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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1 01:30:26 조회 : 2506         
금상 속의 시간 120920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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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1.16) 12-09-27 12:11 
가락교회-다니엘2장20(금상 속의 시간)120920-4강a-이 근호 목사

제 4강a

다니엘 2장 20절 해봅시다.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꿈을 꿨는데 꿈을 찾아내라 하니까 억지죠. 다니엘은 억지를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왜 억지를 그렇게 유발시키느냐 하는 그 점에 지금 착안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정말 이거는 될 수 없는 그것을 동반하고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십니다. 왜 그러느냐,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수단을 부리는 수단을 주께서 거부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기 다니엘 2장에 보면 그 당시에 왕에게 조언하고 신에게 계시 받았던 이런 박수들과 많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잖아요. 많이 있죠. 많이 있는데 그것을 다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난 시간에 다니엘 한 거 잠간 요약하고 오늘 본문 나가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니엘 할 때 성전 개념에 유념하라 했죠? 성전은 중앙입니다. 이 중앙은 하나님께서 중앙이라고 나타내줘야 인간에게는 만남이 이루어져요. 어! 중앙이 그만 불타버렸습니다. 그러면 뭐가 없어졌습니까? 하늘과 땅, 땅과 하늘과 이어지는 연결점이 하나님에 의해서 구겨져 버렸죠. 하나님에 의해서 없어져 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그 하늘 문이 닫혀버린 입장에서 복이라는 것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복도 없고 하나님의 생명 되는 것도 없고 없는 상태죠. 이거 상당히 절망이죠. 그런데 이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한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니 자식을 낳아라.’ 자식을 통해서 복을 내리겠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삭이라는 자식이 어디서 생겨납니까? 이삭이라는 어떤 이 땅에 흔적이라도 뭐 있습니까? 이삭이라는 것이 이러니까 아버지가 있으니까 아들이 있어야 되고, 그런 연결 고리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이미 양쪽 아빠 엄마를 다 죽여 놓고 시작하잖아요. 그럼 절망이죠.

아무것도 없음에서는 있음에 대한 흔적도 없는 상태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게 제 나름대로 적당하다고 생각해요. 없지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도 사실은 진짜배기 없는 게 아니고 뭔가 낌새가 있는 거니까 그것도 있음에 포함돼요. 하나님은 그것마저 허락을 안 합니다. 없는 상태에는 완벽하게 없는 거예요. 없는 상태에서 뭐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그것도 진정한 없음이 아니라 약간 기대하는 꿈을 꾸는 있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것도 허용이 안 돼요.

천국이 뭐냐, 지옥이 뭐냐, 이미 우리가 천국, 지옥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어디에 해당되느냐? 있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요 있음에 근거해서 천국 지옥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은. 그러니 천국 지옥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우리가 아무리 둘러봐도 없는데 만약에 없는 곳에 누가 주입됐다면, 주입된 것만, 비로소 주입으로 인하여 여기는 없음의 세계가 돼요. 예수님이 주입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많네, 꽃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많이 있네. 해도 있고 달도 있고,  있는 것 가지고 해보자.’ 계속해서 없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으로 계속 나가는 거예요.

파르메니데스는 세상의 모든 것은 존재다. 그리고 아무리 잘났어도 변화되고 변화된 본질이 있을 게 아니냐? 뭐가 있어야 달라졌다는 말을 할 수 있지, 아무것도 없는 데서는 달라졌다는 말을 할 수 없잖아요. ‘어! 바람이 부네. 나뭇잎이 흔들리네.’ 그러면 거기 뭐가 있습니까? 바람이 있죠. 뭐가 흔들려 줘야 바람이 드러난다 이 말이죠. 그래서 흔들림을 통해서 바람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없는 것은 없고 전부 다 있는 것밖에 있다.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예를 들어서 없는 것도 있지만 조금 있으면 나타날 거니까 그것도 사실은 있음이 잠복돼 있을 뿐이지, 마냥 없는 건 아니다 말이죠. 모든 것이 있음에서 출발해서 있음으로 나가자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이고 그 로고스 신학을 기독교가 받아들여서 기독교는 하나님을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있다’는 그 있음이 인간에게 나왔기 때문에 그것은 조작된 것이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유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못 만났어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등만 보고 앞은 못 봤죠. 그리고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만났는데 감히 고개를 못 들고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엎드렸죠. 그러니 하나님에 대해서 정면으로 전부를 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잠시 잠간 보여줬지만 인간 세계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약에 이렇게(나타나시면) 돼 버리면 이게 있더라고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없는 것으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없음과 있음은 뭐와 관계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필요하면 있는 것이 되고 약속에 포함되지 않으면 없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없는 존재로 만들어서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해 버리면 그러면 아브라함이 없는 존재에서 있다는 것은 뭐만 있습니까? 약속만 있는 거죠. 약속만 있기 때문에 그 약속에 의해서 이삭이 태어났다면 이삭은 결국은 무슨 자식이냐 하면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고 약속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뭐를 믿었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었다는 말은 내가 그 이삭에게 일어나는 일은 ‘내가 관여한 바가 전혀 없습니다.’를 고백하면서 믿게 된 거예요. 그 이삭은 그냥 이 땅에서 있는 것은 이삭 한 사람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이삭이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이삭의 무한증식, 증식이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생산되는 거죠. 이삭의 무한증식 이예요. 계속해서 이삭과 같은 사람이 또 생기고 144.000이 생기는 거예요. 성도가. 모든 성도는 이삭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뭐 경주 이 씨니 안동 권 씨니 소용없어요. 이삭 같이 태어나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구원을 못 받습니다. 왜,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 이삭이고 그 약속은 이 땅에서 계속 무한 증식되기 때문에. 저지할 수 있는 어떤 힘도 없어요. 이 세상의 어떤 악마의 힘도 어떤 권력도 이 하나님의 약속의 무한증식을 저지할 수는 없습니다. 말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데 말릴 수가 없습니다.

이삭이 약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삭을 이삭 되게 하는 것은 이삭 본인의 행함이 아니고 계속해서 주입되는 약속에 의해서만 이삭이 이삭 되는 거예요. 만약에 이삭이 그 약속에다 자기 행함을 보탠다면 폭발해 버리죠. 그것은 명백한 가짜니까. 그래서 오늘날 성도가 살아간다는 것은 이삭답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뭐를 자꾸 빼내느냐 하면, 우리가 행한 것, 우리가 의도한 것, 우리가 노린 것, 이것을 자꾸 수해났을 때 집에서 물 퍼내는 것처럼 물을 빼내죠. 한일 자동펌프가 돌아가는 것처럼 윙~ 돌려서 계속 우리 행함을 빼내는 거예요. 배가 뚱뚱해도 마음만은 홀~쭉 하게 만들어요. 전부 다 빼버려요. 약속 말고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다 빼내버려요. 그 빼낸다는 것은 일종의 뺄셈이고 제거되고 빠지는 것을 의미하느냐, 그건 마냥 빠지는 것만 의미하는 게 아니죠.

왜냐 하면 다니엘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은 이건 빠지는 것이 아니고 덧붙여진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가 덧붙여지면 뭐는 빠지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는 팍팍 빠지고 계속 빠지는 거죠.

야고보서에 보면 하늘의 은사를 사모하라. 하늘의 은사가 오게 되면 우리는 세상의 것에 안개 같은 세상의 것에 대해서 마음 두지 않고 그것도 빠져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몸이 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없는 데서 이삭을 만들어 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없앴다는 말은 결국은 뭡니까? 새로운 성전이 있다는 거죠.  물 빼내듯이 기존의 성전은 빼내버리고 덧붙여진 새로운 성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그 새로운 성전은 우리 아이디어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새로운 성전이 나오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태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상상도 못한 거죠. 어떤 자식이 나올지, 죽은 몸에서는 상상조차도 안 되죠. 지가 죽었는데 무슨 새로운 아이가 상상을, 그저 웃을 뿐이죠. 웃으니까 이름을 뭐라 했습니까? 이삭, 그냥 ‘허허’ 하고 웃었죠. 그래서 이름이 이삭인 거예요. 예상도 못했다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달리하면 ‘내가 성도가 됐다 하는 것은 나도 예상 못했습니다. 내가 천국을 가다니, 나는 상상도 못한 이 엄청난 일이 주께서 지금 감행하셨습니다. 이 감사와 기쁨을 어떤 식으로 영광을 돌릴지 감당이 안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하더라도 이 주신 은혜에 제가 보답이 안 되는 정도예요. 주께서 손 대고 있다는 이 자체. 뭐 여자들이 미장원에서 파마를 할 때는 미리 예상을 해요.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것을. 전이 예술가, 전이 미용사한테 맡겨났더니 파마한다고 생각했는데 자는 사이에 머리를 다 깎아 놨어요. 여승처럼. 머리를 홀라당 다 깎아놓고 거기다 글자로 ’파마‘라고 써 놨다 합시다. 이건 머리 맡길 때 상상을 못한 거죠. 황당하죠.

주님께 우리가 성도되기는 황당 그 이상입니다. 이건 상상도 못해요. 어느 정도 예상 같으면 우리가 ‘ 착한 일 하면 어떻습니까?’ 하는데 착하고 안착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착한 일도 보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 황당해요. 착한 일 한다는 게 손이 부끄러워요. 거기에 착한 일을 덧붙인다는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주의 성도 되게 하심을.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것이 한두 명이 아닌데 그걸 언제 어느새 그 죄 값을 치러서 구원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분명히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이 극악무도한 인간을 주께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바꿨다는 것은 황당 그 자체 아닙니까? 이 은혜를 무슨 수로 아무리 고생해도 그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죠. 길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전의 성전은 뭐냐, 벽돌로 졌죠. 건물이 나무와 벽돌과 여러 가지 기구가 동원되었죠. 그래서 그러한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라 하는 것은 어떤 건축 구조물이어야 한다는 우리의 선입감, 우리의 예상 책이 있었어요. ‘아휴, 잘 지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다니엘에 와서 하나님의 중앙지점이 건물이 아니고 어느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 같으면, 우리 같으면 다니엘을 사람으로 한다든지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느부갓네살, 이건 뭐 마귀대장 이예요. 마귀 아닙니까? 짐승이거든요.

느부갓네살, 하나님 믿는 사람을 죽였던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의 성전이 들이닥칠 줄이야, 다니엘도 예상을 못한 겁니다. 왜 그랬는가,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가, 그건 제가 70이레 논문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이스라엘 나라로 하여금 70년 동안 그들에게 포로 잡히게 하신 것은 이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그전에 제대로 몰랐어요. 죄를 지은 이유가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겁니다. 선악적인 관점에서 죄를 알았기 때문에 죄를 몰랐던 거예요.

생명나무 관점에서 죄라는 것은 우리가 죄를 타고 났다는 것, 타고 났다는 그 자체를 죄라고 이야기하는데 죄를 모르기 때문에 70년을 포로 잡혀 가서 아무것도 없는데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무(無)에서, 없는데서, 불가능한 상태에서 다시 돌아오게 할 때는 비로소 이 멸망이라는 것, 지옥이라는 것, 죄라는 것을 유일하게 제대로 아는 민족일 경우에만 비로소 구원받는 민족이 되는 겁니다. 지옥이 무엇이라 하는 것.

전에 약속의 땅에서 지옥이다, 죄다 하는 것은 나름대로 연구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엉터리였습니다. 사람이 절망 가운데 있어야 지옥이 뭐며 죄가 뭐며 비로소 아는 거예요. 지옥과 죄, 이것은 바로 우리 자체의 운명이라는 것, 이것은 운명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옥, 죄라 하는 것은 이것은 그냥 운명 이예요. 이건 변경이 안 돼요. 모친의 죄로부터 그냥 태어난 겁니다. 태어나서 그걸 어떻게 예쁘게 해야겠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죠. 마땅히 멸망 받아야 했음을 알 때 비로소 그 자리에서 천국은 개시가 되고 생명은 시작이 되는 겁니다. 마땅히 멸망을 당해야 됐다는 거죠. 마땅히 멸망돼야 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멸망 안당하고 구원 받겠다고 시도했던 자체가 전혀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이해 못한 거예요. 그게 믿음의 관계가 아니고 행함의 관계였던 겁니다.

지옥이라는 것도, 천국이라는 것도 누구만 아느냐 하면 예수님(하나님)만 알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멸망케 했던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께서 계시를 내려 보냅니다. 그러면 중앙지점은 뭐냐 하면 다니엘도 아니고 느부갓네살이 중앙지점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한테 주어졌던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푸느냐, 그게 관건이 되는 거예요.

이걸 아까 중앙이라 했죠? 이걸 말뚝이라 해요. 강남 스타일 유행하니까. 말을 말뚝에다 매놓으면 말이 아무리 이렇게 돌아다녀도 항상 어디서 못 벗어납니까? 메아 놓은 말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죠. 다니엘은 이 느부갓네살 말뚝에 주어진 계시를 다니엘은 풀어야 되는 겁니다. 주변자로서 이 말뚝을 풀어야 되는 겁니다. 다니엘이 꿈 꿔놓고 다니엘이 지 꿈 모르는 게 아니거든요. 그걸 염두에 둬야 돼요. 다니엘이 꿈꾸고 다니엘이 푼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여전히 현재 있는 유다나라 이스라엘 중심으로 한다. 이렇게 돼 버려요.

그건 이미 아직 온전하게 이스라엘과 유다가 없어진 게 아니에요. 아직도 잔재가 있어요. 있는데 하나님의 미래 계시가 느부갓네살에게 주어져 버리면 이스라엘과 유다는 완전히 떨어져 나간 거예요. 진짜 없어요. 진짜 이스라엘과 유다가 아무것도 없어요. 없는데 누가 처음부터 소매 걷고 시작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시작하는데 시작하는 장소가 상상도 못한 바로 이방 민족의 우두머리한테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짐승한테 매어 있고 악마한테 매어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데서부터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은 시작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 유튜브 녹화의 주제였어요.

지옥도 모르면서 지옥에 있어봐야 천국이 보이는데 지옥도 모르면서 무슨 생명을 언급하느냐 말이죠. 교회가 지옥이라는 것이 나쁜 소식이 아니고 기쁜 소식 이예요. 오늘 첫마디가 뭐냐 하면 여러분, 교회가 지옥이라고 생각 해 보신 적 있습니까? 이렇게 나왔거든요. 교회가 지옥이라니까요. 교회 저주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복음을 전한 겁니다. 교회 와서 ‘아! 이게 지옥이구나.’ 이렇게 알면 그 사람이 바로 교회 해당되는 사람 이예요. ‘아휴, 이 교회 짓느라고 애 먹었다.’ 이렇게 나오면 지금 엉뚱한 걸 믿고 있는 거예요.

항상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상 상상도 못한, 우리들의 의견, 우리들의 기대가 주께서는 완전히 잘라버립니다. 그것도 매일같이 잘라버려요. 왜냐 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기대한 고 기쁨을 우리한테 제공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의 생명 구원이라 하는 것은 너무나 황당해서 너무 예상 밖의 큰 기쁨을 주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전부 다 끊게 만들어요. 유치장 배식구에서 사람 빠져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전무후무한 거예요. 이삭 같아요.^^ 전무후무한 일 이예요.

말뚝이 불신자 중에 우두머리 느부갓네살에게 주어지고 다니엘은 주변인으로서 꿈도 끄집어내고 해석해야 돼요. 그렇다면 말뚝을 잡은 분이 누구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죠. 첫 번째 어려운 겁니다. 말뚝을 느부갓네살에게 박아버리고 잠자고 있는 사람을 꿈꾸게 해서 미치게 만들은 것은 하나님이 하셨죠? 그러면 말뚝 붙든 분은 위에 있잖아요. 위에 있는 말뚝 주실 분을 어디로 바꾸느냐 하면 옆에 있는 걸로 바꾸는 작업이 됩니다. 그게 ‘인자야’라고 불러지는 다니엘이 되는 거예요.

꿈에 난데없는 하나님의 계시를 주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죠? 여호와 하나님인데 여호와 하나님을 쳐다볼 건데 그 해결책이 어디서 나옵니까? 옆에 있는 보좌 신하인 다니엘에게서 해석이 나와 버리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위에 계시다고 생각하는데 위에 계신 하나님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자기보다 부하,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신하를 통해서, 권력이 자기가 세고 자기보다 권력이 못한 오히려 자기를 받들어 모셔야 될 그런 자를 통해서 자기에게 꿈을 주신 사람으로 해석케 하게 되면 서서히 그나마 지축이 완전히 어떻게 돼요? 높은 곳이 높은 곳이 아니고 이게 뒤집어지는 타이타닉처럼 배가 뒤집어져야 돼요.

낮은 곳이 실제로는 높은 곳이 되고 높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사실은 지옥이 되는 겁니다.


 제가 총신에 다닐 때 설교나 강의 할 때 이런 이야기했어요. 구약에서의 복과 저주가 십자가를 통해서 이 저주는 복이 되고 축복은 저주가 된다. 이렇게 그림을 그린 게 기억이 나요. 여기 복이 A고 저주가 B라면 여기 복은 여기 복은 A'고 여기 저주는 B'가 돼요. 구약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양이 풍부했잖아요. 그런데 구약의 십자가 가까이 가게 되면 하박국 3장이 나옵니다.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완전히 이번 태풍에 무안이잖아요. 다 떨어져 버렸어요.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뭐로 기뻐한다? 구원의 여호와로 기뻐한다.

그러니까 이 말이 어려운 게 ‘나는 외양간에 소가 한 마리가 없어도 기뻐하는 나다.‘라는 이런 뜻이 아니고 ’내가 소가 없어도 기뻐할 그 나를 내가 그 전에 상상하지 못했습니다.‘하는 뜻 이예요. ’나도 내가 소가 없더라도 기뻐할 그런 나인 줄 내가 예상치도 못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구원받은 나는 그 전에 구원받기 전에 내가 예상했던 내가 아니올시다.‘ 그런 뜻 이예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말뚝을 박은 하나님을 쳐다보면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변 인물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다니엘에게 그걸 알려줘서 누가 섬겨야 되고 누가 섬김을 받아야 되는가를, 하나님 섬긴다고 하나님 보고 결정 내리지 말고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지음을 받은 이삭 같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곧 누굴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섬기고 싶은 사람이 오히려 내가 되기 싫은 ‘아휴, 난 때려죽여도 저런 인간  되기 싫어. 내가 어떻게 거지가 돼?’‘라는 거지가 돼서 해주더라고 그 거지의 신세를 현재 거지 아닌 나보다도 더 섬기고 부러워할 수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 공식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무도 가지 않는 낮고 천한 자리까지 오셔놓고 그 다음에 뭐라 하십니까? ‘니가 나를 존중히 할 수 있겠느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아버지를 존중히 여기고 나를 싫어하는 자는 아버지를 싫어한다.’라고 요한복음 5장에서 해버릴 때 어느 누구가 그 예수의 말씀에 따른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는 거예요.

현숙하고 훌륭한 그런 사람이 잠언서 31장에 보면 나오죠?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래서 그걸 유대인들이 보고 전부 다 여자라면 다 저렇게 현숙해야 된다고 생각할 게 않습니까? 그게 축복이잖아요. 남편한테 잘하고 하나님 잘 섬기고 그게 현숙한 여인이잖아요. 그렇죠? 인간은 예상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멸망당하기 전에 인간은 이미 예상을 해요. 하루 종일 할 일이 뭐 있습니까? 그거나 예상하지. 하나님이 원하는 여자는 이런 여인상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여기 A가 축복이라면 유대인들은 현숙한 여인과 반대되는 B지점을 같이 짝을 이뤄서 생각하기 마련이거든요. 축복을 생각한다는 것은 축복과 멀어지면 그게 뭐가 된다? 저주가 되는 거예요. 저주 받은 여인이 누구냐 하면 세리와 창기 같은 여자를 싫어하잖아요.

예수님께서는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힌 여인에게 뭐를 줬습니까? 여인에게 축복을 줘버렸을 때 어느 누가 그걸 보고 호응할 수 있는 인간이 누가 있겠느냐? 아무도 호응 못하죠. 못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게 바로 말뚝 박히기 전에 느부갓네살이 바로 이스라엘과 온 나라를 지배했다는 것이 들통 나버린 거예요. 유다와 이스라엘이 느부갓네살 바벨론에 포로 잡힐 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잡히기 전부터 그들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겼던 교만했던 자들인데 느부갓네살이 등장해서 잡혀 와 보니까 ‘아! 우리 생각하는 것은 전부 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내 멋대로 지어 낸, 지껄인 그런 엉터리 같은 하나님이었구나. 말씀 가지고 상상을 동원해 지어낸 가짜 하나님이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죠.

현숙한 여인이 축복 받았는데, 여기서는 간음하다 잡힌 자가, 용서 받은 여인이 복 받은 거예요. 그러면 고소가 되죠. 방금 A라는 축복에서 B라는 축복으로 가지를 못해요. 어디를 경유해서 와야 됩니까? A점에서 어디로 내려가야 돼요? B를 거쳐서 B에서 B', 신약의 용서의 자리로 와야 되잖아요. 그러면 A에서 A가 축복이고 현숙한 여인이라고 다들 그렇게 하고 우리나라 옛날 열녀비 세울 여인들 많지 않습니까? 우리 모임도 전부 그런 부인들이 되지만 흠이 없고 티가 없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그런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뭐 된다? 창녀가 되면 망가져도 보통 망가진 게 아니죠. 어느 정도 망가졌습니까? 내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는 게 되죠. 아니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싶을 거예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는 그 환경이 바로 축복이 움찔움찔 지금 축복이 터지려 하는 그 화산의 폭발 직전의 모습 새다 말이죠. 창녀하란 말이 아니고 늘 우리가 잘난 체 해도 주님 보시기에는 똑같은 인간 이예요. ‘죄 있는 자가 돌로 쳐라’ 했으니까 우리도 똑같은 거예요.

‘여기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할 때 지금 생각해 보면 머리 좋은 사람 같으면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러면 돌로 치면 다 죄가 있는데 죄 있으니까 그러면 돌을 놓고 집에 가란 뜻인지, 아니, 아니 그러면 안 되죠. 돌 놓고 집에 가면 집에 있으나 마찬가지라는 결과가 되죠.’

복음에 비해서 율법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이게 중요하다 말이죠. 복음에 비해서 율법은 완전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다가 ‘내가 율법을 지킨다.’가 돼 버리면 이 문장의 의도가 다 깨져버립니다. ‘하나님, 율법 지키다 안 되니까 복음 믿겠습니다.’ 이거는 이 뜻이 그 뜻이 아니에요. 율법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복음에 비해서 율법이 완전하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에 비해서는 율법은 완전한 거예요. 선한 것 이예요. 일점일획이라도 뺄 게 하나도 없어요. 내가 율법을 완성케 한다는 것은 율법을 우리 손에 거쳐서 완성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의해서 율법이 완성되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이 복음에 비해서 완전하지 않다는 말은 율법 폐기주의자가 아니죠? 율법 폐기라 하는 것은 꼭 자기를 관여시킬 때 율법 폐론이냐, 아니냐. 그따위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자꾸 집어넣으면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돌을 쥐었던 그 사람이 우리처럼 머리 좋을 것 같으면 ‘아! 이거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란 말은 이건 말씀은 내가 지키는 게 아니구나. 주님께서 지키고 우리는 율법의 완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도구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저요. 저 사람을 돌로 쳤던 저희들을 용서해 달라.‘ 이렇게 나오면 되잖아요. 그게 예수 믿는 거잖아요. ’저 여인을 돌로 치려했지만 저 여인이나 내나 똑같습니다. 둘 다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된 텐데, 아무도 없었어요. 노 바디, 노 바디, 아무도 없었어요. 주님이 일부러 물었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있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예수를 자력으로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주님한테 지적받아도 기어이 자기 자신을 포기를 못하겠다는 겁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고 나 자신을 위해서 율법이 있다는 그 사실을 내가 스스로 버리기가 싫다는 겁니다. 내 위주고 내가 중요하지 하나님과 예수는 나보다는 덜 중요하다는 이야깁니다. 느부갓네살 이예요. 그거 말뚝 박혀야 됩니다. 독도는 우리 땅 그거만 말뚝 박는 게 아니고 우리 가운데 말뚝을 박아야 되는데 말뚝을 위에서 박는 줄 알았더니만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이 옆에서, 다니엘과 같이 우리 옆에 있는 우리보다 더 천한 쪽에서 우리를 말뚝을 박을 줄이야 어이 알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주변부에서 도와준다는 것, 이거 하나 아시고.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것 알아야 될 것은 말뚝이니까, 인간 중심, 말뚝인데 느부갓네살 중심의 뭐가 빙빙 도느냐 하면 바로 시간이 빙빙 돕니다.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지나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를 예상하죠. 이런 미래를 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과거의 아쉬운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에 미래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할 때 요거까지는 찼는데 요거마저는 덜 찼다. 요 마저는 미래에 찼으면 좋겠다. 요거 찬 것은 현재인데 현재가 채워졌을 때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은 미래고 채워진 것은 곧장 뭐로 바뀌느냐 하면 과거에 생각했던 미래로 바뀌는 겁니다. 참 말을 어렵게 한다.

쉽게 하겠습니다. 한 시간 전에 오줌이 마려웠다. 그러면 그때 빨리 ‘화장실에 갔다 왔으면 좋겠다.’ 했죠? 그래서 화장실 갔다 왔잖아요. 갔다 왔으면 그건 내가 오줌 누기 전의 생각의 완성도지, 지금 오줌 나오고 난 뒤에는 그건 지나간 거고 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거죠. ‘오줌 누고 난 다음에는 뭐를 하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과거에 생각했던 그 미래가 완료 됐나 확인하는 것을 어려운 말로 ‘반-과거’라 한다. 과거라 하는 것은 닫힌 것이 아니고 한쪽은 닫히고 이쪽은 열린 거예요.

시간이 빙글빙글 도는 거예요. 시간이 돌아버리면 과거 생각하고 현재 생각하고 미래 생각하죠. 이것이 자아내는 걸 가지고 ‘현실’이라 합니다. 이게 현실 이예요. 우리가 한번 상상해 봅시다. 어떤 아주머니가 병원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는 ‘저 아주머니는 몸이 아파서 병석에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린다.‘ 이렇게 제 3자가 보기에는 그렇게 누워 있다고 하지만 본인은 누워서 어릴 때 과거 이야기 다 생각합니다. 병원에서 할 게 뭐 있습니까? 누워서 ’내가 그때 누구한테 해코지 안했으면 이렇게 마지막 죽을 줄 알았으면 후회된다.‘ 병원에 누워 있으면 주변에 뭐가 빙빙 돌아요? 과거, 현재, 미래, ’내가 죽게 되면 슬퍼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과거, 현재, 미래가 빙빙 도는 거예요. 그게 본인 고유의 현실입니다. 안철수가 출마하고 뭐고 관계없어요. 탈북자가 어떻든 관계없고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시간이 빙빙 돌면서 만들어 낸 그 현실이 자기에게는 그 현실이 전부입니다.


솜사탕 만들 때 어떻게 합니까? 뭔가 발로 밑에서 누르면 빙빙 돌죠. 그러면 뭐가 뭉게뭉게 피어납니까? 설탕이 깨어진 솜이 뭉게뭉게 피어오르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현실 이예요. 그래서 인간의 현실이라는 것은 솜사탕 제조기처럼 그 안에 누구 몸이 있다? 바로 내가 있는 거예요. 내가 내 주위에 시간이 빙빙 돌면서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여기다가 말뚝을 박아버려요.

여기다 말뚝을 박으니까 내가 아는 현실로서 말뚝을 박으면서 나오는 꿈의 내용을 접선할 길이 없네. 미치고 환장하는 겁니다. 분명히 내가 꿈을 꿨으니까 내 허락도 없이 들어온 현실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아는 현실은 현재 내가 알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관에서만 이것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현실인데 그 현실을 아무리 들이대 봐야 저게 풀리지 않아요.

여러분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단어 하나 나오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에게 뭘 준다? 열쇠를 주죠. 이 열쇠는 어떤 것도 열 수 있는 열쇠라 말이죠. 어떤 것도 열리는 열쇠라면, 자물쇠가 있어야 열쇠로 열게 아닙니까? 자물쇠는 베드로가 알까요? 모를까요? 지금 주님께서 열쇠 준다 해놓고 뭐는 이야기 안 했어요? 자물쇠는 이야기 안 했죠? 그 자물쇠는? ‘예수님, 제가 어떤 걸 열어드릴까요?’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니가 바로 자물쇠다.’ 왜 그러느냐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고난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하니까 베드로가 뭐라 합니까?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했죠? 하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니가 하나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모든 사람과, 사람과 사람이 뭉쳐져서 여기에 악마가 지배하게 되면 이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자물쇠가 되는 겁니다. 그 중에 누가 포함돼 있다? 사람에 베드로가 여기 포함돼 있죠? 베드로가 열쇠를 주니까 베드로는 열쇠로 열려고만 했지 그 열쇠 가지고 자기를 열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나 열라고 준 열쇠를 가지고 베드로는 자기는 빼놓고 ‘자, 이제는 내가 주의 얼마나 큰 사도인 줄을 한번 폼을 내겠다.’는 거예요. ‘도둑놈인가 열쇠로 금고를 열게?’

악마가 이미 베드로를 지배하고 있는 이상은 열쇠를 준 것은 베드로가 그 열쇠를 사용하려고 한 그 순간 ‘니는 악마에 속했다.’고 티가 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교묘한 전략입니다. ‘주님이여, 저 십자가 알거든요. 십자가 열쇠 맞죠? 십자가로 저를 구원하셔서 저는 십자가로 구원받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십자가를 알았다는 그 지식이 나를 구원하리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마귀한테 속한 모습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께서 일하면 일할수록 점점 더 우리는 ‘아! 이래서 마귀에 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구나.’하는 것을 점점 더 밝혀지는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아까 자기 시간, 자기 시간이란 말은 어려우니까 자기 기억이라 합시다. 내가 아는 기억 범위 밖에 나가는 현실관은 없어요. 모든 내가 아는 현실은 내가 기억하든지 경험했던지 그 경험과 기억한 것 가지고 조성된 현실입니다.

이건 말하면 어렵지만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이 맞잖아요. 내가 경험하고 내가 기억된 것 바깥에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도저히 기억할 수 없죠. 내가 기억할 것 외에는 기억할 수 없다. 이 말이 틀린 말입니까? 맞죠. 그러니까 제 말의 취지는 뭐냐, 인간의 현실관은 일방적이다 이 말입니다. 너무나 일방적 이예요.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을 알았다. 그것도 누구 현실속입니까? 내가 알고 있는 기억 속에 ‘예수 알았다. 나는 예수 몇 년 알았다.’라고 돼 버리면 이건 자기 주변을 뱅뱅 돌고 있는 시간 속에 갇혀 있는 예수가 돼 버리죠. 진짜 예수님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구원파가 문제 되는 거예요. 구원파가 뭐라 합니까? ‘당신은 언제 거듭났습니까? 날짜 됐어요?’ 하거든요. 날짜 돼 봐야 자기가 경험한 그거에만 국한된 믿음이기 때문에 그건 엉터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제 말 이해되겠습니까? 인간은 자기 기억 밖에는 못 벗어난다 이 말이죠. 벗어날 수도 없는 인간이 그 안의 자기 기억과 과거 속에 시간 속에 갇혀 있으면서 예수님을 알았다고 우기는 그것은 지 현실 속에서만 써먹는 예수지, 보편 전체적인 예수님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럼 전체적인 예수님은 뭐냐, 그건 성경 다니엘에 나오잖아요. 말뚝을 박아버린다니까요. 그러면 내가 예수를 안다 하는 이것을 말뚝을 박아버리면 이게 쪼개지잖아요. 쪼개지면서 ‘주여, 누구십니까?’ 물을 수 있는 것, ‘주여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내 허락도 없이 내 인생에 이렇게 엮이십니까?’라고 난데없는 외침과 고백과 소리로서.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당신 누구보고 이야기하나?’ 하면 ‘당신 몰라도 돼.’ 사울이란 사람이 말에서 떨어졌잖아요? 그럴 때 주변 사람이 우뢰, 천둥이 울었다 하지만, 그걸 대화를 주고받고 아는 사람 누구밖에 없어요? 사울과 예수님 밖에 없죠. ‘나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이 이야기는 주변 사람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죠. 그 말은 뭐냐 사울이란 사람이 갖고 있던 그 과거 기억 모든 현실을 말뚝을 예수님이 박아버리니까 그때 반응이 뭐냐 하면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 그때 주께서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을 안 죽여도 우리는 평소에 늘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주께 들려오는 것은 ‘근호야, 니가 핍박하는 나 예수다.’라고 올 때에 비로소 내가 예수를 죽이고 예수를 믿고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찾아오셔야 할 문제다 이 말이죠. 찾아오셔서 또 다시 형성된 빙빙 도는 시간의 현실은 또 다시 부수고 또 다시 부수고 또 다시 부수는 거예요. 부서지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부서지는 나를 볼 때 그동안 우리가 시시하게 보고 저 사람 얕잡아 보고 무시하고 했던 그것이 사실은 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이 무시당해도 마땅한 것을 모르고 자기는 얼추 어느 정도 됐다고 여기고 ‘이 정도 생겼으면 사람답다.’라는 그 모든 것이 그게 또 가짜 현실을 유발했던 일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느부갓네살이 그랬고 그 당시 모든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 대표자로 고맙게도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대표로 해서 향도노릇 한 겁니다. 여러분, 향도 아십니까? 고등학교 때 교련 안 받아봤어요? 앞에 깃발 들고 많은 인원의 대표로 서 있잖아요. 인간이란 왜 저주받을 수밖에 없고 왜 짐승인지 대표로 보여준 게 느부갓네살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한테 뭐를 붙입시다. 고마운 느부갓네살! 지가 꿈꾸는 것도 모르고 발작하는 느부갓네살, 지 꿈 꾼 걸 남한테 알아내라고 억지를 부리는 느부갓네살.

그래서 예수님의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교회 다니는 사람처럼 묻는 거예요. ‘예수가 누굽니까? 좀 당신들 교회 다녔으니까 알려줘. 누구야? ’다른 사람들도 아나? 나도 몰라. 복 받는 방법 밖에는 몰라. 예수님은 관심 없으니까.

진짜 관심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냐에 관심 있는 사람은 성령 받는 사람 이예요. 그리스도 영이 임한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죠. 그 문제 해결 안 되면 사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이제는 자식문제, 사업문제 가정문제, 다 중요하지 않아요. 내 문제도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누구냐 이 말입니다. 그 분이 도대체 누구냐, 당체 ‘그분이 누굽니까??‘ 이런 물음. 느부갓네살이 지금 시작을 한 겁니다. 밝혀낼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이 현실을 깨뜨리는 분이라면 그 깨진 현실을 다시 진짜 현실로 전체를 덮는 현실로 제공하신 분에 의해서만 그 해답이 느부갓네살에게 주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것이 주어지니까 시간이 느부갓네살 중심의 시간에서 이제는 인류 보편적인 모든 역사를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드디어 밝히 보여줍니다. 그 이야기를 누가 합니까? 다니엘이 바로 느부갓네살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죠. 사적인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지배하는 바벨론 나라가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벨론 나라가 이란 지점에 있는 것.’ 우리도 하나의 개별적인 나라인 줄 알았는데 이 인류역사상에 등장하는 모든 나라가 바벨론이란 사실은 새로운 말뚝을 박는, 다 깨버리는 새로운 현실 속에서만 그 사실이 드디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이란 뭡니까? 개별적인 인생이란 것은 의미가 없고 전체 인류 역사 가운데서 ‘우리는 왜 존재해야 됩니까?’라는 물음이 우리에게 주어지겠죠. 그렇게 되면 여기서 뭐가 중요하냐 하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 잡혔다는 사실은 그게 별로 중요치 않게 돼 버려요. 왜냐 하면 2개의 떡을 갖다 붙여버리면 떡이 2개가 아니고 뭡니까? 하나가 돼 버리죠. 그러니까 유다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아이쿠, 어쩌다 보니까 죄 지어서 바벨론에 붙어서 떡이 되었다.’ 사실은 둘 다 똑같은 동일한 떡이었습니다.

그러면 언약대로 이스라엘은? 언약대로 유다나라? 언약대로 다윗 언약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 있느냐? 떡이 된 가운데서 그 현실을 깨부수면서 새롭게 삐져나오는 바로 인자되는 다니엘이 받았던 계시 속에서 새롭게 이렇게 나와야 되죠. 마술사가 검은 보자기 해놓고 ‘자, 비둘기 나온다.’ 솔솔 나오는 것처럼, 고 평화의 비둘기가, 다니엘이 직업이 뭐냐, 술사, 마술사예요. 다니엘은 하나님의 지혜죠. 그 속에서 새롭게 삐져나오는 거예요. 둘 다 떡이 돼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실 때 유대인들도 역시 마귀나라였고 이방나라도 기본적으로 마귀나라고, 오직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솔솔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걸 다니엘을 통해서 미리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41.16) 12-10-03 16:10 
가락교회-다니엘2장20(금상 속의 시간)120920-4강b-이 근호 목사

제 4강b

다니엘 할 때 이렇게 어렵게 할 필요가 뭐 있느냐, 이렇게 생각이 들 수 있는데 그 당시 예수님을 다니엘로 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 당시 예수님이 다니엘이라면 요즘 시대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인력으로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 당시 시대에 다니엘을 ‘아이고, 요즘은 예수님을 성령 임해야 믿지만 다니엘 시대는 딱 보면 다니엘을 믿었을 거다.’ 이런 식으로 다니엘을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가서 안 죽었으니까 야! 나 다니엘 한번 믿어야지.‘

지난번에 했죠? 느부갓네살이나 그 뒤의 다리오 왕이 기적을 봤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고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죠? 분명히 기적을 알고 ‘야! 너 대단하다. 내 꿈을 다 알아내다니.’ 감탄했다고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분명히 기적을 맛보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귀신을 쫓아내고 해도 구원이 안 되는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된다니까요.

오늘날 교회가 ‘우리교회 오시면 받을 수 있습니다. 복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기적 받고 복 받아도 그것이 예수 믿는 게 아니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돼요. 그 당시 다니엘이 함께 있었다. 다니엘을 믿을 수 있는가? 이건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않으면 다니엘을 못 믿습니다. 이정도로 꿈 해석하는데 대단하지, 누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대단하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안철수씨가 자기 전 재산 내놓고 한다 해도 우리는 나를 믿지, 안철수를 좋아하는 나를 믿지, 나 버리고 안철수를 믿지는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다니엘을 어렵게 하더라도 좀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쉽게, 쉽게 간다는 것은 우리가 그냥 지식의 정답뿐이지, 그게 구원의 능력은 될 수 없는 문제거든요. 그런다고 더 깊게 한다고 해서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성경에 있는 대로만 그대로 이야기하자면 어떤 기적과 어떤 놀라움을 본다 할지라도 그게 왜 구원과 연결이 안 되는가, 그 내막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오늘 다니엘이 꿈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런 계시를 주실 때 이런 계시에 접한 사람은 아마 천국 갈 것이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그런 생각을 제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거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을 주셨죠? 돈 줘놓고 ‘돈을 사랑하지 마라’ 왜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합니까? 아예 돈을 주지를 말든지, 돈을 줘놓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면 우리보고 어떡하란 말입니까? 그 말은 딴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 다이렉트로 계시를 주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감추어진 자아가 튀어나오게 돼 있어요. 그 튀어나온 자아가 우리대신 이미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튀어나왔고 그 느부갓네살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우리와 똑같은 동질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수용을 해줘야 돼요.

기적 얻었다. 기적 얻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는 주님한테 이런 기도응답 받았다. 그렇다고 신자 아닙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내 속에 나의 모든 시간이 빙빙 돌고 있죠? 그러면 내가 5년 전에 기적 받은 것이나 17년 전에 암에서 나은 것, 이것을 넣으면 이게 빙글빙글 돌게 만들어요. 그러면 느부갓네살은 살아있고 자기 현실은 안 깨지고 있는 거예요. 그럼 깨져야 돼요. 느부갓네살이 이걸 깨려면 느부갓네살에서 ‘이렇게 구원받았다.’가 나오면 안 되고 인류역사 전체가 다 나와야 되겠죠.

인류역사 전체가! 성도를 깨면 성도가 어릴 때 이렇게 살았고 몇 살 때 예수 믿었고 그 다음에 어떻게 봉사했고 이렇게 그것만 나오면 안 되고, 성도를 딱 깨면 그 안에서 인류 보편적인 역사가 전제 다 나와야 돼요. 성도가 3명이라면 3명 다 깰 때마다 전체 역사가 다 나와야 되고, 전체 역사 3개를 다 모아보면 똑같은 역사가 나와야 돼요. 열 명이면 열 명 다.

그래서 수요일 날 제가 어렵게 이야기한 거예요. 뭐냐 하면 인을 받으면 뭐로 전환된다? 숫자로 전환된다는 거예요. 인격이 숫자로 전환되는 거예요. 뭘 통해서? 인(印)을 통해서. 도장을 통해서. 도장이라 하는 것은 그냥 도장이 아니고 인감도장이라 보면 돼요. 하나님께서 인감도장을 찍는 것은 요즘에는 이름을 쓰잖아요. 옛날에는 도장에는 거기에 얼굴이 있어요. 누구 얼굴? 자기 얼굴? 아니에요. 그 당시의 통치자의 얼굴이 들어가 있어요. 로마시대에.

그러니 이건 뭐냐 하면 ‘니는 내 소속이고 너의 모든 것은 내가 보증한다. 인감. 보증한다. 내가 보증서로 도장을 찍은 겁니다. 예수님의 도장을 맞았다는 이 말은 이마에 도장, 표를 받았다는 이 말은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의도적으로 너에게 만들어 낸 일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적혔다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너에게 이러한 일들과 이러한 것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인은 결국은 개인적인 소유의 인이 될 수 없고 보편적인 모든 성도에게 공의 도장이 되기 때문에 그건 뭐냐 하면 숫자로 전환되는 거예요. 144.000으로 전환되는 거예요.

사람이 있으면 이마에 인을 맞으면 숫자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마가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이마에 무슨 표를 하라 했습니까? 출애굽기 13장의 내용을 표해라. 13장의 내용이 뭐냐, 4가지로 돼 있어요. 우리는 애굽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장자가 죽어야 할 것을 양이 대신해서 죽음으로 우리 장자가 살아났다는 것.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것을 이루어 냈다는 것, 우리가 약속의 땅에 산다는 내용. 그런 내용을 여기다가 이마에다 박으라 했다 이 말이죠.
*테필린(Tephillin): 이마와 팔에 묶는 검은 상자와 줄은 한 쌍이라고 볼 수 있으며 성구 갑.

그럼 이마라 하는 것은 우리의 전부의 대표 얼굴처럼 우리 내부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외부의 신체적인 지점이 되면서 그냥 지점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언약이 접촉하는 유일한 장소가 이마가 된다 이 말이죠. 그 이마가 되는 이유는 바로 요한계시록 7장에서 이마에 뭘 박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박아버리죠. 다른 사람한테는 악마의 인을 박고. 그러니 요한계시록 7장 이야기를 알려면 에스겔 9장에 보면 나오죠. 성전에서 고통 하는 사람에게 이마에 먹물로 표를 하고 나머지는 처자든 남자든 애든 다 죽여 버리라고 나오죠.

그런 것이 나올 때에 우리가 그 성경을 보고 난 뒤에 거리에 나가서 세상 사람들을 봐야 돼요. 뭘 봐야 돼요? 이마를 봐야 되죠.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하고 이마를 봐야 돼요. 혹시 짐승의 표가 있나. 보면 뭐 짐승의 표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이마에 없잖아요. 그들에게 그런 것이 안 보인다는 말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그들이 흔적이 없듯이 우리에게도 적혀있는 것이 아니란 말 이예요. 딱 보니까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의 이마에 전부 다 666이라든지 짐승, 이런 게 써 있으면, 나도 집에 가서 거울 봐서 ‘그리스도인’이 나타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아무리 훑어봐도 없는 것처럼 저쪽이 없다는 말은 이쪽에도 아무리 이마 훑어봐도 없죠. 없으면 그건 뭐냐 말이죠.

없으면 그게 뭐냐 하는 겁니다. 그 중간 단계가 에스겔이고 그 중간 단계가 다니엘 이예요. 우리는 그 중간 단계를 지금 거치고 있는 겁니다. 중간 단계를 하다 보니까 과거 지난 것 앞선 것 전부 다 다니엘에다 집어넣으니까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설교가 어려워지는 거예요. 자연적으로. 사실은 그렇게 해야 돼요. 한 구절 속에서 성경 전체가 다 나올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거예요.

유튜브에서 제가 조금 있으면 십일조에 대해서 할 거예요. 십일조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십일조는 없다는 것을 유튜브 강의 준비를 해놓은 게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십일조를 받아 챙기면서 뭘 또 낸단 말입니까? 그러면 받아 챙긴 십일조는 십일조를 모독한 거밖에 더 됩니까? 십일조를 받고서 우리가 성도 됐는데 우리가 받은 거 있는데 내가 따로 낸다는 것은 이건 무슨 짓 이예요? 저쪽은 예수님이 십일조가 아니라는 것밖에 더 돼요? 그럼 예수님을 훼방하는 게 따로 있어요? 그런 게 예수님을 훼방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모독하는 게.

자, 본문 나갑시다. 율법(계시)이 주어지는 것은 감추어져 있는(숨어있는) 우리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아까 예를 들었죠? 돈을 줘놓고 뭐라 합니까? 돈을 사랑하지 마라. 사실은 반대가 되죠. 돈은 사랑하지만 율법이 옴으로 말미암아 ‘아이쿠, 하나님이 주신 돈 받아 놓고 좋다 했는데 어! 하나님이 주신 축복 받아놓고도 이걸 사랑하지 마라 하면 받은 축복 사랑하지 않으면 뭘 사랑해?’라는 의문점이 나오도록 할 때 그때 우리는 진짜 숨어있는 음흉한 나 자신의 실체가 수면위에 떠오르게 되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기 위함 이예요. 로마서 7장에서. ‘빨리 니 본색 숨지 말고 드러내.’ 드러나 보면 그 본색이라는 것은 그저 모든 현실을 내 중심에서, 느부갓네살이 따로 없어요.

개그 콘서트라는 프로에서 요번에 제가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한 코너가 있어요. 지금까지 프로 보면서 그렇게 생각을 깊이 하게 하는데 뭐냐 하면 ‘브라우니’라는 게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인형으로 만든 갭니다. 개가 나오는데 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 데리고 나온 개그우먼이 ‘물어, 물어.’ 하거든요. 인형인지 다 알아요. 인형인 줄 다 아는데 개 인형보고 ‘물어, 물어’ 했다 이 말이죠. 브라우니는 거기에 대해서 움직입니까? 안 움직입니까? 안 움직이죠. 우리가 돈을 사랑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보고 ‘돈 사랑하지 마. 하지 마. 물어, 물어.’하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뭡니까? 우리가 성경 아는 체 하고 뭐 아는 체 하고 예수님 자랑하지만 실제로 우리 자신은 주의 말씀을 아무것도 이미 해낼 수 없는 무능한 자고 오히려 무능하니까 뿔따구 나서 오히려 딴 거 가지고 ‘요걸로 때워주세요.’ 하고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하는 그리고 진짜 무능한 자기는 고이고이 숨겨놓고 안 다치게 하는 그런 인형 같은 존재, 어떤 기계 같은 존재, 나쁘게 말하면 괴물 같은 존재. 아무것도 어느 말씀도 지킬 재주가 없어요.

‘너는 안개니라.’ ‘압니다.’ 안개처럼 살지 않는데 알면 뭐합니까? ‘아는 걸로 그만 넘어가 주세요.’ 이 말이거든요. 아는 걸로 대충 때워달라는 거예요. 우리의 숨어있는 브라우니, 인형 개를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개, ‘물어, 물어’ 해도 가만히 있죠. 그러니까 ‘차도남’ 차도남이 뭐죠? 차갑고 도도한 남자 이 말 아닙니까? 실제로 물 수 있는데 위신 챙기려고 안 물지, 이런 뜻이란 말이죠. 숨어있는 우리의 브라우니, 느부갓네살, 그것을 이미 우리 먼저 매를 맞은 분이 계십니다. 이름이 다섯 자, 느부갓네살! 그는 짐승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장례 있어서 어떤 분이 글을 썼잖아요. ‘아유, 내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부럽다.’라는 회개의 글을 썼는데 저는 댓글 달기를 살아있어도 이미 죽은 겁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 빼놓고 생명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생명이 없더라도 ‘나는 왜 그리 이쁜지 몰라.’ 생명의 유무에 관계없이 ‘그저 여기 있음에 그냥 챙기고 싶어.’ 생명 없더라도, 지옥 가더라고 나 아니면 누가 지옥 가는 나를 챙겨주겠어요? 브라우니를. 그것이 우리는 남들도 다들 그렇게 하니까 용납하고자 했는데 막상 하나님이 율법이 주어지니까 계시 앞에 딱 서니까 그냥 무능 자 뿐 이예요. 무능 자 뿐이고 그냥 짐승일 뿐이고 어떤 대책이 없어. 왜 태어났는지 몰라. 왜 우리는 이렇게 사는 거야?

‘왜 이렇게 사는 거야‘ 하니까 적어왔는데 노래 가사니까 한번 들어보세요.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존재의 이유 김 종환 노래 2절 가사에 나오는 겁니다.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우리나라 20대에서 30대 중반까지 모드 직장인들 남자 여자 모두 다 이렇게 살아요. 여기 3명 남아있는 사람도 이렇게 살걸요. 우리 집사님도 나중에 집에 가면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겠죠.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눈을 뜨면 또 하루가 가고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냥 무능해요. 주의 말씀이 무능해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듣기는 들었는데 그게 아무 소용없어요. 예수니 십자가니 아무 소용없어요. 그저 남는 것은 평범한 몸, 귀찮게 하지 마라. 그뿐입니다. 존재의 이유 듣고 처음에 얼마나 울었는지, 아이구, 니 신세나 내 신세나 똑같다. 쉬지도 못하고 돌아다니고.

바로 그것을 까발린다는 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기능은 니는 짐승이라는 것. 그래서 거기서 다니엘 본인도 놀래버리죠. 개인 속에 전체 역사가 들어있을 줄이야 다니엘도 상상을 못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이삭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무(無)에서 이삭이 태어난다는 것. 모든 것이 있음은 사실은 있음이 아니고 약속을 위해서 없다는 식으로 있어줘야 될 그런 환경 이예요. 아브라함도 그렇고 사라도 그렇고 누구하나 나타나기 위해서? 이삭이 어떻게 나타나나 보라 이 말이죠. 너에게서 안 나온 것이 너에게 생명을 준다는 놀라운 진리의 법칙을 이삭이라는 그 메마른 가지에서 그것을 피어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이 이 작전,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성령을 통해서 똑같이 작용합니다. ‘너 봐, 브라우니잖아. 너 봐, 무능 자잖아.’ 무능한 그 속에서 생명이 피어나는 이 놀라운 기적을 너는 구김 없이 맘껏 자랑하라 이 말이죠.

이걸 다니엘서는 뭐냐, 개인 역사에서 뭐가 나온다? 인류 전체 역사가 다 나와요. 개인역사에서 인류 역사를 끄집어내면 안 되느냐, 이렇게 끄집어내면 이건 인류사가 아니고 누구 중심의 역사냐 하면 이 개인 느부갓네살을 빙빙 도는 자기 가상현실에서 뽑아내온 자기중심의 역사관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 할 때 그 역사관이 누구 중심입니까? 대한민국 중심으로 볼 때 독도는 우리 땅이죠. 그런데 미국은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나는 그러한 민감한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 그렇게 나와요. 그럼 우리가 알래스카를 한번 점령해 보죠. 우리가 알래스카를 점령하면? 알래스카는 누구 땅이다? 미국 땅이라고 나올 거다 이 말이죠.

그래서 사람이 열 사람 백 사람 다 보는 인류사는 전부 다 누구 중심이다? 자기를 중심(중앙)에 놓고 성전이죠. 자기를 중앙에 놓고 거기서 자기 위주로 인류사를 뻗어나가는 겁니다. 어떤 초등학생이 물었어요. 왕건이도 최 수종이고 ...도 최 수종이고 장보고도 최 수종이고 우리나라 건국한 사람이 최 수종이 건국했는지. 최 수종이 누군가 하면 탤런트 영화배우 아닙니까? 하도 드라마에 나오니까. 지가 본 거, 지가 들은 거. 왜 역사는 이렇게 되는가, 대한민국 번영하기 위해서, 왜 독도는 있는가, 독도는 우리 땅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인간은 바로 숨어있는 무능한 그걸 감추고 자기 위주로 그걸 감추어 놓고 세상 역사의 중앙에 서겠다는. 선악과 따먹고 진짜 자기는 감춰놓고 신이 된 자아를 가지고 인류역사를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짜는 그 악마의 버릇, 그것이 뭐냐, 그걸 느부갓네살은 악마의 역사고 짐승의 장난이라는 것을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자, 이제 뒤의 부분 아시겠죠?

자, 이제 꿈을 해몽을 해줍니다. 31절 봅시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이 대목에서 내가 다니엘 같으면 얼마나 폼 재겠습니까? ‘임금님, 꿇어 앉아. 꿇어 앉아. 꿇어 안 앉으면 이야기 안 해주지. 꿇어 앉아. 왕이여, 내가 딱 보니 어제 꿈 꾸셨네. 왕이 큰 신상을 보셨네요.“ 하면 ’아이쿠, 할배여, 맞아 맞아. 그랬어. 그랬어.‘ 나오죠.

여기서 좀 더 진행해 봅시다. 꿈의 해석을 해줍니까? 아니면 꿈과 해석 다 이야기해줍니까? 꿈과 해석 다 이야기해주죠.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요구했던 것은 뭡니까? 꿈에 무슨 꿈을 꿨느냐를 요구하는 거죠. 그 사람이 그럴 때는 뭐냐 하면 꿈 꾼 것만 알려주면 해석은 누가 한다? ‘내가 꿨으니까 내가 알아서 내 중심으로 내 역사 중심으로 하겠다.‘라고 하는 거예요.

꿈을 해석하면서 무슨 권한을 뺏어갑니까?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뺏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저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세요.’라고 이야기할 때는 그 비밀을 알려주면 우리는 그걸 사건이라 생각하는데 막상 알려주고 난 뒤에는 우리 전체를 강탈해 가요. ‘니는 없어. 니는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나니 이제는 니가 사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니 안에 내가 사는 거예요.

성경의 비밀을 알아버리면 안 순간 더 이상 그걸 알아서 어떻게 해먹겠다는 알기 전의 사고방식은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니까 클릭 하나 잘 해야 해요. 삭제 하시겠습니까? 해서 엉뚱한 거 잘못 누르면 날아가듯이. 그래서 제가 동영상 삭제 많이 했습니다. 지난, 지난 주 음성도 해놓고 잘못해서 삭제돼서 다시 뽑아서 올리고 했죠. 그러니까 빨간 선을 끊을 것이냐, 파란 선을 끊을 것이냐, 범인이 다이하드에서 어느 선을 끊을 것인지 잘못 끊으면 뉴욕 시내가 폭파한다니까요.

그것마저 끊고 안 끊고 마저 허락을 안 해준 게 얼마나 우리가 다행스럽습니까? 니가 무능 자인데 니가 나한테 알려줬다고 해서 니가 해석을 갖다 붙일 수 있는 재주가 니한테 없다 이 말이죠. 해석의 재주가 없다는 말은 역사라는 내용에 대해서 해석을 할 영역이 없다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런 거예요. 역사를 알려주되 그 역사를 이끄는 주최도 ‘니가 손 떼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기분 좋게 손 떼시면 되는 거예요. ‘아이고, 아까워라, 내가 알았으면 내가 나설 건데.’ 자꾸 주제넘게 나설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하는 것을 지켜만 봐라.’ 이 말이죠. 제가 지금 제일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어요. ‘가만히 지켜봐라.’ 이거 아무나 안 됩니다. 사람이 가만히 지켜 볼 위인이 따로 있지, 이건 돼요. 브라우니는 된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부터 기도하세요. ‘주여, 브라우니 되게 하옵소서. 인형 개가 되게 하옵소서.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지켜볼 수 있게 하옵소서.’ 속은 막 쓰리죠. 지켜본다고 언제까지 지켜볼 수 있을지, 주께서는 가만두지 않아요. 처음에는 ‘지켜보겠습니다.’ 하거든요. 주께서는 팔짱 끼고 ‘니가 언제까지 지켜보나 해보자. 도저히 성질나서 지켜보지 못할 때 그때 이야기하자. 봐라. 못 지킨다 했잖아.’

기어이 감추었던 우리의 본색을 들추어내면서 우리를 느부갓네살로 만들고야마는 주님의 그 집요함! 우리는 찬양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지켜보는 입장에서 의인되고 싶어 환장하는 우리를 기어이 뭐로 만든다? 죄인 되게 만드시는. 깝쭉 되게 만들고 까불게 만들고 설치게 만들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설쳐댐으로 말미암아 너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함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는 주님의 그 솜씨! 우리는 무슨 수로 어떻게 그 은혜를 감사할 수 있습니까?

자, 그 다음에 해석 봅시다. 32절 봐야죠.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아니 다니엘이 무슨 수로 남의 꿈을 요렇게 상세히 잘 압니까? 그것은 다니엘에게 알려준 하나님이 꿈을 그렇게 꾸게 하신 김기덕 감독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냥 느부갓네살은 스크린에 불과한 것이고, 영화감독이 누구십니까? 주님이 하니까 주님이 모를 리가 있어요? 다 알죠. 이 대목 하나를 가지고도 우리가 내 역사를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든다는 것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죠. 그건 어처구니가 없는 겁니다.

제가 어제 수요 설교에 어려운 많이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전체라는 것은 없다.‘ 했죠? 전체라는 건 없고 다만 과정이 있을 뿐인데 그 과정과 과정의 그 물결, 바다가 곧 전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를 믿으면 나는 구원받는다. 우리는 그것을 되게 좋아하는데, 십자가가 구원이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써나가시는 그 과정에 대해서 오히려 우리는 더 그게 중요하다고 느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 믿었으니까 나중에 죽으면 천당 가겠지.‘라는 결과만 따먹으려고 하지 말고 ’십자가 믿으면 이렇게 구원받는다.‘고 보여주기 위해서 동원된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몸을 더 중요시 여겨야 된다 이 말이죠. 따먹고 알고 내빼려고 하지 말고 못 내빼게 가두리 양식장. 가두어서 매일 다루시는 그것이 더 소중하고 귀한 줄 알아라 이 말입니다.

그게 뭐냐, 과정들이 모인 전체가 전체지, 우리가 생각하는 이게 끝나면 뭐가 등장하는 전체가 전체라 생각하는데 그 전체가, 전체가 아니다 이 말이죠. 서울 대 합격, 참 좋죠. 목표 이마에다 하루 3시간 자면 서울대학 간다. 4시간 자면 떨어진다. 스카이(SKY) 서울 대, 고대, 연세 대, 약자가 스카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전체를 미리 보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수학이 왜 이렇게 재밌지? 영어가 왜 이리 재밌는 거야.’ 그것이 모이면 그게 스카이 되는 거예요. 그 과정이 전체다 이 말이죠. 내일 돼서 하늘의 별 딸 생각하지 말고 오늘 감사하게 되면 오늘 밤 죽어도 천국 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금신상이 전체가 뭐로 안 돼 있다? 금으로 돼 있지 않아요. 우리는 전체가 금으로 돼야 금신상인데 이건 뭐가 금입니까? 머리만 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죠? 그럼 이건 말을 금신상이라 하면 안 되고 금 은 놋 철 이렇게 할까요?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결과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과정에도 이미 결과를 결정하신 분이 주도적으로 거기에 개입하고 있다는 겁니다. 금 다음에 뭡니까? 은, 그 다음에 놋, 그 다음에 철, 그 다음에 얼마는 철이고 얼마는 진흙이다.

자, 그 다음에 진도 나가봅시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어렵지만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시간의 뿌리는 시간 속에 없다. 이렇게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시간의 뿌리’ 라는 게 성립됩니까? 시간의 뿌리는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시간의 뿌리는 사람 몸에 뭐가 돈다 했습니까? 시간이 돌면서 사람은 뭐를 피어낸다? 솜사탕처럼 환상을 피어낸다. 그 환상은 현실이란 환상으로 피어나죠. 각자 시간이 다 다르니까 각자 현실이 다 다른 거예요. 그래서 의사소통이 완벽하게 일치되기가 곤란해요. 부부가 한 몸이라 하지만 막상 부부의 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다 달라요. 살아가면서 같은 게 있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 같이 되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것이 죽음입니다. 여자는 죽음을 어디서 얻느냐 하면 자식을 낳음으로써 죽음을 느끼는 겁니다. 엄마와 자식 사이는 죽음의 관계예요. ‘너를 위해서 내가 죽을 용의가 돼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자는 죽음을 느낄 때가 없고 이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이게 죽는 가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죽기는 죽는데 희망이 안 보여요. 여자는 자식을 낳음으로서 ‘나 하나 까짓 거 죽어도 자식만 살아있다면 나는 죽어도 너 안에서 나의 존재는 이동하는데.’ 죽으면서 생명은 이동하는데, 남자는 땀만 흘릴 뿐이지 아무것도 건진 게 없죠. 그래서 구원은 여자의 후손에서 튀어나오는 것 같아요.

여기서 시간의 뿌리라 하는 것은 인간 속에서 시간이 돌아다니는데 시간에 뿌리가 있다는 말은 어떤 순간을 말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있을 때 시간이 등장하잖아요. 그러니까 시간의 뿌리라 하는 것은 내가 없을 때 내가 어디 있었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죠. 내가 없을 때 나는 어디 있었습니까? 이건 에베소서 1장 4절 보면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여“라 했죠? 그런데 거기서는 나를 말하는 게 아니고 성도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뿌리는 내가 몰라요. 왜? 내가 생각하는 ‘나‘는 가상현실에서 조작된 ’나’기 때문에 진짜 ‘나’는 누가 여기에 나를 있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예수님,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실감되는 게 아니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 볼까? 해서 나온 것이고, 진짜로 내가 그리스도에서 나왔다는 것은 성령이 임해서 내가 있기 전에 내 시간의 뿌리, 내 존재의 뿌리를 외부에서 알려줄 때 비로소 한꺼번에 ‘아! 내 뿌리는 예수님이 내 뿌리구나. 예수 안에서 내가 창세전에 택함 받았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쪽에서는 내 쪽의 시간의 뿌리를 찾을 필요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시간의 뿌리는 어느 속에 없다? 시간 속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못 하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가, 오늘 이거 해야 돼요. 이걸 못 찾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마지막 대목에 뭐예요?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해답 없습니까? 있습니까? 없죠. 이렇게 나이 80되고 90돼도 마찬가지예요. 인생이 없어요. 시간의 뿌리는 시간 속에서 찾을 수가 없어요.

분명히 나에게는 시간이 있어요. 이거는 과거, 요거는 현재, 앞으로 나는 미래, 있는데 그 놈의 뿌리가 어디서 나온 뿌린지,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도대체 난 어디서 나왔고 또 어디로 가는 거야?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요새 20대들 전부 다 몰라요. 아까 집사님들하고 식사하러 가는데 횡단보도 다 보는데서 둘이 뽀뽀하고 난리 죽이고, 안 봤죠? 뭐라고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원래 연세 많으면 잔소리도 늘죠.

나 왜 이렇게 사는 건지, 자기 뿌리를 모르면서 거기다가 예수까지 동원시켜 버리면 그 예수는 무슨 예수인지 몰라요. 지 자신도 모르는데 그 예수해도 복 주는 예수인 줄 알고 그냥 교회가 놀러가는 곳이지, 내가 누군지 뿌리 캐러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면 하나님이 만들어 준 줄 알지만 체험이 돼야죠. 하나님이 만들어 줬다는 체험이 될 게 아닙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으면 나는 미워지고 하나님은 더 좋아져야 되는데 그런 식으로 믿는 게 아니고 여기 있는 나를 더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니 그런 우상이 어디 있어요?

그 뿌리는 계시가 내려와야 돼요. 그 계시는 다니엘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다니엘이 꿈을 해석했다고 해서 다니엘이 역사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았다고 해서 내가 우리 집안의 주인공이고 내가 우리역사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아니무니이다. 나는 사람이 아니무니이다.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너 혈액형이 뭐야? A이야?’ ‘A형이 아닙니다.’ ‘그럼 O형이야?’ ‘O형도 아닙니다.’ ‘혈액형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니까 ‘나는 사람이 아니무니이다. 갸루 상이무니이다.’

역사를 ‘예수님이 십자가 졌습니다.‘ 할 때는 그게 니가 주인공이 아니란 뜻 이예요. 십자가 지신 분이 주인공이지, 너는 그 시다바리지 네가 너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시간의 뿌리를 알게 되면 이 시간이라 하는 곳에서 새로운 시간이 덮쳐버리죠.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지정된 인생을 우리는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넓은 길이 아니고 그게 무슨 길이다? 그게 좁은 길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도 안 좁잖아요? 찾는 사람도 많고 교인들이 너무 많잖아요? 그래도 그게 주님께로 나오면 무조건 그게 좁은 길이고, 수천 명 같이 예수 믿어도 그건 좁은 길이고, 예수 안 믿는 사람 서너 명 와도 남들 보기는 그게 좁을 길 가는 것 같지만 그게 넓은 길이예요.

모든 출발점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느냐, 여기 달려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가 되는 거예요.

제가 의존교회서 이야기 했잖아요. 구원의 투구를 쓴다 할 때 치수 재서 교회에서 주문해서 철모 쓰듯이 이렇게 쓰면 그것이 구원이 되느냐, 그리고 믿음의 소망의 흉배를 붙인다 할 때 여기 소가죽에다 하면 되느냐, 유대인은 지금도 그래요. 지금 그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믿음과 소망이 우리를 죽음이 지배를 해야지, ‘주님이여 제가 소망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믿음 갖고 있습니다.’ 그거는 투구 주문 제작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뗐다 붙였다. 뗐다 붙였다. 오후 2시에 붙였다가 오후 4시에 뗐다가 이건 지가 뗐다가 붙였다가 하는 그건 시간의 뿌리에서 나온 게 아니잖아요. 시간의 뿌리를 찾을 수가 없어요.

결국은 뭐냐 하면 알 수 없는 그 시간 인류사에 우리가 휘말려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니엘도 알고 느부갓네살도 이젠 알아야 되겠죠?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다는 것은 그 꿈 말고 다른 꿈도 역시 예수님에게서 나온 꿈 이예요. 그런데 진짜 그 핵심, 이 세상 역사의 중심이 되는 꿈을 꾸게 한 것은 성전은 죽었다? 안 죽었다? 안 죽었다. 성전이 있다? 없다? 비록 저쪽 성전은 불타도 성전은 분명히 여기 있다. 성전이 있는 곳에서는 이런 태풍의 눈이 휘몰아치고 있다.

그것이 그 말뚝이 그 중앙지점이 바로 느부갓네살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에서 뭐가 피어나느냐 하면 큰 나무가 자라나면서 그 나무가 온 인류사를 다 덮습니다. 그러니까 이 큰 나무는요 유한양행 마크가 뭔지 알아요? 버드나무죠. 그 버드나무가 어떻습니까? 온 천지를 다 덮죠. 하여튼 기업하면서 욕심도 많아. 세미원보다 덜하겠지만. 온 천지를 다 덮어. 그처럼 아마 그 사람이 교회 다니니까 혹시 느부갓네살보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해골산처럼 온 것을 다 덮는데 거기서 느부갓네살 본인은 뭐가 됩니까? 짐승이 되죠. 짐승이 온 천지를 다 덮죠.

물어 봅시다. 왜 금 은 놋 철로 차이가 나는 겁니까? 이것이 무엇을 보여준다? 시간의 역사의 순서죠. 그런데 금신상은 몇 개입니까? 3개, 4개입니까? 느부갓네살 다음에 신상 또 만들었습니까? 아니죠. 금신상은 하나밖에 없죠. 숫자로 하면 1이죠. 1에서 무한이 나오죠. 모든 각양변화가 나오죠. 인류 역사가 끝나기까지 1에서 다 나오죠. 우상이 하나인데 여기서 금 은 놋 철 그다음에 진흙과 철로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금신상이 머리만 금이고 나머지는 금보다 질이 떨어진 은과 놋 철로 돼 있는가, 금이 나아요? 은이 나아요? 금이 낫죠. 그럼 ‘금줄까? 은줄까?’ 하면 다 금을 원하겠죠. 은을 갖고 있어도 ‘금줄까?’ 하면 은하고 금하고 바꾸겠죠. 그러면 은을 갖고 있다, 철을 갖고 있 놋이 있다는 말은 뭣을 지향합니까? 언젠가는 그 바벨론, 금되기를 지향하겠죠.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느부갓네살이 있는 위치에서 역사가 느부갓네살 바벨론으로 오더라도 지난 역사가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방향이 거꾸로 어디를 지향하게 돼 있습니까? 느부갓네살, 바벨론을 지향하게 돼 있다 이 말입니다. 금을 지향하게 돼 있어요. 금의 속성이 나왔으니까.

그러면 이렇게 수평적으로 하면 이해 안 되니까 이걸 수직적으로 하면 이해되겠죠. 이렇게 쭉 올라오는 거예요. 금, 바벨론 역사가 짐승의 역사라는 걸 보여주면서 그 뒤 역사도 쭉 높은 곳을 지향하도록 이렇게 되겠죠. 최고의 어떤 나라가 등장해도 그 최고의 지점은 바로 금 같은 바벨론 나라의 느부갓네살을 지향하는 쪽으로 이렇게 되게 돼 있다 말이죠. 그들이 그렇게 원한다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되게끔 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온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바벨론이죠. 바벨론 또는 간음한 여인, 또는 짐승이 지배하는 나라, 옛 뱀, 이렇게 바벨론으로 전부 다 모든 것을 통일해 버리는 겁니다.


그럼 바벨론으로 통일한다는 말은 바벨론이란 단어를, 바벨론 사람들이 모여서 상의해서 바벨론 명칭을 쓴 거예요? 아니면 바벨론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누가 준 겁니까?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이미 바벨론 화, 속성상 규정지은 거예요.

이마에 예수님의 이름을 박는다. 또 이마에 짐승의 이름을 박는다. 할 때 막상 사람보고 ‘이마 좀 봅시다.‘ 해서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도 그쪽 이마에 뭐가 박혀 있습니까? 짐승의 이름이 박혀 있잖아요. 이거 수용합니까? 믿음으로. 말씀이니까. 사람마다 전부 다 손목과 이마에 짐승의 인이 박혔죠? 아무리 현미경 들여 봐도 없죠? 하지만 말씀에서 이미 박혔다고 보죠. 그렇잖아요. 그 짐승의 이름을 받았으면 그 이마에 박혀있는 짐승의 숫자, 짐승의 그 존재, 그것도 인정을 해줘야 된다 이 말이죠. 인정을 해 줄 때 그 인정하는 것을 성경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모아, 모아 보면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바로 느부갓네살을 하나님이 꿈으로 다룰 때 그때 그것을 알므로 말미암아 ‘아! 모든 인간은 바벨론 짐승의 수하에 있고 부하들이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마에 그게 없더라도. 이마라 하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바깥 신체로 표현하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 바벨론 같은 마음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는 겁니다.

자, 34절 봅시다. “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가득하였나이다. 과거완료, 또는 과거분사, 시제라 하는 것은 동사의 시제겠죠.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를 시제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여기는 이미 뭐로 돼 있어요? 과거로 돼 있죠. 과거 완료. 과거 분사. 이렇게 돼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언어 가운데서 묵시를 표현할 때 그런 시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는 부정사, to 부정사. 이런 걸 통해서 표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표현은 뭐냐 하면 여기서 이미 다니엘 입장에서는 이미 이렇게 금 은 놋 철 하다가 결국은 어디서 날아온 뜨인 돌이 신상의 진흙과 철을 부수어 뜨리는 그 시간적인 것은 인간의 몸에서 뭐가 돈다? 인간의 몸에서 시간이 빙빙 돌잖아요. 백날 생각해 봐야 지 기억나는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거든요. 인자되시는 예수님의 몸에서 빙빙 도는 시간은 그리스도 몸이 있는 한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확정됐다 이 말 이예요.

그리고 예수님의 몸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 짐승 같은 인간의 몸과 충돌해서 이것을 깨부수는 식으로 이(그리스도) 몸이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 몸이 ‘짠, 여기 있다.’가 아니라 창 자국 있고 손에 못 자국 있는 모습으로 등장해서 ‘니가 나를 이렇게 찔렀으니까 이번에는 니가 당해봐라.’ 하고 부수는 방식의 그 몸을 우리는 예수님 몸으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키 재서 178, 몸무게 얼마, 예수님이 아내 있다고 하는 그 하버드 그 이야기는 그게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이라 하는 것은 성령으로 기록돼서 더 이상 사도가 끝나면 성경도 끝나버린 거예요. 뒤에 예수님 오줌 누는 것을 비디오 찍어도 그거 성경 아니에요. 괜히 그런 거 등장하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평소에 성경 안 믿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신학자들이 성경 믿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성경 믿으면 개척교회 하지, 신학자 안 됐을 거예요. 예수님 몸무게 재고 키 재도, 그 몸이 그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기능 있잖아요. 그 기능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기능이란 말이죠. 그 기능이 뭐냐 하면 바로 기능 할 때는 그냥 부수는 것이 아니고 뭔가 개념을, 의미를 주면서 부숴요. 바로 ‘내가 부수는 것은 바벨론을 부순다. 금 은 놋 철 진흙을 부순다.‘라는 개념과 엮이면서 그것이 부정당할 때, 그건 누구만 할 수 있습니까? 뜨인 돌! 태산을 이룰 돌만이 할 수 있는 기능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몸이 누구 몸을 친다? 느부갓네살 몸을 치는 거니까, 그 느부갓네살 몸이 누구 몸이냐 하면 뱅뱅 도는 우리 몸이 느부갓네살 몸 아닙니까? 만날 꿈만 꾸면 과거의 그 상상한 것 생각해서 자기 나름대로 과거분사 과거완료 다 해서 그 과거의 꿈이 미래까지 꿈이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만날 체크하고 하잖아요. 어제 계획한 것이 오늘 얼마나 달성 했는가 만날 다이어리 적어서 체크하잖아요. 그 몸을 주께서는 날마다 공격하고 부숴버리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건 니 몸의 행함에서 나온 것이지, 내 몸의 행함은 그걸 부수는 게 내 몸의 행함이다.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그 기능을 하는 거예요. 결국 오늘 강의 다 추려보면 뭡니까? 몸과 그리고 나타나지 않은 어떤 다른 몸과의 대결상태, 인류사라 하는 것은 새로운 몸에서 깨부숴야 될 인류사를 주께서 의도적으로 부숴 지기 위해서 진척되게 하신 겁니다. 금에서 은에서 바뀌지만 그 지향점은 금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야심은 어떤 인간이든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집사님은 은 되렵니까? 금 되렵니까? 그걸 물을 필요 없어요. 왜, 간단하게 실험하면 됩니다. 은줄까요? 금줄까요? 거지 되렵니까? 부자 되렵니까? 그거 필요 없거든요. 돈 드릴까요? 말까요? 이거와 똑같은 소리라니까요. 모든 우리가 하는 것은 항상 내가 빙빙 돌고 있는 나의 시간, 어렵게 말고 쉽게 갑시다.

어릴 때 가난해서 직살 나게 고생한 사람은 커서 보란 듯이 내가 동창생에 나가서 자랑할 만한 부자 되고 싶은 욕망이 부자가 안 되도 돈 한 푼 없어도 늘 ‘부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것을 숨겨놓은 자아는 감출 수가 없습니다. 숨겨놓은 자아의 본성입니다. 항상 금을 지향하고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나타나면 싫어, 내가 최고의 자리, 금의 자리, 내가 온 우주를 덮는 유한양행, 버드나무처럼 내 나무로 덮고 다른 사람은 나로 인하여 혜택 입는, 그래서 내가 우뚝 서는 그런 본성은 이 몸이 있는 한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야, 사탄아 물러가라. 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전혀 하나님 일을 모른다.’고 지적 받을 때 그 베드로가 바로 축복받은 겁니다. 지적 받는다는 것, 날아 온 돌이 계속해서 깨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그리스도 몸의 역사 속에 이미 우리가 합류돼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바로 다니엘입니다. 성령, 그런 사람이 다니엘 3친구고 그것을 가지고 두 자로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돈을 주셔 놓고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니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 생명 줘 놓고는 니 목숨을 미워하라고 하시니 우리가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고 그리스도만이 천국의 임금인 것을, 주인공인 것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기 위한 활발한 주님의 활동인 것을 저희들이 도구로 사용하여 증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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