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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8 01:21:02 조회 : 1428         
본래적 죄 16060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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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성모(IP:222.♡.181.154) 16-06-12 11:24 
요한복음 10장 40절(가락-본래적 죄)160607a-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40절입니다. “다시 요한이 세례 주던 곳에 가서 거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왜 등장하느냐? ‘등장할 만하니까 등장했겠지..’ 라고 하면 안 되고요, 예수님이 바로 오셔도 되는데 세례 요한을 왜 앞장세웠느냐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전부 다 입을 다물고 있어요. 예수님이 바로 오시면 되는데 세례 요한을 왜 앞장세우느냐 말이에요. “물렀거라.” 하는 옛날 대감마님 앞에 하인을 세우듯이 왜 그렇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해요. 광야에 외치는 소리이기 때문에 먼저 오셨다고요. 그런데 제 질문은 왜 그 소리가 필요하느냐 하는 거에요.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처럼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서 세례 요한이 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오셨다. 그런데 소리가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 요한이고 그 소리의 본부는 예수님이다라고 다들 이야기하는데 제 질문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등장하면 되는데 소리가 왜 필요하느냐, 앞에 하인, 종, 이런 식의 관계를 왜 유지해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무엇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원죄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냥 죄라고 인정하는데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할 때 그 죄, 그 죄가 만들어진 현실을 그대로 밑바닥에 타일처럼, 거름(퇴비)처럼 쫙 깝니다. 그러면 죄가 쫙 깔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죄를 깔아야 되느냐 하면은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담이 자진해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아니면 누구에게 유혹을 받아서 따먹었습니까? 뱀의 유혹을 받았지요.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은 죄는 인간의 단독범행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 거에요. 그것은 악마(마귀)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은 그렇지 않은데 가인은 모든 시작과 마감을 인간에서 시작해서 인간으로 마감을 시켜버립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있고 하나님이 있고 끝이에요. 가인이 동생을 죽인 이유는 죄, 다시 말해 악마가 덮쳐서 그렇거든요. 그러나 막상 정말 악마와 결탁된 가인은 아담의 아버지인 아담의 요소로써 모든 것을 마감하는 경향이 있어요. 모든 영적인 것을 배제해버리고 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실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현실이라는 게 이것으로 종결이 되는 거에요.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 과학시대지요. 귀신이라고 하면 진짜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이고 천국은 가봐야 아는 거고 예수님은 이미 과거의 인물이고 하나님은 있는 게 아니고 대자연은 스스로 자기 촉매적인 국소질서로 만들어진 것이 되는 겁니다. 대자연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구성이 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촉매,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은 나에게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으면 또 거기에다가 영향을 주고..  서로가 영향을 받으면서 서로가 하나의 질서를 만드는데 그 질서가 국소, 제한된 장소의 질서다. 이게 하나의 개체가 되는 겁니다.

개 따로 있고 소 따로, 말 따로 있는데 그것을 질서 덩어리, 동양에서는 그걸 기 덩어리, 서양에서는 에너지 덩어리라고 합니다. 에너지 덩어리는 엽록소에서 광합성에 의한 햇빛 에너지가 발생되면 동물 세포가 그걸 받아서 질소와 산소로 공급해서 이 세상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무엇이 빠졌지요? 귀신이 빠졌지요, 마귀 빠졌지요, 선악과가 빠졌지요? 그렇게 선악과, 여호와 하나님, 약속,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를 빼는 이 작업은 배후에 악마가 있어서 나타난 현상이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죄가 깔려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나쁜 짓을 해서 죄가 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생각하는 범주를 우리가 익히 아는 것으로 제한시키는 이 자체가 죄가 된다 이 말이지요. “가인아, 동생을 왜 죽였느냐?” “미워서 죽였습니다.” 이렇게 가둬두는 거에요. “사람이 왜 욕심을 내느냐” “인간에게는 이(理)적인 요소도 있지만 정(情)적인 요소도 있어가지고 감정이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이(理)적인 요소가 이걸 다스리면 된다.” 이게 바로 악마가 자기의 정체를 안 드러내고 자꾸 앞장세우는 거에요. 그 선악과를 뱀이 따먹었습니까, 아담이 따먹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지요.

그러니까 그 관계가 똑같아요. 뱀은 자기의 정체를 감추고 자기가 원하는 짓을 하면서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을 앞장 세워가지고 자꾸 마귀의 본심을 인간을 통해서 실현코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인간은 “뱀이 시켰어요.” 라고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어 했어요.” “동생 왜 죽였느냐?” “죽이고 싶어서 죽였어요.” “왜 죽이고 싶은데?” “욱 하고 나오니까 죽였네요. 이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지금 성경은 우리를 보고 “다시는 안 그럴 거지?”를 묻는 게 아니고 너희의 모든 행위를 뱀과 관련을 시키라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에게서는 종을 잡을 수 없는 약속이 나와요.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오지요. 인간이 아는 현실의 범위에서는 이것의 실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자식은 여자의 후손이 아니고 남자의 후손입니다. 족보가 전부 남자의 이름으로 들어가요. 시조에 보면 아버지 날 낳으시고 나오잖아요. 전부 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들어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마태복음 1장에 쭉 나온다고요.

모든 것을 그냥 우리가 납득이 되는 것, 우리가 보고 있는 것으로 제한하자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마귀 이야기, 귀신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우리한테 해꼬지할 때 그래서 추방할 필요가 있을 때 ‘에잇, 귀신아 이것 먹고 떨어져라.’ 그러니까 귀신하고 노닥거리는 게 아니고 귀신이 노는 세계 따로, 북한에 요덕수용소 만들 듯이 귀신 수용소를 만들어놓고 죽은 자는 거기로 갔다가 49제를 드리면 거기서 제대해가지고 또 영원히 가고 이쪽은 인간 동네이고 인간이 알아서 할 테니까 귀신은 자꾸 한 맺혀가지고 얼쩡거리지 말라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세요. 옛날 토속 종교나 교회나 똑같잖아요. 새벽기도 같은 데 나와서 강단을 치면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은 전부 다 한이 맺혀있어요. 그런데 한이 맺혀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뜻대로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자기의 뜻을 어디에서 규정했습니까? 자기가 설정한 범주 안에서만 규정한 거에요. ‘아이고 우리 조상은 선악과를 왜 따먹었느냐?’ 이것 때문에 한이 맺힌 게 아닙니다. ‘우리 십자가 때문에..’ 이것 때문에 울고불고 하지 않아요. 그저 ‘돈을 사랑하면 안 되는데, 내가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을 알아야지..’ 이것 때문에 울고불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설정한 나의 영역이 뜻대로 안 되는 이유는 필히 귀신이라든지 악마, 성경에 나오는 나쁜 존재 있잖아요. 그게 장난질을 치니까 그런 거라는 거에요. “마귀를 이기신 주여, 어서 후딱 이 귀신을 내 영역에서 추방시켜서 원상회복해주고 내 인생을 빠른 시간에 만회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거에요. 그 인간이 마귀의 앞잡이에요. 선악과 놓쳤지요,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 다 의미가 없지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눈에 보이는 행실 자체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요.

그리고 힘이 들면 기도해서 마저 채우면 되니까요. 그러니까 생각의 사고방식 모두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현재 자기가 생각하는 현실적인 자기 자신, 그게 계시의 핵심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원죄라는 게 없지요. 여기에서 제가 원죄라고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죄가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죄는 누가 지은 죄입니까? 본인이 잘못해서 지은 그런 죄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 죄 말고 밑바탕에 깔린 다른 죄가 있는데 이 죄는 인간들의 관심을 끌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등장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당신은 그런 주장을 감히 할 수 있느냐?” 세례 요한이 와서 한 일이 뭡니까? 세례를 줬지요. 그래서 이름이 세례 요한이잖아요. 그래서 세례 요한에 관해서 예수님과 연결해서 이야기한다면 세례가 없는 자에게는 구원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말하면 물세례가 없는 자에게는 성령세례도, 천국도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물세례가 뭡니까? 물세례라는 것은 물을 찍어바르는 것이 아니고 요단 강 물속에 잠수하는 거거든요. 이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세례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옛날에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속에 왔을 때 거기에서 한꺼번에 세례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요. 바닷물에 사람이 들어간다면 필히 거기에 들어간 모든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왜? 뒤따라온 애굽 군사들은 홍해 물에서 다 죽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세례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있는 게 원래의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아래에서 죽어 있는 것이 원래의 모습이라는 거에요. 이 원래의 모습이 모든 인간 현실의 밑바닥에 깔려있는데 사람들은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가지고 자기가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다고 우기는 거에요. “살아있는 인간 더 한 번 살아보자. 그런데 이 살아있는 것을 방해하면 마귀다. 그리고 실수하면 죄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와야 될 이유가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평지 작업, 그 기초 작업이 미리 있어야 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본질에 관한 문제이고, 이게 원천에 관한 문제입니다. 세례 요한을 만났다, “아이구 안녕하십니까?” 헤어졌다. 또 예수님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헤어졌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면 안 돼요. 세례 요한한테 붙잡히고 세례 요한한테 붙잡힌 상태에서 그때 예수님이 오셔야 돼요. (같이 있는 사람을 포함해서) 그럴 때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보라, 저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가요? 세례 요한이. 어느 자리에서? 바로 인간들이 도외시한 그 죄의 자리에 인간은 산 존재가 아니고 물에 빠져 죽어 마땅한, 지금 심판 앞, 저주 아래 있는...

지금도 산다는 게 저주에요. 이 세상 산다는 게 저주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게 저주 아래에서 태어난 거에요. 그걸 죄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죄 속에 태어난 그런 행세와 모습이라는 것을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 와야 세상 죄가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을 보라”라고 할 때 이 말은 인간이 자기가 죄 지은 것을 책임지라는 말이에요, 책임질 수 없는 입장이라는 말이에요? 책임질 수 없는 입장이에요. 복음이 기쁜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책임지고 싶어도 책임 못 지게 하시는 이게 기쁜 거에요.

내가 숙제하고 싶어도 숙제하지 말라는 거에요. 십계명을 보고 다 풀려고 하는데 너는 풀지 말라고 하면서 시험지를 가져가 버려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세례 요한의 세례 장면이 나와요. 4복음서에 다 있는 게 몇 개 있어요. 오병이어도 다 있고.. 세례 요한이 하는 모든 일이 세례 요한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냐 하면은 이미 시작, 개시된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의 일을 예수님 만나서 악수부터 하고 시작하지 말고 세례 요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주의 일의 근처에도 못 온다 이 말이에요.

특히 누가복음 같은 경우에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 출생의 비밀을 기록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것마저 예수님의 일이기 때문이에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내가 죄 속에 죽어있음을 안다면 그 자체가 너의 일이 아니고 이미 시작된 주의 일이다 이 말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너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내가 이 지옥 같은, 죄 된 세상 속에 태어났구나를 알게 하는 거에요.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자로 육이라고 하는 겁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오(6월 25일이라고 하면 이건 아재개그에요. 나중에 집에 갈 때 웃어요.)”

모든 것이 육이라는 말은 나쁜 짓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아무리 고상한 일을 해도 우리가 평생 보여줄 것은 우리의 육 됨을 보여줄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할 뿐이라고 하는 것이 주의 일이 되는 거에요. 밑에 우리가 도외시하는 선악과의 죄를 계속 끌고가는 그 작업을 이미 주께서 일하고 온 거에요. 성경을 한 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5장 1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니” 아버지가 일하니까 예수님이 일하지요.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생각해요. “목사님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주의 일을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주의 일은 없어요. “그럼 집에서 놀까요?” 놀면서도 그게 주의 일인 것이 믿어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안 놀거든요. 예수님은 왜 안 노십니까? 아버지가 일하시거든요. 모든 이 세상의 돌아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일하신 흔적들입니다. 주님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지금 모든 것이 주의 일인데 찾기는 뭘 찾아요. 전부 다 주의 일이 되는데요. 낙엽이 떨어지는 것, 별이 반짝이는 것, 중국 여인이 닭하고 쌀을 훔치는 것도 주의 일이고 집사님이 찡찡찡 우는 것도 주의 일이고 모든 게 주의 일이에요. 왜? 아버지가 일하시니까 주가 일하시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왜 내가 놀 때는 일을 안 하고 일할 때만 일을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까? 이것은 마귀가 앞잡이가 되어가지고 자꾸 독자적으로 단독적인 가인의 성격이(이게 육이거든요.) 그대로 계속 이어지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가만히 있으면 세상도 안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이지요. ‘내가 한 번 나서볼까?’ 그렇게 일이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오전 설교에 제가 이봉창 의사 이야기를 했는데요, 우리교회 교인 두 명이 “이봉창이 누굽니까?”라고 묻는 거에요.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이해가 돼요. 왜냐하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봉창은 자기가 나서지 않으면 독립운동이 안 된다는 겁니다. 안중근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그 말이 맞아요, 안 맞아요? 그 말이 맞아요. 그 말이 맞는데요. 제가 안중근이나 이봉창에게 묻고 싶은 것은 “독립해서 뭐할 건데?” 좋다고 쇠고기 사먹겠지. 대한독립이라는 게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이게 안 나오지요. 그러면 성경에 안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대한독립을 위해서 하겠다는 것은 결국 성경의 무엇을 가위로 잘라버리는 거에요? 선악과, 원죄, 귀신, 악마의 일, 약속, 이스라엘 메시아의 기다림을 전부 다 가위로 잘라버리는 거에요. 이딴 것은 필요 없고 이딴 것은 필요 없고 이건 우리 집안에 도움도 안 되고 이건 필요 없고.. 라고 하면서 다 잘라버리는 거에요.

그런 사람에게 “혹시 묻습니다. 세례 요한을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그 양반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이순신은 알지요. 그런데 세례 요한을 내가 꼭 알아야 됩니까?” “당신이 죽습니다. 나미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왜 죽습니까?” “육이거든요.” “육? 육이 뭔데요?” 그러니까 이게 바로 마귀가 모든 문제를 눈에 보이는 인간에 의해서만 처리되도록 그렇게 제한된 현실로 만든 거에요. 인간만의 세계로 악마가 단도리를 잘 한 거에요. 이걸 경상도 말로 단디라고 합니다. “일 단디 해라이.” 단단히 하라는 말입니다.

항상 영적인 것이 있더라도 우선되는 것은 육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요. 그 육을 형성하는 내용은 혈연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이것은 짐승들이 새끼치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제가 대구공부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인간의 모든 욕정은 짝짓기, 혈연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욕정을 주체 못하는 이유는 결혼해서 새끼를 칠 정년기가 되어서 그래요.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나쁘다고는 할 수가 없지요. 왜? 짐승들도 새끼를 치니까 그게 나쁘다고 못하잖아요.

“그런데 둘이 결혼해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그러면 저한테 막 따질 거에요. 그러면 저는 답하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데 홍수는 왜 났지요?” 이게 뭐가 문제라고 홍수가 옵니까? 그런데 이게 문제가 있다는 거에요. 밥을 할 때 고기만 먹어서 그렇습니까? 고등어 구워가지고 미세먼지 46배 만들어서 공기가 오염되었다고 벌을 받는 거에요? 그게 아니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면서 무엇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인자가 임하는 것을 잃어버린 거에요. 인자의 이야기를 누가 안 해주는 겁니까?

인간을 이렇게 가두어놓은 그 배후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서 뱀의 후손,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이것을 현실의 전부로 규정하도록 만드는 거에요. 여기에 돌발사태가 일어났으니 누가 왔다? 세례라는 기능을 베풀 세례 요한이 온 거에요. 세례 요한은 놀러 온 게 아닙니다. 무슨 기능을 해요? 세례라는 기능을 해요. 세례라는 기능이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자기)의 원천을 찾아가는 거에요. “다 물에 들어가. 홍해 바다에 다 빠져죽어.” 이게 원천이에요.

그 원천은 본인이 독자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고 누가 미리 보내서 했다? 예수님이 미리 보내서 한 일이에요. 예수님께서 미리 보내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거에요. 누가복음을 한 번 찾아봅시다. 누가복음 2장 34절입니다. 성경을 보시게 되면 한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쭉 내려갈 수가 있어요. 그러나 단어 하나하나를 따지면 구약 성경의 역사가 거기에 밑바탕 되어 있습니다. 34절 같은 경우에 “시므온이 저에게 축복하여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폐하고 흥하기 위하여 핍박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나오지요. 이스라엘의 설명을 보면 사람이 흥하고 폐하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비방을 받는 자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진짜 이스라엘과 가짜 이스라엘이 등장된다 이 말입니다. 그분이 누군가 하면 아기 예수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 다음에 나온 이야기거든요. 그렇다면 이 말은 예수님께서 보는 현실은 인간이 그렇게 감추어놓고 인간은 전혀 예상도 못한, 다른 현실층으로 범위(범주)의 폭이 넓혀진다는 겁니다.

성도의 자유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가 아닌 사람이 보는 범위보다 모든 세상을 훨씬 넓게 보는 거잖아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라는 열매가 어디에서 나오겠어요? 세상을 넓게 봐서 그래요. 어디까지? 지평선이 아니에요. 오는 세계까지 다 아울러서 보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세상을 넓게 보는 거에요. 베드로에게 “당신 복음 전하면 죽인다.”고 하니까 “아이구 뭐 예수님 소원대로 됐구먼.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가리라고 하셨는데..” “지금 누구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는 몰라도 돼. 나는 주님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이게 범위를 넓히는 거에요. “네 속에 이야기하시는 분이 있어서 네 말이 아니고 네 속에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시리라” 범위를 넓히는 겁니다.

그렇게 넓혀버리면 이제는 드론처럼 되어가지고 세상을 떠서 보지요. 이게 자유잖아요. 그래서 이 복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는 밥을 먹어도 맛이 있지요. 복음이 안 통하는 사람하고는 뭘 해도 소화도 안 돼요. 복음 모르는 사람하고 이야기하면 소화도 안 돼요. 짜증나요. 만약에 여러분이 공직에 있는데 홍민표인가 하는 사람이 와가지고 돈 한 5억을 네 가방에 넣어준다, 사과박스에 넣어준다고 해서 넣어주게 되면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다고 칩시다.) “이거 해서 잘 봐주소.”라고 한다면 “회사가 잘 되면 뭐 하겠노? 잘 되었다고 소고기 사먹겠지.”라고 하면 뇌물을 주겠어요? 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 말이지요.

“당신 그렇게 하면 우리 이혼한다.”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래 이혼하자. 같이 살면 뭐 하겠노? 남들이 행복하다고 하겠지. 개코 행복. 살기 싫어? 그래 갈라서자.” 이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온 말씀 아닙니까? 그래놓고 그게 자유라고 해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하고 붙어 살 필요가 없다 이 말이에요. 이혼했다고 상을 주거나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 본들 남들이 보기에는 (세상 범위 내에서는) 부부끼리 같이 살고 돈 많이 버는 게 대단하지만,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가진 자는 다 못 쓰는 것같이 해라. 왜? 세상 행적은 후딱 간다. 훅 간다. 이 말이거든요.

음악대장이라는 사람이 복면가왕 10연승에 실패했잖아요. 9번이나 우승했다고요. 만약에 음악대장이라는 하현우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승 10번 하면 뭘 하겠어? 오늘 노래 그냥 임팩트까지 가지 말고 대충 부르다가 내려가자.” 그래서 대충 불렀잖아요. 그게 별로 의미가 없는 겁니다.

말로만 예수를 본받아라, 세례 요한을 본받아라, 선지자를 본받으라고 하는데 본받는 방법이 참 쉬워요. 자기가 이미 원죄 아래에서 육이고 지금 죽어있다는 것, 그리고 주일날에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늙어서 맥이 빠져서 죽는 게 아니고 주께서 죽이시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왜? 주님이 말씀대로 일하시기 때문이지요. 세례 요한은 세례 요한이 되어야 되고 삭개오는 돈이 많은 부자지만 네 집에 구원이 이르러야 되고 나사로는 다시 살아나야 했고 그런 겁니다. 탕자는 집에 와서 아버지한테 영접을 받아야 되고요. 그것은 본인이 움직인 게 아니고 주께서 일하신 거에요.

왜 주께서 일하신 것을 강조해야 되는냐? 우리가 뭘 꿈쩍여봐야 그것은 죄를 못 벗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건 일로 쳐주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일은 누구만 하느냐? 예수님만 해요. 왜? 효과가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하는 일은 백날 해봐야 그냥 죄에 더 얽히게 마련이에요. 어려운 사람을 돌본다고 아껴가지고 저금통 깨서 돈을 줬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할 때 오른손이 그 일을 하거든요. 그러면 누가 눈치를 채버립니까? 왼손이 눈치를 채가지고 주의 일이 안 돼요. 주의 일을 겐세이 놓는 식이다 이 말이지요. 주의 일을 방해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를 해봤자 뭐 하겠습니까? 기도했음이 기억이 나는데요. 금식기도 백날 해봐야, 금식 안 해봤지요? ‘이번 금요일날 금식하고 피자 두 판 사먹어야지..’ 이게 자기의 희망이 되는데 이게 무슨 금식입니까? ‘빨리 끝내야지.. 날짜 정말 안 가네.’ 6.25 때 먹던 수제비 먹자고 해가지고 수제비 띄우는데 6.25 빨리 끝나라. 6.25 때 먹던 수제비를 생각하는 그게 바로 육이오. 아재개그예요. 그게 바로 영이 아닌 육이 되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왜 등장했는가? 우리가 밟고 있는 것을 치명적으로 완전히 뒤집기 위해서 등장하는 거에요. 우리의 진짜 본질이 담긴(있던) 담요가 있다고 치면, 그 담요를 확 잡아당겨가지고 담요로 우리를 되덮어서 우리를 덮어버리기 위해서 세례 요한이 온 겁니다. 예수님은 이 세례 요한의 행위를 권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적인 일이 아닌 거에요. 세례 요한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는 말은 세례 요한의 개인적으로 한 모든 행동이 절대로 주의 일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개별적으로 본인의 뜻이라면 주의 일이 아니고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주의 일을 하면서 본인이 의인이 됩니까,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까? 죄인으로 드러나요. 그래서 천국에 있는 어린아이가 누구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까?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고 했지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누구보다 더 큽니까? 구약에 있는 어떤 선지자보다 세례 요한이 위대하다고 했지요. 하지만 그 위대한 자도 천국에 있는 어린아이보다 못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요한복음 10장 40절을 하는데요,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 구절 앞에 있는 38절을 한 번 보세요.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그리고 누가 등장합니까? 세례 요한이 등장하지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훌륭하다, 메시아다가 아니지요. 세례 요한도 죄인이지요? 그렇다면 죄인인 세례 요한이지만 지금 세례 요한이 본인의 일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누가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겁니까? 예수님이 자기의 일을 하면서 세례 요한을 앞장세우지요.

그러니까 지금 인간이 하는 일이 인간이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뒤에 숨어서 세례 요한을 앞장세우듯이 인간의 모든 일은 예수님과의 대척관계에 있는 그 무엇, 여자의 후손의 대척관계가 누구입니까? 뱀의 후손, 악마가 그 일을 하는 거에요. 뱀의 후손이라는 말의 뜻은 뱀보다 작은 새끼라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뱀의 실체를 밝히는, 뱀 이전에 있었던 그 진짜 실체를 뱀의 후손이라고 하는 거에요.

다윗의 자손이 주예요, 주가 아닙니까?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되는 거에요. 똑같은 원리로 뱀의 후손이, 기어다니는 뱀에게 그런 일을 시킨 진짜 숨겨진 어른, 주모자 이게 바로 뱀이다 이 말이지요. 맨날 뱀이다, 뱀이다라고 노래불러도 소용이 없어요. 그렇다고 뱀이 잡히는 게 아니에요. 땅꾼이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후손이 미래에 있고 점점 줄어든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오히려 숨겨진 실체의 범위가 점점 넓혀지는 거에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아담은 모형입니다. 우리는 아담에 속해있고요. 그러면 아담의 후손이면서도 아담의 제 1은 누구냐?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다 말이지요. 그러면 그 아담과 예수님을 연결시키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담은 이 땅에 태어나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야 되었다 이 말입니다. 뱀의 후손과 연결되지 아니하면 여자의 후손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배후에서 세례 요한을 세례 요한이 되게 했다는 말의 뜻은 모든 인간은 배후에 어두움이 있고 인간은 육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에요. 인간이 육으로 살고 싶어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인간의 배후에 배후자가 있게 하셨어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인간에게는 굉장히 낯설고 특이한데, “똘아이 아니야, 미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미친 사람은 혼자 미치잖아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진짜 비유로 말해서 도끼들고 설치는 거니까요.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라고 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그 당시에 인간 세계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심사를 했어요. 그런데 심사하러 오신 그 심사위원들에게, 감사원 직원들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까짓 것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얼굴을 내밀어?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너희들이 구원을 받으면 이 돌멩이들이 구원받겠다. 세상에.. 어디를 여기에서 얼쩡거리고..”

왜 이 세상이 아버지가 일하고 주님이 지금까지 계속 일해왔는데 너희들이 생각하기를, “언제 그랬어?”라고 생각하도록 도대체 누가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었느냐? 이것은 자질의 문제가 아니고 권세에 관한 문제라는 겁니다. 누가 강압적으로 이걸 못 보도록 그렇게 가둬둔 거에요. 세례 요한은 뭐다? 권세다. 하늘에서 온 권세다. 그런데 41절에 봅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너무 특이하고 도끼 이야기까지 너무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 때에 타작마당에 나왔다고(마당놀이 말고) 해요.

타작마당의 뜻은 때가 무슨 때라는 말입니까?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몰랐던 것이 있어요.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이 오신 것과 동시에 모든 것을 심판하는 줄로 알았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고 난 뒤에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거에요. 갑자기 뭘 생각하겠어요? 자기 자존심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나는 지금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가지고 나는 맞다고 했는데 아무 효과가 없다 이 말이지요.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다 그래요. ‘야, 복음을 알았으니까, 하나님이 진짜 진리와 정답을 내려줬으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야, 김 목사, 이 목사, 최 목사, 나 너하고 손잡고 일할게. 다른 사람 못 믿고 너만 믿어.”라고 하셨으면 입을 떼자마자 3천 명이 회개하고 5천 명 등록해가지고 예배당을 얼마나 크게 지을까?’ 이것만 생각해야 될 텐데 있는 사람도 다 나가요. 평균도 안 돼요. 있는 사람마저 다 나가버리니까 의욕이 없어요, 의욕이.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복음을 들어보라고 하니까 어떤 분이 하는 말이 그 교회가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데 왜 교인수가 얼마 안 되느냐 말이지요. “진짜 진리를 전한다면 하나님이 자기 편이니까 많은 사람을 보내가지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할 건데 왜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숫자를 보니까 얼마 안 되어서 (다른 데는 차고 넘치는데) 도저히 못 믿겠다.” 하면서 복음 들을 생각도 안 하고 설교도 듣지를 않고 아예 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시내에 갈 때 직행 6번하고 1번이 가는데 직행 1번은 동대구역에 가고 직행 6번은 가지를 않아요. 직행 1번이 간다고요. 그런데 직행 6번은 우리 동네가 종점이라 사람이 텅 비어있지만 시내로 바로 가고 직행 1번은 동대구역으로 가는데 직행 1번에는 사람들이 꽉 차있는 거에요. 진리입니까? 코스가 달라요. 갈 길이 달라요. 가는 길이 달라요. 한 쪽은 지옥이고 한 쪽은 천국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이 그렇게 의욕이 없을까봐 하시는 말이 “적은 자여, 두려워하지 마라. 천국은 너희 것이니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오지를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모아서 가는 게 아니고 택한 자를 찾아내는 방식이지요. 생명책의 명단은 예수님만 아시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일하시고 아들이 일하니까 오직 예수님으로 스톱되었어요. 제자들은 일을 안 해요. 그냥 추수한 것을 줍기만 하지 일했다고 포함되면 안 돼요. 인간을 보고 일을 시키면 항상 엉터리 일을 하기 때문에 안 돼요.

일을 온전히 하려면 주님이 해야 돼요. 어설프게 미장을 맡겨가지고 집을 다 지어놓고 쑥 그려놓으면 안 되듯이.. 아버지가 일하기 때문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그냥 찾는 겁니다. 누가 이 사람을 아(모르)시나요? 패티김이 불렀던 노래 있잖아요. 이산가족찾기 KBS 여의도 앞에 붙여가지고 했잖아요. 자기 양 찾는 작업이지 사람 떼스리, 팬클럽 모집해가지고 단체로 보내는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백날 해봤자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이사야 6장에 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현실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게 세례 요한의 일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성령께서 내게 능력을 주시게 되면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만 나는 일을 할 뿐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의 범위를 넓혀버리면 마귀까지 집어넣어서 현실을 다시 한 번 재조정과 재비치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세례 요한을 집어넣는 거에요. 그냥 멀뚱하게 있습니까? 세례 요한이 거침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심판 이야기를 하고 도끼이야기를 하지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심판이 시작되는 겁니다. 지금 이 자리부터 심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심판을 안 받으려면 착해야 된다, 나빠야 된다 어느 쪽입니까? 심판은 내가 이런 기운을 받아서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고 심판의 행위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심판할 때 우리는 죄인이 되어 있어야 돼요. 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산상설교가 주어지게 됩니다. 산상 설교 앞에서 의인이라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산상 설교 들을 때 굉장히 기뻐해야 돼요. “주제파악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동안 나는 내가 내 행동에 대해서 책임지려고 했는데 그 책임지는 데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야 돼요. 그러니까 책임질 거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산상 설교를 설교할 때 어떻게 하면 됩니까? “너는 세상의 빛이라” 어디 뭐, 유아인처럼 인물이 잘 생겨야 됩니까? “너희는 소금이라” “등경 위에 빛을 비취되 너희 선한 행실을 가지고 비취라” 결국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비췹니다. “나 죄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비취지요. 그런데 산상 설교를 그냥 하게 되면 이 땅에 천국을 만들려고 교인들을 아예 윽박질러요. 목사 자기도 못 지키면서요. 교인들을 윽박질러 왔어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또 거기에 속아넘어 갔어요. 속이는 인간이나 속는 인간이나, 다단계나 옥장판 10개 사는 인간이나, 대출 받아 사는 인간이나 문 잠궈놓고 휴대폰 압수해놓고 그걸 팔아먹는 인간이나, 똑같아요.

근본적으로 이 땅에서 살면 뭐 합니까? 왜 사는데요? 삶에 이유가 없어요. 왜? 처음부터 우리는 원죄의 늪에 빠져있기 때문에 살 이유가 없는데요. 살 이유가 없었는데 이유가 있지요. 왜? 주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온 겁니다. 주님과의 연관성이 있을 때 우리는 이 땅에 더 이상 육이 아니고 영이 되는 겁니다. 6.25(육이오)에서 0(영)으로.. 영이 되지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믿을 때부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해왔다는 사실을 세례 요한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관계로써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충성모(IP:211.♡.67.154) 16-06-14 23:17 
요한복음 10장 40절(가락-본래적 죄)160607b-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1장 해봅시다. 요한복음 11장에 아버지와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은 죽음 안에서 일하심,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 11장의 내용은 죽음입니다. 죽음 안에 있지 아니하면 네가 하는 모든 말은 너의 가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었어요. 되게 사랑했지요.

그런데 지난 낮설교에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랑이라는 것은 목에 가시와 같이 걸리면 넘어가지 않는다고요. ‘잊어야지, 잊어야지.’ 하지만 ‘잊어야지, 잊어야지.’ 할 때마다 더 생각이 나는데요. 괜히 잊으라고 해가지고 생각이 더 나네요. 사랑이라는 게 이럴 것 같았으면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그런데 만났는데 어떻게 해요. 잊지를 못하는데요. 차라리 남남 같으면 그냥 상처만 되는데 사랑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앙금이 되어가지고.. 사람이라는 게..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이 그래서 실제적인 학문이 되는 거에요. 원래 칼이라는 것은 쇠라는 물질로 되어 있고 에너지를 가지고 피부를 베어서 몸에 피가 나올 때 신경세포를 건드리면 “아야!”라고 하게 되어 있지요. 이게 우리가 아는 “아야!”입니다. 그런데 칼에도 안 베이고 몸이 깨끗한데 보고 싶은 사람이 연락도 없이 가만히 있으면 왜 가슴이 아프냐 말이지요. 그런데 가슴이 아프다는 말도 안 돼요. 가슴 어느 부분이 아픈 겁니까? 어느 부분도 아니에요. 마음이 왜 아프냐 이 말이에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예수님을 사랑해요.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아픈 걸 경험해보지를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사로 가족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하고 똑같아요. 구원이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하잖아요. 구원의 기쁨을 알려면 구원의 슬픔을 먼저 경험해야 돼요. 구원 때문에 당한 수모와 아픔이 있어야 돼요. ‘미쳤지, 내가 괜히 이걸 믿어가지고..’ 이런 아픔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구원의 아픔은 어떻게 오느냐? 이렇게 와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복을 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개코로 복음 아는 교회가 망해버리고 복음 아는 집구석이 다 날아가고 복음만 빼고 나머지는 다 없어졌어요. 그러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가를 부를 때 기쁘게 불러야 되는데 아까 집사님 말대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장송곡처럼 왜 그렇게 서글퍼지는지요. 찬송가에 그런 것이 있지요. “내 주여 뜻대로..” 그 노래를 부를 때 좀 씩씩하게 부르고 감사하게 불러야 되지요. 언제 그 느낌이 생기느냐 하면은 꼭 망하고 난 뒤에 후회할 만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렇게 청승맞게도 부르지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스스로 자기를 위로한답시고 그렇게 부르잖아요.

요한복음 뒷부분에 이런 게 나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느냐?” “예.” “나는 계명만 줄게.” “뭔데요?” “사랑, 한 계명만 줄게.” 그런데 그 사랑의 개념은 미움에서 나옵니다. 네 행실이 더러워서 미움 받는 것 말고 네가 나 때문에 미움을 받게 될 거야. 미움을 받게 될 그때 너는 사랑으로 기뻐하라 이 말입니다. 너는 그렇게 기뻐할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데 그때 너희에게 비로소 생각지도 못한 기쁨이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끝에 보면 나와요. “기뻐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에이, 말로? 말로 누가 못해?”라고 하거든요. 우리는 자꾸 실적을 원해요. 이것은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했잖아요. 사랑을 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고 마르다(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남녀관계로 생각이 되는데요. 사람이 사랑을 해요. 사랑을 하게 되면 인간은 행동을 하는데 행동은 마음에서 나오잖아요. 마음의 의도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마음의 의도에서 나온 것은 반드시 뭘 결부시키느냐 하면은 예상 결과를 결부해서 의도하게 되어있어요.

내가 사랑을 하게 되면 주님은 내 사랑을 알아줄 것이고 그러면 그 사랑을 상상해볼 때 나는 무척 기뻐할 것이므로 기쁘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주체는 주체에서 나오는 대상과 주체가 일치될 것을 기대하면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행동도 마찬가지에요. 반드시 행동을 하면 그 결과가 나오기를 바래요.

부모님께 효도할 때도 효도한다고 백숙을 해서 드렸는데 백숙을 발로 차버리린다든지 그런 것을 예상하지 않아요. “야야, 이 어려운데 이 귀한 것을 해서 줬구나. 이제부터는 내가 네 말 잘 들을게.” 이걸 기대하고 백숙을 해서 드렸는데 거기에 대해서 고맙다는 소리도 안 하고 막 짜증을 낼 때 효도할 마음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효도할 마음이 안 나지요.

그게 바로 육의 열매에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의로운 게 없어요. 인간은 너무 일방적이에요. 자기가 신도 아니면서 너무 일방적이에요.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 관계가 돈독하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가 시키는 대로 다 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것은 남녀관계도 마찬가지에요. 부부가 사귀다가 결혼을 했잖아요. 내가 언젠가 주례를 하게 되면 이런 이야기를 넣을 거에요. 부부가 사귀어서 결혼을 하게 되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사귀어야 되는데 사귀어서 결혼했다고 그 다음부터는 안 사귀어요. 투자를 안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귈 때만 행복하고 결혼을 하면 행복하지 않아요. 더 사귀어야지요. 연애할 때 남자가 여자를 꺄 하고 웃게 했잖아요. 그러면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는 배나 더 꺄르르 웃도록 만들어야지요. 직장에 가서 연구해야 돼요. ‘오늘 집에 가서 뭘 가지고 웃길까?’를 가지고 연구해야 되는데 “왔다, 애는 자나? 밥 줘.”로 끝나버린다 말이지요. ‘이제는 결혼해서 빼도박도 못할 건데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해가지고요. 그런데 여자 쪽에서는 실망을 하지요. 웃는 조건을 남편이 안 주니까 다른 데서 찾지요. 맨날 애하고 꺄르르 하면서 “아빠 밉지? 그지? 아빠 떼찌 해.” 아빠만 혼자이고 전부 엄마 편 같아요.

내가 하는 사랑을 동일성이라고 하는데 사랑은 초과입니다. 예상못한 초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때 내 범위 안에서만 사랑하기 때문에 결과도 너무나 유치하고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예상은 나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를 못해요. ‘내가 지금 있는 그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면 현재 나다운 것으로 만족한다.’ 이렇게 돼요.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초과적인 것이 왔을 때, 다시 말해서 예상 밖의 것이 왔을 때 그것은 나를 보고 달라져야 한다는 요구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해? 너는 달라질 필요가 있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렇게 해놓고 예수님이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보는 그 사랑의 질의 폭과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랑의 폭이 달라요. 폭의 양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질이 달라요. 왜 그렇냐 하면은 예수님은 누구까지 아느냐 하면 아버지를 알아요.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아버지하고 못 산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아요.

베드로가 자기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목숨을 바쳐서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는 올 수 없는 거에요. 왜? 네가 보기에 너는 최선을 다한 것 같지만 내가 아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너는 천국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내가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다시 올게.” 그 처소를 마련하고 오는 게 뭐냐 하면은 성령이 함께 하는 거거든요. 성령이 함께 오게 되면 베드로는 이 땅에서 원치 않는 죽음으로 가야 돼요.

그래서 자기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고생 되게 할 거에요. 또 했고요. 누구 때문에, 누구의 이름으로 고생합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고생하는 거에요. 이 세상이 아예 정나미가 뚝 떨어지도록 만들었어요. 내가 지난 낮설교에 그런 것을 했잖아요. 이 세상에 죽치고 있을 생각을 하지 말고 이 세상을 그냥 통과하라고요. 통과하고 관통해야 되지 자꾸 이 세상에 죽 치고 살 생각을 하면서 “아파트 주세요, 아니면 장사하게 수리 좀 하게 하여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거에요. 그냥 지나가라고 준 것을 가지고 죽 치고 퍼져가지고 앉을 생각만 한다 말이지요.

예수님이 가는 코스가 공생애지요. 그 코스대로 갑니다. 주님이 죽 치고 앉으셨습니까, 아니면 통과했습니까? 주님이 통과했다면 우리도 같이 통과하는 거에요. “세상 구경 한 번 잘했네. 지옥 구경 한 번 잘했네.” 하고 그냥 통과하면 됩니다. 왜? 나그네니까요. 우리의 본향은 따로 있어요. 거기에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게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했다는 말은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그 완력의 힘은 늘 미약하고 환경이 바뀌면 언제든지 손을 놓아 버려요.

그런데 우리가 손을 놓았지만 우리의 멱살을 쥐고 있는 손은 절대 놓지 않거든요. 주님이 우리를 쥐고 있는 이 완력이 얼마나 강한지 로마서 8장에 보면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어떤 권세자, 마귀나 어떤 정치적인, 북한이냐 남한이냐 어떤 것이라도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난 것의 의미를 네가 수용한다면 너는 끊어지지 않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걸 안다는 것을 인식론이라고 하는데요. 주님에 대한 인식은 두 가지가 겸비되어야 돼요. 예수님이 주신 인식과 내가 주님을 사랑해서 내가 이익을 보겠다고 하는 인식, 둘 다를 항상 갖고 있어야 돼요. 만약에 하나를 갖고 있어버리면 이게 내 욕심인지 주의 뜻인지를 몰라요. 둘 다가 있어 병행되어서 죽을 때까지 계속 가면서 서로 다투어야 되고 서로 싸워야 돼요. 내부적인 투쟁이 일어나야 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야 되는데..

어떤 데에 보니까 돌잔치를 하는데 애가 기어이 잡겠다는 것을 못 잡게 책상까지 옮겨가면서 (잡겠다는 것은 따로 있는데) 마이크를 잡으라는 거에요. 마이크를 잡으라는 것은 아나운서가 되라는 거에요. 놀라운 것은 애가 그 역경과 고난을 딛고 기어이 골프공을 잡았어요. 그걸 무를 수도 없어요. 많은 증인들이 있거든요. 그렇다고 애를 때려가지고 할 수도 없고요. 꼭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과 똑같아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로마서 8장에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를 쥐게 하겠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잖아요.”라고 하는 거에요. “주님 사랑해서 헌금을 많이 했으니까 이번에는 눈 감고 내 뜻대로 해주세요.” 초과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울어야 됩니다. 울어야 웃음이 나와요. 그렇게 우리가 잡겠다는 것은 무엇을 피하기 위한 것이냐 하면은 요한복음 11장에 나와 있는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거에요.

그런데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그 자체가 공포를 유발시킵니다. 공포를 불러들일 뿐입니다. 성경을 한 번 봅시다. 요한3서 2절, 쫌(!) 유명한 말씀인데 누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여기에서 사랑하는 자는 요한1서에 나옵니다. 요한1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하면은 예수님 앞에서 나는 의가 없고 죄만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게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죄만 아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되어가는 것이 범사에 잘 된 것이고 지금 몸이 이런 상태가 너무나 강건한 거에요. 왜냐하면 내 영혼이 무슨 영혼이냐 하면은 죄인인데 죄인인 자가 주의 사랑으로써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사랑을 받는 영혼이 되었거든요. 그렇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어떤 일이라든지 건강 문제에 있어서 자동적으로 그게 격이 맞는 거에요. 어떤 격에 맞지요? 아무것도 없어야 되는데 오늘날 왜 이렇게 꽁치라도 한 마리 올라왔지? 이게 범사에 감사하는 거에요. 그래야 그 영혼이 늘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사”(요한1서)가 계속 살아있잖아요.

영혼 속에 계속 주님의 사랑이 살아있게 하는데 필요해서 적절한 상황이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거에요. 몸이 아프더라도, 암에 걸리더라도, 이건 내게 합당한 조치가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몸이 안 좋아요.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주에게 응답을 받았어요. 응답을 받았는데 그 응답이 사실은 이미 아는 응답이에요. 고린도후서인데 그 앞에 나오는 게 응답이에요. “내가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앞에 다 다온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이건은 벌써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나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 나왔던 이야기에요. 나왔던 이야기지만 이걸 실습을 해야 되거든요. 실감이 나야 된다고요. 그냥 지식 말고 실감이 나려면 우리로 하여금 슬픔을 겪게 해야 되는데 사실 내 욕심 때문에 슬프지 슬퍼할 이유가 없어요.

주께서 무슨 슬픔을 줍니까? 기쁨을 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우리가 슬퍼하는 거에요. 콩을 안 먹겠다는 애에게 엄마가 콩을 먹이면 애는 슬프잖아요. 하여튼 청소년들을 보면 얼마나 못 됐는지 몰라요. 그렇게 공부하라고 해도 공부 안 하고 연예인 좇아다니고 “난, 당구를 해가지고 어떻게 할래.” “나는 SM에 들어가서 가수해가지고 뭐 어떻게 할래.” “축구할래.”라고 하다가 나중에 커서는 “그때 엄마 왜 공부를 안 시켰습니까?” “네가 가수한다고 했잖아.” “때려서라도 해야지요.” (때리면 가출하지요.) “때려서라도 공부를 시켜야 될 것 아닙니까?”라고 해요. 

하여튼 잘 되는 것은 다 자기 탓이고 못 된 것은 다 부모 탓이고 금수저니 은수저니.. 시리아 보세요. 지금 한국에 못 들어와서 난리인데요. 밥 주지, 옷 주지 얼마나 좋아요. 세상에 내전도 없고요. Is가 있어요? 얼마나 감사해요. 지금 폭탄을 누가 장치하거나 합니까? 여기를 보세요. 폭탄이 없잖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런 감사하는 마음이 영혼이 잘 된 거에요. 영혼이 잘 되니까 모든 매사가 감사거리로 보이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순복음이라고 사기를 쳐가지고 교회를 세워놨으니 말이지요.

11장에서 죽음을 의도적으로 유발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그냥 죽고 난 뒤에 “정신 차려. 이제 정신 차렸지, 살려줄게.” 이게 아니라 그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한 거에요. 왜냐하면 12장에 예수님이 별세하기 전에 마리아가 향유병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씻었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2장 3절에요. 인간이 된 거지요. 마리아가, 내 성질을 보여줄 게 아니고, 예수님의 속성과 본질이 나를 통해서 나와야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왜 죄를 지셔야 되는가, 도대체 예수님께서 담당한 게 뭐냐 이 말이지요. 담당하신 게 우리의 죄잖아요.

지난 낮설교 때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토해낸 것은 우리 속에 들어있는 거라고요. 들어있는 것은 천국 가는 데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등허리를 쳐서라도 토해내게 하셔가지고 욱하고 구토한 물이 바로, 천국에 부합되지 않는데 이미 내 속에 가득 차있는, 이런 것들이지요. 평생 살면서 계속 토해내는 거에요. 돈을 좋아하는 것, 친구 많은 것, 세상의 인기, 이것을 타인의 시선이라고 하는데 타인의 시선에 놀아나는 내 모습, 이런 것들이요. 나는 용서했는데 남이 용서해서 내가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그것, 기껏 그래봐야 산장의 여인인데요. 아무도 찾지 않는 산장에 들어가서 혼자 책임지면서 속죄하면서 살겠다고 하지요. 마리아가 속죄하듯이 이렇게 자기의 향수를 뿌린 게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이 이미 예수님이 흘러가는 절차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내가 째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시체를 해부해서 인간의 알통을 보면 힘줄이 여러 갈래가 있답니다. 그 여러 갈래가 전부 신자들의 갈래라면 이 전체가 예수님의 공생애가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인생을 품고 십자가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알통이라면 우리는 그 안에 있는 한 가닥의 힘줄들이지요. 평소에 마그네슘을 좀 먹어줘야 돼요. 안 그러면 쥐가 납니다. 하여튼 내가 서울에 갔다가 집에 가면 아침에 쥐가 나가지고 몇 시간째 다리를 펴지를 못해요. 기차를 타는데 기차에서 펴지를 못해서 그래요.

근육 한 가닥, 한 가닥이 우리지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한다는 게 내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입니까? 아버지가 일하시니 예수님도 일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흐름을 따라 사는 거에요. 예수님의 흐름을 추적해가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흐름이 어디에 있는데 추적을 합니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흐름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억울하게 당했던 흐름, 예를 들면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것 있잖아요. 억울하게 그 일을 당했을 때 그걸 남의 일로 보지 말자는 거에요.

세월호 아이들이 죽었을 때 남의 일로 보지 말라는 거에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세월호 사건을 그렇게 욕하더니 갑자기 좋은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는데 제 말은 세월호가 물에 빠진 것을 주의 일로 정리하라는 말이에요. 돈 3억 챙길 생각하지 말고 그걸(주의 일)로 정리하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걸 2년째 끌고 있잖아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죽였는데 왜 자꾸 엉뚱한 사람을 붙들고 그렇게 하냐 이 말이지요.

범위가 좁아서 그런 거에요. 원죄를 몰라서 그래요. 아까 강의하고 똑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출현의 의미를 몰라서 그래요. 주의 일 하시는 것을 생각을 안 하고 자기의 일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원망밖에 나오지 않는 겁니다. 이 세상은 전부 주님께서 일으키는 알통 안에 있는 힘줄들이에요. 우리도 힘줄 중에 하나고요. 그러니까 억울하게 당했던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그 순간만은) 주님을 의식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계획대로 착착 잘 된다, 예를 들어 주식 천 주를 사놓았더니만 10배가 올라서 신문지상이나 sns 같은 데에 사연이 나온, 여의도에 40억 뿌린 여자처럼 졸지에 교사하다가 람보르기니 타는 것은 전부 주식이나 부동산을 해서 그렇게 된 거거든요. 이거 하다가 쫄딱 망할 때 ‘아, 주께서 일하셨구나. 제발 좁은 세상에서 승부 걸려고 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마귀와 승부를 해서 이겨야지 그냥 세상 사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살지 마라.’라고 하는 주의 뜻을 알게 되는 거에요.

마리아와 마르다 오빠가 아파요. 그래서 전갈을 보내서 예수님한테 오빠가 죽으니까 빨리 와주시라고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보게 되면 교인들이 제일 신앙생활이 안 될 때가 있는데 그때는 언제냐 하면은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는데 몸이 아플 때 그때 굉장히 갈등하고 어지러울 정도로 회의에 많이 들어요. 납득이 안 된다는 거에요. 납득이.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에요. 내가 왜 아파야 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에요.

그것은 봉사해놓고 봉사로 끝난 게 아니고 봉사한 값을 좋은 일, 반대급부로 받을 거라는 기대가 높았다가 아프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교회에 한 달째 안 나오고 헌금 다 떼먹고 놀음하고 실컷 나쁜 짓을 해가지고 아파보세요. 같이 아파도 범사에 감사할 겁니다. “주여 정신 차리라고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다음 주부터 교회에 꼭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되는데 봉사를 하다 보니까 은근히 노리는 게 있어요. ‘이쯤 했으면 사업이.. 요새 봉사가 왜 이리 재미있게 잘 되노? 이건 분명히 어떤 상급을 주기 위한 준비를.. 30배, 60배 거기까지 너무 욕심내지 말고 세 명만 끌여들여도 됩니다.’라고 하다가 몸이 아파보세요.

예상 밖으로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느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느낌이 들 거에요. 그때 얼마나 실망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한 텀을 놓는 거에요. 이번에 요한계시록 「생명의 신호」라는 책이 나옵니다. 성도가 어떻게 이긴다고요? 이기는 자에게는 이런 복을 준다고 7교회에 이야기했는데 문제는 이기는 거에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긴다고 되어 있거든요. 어떻게 이깁니까? 한 박자 쉬고 들어가는 거에요. 한 박자 쉬는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다시 말해서 단절된 것, 우리는 망해도 싸다라고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게 되면 모든 것을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럴 때 마귀는 “졌다. 아이고 넘어올 수 있었는데.. 꼬실 수 있었는데.. 졌다.”라고 하게 되지요.

마귀한테 가장 잘 속아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착한 일을 할 때입니다. 사실은 착한 일은 없어요. 모든 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착한 일은 없어요.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일을 쭉 하다가 갑자기 3시와 4시 사이를 착한 일로 끊어버리면 이 흐름이 지속이 되지를 않고 뭉치면서 이게 우상이 되고 맙니다. 갑자기 자전거가 스톱이 되면 넘어지잖아요. 이런 식이에요. 나라가 지금 잘 살아서 국민소득이 3만 5천불이다. 모든 국민에게 300만원씩 주기로 투표하자. 그런데 75%의 국민이 반대를 했어요. 왜냐하면 300만원을 받아버리면 소비에 정신이 팔려가지고 생산에 소홀히 하게 돼요. 그러면 이 자전거는 넘어지는 겁니다.

사회주의가 이래서 문제에요. 잘 사니까 뜯어먹자는 겁니다. 계속 밟아야 돼요. 이 세상은 희망을 주는 곳이지 행복을 주는 곳이 아니에요. 고생을 해도 낙이 있어야 일을 하게 되지 그냥 희망이 현재화 되어버리면 그건 허무로 변합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잔치집에 가면 맛있는 음식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언제 기분이 좋으냐 하면은 음식을 먹기 전에만 기분이 좋아요. 그 다음에 슬슬 먹어보세요. 그러면 그 기대하는 기쁨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효용체감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요. 갈수록 점점 체감해가지고 이제는 하나 먹으라고 하면 “아이고 안 먹을란다. 아이고 난 그만 먹을래.”라고 하잖아요. 기쁨이 없어졌어요. 그러나 음식을 볼 때 왜 기쁘냐 하면은 먹지는 않았지만 마치 그 모든 음식이 내 위 속에 다 들어온 것 같은 희망이 나를 기쁘게 합니다. 일시적으로 엔돌핀이 막 돌고 기쁘게 하지요.

3, 4살 때 천재 아닌 애가 없습니다. 그때 한글을 배우거든요. 최고 천재에요. 천재는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천재가 아닙니다. 그냥 남의 집에 애나 패지 말고 몸만 건강하면 그것으로 고맙지요. 그것만 해주면 좋겠어요. 희망이 있을 때 그 희망이 기쁘게 하는 거에요. 그 희망은 허구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허구에 놀아납니다.

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빠가 아파도 기뻐요. 왜? 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요. 예수님은 희망이에요. 예수님만 있다면.. 왜? 남 좋은 일을 많이 했거든요. 죽은 귀신을 쫓아냈지요. 회당장 딸을 살려냈지요. 예수님은 손만 대면 죽은 자도 다 살려내고 했다는 것이 풍문으로 퍼져서 들었거든요. 그 예수님이 특별히 나를 사랑하거든요. 그냥 특별히가 아니에요. 경상도 말로 턱별히 나를 사랑하거든요. 왜? 오면서 항상 내 집에 거했거든요.

언니는 바쁘다고 잡채하고 동생은 발 앞에 앉아가지고 성경을 듣는데 그냥 들었습니까? 다리를 꼬지 말라고 해도 다리를 꼬고 들어요. 그러니까 언니가 약이 올라가지고 예수님을 보고 “동생을 좀 나무래주세요. 싸가지도 저런 싸가지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구 편을 듭니까? “그래? 너는 뭐 한다고 그렇게 분주하노? 얘는 더 좋은 편을 택했느니라” 그럼 잡채는 누가 만들고요? 어디 중국집에서 시켜먹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희망이에요. 오빠가 아파도 걱정을 안 했어요. 한 박자 쉬고를 모르는 거에요. 그래가지고서는 좁은 현실, 우리 집 행복, 이것만 봤지 아까 이야기한 원죄까지 넓혀서, 밑에 있는 인간의 근본적인 죄 때문에 주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죽음이 현실화 되지 않았고 아직 살아있을 때나 더 살고 싶은 거에요. 백 세 인생입니다. 70, 80 세에 부르지 마라 내가 알아서 갈게.라고 하는 그 백 세 인생처럼 그렇게 계속 예수님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 겁니다.

마치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오늘 우리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죽고 난 뒤에 예수 말고 지금 있을 때 내가 원하는 걸 채워주는 예수, 그것 때문에 교회가 장사가 되고 있어요. 교회에 가서 내세만 이야기하면 장사가 안 돼요. 실제로 어떤 실적이 있어야 돼요. 내가 착한 일을 한 만큼 어떤 보답이 있어줘야 내가 더욱 착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동기가 되잖아요.

그런데 진짜 성도한테는 착한 일을 한 것을 실망으로 바꿔주십니다. 그러면 ‘그때 괜히 봉사했어. 괜히 십일조 많이 했어. 십분의 일만 낼 것을 가지고 십분의 이를 내는 쏘를 했으니 완전히 나는 손해봤잖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늘 우리 자신에게 실망을 해줘야 우리가 버스 직행 6번을 타지 안 그러면 (뭐든지 뜻대로 잘 되면), 자꾸 우리는 엉뚱하게 지옥 가는 데로 진짜 가게 돼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하세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말했으면 진짜 매사가 내 뜻대로 안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라고 해놓고 은근히 내 뜻대로 되기를 노리고 말이지요. 무슨 꼼수가 그런 꼼수가 있어요. 알파고한테 다 들키게 되어 있어요. 알파고가 그 얄팍수를 모를까요? 이세돌을 이겼는데요. 진짜 알파고가 잘 두던데요. 이세돌은 9단이고 알파고는 바둑 12단이에요.

예수님께서 한 박자를 쉽니다. 자 여기에서 중요한 인물은 주변의 제자들이에요. 예수님은 지금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보기에 나사로 가정하고 상대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예수님이 여기에다가 누구를 집어넣는가? 제자들을 집어넣어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는 절대로 사도가 되면 안 돼요. 주변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제자들이 다시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회귀해서 볼 때 그 모든 것이 모든 사람(성도)에게 다 적용될 수 있는 사항을 열두 제자인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열두 제자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대표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알려주지요. 그래서 수행원들을 죽 데려가면서 그들에게 먼저 묻습니다. 11장 9절~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은 그냥 봐서는 이해가 안 돼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낮 속에 밤이 있고 밤 속에 낮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낮이 되면 밤이 없고 밤이 되면 낮이 아니라고 여기는 거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일은 낮과 밤이 공존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살았다 하지만 죽은 것이고, 나사로처럼 죽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산 것으로 만들고 이 사람이 지금 나와 더불어서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거에요. 현재 제자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하지만 그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다시 보게 되면 ‘아, 이건 나사로가 죽은 사건과 연관해볼 때 이런 뜻이구나.’를 아는 거지요.

죽은 자에게 산 자가 있다는 말은 죽은 자는 아담에 속한 모든 자를 말하는 것이고 산 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본인만 산 자로 봐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걸 못 믿느냐 하면은 본인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산 것처럼 예수님도 사신 것 맞지요?”라고 하면서 한꺼번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에요. 자기가 살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그 죄 때문에 필히 죽은 자로서 우리와 함께 있어야 된다 이 말이지요. 죽은 자로서.

쉽게 말해서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려내면서 죽은 자라고 분명히 언질을 해주면서 살려내는 겁니다. 이것은 너희들 동네에서 빠져나와서 내 이 동네, 예수님 동네, 천국에 이동하려면 그러한 개념 교체가 일어나야 된다는 말이 됩니다. 완전히 개념이 바뀌어져야 하는 거에요. 존재가 기능을 하는 게 아니고 기능이 먼저 있고 그 기능을 하신 분이 따로 어디에 계시고 그래요. 우리는 존재로서 주님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그래봐야 개념으로 그치지만, 이미 주께서 일을 그렇게 벌여놓았으면 그분의 존재는 따로 계신다 이 말이에요.

11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또 같은 이야기입니다. 잠들었습니까. 죽었습니까? 잠든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고 죽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인데 예수님은 무슨 용어를 씁니까? 여기에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잠들었다고 해요. 누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거에요. 잠들었다고 하니까 이 소리를 제자들이 듣지요. “잠들었으면 깨우러 가면 되겠네요?”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주님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약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아직 죽지는 않고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깨우면 “아우, 이제 병이 나았네.”라고 할 것이고 그러면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11장 4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개념을 몇 번 바꾼 겁니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는 거지요. 그 다음 4절 후반을 보니까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본인만 아는 이야기를 한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주님께서 나사로를 가지고 노는 겁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예수님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죽고 어떻게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멀쩡한 나사로가 일부러 병이 들게 하고 죽게 하고 나사로를 다시 되살리는 작업을 하는 거에요.

알통 안에 있는 힘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알통 안에 들어있는 힘줄입니다. 그러면 왜 개념을 바꾸느냐? 이것은 대화를 하는 상대가 제자들이고 대화를 하는 상대가 마르다고 마리아이고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때마다 서로서로 의견을 수정하기 위해서 새로운 환기를 하는 겁니다. (참 이런 이야기는 어려운데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합니다. 어려운 이야기인데 듣기만 들어보세요.)

사인(sign) 알지요? 보통 서명할 때 하는데요, 사인마다 완벽하게 일치되는 겁니까, 아니면 비슷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같은 사인을 할 때. 비슷하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지요. 이게 비슷하고 모방이 되기 때문에 사인은 효과를 보는 겁니다. 상당히 역설적이지요. 비슷하기 때문에 사인이 효과가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필리핀에서 누가 한 것처럼 맞춰가지고) 골고다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야 됩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의 사인이 구원의 사인이라면 우리는 사인은 예수님의 사인과 일치되지 않아요. 사람이 죽는 원인과 모양이 성도마다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사자한테 물려죽고 어떤 사람은 돈에 미쳐서 죽고 어떤 사람은 수영하다가 죽고.. 다 달라도 모두 다 순교에요. (요한계시록) 주님 안에서는 다 자는 거에요. 그래야 주기철 목사와 같은 특정 죽음이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다양한 죽음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남이 죽는다고 따라 죽고 하지 마세요. 너는 너 죽고 나는 나 죽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사인의 효과입니다. 그 다음에 4절에 죽을 병이 아니고 누구를 전하는 거지요? 예수님의 영광이지요.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의 영광이 아닙니다. 그 가정의 믿음이 좋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의 영광을 위해서 그 가정을 이용한 거에요. 6절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 더 유하시”다가 갔어요.

그래놓고 아까 본 9절에 보면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갑자기 낮과 밤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10절에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이야기를 가지고 “너는 낮에 속한 사람이야, 밤에 속한 사람이야?”를 묻는 겁니다. “낮이니까 낮에 속하네요.” 그러면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는 “뭐 같은 한 동네이고 지금 낮이니까 같은 낮이겠지요.” “아닌데, 밤인데? 실족하는데?”

주님한테 희망을 걸다가 실망을 했을 때 그건 실족이 되는 겁니다. 실족하는 순간, 그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이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원망이 돌아가면서 순간적으로 자기들은 밤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밤의 여왕인가? 밤의 모습을 드러내지요. 결국 “낮과 밤”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의해서 판정이 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일차적으로 누가 알아야 돼요? 열두 제자가 그걸 알아야 돼요, 몰라야 돼요? 알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가면서 계속 누구를 보고 이야기를 합니까? 제자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가 정말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 난해한가를 한 번 봅시다. 12절에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죽었으면 낫겠나이다가 아니지요?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걱정할 것 없네요. 13절에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라고 했는데 이건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고 나무란 이야기입니까, 아닙니까? 이건 사실 인간적으로 따져서 나무랄 이야기는 아니지요.

어느 인간이 “여보, 나 죽으니까 좀 시끄럽게 하지 마라.”라고 하면서 자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너는 죽었다고 왜 이야기 안 해?” 이런 식으로 예수님이 이야기하시겠어요?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이건 그냥 넘어갈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범위를 넓혔어요. 예수님 자신의 영광이지요. 영광은 빛을 이야기합니다. 빛은 낮에 나타나요, 어둠에 나타나요? 낮에 나타나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함께 있으면 무조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낮이고 낮이면 빛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밤과 낮을 자기의 좁은 현실의 입장에서 정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낮에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될 일을 제자들이나 마리아, 마르다는 죽은 나사로에 관심이 있고 거기에다가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밤에 있는 인간들을 예수님의 영광으로 바꾸어줘야 할 필요가 있지요. 이것을 바꾸어주는 데에 오빠 나사로를 이용하는 겁니다.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런 말을 할 때, 마르다가 나중에 또 따질 때 그때 오빠는 뭐하고 있었습니까? 1. 잠자고 있었다. 2. 죽었었다. 몇 번입니까? 진짜 잠자고 있었어요. 왜?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산 사람은 간암에 걸려 몸이 아파 죽으나 안 그러면 내장암에 걸려 죽으나 그것은 하나의 인간들이 규정한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고 그냥 주님에게는 그게 잠자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잠자기를 되게 싫어하네요. 밤에 뛰놀기 좋아하지 낮에 잠자기를 싫어해요. “아이고 낮에 자면 안 되는데..” 이 죄 많은 세상에 잘 뛰어서 대통령이 되고 나중에 유엔 사무총장이 되기를 원하지 주님 안에 자는 것을 원치 않지요. 나사로가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지금 그걸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금 나사로는 그냥 잠자고 있어요. 그래야 모든 영광이 나사로에게 돌아가지 않고 누구한테 돌아가지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예수님도 일하신다. 오직 모든 영광은 예수님께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4절에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그제사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틀간 늦추는 이유는 뭡니까?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 거에요. 그리고 그걸 제자들에게 이제 나사로에게 가는 길에 밝힙니다. “나사로는 죽었다.” 그 다음 15절에 봅시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나사로의 죽은 사건을 경유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실제적으로 내 말을 믿지를 못하고 이론적으로 엉뚱한 소리를 할 거다. 계속해서 열두 제자들을 실습시키는 거에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나사로가 실습 도구가 된 겁니다. 완전히 의과대학이에요.

그리고 뭐라고 합니까? “그에게로 가자”라고 했어요. 그러면 이미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가서 뭐할 거에요? ‘아, 장례하는 데에 조문하러 가는구나.’ 그래서 도마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해요. 그러니까 지금 “가자”라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실 때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지금은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셨어요? 나사로가 잠자고 있으니까 깨우러 가자.라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죽었다부터 출발해서 예수님이 만든 개념, 잠자는데 깨우러 가자까지 이동을 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죽었다고 이야기하니까 도마가 뭐라고 합니까? 이제는 우리도 같이 죽자. 나사로의 잠자는 본래의 기능은 생각을 못하고 (가봐야 이미 죽은 사람은 죽었으니까요.) 우리도 같이 주와 함께 어디 가서 죽자. 이렇게 이야기한 거에요. 나사로가 죽었다는 인간적인 이 개념을 잠자고 있다는 개념으로 바꾸기 위해서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몰고 가게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서 누가 마중을 나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가 마중을 나오지요? 마중을 나오는 그 모습 속에서 결국 예수님은 울어버리지요. 예수님은 두 번 우십니다. 어떤 사람은 세 번이라고 하는데요. 운다는 말은 결국 누구 때문이에요? 인간들 때문에 울지요. 그러면 울음을 보고 인간들이 뭘 느껴야 됩니까? ‘아, 우리가 실수했거나 뭔가를 잘못했구나. 우리가 실망을 시켰구나.’라는 것을 알아야 되지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우리의 원죄에요. 세례 요한만 기초가 아니고 예수님도 세례 요한의 자리에서 단절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좁은 현실이 다라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주께서 우시고 탄식하시고 심지어 나중에 십자가에 죽어서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찢기시고 하신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에 마귀로부터 갇혀있으니까 이걸 예수님과 아버지만 아시는 범위로 건너뛰게 해주려고, 거기로 확장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거에요.

그리고 그 작업은 지금 우리, 성도에게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맨날 실수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주님이 구원하셨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깨닫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실습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주의 말씀이 점점 더 실감나게 해줄 거에요. 잠자는데 깨우러 가자. 이것이 정말 실감나게 해주실 겁니다. 기다려보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할 일은 주께서 이미 일하심을 따라서 그 결과들 속에 참여하는 그 일인 줄을 압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그러한 제한된 현실 말고 주님이 아시는 넓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얻은 진정한 생명이 무엇이며 우리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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