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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5 01:33:47 조회 : 1978         
언약과 주체 130314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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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2.222) 13-03-19 22:41 
가락교회-70이레 논문(언약과 주체)130314-15강a -이 근호 목사

제 15강a

오늘은 213페이지 언약과 주체의 발생을 하기 전에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그걸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몸이 있는데 그 몸은 골로새서 1장에 보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필요로 해서 만든 몸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하여, 그 다음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돼 있죠. 쉬운 말로 우리 몸의 주인은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우리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주인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을 뭐라 하느냐 하면 앞에 그냥 예수라 하지 않고 ‘주 예수’라 하고 고린도전서 12장3절에 보면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여기서 우리의 몸의 의미가 중요하게 나오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만약에 이웃집 어떤 아저씨가 죽으면 그 아저씨 죽은 것은 우리를 대신한 죽음입니까? 아니면 지 혼자 죽은 거예요? 자기 혼자 죽은 거죠. 그러면 자기 혼자 죽으면 그 이웃집 아저씨가 우리의 주가 될 수 없죠. 불교는 지가 도를 닦아야 돼요. 왜냐 하면 불교는 아무것도 의지하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의 몸이니까 자기만 의지해야 돼요. 자기 의지를 많이 하면 자기는 빛나고 자기를 그냥 방치하면 자기를 방치한 대가로 망가지고 그런 겁니다. 절에 가서 도를 닦든 지가 관리를 해야 돼요.

그런데 복음은, 기독교란 말은 하기도 싫다. 복음은 뭐냐 하면 성령이 안 오면 복음을 모르고 성령이 오게 되면 뭐까지 아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죽음이 우리를 대신하여서, 예수님이 어떤 아저씨라면 어떤 아저씨가 죽었다. 그 아저씨 죽은 것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무도 연결 안 돼요. 그런데 죽으신 그 아저씨 영이 우리 속에 임해버리면, 그분의 죽으심은 죄도 없는데 그냥 죽은 게 늙어 죽은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서, 저주 받아서, 또는 징계 받아서 돌아가신 게 돼요. 그런데 원래 징계, 벌이라 하는 것은 죄가 있어야 받는데 그분은 죄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죄 없으신 분이 죽으신 것은 죄 있는 자를 대신해서 저주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죽은 걸로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뭐죠? 우리의 몸은 우리가 자랑하라고 있는 내 몸이 아니고, 우리 대신 죽으신 분이 자기 그 행위를 자랑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죄를 위해서 대신 죽었던 그 사건 때문에, 우리는 뭘 해도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어야 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게 아주 즐거운 거예요. 우리는 착한 일 했을 때는 착한 일 했다고 보고, 나쁜 일 했을 때는 나쁜 일이라 해서 나쁜 일보다 착한 일이 아무래도 많으면 우리는 악인이 아니고, 선인인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이건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죠. 선이냐, 악이냐, 악이냐, 선이냐 할 때 우리는 분량으로 따지거든요. 악이 많으면 악인이고 선이 많으면 선인이다. 이런 상식에 대해서 누가 금할 수 없죠. 교도소 간 사람은 아무래도 선보다 악이 많은 사람이고 그리고 남한테 칭송 받는 이런 희생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그 사람이 존경받는 이유는 악보다 선이 많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은 전부 다 독자적인, 내 몸은 내 것이라는 독자적인 관점에서는 그게 맞는 것 같은데, 원래 독자적 관점이라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서로, 서로를 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몸은 내 꺼야.’ 이 말은 뭐냐 그러니까 ‘니 몸은 니꺼’ 라고 인정해줄 테니까 제발 ‘내 몸은 내꺼’라고 인정해 다오, 이런 뜻입니다. 하여튼 인간들끼리 저희끼리 장사 다 해먹었어. 원래 주인은 따로 있는데, 예수님을 위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몸을 만들어 놨는데, 악마가 독자적인 존재 양식을 가진 거예요.  악마는 뭐냐, ‘내가 어떤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내가 알아서 선택하겠습니다.’하는 게 악마에요.

우리보기는 이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긴데 주님 보시기에는 더 이상 뭐냐, 악마가 천사거든요. 나는 누구한테 꿀리기 싫고 누구한테 매여 살기 싫다는 겁니다. 그걸 로마서 1장에서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게 뭐냐 하면 마음속에 악마 두기를 싫어하지는 않아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요. 왜냐 악마는 나한테 지시 명령은 안 하잖아요. 우리는 단짝이기 때문에 서로 좋게 지내면 되지, 잔소리하고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소리는 안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백부장은 뭐라 했습니까? 자진해서 이야기해요. “주여 저보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저도 중대장으로서 내 밑에 부하가 백 명 있는데 걔들이 내 말 한 마디면 짝, 짝, 짝 짝 움직인다고요. 제발 그런 관계로 제발 저를 사용해 주옵소서.” 그렇다면 자기 일이 있다? 없다? 자기 일이 없는 사람! 내 일이 없는 사람! 행복한 사람! 축복 받은 사람!

자기 일이 없지만 놀지는 않아요. 왜, 내 일에 내가 참여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의 일에 참여했기 때문에 노는 법은 없는데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결과에 기대하면 안 돼요. 그걸 성경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어떤 결과가 되던 그것은 주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라는 그 고백. 강도를 만나든, 바다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매를 맞든, 이고니아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내쳤던 간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 나로 하여금 일을 시키기 때문에 나는 못하는 게 없습니다.” 능력 주신 자 안에서 그렇죠. 뭐든지 전지전능하다는 말이 아니고 능력주시는 것 때문에 나란 자체도 사실은 능력의 결과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저는 저 자체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여기 있으매 주님이 일 시켜서 있는 거예요. 이게 죽으신 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니까, 죽으신 분의 영이 임하니까 분명히 우리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도 살았고 주님도 살아있고 다 살아있는 걸 알잖아요.

제자들이 다 모였을 때 예수님은 살아있는 게 맞잖아요. 맞는데 세상 사람들 볼 때는 어떻게 보이느냐 하면 죽은 자의 영이 임했다 이렇게 보죠.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기 몸에 대해서 자기가 권리 행사하기 때문에 그걸 사람들은 살아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세상사람 보기에 이미 죽어버린 분이 내 몸을 장악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주님한테는 살아있지만 세상 사람한테는 어떻게 보이느냐 하면 죽은 자가 산자를 움직이는 게 돼 버려요.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인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나는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산다 하는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성령이 있다는 증거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사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살아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 몸은 원래 주인이 우리를 관리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주님 보시기에 그게 정상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자아, 또는 주체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요번 수련회 때 자아와 주체를 나누었죠. 주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회에서 누가 호명을 해줄 때 그게 주체가 된다는 거죠. 자아라 하는 것은 이 몸만 있으면 몸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게 자아인데 ‘몸이 아프다’ 하지 않고 ‘내가 아프다’ 하잖아요. ‘니가 그런 소리 하니까 내가 마음이 아프다.’ 할 때 그 ‘나‘가 자아거든요. 하나님도 몸이 있으면 자아를 인정했어요.

그런데 주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환경이 나를 뭐라고 호명하고 뭐라고 불러주느냐, 어떻게 보느냐가 그 공동체, 그 사회에서의 뭐가 되느냐 하면 주체가 되는 거예요. 환경이 뭐라고 해주는지. 그러니까 그걸 호명이라고 하죠. 예를 들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니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했죠? 그러면 ‘아브라함아’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아고, 호명을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할 때 그 때 예상 밖의 자기가 나는 나밖에 모른다고 했는데 주님이 호명해 주니까 그때부터는 복의 근원이 되잖아요. 믿음의 조상이 되고, 그게 주체라는 거예요. 주체 아시겠죠? 환경 문제, 그러니까 인간의 주체는 몸이 어떤 장소에 놓여 있느냐의 환경 문제에 따라서 주체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주체라 할 때는 사실 자아도 포함되지만 언약과 주체의 발생이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할 때 아브라함 언약이 어떻게 발생됩니까? 아브라함을 불러줘야 아브라함 언약이 생성될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언약이 있는 곳에 뭐가 발생된다? 주체도  같이 발생되죠. 그런데 이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참 쉬운데 이미 이 주체를 발생할 때 아브라함은 ‘내 옛날 고향은 하란 땅이다.’ 뭐 이렇게 나름대로의 또 주체가 있어요. 자기가 생각한 역사적 공간적, 우리 집안은 어떤 집안이고 내가 어느 학교 나왔고 자식은 몇 명이고, 나름대로의 또 사회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주체가 있었다 이 말이죠.

여기서 사회와 공동체를 한번 구분해 봅시다. 사회라 하는 것은 법이 중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걸 테니스란 영국 사회학자는 이걸 게셀샤프트, 게마니 샤프트라 해석하는데  공동체라 하는 것은 역사와 전통 관습이 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회는 법만 지키면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지만, 공동체는 그동안 인정, 의리, 이런 걸 어겨버리면 공동체에서 욕 얻어먹습니다.

그래서 애들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가잖아요. 사회에 나가서 회사에서의 행동을 자기 집안에서 하면 ‘이놈, 어디서 이런 걸 배웠나.’ 욕을 얻어먹죠. 사회는 법을 지키면 의인이 되지만, 공동체에서는 아버지가 전수해 준 그 가정의 가풍, 분위기를 파악 못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아가씨가 회사에 나가서 미니스커트를 입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상견례 하면서 시아버지 앞에서 미니스커트 입으면 ‘니가 니 집안에서 뭘 배워서 이렇게 옷 차림새가 노출이 심하냐.’ 이렇게 나올 때 ‘뭐야? 왜 내 자아에 대해서 이렇게 간섭하지?’ 아가씨가 일단은 참고 나중에 결혼하면 저희끼리 살 때 시아버지 용돈은 없다. 그렇게 되죠. 뭐 가풍이고 가문이고 돈이 중요한 거지 뭐, 늙은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정신 바짝 차려야 되죠. 싫은 소리하면 나중에 용돈도 없고 애 봐주면 용돈 얼마 준다고 그거 다 계산해 놨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줄 때는 반드시 주체가 발생됩니다. 그런데 그 주체는 기존의 우리가 이미 형성하고 있는 주체와 충돌이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이 논문에 시작이 된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 그런데 내가 성경 말씀을 봤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안다. 이건 아니죠. 그것은 내가 여기 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자아로 있고 주체로 있기 때문에 자아와 주체로 다 감춰놓고 여기 내가 있다고 눈이 있다. 눈이 성경을 본다. 성경 말씀 지킨다. 그러니까 옳지. 이거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그 정도보다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오늘날 교인들이 주체, 자아, 이것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내가 성경을 본다. 지키라고 주니까 지킨다. 나 문제없다. 이렇게 되면 언약이 왔을 때 충돌되죠. 아브라함 언약도 충돌 되겠지만 지금의 언약은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 앞에서 그냥 ‘틀렸구나.’가 아니라 처음부터 틀렸다. 그냥 틀린 게 아니고 처음부터 틀렸기 때문에 하는 것마다 틀렸지, 조금이라고 나올 의로움은 아예 나올 낌새도 없고 나올 가능성도 전무하구나, 이게 새로운 주체입니다. 죄인이 의인 되는 거, 여러분, 복습 한번 해봅시다. 죄인이 의인 되는 거, 어떻게 의인된다 했죠?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내 대신 누가 돌아가신 분! 여러분, 내가 말하니까 알지만 그런데 이걸 자꾸 잊어버린다니까요. 내가 행동 똑바로 해서 복을 받지,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는 뭘 모독해요? 이 내가 하는 일이 내 일이라고 여기고 그 결과에 대해서 내가 여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나한테 좋게 온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것은 내가 관리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셨기 때문에 주님의 일로 우리한테 그냥 거기 합류된 건데, 이걸 따로 내 일이라고 간주해 버리면 주님의 대신 죽으심은 흔적도 없이 날라 가 버리잖아요. 이건 누가 좋아서 기뻐할 일입니까? 마귀가 좋아할 일이예요.

성도의 영적 싸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영적 싸움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는데 육적 싸움이 아니고 영적 싸움 이예요. 영적 싸움은 칼 들고 총 들고 설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주인을 주인으로서 인정하는데 있어요. 나는 주님의 메시지라 했죠? 내가 나의 메시지가 되면 안 돼요.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나 이만큼 괜찮은 인간이야.’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안 되고, ‘내가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귀한 일을 맡겼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환자를 이렇게 치료하더라도 스켈링을 하더라도 ‘못난 나에게 주의 일을 이렇게 맡겨 주시다니.’ 이렇게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리고 월급 받으면 ‘못난 나에게 월급까지 주시다니.’ 이렇게 돼야 된다 이 말이죠. “범사에 먹든지 마시든지 범사에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바로 앞에 보면 “너는 이미 값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 이 말이죠.

사람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전부 다 이것에 달려있어요. 내 것이 아니다. 이걸 항상 명심해야 돼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민이나 걱정을 내가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육을 위해 심는 것이 아니고 영을 위해 심는 거예요. 육에 심는 것은 백날 심어봐야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이고, 성령을 위해 심는 사람은 항상 영생을 거둘 수밖에 없는 게 출발점이 영생에서 오는 명령을 받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영생의 명령이 뭡니까? “내 것이 아니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게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 희한한 일이 나온다니까요.

신천지의 문제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단이라 하면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이단이 아니라고 우기니까, 내가 그 답변부터 해야 돼요.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이단이고 우리가 죄라 하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이단이란 뜻 이예요. 이단이란 하나님을 오해해서 믿은 거잖아요. 오해해서 믿었다는 것을 발각시킨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돼야 이게 신앙입니다. 잘못 믿은 것에 대해서 발각시켜 주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잘 믿는 게 뭐냐, 잘못 믿었다는 것을 아는 게 잘 믿는 거예요. 언약이란 것이 한쪽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게 언약이 아니고 항상 우리의 잘못을 항상 같이 들고 와서 비교시키는 게 언약이거든요. 아브람을 없애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과 아브람을 항상 비교시켜서 아브라함은 약속이 있고 아브람은 약속이 없는 상태인 것을 아브라함이 살아가면서 늘 비교해요. 아브람이 낳은 자식은 이스마엘이고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은 이삭입니다. 니가 니 육신이 낳은 자식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너에게 입양시킨 약속의 자식을 사랑하는지 ‘죽이라’ 하거든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입양한 자식을 죽입니다. 이걸 살려 주라 하면 하나님이 주신 자식을 사랑 하느냐 할 텐데 … 하나님은 사랑하는 방법이 반대가 돼요. ‘사랑하지?’ ‘예, 사랑합니다.’ ‘죽여’ 살인하라 이 말 이예요. 주의 명령대로 살인을 할 수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아닙니다. 이건 살인입니다.’ 이렇게 나와 버리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지가 자식을 쥐고 있는 것이지, 약속이 자기를 쥐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 어렵다 정말.

자식이 날 살리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이 아브라함을 살리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 자손을 살리는 게 아니고 남이 나를 살려요. 내 대신 죽으신 분이 나를 살리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좋아한다고 해서 ‘아이쿠, 고맙다.’ 해서 살려주는 게 아니고 ‘세상에, 이렇게 내가 어려울 때 숨겨줬으니까 내가 보답해 줄게.’ 이게 아니고, 주님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주님이 한 거예요. 우리는 주님이 저주 받으면 우리는 도망가 버립니다. 도망 안 가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내가 저주 받겠습니다.” 한 분이 도망 안 가시고 옴팡 저주 받으신 분이 도망쳐서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살리신 거예요. “이리 와, 이미 너는 살아났어.” 하고 찾아다니시는 것이 성령님 역사, 보혜사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어요. 찾아왔다니까요. 숨어있는데도. 그걸 뭐라고요? 선물!

아까 동영상 할 때 그거 했어요. 시몬이란 인간은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너는 돈 주고 사려고 했기 때문에 니는 반드시 망한다.’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설명했죠. 성령이 나타난다는 것은 너는 구원 받으려고 하는 그것만 보여주는 그것만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이 주어지는 그 현장 속에는 반드시 성령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는 자는 이런 식으로 반드시 망한다를 겸해서 같이 보여주는 그 현장이 성령의 역사에요. 이것도 질문하면 이렇게 답변할 거예요. 이렇게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 답변할 게 자꾸 생각나네요.

그래서 그러한 언약과 주체는 마지막 때가 되면 완전히 그 내막이 드러납니다. 이걸 ‘종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종말하면 늘 생각나는 게 뭐냐 하면 드라마 서울의 달, 거기에 종말이가 나와요. 『말씀을 거부하면 사람은 죽게 된다. 그 이유는 …』말씀 안에 뭐가 담겨있기 때문에? 종말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독 들은 캡슐, 건드려서 터트리는 거예요. 독이 들은 캡슐을 깨버리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면 뭐가 된다? 죽으리라. 이게 선악과 속에 껍데기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죠. 그러나 그것을 먹는 순간 안에 들은 독약을 먹은 거예요. 프로포폴 정도가 아닙니다. 그건 피부나 좋아지고 잠이나 오지, 이건 그게 아니고 선악과가 마약 성분이 있는 모양이라. 따먹고 난 뒤에는 오로지 선과 악만 집착을 하게 돼요. 악에서 도망쳐서 부지런히 선을 향하여 가는 것.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의 모든 소설과 신화와 춘향전, 심청전, 모든 전설과 그것은 바로 선악과에서 나온 겁니다. 모든 종교와 교리들.

어떻게 하면 선해질 수 있는지. 선한 선생님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선과 영생은 통하고 그리고 악은 저주와 통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틀렸습니다. 선악과 자체가 저주와 통합니다. 니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그 자체가 저주기 때문에 선, 악을 버리지 않는 한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율법은 니가 선악에 매어 있다는 것, 못 벗어난다는 것을 끊임없이 추궁해가기 위한 것 이예요.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의 구원, 영생, 생명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선물이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선물입니다. 제가 요한계시록 묻는 것에 대해서 선물을 듬뿍 5초 내에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답변한 것은 반드시 보관해서 어떤 답변을 했기에 그런 것도 나중에 십자가 마을에 올릴 겁니다. 질문과 답변으로 해서, 갑자기 일거리가 생겨요.

말씀을 거부하면 사람은 죽게 된다 하는 것은 사람이 새삼스럽게 죽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너는 죽어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계속해서 말씀이 지속적으로 유입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송유관 아시잖아요? 파이프라인이 계속 사막이라든지 가게 되면 파이프라인이 단단해서 안 터지는데 파이프라인이 중간에 만약에 누가 기름을 빼내기 위해서라든지 아니면 테러범들이, 나이지리아 같은 경우는 송유관을 폭파시키잖아요. 자, 송유관이 이렇게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막의 장소에서 폭발이 됐다 합시다. 이건 땅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폭발했을 때는 비로소 뭘 압니까? ‘아! 땅속에 뭐가 묻혀 있었구나.’ 하는 걸 알죠. 그 폭발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이 바깥은 뭐가 됩니까? 역사가 되는 거죠. 역사 속에는 역사 뿐 이예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아까 인간이 생각하는 자아와 주체가 시간에 따라서 중첩이 되면서 앞으로 진보, 전진, 또는 진화가 되는 겁니다. 진화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진화론이 퇴보라는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와서 양서류가 되고 양서류가 파충류가 되는 이것이 퇴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게 문제예요.

그래서 인간이 우주를 생각하는 자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덜 떨어진 가장 못난 존재, 가장 아이큐가 낮은 존재, 하나님을 아는데 가장 아둔하고 제일 무지막지한 인간들이 감히 무슨 논리를 편다? 진화론을 펴는 거예요. 그럴 입장도  못 되고 그런 주제도 못 되는데. 쓰레기가 명품을 비평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터져서 이 십자가 폭발한 사실을 전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고 그리고 사도들이고 사도 베드로였어요. 그리고 오늘날 복음을 아는 성도들이고 그런 겁니다. 요 지점에서 폭발했었다. 이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이러면 고 지점은 하나의 역사 속의 한 점밖에 안 돼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걸 통해서 전 송유관 전체를 다 처음부터 다 후벼 파는 거예요. 처음부터 태초 전부터 다 빼보니까 태초 전부터 예수 안에서 예정된 자만 구원받게 돼 있어요. 뭐로? 그리스도의 피로. 그러니까 창세전부터 예수의 피는 이미 거기에 있었던 거예요. 폭발하는 역사적 관점에서는 그 한 사건이지만. 그래서 이 송유관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 없이 돼 버려요. 송유관 폭발하기 이전에 많은 선지자들도 그렇게 죽었잖아요.

여러분, 가인을 한번 보세요. 가인이 제사 드렸습니다. 가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어떤 하나님이었기에 제물을 바치면 하나님이 응답을 한다는 그런 아이디어가 도대체 누구의 발상입니까? 하나님은 제물 바치면 좋아한다. 제가 한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한데 왜냐 하면 원래 그렇잖아요? 이런 식으로 다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송유관 터지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것을 안 받고 예수님만 받는다 말이죠. 기름만 받지 물은 안 받는다는 이 뜻 아닙니까? 송유관의 기름이 있으니까. 피가 다르니까. 얼마 전에 비가 왔잖아요. 비가 올 때 제가 윤 집사님이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어요. ‘목사님, 물방울이 다 핏방울로 보입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진짜 물방울이 핏방울로 보이는 거예요. 언제? 뭐든지 내 뜻대로 안 될 때. 내 뜻대로 돼 버리면 물방울이 그냥 물방울로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고 힘들게 할 때 물방울이 만약 핏방울이라면, 그러면 내 몸은 또 뭡니까? 주의 피로 만든 거죠. 결국 우리한테 이렇게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것은 주의 피에 동참하라는 이야깁니다. 니 주체파악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 이예요. 똑바로 하란 말 이예요. 피로 값 주고 샀다는 말이 분명히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나오는데 왜 우리는 그걸 실감을 못 느끼는지 주의 말씀이 오게 되면 주의 말씀이 우리한테 어떤 주께서 밀어주신 상황 속이 오게 되면 그 상황 안에서는 ‘아! 내가 온통 피로 범벅이 돼 있구나. 주의 피로 말미암아 오늘도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구나. 내가 죽어도 내가 지금 사라져도 영광이구나.’ 그런 고백. 이게 영적 싸움입니다. 마귀는 그걸 제일 싫어해요.

애들한테 설날에 ‘부모가 돼서 덕담 한번 해주세요. 며느리나 애들이 설날이라 한복 입고 왔는데 덕담 한 마디 해주세요.’ ‘그래, 그저 오늘 하루 살더라도 사라지더라도 고마운 줄 알아라. 며느리와 아기들아.’ 이렇게 나온다면 덕담 들으려다가 올 한해도 저주 받으라는 이야긴데. 세상이 핏빛으로 돼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가 왜 저주 받았습니까? 뭐를 놓쳤기 때문에? 주의 희생을 놓쳤기 때문에 다 저주 받고, 한 사람만 살았죠? 누굽니까? 롯, 그럼 롯은 ‘살았다.’ 합니까? 만약에 천사가 안 왔다면 어떻게 됐습니까? 자기도 똑같이 됐죠. 평소에 착한 것 소용없어요. 천사가 왔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천사를 보냈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언약이잖아요. 결국은 롯은 언약에 의해서 호출당한 새로운 주체예요. 그 새로운 주체가 뭐냐 하면 ‘나는 이미 죽음을 맘껏 품고 살아가는 제대로 죽은 자입니다.’ 죽음을 아니까 이 땅에서 제대로 죽은 자예요. 그러니까 롯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그냥 진작 죽어야 될 인간 이예요. 진작 죽어야 될 인간이 오늘 살다가 죽어도 이의 걸면 안 되죠? 하루치 산 게 어딘데. 꽃 피는 것 봤잖아요. 어제 죽었으면 그거 못 봤을 거예요. 오늘 계 돈 탔습니까? 어제 죽었으면 그 계 돈 못 탔을 거예요. 죽으면 소용없어요. 남들 다 좋은 일시키고. 그래서 자살하면 안 돼요. 내일 무슨 복이 있을지 모르니까.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해요. 자살하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무심한 남편은 술만 처먹고 그냥 누워있는 거예요. 남편이 술 먹고 자는 걸 보고 ‘아이구, 이런 집구석 살면 뭐하나.’하고 베란다에서 막 뛰어내리려고 하니까 부시럭, 부시럭 남편이 깨서 ‘야, 니 뭐하는데.’ 하면서 오거든요. 남편이 나를 떠밀까봐 겁나서 얼른 베란다 창문 닫고 살았다 안 합니까? 말 되죠. 개그 우면 이경애가 그런 소리를 해요. 자아가 선택해서 죽어야지, 남이 죽이는 건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죽는 게 목적이 아니고 폼 나게 죽는 게 목적이었던 겁니다. 자기 선택이 자기 자율에 의해서, 자기가 결정한 인생, 끝까지 죽든 살든 내 몸은 내 것이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그 포기하면 죽겠다는 거예요.

사실은 선지자들이 매일같이 그 일을 당했던 거예요. 선지자는 지가 죽고 싶어도 못 죽게 만들고 그 다음에 지가 살고 싶어도 더 이상 살지 말게 만들어요.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이의 걸었습니까? 처음부터 이 주체가 언약이 만들어 낸, 언약을 위하여 언약에 쓸모 있으라고 주께서 조성한 일에 주님이 주신 주체를 가지고 참여해서 내 대신 누가 돌아가셨다는 고백을, 복음을 선포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 속의 주체입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한 이야기에서 호명이었죠. 呼名(호명), 214 페이지 중간에 『말씀이 옛 인간을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토해내면 된다. 이런 취지의 말씀이 다니엘에게 주어졌다. “인자(人子)야” 라고 호명되면서 제공된다. 호명이란 호명 받은 자가 호명한 자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적 의미를 갖는 관계를 말한다. 4)』뒤에 4)는 관주니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뒤에 258페이지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4) 다니엘 드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원주민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름이 없어요. 왜 이름이 없을까요? 그러니까 남이 없죠. 그래서 이름이 필요가 없죠.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가 난파선에 밀려오다 보니까 하나가 아니고 몇 명입니까? 둘 됐죠. 그러니까 인간은 사실은 하나님이 없으면 이름이 없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주님이 계시고 주님으로부터 호명을 당할 때 비로소 새 이름을 부여합니다. 그게 뭐냐, 주의 이름 이예요.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주의 것으로 호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이름이 뭐냐, 흰 돌에 이름을 새기죠. 주의 것!! 이름은 크리스챤,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게 야곱이 됐던 이삭이 됐던 아브라함, 베드로가 됐던 전부 다 그리스도의 것 이예요. 그래서 이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한테는 그 영광성에 대해서는 차등이 없습니다.

영광성이 차등이 없는 이유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석들이 나오잖아요. 보석들이 각 가지 있지만 어느 보석이 어느 보석보다 더 낫고 못하고 하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보석의 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보석 되게 하셨느냐 한 그 주인 되시는 분이 동일한 것 같으면 그 동일한 분에 의해서 영광 받으면 다 같이 동일한 광채를 지니게 돼 있어요. 손이 발보고 쓸데없다 하면 그러면 그 손과 발은 어느 몸체에 달려있는데 지가 지 맘대로 건방지게 쓸데없다 그래요? ‘어이, 발, 떨어져.‘ ’니는?‘ 자기가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몸체에 붙어있듯이 붙어있으면 다 똑같은 거예요. 붙어 있으면 다 귀한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복음만 전해야 돼요. 누가 질문했다는 건 의미 없습니다. 복음만 전해야 돼요. 그래야 성도인지, 아닌지가 구분됩니다.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다니는 곳도 아니에요. 교회는 그냥 만들어져 있고 그냥 있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 되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고 출석하는 게 아니고 전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교회되기 위해서는 성령이 반드시 매일같이 성령께서 주관해줘야 됩니다.

호명, 원주민을 Friday,라 했는데, Friday 라는 것은 금요일을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원래 호주에 캥거루가 있잖아요. 캥거루가 왜 생겼느냐 하면 처음에 원주민하고 이야기가 안 되니까 ‘저게 뭐죠?’ 하고 영국 사람이 물었어요. 그러니까 그 원주민들이 답변을 한다는 게 뭐죠, 라는 뜻은 모르니까 ‘뭘 원하시죠?’ 하면서 물은 것이 캥거루입니다. ‘우리에게 뭘 원하십니까?’ 가 된 거예요.

그래서 질문하는 사람이 엉뚱하게 질문해 놓고 답변은 지가 지 맘대로 지 입맛에 맞게 ‘아, 캥거루구나.’ 그 다음부터 캥거루 됐답니다. 이것은 답변이라 하는 것은 이미 질문자 속에 답변이 이미 합류돼 있다는 뜻 이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질문할 때는 답변을 얻기 위함이 아니고, 니는 일방적으로 내가 계획한 대로 니는 만들어질 뿐이다. 이런 뜻 이예요. 성경에도 나오죠. ‘이게 뭡니까?’ 한 게 만나가 된 거죠. 주님과의 관계는 이렇게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든지 간에 그 질문도 우리 운명의 일부로서 포함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우리가 질문하는 것은 더 죄 짓기 위해서 질문하는 거거든요. ‘알아서 뭐하는데?’ ‘주여 누구십니까?’ ‘알아서 뭐 할 건데?’ 주님께서 알려준다고 그 다음부터 일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미 주께서 계시 했잖아요. ‘실례하지만 누구십니까?’ ‘시키는 대로 해, 까불지 말고.’ 하지만 ‘누구십니까’를 포함시켜 버리는 거예요. ‘나는 주님이 누구십니까’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라는 식으로 앞으로 계속 일을 하는 거예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 금요일이라는 원주민 주체 입장에서는 아무 의미 없지만, 그걸 호명한 로빈슨 크루소 입장에서는 이건 놓칠 수 없는 인물이 되는 겁니다. 왜, 자기가 이름을 붙여줬으니까. 아담에게 처음에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 뭡니까? 이름 짓는 거죠. 이름을 짓는데 그 이름 속에는 누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여자가 없어요. 그럼 여자 이름은? 남자가 짓는 게 아니고 누가 짓는 거예요? 하나님이 짓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는 여호와를 옆에 두고 있는 셈이 되는 거죠. 여자의 후손이 남자를 살려내요.

여기서 좀 더 어려운 이야기 해봅시다. 아까 어떤 분이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다 이야기했죠. 그러면 여러분 질문 하나 합시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했을 때 예수님이 마리아를 대신해서 예수님 자신이 임신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마리아를 대신했다면, 지금 예수님이 모든 걸 대신했잖아요. 우리 대신, 마리아 대신, 요셉 대신. 그러면 마리아 대신 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잖아요? 그걸 잉태된 그분이 마리아 자리에서 자기가 자기를 임신할 수 있느냐? 이 질문을 하는 거예요. 대신했으면 일괄적으로 다 대신해야지, 누구는 빼놓고, 마리아는 죄 있으면 안 되잖아요. 답변하기 힘들죠. 그럴 때는 뭐냐 하면 언약대로 대신한다. 언약대로!

그러니까 내가 키가 크고 싶다. 주께서 대신 키 키워주면 좋겠다. 이렇게 만약 된다면 키 작은 내가 뭐가 돼요? 키 큰 나에게 뭐가 도입됐다? 언약이 되죠. 언약은 나 좋으라고 있는 게 아니고 언약을 주신 분 위해서 언약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임신한 자체가 이미 예수님이 마리아를 대신한 셈이 돼 버려요. 마리아를 통해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기 때문에. ‘니는 나를 낳아라.’ 이 말입니다. 말씀 자체가 언약 이예요. 말씀이 임하매 마리아가 임신 했잖아요. 그 자체가 이미 마리아를 예수님이 대신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내 숙제 있는데 대신 해주세요.’ 이게 아니고 ‘예수님 내 숙제 힘들어 죽겠다. 내 대신 해주세요.’라는 되도 않은 죄를 발현하는 요것도 이미 주님께서 대신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 만들기 위한 작업을 개시한 거예요. 그래서 항상 우리는 싸가지 없는 요구만 자꾸만 해대요. 그런데 그것마저 주의 대신하심을 염두에 두고 그런 싸가지가 싸가지로 그렇게 입에서 발설이 되는 겁니다.

이건 진도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진도 나간다고 하늘의 별 따주는 것도 아니고, 졸업식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 이뤘는데. 다 이룬 셈에서 보세요. 베드로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우리 이름은 안 지어줍니까? 그 당시 아브람은 아브라함 되게 하고 좋잖아요.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고, 폼 나잖아요. 그런데 우리 이름은 왜 안 해주는데? 사무엘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름 다 지어버리고 세례요한도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가 벙어리가 돼서 지었는데 왜 우리는 그런 이벤트를 왜 안 해줍니까? 이게 이름이라 하는 것은 그냥 그 사람 좋으라고 붙이는 것이 아니고 언약과 동반해서 이름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 이름은 그 언약의 내용물을 보여주게 돼 있어요. 그 시대의 언약의 내용물.

지금의 언약은 뭐냐 하면 십자가 아닙니까? 피! 살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는 어떤 이름을 지어도 죽어야 될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 바꾼다는 자체가 의미가 없죠. 안 죽는 이름은 부활하신 이름, 주님 이름밖에 없죠. 그래서 니 이름 부르지 말고 누구 이름 불러라? 주의 이름 불러라 이 말이죠. 그게 니 이름이다 말이죠. 우리는 주님 몸의 지체니까. 자꾸 자기 생각하지 말고, ‘내 몸이 어떻게 영속되느냐, 내 몸은 계속 버티느냐.’ 그런 것 생각하지 말라 이 말이죠.

새 언약에는 새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몸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이름도 새 언약에 부합되는 이름이 돼야 된다 이 말이죠. ‘나는 나의 이름을 믿지 않겠습니다. 주의 이름만 믿습니다.’ 하는 게 우리에게 합당한 우리 이름이 되는 거예요. 이름 줘 놓고 스스로 이름을 부인하게 만드는 이름, 그 이름을 왜 바꿉니까? 삼순이에서 희진이로 바꿔야 소용없어요. 희진이로 바꿔야 소용없다니까. ‘삼순아, 희진아’ 소용없어요. 희진이도 죽을 이름이고, 삼순이도 죽을 이름인데 이름 바꿔봐야 무슨 별 따는 것도 아니고 그 이름을 왜 바꿔요? 물론 사회적인 주체 때문에 이름이 삼순이란 이름은 바꿀 만해요.

그 다음에 214페이지로 돌아와서 『이는 인간들이 ‘본래의 것’이라고 여긴 것이 실은 ‘비 본래적 선택행위’를 그동안 발휘해 왔음을 비로소 지적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호명이 일어나면 이는 곧 ‘박탈의 장’ 곧 주체의 공터를 발생시키는 사건이 되고 이 무(無)는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 숨어있는 바를 배태하고 터져 나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말은 어려운데 이걸 쉽게 하면 창조라 하는 것이 반드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자신을 폭발시켜 버립니다. 송유관 폭발하듯이 폭발시켜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없음 때문에 있어야 되고, 우리는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돼요. 참 말도 어렵다.ㅎ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우리는 죽지 않아야 돼요. 매일같이 살려냄을 당해야 돼요. 그리고 우리는 없음을 위하여 있어야 되고. 있음에서 없음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 있음은 한번 있는 인간은 영원히 있어요.

제가 지난 주 설교 했죠? 때려 죽여도 우리는 안 죽는다고. 참, 골칫거리에요. 신천지 그렇게 소리해도 신천지 결국 안 죽습니다. 신천지만 빼면 돼요. 그냥 사람이라니까. 합동 측 통합 측 그냥 다 빼버립시다. 전부 다 죄인만 있는 거예요. 누가 구원받느냐, 누가 의인되느냐, 하는 것은 성령을 선물로 주셔야 되고 성령을 선물로 주게 되면, 누가 내 대신 돌아가신 것만 고백하게 돼 있어요. 너무나 공평합니다. 왜, 다 죄인이기 때문에. 공평하기 위해서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하시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공평이 우리 인간의 공평이 아니고, 사랑할 자는 사랑해 버리고, 미워할 자는 미워함으로써 공평을 이루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끼리 이단이고 삼단이고 그 따위 소리는 주님 앞에 안 통합니다. 그건 너희들이 정한 거고, 누가 복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느냐. 참 그거 보면 교회 교단 이것이 자기 패거리가 이게 얼마나 큰 장애되는지 모르겠어요.

10분 쉬고 합시다.
 이한례(IP:203.♡.42.222) 13-03-26 18:48 
가락교회-70이레 논문(언약과 주체)130314-15강b -이 근호 목사

제 15강b

첫째 시간 잠시 요약해 보면 예수님이 주체 자거든요. 예수님이 주체 자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체 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이 주어지는데 인간이 언약을 곱게 받는 것이 아니고 지가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 이미 주체가 나름대로 정립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을 주의 사람 만들려면 자동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충돌이 일어나는데 예를 들면 창세기 4장에서 가인에게 동생이 욕을 안 했거든요. ‘얼레리 꼴레리 형 제사는 안 받고.’ 이렇게 놀린 게 아니고 그냥 동생은 자기 제사 드린 것뿐인데 형이 때려 죽였을 경우에는 이건 동생이 형을 치는 게 아니고, 눈 뭉쳐서 한번 때리니까 형이 두 번 맞는 게 아니고, 동생을 죽이게 만드는 그 주체가 따로 있었던 거예요. 그걸 창세기 4장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가인한테는 강아지처럼 죄가 엎드러져 있다고 돼 있습니다. ‘덮친다. 덮친다. 덮친다. 덮친다. 덮쳤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가인도 지 맘대로 못해요. 죄가 시키는 대로, 그걸 가인이 했다고 보지 말고 가인을 덮친 죄가 아벨을 죽인 거니까 결국 하나님은 아벨을 죽게 만들어서 가인 배후에 가인으로 하여금 주체 자로 만든 배후에 숨어있는 실체를 장차 올 예수님의 죽으심과 겨냥해서 비교한 겁니다. 그냥 아벨만 그만 살다 간 거예요. 그 와중에서 아벨만 그냥 낀 거예요.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그냥 쉼이고 영생 아닙니까? 이 땅에서 별로 고생도 안 하고 죽었어요. 우리 보기에는 너무 얄미워! 회사 부도도 한번 안당하고 그냥 가버렸어요. 북한이 핵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가버렸어요. 아이 참.ㅎ

그러니 이 둘째 시간에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의 주체되기 위해서는 껄끄럽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껄끄러운데 우리의 주체라는 것이 일단 세상이 나를 이렇게 불러주면 우리는 그걸 간직하잖아요. 그러면 그게 뭐다? 죄다 했죠. 왜,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셨다는 말은 우리가 죄인이니까. 그냥 죄라 하지 말고 이미 죄에 물든 주체라고 봅시다. 이 죄 있는 주체가 이 주체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서 내 주체를 부정하는 모든 것들은 적으로 간주하겠죠. 그러니까 우리 속에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빡세게 기도하고 기도 빨이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착하면 복주고 나쁜 짓하면 저주 받는다는 이런 식의 그것을 우리는 때려죽여도 이걸 양보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양보 못한다고 해도 ‘아유, 너는 구원하고 싶은데, 나는 니가 너무 고집부리니까 포기할게.’ 이런 분은 아니시거든요. 그러니까 호명이라 하는 것은 그 호명된 이름은 그 사람의 지가 생각한 주체와는 안 맞는 거지만 기어이 호명한 주체 자의 승리로 끝나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반드시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못 이긴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면서 ‘그러니까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 다음에 계속 봅시다. 214페이지 밑에서 둘째 줄 『구약 성경에서 이런 기존 주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말씀 주체 자로서의 이전 과정을, ‘이름’을 통해서 밝힌다.』이렇게 돼 있죠. 그 이름을 구약 성경에서는 무슨 이름이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라 했죠. 아, 난해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우리가 생각한 이름은 뭐냐 하면 가슴에 붙인 이름이잖아요. 현철이 이야기했죠? 이름을 붙여 누구 가슴에? 내 가슴에, 확실한 도장을 찍고, 그런 노래 있거든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붙이고 다니는 게 이름 이예요. 명찰처럼 이름을 붙이고 다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라고요? 그러면 하나님이 가슴팍이 있다는 말이고, 거기에 이름이 적혔다는 말이고, 나를 부를 때는 요 이름을 부르면 내가 쪼르륵 쫓아갈게. 라는 식이 되겠죠.

그런데 정작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정작 어떤 이름표를 붙여, 내 가슴에 확실한 도장을 찍고, 그렇게 나타나는 게 아니고, 기존에 있던 이스라엘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바꾸기 위한 환경조성이 벌어지게 하는 어떤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힘, 그러니까 그 이름은 글자보고 부르는 게 아니고 달라진 변화 보고 순간적으로 ‘이거 주의 이름이 했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일부러 내 뜻 안 되게 했죠?’ 라고 할 때 그 이름 이예요.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의 이름이 뭐다? 예수? 여호와? 이렇게 부르면 그건 엉터리예요. 왜냐 하면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지저스(jesus)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모든 만국의 주의 이름은 뭐냐 하면 ‘주여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옵소서.’ 요게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자, 서울 용산에 개발한다 해서 땅 좀 사놓고 아파트 사고 개발되면 땅 값 오를 거니까 은행에서 3억 5천정도 융자내서 샀다. 그런데 개발이 파투났죠? 안 됐잖아요. 그럼 은행 빚 이자는 나오죠. 이젠 망했잖아요. 그때 뭐합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거 배후에서 누가 이렇게 했습니까? 생돈 퇴직금 받은 것도 다 날렸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이거 누가 일으켰어요? 이거 주님이 이름이 했죠. 라고 할 때 ‘주님 이름이 하셨죠?’ 라고 할 때 그 발설하는 그 인간이 주의 이름과 함께 있는 자예요.

제가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낮에는 이사하고 밤에는 포로 잡혀 간다고. 분명히 은혜의 땅에서 벗어나서 저주의 땅으로 도망치면서 마치 룻 같아요. 룻이 가뭄 들었다고 어디를 갑니까? 은혜의 땅, 약속의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요? 모압 땅으로 가죠.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어서 못사니까 어디로 갑니까?  몰래 은혜의 땅에서 저주의 땅으로 이사 가는데 그것을 주께서 뭐로 바꿉니까? 포로 잡혀 가는 걸로 바꾼 그것이 기존에 니가 몰랐던 주의 이름이 벌리신 일입니다.

사실은 도망가든 이사 가든 다를 게 없어요. 왜냐 처참하게 망가지니까. 처참하게 망가져도 생명을 주기 위한 망가짐과 진짜 망가져서 망가짐과 그건 주의 이름에 의해서 결정될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폼 낸다고 영생 가고 폼 낸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의미를 우리는 새롭게 부여받게 돼 있어요. ‘주께서 하셨죠? 내 인생 내가 아니라고. 주께서 일부러 돈 3억 5천 홀랑 다 날렸죠?’ 서민에게 3억 5천 그거 큰돈입니다. 용산 이촌동 그 사람 피해 본 게 3억 5천이예요. 융자 낸 것 같아요. 3억 5천을. 융자를 왜 냈느냐, 은행에서 그만한 가치를 보장해 주니까 융자 낸 거예요. 왜 이런 횡재인가 했죠. 왜, 융자 내서 그거 가지고 다른 집 사서 또 전세 받으면 월세를 100만원 받을 수 있으니까. 융자 내주겠다는데 그거 놀리면 안 되죠. 개발할 동안에 월세 받으면 되니까. 그런 머리는 육적인 모든 인간들은 공통적으로 돌아가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복음은 육적인 인간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 된다니까요. ‘여러분들이 복 받아서 3억 5천 융자 받았으니까 이건 복입니다.’ 이런 소리 하니까 다 알아듣죠. ‘그런데 여러분, 그거 다 망하게 하십니다.’ 하면 그런 것은 아무도 듣고 싶지 않죠. 그래서 주의 이름은 항상 평상시에 몸 건강할 때 잘 돌아갈 때는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든지 잘 먹고 잘 살 때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바알의 이름을 불러요. 바알은 곡식의 신입니다. 바알과 모토 해서 바알이 이기니 모토가 이기니 하다가 다시 바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모토를 경유해서 부활의 신이니… 이런 우가리트 신화에 보면 나오는데 바알, 엘이 나와요. 뭐의 아들이 뭐고, 나오는데 지역마다 다르니까 폭풍의 신이라고 하는데도 있고 또 같은 이름 바알을 쓰면서도 폭풍의 신이라 하는데도 있고 곡물의 신이라 하는데, 바알을 섬길 수밖에 없는 이것은 용산 개발된다는 소식은 바알이 전해준 거예요. 왜, 납득이 되니까. 이제 아시겠어요? 사람이 납득이 되니까 우리 편이고 납득이 안 되면 적이 되는 거예요. 선지자들이 고생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언약을 지키세요. 여러분이 주의 이름으로 왔지, 여러분 이름이 잘 되기 위해서 온 게 아니다.‘라고 그렇게 외쳤고 ’아무리 여러분들이 잘 나가도 주의 법을 어기면 이건 저주입니다. 이방 나라와 같습니다.‘라고 아무리 해도 안 듣습니다. 들을 인간이 들어야지, 사람이 몸 따시고 몸 편하면 최고예요. 이빨 아파 보세요. 지 이빨 아픈데 그 주의 이름을 불러서 주의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 편하게 해달라는 이름의 주의 이름이라니까요.

그래서 치과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고. 아플 때는 그렇게 치료 받기를 기대하지만 낫고 난 뒤에는 두 번 다시 오는가 봐라. 왜, 건강하니까 더 이상 주의 이름이 필요 있다? 없다? 없어요. 필요하도록 내게 있는 이것을 키워주는, 내 이름을 키워주는 주의 이름인데 이건 인간의 언약의 주체가 부합이 안 되게 돼 있어요. 왜 언약의 실체가 십자가기 때문에. 마태복음 16장 23절에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 하는 게 있거든요. 십자가 내용 안에 반드시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자기가 구원코자 한다면 그 다음에 잃어버릴 것이요, 지금 한국의 교인들 전부 다 잃어버렸어요. 왜냐, 구원받으려고 교회 오니까. “자기를 구원코자 하면 잃어버릴 것이요, 나(예수)를 위하여 자기를 잃으면 얻으리라“ 돼 있거든요.

우리는 주님을 이용 목적으로 내가 얻고자 이용 목적이지, ‘내 것을 뺏어주세요.’라고 예수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다 빼앗기고 자시고 할 것이 없이 이미 주님께서 전부 다 압류 다 당했어요. 요만한 빨간 딱지를 TV에나 다 붙여놔 버렸어요. 다 빼앗았기 때문에 구차 없이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게 사사기에 되풀이되는 반복되는 역사예요. 아무것도 개뿔도 없으니까 그제사 “천부여! 어서 오시옵소서.” 노래 부르면서 그냥 부르는 게 아니고 몸을 흔들어 가면서 부르면서 와서 ‘이번만 해결해 주시면 그동안 못 다 드린 십일조 다 하겠습니다.’ 아니 갑자기 십일조 이야기를 왜 또 당할 때 합니까? 전에 이야기했죠. 십일조 하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자다 깨어나도 죽었다 깨어나도 못 지킨다는 뜻 이예요. 지킬 수가 없다는 뜻인데 갑자기 십일조는 그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느냐, 내 것 뺏어가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차라리 그게 위기가 기회인 줄 모르고!

간단한 문제예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망했죠? 정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백성이죠? 망합니다. 왜, 구약에서 이미 보여줬잖아요. 그 과정 포기 안 합니다. 그 코스 포기 안 해요. 사람이 망하지 않으면 주의 이름 제대로 안 부르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들 주부들이 바닷가에서 잡은 통(물)오징어 살 때 어떻게 합니까? 칼 가지고 절개하죠. 팍 하고 먹물 터지죠. 매끈한 피부 있잖아요. 그걸 감히 주부들은 그걸 사정없이 잘라버리죠. 우리 어머니 같은 경우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버려요. 그러니까 그거 절개할 때 안에 먹물이 터져 나오죠. 그때 내가 되기 싫은 ‘안 돼, 절대로 이러면 안 돼.’라는 걸 먹물로 포함시키는데 주께서는 그 멍 물을 바깥으로 보여 내시는 그 능력은 우리 힘으로 못 합니다. 아파서 못 해요. 자기가 지 피부를 아파서 못해요.

그런데 애들 이빨 뽑듯이 그냥 확, 문고리 잡아당기듯이 뽑듯이 그냥 절개해서 사정없이 할 때 위기가 기회였습니다. 살았습니다. 살은 거예요. 수술해야 됩니다. 눕혀 놓고 수술해야 돼요. 묶어놓고 잘라야 돼요. 해서 안에 있는 먹물 터져야 돼요. 먹물이 매끈한 비비크림 발랐던 피부에 먹물이 도배하듯이 흘러서 이제는 내 매끈한 피부는 잊어야 돼요. 프로포폴 맞아도 소용없어요. 완전히 맞아도 나중에 검찰에 구속되니까. 완전히 뒤집어 써야 돼요.

차라리 이 딱딱한 거 하다가 여러분들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어떤 가정이 있는 남자가 자기가 은행원이라고 사기를 쳤는지, 가짜로 돈 주고 결혼식 때 일회용 하객들을 사서 결혼을 해놓고 순진한 여자는 살림 살면서 돈 받아가지고, 그러니 남자가 얼마나 훌륭해요? 그 돈으로 본처한테 생활비 300만원씩 보냈어요. 그래서 본처가 와서 어떻게 사나 보니까 결혼식하고 난리나 버렸어요. 두 여자가 다 놀랬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은 자꾸 가짜를 선망한다는 거예요. 은행원, 변호사, 은행원 되기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요? 우리교회 아는 사람이 국민은행 시험 쳤는데 안 됐다 하는데 500대 1인가, 얼마나 힘들어요? 변호사는 공부 이만큼 두꺼운 책을 시험 보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지 힘든 건 안 하고 남 되는 건 되고 싶은 거라.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새로운 주체로 바꾸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지가 되고 싶은 선망하는 주체, 그것만 되면 돈 많은 여자들이 들끓는 그런 주체, 그건 주의 이름이 아니고 누구 이름? 내 이름인데, 그런 내 이름을 위해서 우리는 뭘 도용합니까? 교회 와서 기도할 때 무슨 이름을 부른다? 세상에 주의 이름을 부르니 주의 이름이 그걸 호응하겠어요? 택한 백성 같으면 그 모든 기대를 와르르 다 무너뜨리죠. 부숴버리죠. 그 위기가 뭐다? 기회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BC586년에 망하잖아요. 그들이 기뻐해야 됩니다. 그리고 주께서 ‘내가 너희를 포로 잡혀 가는 가운데 나도 합류할게.’ 이게 뭐냐 하면 망하게 하시고 그들 속에 합류하셔서 이제 제대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뭐하다? 구원을 얻으리라. 그 주의 이름을 부르기가 그렇게 얼마나 힘들어요? 기적입니다. 주의 이름을 제대로 진정성 있게 부른다는 게. ‘내 이름 부르면 나는 망합니다.’는 뜻 이예요. 내 뜻대로 하면 필히 망합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 주께서는 빈틈없이 차질 없이 일하세요? 왜냐 하면 사람이 ‘이쯤 되면 주의 이름 부를 건데.’ 라는 예상을 비껴가서 해버려요. 왜냐 하면 주의 이름을 우리가 부르겠다는 것은 노림수가 있다니까요.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주의 이름이 잘했다고 복 주고 복도 챙기고 구원도 챙기고, 오~! 괜찮네. 주의 이름 불러야지.’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주의 이름 부르는데 니가 부르는 주의 이름은 다 니 이름이지 주의 이름이 아니에요. 이름표를 붙여, 여호와를, 백날 여호와, 예수, 불러봐야 주의 이름 부르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이름 부르려면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는, 나라가 망하는 과정과 더불어서 우리에게 덮 치는 거예요. 덮칠 때 안 불러야 안부를 수 없게 만들면서 튀어나오는 것이 주의 이름 이예요. 그러니까 그 주의 이름은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야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는 그 말이 그 말 이예요. 그리고 주께서는 우리를 아예 약을 올려요. ‘이게 너의 선물이다.’

무슨 선물이 그런 선물이 있어요? 퇴직금 3억 5천 다 날리는 그런 선물이 다 있어요? 완전히 돈의 족쇄가 됐는데, 돈을 안 빌렸으면 몰라도. 3억 5천 받을 때는 굉장히 희망이 부풀었었지, 이걸로 아파트 사서 전세 받으면 100만원 받는다. 얼마나 부풀었어요? 그러면 애들한테 돈 의지 안하고 내 여생은 끝났다. 행복하다. 끝났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거 보고 박근혜 찍어줬는데 정부는 개입 안 한다 하니 끝나 버렸어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납득이 안 됩니다. 우리는 내 이름에서 내 욕망에서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항상 주의 이름을 그냥 좋은 관계로 하면 납득이 안 돼요. 그러나 우리가 직접 손 대고 아까 절개해서 폭파 시키면 이건 납득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지금 자기 것이 날라 가 버렸는데 무슨 그게 자기하고 의논한 게 아니잖아요. ‘얘, 이제부터 니 재산 날리니까 괜찮지?’ 이렇게 의논한 게 아니라고요. 우리는 몸부림쳤어요. 그런 사회가 오지 않기를. 제발 부탁하오니 이것만은 손대지 말라고. ‘사랑하는 내 자식입니다. 사랑하는 내 딸입니다. 이것만큼은 주께서 손대면 안 됩니다. 그럼 섭섭합니다.’라고 우리는 발악을 했다고요.

그게 기회인줄, 그 위기가 기회인줄 상상도 못했어요. 남은 몰라요. 아픔을, 내 인생이 감당이 안 되니까 주께서 하는 말이 ‘니가 왜 니것도 아닌데 감당을 하려는 그게 잘못이잖아.’ ‘주여!’ 감당하려는 이게 죄인 줄 처음으로 안 거예요. 이게 우리 뜻대로 안 될 때 이게 처음으로 오는 거예요. ‘주여! 회개합니다. 감당도 안 되는 일을 건방떨면서 감당하면서 내 인생 이렇게 신앙생활 잘해서 복 받았다는 그거 남한테 과시하려고 이렇게 멋진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살아왔던 그것이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 대신 죽으심을 모독하는 짓인지를 우리는 몸부림치면서 후회합니다. 진짜 ’미워, 미워, 미워‘ 누가? 내가 미워, 말씀이 성취된 거예요.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생명을 얻었다.” 이런 느낌 몇 초 가지도 않아요. 또 슬슬 바람이 또 하거든요. 어떻게 빚은 갚아질까 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주의 이름은 우리가 부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의 이름을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그것은 그냥 집어넣는 게 아니고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 사건은 나의 이름을 박살내는 교체되는 사건으로 주의 이름이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목사님, 현재 우리 집이 홀랑 타야 됩니까? 불타도 내가 불 지르면 안 돼요. 우리는 방화범 됩니다. 내가 불 지르지 말고 그저 불나야 되는데 집에 가니 불 안 났거든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불내고 안 내고 니가 선택해서 내가 이런 짓하면 비참할 거야, 비참을 니가 만들지 마라, 니가 뭔데 니 비참을 니가 만들어요, 비참 안 돼도 우리는 비참한 존재인데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면 한 달 수입이 1500만원이고 땅이 2만 5천 평이고 그것도 비참 이예요. 아이쿠, 미장원에 가서 머리해도 머리 모양도 안 나오고 미치겠네. 이게 비참 이예요. 프로포폴 100번 맞아도 맞을 때뿐이고 인기 다 떨어져 버리고 이게 얼마나 비참합니까? 가만히 있어도 늙어가니까, 비참에 대해서 너무 당겨서 걱정하지 마시고 사시면 머리 빠지고 비참해져요.

아까 전도서 할 때 했잖아요. 별도 떨어지고 달도 안 보이고 이게 뭡니까? 눈이 어둡다는 뜻이거든요.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스케줄 따라 비참하게 해줄 테니까 니가 알아서 비참하게 술 먹고 맞아서 얻어터지고 해서 그런 비참 말고 가만있어도 머리 흰 머리 나게 돼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 과정이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스라엘 역사, 출애굽할 때 신났습니다. 멋있었습니다.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망했습니다. 망하고 게임오버 끝나버리고 진짜 숨어있던 주의 이름으로 일을 벌렸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실은 너희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관계없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사도행전 2장에서 하죠. 그 앞에 나온 걸 봐야 돼요. 이 대목에서 꼭 봐야 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21절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나오죠? 자,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엇의 연장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맨 정신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홀려야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주의 이름이다? 영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주의 이름이죠. 그걸 흉내 내서 옆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그러니까 성령을 받아 버리면 성령 받은 사람이 뭡니까? 이것은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본인이 주의 이름 부르면서 남한테 증거 하겠죠. 주의 이름 부를 때 이건 나는 미친 거야, 이게 바로 주께서 허락하신 주의 이름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 부르면 내게 복 올 거다.‘ 이런 식으로 부르는 주의 이름은 성령 없는 주의 이름 이예요. 이게 언약의 위력입니다. 언약은 안 죽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의 육신만 챙기는 순간이라도 언약은 죽지 않았어요.

그리고 언약이 왔다고도 할 수 있지만 주의 이름이 나를 관장합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대로. 그러면 우리는 주의 이름에 의해서 숨겨지는 먹물 통이 어떻게 됩니까? 통 오징어 안에 있는 먹물 통을 그대로 쏟아내면서 하루하루 일과를 보내게 되겠죠. 그때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구약 사람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짜장면 먹고 싶다. 피자 먹고 싶다.‘ 하는 그 이야기가 인간은 자기 육체를 자기가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어쩌면 미리 우리 앞에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죠. 뭡니까? 그렇게 못 돼 먹고 자기 밖에 모르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는데 주의 이름은 떠났어요? 안 떠났어요? 안 떠났죠. 야!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너희들이 성질이 곧고 곧아서가 아니라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고 너희들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맹세를 이루는 차원에서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신명기 9장에 나오는 말씀 이예요.

자, 그 다음에 봅시다. 『노아 언약으로 형성된 땅의 질서』여기 보면 그 앞에 갑자기 왜 노아 언약이 나옵니까? 지금 계속 주의 이름은 무슨 원칙에 따랐다? 언약 따라 왔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백성이죠.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나님인 줄 오해한 거예요. 언약이 뭔지 모르니까. 언약은 따로 상 차려다 주는 것이 아니고 언약은 쑤시면서 먹물 튀기면서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 그것을 사용해서 언약을 사용하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더라도 그건 지 생각이고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주의 이름이 없는 언약 없는 백성을 일방적으로 이기게 하는 겁니다. 심지어 목이 곧은 백성을 가지고 같이 목이 교만한 백성을 승리케 하는 것은 모든 공로를 누가 가져가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갖고자 하는 일입니다. 이게 언약의 취지에요.

그러니 그냥 사세요. 사시면 주께서 선물로 살아가는 것도 선물이고 주께서 시도 때도 없이 우리에게 주의 일에 니가 참여돼 있지, 니 일은 따로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물론 인간이 기대하겠죠. 하지만 그거 말짱 소용없는 짓이죠.

그러면 왜 노아 언약이 왜 나오느냐. 여기 노아 언약을 언급한 이유가 심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내가 노아 언약을 언급한 거예요. 우리가 생각할 때 노아 언약이라 하는 것은 심판받았다가 구원 받았다. 그러니까 우리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심판은 한 때 있었는데 지금은 뭐다? 지금은 지나갔어. 어쨌든 지금은 구원 받았잖아. 신난다. 이것만 챙기잖아요. 그런데 그것만 챙기면 어린양을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분명히 심판은 물로 심판이잖아요. 요 이야기는 어렵지 않아요. 잘 들어보세요. 물로 심판했죠. 그러면 하늘에서 비 안 오면 심판 끝났어요? 안 끝났어요? 끝났잖아요. 물로 심판한다면서요? 물로 심판하는데 물이 끊어졌으면 심판 받은 거예요? 안 받은 거예요? 심판은 끝났잖아요. 그런데 그게 노아 홍수의 취지였습니까? 아니죠. 끝나고 난 뒤에 정결한 짐승을 잡아버리죠. 그러면 심판은 끝난 게 아니고 '심판은 살아있네.‘ 하는 말처럼 심판은 살아있는 거예요. 그 뒤의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심판 받을 정도로 악하지만 이 제물을 보고 너를 저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심판을 잊어버리고 싶은 거예요. 왜냐 하면 더 이상 심판 받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우리 안에다 뭘? 칩을 넣어버리는 거예요. “니는 지금이라도 물 심판 받아야 되는데 지금 물 심판 안 받는 이유는 니 속에 들어있는 희생양 때문에 살았다.”라는 것을 심어줄 때 그 사람은 언약의 사람이 됩니다. 언약의 사람이 되면서 언약을 우리가 소지하느냐? NO, 주의 이름이 우리를 장악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우리는 가게 되면 뭐가 나오겠어요? 자꾸 주의 이름이 멈추지 않고 주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사용하고 우리는 또 한 고집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내 이름을 또 우기게 되고 우리는 평생 뭐든지 내 맘대로 되는 게 없어요.

예를 들어서 한 목사님이 나한테 ‘목사님, 이거 용돈 쓰이죠, 20억인데 쓰세요.’ 할 때 우리는 기분 나쁜 이유가 있어요. 먼저 20억을 달라고 해야 받을 때 기분 좋아요. 그런데 안 달라고 했는데 20억을 줘버리면 이게 무슨 용산 개발 같이 ‘목사님, 그 계약서 안 썼죠?’ 분명히 이자 쳐서 달라고 한 건데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왜 세상 일이 내 계획 안 된 좋든 나쁘든 그건 나중 문제고 왜 내가 한 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이 말입니다. 내 계획을! 기분 더럽죠. 그런데 그게 위기잖아요. 이 위기가 기회라니까! 그렇게 위기 받으면서 그게 주께 영광이라. 주님 지독하십니다. 뭐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요.

그래서 실제는 이렇습니다. 애보고 ‘얘, 딸아 연속극 보지 말고 공부해라’ 하잖아요. 그런데 애가 공부하잖아요. 미치는 거예요. 왜 분명히 공부 안 해야 되잖아요. 또 미치는 거예요. 그때 뭐라 합니까? ‘주여 용서하소서.’ 나는 공부 안 할 거라고 잔소리 했는데, 세상에 한마디 했는데 공부할 줄이야, 그거는 또 우리는 뭘 해도 내 뜻대로 안 돼요. 반찬 없어도 ‘여보 반찬 없어도 그냥 내가 바쁘니까 당신 먹어라.’ 분명히 안 먹을 줄 알고 했는데 ‘예’ 하고 먹거든요. 미치는 거예요. 이러면 당신답지가 않아. 이상해, 말도 안 돼, 주께서 또 뭐든지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누가 인도하시는 거예요? 이걸 우리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뭐든지 내 인생은 끝났다. 나는 누가 주무른다. 이것은 뭐냐, 까라면 깐다. ‘주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라는 것을 사람한테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누구한테 합니까? 혼자서 기도하면서 ‘주여, 손들고 졌습니다.’ 졌습니다. 해도 몇 초 가지도 않아요. 안 졌습니다. 우리는 알거든요. 졌다고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슬슬 내 이야기가 풀리게 해달라는 그 수작 하는 거예요. 나도 알아요. 내가 나를 아는데 주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주께서 ‘그 맘 아닌 거 내가 알지. 니가 하는 모든 회개, 반성 니도 안 믿고 나도 안 믿는다.’ 우리는 그냥 만들어진 대로 갈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사세요! 주께서 손대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손 안대면 어떻게?’ 주께서 손 안대는 것도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감사하면 되죠. 여러분, 주께서 안대는 것도 이것도 주의 뜻인지 믿으시면 되는데. 행하지 마시고 믿으세요. 주의 말씀을 행하지 마시고 그냥 믿으세요. 일 시켜놓고 해놓고 그 행함을 내 행한 것을 믿지 마세요. 행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걸 믿으시면 됩니다. 그게 바로 심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께서 한 거예요.

심판을 미리 아는 즐거움! 이 쾌재! 만약에 우리가 김정은 앞에 섰다. ‘내가 당신 살려줄게.’ 별로 안 좋아요. 살려내시는 분이 누굴 살려냅니까? 이미 우리는 다른 길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인간들이 살려낸다는 것은 자기 멸망하는 자기 식으로 우리를 똑같이 만들겠다는 뜻이거든요. ‘내 곁에 일 하면 당신 사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그걸 거부해요? 거부하지 말까요? 거부할 필요 없죠. 왜 그걸 거부해요? 월급 많이 준다는데. 커피 바리스타를 왜 거부해요? 하지만 그건 누구 뜻입니까? 니 뜻 아니야, 그것은 주께서 니한테 붙여준 뜻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그게 막사는 거예요.

왜 우리는 고집 부립니까? ‘난 당신 같은 지옥 가는 사람하고 안 사귑니다.’ 왜 그렇게 지 뜻을 반영해야 돼. 그럴 필요 없어요. 뭐든지 어떤 손님이 오든지 그거는 내가 거부할 필요가 없다니까. 그런데 몸이 힘든 것은 그거는 감당이 안 되니까 힘든 것이고, 왜 육신은 우리 맘대로 안 되고 주께서 맘대로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지만 나머지 그거는 그냥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 가면 어떻습니까? ‘이러시면 저주 받습니다. 그러니까 행동 똑바로 하시고 개가 토했던 걸 되풀이하면 여러분 저주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자꾸 자기가 자기를 관리시키게 되면 관리된 그것은 누구 뜻입니까? 자기 뜻이 되죠. 점점 더 마귀가 쳐놓은 굴레에 빠진 거예요.

넘어 갑시다. 진도 나가는 재미가 있어야 되니까 죽 나갑시다. 216페이지 중간에 보면 ‘피’ 이야기가 있죠. 심판 끝났는데 왜 피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그러니까 그게 비평하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겠다. 하니까 왜 노아에 피 이야기가 왜 들어갑니까? 그걸 보고 다른 교수들이 얼마나 놀렸겠어요? 저 인간 기본도 안 됐다 할 게 아닙니까?

노아 심판에 피가 왜 들어갈까요? 피 때문에 물 심판이 안 온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이겁니다. 그 심판이 악인에게만 안 옵니까? 선인에게는 안 옵니까? 악인과 선인 다 같이 안 오죠. 선인과 악인이 우리끼리 구분해도 주의 은혜는 주님 맘대로 되는 거예요. 비오고 안 오고. 선인이 기도한다고 비오는 것도 아니고, 악인이 기도 한다고 비 안 오는 것도 아니에요. 선과 악 관계없이 비는 오게 돼 있어요. 비 안 오는 것도 선과 악 관계없이 안 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다가 피를 줘 보내버리면 그냥 주께서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지상이 지점 이예요. 본점은 어디입니까? 하늘나라죠. 하늘나라에서 누가 그렇게 해요? 가전제품 대리점처럼, 자기 마크가 있는 삼성대리점하고만 연락하지 다른 데하고는 연락 안 하잖아요. 삼성마크 딴 데는 물건 안 주잖아요. 그 대리점이 뭐냐 하면 피를 머금은 선지자죠. 그러니까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비 오잖아요. 보세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하늘 쳐다보다가 이제 누구 봐야 돼요? 엘리야 봐야 되는 거예요. 드디어 점점 더 하늘이 인격화 되죠. 그게 마지막 인격화 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 그래서 “나를 본 자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도마야 니가 나를 보고 있잖아. 왜 자꾸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아버지가 나한테 다 일임했는데.‘

여러분, 하나님이 죽습니다. 안 죽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마세요. 죽는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을 못합니다. 왜, 우리는 살고 싶어서. 죽어가다 보니까 살아있는 하나님이여, 살려주세요. 하거든요. “나도 죽었는데? 나도 죽었는데?” 하나님은 언약대로 가기 때문에 하나님도 죽어야 돼요. 언약이 중요하니까. 언약 안 지키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나도 죽었는데”

‘그러면 예수 믿고 죽으면 안 살려주면 어떻게 할 건데요? 보장이 돼야 되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거예요. “아버지 약속이 내 뜻보다 우선된다는 것을 제가 인정하겠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약속대로 처음부터 약속대로 왔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내 뜻이 안 될 때만 안 될 것이 없는 약속이 믿어져요. 성도에게만 그렇지만. 내 뜻이 안 되잖아요. 그게 안 되니까 자살하자, 아니라 내 뜻이 안 되는 것은 되는 약속을 우리가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걸 놓쳤기 때문에 보여주기 위해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내 뜻대로 안 됐잖아요? 약속을 보여줬잖아요. 돌아서면 그 약속을 마치 내 뜻으로 우리는 전환시킵니다. 그 약속 안 되게 하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죠. 계속해서 우리를 그걸 설교에서 영원한 채무자로 만든다 했죠? 우리는 하늘나라 가서 내 주장을 전혀 하지 못하게 영원한 채무자로 만들어서 ‘거저 받은 겁니다. 공짜로 용서받은 거예요.’라는 이야기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미 지상에서부터 작업에 들어간 거예요.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 ‘피’가 들어간 것은 피는 지점이라 했죠? 본점 따로 있고.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은혜주시는 것은 결국 ‘피’라는 것을 통해서 확연히 몸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피는 그냥 주는 거예요? 그냥 피 내게 했기 때문에 죽은 겁니까? 그게 바로 이 땅에 희생자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이 여기 216페이지에 그걸 억울한 자, 억울한 피, 그걸 아벨의 피에서 사가랴의 피까지 다 너희들이 감당해야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냥 죽으시는 것이 아니고 자꾸 지적을 해요. 그냥 본인이 가만히 산 밑에 가서 죽으면 되는데 너희들이 나를 죽이게 돼 있다고 하시면서 계속 자기 스스로 죽는다 말은 해놓고 자꾸 끌어당긴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을 계속 미워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코너에 몰리는 거예요.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는 당신 없는 곳으로 도망쳐 버립니다.

이 복음을 전해야 돼요. 그래야 그 교회 교인들이 나가요. 나가서 복음이 없는 피가 없는 곳으로 가게 돼 있습니다. 피가 없는 곳에는 누가 멋있어 보일까요? 교회를 옮긴 내가 멋있어 보입니다. 이 바른 선택한 내가 멋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택, 우리 교회 온 선택 잘했죠? 란 설교를 하게 되면 교인들이 모이게 돼 있고 ‘선택한 그것도 죕니다.’ 한다면 그 교회 가 놓고 또 다시 나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예수라 하는 것은 항상 이 땅에서 성공하게 돼 있어요. 단 어떤 자리에서 성공하느냐 하면 진짜 예수가 없는 자리에서는 늘 성공하게 돼 있어요. 진짜 예수는 다른 교회 찾아왔다고 해서 그걸 의라 인정 안 해주거든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선택까지도 인정 안 해주니까 그들은 그 교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통영에서 오신 목사가 우리교회 보고 하는 말이 ‘아이쿠, 교인이 왜 이리 많습니까?’ 이게 많은 건가? 싸움은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교인 수를 얼마나 유지하는 싸움이 아니고 교인에 연연하지 않는 그런 싸움 이예요. 내 목회가 내 일이 아니라는 그 싸움,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것도 내 소관이 아니라는 그 싸움을 주께서는 하게 하십니다. 참 미치겠어요. 이거는 재주나 기술 있다고 되는 게 아니고 맡겨야 될 문제이기 때문에 기술과 재주가 오히려 방해 하거든요. 요령이 방해한다고요. 이럴 때는 기도 5분 동안 하면 되지, 이런 요령들이 전혀 주의 일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냥 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맡길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란 말을 느껴요. 내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맡기게 하신 그것만이 사랑이지, 맡겼기 때문에 결과가 사랑한 것이지, 내가 맡길 분이 없으면 이 세상에 지밖에 없는데 누구보고 사랑한다 해요? 사실 사랑한다는 말이 이용한다는 것이지. 남자들이 여자보고 ‘사랑해’ 이건 이용하겠다는 말밖에 안 됩니까? 그러니까 진짜 사랑하게 되면 ‘마음대로 하이소’ 이렇게 해야 되죠. 사랑한다 해놓고 ‘그건 아니고’ 그게 무슨 사랑 이예요?

217페이지 봅시다. 『세상 해석에 있어 이미 주도권이 상실되었으며 실제적인 언약 실행자 쪽으로 넘겨지는 것을 … 』 이 해석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해석을 한다? 사람은 해석 없이 하루도 한시도 해석 없이 안 넘어가거든요. 저게 몇 번 버스지? 저 전철 타면 돼? 이게 해석이잖아요. 해석은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있다’ 둘 다가 있는 거예요. 해석해야 될 대상과 사물이 있고 해석하는 누가 있다? 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해석 해버리면 이건 무슨 세계입니까? 없음의 세계가 아니고 있음의 세계라니까요.

있음의 세계에서 내가 여기 있으니까 잘 들어보세요. 내가 있으니까 있음의 해석에 누가 반드시 포함돼 있어요? ‘나 있잖아’ 가 반드시 포함되게 돼 있어요. 할아버지가 설날에 손자한테 세배 돈을 줬습니다. 주고 난 뒤에 밥 먹고 난 뒤에 다시 만났어요. ‘야야, 내가 준 세배  돈 가지고 뭐 샀지?’ 이런다고요. 무슨 뜻 이예요? ‘니 아버지가 준 세배 돈’ 이게 아니고 ‘내가 준 돈 아직도 갖고 있어?‘ 이런 뜻이고 이건 다른 말로 무슨 뜻입니까? ’내가 줬다는 것을 니가 기억하고 있느냐? 나의 의미가 니 안에 새겨져 있느냐?‘ 그걸 묻는 거예요.

우리가 손자한테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할 때도 이걸 잊을 리가 있습니까? 피아노 바치고 꽃꽂이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해석한다는 것은 전부 다 일방적인 있음의 세계를 만드는 거예요. 그 있음의 세계를 우리 힘으로 없음의 세계로 바꿀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이걸 바꾸겠다고 중들이 머리를 깎았는데 여러분, 머리카락은 자라나게 돼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아예 없으면 머리 깎을 시간도 없고 한 텐데 자꾸 신경 쓰이는 것은 자기 머리카락이 자라나니까 해석을 하는 거예요. 지금 5센티, 얼마 있으면 주지 스님이 뭐라 하겠나. 그만큼 파마 하나 머리 깎으나 신경 쓰는 것은 매일반이죠.

이것은 내 머리는 내가 관리해야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해석한다. 그 해석된 결과를 가지고 ‘세상’이라고 해요. 세상! 세상 속에 내가 있거든요. 그런 나는 허구가 있고 귀신은 아니잖아요. 그럼 내가 만든 세상은 허상입니까? 실상입니까? 실상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가지고 어둠이라고 했죠. “빛이 왔으되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 아! 도대체 우리가 그동안 예수 믿은 게 뭐예요? 허구적 예수를 심어놓고 믿는 게 아니에요? 나를 어두움으로 되게 한 것에 대해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감사해야 돼요. 내가 무슨 수로 내가 어둡다는 걸 압니까? 내가 뭘 해도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내가 무슨 수로 이걸 진정성 있게 느낍니까? 잘 나가잖아요? 잘 나가는 건 아니고. 못 나게 해주시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 나가든 못 나가든 우리가 판정하고 해석할 문제도 아닌데 우리는 기껏 그거밖에 안 되는 죄인입니다. 성령께서 간섭하사 책망하사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우리의 기준을 무너지게 해주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던 기준만 우리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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