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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2 01:21:01 조회 : 2912         
정치적 악마 111201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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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1.206) 11-12-08 08:20 
가락교회111201-요한계시록16장(정치적 악마)28강a-이 근호 목사
제 28강a

요한계시록 16장을 다시 봐야 됩니다. 평면 층이 이렇게 있으면 성경의 요한계시록 16장이 나와 있으면 그 밑 지층에 또 이렇게 있어요. 그래서 위에 것만 문맥을 훑어가다 보면 밑의 것을 놓치죠. 밑의 것과 위의 것의 연관은 어떤 연관이냐 하면 밑에 감추어진 (이걸 지층이라 합시다.)지층 위에 문자로 돼 있는 문맥들, 글자가 있으면 그 지층은 밑에 있는 어떤 구조에 의해서 뿜어져 나오는 하나의 지형 같은 거죠. 산 있고 강 있고 이런 지형, 이걸 지난  번에 제가 힘의 분포도란 말을 했죠? 이과 계통은 다 알잖아요. 포텐샤 분포도, 에너지가 이렇게 입체적으로 볼록 올라오는, 수평적으로 하면 이렇지만 삼차원적으로 하면 이렇게 힘의 분포가 높고 낮게 올라오죠.

이렇게 볼록볼록 올라오는 이것이 그냥 표면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밑에 뭔가 뿌리가 있을 게 아닙니까? 이 뿌리를 그냥 모르고 지나가서는 해석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성경에 뿌리가 있어요. 왜 위에 이런 문자들, 문맥과 문장들이 어떻게 해서 배열됐는가, 그것은 밑  바탕에 있는 영적 활동성, 또는 영적 대치 성, 영적 구조에 의해서 표면화된, 이게 지형처럼 볼록볼록 튀어나오는 거예요.

특히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제일 위 부분에 등장하는 용어들이 개구리도 나오고 용도 나오고 요란스럽죠? 짐승도 나오고 유브라데도 나오고 아마겟돈 이런 용어들이 등장한 것은 하나의 이렇게 이치적으로 보면 지형처럼 등장하는 거예요. 이것을 밑에 있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위의 것만 연결시켜버리면 말이 안 돼요. 왜 이 단어가 여기 박혀 있어야 되며 왜 이 단어는 저쪽이 아니고 하필이면 요 자리에 배치돼 있어야 되느냐, 이런 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위층만 해 버리면 사람들이 위층을 해석할 때 흔히 잘못된 해석이 뭐냐 하면 이걸 시간 속에서 그냥 해석을 해버립니다. 시간 속에서 해석을 해버리면 ‘야! 요 사건은 언제 일어날 거야? 아무리 봐도 이런 사건은 없는데 언제 일어날 거야?’ 이렇게 되거든요. 특히 예를 들면 8절에 보면, “네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해에게 하나님의 대접을 쏟는다는 것은 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저주하는 심판을 내리는데 대접 같은 경우에는 최후의 심판이 아니니까 일부를 태우겠죠.

전에   일곱 인 할 때는 1/4을, 일곱 나팔 할 때는 1/3, 일곱 대접 할 때는 다 쏟아버리니까 완전히 all, 완전히 다 퍼부어버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여기에 7인 지층이 있었고, 갈아치우고 7나팔도 갈아치우고, 7대접도 치워버렸다 말이죠. 7인, 7나팔, 7대접이 위층을 장식했다면 밑바닥 지층에는 7인을 유발했고 7나팔을 유발했고 7대접을 유발했던 마그마 같은 원형질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것을 찾아낼 줄 알아야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 말입니다.

이걸 놓쳐버리면 ‘아, 7인은 옛날에 지나갔어. 그 다음 7나팔은 서기 1000년부터 2000년 까지 인가?’ 이런 식으로 이걸 시간상으로만 자꾸 해버리면 거짓말입니다. 해석 자체가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 지층에서 올라오는 이런 해석은 시중에 주석을 봐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없죠.

처음에 여기 지층에 있었던 것은 7인, 7나팔, 7대 이전에 있었던 것은 7교회죠. 7교회 이야기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계속 필름을 갈아치우면 똑같은 영적인 부글부글이 있는데 똑같이 갈아치운다 말이죠.

그러면 이 안에 들어있던 7대접이니까 마지막 코스 중에서 나온 용어들을 보니까 12절에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참, 그이야기 해 봅시다 9절에 “네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이런 경우가 역사상에서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없죠? 없잖아요.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는” 이건 혹시 소돔과 고모라? 불 심판? 그런데 그 불이 해에서 온 겁니까? 거리가 먼데? 이건 아마 근처에 있는 지진, 화산폭발은 이해가 되는데 태양에서 날라 온 것 같다? 이거는 도저히 태양에서 날아오려면 거리가 한참 걸리는데요.ㅎ

그래서 태양에 보면 흑점이 폭발할 때 강력한 태양폭풍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자외선이 지구까지 오게 되면 사람이 화상 입는다? 뭐 그런 건가요? 바깥에 안 나가면 되지 화상 입었다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그런 경우는 아니거든요. 손이 탔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이런 경우 있습니까?

10절 한번 봅시다.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여기 대접을 어디에 쏟는다 했습니까? 짐승의 보좌에. 옛날에 미국과 이라크가 사막에서 전쟁할 때 이라크 사람들이 사막에 벙크를 만들었어요. 안에 들어가니까 숨어 있고 했죠. 짐승이라 하는 것은 볼록 튀어나온 건데 이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해석을 할 때 짐승의 보좌는 어디에 있느냐, 그 모습 보고는 몰라요. 짐승의 보좌가 동그랄 수도 있고 뽀족할 수도 있고 그럴 수 있는데 이것 가지고 ‘이게 짐승의 보좌다’ 하면 그 소리 듣자마자 짐승은 밑에 사공이 부르는데, 이 집에 간첩 있다 하면 간첩들이 그 소리 듣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다른 집으로 이사 가죠.

그러니까 역사상에서 나오는 어떤 특정한 걸 담아가지고 ‘요게 짐승의 보좌다.’라고 잡아버리면 벌써 이게 빠져버려요. 거기는 범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천적으로 밑둥치를 완전히 까발려야 여기서 아무리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지 못할 정체가 손에 잡힐 수가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하시기 전에 먼저 광야에 가서 누굴 만나죠? 마귀를 만나죠. 그렇다면 마귀를 만난다. 이거하고 예수님 하고 요걸 하나의 지층으로 보세요. 이걸 하나의 위 표피층으로 봅시다. 그러면 이 밑바닥에 마귀가 어떤 내용으로 밑에서 퍼 올리고 밑에서 퍼 올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퍼 올리고 해서 새로운 모습이 등장한 게 아닙니까? 예수 믿는 사람의 직업이 목사다. 이런 게 없잖아요. 장사하는 사람도 예수 믿을 수 있고 농사짓는 사람도 예수 믿을 수 있고 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다양성으로 퍼 올리잖아요.

이건 마귀도 마찬가지예요. 꼭 마귀라 해서 절에 가서 부처 섬기는 것만이 마귀가 아니잖아요. 다른 마귀가 계속해서 밑에서 나온다 말이죠. 퍼 올려오는 마귀가 마귀 되게 하기 위해서 밑에서 퍼 올려오고 예수님은 예수님 되게 하기 위해서 퍼 올려오는 그 원래의 원형질, 원래의 구조를 오늘 한번 살펴보자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일편 표면에서는 예수님과 마귀가 만났습니다. 그때 그 당시 마귀가 예수님께 제안한 게 3가지 있었어요. 3가지 시험이라 하지 않습니까? 3가지 시험이니까 오늘날 21세기에도 이 3가지 시험을 표면층으로 보면 ‘3가지 실험 같으면 그건 우리하고는 상관  없는데.’ 하지만 이러한 형태로서 나올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다 말이죠.

3가지 시험은 예수님한테 해당되잖아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되는 시험을 또 와서 밑에서 건져 올라오는 거예요. 자기가 출생되는 원래의 자리에서 또 퍼 올려서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3가지 시험으로 시험을 하는 겁니다.

첫 번째는 돌이 떡 되게 하라. 두 번째 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기적이죠. 세 번째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너한테 줄게. 권력과 부귀를 나한테 절하면 다 줄게.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왔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메시야 상에 합당한 것을 마귀가 대표로 이야기한 거예요. ‘백성들이, 이런 류의 메시야를 고대했었지? 고걸 내가 예수님한테 아뢸게. 요구할게.’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신께서 도와주시고 기적을 베풀어서 메시야임을 확인하고 세상의 모든 권력을 여호와의 나라로 정복되는 것, 이러한 세 번째는 선교고, 두 번째는 기적이고 첫 번째는 경제적인 사정을 해소하는 것.

그럼 경제적 문제 해결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함께 있어서 신기한 기적들을 보고 그리고 여호와 내가 믿는 종교로서 세상을 몽땅 다른 종교는 다 밀어내고 완전히 징기스칸 나폴레옹처럼 권력을 정복하는 것, 이게 바로 기존의 유대인들,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꾹꾹 안 들키면서 숨어있었던 그들의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날 교회죠?ㅎ똑같아요. 대중들이 원했다니까요.

교회는 하나님 말씀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 의견을 들어서 만들어져요. 왜냐 하면 교회는 돈이 교회를 만드는 거죠. 돈 없으면 교회고 뭐고 형광등도 하나 못 갈아 끼우는데 교회 문 닫아야 되죠. 돈이 있어야 교회가 돼요. 그러니 교회서 하는 이야기는 돈 되는 소리만 한다 이 말이죠.

돈 되는 소리만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그건 인간을 그걸 몰라요. 오늘 첫 번째로 어려운 거 하나 나왔습니다. 인간은 지가 원하는 것을 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인간은 뭔지를 모르는데 누구는 알아요? 사단은 알고 있어요. 사단은 알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욕구와 욕망을 창출해 줍니다.

모든 TV 선전 광고 보세요. 광고 보고 난 뒤에 그걸 갖고 싶어요. 그런 광고를 안 봤으면 그걸 안 갖고 싶은데 보고 난 뒤에 그걸 갖고 싶어요. 이게 마귀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뭘 원하는지를 모릅니다. 이게 제가 방금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은 대자연이 있으면 그 대자연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게 사람 이예요. 그래서 사람이란 내용물은 대자연과 교류하게 돼 있습니다. 이걸 더 어렵게 하게 되면 이런 질문이죠. ‘당신은 혼자서 누구하고 대화합니까?’ 진짜 어려운 문제예요.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당신은 누구하고 대화합니까? 그 대화 내용이 뭡니까?’ 사람이 아무리 입이 무거워도 자기하고 대화 안 하는 사람 없어요. 전부 다, 중얼중얼, 뭔가 아침에 길을 갈 때도 뭔가 생각하고 대화하고 늘 대화해요.

그 대화 상대가 누구냐, 그 대화 상대가 누군지를 몰라요. 모르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마귀입니다. 악마가 대화 상대가 돼요. ‘니 이거 원하잖아, 니 이거 가지면 기분 좋잖아.’ ‘기분 좋겠어.’ 혼자서 마귀라는 것만 감추어 버리면 ‘나 이거 가졌으면 좋겠어.’ 이래 되거든요. 그걸 마귀의 정체를 갖다 붙이면 돼요. 마귀는 우리가 뭘 원하는지를 알려주고 우리는 그때부터 그걸 소망하게 돼 있고 그 소망을 위해서 우리는 대자연 속에서 그 필요한 것들을 위해 행동으로 나서게 되죠.

그래서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자연의 일부, 세상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세상 따로 내 따로가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이건 사람에게 있을 수 없는 사고방식 이예요. 구원받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만약에 저하고 바닥하고 딱 붙어있다면 내가 여기서 발을 떼면 바닥이 같이 뜯겨 나오잖아요. 그러니 이것은 안 되는 거예요. 차라리 이 대자연과 함께 바닥과 함께 이렇게 붙어사는 게 편해요. 사람은 편한 대로 살게 돼 있습니다. 사람은 기분 따라 살게 돼 있고 편한 대로 살게 돼 있어요. 이거는 신학이고 철학이고 필요 없어요. 가장 인간의 본 모습은 그냥, 그냥 그때, 그때 기분 따라 살고 그리고 편한 대로 살고 그걸로 끝입니다.

환경이 바뀌면 바뀐 대로 인간은 거기에 적응하게 돼 있어요. 왜, 바뀌어야 편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껄끄러워요. 버스 정류장에서 담배 피우면 벌금 10만원이다, 오늘부터 버스 정류장에서 피우면 서울 같은 경우에는 10만원 이예요. 그런데 처음에는 힘들 거예요. 하지만 그 다음부터 버스 정류장에서 피우려면 뭔가 찝찝해요. 그런데 나중에는 10번만 해보면 안 피우는 게 편해요.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게 아닙니다. 몸이 따라 줘야 되는데 몸이 자기가 생각한 몸은 따로 없어요. ‘피우지 마.’ 하면 ‘예’ 하는 그게 그날부터 새로운 자기 몸이 돼 버려요. 사람은 바람 부는 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 둘둘 둘러가면서 먼 길을 돌아서 돌아온 도착지점은 결국은 사람은 그때, 그때 달라요. 그 한마디가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바람 부는 낙엽처럼 부는 대로 갈 뿐입니다. 안철수는 안 철수가는 대로 가고 이건 정치권도 같이 따라가게 돼 있어요. 힘 따라 가요. 인간은 힘이 있는 곳에 모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설교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힘의 분포도라 했죠. 애 낳으면 서울 보내는 것, 왜 서울에 가장 힘의 분포도가 높으니까. 기업을 해도, 여기 몇 층 입니까? 15층이라 합시다. 만약에 회사 직원이 15층에 있는데 옆에 새로 35층이 있으면 자리를 옮깁니다. ‘우리 저기 가고 싶다.’ 왜, 힘의 분포도가 높으니까.

인간은 자연스럽게 힘 따라 가게 돼 있습니다. 세상은 힘의 에너지의 충만 이예요. 힘으로 가득 차 있어요. 그 힘과 전기 속에서 우리는 푹 젖어서 습관적으로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그 세상의 힘을 받는 식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생존하는 법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우리는 익혀 온 거예요.

내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이 나를 만듭니다. 오줌 마려운데 참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어요? 몸이 오줌 누겠다는데 지는 따라서 오줌 눠야 돼요. 지퍼 내려야 됩니다. 그 몸이라 하는 것은 단독이 아니고 주변에 있는 환경과 반응, 교류하고 있다니까요. 그러니 우리의 몸은 자연의 일부고 자연의 일부가 우리 몸이고 그래요. 우리가 이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느 정신병자가 아니면 그건 바보 같은 소리예요. 아니 날 추우면 옷 입고 다니고 더우면 옷 벗고 다니게 돼 있는데 이걸 여기에 이의를 답니까? 여기에 무슨 법칙이 필요하고 철학이 왜 필요하고 신학이 왜 필요하고 성경이 왜 필요한데요. 더워서 옷 벗는 건데.

선악과 따먹고 부끄럽다. 이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그 자연스러운 것을 주께서 뭐라 합니까? 그걸 뭐라 하느냐, 한 자로 ‘죄’라는 거예요. 그러니 죄는 어떻게 행하지 말고 죄는 우리의 운명의 일부고 우리의 바탕이고 우리 밑바탕에 마귀 있는 것은 우리가 수용해야 될 우리의 운명 이예요. ‘마귀야 물러가라.’ 웃기고 있네, 마귀가 왜 물러가야 하는데. 마귀는 우리의 삶도 같이 하고 우리는 마귀 토대위에서 출생한 사람들 이예요. 그걸 예수 믿는다고 우리가 자연의 힘에서 우리 몸이 따로 있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수염이 안자랍니까? 나도 예수 믿고 수염이 안 자랐으면 좋겠지만,ㅎ예수 믿고 난 뒤에 알약 하나 먹어도 밥 안 먹어도 살 수 있으면...그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는 뭔가 잘못 생각한 거예요.

마귀는 우리와 친근하게 친숙하게 사귀어 왔고 마귀 없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는 마귀와 늘 대화했기 때문에 마귀가 주는 희망과 욕망과 마귀가 주는 내 잘났다. ‘ 지 잘났다, 잘났어.’ 이런 소리에 푹 젖어서 살아왔기 때문에, 만약 예수님이 와서 ‘너는 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아야 될 자다.’ 오히려 이 말이 우리한테는 부정적으로 들리고 이게 듣기 싫고 그게 오히려 이상스럽고 이단 같고 ‘잘한다. 잘한다.’ 이거는 우리가 평소에 듣고자 원했던 거예요.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인간이 기억하는 게 아니고 기억이 현재 자아를 규정을 지어요. 그런데 기억은 내가 기억하는 것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이 기억은 내 허락도 안 받아요. 왜, 기억은 나와 관련 된 게 아니고 내 몸, 내 신체와 관련 됐기 때문에 신체의 몸이, 근육이 기억할 것 같으면 나도 거기에 따라가 줘야 돼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신체의 종이거든요. 우리는 내 몸의 종이거든요. 아무리 웃고 싶어도 이빨 아프면 ‘아야.’ 합니다. 이것은 나라 하는 것은 신체가 자연의 일부인 신체의 종이고 그러니 우리는 자연의 종이예요. 신체가 기억한 것은 우리가 기억하고 싶어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신체가 기억한 것이 있어요. 그때, 그때 기억한 것이 나온다면,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내가 거기에 맞추어서 살 수밖에 없어요.

‘아차, 오늘 성경 공부 있지.’ 맞춰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우리 몸이 내가 조정하는 것이 아니고 몸 따라서 우리가 몸의 시녀, 하녀예요. 몸 따라서 우리는 거기에 따라줘야 돼요. 왜, 몸 편한 것이 최고 편하니까. 만약에 몸이 거부해버리면 고생은 누가 합니까? 나만 고생하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가 예수 믿으면 어떤 걸 얻을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너라는 걸 이야기하는 것 뿐 이예요. 너 형편은 이렇다는 걸 이야기할 뿐이지, 제발 착각하지 마라, 니 밑바닥에 마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널 데리러 왔고 마귀는 전적으로 안 뺏기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해서 ‘니 몸은 니가 알아서 지켜라, 니 편한 게 최고다.’ 이런 식으로 ‘예수가 아니고 니 몸이 중요해.‘ 우리는 매일같이 아침 산책할 때마다 계속해서 마귀와 대화하는 겁니다. ’너 이거 있어야 되지? 예수보다 이게 더 중요한 거야. 요번에 애 수능 쳤지? 예수보다 수능이 더 중요해.‘ 계속해서 우리는 익숙해진 것에 그대로 계속 유지되려고 우리 몸과 우리 사고방식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걸 예수님이 안 온 사람이면 그게 그대로 흘러가고 ‘아이고, 죽는 것도 하나의 우리생활의 일부니까 죽으면 죽지, 죽는다고 예수 믿고 그런 비겁한 짓은 안 하겠다.’라고 이걸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배포가 있는 게 우리예요. ‘아이쿠, 내 혼자 죽으면 억울하지, 다 죽잖아요. 이웃집 할아버지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고 저쪽에 할머니도 돌아가셨고, 남가는 거기를 내가 가는 게 뭐가 아쉽냐. 죽음도 용감하게 수용하리라. 왜, 나는 진리니까.

그 뭐 종교도 필요 없고 기독교, 윤리, 불교도 필요 없어요. 죽음까지 수용해 버리면 겁날 것도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정상적이고 이런 식으로 그때그때 반응하고 그때그때 적응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성령이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장해 버리니까 문제가 커지는 거예요.

애굽에 그냥 살면 되는데 모세가 나타날 때부터 그때부터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은 골치 아프게 된 거죠. 그래서 모세 아론 보고 뭐라 그랬습니까? ‘당신들 왜 나타났어. 당신들 왜 나타났어. 힘들어도 우리는 애굽 사는 게 맞아. 당신들 왜 나타났어.’ 모세 하는 말이 ‘당신들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아! 아서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우리는 지금 약간 힘든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바꾸고자 해서 하나님 찾은 거지, 이 좋은 세상 말고 애굽같이 큰 나라 말고 우리가 어디 가서 사는데? 어디로 가는데?’ 모세가 ‘나도 몰라. 그냥 인도하면 된대.’ ‘그런 막연하고 무책임한 발언이 어디 있어요? 나도 모른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이 동행하면 인도하시겠지.’ ‘아이고, 그게 어딘데?’ ‘몰라, 그거는.’

그걸 대를 지어서 이야기해야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있을 때 해서 ‘여러분, 여기는 못 사니까 대피하세요.’ 이런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대피할까요? 안 돼!! 소용없는 짓 이예요. 또 모세가 지 백성들 되기 위해서 지가 폭력 행사해서 사람 여럿 죽이고 지가 독립선언 해봐도 그것도 안 돼, 그것도 소용없어요.

처음부터 우리가 이 땅에서 벗어나서 천국 가는 것은 처음부터 우리 계획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시작도 우리 계획이 아니요, 중간도 우리 계획이 아니요, 마지막도 끝맺음까지 이거 우리 계획입니까? 아닙니까? 우리 계획이 아니에요. 우리의 소원은 내 몸 편한 거밖에 없어요. 그저 돈 많고 가족의 비전보고 그리고 세상의 부귀영화 내 갖고 싶은 거 다 갖는 것, 그것이 우리한테 푹~ 젖어있습니다. 술독에 빠진 쥐새끼처럼, 항상 취해 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에 취해서 그 정신도 없는 인간보고 ‘예수 믿으라, 구원받아라.‘ 하면 지가 원하는 세상부귀 원하는 걸 구원, 천국으로 보지, 세상적인 천국은 뭐냐, 바로 이겁니다. 한 마디로 ’풍요의 나라.‘ 이게 말이 돼요?

진짜 천국은 누구만 섬긴다? 예수님 섬기는 게 분주한 게 천국인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뭡니까? 예수님 섬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 뭐라 합니까? 넉넉하게 즐기는 것, 풍요. 거기사면 여자가 많은가 하고,ㅎ 거기 가면 어디 맛있는 거 많은가 하고, 완전히 오아시스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이슬람교의 천국관입니다. 얼마나 살기 어려웠으면 이런 걸 다 상상하겠어요?

성경에 나오는 천국은 누구만 섬긴다? 니가 어떻게 즐기느냐가 아니라 누구만 감사하라? 예수 그리스도만 감사하는 거예요. 이사야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실 때 그 자락이 온 성전에 가득 찼을 때 천사들이 뭐라 했습니까? 날개 치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할 때 그때 이사야 하는 고백이 ‘화로다, 나는 망하는 백성 중에 하나다.’ 지만이 아니고 다 같이 망하는 백성 중에 하나다.

천국은 이렇게 보여줘야 알지, 우리 상상 같으면 ‘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사야가 이런 생각 하는 게 아니에요. 만나면 ‘아유, 좋은 거 있으니까 내가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이건 지가 만든 천국 이예요. 진짜 천국 만나면 ‘아! 화로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이게 진짜 뭔가 진짜배기를 만난 흔적이 그 흔적밖에 없어요. 왜,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마귀가 올라오는 하나의 통로역할, 하나의 샘터, 마귀들이 계속 나오는, 파이프 꽂아놓으면 원유가 나오잖아요. 미국의 유명한 자이언트라는 영화 보면 메뚜기같이 생긴 기계 돌려버리면 원유가 솟구쳐 올라오죠.

나는 뭐든지 해도 죄가 솟구쳐 올라오는 거예요. 이것을 주를 만나면 그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공식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축복은 나를 죽이고 나를 은혜로 받는 것, 이게 축복입니다. 매일같이 나를 죽이고 매일같이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은혜 아닌 게 없어요. 그 은혜 앞에서 나는 내세울 게 없어져요.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이런 입장도 못 되고 ’모든 것이 다 은혜일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어요. ‘진작 죽어야 될 인간이 아직도 살아가다니 이상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복 받은 사람의 특징이죠.

왜 그러느냐 하면 제가 전에도 늘 이야기했습니다만 목회하는 목사의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이 천국 가겠느냐,’ 이걸 항상 먼저 생각해요. ‘천국 간다는 것은 이 지상에서 뭐든지 죄고 오직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마음을 유지해줘야 천국 가서도 영원토록 그 마음이 계속 이어지는 거죠. ’오직 주님의 공로뿐입니다. ‘이것이 계속 천국 가서도 이어진다 말이죠. ’천국 가서 하지,‘ 천국 가서 하는 게 아니에요. 가기 전에 그런 사람이 돼 있어야 돼요. 자기의 어떤 것도 의로운 것이 없고 오직 하루 종일 나는 죄 짓는 일밖에 안 하는데 그 죄를 주께서는 은혜로써 유지하고 있다는 그 은혜가 날로 크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천국이잖아요.

그래서 이 밑바닥을 다시 봅시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본문과 관련 있는 것인데, 여기 짐승 나오고 유브라데 나오고 그 다음에 세 가지의 개구리의 더러운 영이 나오는데 이 용어들이 옛날 예수님 당시에는 이걸 이렇게 하지 않고 그냥 마귀라 했거든요. 그냥 마귀라 했는데 일곱 대접을 하고 나니까 이런 용어들이 나왔잖아요. 그럼 옛날에 예수님하고 마귀하고 만날 때는 이런 짐승, 이런 것들이 밑바닥에 대기상태로 잠겨있었죠. 대기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어떻게 조치하느냐에 따라서 이것이 한층 두층 7인, 7나팔, 7대접 중에서 잠겨있던 용어들이 툭툭 표피층으로 붉어져 솟구쳐 올라오는 거예요. 올라오기 때문에 여기 예수님과 함께 있는 성도는 바로 이 깊이까지 몽땅 다 그걸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그 깊이까지 어떻게 아느냐,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게 정치적인 충돌에 의해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 정치적인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여기에 14절 봅시다.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그러니까 여기 유브라데라는 강에는 어떤 것들이, 지난 시간 마지막에 했죠? 집결이라고. 아마겟돈의 특징이 뭐라 했습니까? 집결한다. 집결할 때 어떤 목적으로 집결하느냐, 정치적인 세력을 가진 자들은 전부 다 집결해서 정치적인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전쟁을 벌인다는 의미가 무슨 뜻이냐 하면 악마 쪽에 ‘악마가 보고 싶다. 악마가 어떤 모습이냐,‘ 할 때 정치적인 양상으로 이쪽의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 인물로 해석하는 그쪽이 바로 악마의 쪽이다 이 말이죠. 말이 좀 어렵죠? 쉽게 합시다. ’예수? 예수 그 양반 이 땅에 나라 하나 세우려 했잖아.‘라고 한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쪽에서 모든 최종적인 기준이 정치적으로 하나의 단합된 인간의 나라를 짐승의 나라를 건설했기 때문에 지가 자기가 자기를 생각하는 양상으로 상대방을 그렇게 인간은 규정하게 돼 있어요.

예를 들면, 평소에 머리가 좀 빠지는 아주머니가 되면 사람을 볼 때 ‘부럽다.’ ‘왜,’ ‘머리숱이 왜 그렇게 많아요?’ 이 말은 뭔 뜻입니까? 평소에 키가 작은 사람은 머리숱은 관심 없고,  ‘키가 왜 그리 큽니까?’ 꼭 자기가 관심 두고 있는 그러한 범주를 만들어서 그 범주 하에서 상대방과 비교에 나서게 되는 거예요. 뭐든지 그래요. 만약에 삼성 이건희 회장하고 SK그룹 회장 최 태원 회장하고 만나서 이야기하면 ‘오늘 저녁에 반찬 뭐 나올까요?’ 이런 거 안 묻거든요. 오늘 저녁 반찬 이야기는 아주머니끼리 만났을 때 ‘오늘 해장국하고 콩나물 할까.’ 이렇게 하는 것은 시장터에서 하는 이야기지, 이건희 회장하고 최 태원 회장하고 콩나물 이야기 왜 하겠어요? 꼭 자기들이 생각하는 그 독특한 차원이 따로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이 뭡니까? 마귀 정체를 일곱 대접의 차원에서 보여주는데 딱 까발려 보니까 어떤 형식이다? 정치적인 임금들을 모아놓고 뭘 한다? 한판 전쟁을 벌이는데 전쟁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이 아마겟돈이라는 지점이라 말이죠. 그렇다면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목사님, 오늘날 마귀가 보고 싶습니다.’ 마귀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 세상의 정치적인 권력의 힘으로서 마귀는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그들에게 있어서의 예수라 하는 것은 자기 정치적 권력을 도달하는데 어떻게 힘이 돼 줄 것인가, 힘주는 하나님으로 그런 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 가는 거예요. 그게 마귀라니까요.

예수님이 이렇게 있는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각자 자기의 관심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게 아닙니까? ‘아유, 나는 예수 믿고 병 좀 나았으면 좋겠다.’ ‘예수 믿고 나는 가정 어려운데 좀 형편이 좋았으면 좋겠다.’ 병 낫고 형편이 어려워서 돈 좀 보내줬음 좋겠다. 이런 것도 나쁘지만 최종적인 것은 이다? 아니다? 아니다 이 말이죠. 아니고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격하면서 여기 임금들이 정치적인 어떤 합세를 한다는 요것이 이 세상, 지옥 세상에 악마의 최종적인 면면의 모습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제가 하는 거예요. 그거 하려고 이같이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표피층에서 예수님과 마귀 만날 때 그때 마태복음 4장에서는 그때 그 당시의 유대인 사회를 반영한다 했죠?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것, 지금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가면 그건 그때 그 당시고 지금 여기 마귀의 모습을 보고 싶다. 마귀의 모습이 어떻게 건재 하는가, 지금 요한계시록에서는 뭐냐 하면, 정치적인 어떤 힘의 세력, 힘의 과시, 집결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마의 최종적인 모습이 된다 이 말이죠. 그걸 요한계시록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밑바닥에서 끄집어내지 않으면 그때, 그때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자, 그렇게 보셨으면 그 다음에 봅시다. 그런데 이 전체가 임금들이 있더라도 결국 이들이 아마겟돈에서 모이면 한 세력으로 집결되겠죠. 한 세력으로 집결되면 예수님께서 호칭 붙이기가 쉽습니다. 한 세력으로 집결하면 요걸 딱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개인데 하나로 됐으면 하나로 고정되겠죠. 그것이 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바벨론 성’이 되는 겁니다.

여기 19절에 나오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어라” 모든 것이 큰 성 바벨론에 무너지게 돼 있죠. 큰 성 바벨론!

요한계시록 해석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큰 성 바벨론이 어디 있습니까? 묻지 마세요. 전부 다인데, 왜, 집결하니까, 하나로 뭉쳐지니까. 그게 또 나와요. 요한계시록 17장에 보세요. 2절에 땅의 임금들 나오죠? 그렇죠? 17장 1절 끝에 보면 거기에 누가 나옵니까? 음녀 나오죠. 그 음녀가 누구겠습니까? 그게 큰 성 바벨론 이예요.

그리고 7절에 봅시다. 여기 보면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이지만 이거는 어디와 결부돼 있다? 이들이 뭘 타고 있습니까? 자동차? 그랜저? 뭘 타고 있어요? 벤츠 타고 있어요? 뭘 타고 있어요? 여자가 타죠. 그러면 대표자가 누구예요? 여자죠. 큰 성 바벨론이죠. 세상에 있는 모든 권력들이 교체되고 쿠데타 일으키고 백날 해봐도 소용없다니까요. 요한계시록 한방에 다 보내버려요. 한방에 너희들이 여러 가지 정권 교체를 해봐야 그걸 뭉쳐 놓으면 뭐다? 적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정치적인 세력이다 이 말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나왔습니다. 굉장히 간단한 이야깁니다. 문제는 과거 이야기다 하는 문제예요. 이게 과거 이야기 같으면 그 뒤에는 성경에서 애굽이라는 용어를 안 써도 되는데 이미 에스겔, 예레미야, 이사야를 보면 애굽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설교를 했잖아요. 그 유다의 남은 자가 어디로 갑니까? 애굽으로 가죠. 애굽으로 가니까 누가 잡으러 옵니까? 바벨론 제국이 또 따라오죠. 또 따라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애굽으로 내려 간 그 남은 자 속에 누가 섞여 있습니까? 예레미야가 섞여 있다고요. 예레미야가 섞여 있다는 말은 예레미야는 예수님의 영을 받아서 너희가 갖고 있는 애굽을 지리적인 애굽이 아니고 영적인 애굽으로 해석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니가 가는 곳 애굽은 결국은 옛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냈던 그때 그 장소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구원받기 이전을 그렇게 좋아하는구나.’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를 좋아한다는 말은 누구야 떠나라? 우리를 구원하는 예수여!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나 당신하고 안 놀래, 이제는 당신하고 결별할래.‘하고 똑같은 소리라 말이죠. 예수, 예수해서 그 당시 그들이 의지한 예수는 자기 죄가 발각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뜻에다가 더 훌륭한 자기 되고 싶어서 예수 믿었는데 돌아가는 사태가 예수가 나의 소망을 안 들어줄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이제는 예수도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결국 예수 떨어지면 남는 것은 뭐예요? 애굽이죠. 애굽! 네 안에 애굽있다. 애굽이 잇을 때 그 다음에 뭐가 필요해요? 애굽의 상황이 먼저 전제돼 줘야 그 다음에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출애굽이 되죠. 출애굽이 뭡니까? 구원이잖아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구원할 때는 우리를 뭐로 만들고? 애굽으로 만들고, 우리의 본색, 우리는 뭘 원하고 있는가를 완전히 까발려놓고 거기다가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이 접선을 하게 되면 구원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내 잘난 맛에 살면서 거기다가 십자가를 보태니까 이 십자가는 하나의 지식이 돼 버리고 하나의 교양이 되고 상식이 돼 버렸어요. 예수님이 필요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아요. 왜, 그거 외에도 좋아할 게 많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의 본색을 완전히 까발려서 발가벗겨 놓고 그때 어린양의 피를 내보이면 ‘이제는 어린양만 있으면 족합니다.‘라는 식으로 인생을 살게 되죠. 어린양만 있으면 나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내가 어린양의 증인이 되다니 이건 로또보다 더 큰 기적, 축복이 온 거예요. 내가 무슨 수로 어린양의 증인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증인이 되겠어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이렇게 해줬다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는 바랄 게 없다는 거예요.

참, 찬송가 부를 때마다 부끄럽죠.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게 없네.’ 입에 침을 바르고 부르던지.ㅎ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게 왜 없어요? 지금 딴 거 귀한 거 꼬불쳐 놓고 안 들키게 감춰놓고 예수 잘 믿어서 그 덕분으로 진짜 좋아하는 것, 예수는 약간 중간 임시적이고, 진짜 좋아하는 것, 이것은 아무에게도 안 들켰지만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 그것을 위하여 예수가 잠시 필요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의 요구를 부응해주지 않고 그 감추어놓은 그것을 발각시키는 방법으로 뚜껑을 확 열어버려요. ‘니 여기 숨어있나?’ ‘아이, 부끄러워라.’ 그럴 때 주께서 십자가의 피를 줘서 두 번 다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게 있는 것을 남기지 않게 합니다.

그 방법을 지금 뚜껑 여는 작업이 7인, 7나팔, 7대접으로 하신 거예요. 건성, 건성 십자가, 마귀, 사단 이런 것은 다른 역에 가 있어요. 그거 말고 진짜 뚜껑을 열어 제쳐버리니까 세상은 어느 누구라도 하나로 모아졌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음녀, 음녀= 더러운 여자, 다른 말로 하면 바벨론, 여기에 옹기종기 집결돼 있어요.

요새는 그런 집이 없습니다만 옛날 촌에서 살던 집에 보게 되면 늘 집에 마치 가족처럼 쥐들이 부시럭, 부시럭 밤새 돌아다닙니다. 부엌에도 돌아다니고 방에도 지 맘대로 돌아다니는데 우리 어릴 때는 그랬었어요. 그래서 전국적으로 쥐잡기 날도 정해서 쥐를 잡고 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쥐가 안 보이는 거예요. 왜 안 보이느냐 하면 닭고기를 사놨는데 그걸 잊어버리고 부엌에 놔뒀는데 쥐들이 거기에 다 가 있어서 딴 곳에 돌아다닐 여유가 없어서 그 안을 열어보니까 그 안에 쥐가 다 있는 거예요. 그게 큰 성 바벨론이라. 그게 음녀고. 세상의 관심사, 바티칸의 관심사, 교회의 관심사, 딴 거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식이 오르나, 그거지, 어떻게 하면 주식 값 오르고 경제발전 어떻게 하느냐, 전 경제인이 다 모여 있습니다.

그게 주식은 돈 벌 방법은 옛날부터 그랬지만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무역 이예요. 그게 요한계시록 몇 장에 나옵니까? 요한계시록 특히 18장 12절에 보세요. 안파는 게 없어요. 모든 물건 다 팔잖아요. 이걸 마르크스가 발견했다 안 합니까? 이윤이라는 것은 노동에서 얻는 게 아니고 공간적 이동과 시간적인 시간차 공격, 시간적인 격차와 공간적인 격차에 의해서 이윤이 남게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상업 자본주의라 합니다. 시간차 공격, 배구에서 시간차 공격이라는 거 있죠? 하나 뜨고 하나 블로킹 피해서 공격하는 거, 시간적으로 어느 때 팔면 이윤이 남는 것과 공간적으로 어느 장소에 가면 딴 장소보다 이윤이 남느냐, 이런 식으로 고이윤을 챙기는 것을 옛날부터 있었던 상업 자본주의였습니다.

그것이 18세기부터 뭐로 바뀌느냐 하면 산업 자본주의로 바뀌어요. 이것은 언제 시간 기다리고 언제 장소 기다리느냐, 답답해 미치겠는데, 산업 자본주의는 사람들 소비를 장려해서 사람들의 욕망의 시차를 노리고 여기서 재생산해서 사람들에게 팔아먹는 거예요. 빨리 하고 빨리 팔아먹는 거예요. 상품이 그때그때마다 모델을 계속 바꿔나가서 이윤 남기는 것이 산업 자본주의예요.

산업 자본주의 특징은 뭐냐, 과잉. 넘쳐나야 돼요. 항상 넘쳐나야 되고 풍부해야 되고, 그런데 안 팔렸다 하면 한꺼번에 조진다니까요. 공항이 일어나서 완전히 한꺼번에 조져 나버려요. 그러면 공항이 일어나면 정신 차릴 게 아닙니까? 천만의 말씀, 공항이 일어나도 그 다음에 대충 정리할 거 정리하고 주을 것은 줍고 부를 사람은 부르고 다 판돈에서 고스톱 치다가 돈 잃은 놈은 보내버리고 잃은 놈끼리 또 시작 이예요. 또 과잉 이예요. 특히 은행가들, 모기지 이론 같은 건 무섭잖아요. 펀드 상품, 이거는 은행 저들도 겁나는 거예요. 돈 놓고 돈 먹기 장사 아닙니까? 이거 뭐 음식 팔고 그래서 돈이 안 돼요.ㅎ 돈 놓고 돈 먹기 장사, 은행에서.

세계적인 돈이 어디 다 있습니까? 은행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류는 미래가 없습니다. 이제는 막 가자는 거예요. 20년 전만 해도 순진한 중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눈이 퍼뜩 떠졌습니다. 인도도 순진했었습니다. 알라~~ 도만 닦다가 눈이 떠졌습니다.ㅎ 인도, 심지어 아프리카에 1조 달러를 갖다 퍼부어도 소용없어요. 그거로 밥이나 먹고 안 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막가파예요. 이제는 어느 정도로 끝날지 몰라요. 니 죽고 나 죽고 막가는 판 이예요. 전부 다. 세금이요? 전부 다 떠나버렸어요. 전부 다 언제 망할지 모르죠. 그리스 망한 게 세금 안내서 세금 때문에 망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옛날에 점잖았던 유럽 예술을 좋아했던 유럽, 프랑스 독일, 스페인, 지금은 백날 그러다가 이미 나라 말아버릴 신세죠.

모든 것은 결국 음녀인데 돈의 밑에 여자가 뭐를 탑니까? 정치를 타죠. 그러면 정치가 중요해요? 돈이 중요해요? 돈이 위에 있고 바벨론 위에 있고 정치적으로 이런 식으로 마귀가 지금도 나서는 이유는 바로 이 세상과 그리고 예수의 나라를 전쟁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유브라데 강이나 아마겟돈이란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것은 간단하죠. 음녀가 있는 곳이 아마겟돈이고 유브라데가 돼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전 세계 모든 곳이죠. 심지어 티벳 불교까지 전 세계 모든 곳, 그걸 달리 이야기해서 정답을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 왜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 전파돼야 이 정체가 발각되니까. 마귀는 자기편은 안 건드려요. 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파되면 마귀는 돈과 정치적 힘으로서 ‘한번 붙을래?’ 이럽니다. 한번 붙으면 그게 아마겟돈 이예요. 그 다음에 예수 믿는 사람 있으면 ‘한번 붙을래?’ 이래 나와요. 그게 아마겟돈 이예요. 그게 유브라데고. 왜냐 하면 지층이니까 표면층에는 시간과 공간이 지배하잖아요. 그런데 이 밑에 있는 마그마 원형질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없어요. 불쑥 불쑥 언제든지 이걸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에서 짜여 졌던 이 판 말고 그 밑의 판을 보게 되면 이 판은 바로 음녀가 있고 거기 정치적인 사람들이 놀아나고 있는 그러한 형국, 그것이 오늘날 악마의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40.73) 11-12-15 14:03 
가락교회111201-요한계시록17장(정치적 악마)28강b-이 근호 목사
28강b

17장 봅시다. 17장에 중심 되는 단어가 나옵니다. 음행! 17장 2절에 ‘음행’, 음행한 여자를 가지고 음녀라 합니다. 왜,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에스겔 같은 경우 오홀라, 오홀리바, 지난 광주 강의에서 했잖아요. 그냥 ‘니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이러면 된 텐데, 왜 음녀, 더러운 여자, 간통한 여자, 그리고 간통한 남자는 이야기 안 해요. 꼭 간통한 여자, 여자를 극단적으로 음녀로 몰아세우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여기 17장 그전에 에스겔이 있다는 걸 염두해 두어야 돼요.

그럼 에스겔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뭐라 부르느냐 하면 人子야, 사람의 아들이라고 人+子를 분리해서 설명하면 이 자체의 뜻이 완전히 망가져 버립니다. 人子라는 것은 이 자체를 합쳐서 특수한 용어예요. 人子라는 말은 인간 속에 있으면서 다른 인간하고 같은 인간은 아니다.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을 人子라고 합니다. 선지자 노릇을 해야 되는데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은 장차 오실 인자를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다니엘이고 그 다음에 에스겔이고 그런 겁니다.

그러면 이 人子라고 이야기할 때 장차 오실 예수님하고 人子하고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면 이게 위로 올라가면 언약으로 만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이 있으면 언약의 일부가 미리 에스겔에게 내려옵니다.(깔대기처럼) 또 언약의 일부가 아브라함에게 내려오고 언약의 일부가 모세에게 내려오고, 언약의 일부가 그 다음에 다윗에게 오고, 언약의 일부가 에스겔, 예레미야, 말라기까지 온다 이 말이죠. 이 내려온 물탱크의 원천은 뭡니까? 이미 위에 있죠. 위에 있는데서 잠시 뿌려주고 잠시 뿌려주고, 아브라함 앞에는 뭐가 있습니까? 노아가 주어지는 거죠. 이렇게 뿌려지는 겁니다. 뿌려질 때 사람들한테는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 요(위 물 탱크) 대목이 안 보여요. 물탱크가 보이지 않고 뭐만 보이느냐 하면 요 대목(물 뿌려진)만 보이는 거예요. 요 대목만 보이다 보니까 요 대목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뭐냐 하면, 피, 순교, 또는 죽음, 이런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공식 하나 제가 정해드립니다. 우리끼리 아름다운 약속 이예요. 육에서 영으로 갈 때는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 가는데 이 죽음은 나의 죽음은 아니에요. 내 죽음은 필요 없어요.  독특한 죽음인데 이 죽음은 언약 적 죽음을 통해서 육에서 영으로 넘어갑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육에서 영으로 그냥 넘어가는 길이 있다? 없다? 이게 없다는 말 이예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니가 죽어야 한다는 뜻 이예요. 죽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걸, 니고데모는 산채로 다시 가서 산채로 온다, 평소에 버릇이 사는 것밖에 배운 게 없기 때문에 죽으면 끝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끝이라는 것, 이 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는 거예요. 우리를 끝까지 죽도록 밀어붙이는 거예요. 죽음, 그러면 ‘우리는 죽으면 안 돼,’ 절벽까지 밀어붙이면 ‘요기까지 예수 잘 믿을게요.’ 하지만 밀어버리면 아악~ 꿈속처럼 떨어지겠죠.

제가 왜 독특한 죽음을 언약 적 죽음이라 하느냐 하면 이런 점이 어렵지만 여러분은 이제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어려우니까 잘 들어보세요.) 어디를 기초로 하는 죽음이냐 하면 자기가 태어난 것을 근거로 한 죽음입니다. 태어난 내가 목숨 떨어져 죽어서 없어진다. 이런 죽음을 말하거든요. 이것은 이 자체가 육이기 때문에 이 죽음은 어디 달려있는 죽음입니까? 육 끝에 달려있는 죽음이니까 이 죽음은 육적 죽음이 되는 거예요.

불교에 도 닦은 사람이 자기가 자기한테 휘발유를 부어서 도 닦는 채로 하나의 불타는 부처가 되는 것, 등신불, 등신 같아요.ㅎ 요 죽음은 지가 육적인 죽음의 마지막 장렬한 최후의 모습이죠. 베드로가 이걸 이야기한 거예요. 내가 죽어서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주님이 ‘안 돼.’ 너의 죽음은 처음부터 살아있어도 육이기 때문에 안 받아줍니다. 영의 죽음만이 언약 안에서의 죽음이기 때문에 받아주는데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영의 죽음을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주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나는 죽고 그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이런 죽음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겁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있으면 우리는 구원받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잘난 것 믿지 말고 내 안에 ‘예수 죽었어요.’ 자기 죽음 말고 자기 힘든 것 말고 자기 낙타 무릎 말고 주님 죽었다고 그걸 내세울 수 있어야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언약에서 이게 하나씩 나옵니다.

노아 같은 경우에 여기 산이 있고 여기 세상이 있고 지형이 있다 합시다. 노아가 여기 삽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노아는 노아 식구를 산 위 꼭대기에 불러 세우고 구경하면서 그 다음에 물은 산꼭대기 전까지만 차면, 이래도 물에서 구원받는 거 맞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방주를 만들라 해서 노아를 이 안에 집어넣으니까 방주는 어디 안에 있어요? 죽음 안에 있죠. 여기서 비만 오니까, 죽음 안에 방주 있고 방주 안에 누구 있고? 노아 있고, 이런 식으로 노아를 구원하는 거예요.

약속대로 심판 내리고 약속대로 죽어야 되고 그런데 약속대로 방주 있어서 약속대로 그 안에 사는 것, 요게 십자가 방식이고 이게 노아 방주 방식입니다. 우리 같으면 요렇게 지켜보고 박수 치고 ‘신난다. 우리 편 잘한다. 잘한다.’ 이렇게 관람석에 앉아 있으면 되는데 직접 우리를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의 죽음에 참여케 하는 겁니다. 이것이 노아뿐 아니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도 ‘예수 잘 믿나?’ ‘믿습니다.’ ‘진짜 믿나?’ ‘믿씹니다.’ 이러면 쌍시옷으로 끝내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아브라함아! 니 아들을 제물로 바쳐라.’ ‘차라리 제가 죽을게요.’ ‘니 말고 니 아들’ ‘죽이긴 누구 손으로?’ ‘니 손으로’

내 손으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이스마엘 같으면 대번 죽였을 거예요. 열 번도 죽였을 거예요.ㅎ 그가 아니고 사랑하는 내 아들, 차라리 쟤가 살고 내가 죽고 싶은 그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임으로써 그것은 이삭의 죽음이 아니고 누구 죽음이다? 바로 내가 사랑하는 것까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죽음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 내가 그렇게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 좋아하는 것 다 모아서 거기다 죽이고 그 죽을 자리에 숲속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하나님의 준비된 분이 등장하죠. 수양!, 준비된 분과 바꿔치기 함으로써 휴~~ 살았죠. 칼끝이 2센티미터 닿기 직전에 ‘멈춰라.’ 2센티미터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정도, 애 묶어놓고,, 집에서 애 묶어놓고 실험 한번 해보죠.ㅎ

이것은 곧 아브라함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 가는 인생이고 주님을 위한 인생이지 나를 위한 주님이 아니라는 것을 거기서 믿음으로, 그게 바로 믿음 이예요. 너를 위한 게 남아있지 않은 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언약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 살아나야 되고 계속해서 움직여야 된다 이 말이죠.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그렇죠.

모세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도 유월절 지킬 때, ‘이스라엘 다 나와, 다 산위로 가, 그리고 저 밑에 애굽 사람들 장자 죽은 거 봐. 보고 박수쳐. 축복 올리고.’ 그런 게 아니고 어떻게 합니까?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에 건너간 게 아니고 뭘 보고 건너가죠? 니 말고 니 잘난 것 말고 니 집에서 죽은 거, 니가 손으로 잡은 게 뭐예요?  1년 된 흠 없는 어린양이 대표해서 죽음으로써 살잖아요.

왜 한국교회가 이걸 모릅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해준다? 그런 거 없어요. 예수 믿으면 죽어야 구원받습니다. ‘어떻게 하면 삽니까?’ 하는 것은 육의 사고방식 이예요. ‘육이 어떻게 하면 삽니까?’ 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육을 죽일 수 있습니까?’ 이렇게 돼야죠. 질문을 그렇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하면 이 육을 죽일 수 있습니까?’

이것이 어디까지 나오느냐, 에스겔까지 나와요. 음녀가 에스겔에 나오니까. 에스겔도 여기에 들어오게 됩니다. 에스겔이 진짜 노아처럼 노아가 홍수를 일부러 만든 것처럼 산에 올라가서 자기 백성에게 연설하는 걸 지켜보면서 지는 나중에 쉬면 될 텐데 에스겔이 어디로 가서 어디서 죽습니까? 에스겔이 포로 잡혀가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가죠. 같이 포로 됐다 이 말입니다. 포로 잡힌 곳에 함께 가요. 이거 생각할 때마다 유명한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생각나요. 철사 줄로 꽁꽁 묶여 울며, 울며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맨발로 절며, 절며 가는 6.25 포로 잡혀 가는 그 광경, 미아리 고개 넘어가는 광경, 실제로 라헬의 자식들이 많이 울었다고 돼 있잖아요. 생이별하는.

그렇다면 에스겔의 모든 고생과 고난은 자기 죄가 아니고 누구 죄 때문입니까? 백성들의 죄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렇게 쓰이고 에스겔은 뭡니까? 인자로서 가는 거예요. 인자로서 갈 때 그들에게 뭐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왜 우리 유다 나라는 멸망될 수밖에 없느냐, 그것도 다른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구에 의해서? 바로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 받는 이유는 그렇게 멸망 받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숨겨진 축복이라는 겁니다. 망해야 구원이 보인다는 거예요. 이 원리 이 방정식, 안 망하면 구원이 안 보인다는 거예요. 망해야 구원이 보이는 거예요. 포로 잡혀 가는 것도 망하는 것도 축복이고 그게 넘치는 은혜라는 겁니다.

이건 어떻게 교인들보고 믿으라고 목사가 말하기가 쭈삣쭈삣하고 죄송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은 세상을 볼 때 ‘니는 죄인으로서 당연히 나는 고생해야 돼.’라는 입장에서 그런 안목에서 세상을 다시 한 번 돌아보라. 니가 살던 동네,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폈던 그 고향의 봄, 그 고향의 봄을 다시 한 번 봐라 말이죠.

그걸 에스겔에서는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음녀로 규정하는 겁니다. 음녀라고 이야기 했는  걸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 말입니다. 주님이 인자가 등장하지 않으면 우리가 음녀이면서 음녀인 줄 몰라요. 이걸 신약 성경에서는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세상 것을 사랑치 말라.’ 요한일서 2장 15절,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마라. 이게 안 됩니다. 왜, 우리가 세상 일부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 일부거든요.

이건 우리가 상식 이예요. 우리 젊은 사람들이 대학교 입학했다. 그러면 자기는 뭐가 됐느냐 하면 대학생이 됐어요. 여러 대학교에 학생과 더불어 대학생이잖아요. 그러면 이미 자기를 사랑한다면 곧 자기가 속해 있는 대학을 사랑하게 돼 있고 이게 고대라면 저쪽 대학 연대는 안 좋아하게 돼 있어요. 왜, 고연전이니까, 또는 연고전이니까.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이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누가 그 세상의 일부다? 이 귀하디 귀한 내가 그 세상의 일부로 형성이 된 상태기 때문에 만약에 세상을 미워한다는 말은 결국 누굴 미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나를 미워해야 한다는 말과 똑같은 말 이예요. 미쳤습니까? 미쳤나? 왜 멀쩡한 나를 왜 미워해, 날 미워하면 나는 어디 가서 행복을 누리죠? 나한테 미움 받으면 나는 어디 가서 위로를 받습니까? 누가 위로해 주지? 여러분? 윤 복희한테나...ㅎ

누가 위로해 주지? 주님이 ‘니가 왜 위로받아야 되는데?’ 너는 (  )가 아니다? 人子아니고 음녀예요. 음녀 아니면 人子고, 그게 에스겔에서 음녀라는 의미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음녀라는 말을 그냥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뭔가 음녀라는 말을 인자가 투입된 현장에서만 음녀라는 합당한 개념이 발생되는 거예요. 人子가 오지 않는 한 어떤 누구도 음녀라고 지가 연구해도 아무리 연구해도 지가 음녀라고 밝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왜 음녀인데? 저 사창가에 있는 여자가 음녀지, 내가 왜 음녀야,’ 그렇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이유는 망하게 한다는 걸 너무 섭섭해 하지 말고 누가 망하게 했느냐가 그동안 몰랐던 자기 자신을 아는 좋은 계기로서 축복해 주시려고 주께서 우리 가정에 여러분에게 침투하는 겁니다. 매일같이 침투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침투하게 되면 그 느끼는 건 뭐냐, 니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잘했다’가 아니라 모든 것이 ‘그래서 잘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가 되는 겁니다. 잘했다는 말은 ’너는 죄를 줄였다, 적게 지었다‘는 말이고, 은혜라 하는 말은 너는 뭘 해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둘 중에 어느 게 축복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잘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해요. 그러나 성도는 이것이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용서 받은 자 되기를 원해요. 그래서 누가복음 17장 문둥병자가 나았을 때,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죠.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내 꼬라지를 봐도 내가 한심스럽고 내가 나한테 희망을 건다는 자체가 나한테 어떤 의로운 것을 끄집어낸다는 자체가 나는 포기했습니다.‘라는 뜻 이예요.

누가복음 18장에 세리하고 바리새인하고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한쪽은 ‘십일조 했습니다. 금식, 구제했습니다.’ 하잖아요. 그런데 세리는 뭐라 합니까? 감히 얼굴도 못 들고 하는 말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잖아요. 누가 구원받았다 합니까? 세리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세리는 자기를 왜 죄인이라 했을까요? 뭘 봤기에? 바로 주님을 봤기에 주님 앞에서 자기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일말의 기대나 어떤 희망을 전혀 갖지를 않은 겁니다. 이게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면 얻을 것이라는 원리입니다.

음녀 이야기해 봅시다. 그러면 에스겔에는 왜 하필이면 음녀! 왜 여자로 돼 있느냐, 에스겔 23장에 보면 나오는데 광주 강의에서 한 것을 설명해 드리면, 여자의 특징은 항상 자기 자신보다 자기의 남아있는 빈자리를 더 크게 여기는 것이 여자입니다. 자기 빈자리! ‘있어야 돼.’ 이 빈자리를 차지하는 뭔가 낭군님이 있어야 돼요. 낭군님이라고 아시죠? 옛날 고어인데 낭군님의 자리, 항상 빈자리, 만약에 없으면 가상하고라도 나는 어떤 이상적인 낭군님의 여자이고 싶어 해요. 왜, 여자니까.

여기서 ‘여자는 자기 충족적이 아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냥 혼자 있어도 여자라는 법은 없어요. 항상 낭군님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빈자리에 더불어서 나는 여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여자는 뭐가 되고 싶은가 하면 여자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고 여자가 되고 싶어요. 사람인 것보다 여자이고 싶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남자는 뭐가 되고 싶어요? 남자는 사람이고 싶어요. 왜, 귀찮으니까. 잠시 써먹으면 되니까. 눈치껏 나가줘, 갈아치우고 싶으니까, 이제는 귀찮아.ㅎ남자는 계속 대표적인 사람의 대표로 남고 싶어요. 여자는 항상 내가 여자임을 보여줄 어떤 남자가 있을 때만 여자가 되기 때문에 홀로 남자 되라는 것은 여자의 속성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오홀라, 오홀리바,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방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이 바알 신이 뭐냐 하면 다른 말로 주, 남편감, 남편이라 말이죠. 여자가 자기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면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전부 다 여기(남편)에 바쳐서 여자가 남자 바깥에서 여자가 아니라 여자는 남자 안에서 비로소 자기가 여자임을 새롭게 여기서 인생을 새로 시작해요. 여자가 결혼 안하면 여자가 아니고 그냥 아가씨죠. 진정한 여자는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할 남자 안에서 본격적으로 여자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뭘 낳느냐 하면 자식을 낳죠. 자식을 낳게 되면 이건 결국은 생물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남자한테는 손해가 되는데 ‘여자가 남자를 찾는 것은 결국은 남자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생명의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 잠시 남성들을 이용하고 드디어 자기 복제품을 만들어서 자기는 죽더라도 복제품 안에서 자기는 영원하고자 하는 수법이 아닌가.‘ 라고 생물학자들은 이야기를 해요. 왜, 모든 생물은 다 그러니까. 특히 어떤 동물은 새끼 낳고 난 뒤에 남편을 물어 죽여 버려요.ㅎ

그러니 남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 새끼를 낳기 위해서 잠시 가까이 온 머슴 같은 거, ‘으흠’하고 잘난 체 하지만 결국은 ‘니가 있어야 내 귀여운 내 새끼 낳고 니는 꺼져. 나는 남자하고 안 놀래, 나는 내 새끼하고 놀래.’ 남자야 죽든 말든 나는 내 새끼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 돈 내게 하는 방법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식을 위한다면 여러분이 이 교회에 돈을 내어서 이 교회가 여러분 자식을 위한 교회돼야 됩니다.’ 이 한마디 하면 믿음이고 신앙이고 복음이고 돈 다 내버려요.

자식을 위한다는데, 돈 안낼 부모가 없어요. ‘여러분, 구원받습니다.’ 이러면 돈 안내요. 나는 망했지만 내 자식만은 살려야 된다. 이 일념에 돈 다 내버려요. 뭐 대순진리고 뭐고 신천지고 후천지고 간에 돈 내는 방법은 침례교 감리교 관계없어요. 한 가지 방법, 마지막 카드는 그겁니다. ‘여러분, 부모가 됐으면 자식이 나쁜 길로 가면 안 되잖아요. 이 교회가 있으면 여러분 자식이 이 교회 와서 진짜 어두운 세대에 바르게 살아서 여러분만 천당 가면 됩니까? 자식들은 지옥 가도 좋다는 말입니까? 돈 내세요.’ 그러면 돈 다 내버려요.ㅎ '그래, 맞아, 맞아. 목사 말 안 듣지만 자식을 위해서 교회는 있어야지, 교회가 부도난다는데 내가 돈 내야 되지.‘ 돈 다 내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우리보고 어떻게 실천에 옮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도저히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오지 말라 이 말입니다. 니 주제를 안다면 절대로 천국 오겠다는 말을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천국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런 장점, 이런 노하우가 있으니까, 이러한 의로움이 있으니까 이걸 근거로 ’천당 보내 주세요.’라는 말을 니가 함부로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차라리 하려면 나는 내가 아무리 봐도 천당 갈 수 있는 그러한 근거는 있다? 없다? 전혀 없으니 그저 남은 것은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거밖에 없는 거예요.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거밖에 없어요.

야곱이 하나님 천사 만났을 때 그랬잖아요. ‘그냥 떠나가 버리면 저는 죽어요.’ 불쌍히 여겨달라고 붙들 때 주께서는 다시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해서 구원하죠. 생명이라 하는 것은 외부에서 그냥 주는 것이지, 내가 내부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거든요. 나한테는 생명이 없고 영생이 없습니다. 나한테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그 사람은 자기 것을 행함을 자랑하면 안 돼요. 지한테는 생명이 될 게 없다는데 왜 자랑해요. 생명도 없는데 거지발싸개 같은 걸 왜 자랑합니까? 생명도 안 되면서 저주 받을 것만 가득 찼으면서 뭘 자랑해요?

주님께서는 자기 구원할 사람을 뭐로 몰아넣는다? 음녀로 몰아넣어서 자기가 음녀인 것을 아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음녀인줄 모르면서 음녀 짓을 하고 있는 사람은 구원 못 받은 사람 이예요. 음녀 이야기도 마찬가지예요. 다만 요한계시록 17장에서 음녀라 할 때 ‘내가 음녀입니다.’ 하면 그가 구원받은 사람 이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인자가 투입되면 세상은 내가 보는 안목이 아니라 인자가 보는 안목에서 내가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스캔하듯이 쫙 비춰서 아래 위를, 이건 완전히 종합검진처럼, 누워서 두뇌를 단층 촬영하는 거예요. 쫙 훑어버리면 나옵니다. ‘음녀’ㅎ 그러면 우리는 음녀 되게 하신 그 축복이 바로 포로 잡혀 가면서 인자를 투입시키는 그 축복과 같은 축복이라는 거죠.

인자는 홀로 활동하는 인자가 아닙니다. 인자는 어떻게 합니까? 인자는 음녀와 더불어 활동하는 것이 인자라 하는 것이 에스겔에 예언돼 있어요. 에스겔만 신약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에스겔이 몸담고 있던 그 환경, 음녀 같은 이스라엘과 인자의 결합, 이걸 몽땅 들어서 신약에 적용시켜 버립니다. 그렇게도 이야기가 되고 음녀와 인자를 확대시켜 버립니다. 확대시켜 버리면 오늘날 세계이고 그렇습니다.

다시 이걸 상세히 설명을 하면 여자한테는 빈자리가 있기 때문에 여자는 자기를 지향하는 존재가 아니고 자기가 사랑하는 그 빈 공간을 향하여 항상 모든 것을 헌신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뭐가 오느냐, 바알신이 들어왔는데 이걸 남편이라고 섬겼던 거예요. 이게 에스겔에도 나오지만 호세아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니 남편, 처음에 애굽에서 나올 때 여호와가 니 남편이다. 왜 남편 놔두고 다른 남편한테 가는데?’ 한다고요.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음녀, 또는 음탕한 여인, 또는 여자로 표현한 이유는 이미 남자의 자리는 누가 확정돼 있습니까? 여호와로 확정된 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남편이란 소식은 그전에는 안 나오고 호세아 때 나와요. 그걸 보면 참 이상하죠. 꼭 일을 저질러야 돼요. 우리의 죄가 발각될 때 하나님께서 ‘ 그때서야 나는 남편이잖아.’ 이렇게 나와요. 우리가 스스로 죄를 모를 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는데 우리가 죄 지을 때만 하나님이 나타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죄 있음을 발각시키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6장에 탕자 이야기 했잖아요. 거기서 탕자 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아요. 이것은 바로 주께서는 탕자 되게 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사랑을 계속 기다리는 아버지의 끈질기게 기다려서 결국 성사시키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방법, 그러면 우리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배치. 아버지 있고 탕자 있다. 그 구조 자체를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거기에 어떤 역할을 맡았습니까? 놀랍게도 탕자 역할을 맡도록 초대받은 거예요.ㅎ 영화 자체, 드라마 자체는 성공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성공이기 때문에 절대로 성도는 뭐하면 안돼요? 절대로 실망하면 안 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 실망할 필요 없는 게 뭐냐 하면 실패라는 게 우리 인생에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내 단독적으로 하면 내 뜻대로 안 되니까 모든 게 실패인데 단독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역할을 맡고 그 연출은 주님 몫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해도 그건 하나의 역할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패해도 실패가 아니에요. 실패도 성공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에 대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나니, 또는 예수 안에서는 수치가 없다. 우리의 수치를 내가 굴러가게 했다. 더 이상 너는 내 앞에서 흠이 없는 자라. 절대로 내 앞에서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니는 니 역할을 했을 뿐이니까. 죄 있는 역할, 음란한 역할을 했을 뿐이니까.

그래서 이 본문을 알고 있는 성도는 자기가 음녀인 걸, 아니까 누구에게 영광? 이 음녀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예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6절에 보면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성도들의 뭐? 피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이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방금 이야기했는데 또 잊어버렸을 거예요. 어떤 경우에 음녀가 음녀로 드러난다? 인자가 투입될 경우에만 음녀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냥 음녀라는 게 없어요. 십자가 앞에서 당신은 음녀,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그냥 음녀라 하면 ‘내가 언제 사창가에 갔나?’ 이러면 말이 안 돼요. 사창가에 안 간 사람과 비교해서 음녀가 아니고 바람피운 사람 앞에서 바람 안 피운 사람 앞에서 내가 음녀가 아니고 예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음녀가 돼요. 왜, 날 때부터 세상을 사랑하게 돼 있으니까. 왜 세상을 사랑하게 돼 있습니까? 자기가 자연의 일부니까.

내가 자연의 일부고 이 몸은 자연에서 교류하게 돼 있어요. 날씨 추우면 옷 입고 더우면 벗고 몸 편한 게 최고거든요. 몸이란 게 내가 만든 게 아니잖아요. 자연에서 주는 게 아닙니까? 내 몸 만들 때 아빠, 엄마가 태어나기 전에 의논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자연스럽게 태어났다 말이죠. DNA가 안 맞으면 당뇨도 걸리고.... 이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내가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건 내 몸 편한 대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게 인자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올 때 ‘하아! 육으로 난 것은 육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마귀와 사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그런데 마귀와 사귀는 것이 운명일 때는 우리는 몰랐는데 예수님 오시니까 ‘마귀하고 좋다고 사귀었구나.‘ 왜, 일단 몸이 편하니까. 몸이 편하고 골치 아프게 일단 성경 안 봐도 되고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서 이질감이 안 생기니까 세상으로도 보호를 받고 남들한테 환대를 받고 남들한테 착한 소리를 들으니까 모든 것이 모자람이 없고 부족함이 없는데, 왜 이 세상을 떠나느냐 말이죠.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죽으면 떠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세상에서 천국을 간다는 것은 그건 갈 필요도 없는데 왜 가느냐 말이죠. 차라리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낫죠.

여기서 책을 하나 썼는데 ‘교회가 미신이다.’라는 책을 썼는데 그 내용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지금 40페이지 정도 썼는데 진도 안 나가서 미치겠어요. 정말 힘들어요.ㅎ 교회 권사가 교회에 뭔가 진리가 있나 해서 가봤더니 결론은 뭐냐, ‘없다.’ 교회에 진리가 없다. 그럼 진리는 어디 있느냐, 모른다. 그 뿐 이예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교회가 크면 생명이 희박하다. 그러면 교회가 작으면 좋을 거 아닙니까? 교회가 작으면 방귀냄새가 지독해요.ㅎ 인간의 냄새가 독해요. 차라리 어떤 게 몸이 편합니까? 차라리 생명이 희박한 게 낫지, 작은 교회서 교인들끼리 서로 모여서 부딪히는 것, 차라리 큰 교회 가서 ‘니 왔나,’ 흔적 안 나는 게 훨씬 편한 거예요.

생명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뭐 ‘성가대 하라,’ 이런 소리 안 하니까 너무 좋아요. 그런데 교인 얼마 안 되면 ‘반주 할 줄 아십니까? 이번에 몇 명 안 되니까 봉사 해주시고 집사님 없으면 갈사람 없다.’ 이러면 귀찮은 인간관계 또 엮여서 짜증나요. 좀 나에 대해서 관심 두지 말고 내가 오든지 가든지 가만 놔둬버리라 말이죠. 천당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간섭하지마라. 헌금 하든지 표도 안 나고 해봐야 알아주는 사람 없고 그게 편하지, 이건 내가 헌금 안 하면 표가 팍 나서.. 그건 부담이 안 돼, 사람의 체취가 독해요. 그래서 작은 교회 안 가고 개척교회 안 가고 어디 갑니까? 큰 교회에 가서 바람 같이 왔다가 바람같이 흘러가죠. 그런 글을 다 써놨어요. 아까 자식 위해서 바치라 하는 그런 글 다 써놨어요.

호세아 때에 ‘왜 네 남편이 있는데 왜 음란했느냐,’ 이렇게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바알은 내 남편이 아니고 우리는 여호와 믿는데, 왜냐 하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다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 잘 사는 사람들 믿는 거 있잖아요. 우리는 여호와 섬겨도 잘 못 살았어요. 그런데 옆에 잘 사는 사람을 보니까 예배는 드리는데 평소에 징크스라든지 풍습 있잖아요. 재수 없는 손님 오면 '에이 재수 없다.‘ 소금 뿌리고, 고사 지낼 때 막걸리 떠놓고 하는 거,ㅎ 전에 설교 시간에 했잖아요. 차사면 그냥 운행하는 것이 아니고 고사 지내는데 거기 나오는 것이 팥과 대추, 밤, 사과, 배, 그리고 명태 입에다가 돈 처넣는 거, 온갖 것들이 다 꽂혀있다 하지 않습니까? 좋은 건 내가 좋죠. 그래서 내가 귀신덕분에 산다 하거든요.ㅎ 그걸 보고 김OO집사님이 하시는 이야기가 ’아이쿠, 진짜 없는 교인들 들었으면 목사가 저래가지고 빌어먹고 사나.‘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말이죠.ㅎ

왜 그걸 해야 됩니까? 왜 차 사놓고 왜 고사를 지내야 돼요? 이들도 여호와 믿어요. 교회를 가도 사주보고 궁합보고 왜 그래야 되는데? 그것은 여호와는 껍데기고 내 몸에서 올라오는 마귀적인 본성은 그 여호와로 커버할 수가 없어요. 여호와는 천당 갈 때 필요하고 이 몸이 요구하는 바는 바로 마귀입니다. 그건 그냥 자연 속의 풍습이고 재미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음녀라는 것은 언제 발각됩니까? 바로 성도의 피, 그것이 죄고 음녀라고 지적하다가 순교당한 성도나 선지자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장난스럽게 인생을 살아왔구나. 심각한데, 주님 보시기에는 우리 몸이 심각한 몸이고 그리스도의 영광 돌리기에도 다 모자란 몸인데 우리는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할뿐이지, 이 몸 가지고 내 편한 대로 하는 그것이 마귀하고 짝짜꿍이 되어서 그냥 내 좋은 대로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았구나.‘ 이걸 깨닫게 하는 거죠.

거기서 반드시 뭐가 필요하다? 성령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아벨의 피,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자, 여자가 뭘 탔어요.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이 말인지, 소인지, 개인지 뭔지 어떤 특징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 특징을 뭐라 했습니까?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특징을 갖고 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뭐냐, 뿔, 머리, 이것은 어떤 경계선에서 돋아진, 튀어나온 부분 이예요. 튀어나온 부분이니까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은 서로 민주적으로 평안하게 사는 것 같지만 반드시 한쪽으로 튀어나온 쪽으로 집결된 힘들을 사상과 정신 모든 것이 집결되게 돼 있어요.

평소에 사람은 자기주장을 반드시 내세웁니다. 하지만 권력층이 와서 ‘까불지 마.’ 이러면 ‘예’ 하고 숙이는 것이 우리 몸이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돼 있어요. 우리가 자존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있는 한 자존심은 살아있지만 자존심을 영글어내는 이 몸 자체가 이미 마귀에 의해서 만들어진 육적인 몸이기 때문에 이 몸은 힘 있는 주인을 따르도록 돼 있는 본성을 발휘하게 돼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 가고 하지만 ‘가지 마.’ 하면 ‘예’ 하고 이렇게 돼 있다니까요. 이쪽 회사는 반대로 돼 있지만, 교회 가라고 해도 안 가고 예수 믿어라 해도 안 믿지만, 딴 데는 반대예요. 교회 잘 나가도 ‘오지 마. 가지 마.’ 하면 ‘예’ 해버려요.

청년이 취직을 못했다. 그런데 취직자리 하나 나왔다. 가보니까 이단의 총무일, 행정 일을 한다. 이단의 시다바리, 하수인을 한다. 그런데 돈이 좀 된다. ‘목사님 할까요? 말까요? ‘ 물어온다. 그러면 하라 해야 돼요? 말라 해야 돼요? 정답은 ’니 몸 편한 대로 해라.‘ 이게 정답이거든요. 그 말은 그렇게 묻는다는 자체가 뭔 뜻입니까? ’저는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고 ’자기 결심에 대해서 너무 탓하지 마세요.’ 자기 커버하기 위해서 목사한테 물어온 거예요. 나는 결정 할 때 나 혼자 결정하지 않고 역시 목사한테 물어서 했습니다.‘ 이런 핑계대려고 한 거예요.

결혼도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이 여호와 증인이고 한데 다른 사람들은 다 좋다고 하는데 결혼 할까요? 말까요?’ ‘니 몸이 편한 대로 해라.’ 결혼은 몸도 사랑도 그것도 우선이 아니고 직업도 성격도 우선이 아닙니다. 결혼은 지 맘대로 안 돼요. 아무리 하려해도 안 하는 게 결혼이고, 하지 마라 말려도 하게 돼 있는 게 결혼입니다. 괜히 사후에 핑계 대면서 ‘하라 해서 억지로 했다느니. 당신이 중매해서 했다.’ 이런 거 다 핑계입니다. 김 건모의 핑계예요.ㅎ 몸이 당기는데 안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해 보세요. 신혼 안 거치고 튀어나오는데, 우리 아는 사람 그런 사람 있어요. 결혼식 해놓고 ‘너하고 도저히 안 되겠다.’하고 신혼여행 합방도 안하고 튀어나와서 아버지, 엄마는 부조금 받아놓고 신혼여행 가서 이혼한 셈이 되니까, 얼마나 난처한지, 부조금을 다 물어줄 수도 없고. 결혼 이틀 앞두고 깨지고, 천일의 약속. 하기 싫다는데.

그럼 옛날에는 왜 그런 일이 없느냐, 옛날에는 아버지란 권력이 그 집안의 뿌리고 머리가 아버지예요. ‘가’ 하면 ‘예’ 하고 갔어요. 여자고 남자고 가라면 가는 거예요. 의례 가는 줄 알았어요. 지금은 세상에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내 몸을 좌지우지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이야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음녀가 우리 몸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은 ‘나는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내 주인은 마귀 쪽에서 따로 갖고 논다.’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를 믿든 뭘 믿든 마귀 쪽에서 내 몸을 갖고 놀아요. 언제 어느새 예수고 뭐고 갖다 휙 다 갖다 버리고 ‘예, 갖다 버릴게요. 지가 알아서 자진해서 버리고 충성할 수가 있어요.

북한 자체가 처음에 기독교 나라였어요. 김 일성 나오고 난 뒤에 다 김일성한테 다 갖다 바쳤습니다. 목사고 장로고 이런 사람들, 독립투사들이 목사 장로들이예요. 김일성한테 다 갖다 바쳤어요. 김일성이도 뭐냐, 기독교 신자입니다. 놀랍게도. 목사도 그 밑에 여럿 있었어요. 필요 없어요. 짐승한테는 못 이깁니다. 그런 경우가 될 때는 뭐하지 마라? 인생에 실망하거나 실패라고 하면 이게 바로 드디어 지옥 가는 사람 이예요. 그렇게 되더라도 실망할 것도 없고 실패할 것이 아니고, 다시 할게요.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더라도 거기에 누가 동참한다? 인자가 끼어들면 그건 실패도 아니고 실망할 것도 아니고 그 자체가 교회가 되고 성소가 되고 그게 구원이 되는 거예요.

구원받는 형태가 항상 내 잘났다가 아니라 내 믿음 좋다가 아니라 그 안에 누가 끼어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겨줄 때 그게 바로 오늘날 교회입니다. 어느 자리든 어느 장소이든 항상 이런 우리 몸 자체가 이미 어디로 끌려갑니까? 항상 몸 편한 대로 끌려가다 보니까 항상 마귀가 좋아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이런 몸에다가 예수님의 죽으심이 꽂혀있다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나는 평생 살아도 이렇게 세상 참 좋아한다. 이런 인간을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다니, 너무 고마워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게 없다는 것이 매일같이 그렇게 느껴지도록 주께서 인도해 가시는 거예요. 아까 만두 사오셨는데 ‘만두 맛없었어요. 누가 사왔니?’ 이러거든요. 이 몸이 편한 대로, 몸 자체가 이미지거든요. 세상 자체가 이미지죠. 이미지 속에 하나의 일부다 말이죠. 이미지를 절단한 한 일부가 내 몸이 되고 저쪽 몸이 되고 이쪽 아저씨 몸 , 아가씨 몸, 각자 몸이지만 전부 다 하나에서 공급받는 거죠.

아까 물탱크 이야기했죠? 마찬가지예요. 음녀에서 전부 다 뭘 받습니까? 음녀에서 물탱크에서 음녀의 일부로서 몸을 받는 거죠. 이게 육이예요. 이 육속에 뭐가 들어옵니까? 아까 언약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같이 언약이 꽂혀 버리면 엘리야는 못 나도 엘리야는 구원받고 모세는 못 나도 모세는 구원받고, 아브라함은 못 나도 그 못난 아브라함을 의인되게 하시고 구원하는 거죠. 전부 다 아브라함을 죽이고 모세를 죽이고 노아를 죽이고 죽음 안에서 주님의 죽음에 동참시킴으로써 그 자체가 방주되게 하고 그 몸 자체가 구원의 어린양에 동참하는 제물 되게 하셔서 구원시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이 못난 인간을 죽게 만들되 같이 죽는 분 때문에 죽음에서 우리는 사흘 만에 예수님 부활하듯이 부활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잘났다. 우리는 성실했다. 우리는 열심히 끝까지 믿음을 견뎠다.‘ 그런 소리는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거는 우리가 이야기할 게 아니고 주님 쪽에서 우리 보고 이야기 할 것이지 우리가 할 소리가 아니에요. 선줄로 알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대번에 차이죠.ㅎ 대번에 자빠져버립니다.

사람이 음녀한테는 못 당해요. 왜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내 몸 자체가 음녀를 선호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몸이 아프면 예수를 욕하게 돼 있습니다. 왜 음녀의 본성이 나타나서. 제가 신방 가니까 어떤 권사가 평생 동안 50년을 예수 믿던 권사가 내가 가니까 ‘예수가 뭔데, 나 훈아 노래 틀어라. 찬송가는 틀지 말고.’ 할머닌데, ‘어머니, 목사님 오셨습니다.’ ‘목사는 가라. 목사는 필요 없다. 나 훈아 노래는 누가 껐느냐,’ ‘애들이’ ‘애들은 필요 없다.’ ‘사도신경?’ 사도신경은 다 잊어버렸다. 예수가 누군데?’ 속으로 ‘신난다. 신난다.’ 진작 30년 전에 교회 와서 그렇게 하지, 그게 몸이 편하거든요. 찬송가 부르는 것보다 유행가 부르는 것이 편하다니까요. 그걸 숨긴다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권사 주제에 숨긴다고.ㅎ 아이고, 그러고도 ‘내가 권사인데, 내가 왜 지옥을 가.’ 이렇고 있다고요.

우리는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은혜를 박탈해 가면 지옥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성령께서 약속으로 들어와 앉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맘대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부터. 왜냐, 성령은 보증금이거든요. 보증금을 줘서 이미 주인이 바뀌었어요. 원래 보증금 주면 등기 이전하잖아요. 등기 이전돼서 우리가 아무리 실패하고 실망해도 우리는 실망할 자격도 없어요.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뭐로 보기 때문에? 이미 우리를 ‘잘 해야 된다. 훌륭해야 된다.’ 이걸 요구하는 게 아니고 니는 뭘 해도 ‘죄 밖에 안 나와’ 이미 규정을 했기 때문에 그 규정을 했다는 그 능력이 구원의 능력 이예요. 그게 십자가의 능력 이예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 소리밖에 할 수가 없어요. 이미 십자가가 왔으면 이미 규정이 돼 버렸어요. 우리는 아무리 착한 일해도 죄인이고, 나쁜 짓해도 죄인이고 십자가 때문에 이렇게 된 상황, 그 십자가가 책임지고 이미 우리를 구원받게 된 겁니다.

이런 모습으로 사는 걸 성도의 피라고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과 같지 않고 다른 면면을 드러내니까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놀리겠습니까? ‘교회 가더니 미쳤다.’ 이런 소리 많이 듣잖아요. 그게 뭐냐, 이게 일종의 죽음, 그들과 합세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내 몸은 그들을 좋아하는데 그들이 나를 밀어낸다는 사실, 음녀가 나를 밀어내요. 음녀, 바벨론 세상이 나를 밀어내요. ‘니는 종류가 다른 것 같아. 질이 좀 다른 것 같아. 이딴 소리 왜 해, 십자가 이야기 왜 하는데?’ 이상하게 이거는 그쪽에서 나를 밀어내요. 나는 그쪽이 좋은데 술잔 기울이는 것도 좋은데 그쪽에서 밀어내요. ‘니하고 있으니까 술 맛이 떨어진다.‘ 이런 식으로 밀어내는 거, 그것이 우리가 가야 될 팔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모든 곳곳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는데 주님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역할 하도록 성도 역할 하도록 날마다 조치해 주시고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해주시는 그 모든 은혜가 항상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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