베드로야 해놓고 베드로가 옛날 네가 어떻게 기능했는가 보라. 어떻게 기능했습니까?


스스로 띠 띠고 그 다음에 뭐합니까? 누가 원했어요? 베드로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그다음에 어떤 곳입니까? 원치 않는 곳, 누가 원치 않는 곳입니까? 베드로가 원치 않는거죠. 베드로가 뭘 해도 뭘 해도 그거 아니에요. 뭘 해도. 어떤 사람은 그걸 가지고 ‘폭망’이라고 했는데 폭삭 망했다고 하는데. 뭘 해도 안돼요 뭘 해요. 왜냐하면 시작을 내 뜻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차라리 그냥 주면 좋은데 슬그머니 욕심을 나게 만들어요. 야 이거 좀 정말 이거는 100% 되는 일이다. 해놓고 조져버려요. 해놓고 안 되게 했어요.


그런데 이런 주님이 좋아요 싫어요? 싫을 수밖에 이런 주님을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알지요. 주께서 먼저 저를 사랑하잖아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었을 때에 베드로가 계속 그 ‘사랑’이라는 단어를 누가 생산하고 누가 현실화 시키는가를 알아요. 그 사랑이라는 단어를 자기가 소유하는게 아니고 오히려 주님 쪽으로 되돌려 주지요. 사랑은 주님 몫이지 제 몫이 아니잖아요. 저는 주님을 배신한 사람이잖아요. 내 사랑은 그게 한계였다는 거에요.


내가 한 그 모든 사랑은 결국 주님 예수님 배신하기로 내 사랑의 끝을 본거에요. 막장을 다 보여준거에요. 이미 보여준거에요 이미. 나이가 90이든 100살이든 마찬가지에요. 내가 한 사랑은 주님 배신하는 그것으로 내가 한 사랑의 속성은 다 보여준겁니다. 그렇다면 내 앞에 남은 길은 뭐냐 하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길이죠. 그러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위해서 주께서 벌린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내 뜻대로 살아야죠. 막 살아야죠. 내 뜻대로 살아야죠. 왜? 내 뜻대로 살아야 내 뜻이 아님의 작용이 부각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말로 하니까 어렵다. 그냥 막 살면 편한데 이걸 말로 설명하려고 하니까 이렇게 예수님처럼 부정적인 것을 앞장 세우고 이렇게 뒤에 주님의 요소가 붙여져야 돼요. 여러분 막 사세요. 그리고 막 살지 않더라도 그것도 막 사는 것에 포함이 되어 있으니까 이러나 저러나 결국은 마찬가지라니까요. 조심스럽게 철저해가면서 한발짝 심사숙고해서 침착하게 천천히 자기 돌아보면서 그게 막 사는 거에요. 방금 나열한 그 모든 부사 형용사들이 막 사는 거에요.


함부로 나대지 않고 그게 막사는 거라니까. 막 살지 아니하고 그게 막사는 거에요. 왜? 시작을 내 쪽에서 시작해줘야 되요. 그래야 단절과 보내심의 새록새록 그 현장에서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부각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증인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이 정말 우리가 종교로 구원받지 않지만 우리는 그 종교적인 것에 어느새 종교적인 모습을 내고 있어요.


베드로후서 3장 16절 한 번 보겠습니다. 이거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보내심의 대화의 내용이 뭐냐 그렇게 나가겠습니다. 진도를. 베드로 후서 3장 16절에 보게 되면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스스로 멸망에 이르지요.


성경말씀이 멸망에 이르는 말씀인 것을 여러분들은 새삼스럽게 아셔야 됩니다. 멸망하라고 준 성경이에요 이게. 성경안본 사람이 아니고 성경 보는 사람이 봤다는 이유 때문에 멸망이 가까운 거에요. 멸망했다는 평행을 보면서 멸망해야 돼요. 잘못 해석해서. 왜 대화가 필요한지 그것도 성령과 대화가 필요한지 설명을 하기 위해서 이 말 하는데 성경을 보면서 왜 이게 잘못된 길로 가느냐 하면 성경을 보면서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되냐면 떨어져 나옴, ‘단절’이죠. 떨어져 나옴 이게 발견돼야 돼요 성경 해석하면서.


나는 성경을 보면서 비로소 나는 주님과 나는 별개며 주님이 나를 떨쳐낼 이유를 안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돼야 돼요. 베드로처럼. 나는 저 사람의 제자가 아니라고 자기 입으로 이야기한 그것을 우리는 성경 말씀을 보면서 이걸 절감해야 된다 이 말이죠. 뭐 예를 들면 간단하죠. 먹는걸 족한 줄로 알라. 이 땅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때도 아무것도 없이 죽는다라고 할 때, 아 나는 기분 너무 좋아. 뭐 이런 경우도 있지만 처음에는 안 그래요.


좀 섭섭한 마음도 들고 통장을 몇 개를 정리해야 되느냐 그것도 걱정되고. 유산을 자식한테 줄거냐 교회에 갖다 낼거냐 그런 문제도 고민되고 그 말씀을 내가 맞추려고 애를 쓰겠지요. 보니까 몇 명은 내놓을 돈도 없어. 뭐 있어야 그야말로 성경 말씀대로 내 뜻대로 안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늘 아슬아슬해. 우리는 아슬아슬한 일용할 양식 가지고 사는걸 그렇게 소원합니까? 풍부하게 사는걸 좋아하지 일용할 양식만 주옵시고 주기도문에서는 그렇게 상투적으로 하지만 상투적으로 하는걸 이걸 문화에서는 ‘클리쉐이(cliche)’라고 하거든요 프랑스말로.


클리쉐라고 하는 것은 상투적인 것 판에 박힌 그런 문학적 표현인데 클리쉐 상투적인 것 일상대로 그걸 다른말로 하면 우리의 본성대로 우리의 본성은 아까 뭐였습니까? 인간은 소유지요. 본성대로 하면 우리는 친구도 많이 소유하고 돈도 많이 하고 나 칭찬하는 사람도 많고 우리 교회 교인도 많고 뭐든지 소유를 통해서 풍부함으로 살아가는게 우리의 ‘클리쉐’ 우리의 판에 박힌 이거는 판에 박힌 겁니다.


인간은 행동하고 생각할 때에 아무리 그럴듯하고 척해도 본성은 안 죽습니다. 본성은 안 죽어요. 인간의 그 소유욕은 죽을 때 까지 변하지 않는다니까요. 여러분들 어르신들과 살아보면 다 느끼죠. 급할 때 자식이고 뭐고 자기 밖에 모르잖아요. 인간의 본성 그 본성을 성경에서는 보면서 뭐가 등장했느냐 하면 내 본성이 그대로 노출되어야 돼요 그대로. 그렇다면 성경 해석에서는 뭐가 해석되느냐 하면 너는 성경말씀에 의하면 너는 멸망되어도 마땅해라는 해석이 필히 나와야 됩니다.


이걸 세자로 뭐냐 ‘걸림돌’이라고 해요 걸림돌. 복음이라 하는 것은 이 판에 박힌 세상에서 필요없다고 갖다 버린게 복음이에요. 예수님은 버림받은 분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버림받은 자, 그 버림받기로 남은 자가 그 남은 자가 바로 이 제자들이에요. 보내심을 받아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받은 수모를 같이 버림받은 수모를 받은 자들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이게 아까 이야기한 베드로가 자기 뜻대로 안돼요. 자기 원대로 안돼요. 원치 않은 길을 가게 하신이유는 베드로가 뭐 건물주 되고 궁중족발 내쫓고 이런 권세있는 자가 아니에요.


아무것도 없는데 사건만 유발시켜요 사건만. 어렵게 말씀드릴까요? 베드로가 가는 그 현장이 곧 천국이 되게 만드는 거에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니까. 이 세상은 그냥 클리쉐에요. 그냥 판에 박힌 대로 그냥 돌아가요. 그렇고 그런 세계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성도가 가는 그곳에 돌발사태라든지 뭐 이렇게  특이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거기에 바로 예수님이 함께 있는 거에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가는 곳에 주님의 기능이 거기에 덮쳐 버립니다. 그 기능이 뭐냐? 단절의 모습을 보여줘요.


누가 믿었으리요.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건을 발생시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다는 거에요. 베드로가 사도 바울한테 그렇게 해놓고는 편지 쓸 때는 사도바울을 그렇게 칭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바울에게 사랑하는 형제 바울에게 쓴 편지는 인간이 쓴 편지가 아니고 그 편지는 구중에 그걸 억지로 인간적인 편지라고 하다가 멸망에 이르게 하는 편지다. 그래서 이 세상에 진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편지기 때문에 함부로 풀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함부로 안 풀면 뭐냐? 성경을 보는 우리가 짤렸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내 힘으로 이 말씀을 지킨다 못 지킨다? 행함으로 못 지킨다 도저히 행함으로 이 말씀을 못 지킨다는 것을 서슴없이 받아들여야 돼요. 왜? 우리는 육에 속했으니까. 육은 자기 자신의 그 가치만 인정하기 때문에 안돼요. 지난 낮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지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세상의 영광은 바로 썩어질 영광입니다. 주님이 보여준 영광은 그 하늘의 거창한 영광이 아니고 독생자의 영광. 그냥 사람에게 버림받은 영광. 버림받는게 무슨 영광이겠어요? 버림받은 영광.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그 제일 낮은 자리까지 가신 영광. 그게 바로 독생자의 영광 그것이 하나님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영광이 바로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에요.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나사렛 예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어요. 다른 하나님은 다 인간들이 조작한거에요. 성도에서 나올 것은 나사렛 예수가 나와야 되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나와야 돼요. 그런데 일반 교인들 툭 치면 하나님이 나와요.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 교회 가보면 모든 목사 설교가 하나님이 어떻고 전능하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자꾸 하나님 이야기해요.


하나님 이야기 하니까 하나님 뭐가 되요? 기능이 아니고 뭐가 됩니까? 존재가 되어 버려요. 하나님이 나에게 이걸 해줬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거는 이 대화가 떨어져나감이라는 어떤 요소가 빠져버린 대화가 되어버려요. 단절이라는 내용이 없는 걸림돌이 빠져버린 대화가 되어버린다니까. 그럼 그 하나님이 누구 좋으라는 하나님이냐? 나 좋으라는 내 존재를 키워주는 하나님이 되요. 그게 바로 불교 아닙니까? 그게 불교고 모든 종교잖아요.


항상 주님의 영광은 희생이라는게 들어가야 되고 버림받음 그리고 우리는 가해자 이런 요소가 들어가줘야 돼요.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을 볼 때에 내가 성경을 들여다보잖아요. 그럼 성경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 있어 나로 하여금 들여다보는 나를 어떻게 만든다? 벌거벗게 만들어야 돼요. 히브리서 4장의 말씀처럼. 나를 벌거벗게 만들어야 돼요. 나를 벌거벗게 만들면 나는 뭐냐 하면 그냥 바짝 마른 뭐가 되느냐 하면 뼈가 되요 뼈. 뼈에 살점 붙은거에요. 이게 바로 LA갈비 아닙니까? LA갈비.


이게 지금은 젊을 때는 모르지만 돌아가실 때 되면 진짜 뼈만 남아요. 뼈하고 가죽 밖에 안 남아요. 그게 바로 우리의 본 모습이에요. 그때는 힘이 없어 거울도 못 봐요. 거울 보여줄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죽는 사람 약 올릴 일 있습니까? 30대로 상상해서 돌아가시는데 그만큼은 좀 양보 해줘야지 양해해줘야지. 인간은 나이가 60이 되도 70이 되도 항상 생각하는 것은 28-36세를 자기 모습을 그리워합니다.


꿈에 나타난 여러분 모습 몇 살이던가요? 30대에요 30대. 꿈에 나타난. 늙어도 30대라니까 꿈에. 자기 그 늙은 친척들만 늙게 보인다니까 꿈에 친척들 보면 친척들은 다 늙었어요. 자기가 20대 때 봤던 고모들은 다 50대이기 때문에. 아이고 꿈 속에서 우리 고모님이 왜 저렇게 늙었지? 자기 꿈꾸는 나는 65세인줄 모르고. 지금 공짜로 지하철 타는 것도 모르고 공짜로 지하철타는 그 나인데.


아직도 꿈꾸면 30대 있었던 그때 친구들이나 그때 친척들은 나보다 늙었어요. 그때 50대에 있는 고모들이 얼마나 할머니처럼 보이는지. 아이고 세상에 우리 고모가 저렇게 할머니가 됐나? 세상에 55이 뭐야 이렇게 하는데 지금 55보면 아이고 젊어라. 인간은 객관적으로 보는게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관행적인 정신상태가 자아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붙들고 있거든요. 그 붙들 때 뭐냐 하면은 내가 남들에게 가장 좋은 인상을 남길 때에 그 추억들을 편집해서 그걸 놓고 계속 나로 붙잡고 있어요. 그게 오래가요. 남들이 나를 칭찬했던 그 장면들 기억들을 편집해가지고.


그래서 공주로 살던 사람이 하녀로 못살잖아요. 현실은 공주고 뭐고 어디 있습니까? 재벌집 어디 있어요. 지금은 부도 나가지고 식당에서 일해야 될 입장이지만 꼭 하는 행세 보면 옛날에 한 공주행세 그대로 나온다니까. 옛날 젊었을 때 우리 60년대 이야기입니다. 젊었을 때 방앗간, 술도간, 과수원했던 애들 그 사람 60되도 옛날 돈 팍 쓰던 행세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술도간 막걸리집하고 방앗간하고 유일한 지역의 유일한 공장이거든요. 과수원 세상에 옛날 과수원하면 그 동네 재벌입니다 과수원. 이 집안은 보통 집안 아니에요 이 집안은.


자기가 괜찮게 되었을 때는 그 자기를 어떻게 눈물 겨운 그걸 어떻게 포기를 합니까. 못 먹어도 그 레벨이라니까 못 먹어도. 지금 굶어 죽어도 그 레벨이에요. 인간이 정신은 악마가 그만큼 타인에서부터 나는 신으로 대우받는 그것을 그게 너야라고 아주 굳히기 들어간겁니다. 이런 인간들이 교회 가니까 목사들이 뭐라고 퍼붓겠어요. 너희 소원대로 되리라. 이거는 아까 요한복음 21장하고 정반대에요. 뭘 우리 소원대로 돼요 내 뜻대로 안되지요.


성경 말씀은 네가 무슨 기도를 해도 네 뜻대로 안 된다는게 성경 뜻이에요. 이제는 말한다. 속이 시원하네. 이런 소리하면 그 다음에 0.2초 만에 튀어나오는 대꾸가 있습니다. 그럼 기도할 필요 없겠네요. 누가 기도하라고 했나? 지가 기도해놓고. 기도가 아니고 대화다 대화. 대화입니다. 대화는 내 쪽에서 대화하는게 아니에요. 대화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십니다 주께서. 왜? 살아계시니까. 주께서 살아계셔가지고 우리 목을 졸라. 목을 조르던지 우리로 하여금 난감하고 절망적이고 당황스럽고 이런 일을 유발시킵니다.


여기서 계속 한번 어렵지만 봅시다. 떨어졌지요. 우리는 주님과 떨어진 사람입니다. 떨어지지 않고서는 찾아옴이 없어요. 반드시 떨어진 자에게만 성령이 오신 사람에게만 전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내 행함으로 교회 다니면서 봉사한 그것이 바로 주께 떨어진 상황인 것을 성령 받은 상태 사람에게만 그게 이해가 돼요. 그 짓해서 결국 내 존재 빛나게 한 것 나 천당 보내려고 한 것 하여튼 개 같은 짓을 했구나. 성령 받은 자만 알아요.


그래서 여기 목사님들도 계시지만 목사치고 구원받은 사람이 거의 없지요? 못 먹어도 목사라니까 못 먹어도. 목사가 된 이유는 아 그것이 바로 떨어질 주와 갈라질 수밖에 없는 그런 현주소를 언급하기 위해서 목사 되게 하신거에요. 그러면 이 떨어진 상태에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나에게 어떤 환경을 일으켜요. 환경을 일으켜 버리면 이 환경을 뭘 자꾸 생각나게 하느냐 하면 우리의 육의 속성과 우리의 본능을 다시 깨우치게 합니다. 우리의 속성과 본능을.


제가 아까 이야기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몇 가지만 해보겠어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 내 것이 생기는 것. 내 것이 생기는 것 이게 뭡니까? 소유지요 소유. 내 것이 생기는 것 ‘소유’. 이것을 평소에 우리는 못 느낍니다. 못 느끼는데 황당하거나 당황스럽거나 낙망한 일이 있을 때는 갑자기 우리는 어디에 본능을 보이느냐 하면은 남한테 욕 얻어먹으면 어떻게 하지? 어! 내 것 벌금 내가지고 5만원 나갔네. 어?! 내 5만원. 과속해서 하필 왜 운전할 때 분명히 기도 했는데.


평소에 경찰이 없는 그 모퉁이에 경찰이 있어 가지고 나 분명히 핸들 잡을 때 기도 하거든요. 주여 오늘도 안 걸리게 하옵소서. 오늘도 벌금 과속 단속 안하게 하옵시고 네비에 있는 것만 나오게 하시고 우연히 이렇게 경찰들 과잉 근무하지 않게 이렇게 하는데 딱 걸렸어. 그것도 걸려도 걸릴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생각하는게 그때 집 나올 때 기도를 2초 당겨서 했더라면 안 걸릴 수도 있었어요. 타이밍이 하필 그 시간에 나와서 속도 70 유지하다가 그때 하필 다른 생각하다가 80나오다 보니까 60대가 20 플러스 되서 걸렸거든요.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한다는게 뭘 뜻합니까? 평소에는 우리는 소유를 몰라요. 그냥 말씀대로 사는데 무슨 일이 딱 가시가 딱 오게 되면 갑자기 본전 생각나요. 본전 생각나고 내 소유의 입출 들어가고 나오고 생각하고 내가 얼마나 손해 봤느냐 이익 봤느냐 생각하고 타인에게 욕 얻어먹느냐 이것도 생각하잖아요. 갑자기 우리애가 공부를 잘한다든지 툭 이렇게 던져놨는데 생전부지의 할머니가 오시더니만 내가 네 이웃의 누군데 내가 죽고 난 뒤에 손자도 없고 조카도 없고 아무도 없어가지고 재산 25억을 너한테 줄게.


갑자기 이런거 없습니다만 있다고 칩시다. 갑자기 이렇게 25억 생기고 생겨버리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주님 앞에 떨어졌음을 생각납니까? 아니면 주님 앞에 딱 붙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시 주님 믿으니까 보상을 해주는구나 보상을. 예상치 않은 복을 주시는구나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25억 가지고 갑자기 기쁘고 할렐루야 됐다 이 말이죠. 그러면 디모데전서 6장에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하라는 말씀은 어디서 찾습니까? 못 찾잖아요. 돈 있는 부자는 천국 가기 어렵다 하는 그런 것은 이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갑자기 25억이 뭐가 됩니까? 나의 소유가 되지요. 25억이 됐는데 갑자기 그 다음에 할머니가 아들이 없다고 했는데 아들이 와가지고 지금 할머니가 노망 들어서 잘못 갔습니다 25억 도로 가져가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보상 100만원 드릴게. 100만원 받고 기뻐하십니까? 아니면 병신같이 이사 갈 걸 아이고 25억 받고 튈걸. 괜히 그 자리에 있어가지고 도로 마치 도로 빼앗긴거 같은 느낌 들지요. 지금 얻었다 빼앗겼다 이거 무슨 개념입니까? 이게 소유 개념이잖아요 육의 개념이라니까요. 이게 죽을 때까지 번잡스럽게 매일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같이 여기에 시달리는거에요. 한순간도 여기서 떠나본 적이 없어요. 늘 시달려요 늘.


오늘 하루에 계산해서 오늘 하루에 얼마나 나갔고 얼마나 벌었는지 늘 소유의 개념으로 완전 무장하고 있습니다. 막 사시라니까요. 뭘 조심해요. 육에서 육인데 뭘 육을 조심한다고 영됩니까? 조심할 것도 없고 그냥 살아가시라 이 말입니다. 살아가시면 결국 주께서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육이라는 것을 드러내겠죠.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영이에요 영.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내 자신이 육인지를 아는 순간 그게 영이 되요. 왜냐하면 존재가 아니고 육을 육 되게 하는 기능은 누구만 할 수 있느냐? 예수그리스도가 함께 있는 자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가 꽃꽂이해서 주일마다 강단에 꽃꽂이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칭찬들이 난리가 났어요. 이렇게 훌륭하다. 그럼 아까 이야기한 타인이 나에게 인정  해주는거 있지요. 저 사람의 존재가치는 꽃꽂이를 하면서 나의 존재가치가 빛나는 거에요. 그리고 아주 노골적으로 목사님 강단에서 여러분들 저사람 좀 본받아라. 다같이 은사가 있는데 여러분 은사는 왜 달란트는 썩어문드러지고 저쪽은 다섯 달란트 해가지고 지금 열달란트 됐잖아 이렇게 칭찬을 하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진정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 같으면 그 소리가 들리겠어요 안 들리겠어요? 사탄의 시험으로 들릴거에요. 그런데 꽃꽂이 했는데 교회에 보면 번잡스러운 꼬맹이들 있잖아요. 가면서 또 엄마 꽃 이쁘다 해가지고 올라가서 뭉개버렸어요. 뭉개놨을때에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은 그걸 감사해야 됩니다. 왜? 애가 올라간 것도 주의 뜻이 아니면 안 올라갔다.


그런데 그걸 만약에 타인의 칭찬을 고려했다면 자기가 정성을 들여놓고 저걸 함으로서 토요일 밤에 그걸 해놓고 내일 아침 되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꽃을 보고 백합을 생각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는 소리가 이걸 예상할 수 있는 거에요. 사람은 육은 기대하기 때문에. 기대하는데 주께서 그걸 뭉개놨다 이 말이죠. 그러면 뭐냐 하면 아까 요한복음 21장처럼 내 원대로 꽃꽂이 했는데 주께서는 내가 원치 않는 결과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서 뭐냐 하면 오히려 주께 조치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되겠지요. 제가 여러분께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꽃꽂이 이야기 했지만 사실 꽃꽂이라고 하지말고 꽃꽂이라 하지 말고 여기에 여러분 인생을 집어넣어 보세요. 우리 자신의 인생을. 누가 와서 뭉개면 용서가 안 됩니다. 내가 신인데 신을 건드렸으니까 용서가 안 되지요. 그렇지요? 잊었다 하는데 절대로 잊지를 못해요.


다시 합시다. 빨리해서 제가 미안한데요. 나라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 칭찬받는 것을 모아서 자아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 칭찬을 받을 때는 빼고 싶은 경험이 있어요. 어떤 누가 나를 모독 줬다든지 나를 개무시했던 경험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방금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애써 아닌 것처럼 발로 확 밟아놨어요. 튀어나오지 마라 튀어 나오지마. 네가 튀어나오면 나는 육이 되니까 튀어나오지마. 꽉 밟아놓고 절대로 나는 오직 주께 구원받는 기쁨만 한다고 신신당부를 딱 하고 딱 하는거에요. 철두철미하게 나는 주님의 은혜로 산다. 주께 감사합니다. 이걸 대화를 통해서 성령께서 은혜를 줬다 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나에게 그렇게 오년전에 긁었던 그 사람이 와서 그 사이에 안 오던 주위 사람이 갑자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순간 이 사람은 본인의 말을 들을 틈도 없이 가슴이 찢어집니다. 가슴이 막 찢어지면서 찢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아파요. 심장이 아파요. 아파고 숨을 못 쉴 정도입니다. 자기는 애써 잊었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이제는 그런건 인간도 아니야 그런건 무시해. 본인이 계속 무시해 무시해 한 그것이 점점 더 기억이 깊이 깊이 그만 더 새겨지고 못 빠져나오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어느 모임에서 만났다. 기절초풍하죠. 그 모임에 백날 은혜 줘도 소용 없어요. 말씀 좋아도 소용 없어요. 그 사람만 주시합니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은 가만있어요. 가만있어도 가만있는것도 미워. 가만있는 것은 뭐고 행동하게 되면 저 봐 저 봐 저런 행동 나한테 저런 행동 했잖아.


이건 뭐 수련회 가가지고 수련회 간 것이 아니고 감시한다고 시간 다 보내. 이거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직장가도 상사 미운 상사 있으면 결국 못 다닙니다. 결국 그 사람이 준 상처 때문에 못 다녀요. 교회가 복음이 아니고 복음 하나도 없고 완전 목사 다하고 자기 집사고 차사고 선교비 끄집어 내가지고 자기 놀러다니고 백날 그런 교회해도 그 교회에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 그 교회 떠나지 않습니다. 남자 있으면 남자나 자기가 좋아하는 아가씨 있으면 교회가 어떤 꼬라지라도 관계 없어요. 그거 보는 재미로 다녀요. 그 사람 만나는 재미로. 멀리서 짝사랑해도 괜찮아요. 매주 되면 아침 되면 토요일 되면 기다려져. 그 사람 보고 싶어서.


이정도로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자아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보내심을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보내심을 되게 되면 내 뜻대로 안 해줘요. 그 아가씨가 갑자기 다른 교회 간다든가. 아 10년을 버텨서 고백을 했는데 아가씨 말에서 아주 퉁명스럽게 나옵니다. 저 다음 달 결혼해요. 아니 결혼 티도 안 났는데? 교회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입 다물고 있었어요. 다음 달 결혼해요. 오실 거죠? 그 아가씨 성가대하면 같이 성가대하고 주일 학교 애들을 영혼으로 생각하는게 아니고 그 아가씨 보려고 주일학교 하고. 자리도 그 아가씨 바로 뒷자리 해가지고 주시하고 이렇게 다녔는데. 얼마나 충성 봉사한다고 칭찬 다 받았던지. 교회에서 너 같은 청년 없다. 사실은 주님 사랑해서 주님 보고 하는게 아닌데.


인간은 자아의 이익되는거 자아에 손해되는거 아주 민감합니다. 민감해요. 이게 나한테 손해냐? 아니면 이익이냐? 당신에게 얼마를 해주면 당신은 나에게 얼마를 해줄건데? 내가 이만큼 해줄테니까 당신은 나한테 뭘 해줄겁니까? 뭐 성령 받았다고요? 이게 본심인데. 무슨 성령을 받아요. 그런데 그 인간을 보내시잖아요. 어디? 이 세상에 보내시는 거에요.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겁니다. 보내게 되면 비로소 그때 사랑이 뭔지 천국이 뭔지 주께서 지켜주시는게 뭔지 비로소 실감나게 느끼는 겁니다.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있고 예수님의 희생 사랑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어떻게 살아도 이제는 상관 없어요. 자기 할 일은 자기 죄 아는 것 그것만 자기 할 일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뭐든지 육으로 살수 있는거에요. 말이 이상하게 끝나죠 결국은. 이렇게 해서 영적으로 삽시다가 아니라 영적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육으로 당당하게 육으로 살 수 있어요. 내가 이야기하는데 왜 속이 시원하노? 당당하게 부끄럽지 않고 육으로 살 수 있는 겁니다.


이제는 알거든요. 누가 나를 돌 던질 수 없다는걸. 이미 주님이 이만한 돌 던졌어. 주님이 나를 이만한 돌 던졌기 때문에 주님 던진 돌보다 더 센 돌이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말씀을 해석할 때 내가 뭐다? 결국 나는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 말씀을 봤다 이 말이죠.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결국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마지막의 끝은 뭡니까? 자기 입으로 나 저 사람의 제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한 거에요. 그리고 일곱제자들 따로 고기 잡으러 간거에요. 할 짓이 그거밖에 없으니까.


여기서 생각할 것은 주님이 안 찾아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주님이 안 찾아오면. 안 찾아오면 끝나는 거죠 뭐. 중요한건 찾아와 주셨다는 것이 베드로가 이뻐서가 아니라 주님이 자기가 자기에게 한 약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 18장 6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뭐합니까? 엎드러지죠. 그러니까 지금 이 요한복음 기록을 하면서 체포되는 죄인이지만 체포한 사람이 어떤 기에 눌렸다 할까요? 어떤 영에 눌렸다 할까요?


체포라는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체포하잖아요. 그렇지요? 자기는 잘났고 너는 못났기 때문에 체포하는건데 갑자기 못났다고 체포하는 사람 앞에 뭐합니까? 엎드려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해요. 엎드려서 이렇게 있는거에요. 누가 잡고 누가 잡히는지를 그들은 말보다 먼저 본심으로 드러낸겁니다. 우리가 잡을 분이 아니올시다. 그런데 주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잡혀주는 겁니다 라는 이야기를 그들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에요. 그들이 그런 마음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은 어떤 기에 눌려서 할뿐이고 우리가 볼 때는 주님 앞에 어느 누구도 엎드릴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도 주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지요? 엎드릴 수밖에 없는 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가지고 이 땅에서 예수의 증인되게 하신 겁니다. 특별히 해줄 주님께 할 게 없어요. 특별히 우리가 어떤 좋은 환경을 만들 필요도 없어요. 괜찮고 거룩하고 경건한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지 마세요. 이거는 옛날에 많이 했다. 마이 묵었다 고마해라. 이건 많이 한거에요. 우리가 평소에 옛날에 성령 안 받았을 때 많이 한거라 이 말이에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끝입니다. 오늘 총정리 하는 의미에서 하겠어요. 자, 교회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몰라요. 우리 자신은 모릅니다. 교회가 눈에 보인다 이 말이에요. 어릴 때 주일학교 다녔거든요. 아 죽고 난 뒤에 교회에서 들으니까 하나님이 계시니까 죽고 난 뒤에 지옥가면 안 되고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면 어릴 때부터 복을 받는다. 이 복이라는게 뭐냐 하면 내가 잘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세상 살아보니까 만만치 않거든요. 내 힘으로 되는게 아니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누구한테 의지해야 되잖아요. 의지할 때 누구한테 의지해야 되겠어요? 내가 어릴 때 믿던 하나님한테 의지해야 되겠지요? 신에게 의지해야 되겠지요. 이 신이 뭐냐 하면 바로 ‘타자’에요. 어떤 타인이냐? ‘든든한 타인, 든든한 타자’.


자, 이렇게 믿게 될 때 우리 자신의 변화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단독적인 변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내가 있는데다 ‘플러스 알파’지요. 내가 현재 살아간데다가 뭔가 모자라고 부족하고 보충하고 나의 능력 없을 때 플러스 알파 뭔가 나를 도와주고 후원해주고 내가 어려울 때 위로해주고 사랑해주고 내 뜻대로 해주고 해주고 해주고 그 해주는 그분을 든든하게 믿는 겁니다. 그때 행함으로 하지 말고 교회에서 목사한테 들은건 있어가지고 행함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으로 구원한다고 이 믿음을 주님과 대화하는데서 뽑는게 아니에요. 이 믿는다는 것을 자기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교회 목사가 뭐냐? 믿을 때 그냥 믿지 말고 열심히 믿으라 이렇게 하거든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순수하게 믿으라 이 말이죠. 그거는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거에요. 이 육이. 순수하게 믿고 열심히 믿고 믿는데 목적은 뭡니까? 괜찮은 나에다가 더 괜찮은 나를 만들어 주는 것. 여기에는 대화가 뭐냐? 내가 이 욕심 많은 육이 누구하고 대화한다? 육과 나하고 대화한거에요. 그래서 제가 주일낮에 육하고 대화하지 말라고 했지요. 여러분 여러분 자신하고 대화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여러분 자신을 배신하라고 했지요.


자꾸 나하고 의논하지 말란 말이죠. 나하고 의논하게 되면 내가 정당화하게 돼요 내 행동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착했는데 더 착하게 되어 버려요. 주님의 뜻은 그게 아니고 걸림돌이 있다 이 말이죠. 못 됐는데 너 지금 당장 죽어도 되는데 주님께서 살려준다는 대화가 소통되려면 뭐냐 하면 바로 이 말씀이 우리가 말씀을 이렇게 믿고 이런게 아니고 믿음이든 말씀이든 지금 내가 여기 있음, 있음 자체가 뭐다? 이게 바로 영이다 이 말입니다. ‘있음’ 자체가.


내가 여기 있는게 영으로 있는 거에요. 그러면 그런 나를 보면 나는 육으로 보이죠. 이 육으로 육이라는 것은요 안 믿는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은 인정을 안 해요. 자기를 인간으로 보지 육으로 안 봐요. 그런데 육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영의 안목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사하죠. 평소에 안 믿는 사람 같으면 착한일 해야 감사해요. 왜? 복 줄 거니까. 착한일 이만큼 했으니까. 착한일에 대한 보상이 있잖아요. 당근과 채찍이다 이 말이죠. 착한일 하면 당근 줄거고 나쁜일 하면 채찍 줄거고. 착한일 했으면 복이  올 거라고 기분 좋아서 하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는 착한일 나쁜일이라는게 없어요.


이제는 선악 체제가 없는데 있는 자체를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그냥 영의 관계 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해도 말고 귀를 붙여주고 그냥 육이 할 수 있는 것을 그냥 다 까발리게 해줘요. 그게 바로 18장 그 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홀로 가십니다. 제자들하고 이제 떨어지는 거에요. 이 ‘떨어짐’을 나중에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알지요. 떨어져도 괜찮은데 찾아 오셨다는 것. 찾아오심이 저와 여러분이 뒤에 받았다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뜻대로 태어나지 않았고 내 뜻대로 살아가지 않았음을 우리는 짧은 시간은 알지만 다시 돌아서면 또 자기 살 궁리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마저 육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235번지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