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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8 01:30:22 조회 : 2033         
우리 140417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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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2.222) 14-04-30 00:35 
가락-요한복음 1장14(우리)140417a-이 근호 목사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장 14절 해봅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하면 우리가 믿어집니까? 이게 안 믿어지죠. 안 믿어지는 게 정상 이예요. 왜냐 하면 우리 인간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안 믿어요. 우리가 개입되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인간이 시작하지 않은 일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법이 없다는 식으로 우리는 살아왔습니다.

식구 중에 아무도 밥을 한 사람이 없는데 보니까 상이 가득하게 반찬도 많이 해서 차려졌다면 분명히 이건 도깨비가 와서 하든지 요정이 와서 하든지 천사가 와서 하든지, 아니면 수상한 가정부가 와서 하고 몰래 사라질 수도 있는 문제죠.

그러면 우리는 깜짝 놀라죠. 왜 깜짝 놀랄까요? 앞에 아무도 차리지도 않았는데 식구 세 명이 아무도 차리지도 않았는데 와보니까 밥상이 한 상 잘 차려져 있더라. 그게 왜 놀랄 일입니까?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가 일을 시작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시작을 안 했죠. 인간 쪽에서 시작을 안 했는데 어떤 결과가 나와 버리면 사람은 놀라죠.

그런데 그 일이 그 다음날에도 밥상이 차려지면 그러면 그때부터는 놀랄 정도가 아니고 무섭죠. 그야말로 뭔가 우리 집에 귀신이 사는 게 분명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단한 번 밥상이 차려지고 그 다음부터 아무 일이 없었다 하면 우리는 곧장 잊어버리고 다시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인간이 먼저 일을 개시해야 반드시 이 세상에는 일이 일어난다. 인간이 시작하지 않은 일이 이 세상에 절대로 일어나는 법이 없다.‘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정서와 마음은 안정이 돼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안정하게 되는 이유는 변함없는 원칙 속에 있기 때문에 안정이 되고 그 원칙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시작하는 일은 절대로 이 세상에서 생겨나는 일은 없다입니다.

그런데 아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됐죠? 말씀이 육신이 되는 걸 누가 부탁한 적 있습니까? 요청한 적 있습니까? 사람이 누가 개시한 적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해봤자 사람이 먹히겠어요? 안 먹히겠어요? 절대로 먹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이거는 인간이 믿을 수 없는 말이 됩니다. 이 말씀뿐만 아니고 모든 요한복음 모든 성경 전체가 인간은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리 한번 해봅시다. 1.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책. 이게 성경입니다. 2. 믿는 자. 두 번째 성경에 보니까 믿는 자가 있어요. 1번에서 2번으로 하기 위해서 믿을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벌려놨기 때문에 우리는 안 믿는 게 정상이고요. 안 믿는 게 정상이기 때문에 믿으려고 시도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시도를 안 하겠죠. 왜, 안 믿어지니까 믿으려고 시도를 안 해요. ‘아! 좋긴 좋은데 한번 믿어볼까?’ 이러려면 뭔가 마음에 들어야 되는데 전혀 우리가 예상치도 못할 걸 떡 걸쳐놓고 그것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이유도 없고 믿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뭡니까?  믿는 자가 생겼다는 거예요. 이건 이상한 일 이예요. 만약에 저는 안 믿는데 집사님이 믿는다면 ‘집사님, 돌았어요? 내가 믿을만한 가치도 없고 믿지도 않는데 왜 믿죠?’ 하면 집사님이 ‘내가 믿을만해서 믿습니다.’ 하거든요. 그러면 같은 인간 아니십니까? 분명히 같은 인간이거든요. 같은 인간이라면 한쪽은 믿고 한쪽은 안 믿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안 믿으면 다 같이 안 믿고 믿으면 다 같이 믿는 것이지,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동일하기 때문에 누구는 믿고 누구는 안 믿는다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1번도 인간이 믿을만한 내용이 아니니까 안 믿고 2번 믿는 자 있다는 그것도 안 믿어요. 두 번째가 중요하죠. ‘믿는 자가 생겼습니다.‘라는 말을 안 믿어요. 믿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3. 구원, 영생을 얻는다. 믿는 자는 독생자를 믿음으로 뭘 얻는다? 영생을 얻는다 하잖아요. 이것도 안 믿어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전체 내용이 다 이거는 우리가 거부할 수밖에 없는 그런 내용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마는 1, 2, 3번으로 내려갔잖아요. 그런데 제가 3번부터 시작해볼까요? ‘여러분 영생을 얻습니다.’ 하면 갑자기 어떻게, 어떻게 대번 거기만 가져요. 요한복음에는 1번부터 시작했는데 방금 제가 3번부터 시작했죠. 영생을 얻는답니다. ‘그래요? 죽어서 영원히 살지. 천국, 천국, 천국. 천국 가고 싶어. 인 그래도 궁금해 죽겠어.‘ 좋아한다 말이죠. 그런데 믿는 자 ’믿지 뭐. 영생 주겠다는데 그걸 왜 못 믿어. 믿지 뭐.‘

그러면 1번 믿으려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걸 믿어야 ‘그것까지도 믿지 뭐. 그것까지도 믿지 뭐.’ 그러니까 3번부터 출발하니까 다 안 믿는 사람이 아니고 다 믿는 사람이 돼 버렸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뭘 믿느냐 하면 1번을 믿고 3번이 되는 게 아니고 3번이 탐이 나니까 영생이라 하는 것은 뭐와 대비개념이냐 하면 죽음과의 대비개념 이예요. 안 죽고 영생 얻는다니까 사람이 이미 자기는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해결책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3번 이야기하니까 걸려들었고 그 다음에 2번하고 1번을 믿는 자칭 믿는 자가 돼 버렸어요.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고 잘못된 이해입니다. 1번부터 시작해야 돼요.

1번부터 시작할 때 어떻게 시작되는가? 김 중우 집사님이 어렵다, 어렵다 했는데 할 수 없이 어려운 거 하겠습니다. 제가 질문을 할 테니까 답변해 보세요. 선악과가 어떤 나무인지 모르고 아담과 하와가 따먹고 난 뒤에 뒤늦게 하나님이 오셔서 ‘선악과 따먹었어?’ ‘따먹었어요.’ ‘이제 죽었어.’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먼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그들이 따먹었습니까? 먼저 하셨죠.

그렇다면 이게 뭐가 어려운 일이냐, 쉬운 일이지. 하면 어렵게 해볼게요.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죽음이 무서워요? 안 무서워요? 무섭죠.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고 수학여행 가면 무서워요? 안 무서워요? 안 무섭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고 이야기를 해놓고 따먹지 말라고 한 거예요. 그 말은“선악과 따먹지 마라”는 그 말씀자체가 이미 선악과 자체에서 벌써 발산되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 속에 이것이 침투되는 방식을 사용하신 겁니다.

말이 어려우니까 쉽게 합시다. ‘얘야, 안산 단원에서 수학여행 간다며?’ ‘내일 수학여행 가.’ ‘너 배타고 간다면서?’ ‘배 타고 가. 아빠.’ ‘너 죽어.’ 그런 말을 안 들었으면 그 애는 싱글벙글 재미나게 ‘낼 아침에 눈 뜨면 제주도에 10시에 도착한다.’가 되는데 그 말 듣고 난 뒤에 그 말이 ‘죽는다.’는 위협이 이미 아들 자아 속에 박혔죠. 그러면 남들은 007 빵 하면서 재미있게 노는데 그 애는 재미가 없어. 왜, 새로운 자아, 아빠가 배타면 빠질 수도 있다는 자아가 스며든 이상은 그는 벌벌 떠는 거예요.

결국 제 말은 뭐냐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이 선악과 자체에 고정된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자아의식을 유발시키는 말씀 이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선악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과 말씀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엮여져 있어요. 그럼 이 말은 뭐냐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말씀이 뭐된다? 육신이 된다는 것을 이미 예수님의 형상물인, 예수님의 상징물인 아담으로부터 이미 작용을 한 겁니다.

말씀이 어디로 파고들었다고요? 인간의 자아 속에 이미 파고 들어왔죠. 그러면 천국! 영생! 하늘나라! 우리는 나와 상관없이 가만히 있으면 그 나라가 환경에 주어지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면 내 자아의식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내 자아의식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환경이 좋으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천국에 부합되는 인간이 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생각하고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 영생의 나라를 만들거나 그걸 세울 수가 없어요.

천국은 아들의 나라거든요. 하늘나라는 아들의 나라입니다. 먼저 인간의 상식부터 생각한다면 하늘나라는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이 땅에서 사람들끼리 살다보면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천사들이나 거룩한 분들 사는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다. 그럴 때 하늘나라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럼 그 하늘나라는 지상의 하늘나라에서는 이 땅의 고통 많은 세상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는 얼마나 잘해놓고 살겠습니까? 거기에 합류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이 하늘나라는 어디서 나온 하늘나라냐 하면 고생되고 비참한 내 모습과의 투영된 반대편에 있는 대립된 이상적인 나라, 그 나라가 하늘나라죠. 그 하늘나라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내가 환경이 안 좋아서 고생하니까 하늘나라 보고 싶다. 이 땅에서 내가 고생 많이 했으니까. 난 지금 문제가 없는데 환경이 지금 안 좋기 때문에 이 문제성 없는 내가 좋은데 가서 호강 한번 누려보자.‘라는 하늘나라 있잖아요. 그 나라 없어요. 왜냐 하면 그 천국은 말씀이 완성된 나라라. 다 이루어진 나라거든요.

그런데 말씀이 어디로 이어졌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이미 연계돼 있죠. 그러면 우리 자신이 말씀을 순종치 못한 이상은 누구의 천국을 방해합니까? 내가 나의 구원과 나의 영생과 나의 천국을 내가 방해하는 거예요. 이런 마음 자세, 이런 자아 가지고는 하늘나라 갈 수 없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나라거든요. 예수님과 같은 인간성, 예수님 마음, 예수님과 같은 성품, 예수님과 같은 영혼, 예수님과 같은 자세가 아니면 천국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고 천국 못 들어가요. 환경이 문제가 아니란 이야기를 드립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누가 문제에요? 들어가고 싶어도 인간성이 달라지지 않고 바뀌지 않는 이상은 그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것은, 천국을 그리워한다? 인간치고 다 천국을 그리워해요. 사람이 고생하게 되면 뭘 생각합니까? 고생 없는 세계를 그리워하잖아요. 지금 안산의 단원 고등학교 학부모들이 생각하는 건 뭐냐, 제발 원상복귀만 되기를, 수학여행 안 가도 좋으니까 그 발랄했던 교복 입은 고등학교 2학년으로서 평소에 학교 다니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거예요. 원대복귀죠. 그게 됩니까? 안 됩니까? 그게 제가 그걸 회복이라고 하고 싶은데 그 원대복귀는 근거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너무 비참하고 아들이 죽고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 내가 현실로 받아들이기 너무 괴롭기 때문에 다시 옛날 다복했고 참 정답고 ‘엄마 나 100점 맞았어.’ 하고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때 아파트 문 열고 까불기도 하고 엄마하고 장난치던 그 애가 없어진 거예요. 지금 섭치 10도 차가운 물속에 사라지고 시체가 되었단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면 방법은 뭐냐, 신에게 대들어야 돼요. 최종 책임자는 해운회사가 아니고 하나님 이예요.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 져야 돼요. 하나님께 대들고 대들면서 기도하면서 원대복귀, 다시 말해서 아직 가능성 있으니까 실종된 자들 중에서 다시 살아 돌아와서 다시 행복하게 다복하게 품에 안기는 그런 자식 되게 해 달라 그 수밖에 없죠. 이게 뭐예요? 거기서 뭐가 빠졌습니까? 내가 말씀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내용은 어떻습니까? 빠져버렸죠. 그래서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은 안 되는 거예요. 진짜 천국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이 비로소 보여줄 때 그게 천국이지, 우리가 상상하고 내가 괴롭다고 애 잃어버렸다고 그걸 회복시킬 수 있는 그걸 보상받을 수 있는 그런 세계는 그건 종교의 세계지, 진짜 천국의 세계는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말씀이란 선악과에서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우리에게, 아담에게 전수되죠. ‘하나님, 저 선악과가 뭡니까?’ 아담이 그걸 요청했습니까? ‘하나님 선악과의 의미가 뭐죠?’ 요청했습니까? 일방적으로 선악과 심어놓고 일방적으로 아담에게 그냥 통보해 버렸죠. 마찬가지로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걸 우리가 믿고 싶어 했습니까? 이거 믿고 싶어서 매달렸습니까? 이 말씀이 그대로 일방적으로 뭡니까? 통보되는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어.“ ‘안 믿어집니다.’ ‘누가 믿으래?’ 하여튼 믿고 안 믿고 관계없이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이 되신 거예요. 끝! 이미 끝난 상황이라니까요. 그래서 끝난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가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두 번째 믿는 자 있잖아요. 우리가 믿겠습니다. 하는 그 믿는 자는 주께서 이미 거절한다 했죠. 다 잊어버렸네요. 1번,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우리 뜻이 아니니까 안 믿죠. 2번 믿는 자 생긴다. 우리 뜻이 아니니까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으니까 믿는 자 있을 이유가 없고 지나 개나 다 똑같은 인간이니까.

세 번째 영생, 믿는 자 없으니까 영생도 괜히 약만 올리다가 ‘들어올 사람 없지? 간다.’ 하고 떠나버리는 식이 되니까 없는 거예요. 우리 생각은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1번이 등장했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럼 2번은 뭡니까? 우리가 믿는 자가 누구냐? 우리가 찾을 필요 없어요. 1번 등장하면 반드시 뭐가 생긴다? 2번 생기도록 1번이 조치하게 돼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우리는 전혀 믿을 수가 없어요. 믿을 수 없는 데 믿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는 자는 뭐라 합니까? ‘믿을 수 없었는데. 이럴 수가.’ ‘믿을 수 없었는데.’ 허각이 불렀던. 아따 이럴 수가~♬ 도저히 믿을 수가. 어떻게 내가, ‘너 믿어져?’ ‘안 믿어져.’ 따님 믿어져요? 안 믿어져요. 믿어져? 안 믿어져. 나도 안 믿어져.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믿게 되어 버렸을까요? 뭘 주려고? 영생 주려고.

그러니까 영생이라 하는 것은 손들고 오라고 모집하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취직 광고 내는 게 아니고 신문에 ‘삼성에서 몇 명 뽑습니다.‘ 라고 뽑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요한복음 5장 말씀대로 아들의 택한 자로 호출당해서 믿어지는 거예요. 호출당해서 믿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누굴 믿어요? 믿어지는 나를 믿으면 안 되고 호출 당했으니까, 누가 나를 질질 묶어서 끄니까 ’에이 씨 누가 자꾸 끄는 거야?‘ 이게 믿음 이예요. ’너 요새 어떻게 사노?‘ ’아유, 참 누가 자꾸 잡아당기잖아.‘ 요게 믿음이라니까요. 요게 예수님 증거 하는 거예요. ’아유, 오랜만이다. 우리 초등학교 졸업하고 40년 만인데 반갑다. 요새 어떻게 지내노?‘ ’에이 씨, 누가 잡아당기잖아.‘ 이게 증거라니까요.

주님이 잡아당기는 거예요, 누가? 말씀이 육신이 돼서 다 이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럼 그 이야기를 왜 이제 와서 요한복음에서 하느냐? 구약에는 왜 안 했느냐? 구약에는 뭘 했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될 때 미리 그들에게 말씀을 줬습니다. 그들도 육신이거든요. 사람이니까 육신이잖아요. 육신에게 뭐가 임했다? 모세 율법이 임했거든요. 임하니까 거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이게 나왔어요. 우상숭배! 이스라엘 망했습니다. 망한 이유가 단 한 가지에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우상숭배 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예레미야, 에스겔 보면 좍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내가 지명하지 않은 다른 신을 섬겼다.

그러면 다른 신을 안 섬기면 되잖아? 이러죠.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안 섬기고자 해도 안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반드시 우상숭배를 하게 돼 있어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는데 그 우상숭배의 끝은 어디냐 하면, 참 이런 말도 어렵지만, 여러분 우상숭배 하는 것을 내가 본인이 우상숭배를 알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진짜 우상이 아닌 하나님이 나타날 경우에만 해당돼요.

우리 김 중우 집사님이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본인이 직접 나타나서 비교해봐야 아! 이것은 가짜고 이것은 진짜인지 들통 나잖아요. 우리가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우상숭배라 했죠. 그럼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우상숭배임을 충분히 드러내려면 이스라엘은 망하고도 그 다음에 예수님 오실 때까지 유대나라가 계속 이어져야 됩니다. 제대로 우상숭배가 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진짜 우상숭배 아닌 분이 나타날 경우에만 아하! 진짜 우상숭배라는 것이 확인되거든요.

제가 수원에서 그런 이야기해서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데, 간음죄라고 할 경우에 사람들이 ‘이건 간음죄입니다.’ 라고 판정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간음 안 한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간음이냐, 아니냐를 비교해요. 그거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그거 말이 안 되죠.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을 누가 줬습니까? 예수님이 주셨잖아요. 그럼 간음죄 판정을 누가 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해야 되는데 왜 바리새인이 돌 들고 왜 설칩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다 쫓아버린 거예요. 판정할 자격도 없는 것들이 왜 간음이니 간통이니 너희들이 왜 나서느냐 말이죠. 진짜 말씀 주신 예수님 본인인데.

그럼 여러분, 간음죄 안다고 치고 진짜 아는지 물어보겠습니다. 간음죄가 아닌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①번, 본인이 간음죄 짓지 않을 때 ②번, 본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③번, 예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할 때. 몇 번입니까? ③번이죠. 갑자기 간음죄냐, 아니냐에 갑자기 뭘 투입했습니까? 사랑이란 말을 투입했죠. 사랑이란 말을 투입하는데 ②번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도 있겠죠. 내가 사랑하니까 그건 내 사랑이죠. ③번이 뭐였습니까? 주님이 그 사람을 용서할 때.

그러면 용서 받지 않은 모든 인간은 간음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걸 바리새인이 몰랐던 거예요. 아까 어떤 분도 몰랐던 것이고. 자꾸 예수님이 나설 자리에 주제넘게 누가 나서느냐? ‘제가 할게요.’ 하고 자기가 판정가로 자꾸 나서는 거예요. ‘저는 간음을 안 했기 때문에 간음죄냐 아니냐를 제가 판정할게요.’라고 나선 거예요.

결혼한 사람 남편한테 묻습니다. 아내가 간음 안 한 이유 때문에 사랑하십니까? 간음 하나 안 하나 낯짝보고도 사랑 안 해요. 간음 하고 자시고 바람 피워서 갔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보세요. 인간들의 사랑도 보세요. 간음하는 영역을 떠나잖아요. 사랑이란 영역으로 봐야 된다고요. 그런데 그 인간인 경우도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 와야 모든 것이 우상숭배가 그때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그때까지 이스라엘, 유대나라 안 망해야 돼요. 안 망하고 언제 망해야 되는가,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 다음에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서 완전히 망해버려야 됩니다. 내가 올 때까지는 너희가 죄가 없으려니와 내가 왔으매 모든 죄는 죄로 다 들통 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그 말은 먼저 구약부터 있다 했죠? 육신인 이스라엘한테 뭐가 왔다? 말씀이 왔지만 그들의 육신이 내뱉은 그 본성은 뭐였습니까? 뭐로 끝났습니까? 우상숭배! 그들은 우상숭배의 의미를 에스겔한테 명령을 들었음에도 뭔 뜻인지 몰랐어요. 망하고 난 뒤에 유대나라 다시 만들어서 그리고 진짜 말씀이 육신 되신 예수님 왔을 때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 자체가 우상숭배인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바알을 섬겼습니까? 아니죠. 바알은 옛날 구약 때 섬겼고, 이 바리새인들은 구약을 완전히 외워서 우리가 두 번 다시 바알이나 다른 이방신을 절대로 섬기지 않겠다고 작심을 한 사람들 이예요. 그런데 그게 세상에 우상숭배일 줄이야. 우상숭배냐 아니냐를 자기들 본인은 우상숭배 아니라고 여기고 자기가 골라잡아서 여호와 선택하면 우상숭배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거 선택하면 우상숭배라고 여겼던 거예요. 그런 게 잘못이란 말이죠. ‘나는 교회 나가니까 제사 안 드리고 부처도 안 섬기니까 우상숭배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 죄가 되는 겁니다. 왜,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정리해 봅시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결국 우상은 누가 우상이다? 내가 우상이다. 구원의 방해를 누가 한다? 내가 한다. 왜, 우리는 내가 믿을 만한 것만 믿으니까. 다시 한 번 해볼까요? 1번은 말씀이 육신이 됐다. 이건 진짜 오늘 기억해야 돼요. 2번은 뭐였습니까? 믿는 자 있다. 3번은 영생이죠.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됐다는 것은 아무도 안 믿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믿지를 못하죠. 따라서 믿는 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믿는 자가 있을 리가 없죠. 따라서 믿는 자 없으니까 믿는 자에게만 뭐 준다? 영생 주어지는데 영생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1번부터 하니까 아무도 믿는 자 없는데 3번부터 시작하니까 다 믿네. 영생 준다는데. 어떻게? 믿으라고? 다 믿죠. 뭘? 말씀이 육신이 된 걸, ‘네 믿습니다.’ 이러니까 다 가짜가 돼 버린 거예요.

주께서는 3번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1번부터 출발하는데 출발하는 방식이 뭐냐, 구약을 반복합니다. 너희는 뭐다? 너희는 너희 자신이 우상이다.‘ 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뭐라 합니까? ’우리는 바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자, 섬긴지 안 섬긴지 해볼까? 해서 요한복음이 시작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 다 거부하고 주님이 하신 말씀 못 알아듣고, ‘예수여,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포도주가 떨어진 거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포도주 떨어지면 택배로 주문하면 되지, 왜 예수님께 이야기합니까? 그런 이야기, 모든 이야기가 결국은 인간 자신이란 자체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자가 되지 못하고 따라서 영생 얻는 그런 권리나 그런 능력은 인간에게는 일찌감치 없음을 분명히 해주는 겁니다. 구약을 대신하는 것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구약을 대신하는 거죠.

그 다음 14절 다시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지 마라”한 그것이 “정녕 죽으리라” 한 그것이 선악과나무에 고정된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아담에게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아담에게 뭐가 생겼다? 자아의식이 생겼죠. 자기 안에 ‘따먹으면 안 되지. 따먹으면 안 되지.’ 하와도 마찬가지인데 뱀이 와서 “따먹어도 돼. 따먹어도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안 가르쳐 주고 ‘너 따먹었지? 죽을래?’ 이게 아니고 미리 알려주고. 반복해야 돼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렸다 하니까. 선악과를 미리 알려주고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알려주고 선악과 서 있으니까, 따라서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이미 말씀이 들어와 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과연 말씀이 육신이 될 능력이 있는 인간인지를 보시는 거예요. 마귀가 와서 꼬셔보니까 후다닥 넘어진 거예요. 예수님은 안 넘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되고 믿을 자격도 안 되고 영생 얻을 자격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을 안 되는데 우리보고 이 말씀 했다는 것은 말씀 자체가 이제는 확장되는 겁니다. 제가 수요일 날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밀가루 반죽을 이렇게 높이 해놓고 홍두깨로 민다 했죠? 죽죽 밀어버리면 밀가루가 딴 데 퍼지지 않고 손으로 미니까 이게 피자 판처럼 넙죽하게 되죠. 하나도 훼손된 게 없으면서 높이는 납작하게 되죠. 예수님께서 슬슬 밀면 예수님의 이 말씀의 영역이 점점 더 확장되면서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그 자체가 활동을 하게 되면 믿는 자가 드디어 생겨나고 드디어 영생 얻는 자가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내가 택한 자도 내가 건진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봅시다. 여기 17절 봅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라고 했죠. 아! 이 말씀이 엄청 어렵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라고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보고 율법 주라고 명령하신 분은 누구에요?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됐으니까. 참 설명하려 하니 내가 정신이 어지럽습니다. 자 율법은 결국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지만, 보세요. 말이 안 되는 게 모세 자기가 준 게 아니잖아요. 이건 분명히 예수님에 의해서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거잖아요. 그러면 율법도 주님이 줘놓고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 주신 것이 되죠. 그러니 뭐에요? 지금 사람들에게 병 주고 약 주는 셈이 된 거예요. 이 소리 들으면 모세가 억울할 거예요. ‘제가 만든 게 아닌데 주님이 줘놓고 나한테 줬다고 덤터기 씌웁니까?.’ 이렇게 나올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제가 하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은혜와 진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미 율법이 들어있다는 말을 제가 하고 싶은 거예요. 은혜와 진리 안에서. 왜 그러느냐 하면 율법을 줌으로써 뭐가 발생되느냐? 저주가 발생되는 거예요. 저주 없는 십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십자가 자체가 저주에요. 율법대로 시행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도 주고 저주도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저주가 주어지면서 덩달아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주 모르면 뭐도 모르는 사람이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을 누가 알아듣겠어요?

모세한테 율법을 준 것은 저주 받으라고 준 거예요.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라고 아는 사람에게 비로소 뭐가 보입니까? 은혜가 보이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은혜가 다 있다니. 이런 혜택이 다 있다니.’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잘못 생각하면 ‘나는 율법을 골라잡을까? 은혜를 골라잡을까? 율법 지켜서 구원받을까? 은혜는 그냥 받아서 구원받아? 에이, 율법 지키려니 귀찮다. 은혜부터 먼저 건져야지.’ 이렇게 은혜를 건지는 거예요. 누가? 소위 복음 안다는 사람들이.

‘목사님, 우리 남편 술 먹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이미 법이 주어진 것은 술 먹으나 안 먹으나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뭘 모르느냐 하면 ‘왜 저주받아 죽지?’ 그걸 모르기 때문에 은혜가 임하면 ‘아!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 아유,  전에 바다에서 보트 탈 때 배가 뒤집어져서 진작 죽어야 됐는데 괜히 살았어.’진작 죽어야 마땅하구나.‘라고 하는 사람에게만 그 사람은 이미 은혜에 속한 사람 이예요.

은혜가 무슨 은혜냐 하면 ‘나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은혜, 그 은혜가 주님 은혜 받은 사람의 티가 팡팡 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랑할 수가 없죠. 자기 자랑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법으로 안 되니까 은혜를 한번 골라봐.’ 이건 누가 자기 맘대로 골라요?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무슨 자기 맘대로 골라요? ‘율법 지키려니까 힘들어서 안 되겠다. 은혜 해야지.‘ ’술 끊어라.‘ ’이런 식으로 술 못 끊겠는데.‘ ’오, 십자가로 구원, 나 술 안 끊어도 십자가로 구원 받겠다.‘ 이렇게 골라잡을 입장이 못 됩니다.

술 먹으나 안 먹으나 말씀을 어겼으니까 입도 대지 말고 죽어라.‘ 술 먹는 사람한테 입도 대지 말라는 건 그것도 저주긴 저주입니다만, 담배 피우는 사람한테 피우지 말라고 하면 이것도 저주거든요. 하지만 하나님의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요 주님의 스케줄, 모세 보내고 예수님 보내는 하나님의 스케줄이 흠뻑 그대로 와서 그냥 덮쳐도 박수 짝 짝 짝 끝! 하고 감사히 여기게 되죠. 이게 뭐냐 하면 믿는 자 없다 했죠? 믿는 자 없는데 말씀이 육신이 돼서 믿는 자 없더라도 믿는 자 만들어 내죠. 그 만들어 낸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몽땅 100% 다 동의하면서 수용하는 거예요. ’참 스케줄 하나 잘 짜셨습니다. 저는 어떤 것도 개입한 적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죠.

이게 바로 요한복음에서 서론 격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려웠는데 설명 들어보니까 쉽죠.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라 하는 것은 이미 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저주임을 안다는 것은 은혜를 이미 받았기에 율법이 뭣 때문에 주어졌는가를 소급해서 다 아는 사람에게 진리와 함께 하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은 뭐냐 하면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마음 놓고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아주 즐겁게 기쁘게 마음 놓고 외치는 사람 이예요.

그 다음 18절 봅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이건 지난번에 설명을 했는데 오늘 요 흐름에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여기 하나님이 몇 분이 됩니까? 두 분이죠. 하나님이 두 분이라는 것은 유대나라에 용납됩니까? 용납 안 돼요? 용납이 안 돼요. 용납이 안 되는 이유가 유대나라는 이방나라와 비교해요. 이방나라와 비교할 때 너희들 신은 아니고 우리에게 찾아온 하나님이 진짜 최종적인 신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방나라가 의미 없이 되고 이스라엘마저 이방나라로 취급돼 버리면 결국은 신이냐 신이 아니냐를 따질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있는 나라가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 분이든 네 분이든 두 분이든 그것은 인간이 그러면 반칙이죠. ‘하나님이 두 분이면 안 되죠.‘라고 입을 뗄 수 있어요? 없어요? 없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자기가 속한 신과 다른 나라 신과 비교하다 보니까 무조건 자기가 믿는, 자기가 알고 있는 신 그대로라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 망하고 난 뒤에 네가 알고 있는 신은 너를 멸망시킨 신이다  말이죠. 그러면 너희들이 뭘 모르느냐, 바로 하나님이 한분이 아니고 두 분으로 나누어진다는 요 내막을 이스라엘 본인은 그걸 알 턱이 없고 맨날 다른 나라 신하고 비교해서 ‘우리나라 신이 최고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집에 아버지가 얼마나 화가 난지도 모르고 동네에 가서 꼬마가 ‘너희 아버지보다 우리 아버지가 훨씬 잘 생기고 훨씬 착해.’ 이러다가 집에 가서 얻어맞고, 자기 아버지 본모습을 모르고 다른 애 아버지와 비교한다고요. 왜냐, 하나님은 항상 누구편이다? 역시 내 편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들 편이기 때문에 두 분으로 나타납니다.

두 분으로 나타나는데 동일한 두 분으로 나타날 때 관계로 나타나요. 그게 뭐냐 아버지와 아들! 왜 아버지와 아들인가? 이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들의 자리가 공백으로 돼 있습니다. 비어있어요. 구멍이 뚫렸어요. 원래 이스라엘이 아들인데 이스라엘이 멸망함으로써 아들의 자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버지가 원래 아버지가 아닌데 아들이 등장하니까 아버지가 있는 거예요. 항상 순서에 주의해야 됩니다. 아버지 계시고 아들 주신 게 아니고, 처음엔 아버지가 아니에요. 하나님 이예요. 이게 나눠지지 않은 그냥 전체적인 하나님입니다. 아들이 등장하니까 아버지가 생긴 거예요.

그들은 하나님이 자체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누가 아들이냐 하면 이스라엘 본인들이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 안에 아들 아버지 있다고 생각도 못한 거예요. 구약에 그런 거 있던가요? 구약에 하나님 아들 있던가요? 하나님 아들을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모슨 다른 하나님 아들을 찾아요? 이스라엘 본인들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그렇게 자부하고 있는데 무슨 아들이 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했잖아요. 아들 자리가 뻥하고 구멍이 뚫렸죠. 구멍이 뚫려버리면 뭐가 깨지냐 하면 언약이 완성이 안 되는 거예요.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낸 거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아들로 봐버리면 아들이 아닌 자는 뭐냐 애굽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자체가 아들이 아니라면 예수님 빼놓고 모든 나라가 다 애굽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나라 전부 다 애굽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분은 이스라엘도 아들도 아니에요.

여기 요한복음 1장 51절에 보면 “큰 일을 보리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원래 천사가 머리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 사람은 처음에 누굽니까? 야곱이죠. 야곱 이름이 뭐에요? 이스라엘로 바뀌죠. 바로 예수님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이 뭐냐 말씀이, 야곱에게 있었던 그 언약이 이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게 아니고 예수님 본인한테 주어진 거예요.

그럼 야곱은 뭐냐 야곱은 예수님 본인에게 주어진 것을 앞당겨서 예고편으로 미리 보여준 거예요. 그러니 야곱 안에 누가 있었단 말입니까? 야곱 안에 예수님의 영이 있었던 거예요. 베드로 전서 1장 11절 말씀처럼. 우리는 차후에 주님이 계시고 그 전에 있던 사람들은 미리 앞당겨서 주님의 영이 가 계신 거예요. 예수님의 영이 임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이 말이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사실 어려운 것보다도 이런 거예요. 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구약에서 실패한 거 도배하듯이 예수님이 친히 알아서 구약에서 실패한 걸 전부 다 완성을 시키는 그 작업을 요한복음 1장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보시면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될 거예요. 이스라엘이 못한 거, 인간이 못한 거, 우상숭배자가 못한 것, 주께서 취소하지 아니하고 그걸 예수님이 나서서 전부 다 예수님 홀로 인간이 말씀을 이루지 못한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시는 거예요. 율법이고 다 이루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거예요. 구약의 에스겔이 한 성령, 전부 다 주님이 이루시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게 되면 아들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없어졌어요. 그러면 언약에 의하면 아들이 있어야 되는데 아들 자리에 없으니까 예수님이 독생 하신 아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아들 차지하는 순간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가 되면서 모든 인간은 이 아버지를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알 사람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예수님 아버지를 믿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어요. 하나님을 믿는데 그 하나님은 가짜죠. 하나님 믿다가 멸망한 자가 이스라엘이잖아요. 실컷 믿어라. 멸망당하고.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밖에는 하나님이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언약 안에서만 하나님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 언약 자리를 아들이 차지하고 아들이 차지하니까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버지가 나타나는 거예요. 아들이 먼저 나타나고 아들 때문에 아버지란 기능으로서 하나님이 작용한 겁니다.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 이 두 분이 옛날에 이야기했던 언약적인 하나님이었던 거예요. 이걸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나눠졌던 거예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이름은 이스라엘과 동행하신 분이 이름이고. 이제 하나님 이름에 대해서 모른다 하지 마세요.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면서 이스라엘 멸망시킨 하나님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 이름 이예요. 멸망시키면서 언약을 연속적으로 이어져가게 하신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성전 위에 있었거든요.  'Sun of God' 보셨다 하셨죠? 거기 보면 예루살렘성전 나오잖아요. 성전 구조 궁금한 사람들은 궁금해요? 그 영화 보시면 3층으로 된 성전 구조 나옵니다. 돈 만원만 주면 신약 성경 흐름 완전히 전부 다 아는 거예요. 백날 집에서 책 봤자 가짜 천국 봐서 자꾸 혼돈되고 복잡해서 모르겠다 하지만 그 영화 보고 나면 뭔가 틀이 잡히고 감이 잡히고 줄거리가 잡혀요. 그거 후딱 지나가기 전에 빨리 놓치지 마시고 보세요.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새로 다시 요약해봅시다.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인간은 없다. 없는 이유는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받았잖아요. 받았지만 그들은 우상숭배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아무도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이 말은 그들은 하나님을 안 적이 있었다? 없었다? 아무도 없었어요. 결국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불렀다는 것은 이방민족들이 그들의 신을 부른 거와 똑같은 거예요. 여호와 이름의 다른 신을 부른 거예요. 왜 언약 안에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들로서 언약을 이루면서 왔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럼 손해냐? 손해가 아니고 반가워해야 되죠. 아휴, 궁금했었는데. 아휴 알고 싶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 모든 내막을 하늘나라 내막을 다 알려주시네. ‘아! 이렇구나.’라고 반기면 될 텐데. 반긴 사람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그게 어두움의 위력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미 이 세상은 주님에 대해서 반대하는 쪽이 세상 신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리게 한다 했죠? 고린도 후서 4장 4절에 보면 세상의 신이 하는 일이 뭐에요? 악마가 하는 일이 뭡니까?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가리는 일을 하는 거예요. 악마라 해서 인상 더럽고 칼집 있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복음을 전파해야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죠.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서 악마는 골라낼 수가 없어요. 간단해요. 복음만 던지세요. 마귀는 단박에 노출됩니다. 다 맞고 좋은데 교회는 어떻게 운영할 건데? 이렇게 나오면 마귀에요. 그들은 복음의 광채가 좋은 게 아니고 교회 광채가 좋고 그 교회 당회장보다 본인의 광채가 더 좋고 그 교회 교인들 숫자에 교인들 서로가 너, 나가 서로 우리, 힘을 합친 우리, 우리 영광, 광채가 주님의 복음의 광채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숫자 많고 돈 벌면 신이 나죠.

자, 넘어갑시다. 18절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을 우리는 모르니까 아들을 통해서 비로소 뭐가 등장한다? 아버지가 비로소 등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신 말씀이 “아들을 공경하는 자에게만 아버지가 인정하고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면 요새 말로 어림반품어치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내가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다 가짜고 너희 애비 마귀가 그렇게 시켰다는 거예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 들으면 여호와 하나님 믿어도 문제라. 다른 제 3자가 보면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할 때 얼마나 쉽겠어요? ‘여호와 하나님 믿는 것도 쉬운 일인데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율법 지키는 것도 대단한 정성인데 그걸 마귀가 시켰다 하면 너무 심하지. 너무 오버지,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게 오버입니까? 그게 잠바에요? 그게 심한 말 이예요?

요한복음은 아들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 했습니다. 그거는 심한 말 아닙니다. 물에 빠져 죽으나 배에 빠져 죽으나 어떻게 빠져 죽어도 아들 믿으면 영생이고, 그냥 멀쩡하게 살아서 ‘고맙다 아들아.’ 돌아와도 그건 저주라는 그 아우라가 같이 쟁반처럼 위에 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거예요. 아들이 없는 자는 저주가 머물러 있다 했습니다. 머물러 있다는 이 말은 무서운 말 이예요.

머물러 있다는 것은 ‘휙, 가.’ 해도 안 간다 이 밀이거든요. 참 불신자하고 산다는 게 집안에 저주가 머물러 있는 거예요. 제사지내고 소용없고 굿해도 소용없어요. 마귀가 굿해도 안 떠나요. 제 말은 사람을 겁내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주님을 생각하면 사람이 저주를 주지 않고 저주를 해결하지 못하는 존재는 겁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축복을 줄 수 없고 영생을 줄 수 없는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건 영생 주시는 분을 무시한다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이 뭐에요? 사람을 겁내지 마라.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 뜻 이예요. 세상 권세를 두려워마라.

세례요한이 왜 쟁반에 목이 베어 죽었습니까? 세상이 그렇다는 거예요. 바로 예수님이 있는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그런 유의 그런 질을 갖고 있는 아주 더러운 세상이라는 겁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이한례(IP:203.♡.42.222) 14-05-09 23:30 
가락-요한복음 1장14(우리)140417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자,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 품속에서 몇 명이 나왔죠? 독생자 한명 나왔죠. 그런데 성도가 몇 명이죠? 많잖아요. 어! 하나에서 왜 다수가 되었을까요? 왜 하나가 다수가 되지? 이 문제를 예수님 믿기로 누가 계모임 했습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자, 너와 내가 모입니다. 모일 때는 공통점이 있을 때만 모이는 거예요. 그러면 공통점이 사라지면? 모였다가 깨어지죠. 물론 부부도 깨질 수 있지만 자식 때문에 안 깨지기도 하지만.

사람이 두 사람이든 세 사람이 모이게 되면 반드시 거기는 모여야 될 타당성, 정당성 이유가 계속 그 안에 원리가 살아있어야 돼요. 그게 만약에 없어버리면 그게 깨어지게 돼 있습니다.

교회에서 기념일마다, 기념일이란 부활절, 맥추절 이런 건데요. 기념일마다 목돈 내라 하거든요. 기념일 자체가 봉투 돌려서 목돈 내는 날 이예요. 목돈을 내게 되면 교회가 뭐로 단결되겠습니까? 지금 낸 게 뭐에요? 돈 냈죠. 평소에 푼돈 내다가 주정헌금 1000원 내다가 그때는 목돈을 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교회를 떠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자기가 낸 목돈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십일조라 하는 것이 1/10이 아니고 십일조가 나중에 누적이 되면 나중에 십일조 낸 사람 복리로 계산하게 되면 엄청난 비용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교회를 떠날 수가 없죠. 그러면 그 교회서 가장 영향 있는 사람은 그 교회에 가장 돈을 많이 낸 사람, 그러니까 빌라 바쳐서 간 사람이라든지 반드시 돈을 투자한 사람들이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우리교회에 처음 왔는데 자기 집을 팔아서 교회에 헌납을 했다면 기존에 푼돈 냈던 사람들은 그 사람은 우습게보겠습니까? 안 보겠습니까? ‘나는 1년 동안 다니면서 10만원밖에 안 냈는데 저 사람은 오자마자 2천만 원씩이나 냈으니까 그러면 그 사람 지분이 있을 게 아니냐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서 교회가 그 사람들에게 낸 만큼 혜택과 보상차원에서 내려고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뭔가 제직 때 발언을 할 때는 발언권이 먹히게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저들은 2천만 원 냈고 내년에도 2천만 원 낼 수 있으니 예산 펑크 나면 메울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들의 단결이 어떤 단결 이예요? 돈의 단결이죠. 공통점이 돈이었습니다. 교회 부흥의 비밀이 거기에 있었네. 항상 어쨌든지 간에 돈을 내게 함으로써 돈을 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저거 내가 냈어요. 피아노 내가 했어요. 저 꽃꽂이 내가 했어요.’ 함으로써 기어이 그 사람을 그 다리 거쳐서 그 사람 일은 하나의 지체로서 만들어 내는 그 행정적 방법, 그것이 교회로 하여금 결속하는 힘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미 주님께서 독생자에서 다수가 되기 이전에 이미 그전에 다수가 있었어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었어요. 유대나라였습니다. 유대나라가 뭐로 결속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자기 의를 유지하는 방법은 뭐가 투입돼야 됩니까? 율법을 줘야 되겠죠. 자 묻습니다. 율법을 지킨다. 안 지킨다. 를 누가 결정합니까? 자기 자신이라고 하면 곤란해요. 왜냐 하면 백정도 세리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하면 유대나라에서 그게 먹혀요? 안 먹혀요? ‘웃기고 있네.’ 라고 안 되죠.

그러면 율법에서 자기 의가 나오는데 그 중간에 뭐가 빠졌어요. 뭐냐 하면 관행과 관습의 해석법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럼 해석법을 좀 더 권위 있게 하기 위해서는 누굴 동원시키느냐 하면 역사를 동원시켜야 돼요. ‘우리는 아브라함부터 지금까지 성경해석이 계속 업그레이드 해왔다.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우리에게 모세를 주었고 모세 때부터 해석은 계속해서 업그레이드 해온 거예요. ’해석은 이게 율법의 바른 뜻이야, 아니야 저게 바른 뜻인지.‘ 계속해서 실험해 왔고 검정을 거쳤고 그것이 해석의 누적이 되어서 진리에 가장 완벽한 진리체제로서 지금 예수님 시대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떡을 원하지만 바리새인과 새두개인은 뭐를 원하느냐 하면 율법 바로 세우기, 그리고 율법 바르게 세우기는 율법을 실천에 옮기는데 그 실천의 세칙과 규칙은 누가 제정합니까?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정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활동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어디까지 기어 올라가는 겁니까? 일반 민중들부터 시작해서, 떡 좋아하는 사람들부터, 율법 관계없이 병 걸리고 귀신들린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귀신, 마지막 사단은 뭡니까? 바로 율법을 쥐고 있는 사람, 율법을 쥐고 그걸 권위 있게, 권세 있게 해석을 내리는 그쪽이 마귀와 가장 마귀로부터 가장 충실하게 다루어지는 마귀의 한 family,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한복음의 흐름은 그렇게 돼 있습니다. 제일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점차 율법을 쥐고 있는 그 권위자까지 마주치게 하는 겁니다. 처음에 요한복음 4장에서 누가 옵니까? 사마리아 여인부터 시작하죠. 그리고 5장에서는 연못에 들어가서 병 낫기를 원하는 병자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사실 요한복음 1장, 2장, 3장도 서론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부터 시작하니까 추수부터 시작하니까.

38년 된 병자가 무슨 호수입니까?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된 병자 있었잖아요. 무수한 병자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이 바리새인이 왜 없어요? 바리새인은 이들이 병 낫는 것에 대해서 해석하고 평가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9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아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이렇게 했어요.

그러면 세례요한보고 네가 누구냐고 묻는 그것이 하나의 체제가 돼 있죠. 그게 바로 예수님이 독생자 나타나서 툭 떨어진 체제가 이미 율법으로서 하나의 질서가 잡혀있고 계급이 형성돼 있는 그런 세계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나름대로 단단한 우리가 되죠. we, 우리가 되죠. 우리를 나의 복수와 우리의 단수라는 말을 할 수 있어요. 나의 복수라는 것은 나를 극대화 시킬 때 내가 나누어지면서 우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소속된, 그러니까 소속을 말하죠. 나로 하여금 내가 커지고 확장되는 이상형이 바로 우리가 되는 겁니다. 복수란 말은  복수, 보복한다는 말이 아니고 여러 개지만 그들이 다 하나의 나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그 우리. 이것을 지향하는 거예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은 우리가 뭐가 됩니까? 이게 단수, 우리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체제가 갖춰 있다 말이죠. 이게 유대나라 이스라엘에서 마지막 최종모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독생자가 한분이다 말이죠. 한분인데 왜 한분이 어떻게 여러 성도들, 여러 믿는 자를 발생시킬 수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제가 할 때 그 사람의 개성을 살리면 안 되죠. 여럿이 되고 다 깨지잖아요. 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뭐였습니까? 율법이라는 해석이고 율법으로 그들은 하나가 됐잖아요.

그러면 예수님도 율법으로 그들을 하나로 묶었습니까? 아니면 율법 외에 다른 걸로 하나가 되었습니까? 율법 외에 율법의 완성으로 하나가 된 거죠. 그러면 율법의 완성이 됐다는 말은 결국 이들의 이것은 미완성이란 뜻이죠. 그러면 이것도 주님이 성도 만드는 것보다 이거부터 먼저 따져봅시다.

‘내가 율법을 존중합니다. 너도 존중합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라고 할 때 이게 진정 하나냐 이 말입니다. 미리 정답을 하면, 이건 하나가 아니에요. 인간이 법 좋아한다고 법 좋아한 사람 묶는다고 해서 그게 한 몸이 되지 않습니다. 부부가 ‘당신 야구 좋아해?’ ‘우린 야구 좋아해.’ ‘우리 결혼식 때 야구장에서 할까?’ ‘야구장에서 해.’ 그럼 한 몸입니까? 야구 좋아하는 데서는 하나지만 ‘당신 뭐 먹을래? 나 짜장면.’ ‘나 짬뽕’ 이래서 갈라져서 이혼까지는 안 하겠지만 그게 다를 때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죠.

그러니까 제가 주님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의 율법이라는 것은 핑계라는 거예요. 핑계고 율법은 하나의 빌미고 율법으로 묶게 하는 다른 세력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어두운 세계고 예수님에 대한 반대 세력인 겁니다.

그러면 결론은 났어요. 뭐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가 되게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반대되는 세력에 의해서 튕겨져 나오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예수님과 한패가 되는데 예수님 반대 세력에서 안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요. 안 받아주는 사람은 그 안 받아주는 식으로 그 사람들을 모아서 예수님의 하나가 되는 거예요.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 하면 ‘세상이 너를 싫어하느냐? 미워하느냐?’ ‘미워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네가 내게 속했기 때문에 미움 받는다.’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 일방적 생각이지 제자들은 그런 생각이 없어요. 제자들은 권력에 지금 굴복하기 바쁩니다.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했는데 잊어버렸죠? 뭐냐 하면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지죠? 영생을 얻는다 하고 믿어버리면 이건 영생 원하는 사람 모여라, 해서 모이면 그건 하나가 안 돼요. 지금 그걸 설명하려고 이렇게 제가 어렵게 설명하는 겁니다.

‘너 뭐 얻을 거야?’ ‘나 영생 얻을게.’ ‘ 나 영생 얻을게.’ ‘영생 얻을 사람 모여라. 우리 교회다.‘ 이건 아닌 거예요. 이건 모아봤자 이건 다 따로따로 개인이 복수가 되지 않고 다 따로따로 놀아요. 그래가지고는 교회가 될 수가 없어요. 그건 주님의 진정한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경험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어야 돼요.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한테 ‘너 스스로 내가 스승인 줄 아느냐?’ ‘예 압니다.’ 그 말 안 믿어요. 예수님을 스승으로 믿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을 믿는 방법은 예수님이 당했던 동일한 경험을 겪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내치는 그런 어두운 세력이 구축 화 돼 있어야 돼요. 그리고 구축 화 된 세력에서 그들이 감당 못해서 튀어나오는, 그들이 내쫓게 하는 그런 경험을 겪어야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마태 마가 누가와 다른 요한복음의 특징 이예요. 진짜 어렵죠. 지금 제가 어렵다는 것은 출발점이 뭐냐 하면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발생되느냐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이쿠, 예수 제가 믿죠.’ 그거 인정 안 합니다. ‘제가 영생 얻기 위해서 예수 믿겠습니다.’ 인정 안 해요. 그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 믿고 나왔다가 자기가 백날 세미나 듣고 백날 해봐야 ‘아, 이제 알았네.’ 하고 믿는 게 아니에요. 니고데모는 섞일 수 없는 공의회거든요. 거기서 배척받고 튕겨 나와야 돼요. 여러분 어디서 튕겨 나왔습니까? 사모님한테 밉상 받았어요? 등산 자주 간다고 밉상 받고 친구 잘못 사귄다고 밉상 받은 거 아니에요. 그렇게 튕겨 나오면 안 된다니까요.

그렇게 튕겨 나오면 안 되고 예수님이 튕겨났던 그 튕김과 동일한 튕김으로서 나올 때 비로소 이건 내가 주님과 한 몸 된 것은 내 뜻이 아니고 누구 뜻이다? 주님의 모집 전략에 입각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안 튕겨 나오고 싶은데 튕겨 나온 셈이 돼 줘야 돼요. 그럴 때 우리는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금 제가 요한복음 14장, 15장을 미리 이야기했어요. 내가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다시 성령을 보내줄게. 성령이 와서 너희를 책망할 것이다. 책망을 받게 되면 비로소 너희는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다. 책망 없는 하나는 없다. 책망 받는 책망의 기준은 뭐냐, 내가 이 세상에서 당했던 기준을 똑같이 너희에게 적용시킬 것이다. 세상은 그걸 거부하지만 너희들은 성령에 의해서 그 책망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너는 내 제자가 되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된 것처럼 너희도 나와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 출발점이 뭐냐 하면 어떻게 각 사람인데 하나가 되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we,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서 우리가 되느냐. 이것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전에는 너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부활되고 난 뒤에. 내 아버지가 이제는 뭐가 된다? 이제는 너희 아버지가 된다는 거예요. 이래서 우리가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4장에 나와요.

여러분들이 나, 너, 자꾸 이걸 여러분들이 신경을 안 썼던 이유가 요한복음 보고 ‘제가 믿을게요.’ 손들고 나서면 믿는 자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믿는 자 되기 위해서 우리가 손든다고 ‘그래 오너라.’ 받아주지 않아요. 그러면 내 개인이 살아있어요. 천국 가서 자기 자랑한다 말이죠. ‘저 우리 동네서 저만 믿었어요.’ 자랑하게 돼요. 자랑함을 없애야 돼요. 안 없애면 이건 독자적인 요소가 됩니다. 내가 그대로 살아있어요. 이러면 주님 중심의 우리가 성립이 안 돼요. 계속 자기가 살아있게 돼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모든 제자는 다 도망쳐야 돼요. 당연히 도망쳐서 그게 본색이고 그럴 수밖에 없고 그들은 예수님과 하나 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로 끝나야 됩니다. 실패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것에 실패를 하셔야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사람다워요. 뭔가 실패해야 돼요.

아까 수원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자 봅시다. 홍해 바다입니다. 홍해바다에 모세 있고 백성들 있고 뒤에는 누가 따라옵니까? 애굽 군이 따라오죠. 자, 요 지점이 A지점이라면 요 지점에서 바라본 홍해와 요 지점(B)에서 바라본 홍해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요 차이점을 알고 있어야 신자에요. 요 차이점을 알고 있어야 건너온 사람이라는 티가 팍팍 나요. 이 차이점을 모르게 되면 건너본 적도 없으면서 건너봤다는 그냥 허세를 부리는 사람입니다.

이 차이점 A 와 B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나와 나의 차이점 이예요. 이랬던 내가 이랬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지고 두 조각내는 겁니다. 내가 이랬던 사람인데. 그럼 이랬던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영생 얻으려고, 천국 가려고 예수 믿으려고 했던 사람인데 주께서는 그 방법을 일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나로 하여금 죽음의 바다에 건너가게 해서 마땅히 우리는 물에 빠져 죽어야 마땅함을 일깨워주시고 나중에 건너와 보니까 내 힘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 이걸 건너오다니, 내 구원에 대해서, 내 믿음에 대해서 내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우리가 느껴져야 됩니다. 나 같은 인간이 예수를 믿다니, 뭐가 부족해서 예수 믿어요? 나 같은 인간이 예수 믿다니,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건너와 보니까 이미 죽은 자로서 나를 새롭게 채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냥 나를 착하다고 채택한 것이 아니고 죽여 놓고 나를 데려간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이 홍해가 바로 율법체제, 이게 율법체제거든요. 지금은 유대나라가 없잖아요. 지금은 아, 대한민국이잖아요. 그렇지만 유대나라가 유대로 결속이 된 것이 율법에 대한 해석이고 그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계급이 생겼잖아요. 착한 사람, 덜 착한 사람, 악한 사람, 진짜 착한 사람. 그걸 우리는 거기서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건너왔죠. 건너옴을 통해서 우리는 마땅히 이런 것이 이미 주님께서 건너 간 길이라면 우리는 그 길을 따라서 주님을 오해하고 주님이 비난받았던 이유를 같이 공유하면서 가는 거예요. ‘주님이 이런 말 하셔서 이렇게 받았구나.’ 하면서 건너온 사람은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왜, 체험되었으니까.

다윗이 간음했고 살인했기 때문에 비로소 다윗은 사람에게 죄짓지 않은 거예요. 다윗이 누구에게 죄졌다 했어요? 주께만 죄졌죠. 이런 뻔뻔스러움. 그러면 우리야는 뭐고 밧세바는 뭐야? 죽은 우리야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런데 거기다 한 수 더  뜹니다. “주께서 꺾어진 뼈로 제가 살았나이다.” 이렇게 되면 주께서 꺾으신 뼈가 누구냐 하면 우리야 장군이거든요. ‘우리야 장군은 나 구원하기 위해서 소모품이다.’ 이런 발언을 하잖아요. 그거 우리야 장군 들으면 기분 나쁘겠어요? 기분 더럽겠습니까? 이게 우리야 장군이 우리가 아니라면 기분 더러울 건데 이게 우리라면 감사하죠. 왜 감사하냐 하면 나는 어떻게 쓰여 지던 간에 그렇게 누굴 구원하는데 쓰여 졌다면 저로서 고맙죠, 라는 발언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모여서 우리의 천국이 되는 거예요. 그게 모여서 영생이 되는 겁니다.

집사님이 집사님을 때리면서 ‘기분 나쁘죠?’ 하면 ‘나는 비로소 당신의 주먹이 이렇게 센지 알게 되는 기쁨을 누렸소.’ 라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주먹 한 대 정도는 괜찮은데 이 세상에 주먹이 아니고 돈이 문제 아닙니까? 돈 빌려줬는데 돈 안 갚을 때 ‘비로소 당신은 얼마나 뻔뻔스런 인간인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알게 된 기쁨을 당신이 누리게 하시는군요.’ 이런 소리 하는 사람 없어요. ‘돈 안 갚나? 집 사고 차사고 돈 얼른 갚아라.’ 이렇게 나오죠.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돈으로 결속돼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을 만나면 나한테 돈이 얼마나 들어오나, 이걸로 봤는데 돈이 떼일 때 비로소 그 진짜 결속력이, 노끈이 드디어 노출된 거예요. 내가 말해도 너무 심하게 말해서 오그라든다.

어릴 때 세 살인 쌍둥이가 ‘아빠 나 사랑해?’라는 말은 ‘내 형보다 빵을 하나 더 줄 거야? 더 큰 빵을 줄 거야?‘ 그 이야기잖아요. 아직 어린애가 그렇잖아요.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빵 하나 더 주면 사랑하는 것이고, 빵 안 주고 맛없는 것 주면 미워하는 거예요. 애들은 그거에요. 그 애들이 커서 나중에 나이 40, 50이 되면 누구는 집 팔아다 보증 서주고 누구는 대출 담보 대주고 형은 다 해주고 나는 왜 대출 안 해줍니까? 이런 식으로 나왔을 뿐인데 축소해보면 역시 부모 자식 간에도 무슨 관계? 돈의 관계다.

조금 더 나아가봅시다.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난 뒤에 아버지 유산을 형한테는 빌딩 주고 저한테는 빚만 주고 이럴 때 그 동생이 대번 누구를 찾아오느냐 하면 예수님을 찾아와요. 찾아와서 ‘형이 내 유산 가져갔습니다. 어떻게 정의롭게 해결해 달라.’ 할 때 주님이 뭐라 했습니까? 화내죠. 어떻게 내가 너희들의 우리라는 유대관계, 돈으로 맺어진 우리 관계를 그걸 해결해 주는 메시야로 봤느냐? 탐심에서는 생명이 나온다? 안 나온다? 안 나온다. 생명을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 데려가면, 오늘밤에 진주에 배 태워버리면 저 책꽂이에 있는 교과서가 누구 것이 되겠느냐? 죽은 사람에게 너무 잔인하게 예를 들어서 미안하긴 미안한데요. 복음을 위해서 할 수 없어요. 오늘밤 저 옷장이 옷이 누구 옷이 되겠느냐? 기가 막힐 일입니다. 애 하나 키우는데 조기유학 시켰죠. 돈이 얼마나 들었어요? 초등학교부터 선행학습 시켰죠. 돈 투자를 얼마나 한 거예요? 보상금 4억 5천 가지고 한이 풀리겠어요?

자식이 있다는 것은 부모의 살 희망과 용기가 있다는 거예요.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고 투자비용 문제가 아니고 누구 때문에 사는데요. 늙은 남편 때문에 살까요. 파릇파릇한 자식 보고 사는데 그 자식을 가장 귀한 자식을 죽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보고 뭐라 했어요? ‘ 네 아들을 배에 태워라.’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리고 ‘엔진 빼라.’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이 말은 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누굴 죽인다? 아들을 죽이라 하니까. 도대체 우리가 믿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이예요? 자비로운 하나님? 어디 그런 자비, 자비 두 번만 있으면 자식 다 죽이겠다. 무슨 그런 자비가 있어요?

죽이라는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는 하나님이라니까요. 죽는 것이 뭐냐, 율법의 완성이고. 우리가 지켰다. 지켰다 우기는 그 율법을 지킨 게 아니고 죽이는 거예요. 그 경험을 공유할 때 비로소 우리는 천국의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뭐 요한복음 3장 16절 잘도 외워요. 하여튼 올림픽이나 월드컵 보면 꼭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JOHN 36 써서 카메라 앞에 들고 다니는 사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말이 얼마나 쉬운 말이지만 이걸 믿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누가 나서서? 우리로 하여금 나의 죽음을 일깨워주는 그 주님의 직접적인 능력이 아니면 요한복음 3장 16절 남의 이야기에요. 소용없어요. 백날 해보고 천 번을 한다고 이게 학이 되는 게 아니에요. 종이학은 천 번을 접으면 학이 되겠지만 이건 천 번 해서 종이학 만들어도 말씀 날라 가지도 않아요.

그래서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벌써 심판을 받았다 해서 인간의 시간 개념을 깨버려요. 인간의 시간 개념, 전 후를 따지는 인간이 전 후는 주님 앞에 안 통한다. 왜 애초부터 구원 못 받을 인간이라고 확정된 셈이기 때문에 거기다 인간의 전 후를 개입하지 말라 말이죠.

 1장 다시 봅시다. 요 문제 해결돼야 됩니다. 뭐냐 하면 인간의 맺음이라 하는 것을 결국은 보이지 않는 법의 힘! 저주의 힘으로 인간이 결속시켰다. 바리새인, 사두개인은 최고고 제일 밑바닥에는 죄인이고, 그래서 인간의 결속이 단결 돼서 유대교라는 게 성립된 거예요. 여기에 누가 뛰어들다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뛰어들어서 돌아가셨잖아요.

그렇다면 아무도 이 보이지 않는 법, 이 법을 이용한, 법을 앞장세워서 하나님의 의의 체계를 세우는 이 악마적인 법에서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가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거에요. 어느 누구도 이 의라는 법 체제, 법을 통해서 주는 의라는 체제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선악과를 아무 소리 안하고 따먹고 난 뒤에 “너 따먹었지? 죽어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아니면 선악과 따먹기 전에 먼저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이야기했습니까? 먼저 이야기했죠. 먼저 이야기해버리면 이게 하나의 아담과 하와의 자아의식에 박혀 버려요. 박히니까 뱀의 유혹의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든 이유가 선악과에 담긴 말씀이 인간을 통해서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이야기해서 뒤에 있는 악마까지 정체를 드러내는데 인간이 사용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면 죽는 게 무섭습니까? 죽는다는 위협이 무서워요? 죽는다는 위협이 무서워요. 왜 그러느냐 하면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의 자아의식에 박힌 죽음이 돼 버리면 그 다음에 협박의 대상이 돼 버려요. 죽기를 무서워하면 종노릇하듯이. ‘이러면 죽는다. 죽는다.’

그런데 우연히 죽는 사람은 죽는 것도 모르고 죽어요. 예를 들어서 ‘아빠 물이 차 들어와요. 지금 바쁘니까 물 피해서 갈게요.’ 애들은 죽음의 위험을 모르고 그 메시지를 받는 부모는 지금 자기가 죽는 거 이상으로 무서운 거예요. 애는 현장에서 자기 물 퍼내고 물 피하는 그 자기 일상의 일에 충실했을 뿐 이예요. 전혀 무섭지 않아요. 숙제하듯이 지금의 할 일은 뭐냐, 물 피해서 배 위에 올라가는 그 일 뿐이지, 내가 죽고 난 뒤에 그건 겁나지 않아요. 누가 겁나느냐, 그런 것을 상상한 안산에 있는 부모가 겁난다니까요. 이것이 인간의 자아의식 때문에 그래요.

마귀는 인간에게 일부러 자아의식을 불어넣어서 자아의식 속에 있는 것을 유혹했고 인간 자체가 아주 버려버렸어요. 인간 자체가 모여 봤자 악마가 주는 그 의의 힘, 선악과의 힘에 의해서 인간은 단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선악과 벗어나는 놈은 우리 손에 죽는다.’ 이겁니다. 이것이 극대화 된 것이 바로 국가라는 거예요.

국가는 이건 참고로 하겠어요. 국가에서 법의 혜택을 받지 않는 사람은 딱 한 사람 있어요. 그게 누군지 알아요? 국가의 왕 이예요. 왕은 법에 저촉 받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면 국가가 성립이 안 돼요. 밑의 사람이 따지고 들 수가 없어야 돼요. 그래야 국가가 돼요. 그게 창세기 4장에 라멕입니다. 라멕은 본인의 결정이 곧 법이 돼요.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7배로 받되 내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벌의 77배를 받는다.’ 이게 법이어야 돼요. 그래야 국가에서 법이 돌아가요. 법이 돌아갈 때 최종적인 법에서 초월한 존재가 있어야 법이 돌아가지, 초월한 존재가 없으면 이게 개판돼 버린다고요. ‘너만 잘났나?’ 이래 돼 버리면 나라꼴이 안 돼요. ‘자자, 우리 말 치우고 우리 어르신은 뭐라고 하는지 들어봅시다.’ 어르신내는 법의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법을 초월했다는 점에서 법을 해석을 해줘야 돼요. 그래야 법이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법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고 법의 체제가 잡힌 자체가 정답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말하면서도 어렵다. 그들이 법을 알아서 질서 잡히는 게 아니고 질서 자체가 정답이 되어서 무조건 순종한다는 자체가 법이 있는 이유가 된다니까요. 대들지 말라 말이죠.

우리는 죽음의 권세한테 대들면 안 돼요. 어떤 인간이 ‘하나님이여, 왜 저를 죽이십니까?’ 그렇게 대들면 안 된다고요. ‘죽는 게 마땅하군요.’ 이렇게 돼야지 대들면 안 돼요. 직원이 사장한테 대들면 사장이 그를 직원으로 간주하든지 아니면 사장보다 더 높은 사장으로 간주하든지 둘 중에 하나잖아요. 그럼 사장보다 더 높은 사장이면 그 직원을 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쫓아내야죠. 쫓아내면 사장은 몇 명입니까? 갑자기 2명 되다가 몇 명 됐어요? 혼자되면 회사가 잘 돌아가는 거예요.

법을 내린 사람은 절대로 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 겁니다. 간음했다고요? 주님이 뭐라 합니까? “마음속으로 간음한 자도 이미 간음했다.”고 했을 때 그 법을 지킬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어야 ‘세상에 저런 권세가 어디서 나오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킬 수가 없어야 돼요. 그래야 복종을 하는 거예요. 복종하는 자체가 법이 있는 이유입니다. 마귀가 와서 선악과를 따먹게 했죠? 그러면 우리는 마귀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는 무조건 나보다 더 센 법에 복종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에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법을 못 지키기 때문에 법 잘 지키는 세계에 굴복한다면 그거는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여전히 율법의 저주 아래 속한 사람 이예요.

‘주여, 앞으로는 잘할게요.’ 다윗이 간음하고 난 뒤에 이랬습니까? ‘하나님, 앞으로는 간음죄 안 지을게요.’ 이랬습니까? 한번 한 것은 실수로 봐줘야 되죠. 그런데 이런 말에서 이 세상에서 간음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는 간음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어요. 빨리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간음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단 한 번만 간음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간음을 한번 하게 되면 계속 또 하게 되니까. 재밌으니까. 해도 아무렇지 않으니까.

다윗이 간음하고 난 뒤에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이랬습니까? 그 자체가 의미가 없죠. 주께서 원하시는 건 상한 심령이니까. 간음 안 하면 두 번 안 하면 상한 심령에서 옳은 심령 됩니까? 우리가 나쁜 짓하고 난 뒤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잖아요. ‘주여 이런 못 된 짓을 했습니다. 주여 용서하옵소서.’ 주님이 어리둥절합니다. ‘네가 지금 나를 제대로 알고 기도한 거야? 내가 율법적인 존재야? 다시는 안 하겠어.’ 그건 같은 인간들보고 하는 거예요. 그건 바리새인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은 죄를 지어도 죄를 모르는 이유가 죄에 반드시 자기의 반성과 ‘이것이 나쁘다.’ 하는 것을 알고 죄를 짓기 때문에 죄는 나쁘지만 그 죄가 나쁘다는 그 사실은 나쁠까요? 안 나쁠까요? 내가 돈을 훔쳤던 것이 나쁘다는 그것까지 나쁜 겁니까? 아니죠. 돈을 훔친 건 나쁘지만 돈을 훔친 것이 나쁘다는 그 마음까지는 나쁘지 않고 그걸 양심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아이구 착한 면이 있네.’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선악에서 못 벗어난다니까요. 죄를 짓는 곳에서도 ‘나는 죄를 짓는 나쁜 놈입니다.’ 라고 회개하는 선함이 있으니까 이게 선악과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이게 악마의 덫인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고 네가 회개를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선악의 체계서 당해서 밀려나오듯이 너도 거기서 밀려나오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하고 나하고 사적으로 만나지 말고 우리 소속으로 만나자는 거예요. 너는 어느 소속이고? 선악 소속이고. 나는 거기서 쫓겨나서 아버지께 소속됐고. 네가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 소속이 돼야 돼요.

아버지께 소속이 되려면 아들이 와서 그 자를 아들다운 모습으로 고난을 받도록 이렇게 해야 됩니다. 네가 속해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지적 질을 당해야 돼요. 그래서 같이 빠져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쪽 세계에서는 우리를 용납하지 않고 ‘에잇, 퉤, 가라. 잘 먹고 잘살아라. 꺼져라.’ 이렇게 해서 구원받는다니까요. 구원이! 제가 말하는 요한복음이 그래요.

요한복음 6장에 봅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할 때 그 말은 우리가 ‘가겠습니다.’라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보내주는 그 절차, 메카니즘, 프로세스, 과정은 예수님이 먼저 거치고 난 뒤에 거쳐진 그 과정을 그대로 그 사람에게 적용시켜 버리면 그 사람도 이 세상에서 똑같이 얻어맞고 주님한테로 튕겨져 나온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베드로보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했죠. 그때 베드로 하는 말이 ”주께서 아십니다.“ 하고 주께 밀어버리죠. 그리고 그 다음에 ”네가 앞으로 띠 띠고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했죠. 그 모든 말이 뭔 뜻 이예요? ‘네가 이제부터 똑바로 복음 알았지?’ ‘예’ 이게 아니고 주께서 했던 그 과정을 그냥 반복해서 베드로에게 씌워버리면 베드로는 그야말로 주께서 당한 고난에 함께 참여되면서 주께서 튕겨져 나온 방식으로 그대로 튕겨져 나오게 돼요.

요한도 마찬가지에요. 요한이 마지막에 어디서 죽습니까? 밧모 섬에서 죽죠. 밧모 섬에 요한이 있을 때 누가 나타나요? 예수님이 나타나죠. 천사를 통해서 계시주면서. 보세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잖아요. 사도바울이 풍랑 만날 때 배에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배에 인구 조사할 때 47 몇 명? 숫자가 한 명 바뀌죠. 사도바울도 숫자가 바뀌었어요. 한 명 더 쳐야 돼요. 로마 가는 길에 누가 함께 있었습니까? 주님이 함께 있었는데 그건 숫자에 안 넣었어요. 주님이 함께 가는 거예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었던 거예요. 이것은 뭐냐, 우리를 빼내기 위한 전략입니다.

홍해 앞바다에서 모세와 백성들이 함께 있었죠. 모세가 물을 갈라줘야 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주님이 열어줘야 갈 수 있는 거예요. 왜,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세계기 때문에 우리가 아들 아닌 이상은 못 들어가요. 그런데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해서 그 관계에, 처소에 넣어 줄 때 우리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그냥 가만있으세요. 찾아오실 때까지. 찾아오시는데 안 찾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주일 날 설교에 했잖아요. 안 찾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바람 불잖아요. 오늘도 바람이 부네. 바람이 불잖아요. 주께서 활동은 쉰 적이 없어요. 계속해서 자기 백성을 추수해 내십니다. 이건 쉬지는 안했어요. 괜히 바쁜 사람보고 자꾸 안 찾아온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진도에서 수색대가 몇 명 건졌는지 뉴스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마는 오늘 낮에 휴게소에서 보니까 배 근처에서 구조대원들이 활동하고 있죠. 안 놀아요. 안 노는데 구조 자가 없네. 맨날 박 근혜 대통령은 최선을 다해서 건지라 하는데 물살이 세서 탁해서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그들이 놉니까? 택한 자만 건집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리는 이 작업에서는 빈틈이 없어요. 완벽하게 해냅니다. 믿읍시다, 우리가. 주께서 반드시 건질 자를 건지십니다. 괜히 우리가 나서서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의 속에서 우리는 사라져야 되고 난 사라져야 되니까.

우리 속에서 세례요한은 뭐였습니까? 여기 23절에 ‘아니다. 아니다’ 하니까 ‘그럼 너는 누구냐’ 할 때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소리라는 말은 바로 ‘너는 누구냐’고 물을 때는 개인이 물었잖아요. 개인이 묻고 그들의 소속을 물었거든요. 우리나라 소속에서 너는 어떤 존재냐, 묻는 거예요.

여자 목욕탕에 이상하게 남자 같이 생긴 사람이 들어왔다 말이죠. 그러면 여자 목욕탕 주인이 ‘너는 누구냐’ 묻는 것은 ‘나는 판사입니다. 나는 백수입니다.’ 그런 질문을 묻는 게 아니고 질문이 뭡니까? 소속이 뭐에요? 여탕이잖아요. 그러면 뭘 묻는 거예요? 남자냐? 여자냐? 그걸 묻잖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체제 속에서 ‘넌 위치가 뭐냐’ 할 때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네 체제 말고 우리 체제 따로 있어요. 그 체제에서 세례요한은 뭡니까? 소리죠. 소리니까 ‘나는‘이란 말을 쓸 수 있어요? 없어요? 쓸 수 없어요. 그분의 소리! ’그분의‘ 이니까 소유격이죠. 영어로 of, 그분에게 소속된 사람입니다.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되고.” 왜 그 말을 했을까? 왜 우리 같으면 그분도 흥한 덕분에 우리도 흥했으면 좋겠는데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되고, 왜 그래야 되는가? 그것은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있으면 그걸 둘러싼 뭐가 있기 때문에? 둘러싼 어두움의 세계,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두움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어두움의 세계와 관련되어서 나는 쇠해야 되고, 어두움의 세계와 관련되어서 주님은 흥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자체가 개인을 언급할 때는 나, 딱 둘러선 나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소속에서의 나는 뭣과 다릅니다. 나는 저들과 이렇게 다릅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뭐는 아니고 뭐는 아닙니다.

그 다음에 24절 보면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 요거 설명을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했지만 또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의 결속을 위해서 율법으로 결속했다 하죠. 율법을 하기 위해서 역사가 있어야 되겠죠. 역사는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거론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이 보장한다. 따라서 우리의 법 해석은 이미 누적된 진리와 가까운 것만 했기 때문에,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세례를 주는 자격자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들에게 권위 있게 인정받은 사람에게만 세례를 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역사 정통성이 그대로 계속 살아있게 하는 거겠죠.

그런데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뭐라고 합니까? 세례를 주는데 너희 모르는 다른 노선에 의해서 주어지죠. 그럼 노선이 몇 개에요? 노선이 결국 두 개인 겁니다. 요걸 설명할게요. 너희들 노선 하나, 또 노선 하나,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기존의 노선은 아니오, 라고 하면서 비로소 등장되는 노선이 바로 낯선 노선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너는 이 노선이고 나는 이 노선이 아니고, ‘그 노선이 아니다.’고 밀침으로써 비로소 그 밀치기 전까지는 나타나지 않고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나타나는 노선, ‘아니다.’가 아니면 절대로 나타날 수 없고 나타날 때는 반드시 ‘아니다.’ 이야기하고 나타나야 되는 노선. 그게 바로 구원받은 노선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구원할 때 ‘너, 너, 너 하늘로 와.’ 이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고난과 핍박을 받고 예수님은 뭐로 판정됩니까? 이 세상에서 ‘아니오.’로 판정되죠. 그래서 같이 ‘아니다.’로 판정 받는 그 ‘아니다.’가 오히려 ‘이다’가 되는 방식을 사용하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성도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복음을 전했을 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를 증거 하는 게 돼요. ‘너는 다른 거 같아. 너는 모든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하고 다른 것 같아.’라는 그런 말을 하는 가운데서 성도됨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예들이 전부 다 그런 쪽이죠.

그 다음에 봅시다. 26절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요한이 질문한 사람, 사람 같지도 않은 거예요. 보세요. 질문이 뭐냐 하면 “어찌, 어찌 너는 네가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주느냐?” 지금 질문한 것은 “네가 세례 줄 자가 맞느냐?” 이렇게 질문을 했거든요. “네가 누구 허락 받고 세례를 줘?” 질문이 이러면 그럼 답변이 뭐가 돼요? “나는 누구 아는 바리새인이 세례 주라 했어.” 이런다든지 “내가 알아서 한다.” 답변이 그렇게 나와야 되는데, 답변이 뭡니까? “나는 물세례 주거니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성령세례를 준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지금 그 질문의 답변이 맞는 거예요? 아니 사람을 완전히 개 무시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엄마, 파마 어디서 했어?’ 이러면 답변이 뭡니까? ‘아, 요 동네에서 했어.’ 이래야 되는데, ‘엄마 파마 어디서 했어?’ 하니까 ‘나 지금 쌍꺼풀 수술할 거야.’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결국은 뭐냐 하면 ‘너는 나에게 질문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네가 뭐라고 말하든 간에 나는 내 할 도리를 계속 해야만 하는 그런 입장이라는 그런 뜻 이예요.

그래서 그 말은 더 나아가서 뭐냐 하면 ‘너는 나에게 따질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너에게 닥칠 일만 걱정하라.‘ 그 뜻 이예요. 와~! 세례요한 세죠? 쟁반에 목 벨 만큼 대단히 센 거예요.

지금도 바리새인들이 이런 질문을 세례요한한테 했는데 이 질문을 오늘도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내용도 모르고 고분고분 답변 다해줘요. ‘어떻게 구원됐어요?’ ‘기도원에서 기도하다 구원됐어요.’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당신은 구원됐습니까?’ 하면 ‘너 같은 인간에게 주께서 재림하십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자꾸 유대를 해서 힘들지 않게 살아가고 불평 없이 살아가려고 그렇게 시도하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해야 될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유대지 사람과의 유대가 아니에요. 우리는 튕겨져 나와야 돼요. 그래서 교회서 나가라 할 때 이거는 사실은 이런 축복은 없어요. 문제는 그동안 내가 낸 십일조가 아까운 거죠. 십일조도 아깝지만 그동안 그 교회 깔아놓은 부조 돈 나간 게 있어서 곧 자기 딸이 결혼식 하는데 회수를 해야 되는데 나가 버리면 이단 나갔다고 결혼식 할 때 회수를 못하게 되잖아요. 그러니 인간은 선악과 체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하는 방식은 그들로 하여금 ‘제발 나가주세요.‘ 하는 날이 올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엄마 복음 이야기하려면 나한테 이야기 하지 마.’ 이런 식으로. 제발 딴 이야기는 좋은데 엄마, 복음 이야기는 하는데 내가 미치겠다. 그러니까 복음 빼고 딴 이야기 다 해줘.‘ 이런 말이 뭐냐 하면 소속이 이미 다르다는 이야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코스를 우리가 밟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될 텐데 우리는 걱정부터 늘어집니다. 행여나 세상한테 미움받을까봐 그저 입술로만 믿기만 작정했지만 실제로 믿게 하시는 주님에게 영광 돌리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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