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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23:44:11 조회 : 495         
두개의 세상 181016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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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21.♡.203.222) 18-11-01 17:42 
강남-요한복음 18장 33절(두개의 세상)181016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8장 32절 한번 보겠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렇게 되어 있죠. ‘말씀에 응한다’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일도 인간의 어떤 발걸음도 어떤 생각도 말씀이라는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어떤 계획도 말씀이 허락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계획도.


예를 들면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을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한번 적어볼께요. 예수님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씨 뿌리는 자’로 이야기 했어요. 씨 뿌리는 자. 이게 뭐냐 하면 주도권이 예수님한테 있다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주도권이. 한번 상상해 보세요. 농부가 씨를 갖고 있다. 이것을 마구 뿌리는 거에요.


그런데 뿌릴 때 밭이 우리한테 던지지 마세요 라든지 듬뿍 뿌려주세요 가 성립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냥 임의로 임의로 뿌려요. 위에서 살충제를 살포하듯이 주님께서 뿌리는 자거든요. 그러면 세상은 이미 세상은 어떻게 되겠어요? 뿌린 대로 진척될 뿐이에요. 뿌린 대로 진척. 전개되는 것.


위에서 씨 뿌리는 분이 뭐를 뿌리느냐 하면 마태복음 13장입니다. 씨 뿌리는 분이 뭘 뿌리느냐 하면은 ‘말씀’을 뿌리거든요 말씀을. 말씀을 뿌리게 되면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이라는 것은 항상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할 때는 출발을 예수님의 씨 뿌림부터 출발을 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부터 시작해야 이 세상이 규정이 된다는 겁니다.


세상은 어떤 것이냐? ‘말씀대로 전개되는 것’ 간단하지요. 간단하거든요 세상이라는 것은. 말씀대로 전개된다. 그러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말씀 봐. 말씀 보라고. 거기에 보면 그 말씀대로 전개되는데 그걸 요한복음 18장 32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응한다는 것. 때가 되매 타이밍 맞춰서 딱딱 그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를 인정을 하려면 내 인생에서 내가 내 인생의 씨를 내가 못  뿌립니다 또는 뿌릴 수 없습니다. 뿌려도 소용 없습니다를 인정해줘야지요. 내 인생에 대해서. 내 인생은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 내 인생에서 나를 빼세요. 나를 빼고 인생 자체가 주님의 씨 뿌림의 전개 과정에 거기에 합류되어 있다고 봐야 되지요.


그러면 내 인생에서 내가 빠져버리면 그러면 나라는 인생은 누구에 의해서 결정된겁니까? 주님의 씨 뿌림에 결정 되지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내가 뭐를 더 얻을까를 생각 안하고 주신게 뭐냐를 생각하게 돼요. 인생을 살면서 제일 모든게 피곤하고 짜증나고 화나고 투덜대는 이유가 내가 왜 투덜대느냐 하면 내가 희망을 갖기 때문에 그래요. ‘희망’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기대를 갖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희망과 기대를 갖지 말자는 겁니다. 그러면 희망과 기대를 갖지 않으면 그럼 나는 뭐냐? 나는 이게 되요. 완결이 되는 겁니다. 이것 주세요 하지 말고 이것 주셨네요 라고 바꾸자 이 말이죠. 그것을 헬라어 문법에서는 ‘아오리스트’라고 하는데 완료형이에요 완료형. 그 완료형의 대표적인 구절이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시고’가 우리 번역에는 과거로 되어 있잖아요 그 말이 맞아요.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그 다음에 영광스럽고 또는 영화롭게 영광스럽게 하셨느니라 하는 그 번역이 뭐냐 하면 성도를 볼 때에 완결형으로 봐라 완결형. 그러니까 내가 몇 년도 태어났을 때는 때가 응해서 태어난거에요. 내가 몇 년도에 태어났다는 것은 태어났으니까 이거 가져야해 네가 이만큼 실적 업적을 남겨야해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에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는 아 태어났다는 자체가 이게 주의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태어난겁니다. 말씀자체가 완결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인생이 피곤한 이유가 뭐냐 하면 기대를 하기 때문에 피곤한거에요. 완결로 보지 않고 기대를 하기 때문에. 딸이 와서 엄마 나 수학 0점 이야 라고 할 때에  그 아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거 아니고 주께서 모르는 문제만 출제되게 하셔서 그런거에요. 아버지가 교무과장이 아니거든. 모르는 문제만 출제되서 그렇게 한거에요. 뭐 속으로 부글부글하겠지만. 그래서 엄마가 되어서 딸이 수학 시험 나 몇 점 맞았는지 알아? 이렇게 할 때는요 마치 기대를 안 한 것처럼 내가 생각도 안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세요.


오늘이 분명이 수학시험 발표 날인데 이게 학원 끝나고 5시에 들어오겠지. 5시에 들어오면 내가 물어야지. 너 시험 몇 점 맞았어? 이 자체가 이미 기대잖아요. 이 자체가. 이 자체가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인생 사는게 피곤해요. 가만히 있어도 피곤한데 피곤을 가중시키고 있는겁니다. 뭘 새롭게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뭐를 얻고 살았나를 생각하라  이 말이죠 뭐를 얻고 살았나. 그게 바로 그렇게 될 때 범사에 감사라는 말씀이 현상이 나타나고 그게 말씀에 응하는 거에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뭐로 봅니까? 씨 뿌리는 농부로 봤지요. 씨 뿌리는 자. 씨를 뿌렸거든요. 어디에 뿌리는가 보니까 ‘마음’에 뿌렸어요 마음에. 그게 13장에 보면 나와요. 마음에 뿌린다고. 그런데 이 마음은 수동적입니다. 뿌리면 뿌리는 대로 그냥 결과물을 낼 뿐이에요. 씨 뿌렸는데 마음이 정신 차려라 이 놈아 해서 내 마음이 내 마음을 원하는 마음이기를 포기하라 이 말입니다.


주시는 씨와 마음이 거기서 반응을 나타내는 이 반응은 주께서 이미 익히 아시는 반응이기 때문에 이 반응을 내 마음이 조작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우리는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 같아요. 산성에 들어가면 붉은색깔이 파랗게 변하고 그렇지요? 붉은 산은 불난다 하는 공식이 있잖아요 화학시간에. 산성은 리트머스 시험지를 붉은 것을 파랗게 변하게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그게 리트머스 시험지가 오기 전까지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예를 들어서 내가 하나의 씨를 뿌린다고 들을 때 그 말씀이 전혀 생각이 안 날 때 이거 마귀가 와서 낼름 물고 도망친 겁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예시에서 악마를 뭐로 표시했느냐 하면 말씀을 빼가는 존재로 봐요. 그만큼 악마에서는 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악마는 이미 알고 있어요. 악마를 말씀을 낚아채는데 악마의 모든 힘은 영향은 거기에 모아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악마의 복수극을 벌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복수심이 있어요.


왜냐하면 선악을 아는 일에 있어서 자기도 한 몫 하는데 악한 천사가 선악을 알고 있거든요. 하는데 주님께서는 선악을 아는 그런 주로써 자기 아들 예수님을 자기 대신 내세웠습니다. 소설 이야기 아니에요. 이거 요한계시록에 다 나오는 이야기인데. 악마의 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악마의 적은 예수님이 적이에요. 욥기에 보면 악마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구약이니까 신약은 또 예수님이 등장하지만 예수님 오시기 전이니까 그 시키는대로 욥에게 가지요.


욥에게 갈 때에 욥이 장차 올 성도의 그 모습을 욥이 잘 보여줍니다. 욥기 13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로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이런 대목이 나와요. 하나님이 신앙인에게 다가섰는데 신앙인 왈 하는 말이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로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라는 반응을 나타난 겁니다.


대단히 중요한 대목인데 욥기 13장 24절 대단히 중요한 대목인데 이게 뭐냐 하면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신앙을 가지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신앙의 ‘보관자’로서의 인간이 신앙인이에요. 주님이 주신 신앙을 보관하고 있는 사람. 그걸 유지하고 있는 사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신앙을 ‘선물’이라고 하거든요. 내가 신앙을 공장에서 만들어 낸 것이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택배로 보내준 신앙을 고이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신앙인이에요.


왜냐하면 그 신앙인 속에는 그 신앙 속에 내용을 쪼개보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신앙’이 거기에 담겨있어요. 예수님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야기 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도 포함되어 있고 ‘주께서 나를 살리셨나이다’도 포함되어 있고. 그 중간에 ‘주께서 모든걸 다 이루었다’도 포함되어 있고. 이해 되십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이 없는 신앙을 예수님이 오셔서 생산해 내는거에요. 그 생산해 낸 것을 성도를 통해서 보관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보관했던 그 성도의 입에서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로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라는 그러한 반응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반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때 나온 반응과 반응을 그대로 복제를, 복사를 한거에요.


우리가 아는 신앙과 너무나 다르죠. 우리가 아는 신앙은 뭐냐? 믿습니다.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 주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떠나지 않겠습니다. 잘못했을 때 회개하겠나이다. 우리가 줄줄이 꾀고 있는 신앙의 그 면면들은 굉장히 고상하고 성스럽고 거룩하게 보이잖아요. 그런데 정작 욥이라는 신앙인이 보여주는 진짜 신앙은 주께서 어떻게 얼굴을 가리시고 저를 외면하시고 어떻게 저를 주의 원수로 만드십니까가 신앙의 그 내용이 된다 이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쳤던 그걸 그대로 보여주는 거에요. 우리의 상식을 밥상 엎듯이 엎어버립니다. 우리의 상식을 엎어버려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처음부터 다시 할께요. 씨 뿌리는 분, 씨 뿌리는 농부로서 예수님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세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씨 뿌리는 이의 ‘연쇄작용’이죠 연쇄작용. 연쇄작용으로서 저는 이걸 ‘전개’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있는 것이 아니고 전개되어 가는 거예요. 씨 뿌리는데 그 씨 뿌리는게 뭐냐 하면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이라는 씨를 뿌려주게 되면 여기에 세상에는 없는데 씨가 뿌림으로서 말씀이 있음으로서 말씀이 말씀되게 말씀의 내용을 더 전개하는 전개과정 속에서 부채살처럼 펼쳐지는 것이 이게 바로 세상이라 이 말이죠 세상. 이게 바로 창조 아닙니까 창조. 이게 세상이다 세상. 세상 있다면 이 세상 속에 인간의 마음도 인간의 몸과 마음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수동적이라서 내가 내 마음을 못 바꿔요. 못 바꾸니까 바꾸지 마세요. 내가 내 마음을 바꾸지 마세요.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 있는 마음으로 바꾸지 마세요.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데 그 소관은 말씀의 소관인데 마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마음 안 고치면 너 지옥 가 라는 식으로 협박을 한거에요.


협박을 하니까 이 협박은 뭐냐 하면 악마가 와서 농부가 씨를 뿌릴 때 돌짝밭에 떨어진 씨의 특징을 해석하면서 뭐냐 하면 악마가 와서 그 떨어진 씨를 씨 채로 몽땅 물고 갔다는 거예요. 씨 없다. 여기 씨 없다 하는 식으로 물고 갔다는 말은 악마가 정말 싫어하는 것 악마가 정말 반대하는 것은 뭐다? 세상 역사를 전개하는 기초되는 그 말씀 전개 시키는 힘의 원동력을 아예 차단시키는게 악마의 역할이에요.


말씀 자체 씨 뿌리는 분 예수님이죠. 씨 뿌리는 분과 차단시키고 이걸 아예 말씀이 없으니까 예수님도 없겠지요. 없는 걸로 하게 되면 이 세상전개는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바로 인간들 손에 달린거예요. 그럼 내 인생 전개 내 인생 운명과 미래는 누구 손에 달렸단 말입니까? 나한테 달렸다. 내가 얼마나 순종하고 믿고 착실하고 헌금하고 나한테 달렸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악마의 복수극’이에요. 악마의 복수극.


선악을 아는데 있어서 왜 나도 악마도 아는데 주님께서는 따로 주를 나 말고 제끼고 하나님 아들에게 줬습니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서 악마는 자기 인간들을 볼모로 잡아 버리죠. 그렇게 해가지고 복수극을 하게 만들어서 총을 악마한테 겨눌 총부리를 누구한테 겨누게 만드느냐 하면 예수님한테 겨누게 만드는 거에요.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너무나 예수 믿는 내가 내가 보기에 너무나 대견스럽고 훌륭하고 착하기 때문에. 주여 그럴리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야 라고 베드로를 통해서 12제자를 통해서 그렇게 보여줘도 그건 베드로가 신앙이 없어서 그렇지 저 몰라요? 저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우기는데 욥기 13장 24절에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거에요.


욥기 13장 24절 네번째한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로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라고 이야기 한거에요. 누가? 욥의 친구가 아니고 욥이. 하나님이 자랑질하려고 내세운 그 신앙인이 이런 고백을 하는거에요. 이 고백은 놀랍게도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하신 고백이에요.


그렇다면 주께서 신앙인에게 네가 믿음을 만들라는 이야기 아니고 내가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이 네 안에 보관이 되고 장착이 되게 되면 그 말씀이 스스로 안에서 움직이면서 이게 주름 겹쳐진 것이 펼쳐요. 마치 영화 자동차 됐다가 로봇 되는거 있잖아요. 트랜스포머처럼 1,2,3,4 까지 나온 트랜스포머처럼 스스로 이렇게 구겨진 것이 펼쳐지는 겁니다. 펼치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나와요.


그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믿음이에요. 그 과정을 밟게 하는겁니다 그 과정을.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주를 배신하는 당사자가 나라는 그 자리부터 시작해야 그게 신앙이에요. 이게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 찾아왔을 때 똑같은 반응으로 나타났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 반응이 뭡니까? 나? 네가 핍박하는 나. 네가 핍박하는 나.


그러니까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고 나는 너의 핍박을 받는 자 나. 핍박받는 자가 핍박하는 자를 찾아오는 방식의 구원이에요. 구원은 그 방식 외에 다른 방식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핍박했다는 인식 없으면 그 사람은 지금 자기 믿음을 조작하는 사람이에요. 모든 하는 일이 주님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왜 날 힘들게 하느냐 이 말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내 인생 왜 이렇게 꼬이게 하십니까. 맹장 꼬이면 수술하면 되지 인생 꼬이면 수술 할 그것도 없어요.


그렇다면 말씀이 세상 전개하면서 신앙의 본색을 한꺼풀 두꺼풀 벗겨낼 때에 그 과정을 그 과정에 어떤 원칙이 있는데 다른 이방민족은 원칙을 몰라요. 구약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그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은 간단하게 이렇습니다. ‘시간에서 공간으로, 공간에서 인물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어떤 계명을 줬냐 하면 ‘안식일을 지켜라’했죠 안식일을. 안식일은 공간입니까? 시간입니까? 시간이죠. 특정 시간을 엄수하게 만들었어요. 특정 시간을 엄수하게. 인간세계의 어떤 특정 시간을 들어와 버렸습니다. 제가 대구 강의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오실 때 그냥 오신게 아니라 특정 시간을 요구하면서 들어 왔다는 말은 평소의 인간들의 모든 시간은 뭐냐 하면 자기 생계와 삶의 보탬에 대해서 시간 스케쥴이 짜였다는 것을 염두해 두는거예요. 내 몸 살리기 위해서 나는 시간관리에 나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안식이라는 것을 강제로 이야기 해버려요 강제로. 강요해 버려요 안식일을.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잖아요. 날. 안식이 뭡니까? 쉬는 날 이잖아요. 누구 쉬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 쉬는 날이에요. 하나님이 쉬는 날을 반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너 이스라엘아 너는 택하신 백성이거든요. 택하신 백성 출애굽기 19장에 나오지요. 너는 택한 이 세상에 많은 민족들 가운데 유일하게 너를 택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많은 민족들을 일부러 들추어내요.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너만 유독 택하여 세웠나니 지금부터 너는 뭐를 지켜야 되는냐 하면 언약을 지켜야 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언약이란 강매에요 강매. 언약 강매라고요.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청한게 아닙니다. 우리 그것 지킬께요 자기들이 짜낸게 아니에요. 그냥 쳐들어온거에요 언약이라는게.


쳐들어와버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6일동안 7일동안 열심히 살아도 안식일을 누락하게 되면 작살나게 되어있어요.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삶과 죽음은 본인의 노동여하에 달린게 아니고 어디에 달려있습니까? 주께서 규정한 그 틀, 주의 안식일 틀에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면 안식일 잘 지키면 되지 않느냐. 안식할 시간이 또 뭐로 변하느냐 하면 안식하는 땅으로 변해요. 시간이 뭐로 변한다고 방금? 시간이 뭐로 변합니까? 공간으로 봐요. 이걸 가지고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시간이 공간으로 변해요. 안식이 이렇게 완료되는 것. 마무리 되는 것. 계속해서 안식되는 땅, 그게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누가 사느냐? 성경에 보면 약속의 땅에 누가 사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게 하기 위한 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조건은 본인이 본인을 위해서 있는 시간이에요. 인간들을 고려한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본인을 위한 시간이고 약속의 땅 요새 말로 천국이죠 천국도 하나님 자신을 위한 땅이에요.


여기서 뭐가 배제됩니까? 인간을 위한 땅은 아니에요. 그래서 이 땅을 신명기 12장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땅’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땅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천국은 주의 이름을 위한 땅이에요. 우리를 위한 땅 없어요. 여기까지는 구약에서 우리가 조금 이해되고 쉽다고 하는데 그 다음에 어려운게 뭐냐 하면 안식의 땅이라고 하는 것 누가 봐도 ‘땅’이죠 땅. SIO2 물질성분인 땅. 시간.


이 땅이 뭐로 변한다고 했습니까? ‘인물’로 변해요 인물로. 이것은 엄청난 도약입니다. 엄청난 비약이거든요. 땅하고 인물하고 이게 매치가 안돼요. 이 인물로 변하는 것을 가지고 사도바울 편지에서 인물로 변해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 진짜 어려워요. 예수 안, 다른 같은 말로 ‘성령 안’, 다른 같은 말로 ‘십자가 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특히 십자가 안이라는 것은 더 어려운 말이죠. 왜? 십자가라는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안팎이 없어요. 제가 여러분한테 질문할께요. 묵 파라핀 비누 공통점이 뭡니까? 묵, 메밀묵하는 묵, 파라핀 비누 특징 딱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이 뭐죠? 안과 밖이 없어요. 안과 밖.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파라핀 덩어리 양초, 양초 덩어리 비누 덩어리 묵 덩어리는 안과 밖이 따로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그 자체가 전부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들어온다는 말은 예수님과 한덩어리 되는걸 말해요. 내 손이 아니고 주님 손 이렇게 된다 말이죠. 내 목숨이 아니고 주의 목숨 이렇게 된단 말이죠. 이게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려요.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예수님하고 나하고 사이에 둘 중 하나를 양보를 해야돼요. 예수님 살면 나는 죽어야 되고 나는 내가 살면 예수님이 죽어야 돼요.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대표자를 누가 정하느냐 둘 다 대표자가 될 수 없어요.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메밀묵인데 이게 도토리묵하고 섞이고 그러면 안돼요. 인삼비누인데 다른 아카시아 비누 이런거 안돼요. 동질이에요 동질. 그걸 요한복음 17장에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17장 여기에 22절에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요한복음 17장 22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된다 못 빠져 나온다. 예수 믿었으니까 따로 나라는 것을 끄집어 낼 생각을 아예 하지 마라 말이죠. 끄집어낼 생각을 하지 마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하는 말씀이 그 말이거든요. 나는 죽고 누가 산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왕 말 나왔는데 고린도후서 한번 봅시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 자구적으로 누가 봐도 누구보고 여러분 설명해보세요 해도 동일한 이야기 나와야 되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 고린도 후서 4장 10절의 말씀을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예수님 따로 나 따로가 된다? 안된다? 이게 따로 국밥이 안된다니까요. 그냥 밥만 줘서 국에 밥 말아 먹던지 이렇게 해야지 이게 따로 나오질 않아요. 둘인데  안되잖아요. 성령이 그렇게 해줘요 성령이. 성령이 그렇게 해주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쪽에서 주님께 할게 없어요. 신약시대는 이후에는 십자가 이후에는. 내 쪽에서 주님께 할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주시는 분이지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사도행전 17장의 말씀처럼. 주께서는 일체 안 받습니다. 아무것도 안 받아요. 돈이고 정성이고 안 받습니다. 기도도 안 받아요. 아무것도 안 받아요. 기도할 줄 알아야 받지요. 중언부언 하는데요. 맨날 달라는 기도 하는데 그 기도 안 받습니다.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죽은 놈한테 아무것도 안 받고 이미 죽은 놈한테 뭘 받아요.


그러니까 드리고자 바치고자 하는 것은 아직 덜 죽었다는 뜻이에요. 이게 안 믿어진다는 겁니다. 안 믿어지게 때문에 기도하는거예요. 안 믿어지기 때문에 아주 애가 타는거예요 애가. 내가 애가 타는 것은 씨 뿌리는 자를 완전히 가려버리는 거에요. 이거 해주면 주께서 이거 해주면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보다 더 한거 해드리겠습니다 한단 말이죠. 그건 나와 타자, 나와 타자가 분리될 때나 하는 소리에요.


나 여기 있고 바깥에 남이 있을 때 이게 하나가 아니고 뭡니까? 하나가 아니고 둘이죠? 둘이 될 때는 내가 저쪽으로 다가가려고 접근하지요. ‘approach’라고 하는데 영어로 접근하고  접근하고 가까이 더 가까이. 경상도 말로 가차이 더 가차이. 천로역정처럼 좀 더 높은 곳을 행하여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또는 선교단체 같으면 버리고 또 버리고 완전히 불교에요.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어디까지 기어들어가는지 한번 보자 어디까지 기어들어가는지 한번 보자. 나를 버리고 또 버리고. 좋아 머리까지 깎아라. 어디까지 들어갔는데? 퍼주고 더 퍼주고 가난한자 도와주고 원수를 사랑하고 좋다 더 해보자. 어디까지 하는지 한번 보자.


내가 누구한테 드린다는 것은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주는게 아니에요.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지 주는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헌금을 할 생각을 하지 말고 감사히 받아 챙기세요. 애들 피아노레슨 돈 들어가고 쓸 거 많지 않습니까 침대 바꿔야 되고 라돈 침대는 주의해야 되고요. 가스렌지 고장난거 해야 되고.


왜 주신 것을 쓰는 그것이 영광이에요. 사람이 뭔가 남한테 주게되고 바치게 되면 갑질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그거 자기 기대한 예상대로 안하면 복수하게 되어 있어요. 총부리를 주님 앞에 쏠 준비하고 있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에게 정성을 얻고자 오신게 아니고 “아이고 철딱서니 없는 것 네가 뭘 알아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 다 이루었다.” 그거 하러 오신 거에요. 받아 챙기려고 교회 받으려고 온게 아니에요.


그 친목단체 만나면 뭐합니까 맨날 놀러가고 버스타고 놀러가고 버스 출발할 때 기도하고 들어올 때 교회 올 때 8명 죽어 돌아오고. 버스 운전사 졸음운전 해가지고. 교회 권사들 놀러가 8명 죽고 돌아오고. 기도해도 소용없네. 지금 이 문제 풀어야돼요. 시간에서 공간, 공간에서 인물로 전환될 때 충격적입니다.


이 인물은 구약에서는 내가 여기 있고 여호와 하나님 있잖아요. 물론 여기 모세 선지자들 있지만. 안식일을 지켜라. 예. 안식일날 나무하지 마라. 예. 십일조 해라. 예. 뭐 이렇게 헌물을 바쳐라. 예. 제사해라. 예 알겠습니다. 나 따로 있고 하나님이 타자로 또는 남이 되어서 나에게 지시하게 되면 이걸 받아들여요.


그런 식으로 순종하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쉐마’라고 합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신명기에 나오죠? 들으라. 쉐마 쉐마 쉐마 쉰 소리 하는거 많이 들었죠? 쉐마 쉐마. 못 들었어요? 순종 안하면 너희 저주 받는다 이런거 있잖아요. 말씀을 들으라. 우리는 순종만 하면 된다. 옛날엔 순종 못했는데 성령 받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다. 이런 구조로 가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있는 이상 나와 나 사이에는 항상 건널 수 없는 개입이 항상 존재하게 되어 있어요. 항상 존재해요. 한 발짝 다가가면 또 한 발짝 떨어지고 또 한 발짝 다가가면 또 떨어지고. 꼭 님 그림자 님 그림자 달 그림자. 달 잡으려고 하면 달은 저만치 가잖아요.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사실은 타인 예수님이 나의 타인 자리에 있다는 것이 사실은 예수님을 위장한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만든겁니다. 여러분 수녀 신부들 보세요. 복장 꼬라지 한번 보세요. 수녀 신부 복장. 복장 봤어요? 수녀 신부 교황. 아직 교복 안 벗었어요. 유아적인 퇴행적 자질을 보여줍니다. 유니폼을 입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인위적 소속감을 준다 인위적 소속감. 뭔가 인위적으로 우리는 한 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선교단체들 어떤 수련회 참석하면요 JESUS 빨갛게 해가지고 이거 왜 입는데? 이거 왜 입어요? 죽어도 하나 살아도 하나 같이 간다 이 말이거든요.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다 교회에서 그렇게 안 놀았어요? 어디서 노셨군요. 교회에서 노신 사람은 그런 모습에 그런걸 가지고 어떤 소속감을 느끼고 마음의 안정을 얻고 그래요. 내가 참 세상에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같은 형제 자매와 더불어서 이렇게 찬송하고 내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눈물을 팍 흘리고 하잖아요.


성경에서 인간들은 잠잠해야 됩니다. 인간들은 잠잠하고 말씀 자체가 어떤 식으로 전개 되는가 시간에서 공간에서부터 인물로 가요. 그렇다면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마음이 있는데 마음이 4종류의 마음이 있지요. 4종류의 마음이 있는데 나는 어떤 종류인지 본인은 몰라요. 본인도 몰라야 되고 알 필요도 없어요.


내가 만약에 4가지의 마음밭 중에서 골라라고 하면 전부다 막 머리 쥐어뜯고 여기에 30배 60배 100배 여기 다 가려고 줄을 서시오 해서 전부 줄 다 서야 돼요. 그러니 이거는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한다는 자체는 뭐냐 하면 결정을 선택을 내가 했다는거예요. 내 결정 내 선택이 바로 악마의 악마가 그걸 유지하라고 말씀을 제껴버린거에요. 말씀하게 되면 무조건 뺏어 가는 이유가 그 말씀 안에 주님의 선택과 결정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걸 못 듣도록 못 보도록 뺏어가는거에요 악마가.


남아있는 것은 내 결정과 내 결심은 나의 기대감과 나의 희망과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현재 마귀 세상이 이런 세상이에요. 상당히 주님 보시기에 정말 불편한거에요. 이거 나만 불편한가? “나만 불편해요?” 백일의 낭군에 나오는 대사 아닙니까. 심히 불편하구나. 말씀이 스스로 알아서 전개하라고 요한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있습니다. 성경 왜 있는데요? 응하게 함이라, 응하게 함이라.


오늘 18장 32절처럼 주님께서 죽으신 것도 알아서 죽으신거에요 알아서. 말씀에 응하게 하심 타이밍 맞춰서 때가 되매 죽으신거에요. 그러면 성령오신 것도 때가 되매 오시는 거에요. 그러면 그렇게 전개된 것은 그 전개된 모습이 주님의 실적이고 지금 이 모습이에요. 이 모습인데 우리 안에 딱 들어오니까 ‘주여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되는 겁니다.


공간에서 인물로 되기 위해서 공간 자체에서 공간이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눠져야 되겠지요. 첫째는 뭐냐 하면 사람 잡는 공간, 사람 죽이는 공간 있어야 되죠. 주님께서 오셔서 요한복음 특히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거의 없는데 요한복음에는 있어요. 내가 이 세상에 왔다고요 이 세상에. 내가 이 세상에 왔다는 이야기를 요한복음에 굉장히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많은데.


‘내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이 세상에 있다는 뜻이 아니지요. 나는 다른 세상에 있었는데 이 세상에 왔다가 되는 겁니다. 공간이 두 개입니다. 그럼 공간이 두 개라면 어떻게 인물이 되느냐. 이 공간에 왔다는 이유 때문에 이 공간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습니다. 죽어버려요. 죽어 버리면 이 세상 자체는 말씀에 이 공간 자체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공간은 나쁜 공간이 되겠지요. 주께서 일체 아무것도 없는 폐기될 공간으로 확정되는 겁니다. 그리고 주께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다시 성령을 통해서 또는 그냥 주님을 통해서 그냥 오시는  거에요.


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여기 오셨습니다. 우리가 상황극을 한번 해볼께요. 여러분하고 제가 같이 있는데 제가 갑자기 여러분들 그냥 조용하게 있는데 갑자기 ‘주여 누구십니까?!’ 이러면 다른 사람들이 미쳤나?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뭐 번개치는 그런 소리 밖에 안 들렸어요. 그런데 사울은 이게 번개가 아니고 어떤 돌멩이가 떨어진게 아니고 어떤 분이 귀신처럼 어떤 분이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본인만 알았던거죠. 본인만 알았으니까 그 분은 어떤 분이냐 하면  대화가 가능한 분으로 오신거에요.


그걸 ‘현존성’이라고 하는데 인물의 현존성. 실제로 안보이지만 와 계신거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하니까 대화가 가능하니까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하고 대화를 주고받는 거에요. 신앙이 이것부터 출발한다고 한다면 이거는 교회 10년 20년 50년 다녀도 소용없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사도바울과 동일한 체험 동일한 경험을 가졌다 이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현존성’ 예수님의 현존성이죠 현존성.


만약에 어떤 청년이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면 식구들하고 이렇게 밥상에서 TV보다가 주여 누구십니까?!! 이렇게 하면 아버지가 “밥 먹다가 이거 무슨 짓을 하는거냐 밥 먹다가 이게 버르장머리 없이 이게 무슨 짓이야.” “아버지는 제 3자니까 가만있어요. 주여 어쩌라는 겁니까.” “뭐 이런게 다 있어 야야 병원 예약해라.” “아버지는 몰라요.” “내가 뭘 몰라 내가 뭘 몰라. 내가 제일 아는데.”


이 대목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육에 속한 것 영에 속한 것 이렇게 구분해서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진짜 계룡산에 귀신 안 씌이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이 쫙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럴 때 너는 좋겠다 너는 박수무당 되서 좋겠다. 그게 아니고 정작 온 사람은 마치 십자가에 온 강도처럼 내가 주님 앞에서 자동적으로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거에요. 자동적으로.


이거는 이유불문하고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났으니까. 태어난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그런 관점에서 이명직 목사님 조카가 10월 3일날 돌 됐다면서요. 그러니까 목사님 복음적으로 보는 거에요. 속으로 해야지 겉으로 하면 안 되지만. ‘아이고 조카야 너 왜 태어났니 이 더러운 세상에’ 이렇게 되요. 이 더러운 세상에 왜 태어났니? 고생이 훤하다 이렇게 된다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그걸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버림받은 파선된 배에 우리가 승선해서 있거든. 완전히 버린 폐기처분된 배에 우리가 올라탔으니까.


그게 바로 뭐냐 하면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같은 묵, 같은 동질 그리스도 안에 또는 그리스도 비누 안에 또는 파라핀 양초 안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제가 왜 묵 파라핀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한번 안에 들어온 사람은 자기의 실력으로 들어온게 아니기 때문에 못 빠져나가요. 빠져나가려고 해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 안에 우리가 들어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나라는 것은 없어지고 예수님이 규명한 ‘새로운 나’, 예수님 보시기엔 너죠. 너가 여기서 만들어내십니다. 만들어내시는데 나의 구원을 위해서 새삼스럽게 구원받기 위해서 만들어내시는게 아니고 예수님의 하신 구원의 완성 완료, 완료와 그 전개 과정을 우리의 몸을 통해서 보여주기 위해서는 ‘너’라고 불러주는 겁니다 너. 그리스도 안에서 너라고 불러주는 거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너라고 불러줄 때 우리는 아까 욥이 한 말씀처럼 우리는 주의 원수가 되고 얼굴을 가리게 되는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 역할을 우리가 담당하게 되요. 그 역할이 뭐냐 말씀에 응하는 상태가 인물이니까 인물 속에 시간은 그 자체가 아까 했지요. 이미 다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완료상태에 들어가요. 완료상태.


살아있는 내내 그리스도 안에 우리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점차 점차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라도 식빵이 있다면 식빵은 어떤 통에 찧어도 식빵인 것처럼 어떤 시간을 쪼개도 쪼갠 시간 속에서는 우리가 주님의 주님 앞에서 주님이 주되게 하는 너의 역할은 거기서 다 보여주는데 그 역할은 바로 ‘말씀에 응하게 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럼 이 말씀에 응하게 한다는 이 의미가 뭐냐 하면 바로 나가 아니고 ‘육이라는 기능을 하기 위한 너’로 부름을 받은거예요. 육이라는 기능. 구원받지 아니하면 우리가 육이라는 것을 인식을 못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뭐로 보느냐 하면 육으로 보지 않고 자기를 인간으로 보고 사람으로 보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이천년 교회 역사의 신학이 여기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인간 사랑.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을 사랑한다. 사람이 들어가요. 만약에 사랑이 안 들어가고 죄가 들어가면 하나님은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순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셨는데 인간이 어찌 실수해서 선악과를 따먹으니까 그걸 불쌍히 여겨서 주님께서는 죄를 만회할 수 있는 옛날의 에덴동산을 다시 들어갈 수 있는 방안을 빨리 빨리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뭐냐? 차라리 너희들 하지 마라. 내가 와서 대신 해줄게. 그러니까 네가 할 것은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십자가질테니까 너는 나를 믿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겁니다.


믿고 그냥 믿었다고 입 딱 닦지 말고 믿었으니까 이제는 성령 받고 믿었으니까 이제는 그동안 못한 숙제 있잖아요 숙제. 거룩하게 되는 것.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한 것처럼 이제는 성경말씀 폼으로 준 것 아니니까 그걸 다 지켜야 된다는 거에요. 지킬 수 없다고 하지 말고 지킬 수 있다고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뭐 이상하지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이천년 신학에서 뭐가 빠졌어요? 이게 빠졌지요. 이미 ‘우리는 죽었다’는 것을 계속 의도적으로 빼버리지요. 죽은 놈한테 뭘 요구합니까. ‘바짝 마른 뼈’인데. 뼈다귀야 뼈다귀야 바짝 마른 뼈다귀야. 뼈한테 무슨 헌금을 요구하고 무슨 전도를 요구합니까 뼈인데.


뼈에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키는 육이 돼요. 사람으로 죽고 뭐로 태어난다? 육의 관계로 태어나고 주님께서는 육을 구원하신 구원자의 관계 속에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해요. 무엇을 소유하는게 아니고 역할을 한다니까 ‘역할’. 어떤 ‘기능’을 하는거예요 기능을. 어떤 기능? 말씀이 과연 주님의 희생으로만 구원됐다는 것을 보여줄 정도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역할을 다하는 거에요.


이거 따져보면 이거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36절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내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는 어디에 속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제자들은 어디 나라에 속합니까? 어느 나라에 속하지요? 예수님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져야 되니까 어디 나라입니까? 그냥 인간들 사는 나라지요. 인간들 사는 나라에서 인간은 자기를 육으로 보지 않아요. 그냥 사람으로 본다니까요. 가능성이 있는 사람, 메시아 영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


그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 그냥 사람들이에요. 가르치기만 하면 새롭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사람. 말씀만 하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본다니까요 자기 자신을. 스승을 배신하지 않고 스승이 원한다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베드로 같은 그런 사람으로 봐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육 자체가 하나의 팥죽이 되어서 세상 자체를 꼼짝마라 하거든요. 그런데 그걸 몰라요. 악마가 전부 다 각자 권총을 가져 가지고 네 인생을 네가 알아서 살면 그만한 업적을 이룬다고 그런 식으로 가르쳤던 거예요. 악마는요 주님이 왔을 때만 등장하지 인간 속에 그냥 인간만 풀어놓고는 악마는 뒤에 빠져버리는 거에요. 악마가 어디 있어요 인간밖에 없지 현실은. 그래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악마는 응집이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역량을 다해서 예수 쫓는 일에 거기에 전력을 다한 겁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IP:121.♡.203.222) 18-11-01 17:43 
강남-요한복음 18장 33절(두개의 세상)181016b-이근호 목사




방금 쉬는 쉬간에 중요한 질문 나왔습니다. 신앙의 고백을 하고 싶어도 사회생활 할 경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뜻이죠. ‘사회’라는 것은 뭐냐 하면 ‘타자’에요 남이에요 남. 내가 있으면 내 주위에 포진하는 것이 타자 아닙니까. 타자가 있으면 남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결과가 뭐냐? ‘나’를 더욱더 응축하게 되어 있어요.


나를 정신 차려서 지키지 아니하면 저 타인에게 밀리거나 그쪽에 꿀리거나 꿀림당함을 하거나 그 사람한테 사기를 당하거나 속임을 당하거나 손해볼 수가 있어요. 타인이 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누구를 발생시키느냐 하면 나를 또 새롭게 타인에 맞추어서 나를 발생시키게 되는 겁니다.


혼자 살 때는 혼자 산 속에 살 때는 옷 아무거나 입어도 되요. 그러나 혼자 사는 사람이 사돈 만나서 상견례할 때에 산에서 나무캐던 옷 입고 가게 되면 자식들 욕보이잖아요. 신경 쓴다고 옷 뭘 입어야 되나. 옷 몇 벌 되지도 않는데. 그게 뭐냐 하면 새로운 내가 요청 아니한 타인 앞에서 전에 내가 기대했던 타인 말고 갈아치기한 새로운 타인 앞에서 나는 새로운 자아가 되는 거에요.


요청하지 않는 타인의 대표적인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전화 갑자기 와가지고 “차주 되시죠? 차 좀 빼주세요” 이거. 정말 요청 안 한 타인이에요. 그 사람하고 전화 받고 난 뒤에 “요새 날씨 좋지요? 그렇지요?” 뭐 그런 이야기 안합니다. “예~” 하고 후딱 말 빨리 끊고 빨리 차 빼주고 빨리 남남으로 돌아서야 돼요. ‘난입’


나 혼자 사는 인생에 난데없이 뛰어드는 그런 타인은 나의 현재 구축된 자아의 완곡을 자아의 체계를 혼선을 일으킵니다. 혼돈을 일으켜요. 이게 드라마에서 뭐냐 하면 이걸 ‘출생의 비밀’이라고 해요 출생의 비밀. 숨바꼭질이라는 드라마 화장품 회사 물려받는데 갑자기 들어와가지고 뼈대 없는 것들이 들어와가지고 갑자기 자기 딸 되잖아요. 출생의 비밀 이런거. 그래서 인생 꼬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인간으로서 예수님 걷어치우고 하나님 걷어치우고 교회 그런거 다 걷어치우고 인간의 소망은 뭐냐 하면 날 좀 건드리지 마라. 제발 날 좀 건드리지 마라에요. 이걸 가정에서는 뭐냐 잔소리 하지 마라와 똑같은 거거든요. 제발 잔소리 없이 한번 살아보면 좋겠다. 내가 잔소리 하고 싶어서 하나. 하는 꼬라지 보니까 안 할 수가 없어 이렇게 하거든요. 오고가는 대화가. 대화가 그렇잖아요.


남편들의 소원은 제발 여자가 잔소리 안했으면 좋겠고 여자들의 소원은 잔소리 안하게 만드는게 소원이고 둘 다 사고가 안 맞아요. 이게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아니고 타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영원한 타인이에요. 그러면 왜 사느냐? 경제적 이유 때문에 살아요. 경제적 이유 아니면 같이 살 이유 전혀 없습니다. 정은 애초에 날아갔고 각방은 애초부터 각방 쓰고. 경제적 이유, 자식, 결혼식 때 손잡고 들어가는 그 이유 때문에 살아요.


그러니까 이게 인간은 교회 왜 가느냐? 날 좀 덜 건드리라고. 신이시여 날 좀 건드리지 말라고 미리 아부하고 뇌물 바치기 위해서 가는 거에요. 나 자신이 내가 생각하고 구상한 내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미리 약치기 위해서 교회 가는 거에요. 내 가정 건드리지 말고 내 자식 건드리지 말고 내 인생 건드리지 말라고. 개판이지 진짜 개판이지 교회가 개판되는 거에요.


그럼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인간들이 자기 정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우리보다 더 열심히 더 철저하고 완벽하게 하나님 말씀으로 지키려는 집단이 있어요. 그게 바로 유대나라입니다. 유대나라. 이 유대나라 이야기를 성경에 예수님과 매치시키는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 했거든요.


너희들이 아무리 착해도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뭐냐 하면 인간의 인류 역사상 가장 스스로 구원 받기 위해서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나 구원받기 위해서 내 개인적 구원론이죠. 구원론 하나 붙들고 최정점에 이르렀던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그 뒤에 교회가 아무리 따라가도 못 따라가요. 청교도? 청교도 홍교도 못 따라갑니다. 아무리 해도 못 따라가요. 최고입니다 그들은. 철저에 철저를 기한거에요. 안식일 지키는 것도 무려 세세하게 다 따져서 지키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그것은 다 뽑아내서 하는 거에요.


그러나 그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그러니까 100m 10초대라면 10.2까지 온게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아니하면 어디 못 간다? 9초대에 못 뛴다. 우사인 볼트처럼 못 뛴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달리는 이 토끼. 그런데 느림보 거북이가 100m 2년 5개원 걸리는 느림보가 무슨 빽 믿고 이렇게 천국에 왔느냐? 여기에 낙타를 넣어주는 그 바늘구멍이 있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너 구원받았나? 네 구원 받았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왔구나. 이렇게 되는거에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역할’이에요 역할. 이게 역할이에요. 주님이 살아 있어서 사람은 일체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살아 계셨으면 하는 일마다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만 그 기능을 분양하는 거에요 분양. 분양 아줌마들 좋아하죠 분양. 분양해주는 거에요 분양. 자기꺼 아니에요. 본점과 지점 관계에요.


분양을 해주게 되면 기능을 분배 받아요. 이 기능 분배를 가지고 성경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 이게 은사에요.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택배로 왔기 때문에 반납이 안돼요. 은사에요 은사. 그 은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내 힘으로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내 것으로, 같은 말로 하면 내 힘으로 안 되는 일 이겁니다.


신앙이란 뭐냐 하면 생각해 보세요. 내 힘으로 안 되는게 뭔가를 한번 찾아보세요. 내 힘으로 안됐던 것. 처음에는 기적을 원할거에요 기적. 하지만 나중에 보면 내 힘으로 안 되는게 없어져요. 모든게 내 힘으로 다 안 됐던거에요. 왜냐? 밥먹는 것도 은혜고 모든게 은혜 아닌게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이 햇빛 공기 그리고 걸음걸이 그리고 사건 막아주시고 이렇게 키운 이 모든 것이 내가 한게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뭘 더 원하지 말고 주신 것을 더 찾으라고요. 그렇게 찾을게 있다는 인식자체가 은사입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할까요? 전에는 예수님 안 찾을 때는 안 믿을 때는 누가 주체? 주체 말고 쉬운 말로 누가 ‘나’였어요? 내가 나였어요. 내가 나였는데 내가 나 이기 때문에 그때는 죄가 뭐냐 하면 ‘내 것 지키기’에요. 내 것 지키고 내 것 키우기. 내 것 지키기. 나 천당 가기. 전부다 출발이 나부터 출발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를 죽이시고 주께서 기능을 하게 되면 나는 죽었지만 주님은 살아 계시잖아요. 주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뭘 준다? 은사를 주려면 은사 받는 그 자가 주님 보시기에 ‘너’라고 지칭되는 은사 주는 사람이 만들어져서 거기에 은사가 주어지는 거에요. 은사가 너라는 주님의 언약 상대자를 만들어 내요. 그 기능이 살아있으니까 누가 살아 있어요? 성도가 살아 있는거에요.


성도가 살아 있는 것은 목숨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기능이 살아 있어요. 그래서 성도가 만약에 늙어가지고 몸이 없어진다. 그러면 기능은 죽어요? 살아요? 몸은 죽어도 기능은 살아 있으니까 이 기능에 부합되게 이 몸이 새로운 유니폼으로 바뀝니다.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장막으로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게 되요. 고린도후서 5장에. 이게 주님의 프로젝트입니다. 이게 주님의 계획입니다. 말씀의 계획이에요. 그렇게 보시고 사도 편지를 쭉 보세요. 이해 안 되는게 어디 있어요. 다 이해되는 거에요.


다시 정리하면 나보다 우선 되는 것이 뭐라고요? 기능, 은사고. 기능보다 우선되는 것이 뭐다? 지금 주님 살아계시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 누구십니까?!” 이렇게. 주님이 살아 있어서 우리에게 사도 바울로 하여금 “너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라.” 무슨 재주로? 안돼요. 사도가 될 재주가 사울에게는 없습니다.


그럼 뭐냐? 날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가게 되면 그 은사가 이방인을 구원을 위한 필요한 은사를 주께서 필요할 때마다 주시는거에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바둑도 잘 두고 장기도 잘 두고 그런 말이 아니고 주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모자람 없이 다 채워주셨다. 그래서 지금 일어난 일이 주님보시기에 완료된 주께서 원하는 그 일이 되는거에요. 30배 60배 100배 그런 뜻이에요.


그냥 우리를 사용할 때 그냥 사용하게 되면 우리 나오는 은사가 뭐냐 하면 내 힘으로 안됐다. 내가 율법 지킴으로 안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십자가 기능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근거해서 나온 기능인 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가 이것을 이 계시를 못 받는다 해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안’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못 따라간다 해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성령 안’이라고 하는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찾아옴을 우리 힘으로 못 벗어날 수 없다고 해서 뭐라고 하느냐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거에요. 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점점 갈수록 더욱더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과 우리 관계가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의 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는 누구 의 아니에요? 나의 의는 아니지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의 안에서 우리는 종이 되어서 그때부터 우리는 뭐가 되느냐? 의의 종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 조건이 있어요. 로마서 6장 1절. 반드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됩니다. 언제 죽을까요? 9월달에 죽을까요? 10달에 죽을까요? 아니에요. 주님의 은사한테는 시간이 인물로 바뀌었기 때문에 주님이라는 인물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항상 현재 진행형이에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겁니다.


자, 그 이야기 계속 해 봅시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그러면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산다는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연기해야 되요. 저녁 먹고 난 뒤에 잘란다. 죽자. 윽 하는데 성경에서 이제부터 여러분들한테 좀 사과해야 되는데 어렵게 하겠어요. 할 수 없어요. 지금부터는 좀 어려워요. 이게 어느 정도로 어려우냐. 그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어요. 제가 일부러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언약의 중첩’입니다. 언약의 중첩이라 할 때는 뭐냐 하면 다른 쉬운 말로 하면 ‘개념의 중첩’이에요. 개념의 중첩이라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언어를 통용하지요. 언어를 통용한다는 것은 언어에 의미가 실려서 통용하는거에요 개념상. 인간이 소통하는 의미 있고 자, 오늘 본문 18장 36절 한번 읽어 보세요.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닌데 맞지요? 주님의 나라하고 이 세상하고 평화롭습니까? 싸운다고 되어 있어요? 여기 36절에. 싸운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통용되는 개념 의미가 서로 대치된다는 말이죠. 다르다는 말이죠. 거기까지 이해되시죠? 인간들이 평소에 인간들 간에 언어 쓸 때에 ‘죽는다’는 개념이 무슨 개념입니까? 숨 끊어지는걸 죽는다고 하잖아요. 그렇죠? 이 개념을 주님의 나라는 안 받아준다 이 말입니다.


숨 끊어지는 것을 죽는 것으로 보지 않아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는 것으로 본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 것을 죽는다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살아도 죽은거에요 인간은. 왜? 언약 관계가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내통하지 않으면 그건 죽은거에요.


그 어려운 이야기가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엄청나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갑니까? 도마한테 간다. 왜 가십니까? 도마가 죽었느니라. 죽었으니까 우리도 죽으러 가자.’ 그 죽은게 아니야. 주님께서는 그 죽음을 말한게 아니거든요. 예수를 믿지않는게 죽은것이라고 보는 거에요.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 마리아가 마중을 나와서 되지도 않는 소리 했잖아요. 예 마지막 때에 다시 부활. 마지막 때에 부활해서 사는 것은 이 인간 세상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 하면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해서 그런거에요 자기 몸. 인간의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해서 내 몸이 펄펄 살아 있으면 살아있다. 내 몸이 싸늘하게 되면 죽었다 이렇게 보잖아요. 그러나 너희 오빠는 안 그렇다는 거에요. 오빠는 죽었더라도 예수 안에서 살아있다는 거에요. 왜? 오빠는 예수를 믿으니까. ‘믿는다’는 은사가 있으니까.


예수님의 몸은 어떤 거냐? 우리 몸은 죽으면 죽은거지만 예수님의 몸은 죽었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 안에서 이게 관계가 제대로 주의 뜻대로 죽었기 때문에 제대로 산 관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살았다’가 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죽어도 산 관계 되는 거에요. 그것을 역사 속에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했지만. 모든 복음의 근거는요 교회 부흥이나 인간성 좋게 되는거 아니에요. 근거는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모든 신약의 근거가 되야 돼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


문재인 대통령이 프랑스 갔다 그게 근거가 되면 안돼요. 문재인 대통령이 프랑스 갔다 뉴스에 나오지요. 문재인 대통령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아서 멀쩡하게 돌아다니니까 살은 것으로 보이지요? 문재인 대통령 살았다는 것을 어디에 근거해서 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었다 부활에 근거하지 않고 내가 살아서 내 눈으로 지금 목격하게 되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나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 나고 살고 당신도 살아 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대표적인 것이 사랑이라는 건데 이번에 아가서 할 건데요. 참 정말 아가서 너무 깊어서 내가 혼절할 정도에요. 너무도 내용이 깊어요. 엄두가 안 날 정도로 깊은데 그냥 뭐 주신 은혜대로 하겠습니다마는 ‘사랑’이라 할 때에 내가 나를 사랑할 때 절대로 내가 사랑하는 것을 타인이 모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도 내가 나를 모르는걸. 이거 있잖아요. 타타타. 나도 내 마음 모르는데.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남한테 알아달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네 몸은 네 몸이고 내 몸은 내 몸이에요. 왜 다르냐 하면 내가 살아온 경력이 다르고 네가 살아온 경력이 달라요. 경력은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의 두뇌 속에 기억으로 쫙 되어 있고 그 기억은 순간순간 지금의 나의 자아의 내용물로 툭 튀어 나온단 말이죠.


여러분 꿈 속에 뭐 나오든가요? 왜 부부가 같은 잠을 자도 같은 꿈을 안 꿉니까? 고등학교 다른데 나왔거든. 고등학교가 다른데 나왔거든 고등학교가. 살던 동네 풍경이 달라요. 그런데 꿈만 다른게 아니고 말 하나 내뱉을 때 말 하나 그냥 개념이 아닙니다. 과거 역사가 총 동원해서 거기 실려서 딱 튀어 나와요.


내가 너 사랑한다. 남편이 이야기하면 여자가 어쩌라고. 사랑하는 꼬라지하고는 설거지도 안 해놓고 뭘 사랑한다고. 이 말은 뭐냐? 내가 너를 내가 경상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상도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하지 않는데 내가 용기내서 했다는 말은 이 남자는 뭐냐 하면 경상도 남자는 절대로 자존심 강해서 부인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를 전제로 해서 이걸 내가 이 힘든 결정을 하고 너한테 사랑했다는 거에요.


여자의 말 내가 경상도 여자야? 그건 너의 과거고 나의 과거는 입만 열면 무조건 사랑한다는 나는 그 동네 사람이다. 뭐 별난거 했다고 티를 내고. 사고가 달라요. 그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결혼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누누이 절실하게 알게 하는 겁니다. 님아 강 건너지 마라. 강 안 건너면 또 싸울려고. 남이 강 건넌다는데 지가 왜 붙들고 난리에요. 주께서 건나가게 하시는데.


‘사랑’이라는 이 단어처럼 너무나 일방적인 단어가 없어요. 사랑에 담겨 있는 것은 뭐냐? 그 인생이 자기 인생이 그 과거가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살았잖아요 그러면 “나 당신을 사랑해” 이 말은 내가 나 이만큼 키운 것에 기여한 것처럼 너는 무조건 내 뜻에 따라서 너는 내 인생의 부속품이 되어 다오 이 말을 짧게 이야기해서 두자로 ‘사랑.’


너는 내 소유물이 되어서 내 과거를 빛나게 하는데 기여하라. 제가 너무 길게 이야기 했지요? 간단하게 하면 사랑. 춘향전 사랑대목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가라 뒷태를 보자. 어화둥둥 업고 놀자. 업고 놀자. 그런데 거기 보면 춘향이가 이도령을 업지요. 아니 이도령이 춘향이를 업잖아요. 그런데 업는데 문제는 춘향이는 이도령을 업지 않는다는 거에요. 왜? 지는 다른 방식으로 하거든요. 수청들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방식이 달라요 방식이.


그런데 그 방식을 이해해 주느냐? 인간은 절대로 남을 이해 못하는 존재입니다. 남을 이해하겠다는 것은 자기한테 되지도 않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에요. 그거 강요하지 마세요. 그러면 어떻게 살아요? 주께서 붙여준 대로 사시면 되요. 더 할 생각하지 마시고 더 기대하지 말고 더 희망 갖지 마세요. 주신 것만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들 인간이라고 하지 말고 내가 타인을 상대할 때 동원했던 개념과 의미들이 쫙 깔려 있어요. 따라서 이 세상에 종교라는 것 기독교 종교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멀쩡하고 이 타인의 자리에 누구를 집어넣습니까? 예수님 하나님 삼위일체 다 집어넣어요. 평소에 자기가 남을 다루었던 방식대로 예수님 하나님을 다 담아 버려요.


포로이드는 프로이드 이론이 뭐냐 하면은 라캉 이론도 마찬가지지만 자아와 주체 사이가 벌어졌단 말이죠. 나는 되고싶은게 있는데 현재는 자기가 현실적으로 안 되니까 이 되고싶은 것을 뭐로 메꾸느냐 하면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고 전능한 어떤 타인을 동원시켜서 내가 한 일 플러스 알파를 해서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을 이루겠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이게 의식적으로 이렇게 하지만 이건 어디서 한다? 이거는 ‘무의식’ 세계에서 그렇게 된다는 거에요 무의식 세계에서. 이게 충동으로 나타나요. 이성적으로 따지면 알겠지만 이성말고 욱하는거 있잖아요. 용수철처럼 눌린게 있다고요. 아버지 생신날 자식이 아버지 애먹입니까? 어머니 생신날 어머니 애먹입니까? 자식이. 아들 생일할 때 아버지가 잔소리 별로 안하지요? 그 다음날로 미룬거에요. 오늘까지 봐준다. 봐준다. 오늘 참는다 이런식이에요. 참는다는 말은 사라진다? 안 사라진다? 오히려 저축이 되는거에요. 다음에 걸릴 때 한 번 보자. 한 번에 팍 터지는 겁니다. 얼마 전에 경험했지요?


평소의 이미지 감정, 여자가 시댁에 갔다 오고 내내 참지요. 남자가 처갓집에 갔다 오고 내내 참아요. 오늘 좋은 날이니까 참고 그냥 지나가자. 참아요. 처갓집에서 사위는요 역사가 달라요. 살아온 내력이 달라요. 전통과 의식이라든지 인생관이 달라요. 시댁은 여자한테 가문과 전통이 달라요. 다른 동네라고요. 다른 동네. 지금 애 보고 살지 시댁보고 시댁 돈 많은 경우는 할 수 없지만 참지만. 뭐든지 돈 많은 때는 모든 것이 잠잠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자아와 주체 사이 안 되니까 여기다가 어떤 아버지 역할하는게 들어가는 거에요. 왜 아버지 역할이냐 하면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그 가정에서 절대자이기 때문에. 엄마도 아버지한테 꼼짝 못했다 이 말이죠. 물론 어머니가 더 쎈 집안은 어머니가 역할을 하겠지요. 그처럼 아버지 역할하는 사람 있다가 성인이 되고 난 뒤에 자기가 되고 싶은 승진이라든지 돈벌이가 안 될 때는 자기 현재 형편은 자아인데 되고 싶은 주체, 주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회에서 남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 이게 주체에요.


사회에서 나를 어떻게 불러줬으면 내가 기뻐하겠다는 것. 남들이 그 직장 과장 같으면 과장답게 과장 짓을 하는 것을 부장 쪽에서 요구하는 것. 그러나 실력은 일처리 못하고 사무정리도 못하면서 자리는 과장이다. 낙하산으로. 그럴 때는 이 자아와 주체 사이 가는거에요. 어딜 가느냐? 영락교회 가야지요. 주여 아버지 불러야 되는 거에요 이게. 내가 나는 벌써 마음은 저기 벌써 승진 내 마음은 우리 애 공부 잘하고 아파트 좋은 차 타는데 가 있는데 형편이 꼬라지가 어려운 꼬라지죠.


이 남은 이 빈 공백을 뭐로 채우겠습니까? 두 자지요. ‘간구.’ ‘간절한 기도.’ 과부의 기도를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서는 배척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러한 어린애 같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소문난 교회 가가지고 간구하는 거에요 간구. 간절한 기도 하고 있는 거에요. 간절한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나의 몸에서부터 시작 되지요. 나의 몸은 뭐로 무장되어 있다고 했습니까?


내가 남들과의 관계에서 의미와 이미 확증된 개념들이 있겠지요. 그러면 기도할 때 기도 문장들 한번 적어 보세요. 주여 아버지 삼위일체 어린아이부터 쫙 해볼 때 그 모든 단어 다 어디서 나온 단어 입니까? 이 모든 단어를 사도 바울은 이걸 가지고 한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이게 어디서 나왔다? 요한복음에서는 ‘육’에서 나온 거에요. 모든 것이.


사람들은 저보고 그럼 육에서 나오는 기도 하지 말고 영에서 기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육의  기도 이제 그만하고 육은 죽었으니까 이제 영으로 기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육이라는 것을 아는게 영이에요. 영은 주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니라고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짓 하면 되요 이 짓. 이 짓하면 된다고요.


예를 들면 지난 5월달에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 받아가지고 나는 누가 뭐래도 신자라고 확증했습니다. 이게 벌써 10월달 되면 벌써 이게 뭐로 변했습니까? 이 영이 뭐로 변했습니까? 육으로 변했어요. 왜냐? 우리는 매일같이 나를 자아가 여기에다가 자아의 것으로 소유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러다가 10월에 마지막날 되면 벌써 은혜받은거 10월 마지막날 되게 되면 또 이게 육으로 변했어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셔요. 왜?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못하는 것을 해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몸에서는 계속해서 육을 영으로 바꾸고 육을 영으로 바꾸는 그것이 바로 의의 언약의 완성이거든요. 그 발동기, 그 트랜스, 죄를 영으로 바꾸어 주는 그 완성된 제사가 예수님의 고유 기능입니다. 우리는 그 기능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나와서 육의 육으로 밖에 살 수 없어요. 육이 육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요.


뭘 해도 왜냐하면 아무리 은혜 받아도 몇 분만 지나면 육으로 변해요. 나 은혜 받았다! 이러고 있다고요. 죽은 자아가 또 다시 죽은 자아가 주님 주신 은혜를 내 소유화시키기 위해서 또 옛날에 기억된 나를 또 갖다가 붙이는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또 어떤 사태를 일으켜요. 사태를 일으켜 가지고 다시 해봅시다.


내 자아가 있으면 그 다음에 뭐가 생긴다 했습니까? 내 안에 자아가 생기면 자동적으로 내안에 뭐가 생기겠습니까? 아까 했지요. ‘자아’가 생기면 뭐가 생깁니까? ‘주체’가 생기겠죠. 여기 미흡함, 미흡함을 메꾸기 위해서 기대 그다음에 소망이 자동적으로 따라옵니다. 이 미흡함 기대 소망이 이런 것이 자동적으로 따라오죠.


따라와 가지고 주님 지금까지 은혜 주신 것은 감사한데 더 이상 우리 딸 신랑감이나 맺어주면 더는 내가 소원이 없겠습니다. 또 이렇게 너 죽인다 해도 소용없어요. 내 딸 시집가는거 보고 눈 감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래서 주님께서 노아의 언약 때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하는 일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먹고 마시고 이럴 때 주께서 갑자기 나타나죠. 그렇다면 이 사람 논리에 의하면 주님께서 재림을 언제까지 미뤄야 됩니까? 자기 딸 결혼식 이후로 재림이 와야 돼요.


왜 그러냐하면 내 자아 때문에. 이미 은혜 받은 내가 또 다시 자아감이 생기는 육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 세상에 성도치고 자아가 없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모든 성도는 자아감에 무장되어 있습니다. 신자 불신자 똑같아요. 전부 다 자기 밖에 몰라요. 그런데 신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것 때문에 누가 돌아 가셨다? 십자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미 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거에요. 이미 망했기 때문에 뭔들 못합니까? 사람이 한번 망하지 두 번 망합니까? 이미 주님 보시기에 망하는 자에게 성령의 은사를 줬잖아요. 망했기 때문에 준거에요 망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같은 인간을 위해서 죽었다 살아났기 때문에 너는 죽을 인간밖에 안 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성령을 줬잖아요. 그렇지요? 뭐 가능성보고 준거 아니지요? 같이 죽었단 말이죠 둘 중에 한사람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이 죽었으니까.


그 다음에 한번 봅시다. 37절 한번 봅시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지금 중첩되어 있으니까. 언약 중첩을 이야기 할까 말까 주저 하는데 어려워서요. 그냥 넘어가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못 참겠다 해야되겠다.


‘언약 중첩’이 뭐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한 그거에요. 우리 인간을 만들어 놓고 이걸 새로운 피조물 안에 뜯어보면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이 중첩되어 있어요.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는거에요. 구약대로 해서 우리에게 뭐가 주어진다? 이 말 지키지 않으면 뭘 받는다? 지키지 않으면 저주받지요? 지키는 자는 복을 받지요?


지키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야 돼요. 오후 5시에 지켰는데 오후 5시15분에 어기면 안돼요. 늘 24시간 늘 지켜야 되고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모든 율법을 늘 지켜야돼요. 탐내도 안돼요. 왜? 십계명에 탐내지 말라고 했으니까 탐내면 안돼요. 오른손이 범죄하면 찍어 버려야 돼요. 남을거 없어 다 찍고 나면 남을거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구약 있고 구약 적용시키고 신약 올라갈 때 구약과 신약 올라갈 때 우리 힘으로 못 올라갑니다. 여기에 뭐냐? 십자가의 ‘반복성’이 주어지죠. 십자가의 피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저주 받은 인간을 신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언약 중첩’이에요. 말은 굉장히 멋있어 보이지만 간단하지요?


언약 중첩을 그럼 쉽게 하지 왜 그렇게 어렵게 하느냐? 지금 사람들이 언약 중첩을 이중 중첩으로 보지 않고 언약 하나를 짤라냈어요. 지금 신약시대라는 거에요. 이걸 짤라버리니까 지금 완전 도살되어 버렸어요.


목사님 저는 죄지을 줄 몰라요 이러고 있다고요. 성경 한번 들이대 볼까? 먹을거 입을걸로 족한줄 알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이 말부터 한번 들이대볼까요? 분을 품되 언제까지 품지 마라? 해지도록 품지 말라고 했지요? 시계 딱 보고 노을 한번 보세요. 해 지는가 한번 보란 말이죠. 발꿈치 들고. 그때까지 품으면 안돼요. 무슨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니까요. 늘 다 지켜라 늘 다 지켜야 돼요. 뭐 저것 빼고 자시고 고르고 할 거 없어요 이거는 쉽고 저것은 어렵고 없어요.


자기 자식을 자기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한 자는 하늘나라를 못 들어가요 그게. 천국을 못 간다고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 못가요. 천국 못 간다는 구절이 왜 그렇게 많은지요. 천국 가다 다 걸렸어요. 누가 누구를 사기치다 걸리거든 고소하지 마라. 이거 참 어려운 이야기 아닙니까? 고린도전서 6장에. 더 어려운거 해볼까요? 아내 된 자들이여 이거 참 어렵다. 남편 된 자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중간에 거두절미하고 목숨 바쳐라는 거에요. 미쳤어요!!미쳤어요!! 목숨 바치게. 이 귀한 목숨을 왜 그런 점점 늙어가는 그 여자를 위해 왜 바칩니까?!


성경 어느 말씀도 못 지키는 것을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들이밀게 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에요. 하나 지켰다고 매직으로 내 성경에서 이거 하나 빼자 이런거 없어요. 분명히 지켰는데 15년 뒤에 보면 그거 또 어겼어요. 이거는 소싯적에 지켰다고 했는데 25년 뒤에 보니까 어기고 있다 말이죠. 아까 이야기 했지요. 성질나면 욱 올라온다고. 참고 참았는데 욱하니까 다 튀어나오잖아요. 그동안 참아야 하느니라 이거는 형제 우애 자비 참아야해 해놓고 나중에 형제 우애 돈 앞에서 다 튀어 나오죠.


구약 빼고 신약으로 갑시다 안돼요. 이제는 구약도 언약에 중첩이 되어서 복음입니다. 구약도 복음 되었어요. 복음으로 다시 거꾸로 구약의 율법을 복음적으로 해석해야 돼요. 복음적으로 해석해야 돼요.


자,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아까 왕 개념 들었지요? 배웠지요? 두 개입니다. 인간과 인간으로 통하는 왕 개념 있고 주님의 나라의 왕 개념은 무엇과 끊어져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왕 개념과 완전히 끊어져 있지요? 그래서 주께서는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이렇게 하니까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주님은 일방적이에요.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이렇게 했어요. 진리가 무엇이냐. 아까 그 쉬는 시간에 했는데 다시 하겠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예수님이 답변했습니까? 답변 안 했습니까? 답변을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지요. 왜 안 하느냐? 질문은 인간이 하는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자는 주님이지 인간이 씨 뿌리는게 아니거든요. 여기 뿌려주세요 여기 뿌려주세요. 이런거 없어요.


너는 뿌린 대로 지옥갈 놈은 지옥 가고 천국 갈 놈은 천국 가고 그 결정은 주님이 하시는거지 나는 좋은 밭 되어야지 해가지고 스스로 자기 가슴 막 이렇게 개풀 뜯어 먹는 소리하고 농사짓는 것처럼 하고 이런거 없어요. 목사들이 그 설교할 때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마음 바꿉시다. 뭘 우리의 마음을 바꿔요? 떡 줄 놈 생각도 안하는데 자기가 김칫국 마시는 것처럼 된다 말이죠.


내 안에 뭐가 있는지는 내 안에 이만한 돌이 장애물이 있는지 내가 가시덤불 있는지 그건 내 소관 아닙니다. 아무리 구원받고 싶어도 내 안에 가시덤불을 발생시키게 되면 우리는 열매를 맺지를 못하고 지옥가야 돼요. 지옥가는 것에 대해서 섭섭하게 여기지마세요. 이미 우리는 육이 되었기 때문에 육은 죽은 자거든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가 섭섭해한다는 말이 말이 안돼요. 어떻게 쓰실 것만 육으로 만든 것부터 쓰실거고 육으로 만들어서 어떻게 어떤 은사를 집어넣을거냐도 주님의 고유 권한이지 내가 뭐 이과가고 문과가고 내가 선택할 문제 아닙니다. 그냥 사시면 주께서 그날그날 숙제 주실거예요. 맞게 은사 주실거예요.


제가 그런 예를 들었어요. 노래에 이런 노래 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그런 노래 있지요. 밤만 되면 가스관 올라가지고 도둑질하는 아빠를 향하여 아들이 무슨 노래 부르겠습니까? 아빠 힘내세요 가스관 잡다가 놓치지 말고 힘내세요. 왜냐하면 이게 자기 가족 구성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통용될 때는 본인들이 살 생존 본인들의 삶을 위해서 선과 악이 자기들끼리 새롭게 규칙이 만들어져요.


아빠가 도둑질 하든말든 아빠가 도둑질해서 내가 스마트폰 구입할 수 있다면 아빠 힘내세요 할 수밖에 없어요. 목사님 너무 과격한 예를 들었습니다. 그건 나쁜 짓이잖아요. 그러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요 아파트 두 채가 나쁜 짓이에요. 나쁜 짓이라고 하는데 나쁜 짓이라고 하는 것을 범주를 확장시켜 보세요. 지하철 만원 지하철에서 아무리 바르게 서 있으려 하더라고 저쪽에서 밀면 밀어서 저쪽에서 옆에 있는 여자 손대게 마련이에요 미니까.


한번 부도나면 아무리 건실하고 뭐 잠언서에 보면 열심히 노력하는 자는 부자 된다고요? IMF 할 때 열심히 노력 안 해서 망했습니까? 치킨집 사장이 하루에 16시간씩 일하는데 망했어요? 우리나라 창업 75%가 망합니다. 폐업률이 75%에요. 왜? 열심히 안 해서 그래요? 열심히 해서 그래요. 열심히 해서 그래요. 어떤 기준에서? 자기 딴에. 자기 딴에 열심히 했어요 자기 딴에.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해서 직원 5명 데리고 열심히 했어요. 직원 5명 왜 구합니까? 자기 혼자 하지. 그런데 자기 역량에는 5명이랑 하는 것이 열심입니다. 왜냐? 그거 혼자서 다 못하니까. 인간의 역량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착한 일하고 나쁜 일 구분 어떻게 하느냐? 일단 남자 키가 180이상. 척추가 곧아야 돼요. 왜? 그래야 무거운걸 들 수 있기 때문에. 무거운걸 들어야 그 사람은 직장에서 일 많이 한다는 에너지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한다고 해서 살아남으니까 살아남은 이 사람 식구가 세 식구라면 이 사람은 직장에서 척추가 곧아서 들고 하는 일, 이거 잘해서 가족들이 살았으니까 생존=뭡니까? 생존=착한 일 되는 거에요. 이게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돈=뭐가 된다? 착한 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은 아버지가 뭡니까? 자식에게 잔소리 하는 아버지는 안 좋아요. 명절날 모여서 자식들에게 야 너 돈 필요한거 없니? 이런 아버지가 제일 좋은 아버지에요. 잔소리 하는 아버지는 안 좋아요. 돈을 줘야 아버지에요. 누가 제일 좋은 시아버지 입니까? 며느리한테 용돈 안 받고 오히려 며느리한테 용돈 주는 시아버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에요. 최고입니다.


누가 좋은 하나님입니까? 부자 되게 하는 하나님이 최고 좋은 하나님이에요. 이게 어디서 나왔어요? 자아, 나라는 것이 계속해서 모든 것을 나부터 출발해서 그래요 나부터. 나는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싫어하는 이 세상에 속했거든요. 이 세상의 일부가 나에요. 나로부터 출발하는데 주님께서는 여기다가 완전히 직격탄으로 십자가로 해서 나는 죽으러 왔다. 너희는 살려고 하는 그 동네에 나는 죽으러 왔다. 자, 누가 진리냐 이 말이죠.


빌라도가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죽은 놈은 그런거 묻는게 아니야. 성경에서는 반드시 질문을 해도 하나님부터 찾아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모든 의미는 저쪽 바깥세상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제공함으로서 그 의미가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이냐 해가지고 주님께서 삐져서 이야기 안 한게 아니고 처음부터 너는 질문할 대상자를 잘못 고른거에요. 질문을 해도 주님이 질문합니다. 왜? 주님이 씨 뿌리는 분이기 때문에. 빌라도가 씨를 뿌리는게 아니에요.


그럼 빌라도의 역할은 뭐냐? 이중 계약, 중첩 계약에 있어서 빌라도의 역할은 바로 저주를 유발하는 기능을 해야돼요. 진리 안에서 예수님은 모든게 진리인데 진리 안에서 빌라도나 바리새인들이 해야 될 역할은 저주를 더욱 더 저주되게 하는 겁니다. 그들의 역할을 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이 욕하고 할 때 그거 대들지 마세요. 자꾸 그 사람 보지말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거에요.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했으니” 로마서 14장이죠. 나는 믿음 있다 해놓고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되는데 갑자기 혼란스러운 이야기 나올 수도 있겠는데 여기에 보면 로마서 12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예수님한테 있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느냐 하면 내가 주님이 주신 ‘기능자’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내가 또 ‘자아’가 또 구축되어 버려요. 내가 이 정도로 믿음 좋고 내가 이정도로 주의 일을 많이 하고 있는데 나를 무시해? 이렇게 되어 버리면 갑자기 기능인에서 독자적인 존재로 또 돌변했어요. 사실은 그게 육이지만 사실 우리는 매일 그렇게 살지만. 매일 그렇게 사는 것 하고 지적하는 것하고 달라요.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지적은 받아야죠. 그래야 성경말씀이 한번 말씀이 아니고 두고두고 계속해서 이 말씀 봐야돼요. 두고두고두고두고두고 계속해서 이 말씀이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계속해서 그걸 봐야 된다 이 말이죠.


원수를 갚는 다는 말은 이미 우리가 뭘 내고 있다? 화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이야기로. 화를 내고 있을 때 인간은 이거는 수련회 할건데 미리 해봅시다. 인간은 인간이 다룰 수 없는게 있어요. 그게 뭐냐 ‘충동’입니다. 화 나는 것을 나는 화  안 난다 화 안 난다 화를 참아야돼. 이런다고 화가 안 나는게 아니에요. 누가 화가 난다 누가 사랑스럽다 누가 밉다든지 이것은 인간이 자아가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에요.


그래서 왜 그러냐 하면 ‘자아’라는 것이 의식에서 남과 만날 때 자아거든요. 오늘 여러분 좋은거 배웠지요? 자아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남이 있을 때 그걸 남들을 의식해서 내가 옷을 이렇게 느끼는거에요. 배고플 때는 그냥 배고픔만 느낄 뿐이지 누가 배고프냐? “저요”하고 손 든단 말이죠. 나 이전에 뭐가 있다? 의식 이전에 뭐가 있어요? 무의식에서는 충동이 있어요. 충동은 몸의 차원이에요. 몸은 나에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의사들이 반사 신경할 때 앉혀놓고 무릎을 탁 치게 되면 이렇게 발아 들려라 해서 들리는거 아니잖아요. 그냥 들리죠. 우리는 90%가 몸의 익힘 과거 역사의 몸의 익힌 반사에 의해서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반사에 의해서. 어떤 여자가 아름답다 할 때는 분명히 자기 어머니와 닮았다든지 자기가 좋았던 기억을 거기에다가 엎쳐서 좋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보수적이란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보수적입니다. 한번 했던 관행을 그대로 가는게 있어요. 한번 좋았던 사람은 어지간히 나쁜 짓 해도 그 사람을 보호하려고 해요. 보호하려고 해요. 특히 자식 같은 경우 어지간히 잘못해도 음주운전해도 감싸려고 합니다. 너는 자식 안 키우나!! 이렇게 해가지고 손대지마라. 내 자식 잘했다. 너 몇 대 맞았어? 두 대 맞았어. 너는 몇 대 때렸어? 5대. 잘했어 잘했어 내 새끼 잘했어. 보수적입니다. 모든 인간은 보수적이에요. 자기가 자기 스스로 본능상 자기 지킵니다.


무엇을 지키는가? 홀로 살 때 필요한 것들을 지켜요. 남 없어도 나 혼자 버틸 수 있는 역량 키우는데 그걸 보수적으로 지키는 겁니다. 인간이 참 못 됐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야말로 ‘마귀’에요 마귀. 자기 밖에 몰라요. 맨날 ‘건드리지 마라’ 하거든요. 그런데 사랑이 나와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이 사랑을 의식해서 받아가지고 뭐냐 하면 ‘나를 위한 사랑.’ 이 사랑이 나를 위한 사랑이 되어 버립니다 나를 위한 사랑.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시간 다 됐으니까. 이 세상은 나 위해서 존재할 때만 좋은 세상이에요. 모든 인간은 다.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를 위할 때만 이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충분하게 죄를 지어야 돼요. 내가 생각 못한 깊이 있는 죄를 우리가 인식해야 됩니다. 이왕 구원받았는데 뭐. 이왕 망한 사람은 두 번 다시 안 망하거든요. 이미 망했기 때문에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자기 힘으로 바깥에 못 나오고 구원받지 못하고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한다며 여기에 누가 기다리냐 하면 여기에 악마가 우리를 그 다음부터 힘들게 만들어요. 오늘 너 죄 5개 지었어. 착한일 6개 해야 된다. 너 때문에 눈물 흘린 사람이 7명이였다. 네가 7명의 눈물을 너 혼자 다 흘려야 돼. 안 그러면 네가 돈으로 갚아주든지. 너 때문에 자식이 망쳤으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책임감 회개 반성 이게 악마가 인간을 구원을 차단하는 주특기입니다 방식이에요.


우리에게도 그게 먹혀들어갑니다 우리에게도. 유혹같은 경우 우리도 먹혀들지요.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께서 악마가 그렇게 하게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성도는 더욱 더 신자 되게 만들어요. 주께서 악마로 하여금 이 세상을 지배하게 함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더욱 더 성도되게 하고 성도인 척 하는 인간들은 기어이 주님 총 겨누고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왜? 그것이 바로 마음의 밭이 그랬어야 되니까 마음의 밭이.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진리라든지 주께서 하셨다 하는 이것이 우리 죄 속에서 오늘 보았던 요한복음 18장 이 내용이 매일같이 이것이 반복해서 반복해서 우리를 통해서 은사로 발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살아서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주님 아니면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죄인 입장에서 죄인의 괴수 입장에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허투로 말씀 주신게 아니고 그냥 취소될 말씀도 아니고 비현실화된  말씀도 아니고 실제 이 세상에 지금도 작용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서 주님의 일방적인 찾아오심과 이끌어주심과 일 시켜주심이 우리를 통해서 더욱더 예수님 살아있음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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