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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5 01:21:59 조회 : 2337         
기형적 짐승 121004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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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1.16) 12-10-11 11:42 
가락교회-다니엘2장35-4장9절(기형적 짐승)121004-5강a-이 근호 목사

제 5강a

다니엘 2장 금 신상에 대해서 지난번에 했는데 2장 35절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이렇게 돼 있죠? 뭔가 그전에 있었죠? 태산을 이루는 돌이 오기 전에 뭔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뭐가 있었느냐 하면 금신상이 있었다 말이죠. 있었는데 뭐가 들이닥치자 이게 ‘오! 있었는데 없네.’ 가 되는 거예요. 바람에 불려서 간곳이 없다가 되는 거예요.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있었는데 갑자기 돌멩이가 날라 와서 그걸 부수니까 갑자기 그게 없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없어질 것 같으면 생기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뭔가 생겨나면 계속 유지가 돼서 있어줘야 되는데 집안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뭔가 생겨났으면 그 다음에도 ‘오, 작년에도 있었네, 올해도 있구나.’ 있으면 있음으로 계속 나가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있게 만들어 놓고 손 털고 없애버릴 때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오는 태산을 이루는 돌멩이라 하는 것은 앞에 뭐가 있음이 받혀줘야 비로소 태산의 의미가 드러나는 거죠. 논리적으로 그렇죠?

그렇다면 그 돌멩이 안에 뭐가 들어있냐 하면 우상과의 마주침이 그 돌멩이 안에 이미 내용이 포함이 돼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동생이 골목에 나가서 ‘우리 형 싸움 잘한다.’고 말만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힘 꾀나 쓰는 애가 골목에 등장해야 되잖아요. 등장했는데 진짜 형이 나와서 그 애를 혼내고 치니까 그 애가 도망갔다 말이죠. 그러면 그 애가 도망가고 난 뒤에 ‘어때? 우리 형 과연 힘세지?’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그 애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잠복돼 있는 게 뭐다? ‘우리 형은 힘이 세다.’가 잠복돼 있던 겁니다. 그러면 있다가 없어지는 그러한 것들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과연 힘세구나.’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보조역할로 등장했다가 사라져줘야 되는 거죠.

어떻게, 우리 인생이 어떻습니까? 인생이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한다. 이 말은 내 구원하는데 초점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뭐가 잠복돼 있다? 택한 백성은 반드시 건진다 하는 사실이 잠복돼 있고 포함돼 있었는데 바보 같은 우리가 와서 죄만 짓는 우리가 와서는 ‘오!’ 구원을 받고 부터는 어떻게 됩니까? ‘과연 예수님께서는 나 같은 인간도 구원하는구나.’ 이렇게 되죠.

한번 적어 볼게요. 어떤 인간? 나 같은 인간! 나 같은 인간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인간 같지도 않은 나다 말이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나야 돼요? ‘인간 같지도 않은 나’가 돼야 되는 겁니다. 인간 같지도 않은 나!

이제부터 우상과 태산의 만남을 방금 이야기했는데 어쩔 수 없이 어렵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출애굽에서 여기 애굽 나라죠. 애굽나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벗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애굽에서 벗어날 때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여기 무슨 바다가 있었죠? 바다는 뭡니까? 홍해죠. 홍해는 걸러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뭘 걸러내죠? 애굽 사람은 발 디디면 죽고 이스라엘 사람은 거기서 길이 나서 무사히 통과하고 걸러내는 작업이죠. 영어로 채널 링[channeling], 터널 같은 역할, 또는 채널 같은 역할, 채널 링 역할을 하는 거예요.

자, 요 이야기를 여러분이 아시니까 바로 진도 나가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너무 어렵지만 할 수 없어요. 인간이 있고 그리고 인간 주변을 자연이 둘러 싸여 있습니다. 그러면 신은 어디 있느냐, 신은 자연을 만들었으니까 신은 이쪽 편에 있습니다. 순서가 인간이 있고 자연을 알고 자연을 만드신 신이 있다 말이죠.

그런데 채널 링, 다시 말해서 여기 애굽에서 출애굽해서 이스라엘이 생긴다는 것, 없는 나라에서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요 원칙을 여기다 그대로 한번 덮쳐버리자. 덮쳐버리면 요 자연이 채널 링 역할을 하게 되면 이 자연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기형으로 바뀝니다. 기형! 기형이라 하는 것은 깨진 거울에 내 얼굴 비취면 찌그러지고 깨지고 기형으로 비취죠.



요 다니엘에서 짐승이 나오는데 짐승은 우상에서 금 신상 옆에 있는 우상을 설명해야 되는데 그 신상들의 바다에서 나온 모습들을 보게 되면 전부 다 한결같이 짐승은 짐승인데 전부 다 이상해. 자연에서 발견되는 자연 그대로 발견되는 짐승 맨 얼굴로 관찰될 수 있는 그런 짐승들이 아니에요. 다니엘 7장을 잠시 보게 되면 다니엘이 꿈을 꾸니까 짐승이 등장했는데 그 첫 번째 짐승은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 날개가 있다. 이게 뭔 뜻입니까? 동물에서 이런 거 봤어요? 몸체는 사자인데 독수리 날개가 있다. 두 번째는 곰은 곰인데 곰 한편은 사람의 마음이 있고 이빨에 갈빗대 물었고 세 번째 짐승은 뭔가 이상하게 이빨이 철로 돼 있고 나머지를 부수고 그리고 뿔이 열 개 나 있고, 이것은 자연세계서 우리가 동물을 볼 수 있는 인간이 익히 아는 정상적인 그 동물들이 아니에요. 동물이 기형화 돼 있죠? 뭔가 비뚤어져 있죠.

자, 묻습니다. 여러분, 자연에 있는 동물이 비뚤어졌을까요? 그동안 내가 평소에 자연이라고 봤던 내 인식이 비뚤어졌을까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내 인식이 비뚤어졌을 경우에는 나에서 자연, 자연을 만드신 신이 있고 우리는 자연을 만든 신을 섬기면 된다. 이 방향이 신 쪽에서 자연을 통해서 이렇게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려면 무슨 채널 링? 홍해라는 채널 링! 애굽 사람들이 기린을 보면 기린은 목이 긴 거예요. 애굽 사람들이 사자를 보고 독수리를 보면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이 보기에 ‘오! 몸통은 사자인데 날개는 독수리 날개가 있다. 이건 미쳤어요. 이건 미친 거야. 이건 내가 봤던 그 자연의 그 동물이 아니에요. 이건 분명히 놀랍고 무섭고 기형적 이예요.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면 tv 채널 맞출 때 채널이 안 맞으면 어떻게 되죠? 갑자기 지~지~직 해서 사람들이 비뚤어지고 물결치고 난리가 나죠? ’이게 왜 이래?‘ 해서 tv를 툭툭 치고 해서 채널 맞으면 제 얼굴 나오잖아요.

애굽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상인으로 보는 거예요. 마치 오늘날 우리가 정상인 것처럼. 이 애굽 나라에 히브리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없었으니까) 애굽 나라가 비정상이라는 생각을 히브리인들은 한 번도 가지지 않았어요. 왜, 그 나라 덕으로 사니까. ‘그냥 살려만 주이소’ 이런 식으로 사니까.

지금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개 거품 물고 비틀거렸습니까? 아니죠. 귀신 들린 자가 개 거품 물고 쓰러졌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은 아주 맨 정신 똑똑한 명석한 이성적인 로고스, 수련회에서 배웠으니까, 이걸 책으로 내고 싶어요. 그 똑똑한 명석함을 가지고 예수님마저 재판하고 판단한 겁니다. 그리고 더 한걸음 나아가서 사울이란 사람은 어떻습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뭐라 했느냐 하면 ‘주여 누구십니까?’ ‘니가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다.’

맨 정신으로 하나님 섬기는 것이 예수님한테는 뭐냐, 핍박하는 걸로 받아지는 거예요. 맨 정신으로 여호와 섬기는 것이 철저하게 탈무드 연구하고 성경해석 하고, 이것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걸로 보는 거예요. 이게 채널 링입니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맨 정신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뭐 있어야 들어가지요. 뭐 없는데요. 없는 나라에 이스라엘 만들어서 이스라엘이 가는 나라로 약속의 땅을 만들 때 그 중간에 홍해가 있어서 이건 맨 정신으로 정상적인 상태로서는 그 홍해를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들도 안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앞에는 물결이 출렁이는데 뒤에는 애굽 군사가 따라오지, ‘Why me? 왜 나에게, 안생을 이 지경으로 궁지로 몰아넣습니까?’라는 말.

우리 정상이고 애굽 나라 정상입니다. 정상적인 두 민족끼리 회의해서 자기 지분 받고 애굽 나라에서 숨이나 쉬면서 약간 노동시간이나 줄이고 그렇게 사는 것을 히브리인들은 바랬어요. 그러니까 이 출애굽은 누구 생각 이예요? 사람들 생각이 아니고 사는 게 괴롭고 힘들고 어려워서 뭔가 하나님께 대책 세워주라고 하는 그런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들어주신 게 아니고 이건 사람들이 상상을 못했던 나라예요. 천국이라는 그 나라가 이건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나라예요. 납득이 안 돼, 납득이. 어떡하지? 납득이 안 돼. 도대체 이건 상상이 안 돼요. 우리가 지금 그 나라에 가고 있습니다.

다니엘 보고 있습니다. 사자에 뭐가 달렸다고? 사자에 독수리 날개 달렸다. 그걸 지금 해석해내야 돼요. 미치겠어. 기형이야. 동물에 그런 동물이 없거든요.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그 이미지가 왜 찌그러지고 우리가 도무지 예상도 못한 그런 해괴망측한 짐승들이 나오느냐 말이죠. ‘주여 이건 놀랍고 무섭고 겁나는 겁니다. 이건 우리가 이런 짐승을 원했던 게 아닙니다. 왜 갑자기 나라를 짐승으로 표현합니까? 이미지를 왜 짐승 이미지로 다음에 다가오는 나라를 짐승으로 표현합니까?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은 아무도 몰라요. 심지어 다니엘도 몰라요. 그냥 꿈만 꿨을 뿐이지 그런 해석에 대해서는 유보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 시대 다음에 역사가 어떻게 전재될 지.

그러면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종합해서 정리를 딱 내리면 앞으로 대한민국, 앞으로 북한, 앞으로 중국, 이 모든 나라의 운명은 대한민국의 운명은 대한민국이 모르고 일본의 운명은 일본이 모르고 그냥 애굽으로 질주하다가 홍해 만나면 한쪽은 천국 가고 한쪽은 지옥 가고 끝나는 거예요. 필리핀이 필리핀 운명을 몰라요. 태풍이 어떻게 맞을지 아무도 몰라요. 그 모름을 기괴한 짐승의 이미지로 표현한 겁니다. 다니엘에서.

이제 아시겠습니까? 왜 짐승이 정상적인 짐승이 한 마리도 없느냐 말이죠. 개라면 브라우니 정도 예쁘게 나타나면 우리가 아는 건데, 만약에 개인데 거기에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러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주께서 뭐냐, 놀라라 이 말입니다. 왜, 놀라니까 니가 정상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정상적인 사고가 아니고 그냥 애굽에 푹~ 젖어 사는 그걸 정상이라고 니가 그걸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는 갇혀 진 세상에 불과한 거예요. 여기에 주께서는 채널 링을 집어넣어서 없는데서 이스라엘 나라를 뽑아내는 작업이 다니엘에도 다니엘 역사 속에 그대로 출애굽 원리를 적용시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건 여러분이 잘 이해하신 것 같고 이제부터 여기 36절부터 다니엘이 푸는 해석을 들어가 보는 겁니다.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 해석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꿈은 느부갓네살이 이해 못했습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해석은 이해합니까? 꿈은 이해 못했죠? 꿈을 이해 못했다면 꿈을 다니엘이 해석해 줍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해석한 것을 느부갓네살이 해석을 이해했을까요? 못했을까요? 이해 못하죠. 뭐 해석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 이야기했습니다.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설명 들은 사람은 다 이해했습니까? 똑같아요. 이해 못합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 복음 이야기했습니다. 1000명이 다 한글 읽으니까 읽어 봤어요. 십자가 이름도 압니다. 이해했습니까?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주의 말씀을 문자로 풀지 말고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이 성경 해석을 풀라고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나오죠. 문자가 아니고 영으로 돼 있으니까 영이라 하는 것이 그냥 모호한 영이 아니고 그리스도 영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영을 받지 않으면 성경해석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걸 다니엘에서는 어떻게 보느냐, 이게 뭐냐 하면 홍해라는 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하늘나라의 해석이 불가하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주께서는 홍해라는 이것을 현재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을 가로막는 이런 쪽으로 말씀이 개입해서 출애굽의 원리가 말씀 안에 다 담겨서 발현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다니엘이 푸는 꿈을 한번 봅시다. “왕이여, 모든 것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 이 해석부터가 왕은 이해 못합니다. 왜냐 하면 “왕이 금 이십니다.” 할 때 왕(王(덧말:왕))이 등장하죠. 여기서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들이나 기존의 사람들이 분명히 여기에 신상이라 하는 것은 나라를 이야기하거든요. 처음에는 금 같은 나라, 두 번째는 은 같은 나라잖아요. 나라인데 王(덧말:왕)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렇다면 이거는 나라 되기 이전에 먼저 하나의 인물, 하나의 인격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이야기해요.

나라가 있는데 왕이 누구야? 왕이야? 어,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위해서 왕이 있구나. 우리가 보통 상식으로는 그건데 하나님의 꿈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왕이 있으면 항상 그 왕이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이건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게 왜냐 하면 왕만 바뀌면 나라가 바뀌는 거예요.

지금은 민주주의 사회기 때문에 대통령이라 하는 것은 국민들 중에 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나 다니엘이 계시를 주위에서 사용하는 그 환경은 계시에 맞춰서 나중에 인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맞추어서 그 당시에 있던 나라들의 모든 구성을 거기 맞춰서 연결되도록 재정립되는 겁니다. 아담이 죄 지을 때 내가 죄 지으면 내 후손이 아무리 똑똑하고 의로운 짓을 해도 죄라는 것을 알고 죄졌습니까? 아니죠? 아담은 그냥 선악과 따먹고 따먹을 때 따먹은 사람이 누굽니까? 자기만 따먹은 거지, 자기가 오고 오는 모든 인류를 대표한다는 생각을 갖지를 못했죠. 그런데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죄인이 되고 그 뒤에 덩달아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됐다는 그 규정은 누가 등장했을 때 비로소 밝혀집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으로 등장하니까 아담은 뒤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거기에 맞추어서 아담의 위상이 새롭게 마련되는 거예요.

여기 뜨인 돌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인격이고 하나의 인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한테 얻어맞는 사람은 ‘나’는 아니고 뭐냐 하면 왕이라는 직함을 가진 어떤 인물인 거예요. 이게 인물이 되어야 아까 원칙, 인간 있고 또 자연 있고 신이 있다 할 때 이 자연에 있는 짐승이 정상적인 짐승이 아니고 기형적인 짐승이 된다 했죠. 그걸 누가 본다? 어떤 인물이 보는 거예요.

인간이 짐승 되는 거예요. 이건 느부갓네살이 나중에 짐승 돼요. 인간이 짐승 되고 짐승을 통해서 아까 인간 세상 자체가 우리보기는 정상인데 주님 보시기에는 짐승의 나라라는 것이 밝혀지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나라’라는 개념이 오늘날 근대개념의 나라, 다시 말해서 투표해서 대통령 뽑고 이런 의식은 없어져야 돼요. 나라라는 어떤 법인체가 있고 임금이 있어버리면 나라 통 체가 하나의 인격으로 다루지를 못해요. 나라가 운다든지 나라가 웃는다든지, 나라가 아프다든지 그런 소리를 못해요. 그런데 그걸 왕으로 대변해 버리면, 왕이 울면 나라가 우는 게 되고 왕이 웃으면 나라가 웃는 거예요.

여기 짐승이라 할 때 짐승은 몇 마리입니까? 한 마리죠. 나라는 몇 마리입니까? 대한민국은 몇 마리입니까? 이 말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주님께서 이걸 인격으로 바꾸는 이유가 신상의 꿈 해석을 하나의 왕과 인간과의 교체로 바꾸는 것은 보이지 않는 권력이 어떤 배후의 인간 같이 생긴 악한 인격체가 상주하고 있어서 인간들을 배후에서 사주하고 있다는 면을 들추어내기 위해서는 인격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이야기합니다. ‘모든 짐승과 모든 공중의 새들이 임금한테 복종합니다.‘ 이거는 우리 보기는 너무 오버죠. 우리나라에 나무들이 많잖아요? 이 나무들이 이명박 대통령한테 복종합니까? 그건 아니죠. 이 앞의 꽃나무가 이 명박 대통령이 명령하면 꽃 피고 이럽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꿈 해석 자체가 채널 링이라. 납득이 안 돼. ’모든 게 임금에게 복종합니다. 공중의 새도.‘

이건 아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건 아부를 해도 너무 심하게 아부한다고 생각이 들죠. 직원들이 사장님한테 복종합니다. 이건 이해되잖아요. 그런데 책상이 사장님한테 복종한다. 이건 아부를 해도 너무 심한 아부를 한 거예요. 저 시계가 사장님한테 복종합니다. 이건 너무 오버했죠.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신 나라에 있는 모든 일 거수 일 투족이 당신한테 달렸습니다.’ 이 말 이예요. ‘당신이 똑바로 안 하면 이 나라 저주받습니다.’ 그런 뜻 이예요. 그것을 무슨 언약이라? 다윗언약이라 합니다. 그 나라에 속해 있는 산과 들에 있는 사슴과 토끼 그 모든 운명이 그 나라 임금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 다윗언약입니다.

이 근대적인 현대적인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도저히 납득이 안 돼요. 이건 말이 안 되죠. 왜냐 하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몇 번씩이나 하는 거지만) 자연이 있잖아요. 자연은 신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해와 달을 지 맘대로 바꾸고 이러지 못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 자연이 하나의 짐승이라는 인격체가 돼 버리면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그동안 짐승 같은 악마의 사주를 받으면서 살아온 거예요. ‘아, 우리나라는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이건 아무 문제없는데, ‘우리나라는 악마가 있습니다.’ 이건 문제 되는 거예요. 문제 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에 나와요.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할 때 우리 입장에서는 출애굽 사람들을 친 거로 알잖아요. 각 가정의 장자를 친 걸로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게 돼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신들을 쳤다는 거예요. 그 신들 속에 뭐도 포함돼 있습니까? 메뚜기, 우박, 그리고 깜깜한 해, 모든 자연이 신들인 거예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물에 영혼을 넣는다.‘ 이 말 이예요. 불어넣으면 뭣과 연결되느냐 하면 바로 인격적인 신과 접촉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이 기계로 만들어 놓고 그냥 만들어진 신이라면 구태여 사물에 영혼을 부여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 영혼이라 하는 것은 나무나 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은 누구한테만 있어요? 인격자에게만 영혼이 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격자로 만들어 줘야 우리가 여기서 인격적으로 기도하는 것도 응답이 되거든요. 그러면 그 중간에 있는 자연도 뭐가 돼요? 사물 하나가 인격적으로 전환돼야 되는 겁니다. 옛날 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단군은 어디서 태어난 겁니까? 곰하고 호랑이하고 태어났죠. 단군의 설이 두 가지 있어요. 곰하고 호랑이하고 했다는 말은 자꾸 억지로 곰하고 호랑이는 인격이 아닌데도 기어이 거기서 뭘 끄집어내요? 영혼도 끄집어내고 인격을 끄집어내서 인간의 최초의 조상으로 만들어야 자연세계가 모든 인격 신 안에서 조화가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바로 고대 신화적인 인식 바탕인 겁니다.

 출애굽을 할 때 거기 있는 모든 자연물들을 신들이라고 표현하고 ‘나는 애굽에 있는 사람들과 그 신들에게 벌을 내렸다.‘ 돌멩이한테 벌을 내릴 수 있습니까? 돌멩이 매 맞아봐야 ’아야‘ 소리도 안 하는데. 돌멩이가 만약에 영혼이 있다면 때리면 ’아야‘ 하겠죠. 그걸 물활론이라 해요. 어떤 물체가 마치 사람처럼 살아있는 그런 뜻이 물활론이라 해요. 오늘날 입장에서는 돌이 무슨 살아있습니까? 그러면 사람 치는 것처럼 발로 차면 얼마나 아프겠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그런 현상, 어쨌든 간에 인간들이 신과 접촉하려고 애를 써서 사물에다 영혼을 집어넣어서 자연 속의 영혼과 대화하는 그런 시도를 주께서는 익히 이미 인정해요. 옳다는 게 아니고 너희가 그런 식으로 자연을 해명하려고 애쓰는 그 점을 이용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으로 다가서서 쳐버리는 겁니다.

모든 자연은 왕에게 종속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왕 하나 똑바로 하게 되면 모든 곡식들이 잘 되고 만약에 왕이 못하면 저주를 받아서 곡식도 안 되는 거예요. 곡식이란 세포와 왕이라는 동물세포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현대 생물에서는 관계없죠. 관계없는 것을 관계있으려고 노력하는 과학이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 당시의 신화적 세계를 주께서 충분히 활용하신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활용하셔서 모든 것을 왕과 왕의 인수인계식으로 하나님의 신상을 설명한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공중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왕의 손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금 머리입니다.” 그 다음에 39절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세 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이것이 나중에 다니엘 7장에 보면 짐승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7장 19절에 보면 “이에 내가 네 째 짐승의 진상을 알고자 하였으나 곧 그것은 모든 짐승과 달라서 심히 무섭고 그 이는 철이요 그 발톱은 놋이며 먹고 부숴뜨리고 나머지는 발로 밟았으며”

지금 우리가 궁금한 것이 “왕의 후에는 왕보다 못한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라고 돼 있다 말이죠. ‘못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겁니다. 만약에 진짜로 못하다한 것 같으면 왕의 나라가 정복되겠습니까? 정복 안 되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정복하는 자가 더 나은 나라가 되지, 정복당한 자가 못한 나라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못한 나라한테 금의 나라가 정복이 됩니까? 그거 참 이상하죠.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푸느냐 하면 아까 왕=금, 그 다음에 은이잖아요. 방향이 이렇게(⤋) 되면 설명이 안 돼요. 그런데 방향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제일 나중에 발, 철과 흙이 섞였는데 발, 철과 흙의 밑에서 이렇게 (⤊) 올라온다고 생각한다면 결국은 왕보다 못한 나라가 왕의 나라를 정복했다는 것은 누가 밑에서 밀어주는 힘에 의해서 왕은 정복당해야 되겠죠.

그런데 여기서 더 어려운 것은 이 은 같은 나라가 누구한테 당합니까? 놋 같은 나라한테 당하죠. 철 같은 나라한테 당하고 이러면 결국은 뭐냐 하면 갈수록 못한 나라가 소위 잘난 나라를 집어삼켜 버리는 결과가 되죠.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돌멩이 같은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이건 못 나도 너~무 못해.ㅎ 찌질이. 찌질이 왕에다가 찌질이 제자들이나 찌질이 백성들. 그런 나라가 결국은 이것을 없는 나라로 아예 가루로 만들어서 ‘있었어? 없네.’ 라고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찌질이 나라 속에 뭐가 잠복돼 있다? 얼마나 찌질이 나라가 돼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단한 나라들을 앞당겨서 이 세상의 역사로서 장식하게 만든 거예요. 깜짝, 깜짝 놀라고 감탄하게 만드는 거예요. ‘야~ 러시아 대단하다. 중국 대단하다. 미국 대단하다. 아이쿠, 한국은 찌질이네.’ 이렇게 부국과 강국에 대해서 그걸 부러워하면서 ‘그래, 나도 언제 일본은 대단하지만 일본을 삼키고 말거야.’ 그러니까 밑에 있는 나라가 항상 선망의 대상이 뭐예요? 자기보다 영광스럽고 대단한 영광을 받았던 그 나라예요.

은나라가 금나라를 이겼으면 금나라는 어디에 포함돼 있어요? 이미 은나라가 금나라를 정복해서 금나라를 대체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 은나라를 이기면 뭘 이기는 것이다? 금나라를 이기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밑의 있는 것의 하는 방향은 항상 태산 쪽이 아니고, 찌질이 나라가 아니고 항상 그때 그 대단 했던 그 나라를 선망하면서 모든 인류의 모든 나라는 그런 식으로 발전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발전인지 퇴보인지는 분간이 안 갑니다만 그런 나라가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역사라 하는 것은 결국은 오해와 착각 속에 계속 지금 놀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아까 본 것처럼 느부갓네살 금나라는 뭣을 다스렸습니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친히 통치하시고 친히 다스리잖아요. 뭘 더 원합니까? 밑에 있는 나라가 뭘 더 원해요? 금이라는 나라가 이 세상의 모든 걸 통치했다면 그까짓 거 우리도 한번 금나라만 점령한다면 우리도 옛날 금나라가 해왔던 것처럼 우리도 통치할 수 있다는 거예요.

결국은 뭐냐 하면 현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누가 집어먹고 누가 차지하느냐 그런 싸움을 다니엘에서는 뭐냐, 짐승들이 갖고 있는 한계라고 보는 거예요. 미꾸라지 국을 뭐라 합니까? 추어탕이죠. 추어탕 끓이기 위해서 양푼에다 미꾸라지를 담아 놓으면, 어릴 때 집에서 가만히 보면 답답한 게 있어요. 물은 별로 없는데 미꾸라지가 별로 없는 물 안에서 서로 헤엄치고 서로 숨 쉬겠다고 거품을 물고, 치고 박고 다다다닥 다다다닥 하거든요. 꼭 다니엘의 짐승 같아요. 이 세상이 뭐 그리 좋다고 한 때 이 세상을 느부갓네살이 통치했으니까 그 놈의 그 통치가 그리운 거예요. 유일한 비전과 소망과 Boys be ambitious! 오직 모든 청소년들이 노리는 것은 뭡니까? 이 짐승이 한번 거쳐 간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 그것밖에 없어요. 그게 짐승의 마음을 입은 거예요. 짐승의 마음!

그런데 그 금 같은 왕이 나중에 어떻게 돼요? 일곱 해 동안에 이슬을 맞으면서 자기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게 뭡니까? 짐승! 당신은 짐승이야. 결국은 짐승이 짐승을 부러워했고 짐승이 짐승의 뿔에다 쓰는 그 왕관을 후대 짐승(왕)들이 그렇게 부러워한 거예요. ‘나도 저 왕관 한번 써보자.’

그럼 이 세상의 본질은 뭐예요? 이미 누가 썼던 왕관을 누가 바꿔치기하면서 자기도 한번 써보는 거예요. 그러면 새로움은 있습니까? 없는 거예요. 이 새로움이 없다는 것은 애굽은 여전히 애굽으로 남아줘야 그 속에서 비로소 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는 거예요. 세상은 달라질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 거예요. 결국은 매일 짐승이 설친다는 것은 세상은 똑같다는 이야깁니다. 아무리 그 후발 왕이 나타나도 나라가 나타나도 하나의 금 신상 속의 부속기관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결국 느부갓네살이 꾼 꿈은 그 꿈의 지배를 받는 것이 인간 세상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지가 꿈을 꾸는 정도가 아니고 꿈이 인간을 규정하고 있어요. 꿈이 인간을 비로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아, 니는 내 손 안에 있어. 이 꿈 속에 있어.’ 결국은 꿈이죠. 언제 꿈이 되는 겁니까? 태산이 와서 실제 나라 천국이 왔을 때 천국이 대단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있다가 사라졌던 하나의 추억 거리 같은 것, 에피소드 같은 겁니다.

우리 인생이 지나고 보면 전부 다 에피소드에 불과해요. 하늘의 형상, 예수님의 형상을 입었을 때는, 우리가 새 옷을 입었을 때는 벗어 놓은 옷, 버려놓은 그 옷들은 하나의 에피소드 같은 거죠. 옛날 지나간 추억에 담긴 그런 옷에 불과하듯이 그때는 우리가 옷을 갈아입을 것이라고 히브리서 1장에 나오죠. 그 옷은 바로 왕들이 그렇게 치고 박고 서로 가지려고 철수도 그렇고 근해도 그렇고 재인도 그렇고 그저 가지려고 미꾸라지 추어탕하기 위해서 얼마 되지도 않는 물을 산소를 더 빨아 먹으려고 물을 튕기고 튕기는 누구는 돈 받았다 하고 누구는 안 줬다 하고 그게 진흙탕 싸움 이예요. 그들은 천국에 관심이 없어요. 그걸 주님께서는 기형으로 보는 거예요. 뭔가 비뚤어진 것이다. 크게 비뚤어진 것이다.

이런 꿈 해석을 누가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 누가 해석합니까? 다니엘이 해석하죠. 다니엘 너는 뭐냐? 해석자죠. 느부갓네살이 짐승이 될 때 여기에 누가 와서 짐승 만드느냐 하면 관찰자가 있어요. 관찰자에 의해서 느부갓네살이 짐승이 된다면 결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느부갓네살은 이건 최고 자리에 앉은 왕이 될 수가 없죠? 그러면 뭐냐, 느부갓네살은 뭔가 연기는 하면서 남자 배우처럼 연기는 하면서 지금 하는 그 연극의 내용을 모르는 거예요. 부지런히 감독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감독이 시키는 대로 짐승은 되지만 진정한 그 연극을 통찰하고 관찰하고 해석자는 누굽니까? 다니엘 이예요.

그럼 다니엘은 어디서 흘러온 사람 이예요? 누구한테 흘러온 사람 이예요? 다니엘은 포로 잡혀 온 유다 사람이죠. 다니엘의 유다는 다윗 언약의 다윗에서 왔잖아요. 다윗언약을 주신 분은 누굽니까? 다윗 자손에서 오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유다 백성에서 오는 다니엘은 바로 짐승의 나라를 뭐로 보고? 애굽으로 봐서 지금 다니엘이 그 안에 신하로서 복속돼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빼내겠다는 것은 이 애굽나라를 구원하겠다는 게 아니고 애굽나라에 들어있는 진짜 언약의 백성을 빼내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애굽의 그 속성을 영적인 것까지 확장시킬 필요가 있는 겁니다.

자전거 타이어 펑크 난 것을 잘 모를 때 어떻게 합니까? 바람을 더 집어넣어보는 거예요. 바람을 더 집어넣어서 물속에 집어넣어서 공기가 어디서 새는지 살펴보잖아요. 바벨론이 부풀대로 부풀어서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이 단순히 인간 있고 자연 있고 신이 있는 그런 식이 아니고 이게 인간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영적인 실체와 관련돼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충분하게 부풀대로 부풀어 보는 거예요.

그러면 바벨론 나라가 짐승이 되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바로 꿈의 해석자 앞에서만 짐승이 되는 거예요. 다니엘 앞에서만 짐승이 되는 거예요. 느부갓네살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바로 바벨론 왕 앞에 다니엘이 서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다니엘 앞에 누가 서 있습니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서 있는 거예요. 지금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 바로 이 위상입니
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성도로 하여금 성도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해서 여기 배치돼 있는 불신자들이 그런 식으로 세상은 진행되고 있어요. 성도를 성도되게 하기 위해서! 성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주변에 불신자들이 포진돼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다니엘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다니엘 3장 1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금으로 뭐를 만듭니까? 신상을 만들었죠. 보세요. 좀 이상하죠. 분명히 그 신상은 뭐로 망한다? 돌이 날라 와서 부순다고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으면 드라마 미리 알면 어떻게 합니까? ‘아이쿠, 그렇다면 내가 안 만들래. 나보고 금 신상 만들면 만들지 말라고 이야기 해.’ 이렇게 나와야 될 텐데 어떻게 됩니까? 드디어 금 신상을 만들죠. 분명히 지금 다니엘하고 이야기 했잖아요? 느부갓네살이 꿈꾸고 꿈 해석해 줘도 느부갓네살은 지금 다니엘이 무슨 소리 하는지 도통 도무지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성도가 불신자 앞에서 ‘저 여러분 때문에 성도 되었어요.’ 하면 불신자가 무슨 소린지 모른다니까요. ‘저게 돌았나?’ 이런다니까요. 그리고 성도가 ‘당신들이 뭘 해도, 당신들은 똑똑하고 정상적이라고 보지만 나는 기형으로 보인다.’ 해도 ‘내가 왜 기형인데? 내가 왜 미쳤어? 나는 똑똑하고 하버드 대학 나왔는데, 나는 박사 학위 2개나 돼, 나는 똑똑해, 나는 에디슨이다. 발명도 잘 해, 나는 원자 분자를 발견 했어 나는 우주선 만들었어. 나 똑똑해.’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기형이고 짐승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다니엘을 본 게 문제에요. 다니엘을 안 봤으면 문제 없는데 다니엘을 봤기 때문에 추어탕을 생각해서 ‘당신은 추어탕에서 지금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관찰자, 해석자 입장에서 하라는 것이 주님의 지시입니다. 성도보고. 제발 해석을 해라. 세상 해석을 해가며 살아라, 인생을 그냥 살지 말고. 꾸준히 해석을 하라 이 말이죠. 세상이 노리는 게 뭐가 있습니까? 이미 사람들이 썼던 금 면류관을 그걸 내가 쓰고 싶어서 환장한 거잖아요. 교회 당회장이 당회장직을 그만두면 부교역장은 뭐가 되고 싶어요? 그 자리가 갖고 싶은 거예요. ‘저 자리가 내 자린데. 저 자리가 내 자린데.‘

저는 전에 tv에 ‘쎄시봉’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거기 송 창식 김 세환, 윤 형주, 조 영남이 나왔을 때 이 장희 가수가 뭐라 했습니까? ‘아! 저 자리가 내 자린데.’ 그러니까 이미 누가 멋있게 썼던 금 면류관, 하늘나라가 좋은 게 아니고 어쨌든 내 자식을 남이 한번 썼던 판사, 검사, 의사자리, 그 왕관 써서 좋은 데 장가보내고 시집보내고 그게 꿈인 거예요. 그게 아무 소용도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그 사람들은 오늘은 동지가 되었다가 내일되면 뭐 돼요? 원수가 되죠. 그게 정당 아닙니까? 온 누리 당, 새 누리 당, 헌 누리 당, 전부 다 그거잖아요. 이익이 있으면 동지고 나한테 이익 없으면 원수가 되고, 이게 기형인데, 이게 기형된 짐승의 왜곡된 모습인데.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다 그게 정상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해석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되면 예수님은 팔짱 끼고 ‘어이구, 짐승들, 날 믿어라.’ 마리아 마르다가 ‘아휴, 우리 오빠 죽었어요. 오빠, 오빠’ ‘아이구, 나를 믿으면 산다. 니 오빠도 살았어.’ 이게 바로 채널 링! 홍해라는 채널 링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게 다니엘이 되시고 홍해가 되셔서 ‘오직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내 말을 듣고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게 얼마나 어려워요? 그래서 다니엘에서 그걸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짐승아, 짐승아, 니가 노리는 것이 전에 썼던 세상의 영광이야,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 그냥 있던 거라 말이죠. 세상의 아들로 태어났고 세상의 딸로 태어난 그 자체가 세상에 속하고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죄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능력도 없을 뿐더러 그런 의지도 없어요. 능력 없는 건 기본이고 우리는 그런 마음도 없어요. 이왕 천당 가는데 죽을 때까지 복이라도 따내고 보란 듯이 한번 행세하고 가야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어제 수요설교 했죠. 부자가 지옥 갔는데, 아니  물이 없을 줄을 꿈에도 몰랐어요. 지옥에는 물이 없답니다. 그 다음에 묻는 거예요. 여기 물은 왜 나왔습니까? 누구 덕분에 나왔습니까? 우리는 수도 공사해서……하지만, 그게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공로로 그냥 죄인에게 그냥 무상으로 주는 햇빛과 공기의 그 연장선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수돗물을 쓸 때마다 ‘아휴, 이 죄인에게 수돗물을 주시다니…’ 이런 마음으로 살면 그 사람은 이미 홍해라는 채널 링을 통과한 사람이고 ‘어이, 물 많다. 맘껏 쓰자.’ 이러면 뭘 모르느냐, 지옥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 기어이 지옥이 없다고 여기면서 그따위 짓을 하는 거예요. ‘이왕 갈 거 실컷 쓰고 가자.‘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짐승의 나라에 지금 살지만 이 애굽에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어떤 물이든 불이든 뭘 하든 간에 조그만 일이라고 여기 뭐가 연관돼 있다? 해석자, 관찰자, 태산, 그것과 연관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겁니다. 뭐라고? 세상은 기형이다.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라고 여기는 그것은 짐승들이 하는 연극된 거짓말이다. 뭐든지 인간 자체가 사기꾼들이예요. 인간 자체가. 전부다 사기꾼들입니다. 정상이 아니면서 정상이라고 우기고 있어요. 속에서 나오는 게 죈데 자꾸 손 씻으면 깨끗하다고 보는 이 왜곡된 기형적인 짐승들. 그것은 바로 해석자가 그렇게 짐승이라고 해석을 해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그것을 알아낼 수가 없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41.16) 12-10-18 14:44 
가락교회-다니엘2장35-4장9절(기형적 짐승)121004-5강b-이 근호 목사

제 5강b

43절 봅시다.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을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못한 나라라는 뜻이 뭐냐 하면 결국 하나로 일치되지 않는 나라, 뭔가 쉽게 부수어지는 나라가 앞의 나라보다 더  못한 요소가 되는 거죠. 금, 은 이런 질적인 차이는 서로가 서로를 이렇게 잡아 묶는 본드가 결합력이 떨어지는 나라. 그렇다면 그 나라는 결국은 진흙과 흙이라고 하지만 이걸 한나라로 볼 수가 없는 거죠. 전체로 볼 때는 전부 다 생각이 같으면 한나라이어야 하는데 생각이 같다고 하면서 각자 따로 노니까 결국은 뭔가 금이 되고자 하는 생각은 같은데 서로 사이는 이미 떨어진 사이라. 이게 태산한테 얻어맞는 그 순간에 직면된 나라꼴이 이런 꼴이다 말이죠.

분명히 세상에 있는 부귀, 그 최고의 금을 쓰고 싶은데 더럽게도 다가가지 않는 상황, 목표점은 동일하기 때문에 한나라로 쳐주지만 그 안에는 진흙과 흙과 철이 섞여져서 서로서로 티격태격 싸우는 그런 개판 일보직전의 나라가 되는 거죠. 콩가루 집안이죠. 그것이 그 다음부터는 개인플레이, 이기주의가 굉장히 팽배한 겁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부 다 마귀의 종이 되는 이유는 뭣 때문에? 인터뷰해서 mbc에서 마이크를 대보면 목적하는 바가 다 똑같아요. 설날 해 뜰 때나 추석에 달 뜰 때 비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세요. ‘뭘 빌었습니까?’ ‘그저 남편 사업 잘 되고 가정이 건강하면 최고죠.’ 교회 와서 교인들이 새벽 기도에 뭘 빌었습니까? 하면 ‘그저 남편 사업 잘 되고 지 몸 건강하면 되죠.’ 절에 가서 비는 사람은? 똑같은 생각하는 거예요.

마귀는 그냥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 마귀가 신경 쓰는 것은 우는 사자와 같이 쫓는 것은 바로 목적을 여기에 두지 않고 태산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부수는 날라 오는 돌멩이에 신경 쓰고 있으니 여기는 마귀가 손 좀 봐야 돼요. 요거는 마귀가 찾아다니면서 ‘이건 안 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광야에 가셔서 성령께서 일부러 마귀와 붙여줬죠. 마귀한테 한번 시험 받으라고. 완전히 해병대 훈련받는 식으로. 40일 굶게 만들어서, 40일 굶게 만드니까 사람들은 종교니, 하나님이니, 뭐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몸이 중요하니까 굶었으니까, 첫 번째 당기는 감정은 딴 거 없죠. ‘밥 먹고 싶다.’ ‘밥 먹고 싶다‘를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몰아세우죠.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게 있잖아요.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그렇게 해놓고 뭐라 합니까? ”…도살할 양 같이“ 왜 성도를 이 지경으로 만듭니까? 왜 멀쩡한 사람을 도살할 양같이 만드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어떤 모습이었어요? 도살할 양 같은 모습이잖아요. 똑같이 다루시겠다. 예수님을 다루었던 성령께서 나도 너희를 똑같이 예수님처럼 다루시겠다는 거예요. 이게 축복입니다. 똑같이 다루어서 넓은 길 못 가게 만들어서 좁은 길 가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환난과 핍박 그런 것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을 집어넣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청도에서 했죠.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언약인데 여기에 우리 인간을 집어넣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된 것처럼 너희도 나와 하나 되게 만든다는 이것이 요한복음 17장에 돼 있죠. 요한복음에 이렇게 한 것을 다니엘 역사를 통해서 풀어보자. 그렇게 되면 아까 금 신상 꿈을 꾸게 해서 해석자 나오고 …, 이런 복잡한 거예요. 그만큼 정리 정돈이 아직 안 된 거예요. 뭔가 역사가 더 진행돼야 되고, 역사에서 사건들이 터져야 되고,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아직도 우리 역사에 대해서 그만큼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기대라 하는 것은 ‘나도 언젠가 왕관 한번 써보자. 나도 잘 사는 나라 한번 만들어 보자. 나도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 국민이란 소리 한번 들어 보자.’라는 왕관 쓰고 싶은 기대치가 있는 겁니다.

사실은 이것이 전부 다 바벨론인데 바벨론 새끼들이고 바벨론 자식들이고 바벨론에서 못 벗어나는데 그럼에도 아비가 쓴 것을 서로 빼앗아 지 한번 써보려고 지 써 봐도 지 손자가 물고 늘어져서 뺏어서 이렇게 하죠. 그러니까 무는 놈이나 물리는 놈이나 한꺼번에 전부 다 짐승! 그게 다니엘의 꿈의 해석 이예요.

그러면 짐승의 출발은 어떠냐. 간단한 겁니다. 3장에 봅시다. 느부갓네살이 뭐를 만든다?  신상을 금으로 만들었다. 이게 바로 서서히 짐승의 본색을 억누를 수 없어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 다음에 2장 44절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러면 앞에 있는 모든 나라는 영원히 망하고 이쪽 한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죠. 그럼 우리가 어느 쪽에 속하죠? 망하는 나라에 속하죠. 그럼 한번 물어 봅시다. 망할 나라에 속하면서 이 나라가 망하기를 원합니까? 안 망하기를 원합니까? 사실 망하기를 원해야 돼요. 왜,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를 위해서 자리를 내어줘야 되거든요. 주의 뜻이 중요하지, 내가 얼마나 이익 보는 것은 우리한테 안 중요합니다. 확실한 진리가 무엇인가 중요해야지 내가 뭘 하게 되면 나한테 이득이 오나, 그건 중요하지 않는 문제거든요.

목회자나 설교자가 제일 신경 써야 될 것은 뭐냐, 이것이 과연 진리냐가 중요하지 이거 전 전해서 몇 명 남을 것인가, 몇 명이 감동 받을 것인가, 이건 중요하지 않은 문제예요.

그래서 그 질문을 다니엘이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한나라가 와서 그 나라는 망하고 돌이 철과 놋과 진흙을 모두 부숴버립니다.‘라고 하니까 46절 느부갓네살 태도 한번 보세요. 갑자기 엎드려 다니엘에게 뭐하고? 절하고 ”보세요. 지금 해석자가 누구보다 더 세다? 해석자가 왕보다 더 세니까 왕은 결국은 다니엘이 풀어주는 꿈의 실체가 오면 하나의 연기하는 이 지상의 무대에서 연기를 해야 될 배우에 불과하고 연출자는 누가 했다? 지금 다니엘이 서 있는 그쪽이 연출자가 서 있는 자리가 돼 버려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이런 식으로 믿었습니까? 우리는 연기하고 주님은 연출자고, 이렇게 믿었습니까? 아니면 동업하자는 거예요? 동업하자고 나온 거예요. ‘예수님, 하늘나라 갈 때 한 자리 주세요.’ 이건 동업하자는 겁니다. 지분 달라는 거예요. 지분도 그냥 달라하지 않고 공평한 것도 아니에요. 뭡니까? ‘우리 중에 누가 높습니까?’ 이게 뭡니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 이건 망할 나라에서 통용되는 법칙을 어디까지 지금 적용시키고 있습니까? 예수님나라에다 적용을 시키니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필히 마시게 될 것이다.’ 그 사약. ‘사약을 마셔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는 듣거라. 사약을 마셔라.’ 안 먹죠. 안 먹지만 기어이 장희빈처럼 아가리 벌리고 거기다 사약을 펑펑 집어넣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사는 거예요.

제가 청도 강의할 때 했죠? 욥은 단시일 안에 고난을 받았는데 오늘날 성도는 어떻게 받는다고요? 평생을 거쳐서 그 욥이 받은 고난을 그걸 다 받아요. 욥만 성도가 아니고 우리도 성도예요. 욥은 단시일 안에 고통, 기왓장 가지고 긁었죠. 우리는 서서히 50대에도 긁잖아요. 욥이 따로 없어. 우리가 욥 이예요. 그러면서도 차라리 태어나지 말게 하소서. 왜 태어나게 해서 고생만 하게 하십니까?‘ 욥이 한 소리를 주렁주렁 거리고 우리도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들이, 더러운 인간들, 악마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주님의 주되심과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야 되는 겁니다. 주님도 그렇게 죄의 세계 속에서 살면서 악마의 정체를 밝혀냈듯이 이제는 성도 곁에 악마가 항상 주목을 하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느부갓네살이 절을 하죠. 절을 하면서 온갖 칭찬의 칭찬을 늘어지게 다 합니다. 그게 무슨 신앙이고 이게 무슨 구원받을 믿음이겠습니까? 야, 똑똑하다, 너, 나보다 낫구나, 참 존경한다.‘ 그거죠.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데려왔을 때 제가 답답한 게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이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돼요? 돌 놓고 도망가지 말고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하고 오면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하면 ’아이쿠, 죄인이구나.‘ 글자 막 쓰고 하니까 그 글이 자기 글이거든요. 돌 놓고 도망치지 말고 ’들켰습니다. 주님이여.‘ 하고 오면 되는데 다 도망가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왜 도망 못 갔습니까? 가봤자 또 죽어요. 가봤자 죽이려고 했다가 유보시켜서 데려온 여자기 때문에 도망가야 또 죽습니다. 이 여자는 갈 때가 없어요. 갈 때가. 예수 믿어서 있는 게 아니고 꼼짝없이 죄인의 대표로서 도망갈 수 없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묻죠. ‘너를 고소한 자가 있더냐?’ 하니까 ‘아무도 없나이다.’ 뻔히 아는 질문을 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지가 알아서 죄인 돼서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니는 어째서 나한테 붙잡힌 거야. 그런데 그 운반자가 고소하는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브라우니처럼 끌고 와서 ‘물어, 물어.’하려고 끌고 온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통해서 자기가 유일하게 죄용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이 있는 메시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너를 용서한다.’ 이렇게 하신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죄가 없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질질 끌려온 거예요. ‘우리도 도망치고 싶어, 정말 우리도. 예수 괜히 믿었어. 안 믿고 싶어.’ 가면 또 질질 끌려와. 안 돼, 그냥 붙잡혀 와서 개처럼 끌려와서 꿇어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용서하시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식의 용서기 때문에 이게 바로 채널 링, 애굽나라의 자존심 있는 사람한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은 소용없는 거예요. ‘아이구, 훌륭하다.’ 이런 건 구원 못 받아요. ‘훌륭하다. 너희 하나님은 대단하구나, 내가 보물 줄게, 내가 절할게.’ 백날 아부를 떨어도 아직도 이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난 다음에 3장에 뭐한다? 서서히 자기의 누적된 본성대로 잠복돼 있는 시나리오대로 가야되는 거예요. 사람 안 됩니다.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세상이 희한하게 내 뜻대로 안 돼요. 그걸 감안해야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뭘 감안해야 되느냐,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시고 기도해주셔야 돼요. 그렇게 되면 내가 기도드릴 이유가 있어요. 왜, 기도를 해야 주께서는 부숴버릴 수가 있어요. 개그콘서트 보면 어떤 학생이 연기 하겠다고 주죠. 그러면 선생님이 ‘에잇’ 하면서 종이를 찢어버리잖아요. 만날 우리는 우리 맞춤 세상이고 싶어서 뭔가 새로 결재를 올리면 주께서 ‘에잇’ 하면서 또 찢고, 찢는 재미로 계속 기도를 해야 되는 겁니다. 매일같이 찢기는 재미! 우리가 바로 멘붕 스쿨.

그래서 여기 보면 모든 사람이 낙성식에 참여해서 여기 6절에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했죠. 아까 누가 누구한테 절했다 했습니까?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에게 절을 했죠. 아 참 오묘해요. 다니엘 보고 절을 했던 사람이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누구든지 나한테 절하라”고 했을 때 다니엘과 3친구는 그 자리에 빠져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날 다니엘은 빠졌어요. 어디를 갔는지는 모르지만 어디 출장 갔다 하는데 모르죠. 다니엘 3친구는 절 받아야 될 사람이 절 반드시 해야 될 목록에 포함시키게 만드는 하나님의 교묘한 작전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작전입니다.

예수님을 안 싫어하고 좋아하면서 딴 것을 찾는데 그 찾는 자리에 예수님이 다가와서 ‘아! 니 내 딸이야.’ 하고 나오는. 그래서 교회에서 주님 생각하고 직장에서는 자기 생각하고가 통한다? 안 통한다? 이게 통하지 않게 만들어요. ‘6일 동안은 나를 위해서 일 하고 하루는 주를 위해서 한다.’라는 정신은 결코 무슨 정신이 아니다? 결코 안식일 정신이 아니에요. 6일 동안 일하면서 뭐하느냐 하면 주께 영광 돌리는 날이 빨리 돌아왔으면. 천국이 빨리 왔으면, 이런 마음으로 일하면 6일 동안 일해도 안식일 정신 이예요.

세상의 모든 목적은 이스라엘 목적은 안식일에 있지만, 세상의 다른 민족들은 자기 노동의 대가를 원하는 날, 월급날이죠. 그날을 기다리잖아요. 그래서 여기에 우리 같으면 이렇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 만들었잖아요. 하나님께서 ‘아휴, 철도 없는 인간, 그냥 한번 봐주자 그 인간.’ 이러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3명에게 ‘다들 이리와, 지금 일 벌어졌다. 빨리 들어와.’ ‘알겠습니다.’ 들어가니까 다 악기를 불고 ‘전부 다 절하기’ 이렇게 하는데 어떤 사람이 찔렀어요. 아휴, 못됐어. 8절 봅시다.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그들이 느부갓네살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이거 아부 보세요. 얼마나 살아야 만세예요? 아부해서 왕이 분명히 나팔 불 때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했죠? 했는데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한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앙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누가 누구의 함정에 빠진 거예요? 느부갓네살의 함정에 다니엘 3친구가 빠진 겁니까? 아니면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계략에 빠진 거예요? 느부갓네살이 빠진 거예요. 하나님께 준 헌금이고 헌금 했으니까 됐고 나머지는 제가 씁니다. 하는 그때 주님께서 그 돈마저 날라 갈 때 결국은 ‘어, 내 돈 왜 날라 갑니까?’라고 한다는 말은 그때 헌금했던 그 마음가짐이 결국은 온전한 헌금이 아니었다는 걸 들통 내는 주님의 계략이 되는 겁니다. 차라리 내지 마. 차라리. 주님께 낸 것도 내 꺼 입니다. 하려면 차라리 그 따위 사고방식이면 차라리 내지 마라. 세상에 돈 받고 구원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돈 받고 구원하는 예수님 봤습니까? 없어요. 차라리 내지 마라. 그럴 것 같으면. 돈 몇 푼 있으면 감사히 쓰면 되지, ‘요건 내 꺼 입니다. 내 맘대로 씁니다.‘ 이럴 것 같으면 ’그건 안 봐준다.‘하고 결국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극렬히 타는 풀무를 이미 말했으니까 준비 하라 했죠. 제가 만약 느부갓네살 같으면 ‘그 3사람 봐줘라.’ 이러면 돼요. 그런데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면 이게 브레이크가 없어서 ‘에이, 이미 일이 벌어진 거.’ 중간에 그만두면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부부 싸움이 그렇잖아요. 부부 싸움이 대충 아무거나 ‘순댓국 먹을래? 고기 먹을래?’ 한번 고집 부렸으니까 남자의 자존심이 있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난리 나죠. 브레이크가 있어서 멈춰야 되는데 자존심이 뭔지, 그냥 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예~예~’ 뭘 하든지 ‘예~예~’ ‘이렇게 합시다.’ ‘예~예~예~’ 그렇게 하지 말고 따로 합시다. ‘예~예~예~’ 그래서 제가 배운 게 ‘잘했군, 잘했어.’예요. 뭐든지 잘했어. 무조건 잘했어. 잘한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 잘했어. 가정은 조용한 게 최고예요. 자존심이 있으면 지 자존심 계략에 지가 빠져요. 그 늪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결국 자기 본성을 드러내죠.

자, 그렇게 일을 벌려 놨어요. 풀무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보세요. 이게 또 홍해입니다. 홍해 바다가 있습니다. 바다에 사람들이 못 건너가잖아요. 이 홍해 바다를 뭐로 바꾸느냐? 불로 바꿉니다. 불로 바꿀 때 다니엘 3친구를 묶어서 데려가는 사람은 소방관 원처럼 완전무장해서 집어넣었는데 누가 탔습니까? ‘세상에, 불쌍한 거.’ 나는 이 대목 보면서 그 공무원 했던 그 공무원의 집의 가족들, 죄수를 죽이다가 지가 불타서 죽어버리면 그 가족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월급도 얼마 안 될 텐데 어이 살라고. 괜히 걱정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확실하게 가짜 불이 아니고 진짜 불이었다는 거예요. 인간의 세포는 250도 되면 단백질이 돼서 세포가 탑니다. 같은 세포인데 동일한 세포인데 생명이 똑같은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는 타고 하나는 안타요. 그리고 3친구가 몸이 들어갈 때부터 밧줄로 묶여 있어요. 행여나 밧줄 풀고 도망갈까 싶어서. 인간적으로는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거예요. 일말의 구원받을 희망이 전혀 없도록. 홍해! 하나님께서 홍해 말고 물이 쪼르르 흐르는 물 같으면 그런 것 못 느껴요. 홍해가 가로막았다는 것은 물이 갈라지지 않는 이상은 길이 없는 거예요. 천국 가는 길이 그 길입니다. 주께서 열어주지 않으면 항상 깜깜해요. 주께서 열어줄 때 주께서 함께 있음을 우리가 느끼죠. 그때 우리는 내 공로 아니고 주의 공로라는 것을 또 다시 찬양하게 됩니다.

하여튼 우리를 날마다 죽이시고 죽으심 속에서 주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셔요. 그 방식. 욥이 따로 없어요. 오늘날 우리가 욥입니다. 만날 절망 속에서 주께서는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묶어서 갔고 불도 진짜 불이고 이 장면을 보면 그 당시 산업시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 제가 포항제철 수학여행 가면서 구경한 게 있어요. 거기서 근무도 했으니까. 용광로가 장난이 아닙니다. 용광로가 7배나 뜨거운 불이예요. 수천 도까지 올라가거든요. 태양의 표면온도가 5400도인데 그 정도까지는 안 돼도 엄청나게 올라가요. 거기에 사람들이 거기에 뜨거워서 사람들이 못나거든요. 관람하려면 멀찍이서 하고. 제가 일할 때는 현장에서 일했고 여름에는 뜨거워서 미치겠어요. 그런데 그 불 속에 들어간 거예요. 그 이야기는 끝난 거예요. 다니엘은 끝나 버렸어요.

끝났다고 여기는 것에 이야기를 이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가능성 있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죽게 만드는 길로 인도하시는 거예요. 누굴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게 만드는 거예요. 이 용광로는 누굴 위한 용광로입니까? 예수님을 위한 용광로예요.

여기 15절에 봅시다. 느부갓네살이 지가 함정에 빠져서 부탁합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라” 이랬잖아요? 이건 왕이 스스로 법을 어긴 거예요. 분명히 왕은 뭐라 했습니까? 분명히 이런 음악 소리 들릴 때 일제히 절하라 했잖아요? 안 하면 어떻게 된다? 안 하면 풀무에 넣는다 했지, 한번 봐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누구 꾐에 빠진 거예요? 왕이 지가 법을 세워놓고 그 법에 대해서 지가 후회하고 있는 거예요. ‘니가 절 안할 줄 몰랐다. 니가 그러면 내가 법을 그렇게 안 만들지, 아이, 미안하다. 그렇다면 내가 왕의 권한으로 한번 봐줄게. 다시 한 번 해라. 다시 봐줄게.’ 이게 특징입니다. 이러면 안 돼요. 이러면 왕은 절대자입니다. 이러면 왕의 권위가 뚝 떨어져요.

그런데 오죽 답답했으면 스스로 왕의 권위를 이렇게 훼손하면서까지 한번 더 기회를 주겠습니까? 그렇게 볼 때 다니엘 3친구의 이야기를 우리가 한번 분석해 봅시다. 다니엘 3친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가 분석해 볼게요. 느부갓네살 신상에 절하라 했죠? 그래서 다니엘 3친구가 뭐라 합니까? 뭐를 내세웁니까? 신상을 내세우는 게 아니고 신을 내세웠죠. 그러니까 내가 믿는 신이 뭘 만들었다? ‘임금님으로 하여금 신상을 만들도록 주님께서 그걸 허락하셨습니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어요.

우리가 이걸 잘못 생각하면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지 구원에 관한 믿음으로 하나의 오기가 될 수 있어요. 이거 본받아서 믿음 있는지 연탄불 속에 들어가지 말고 이것은 뭐냐 하면 꼭 풀무 불 지피지 않더라고 평소에 ‘사소한 일이라도 주님께서 뜻이 있어서 나에게 그런 경우를 당하게 했습니다.‘라는 믿음이 다니엘 3친구의 믿음입니다. 꼭 뭔가 극단의 어떤 심각한 일을 만들어서 시험하듯이 ’이 예수 얼굴을 밟고 지나가라.‘ 이런 걸 만들어 낼 것 없이 평소에 ’순댓국 먹을까, 소고기 먹을까.‘ 그런 자리마저도 누가 허락했다? 그렇게 짬뽕 이냐, 자장면이냐, 갈등을 누가 일으켰다? 주께서 일으키신 거예요.

짬뽕 먹을까? 자장면 먹을까? 사실 이것은 어떤 걸해도 후회하게 돼 있어요. 왜 짬뽕 먹고 있으면 자장면이 맛있게 보이고 자장면 먹고 있으면 짬뽕이 맛있게 보이고. 짬뽕 시켜서 한 그릇 먹고 있다 보면 괜히 먹었다 싶고 나눠 먹을 걸, 이 맛도 아니고 괜히 먹었어. 앞으로 두 번 다시 안 먹는다 하고. 그러니까 그렇게 고민케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마련한 장치, 하나님께서 시나리오를 재현케 하시는 장치에 우리가 말려든 거예요.

바로 다니엘 3친구의 믿음은 단순히 ‘에잇, 까짓 거 이제 죽으면 죽으리라.’ 이게 아니고 그건 안 인숙 여사가 한 이야기고, 그게 아니고 ‘당신이 그렇게 신상을 내세우는 그것마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범주가 넓으니까 그쪽에서 할 일이 없는 거예요.

하는 말이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이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왕은 누구 아래 있다? 내가 믿는 하나님 아래 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하는 것처럼, 아무리 당신이 높은 체 해도 하나님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런 일을, 풀무를 지필 때는 그 속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이 누구한테 있다?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나는 이런 일을 조치하신 하나님을 안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일은 뭡니까? 과연 다니엘 3친구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는가를 그 시대 상황에서 증명될 절차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느부갓네살이 신상 만들고 집어넣는 것은 누구의 하수인? 하나님이 했던 일을 그냥 실험에 옮기는 실험자에 불과한 거예요. 세상 모든 불신자와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실험 실습 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너무 겁내지 마세요. 저 사람도 시험하고 나도 실험자로서 참여하고 있는 거예요. 자꾸 세상에서 시험, 시험하죠. ‘겁나지? 겁나지?’ ‘겁 안 나거든요.’

사람에게 겁을 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지 주님을 안 믿는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으면 자기 자신이 사수해야 되니까, 자기를 지킬 사람은 자기밖에 없으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나한테 그런 이야기 한 것까지 우리 주님께서 알아서 이야기했다가 돼 버리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게 되죠. ‘주여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하나이다.’ 스데반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 이야기가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나올 수가 있는 겁니다.

자, 실험에 옮깁니다. 실험에 옮기는데 여기서 생각할 것은 실험 장치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만 머뭅니다. 만약에 내가 느부갓네살이라면 그렇게 불을 지피는 정도가 아니고 미리 이야기하겠어요. ‘백성 여러분, 불 지핀 이 속에 3사람 들어가죠? 실은 1사람 더 나옵니다. 그러니까 무사히 나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젠데 그런 머리는 인간에겐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제가 만약에 미리 알아서 ‘에이그, 주님 나타나서 아무도 안타고 살려줄 거지? 그걸 내가 미리 이야기해야지. 여러분, 다니엘 3친구가 믿는 하나님이 살려내는 거 보고 우리 박수 칩시다.’ 이렇게 나온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니엘 3친구를 안 살리고 죽여 버립니다. 기어이 틀어지도록 기어이 예상 못하도록 하는 거예요. 꼭 우리기도 응답하는 거와 똑같아요. 기어이 기도응답 안 되는 쪽으로 응답해 줘요. 아주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에요. 기어이 우리 뜻대로 안 되게 만들어요. 얼마나 재밌는 일인지 몰라요. 우리는 요런 식으로 안 되면 요런 식으로 미리 예비해서 응답을 만들어 놓는데 고 사이로 다 빠졌어. 그거 다 벗어나고 엉뚱한 게 나와요.

결국 여기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그것이 기적입니다. 아까 낮에 손님들 만났거든요. 선교사님 손님들 만났는데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해요. 자기 아는 간암 말기 환자가 있는데 꿈을 꿨답니다. 환상인지 꿈을 꿨는데 목사님, 꿈에 가보니까 천국 온 목사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치료하라고 돈 대준 목사는 설마 천국에 왔겠지.‘라고 했는데 자기 치료하라고 선을 베풀고 구제를 베푼 목사마저 천국에 못 왔답니다. 그런데 못 왔는데 돈 대준 목사한테는 한번 허락을 얻어서 지금 회개하면 혹시나 갈 수 있다.’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이 직접 체험한 이 말을 믿어야 될까요? 안 믿어야 될까요? 할 때 제가 식사하면서 그 자리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기적의 마감은 요나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궁금해서 ‘해봐, 해봐. 우리 앞에서 해봐. 하늘에 불 던지고 우리 앞에서 뭐든지 해봐.’ 할 때 예수님께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 십자가 밖에 없다.’ 십자가 통과하지 못하면 천국 없습니다. 제가 너무 심한 말 했습니다.

십자가 통과하려면 죄인으로 통과해야 돼요. 왜냐, 피 흘렸으니까. ‘내가 피를 흘린 만큼 너는 저주받을 죄인이다.’라고 느끼는 것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기적입니다. ‘나는 주의용서 덕분으로 살지,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라고 느끼는 것.

그래서 여기 또 기적이 나오죠. 우리 인간들이 하는 모든 시도가 다 하나님이 계획 속에 있는 허접스러운 일에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추어탕. 그냥 갇혀 있는 양동이에 그저 살려고 몸부림치는 미꾸라지의 몸부림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부 다 짐승 이예요.

그래서 풀무 불 속에 들어갔죠. 그것도 결박된 채 들어갔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공무원들은 타죽었어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이 일어나서 봅니다. ‘어! 이상하다. 3사람 아니었어?’ ‘3사람입니다.’ ‘3사람인데 왜 4명?’ 4사람이 불 가운데 다니는데 아무도 상하지 않았어요. 27절에 보면 그들은 불에서 끄집어 낼 때에 몸도 안탈뿐더러 물론 세포도 안상할뿐더러 입었던 옷도 빛도 변하지 않고 불 탄 냄새도 없죠. 보통 옷은 뭐로 돼 있느냐 하면 섬유로 돼 있잖아요. 폴리에스테르, 면 같은 성분, 그것이 버틸 수 있는 그 고체가 기체로 버틸 수 있는 한계가 몇 도예요? 얼마 안 되잖아요. 홀랑 타잖아요. 그런데 그게 안 탄 거예요. 과학적으로 납득이 안 돼, 납득이.

홍해가 물이 흐르게 돼 있잖아요. 그런데 홍해가 갑자기 막혀서 양쪽에 벽이 생기는 것은 납득이 안 되잖아요. 여기는 타지 않은 것이 납득이 안 되죠. 그러면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다니엘 3친구보고 다시 들어가라 하면 아마 미쳐서 자살하지 싶어요. 왜냐 하면 다시 하겠다는 것은 예상하겠다는 거잖아요. 그 예상 안 나옵니다. 주님은 두 번 다시 홍해는 없습니다. 요단강은 홍해 식으로 안 했어요. 좀 기다려봐야 소용없습니다. 그것도 비로소 들어갈 때 갈라지게 돼 있어요. 문제가 업그레이드 됐습니다. 문제가 더 어려워요.

그러면 오늘날 문제는 뭡니까? 베드로의 문제는 순교하면 구원받을 줄 알았죠? 순교해도 소용없어요. 구원 안 돼요. 그러면 오늘날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게 정답입니다. 온 몸을 불사를지라도 구원이 안 돼, 사랑이 아니고, 천사의 말을 해도? 그것도 안 돼, 구제해도 안 돼요. 그냥 짐승으로 사는 거지, 할 수 없죠. 뭐. 거기서 ‘모든 것이 나는 이 죄인 중에 괴수다. 뭘 해도 죄다. 이렇게 되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다. 머리털도 단백질이라서 탈 때 냄새가 이상한데 그것도 타지 않았고 멀쩡한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뭡니까? 그렇다면 아이디어가 뭐냐, 정답은 캡슐, 캡슐로 둘러쌌으니까 불이라는 열에너지가 캡슐에 못 들어오도록 했다. 이 말이 맞습니까? 이건 억지로 맞추려고 하는 거지 해답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불에 안탔는가, 이유가 뭡니까? 다니엘이 다리오 왕 때 사자 굴에 들어갔잖아요. 그때 사자 입이 다니엘을 왜 가만뒀을까요? 거기에 나와 있어요. 천사가 사자를 관리해서 다니엘을 안 물었다 했습니다. 그러면 사자가 배가 안 고팠을까요? 무척 고팠지만 천사가 못 먹게 했어요. 다니엘을 빼놓고 다니엘을 고소한 사람 집어넣더니만 사자들이 몇 날을 굶은 데다 들어왔으니까 얼마나 맛있게 잡숫는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실라하고 옥에 갇혔잖아요. 옥문이 열렸습니다. 착고가 풀렸습니다. 누가 와서 이거 끌렀습니까? 아니죠. 정답은 뭡니까? 천사가 와서 도와줬다. 그래서 여기서 결국 4번째 분이 이렇게 안타게 만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을 구원함이 아니라 모든 계획은 바로 하나님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다니엘 3친구가 그렇게 강남 스타일 추면서 까불었습니까? 더~ 겁나죠. ‘진짜 계시잖아.‘ 그 다음부터는 더 조심스럽고 더 무섭죠. ’아휴, 나는 몰라도 혼났잖아요. 정말.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나왔으니까 긴가 민가 했겠죠. 머리로 알던 것을 온 몸으로 체험했잖아요. 그래놓고 느부갓네살이이 또 뭐라 합니까? 28절에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누가 이야기했어요? 느부갓네살이 이야기했죠. 그래서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을 부쉈습니까?

야, 이 고집도 보통 고집이 아니죠. 결국 왜 이렇게 나오느냐 하면 ‘니가 나의 예상 못한 일을 했을지라도 어디까지나 니는 내 밑에 있다. 나는 내 자리를 너한테 물려줄 의사는 없다. 나는 나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 안 믿는 이유가 그거밖에 없어요. 예수님 훌륭한 줄 알고 지가 죄인인 줄 알고 다 아는데 내가 갖고 있던 그 고유의 자리를 나는 그걸 지키고 싶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지, 주님이 믿게 해서 믿기는 싫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똥고집입니까? 내가 예수를 믿고, 믿고, 믿고, 하고 싶지, 그래야 믿었다는 공로가 자기한테 있을 게 아닙니까? 내가 안 믿고 싶은데 주께서 억지로 믿게 해서 주님의 똘마니 노릇을 하기 싫다는 거예요. 누구누구의 똘마니는 내 취향에 안 맞는다는 거예요. 하여튼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불신앙의 이유를 하나님이 유발시켜 놔요. 그때 그 시대 맞추어서 계속 유발 되게 해요.

오늘 강의 어려우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사람이 있고 신이 있을 때 중간이 뭐가 있습니까? 자연이 있죠. 사람이 자연을 통해서 ‘이 자연을 누가 만들었어요?’ ‘신이 만들었어요.’ 그래서 자연을 통해서 신을 믿는 거예요. 이럴 때 자연을 정상으로 본다면 자기 자신이 정상적이고 자연에다 하나님의 어떤 영을 부어서 ‘나는 사슴이 좋아. 사슴 속에 있는 주님의 영이 살아있어.’ 이렇게 하게 되면 하나님은 자연적으로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처럼 인격적인 존재가 되어서 섬기는 겁니다. 이 구조를 누구나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옛날 단군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옛날 고조선 모든 신화들이 이 신화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돼요? 갑자기 여기서 기형적인 사태가 벌어지죠.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짐승이 되고 갑자기 꿈이 개입되죠. 꿈이 개입된다는 말은 인간에서 이 노선이 정상 이예요? 정상이 아니에요? 정상이 아닌 거예요. 이 전체를 제가 뭐라 했습니까? 바로 애굽이라 말이죠. 애굽에서 그냥 애굽되는 사고방식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갑니다. 그래서 채널 링이 있어서 거기서 홍해 같은 장치가 있어서, 문제는 내가 문제 있다. 하나님이 문제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율법을 못 지키게 만드는 요소가 내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을 못 지키는 거예요. 못 지켜서 못 지키는 게 아니고 못 지킬 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먼저 율법이 왔고 우리는 못 지켜서 발각되고 그런 겁니다.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 문제 있음을 들춰내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기적입니까? 매일같이 ‘너는 죄인이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 이예요? 우리가 문제 있으니까 주께서 죽었지, 문제없으면 그냥 낚싯대로 우리보고 호출했죠. ‘그냥 와. 천국 가면 돼.’ 이러지, 무슨 십자가를 왜 지겠습니까? 십자가를 통과하라는 말은 ‘너는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이야. 내가 용서하고 불쌍히 여겨서 구원하는 거야.’라는 그런 취지로서 우리를 구원하잖아요. 그럼 그 취지가 흠뻑 묻혀야죠. 묻히면 우리는 그냥 용서받은 사람으로 뭘 해도 죈데 용서받았으니까 감사할 뿐이다 말이죠.

그런 사건이 그 시대에 중간에 이런 채널 링, 중간에 바꾸어주는 기능으로서 꿈이라는 것을 일부러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과 동시에 그 꿈은 우리의 역사에 보편적으로 다 적용되는 거죠. 그 시대뿐만 아니고 앞으로 나오는 모든 세상을 지배하는 원칙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4장 봅시다. 참 느부갓네살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든 천하는 내게 속하고 내 지배하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4장에 느부갓네살이 궁에 있을 때 또 꿈을 꿔요. 미쳤어요. 이제 꿈꾸다가 환장할 거야. 또 꿈을 꿨는데 꿈이 뭡니까? 세상에, 그 꿈에 순찰 자, 저는 순찰 자 생각하면 퍼뜩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신학교 때 정찰기, 정찰기가 오면서 자기가 짐승이 되죠. 누가 나타날 때 짐승이 된다? 안 나타나면 자기는 온 나라를 다스리는 왕인데, 누가 나타나면? 윙~~ 하고 정찰기 나타나면, 졸지에 나는 ’I am a 짐승.‘

또 꿈을 꿨어요. 아예 다니엘을 부릅니다. 모든 박수들 소용없고 나는 ‘니만 해석할 수 있다.’고 딱 집어서 이야기합니다. 불러서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내가 그에게 꿈을 고하여 가로되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아무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이상의 해석을 내게 고하라” 하고 전에는 꿈꾼 것도 이야기 안 해주고 꿈도 이야기하고 해석도 이야기하라고 억지를 부리더니만 이번에는 뭡니까? 자기가 꿈꾼 것은 기억을 해서 그걸 이야기를 해줘요. 해석은 누가 한다? 다니엘이 한다. 그만큼 이미 다니엘 앞에서의 느부갓네살은 종속자의 입장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의 계획에 이미 느부갓네살이 말려들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 위에 서 있고, 이게 오늘날 성도가 이래야 돼요. 그 남이 썼던 왕관 지가 뺏어 쓰려고 싸울 때 그걸 바라보면서 ‘아유, 미꾸라지 추어탕들.’ ‘그래 뭐가 궁금한데?’ ‘어떻게 하면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거 세상 영광이야.’ 간단하게 끝났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야. 이번에 누구 찍으면 되겠습니까? ‘아이고, 그 남이 썼던 왕관 지가 한번 써보겠다고, 남이 썼던 청와대 화장실 지도 한번 사용하겠다고.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자기의 의지를 자기 마음대로 조정이 안 된다는 사실, 이건 필히 출마해야 된다는 사실, 이번에 허경영이가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자, 꿈의 해석을 높은 나무가 있다 했죠. 이걸 크게 쓰겠습니다. 이게 뭐냐 바로 자아가 땅 끝에서부터 하늘까지, 자아가 없는 공간이 없이 꽉 차 있어요. 심지어 모든 인간들이. 간난 아이부터 모든 인간들의 자아는 놀랍게도 한계가 없어요. 땅 끝에서 하늘까지 꽉 차 있어요. 어떤 세상의 것도 다 누굴 위하여? 나를 위하여, 나의 조정과 다스림을 받기 위하여 있는 것처럼 그렇게 느끼면서 모든 인간이 살아가고 있어요. 이게 자아입니다.

비로소 여기서 왕이 자아의식으로 드디어 발전하면서 영적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스스로 꿈을 통해서 주께서 열어젖히는 겁니다. 수술할 때 어떻게 합니까? 메스 가지고 쫙 째면 핏줄이고 개봉이 되죠. 째는 작업이 꿈을 가지고 쫙 째버리면 느부갓네살이란 것은 밖에 나가면 너는 따로 있고 나는 느부갓네살이니까 나는 왕이고 한 사람이 더 있잖아요. 그러나 각자 자아 속에 들어가 보면 전부 다 각자 자아 속에 전부 다 모든 세상이 포함돼 있어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있다,로 끝나지 않고 저 오바마 대통령이 있음으로서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저 꽃을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줄 때 그 꽃은 나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남들이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누가 기분 나빠요? 만약에 ‘이런 꽃이 있었나?’ 하고 치면 누가 아파요? 읔, 내가 아파요. 왜, 이미 내가 꽃이라고 내가 의미를 줬음에도 다른 사람이 치고 가면 그 꽃마저 내 지배하에 내 자아 속에 포함이 되니까. 모든 소녀, 소년, 청소년 할 거 없이 어른 노인 할 거 없이 다 마찬가지라. 뭐든 게 다 그래요. 모드 스케줄도 회사 돌아가는 것도 나를 위해서 돌아가 줘야 그게 좋은 세상인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마저 그 안에 포함이 돼요. 나를 사랑할 때 비로소 좋은 하나님이라고 간주할 용의가 돼 있다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의 개인에서 자아를 곱게 째면 거기서 드디어 짐승과 만나는 장소, 바로 그건 자아의 장소입니다. 이 몸하고 짐승과 만남은 이 자아를 통해서 드디어 짐승의 특정 장소가 그냥 내 몸이 되는 게 아니고 자아라고 규정되고 난 뒤에 자아와 결부된 것이 짐승 이예요.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창세기 3장에 아담이 선악과 따먹는 것은 그냥 과실 하나를 내 몸이 다가와서 따먹는 거, 하와가 그냥 따먹는 게 아니고, 중간에 뱀이 뭐라 합니까? 니가 이걸 따먹으면 니 자아는 뭐가 된다? 신처럼 되는 거예요. 나는 하나의 몸체에 지나지 않고 내 자아는 몸은 여자의 몸이지만 내 자아는 뭐가 될 수 있다? 신이 될 수가 있다고 할 때 그때 거기에 뱀의 말이 같이 철석이 되는 영적 공간이 마련되는 겁니다.

 제가 어려운 거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개 거품 물고 살았습니까? 아니죠. 우리는 보통 귀신들렸다 하면 뭡니까? 개 거품 물고 쓰러졌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같은 똑똑한 사람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 어떻게 개 거품도 안 무는데 어떻게 그게 마귀입니까? 방금 뭐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자아는 하나님마저 전부 다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악마가 들어가는 자리예요.

또 묻습니다. 가룟 유다가 정신병자입니까? 아니죠. 그럼 뭐가 들어갔다? 사탄이 들어가서 양심의 가책을 받죠. 이게 뭐냐, 모든 악마의 인간의 접선 지역은 내가 이 몸에서 멈춰서면 악마가 안 되는데 내가 ‘나는 나다.’하는 자아의식이 있을 때 그때 그것과 악마는 드디어 작업이 시작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땅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세상 중앙에 나무가 서 있는데 사실은 그 느부갓네살의 꿈이 우리가 매일같이 꾸는 꿈의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자아가 잘 돼야 좋은 하나님이라고 믿는 우리의 이러한 사고방식이 사실은 악마가 접선하는 지역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여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심겨져서 십자가를 위해서 우리가 그런 인간되었음을, 그 관계성을 다시 한 번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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