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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가락강의
2015-07-17 00:28:48 조회 : 1818         
현재의 기능성 150716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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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218.♡.196.154) 15-09-14 05:33 
가락-요한복음7장20절(현재의 기능성)150716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7장19절요,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상당히 예수님께서 오버하신다는 느낌이 들지요. 20절에 보면,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앞에 뭐 하나 글자 붙인다면 “가만히 있는 당신을 왜 우리가 죽인다고 당신은 그렇게 혼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것 봐! 우리는 점잖은 사람이야. 당신이 너무 지레짐작 그렇게 오버해서 스스로 그렇게 자꾸 몰아세우지 마세요. 우리는 당신을 건드릴 의사도 없고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지요. 누가 봐도 유대인들의 말이 맞고 예수님께서는 뭔가 지금 본인이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지요.

그래서 제가 시작할 것은 보는데 왜 안 믿어지느냐, 예수님을 마주보고 대화를 하잖아요. 대화를 하는데, 본다는 이유 때문에 영 믿음이 안가. 차라리 예수님께서 구름 속에서 음성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아이고, 신기하다. 구름 속에 어떤 어르신네가 계시는 모양이다. 믿어야지. 저 구름 뒤에 있는 분을 믿어야지.” 이렇게 될 텐데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안 믿어져요. 너무 가까이 있어서. 너무 평범해서 안 믿어지잖아요. 너무 평범해서. 좀 멀찍이 떨어지면 신비감이나 흐르지. 완전히 신비를 삭제하고 코앞에 딱 등장하니까 목수의 아들, 요셉의 아들, 동네 집 누구 아저씨 아들, 방앗간 집 아들, 이런 식으로 있는 것처럼. 세탁소아들 이런 것처럼. 너무나 평범한 겁니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사람들도 이렇게 예수를 안 믿는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 말이지요. 그 당시 사람들이 보고도 안 믿는데. 우리가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술 하느냐, 믿는다는 이 근거가 이건 무지 무지 허술하지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지가 상상해서 얼마든지 예수를 조작해내가지고 믿습니다. 라고 지가 우긴들 “너는 믿는 거 아니야.” “너는 믿는 것 맞아.” 그 판정을 누가 함부로 내리겠습니까? 확실하게 믿는 게 맞아. 확실하게 아~ 이거 믿는 게 아니야. 라고 판정내릴 수 있는 그 위인이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다면 이것은 우리가 뭔가 예수님에 대해서 믿지도 않으면서 그냥 신비로운 분을 그냥 조작해내가지고 자기 미래를 보장받겠다고 이렇게 억지로 부리고 있지 않은지 우리가 어떻게 그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그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믿느냐, 안 믿느냐를 두 가지 던져요. 하나의 율법을 네게 주었다는 거예요. 율법을. 그러면 율법대로 받듯이 너희들이 나를 죽여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줬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동의합니다. “그래, 우리 율법 받았어.” “율법 받았지?” “그래, 받았어.” “자, 그럼 율법대로 나를 죽이는 것만 남았지.”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은 것이 어떻게 예수 당신을 죽이는 동기로 작용하는지 그들은 도무지 수용이 안되는 겁니다. 만약에 율법을 받았다. 자, 받았으니까 이 율법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가지고 예수 등장하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으라고 이렇게 분노에 끌어서 죽이게 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주신 율법 안에 이미 그 안에 힘이 담겨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를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성경책을 줬다는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논리가 그런 논리에요. 참, 터무니없는 논리지요. 이거 오늘날 교회에게 이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이 논리에 의하면 예수님을 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줬다. 이리 되어버리면 이 논리 속에 뭐가 빠졌냐 하면 “하나님 말씀 지켜서 구원받아야지.” 이 요구사항은 확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건 니 생각이고, 그건 우리 생각이고. 확 빠져버리는 겁니다. 쓸데없는 데 거기에 우리가 가미된 거예요. 그럼 방금한 두 문장을 합쳐봅시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니까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아, 율법을 줬으니까 율법을 지켜서 복 받아서 영생 얻어야지.’ 라는 생각이 합쳐져서 누구를 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게 만들었다는 거죠. 그럼 이 논리로 계속 가봅시다. 계속 가버리면 뭐냐 하면 예수님은 맞아죽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사전 작업이 뭐냐, 나를 때려잡으라고 뭐를 줬느냐 율법을 먼저 준겁니다. 율법을 주니까 그들의 반응은 이제는 스스로 구원될 수 있네. 잘만 지키면 구원받겠다. 라는 것이 힘으로 작용해서 어떤 힘인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살해해야 될 힘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누가 누구를 죽인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뭐라고 반발합니까? 나는 당신을 죽일 의사가 없다. 이렇게 반발하지요. 자, 그러면 빠진 게 있는데요, 유대인들은 나는 당신을 죽일 의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나를 죽이게 되어있어. 그게 주님의 스케줄이야. 죽게 돼 있어. 그런데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양자밖에 없는데, 유대인 입에서 뭐가 툭 튀어나왔어요.

그게 바로 20절입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여기에 귀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요. 귀신. 유대인들의 생각을 따라 가봅시다. 우리 유대인들은 예수 당신이 뭐라고 당신이 대단한 존재도 아닌데 당신을 죽이려하느냐, 우리는 당신을 죽일 의사가 없습니다. 없는데, 당신은 율법을 받아놓고 율법 받은 티를 내는데 그 율법으로 인하여 필히 당신들은 나를 죽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 서로 소통이 안 되지요. 안되니까 유대인들이 대화가 안 된 이유를 거기다가 첨가합니다. 뭐냐 하면 우리는 귀신이 안 들고 맨 정신인데 예수 당신이 귀신 들렸기 때문에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라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님 플러스 뭐가 있다? 예수 + 귀신이 있다. 예수님에게 귀신이 있는데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나온 결과가 뭐냐 하면, 바로 율법이 있는 우리를 이렇게 모함하고 공격하는 성향을 보인다. 그렇게 유대인들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 플러스 귀신 들리면 그래서 공격하게 되어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말하는 귀신의 기능은 뭡니까? 귀신의 하는 일은 애매하고 잘못이 없는 사람을 죽이는 기능, 죽이는 기능이 뭐가 한다? 귀신이 한다 이 말이죠. 귀신이라는 것은 상당히 좋은 쪽이 아니고 나쁜 쪽에 속하지요.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이미 귀신들렸다고 인정을 했잖아요. 규정을 했으면 유대인이 보기에 예수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지요. 귀신과 함께 나쁜 사람이지요. 나쁜 사람이 계속 덤벼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죽여야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귀신 들렸다는 말은 우리 유대인 입장에서 당신을 죽여도 우리 잘못 아니고 그 죽이는 근거가 뭐냐 하면 우리는 율법에 의거해서 율법대로 당신을 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당합니다. 라고 유대인들이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의 본인의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 재미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했잖아요. 율법을 받았으면 율법의 티를 내는데 그게 바로 나를 죽이는 쪽으로 모든 스케줄이 진행된다. 예수님께서 언급을 했잖아요. 그 언급한 그 자체가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이 언급한 것도 대라 말이죠. 쉽게 말해서 “아, 율법 받았다. 어떻게 지키지?” 그럼 예수님은 “아니야, 아니야 어떻게 지키지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내 말하는 거기다가 보태.” 그럼 뭐라고 보탤 것이냐, 우리가 율법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남은 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걸 보태라는 거죠. 그걸 보태는 게 뭐냐 하면 율법을 주신 취지라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논리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논리는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반드시 상대에게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의 율법완성에는 반드시 부정적 역할을 하는 상대자가 필요한데 상대자로 뽑힌 역할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유대인들인 거예요. 유대인은 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누구를 대표하느냐 하면 인간을 대표하는 겁니다. 어제 수요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이 미친 그 곳이 세상을 압축한 것이다. 독일군 모형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작전모의하면서 작대기가지고 밀고 전함, 잠수함, 탱크하고 그 조그맣게 만들어놓고 회의실 만들어놓고 모자 멋있게 쓴 독일장교들이 가가지고 회의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전 세계를 대표해요. 왜냐 하면 약속이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이 대변자에요.

이스라엘이 망했다면 어느 누가 그 자리에 가도 다 망해요. 누구도. 유대인만 율법 받아서 그런 게 아니고 누구도 율법 받으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고 미워하게 돼 있어요. 율법 그 자체에. 그래서 이 점을 이제부터 난해해질 수 있는데요, 이 점을 우리가 생각할 때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율법을 발명하신 분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냐 하면 바로 성도가 돼요. 율법을 발견하면서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율법 주신 분이 예수님 맞지요? 라고 발명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지금 발명, 발견이라는 말을 유대인들은 사용하지 않지요. 왜냐 하면 율법을 성취시키는 문제는 이미 주신 분은 하나님이고 그 율법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이제는 율법 받은 자기가 잘 지키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고 이미 모든 결과는 누구 손에? 자기 손에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유대인, 유대인 하지만 사실은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거든요.

어느 사람도 사도바울의 편지 보고서 하라, 하라했는데 그 하라, 하라는 것을 전혀 고려치 않고 막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뭔 행동할 때  “참, 성경 말씀에 하지 말라했는데 이래도 되는가?” 전부다 뭔가 자제를 하고 조심하고 “그래, 이 말씀 어기면 주께 영광을 못 돌리는 거야.” 이렇게 조심들을 하겠지요. 그게 유대인이라니까요. 그게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에요. 지시와 명령 줬는데 그걸 깡그리 무시한다? 그것은 본인의 양심이 허락지 않지요. ‘내가 이래서 하나님의 백성 맞아? 이걸 무시하고 백성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양심이 이야기한다. 이건 말이 안 돼. 적어도 은혜를 받았으면 값은 해야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우러나게 되어있어요.

그 선배들이 유대인이에요.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자신감에 넘쳐납니다. 험 잡으려면 험 잡아. 우리는 완벽에 완벽을 기했어. 완벽에 완벽으로 기했으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자, 우리는 완벽하다. 그러면 이 완벽한 근거를 가지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제는 평가에 나서고 그리스도를 재단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심사에 나서겠지요. 왜? 자기는 완벽하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말합니다. 그 완벽에다가 뭘 보태느냐 율법을 발명하신 분을 그 완벽이 살해한다는 내용을 거기에 첨가하라는 거예요. 그걸 첨가해버리면 결국은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을 우리 손에서 죽이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을 받은 것을 인정한 셈이 되잖아요. 그걸 유대인들은 용납을 못하는 겁니다.

발견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요 점을 한 번 더 생각하면서 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중국의 동양 의약에 내경이라는 거기에 보면 대둔 혈이 있어요. 이 대둔 혈이 나온 경위가 뭐냐 하면 어떤 주추시대에 유명한 목수가 임금님이 궁궐을 지라하니까 궁궐을 지으러 갔습니다. 목수가 아니고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하는데 두통이 굉장히 심했어요. 두통이 굉장히 심했는데 그래도 나무를 하다가 다리를 다쳤어요. 다리를 다치는 순간 머리는 안 아픈 거예요. 다리를 다쳤으니까 머리가 안 아파. 좀 있다 보니까 또 머리가 아프고. 우연이겠지. 그 다음에 또 발을 다쳤는데 순간 머리가 안 아파요. 그 이야기를 했더니만 나중에 시험을 해봤어요. 침으로 자기 발을 딱 하니까 머리가 안 아픈 거예요. 그럼 이건 뭡니까? 발견이죠. 발명 아니지요. 숨어있는 내용이 우연히 그것을 발견한 거죠. 혈기라고 하는데 한의학에서. 경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하여튼 혈기를 발견할 때 그게 발견입니다. 발명 아닙니다. 발을 찔렀는데 머리가 안 아프다는 그러한 방법은 누가 발명했어요? 그건 중국 사람은 몰라요. 하나님을 안 믿기 때문에 모릅니다. 하여튼 누가 발명했는지 몰라도 돼요. 자기만 편하면 되니까. 건강하면 되니까.

또 한 가지 발견의 예를 들어봅시다. 루프라이라는 독일 사람이 디프테리아균을 발견했어요. 디프테리아균이 있는 사람의 혀를 보니까 하얗게 점막이 올라가 있는 거예요. 점막을 긁어가지고 현미경으로 보니까 뭔가 파란색 막대기 모양의 물체가 있더란 말이죠. 그래서 분명히 이것이 균을 일으키는가 싶어서 배양을 했어요. 배양을 해놓고 그 배양된 걸 가지고 토끼에다가 이걸 주사를 해놔 봤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토끼가 잘 뛰어놀아. 그래서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이렇게 생각했는데 토끼가 갑자기 헉헉거리며 죽었다 말이죠. 배양된 것을 토끼한테 심어주니 토끼가 갑자기 죽었어요. 아하! 그러니까 이게 귀신의 장난이 아니고 병의 원인은 박테리아의 푸른색 균에 있다. 그것을 발견해가지고 거기에 면역체를 해가지고 디프테리아균을 면역을 했다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뭔가 나쁜 균을 배양을 해서 토끼한테 집어넣어줬지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꾸 유대인에게 시비 거는 것은 유대인들은 토끼에요. 자기 속에 뭐가 들어있는 줄 몰라요. 자기는 합리적이고 율법 줬으니까 우리를 대표해요. 말씀을 줬으면 사도바울의 권면 있잖아요. 사도바울의 편지 나온 거 뭐 하라, 어떻게 섬겨라, 서로 사랑하라, 분을 품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고 온갖 명령을 받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그 만큼 은혜 받아서 이제는 말씀 정도는 지킬만한 그런 역량이 있다고 자부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유대인들은 구원받는 것은 은혜로 받고 영광 돌리는 것은 행함이라 생각하거든요. 왜냐 하면 홍해가 갈라질 때 그들은 거저 나왔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저 구원하신 것은 이제 그 홍해 건너가시고 시내산에서 뭘 줬다? 십계명주고 말씀 줬잖아요. 이건 누가 봐도 딱 뭡니까? 은혜 받았으니 이제는 은혜 받은 티를 내서 영광 돌리면서 나한테 은혜 주신 것에 고맙다고 감사하게 되면 이것은 내 백성이라는 그런 공식이 딱 나오잖아요. 여기에 백 명 천명의 사람이 모여도 전부다 고개 끄덕이고 순서상 그래요. 순서상 홍해다음에 시내산 십계명. 이건 누가 봐도 그 순서잖아요. 그 순서를 바꾸는 아이디어는요, 예수님 안 만나고서는 아무도 몰라요. 대표로 저주받으라고 율법 줬다는 사실을 홍해 건너고 했다는 사고방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생각 아무도 안 들어요.

구원을 할만 해서 구원해줬고 그러니 구원받는 것은 기적이고 그 다음에 기적 받았으면 그냥 입 닦고 이리 있으면 못된 인간이잖아요. 이제는 말씀 주신 거 가지고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라고 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살면 그게 영광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토끼 속에 있는 디프테리아 병균임을 아무도 모른 거예요. 그게 바로 죄의 숙성입니다. 균을 배양하는 거예요. 어디 안에서? 유대인 안에서 균을 배양한 겁니다. 그게 뭐냐, 죄의 발견입니다. 누가 발명했어요? 주님이 발견한 그것을 죄를 그 인간에다가 심어놓고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할 때 멸망했겠어요?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할 때에 멸망했겠습니까? 멸망의 최종의 마지막 자리가 어디입니까? 십자가. 예수님을 죽이라고 그리스도 대신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할 때, 그 때 그들은 자신의 극단을 드러낸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3장1절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 율법으로 의를 얻을 것 같으면 십자가는 헛 죽은 것이다. 십자가에 헛 죽은 것이 아닌 것을 너희들이 안다면  율법은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우리는 죄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될 것이다. 그런 쪽으로 이야기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로운 가능성이 전혀 없지요.

하나님께서 십자가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다 죽은 거죠. 예수님이 죽을 때,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니체가 뭐라고 했습니까? 신은 죽었다. 했잖아요. 니체는 뭘 모르는가 하면, 신이 죽었을 때 본인도 죽은 걸 모른 거예요. 신을 죽여 놓고 자기만 살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신이 죽을 때 인간도 같이 죽은 거예요. 다 죽은 겁니다. 하나님은 죽음 자체로부터 그게 처음 자리에요. 홍해가 시작이고 율법을 준 게 아니고 십자가가 처음자리이고 십자가로부터 거꾸로 진행되는 겁니다. 십자가로부터. 십자가로부터 거꾸로 흘러가는 거예요.

갈라디아서3장1절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하는 그것을 저는 영어로 한 번 쓰겠습니다. 쉬운 영어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부담 주는 영어는 쓸 줄 모릅니다. now 거든요. 현재에요. 현재. 그런데 인간은 현재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인간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현재라고 해도 쪼개고 분할이 가능해요. 짧은 기간도 쪼개버리면 이건 뭐냐 하면 과거와 미래로 또 쪼개져요. 과거와 미래뿐이지 현재는 인간이 다룰 수가 없습니다. 현재를 어떻게 인간이 소지합니까? 그 사이에 끼어있는데.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있는데. 현재에 속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더 이상 과거와 미래가 날아가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now 현재에 속한 사람은 더 이상 과거와 미래에 어떤 행동도 우리한테 어떤 영향력을 미치지 않습니다. 영향력이 우리한테 행세하지 못해요. 다른 동네로 붙잡혀버렸어요. 붙잡혀서 다른 동네로 가버렸어요. 영원한 현재의 영향을 받아요. 그런데 과거와 미래의 영향을 받게 되면 계속해서 우리는 시달리게 되는 겁니다. 그걸 지난 낮 설교에 빈 페트병 찌그러진다고 했잖아요. 완전히 찌그러지듯이 찌그러지는 거예요. 실제로 우리가 살아갈 때에 보세요.

“아, 과거에 내가 이런 희망과 기대가 있었는데 왜 내 뜻대로 안되지?” 이게 뭘 시작하는 겁니까? 과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과거부터 시작해가지고 그러니까 미래라는 것은 뭐냐, 미래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과거등장하면 동반해서 미래도 같이 등장해요. 앞으로는 잘할게. 앞으로는 잘할게 라는 말은 뭐냐 하면, 무엇을 전제로 깔은 거예요? 과거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안 드니까 그걸 보충하기 위해서 미래라는 시간을 내가 도입해서라도 내 자존심 회복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것은 뭐냐 과거의 미흡하다는 것, 판정은 누가 내립니까? 이게 과거에 속한 과거의 열매인 내가 과거를 판정하니까 세상에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이게 왜 반칙이 되는가 하면 전체 안에 내가 부분이 있으면서 부분이면서도 전체가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객기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이죠. 전체를 말하려면 전체 바깥에 나가있어야지요. 자기가 전체를 보는 것은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 범위 내에서만 포착된 그것을 가지고 마치 전체라고 우기는 게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인간의 현실관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은 구겨져야 돼요. 전부다 이건 구라입니다. 전부다 거짓말이에요. 이 선입감이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now, 현재에 속한 분이 예수님이고 시간 속에 속한 자는 유대인이고, 둘이 만난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는 반드시 나를 죽이게 되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율법을 준 이유라는 거예요. 나를 죽이라고 미리 당겨서 율법을 줬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토끼 안에 디프테리아균을 배양해가지고 집어넣은 거예요. 토끼는 까불지요. 깡총 깡총. 그런데 토끼가 90년 살다가 야들아! 건물은 큰애가 하고 땅은 둘째가 하고 셋째는 내 빚이나 갚아라, 하고 이런 식으로 유언하고 죽을 때 그게 토끼입니다. 돌아가신 그 아버지가 토끼라니까요. 돌아가신 아버지만 토끼인줄 알아요? 우리는 토끼새끼이고.

다윗이 말하기를 모친의 죄가 내 속에 배양돼있는 겁니다. 이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죄 지으라고 줬기 때문에 내가 이거 따로 뽑아낼 수 없어요. 왜, 우리는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난 입장에서 나 말고 따로 분리가 되어버리면 나는 원래부터 나쁜 인간 아닌데 내 속에 요런 나쁜 게 들어있기 때문에 내가 나쁘다, 되어버리면 이게 온전한 죄가 아니고 죄도 있고, 의도 있고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런데 십자가는 뭐라고 합니까? 죄가 있고,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십자가를 져버리니까 몽땅 죄야. 내가 나쁜 짓 안하면 착한 사람이고 의롭다 한 그것이 십자가 앞에 딱 서버리면 몽땅 죄가 되어버려요. 몽땅. 그 내용이 율법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너희가 간파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왜 간파하지 못했을까요? 인간은 시간 속에 과거와 미래라는 역사 속에 잠겨있어서 역사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사를 못 벗어나요. 그러니 역사라 하는 것은 이것이 솔솔 잡아당기거든요. 역사를 잡아당기면 역사를 처음시작한 분과 역사를 마감하시는 그 분의 움직이는 선반위에서 역사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탄자를 끌어당기면 양탄자에 있는 무늬가 있잖아요. 양탄자의 무늬가 인간의 문화고 문명이에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라는 책에 나와요.  모든 문명과 문화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고 자연의 의지라 합니다. 문명이란 날씨와 기후로 끝. 인간이 몇 층을 짓고 어떤 공업화를 해도 아무리 문명을 발달시켜도 그것은 아열대성 열대성 저기압이라든지 그 다음에 이상기후 온난화 그리고 지진판 갈라지면 다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바로 인간을 지배하는 그런 지진이나 가뭄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가지고 세상을 뒤엎어버리지요.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뭐냐 하면 바깥에 있는 것을 안으로 집어넣고 밑에 지편에 있는 것을 올리면서 인간 언어로 묘사한 것이 요한계시록이에요. 그러니까 바깥의 위에만 소통하는 언어가지고 인간 바로 밑에 있는 주님이 천사가 심판의 경우들을 묘사를 하니까 이걸 풀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풀어내는 방법은 뭐냐 하면 십자가와 함께 죽는 자만이 이것을 풀어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푸느냐 하면 예수님이 유대인을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자신의 뜻을 알려줄 때 반드시 나쁜 역할 하는 것 어떤 누가 짝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있어야 되겠지요. 인간들이 요한계시록을 마음껏 해석하게 하세요. 반드시 그게 필요해요. 맘껏 해석하게 해놓고 다했지! 했지! 그걸 뒤엎으면 돼요. 후라이팬에 해물전 할 때 한 번 튕겨가지고 엎으면 돼요. 엎어보면 그게 뭐가 묻었는가 하면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전부다 어린양의 피로서 해석하면 해석 다 온전한 해석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이후의 요한계시록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어떤 정보만 알게 되면 이 7년 대 환란 천년 후 무슨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던 이 환란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남을까? 라는 해석만 요한계시록에 가짜 해석으로서 범람하게 되고 그게 온갖 아이디어가 다 들어가요. 베리 칩이고 밸리 댄스고 간에 다 들어간다니까요. 거기에.

바로 그런 해석 때문에 누가 돌아가셨다? 밑바닥에 그 십자가 그리스도가 죽은 거예요. 그 해석은 뭐냐 하면 “신이시여, 내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거기서 나온 해석이거든요. 우리는 살려고 이 땅에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만든 인간 같으면 살려는 생각은 쑥 들어가 버리고 “제가 언제 주님을 죽였습니까?” 이 이야기만 나오면 돼요. “아, 이래서 죽였군요.” 라는 것을 사도바울의 권면과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요한복음을 통해서 “아, 우리가 유대인과 한패이군요.” 이걸 알게 되면 해석 끝난 겁니다.

바로 우리 손에 의해서 주님이 살해당했고 그것만 인정하는 사람만 건지시는군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공식이. “제가 주님을 죽였습니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게 나온 거죠. 왜 그러느냐 하면 제가 주님을 죽였습니다. 하는 것은 후라이팬 위에서 노는 게 아니고 주님이 십자가에 있던 그 밑에서 숨어있는 것에서 이게 바깥으로 바뀌면서 나온 고백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엎어져 자다가 휙 뒤집어져서 잔 게 돼요. 엎어져 잘 때는 온갖 것 가식적인 것들이 자기 덩어리에 장착돼 있지요. 헌금은 얼마 했고, 교회당 몇 개 세웠고, 설교 몇 번했고 다 있지요. 그런데 이걸 뒤집어버리면 바로 내가 행한 그것으로 인하여 그것이 나의 의라고 오해해서 예수님을 제가 모독했습니다. 하는 고백으로 뒤집어져 나오는 거예요.

방금 강의한 것을 한 가지로 이야기하면 뭡니까? 토끼다. 나는 토끼다. 그거면 돼요. 실험용 토끼는 그 안에 디프테리아균을 배양하는 하나님께서는 죄를 숙성하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신 겁니다. 아브라함이 언약 받고 난 뒤에 바로 가나안 땅에 못 살았습니다. 4대를 기다려요. 400년을 대기하고 있어야 돼요. 왜 대기해야 됩니까? 가나안 땅 원주민들에게 죄가 숙성되어야 되기 때문에. 죄가 숙성되어야 돼요. 숙성된 타이밍에 맞춰서 이쪽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다가 히브리인들을 끄집어냈잖아요. 그러니 죄와 죄인의 만남에서 누가 더 났고 누가 더 못 났고 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스라엘이 구원받습니까? 신명기9장5절,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6절,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성경을 보고 있는 누구를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지금 우리 자신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냐, 우리의 대표자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우리도 토끼거든요. 우리가 목이 곧은 백성이에요.

목이 곧은 백성이 헌금을 해봐야 목이 곧은 헌금 나오고, 기도해봐야 목이 곧은 기도 나와요. 백날 회개해봐야 목이 곧은 회개 나온다니까요. 구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신약에서는 이것이 더 깊이 들어가 버립니다. 구약에서는 자꾸 뭘 주는가 하면 장래의 어떤 가능성을 비취는 것 같지만, 신약에 오면 시간 전체를 통째로 했기 때문에 내일 하는 게 없어요. 지금이에요. 지금. 지금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야. 구약에서 뭐라고 합니까? 지금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야. 앞으로 니가 똑바로 안하면 니들은 다 진멸해. 라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신명기에 보면 어떻게 되어있는가 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했잖아. 너가 내 말 안 지키면 너가 이 땅에서 저주 받는다고 이야기했지? 과연 너희들은 진멸당할 것이야. 라고 이야기해버려요. 신명기 끝에 보면. 성경이 뭔가 여유를 좀 줘야 되는데 이미 결론을 내려버렸어요. 너가 아무리 애써도 너는 결국은 이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제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명기 끝에 나와 있어요.

결국은 너희가 끝에 나왔을 때, 이렇게 이야기해라. 우리가 쫓겨남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그렇게 고백해라. 마치 이스라엘이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너의 운명을 너희 스스로 경영하지 못하는 것이 이미 확신해진 것처럼 그렇게 미리 예언을 해버려요. 그 예언을 누가 비틉니까? 아무도 비틀 사람 없습니다. 비틀지를 못해요.

우리는 길을 찾지 마세요. 길을 찾는다는 자체가 객기입니다. 괜히 길 찾아봐야 그 길 아니거든요. 그냥 사시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기대와 뜻대로 안되게 해주시는 사태가 일어날 거예요. 그게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길 찾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뭐냐 하면, 우리의 희망을 박탈하는 것이 주님의 개입이에요. 우리의 꿈과 희망을 다 박탈해버립니다. 왜 박탈하느냐 하면 십자가는 영원한 현재잖아요. 그러면 5년 후도 십자가고 10년 후도 십자가로 구원받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뭐냐 하면 끝에 가도 십자가 은혜입니다. 그 십자가가 은혜라는 것을 미리 우리가 여기서 우리가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2014년도에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우리는 또 생각해요. 십자가 은혜 알았으니까 이제는 성령 받았으니까 바르게 살자, 이리 되어버려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십자가 이후에 십자가 의미가 날아가 버려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결국 어떻게 살던 결국은 십자가 은혜밖에 없다면 2014년도에 일어났던 이런 사고방식을 여기서 삭제시키고 박탈하는 작용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차피 마지막에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잖아요. 그런데 그 은혜를 미리 우리가 당겨서 받아버리면 그 십자가 은혜를 받아버린 나, 나 자신을 긍정해버리는 그런 오류가 돼요. 따라서 십자가라 하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을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피와 살로 구원했다. 이게 십자가잖아요. 그렇게 되려면 계속해서 남아있는 게 뭡니까? 십자가 남기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여기서 계속 삭제당하는 일이 일어나요. 그럼 뭘 삭제하느냐, 삭제할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삭제할 것이 우리가 마지막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삭제당하는 게 뭐냐, 주 앞에 삭제 당할 것만 이제는 만들어내는 업무만 남아있는 거예요. 마음대로 사세요. 어차피 삭제 당할 건데. 고상하게 산다고요? 그것도 삭제 당해요. 막 산다고요? 그것도 제거당합니다.

제 논리가 좀 이상하게 보입니까? 저는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십자가 은혜를 이제 알았잖아요. 고 안 거 내일되면 삭제당합니다. 십자가 은혜를 알았다는 것이 어디에 모아지느냐 하면 십자가 은혜를 알았으니까 십자가는 남겨두고 알게 된 나를 내가 귀하게 여겨버려요. ‘아, 십자가 은혜를 알았으니까 나는 너무 중요해.’ 그래 버리면 십자가를 누가 가리느냐 십자가 은혜 받은 내가 가려버려요. 은혜를 받았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제 복 주시겠지. 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복이 뒤틀어지면서 “이건 뭡니까? 하나님! 이래가지고 동업하겠습니까? 왜 이러십니까? 주께서 힘을 팍팍 실어줘야 복음을 전하던지 하지. 이렇게 협조안하시면 제가 무슨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라고 나올 때 그게 진작부터 삭제 당해야 될 죄에 한목에 포함이 돼있었는데 그것은 과거에는 그런 일이 때가 아직 안돼서 안 생겼어요.

십자가 은혜 받고 난 뒤에 새로운 죄가 나왔기 때문에 삭제될 죄가 주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또 만들어냈어요. 십자가가 자꾸만 뭘 만들어내는가 십자가가 제거될 죄를 만드는 그러한 현장을 하나님께서 성도를 통해서 계속해서 가게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주께서 원치 않는 길로 계속가게 만들어요. 그렇게 되면 이 말은 뭐냐, 미래라 하는 것은 과거와 동반해서 같이 와요. 과거 등장하면 반드시 미래가 있게 돼있어요. 인간의 현재는 없어요. 요거는 과거고 요거는 미래고 그러면 현재는 그 사이에 있잖아요. 그 사이가 몇 센티 돼요? 그 사이해도 사이를 또 잘라버리면 사이는 그냥 사이일 뿐이지 아무 면적이 없어요. 폭이 없다니까요.

그냥 두 개의 대립되는 시간적인 만남의 선이지 거기에는 폭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과거와 미래의 만남이지 거기서 그걸 따로 핀셋으로 현재를 뽑아내는 순간 이미 그건 과거가 돼버리니까. 생각해보면 맞는 이야기라니까요. “그래, 이게 현재야.” 하면 벌써 과거가 되어버렸는데. 현재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현재는 주님만 현재지 우리는 현재에 들어갈 수 없어요. 폭이 있어야 들어가지요. 우리 5분 동안 현재로 합시다. 말도 안 되는 순간이에요. 5분 동안 현재는 없어요. 주께서는 날마다 현재로 만들어내지요. 날마다. 과거에도 주와 함께 있으니, 그게 과거에 주와 함께 있다는 것도 현재고 5년 뒤에 주와 함께 있으면 5년 뒤의 우리의 미래가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는 그건 현재에요.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일 때는 과거를 생각하지 마세요.

“과거에 말이야. 내가 예수 믿기 전에 과거는 말이야.” 이리 되어버리면 그건 현재가 아니고 내가 스스로 미래라고 그걸 브랜드 붙이는 셈이 되니까. “내가 그 땐 이 미래를 몰랐지.” 하지 말고 “이 현재를 몰랐지.” 그러세요. 내일되면 또 주님 주신 현재라는 핀셋에 같이 또 있습니다. 현재는 무엇을 삭제한다? 과거와 미래를 삭제한다. 왜 삭제하십니까? 과거 생각하지 마라. 과거 생각하지 않으면 뭐가 날아가요? 미래도 같이 날아가 버리지요. 그래서 뭡니까? 성도는 과거를 생각 안하니까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고 불안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깜짝 깜짝 경기들 일도 없고, 남편이 집에 오면 누구세요?

“내가 과거에 미안해. 내가 술 먹고 때렸잖아.” “언제 때렸는데요? 저는 기억나지 않는데요.” “앞으로 잘할게.” “뭘 앞으로 잘해? 지금 현재만 생각합시다. 앞으로 나는 안 믿어요.” 미래 큰소리치는 인간 안 믿고 과거의 내 해꼬지 한 것을 잊어버렸으니까 나한테 뭐가 없습니까? 복수심이 없지요. 복수심이 없으면 몸둥이가 제로에요. 존재의 가벼움. 복수가 없으니까. “니 한 번 봐라. 내가 때려죽일 테다.” 이게 없으니까. 갑자기 뭔가 텅 빈 것 같아. 다이어트 중 이런 최고의 다이어트가 없어요. 속이 텅텅 비어있으니까. 바나나, 가슴살 안 먹어도 돼요. 복수가 없으니까. 성경에 보세요. 복수는 누구한테 맡기라 했습니까? 복수는 현재한테 맡겨야지. 왜냐, 복수는 현재로 하기 때문에. 나의 과거에 입각해서 복수하지 않거든요. 주님이 복수해요. 왜냐 하면 그 때 일어난 일이 주님이 알아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때 현재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복수도 그 때 현재에 가서 일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첫 째 강의한 것은 못 알아듣기 위해서 한 겁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도대체. “왜 잘했는데 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느냐. 앞으로 잘할 건데 말씀대로 잘 살 건데 협조하지.” 일체 없어요. “니는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야.”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8.♡.196.154) 15-09-14 05:34 
가락-요한복음7장20절(현재의 기능성)150716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하고 대화가 소통이 안 되니까 유대인들은 뭘 집어넣는가 하면 당신은 귀신들렸다 했어요. 귀신들렸다. 자, 이것을 통해서 유대인과 예수님 사이에서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의사소통이 안 되지요. 의사소통이 안 되는데 안 되면 관계가 끊어져야 되는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줬다는 것은 유대인들은 알지 못하는 다른 관계가 다른 영적인 요소가 거기 들어 가있다는 뜻이에요. 예수님과 인간인 유대인 사이에 유대인들은 어디에 매여 있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8장에 보면 뭐라고 나옵니까? 너희 애비는 마귀니라. 귀신, 마귀.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냈었으니까 마귀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과 유대인사이에 소통이 안 되니까 유대인들은 뭘 인정하느냐 하면 예수님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귀신이 예수님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내 쪽에 있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그 생각은 못하지요. 그 생각을 못하잖아요. 그 생각을 못하고 귀신이 어느 쪽에 있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귀신은 예수님 쪽에 있다고 이야기했지요. 요한복음7장20절에 있다고 했잖아요. 있다고 했으니까 예수님에게 있다고 한 그 자체를 자체가 뭘 유발하는가 하면 죽음을 유발하지요. 논리로 보면. 귀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너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 이리 되어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풀을 때는 인간 대 개체로 풀을 수가 없고 귀신과 영의 세력을 도입해야 문제가 풀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영의 도입을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하면 돼요. 영어로 하겠습니다. to green과 green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to green이라 하면 푸르러지다, 이고 green은 녹색이라 하지요. 이게 뭐냐? 녹색이다. 이렇게 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뭐는 포착이 안 되는가 하면, 푸르러지다가 포착이 됩니까? 안 됩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동사로 상처를 입다, 나는 어떤 벌을 받는다, 아이고 내가 왜 자꾸 젊어지지, 이런 것은 반드시 그런 말을 그냥 표현을 못하고 누가 붙어요. 누가? 누가 젊은데? 무엇이 푸르러지는데? 그러면 푸르러진다 자체가 강조되지 못하고 나무가 푸르러진다. 나무에다가 초점을 해버려. 그럼 나무는 뭐냐 하면 이것은 하나의 개체가 됩니다.

나무가 푸르다, 하늘이 푸르다. 이리 되어버리면 이건 하나의 개체가 되거든요. 개체가 되어버리면 이건 뭐냐 하면 바로 영적 세계와 표현이 안 되고 끊어져버려요. 지금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가 하면 나도 인간이고 너도 목수의 아들이니까 다 같이 인간이네. 인간 대 인간은 개체 대 개체잖아요. 그러면 남의 마음을 압니까? 모릅니까? 인간은 자기 마음을 확대할 줄밖에 몰라요. 남을 타자, 타인하거든요. 남을 타인으로 볼 때는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게 아닙니다. 저 사람을 내가 생각하는 주관 속에다가 나를 전환시켜서 형태 바꾸어서 일방적으로 평가를 해버려요. 그럼 나의 확산이 돼버리는 겁니다.

“우리 목사님은 참 좋아.” 그건 니 생각이고. 우리 목사님은 참 좋다고 했는데 갑자기 설교 시간에 누구를 거론해서 실명을 거론해가지고 제대로 신앙생활 안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삐져가지고 그 사람 교회 안 나오지요. 그 목사는 어때? 그 목사는 사기꾼이야. 대박 딴 소리 나온다니까요. 왜, 공개적으로 욕했다고. 그럼 그 전에 우리 목사님은 참 좋아, 했던 건 뭡니까? 그건 지 생각이지요.

이 개체라는 것이 옛날 중세시대 때는요, 개체가 그냥 개인이라는 게 없었어요. 중세에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과 관련된 개체였습니다. 그걸 신이 지배하는 세계에요. 그런데 뉴턴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 개체가 뭐로 바뀌는가 하면 이게 주체가 되는 겁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는 스스로 반성하면서 알게 된다. 이건 아니고, 이건 아니고, 이거네. 그러니까 내가 필요한 그것을 내가 수집하게 되면 나라는 존재에 내가 필요한 것들을 끌어 모은 그 집결, 그 단체가 곧 이게 나요, 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옛날에 중세 때에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신의 백성이에요. 저는 신의 아들이에요.” 이렇게 하잖아요. 지금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의사요.” 뭐가 빠졌지요? 신이 빠져버렸지요. 옛날 초대교회 때 “당신은 누굽니까?” “저는 집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사라는 은사를 주었고 하나님이 직분을 주셨습니다.” 선을 보러 가는데 선보는 머슴아에게 뭐합니까? “예, 교회에서 집사합니다.” 그거 묻는 게 아니고 직업이 뭐냐고 묻습니다. 아이고, 집사라는데. 집사가 직업이 아니잖아요. 직업이 뭡니까? 뭐해서 밥 먹고 살아서 내 딸을 밥 먹일 겁니까? 그걸 이야기하라니까요. 그럼 그 쪽에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집사가 중요합니다. 애 내놔도 괜찮습니다. 집사가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딸 가진 부모로서는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고 월급 얼마이며, 허우대는 멀쩡하냐, 집안 어떠하냐, 그걸 본다고요. 왜? 그런 것들 직업이 무엇이며, 아버지는 뭐하시며 이런 것들을 모아 모아서 한 쟁반에 담으면 그게 나가 되는 거예요. 한 쟁반.

자, 인간의 현재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이게 쟁반인데 여기다가 나는 뭐고 나는 대학 어디 나왔고 인물은 어떻고 요걸 모아 놓으면 요게 나가 돼요. 이걸 자아정체성이라 합니다. 이게 주체라 하는 거예요. 요 경계 바깥에 있는 걸 타자라고 해요. 남이라고 해요. 태두리 바깥이 남이 되는 거예요. 남이 요걸 갖고 있거든요. 그걸 집어넣으면 요게 다시 내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인간이 기도할 때, 현재 요거 요거 들어왔는데 요게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 요걸 더 주시옵소서.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교회에 충성할 테니까 요걸 주시옵소서. 이리 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은 성도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요걸 가져가고 요걸 내놓고 요걸 다가져가 버려요. 빈껍데기만 남았어요. 그러면 “에이씨~ 자살해 버릴 거야. 어떻게 내 인생이 이것만 남았어.”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죽어라! 죽어.” 하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처음부터 죽어 마땅한데 주께서 은혜로 이걸 줬는데 이게 있다 보니까 나는 처음부터 안 죽어야 될 사람으로 오해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단으로 몰아넣어서 그제 서야 집나간 이런 것들이 들어오게 되면 이게 뭐냐, 전부다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은혜가 되면서 내게 안돼요. 내 주체가 안 되고 이름을 바뀌어요. 내 이름으로 가졌던 것이 주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사도행전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집에 있는 내 자식들 다 주님께서 주신 겁니다. 고백은. 내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죽은 자에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서 주의 이름으로 산 자 되었지 내 이름으로는 여전히 죽은 자거든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전환된 채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으로 돌아왔습니다. 들어오면서 우리는 이 밑바닥에 있는 육신이 있잖아요. 아까 우리가 첫 째 시간에 배웠듯이 죄가 있다는 것은 무슨 의식을 갖고 있다? 시간의식을 갖고 있지요. 주의 은혜로 주셨으니까 “주여, 지난 3년 전에 은혜 받았습니다.” 이런 게 있다고요. 3년 전 은혜니까 이게 과거가 되어버렸지요. 3년 전 은혜는 과거되지요. 과거가 되면서 은근히 뭐가 걱정됩니까? 은혜주신 거 도로 가져가면 안돼요. 2년 후에 가져가시면 안 됩니다. 이러면 또 과거와 동반해서 뭐가 생긴다? 갑자기 미래가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욥은 봐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랑을 하셔요. “사탄아! 어디까지 봤느냐?” “온 세계 다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밤에 전투기 돌아다니지요. 사탄이라 보면 돼요. 온 천지에 밤에 전투기 훈련하면서 다니면서 다 보는 거예요. 요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주님께서 천사를 파견시킵니다. 스가랴의 예언대로. 스가랴의 예언을 보면 4종류의 천사가 땅 끝까지 가버려요. 가가지고 살펴요. 관리한다 이 말이죠. 모든 걸 관리하거든요. 할 때, 욥만한 믿음을 봤느냐. 봤지요. 천사는 귀신이라. 모르는 게 없어요. 북한 핵개발 했는지 천사는 다 알고 있어요. 완전히 다 알고 있거든요.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욥만큼 믿음 좋은 사람 없고  최고다, 라고 한 거예요.

이건 누구 이야기이냐 하면, 하나님하고 사탄과의 이야기에요. 욥이 그 이야기 물어봤습니까? 아니요, 사탄과 하나님과의 대화란 말이죠. 그 다음에 죽어나는 것은 누가 죽어나요? 괜히 가진 걸 다 가져와. 다 가져온 거예요. 그러니까 욥이 원인을 모르겠어. 원인을 모르는 거예요. 원인을 모르는데 결국 욥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가져가시려면 내 생명도 가져가지 이 빈 접시 뷔페도 아니고 이거 왜 놔둡니까? 차라리 이것도 주시지 마시지, 줘놓고 다가져 가버리면 너무 아픕니다. 아픈데 또 종기가 나요. 지금 욥이 해결이 안 된 것이 온 천지가 종기난 이 몸이 그 다음에 뭡니까? 이 몸이 몸으로 끝인 것이 아니고 이 몸이 곧 나라는 겁니다. 주체 의식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기 때문에 그 허상인 주체를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차라리 바보가 되면 좋겠는데. IQ가 한 30되는. 인간은 몸이 있으면 그 몸은 남의 몸이 아니고 내거라 해서 내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이런 푸르러지다, 라는 to부정사가 안되고 뭐가 되는가 하면 명사가 되어버려요.

명사는 구분이 된다니까요. 나라는 고유의 명사와 고유의 명사가 생겨버리면 이건 주체가 되고 바깥에 있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건 객체가 된다고요. 주관성, 객관성. 이건 어려운 말로 나와 타자 어쨌든 어려운 말이고 주체가 있다는 말은 내가 바라보는 타인을 객체성이라고 합니다. 내가 바라볼 때. 그러니까 이 객체라 하는 것은 전부다 일방적이지요. 나에게 부터 시작된 나의 일방적인 사고방식이 객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 객체를 가지고 다른 말로 하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게 현실이거든요.

그러면 현실이란 누가 들어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들어있고 삼위일체가 들어있어요. 그러면 내가 믿는 예수와 삼위일체는 다 누가 지어낸 겁니까? 내가 지어낸 거죠. 누구 좋아라고? 내가 내 몸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한 조치로서 성경에서 필요한 개념들을 내 이용하려고 뽑아낸 거죠. 예수님 고마워라~ 십자가 지시고. 아이고~ 성령도 고마워라, 은혜주시고, 하나님이 천지창조하시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믿는다는 것, 하나님, 예수, 성령, 전부다 이 주체를 더욱더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나의 객체의 대상으로 삼아버린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종교거든요. 이게 유대교라니까요. 못 빠져나옵니다. 이걸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이 만든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뭐냐 현실, 리얼리티 실제상황, 이게 실제라는 겁니다. 지 혼자 실제라. 자기 혼자 실제지요. 광주사태는 실제지만, 다른 강원도 할머니한테는 별로 중요하지를 않아요. 딴 데 바빠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전체가 있다면 전체에서 필요한 것만 자기의 현실이라고 따로 뽑아내기 때문에 옆 사람의 사정을 우리는 이해 못합니다. 옛날 우리의 전래동화에 이런 게 있어요. 양반 아들인데 꿈에서 여종을 본 모양이라. 아침에 일어나서 여종 불러서 나, 꿈에서 너를 봤거든. 니는 나를 봤느냐? 하는 거예요. 왜 같이 봤는데 왜 니는 못 봤다 하느냐, 이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지 꿈 꾼 것에 그런 억지를 쓰느냐고 하지요. 그 바보가 바보이야기입니까? 그게 우리 이야기에요.

“딸아,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제서 들어왔느냐?” 딸이 뭐라고 합니까? “누가 걱정하라고 했어요.” 이게 안 똑같은 이야기라. 누가 걱정하라 했어요.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왜 아들이 아버지를 안 좋아하느냐, 왜 딸이 아버지를 안 좋아하느냐, 딸이 투표해서 아버지를 안 뽑았거든. 누를 낳으라고 했어. 그걸로 끝나요. 뭐 유자식 상팔자 그거 진짜 보기 싫어했거든요. 제 아내가 보기 때문에 안보는 척하다가 보기는 보는데. 이건 도대체 자식보다 아버지가 더 개판이야. 아버지들이 전부 다 짐승이야. 자식을 나무랄 자격도 없어. 그 아버지에 그 자식들이에요. 전부 다. 완전히 가정이 괴물 같아. 그런데 그 가정이 우리나라의 표준적 가정이에요. 해결책? 없습니다.

복음을 알아야 해결책이지. 서로 서로 이용하는데. 지 필요할 때만 헤헤거리고. 필요 없을 때는 아버지 욕하고, 엄마 욕하고. 그동안 집에 괴물들 양성했어요. 왜 집의 자식들 그렇게 키웠느냐, 제가 주일 낮 설교했습니다. 분명히 주일 설교에서 언급했어요. 혹시 약점 잡힌 게 있어요? 부모는 자식들한테 약점 잡힌 게 있어요. 내가 자식들에게 해 준 게 없다는 약점. 약점을 잡혔다는 말은 나는 장점만 있어야 되는데 약점 잡혔다, 그런 뜻이거든요. 자기에 대해서 그렇게 착각들을 해요. 우리는 장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뭐라고 합니까? 우리의 약점은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고리라고 했지요.

기생 라합의 약점은 뭡니까? 거짓말한 거잖아요. 아브라함의 약점은 뭡니까? 지 자식인데 잡아 죽이려고 한 그게 약점이죠. 그런데 그것이 그 약점 투성이가 진짜 우리의 예수 안에서의 예수님이 보는 내 모습이 그거에요. 니 안에 모든 범죄 다 들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구원하고자 한다. 간음했고, 살인했고, 거짓말했고, 그것 때문에 구원하고자 한 거예요. 왜? 그런 인간이야 말로 십자가를 가장 십자가답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던 인간이 구원하고 난 뒤에는 또 2010년도에 구원받고 난 뒤에 헤헤거리면서 나 구원받았다! 까불지요. 그래서 다시 원래의 상태로 삭제시키는 거예요. 삭제시켜서 결국 마지막 죽을 동안 뭐냐 하면 내가 내 안에 담겨있는 아담의 죄를 마음껏 발산하는 거예요. 그 발산하는 죄는 이게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명사에서 to부정사로 바꾸는 겁니다.

뭐냐 하면 바로 변해가는 거예요. 변해감은 내 소유가 될 수 없어요. 왜냐 하면 변해 감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나는 변한 사람임. 라는 명사가 되어버려요. 이게 규정이 된다고요. 노란 잎이 녹색 잎이 되면 노란 잎, 녹색 잎이 되잖아요. 우리는 뭘 보는가 하면 우리는 존재고 객체이기 때문에 “어? 노랗네.” “어? 녹색이네.” 우리는 하나의 주체기 때문에 객체로 보는 거예요. 내가 하나의 존재 덩어리인 것처럼 저 나뭇잎도 하나의 나처럼 하나의 존재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뭘 놓칩니까? 노란색에서 녹색으로 변하는 푸르러지는 과정은 우리는 놓칩니다. 노란에서 이틀 뒤에 스톱! 하면 스톱! 해봐야 또 그것도 분할돼요. 미분으로 분할돼보면 그 스톱하기 5초전과 5초 후의 5초라는 개입을 흐름을 또 읽어낼 수 없어요. 그럼 목사님 어쩌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영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것이지 내가 하나의 존재가 이 존재한테 손질을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망치 들고 나를 대한다 말이에요. “인간되란 말이야!” 나를 머리를 치고 나의 양심을 꾸짖고 이렇게 해서 때려서 변화시킨 게 아니고 우리는 결과물만 자꾸 내 것 인양 일방적으로 그걸 전환시켜 버려요. “세상에 오늘도 기도 두 번이나 했다. 미치겠다. 왜 이리 착하지. 오늘도 노숙자한테 돈 천원을 줬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게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것처럼 또 주의 힘으로 그것도 그냥 하면 미안하니까 주의 힘으로, 은혜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 된 자가 니가 아니고 접니다. 또 괜히 주체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우리는 교회 가서 목사의 말 가운데서 주께서 하신 것은 다 빼버리고 “여러분, 이런 인간 되세요.” 그것만 골라서 가져와가지고 집에 와서 그걸 숙제삼아 목표삼아 그런 인간 되라고 하는데, 인간 되고 안 되고 판정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리잖아요.

지가 출제내고 지가 시험 채점 다하고 그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말도 안 되지요. 자기가 채점하는데 계속 빵점 줄 사람 없습니다. 왜냐 하면 진짜 채점해서 빵점이 되어버리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하면 “주님, 저 빵점입니다.” “그래? 그러면 오늘부터 니가 부도나고 은행통장 다 날아가고 니 죽어도 니는 상관없지?” “그러시면 안 되지요.” “뭐? 뭐? 아직 살아남을 가치가 있단 말이냐?” “요만큼 남아 있잖아요.” “그럼 빵점 아니네. 5점이네.” “5점짜리지만, 저는 아까워 죽겠습니다.” “그럼 바로 니가 개체잖아.” 또 5점짜리 쥐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목사님! 언제 해야 5점에서 빵점으로 갑니까?” 얼마나 노력해야 빵점 될까요? 시간을 다룰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거든요. 시간을 변화시킬 분은. 예수님 자체가 이 땅에서 빵점이에요. 예수님 자체가. 우리가 예수님을 못 믿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빵점이기 때문에 싫은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우리한테 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십자가만 주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준다니까요.

자, 여기서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마가복음16장17,18절 봅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아! 요 대목 가짜 신자 다 들통 내는 대목입니다. 제가 방금 요거 보기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준다고 했지요. 안 주는 방법이 요 방법이에요.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주지를 않아요. 내 것 될 수 있는 것.

한 번 물어봅시다. 뱀에 안 물리는 게 좋아요? 뱀 물리고 더 이상 자기 인생 포기하는 게 좋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내가 존재하고 싶으면 안 물리고 싶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영으로 보는 거예요. 제로로 보기 때문에 뱀이 와서 물리게 해버려요. 그러면 그 순간 내 인생은 종쳤습니다. 죽은 거예요. 죽었는데 이제 내 인생 아니지요. 뱀은 누가 다가오게 했습니까? 주님이 다가오게 하셔가지고 안 죽게 만들었지요. 사도바울처럼. 안 죽게 만드는 그 과정 속에서 그 푸르른 그린 속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내 것에서 누구 것으로 바뀌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주의 것으로 바뀌었지요. 이 방법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이 얼마나 말씀이 무서워요. 상주 공성면에 여러 번 갔어요. 제가. 사건 났잖아요. 누가 음료수에 농약 부어가지고 음료수 마셔가지고 80노인 하나 죽게 했잖아요. 그 중에 예수 믿는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안 죽어야 되잖아요. 그리고 뭡니까? 오직 100% 예수 성령 받은 사람만 모이는 단체가 있어요. 지방교회. 오치만리. 그 단체에 농약을 섞어 포도주를 나눠줘 보세요. 몇 명 살아남는지. 마가복음16장 이 말씀 초대교회 역사가 일어나야지요.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있나니.

결국 믿는 자라 하는 것은, 믿는 자라는 말은 나로서 증거 될 수 없고 주께서 믿게 하신 자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요.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주님께서 자신의 믿음과 인간들이 자기 명사로서 자기 몸을 내거라고 여기는 인간들의 믿음을 날카롭게 이걸 분열시키는 거예요. 분열을 시켜야 이게 상실이 되고 박탈될 수 있기 때문에 주께서 계속해서 십자가로 역사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체니까 주님의 객체가 누구에요? 우리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믿음의 주체라고 우기잖아요. 그럼 주님이 주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갑자기 우리에게 뱀이 찾아와서 물리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뱀 물린 것을 우리 힘으로  낫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하지요. 나자빠버리지요. 아이고 이제 죽었구나! 끝났어! 주여, 어서 오늘밤에 낙원에 가게. 낙원에 안가. 지금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독사에 물렸는데 툭 치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면 누구이름으로 계속 사는 거예요? 주께서 주님이 자기 주체라는 겁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너희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으로 하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것 아닙니다.” 하는 그 자체가 주의 영광이 되는 거예요. 영광 되는 음료수 따로 마시는 게 아니고 그냥 칠성사이다 마시면 그게 영광이고 맥콜 마시면 그건 이단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매사가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삭제시키는 쪽으로 일함을 믿으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에요. 그저 주님 좋은 일만 하세요. 이게 백부장 믿음이잖아요. 그리고 주님께서 감탄해요. 세상에 이만한 믿음 못 봤다.

어떤 분이 나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주께서 12년 혈우병 걸린 여자나 백부장보고 뭐냐 하면 세상에 이만한 믿음 못 봤다 라고 칭찬했기 때문에 그 칭찬은 주님이 주신 칭찬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소지할 수 있는 믿음인 거 맞잖아요.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이 이해되십니까? 세상에 이만한 믿음 못 봤다 하니까 이것은 주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도 닦아서 생긴 그러한 멋진 믿음이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과 비교해서 니가 이런 믿음이 있다니 다른 믿음 보니까 니가 헐 씬 낫네. 내가 니를 칭찬하노라. 니 믿음으로 구원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맞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그 믿음이 개인적 소유가 된다면 결국은 인간은 개인이 만들어낸 자기가 열심히 도 닦은 믿음으로 얼마든지 천국갈 수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따라서 각자가 만든 믿음 다 가져와! 믿음 다 가져와! 공작시간이라. 숙제 나눠 준 거 다 가져와. 잘했으면 천당! 못했으면 지옥 보내. 이것이 주의 뜻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질문을 한 거예요. 저한테. 그 질문이 저한테는 굉장히 반갑고 고마운 질문이에요. 사실은 그런 질문을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데 우리교회에서는 전부다 무엇이 겸손한지 솔직한 말을 못하고 넘어가자, 그냥 어물쩍 넘어가는데 그 사람은 용감했어. 그 이야기를 설명해 드릴게요.

로마서3장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지요. 모두 죄인이지요. 사도바울의 모든 편지는 뭐냐 하면 십자가 이후입니다. 십자가 이후가 되게 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예수님이 죽을 때, 모든 인간이 죽었잖아요. 그러면 모든 인간이 죽었지요. 죽었으면 이게 뭐가 죽었는가 하면 시간과 공간관이 죽은 겁니다. 특히 시간관이 죽은 거예요.

에스겔37장에서 에스겔을 데리고 뼈 집합소에 가지요. 그 뼈는 나이를 먹습니까? 안 먹습니까? 전부다 바짝 마른 뼈지요. 선후배 없지요.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누가 선배입니까? 둘 다 변화산에 나타났잖아요. 선배님! 이랬습니까? 하늘나라에는 아까 했잖아요. 모든 게 현재가 된다고요. 시간은 어디에서 끄집어낸 시간입니까? 이 인간세계에서 시간이에요. 하늘나라에 가면 장가도 안가고 시집도 안가고 순서도 없어요. 여자가 하나있는데 일곱 형제하고 다 결혼했어요. 아, 여자 입장에서는 신나지. 일곱 명이나 하고 결혼했으니 신나지요. 그런데 바리새인이 묻습니다. 만약에 천국에서 그 여자하고 남자가 만났다면 전부 다 장가들어서 여보! 여보! 하고 달려들면 그 일곱 중에서 누가 남편이 되겠습니까? 그리 물었잖아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했어요. 뭐냐 하면 살았다는 말을 인간들이 사는 그 개념을 가지고 살았다고 연결시키면 안돼요.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 이미 죽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살아도 죽음의 양태에요. 죽음의 모양새에요. 실체는 속성과 양태로 구체화되는 겁니다. 주님의 실체가 속성과 양태는 기능과 같다는 거예요. 기능. 아까 to부정사 푸르러진다. 뭔가 변해진다. 이것밖에 안돼요. 인간은 그걸 거두어서 내 것 만들었다. 하고 존재로 만들지요.

지금 백부장의 믿음이나 12년 혈우병에 걸린 여자나 그 사람의 개인적 믿음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시간이 죽었잖아요. 시간이 죽고 난 뒤에 승천했잖아요. 승천하고 난 뒤에 뭐가 왔습니까? 성령을 주시지요. 성령 안에는 뭐냐 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없어요. 성령 받은 것이 몇 년 됐는가? 이건 아무 의미 없다니까요. 성령은 영원한 현재에요. 왜, 예수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묵시이기 때문에 영원한 현재에요. 성령 안에서 나이 먹는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성령의 인 치심을 받아버리면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가고 내일 죽어도 낙원에 가요.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가든 안 가든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 그 장소가 그 장소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진리와 화평이라,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이런 게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러니 마리아 마르다 오빠처럼 지금 죽어도 예수 안에서 죽고, 살아도 예수 안에서 오빠가 살아있어요. 마르다는 오빠 살려라 하니까, 나사로야! 기어 나와 봐라 하니까 나왔잖아요. 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있잖아. 봐라! 나사로야! 또 들어가. 나사로만 괜히 등장했다가 또 죽고 했어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안 죽어요. 왜냐 하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죽은 자도 살리시리라, 이 말씀이 계속해서 여기다가 퍼부어졌기 때문에 이게 죽고 싶어도 안 죽는다니까요. 그리스도의 영생, 생명 안에서 계속 살아요. 이미 살았는데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다? 이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러면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거리는 몇 키로 됩니까? 예수님이 하늘나라 갈 때 3일이라는 시간으로 해서 길을 냈거든요. 인간들이 사는 이 땅에서의 시간 개념은 3일이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거기가 거지고. 십자가 안이 곧 하늘나라입니다. 입구는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 성령 안, 하나님의 안이 되는 겁니다.

어디 있느냐, 걱정하지 마세요.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십자가에 참여해서 부활에 이르게 함이라. 빌립보서3장 11절. “그러면 목사님 그 말은 맞는데 그게 안 믿어집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3일 하늘에서 나오는 하늘이 만든 작품이 지금 우리에요. 입 다물면 혀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에~~하면 혀가 나오지요. 요 혀끝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에요. 주님의 개체는 다양성하게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죽으면 다시 혀끝이 안에 있기 때문에 닫아버리면 다시 주안에 들어갑니다. 주밖에 나왔다 해서 주와 끊어진 상태는 아닙니다. 믿음 올 때마다 혀를 낼름 내미세요. 거기가 거기에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삼층천에 올라갔다 했지요. 어딥니까? 묻지 마세요. 사도바울이 있는 현장이 바로 삼층천입니다. 왜냐, 기능이니까. 주님의 보이지 않는 실체는 속성을, 속성이라는 것은 두 가지에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안 믿는 사람은 망하도록 복음 전했고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1장에서. 이걸 향기라 믿는 사람은 영생 얻기 위해서는 복음에 들어갑니다. 사도바울이 주의 속성을 전하게 되면 한 쪽은 영생이고 안 믿는 자는 속성이 사도바울의 양태, 사도바울이 보니까 인물이 별로네. 아이고 말이 어눌하네. 이게 양태에요. 보고도 못 믿어요. 꼭 예수님께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동방박사는 별 따라 왔잖아요. 동방박사는 인물보고 온 게 아니거든요. 딱 보고 아기에게 경배 드렸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예수를 믿는데 어떻게 믿었습니까? 살아계신 주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믿게 만들어버렸지요. 믿게 만들고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내 직업이나 이걸 집어넣고 이걸 빼버리고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이 나라는 주체를 이 팔을 믿음, 소망, 사랑으로 채워버리니까 우리는 이 죄에다가 주의 십자가 들어가 버리니까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버린 겁니다. 뭘 해도. 신 났어 우리는.

뭘 해도 죄인데 뭘 걱정해. 복수하고 싶어요? 하세요. 죄니까. 복수 안 한 척 하지 마시고. 우리는 눈만 뜨면 저 인간 안 죽나, 맨 날 복수인데 집에서. 아이고, 귀신 많어. 귀신 많어 잡어가라고. 그게 주님의 혀 바닥이라니까요. 그게 주님의 혀 바닥이에요. 그럼 주님 뭐라고 합니까? 니부터 죽이면 어떻게 할 건데? 아이고 저부터 죽인 다고요? 미안합니다. 그게 바로 회개인 거예요. 마치 세상이 내 때문에 있어야 될 현실인 것처럼 자꾸 오해가 나오는 이 몸. 이 더러운 몸도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다는 이 놀라운 기적. 이 기적 때문에 이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마가복음 이 이야기를 언급한 겁니다.

믿는 자에게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주께서 친히 나를 쓰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기적이 나올 것이다. 그럴 때, 내가 잘났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 일을 벌였습니다. 어떤 목사는 이걸 시험하다가 죽은 사람이 있어요. 미국의 어떤 목사가요.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교인들 앞에 왜 초대교회의 기적을 안 받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믿음이 없어서 그러는데 초대교회에 이런 기적이 있는데 왜 우리 교회는 냉냉 하십니까? 여러분 이러면 일곱 교회처럼 우리는 망합니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기적을 우리가 간곡하게 성령으로 역사해서 기도합시다. 어느 집사가 그런 소리하니까 니부터 먼저해보세요. 했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말은 해놓은 게 있고 괜히 마가복음 봐가지고 주여, 믿습니다! 해가지고 이제는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거예요. 에이 이판사판. 말은 해놓고 그래서 독사를 사가지고 했어요.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매일 내 귀신 나오잖아요. 내 귀신. 뭐냐 하면 순교라 하는 것이 누구 때문에 순교하느냐 하면 내가 나 때문에 순교하거든요. 누가 순교를 방해하는 줄 알아요? 주님의 순교를 내가 방해해요. 순교는 멀리 가지 마세요. 아프가니스탄, 캄보디아 가지 마세요. 집구석 앉아 있으면서 순교돼요. 평소에 하면서 우리는 순교를 박해하는 자가 되는 동시에 그 순교자도 되게 하고. 순교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받기 때문에 내가 나를 박해하는 자도 되고 순교되는 자 양면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보여주는 기능인이 되는 거예요. 기능인. 주님의 속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우리는 주님 따로 있고 나는 주님의 속성으로서 이 땅에 다양성 있게 살아갑니다. 저 사람은 저런 식으로 살게 하고 나는 이런 식으로 살게 하기 때문에 남의 흉내 내면 안돼요. 어떤 분이 저하고 상담하면서 제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어떤 잘 믿는다는 사람을 모델로 걸치지 마세요. 이것은 아까 귀신을 쫓아낸다 했지요. 그게 바로 귀신이에요. “주여, 내가 믿음 좋은 저 사람을 닮아서 그 다음에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 닮겠다고 하는 그 사람 귀신입니다. 자기가 얼추 하겠다는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죠.

우리는 자신감을 가져버리면 그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버려요. 내가 주체가 되고 내가 미래를 정해버려요. 나는 언젠가 3년 계획 잡고 내가 저 사람 신앙을 따라가 볼 거야. 따라가 보세요. 지 귀신, 내 귀신 똑같은 귀신인데. 주께서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항상 귀신이 노는 노래방이에요. 귀신이 노는 마을회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툭하면 세상의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유명한 나훈아가 불렀던 노래 <내가 왜 그런지 몰라> 왜 그런지 몰라 앞에 뭐가 붙었습니까? 내가지요. 내가. 그리스도를 붙이면 <그리스도의 나라가 왜 그런지 몰라>가 되지요. 만약에 우리 회사가 부도난다면 <내 회사가 왜 그런지 몰라>가 되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무조건 나는 내가 잘되어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귀신 들린 거예요. 집나간 귀신을 주께서 쫓아낸 나를 귀신이 불러가지고 다시 불러와요. 너 봐라! 허전하잖아. 빨리 옛날 영화를 회복해야지. 이거다 말이죠. 회복하기 위해서 방법은 뭐냐 철야기도지요. 뭐. 성경쓰기. 성경 만 독 읽기. 이래도 회복 안 해줄 거야?

맨 날 과거 때문에 미래를 생각하는 거예요. 빨리 미래는 전에 과거처럼 그렇게 오순도순 살았으면 좋겠다. 죽은 내 아들 내놔라! 죽은 내 남편 내놔라! 죽은 남편 사별한 부인들이 다른 교회 안가고 왜 죽은 남편 교회 가는 이유는 그 교회에 가야 다시 꿈에라도 남편 만나지요. 그러니까 평소에 남편은 남편이 아닙니다. 내 소유된 소건 하에만 내 남편 되는 거예요. 니 왜 내 허락 없이 죽었느냐 말이죠. 남아있는 두 과부가 평생 싸웁니다. 니가 꾀서 낚시 갔다. 형님이 꾀서 낚시 갔지요. 니는 따라가긴 왜 따라 갔느냐. 평생 싸워요. 평생 싸운다니까요.

인간은 평생 나라는 귀신에서 못 벗어나요. 세상에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해줬으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십자가 이후입니다. 십자가 이후는 시간을 뺏어버리고 묵시를 거기다가 집어넣어서 이것은 백부장이던 하여튼 주님 앞에 몽땅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왜 그들을 칭찬했는가 하면 주께서는 십자가 이후에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모델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믿음으로 칭찬하는 이런 사람이 되도록 내가 믿음을 분배해주는 거예요. 성령 안에서.

그것을 미리 당겨서 모형으로 백부장이나 12년 된 혈루 병에 걸린 여자나 뱀에 물려도 죽지 않은 그런 사람을 미리 깔아둔 거예요. 그런 사람을 흉내 낼 필요 없어요. 일부러 12년 동안 꼬부라져 다닐 필요 없다니까요. 그런 방법 쓰는 건 그 여자 쓰라하세요. 또 중대장 되어가지고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건 중대장 쓰라하고 나는 뭐하느냐 하면 짬뽕 먹을까요, 자장면 먹을까요, 이런 것 가지고 영광 돌리면 되는 거예요. 비빔냉면 먹을까요? 물냉면 먹을까요? 아~ 씨 비빔냉면 말고 물냉면 먹을 건데. 이런 걸 통해서 영광 돌리면 돼요. “주께서 오늘도 비빔냉면 먹으라 했으니까 주여,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물냉면 먹겠습니다.” 그 다음에 갔는데 비빔냉면 전문이 돼가지고 물냉면 없어. “주여, 또 내 귀신 쫓아내시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되지 못하는 변화를 귀신이 있던 그 귀신을,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주체대로 하는 그 귀신을 추방하는 그 기능, 노란 잎을 녹색 잎으로 쫓아내는 그 힘이 바로 이미 성령이 들어왔기 때문에 나라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런 속성과 양태를 보이는 거예요. 그걸 내 소유화 시키지 마세요. 그냥 맡기세요. 주께서 노란 잎을 녹색 잎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귀신 들렸다 하는 것은 너희들은 바로 너희에 대한 소유 때문에 우리는 깨끗해! 이 주체는 건전해! 영광 돌릴 거야. 우리는 구원 받을 거야. 하는 동안에 주께서는 그걸 토끼로 사용해가지고 그게 바로 니 안에 악마의 죄가 들어있는 배양체로서 유대인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죽임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방인이든 똑같아요. 그 다음에 성령이 임하면 “주여, 이 구원은 제 행함이 아닙니다. 주여, 성령의 선물입니다.” 라는 고백을 통해서 영광 돌리게 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십자가 다 이루었다 할 때까지 여러 가지 모든 절차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됨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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