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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6 10:45:15 조회 : 4116         
두 증인의 죽음 110505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요한계시록 14강 두 증인의 죽음 11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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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39.20) 11-05-08 13:00 
가락교회110505요한계시록11장-(두 증인의 죽음)-14강a-(이 근호 목사)
제 14강a

요한계시록 11장은 두 증인의 이야깁니다. 축구에서 two talk 작전이라 하죠. 앞에 선두로 두 사람을 보내는 거예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스가랴 4장에 보면 나오는 이야긴데, 그 두 사람 이야기 이전에 먼저 10장에 지난 주제가 뭐냐, 10장 10절에 보면,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했죠, 지난 시간에 뭐라 했죠? 우리가 먹는 것이 아니고 뭔가 우리 안에 자리로 터 잡고 있는 ‘ 너 좀 사용해야 되겠어, 미안하다, 내가 너를 사용해서 이 쓰디 쓴 이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어.’ 잠시 ‘너’를 차압하는 겁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국방부에서 어떻게 합니까? 민간의 모든 자동차나 그걸 징발하죠. 징발하듯이 입에는 다나 속에는 쓰게 돼서 ‘존재 바꿈’, 그러니까 우리 몸이 있는데 우리 몸은, 나라는 것은 나라는 몸 이미지에서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 전쟁의 안쪽에다가 말씀이 들어가 버리면 껍데기는 우리의 몸인데 속에는 그 껍데기를 사용하시는 주도권은 말씀이 말씀대로 그대로 현실화되고 구체화되는데 우리 몸을 사용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입에는 다나 속에는 쓰다.‘ 쓰다는 말은 사람은 단 것만 원하는데 ’어, 내 몸에서 왜 쓰지? 하아, 내가 원해서 들어온 요소가 아니구나,‘ 하는 거예요. 내가 원래 원했던 바가 아니고 나를 쓰시고자 하는 그분이 원하는 바가 내 허락도 없이 그냥 나를 징발하죠. 나를 그냥 차압해서 쓰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입장에서 11장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속에 들어온 말씀이 뭘까? 어떤 용도로 성도가 쓰임을 받을까, 어떤 스케줄이 준비 돼 있는가? 주께서 나를 ‘쓰시겠다.’ 하니 그때부터 우리는 상상하게 됩니다. ‘주께서 쓰시면 말씀 한번 전하면 수천 명이 몰려오고,’ 멋있는 그런 것들을 염두해 두는데, 그런 것은 입에는 달지만 속에 들어가면 뒤바뀌는 쓴 것을 느낄 것입니다.

쓴 것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면, 이런 거죠. 다시 한 번 해 볼게요. 泳汰? 우리는 껍데기다. 속에 이질적인 것이 들어왔다 했죠? 그래서 이질적이기 때문에 쓰다. 쓴데 여기에 말씀이 들어왔죠. 책을 먹어라 했으니까 말씀이 들어왔죠. 이 들어온 말씀이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펼쳐지느냐 이게 궁금한 거예요. 궁금한데 여기서 잘 알아야 돼요. 이것이 하나의 환등기의 필름이라면 이 필름이 영사되겠죠. 쭉 영사되게 되면 비취게 되면 여기에 말씀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의 몸은 껍질이기 때문에 이 말씀세계에서 어떠한 입장으로 말씀세계에 관여하고 있느냐, 를 봐야 해요. 이것은 바로 죄인의 역할을 하면서 이 말씀세계에 관여하게 돼 있어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 이예요. 구원 받았기 때문에 내가 죄인인 것을 안 순간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이미 다 날아가 버립니다. 죄인인 내가 의인이 될 필요가 있다? 없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공포, 특히 두려움과 공포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남들 보기에 내가 얼마나 훌륭해 보였으면 좋겠다.’는 데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걸 반대로 하는 거예요.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심지어 남들 보기에 좋다 할지라도 속지마라, 주님 보시기에 너는 껍데긴데 껍데기를 이 세상에서 펼쳐보니까 너는 이러이런 식이니까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여기에 스크린이 펼쳐지는 겁니다. 쓰여 지면 그만 이예요. 우리는 ’내가 죄인이냐, 의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쓰여 진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이라는 그 능력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겁니다.

그렇게 펼쳐질 때 말씀의 내용이 스가랴 3장, 4장의 내용을 가지고 또 여러 가지 내용을 가지고 펼쳐집니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이 쭉 펼쳐지면서 우리 두 증인은 죄인의 역할로서 여기에 가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 말씀이 펼쳐지는 요것이 어디로 가느냐면, 이것이 바로 이방인의 세계로 요걸 고대로 들고 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11장에 보면, 지시가 있죠. 10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라고 돼 있죠? 이 예언대로 이방인의 세계에 가는 겁니다.

자, 그러면 잠시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이방인의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 세계와 차이점은? 항상 차이점이 중요해요. 차이점이라고 물으면 양쪽 다를 알아야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복음을 압니다.’라고 나오면 ‘복음 아닌 게 뭐죠?’라고 물어봐야 돼요. ‘이런 것이 복음 아니고 이런 것이 복음입니다.‘라고 차이점을 이야기 해주면 양쪽 다를 아는 사람이 되는데, 그건 모르고 ’ 저는 복음 압니다.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라면 그럼 ’복음이 아닌 것은 뭡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어쨌든 간에 자기의 수치와 자기 구원 받고자 하는 그 욕망, 그것에 허겁지겁 달려들다 보니까 좋다 싶은 것은 다 집어넣는 거예요.

이것은 어제 수요일에 설교했습니다만, 창세기 3장에 아담이 죄 짓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게 뭡니까? 자기 수치를 가렸죠. 피 가지고 가리고, 십자가 가지고 가리고, 언약 가지고 가리고, 좋다는 걸로 다 가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시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그 가린 것을 벗기죠. 피, 언약, 십자가, 이것은 가리는 용도가 아니라고 그걸 벗겨버리는 거예요. 벗겨보면 더 이상 ‘내가 나를 거쳐서 나를 구원하는 그런 수단은 우리에?허용한 적이 없구나.’하는 겁니다. 내가 이걸 믿어서 구원 받겠다는 시도 자체가 그것이 잘못된 구원관이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구원 해준 적이 없어요.

언약 안에서 구원 받겠다는 그런 시도 자체가 엉터리예요. 그럼 그걸 어떻게 아느냐, 우리의 수치를 그대로 노출해야 되죠. 있는 것도 벗겨내시는 주님, 그냥 수치스러움을 그대로 우리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딱 등장시킵니다. 등장 시키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이야기는 그거는 이미 옛날이야기 돼 버리고 ‘주께서 왜 찾아오셨습니까?’ 너는 구원을 받고자 찾아온 것이 아니고 구원에 쓰이기 위해서 찾아온 거예요.

여기서 사명이 소유보다 더 큰 겁니다. * 사명❱소유 * 소유가 되려면 내 뜻이 있어야 되고 내 뜻을 끌어 모으면  이것이 나의 힘이 되어서 이것으로 구원이 된다고 하는데, 이런 방법으로는 이방인들의 세계에서 하는 것이고, 소유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사명 이예요.




10장 11절 또 다시 안 읽어도 알죠? “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증거 해야 한다. 사명이죠. 사명은 내 소유의 바탕이 아니고 내 존재의 바탕이 아니고 어린양의 바탕위에서 사명이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이 성도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전체 그림을 가지고 어디에 간다? 누구와 마주친다? 이방인 세계에 나가는 겁니다. 이방인 세계에 나가버리면 여기서 그 이질적인 것과 부딪히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곧 지진, 두 대륙판이 마주치면 지진이 나오죠? 두 대륙판이 마주치면 지진이 나듯이 이질적인 것이 마주치면 그 안에서 이미 세상에 숨어 있었던 악마가 고개를 쏘옥 내밀고 튀어나오는 거예요. 마귀는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지 전에는 좋은 친구고 훌륭한 사람에 인격자이고 다정다감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도 복음 전하니까 그 틈 사이에서 마귀가 쏙 튀어나오는 거예요. 심지어 부모한테 복음 전해도 마찬가지예요. 어릴 때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자식 키울 정도로 훌륭하신 어머니, 그 어머니 구원 하겠다고 주제파악도 못 하고 복음을 전했더니만, 그 어머니가 복음에 대해서 악랄하게 저항할 줄이야 감히 생각도 못했죠. 어느 자식이든 자기 어머니에게는 천심 이예요. 천심은 하늘에 의지했단 말이죠. 그 어질고 어진 어머니께서 딴 것은 다 모든 것이‘내 자식 내 새끼’ 하는 것을 딱 한 가지 복음만은 전하지 마라. 집사님도 그런 경험 많죠? 예, ‘딴 건 다 좋은데 복음만은 제발 나한테 전하지 마라.‘

두 대륙 간에 충동해서 찌지직~ 지진이 일어나죠. 그것이 왜 그러?하면 이 안에 있는 쓰디 쓴 것이 빠지고 말씀이 없이 껍데기만 가버리면 이방인들은 우리와 대화가 잘 돼요. 왜냐, 둘 다 인간이기 때문에, 저쪽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라. 우리 껍데기는 별게 아니에요. 우리 껍데기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담에서 나온 거 아닙니까? 저쪽 인간도 누구 출신 이예요? 아담 출신이잖아요. 아담 출신이 대화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다 되죠. 다 자기 몸 위주니까, 편하면 진리고 불편하면 진리가 아니고. 이거는 모든 것이 대화가 안 될 수가 없죠. 나한테 베풀어주면 너에게 이득을 줄게, 오케이~ 뭐 성사 안 될 게 없어요.

집사님도 대전에 가서 배웠어요. 물건을 팔 때는 반드시 물건의 값어치를 ‘이 물건을 들이면 그만큼 이득이 남습니다.’ 라고 설득을 시키려면 이야기를 해야죠. 그게 얼마나 중요해요. 이 물건을 이걸 왜 들여야 되는가, ‘들여놓으시면 당신에게 이런 이득이 있습니다. 안 들이면 당장 손해입니다.’라는 식으로 설득을 하는 그것이 판촉의 기본이라 했잖아요. 마찬가지로 대화가 되는 거예요. 당신한테 이익이 되겠다는데 대화가 다 되죠. 그런데 무슨 지진이 일어납니까? 대화가 잘 통하는데,

문제는 이 껍데기 속에 뭐가 들어온다? 본인이 원치 않는 쓰디 쓴 말씀의 세계가 들어오니까 그때부터 이방 세계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거예요. 사람 대 사람의 말은 다 되죠. ‘어머님, 천국 가시면 이러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 천국 믿을게.’ 다 이렇게 나오죠. ‘어머니 천국 가시면 이런 이득이 있고 영원히 죽지 않고 아픈 것도 없고 이런 소득이 있습니다.’ 그러면 ‘ 내가 한번 믿어 볼까?’ 이런 이야기가 된다니까요.

그런데 ‘어머님은 예수님을 섬겨야 됩니다.’ 평생 동안 자기만 섬기는 것이 아담의 속성인데, ‘나 말고 누구를 또 섬겨? 난 나 섬기는 것도 못 섬겨서 힘든데 거기다 예수를 섬기라고? 내가 왜 섬겨야 하는데? ‘ 예수 섬기라는 것에는 딱 질색이죠. 왜냐, 사람은 자기만 사랑하는데 자기 말고 다른 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 이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죠. 그러니 대화가 안 되죠.

자, 그렇다면 이 쓰디 쓴 말씀이 이방인의 세계로 갈 때는 결국은 대화해서 꼬시라고 간 것이 아니고 이건 심판용으로 이미 세상은 끝났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해서 파견된 겁니다. 그러면 그 통보하는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니까 어렵기 때문에 미리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속에 있는 뻬맛?아까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우리 안에 누가 들어온다 했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죠.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죠. 예수님은 ‘죽음’을 말하는 겁니다. 죽음에서 부활한 분이기 때문에 항상 시발점이 십자가 죽음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자기가 여기 ‘있음’ 있다는 겁니다. 오늘도 어린이날이잖아요. 어린이날 애들 데리고 왜 놀러 갑니까? 애가 있잖아요. 내 자식이 없으면 못 가는데 애가 있다 말이죠. 그럼 내 부모가 여기 있고, 나는 부모고 너는 자식이고, 이 ‘있음’을 더 더욱 더 행복하게 ‘있음’을 하기 위해서 애를 데리고 놀이동산에 가고, 맛있는 저녁을 사 먹이고 하는 겁니다. ‘있음’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면 이방인의 세계는 ‘있음’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예수님은 ‘있음’으로 인해서 죽임을 당하신 분이 새로운 ‘있음’ 새로운 부활의 세계를 가지고 왔다 이 말이죠. 부활의 세계가 그냥 저 ‘있음’에서 이 ‘있음’으로 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죽음’을 통해서 부활되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실 때에는 반드시 이 과정을 빼놓지 않고 필수 코스로 이걸 경과해서 저쪽(이방인의 세계)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너희들이 나를 죽였잖아’ 이게 바로 기독교입니다.

‘세상아, 너희들이 나를 공모해서 죽였다. 그래서 너희들은 내 심판자 손에 죽어야 돼,’ 라는 소식을 네 자로 ‘기쁜 소식’이라 하는 겁니다. 왜, 비로소 그게 내가 미처 몰랐던 내 본연의 모습, 우리 본성인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그 죄의 진의,  죄의 진짜 본질이 하나님을 섬기는 게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을 주 되게 하느냐, 아니면 예수님 빼고 내가 직접 하나님을 상대하느냐, 그런 문제로 모든 것이 결말이 나버렸어요. 마귀, 귀신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야고보서에 나오죠?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믿고 두려워 떤다.’고 돼 있어요. 귀신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특히 욥기에 보면 뭐가 나와요? 사단과 하나님이 대화하죠. 스가랴에 보면 사단이 하나님 앞에 좌정해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항해서 악마로서 대하는 게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된다 해서 거부하는 겁니다. 왜 우리가 나사렛 예수한테 종속돼야 됩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만?nbsp;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는데, 왜, 우리가 엄연히 여기 ‘있음’인데 이 ‘있음’이 선악과 따먹을 때 인간하고 악막 공모한 게 뭡니까? 이제는 우리가 종속되지 말고 우리도 하나님처럼 같이 맞먹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 있음은 하나님이 있게 한 이 존재하는 걸 가지고 왜 이걸 나사렛 예수에게 종속돼야 되느냐 말입니다.

선악을 알면 우리가 알아서 자립적으로 자존할 수 있는데, 결국은 모든 귀신과 악마는 누구를 공격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의 자리에 되는 것에 대한 거부입니다.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죠. 그건 마귀 종교죠. ‘나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항상 자기 자신을 집어넣어요. 자기(예수님)를 우회해서 자기를 비껴서 하나님께 갈 수가 없어요.(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내놓고 ‘내가 예수님 가시는 그 나라에 가겠다.’ 하니까 가지를 못해요. 왜, 하나님은 예수님만 받지, 인간은 상대를 안 하시니까, 그게 피조물로서 그게 싫은 거예요. 악마도 싫고 인간도 싫어서 둘이 합작해서 저것만 먹으면 더 이상 하나님이 ‘따먹지 마라’한 것은 하나님이 신에 대한 하나님 스스로 자기 허점을 드러낸 거라고 본 겁니다. ‘너가 따먹지 마, 너가 만약에 따먹으면 신처럼 될 까봐 겁나서 내가 따먹지 말라고 한 거야,’ 라고 누가 해석했습니까? 마귀, 뱀이 그렇게 해석을 한 거예요. 숨어있는 내막을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약점을 노출시켰으니까 이참에 우리가 거기에 구애받지 말고 이참에 저걸 따먹어서 우리고 같은 하나님이 돼 버리자.‘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뭉개버리는 거예요. 처음부터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을 뭉개버리는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인간, 그걸로 만족하는 상태로 들어가?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한국 교회 같은 경우는 기독교가 아니고 하나님 교예요. ‘하나님 아십니까? 아이쿠, 아세요? 구원 받았습니다.’ 간단하게 ‘죽어서 천국 갑니다. 죽어서 하늘나라 갑니다.’ 지금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님이 빠져버렸어요. 예수님은 여러분의 죄만 씻어주고 빠져버린 사람 이예요. 죄 씻음 받았으니까 예수님을 상대하지 말고 직접 하나님을 상대 하세요. 이게 악마의 품성에 아주 딱 들어맞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이방 세계에 보냄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무슨 사건을 부각시키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을 부각시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나옵니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여기 하나 더 첨가하면 문경 채석장 이예요. 문경 채석장에서 어떤 분이 십자가 진 것 알죠. 참 이 대목이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 왜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들을 쓰디 쓴 말씀을 줘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 잘 전하면서 자기 팬들 많이 확보해서 유명인사 돼서 유명한 단상에서 ‘이렇게 돌에 맞았어.’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죽게 하시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반복성’ ‘예수그리스도가 너희 죄로 인하여 죽었다.‘ 그때 인간들은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죽고 난 뒤에 태어났습니다.‘ 이럴 수도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방인과 성도의 만남의 틈새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그 이방인 세계에 뭐가 이미 작용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거부하는 어두운 악마가  이미 관할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관할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니까 진짜 예수님의 쓰디 쓴 말씀이 있는 사람을 그들과 마주치게 해서 또 다시 십자가 사건을 벌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봐, 니 의지가 아니지, 니 맘이 니 맘이 아니야, 니 영혼이 니 영혼 아니야. 누구한테 예속돼 있어. 아주 장악돼 있어 어두운 세계에.’ 어둡다는 것은 기존의 악하다는 의미, 악하다 선하다는 기준이 아니에요.

예수그리스도에 대漫?인정치 않는 악함이죠. 예수님이 등장 안 하면 전혀 악하지 않아요. 다 점잖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교양적이고 경건하고 착하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 그런데 그 사울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잖아요. 한둘이 아닙니다. 살인자예요. 그래서 ‘살인자요 폭행자요. 그런 나를 창세전에 예정하사 하나님의 사도로 세웠다.’ 그것은 본인의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역할, 자기가 구원 받아도 주께서 다뤄야 될 사명!! 죄인 중에 괴수를 그렇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우리보다 죄를 더 지은 게 아니에요. 왜냐, 다 같이 악마의 공중권세 잡은 자에 속해서 진노의 자녀라는 점에서는 하등의 차등 없이 니나 나나 다 똑같은 뱀 이예요. 뱀!! 지난 수요일 어제 이야기 했듯이 동창회 한 100명 모였으면 뱀 100마리 모였다고 생각하면 돼요.ㅎ 다 같이 뱀 이예요. 그 중에는 순한 뱀 있고 이쁜 뱀 있을 거예요. 자기 잘 닦는 이쁜 뱀, 착한 뱀도 있는데, 본인이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언제 아느냐, 본인에게 들어온 쓰디 쓴 이질적인 말씀 때문에 복음을 전했더니만 졸지에 완전히 싫어버린 바 되었다. 또 다시 십자가의 설움 받는 그런 슬픔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보면 돼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단순히 생각하면 편안히 생각하면,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래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참된 의인이고, 참된 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하게 성령 받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인정하는 유일한 인간입니다. 소위 인간이라고 우기는 인간들과 지진 판이 마주치는 가운데서 숨어있던 인간을 지배했던 악마가 그 모든 정체를 드러낸 거죠. 그 십자가 사건을 항아리에 담았다고 칩시다. 항아리에 담았는데 이걸 봉인해 놨어요. 봉인(도장)을 딱 떼는 게 7째 인이고, 떼면서 통보하는 것이 7나팔이고 요걸 갖다 부는 것이 7대접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입니다.

항상 십자가 사건을 딱 저지르면 ‘됐어, 하고 봉인하는 거예요. 그게 펴지지 않아서 사도요한이 우는 겁니다. 사도요한이 왜 우느냐 하면요, 본인이 밧모 섬에 귀양 온 것이 자기 속에 든 쓰디 쓴 말?때문인데 이 말씀이 활짝 펴야 된다 말이죠. 그런데 자기 앞에 봉인된 책자가 오니까 이걸 자기 역할대로 펴서 공개해야 되는데 이걸 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럴 때 다윗의 자손이 되는 예수님이 와서 봉인을 뗀다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5장에 나오는데  이걸 11장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 대신에 ’성전‘이라 하는 거예요. 지금부터 성전 이야기 하겠습니다.

성전이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 11장 2절에 나오죠. 성전에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반복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의 보통 죽음이 아니고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 승천하셨다. 그렇다면 반드시 세상에 있는 인간들, 이방인들에게 다가갈 때는 그냥 부활하신 몸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뭘 앞장세운다? 자기가 통과했던 이걸 통과해 줘야 이쪽 이방인들의 실체가 드러나니까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하는데, 앞장세우는 여기의 역할을 자기가 성령 받은 성도에게 two talk 처럼, 두 증인에게 시키는 거예요.

두 증인!! 그럼 세 증인이 아니고 네 증인이 아닌가? 두 증인은 스가랴에 나오는 이야기라 했죠? 스가랴에 나오는 두 증인을 세움으로써 이 증인들이 뭐를 실패하느냐 하면, 모든 말씀을 지금부터 말씀이 증인들이 있음을 말씀으로서 대변해주기 위해서 스가랴를 동원한 겁니다. 꼭 두 사람이여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 성도를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두 사람이냐? 이것이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두 인물이 대표로 해서 보여줘서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같은 말씀 구조아래 있는 사람도 이 두 증인의 신세와 똑같은 운명을 갈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수제비 덩어리를 다 떼면 떼서 넣은 수제비나 남아 있는 수제비나 질이 같잖아요. 그걸 딱 떼는데 그걸 스가랴를 가지고 인용하신 겁니다. 자, 여기서 성전 이야기 나옵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성전 구조가 이렇게 돼 있어요.(동영상으로 그림 참조하시면 좋을듯합니다.) 성전 구조가 여기는 요렇게 되고 요렇게 됐는데 요게 100미터가 안 돼요. 그런데 제단까지 합하면 100미터가 됩니다. 이쪽은 50미터가 되는데, 요 성전 제단에 뜰이 있어요. 요 뜰이 제사장의 뜰입니다. 여기는 회람들이 있어서 작은 방들이 3층으로 돼 있고, 이 주변을 넓혀서 이만큼 뜰이 있어요. 이것이 이스라엘 남자들 뜰이 있어요. 뜰이라 하는 것은 한계를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요기까지 들어올 수 있고 제사장 뜰에는 못 들어가는 거예요. 또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여인의 뜰입니다. 여자는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동쪽에 문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거보다 훨씬 넓은 뜰이 있습니다. 이 넓은 뜰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 자체가 결국은 뭣을 보여주느냐 하면, 요 뜰에서 요 뜰로 넘어가지를 못하죠. 못 넘어간다는 것은 그 경계선 하나마다 척량이란 말은 더 이상 설계할 때 설계 자체에서 극복될 수 없는 턱, (문지방, threshold) 을 하나님께서 턱을 준비한 거예요.

여인의 뜰, 이스라엘 뜰, 제사장 뜰은 구분하지 않고, 여기서 11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방인의 뜰을 강조했죠? 결국 성전에서 이렇게 구분한다는 것은, 여인, 이스라엘, 제사장, 고 차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요거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요걸 ‘거룩’이라 보고, 이 바깥 전체를 비 거룩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이것을 신약 성경에 와서 설명을 하면 이런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 볼게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 했어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라 했습니다. 다른 예수가 있을 것 같으면 여기 참 예수가 있을 것이고, 다른 복음이 있으면 참 복음이 있고, 다른 성령이 있으면 진짜 성령이 있을 것 아닙니까? 요 차이점을 알아야 된다 말이죠. 요 차이점 할 때 뭐가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11장 15절에 보면 여기에 사단이란 용어가 나와요. “사단의 일군이라” 지금 이것이 그냥 예수 전하고 그냥 복음 전하고 그냥 성령 전하면 이것은 뭐가 빠진 상태입니까? ‘사단이 누굽니까? 악마는 어떤 존재입니까?’ 라는 게 빠지죠. 거기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럼 알 필요 없이 내가 전한 복음만 받으면 어디에 간다? 구원 받는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고게 바로 가짜 복음이라는 겁니다.

사단?악마로 언급하지 않고 악마를 집어넣지 않고 인간에게 어떤 유리한 거, ‘당신 이리하면 유익입니다.’라는 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전부 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에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고린도교회 설교자, 요새 말로 당회장이죠. 당회장을 사도바울이 뭐라 합니까? 악마의 사단이라 봤죠. 이것이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 사도바울이 증거 한 교회에 왜, 당회장, 설교자가 악마의 일군, 악마의 하수인이 왜 들어갔느냐? 그게 들어가 줘야 참 예수, 참 복음, 참 성령이 오히려 부각이 되는 겁니다.

'악하기 때문에 세우신다.’ 이겁니다. 악하기 때문에!! 악마기 때문에 목사로 세운 거예요. 이런 소리가 얼마나 시원하게 들립니까? 이게 사실 이예요. 목사 시험 볼 때, ‘복음을 왜 전하겠어요?’ 이런 사람 절대 안 세우거든요. ‘1년 만에 300명 모으겠습니다.’ 이러면 세운다 말이죠. 왜냐하면 악마기 때문에 그 목사가 세워져야 돼요. 악마기 때문에 그 대다수가 부흥돼야 돼요. 악하기 때문에 번창시켜 줘야 됩니다. 호세아 보면 나오죠. 무성할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죠. 번성할수록 더 악을 저지른鳴?나오죠. 번성할수록 악을 저지르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그들이 번성하고 축복 받았다고 우기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손쉽게 일어날 수 있는 그런 혜택이 있습니다. 이 혜택이란 말을 해야 되는가 모르겠습니다.ㅎ

십자가 사건이, 십자가 주님이 당했던 수모가 처처에 곳곳에 자주 일어나는 결과를 낳게 되죠.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밖에 모릅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려면 무슨 수를 다 쓰죠. 그 수가 뭐냐 하면, 악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교회는 부흥돼야 되고 번창돼야 됩니다.

이번에 문경에서 50대 남자가 십자가 달려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첫 번 느낀 것은, ‘저것이 행함이다.’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느냐 말이죠.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여의도에 4중 복음이 뭔지 알아요? ‘여러분, 이런 거 이런 거 있으면 믿음 있습니다.‘라고 확인시켜 주는 게 4중 복음 이예요. 방언하고 병고치고 복 받고 장사 잘 되는 것, 이런 사람이 복 받음 사람이라고,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기 몸을 동원해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이방적인 욕망, 그 욕망을 들어줄 때 그 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쓰디 쓴 말씀을 먹고 들어간 사람 같으면 어떻게 돼요? 튕겨 나오겠죠. 그 튕겨 나온 그 사이에서 성경대로 사단의 일군이라는 것이 성경의 말씀대로 현실화되고 구체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사단의 일군이 들어있죠. 사단의 일군이 누군지를 확인하는 차에 우리를 주께서 보내는 겁니다. 보내서 복음을 전하면 튕겨 나오죠. 사단의 일군인지를 안다 말이죠. 튕겨 나오는 정도가 아니고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그걸 소돔이라 하고 애굽이라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공간, 지점이라고 본 겁니다.

자, 이제부터 어려운 거 합니다. 지금까지도 어려웠지만 쉽다 치고 좀 더 어려운 것 하겠습니다. 어려운 거 해야 돼요. 원치 않는데 할 수 없어요. 한번 봅시다.

소돔이라 하고 애굽이라 하고 그 다름에 십자가죠. 그런데 이 세 군데를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공간, 한 장소로 봤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특히 무엇이 어려우냐 하면, 이 한 장소 한 공간을 ‘한 순간’으로 본다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같이 한 덩어리로 만들어 버려요.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고 계기를 ‘사건’이라고 봅니다. 쉽게 말해서 블랙홀이라 할 때, 처음에 빅뱅, 우주가 폭발할 때,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었는데 그 입자들이 터져 나오는 입자들이 퍼지면 그게 공간이고 그 입자들이 날아다니면 그것이 시간이 되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 자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먼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데 시간과 공간이 없죠. 먼저 시간과 공간? 먼저도 있어야 하는데 먼저도 없을 때는 없어요. 서울 이예요? 송파구예요?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없는 게 없으니까.

없다는 게 뭐냐 하면 현재 이방 세계를 이해를 해야 제 말을 어렵다 하지 않아요. 이방 세계는 전부 다 ‘있음’의 세계예요. 있음의 세계에서는 시간은 맨 처음부터 역사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있음과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 없는 미래 없다.‘ 이것이 있음의 세계에서는 철칙이고 진리입니다. 남자 50 같으면 49없는 50이 어디 있습니까? 해마다 난 50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왜 그래요? 40대가 없으면 50대가 없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그 있음이 계속 있음으로 가기 때문에. 그런데 이번 수련회에 디모데 하지만, 디모데전서에 보면, 아주 어려운 대목이 나와요.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이 나와요. 아~ 학자들이 그거 푼다고 바빠요.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지, 어떻게 애 낳는다고 구원 받느냐“?? ’그럼 산부인과 가서 애 낳는 사람은 다 천당 갈 건데?’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 받는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이걸 설명해 드릴게요. 여인이 하나잖아요. 하나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다른 존재가 나왔죠. 아기라는 다른 존재가 나왔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볼 때 여자가 하나였는데 여자한테 또 하나의 인간이 있죠. 그러면 몇 명이죠? 두 명 되죠. 그러면 새로 생긴 아기는 어디서 생긴 거예요? 우리는 여자 몸에서 나왔다는 걸 알잖아요. 하지만 이걸 가지고 뭐로 보느냐 하면, 없는 데서 나왔다는 거예요.

항상 하나님의 사건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 받았다 하면, ‘실례하지만 어디서 구원 받았습니까?’ 라고 구원 파에서 하는 거죠.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날짜를 대야 돼요. 1985년 7월 6일 오후 2시 40분에 구원 받았습니다. 날짜를 대는 구원은 그 바탕이 뭡니까? 역사라는 바탕 위에서 나온 거죠. 있는데서 있음이 나왔죠. 구원 받은 장소는 어디였습니까? 그거는 가야산 두 번째 강의할 때, 그때, 이미 가야산이라는 게 있잖아요. 있는데서 있다고요. 그러면 못 가면 기도원 쫓아간다고요. 가서 그때 그 감회를 다시 한 번 맛보기 위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시 그때의 은혜로 다운 되어 있는 신앙을 다시 찾기 위해서.

 그런데 그러한 행위 자체가 결국은 나라는 있음을 더 있게 하기 위한 이방적인 사고방식에 해당되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있음에서는 있음만 나오지, 아무것도 없는데서 나올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데서 둘이 나왔다는 것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이 자체를 태어난 아이를 여자를 통해서 없음이 비로소 있음으로 새롭게 등장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해산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구원이란 개념은 마치 애가 태어난 해산과 같은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하는 겁니다. 그걸 애를 해산함으로써 구원받았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말은 그 여자가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됐다는 이 말입니다. ‘아~ 이거구나, 내가 애 낳다고 애가 내 소유가 아니고 주께서 주셨구나.~! 마치 내가 저처럼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구원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아는 계기를 주신 것처럼 고렇게 할 때 여자가 앞에 비록 그 주변의 이야기는 뭐냐, ’여자는 교회서 잠잠하고 남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남자한테 말  듣는다고 해서 전적으로 남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여자는 여자 따로 자기 나름대로의 여자 특유의 구원의 징표를 갖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그 주도권에 너무 부러워하거나 탐내지 말라고 오늘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어려운 거 해 봅시다. 시간과 공간이 여기서 새롭게 등장한다면, 그렇다면 뭐가 어려우냐 하면,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 잠식되어서 그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새로운 사건으로 인하여 이것이 부정당하는 거예요. 이것이 이해가 안 가는데, ‘너는 왜, 시간과 공간밖에 몰라, 부정당하는 거예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할게요. 만약에 ‘내가 어제 십자가 은혜를 받았다. 이제는 내가 죄를 안 지으면 의인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또 할 수 있죠. ‘나는 처음부터 원래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의인되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다. 은혜 받았으니까.‘라고 했다 말이죠. 했는데, 오늘이 되었어요. 오늘 누구 생각하고 있느냐 하면 갑자기 ’어제 나는 은혜 받았으니까 오늘도 은혜 받은 사람 맞다.‘는 있음에서 있음을 끌어 모으는 본성을 또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그것을 벗기고 새롭게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만약에 ‘어제 뵉?받았는데, 오늘도 은혜 받았으니 구원 받은 사람 맞다.‘ 할 때에 갑자기 가정에 우환이나 어려움이 생기면, ’ 하나님이여, 제가 은혜 받은 사람 맞는데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라고 주님의 은혜가 있어도 갑자기 있음에서 지키려고 이것을 사수하려고 할 거다 말이죠. 그러면 당연히 있음에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부활薩?때문에 반드시 부활은 뭘 통과해야 한다? 십자가 죽음을 앞장 세워서 그걸 통과해서 일이 벌어지듯이 쳐들어오기 때문에 현재 이방적인 그런 우리 껍데기와(우린 아무리 구원 받았어도 껍데기는 이방 적 이예요.) 이방적인 사고방식, 돌아서면 내 것이고 돌아서면 내 소유고, ’나 은혜 받았단 말이야. 나한테 함부로 까불지 마, 나 은혜 받았어.‘ 라고 또 자기주장을 되풀이해요.

은혜 받으면 ’나는 그래.‘ 라고 죄인이면서 나를 근사하게 여기는 우리의 껍데기의 본성은 계속돼요. 그렇다면 이것에 대해서 시간과 공간을 추월해서 날마다 새로운 것을 얻어내죠. ’아! 어제 은혜를 받았는데 몰랐던 은혜를 오늘 새로 받네.‘ 어제는 몰랐던 은혜를 오늘 새로 받는 거예요. 그럼 오늘 은혜 받는 것은 뭐가 돼요? 껍데기가 돼 버리고 말죠. 말씀이 우선이지, 너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너는 계속해서 껍데기로 쓰여 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 속에 포함이 돼 있는 사명자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아까 소돔이라고 하고 애굽이라고 하는 그 십자가를 미리 알면 겁나서 우리는 못 갑니다. ’아이쿠, 주여, 왜 이러십니까? 가만히 있으렵니다. 괜히 나대다가 죽는다.‘ 고 겁내는데 이건 하고자 하는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이건 겁을 내는 자체가 뭐가 됩니까? 또 다시 이방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회수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주여, 저 오늘 은혜 받았으니까 조용히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전도한다든지 이따위 소리 하지 마시고 나한테는 믿음도 없습니다.‘라고 빼죠. 그러다가 소 뒷발질 하다가 쥐 잡듯이 그러다가 여러 사람 전도하고 그래요.ㅎ 여러 사람 전도하고 본인은 욕을 먹고, 이와 같이 시공간 문제가 남아 있는데, 그것은 10분 쉬고 다음시간에 계속 합시다.
 이한례(IP:203.♡.47.76) 11-09-15 11:57 
가락교회110505요한계시록11장-(두 증인의 죽음)-14강b-(이 근호 목사)
제 14강b

시공간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시간과 공간이 들어가면 사건이 된다. 사건이 돼 버리면 기존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생각하는 시공간이 다 해체가 되고 사건 속에서 나오는 새로운 시공간이 새롭게 분배가 돼요. 새롭게 분배가 돼 버리면, 소돔이라는 공간, 시간, 이것은 창세기 19장에 나오죠. 애굽, 이것은 출애굽기에 나오잖아요. 그 다음에 십자가, 이것은 완전히 장소도 다르고 시간도 다른데도 불구하고 전부 다 이걸 한 장소, 한 순간으로 보는 것은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시공간이 전부 다 부정당하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의미라 하는 것은 우리의 몸을 중심으로서 ‘내가 했다. 내가 시간을 여기는 게 의미이다.’가 무엇과 충돌을 되느냐 하면, 예수의 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벌어졌던 사건이 일어났던 그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몸에서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그 말씀 완성의 시공간에 의해서 교체가 돼야 됩니다. 교체가 돼 버리면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것은 뭐가  돼 버리느냐 하면, 이건 환상이 돼 버리고 참다운 현실은 숨어있었던 현실인데,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에게 나타날 때 그게 참된 현실이죠.

그러면 여기 지우개가 있다면 하나 예를 들어 봅시다. ‘이게 뭐냐?’ 할 때 ‘이건 지우개다’ 하면 틀린 거예요. 이게 지우개 같으면 이걸 산 시점이 있을 것이고 산 가격이 있을 것이고, 팔았던 1층에 문방구가 있을 게 아닙니까? 공간 시간을 누가 정합니까? 우리가 이해하고 납득이 되는 시공간이 둘러싸여 있는 지우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사건에서 보면 이 지우개는 뭐냐, 이 지우개는 주님께서 복음 전하라고 주신 것, 새로운 의미가 부여돼요. 지우개를 아무리 뜯어봐도 예수님 여기에 안 붙어있고 예수님이 복음 전하라고 주신 의미가 전혀 안 붙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해요. ‘이 지우개는 복음 전할 때 지우라고 주신 것이다.’ ‘도대체 너는 그따위 해석을  어디서 나오느냐.’ 그따위 해석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것은 내가 내 돈 주고 문방구에서 내가 샀다. 그 돈은 내가 봉급 받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부정하는 심리, 그게 틀렸다. 그따위 사고방식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지, 그러니까 니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당하지, 그러니까 니가 애굽에서 나와야 되지, 소돔, 애굽, 십자가 이 세 가지는 뭐냐 하면, 빠져 나와야 되는 곳, 그런 사건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세상이죠.

소돔이란 애굽이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게 한 그 동네나 일방적으로 매도당할 만한 새로운 능력과 의미가 성도 안에서 쓰디 쓴 말씀으로 출렁이고 있어야 한다 말이죠. 그러니까 세상이 환상이냐, 현실은 십자가만 현실이냐, 그럼 그렇게 되면 화가 나서 ‘지금 이 손톱은 누구 거야?’ ‘손톱 아냐,’ ‘손톱 맞잖아. 아프면 병원 가는데 의사를 부정한단 말이냐, 아프면 병원 안 갈 거야?’ ‘아니야, 이 손톱은 주님의 거야, 병원에 가면 의사도 주께서 허락하신 거야. 심지어 나를 핍박하는 저 사람들도 주께서 허락하신 거야,’ 모든 의미에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주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다 사건화 되어서 가미가 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마지막에 뭐라 했습니까? ‘주여 내가 여기서 죽으면 복음 못 전합니다. 나 말고 복음 전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내가 살아야지.’ 이렇게 했습니까?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다른 말로 저들은 뭣에 빠져있다? 그들은 환상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그것이 뭐냐? 그것은 환상이 아니고 진짜 현실을 모르니까 용서해 달라.

사람의 문제가 자살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안 죽는다는 데에 있어요. 천 번을 죽여도 안 죽어요. 짓밟아도 안 죽어요. 왜? 주께서 무덤 속에서 다시 불러내기 때문에, 법정 스님이고, 김수환 추기경이고, 내놓으라 하는 그런 훌륭한 스님들, 다 지옥가기 위해서 다 불림을 당해요. 그래서 거지 나사로가 똑똑한 사람 이예요. 왜, 세상에 축구가 전반전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후반전이 있다고요. 사람들은 전반전으로 끝인 줄을 알죠. 15분 쉬는 것을 모르고, 후반전 남아있는 걸 모르고, 나사로는 후반전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예요. 전반전에는 거지였고 후반전에는 아브라함 품에 안겼고, 부자는 전반전에 부자였고, 후반전에 지옥 가고. ‘아이쿠, 휘슬 부니까 게임 오버, 끝나버렸어요.ㅎ

회사 직원도 마찬가지지만, 얼마나 젊은 애들이 철이 없고 자기가 교육받은 이것이 세상에 현실이고 전부인줄 알고 있어요. 아까 앞에 보니까 머슴아 둘하고 기집 애 하나가 담배 피워서...가서 간섭했는데, 지옥에서 담배 피우면 어떤지, 천국에는 담배 피우지 못하니까, 스데반 집사가 그런 마음이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성경에 보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해요. 그게 모델이 돼야죠. 성령 받은 모델은 뭐냐 하면 죽어도 안 죽고 주님 품안에 있다는 그걸 만끽하고 살아가는 게 성령의 충만 이죠.

이게 뭡니까?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품고 사는 것이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에서만 비로소 부활이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은 것을 우리가 짊어지면 그 안에서 뭐가 나온다? 내 몸에서 생명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신기하기 짝이 없어요. 죽은 예수님을 모셨는데 생명은 계속해서 영생을 얻는 거예요.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어린아이의 구슬이 발광하는 빛이 튀어 나오는 구슬 안고 있으면 얼굴이 벌겋죠. 온 몸이 발그레하게 빛이 비취는 것처럼, 우리가 품고 있는 보배로운 복음, 베드로전서에 보니까 이 보배로운 것을 품고 있으니까 여기서 영생의 빛이 비춰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이 현실이라는 것은 전체를 미국, 소련, 베트남, 러시아,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가 있더라도 이 전체는 뭐가 되냐? 이 전체는 하나의 애굽이 되고, 이 전체는 하나의 소돔이 되고, 이 전체는 하나의 요한계시록에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현장이 되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바로 성도가 현실을 아는 성도가 그들 속에 자립할 때 비로소 그들은 전체가 애굽으로 변해버리는 겁니다. 전체가 소돔, 고모라로 변해버리는 겁니다.

성도가 제대로 현실을 볼 때, 전체는 환상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들이 애굽이라 할 때는 여기에 뭣이 나와야 되느냐, 애굽이라 하는 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오는 것은 출애굽이 돼야 되고 소돔에서 나오는 것은 불 심판이 나오겠고 십자가에서는 뭡니까? 영생이 나오겠죠.

고걸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에 보면,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렇게 돼 있죠? 11장 10절에 보면 “서로 기뻐하고” 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그걸 근거로 해서 “그 시에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그리고 15절부터는 드디어 죽었던 성도는 어떻게 됩니까? 지금 어디에 가 있죠? 16절~17절 보면 어디에 가 있습니까? 천국 가 있죠. 이미 천국 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자기가 죽으면 안 되고, 세상이 죽여줘야 되는 겁니다. 세상이 죽여줄 때 세상은 애굽으로 드러나고 성도는 백성으로 드러나고, 그래서 양쪽 다 말씀 구조를 보여주기 위한 배치 물로서 충분하게 하나님께서 활용하시고 허락하신 겁니다. 악하기 때문에 그들은 성도를 죽여줘야 되고 성도는 영생을 위해서 하나님이 죽여주시는 죽음에 순복하면서 죽어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로 지금 굉장히 오늘 강의 중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이런 이야기를 잘못 해석하면 문경에 가야 합니다.  문경에 가서 소위 신앙적으로 내대야 돼요.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라고 고함쳐야 되고, 경찰서에 묶이면 순교처럼 이렇게 나대야 돼요. 그 해석은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거예요. 그럼 어디서 잘못됐느냐, 그 잘못 된 것을 이러한 해석은 잘못이라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까 이야기 하다가 딴 쪽으로 갔는데 다시 성전으로 가 봅시다. 성전을 누가 만들었죠? 1번, 다윗이 만들었다. 2번, 솔로몬이 만들었다. 성전은 죽은 다윗이 만들어요. 왜냐하면 성전을 언약궤라 하는데 다윗 시대의 언약은 다윗언약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됐죠? 그런데 누가 가나안 땅을 정복했죠? 지금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복 한 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세에게 주어진 언약이 있기 때문에, 그게 모세언약이거든요.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주어진 언약에 이렇게 환상이 아니고 실제 현실로 이렇게 성취됨을 지는 관찰자요. 목격자에 불고합니다. ‘야, 우리 선생님 모세가 받았던 이 언약이 장난이 아니고, 그게 진짜 현실이구나.’

그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그 원리 원칙이 주께서 하는 모든 원리 원칙이 무엇에 준하여 일어난다? 모세에게 주신 율법대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 증거 하나가 기브온 어떤 종족은 반드시 멸망당해야 하는데 모세 언약대로 하나님 앞에 반드시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 멸망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모세 언약에 근거해서 그들은 멸망당해야 된다고 여호수아가 이야기하죠.

그렇다면 여기서 어렵다는 게 뭐냐 하면, 성전 준비를 다윗이 했다고요. 성전이 무엇이냐는 문제는 다윗언약이 무엇이냐에 나와요. 다윗 언약이 무엇이냐? 모세 언약이 무엇인지 잠깐 설명하고 다윗언약을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 까지 관통할 때 언약 가지고 관통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죠. 모세언약은 이겁니다. 시내 산이 중심이죠. 시내 산 위에 있는 것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죠. 사월초파일에 절에 가면 뭘 달죠? 연등을 달죠. 연등을 발로 밟아버리면 찌부러지면서 그 윤곽은 그대로 있죠.

모세언약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찌부러뜨리면 아래 있으면서 아래쪽에 무엇이 생기냐 하면, 새롭게 거룩의 공간이 생깁니다. 그럼 뭐가 생겨요? 시내 산에는 여호와 계시잖아요. 아래에 거룩이 공간에는 ‘하나님 이름’이 계세요. 이름만 계세요. 하나님의 이름이 계셔서 그 이름을 통해서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해야만 아버지께 영광이 돼요. 왜? 예수님은 내려오신 분이기 때문에.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ㅎ 거룩이 이렇게 와 버리면, 잘 들으세요. 거룩이 와 버리면, 여기에 아주 경건하고 겸손한 사람이 졸지에 뭐가 돼 버려요? 졸지에 세속이 되고 졸지에 더러움이 돼요. 이런 부분이 굉장히 어려워요. 점잖고 훌륭한 사람도 갑자기 여기에 거룩이 들어 온 그 순간 이쪽은 더러움이 돼 버립니다.

여자가 월경한다. 이건 자연스럽죠. 그런데 거룩이 들어와 버리면 이것은 더러운 것이 돼요.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 이건 생존 본능이라 마땅한데 거룩한 말씀 앞에 보면, 이게 죄악 되고 더러움이 돼요. 여기는 뭔가 정화장치(깨끗하게)가 주어지지 아니하면 이 땅에서 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땅은 뭡니까? 거룩한 분의 긍휼과 죄 씻음에 의해서 거기에 죄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같이 한 덩어리 된 그러한 나라, 그걸 거룩한 나라라고 해요. 말 재밌죠? 누가 거룩합니까? 누구만 거룩해요? 하나님만 거룩한데 다른 사람은 거룩하지 않아요. 그런데 뭐를 받았다? 무슨 혜택? 그 거룩의 혜택을 긍휼을 위해 받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혜택을 받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불러 모은 사람 이예요. 그들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저는 혜택 받았어요. ㅎ 저는 공짜로 용서받았어요.’라는 그 소리 하라고 이 사람들은 모은 거예요. 요게 바로 모세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두자로 하면 ‘율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땅에서 농사가 잘 됐다. 그럴 때 농사가 잘 됐으면 농사 잘 된 것이 현실이 아니고 이 농사가 잘 된 것은 ‘우리 가운데 거룩한 분의 혜택 때문에 잘 됐습니다.‘라고 할 때 그게 현실이 되는 거예요. ’ 농사 잘 됐다.‘하면 그건 현실이 아니고 환상입니다. 환상! 미친 거예요. 착각한 거예요. 만약에 농사가 그냥 잘 돼 버리면, 나는 농사가 잘 된 집의 농부가 돼 버려요. 그러면 나는 죄인이라는 기준이 날아가 버려요. 왜? ’나는 복 받을만  하니까, 나 같이 착한 사람이 어딨어. 이렇게 복 받았어. 나는 복 받을만해. 얼마나 헌금 많이 하고 얼마나 전도 많이 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기 때문에 복 받을만해,‘ 이렇게 돼 버리면 갑자기 혜택 입은 것이 아니고 갑자기 자기는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겁니다. 여기 있는 거룩 자리가 모든 사람을 통째로 지배해서 여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혜택을 입을 뿐이다. 너희들 공로가 아니고 안에 계신 분의 공로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계획, 계시를 보여주는 그것이 다윗언약이라는 겁니다. 여기 중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이 있는 장소가 상자입니다. 그 상자를 언약궤라 해요. 상자는 언약 상자라는 이름이 붙어요. 하나님의 언약 상자에 누가 계신다? 하나님이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뭐가 주어진다? 혜택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언약에 보면,  성전을 세우는데 성전을 왜 세우느냐 하면, 성전이 이동 성이예요? 고정 성이예요? 고정성인데, 더 이상 이 지평선이 있는 이 땅에는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 드립니다. 이게 수평선에는 떠돌아다니지 않는데 위로 떠버려요. 꼭 로버트 같아요. 비행접시 같아요. 위로 뜨게 돼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예수님께서 부활 하시고 어디로 가셔요? 그냥 구름타고 떠버리죠. 떠버린 순간 이 세상은 지옥, 예비지옥 이라는 것,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너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 왜? 이 땅에서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보관돼 있느니라.‘ 하늘나라에 너희 생명이 보관돼 있다는 그 생명은 뭐냐? 창세전에 예정된 생명입니다. 지금 우리 목숨 말고 스데반 집사의 그 목숨 말고, 이 몸 말고, 하늘에 있는 몸은 따로 있어요. 이것은 흙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에 이것은 해체돼야 됩니다. 이 몸 말고 예수님에 근거해서 주신 하늘에 속한 생명은 창세전부터 예정된 자에게 주게 돼 있어요. 그 생명은 보관돼 있어요.

자꾸 이 생명이 보관돼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이 생명이 보관돼 있으면 그러면 아내하고 또 살아야 되고 남편하고 또 살아야 되니....ㅎ 이 땅에서 사는 것도 힘든데, 이건 제 아내보고 하는 게 아닙니다.ㅎ 다만 행복할 따름이고요.

어쨌든 간에 이 세상의 것들은 혜택을 입어야만 되기 때문에 이것이 마저 떠버리면 뭐가 없어지죠? 혜택이 사라지죠. 혜택이 사라지면 뭐만 남습니까? 하나의 시커먼 저주스런 몸으로만 돌변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몸도 원치 않는 길로 가야죠. 본인이 원하는 길 말고 본인이 원치 않는 길로 가야되죠.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모세언약은 시내 산에서 확 밟아버리면, 시내 산 위의 거룩이 땅에서 이렇게 같이 동행하게 된다는 특징이 있죠. 동행하면서 졸지에 킹窩?오는 순간 이때는 소위 ‘나 잘났다. 나 깨끗하다. 경건하다. 나 훌륭하다.’ 가 뭐가 됩니까? 더러움으로 바뀌죠. 인간자체가 더러운 거예요. 인간자체가 죄인인 겁니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의인될 생각 하지 마세요. 그냥 주님 보시기에 죄인 이예요.‘죄가 없는 자로 치라‘ 란 말은 여자 앞에서 보여주는 거예요. ’여자야, 너는 사람한테 죄 지은 게 아니고 누구한테 죄졌다?‘ 바로 니 앞에 서 있는 주께만 죄 진거예요.

사람이 죄 짓는 것도 주님 허락 없이는 죄 짓지 못합니다. 주께서 허락하셔야 죄를 지을 수 있는 거예요. 죄 짓는 역할을 할 때 죄를 짓는 겁니다. 사람한테 미안한 게 없어요. 사람한테 미안해 버리면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반성하게 되는데 반성한다는 자체가 자기는 착한 사람이 돼 버려요. 남들은 반성 안하는데 ‘나는 반성하니까 나는 의롭다.‘ 이렇게 된다고요. 우리는 반성해도 더러워요. 소용없어요. 반성을 천번만번해도 반성이 너무 지나쳐서 자살해도 소용없어요. 반성이 지나쳐서 자살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가룟유다 아닙니까? 어디 갔습니까? 지옥 갔잖아요.

기독교라는 것은 혜택을 입는 것이지, 혜택을 입어서 그것 가지고 그걸 밑천 삼아서 새로운 인간으로 새로운 진리의 기회를 노리는 게 아니에요. 이런 혜택이 고정되는데 고정될 때 아까 언약궤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언약이 들어가죠. 그게 무슨 개념입니까? 십계명 돌 판이 다윗언약 성전에 따라서, 정리하면 다윗언약은 뭐다? 한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이 혜택을 입음으로 축복을 받는 구조인데 그 한사람의 모습이 언약이고, 언약의 모습을 완성하러 왔고, 그 언약 주변에 언약궤에 뭐가 묻히느냐 하면 피를 묻히죠. 그렇다면 피와 언약의 만남이 이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한자로 써서 ‘왕(王)’입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 왕이여 어서 오소서.’ 할 때 왕, 왕이 되는 거예요. 왕이 된다는 말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왕 노릇을 제대로 하는 왕’이라는 거예요.

전 우주의 주인이시고, 통치자 이십니다. 왕의 뜻은 뭐냐 하면, 왕의 권력이 빠짐없이 모든 구석에 다 사용이 가능하다는 뜻이 왕 이예요. 왕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구석이 있다? 없다? 없을 때 그걸 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로마서 5장에서는 ‘은혜의 왕 노릇’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누가 왕 노릇 했습니까? 죄가 왕 노릇했던 그 시대에 예수님께서 희생으로써 왕 노릇한 거예요. 그럼 성전은 결국은 뭐냐 하면, 모든 이스라엘 내부 속속 들이에 은혜의 왕 노릇, 그래서 ‘니가 농사가 안 된다. 죄를 지었다. 가정에 우환이 있다, 병이 났다. 전쟁에 졌다.’하면 무조건 어디를 향해서 기도하라?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든지, 아니면 성전에 와서 기도하고 희생제물 드리면, 거기서 하나님께서 혜택을 입혀주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이스라엘이 큰 오해를 했습니다. 무슨 오해를 했느냐 하면, 이런 오해는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는데, 자기가 병이 났잖아요. 병이 났을 때 어디 와서 기도를 하라 했어요? 여기 와서 기도를 하면 병이 난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병든 사람이 기도를 하면 자기가 병이 난다고 할 때, 병자니까 새까맣게 칠해 봅시다. 병자가 성전에서 기도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병이 나았으니까 하얗게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이게 오해인 거예요. 새까맣게 된 자가 하얗게 되는 것이 아니고, 새까맣게 된 자를 하얗게 되신 분이 그걸 잠식해 버리고 그걸 갖고 노시는 거예요. 자기가 싸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 개인적인 이익으로 생각해서 마치 주술 하듯이 점쟁이 찾아가듯이 점 보러 가서 점쟁이 살림살이 챙겨주러 가지 않잖아요.

‘내가 결혼을 하겠습니까?’ 묻잖아요. ‘몇 월 달에 결혼하겠습니까?’ ‘4월 달에 결혼한다.’ 이렇게 점 궤를 알려주면 복채를 주고 가면 되지, ‘실례하지만 가스렌즈는 있습니까?’ 이런 건 안 묻잖아요. 그 사람에게 복속되는 건 아니다 말이죠. 동사무소에 가서 서류를 떼면 되지, 동사무소 직원에게 살림살이 물어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가서 뭔가 좋은 게 있으면 사용하고 편리보고 다시 내 자리를 확보하려고 하는데, 언약은 그게 안 돼요. 자기 자리는 없어지고 누구 자리? 하나님의 이름의 자리, 주의 자리로 주께서 삼으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손해 보는 장사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자기를 찾아온 사람 결국은 그 배후에 누굴 떠민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떠민 거예요. 뭐하라고? 니는 나한테 잠식될 때만 너는 영원히 살 수 있어. 다만 니 생각에서 왔다가 다시 니 생각으로 돌아가면 니는 나와 결별이야.‘ 병 낫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좋은데, 기도하다보면, ’아! 이건 아니구나.~ 이건 아니야, 십자가를 이런 식으로 내 사적인 병원 가면 돈 많이 드니까 돈 적게 들려고 이렇게 기도해서 때우려 하는데 이런 통 밥은 아니야, 이건 용납이 안 돼, 병을 주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요. 낫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요. 내 생명 주신 것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욥의 신앙을 본받기 위해서 주께서 시발점에 원치 않는 행사를 만들어주신 겁니다. 그 경과에 따라서 십자가라는 것이 단순히 병 고치는 것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십자가를 경과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조치였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의 의미죠.

성전의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나오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구를 본받느냐 하면, 이방 민족을 본받았죠. 그들을 본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과 껍데기가 아다리니까, 잘~ 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실도 여호와 믿고, 성전 제사 드리지만 성전에 매일 제사 드리고 만날 양 잡으면 주께서 뭐랍니까? ‘그만 가져 오거라, 너희 수만의 기름과 재물이고 절기고 부활주일이고 고난주일이고 전부 다 그따위 절기 만들어 가지고 돈 가져오라는, 이제는 꼴도 보기 싫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은  처녀가 아기를 낳고 아들이 하나님 모습으로 나타나서 어두움에 빛이 있게 하는 것,’ 바치고 봉사하고 그게 주께서 원하는 게 아닙니다. 안 바치고 봉사 안 해도 현재 나의 있음 자체가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다? 주의 혜택을 입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한 혜택 결과물 이예요. 열매예요. 포도나무에 맺힌 열매로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그냥 맘대로 사시라니까요. 맘대로!!!

어차피 죄인이니까. 사시면서 미처 몰랐던 그런 죄들이 이미 용서 받았던 죄들이 어떤 죄들이 있는가, 그 항목을 아는 가운데 은혜가 더욱 더 넘치는 겁니다. 지금 굉장히 중요한 거 했어요. 이 사람들이 이방민족과 하나 될 때, 이방민족과 하나 돼서 코스로 이게 멸망해야 돼요. 요한계시록 11장 3절에 보면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몇 일 동안?  ‘일천 이백 육십일, 일천 이백 육십일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의 기간입니다. 물론 세속적인 시간개념이죠. 멸망기간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의미로 왜, 이스라엘은 멸망을 해야만 되는가를 그들에게 알려주는 그 자체가 무엇에 포함돼 있느냐, 하나님의 언약 작용의 내용물로 포함이 돼 있어요. 멸망을 당함으로써 멸망이 멸망으로 현실화되고 표면화되고 구체화되는 겁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줘야 돼요. 집을 나가주는 그것이 구원받는 코스예요. 집을 안 나간 맏아들은 구원을 몰라요. ‘난 늘 아버지와 함께 있었는데,’ 이래요. 탕자는 어른이라니까요. ‘저를 기다려 주었군요.’ 이미 사랑하는 분은 내가 착한 일 해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사랑은 내가 착한 일 하기 이전부터 이미 사랑하기로 예정된 걸 모르고 하나님께 잘 보여야 사랑받는 줄 아는 세상 적 사고방식, 이방 적 사로방식을 그대로 이게 교회에 왔다 말이죠.

내가 착한 일하면 복주고 나쁜 짓하면 벌주는 그런 잘못된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내가 상대 안하고 언약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혜택을 입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그걸 깨달아야 돼요. 어차피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 것은 안 받거든요. 줘도 안 받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순록과 사슴, 모든 게 내 것인데 거기서 잡아다가 제단에 바친다, 선물을 바친다 하지만 다 내 것인데 그냥 산에서 뛰놀게 놔둬요. 니가 돈으로 나에게 바친다고 그게 행복이 아니고 집에서 콩나물 사는 것도 나에게 행복이라 말이죠. 어떤 인간이 바쳐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복을 받고 있음이 너의 행동과 관계없음을 아는 그게 복 이예요.




작은데서 은혜를 새롭게 발견해야 돼요. 남 가진 것 그런 것에서 발견하지 말고 남이 버린 작은 것도 가만히 보면 전부 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거예요. 그 안에 십자가 신음소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고통에 근거해서 주어진 거예요. 노아언약에 의해서 햇빛, 공기를 주시잖아요. 노아언약의 완성이 어딘지 알아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노아언약?새 언약에서 완성이 돼요. 노아언약 안에는 노아가 들어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이 들어있어요. 그게 노아언약 시대에는 정결한 피를 받아서 그 피로써 무지개를 생기게 했지만 사실 무지개 주인공은 노아언약에서 새는 하나의 상징물이고 그 바탕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거기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온 것도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살아온 것이고 숨 쉬고 말하는 것도 예수님의 고통과 그 신음소리 때문에 살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불신자도 이런 혜택을 입었어도 나중에 ‘누가 죽었지? 은혜를 누가 준 거야?’ 이걸 모르고 있으니까 나중에 지옥 가서 아는 거예요. ‘아! 주께서 주신 것도 모르고 난 내 힘으로 잘 사는 줄 알았구나,’ 통곡하고 울어도 소용없고, ‘그때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들어도 소용없는데요. 뭐. 심판주의 음성이죠.

여기서 예언을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3년 반, 다른 말로 하면 삼일 반, 십자가에서 삼일 반이 삼년 반, 일천 이백 육십일, 마흔 두 달, 이런 식으로 펴지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하나의 사건이 확 펴져 버리면 이것이 현실로 구체화되니까 그것이 부채 살처럼 손에서 확 펴져버리면 인간의 시간과 공간이 부채 살처럼 전부 다 확 펴지는 거예요. 그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부채 살처럼 바깥으로 펴지는 에너지가 십자가의 예수님 희생 때문에 펴지는 거예요. 그 심판, 그 멸망은 멸망당한다고 서러워말고 그 심판과 멸망을 유보시키는 그 원인자가 뭡니까? 그게 예수님의 영원한 진리죠. 그 예수님의 영원한 진리를 뭐로 보여줬다? 일천 이백 육십일이라는 혹독한 고난과 심판의 기간에 모든 남은 역사가 다 꽃 피워지는 거예요. 남은 역사뿐 아니라 지금까지 역사가 고난으로 꽃피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강의가 정말 어렵다는 게 이거죠. 자, 십자가 지신 것이 BC30년경이라 합시다. 십자가 이후에 1260일, 삼년 반인데 이게 아니라니까요. 이게 십자가가 위로 올라오잖아요. 예수님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위로 올라가 버리면, 십자가가 위에 있을 때는 지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데, 십자가가 역사적 시간이 바닥에서 떠버립니다. 바닥에서 떠버리는 순간 십자가는 묵시의 모델이 돼 버려요. 모델이 되면 1260일이 전부 다 해당이 됩니다. 창세기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1260일이란 역사의 하얀 빵에다가 팥을 송송 뿌리고 덮고 또 뿌리고 완전히 층층이 있는 것처럼 이 역사의 층층에 하나님의 구원의 층도 있고 하나님의 고난의 층도 여기 있고 이것은 수직적인 층층으로 봐야 돼요. 이 전체가 7인, 7나팔, 7인을 저촉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수평적인 것으로 보면 십자가 이후에 나온 사건 이예요. 이 전체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십자가 안에서 에덴동산부터의 모든 코스가 십자가 안에서 일어난 사건 이예요.

그래서 애굽이고 소돔이고 십자가가 한 장소가 되고, 한 시간대예요. 십자가 죽으실 때 흑암이 있었죠? 십자가 죽으실 때 뭐가 일어났다? 지진이 일어났다. 오늘 요한계시록 11장 13절 보면,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결국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 이후도 십자가 사건의 공백 안에 놓여 있는 그러한 현실 배치도라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이라 하는 것은 지나가버리면 사라지는 거지만, 주님의 시간에서는 묵시적 입장에서는 사라지는 시간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반복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있는데 이들이 멸망당합니다. 1260일 동안 고난을 받아요. 이게 다니엘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빠져 나오면 이 가나안 땅은 비어있는 땅이 되죠. 그러면 가나안 땅이 텅텅 비어있으면 이 땅은 막연하게 그냥 비어있는 것이냐, 이건 성경에 이렇게 돼 있어요. 70년 동안 포로 잡혀 간 것은 이 땅이 뭐 하기 위해서? 그동안 누리지 못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안식을 누린다는 말은, 언약대로 쉼을 얻는 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이 다시 돌아오면 뭐를 맞이하게 됩니까? 우리 때는 버려버린 언약이 우리가 사라지니까 도리어 언약이 언약대로 완성이 되는 상태를 맞보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 밑에 멸망이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구원이 이뤄져야 됩니다. 멸망 단계 가는 그대로 다시 구원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어제 설교 예레미야 31장 21~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포로 잡혀 갈 때에 너희가 가는 길 나무에 표시를 해 놔라. 왜, 언젠가 돌아올 때에 표시한 대로 돌아온다는 그 신기함을 니가 맛볼 것이다. 처음에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이제 너희들이 돌아올 때는 아들이 아니고, 니가 여자가 돼 가지고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자기가 껍데긴 줄 몰라서 자기가 아들인 줄 알았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 나오죠.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내 장자라.’ 자기들이 아들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만이 유일한 아들이었어요.

그러면 그 현재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건 전부 다 멸망당해야 될 사람 이예요. 사람이 있더라도 비어있는 곳에 누가 옵니까? 말씀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이 언약을 완성시키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완전한 안식일이 이미 장악했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래요. 애가 너무 집안을 어지르니까 온 집에다 낙서를 해 놨습니다. 엄마가 ‘너 일주일 동안 이모 집에 갔다 와.’ 이모 집에 보냈어요. 그리고 온 집의 도배를 깨끗이 새로 했어요. 그리고 애를 다시 불렀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저지른 그 죄악, 이런 것들을 도말해 버린 거예요. 십자가에서 도말하셨다.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이 다 덮어버리고 다시 돌아오니까 새 도배지에서 나오는 향기, 안식, 그리고 그 깨끗함, 그 거룩함, 그 영광스러움에 도취돼 버렸죠. 이게 누구의 혜택입니까? 자기는 이모 집에 가 있었으니까 누구의 혜택입니까? 자기를 이모 집에 보내신 분의 혜택이죠. 그러면 이 멸망, 심판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과정에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고, ‘니가 그 심판 받는 그 기간, 1260일이, 또는 1290일이 그게 뭐에 포함되느냐 하면, 이런 코스로 니가 반드시 구원돼야 된다는 거예요.

현빈이가 백령도에 배치됐는데, 그전에는 뭐했습니까? 4주 동안, 죽자고 해병대 훈련 받아야 되는 거예요. 훈련 받을 때 그것을 KBS에서 방영을 했어요. 다큐멘터리로 해병대 훈련은 이렇다고. 김 태평이라는 이름 본명을 달고 고생한다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고생했어요. 그렇게 고생 한다고요.

이 땅에서 성도가 십자가에 죽는 거, 그게 구원의 코스예요. 포함이 돼 있어요. 다시 돌아보니까 예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장만해 놓은 거예요. 이러한 것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시공간대에서 보면 이게 십자가 이후의 사건이 맞아요. 이걸 수직적으로 천사가 와서 보면 이러한 일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빈번하게 반복해서 일어났던 거예요. 반복해서.

십자가가 위에 있으니까. 십자가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 있으니까 창세전부터 십자가가 이미 있었으니까 계속해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버리고 찾고 버리고 찾고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동전을 잃었다가 찾고 양 100마리 중에서 99마리 버려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잔치 벌리고 탕자가 돌아와서 기뻐하고 있던 맏이는 삐져서 있고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가 횡령 해먹고는 오히려 칭찬을 받고 그리고 16장 끝에 보면 거지가 아브라함 품에 안기고 부자는 지옥 가 있고, 부자가 답답해서 지 동생에게 나사로 보내 달라 했지만 그건 허락되지 않고, 성경책에 다 있는데 거지 나사로가 가 봐야 ‘니 나사로 아니야’라고 부정할 텐데.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은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방금 이야기한 것이 하나의 헛소리가 아니고, 괜히 지어낸 동화가 아니라 이게 실제 현실이라는 것은 바로 훌륭한 신앙인, 어떤 사람, 목사의 강의가 아니라 십자가 부활만이 증거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느냐, 나는 너희에게 예수님의 죽으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 모든 성경 이야기가 확실한 증거는 ‘성경이 이렇다. 문자가 이렇다.’ 가 소용 없어요. 문자 연구 해봐야 안 나옵니다. ‘아! 이런 분이 있구나.’ 이래요. 어떤 분이 죽었다가 살아났습니까? 공자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까? 부처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또는 정확하게 삼일 반 만에, 살아나신 거예요. 삼일 반 동안 시체를 못 죽이게 했으니까. 장사지내지 못하게, 삼일 반 만에 살아난 십자가 사건은 그 예수그리스도가 처음부터 뭐와 연관되느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하여 사전에 이미 계획 잡혀서 ?땅에 출몰돼야 된다는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을 아는 것은 바로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 지신 그 창자국과 못 자국을 본 도마가 ‘오 하나님이시여,’ 하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오 하나님이여.’하는 것이 아니고 부활의 흔적은 부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고 ‘부활 하신 게 맞습니다. 하나님’ 이라 고백했잖아요.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항상 출발점이 뭐라 했습니까? ‘있음,’ ’내가 여기 있잖아. 꿈이 아니잖아. 만져 봐, 아야, 하잖아, 이걸 왜 부정해. 바보야 너, 맞잖아 분명히 여기 있잖아. 불러봐 내가 여기 있잖아.‘ 내가 있기에 모든 행동은 다 누굴 위하여?  현재 ’나 있잖아. 내일도 나 여기 있어.‘ ’나‘라는 오직 나 있음을 위하여 존재하는 거예요. 밥을 먹는 것도 나를 위해서, 술을 마시는 것도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아 나를 위하여 나에게 돌아오는, 있음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를 다하는 거예요.

‘나 죽으면 좋은데 가야할 텐데, 옳지, 예수 믿어야지, 하나님 만나면 착한 일 해야지, 다 있음으로 하잖아요. 바로 이러한 것이 주께서는 더럽다, 이게 죄라는 생각은 하늘에서 이 진짜 거룩한 것이 우리 속에 섞여 있을 때, 아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로서 오신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인 사람이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천하보다 더 경건한 사람,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 그리고 제사장들, 그들에게 성전의 의미는 뭡니까? 시공간적인 성전이잖아요. 시공간적인 성전은 그들이 노는 장난감이고 놀이텁니다. 요새 말로는 교회입니다. 그들만의 시공간, 여기에는 역사가 있어요. 그리고 그 성전을 만든 돈의 주인공들이 영광을 받습니다. ’이 예배당은 역사가 오백 년 됐어. 어디 함부로 날아 온 돌이 빼려고 달려들어. 얼마의 역사인데, 그리고 이 교육관 바친 사람이 있고, 저 벽돌 하나, 하나 이름 써져 있고 꽃꽂이 있고 피아노 있고, 성가대 대장은 뭐 어떻고, 주인공들이 있어요. 이거는 놀이텁니다. 뭐를 갖고 논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노는 장소예요. 그들이 그 안에서는 더럽지가 않아요. 그들은 봉사하고 헌금하기 때문에 고상하기 그지없습니다. 누가 자기들보고 죄인이라 하면 용서치 않아요. 요것이 정치화된 것이 북한 인민공화국이고, 요게 종교화 된 것이 순 복음 교회, 통일교입니다. 여기서 오직 역사와 주인공, 이것밖에 없어요. 이거 아류가 한국교회입니다. 한국교회!!

그러면 이것이 뭐냐, 환상이라는 거예요. 왜, 이 역사와 이 주인공을 더럽다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진짜 성전, 모든 말씀을 다 안식시킬 수 있는 진짜 성전, 그 성전은 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다 했습니까? 바로 내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한다.‘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나 때문에 죽으신 분이예요. 반드시 ’나 때문에 죽으신,‘ 그러면 나는 뭐가 됩니까? 나는 의미가 아니고 뭐가 돼요? 나 때문에 돌아가신 그분의 죽음을 가지고 나오면 그것이 바로 이미 새 언약을 증거 하면서 거절을 당하는 새 언약의 아래에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재림이죠. 말씀에 거듭난 자요.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성전의 의미를 1260일 이것은 하나의 멸망, 심판이죠. 인간들이 교회 와서 노는 것은 뭐냐, 심판과 멸망을 모르고 노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도 성전을 교회라 부정하지만 그것도 모르고 또 나의 정당함을 부정하는 큰 교회는 부정하면서 작은 자기 교회는 또 진짜 택함 받은 진짜 교회라고 있음을 또 강조하겠죠.

그래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어차피 껍데기로 환상밖에 모르고 환상에 울고불고 합니다. 사람이 환상 때문에 울고불고 해요. 웃는 것도 환상 때문에 우는 것도 환상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서 그렇게 시달리게 하시는 겁니다.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어린이날 내 새끼만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담의 본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보면서 그 십자가 성전이 오게 되면 우리는 혜택을 입게 됩니다. ‘내가 나로 인하여 놀고 있구나, 내가 주인공이잖아. 내가 만든 내 환상 속에 즐기고 있구나,’ 그런데 그걸 깨닫게 하는 진짜 현실, 십자가로 이 죄가 용서받았다는 이 현실, 이 자체가 문경에 가서 십자가에 안 죽어도 이 자체를 가지고 십자가 발생됩니다. 십자가가 요란스럽지 않? 그냥 사시는 게 십자가 삶을 사는 겁니다. 그게 자기를 부인하는 게 되는 거예요. ‘나는 죄다,’ 해야 구원 되는 게 아니고, 나는 이런 환상 속에서 산다고 깨닫는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나는 부인한다. 나는 부인한다.‘ 이런 소리 만 번 한다고 부인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생긴 대로 살면 그 모습이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역시 나는 내 힘으로는 구원이 안 돼, 날마다 주께서 동행해 주시기 때문에 구원 받는 거야, 나는 십자가 피만으로 구원되지, 나의 어떤 행위로도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두 증인의 모습입니다. 지금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11장 13절까지 했죠. 다음시간에는 14절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께서 십자가 지셨는데 이유를 아는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백부장이 십자가 죽는 걸 보고 참으로 메시야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죄를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죽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잘난 체 할 건데 하나님 대신 우리 앞에서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내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죄인인 것을 알게 했사오니 더 이상 우리 인생이 우리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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