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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2 01:31:43 조회 : 2202         
옛사람과 말씀 130321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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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2.222) 13-04-06 14:07 
가락교회-70이레 논문(옛사람과 말씀)130321-16강a -이 근호 목사

제 16강a

214페이지 중간에 보면 『말씀이 옛 인간을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토해내면 된다.』이렇게 돼 있죠. 옛 인간은 구원 못 받는다. 그런 이야깁니다. “옛 인간을 말씀이 와서 삼켜서“ 돼 있으니까 천국 가려면 우리가 천국 간다고 해서 천국이 ‘들어오세요.‘ 하지 않고 뭔가 끌고 가는 게 있어야 되죠. 그러면 옛 인간과 무엇의 만남? 말씀의 만남이 되는 겁니다. 옛 인간과 말씀이 만나면 나중에 그 생산물이 뭐라고요? 새 인간이 나와야 돼요.

그러면 말씀 안에 어떤 장치가 있단 말입니까? 옛 인간을 새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장치가 이미 말씀 안에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걸 좀 더 정확히 하면 언약이라고 보시면 돼요.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나님의 언약이니까 우리말로 약속이라고 하면 되죠. 하나님의 약속과 옛 인간이 만나서 새 인간이 된다. 그렇게 방금 전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약속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방에서 10시에 만나자. 우리가 약속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다방에서 10시에 만나는 것은 그건 아무 실내용이 없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거든요. 다방이라는 거, 그리고 10시라는 것도 우리가 익히 옛 인간 속에 이미 담겨 있는 시간관이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게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알아챌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우리를 비껴갑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하나님이 그건 약속의 아들이 아니라고 이 말을 했거든요.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은 뭐냐 하면 니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다 했는데 아브라함은 그걸 자기 딴아 알아들었다고 여겼는데 막상 알아들었으니까 ‘아, 그러면 제가 자식 낳겠습니다.’ 하니까 ‘아서라 말아라.’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그게 아니라는 말은 자기가 지금 제대로 알아들었다고 여겼는데 그것은 알아들은 게 아니고 지 일방적인 생각, 그게 뭐냐, 옛 인간 이예요.

옛 인간이 뭘 만나서? 말씀을 만나서 새 인간 될 때에 이 말씀이 주어지게 될 때 여기서 옛 인간은 뭘 발생하느냐, 오해를 발생해요. ‘그래, 저게 약속이야, 그래, 저게 언약이야, 내가 알아챘어. 내가 다 이해했어.’ 그런데 말씀은 그걸 비껴가거든요. 아니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러면 그 내용 말고 특별한 게 있느냐 할 때 있습니다.

말씀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여기 예수님이 들어 있어요. 말씀이라고 왔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는 말씀인 줄 사람들이 몰랐죠. 그냥 말, talk 하는 줄 알았죠. 토크 쇼에 토크하고 아나운서들이 이야기하는, 북한의 소행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알아듣는 이야기, 그런 이야긴 줄 알았죠. 북한이 올해 신한은행하고 뭐 이렇게 북한이 했습니다. 우리 알아듣잖아요. 그런데 제 말, ‘북한이 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했습니다.’ 하면 누가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는다 말이죠.

그걸 알아들을 때 새 인간입니다. 아! 그러니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농부가 씨를 뿌렸다. 다 알아듣습니다. 농부가 씨 뿌리지 어부가 씨 뿌립니까? 농부가 씨를 뿌렸다. 밭에다가. 다 알아듣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그 이야기 못 알아듣는 인간 있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아무도 못 알아듣는데 허락된 사람만 알아듣는데 그 허락된 너희들이 복이 있도다.

제가 오늘 동영상 하면서 두 번째 강의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열 두 제자가 교회냐? 아닙니다. 열 두 제자가 교회가 아니에요. 베드로보고 “니 반석에 교회를 세우리라“ 했지, 장래를 이야기했지, 그 열 두 제자는 교회가 아니에요. 그런데 나중에 성령이 오니까 뭐가 됐습니까? 교회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이거는 사람이 있다고 교회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 되는데, 성령이 임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성령 앞에서 열 두 제자, 어느 제자 할 것 없이 다 도망쳤다는 것을 등장합니다. ‘니 도망쳤어. 내가 니 쫓아가서 건진 거야.’ 그렇게 돼야 교회입니다.

‘내가 교인이니까 교회 간판 보고 왔습니다.‘ 이러면 교회 아니에요. ’너는 도망쳤어.‘ 제가 다니는 교회 교인이 20명 다니는데. 그럼 가짜 교인이겠지. 그건 니가 이해하는 교회는 가짜 교회에요. 진짜 교회는 교회를 안 믿습니다. 믿을 놈을 믿어야지, 사람을 믿으면 되겠어요? 뭘 믿느냐 하면 주님의 용서를 믿습니다. 그게 교회에요. 용서를 믿는 게 교회에요. 두 세 사람이라도 용서를 믿으면 그게 교회에요. 5천 명, 6천 명 있어도 그건 그 자체를 믿으면 그건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자기들의 집결된 힘, 그 권력 체를 믿는 겁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죠. 베드로가 예수님께 내가 어떤 식으로 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가기 위해서 밑에 내가 어떤 식으로 뭘 깔면 주님에게 가겠느냐, 베드로가 생각을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죠. 뭐만 쳐다봤습니까? 예수님만 쳐다봤죠. 그냥 예수님만 보고 가니까 이게 물인지 불인지 구분도 안 하고 갔잖아요. 이게 천국 가는 유일한 방법 이예요.

‘천국 가기 위해서 내가 뭘 걸쳐놓고 내가 걸어가면 되지?’를 주께서는 이걸 허물어 버립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가다가 보니까 자기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아니고 만화도 아니고 지가 물 위를 걷는 거예요. ‘내가 미쳤지, 내가 물 위를 걷고 있지?’라고 할 때 베드로는 주님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 끊어졌습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천국은 인간이 자기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온다면 아무도 갈 수 없는 곳, 천국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을 발판으로 깔아놓고 나가면 그건 천국이 아니고 지옥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과 진짜 천국은 연결돼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옛 인간에서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서 아무리 천국이고 좋은 것을 다 상상해도 그건 새 인간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중간에 가로막습니다. 뭐가? 말씀이! 이 말씀에 대해서는 모든 한국교회나 모든 종교단체에서는 이 말씀을 말로 이해합니다. 성경 구절 외우면 되지 뭐. 얼마나 잘 외웠어요? 여호와 증인 달달 외워요. UBF(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 네비게이터, 전부 다 성경 달달 외우기 아닙니까? 옛 인간이 외운 거예요. 토익 시험 칩니까? 어떻게 사법고시 시험 칩니까? 사법고시 합격했다고 새 인간 되는 거 아니거든요. 왜, 그들은 말씀을 접한 적이 없고 말을 배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은 공부하면 돼요.

그러나 말씀은 예수님이 들어있어요. 말씀은 예수님이 들어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새로 깔아놓은 거 아니면 우리가 깔아 놓은 것은 전부 다 악성코드 걸립니다. 화면이 안 떠요. 분명히 천국 떠야 되는데 보니까 시커먼 화면에 숫자만 떠 있고, 글자만 있고 뜨지를 않습니다. 마귀가 악성코드를 깔아 놔서 컴퓨터가 열리지를 않습니다.

항상 신약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 다가와야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2장 한번 봅시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인데 누가복음 2장 29절에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그 다음에 뭐죠? “편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거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누굴 만났습니까?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하는 말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거죠. 뭐 곗돈 탔습니까? SBS에서 로또 당첨하는데 마지막 숫자가 맞아떨어진 거예요. 계약이 안 되다가 계약이 되니까 종이 평안해진 거예요? 시므이가 뭘 기다리는 겁니까? 예수님이죠. 메시아죠. 메시아는 기다려야 되지,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아무도 갈 수 없고 찾아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이 있을 때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보혜사를 보내주노니” 했거든요. 보혜사 안 오면 끝나요. 성령이 안 오면 예수도 없고 하나님도 아버지도 없고 삼위일체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지가 상상한 삼위일체만 있을 뿐 이예요. 옛 인간은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말이 아니고 말씀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가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들이닥쳐야 우리는 말씀과 우리 인간의 만남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안 오면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신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신자 된 자의 기적을 목격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오! 저 사람 왜 저렇게 하지? 어! 저 사람 달라졌네.’ 달라졌다는 게 뭐냐 하면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 내가 성전에 줄 것 준비하고 헌금 준비하고 뭐 준비하고, 준비하고 준비해서 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베드로가 배 위에 있는 예수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도 물에 배를 띄웠습니까? 중국처럼 항공모함을 띄웠습니까? 뭘 띄웠어요?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죠.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어야 돼요. 그런데 사람은 준비 안 해놓으면 지가 허전해서 안 돼요. 지가 불안해서 안 돼요. 뭐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돼요.

마태복음 25장에 지혜로운 다섯 처녀 나오잖아요. 그런데 뭘 준비했죠? 기름 준비했죠. 기름 준비하면 뭐합니까? 다 잤는데. 기름 준비하고 다 잠을 잤다니까요. 사람이 잠을 잔다는 것은 죽음 상태거든요. 잠을 잤다는 것은 자기 자율과 자기 자유와 행함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란 뜻이잖아요. 잠잘 때 누가 데려가도 모르잖아요. 그때 누가 왔습니까? 신랑 떴잖아요.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기름 준비해도 소용없어요. 그 다음에 열 처녀 가운데 네 처녀는 기름 준비하고 여섯 처녀는 기름 준비 안 했다. 그럼 신랑 안 옵니다. 그런데 한 처녀가 오줌 누러 갔다가 이참에 기름 준비해볼까 해서 SK가서 기름 준비하는데 다섯 번째 마저 채우니까 왔다니까요.

기름 준비가 구원받는 요건이 될 수 없어요. 그냥 주님께서 찾아 와서 그냥 공짜로 주시는 겁니다. 안양에서 마트에서 광고한다고 공짜로 줬다면서요? 힘이 부쳐가면서도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공짜를 마트에서 집까지 이동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고가 많았겠습니까? 공짜니까. 공짜니까 힘든 줄 모르죠. 그러니까 구원도 공짜로 주니까 구원받는 기쁨! 종을 평안히 놓아주는 기쁨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엎어지고 자빠져도 괜찮다 이 말입니다. 공짜를 이동시키는 즐거움, 옛 인간이 새 인간을 들쳐 업고 가는데 신바람 나잖아요. 신나야 됩니다. 새 인간인데요. 힘은 부치겠지만. 옛 인간은 70키로고 새 인간은 50키로면 괜찮은데, 옛 인간은 70키로고 새 인간이 90키로 같으면 힘은 부치겠지요. 그래도 새 인간이 어디인데요.

종을 평안히 놓아준다는 말은 시므온은 뭘 기다리느냐 하면 분명히 오신다는 걸 기다린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내 행한 것을 보상해 주는 게 아니고 내 한 것과 상관없이 그분께서 다 이루신 것을 주실 것이다. 물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시므온이 몰랐죠. 그냥 메시아가 온다는 건 알았지만 나중에 요한복음에 보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가 지키지도 못하는 말씀을 우리 육신이 지키지 못하는 그 말씀을 친히 육신이 되셔서 다 지켜서 우리가 못 지키는 우리 육을 대신해서 지키시는 그 육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 대신 지키신 육을 한 자로 ‘영’이라고 합니다. 영! 영에서 영, 영에서 성령이 나오는 거예요. 이미 예수님은 영이예요. 그래서 성령을 그리스도 영이라 하죠. 그리스도 영은 전부 다 저쪽에 계신 분이 성령이 오게 되면 저쪽에 계신 분 속에 우리들이 이미 여기에 잠식시켜서 우리를 들이닥쳐서 삼켜 버리면 새 인간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 안에 있었죠. 예수님이 새 인간이니까. 예수님의 것으로 우리를 덮쳐 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예수님 몸에 붙어있는 지체로 변하고 머리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지체로 행세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 머리에서 주시는 살려주심, 용서하심, 살려주심의 능력인데 성경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용서받았다는 뜻입니다. 용서 받지 않으면 안 살려줘요. 그만큼 우리는 예수님의 살려주심을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우리는 범죄가 우리 몸을 통해서 계속해서 발굴되어지고 만들어져야 됩니다.

제가 어제 수요일 날 잠간 이야기했던가, 우리 몸을 죄의 박물관이라고 했는데, 박물관! 박물관이 뭡니까? 죽 이렇게 스쳐지나가면서 옛날에, 옛날에 이러했다고 보잖아요. 우리 몸 자체가 박물관이라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는 거예요. 우리가 날마다 죄들을 박물관에서 유물 보듯이 보는 거예요. ‘아! 이런 죄도 용서받았구나. 아유, 이런 죄도 지었네. 아유, 솜씨도 좋네, 이런 죄를 진다고 얼마나 조마조마 했을까, 아이구, 다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걸, 이런 죄도 지었네.’ 마치 남의 일 보듯이 그렇게 보는 거예요. 박물관 보듯이 관람하고 공짜로 죽 내 죄에 대해서 내가 여유롭게 관람한다는 거, 그게 어딥니까?

만약에 우리가 용서받지 않았다면 자기 그 죄 속에서 못 빠져 나온다면, 빠져나올 수는 없고 빠져나오려고 시도하게 되면 이제 빠져나왔다고 여기는 순간 더 큰 유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그 유혹에 전보다 더 큰 시험과 죄에 빠져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만약에 우리 몸을 박물관으로 본다면 바로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거예요. 여기서 나와서 착한 일이라고 빠져나왔는데 아이쿠, 된 통으로 더 걸렸네. 더 큰 죄를 지었네. 이걸 해소해 보려고 아이쿠 교회로 어지간히 돈도 갖다 바치고 했는데 소용없네. 목사가 돈 가지고 도망갔네. 소용없네. 그걸 죽~ 비디오 보는 거예요. 아이쿠, 장로 됐다고 교회 피아노 기증했고, 어이쿠, 피아노 기증한 거 목사가 피아노까지 팔아먹었네. 교회 충성했는데 목사가 토사구팽, 사냥하게 해놓고 나를 잡아먹는. 모든 살아온 행적들이 예수 믿는다 해놓고 보니까 오! 예수보다 자식을 더 좋아하는 그런 모습들이 보이죠. 원래 보름달이 떠야 주부가 주님 사랑하지 않고 자식만 사랑했다는 것이 티가 나죠.

평소에 내가 누굴 사랑했다 하는 것은 뭐가 떠야 돼요. 달이 뜨든 해가 뜨든 뭐가 떠야 돼요. 내가 주님을 사랑한 척 했다는 그 모습을 밤 문화처럼 우리는 지켜볼 필요가 있어요. 죽 스캔을 하는 거예요. 그 스캔은 누가 시키느냐, 몸통은 예수님이 하고 우리는 내 하는 행세를 내가 지켜보는 촉수 역할, 촉수 끝에 카메라 달리고, 일종의 우리는 블랙박스 같은, 카메라 같은 역할 이예요. 우리의 몸통 되신 주님의 시선으로 옛날에 그 시시했었던 나의 했던 행세를 주님의 시선으로 쳐다볼 때 우리는 평생을 막 살았다는 사실! 막산다는 것 때문에 삐져서 다른 교회 가버리고, 그게 막사는 건지 모르고.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언약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노아 언약 이야기 나오는데 지금 언약 이야기하는 겁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하니까 내가 염려가 돼서 그런데 언약이란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바꾸는 장치가 그 안에 들어있는데 그 장치가 딴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에게 언약이 왔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그 이야기예요. 그래서 시므이가 그걸 보고 ‘야, 메시아가 안 왔으면 나 어떻게 됐을까?’ 농부가 비가 안 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에 작년에 비가 한 번도 안 왔으면 농사 다 날려 버리잖아요. 그러면 농사를 날리면 그 다음에 딴 데 취직을 하든지 하면 되겠지만, 만약에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아예 이 땅에 나타나시지 않았으면 우리 죄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해야 죄를 씻을 수 있을까요? 씻을 수 없는 거죠. 그러면 그 저주는 그대로 다 받아야 돼요.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메시아가 오셨다는 거.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메시아가 오셔서 오셨기 때문에 오시고 내 속까지 들어오셨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그냥 바깥에 오시면 안 돼요. 너무나 낯선 존재기 때문에 우리는 거북스럽고 우리는 외면해 버립니다. 외면 안 하도록 ‘똑바로 들어, 똑바로 봐.’라고 목을 잡아서 보게 해서 지적해 줄 때 고개 꽉 붙잡아서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는 그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영화에 차태현하고 나오는 여자이름이 누굽니까?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에. 전 지현 나오는 그 영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있어요. 전 지현이가 여자지만 얼마나 대찬지 남자 때릴 대 ‘똑바로 해.’ 하는 장면이 나와요. 자꾸 우리가 예수님이 오셨다고 생각하는데 안 오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안 오셨다면, 우리는 희망이 있어요? 없어요? 희망 자체가 살아도 소용없죠.

그러니까 제일 답답한 게 대책 없이 죽음이 다가오고 죽음을 맞이할 때 제일 대책 없는 게 늙어 가는데 죽음 이후는 아무 준비가 안 돼 있고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자꾸 잊어버리고 침해 초기에 자꾸 접어들고 몸은 비틀거리고 당뇨는 370까지 혈당이 올라가고, 그러니 대책이 없을 때 그런 게 이런 겁니다. 집을 팔렸고 이사 나가라 하는데 이사 갈 데가 없을 때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을 때 그때 얼마나 하루하루가 지옥 같겠습니까?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이 마음이 천국이 돼야 될 이유가 히브리서 11장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아예 떠나야 될 곳이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살기가 적절치 않은 곳 이예요.

오죽했으면 최백호가 이런 이야기했겠습니까?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나이 60에 갈 곳이 없는 거예요. 어디 부두에 다방에 앉아서 화장 짙게 한 낭만을 찾을까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적절치 않도록 주님께서 조치를 해주시는 게 얼마나 고맙습니까? 여자가 임신했을 때 애가 그냥 있겠다, 하면 보통 문제 아니잖아요. 나중에 배 터져버리잖아요. 밀어내듯이 주님께서 자꾸 ‘니 자리 아니야.’ 하고 밀어내시는 요 고마움, 말은 고마운데 쉽게 말해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죠. 그게 IMF터지고 금융위기 터지고 되는 일이 없다는 뜻 이예요. 엉덩이 걸치고 그냥 앉아 있어야 되는데 밀어내는 거예요. ‘니가 살아도 별로 살고 싶지 않지?’ ‘예’ ‘그래. 그게 정상이야.’ ‘나도 그랬어.’ 예수님께서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앞으로 달 보고 빌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저 집안 식구 올 한해 잘되고…‘ 달보고 빌지 말라 말 이예요. 그 말은 어떻게든 집착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기어이 한번 적절하게 살아보겠습니다. 그래도 내 인생에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는 것처럼 그래도 ’나 성공했다. 나 성공한 인간이야.‘ 그거 떠벌이고 가겠습니다. 하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서 실패했어요.

주님의 영이 왔다는 말은 이야기 끝난 이야깁니다. 주님과 우리가 같은 동기생, 동창생 돼야 돼요. 주님께서 실패했다면 우리는 이미 실패한 거예요.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합니다. 실패했다고 느껴지는 그 자체만이 뭘 해도 성공 이예요. 요리할 때 맛이 안 나오다가 ‘딱 이 맛이야.’ 하고 ‘야, 성공했어.’ 하잖아요. 그럴 때 주님 찾아와서 ‘너 요리 성공했으면 평생 요리하고 살지?’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비록 성공했지만 떠나야 됩니다.’ 요런 생각이 들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내 뜻대로 잘된다고 하더라도 자만하거나 교만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기대를 한다는 그것은 기대한다는 자체가 그건 스스로 악성 바이러스를 자기 몸에 세균을 집어넣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임플란트를 하게 되면 ‘잘 돼야 될 텐데.’ 기대 하지 마시고 주께서 이런 경로를 통해서 또 이 세상을 떠나라 하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하시고 오히려 죽이라고 하시는구나, 그렇게 사시면 되는 거예요. 돈 250만 원, 갖다 버리라는 뜻이구나. 이렇게 보시라니까요. 아! 떠날 때 이런 식으로 떠나는구나, 그래, 떠날 때는 말없이. 이제는 척척 되네요. 떠날 때는 말없이 미련 없이, 떠날 때 그냥 떠나지 마시고 임플란트 돈 좀 뿌리시고 돈 흘려놓으시고 그렇게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나중에 이빨 아프고 눈도 고쳐야 되고 뭔가 옷을 벗는 것처럼 우리가 그동안 성공이라고 걸쳐졌던 것을 이제는 소급해서 반납해야 되는 거예요. 성공했던 거 다 떨쳐놓고 ‘어디 실패자가 성공의 티를 내? 어디 성공의 흉내를 내? 어디 마귀 새끼 흉내를 내냐?’고 질책하면서 우리가 억지로 입었던 것을 전부 다 벗겨내는 그 작업이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그게 옛 인간이 주님 만나서 새 인간 되는 절차입니다. 우리는 뭘 가짐으로서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반대로 박탈하면서 구원시키는 거예요. 요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214페이지의 중간에 보면 『이렇게 되면 호명 받은 자의 선택은 호명하신 분의 선택에 의해서 전부 박탈당한다.』아! 요 말 어려워요. 그냥 이렇게 보면 안 어려워요. 『이렇게 되면 호명 받은 자는 호명하신 분에 의해서 전부 박탈당한다.』이러면 안 어려운데 ‘호명 받은 자’의 그 다음에 뭐죠? ‘선택’은, 이 선택한다 하니까 문제가 어려워진 거예요. 이 말은 ‘나 끊임없이 예수님을 선택해.’ 다른 말로 하면 ‘나 예수를 믿을 거야.’라는 그 믿음조차도 매일같이 박탈당한다 이 말 이예요. ‘주여, 나 믿는 거 보이죠? 잘 믿죠?’ 그것도 박탈당하는 거예요.

 제가 어젠가 십자가마을에 글 하나 올렸잖아요.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인데 거기에 보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라는 것을 주께서 미운 거예요. ‘니가 사랑을 알아?’ 어떤 대사에 이런 게 있어요. ‘내가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멘트가 있어요. 그런 멘트 하는 남자 같으면 얼마나 듬직하고 믿음직하겠습니까?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돼요. 그만큼 사랑은 목숨보다 강하다 이 말입니다. 아가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렬하다 그런 식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박탈해 주는 사랑으로 옵니다. ‘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는 것이 말씀에 들어있거든요.

몇 분 지났다고 다 잊어버렸다. 다시 해봅시다. 옛 인간이 뭘 만난다? 말씀 만나죠. 우리가 이걸 잘 알잖아요. 하나 예를 들어보면 갑자기 헷갈립니다. 말씀에다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란 이 말씀이 여기 들어 있잖아요. 요한일서 4장에. 그렇다면 이 말씀과 우리가 뭣과 충돌됩니까?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가 어떻게 돼요? 대충돌이 일어나겠죠. ‘왜 이리 까불고 있어.’ 하고 꿀밤을 주고 ”너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야.‘라고 이 말씀대로 돼야, 그 말이거든요.

“탐내지 마라”는 말은 지금 탐내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믿고 성령 받아서 탐 안 냅니다.‘ 그러면 그건 호되게 혼나는 거예요. 그게 ’예수 믿고 탐심을 안 냈습니다.’ 하는 그게 탐심인 거예요. ‘저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할 때 사람들이 혼동하는 게 뭐냐 하면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이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구분하는 거예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과 신체적으로 간음한 것을 구분해서 ‘아마 하나님께서는 달리 볼 걸.’ 지가 지 맘대로 정한다고요. 여인을 보고 음란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했는데, 그게 말씀인데 우리는 이 말씀 가지고 내 인간 속으로 잡아당겨서 지가 지 인간의 정당화를 위해서 이걸 조작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언어라 하는 것이 전부 다 실체가 없어요. 거짓말입니다. 전부 다 은유가 돼서 확정적인 내용을 언어 속에 담을 수가 없어요.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다 할 때 그 음욕을 어느 정도 품는다는 말입니까? 손을 잡는 것? 뒤 태 보는 것? 어느 정도, 어느 정도가 음욕인데? 그림자를 밟는 이런 것? 아니 어느 정도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떤 남자, 신성일이가 엄 행란하고 결혼하고 살면서도 어느 아나운서하고 좋아했다, 라고 고백했죠. 그럴 때 우리 젊은 사람들이야 신성일이가 70이 넘었으니까 하지만, 같은 70넘은 사람들, 그것도 같은 경북고등학교 동기생들 같으면 얼마나 화를 내겠습니까? 남자가 칠칠치 못하고 점잖지 못하게 국민의 인기를 받았으면 인기 값을 해야지, 그걸 자기 자랑이라고 하나? 라고 화를 내는 의도가 뭐예요? 자기는 못해 봤거든요. 그러니 약이 오르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신 성일을 감싸주고 괜찮아, 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같이 해본 사람.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꾸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추궁하게 되면 끼리끼리 서로 단결돼요. 누구끼리? 인간은 인간끼리. 주님은 주님만 홀로 남아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 믿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다 싫어요. 성령이, 주님의 영이 와야 내가 주님 편에 서지 않고 사람 편에 선 게 죄인 줄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고개 숙이고 오는 거예요.

옛 인간은 옛 인간 티를 내게 돼 있습니다. 자꾸 티를 내게 돼 있어요. 지가 종교 만들고 지가 하늘나라 올라가고 지가 바벨탑 만들고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그런 것들, 범죄들은 우리가 이미 잠재적으로 다 지을 수밖에 없는 일들을 선배들이 먼저 다 저질러 놓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강도가 구원받은 것처럼 구원이라 하는 것은 그냥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그 이야기에요. 내가 선택한 것마저도 주님이 꺾어버리고 주님의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구원받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는 인간들이 ‘본래의 것’이라고 여긴 것이 실은 ‘비 본래적 선택행위’를 그동안 발휘해 왔음을 비로소 지적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인간은 자기의 본래의 것으로 자꾸 들어가야 돼요. 집에 강아지를 촌에서 열댓 마리 키워 본 사람은 강아지가 자꾸 주인 없으면 담장 넘고 밖으로 자꾸 나가잖아요. 주인이 어떻게 합니까? 부추겨서 주인이 본래의 강아지 집으로 보내잖아요. 인간은 자기가 죄인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되는데 조금만 믿음 좋다 하면 지가 죄인이 아닌 체 하고 담장 타 넘고 기어 올라가서 도망쳐 버려요. 도망치면서 그냥 도망치는 게 아니고 ‘주님, 쟤 나쁘잖아요.’ 손가락질을 남한테 하면서 도망쳐요.

그래서 본래의 것이 아니고 비 본래의 것에 척하니 지 자리라고 앉아 있는 거예요. ‘주여, 저 믿음 많이 성숙했죠?’ 이러고 앉아있다 말이죠. ‘원래 막 사는 니 자리 돌아가라.‘ 자꾸 지적하는 겁니다. 그 자리 지적했다고 교회 뛰어 나가버리니, 참. 박탈하는 게 그렇게 기분 나빴던 모양이죠. 마지막 남은 그거, 그것마저 박탈하니 그렇게 속이 상하고 미웠던 모양이죠. 우리 십자가마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었습니까? 이 박탈하는 것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는 거예요. 자기 것을 자기는 꿍친다 하죠. 안 뺏기려고 꽉~ 쥐고 있으니까 아주 발악을 해요. 죄인이라고 놓으면 되는데 바바리 맨처럼 이렇게 놓으면 되는데 바바리를 꽉 모으고 꽉 잡고 있으니까 볼 거 하나도 없는데 괜히 신비한 것처럼... 꽉 쥐고 안 보여주는데, 주님은 ’떼치‘ 손을 떼게 해서 이걸 공개시켜 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미워서 박탈하는 것이 아니고 탈탈 긁어낼 때 그 배후에 악마의 얼굴이 비로소 아주 민망한 얼굴을 하면서 그때 얼굴을 내밀어요. 결탁해 있었거든요. 배후에 우리가 모르는 세력하고 우리 자신이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었는데 물론 마귀는 자기 정체를 감추니까 우리한테는 없는 존재죠. 그래서 인간을 박탈해 버리면 인간은 뭐라 하느냐
‘주님이여, 더 이상 없나이다.’ 없다고 하는 거예요. 없다는 걸 한자로 하면 무(無)죠. 그런데 주님께서 무(無)속에 살아있는 진짜 없음 덩어리를 보거든요. 그게 악마에요.

무,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온다는 것은 철학자들도 다들 주장하는 겁니다. 옛날 철학자들도 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철학자들이 모르는 게 있어요. 심지어 요새는 과학자들도 무에서 유를 이야기해요. 없는 데서 있게 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없음의 자리를 힉스 입자, 자기는 질량이 없으면서 남의 질량을 있게 하는 최소한의 입자,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자기한테는 질량이 없는데 질량을 있게 만든다면 그러면 질적으로 질량이 있을 때 뭐냐 하면 책 3권을 무게를 알려면 이 책 다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이 책에서 무게가 나오죠? 무게는 다시 뭐로 보낸다? 이 책, 이 책, 이 책 다 원상복귀가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모든 질량을 힉스 입자로 다 쪼개버리면 결국은 질량이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없는 게 모여서 뭐가 생겼다? 있는 게 돼요. 이게, 이게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예요?

힉스 입자를 발견한 것은 99%라고 이론만 있던 것이 실제로 관측했다고 유럽 나라에 세계에서 제일 큰 전자를 돌려서 입자 가속기를 돌려서 충돌시키거든요. 충돌하면 이게 잘 안 맞아요. 100만 개 충동하면 그중에 하나 맞을까, 아는 사람이 입자 물리학 최고 책임자로 있던 분이 있어요. 한국에 와서 삼성에서 상까지 받았어요. 여자인데 한국의 최고의 과학자라고. 그 사람이 하양 사람이거든요. 같이 아는 사람이라 이야기하는데. 그게 충동할 때 잘 안 된대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 개 아다리 될까 한다는데. 어쨌든 간에 없는데서, 과학도 없는데서 있게 한다고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과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거기서 예수님 얼굴이 나옵니까? 지금 마귀가 뭐냐, 과학 중에서 없는데서 있게 한다 하지만, 마귀는 기어이 뭐를 빼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없는데서 있게 한다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다 빼버리는 거예요. 그러니 과학이 종교 대체물이 된 겁니다.

진화론이 왜 나쁘냐? 진화론만 나쁜 게 아니에요. 창조론도 나빠요. 과학 자체가 나빠요. 왜냐, 우리가 나쁘니까. 우리 자신이 죄인이고 나쁘니까. 다시 이야기 하면 박탈하는 이유는 우리가 비켜야 그동안 우리로 인하여 가려졌던 진짜 예수님께 대드는 진짜 악마의 모습이 비시시 웃으며 튀어나오는 겁니다. 맨홀 뚜껑 열면 개구리 튀어나오듯이, 요한계시록에 그런 비슷한 내용 있죠? 뚜껑 여니까 황충들이 나오죠. 그러니까 자꾸 우리가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주님 우리하고 상대합시다. 나하고 상대해요.’ 하면 ‘비켜, 비켜.’ 우리가 비켜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공격하는 게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을 공격할 때 인격과 그리고 인간의 명예, 인간의 자율성, 인간의 선택, 이런 걸 거론해서 ‘우리 다 같은 형제 아닌가, 우리 다 같은 인간 아닌가, 서로 평화를 누리자.’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로마 카톨릭 요번에 교황 된 사람이 뭘 하자 했습니까? 서로 종교끼리 관용을 베풀자, 이러죠. 관용 베풀어서 뭐하는데?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분노가 없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맞아 죽었어요.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이 분노가 주님의 시선 이예요. 분노가 있는 곳에 용서가 의미가 있었다니까요.

이건 어려운 거니까 해봅시다. 임금이 자기 종이 빚을 졌는데 탕감해 줬죠. 이 신하는 임금에게 막대한 자금을 탕감 받아놓고도 이 용서의 의미를 몰랐던 거예요. 언제 용서의 의미를 아느냐 하면 지가 지 종한테 몇 푼 안 되는 것 안 갚았다고 갑자기 임금이 보낸 군대가 와서 완전히 박탈할 때 소급해서 보면 그때 그 용서가 얼마나 큰 용서인지 아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뭔가 혜택 입으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뿐이지 실제로 감사 안 해요. 전혀 감사 안 합니다.

그런데 있는 것 다 날라 갈 때 비로소 그동안 주께서 많이 봐주고 왔다는 것, 인내성 가지고 많이 용서해 주고 왔다는 사실을 소급해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유구무언, 입이 열 개라고 할 말이 없어요.

삭개오가 주님 만나고 난 뒤에 뭐라 했습니까? 소급해서 4배나 갚아준다 할 때 계산해 보세요. 천만 원 한 사람한테 얼마를 갚는다고요? 4천만 원입니다. 이런 횡재가 없어요. 그 사람들 떡가래하고 밀가루하고 쌀 막 들고 가요. 이런 횡재가 없어요. 마트 그 사람 죄 짓는 일인지 몰라. 4배나 갚으니. 그만큼 자기 가진 거로부터의 자유가 된 겁니다. 용서 받으면. 그동안 ‘내꺼야’ 하고 있던 내 것이라는 것에서 자기가 ‘내꺼’라는 껍질을 홀랑 벗고 내 것에서 벗어나서 탈출 시도가 된 겁니다. 1단계, 2단계, 그 밑에 있는 것이 빠지고 로켓 발사할 때 캡슐만 도망치듯이 ‘이건 내꺼야. 이건 죽어도 안 뺏긴다.’ 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홀라당 발가벗고 빠져나온 거예요. 벌거벗은 채로 니가 드러나리라, 히브리서 4장 말씀대로 니가 벌거벗을 것을 보게 되리라. 그게 바로 참 자유 아닙니까? 자유! 율법으로부터, 마귀로부터, 자기 죄로부터, 심지어 자신의 살고자 하는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예수님 같이 되는 게 아닙니까? 말씀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의 옛 사람이 도망치듯이 새사람 쪽으로 부리나케 도망치게 되는 겁니다. 들을 때뿐이고 돌아서면 다시 자기 자리로… 요 순간만이라고 도망칩시다.

그래서『묵시적 사건이란 이름으로 역사적 지평위에 지뢰처럼 수시로 터지게 된다.』묵시적 사건인데 사건 자체가 사실은 묵시적 이예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일어났었어요. 그런데 사건이 터지면 그건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합니다. 감염되기 전에 이미 병균은 그 지역에 퍼져 있죠. 그런데 감염되는 순간 벌써부터 병균이 여기 있었구나, 하는 것을 소급해서 파악하잖아요. 고 감염되는 고 사건, 그 사건이 창세전에 우리가 이미 구원받기로 예정됐구나, 하는 걸 확인해 주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 사건 하루에 12번이라도 일어날 수 있어요. ‘주여, 제가 떠날 곳이 있는데 왜 걱정했는가요?’ 수시로 주리 틀 듯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거 보통 축복 아니죠. 우리 마음은 길게 갔으면 좋겠는데 길게 가면 사건 아니에요. 길게 가면 그걸 우리가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 옛 사람이 ‘나 은혜 받았어. 까불지 마.’ 이렇게 까불게 돼요. 은혜 받은 그것이 좋아서 오래 이 땅에 살고 싶어 합니다. 자랑하고 싶어서. 간만에 온 은혠데 이걸 자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지 자랑하는 재미로 살기 때문에 밥을 먹든지 영화를 가든지 놀러 가든지 지 혼자 가면 재미가 없어요. 왜, 지가 자랑 질 할 사람이 없으니까. 심지어 여자들은 목욕탕이나 화장실 갈 때도 같이 가는데.

사람은 자랑 질 하고 싶은 이유가 그게 마귀가 옆 사람을 잡아먹어야 니가 산다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남을 잡아먹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어요. 치과에 손님 오면 또 잡아먹힐 놈 하나 왔다. 밥 왔다. 밥, 밥, 밥‘ 이러거든요. 교회에 교인 하나 오면 ’밥 왔다. 밥‘ 그런데 보니까 돈도 없어 보인다. ’에이, 장사 망했다. 물 뿌려라.‘ 좀 가지고 교양 있게 생겼다. 이 사람은 ’잘 꼬시면 돈 나오겠네.‘ ’전에 어느 교회에서 오셨습니까?‘ ’고신 측‘ ’와~ 십일조!‘ 고신 측, 합동 측 십일조. 야! 십일조 계산 딱 해서 요번 연말 예산 좀 늘려야겠네. 24시간 목사는 그것만 생각합니다. 참, 그것이 알고 싶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일 하는 사람, 없는 사람 가도 별로 화가 안 나요. 그런데 십일조 내는 사람이 저쪽으로 가면 목사는 돌아버립니다. 전에 설교에서 이야기했죠. 사람이 세상에 살면 지 맘대로 안 됩니다. 미쳐버려요. 미치지 않으려면 뭔가 믿는 수밖에 없어요. 그게 예수가 되든지 부처가 되든지 관계없어요. 그냥 교회 나오고 그냥 가는 것은 그거라고 안 믿으면 환장하고 미칠 것 같아서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릴렉스, 자기 마음 평정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회개하는 곳이잖아요.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회개를 이야기해야 되는데, 불에다가 기름을 넣는 거와 똑같은 거니까 안 돼요. 달래줘야 돼요. ‘잘 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러니 교회가 고객관리 한다는 게 참 악마의 촉수로서 움직이는 그게 오늘날 교회입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42.222) 13-04-07 15:54 
가락교회-70이레 논문(옛사람과 말씀)130321-16강b -이 근호 목사

제 16강b

아까 전염병 했죠? 이미 감염된 순간 병균이 이미 여기 퍼졌다는 것을 그냥 확인할 뿐이죠. 그와 같은 차원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뭐예요? 이미 죽어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사건이 인간이 죽는 순간입니다. 이미 죽어있다. 그럼 언제 죽어 있느냐, 그럴 때 십자가 나오죠.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렇다면 십자가는 시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시간을 정해버리죠. 십자가 안에서 새삼스럽게 모든 시간들이 다 의미 있게 깔려있다는 게 정리되잖아요. 그러니까 요 십자가 안을 가지고 뭐라 그러느냐 하면 시간을 도리어 만들어내는 출처가 되기 때문에 묵시라고 하는 겁니다.

이 논문의 어려운 한 단계가 지금 드러났습니다. 묵시가 뭐냐 하면 시간을 의미 있게 유발시키는 이유가 들어있는 곳, 들어있는 상태, 묵시 상태죠. 묵시는 시간을 창조하신 분에게만 묵시라고 할 수 있죠. 그러면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 누구죠? 예수님이죠. 시간을 창조했다 하니까 과학자들은 이해가 안 돼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창조되는 아니거든요. 인간의 의식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성경에서는 시간을 창조했다는 말이 되는 이유가 그냥 시간이 아니고 의미 있는 모든 변화를 만들어내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시간이라 하는 것은 변화인데 변화가 없으면 시간이 측정이 안 되는 거예요. 꼭 시간은 차이가 있어야지 ‘아, 시간 흘렀다.’ 가 되는 거예요. 만약에 배불렀다. 또는 배고프다. 배부르다와 배고프다가 있어야 시간이 흐른 거예요. 아무 변화도 없다면 시간은 우리 속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아무 느낌이 없는 순간에도 우리는 변하고 있는 이유는 이 시간은 묵시에서 나왔기 때문에, 묵시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는 변화해 줘야 돼요. 변화 안 되려고 해도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어린애는 나중에 소녀가 돼야 되고 할머니가 돼야 되는데 다 누굴 위해서? 묵시적 존재인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시간에서 예수님까지 가는 그걸 숫자로 계산한다면 바로 7, 또는 666, 또는 144,000,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한 달, 두 달 반, 70이레, 이런 식으로 현재 시간에서 깔리는 세계와 묵시관이 만들어지는 원래 나왔던 예수 그리스도 의미가 나왔던 그 자리와의 연결성을 그렇게 까는 겁니다.

어릴 때 운동회 할 때 학교 교정에 보통 초등학교 교정이 3층 건물 아닙니까? 운동회 한다 하면 학교 소사 불러다가 여기와 건물하고 만국기를 하죠. 여기 만국기 하나가 666, 7, 144.000, 1.000… 묵시와 시간이 있는 지평과의 연결을 숫자로 표시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이 연결을 한 숫자로 연결됐어요. 12, 야곱과 열두 아들, 12죠. 이 땅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은 하나의 야곱의 언약에 저촉받기 때문에 열두 개가 있습니다. 이 열두 개 만국기가 서로 얽혀 가면서 열둘은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열둘에서 나온 게 10개 하고 2개 하고 나눠지죠. 그런데 둘이 열둘의 역할을 합니다. ‘열은 저리 가.’ 열은 가고 둘, 베냐민지파와 유다지파 두 개가 열둘로 갑니다. 나중에 둘도 없어져 버리죠. 나중에 예수님에서 새로운 족보가 나오는데 이게 열둘이 되는 겁니다.

1에서 12 나오고 12에서 소멸되면서 다시 1로 회귀하는 거예요. 묵시에서 역사를 거쳐서 역사에서 다시 묵시로 가는 겁니다. 인자가 ‘나는 들려야 하리라.‘ 들린다는 말은 이 땅에 왔다는 뜻을 먼저 전제로 합니다. 들릴 때 그냥 들리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 들리는 거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죽이게 했던 이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죽음의 세계입니다. 무의 세계고 죽음의 세계입니다.

죽음의 세계를 어떻게 활용해서 거기서 생명을 끄집어내는가? 그것은 주님의 몫이죠. 주님의 역할입니다.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으로 말미암아 부활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죽음을 재료로 해야만 부활시킨다는 거예요. 죽은 자가 없으면 부활 세계도 없어요.

다른 종교의 신들은 죽음이 없어요. 죽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영생도 가짜가 되는 겁니다. 반드시 죽음을 배경으로 할 때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해야 그것만이 생명이 되고 십자가와 부활을 거치지 않은 것은 그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그건 복음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그러니까 교회 목사가 교회를 한다면 교회는 죽어야 돼요. 죽어야 그 교회가 생명이 있습니다. 교회가 죽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어요. 가정이 산다고요? 가정이 죽어야 돼요. 내가 산다고요? 내가 죽어야 돼요. 내가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야 그래야 내가 생명으로 새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작업은 우리가 아무리 팔짝 뛰고 노력해도 안 돼요. 기다리세요. 기다리면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우리 뜻대로 안 해주시는 축복을 주실 겁니다. 우리 뜻대로 안 해주시는 축복!

그러니까 우리 뜻대로 ‘내 뜻대로 안 될 거야.’ 하는 그 뜻도 안 돼요. 그래서 계속해서 주께서 일방적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 이끌어 가는 거예요. 왜, 생명이 주도권을 갖고 있지, 죽음이 주도권을 못 쥐고 있거든요.

내가 지난주일 낮에 했잖아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하고 안 하고, 안 하고 하고가 결정 되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 천국은 안 가고 싶어도 안 갈 수가 없어요. 때려서라도 데려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귀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집어넣어준 그것이 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야, 니는 니 혼자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집어넣어준 것이 있어. 그러니까 니는 니만 생각하지 마. 너보다도 너 속에 들어있는 게 더 귀해.’ 그래서 우리를 주께서 안 놓으시는 겁니다. 안에 있는 내용물을 위해서 겉을 때리시기까지 하면서 안에 있는 내용물을 옛 우리로 하여금 관심 갖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인간적 입장에서 이 세상 어떤 일도 구원보다 더 귀한 건 없어요. 제일 귀한 게 구원입니다.

자, 그 다음에 갈수록 태산이네. 참. 묵시적 사건이라는 것은 시간이 나왔던 그 원천, 시간을 만들어 낸 원천, 그것은 무엇의 원천이냐, 시간의 의미를 제공하시는 분이 묵시적 사건의 주인공으로 계시는 그 상황이 묵시적 상황이죠.

그 다음에 그 밑에 『구약 성경에서는 이런 기존 주체 자를 부정하고, 새로운 말씀 주체 자로서의 이전 과정을, ‘이름’을 통해서 밝힌다.』이름을 통해서 밝힌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이름이 들어간다는 것, 인간 사이에서 이름이 뭐죠? ‘이것이 무엇이냐?‘ 이죠. 해볼게요. 인간 사이에는 ’이것이 무엇이냐?‘에서 인간은 이름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주여 이게 뭡니까?’ 이렇게 물으면 하나님이 과연… ‘이건 누굴 위한 겁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이것이 무엇이냐‘에서 ’누굴 위함이냐?‘ 여러분 주기도문 외울 줄 알죠? 외울 줄!! 실천보다 외울 줄 알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거 보세요. 주기도문에 뭐가 나와요? 우리는 누굴 위함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함이라고 나오잖아요.

그런데 인간 사회에서는 ‘이게 뭐냐? 컵이냐? 이게 뭐냐?’ 묻잖아요. 이 되도 않은 버릇이 누구한테 묻습니까? ‘하나님 누구십니까?’ 하나님도 어떤 컵이라든지, 카메라처럼 어떤 사물을 지적하듯이 알아서 내가 믿겠다는 거예요. 알아서. ‘예수님이 메시아 맞나요? 다시 부활하신 분 맞습니까? 한번 만져 보겠습니다.‘ ’한번 만져봐라.‘ 겁 없이 만졌죠. 창 자국, 못 자국, “주여 하나님이십니다.” “니가 보고야 믿느냐, 앞으로는 보고 믿는 건 끝났다. 보지 않고 복을 주는 그런 식으로만 믿는 자가 생기는 거예요.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뭡니까? 과거에 경험해 본 게 있어서 그거하고 내가 과거에 기억하고 비교해서 ‘아! 그거다.’ 이 말이죠. 이게 컵이란 걸 어떻게 알아요? 생전 컵 보지 못한 사람은 이게 뭐냐 하면 이걸 모릅니다. 하지만 컵을 컵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 이것이 무엇이냐, 할 때 이건 컵이야, 라는 이름이 붙잖아요. 이름은 ‘이것이 무엇이냐’와 관련이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이 무엇이지? ‘아, 이건 컵이잖아. 엄마가 알려줬어.’ 하거든요. 그러면 엄마가 이 컵은 누굴 위한 것이냐, 그건 안 가르쳐 줬다는 거죠.

이것이 무엇이냐, 물을 때 그냥 호기심에서 그냥 묻는 게 아니고 내가 이것이 무엇이냐, 묻고 답변하는 나를 위해서 이 컵은 존재해야 된다. 이런 뜻 이예요. 김춘수의 시처럼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 꽃은 이미 있었어요. 그러나 내가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그 꽃은 의미가 되어서 나한테 다가오는 겁니다.

사람이 이름을 호명한다는 것은 그건 호명한 나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호명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자기 밖에 모르는 짓이죠. 그러니까 어떤 ‘무엇이냐, 무엇이냐. 3+5=8’ 그게 진리가 아닌 이유가 그게 다 누굴 위함 이예요? 3+5=8이라는 게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게 진리가 아닌 거예요. 사법고시 준비하는 사람이 책을 그만큼 많이 공부해서 판사 되고 또 공부해서 검사되고 이게 촌에 플랜카드 펼치고 할 일이 아니에요. 왜,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진리란 보편적이어야 돼요. 진리라는 것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갖고 있을 때 진리입니다. 누굴 심판할 때 ‘너 지옥 가, 너 천국 가.’라고 판정이 그게 완벽한 판정, 하자 없는 판정이 될 때 그게 진리 아닙니까? 진리 어긋나서 지옥 갈 때 지옥 간 자가 할 말이 없고, 진리 합해서 천국 간다면 천국 간 사람도 지옥 간 사람들이 ‘쟤는 왜 천국 보냅니까?’ 할 때 ‘내가 진리다.’ ‘진리구나’ 이러면 되는데, 자기가 천국, 지옥을 만들지 않았는데 내가 나서서 ‘너 지옥 가.’ 하면 안 믿어주죠. ‘니가 뭐야?’

바리새인들이 지가 법을 안 만들어 놓고 간통한 여인보고 ‘돌로 쳐 죽입니까?’ 할 때 주께서 글을 쓰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할 때 그들은 진리도 아니면서 누구 흉내를 내는 거예요? 진리 흉내를 낸 거죠. 그런데 진리 흉내 내다가 막상 진리를 마주치다 보니까 진리 앞에 깨갱 한 거예요. 여자도 가지 못하고 그냥 눌러 앉고.

나는 진리요, 길이라 할 때는 아무도 진리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받을 때 본디오 빌라도가 뭐라 했습니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잖아요. 그 말은 니에게 그런 답변할 쨉이 못 된다는 겁니다. 니가 오히려 나한테 ‘주님, 진리가 무엇입니까? 내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 물음은 누구를 위함입니까? 다 주님을 위한 물음입니다.’라고 질문했으면 이야기를 할 텐데 ‘진리가 뭐꼬?’ 이렇게 묻는 것은 뭐냐, 진리라고 묻는 나를 위해서만 진리가 있어야 된다. 하는 그런 자기주장이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답변해봐야 개한테 진주 던지는 거와 똑같다 이 말이죠. 귀한 것도 모르고 발로 차고 진흙탕에 던지고 혼자 귀한 것도 모르고 하잖아요. 귀한 거라 하는 것은 모든 게 박탈당할 때 비로소 귀한 겁니다.

우리가 어릴 때 초등학교 때 봤던 서양의 짧은 이야기를 저는 잊지 못하겠어요. 잘 살던 귀족 부인이 사치만 하고 만날 명품만 좋아하는 귀족 부인이 남편이 인도에 가서 무역했는데 잘 나갈 때는 사치를 해도 괜찮다 했죠. 원래 여자 분들은 뭔가 일이 잘되고 곗돈 타면 명품 한 가지 사도 괜찮다 생각하잖아요. 그 여자도 자주 돈을 잘 버니까 자주 사치 하다가 나중에 인도 갔던 남편이 무역선이 풍랑에 졸지에 빚져서 거지 됐거든요. 그 전에 남편이 밀가루를 사줬는데 ‘이 따위 흔한 밀가루’ 해서 밀가루를 다 바닷가에 갖다 버렸거든요. 나중에 여자가 몸종 되어서 거지꼴이 돼서 친구들 다 떠나고 바닷가에 가니까 밀이 있는 거예요. 저 밀!, 보니까 자기가 필요 없다고 버린 밀이 저렇게 귀한 존재인줄 그때 박탈당했을 때 안 거예요.

얼마 전에 예화 들었잖아요. 3가지 소원 이야기, 욕심 없는 농부가 3가지 소원 말하라 하니까 ‘소시지 주세요.’ 하니까 옆에 있던 부인이 기껏 소원이 간만에 찾아온 기회를 소시지 한 개와 바꾸느냐고 하니까 ‘에이, 니 코가 소시지가 돼라’ 하니까 소시지 코가 돼 버렸잖아요. 두 개 썼잖아요. 마지막으로 1개 남은 것, 다시 원상 복귀 해달라고 해서 결국 행운이 찾아와도 인간의 욕심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거예요. 인간의 모습에서 하나의 교훈을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이 박탈당한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시간이라는 변화 속에 있으면서도 뭐라고 착각하느냐 하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영원할 거라고 자꾸 착각하다 보니까 주님의  피로 주신 빗방울과 피로 주신 햇빛을 우리는 무슨 용도로 합니까? 나의 영원함을 정착하기 위한 용도로 그걸 하니까 이게 맞을 리가 있습니까? 햇빛 줘도 그것을 자기를 위하여 소비해버리고, 모든 걸 주를 위해서 주신 햇빛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써버렸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고 기도하라 이 말입니다. 무엇을 달라 하지 말고 니한테 주는 것은 너 하라고 주는 게 아니고 너를 경유해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아버지가 주신 건데 우리는 경유하는 게 아니고 중간에 우리는 새치기해서 이게 도로 주님께 가야 될 택배를 지가 지꺼라고 꿍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그 이름, 우리가 이 컵은 누구를 위함입니까? 할 때 그 누구를 위한 이름이 이스라엘 속에 같이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뭐냐, 동행이 관건 이예요. 이스라엘 자기들끼리 40만, 50만 모아봐야 소용없습니다. 거기에 주의 이름이 동행해야 그게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동행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은 막강한 나라가 되죠. 천하에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민수기 23장 20절 봅시다.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발람이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 다음에 뭡니까?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여러분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거룩하신 분인데 어떻게 자기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요? 그저 하나님은 멀찍이 저 하늘에 계시고 사람들이 그냥 제사 드리는 식으로 이렇게 대충 엮이면 안 되겠습니까? 옛날 전설에도 나오지만 어떤 할머니가 정화수 떠놓고 신에게 기도를 하는데 아니 천사가 직접 와 버릴 때, 정화수고 뭐고 얼마나 겁나겠어요? 그럼 뭡니까? 그동안 직접 맞닥뜨릴 때 겁이 났다는 말은 평소에 제사드릴 때 무슨 제사를 한 거예요? 안 볼 거라고, 보이지 않고 작게 보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드린 것밖에 더 돼요? 기도할 때 기도하는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기도가 돼야 되는데 기도하면서 ‘빨리 끝내고 TV 봐야지.’ 이러면서 기도하니까, 막상 기도한 당사자가 와버리면 기절해 버립니다. 그런 경우 있죠. 사사기 보면 삼손 아버지 마노아, 직접 천사가 와버리니까 ‘죽었다.’ 안 합니까? 장난치듯이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직접 오신 하나님이 직접 자기 백성과 동행했습니다. 그 흔적은 뭐냐, 어린양의 죽음, 피였습니다. 장차 오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면 하나님 보고 싶어요? 보고파요? 500원, 보고 싶다면 사람 손에 죽었던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하나님 찾지 마세요. 끝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다녀가셨습니다. 이건 인간 최고의 사건 이예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해와 달을 만드신 분이 감히 누추한 곳에 사람과 함께 있었다는 것, 그걸로 복음이고, 그걸로 모든 진리는 오버, 이제 끝났어요. 진리는 더 이상 없습니다. 이미 다녀갔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죽었어요.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이런 저런 불평하거나 제사하는 것도 헛일. 뭐라고 제사 드리는데. 제사 받는 분이 직접 갔다 갔는데, 무슨 제사가 필요합니까? 두 번 다시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하여 제사가 필요 있다? 없다? 필요치 않습니다. 다녀가신 분을 믿으면 그게 죄 용서 받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를 세운다? 교회 세워서 뭐 할 건데? 사기나 치려고. 중요한 것은 복음 이예요. 사도들이 복음 전했지, 교회 세우려 한 게 아니에요. 교회는 주님이 세우는 거예요. 복음 전하는 현장에서 교회되는 거예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 잘못해서 죽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만 보였지 주님이 살아있다는 걸 못 본 모양 이예요.

다시 정리해 봅시다. 묵시적 존재가 역사 속에 들어왔다면 그때부터는 이 묵시와 역사의 관계는 묵시적인 것과만 통합니다. 역사적인 어떤 율법이라든지 행함 이런 것은 주님을 못 만납니다. 묵시적 존재가 이미 다녀간 이상은 주님이 제시한 묵시적 관계만, 그것만 통합니다. 물 길러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 한 컵 예수님한테 준다고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이제는 사마리아 여인한테 뭐가 나와야 돼요? 끊임없이 계속 물이 나와야 돼요. 그게 뭐냐 성령이 나와야 돼요. 성령이란 이 묵시적 그걸 통해서만 주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식과 형식 종교적인 그거, 천주교에서 옷 입고 향 뿌리는 거, 교황들 머리 관 덮어 쓰는 것, 완전히 이거 딱지 따먹기도 아니고 애들 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가관이라. 왜 그런 도포를 걸칩니까? 그거 몇 만원 주면 사는데. 도포도 요번에 된 교황은 겸손하다고, 겸손하나 안 하나 그런 유니폼을 왜 입는데? 유니폼 입는 것은 자기 과시예요. 자기 권력용이라고요.

주님이 언제 그런 역사적 산물 가지고 주님을 만나요? 성령 안에서만 만나지. 성령을 만나면 ‘옷 입고 갖추고 오너라.’ 이런 것 없어요. 성령 만나는데 ‘파마도 하고 오너라.’ 이런 거 없다니까요. 성령 만나면 반지 빼고. 이런 거 없어요. 반지를 손가락마다 다 끼고 오던지 머리를 파마를 하든지 뭘 하든 성령으로 왔다는 데에서는 주님 앞에 그럴 게 없습니다. 거지가 되든지 부자가 되든지 성령 안에서는 다 구원받습니다.

이게 바로 주의이름이 우리와 그 당시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럼 주의이름이 함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했겠어요? 이스라엘 내부에서 반복적으로 매일 이루어지는 게 뭐라 했습니까? 제사! 주의 이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흔적인데 일종의 그림자, 흔적은 바로 제사입니다. 그런데 제사는 그냥 흔적일 뿐이잖아요. 제사가 하나님의 실체라고 여기고 제사만 해서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러니까 쉬운 예를 들면 저 안방에 어르신은 계시는데 도통 바깥출입은 안 하셔요. 그런데 오랜만에 시누이가 와서 ‘언니, 우리 아버지 계셔?’ ‘계셔’ ‘어떻게?’ ‘어흠,어흠’ 기침을 하거든요. 흔적이거든요. ‘어, 기침하니까 아버지 살아계시는구나.’ 하고 갔어요. 나중에 보니까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죽이고 녹음 틀어놓고 기침하는 것처럼 했다 말이죠. 실제가 아니고 제가 방금 지어낸 거예요. 아이디어 드라마에 사세요.

이럴 때 그 집안 망해야 되죠. 그래서 망한 집안이 누굽니까? 이스라엘이고 그래서 망한 데가 교회입니다. 교회가 녹음기 틀어놨어요. 절에 가면 뭐 틀어요? 염불하기 싫어서 녹음기 틀잖아요. 염불도 목 아프고 하니까 녹음기 틀잖아요. 반야바라 밀다 어쩌고 저쩌고…밀고 당기고 하잖아요. 돈만 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하고 예배하고 전부 다 흔적이거든요. 그걸 모방의 모방을 한 거예요. 기독교 문제는 모방을 한다는 문제고 천주교는 모방의 모방을 하는 거예요. 구약을 모방하거든요. 구약을 흉내  내니까 이건 모방의 모방이라. 그러니 다른 종교도 관용하자. 이런 소리 나오는 기라.  그저 돈만 챙기려고 온갖 짓 하는 거죠.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건 분명히 제사라 했죠. 오늘날도 주의 이름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뭡니까?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산 제물 되게 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누가 계시고?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죽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바깥에 있는 성도는 뭐냐, 날마다 회개하는 거죠. 회개한다는 말은 날마다 반성한다는 말이 아니고 날마다 ‘또 세상만 보고 살았습니다.’라고 자백하는 걸 말하죠. 또 세상의 귀하지 않은 걸 귀하다고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진짜 귀한 것은 죄 용서인데, 곗돈을 귀하다고 여기고 애 성적 올랐다고 좋다고 눈물 흘리고, 김 연화 승리했다고 캐나다 학생들이 애국가 불러줄 때 눈물 흘리고 이랬다 이 말이죠. 캐나다 합창단이 애국가 부를 때 눈물 나오죠. 다음에 김연화가 2등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까불다가 CF만 찍다가 연습 안 했구나.‘ 하고 온갖 소리 하겠죠. 인간이 이렇게 간사해요. 자식이 성적 오를 때 눈물 나죠. 그 애가 나중에 술 먹고 들어오면 화나죠. 도대체 컵은 누굴 위한 컵이란 말입니까?? 김 연화는 누굴 위한 김연화예요?

주님의 용서를 보여주는 김연화가 돼야 될 텐데 우리는 뭡니까? 내가 소속돼 있는 대한민국의 영광, 곧 나의 영광을 위하여 김연화가 잘했으니까 박수치고 싶은 거예요. 그럼 주기도문 이제부터 바꿔야 돼요. 이 땅에 있는 대한민국의 영광을 위해서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회개가 주께서 우리와 주의이름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들어보면 쉽죠? 신앙생활이. 쉬워도 너~무 쉽죠. 이 좋은 신앙, 듣기 싫어서 바꿔줘. 바꿔달라고 대들고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복음을 아는 사람은 분노를 느끼죠. 분노를! 니 하나 교회 오고 안 오고 문제가 아니고 예수를 죽인 너! 이런 분노를 느껴야 돼요.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분노만 느끼고 나머지 모든 일은 바보가 돼야 돼요. 천하 바보,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주님을 죽였던 자라는 분노만 있으면 돼요. 괜히 자기 사기당한 거 분노하지 말고, 내 인생 힘들게 했던 것에 대해 화내지 마시고, ‘나 때문에 주님 죽었다.’ 하는 그 자체보고 자기가 미워서 분노해야 되고, 나머지 일은 바보 등신 돼야 돼요.

어떤 사람을 자기를 빙신(氷神)이라고 해서 나는 굉장히 겸손하다고 생각했는데 빙신은 그게 아니고 스케이트 타는 신, 얼음 위에서 신, 얼음 스포츠 신이라고 이름 잘 졌어요. 빙신.

그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한다. 215 페이지, 주의이름이 등장한다는 말은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주의이름만 등장했죠. 분명히 사람들은 누구이름만 있다고요? 주의이름만 있죠. 그런데 주의이름이 겨냥하는 다른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이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자기들 각자 이름밖에 모르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자기 이름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주의이름이 진짜 공격하는 것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해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함으로서 주의이름으로만 등장하는 순간에 주의이름과 정 대립이 되고 적대가 되는 주의이름과의 싸움을 한바탕 붙을 다른 이름이 서서히 이스라엘 주변에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호와 외 다른 이름, 다른 신들.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름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니 여호와 이름 알아라.’가 아니라 여호와란 이름과 다른 신들이 이름자체가 차이가 난다는 그것을 유지해야 될 책임이 이스라엘 내부에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뭐만 지키면 돼요? 여호와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뭐를 알아야 됩니까? 여호와 말고 다른 이름도 같이 알아야 될 역할을 맡은 겁니다.

그 다른 이름이 뭐냐 하면 구약에서는 우상이 되겠죠. 그런데 신약에 오면 뭐가 됩니까? 우상의 이름이 아니고 인간의 이름, 인간의 이름인데 인간의 이름이 다니엘을 거치면서 짐승의 이름이 됩니다. 분명히 인간인데 짐승이죠.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에게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그 다음에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은 자기 이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사람의 전체 이름이 곧 누구 이름으로? 자기 이름으로 결합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드디어 신약에 오게 되면 구약도 마찬가지지만 이름이 그냥 이름이 아니에요. 이 묵시적 이름은 지상에서 그냥 이름이 아니고 활동하는 주체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이름이 온다는 것은 이름이 적힌 내용대로 그대로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것 이예요.

야곱의 이름이 바뀌죠. 이스라엘로. 이삭, 약속의 이름, 아브라함?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스라엘 이름 자체가 주의이름이 지어진 이름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이름을 통해서 주의이름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이 움직이는 모든 것은 결국은 이스라엘 이름을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한 것이고.

그렇다면 진짜 주의이름에 합당한 분이 온다면 그동안 이스라엘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곧 누가 일으킨 사건이다? 예수님이 주동자가 되셔서 일으킨 사건이죠. 그 모든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 탄생에 다 담아버렸습니다.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신들과 싸웠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누구와 싸웠다? 애굽의 신들과 싸웠죠. 이게 신약에 오면 죄와 싸운 것이 되고 마귀와 싸운 것이 되는 겁니다.

분명히 소돔과 고모라에서 주께서 심판했죠. 예수님이 심판했죠. 마태복음 11장 21절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하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3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호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여기서 보면 두로와 시돈이 이사야에 보면 이미 저주받기로 돼 있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소돔도 이미 유황불이 떨어졌죠. 그러면 그동안 주의이름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마구 조졌죠. 그 무엇을 분간하기 위해서? 주의이름이 함께 있는 나라만 영원한 나라고, 나머지는 이스라엘이 영원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영원치 않음을 보여줄 나라로서 그동안 쥐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멸망하는 이유는 몰라요. 모르는데 여기에 그 당시 그냥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이 있으니까 멸망 안 하고 다른 나라는 주의이름이 없으니까 망하는구나.’ 이렇게 했는데 그 상세한 이유는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주위로부터 부딪히는 가운데서 ‘아하! 이 세상 자체가 주의이름에 대드는 악마의 세계구나.‘ 하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누굴 만나죠? 그동안 숨어서 안 들켰던 마귀가 오죠. 와서 3가지 시험하잖아요. 이미 예수님은 알았어요. 누구하고 싸우는지. 나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와 이미 싸웠는데 마귀와 싸울 때 꼭 마귀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요. 누구냐 하면 주의이름에, 주의이름하면 어려우니까 예수님으로 합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 없고 쓰잘데기 없다고 외치는 모든 것들이 바로 마귀가 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인격적으로 해야 된다. 십자가가 아니고 인격이 중요한 것이다. 교회라 하는 것은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서로 화목하고 열심 내는 게 교회다. 이게 다 마귀가 외침이나 소리예요. 마귀의 음성, 마귀의 음성이 덜덜덜 떨리는 게 마귀의 음성이 아니고 침착한 양의 탈을 쓴 천사의 모습으로 ‘십자가가 다가 아니죠.’ 요런 식으로. 이단은 웃으면서 하잖아요. 여호와증인들, 훈련받거든요. 어디를 가나 절대로 화를 내지 말고 웃으면서 눈 아래로 깔고 ‘선생님이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우리 기본적 인격적으로 세상 사람보기에도 그렇게 성경을 보시면 안 되죠. 우리 성도와 성도의 몸으로 화평 중에 이야기해야 되죠.’ 이게 마귀라니까요.

우리는 모든 인간에게서 분노해야 돼요. 박OO나 모든 인간에 대해서 분노를 느껴야 돼요. 예수님을 죽인 사람. 심지어 우리 자신도. 우리 자신을 미워해야 구원받게 되잖아요. 자기 자신을 미워해야.

215페이지 봅시다. 『기존의 이름들을 공격하는 전략적 이름이요, 전술적 군사 개념이다. “여호와는 용사시니”』용사가 하는 일이 뭡니까? 게임하는 사람입니까? 싸움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의이름이 이 땅에 왔다는 것은 놀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싸움하자는 거예요. 싸우려면 적이 있어야 되잖아요. 적이 뭐예요? 적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을 헛된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 그걸 사도바울의 갈라디아에서 보면 행함을 내세우는 사람들.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 행함에 관심 두자. 행함에 주목하자. 이게 전부 다 십자가의 원수, 악마죠.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한번 보세요. “여호와는 용사시니“ 얼마나 말이 어렵습니까?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이름이란 말은 우리 기존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이것이 무엇이냐’로 돼 있는데 묵시적 이름은 ‘누굴 위해 싸우십니까?’ 그 누굴 위해 싸우느냐는 그것에 합세 하는 것, 그러면 그 순간 나는 뭘 접어야 됩니까?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온 생은 이제 끝났죠. 더 이상 나를 위한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나한테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를 위한 인생이란!

나의 이름은 주의이름으로 완전히 자리를 양도해 버렸어요. 그러면 내 이름으로 싸울 이름이 별로 없어요. 주의이름만이 나를 가지고 제대로 적을 파악해서 싸우는 용사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기껏 내 이름으로 하게 되면 그냥 바가지로 홍해 물 푼다고 바빠요. 퍼 올리면 또 내려오고 퍼 올리면 또 내려오고, 이게 언제 줍니까? 주의이름으로 하니까 다 돼요. 모세가 지팡이를 댔다. 지팡이 화학성분 한번 분석해 보세요. 거기서 능력이 나오는가. 안 나오잖아요. 모세가 지팡이 가지고 올리니까 아말렉 전쟁에서 이겼잖아요. 그 지팡이, 나중에 그 지팡이가 뭐 된 줄 알아요? 우상 돼요. 그 지팡이 가지고 고라 자손할 때 그 지팡이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그 지팡이에서 몸에 좋다는 살구가 나왔어요. 살구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살구꽃이. 지팡이는 용도가 다양했었습니다. 지팡이가 살구꽃을 핀 게 아니고 주의이름이 지팡이를 사용하신 거예요. 그 지팡이 같이 오늘날 자기 백성, 성도를 지금도 사용하시는 겁니다. 죄의 꽃을 피어라. 죄의 꽃! 니는 죄의 박물관이니까.

우리가 죄의 꽃을 피워줘야 여호와께서 여호와 이름으로 십자가가 우리를 통해서 발현될 게 아니겠습니까? ‘나의 모든 행위는 결국 나의 죄로 돌아왔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해야 그런 죄인도 십자가 피로만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정 중기 목사님 그 분한테 전화가 왔는가, 글을 남겼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오직 예수의 피만 구원받는다. 글로 남겼어요. 앞에 임 청일이라는 분이 글을 썼죠. 목사님 최고다. 라고. 시험 들기 얼마나… 지금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 자, 이때 이 목사는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보자. ‘아닙니다. 나는 최고가 아닙니다.’ 이게 더 우스워. 이래도 흠 잡히고 저래도 흠 잡히고.

여호와 이름이라는 것, 내가 이 땅에 겸손해야 돼, 이것도 여호와 싸움이 아니고 자기 싸움 이예요. 겸손하면 구원받습니까? 말도 안 되는 거죠. ‘나는 최고 아니에요.’ 이러면 구원 받아요? 구원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가지고 전쟁에 나서서 승리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한 그 전리품 이예요.

아까 이야기한 거 다시 해봅시다. 이미 병균이 있어 왔다는 것은 우리가 감염된 순간에 아는 것처럼, 감염될 때 병균이 새로 온 게 아니고 감염이 이미 왔다는 것은 전에 있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죽는 것은 이미 죽어있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처럼,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이미 승리했다.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다 이루심이 놀랍게도 우리를 하나의 이루시는 출구로 보여주는 맨홀 뚜껑으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뿐 이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주님이 잉크라면 우리는 볼펜 끝에 있는 동그란 쇠구슬에 해당되는 거예요. 우리를 밀고 그릴 때마다 우리에서 뭐가 나온다? 예수님의 피가 쏟아지는 겁니다. 우리는 완전히 쪼다 돼 버리고, 살아도 살 필요가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계속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피가 증거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마귀는 그걸 막고자 하고 그걸 못 보게 하고 못 듣게 하는 그겁니다. 딴 거는 다 허용되는데 제발 예수의 피로만 구원받는다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마라. 예수 피 믿고 그 다음에 성령 안에서 헌금하고 이러면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해야지, 그냥 예수의 피로만 구원받는다 하지 마라. 예수 믿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서 그걸 보태야 구원받는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얼마나 내 말을 못 알아듣는지 ‘막 사세요.’ 하니까 그들은 예수 피 믿고 그 다음에 막 살아야 구원받는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 이 근호 목사는 막산다 하는데 막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하는 자체가 예수의 십자가로도 모자라고 ‘막 살아서는 안 됩니다.’를 보태야 구원받는다는 그런 마귀 설교를 한 거예요. 나중에 끝에 가서 ‘결국 우리는 막 살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치더라도 십자가 믿고 그 다음에 ‘막 살 수밖에 없습니다.’는 그 과정을 거기 간 사람은 그 과정을 다 봐서 그 과정을 자기도 모방할 게 아닙니까? 그게 무슨 복음 이예요? 모방이지. 모방의 모방을 하는.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어느 교회 가고 안 가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늘도 ‘십자가 피만’이 할  때는 누가 뭐래도 형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형제냐 아니냐. 확인할 때는 그 교회 의미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체도 막 살고 있는 중입니다. 그게 화나서 삐진다면 형제 아니고, ‘제 생각과 똑같네요. 저도 막 살고 교회 아무 의미 없습니다. 십자가 피만이 최고죠.’라고 나온다면 지가 어느 교회고 서바나고 뭐고 관계없이 형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십자가마을에 남겼으면 십자가마을을 통해서 전부 다 형제로 확인하면 되잖아요. 삐지긴 왜 삐집니까? 삐진다는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 제 논리에 문제 있어요? 맞잖아요.

그걸 굉장히 싸웠어요. 그냥 달만 봅시다. 사람 손가락 보지 말고, 이러니까 저쪽에서 ‘니만 달 보나, 우리도 달 본다.’ 그 말 할 이유가 없다니까. ‘아유, 같이 보고 있습니다.’ 이러면 될 걸 가지고, ‘니만 달 보나, 왜 니만 달 본다고 주장하나’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이건 정신이 어디 가 있느냐 하면 달 본다 해놓고 거짓말한다니까요. 달만 보는 게 아니고 ‘지만 달본다.’ 하는 것을 관심 두고 있어요. 이게 뭐냐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음 없는 사람은 모방만 해요. 자꾸 누굴 모방을 해요. 아휴, 가짜 안 들킬 줄 알았지, 다 드러나요. 다 들키게 돼 있어요.

내가 주일 오전 설교인가 마지막 때 죽고 난 뒤에는 ‘미안합니다. 명단에 없네요.’ 얼마나 무서워요? 제일 무서운 말 이예요. 실컷 복음 알고 다 했는데 명단에 없다니까.

아까 한 것 잊어버렸을 거예요. 옛 사람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말씀, 말씀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생명책의 명단이 있다. 이게 들어오잖아요. 요게 옛 사람을 덮쳐 버리면 이건 내가 명단에 없다 해도 명단에 있다는 것이 내가 믿어지는데 내가 어떡하라고? 내가 믿어지는데 내가 부인할 수 없잖아요. ‘명단에 있어야 할 건데.’ 애쓰는 것은 소용없어요. 이건 지가 자기를 속이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것이 덮쳐왔을 때는 이 명단도 같이 덮친 거예요. 그럼 뭐든지 주의 뜻대로 말씀대로 될 뿐입니다. 우리는 그냥 당하기만 하는 거예요. 이게 믿음 아니에요? 그냥 당하기만 하는 거예요. 뭐를 새삼스럽게 믿어 볼까요? 어떻게 잘 믿습니까? 할 필요 없어요. 명단에 있으니까 주께서 찾아왔지, 뭐, 이게 자연스럽게 믿어진다니까요. 그걸 설명을 어떻게 해요? 무슨 수로 설명을 해요? 설명하면 또 흉내 낼 텐데. 설명하면 문제예요. 나도 믿는데. 뭐라 했나 믿든지 니 맘대로 해라.

십자가 나간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왜 내 믿음을 믿음이라고 인정 안 해주고 내 성령 받은 것을 성령 받은 것으로 왜 인정을 안 해주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더욱 더 화가 나는 것은 그걸 왜 우리한테 인정받으려 하는 그 심보가 더럽다 이 말 이예요. 그게 안 믿으니까 믿는 척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지금 화 안 내려 하는데 오늘 좋게 보내려 하는데. 강의하다 보니까 말씀을 보니까….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홍해 건너 갈 때에 그 사람들이 바지 걷었습니까? 아니죠. 주어진 은혜 속에서 그냥 걸어갔죠. 물론 다리 아픈 사람은 휠체어 타고 밀면서 갔을 것이고, 우리가 그냥 살아요. 그런데 이 환경은 누가 허락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피로 온 것이 믿어지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님의 모든 저주로부터 벗어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뭐 어떡하라고? 휠체어 탈까요? 가면서 오징어 몇 마리 잡을까요? 뭐 그렇게 유별나게, 그냥 사는 대로 그냥 살면 되는 것이지, 환경이 예수님 피로 조성한 건데, 뭘 새삼스럽게 별을 딸까요? 달을 딸까요? 따다가 뭐 할 건데. 예수 믿고 어떻게 살까요? 그냥 사세요. 사시는 대로 살아요. 유행가 좋아하면 유행가 부르고, 개똥벌레 부르고 살아가라 말이죠.

찬양을 한다는데 찬양 중계방송을 보니까 저 찬양 끝나고 무슨 노래 부르지? 박 종훈이 나와서 전부 다 학생들이 서서 2시간 동안 노래 부르는데 저 끝나고 무슨 노래 부르지? 찬양을 하면 연속적으로 계속 이어져야 돼요. 나중에 목 아파요. 그 쉬는 타임에 무슨 노래 부를까?

우리는 찬양케 할 때 찬양입니다. 찬양노래 부르는 게 찬양하는 게 아니고, 찬양케 하실 때, 노래 부른다고 찬양이 아니고, 자기를 잊어버리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그게 찬양 이예요. 그러니 결국 주님의 찬양 이예요. 천국의 찬양이고 천사들이 하는 찬양이고. 찬양 내용 하나밖에 없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거룩, 거룩, 거룩”이예요. 거룩, 거룩, 거룩이 아니고, 나는 이 거룩 노래 불러도 참, 내가 봐도 가증스럽습니다.‘ 하고 회개할 때 그게 참된 찬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사는 형편이 태어난 것도 죽는 것도 모든 게 주의 손에 있는데, 그 주께서 십자가에서 피까지 흘려 주셨사오니 우리가 피 안에서 살아가는 이 기쁨을 세상한테 빼앗기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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