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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3 01:34:24 조회 : 1708         
선제 공격 150702 이름 : 이근호(IP:117.55.13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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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218.♡.196.154) 15-07-06 09:42 
가락-요한복음7장17절(선제공격)150702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7장17절부터 할 차례인데, 요한복음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미 처음부터 선언하고 들어가지요. 그 선언이 뭐냐 하면 7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 함이라” 이리 되어있어요. 선제공격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대하여 선제공격한다는 것은 상당히 좀 드물게 느껴지지요. 그 점잖으신 분이 그냥 당하면 당하는 대로 사는데 선제공격을 하시는 거예요. 선제공격의 내용이 19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없도다, 이렇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좀 성실하게 지켜.” 그런 뜻이 아니에요. “잘 지키는 사람도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좀 따라 붙여야지.” 그런 뜻이 아니고 낫씽, 아예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당시 유대인들의 법이라 하는 것은 헌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법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모세가 하나님과 독대했던 그 율법이었습니다. 십계명부터 중심에서 내려온 제사법들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 가지고 유대인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자긍심이 유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너희들 하나님한테 직접 계시 받아봤어? 우리는 받았어!” 이래거든요. 그러면 그 하나님에 받은 그 계시가 결국은 무엇을 유발했느냐 하면 국가라는 것을 만들었거든요. 유대나라 이스라엘.

그렇다면 이 국가를 스스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스라엘을 자기가 스스로 아니야, 아니야, 라고 부정할 수 있는 그런 권리는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냥 하나님이 주신 것에 누리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누린다? 율법을 주셨으니까 율법 안에 살면 자기들은 복된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모세 율법을 받아놓고도 너희가 지키는 자가 없다.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율법에 대한 기본적인 발상, 율법에 대한 견해 자체를 근본적으로 드디어 악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율법이 악한 건 아니겠지요.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는 말은 율법 쪽에는 문제가 없는데 그걸 지키고자 하는 너희들이 문제가 된다. 악하다 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악하다. 율법보고 악하다는 이야기는 안하셨고.

그러면 여기서 두 가지의 차이점을 알 수 있는데요, 내가 무엇을 행하면 됩니까? 교회에 나와서 교인들이 교회 목사들이나 선배, 신앙인들에게 묻는 요지가 뭐냐,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라고 질문들 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 속에서 뭐냐 하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런 식으로 물음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했어요. 요한복음 16장21절에 보게 되면,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치 아니 하느니라” 그러니까 아기를 가진 임산부가, 임신을 했다는 것이 세상에 이처럼 절실하게 현실성을 느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생긴 애가 덤으로 붙어있는 거잖아요. 캥거루처럼. 덤으로 붙은 거라 말이죠.

자, 이것부터 해봅시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됩니까? 목사님, 집사님, 장로님 된다 말이죠. 보통 교회 올 때는.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이리 묻잖아요. 묻는데,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뭐냐 하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라고 물어야 된다 말이죠. 그럼 “내가 무엇을 해야 됩니까?” 해버리면 이게 왜 안 되느냐 하면, 내가 무엇을 하게 되면 거기서 새로운 현실이 나로 인하여 만들어지겠지요.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하는 것은 내가 나대지 않더라도 이미 덮쳐진 현실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어느 쪽이 믿음입니까? 내가 유발하고 만들어내고 조작해낸 게 아니잖아요.

내가 교회 부흥하기 위해서 신방을 어떻게 하고 기도는 어떻게 하고 새벽기도는 어떻게 하고 예배는 어떻게 합니까? 이것 묻는 것은 교회부흥을 은근히 노리기 위한 일이지만, “주님, 오신 교인들 어떻게 감당할까요?” 이것은 지금 시작을 누가했다? 내 쪽에서 한 게 아니고 주님 쪽에서 일을 벌려버렸습니다. 거기에 대한 성경의 적절한 이야기가 뭐냐 바로 임신한 이야기를 요한복음16장에서 하는 거예요. 임신한 이야기를.

아기가 임신 되었을 때에, 아기가 생겨버렸을 때에, 임신 하는 건 뭐냐 하면, 내 몸에 뭔가 생긴 거잖아요. 내 몸에서 생겼는데 10개월 동안만 내 몸인데 10개월 지나면 바이, 바이 헤어져야 돼요. 내 몸인데 헤어져버려요. 가지치기해서 톡 튀어나가 가지고, 마치 자식은 엄마 몸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안하고 내가 태어나가 위해서 잠시 엄마 몸을 잠시 차용했다. 빌렸다는 느낌으로 애는 살아가고 있어요. 사람이 또 그래야 되고요. 마마보이 되니까 그래야 되겠지요. “어머님, 키워줘서 고맙습니다.” 라는 말하고 “저, 아무리 커도 엄마 거예요.” 하고 뉘앙스가 다릅니다. “나를 만들어 주신 것 고맙습니다.” 하는 것은 여전히 주인이 누구냐 하면, 엄마가 아니고 이제는 내가 주인입니다. 라는 뜻이고 “제 것은 없어요. 지금껏 엄마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애는 독립하지 못한 성숙하지 못한 자식이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해산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아기가 되어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독립을 하는데 껍데기를 누구를 동원하느냐 하면, 바로 내 제자들, 너희들을 껍데기로 사용하겠다는 거죠. 그러면 그 제자들이 임신하고 싶어 합니까? 자기 의사가 아니지요. 주님 마음대로 허락도 안 받고 우리 몸을 빌려가지고 자기가 우리 거라 여긴 것을 누구 것으로 전환시켰습니까? 주님의 자신의 몸으로 전환시켜 버렸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뭐냐 적절하게 해산의 고통을 의미하는 겁니다.

고통스러운데 해산하고 난 뒤에는 어떻다? 고통보다도 고통은 잊어버리고 기쁨이 충만하더라. 그런데 그 기쁨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거라는 기쁨이 아니고 “처음부터 주님께서 저를 사용하셨네요.” 라는 자기를 한 번도 놓쳐보지 않고 쥐고 있던 그것을 주님이 강제로 내 것을 내 것으로 손을 떼게 하는데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이에요.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너로부터 너 것에서 손 떼게 해줄 때 그것이 니는 쉼을 얻으리라. 다른 말로 하면, 내 것 내가 쥐고 있으면 쉼은 없다. 너는 이제 근심걱정밖에 없다. 

지난주일 낮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왜 인간이 이단인가, 간단해요. 주어진 상항을 우리는 감당 못하면 주어진 상황과 내가 이 상황에 대해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에 주인공도 아니면서 주인공 행세하니까 근심이 되거든요. 그러면 주인공이 따로 있다. 주님이 주인공이잖아요. 그러면 맡기면 되는데 우리는 맡기는 대신 근심으로 대처하지요. 마치 자기가 자기 주인인양 그러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뭐다? 이단이지요. 태어날 때부터 이단이에요. 거기다가 새삼 이단이라 하는 걸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단이기에 구원하시잖아요. 이단이기에 구원해 놓고 이단이 생각하는 영생의 나라는 내 나라인데, 구원을 해놓으니까 천국이 내 나라가 아니고 누구 나라입니까? 아들의 나라가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한다면 이건 이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뭐로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아들의 나라로 바뀌어져야 돼요. 처음 듣지요? 하나님 나라가 되어버리면 내가 은근히 노렸던 나라에요. 그 나라는. 생로병사 고생하지만 죽어서는 호강하자! 이런 구호에 따라서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이런 식으로 이 땅에서는 고생하지만 조금만 참으면 어디 간다? 천국 가서 호강하겠다. 이럴 경우에는 이건 하나님의 나라에요. 유대인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

그런데 아들 나라는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의 나라를 가위표 치고 그걸 찢어버리고 “너는 천국 와서는 안 돼! 너는 못 들어가.” 라는 언지를 주시고 그 다음에 등장한 나라 그것은 뭐냐, 너가 원했던 나라는 물 건너가고 그건 하나의 공상이고 망상이었던 겁니다. 그 망상 속에서 새로운 나라가 나오는데 그것은 내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통하는 원리를 성경에서는 이렇게 되어있어요. 너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유지되고 거기에 입장하는 나라, 주의 이름으로. 그래서 그걸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요엘서 2장에 예언한 대로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그 고백을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대목을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주의 이름을 못 부른다는 거예요. 그러면 또 이 세상 사람들은 실험하기를 좋아하거든요. 칼이나 단도나 아니면 미국 같은 데서는 권총을 들고 장전해가지고 예수 안 믿는 아들한테 이마에 대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 소원이니까 제발 예수님 이름으로 한 번만 해 줘.” 권총 들이대고. 아들이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전도 간단해요. 권총이나 칼 너무 분위기 험악하면 봉투에 오 만원, 십 만원 넣어서 전도하면 돼요. “십 만원 줄 테니까 예수 이름으로 이야기해봐라. 오만원 줄 테니까.” 큰 교회에 하잖아요. 천 원짜리 주면서 일당주면서 “예수이름 불러보세요. 앞에 나와 영접하고 손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전도된 거예요.

봉투에 돈 넣는 것은 물론 교회들이 하지만, 대부분 다른 방식을 사용해요. 일단 믿어보시면 30배, 60배, 100배 복 받습니다. 방법의 차이에요. “암 걸렸어요? 예수 믿어보세요. 암 낫습니다.” 방법의 차이라니까요. “가정이 불화합니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갈등이 생깁니까? 예수 믿으세요. 화목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오히려 갈등을 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싸우고, 엄마와 딸이 싸우고, 이게 예수 믿는 효과라는데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엄마하고 딸하고 불화하게 한다니까요. 지금 주의 말씀대로 잘 되고 있어요. 가정에. 엄마와 딸이 지금 불화한다니까요.

이건 다른 기쁨, 어떤 기쁨? 내가 은근히 노렸던 천국은 이게 망상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 기쁨을 주시는 겁니다. 쉽게 갑시다. 내가 생각한 것을 내가 부풀어서 내가 임신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다른 어떤 영이 임해가지고 나로 하여금 배가 배불뚜기 되어가지고 임신이 되는데 그 임신을 쪼개보니까 그 안에 초음파 찍어보니까 예수 그리스도 들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식처럼 들어와서 지 마음대로 해산해놓고 그리고 그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지, 엄마 내 나라는 아닌 겁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시고 다시 한 번 봅시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가 아니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원치 않는 우연적인 사건이 왜 자꾸 벌어집니까? 왜 나는 뜻한바 있어서 뜻한 대로 그걸 내용으로 잡아서 끝에다가 예수님이름으로 주술 붙이듯이 붙여가지고 새벽기도 하는데 왜 기도 응답은 내가 기도한 내용에서 다 피해간 다른 것들이 자꾸 이런 사태가 일어나느냐 말이지요. 다른 사태가.

왜 길거리 가는데 뭔가 갑자기 바람에 두 번 날려 갔다 붙이는데 보니까 로또였다. 버릴까하다가 놔두지 하는데 갑자기 1등 당첨이 되게 하시느냐 이 말입니다. 왜 내가 원치도 않는 그러한 일들이 오냐 이 말이죠.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로 알고 그렇게 새벽기도 했는데 왜 갑자기 어떤 할머니가 내 이름으로 40억을 유산으로 남기고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느냐 말이지요. 왜 이렇게 황당한 일이.

그것은 바로 뭐냐 하면, 니가 원하는 나라를 의도적으로 피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 이방인에게는 피하고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고? 주께서 욕하고. 방법은 똑같아요. 유대인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니까 욕하고 이방인들은 하늘나라고 뭐고 없어요. 율법도 없어요. 그냥 개, 돼지 같이 살아가는 겁니다. 개, 돼지같이 살아가는데 갑자기 성령이 임해버리니까, 성령세례라 하는데, 성령이 임해버리니까 뭐가 생겼느냐 이게 생겼어요. 전에 이것 때문에 목사 잘렸거든요. 이 말해가지고. 성령세례 받아버리니까 이게 생겼어요. 딱 한 자에요.

기존 교단에서 뭐냐 하면, 십일조 해야 되고, 안식일 주일 지켜야 의롭다하거든요. 그래서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이방인들은 율법도 없었다. 우리는 이방인들이다. 논리가 간단합니다. 이방인들은 율법도 없었다. 율법은 유대인들을 준거다. 우리는 이방인, 대한민국 단군의 자손 이방인이다. 이방인들이 의롭게 된 것은 뭐다?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뭐다? 성령이 임하니까 의인이 된 걸, 여기에 왜 그들이 감당 못할 율법을 짐을 지우느냐,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번째 사도회의 같아.

그들이 재판관들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말이죠. 그들이 평소에 써먹지는 않았는데, 써먹을까봐 겁났지. 써먹지는 않았는데 분명히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그 다음부터는 성경이야기를 중지를 하고 성경 그 다음부터 고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에 나온 이야기가 웨스트민스터 이야기를 시작한 거예요. 웨스트민스터에 어긋났으니까 너는 죄인이다. 이리 된 거예요.

성경은 무슨 폼으로 있습니까? 죄라 하는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계시로 정하는 거죠. 그러면 웨스트민스터가 죄이냐 아니냐를 결정할 수 있는 천국 가냐, 안 가냐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면 질문 또 하겠습니다. 교회법 어기면 지옥 갑니까? 교회법은 지옥 안 가지요. 그러면 초자 목사가 선배 목사에게 해야 될 일은 하나밖에 없지요. “선배목사님들, 저 말씀만 전하겠습니다.”그래야 되겠지요. 아! 그런 용기 있는 목사들 없습니다. 앞으로 말 잘 듣겠습니다. 이리 되지 어디 죽으려고 이 바닥에서 밥이나 먹고 살려고 하면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되지요. 물론 주제 없이 나서면 안 되는데 주제 없이 묻지도 않았는데 지가 나선다 하는 것은 그것은 모독이고, 그게 아니고 그쪽에서 물어요. “목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선배목사가 그렇게 묻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튀지 마세요.” 그런 뜻이에요. “당신이 튀어버리면 우리교회는 골로 갈 수 있습니다. 튀지 마세요. 우리 다 같이 장사 한 두 번 합니까?”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튀지 마세요. 유난하지 마세요. 우리 색깔 맞춥시다. 그래야 더불어서 확고 된 이 좋은 분위기 밀어붙이면 아마추어들이 뭘 알아요. 아마추어들. 강단에서 똑같은 소리 하는데. 당신이 와서 강대상에서 헌신예배 딴 소리해버리면 과연 그런가하여 사도행전 나오는 말이 과연 그런가하여 성경 다시 보게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시대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방금 했던 이야기가 딴 소리 하는 것 같지만, 딴 소리가 아닙니다. 뭐냐 하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8절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하는 것은 그들은요, 아무소리 안했어요. 지금 예수님께서 그들을 먼저 선제공격 곧 욕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제3자가 보면 이 유대인들 굉장히 억울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그들이 안했던 소리까지 지어내서 공격하는 그런 투로 보인다니까요. 지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지금 초막절, 7월15일부터 있었던 초막절 7일동안하는 날이에요. 7일하고 마지막 8일째 큰 절기로 모이는데, 먼저 선제공격하는 겁니다. 왜 선제공격하느냐, “듣고 기분 나쁘지?” “기분 나쁘다.” “그럼 나를 죽여라.” 나를 죽이라고 유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왜 당신을 우리가 죽이라고 하느냐, 그래야 초막절 절기에 완성이 시간 스케줄 지켜서 완성이 아니고 그건 개인들이 생각하는 거고, 나를 죽이는 것이 곧 절기의 제대로 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살해하고 살해해줘야 아버지께서 사흘 만에 살려낼 게 되잖아요. 그것이 인간이 지켜내지 못한 절기지킴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18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 굉장히 어렵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저기 상상해서 계시고 땅에는 남아있으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영광 돌립니까? 하는 그 식으로 영광 돌리는 방법만 인간은 그게 한계에요. 그것 밖에 몰라요. 그런데 주님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여기 메시아가 왔다는 것은 너희들에게 영어로 하면 해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감을 잡으라는 거예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모세한테 율법 받아서 우리는 택한 민족이라고 그렇게 떵떵거리는 우리를 향하여 대번에 절기 분위기 축제 다 깨도록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너희들은 율법을 받아놓고도 전혀 지키는 자가 아무도 낫씽 아무도 없다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누구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그러면 오늘날 우리 이방인 같으면 뭐라고 하면 됩니까? “맞습니다. 옳소이다. 우리는 개입니다.” 이러면 간단한 문제에요. “하지만, 개도 주인의 부스러기 얻어먹다보면 영생이잖아요.” 이렇게 하면 되는데 이방인들은 그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그게 될까요? 안 될까요? 그 놈의 역사와 전통과 관습이 뭔지.

성경에 보면 용서라는 말이 있지요. 용서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새로 시작입니다. 같은 말이 뭐냐 하면 회개도 같은 말이에요. 전부 다 뭐로 보느냐, 새로 시작이에요. 새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굉장히 어려운데 중요한 것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건 아닙니다. 나로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은요, 제가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용서를 구하고 회개를 할 때, 그렇게 하면 새로 시작한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용서와 회개를 해버리면 이것은 온전한 새로운 시작이 아니고 수상한 새로 시작이 돼요. 뭔가 노리고 회개하는 척이 되고 용서를 구하는 척이 돼요. 이것은 여자 같으면 수상한 그녀가 됩니다. 수상해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회개하고 용서할 때는 무엇을 내 소유로 할 수 없다? 새로 시작한 그 시작을 도로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그러한 나의 자리가 아예 나는 그것까지 나의 자리는 날아가 버렸습니다. 라는 이야기에요. 접시에다가 “아이고, 나 이 빵 안 먹겠어요.” 하고 “빵 안 먹고 다른 빵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접시를 비울 때, “내가 원하는 내 빵을 달라 이 말입니다.” 라고 요구한 게 되지요. 그런데 에이! 하고 접시를 깨버리면 무엇입니까? “나는 빵을 안 먹어도 마땅한 인간이다.” 그런 뜻이다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이 회개했잖아요. 마태복음9장에 나오잖아요. 고난주일 날 했잖아요. 그들이 고난 주일날 회개할 때 예수님은 뭐합니까? 죄인들하고 술 먹으러 갔잖아요. 그들은 회개기간에 고난기간에 회개했어요. 그 고난 기간에 금식해야 될 기간에 예수님은 오히려 금식하지 않고 술 잡수고 죄인들과 함께 있었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회개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불교에서 도 닦는 거와 마찬가지에요. 불교에서는 뭐냐 하면, 우리의 마음은 늘 처음부터 깨끗한데 세상 살다보니까 먼지가 낀 거예요. 먼지가. 그러면 거울에 먼지 끼면 어떻게 되겠어요? 더럽겠지요. 그러면 물청소를 해주면 윤이 반짝 반짝 빛나겠지요. 이게 우리가 늘 청정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자기를 돌아보고 해야 된다는 거예요.

방금 제가 불교이야기 했지요. 불교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교회도 똑같이 써먹는 거예요. 유 병언의 구원파가 뭡니까? 한 번 예수 믿으면 다시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이고. 그렇죠? 그래서 히트 쳤잖아요. 그런데 그 구원파가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기존 교회는 뭡니까? 거울을 깨끗이 닦자. 이거잖아요. 둘 다 복음 아니지요.

절에 갔던 사람이 절에 가니까 1년에 산에 올라가니까 너무 튀잖아요. 그러면 가끔 동네의 개척교회에 가는 거예요. 절에나 개척교회에 가가지고 해보면 절에서 하는 이야기와 똑같이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날마다 닦아내시면, 닦아내시면 가정법이죠. 닦아내시면 뭐 줄 건데? 닦아내시면 착하다고 여러분이 원하는 걸 채워주실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기도하면 불가능이 없다. 이런 거예요. 어떤 교회는 플랜카드에 붙여놨답니다. 골목에다가. 니 믿음대로 될지어다. 개척교회 그런 거 붙여야 돼. 니 믿음대로 될지어다.

지금 파산신청한 사람도 있고 온갖 아픈 사람도 한 둘이 아니고 이런 사람들 지나가는데 우연히 플랜카드에 니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는 순간 그 사람은 무엇을 회상하느냐 하면, 자기 일곱 살 때 크리스마스 때 비겁하게 빵만 얻어먹으러 갔던 교회의 지난날의 초등학교 때 다닌 기억이 나가지고 “주여,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옵니다.” 이제 나이 60돼 가지고 다시 교회 다니면 그 교인 확보하게 되면 그 숫자 괜찮은 숫자 채워지겠지요. 어차피 영업인데. 목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자극적 문구를 광고로 내세우는 거죠.

그런데 니 믿음대로 될지어다, 해놓고 막상 들어갔는데 목사님이 성령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는 목사다. 여러분 그동안 죄만 지었는데 어딜 가기를 어딜 갑니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합시다. 이렇게 나오면 왔던 사람들은 와르르 다가지요. 그러면 그걸 붙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들은 원래 청량한 마음인데 그동안 세상 살면서 여러분 잠시 교회를 떠났지요? 이제는 말씀이 왜 있습니까? 말씀으로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 디모데후서3장15절, 16절 해가지고 의로 유혹해요.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도만 닦으면 되는 거예요. “도를 닦는데 그러면 목사님, 도를 닦는데 또 세상에 나가면 어떻게 합니까?” “그 때는 회개하시고 한 번 닦아내시고.” “그러면 또 죄를 지으면.” “또 다음 주 와가지고 또 닦아내시고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절하고 교회하고 차이점이 뭐가 있어요? 전혀 없어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납득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납득이란 말을 누가 유행시켰느냐 하면, 박영선 목사가 유행시켰어요.

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나한테 욕을 얻어먹을 때 그걸 마땅할 때만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중보자 없이는 영광이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중보자 없이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대신 죽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영광이 없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는 너무 너무 쉬웠던 거고.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이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쉽게 못해드린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막 나갑니다.

죽음은 죽고 싶은 사람한테 찾아옵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다 찾아옵니까? 수동적이지요. 제 논리 잘못됐으면 이야기하세요. 죽음은 우리한테 미래의 일입니까? 과거의 일입니까? 미래의 일이지요. 늙어죽으니까. 늙는 과정이 있어야 죽잖아요. 젊던 늙든 아직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으니까 제 말 듣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죽음이란 미래의 일이지요. 죽음은 수동적이다. 이건 피동적이죠. 그냥 당하는 거죠. 죽음이 덮쳐오잖아요.

그리고 죽음은 아직까지 미래지요. 그러면 요 두 개를 연결시키면 죽음은 미래다. 그러면 요 미래자체가 수동이 되겠지요. 미래 자체가 수동이 된다면 인간의 시간의식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돼요. 제가 여러분 속이는 게 아닙니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경유해서 어디로 갑니까? 미래로 가지요. 방금 앞에 있는 논리에 의하면 미래가 뭡니까? 이게 수동적이죠. 그럼 미래가 수동적이면 현재도 수동적이 되고 피동적이고 우리의 과거도 피동적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네요. 우리는. 피동적이다, 라는 말은 결국 우리가 주체로서의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차단되고, 금지되고, 저지되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맞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맞네요.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듣기 싫어한다는 거예요. 왜 듣기 싫어할까요? 미래는 분명히 죽음은 원치 않는 죽음이 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나중 사태로 일단은 보류시켜 놓고 지금 과거와 현재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능력적으로 하고 싶은 이 본성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본성은 현실과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지요. 이건 반칙입니다. 우리가 뭔가 반발하고 있어요. 이 세상에 대해서 뭔가 반발합니다. 악을 품었다. 독을 품었다. 요게 적절합니다. 독을 품고 악을 품은 거예요.

일관성이 있으려면 죽음의 전부다가 덮쳐져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능동성은,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기어코 하고야 말리라는 것은 어디서 출발했는가, 죽음으로부터 출발해야 될 것을 우리는 세상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뭐냐,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만 확실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얼마나 능동적이고 긍정적이에요.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것은 생각 안하고 내가 왜 있지? 에이 골치 아파. 그거 중요하지 않아. 내가 있다는 게 중요해.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게 중요해. 그러니까 숨 쉬는 것도 자기가 숨 쉬고 싶어서 숨 쉬었다고 그렇게 해석되는 거예요. 그러면 잠 잘 때 꿈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가 꾸고 싶은 대로 꿈꾸는 겁니까?

인간의 내장이 자율신경으로 되어가지고 교감과 부교감 신경으로 움직인다 했지요. 그럼 내 심장과 이것은 잠을 잘 때 내가 잠자지도 않고 심장아 뛰어라, 심장아 뛰어라, 뛰어라, 이렇게 하면 뜁니까? 우리의 대다수는 내가 원치 않는 것으로 되거든요. 키가 작은 거, 얼굴 못 생긴 거, 잘 생긴 거, 전부다 내 뜻이 아니다 말이죠. 재벌 집에서 태어나지 않고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도 내 뜻이 아니고 다 그런 거예요. 흰머리 나는 것도 마찬가지고. 여기서 뭔가 역지가 있는 거예요. 어떤 현실에 대한 강한 저항, 이건 불순요소입니다. 불순적인 요소가 우리의 주체를 현재 지배하고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로마서에서는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에 비해서 비현실적인 것. 억지! 요 단어가 적당하네요. 굉장히 억지스러워요.

현대인들의 모든 살아가는 모습이 전부다 억지스러워요. 죽은 사람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만, 성 완종 장로 세상에 자기 뜻대로 안 돌아오니까 북악산에 가가지고 나무에 매여죽지요. 자연스럽습니까? 내추럴 해요? 그게 내추럴 합니까? 뜻대로 안되면 전부다 북악산에 전부 집합해야 돼요? 단체로. 아니지요. 뭔가 억지스럽지요. 그러면 금요일 날 저녁때 유흥가에 가보세요. 술 잡수시는 분, 대개 억지스러워요. 줄담배 피우는 사람들, 굉장히 억지스럽지요. “아휴, 나는 담배 피우는 게 건강에 너무 좋아.” 이리 피우지 않잖아요. “그래, 담배 나쁜 것 천하가 다 알지만 속상해서 오늘 나는 안 피우면 안 되겠어.” 뭔가 억지스럽지요.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하여 지금 자기가 발악을 하고 있어요. 발악을.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술 먹기 전에, 담배 피우기 전에, 그냥 회사에서 고분, 고분 그것도 내부적으로 따져보면 억지스럽고 지금 반발로 돼있어요. 뭔가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하여 화를 분통을 터트리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 이유도 없어, 대상도 없어, 딱 지적해서 누구 없어. 대상이 없어서 박근혜가 되지만. 아무튼 구체적으로 딱 잡아서 내 적도 없어요. 무조건 울분이라. 그것을 누가 받는가, 그 현실을 만드신 분,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너희들이 너희 영광만 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완전히 조저 버렸다. 그렇게 되지요.

그 다음에 계속 논리적으로 가봅시다. 방금 알았다 치고요. 그러면 시작은 왜 있는지를 모르겠다하니까 이 시작 값도 못하고 이 시작으로 적당하지 않으니까 확실한 건 이야기하지요. 확실한 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거예요. 그럼 죽음으로부터 죽는 존재로서 태어났지요. 확실한 것은 우리가 죽는다는 것. 물론 로마서5장에 나와요. 모든 사람은 죄의 왕 노릇하기 때문에 결국 죄 값은 뭐다? 사망이다.(롬5:17) 확실하지만, 성경 그 딴 거 다 버리면 성경 안 보겠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창세기5장에 보면 아담의 형상을 입고 난 뒤에 아담의 형상의 특징이 뭐냐 하면, 900살아도 소용없어요. 죽었다는 거죠.

899년이나 살았는데 죽고 싶습니까? 아니면 더 살고 싶습니까? 이 만큼 살았는데. 1000년을 살아보세요. 그 다음날 또 살고 싶지요. 이게 억지라니까요. 억지. 이게 이유 없는 반항이에요. 살려줄 때는 언제고 왜 죽이십니까? 이리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니 원래부터 죽기 위해서, 죽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야기했다. 왜냐 하면 진짜 나는요, 내가 없을 때, 내가 사라질 때, 진짜 내가 등장해요.

이 세상의 진짜 나는 복수가 아니고 65억중에 딱 한 사람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자신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로마서5장에서는 예수님이 최후의 아담이지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봅니다. 터미네이터. 종결 자. 터미널이 종점이잖아요. 종점 같은 존재. 터미네이터. 예수님이 진짜 인간 아담입니다. 그것을 마지막 아담이라 해요. 그리고 두 번째 아담. 따라서 이 세상에 있던 첫 번째 아담은 가짜다? 아니다? 가짜지요. 그 아담을 가지고 뭐냐 하면 흙이라 해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가짜다. 이리 되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가짜에요. 어느 정도로?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 인간 아니라는 말입니까?” 인간인 경우는 뭐냐 하면, 주께서 우리를 호명해 줄 때, 우리는 고 관계성에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어렵다 했지요. 어려워도 들으셔야 돼요. 왜 들으셔야 하면은 인간은 뭐냐, 영과 몸과 혼으로 되어있다. 아니에요. 인간은 뭐냐, 영혼과 몸 아닙니다. 인간이 있다고 치고 분석하는 것은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에요. 인간은 없다고 생각하고 왜 만들었습니까? 하고 규정되어야 되지 있는 인간 조사해 보자, 이리 되는 것은 육과 혼과 영에 있는 것은 이것은 기독교가 그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서양에 헬라철학이 500년 전에 플라톤이 이야기한 거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거예요.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질료, 이렇게 물질로 되어 있는 걸 몸이라 하고 혼이라 하는 것은 짐승과 공통점, 동물과 공통점, 동물과 공통점이 뭐냐 하면, 여러분 집에 개있어요? 개 키우면 이 개가 사람인지 괴물인지 구분 안돼요. 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요. 어떤 집사님은 개가 우울증 걸렸다는 거예요. 정신과에 가보지 했거든요. 주인이 너무 안 들어오니까 우울증 걸린 거예요. 안 놀아주니까. 이게 개가 아니고 괴물 같아.

그러면 동물이 그렇게 인간과 닮았다면 식물은 어떻습니까? 식물은 그럼 제외시킬까요? 원예 농업 하는 사람들이 트로트 틀어주는 것하고 모차르트의 음악 틀어주니까 기분 좋다고 열매를 더 맺는다면 결국 식물 안에 인간만 갖고 있다고 우기는 감정적인 요소가 식물에도 있다는 뜻이거든요. 실제로 실험적으로 해보면. 수확이 많으니까. 강한 비트가 들어가 버리면 스트레스 받아가지고 열매가 안 맺힌다는 거예요. 그런데 부드러운 클래식을 해주니까 너무 잘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뭐예요? 그러면 식물조차도 우리가 갖고 있는 감정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야말로 꽃으로 때리지 말라는 것은 애가 아픈 게 아니고 때리는 꽃이지만, 꽃이 아플 수가 있어요. 김 혜자 제대로 알아야 돼요. 꽃으로 때리지 말라하는데 꽃이 아플 수가 있어요. 식물이 그렇거든요. 식물이 그렇거든요. 그러면 광물은 어떻습니까? 광물. 광물은 기분 나쁘겠어요? 기뿐 나쁘지 않겠어요? 플로티누스라는 철학자는 광물도 그 안에 영혼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래서 더 나아가면 뭐가 되느냐 이것이 바로 힌두교 종교, 모든 사물은 안에 정신이 있고, 영혼이 있다. 그 힌두교 종교를 가지고 성경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딱 두자입니다. 바알종교에요. 그게 바알종교입니다. 자연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연으로 말미암아 자연으로 귀소, 귀환되는 종교, 그게 바로 바알종교에요. 해를 섬기고, 달을 섬기고, 그 섬기는 주체는 인간이고. 신은 보이지 않고.

그런데 그게 바알종교라면 이 세상에 그러면 이 세상에 바알밖에 없네요. 바알의 아버지가 엘이에요. 엘. 가나안 지역의 엘이거든요. 엘을 다른 말로 하면 알라 돼요. 알라. 이슬람교. 모든 종교는 엘 종교로 통합이 돼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신이에요. 그러면 여호와든 뭐든 모든 신은 하나밖에 없네. 통합돼 있네. 라고 할 때, 차이점이 뭡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알아야 돼요. 그게 만약에 우상이라면 우상 아닌 게 뭐냐, 그게 바로 예수하면 안 됩니다. 예수 내용만 딱 깨어보면 그것도 자비하시고 다 나와요. 또 신하고 똑같아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하나님의 언약이고 그 언약의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언약이 십자가에요. 언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 존재가 아니고 기능입니다.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 예수를 보아라, 사도바울이 그렇게 했습니까? 눈앞에 예수가 보이지 않느냐, 그렇게 이야기했습니까? 갈라디아서3장1절에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3장 1절에 뭐로 되어있습니까? 십자가지요. 사건이라니까요. 사건. 존재가 아니고 우발적인 사건이라니까요.

십자가를 보아라, 만약에 예수를 보라 하면요, “저, 예수 잘 믿어요.” 예수를 누구나 다 상상할 수 있으니까. 누구나 좋으신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어요.  왜, 내가 좋으니까 상상할 수 있어요. 그게 아니고 십자가라 하는 것은 결국 뭡니까?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그 하나도 없는 죄인 속에 누구도 포함돼 있다? 바로 예수 믿는 나도 이미 그 안에 죄인으로 포함돼 있음을 니가 수긍하느냐 이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예수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으로, 십자가로, 능력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을 내가 일으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나는 내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여지는 애초부터 차단돼 있지요. 그 차단돼 있음을 감사하는 거예요. 내가 헌금하고 전도하고 강의하고, 설교하고, 이래서 구원 받지 않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말씀 지켜서 구원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피동적으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하지요.

그러면 능동적인 것은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 주께서 허락해야 떨어지고 참새가 시장에서 두 데나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되듯이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리 되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마디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그 다음에 크게 쓰겠어요. ‘죽음의 자리에서 호명당할 때, 우리는 언약 안에 있다.’ 진짜 인간으로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사야6장 8절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이렇게 되어있어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누가 나를 위해서 갈꼬.” 할 때 이사야 하는 말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자기 여기 있습니다. 스스로 이야기해요. 누가 호명해주는 게 있는 거예요.

주님이 찾아와서 호명해주니까 그 주님이 호명한 그 범위 안에서 없던 존재가 생긴 거예요. 없던 존재가. 피동적인 자리이고 수동적인 자리입니다. 능동적인 나는 처음부터 없었어요. 왜, 나의 죽음의 자리가 우리 자리이니까. 죽기 위해서 우리는 만들어졌으니까. 따라서 진짜 나는 살아있는 내가 없어질 때 비로소 그 때는 내가 있어서 있는 내가 아니고, 나는 없어지고 주님 때문에 생겨야 될 내가 주님의 죽음 안에 함께 있을 때 비로소 파악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3장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은 우리가 늘 십자가 사건이 유발되는 그 현장에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바로 지금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십자가를 적용시키는 일이 일어나지요. 따라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하면 안돼요?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라는 말이 필요치 않지요. “지금 주께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제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면 예레미야 애가3장3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예레미야의 고백인데,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찌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때리면 맞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예레미야가. 주께서 때리시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예언한 것은 장차 누굴 이야기하는 겁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거죠. “아버지여, 때리시면 제가 뺨으로 맞겠습니다.” 모욕을 당하면 제가 당하겠습니다. 얼마나 수동적입니까? 얼마나 피동적이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때리긴 왜 때려. 때리는 것이 우리의 몸을 통해서 예수님의 정보가 우리에게서 방출이 돼요. 그러면 예수님의 정보가 방출이 되기 전에 우리의 독자적으로는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가,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공은주(IP:218.♡.196.154) 15-07-12 21:47 
가락-요한복음7장17절(선제공격)150702b-이 근호 목사

둘째 시간 하겠습니다. 나의 죽음도 없어요. 나의 죽음은 없고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죽이시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죽고 싶어 죽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타이밍 맞춰서 죽여요. 내 죽음으로 마감되지 않도록. 죽을 때도 주님이 생각했던 그 진짜 죽음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우리의 죽음을 사용하는 겁니다. 나와 함께 죽으면 나와 함께 살리라, 원리가 그렇습니다. 같이 죽으면서도 단독적으로 죽으면 처음부터 버리움 받았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자기 주인을 못 알아보지요.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가 이런 말을 했지요.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 집에 보면 나와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사도행전16장36절에 보면,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거기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예수 앞에다가 주가 붙는 걸 굉장히 중요시 여긴 겁니다. 그냥 예수로 보지 말고 나의 주인으로서의 주를 믿으라.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본래의 존재의 의미가 비로소 밝혀진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왔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살만큼 살다가 적절한 때에 죽고 그렇게 죽었던 분이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그러면 그 분은 첫 번째 부활과 두 번째 부활, 세 번째 부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걸 끌고 지나간다고 하는데, 두 번째 시간 어렵게 해서 미안한데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냥 밀어 붙이겠습니다.

인간이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현실을 만들어내는데 이 인간이 만든 모든 현실이 거짓말이에요. 왜 거짓말이냐 하면, 진짜 현실을 만들면 현실 속에 누가 있어야 됩니까? 나도 포함이 되어야 되잖아요. 왜, 현실은 이 자연세계는 나보다 크고 나는 자연의 부분이 되니까. 말은 빨리 하지만, 말은 맞지요? 큰 대자연 속에 내가 포함이 되잖아요. 포함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대 자연의 현실이라는 말을 더 이상 쓰면 안돼요. 왜냐 하면 그렇게 쓰려면 우리가 자연 바깥에, 현실 바깥에 나가 있는 시선을 따로 확보해야 됩니다.

하나의 수정구처럼 이것이 자연이라면 이 자연을 우리 바깥에서 나와서 자연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자연은 이렇고 이렇다, 이야기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분명히 현실보다 작고, 자연보다 작으면서 인간이 되바라졌어. 인간은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면서 자연은 이렇다, 그것은 잘못한 게 아닌데 뭘 잘못 썼는가 하면, 이 현실이라는 말을 크게 잘못 쓰고 있는 거예요. 이 현실이 조작된 거거든요. 이건 누구를 위한 현실이겠어요? 자기 자신을 위한 현실이면서도 이걸 마치 남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현실인양 마구 부도수표를 남발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부싸움이잖아요. 남자들이 원하는 여인상은 뭐냐 하면, 남자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되 절대로 잔소리하지 않는 여인. 남편이 무슨 짓을 해도 잔소리하지 않는 여인. 그래서 옛날에는 뭐냐, 남자가 어떤 짓이라도 해도 된다는 것을 하기 위해서 칠거죄악 가운데서 남자가 바람피우고 다른 여자 데려와도 말 안하기. 이걸 최고의 여자로 삼은 거예요. 왜냐 하면 가정은 누가 하늘이기 때문에? 남자가 하늘이기 때문에 가정은 누구의 현실입니까? 남자의 현실이 되지요. 남자의 현실.

문제는 교회에서 그런 가부장적인 유교적 분위기가 있는 그 한국에서 교회가 들어와서 교회에서 여자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창세기2장을 동원해서 이걸 뭐냐 하면, 배필자라 하지요. 배필 자를 5월 달에 설교하면서, 배필 자가 뭡니까? 남자가 하는 일에 보조역할 하는 것 배필자라 합니다. 그러면 남자가 바람을 피우던, 사업을 하던 간에 여자는 잔소리하지 말고 순종의 미덕을 보여줘야 되지요. 순종의 미덕을.

그러면 이 시대에 순종의 미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밤낮으로 돈을 벌어서 남자의 사업자금 대는 거예요. 최고의 배필자지요. 남자가 말아먹어도 돈 벌어다 주고, 남자가 바람 피워도 돈 해주고, 최후의 배필 자. 친정 가서 대출 받아오고 하는 거예요. 남자가 하는 말이 “이거 다 내 혼자 좋아라고 하는 말인가, 다 우리 가정 우리 자식새끼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데 그거 못 도와주나? 니가 교회 다니면서 창세기2장 모르나? 배필 자잖아.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했는데 니가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어길 거야?” 지는 교회 안 가면서 그걸 또 적절하게 써먹거든요. 그거 배필자입니까? 그걸 보면 인간들이 참 불쌍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르겠어요.

배필자라 하는 것은 잔소리하라고 하는 것이 배필 자입니다. 잔소리 하라고. 왜냐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약한 자가 강자를 구원하기 때문에. 잔소리 해대는 자가 얼마나 눌렸으면 잔소리하겠어요. 얼마나 아팠으면 비명을 지르겠습니까. 그 아파서 비명 지르는 역할은 여자가 하고 남자의 무심코 장난한 것에 대해서, 돌에 맞는 개구리는 여자가 하고 돌 던지는 역할은 남자가 하고. 피해보는 여자 쪽이 남자를 구원하는 원칙. 이게 바로 여자의 후손입니다.

뱀은 힘을 강조하고 여자는 힘에 눌린 아픔을 보여주고. 그래서 하늘나라가 뭐냐, 마태복음5장에 나오는 팔복이라 하지요. 그 팔복의 내용이 뭐냐, 나처럼 당하면 구원받는다, 그겁니다. 나처럼 당하면 복 받은 자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인간이 만든 현실의 판을 긁고 지나가거든요. 매끄러운 판에다가 찍하고 날카로운 금속으로 긁고 가보세요. 흠집 생기지요. 주님께서 그렇게 끌고 지나가는 거예요.

오늘 본문 요한복음7장에서 뭡니까? 내가 세상을 향하여 뭐한다? 악하다고 긁고 지나가지요. 긁고 지나가면 자국이 남겠지요. 그 자국이 바로 유일하게 생명으로 가는 길이에요. 주님 먼저 통과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거든요. 아버지의 원대로 닦아놓은 그 길로 가다보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우리는 이단아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아웃사이더가 되는 겁니다. 똘 아이가 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거예요.

어떻게 행함도 없이 구원받느냐, 어디 그런 되도 않는 소리가 다 있어? 라는 말을 여러분은 들을 수 있어야 돼요. 그 듣는 것이 팔복입니다. 그게 팔복이에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고난을 받거든 기뻐하라. 나도 당했는데 너도 당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구원 없다. 개판으로 살았는데 구원받아요. 뭐 이런 일이 다 있습니까?

예수님 그 당시 기적은 뭐냐 하면,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는 것이었고 다시 만나가 떨어지는 걸 기적으로 봤고 뭔가 획기적인 것.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질 때, 이걸 기적으로 봤잖아요. 그런데 정작 주님께서 제시하는 기적은 뭡니까? 우리가 정당하고 우리가 합당하다고 여기는 우리의 심령을 흠집을 내는 거예요. 어떻게? 속에 들어오는 것이 더러운 게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아예 우리는 생각지도 않는 우리의 속을 꼬깃 꼬깃 감추고 있던 우리의 속을 완전히 긁어버리고 지나가는 거예요. 이런 속성을 가지고도 니가 구원을 넘봐. 이 나쁜 것! 하고 우리의 속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그 작업을 당했거든 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어요. 요한복음8장에서 어떤 여인이 간통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어요. 만약에 우리가 간통한 여인 당사자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로 이미 확정이 됐다고 합시다. 그럼 내가 간음을 하고 간통을 한다면 주께서는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됩니까? 우리 인간 같으면 이미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종용히 처리하는 것이 좋지요. 그걸 동네방네까지 까발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개 끌듯이 질질 끌고 광고할 필요 없다 말이죠. “니가 간음했나?” “간음했습니다.” “잘못됐지?” “잘못됐습니다.” “내가 십자가 피로 용서해 줄게.” “고맙습니다.” 이거 얼마나 일처리가 깔끔합니까. 아주 깔끔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해요? 이것은 온 동네 구사를 시키고 아는 사람들이 전부다 아저씨들이 돌 던지고 죽이려고 달려들더라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정말 간음한 여인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구원받을 사람이 아니라 한다면, 주님을 사랑하지를 못합니다. 구원을 이렇게 요란스럽게 구원하는 건 딱 질색이고 본래 우리끼리만 알아야 되는데 이미 모든 위신과 체면, 명예는 다 꼴아 박아 놓고 이 판에 와서 너를 구원하리라, 장난칩니까? 지금.

지금 나의 그 고귀한 자존심, 그걸 훼손시켜 놓고 이제 와서 너를 구원하리라, 그 소리를 듣고 누가 좋아하겠어요?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 여인은 좋아해요. 그 여인 미쳤어요. 그게 바로 기적이에요. 주님한테 공개망신 당했는데 공개총살 당했는데 오히려 그걸 보라는 듯이 구원에 기쁨을 말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런 원리, 감동 화 되어가지고 자기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될 텐데 뻔뻔스럽기 짝이 없지요. “주여, 하나님의 나라 임할 때 저를 생각해 달라.”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지요.

하늘나라 임할 그 다음에 뭐가 나오지요? 임할 날, 임할 때, 주의 하나님의 날에, 날, 어떤 시간을 이야기하지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이 잘못됐다 했지요. 강도도 마찬가지에요. 같은 인간이니까. 그 때에 저를 생각해 달라 하니까 주님께서 이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걸 이렇게 바꿨어요. 요걸 바꿨습니다. 니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 안에는 모든 날이 오늘이에요. 투데이. 모든 게 투데이. 오늘이에요. 오늘이라는 말은 너가 미래가 수동적이라면 오늘도 수동적이고 지난 과거도 그래야만 했던 일이 그래야만 일어나야 될 일이에요. 그걸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표시를 한 겁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런 코스를 밟아야 돼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을 행함이라 않고 이건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기능이라 해요. 주님이 주의 이름으로 기능을 우리한테 적용시켜가지고 우리가 내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면면을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기능이 되지요.

그 기능에 뭐가 들어가느냐, 우리가 죄인이 되면서 그 기능과 죄인이 되면서 중보자가 개입하게 되면 뭐가 됩니까? 의인되지요. 그런데 이것이 수동적이 되지요. 그러면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는 의인이어야 하기에 우리는 죄인의 모습으로 보여줘야 하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뭘 해도. 왜? 의인을 의인으로 드러나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강의하면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고 제일 중요한 대목이에요. 뭘 해도 의인되어야 하기에 뭘 해도 죄인 되게 하시는 겁니다. 왜? 그래야 구원받기 때문에. 아니에요. 그것이 예수님의 기능이기 때문에.

주님이 함께 있던 증거가 어디입니까? 뭘 해도 내가 죄가 된다는 고백. 죄인 중에 괴수되는 그것이 집이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뭐든지 죄인데 그게 그렇게 웃음이 나고 가볍고 기분 좋은 이유는 이미 의인됐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뭘 해도 죄인이라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미 의인되었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진 자의 여유’라는 거예요. 가진 자의 여유.

가진 자의 여유인데, 빌립보서4장에서는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 모든 것이라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게 아니에요. 홍해 갈라지는 게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바로 모든 것이라는 거예요. 물을 마시면 바로 할 수 있잖아요. 바로 되잖아요. 바로.

이건 애굽의 10가지 재앙입니다. 애굽의 10가지 재앙 중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2,3 하고 틈을 띄우고 4,5,6,7,8,9,10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 갈라진 틈이 뭐냐, 1,2,3은 모세도 할 수 있고 애굽의 술사들도 할 수 있는 것이 1,2,3이에요. 4번째 딱 될 때, 얼추 따라 붙였습니다. 술사들이. 따라 붙였는데 아! 4번째 안되네요. 4번째 안돼요.

그런데 1,2,3 이 재앙은 뭐냐, 애굽사람이 살던 지역이나 이스라엘 사는 지역이나 다 내려집니다. 다 내려져요. 그러나 이번 10가지 재앙에 이 모든 주체측이 인간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특별히 모세를 보내신 그 숨겨진 하나님의 프로젝트라는 것이 들통 나고 난 뒤부터는 애굽 사는 지역에는 내려지는 재앙이고 이쪽의 이스라엘 사는 지역에는 전혀 그 재앙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없는데서 새로 만드는 작업을 합니다. 만들어서 대비를 시켜요. 하나님의 손댄 민족과 하나님의 새로 창조한 민족과 그냥 있음, 존재의 있음을 계속 끌고 가는 민족과의 구별, 그 구별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두자로 ‘거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거룩은 선의 충만이 아니고 갈라짐, 차이를 가지고 거룩해요. 차이. 그래서 거룩이라 하는 것은 “목사님, 어느 정도로 거룩 되어야 됩니까?” 묻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바둑 6급하고 7급하고 차이 납니까? 안 납니까? 차이나지요. 당구 50하고 500하고 차이나지요. 차이 난 부분만 거룩이 돼요. 그러면 거룩한 주님이 거룩한 분이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없는 차이를 일부러 차이를 유발시킨 분이 바로 거룩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딸과 싸우는 거예요. 며느리하고 시어머니하고 싸우고, 형제간에 싸우고 멀쩡한 것이 지진이 일어나지요. 갈라지지요. 갈라지게 되면 지평이 평지가 갈라지게 되면 우리들끼리만 있던 데에 낯선 제3의 요소가 솟구쳐 올라옵니다. 바로 솟구쳐 숨겨진 솟구쳐 올라옴이 평소에 있다고 여겼던 모든 있음을 지배해왔던 원천 자가 돼요. 원천 자. 이걸 어려운 말로 함께 있는 초월자라고 해요. 우리와 함께 있던 초월자라고 이야기해요. 우리와 함께 있던 초월자.

함께 있으면서 굉장히 평범해 보이는데 사실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우리를 초월하신, 만드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에요. 자기 고향에서 예수님은 뭐로 태어났습니까? 목수의 아들이에요. 방앗간 집 둘째 아들 이런 식으로. 목수의 아들인 거예요. 담배 가게 아저씨 이런 거. 아주 평범해요. 그런데 담배 가게 아저씨가 졸지에 율법을 거론하면서 절기에 나타나가지고 너희들 중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도다, 하고 나선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입니다.

영광, 거룩은 우리가 따로 열심히 말씀 지켜서 거룩 되고 영광 되는 게 아닙니다. 뭐냐 하면 갈라지게, 멀쩡한 우리를 쪼개지게 하는 다른 요소가 솟구쳐 올라와야 돼요. 그래서 손대기 전에는 구원 없습니다. 도 닦으면 구원 안 됩니다. 누가 낯선 분이 손을 대줘야 돼요. 손댈 때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이렇게 호명을 이야기하지요. “주여, 누구십니까? 제가 여기 있나이다.” 이게 바로 구원 받은 사람의 보편적인 고백입니다.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주께서 이미 저를 아셨습니다. 제 구원에 대해서 이제 남겨진 일은 완전하게 손 떼었습니다. 없습니다. 주의 기능만 저한테 퍼부어주소서.”

그 카페에 보면 요새 냉커피팔고 빙수 팔잖아요. 냉커피 어떻게 제조합니까? 제가 잘못 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커피 타고 그 다음에 얼음 나오는 기계 앞에 가니까 거기에 각진 어름들이 주룩 쏟아지지요. 우리가 유치원 다니고 초등학교 다니고 뭐 대학교 나와 가지고 취직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얼음같이 부어버리면 이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어버려요. 냉커피가 아니고 성령커피에요. 우리를 그릇으로 사용하고 거기다가 성령이 얼음을 담아버리면 주께서 맛있게 합당한 커피가 되어버리지요. 얼음 없는 냉커피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성령 안 받은 그리스도인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로마서8장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뭘 자랑하라? 예수님만 자랑하라 말이죠. 우리에게 똑똑한 사람도 없고, 강한 사람도 없고, 잘난 사람도 없고, 돈 많은 사람도 없는데, 없는 자를 있게 하사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모르는 사람을 택하사 알게 하셨으니 이 모든 것은 아는 나를 자랑하지 말고 뭐를 자랑하라?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심이라, 이걸 가지고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이 교회는 전부다 뭐만 끄집어내요? 커피 꺼내지 마시고 받았던 얼음 꺼내시면 됩니다.

이미 의인되었음을 자랑하지요. 의인됨을 끄집어낼 때, 어떻게 끄집어내요? 나는 뭘 해도 죄인 된다는 사실을 하면서 의인을 끄집어냅니다. 나는 뭘 해도 죄인이다. 강단에서 설교자가 설교하는 것부터 해야 돼요. 나는 설교해도 죄인입니다. 하는 그것부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돼요. 만약에 선교사가 교회에 오게 되면 “여러분, 저 선교하면서 여러분의 귀한 선교비만 날렸습니다. 죄인입니다.” 이렇게 선교 고백을 해야지요. 선교보고를 해야 돼요. “제가 아프리카가 가서 한 짓은 죄밖에 지은 게 없습니다.” 그런 선교사였으면 좋겠어요. 사진 찍고 이런 거 보내지 말고. 제발. “저는 여러분의 돈만 축냈습니다. 나는 아프리카 가서 이야기한 것은 나는 죄인입니다. 그것밖에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도와주려면 도와주고 말려면 마세요. 돈으로 선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아직도 죄인 됨을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지요. 선교사가 강단에 서서 그런 선교를 하기에 힘들어요. 왜냐, 초청한 목사의 안면도 생각해줘야 되니까. “니 그리 이야기하면 나는 뭐 되노?”

18절 다시 봅시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그 속에 불의가 없지요. 그러면 이 불의가 없다. 거룩하다. 이 참된 말씀 지키는 것은 어딥니까? 불쑥 솟구쳐 올라온, 밑에서 올라온, 지금 초막절에 파티는 즐겁습니다. 지금 유대인의 유월절 보면요, 뭐 춤추고 되지도 않는 춤, 이상한 노래 시편에 나오는 노래지만 여호와 찬양 부르면서 춤추고 모르는 사람과의 껴안으면서 온 축제마당이에요. 만약 거기에 누가 불쑥 등장해가지고 “당신들 전부 죄인이야.” 이러면 맞아죽지요. 지금 이스라엘에서. 그 일을 하신 거예요. 지금 축제일에, 명절날에 그 일을 하신 거예요. 주께서. 너희들 율법대로 산 사람이 낫씽, 아무도 없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자, 거기에 대해서 20절에 보세요. 보기 전에 또 다시 합시다. 기억하세요. 거룩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끼리만 있는 이 현실에.  인간의 현실은 다 가짜입니다. 왜냐 하면 자기를 빼놓고 자기가 쳐다보는 현실을 현실이라 하니까 그 자체가 논리적으로 이게 모순되고 이게 엉터리에요. 자기 빼놓고 쳐다보는 현실이니까. 쳐다보면 안돼요. 포함을 시켜야 된다니까요. 그러면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아이고, 목사님 나를 포함시켜서 현실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당신은 현실을 모른다고 이야기해야지요. 어느 큰 단체에 작게 포함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전체를 모른다고 해야 돼요.

그래서 현실을 나는 모른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래서 “나는 현실을 모릅니다.” 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런데 현실을 모릅니다, 라고 이야기해버리면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그럼 당신은 왜 삽니까? 같은 논리로 하면 “나는 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차마 그것까지는 못하거든요. “그저 자식새끼 밥 먹이고 먹고 삽니다.” 그러면 지만 사네. “그러면 그게 전체 현실을 봐도 옳다고 생각합니까?” 말대꾸를 못해. 옳다고 생각한다면 마치 현실 전부를 다 아는 사람처럼 돼버리고, 옳지 않다고 여겨버리면 지금 나쁜 짓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자기가 감수해야 된다는 부담이 생기고. 소크라테스가 그 짓했어요.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괜히 찾아가 시비건 겁니다. “당신이 정의에 대해서 아십니까?” “압니다.” “그러면 이것도 정의입니까?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이 배고파서 감나무에 감 따는 것도 정의입니까?”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도둑질인데.

그러면 부자 집에 가가지고 도둑질해서 가난한 사람 도와줄 때, 장발장이 촛대 훔치는 것이 그것이 정의입니까? 소크라테스를 장발장으로 예를 들어서. “그것은 나쁜 짓이요.” “그런데 그 촛대가 원래 당신 집에 있던 건데.” 그러면 내거 내가 찾는데 그럼 정의 없지요. 그러면 일본에 있는 문화재를 훔쳐서 가져왔는데 중이. 뉴스에 나왔잖아요. 그게 정의입니까? 그러면 노동자가 사장 집에 가가지고 TV훔치는 것, 그게 정의입니까? 왜, 내 노동력을 착취해가지고 자기 TV샀으니까. 내 노동력 대가를 훔치는 것도 정의입니까? 그건 정의입니다. 그러면 당신 노동력보다 당신보다 더 많이 하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당신보다 더 많이 착취를 당했는데 그럼 줄을 서세요. 당신은 그 다음 세 번째 순서고 제일 착취를 많이 당한 사람이 먼저 가져야 될 텐데 당신은 첫 번째 순서에 안 가져가거든 그 때 찾아가세요. 그게 정의롭지 않습니까? 이리 이야기하면 뭐라고 합니까? 그럼 신문에 광고해야지요. 사장님에 집에 가서 물건 훔쳤는데 나보다 먼저 착취당한 사람을 찾습니다. 광고내야지요. 이게 모든 세상에는요, 현실이 따로 없어요. 자기한테 유리하면 진리이고 선이고 자기한테 불리 되면 악이 돼요. 그게 사람에 정의로운 거예요.

그걸 범위를 넓혀볼까요. 대한민국의 정의로움은 뭡니까? 대한민국의 국가의 이익이 되면 그게 선이고 대한민국이 불리하면 그게 악이 되는 거예요. 북한에서 마약을 팔면 그게 선이 되고 우리나라에서 마약을 팔면 그게 악이 되는 거예요. 북한은 마약 팔아가지고 핵개발 하거든요. 얼마나 보세요. 일방적입니까? 인간은.

방금 제가 한 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유대인들이 이미 극복을 했어요. 어떻게? 거룩과 모든 정의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다. 다른 민족이 “당신이 뭔데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우리에게는 율법을 줬기 때문에.” 율법 자체가 오직 거룩이고 의다. 그럼 당신네들은?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았으니까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출애굽기19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아예 나라이름 자체가 거룩이에요. 거룩한 제사장나라. 그러니까 우리가 거룩하다.

주님이 나타납니다. 이 나라 왜 망했느냐. 거룩한 나라 이스라엘 왜 망했지? 그 땐 조상들이 안 지켜서 그런 겁니다. 그럼 지금은 왜 로마의 압제를 받느냐, 그것은 우리가 열심히 지금 때가 안돼서. 메시아가 오게 되면 우리나라 구원할 거예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 “그러니까 너희 애비는 악마다.” 지금 방금 이 논리에서 소크라테스 논리에서, 유대인 논리에서 지금 딱 한 가지 빠졌어요. 뭐가 문제입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빠져있는데 뭐가 문제에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뭐가 빠져있습니까? 바로 누가 죄인이에요? 바로 내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인 것을 지금 누락시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십자가는 뭡니까? 십자가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누가 이야기합니까? 사도 바울이 바로 복음으로서 외치는 거예요. 복음은 딴 게 아니고 니가 바로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의인도 아니면서도 의인인양 마땅히 의인 이어야 부터 출발한다는 그 자체가 십자가를 죽이고 또 죽이는 십자가 죽이는 그 원인제공자와 같은 동일한 원리였다는 겁니다.    

이리 이야기하면, 흔히 저보고 비판하는 게 있어요. 맨 날 이 근호 목사 당신 말따나 우리가 찡그려야 되고 울어야 되고 늘 웃어서는 안 되고 우는 놈들은 천국 못 간다 하는 그 사건이 뭐냐, 그것이 바로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이에요. 소설에 살인사건이 일어나는데 고지식한 수도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보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뭐냐 하면 바로 웃음의 행복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주님의 십자가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죄를 생각한다면 웃어야 돼요? 울어야 돼요? 늘 웃으면 안돼요. 웃으면 주께 영광이 안 되고 그래서 14세기 때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어기고 시들시들 웃고 하니까 주의 법을 어기는 이 수도사들을 죽이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웃음을 긍정하는 거기에다가 독을 발라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보려하는 사람을 다 죽여 버렸어요. 그게 <장미의 이름>입니다. 그 말은 고지식한 광신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하느냐, 그걸 고발하는 책이지요.

그러면 이 이야기하고 아까 그 이야기하고 맨 날 죄인이다, 죄인이다, 하고 고지식한 수도사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맨 날 찡그리고 살까요? 죄인이다, 하고 으으으~ 할까요. 떡도 먹지 말고, 밥도 먹지 말고, 맨 날 금식하며 살까요? 질문 던집니다. 누가 죄인이라 했던가요? 누가? 우리가 죄인이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내가 내 이야기하면 가짜고요, 내가 내 이야기하는 것이 왜 가짜이냐 하면, 우리는 전체의 일부이거든요. 우리는 죄를 아는 바깥에 나가 있을 때나 내가 죄를 규정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가 현실 속에서는 내가 죄인인 줄 몰라요. 하지만, 어느 날 내가 뭘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편51편에 다윗이 고백하기를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시편51편에서 그렇게 된 것은 누구 덕이라 했습니까? 다윗이 누구의 덕입니까? 성신의 덕이지요. 저는 옛날 신학교 때 성신이라는 말을 듣고 굉장히 성신이라는 말이 좋게 받아들여졌어요. 왜냐 하면 그 때 박재란 딸의 이름이니까. 죽은 박재란 딸의 이름이 박 성신. 그의 노래가 좋았거든요. 성신 생각할 때마다 아! 그 사람이 부른 노래가 유명한데 그 사람 죽었어요. 젊은 사람인데. 그 성신이 기억나는 거예요. 또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 성령이란 이름을 갖고 있어요. 미스코리아 출신 있어요. 잊을 수가 없어.

다윗이 성신 받고 고백이 뭐냐 하면, 나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거예요. 와! 이거 오늘 제가 이거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죄 지은 적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인간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 니한테 죄 지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상당히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에요. 미쳤는가 이 인간은. 시편51편 보세요. 나는 하나님에게만 죄졌다. 그 말은 인간은 인간이 사라질 때 비로소 인간의 장소, 그 장소는 유일한 인간, 예수님만이 참된 인자,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들은 주님의 속성을 양도받은 분양받은 거죠. 주님의 속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저주받기 위해서 만들어진 그릇이고 또 하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만들어진 그릇이죠. 아까 목사님과 이야기하면서 아가서이야기 많이 했잖아요. 그거 외우신다고. 아가서 내용이 뭘까요? 다윗언약에 의해서, 다윗언약 안에서는 법을 초월하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죽음보다 강하다는 거예요. 사랑은 무엇이냐, 거기에 나온 정의는 뭡니까? 사랑은 무엇이냐,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은 베푸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사랑은 사랑의 반대말을 거론하고 사랑을 이야기해요. 사랑은 뭐보다 강하다? 죽음보다 강하다. 그러니까 제발 니 죄로 죽여주세요. 죽는 것도 주의 사랑이라는 것을 제발 알아채세요. 그런 뜻입니다.

제가 지난주일 낮에 마지막 대목에서 한 이야기가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할 때 제가 답변한 게 뭐냐 하면, 모르면 되고 죄지으면 되고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죽으면 된다 했잖아요. 하여튼 내가 강조한 것은 듣지도 않고. 모르면 되고, 그래, 나 몰라, 죄 지으면 되고 그거 신나는 이야기고, 평소에 죄짓는 거. 세 번째가 딱 걸려버려요. 뭐냐 하면, 죽으면 되고. 제 뜻이 뭐냐 하면 죽고자 하는 자는 모든 것을 이미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지금 모든 문제가 뭐냐, 살고자 하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살고자 하니까 일곱 귀신 나간 귀신 다 들어와요. 친구끼리 골라가지고 완전히 집안의 내간이 노래방 같아. 온 동네에 있는 귀신들 다와 가지고 노래 부르고 마이크 쥐고 난리 났어. 그거 쫓아낸다고 성경 한 장 더 보고, 기도30분 연장하고, 헌금 십일조 막 해대면서 마귀 좀 나가 줘! 하는데, 마귀는 십일조, 주일성수한다고 안 나가거든요.

“그래, 나 죽었어.” 이래면 다 나가버려요. 또. 희한하게. “나, 죽을게.” 이러면 다 나가버려요. “아휴, 나, 숨 좀 쉬어보자. 살아보자.” 하면 다 들어오고. 꼭 자식 같아. 부모 좀 살라하면 기대기 위해서, 어떤 부모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자식은 (   )다. 이것은 정보통통인데. 자식은 (빨대)다. 부모 거 다 빼먹는. 결혼 유무와 관계없이 결혼해도 마찬가지에요. 빨대에요. 사업한다고 친정가가지고 대출받아가지고 친정엄마한테 책잡히고.

자식이 제일 편할 때가 언제이냐, 자식 군에 갈 때. 제일 괴로울 때가 군에 휴가 올 때, 지금 내가 있는 내 생활리듬을 휴가 와서 다 버려놨어요. 결혼하고 난 뒤에 자식이 좋을 때가 언제냐 손자 안고 들어올 때, 가장 좋을 때가 손자 안고 나갈 때. 사람은 어차피 우리는 모든 것이 자기 빼놓고 다 귀찮을 때 마지막에는 자기도 귀찮아요. 그래서 자살이 있는데 자살 아닌 자살같이 죽어가는 거예요. 전부다.

주께서는 우리를 죄인이라 할 때, 찡그리는 게 아니고 왜 기쁘냐 하면, 이 죄를 현실을 만드시고 현실 바깥에서 유일하게 보시는 그 분이 성신이죠. 성령. 성신께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내 자신을 현실 아니고 현실 바깥에서 내 자신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참 감사해요.

그래서 이 이야기하면서 제가 주로 쓰는, 전에 썼던 예가 뭐냐 하면, 화투장 48장을 언급하지요. 화투 그림을 보면 1월은 송학(松鶴:솔), 2월은 매조(梅鳥), 3월은 벚꽃 이건 알 필요 없는데, 바깥에서는 성령 색깔 아름답지요. 그런데 화투를 뒤엎어보세요. 칙칙한 뒷면, 똑 같아요. 밤에는 얼룩소가 없다는 말이 있지요. 밤 되면 흰 소인지 얼룩소인지 몰라요. 시커머니까. 그래서 요한복음에 뭐냐 하면, 예수 믿지 않으면 전부다 어두움이 되는 거예요. 도토리 키 재기 아무 의미 없어요. 개체자로 모두 어두움이에요.

빛은 오직 예수님만 빛이에요. 그 안목이 그냥 예수님 안목으로 머물렀던 그 안목이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시선과 안목이 세상 바깥의 안목이 난데없이 내가 나를 보는 안목으로 바뀌어버렸으니까 그걸 호명입니다. “누구야? 죄인 있나?” “죄인 여기 있나이다.” 야!! 이건 싱글 벙글. “죄인 여기 있나이다. 보내려면 저를 보내소서. 어느 골짜기라도 가겠나이다. 어떤 수모도 제가 감당하겠나이다. 주의 기능만 저한테 적용시켜주옵소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니가 죄 있다 하니까 니가 의인이고, 옆에 있는 성전에 있는 바리새인은 뭡니까? 바리새인은 지가 뭔데 비교해요.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그 말 안해야 되는 건데.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드리고. 아, 그 말해서는 안 되는데 그 말을 해서 실수해서 지옥가고. 

그런데 세리는 뭡니까? 아무도 비교하지 않아요. 왜냐, 주님이 나를 밑에서 나를 째니까 잘나고 잘난 나를 째버리고 현실 바깥에서 제대로 현실을 보는 안목으로 나를 집어넣는 주님의 기능을 발휘해버리니까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죄인 되었으니까 이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말이죠. 그 점에서 율법은 자, 이제 마지막으로 율법이 그럼 어떻게 해석됩니까? 하는 율법을 지금 못 지킨다 하니까 지금 제가 하는 거예요. 율법을 못 지킨다, 그러면 못 지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율법은 어떻게 지켜야 지키는 겁니까? 그것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율법 지킨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아무도 없는데. 그럼 천국 못가네. 천국 갔는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천국 갔잖아요. 율법도 안 지켰는데 천국을 가?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아브라함은 우리하고 똑같아요.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에요. 똑같은 사람인데, 똑같기 때문에 무엇을 행해야 됩니까, 를 늘 생각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뭘 행해야 됩니까, 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금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 그 벌어진 일이 지금 아브라함 인생을 통해서 뭔가 티가 나야 되겠지요. 그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내려갑니다. 이집트에 내려갈 때에 자기 아내 사라가 이뻤던 모양입니다. 그 사라를 누가 건드렸습니까? 애굽의 바로 왕이 건드렸지요. 그럴 때 거기에 대해서 남편이 용감하게 나섰습니까? 안 나섰습니까? 이건 완전히 신났지. 아내 팔아먹고 이게 가부장제도 아닙니까. 아내 니 때문에 내가 살자. 나는 복의 근원이니까 나를 챙겨야지 이리 된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우연한 개입이 와요. 아까 이야기했던 밑에서 째고 올라오는 거예요.

지금 애굽의 왕을 누가 힘들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이 간절히 기도했습니까? 우리 마누라 조지니까 어떻게... 이거 없잖아요. 지금 지는 지 이익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누가 개입했어요? 주님이 개입했지요. 그래서 건드리지 아니하면 신자가 아니에요. 뭔가 주님이 내가 생각한 인생을 주께서 째고 들어와서 뭔가 건드려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항상 주의 뜻이 내 뜻을 위반하면서 내 뜻을 부담스럽게 만들면서 째고 들어올 때에 이미 주도권이 나로부터 나는 피동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주께서 하는데 주께서 그냥 벌어진 게 아니고 그것이 주의 언약대로 그래요. 그러면 주의 확정된 언약이 그냥 일시적인 나를 얼음 붓듯이 나를 덮쳐버려요. 덮쳐버리니까 그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냥 빈손으로 나왔습니까? 막대한 부자 되어서 나왔어요? 그 부자 된 재산은 누구 덕분에 얻은 겁니까? 주님 덕분에 횡재한 거죠. 양떼가 많고 소떼가 많고, 너무 많아가지고 롯하고 가위바위해가지고 니 좌하면 우하고, 니 우하면 좌할게, 해가지고 나왔잖아요. 하나는 헤브론으로 가고 한쪽은 사해바다로 해서 갈라졌다고요.

그러면 결국 아브라함이 율법 지켰습니까? 뭘 지켰는데? 아브라함이 뭘 지켰어요? 로마서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행한 것도 없는데 뭐가 됐어요? 의인됐지요. 무슨 이런 난리가 다 있습니까? 동전 찾는데 커피가 나왔어요. 이거 뭡니까? 뭐 착해보려 했는데 벌써 착함이 나왔어요. 결국 이것은 뭐냐, 인생이 애초부터 내 인생이 있었다? 없었다? 없었던 거예요. 예수님 인생을 카피해서 아브라함이 되었고, 아브람을 예수님이 중간에 개입해가지고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하신 거예요.

야곱이란 인간도 없어요. 순서가 예수님이 먼저 계시고 야곱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타임 맞춰서 어느 때에 야곱을 태어나게 하시고 그 야곱을 타이밍 맞춰서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요소, 요소에 과정, 과정에 누가 개입했어요. 진짜 예수님이 개입을 하셔가지고 주님께서 만든 인생이 되는 거예요. 기능이 적용되는 인생 될 때, 그 아브람과 야곱이 우리와 똑같이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동지가 되는 겁니다.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걸 적용시킬 때, 내가 오늘 강의한 것은 중간에 지반이 갈라진다는 것, 갈라지게 되면 갈라진 자체가 어떻게 됩니까? 내가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죄인인 것을 알게 될 때 갈라진 거예요. 나쁜 짓해서 죄라 하는 것이 왜 나쁘냐 하면, 진짜 현실 바깥에 보면 십자가에서 보는 그 죄를 내 윤리적, 도덕적 감정으로 죄라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가리는 역할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다시는 내가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지, 다시는 술을 안 먹을게. 왜?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남을 용서해야지. 이게 왜 십자가 복음을 가리는 행위이냐 하면은 내가 생각한 착함을 가지고 주님의 거저 주신 의를 훼방하는 짓거리가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인생을 어떻게 사는가, 조심스럽게 살아요. 지난 오후 설교 때 인생 절대로 조심스럽게 살지 말라고 했지요. 조심스럽게 산다는 것은 신자 티가 안 난다 했지요. 조심스럽게 산다는 말은 “내가 예수 믿고 용서받았는데 여기서 삐꺽해가지고 다시 내가 죄를 지으면 지금 받은 복 다 날리고 다리 부러지고 교통사고 나고 또 있는 재산이라도 날아가게 되면 아휴 징계 받으면 나만 손해 게.”

또 성경 구절에 보면 먹는 걸 토하는 돼지를 봐라, 나오고 히브리서6장에 보니까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이게 전부다 공갈 협박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사는데, 조심스러운 그것이 주의 의를 훼방하는 겁니다.

반드시 잘해도 평소에 아무 일 없어도 죄인을 의인되게 하시는 주님의 일관된 주님의 용서와 사랑의 작업으로서 지금 하나의 주님의 쟁반과 그릇으로서 주님께서 얼음을 담고 있는 과정입니다. 오늘밤에 주무실 때에 오늘 하루도 더운 하루도 주님께서 그렇게 인도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로 인생 끝났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지 안 뜰지는 그것은 알 수 없어요. 그냥 주의 은혜가 되면 아침에 또 눈 떠가지고 주의 인생이 또 시작되는 겁니다.

그저 부탁하는 것은 죄만 지으세요. 그냥 죄만 지으면 돼요. 반복해서. 목사님 같으면 심방하는 죄, 기도하는 죄, 주여 기도하는 죄를 쉬지 않게 하소서 하는 죄, 설교하는 죄, 성경 열심히 공부하는 죄, 거리에 있는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죄를 지으시기 바랍니다. 왜냐, 이미 우리는 이것 했어, 이 행동으로 의인되는 게 아니고 이미 그 의인됐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행동하는 것은 내가 한다는 의와 주님의 십자가의 의와 어느 것이 진짜 거룩의 영광이 되는가, 주님이 주신 그 십자가만이 영광이고 그게 거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가지고 노시는 주님, 마음껏 노셔서 나의 기쁨보다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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