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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1 01:16:02 조회 : 2469         
주체에서 실체로 111020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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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7.76) 11-10-27 16:44 
가락교회111020-요한계시록15장(주체에서 실체로)25강a-이 근호 목사
제 25강a

요한계시록 15장 5절을 봅시다.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라 돼 있죠? 여기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열리며’라 돼 있죠. 아! 여기 초반부터 어려운 걸 하는 것을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아는 게 좋아요. 어렵더라도 여러분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것이 차이가 나요. 존재론이라 하는 것은 거기 ‘있음’이고 인식이라는 것은 있는 데를 우리가 어떻게 알아내는가 하는 것이 인식론이거든요. 성전이 있다. 존재론적으로 있어요. 그런데 있어도 거기 성전이 있고 뭐가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으니까, 오늘 ‘열리고‘ 하는 거예요. ’하늘이 열리고‘ 하늘이 열리고 성전이 보인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뭐가 열렸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그 다음에 성령이 왔죠. 그러면 성령은 원래 어디 계셨습니까? 하늘에 하나님과 함께 성령님이 계시잖아요. 지금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람이 죽어서 어디 간다고 합니까? 사람이 죽어서 천국 간다고 교회 교인들이 하잖아요. 사람이 죽어서 천국 가려면 천국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천국이 어떤 천국인지 인식을 알아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천국이 있다 하는 것은 안다 할지라도 그 있는 천국을 인식을 잘못해 버리면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어요. 엉뚱한 곳으로! 있음과 그 있는 것을 그대로 아는 인식이 일치가 돼야 되는데, ‘천국은 있어.’ ‘어떤 천국인데?’ ‘몰라’ 이러면 곤란하다 말이죠. 그러면 그 있는 천국은 어떠냐 하면 지가 지어낸 천국 이예요. 가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어려운 점의 하나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인식하지 못한 것만 하나님께서 언급을 하고 멘트를 날리거든요. 인간이 인식을 못하도록!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도록, 인식 못하는 것을 날리는 이유가 인간이 이미 예수님이 와서 발설하기 전에 이미 안다고 여기는 그것이 진짜 천국과 적대적 관계에 있어요. 적대적 관계!

적대적 관계라 하는 것은 적과 적이다. 원수다 아닙니까? 적대적이니까 나열해 볼게요. 자,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을 어떻게 한다? 공격한다. 침노하고 침노 받고 있다. 공격한다. 인간이 생각하는 율법은 진짜 율법을 공격한다. 놀라운 사실은 인간이 세운 교회는 진짜 교회를 공격하는 적이 되고 인간이 생각하는 예수는 진짜 예수님을 공격하는 적대적 예수를 믿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중요한 이야깁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를 모독하는 십자가라니까요. 부활도 마찬가지고, 인간이 생각하는 성도가 진짜 성도를 핍박하게 돼 있어요. 구약에 가짜 선지자들이 자신에 대해서 ‘나 가짭니다.’라고 이야기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하죠. 미가야가 천상회의에 성신 받아서 천상회의에 갔다 와서 ‘내가 진짜 천상회의를 봤다’ 하니까 뭐가 날라 왔습니까? 불이 번쩍 귀싸대기가 날라 왔죠.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피해서 니만 줄 리가 있느냐.‘ 다른 사람은 400:1입니다. 4:1도 아니고 40:1도 아니고 400:1이예요. 400명 모아 보세요. 구름 떼 같아요. 그 중에서 모기 소리만큼 ’아니요.‘ 해봐야 이거는 완전히 무시되는 거죠. 노회 하는데, 목사 장로 400명 모였는데 혼자서 ’아닙니다.‘ 해봐야 ’탕탕탕 통과.‘ 만장일치로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왜 성경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우리를 난처하게 만듭니까? 왜 우리 편이 ‘우Ti, 우쌰’ 우리 편이 많아지면 좋겠는데 왜 자꾸 소수가 되게 하고 좁은 길 가게하고 왜 그럽니까? 인식론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 자체가 천국을 공격하는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어요. 그러한 성경을 갖고 있어요. 그 성전에서 누가 태어나느냐 하면 저와 여러분이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악한 세계에서, 이걸 악한 세계이라 하는데 이걸 에베소서 2장 2절에 보면 ‘우리가 그때는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라서“ 이래 되죠. 제가 악한 세계라. 또는 요한복음에서 어두움에서 태어났다 이러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우리가 그때는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진노의 자식, 불순종의 자식, 이렇게 되죠.

‘모든 인간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심‘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모든 사람을 죄 가운데 가두어 두심‘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제가 가두어 뒀다는 것을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교도소에서 어떤 아줌마가 임신했을 때는 이미 임신한 속에 있는 애는 벌써부터 징역살이 하고 있는 게 되죠. 징역살이하면서도 본인은 인식론적으로 ’내가 엄마 뱃속에 있지, 나는 교도소 안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못 느낍니다. 심지어 애가 출생해서 교도소 바깥을 뛰어 다녀도 자기가 엄마하고 함께 있는 것이지 징역살이라고 여기지는 못할 거예요. 그것을 징역살이라고 본의 아니게 태어나기 전부터 징역살이 하고 있다는 것은 교도소 밖에 있는 시선과 응시, 그 안목이 있을 때만 너희들은 갇혀있다는 게 성립되는 겁니다.

그러면 바깥의 안목을 얻으려면 일단 그 안에 있다가 바깥에 나가서 다시 이쪽을 이야기해줘야 되는데 바깥에 계시다가 안에 들어온 분, 바깥에 계신 분은 하나님 아들, 안에 들어온 분은 예수님, 그 다음에 다시 나가신 분도 예수님, 다시 들어오신 분은 성령, 예수의 영, 복잡하죠. 이렇게 해서 전~혀 예상 못한 다른 인식론,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안다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구나, 나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처음부터 죄 안 지었다 한 순간도 이미 그것은 죄 짓고 있었었었구나. 내가 나쁜 짓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죽기 위해서 태어났었어야 했었구나, 내가 중간에 예수 잘못 믿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갔었어야 할 인간이었구나, 처음부터 애굽사람이었었었구나. 강제로 출애굽 됐었구나. 자진해서 강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 나왔을 때 인식론이 안 바뀌었어요. 분명히 환경은 바뀌었는데 인식론은 안 바뀌었습니다. 고 점을 약간 설명하고 오늘 본문 들어가겠습니다. 어떤 단체에서 가죽옷을 입지마라 했답니다. 왜 가죽옷을 입지마라 했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가죽옷으로 아담과 하와의 치마를 만들어 줬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만들어 준 가죽옷 대신 인간이 만든 옷을 입을 수는 없는 거예요. 제가 이 이야기 듣고 뭣에 주목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죄악 된 인식론 가지고 성경 해석을 어떤 원리를 뽑아내느냐 보는 겁니다.

어떤 중국집에 가니까 소스는 맛있는데 면이 맛이 없는 데가 있어요. 보통은 면이 어지간하면 다 그냥 먹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 중국집은 특이해서 면을 못 뽑아요. 면이 맛이 없는 면을 뽑아내요. 인간은 하나님이 안 통하는 면을 뽑아내요. 하나님이 인정 안하는 인식론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이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구약 율법을 보면서 어떻게 인식론을 했느냐 하면 ‘우리가 이거 지키면 의인되고 구원된다.’라는 인식론으로 시작한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도 인정하듯이 의로움으로 최고 수준이라면 그 줄줄이 그 뒤에는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있겠죠. 율법의 도사가 인정 못 받는 그 정도라면 그 뒤 뒤따라 줄을 서 있는 우리들은 볼 것도 없어요.

우리의 기껏 인식론이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인정해 달라고 하는 욕망의 화신으로서의 인식론이죠. 반드시 인식론 뒤에는 ‘나 예쁘지? 그렇죠?’ 이게 그 안에 포함돼 있어요. 남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안에 ‘나는 예쁘죠? 그렇죠?’ 라는 포함돼 있는 인식론을 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인식론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게 개혁주의 신학이거든요. 개혁주의 신학이 그겁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처음부터가 잘못된 겁니다. 출발부터가 잘못된 겁니다.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될 것을 어디서 출발하느냐 하면, ‘인간은 연약하다’ 이런 것부터 출발해요.ㅎ

인간이 아무리 연약하고 하나님 보기에 왜소하다 하지만 현미경으로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그 안에 또 자기 나름대로의 소유 성을 갖고 있다니까요. 자기는 아무리 하나님 보시기에 왜소하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내부에 따로 빼놓으면 그쪽에서도 안에 복잡해요. 높은 사람 따로 있고 낮은 사람 따로 있고 잘난 사람 따로 있고 못난 사람 따로 있고, 전체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구동성으로 하지만 막상 건드리면 완전히 인간은 폭발하죠.

인간이 ‘난 부족하다’ 하는 것은 하나의 변명, 자기만의 가치를 따로 은밀한 곳에 감추어 놓고 하나님 접대용으로 ‘하나님 이 정도 부족하면 저도 얼추 신앙인답죠?’ 라고 내세우는 접대용이죠. 그래서 제가 늘 하잖아요. 막 사시고 착하게 살지 마시라고. 인식론 때문에 그래요. 그 잘못된 인식론 때문에 뭘 해도 그것이 지 잘난 쪽으로 결론 내리게 되는 겁니다. 자기 가치 있는 쪽으로. 회개해도 회개한 자기 자신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자기한테 반할 정도니까.

그러니 이것은 인식론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것을 굽어진 것을 피해버리면 깨집니다. 부러지죠.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을 그냥 두세요. 괜히 나대서 착한 척 하지 말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아! 나에게는 인식론 문제 있다.’라고 언약 안에서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 방식은 뭐냐 하면, 인식론에 문제 있음을 제대로 된 인식론을 가지고 같이 붙여주면 되겠죠.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전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전이 나오죠. 하늘이 열리고 성전이 나오면 지상에서 인간들이 성전 만들어서 하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것이 아까 가죽옷하고 똑같은 거예요.

성전에서 뭘‘하라. 하지 마라.’ 하는 이것을 성전 만들라. 하면 만들고 방주 만들라. 만들어, 이것은 성전 만들어서 구원받고 방주 만들어서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다윗이 성전 지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자기아들 바쳐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성전, 방주, 그 다음에 이삭 바침, 이런 것들은 하나의 배후에 언약이 있고 언약을 보여주는 기호들이예요. 언약을 보여주는 형식들이죠. 여기에 인간이 다가와서 마주친 거예요. 마주치면서 ‘하아, 나는 죄인이다.’를 발견한 거예요. 왜 죄인이냐, 죄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마주침에서 오는 죄인 이예요. 이사야가 ‘화로다, 나는’ 뭐라고 했습니까?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사야 혼자서 도 닦아서 된 게 아니에요. 뭔가 하늘이 열리면서 성전이 열리면서 성전에 거룩한 분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낼 때에 그 환한 빛, 조명발, 스포라이트, 집중해서 바라볼 때에 눈이 부시죠.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때 눈이 어떻게 됐어요? 눈이 아주 가버렸잖아요. 장님 됐어요. 그 빛의 강함에 맞아 떨어지면서 장님 돼 버렸습니다. 빛 앞에서 자기는 어두움이었고 더 나아가서 나는 이 빛 되신 분을 핍박하는 어두움, 그냥 어두움이 아니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어두움 이예요. 주님은 찾아오신 빛이 되고 거기에 무슨 언어가 필요합니까? 거기에 무슨 언어가 필요하고 거기 무슨 신앙이 필요합니까? 거기 무슨 개혁주의 신앙이 거기 왜 끼어들어옵니까? 개혁주의 신학가지고 구원받습니까? 꼭~ 주님 안 만난 인간들이 개혁주의 신학 주장해요.ㅎ 뭔가 내놓을 게 없으니까. 그냥 강원도에서 감자 캐면서 ‘나는 죄인’이라 하면 구원받는데 그 신학 배워서 뭐할 건데.

하늘이 열리고 성전이 열리면서 그 다음에 뭐가 오느냐, 심판이 주어지죠. 그 대목 봅시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내려온다. 그랬죠. 요거 설명 깁니다. 길더라도 내용은 긴데 어렵지는 않습니다.

수요일 날 한 건데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민수기 18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죠. 제사장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들은 너희 일을 똑바로 잘해라. 안 그러면 너희는 죽는다. 제사장들이 뭘 모시는 겁니까? 언약궤를 모시죠. 이것은 바로 언약궤를 잘 모시지 않으면 너희는 죽으리라, 아니면 니 말고 외인들이 가까이 하면 죽는다 했어요.

결국 제사장은 뭐냐 하면 ‘죽음을 모시는 자들‘이예요. 또는 앞에 누구 죽음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죽음이죠.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여기 하나님이 죽었다고 표시하는 사람들, 이게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듯이, 이루어진 게 뭐냐, 하나님의 죽음이 이 지상에도 하나님의 죽음의 소식이 들려지고 그것이 표현되면 그것이 뜻이 다 이루어진 거예요. 모든 뜻이 거기서 다 이루어진 겁니다.

‘하나님이 죽었다’ 앞에 우리는 더 이상 산 자라고 우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죽음 그 앞에 하나님이 죽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았다 하면 이상한 인간이죠. 하나님마저 죽어야 될 세상인데 우리는 살았다 하면 우리가 하나님보다 센 게 되잖아요.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잖아요.

인식론 이야기입니다. 지금 인식론이 어떻게 바꿔지는가 들어보세요.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은 하나님의 죽음을 모시고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죽음을 모시고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우리는 어떤 인간도 산 자는 없다 이 말이죠. 산 자가 없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밖에 없기 때문에 죽은 자가 살아보겠다고 하는 것도 부질없는 죄가 되는 겁니다. 이미 죽어버렸는데 죽었다는 것을 자꾸 거부하고 회피하는 거예요. 그걸 애써 부인하고 ‘아니, 아니야, 그래도 살 길이 있을 거야.’ 아니 하나님도 죽으셨는데.

예를 들면 어떤 산부인과는 태어난 모든 아이는 다 죽는다. 이런 명제가 있다 합시다. 대구 제일 산부인과는 태어난 족족 다 죽었다. 이게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히브리인 남자는 족족 다 죽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서 살아났다. 이것은 모세가 예외 규정 이예요. 이것은 바로 죽음에서의 사흘 만에 뭐가 된다? 부활이 되는 예외 규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임할 때 당연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거예요.

모세 운명이 이스라엘 운명 이예요. 모세가 물에서 건짐 받죠? 그럼 이스라엘도 어디서 건짐 받습니까? 물속에 들어갔다가 물속에서 튀어나와 버려요. 뒤 따라오는 애굽 군사들은 지들이 가니까 우리도 갈까 싶어 물속으로 갔는데 그들은 다 죽었어요. 그런데 물을 빠져나온 유일한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밖에 없습니다. 물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못 죽였습니까? 갑자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가미가 생겨서 아가미로 물속에서도 산소를 섭취해서 숨 쉴 수 있어서 그렇습니까? 그 내막이 그 다음의 절차, 광야에서 밝혀져요.

광야에서 반석을 치니까 물이 나오잖아요. 깨졌다. 하나님이 너희로 인하여 깨어졌다는 그걸 근거로 너희들은 죽음에서 살았다. 너희들이 너희들 자격으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 없다?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너희들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데 다만 너희들과 동행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동행한다는 이유 때문에 너희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효과를 누리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말려든 거예요. 이스라엘은 자기 구원받았다고 좋다고 까부는데 빠져 보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프로젝트에 본의 아니게 강제로 말려들어서 증인노릇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처럼! 성령이 오게 되면 반드시 무슨 절차를 매일같이 밟게 되느냐 하면, 죽었는데 살고 죽었는데 살고 매일같이 반복돼요. 성령은 십자가의 영,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예수님의 영이 오게 되면 죽었는데 살게 되거든요.

죽었는데 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는 주체가 있는데 주체는 그냥 주체가 맹하니 있는 게 아니고 주체는 반드시 대상을 찾아서 그 대상을 나의 실체로 상상하는데서 주체로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나 여기 있다.’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나 여기 있는데’ ‘어떤 인간인데?’ ‘나 여기 있는데 저기 가는 판사님하고 아마 레벨이 같을 걸’ 하고 판사하고 자기의 실체를 만들기 위한 대상으로 뽑아 세우는 거예요. ‘나도 옛날에 법조계에 있어서 판사 되려고 애썼는데 저 사람이 나하고 레벨이 같을 걸’

‘나 여기 있다.’ ‘그래서?’ ‘저기 보이는 대 저택이 사실은 내가 살고 싶은 저택이야.’ 그래서 나는 저 저택에 살만한 가치가 있는 나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체가 몽롱하게 있는 것이 아니고 주체는 반드시 내용을 실체로 굳어진 내용을 포함시키는 겁니다.

또 집사님 계시니까 예를 들면, 나는 손자를 키우고 있는데 그냥 나가 아니라 내가 키우는 손자는 유엔 사무총장 감 되는 애를 키우는 정도로 나는 괜찮은 할머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반드시 주체에서 객체로 대상 삼을 때 반드시 뭘 하게 돼 있습니까? 기대하게 돼 있죠. 이게 죄예요. 기대 없이 사는 인간이 아무도 없는데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죄 안 짓고 사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인간의 기대는 바로 내가 주인공이 되고 내가 주인이 돼서 내 주인공은 내가 결정한다. 내 입맛에 맞는 내 구미에 맞는 대상들을 소유해서 그것을 나한테 끌어당기는 식으로 우리는 그걸 살았다고 보는 거예요. 그 삶을 하나님께서 죽여 버리는 거예요. 뭐로? 십자가로!!ㅎ 왜 죽입니까? 니 속에는 언약이 없다. 니는 언약궤를 내용으로 품는 존재로서 내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니는 가담이 된 건데, 니는 하나님의 언약은 빠지고 만날 세상에서 듣고 보고 배우고 입고 먹고 마시고 씹고 뜯고...그걸 갖다가 놓고 ‘하나님, 이게 바로 납니다.’ 하는 거예요. 그걸 잔뜩 기대를 하면서.

MBC에서 일요일 저녁에 하는 유명한 프로 있죠? ‘나는 가수다’ 어제 수요일 날 하나 예를 들었는데요. 예수 믿으면 이렇습니다. 하고 (   )를 치라 했죠? 예수 믿으면 이렇습니다. 할 때 주로 (  ) 치는 게 예수 믿으면 암에서 나았다. 예수 믿으면 교회가 부흥된다.

성경대로 하면, 예수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걸 딱 뒤에다가 붙이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왜 거의 없느냐 하면, 만약에 그걸 붙이게 되면 ‘나는 가수다’처럼 그걸 붙이면 ‘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가 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과연 그런지 주변에서 사망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 입장이 난처해지잖아요.ㅎ ’내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을 믿습니다.' 요 열심으로 뭔가 내가 나를 살리려고 이런 꼼수를 썼는데, 성경에 좋다고 하는 것은 뒤에다 ‘나는 (  ) (  )다’ 가 성경에 좋다는 것은 다 썼는데 내가 성경 구절을 동원하는 이유가 결국은 주체가 성경이란 말씀을 집어넣어서 내가 원하는 구원받은 사람을 내 식으로 구원받게 만들겠다는 노림수거든요. 이거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이야기해도 복음을 이해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십자가 믿어줬고 예수 믿어 주는 거예요. 그런 행위가 무슨 행위입니까? 결국 내가 나는 기어이 나는 뭘 믿더라도 내가 나를 구원받아서 천당 보내야겠다는 기대감에 부흥하는 거예요. 그건 집요한 오락입니다. 지독한 오락이죠. ‘니가 뭔데? 지가 뭔데 구원받아야 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나는 가수다. 할 때 나는 (  ) (  )다 할 때 이 (    )안에 넣는 것은 우리가 슈퍼에서 물건 고르듯이 뷔페에서 쟁반에 음식을 담듯이 우리가 골라 집어넣는 게 아니고 뒤에 붙은 서술어, 뒤에 붙은 목적어 이것이 주체 나를 매일같이 죽여 버립니다. 왜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정체적 환경이거든요. 내가 만든 천국을 주체 쪽에서 부숴버리고 내가 만든 율법을 진짜 율법이 부숴버리고 내가 만든 예수를 진짜 예수님이 부숴버리고 내가 생각한 부활을 주님이 진짜 부활하셔서 부숴버리는 정체적 환경입니다. 애초부터 우리의 인식론이 안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식론을 우리가 바꾸면 되지 않느냐, 우리가 바꾸려 해서 바꾸어지는 게 아닙니다. 왜 우리가 인식론을 바꾸면 안 되느냐 하면 ‘나는 올바른 인식론을 갖고 있다’고 해 버리면 올바른 인식론을 갖고 있는 나를 앞에 있는 내가 소유한 셈이 돼 버려요. 그러면 내가 나를 믿는 셈이 돼 버려요.

아무리 뒤에다가 좋고 거룩한 거나 고상한 것을 붙여도 결국은 ‘나는 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결국 불교에서 하는 기독교에서 백날 이야기해도 불교라는 말이 이런 근거에서 하는 말 이예요. 기독교에서 백날 하나님해도 결국 불교다 주장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에 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이 짓하고 있어요. 결국 돈 따먹는 재미, 취미예요. 수리수리 마수리, 그거하고 뭐가 다릅니까?

그냥 사시면 이쪽에 있는 서술어가 내 주체를 매일같이 나의 기대, 욕심 없는 기대도 뜯어버립니다. 옛날에 70년대에 나온 노래가 있습니다. ‘욕심 없는 마음’이라는 게 있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성경책 하나고, 가사 보면 그런 내용이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작은 성경책~~♫♪ 이제 다 잊어버렸어요. 욕심 없는 마음을 갖겠다는 것도 욕심 이예요.ㅎ

여러분, 이걸 아셔야 돼요. 욕망은 뭐가 채워지면 만족하는 게 아닙니다. 욕망은 욕망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도박하는 사람이 돈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도박을 계속 하기 위해서 하는 도박이 되는 겁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예요. 사업도 돈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업 자체를 하고 싶어서 사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월급쟁이 하는 사람도 사실은 사업가입니다. 언젠가 돈 벌면 뭐 하겠다? 기어이 사업하겠다. 지금 윤 집사님 돈이 없어 그렇지 누가 돈 200억 줘 보세요. 사업한다 하죠.ㅎ

인식론이 잘못됐기 때문에 하늘 문이 열리고 그 다음에 열리면 ‘야! 열렸으니까 이제 인정받겠다.’ 이런 건 없어요. 심판을 벌려요. 성전 문이 열리고 심판을 벌리고 7천사를 동원해서 심판으로 때려버립니다. ‘죽어라 이 인간아, 다 죽어라, 다 죽으면 내가 새로운 피조물 만들어 줄게. 일단 죽어라.’ 다 죽어요. 심판 속에서 피어납니다. 왜, 심판 속에서 피어나느냐 하면 구원은 불가능성 때문에 그래요. 구원이 내 구원이 내 가능성으로 구원 같으면 애초부터 구원이 아닙니다. 도저히 이거는 구원이 안 되는 지경에서 구원되었음을 차후 적으로, 회기 적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으로 찾아오셔서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면 갈수록 감사와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야! 정말 사랑이구나, 난 이정도면 구원 받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주님이 지속적인 사랑이 하는구나.’

그래서 이 기대가 내 안에 ‘나는 (  ) (  )다’ 하는 것을 집어넣으면 이건 ‘누구 것이다’에 내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이 돼요. 성경은 너는 그리스도의 것이 돼 버리면, 이 그리스도의 것은 여기에 내 것이 포함이 되면 안 돼요. 하나도 포함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 것이 돼요. 그래서 일체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 위해서 내가 집어넣은 모든 것은 다 발로 차버립니다. ‘죄야, 죄야, 죄야.’ 다 차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것만 담기게 되는 겁니다.

요게 뭐냐 하면 바로, 여기부터 어렵습니다. 언약궤가 있는데 누가 들고 있다 했습니까? 여기 있는 제사장들이 짊어지고 멀찍이에서 레위 인들이 있죠. 제사장들이 지금 뭘 모시고 가는 겁니까? 하나님의 죽음을 모시고 가죠. 그렇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은 하나님의 죽음이 우리 속에 배어야 해요. 밴다는 말 하지죠? 시폰지에 물이 흡수되듯이. 하나님의 죽음이 우리 속에 배게 되는 겁니다.

‘구원이 너희 집에 이르렀다’는 말은 ‘니 안에 언약궤 들어앉았다.’ 다른 말로 하면 니 속에, 니 집구석에 하나님의 죽음이 들어앉았다. 이 말입니다. 그냥 들어앉아서 고요히 있으면 아무 변화가 없는데 그 들어앉으신 분이 하나님의 죽음 안에, 하나님의 살과 피 안에 우리를 바꿔치기해버려요. 우리의 모든 것에다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집어넣어 버려요. 그러면 스폰지처럼 스며들어요. 스며들면 우리는 매일같이 ‘날마다 죽노라‘하는 그런 입장에 놓여있죠.

그런데 그 죽이는 방법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죽이는 방법이 뭐라고 돼 있죠?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심판이죠. 심판할 때 누굴 통해서 심판을 하느냐 하면, 우리가 그렇게 ‘나는  (   )다’ 라고 여기 뒤에 집어넣은 세상 것, 세속적인 것, 우리는 세상적인 것, 우수한 것, 대단한 것, 남이 부러워할 만한 것, 이런 걸 집어넣는데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 심판 작용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말을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저걸 갖고 싶은데 저걸 갖는 순간 저걸 갖고자 기대하고 가졌다는 그 자체가 우리 집구석에 심판이 찾아온 거예요. 왜,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가 났기 때문에,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그 다음에 뭡니까?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면 참 좋겠는데,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되면 좋겠는데 ’왜 가져가십니까?‘ 결국 주셨다는 것은 진짜 주신 것이 아니고 내가 갖고 싶었다는 다른 표현으로 아부 성 발언을 한 거예요. ’주님 이거 주님이 주셨습니다.‘ 이 말은 솔직한 말이 아니고 ’주님 이거 내 것입니다. 손대지 마세요.‘ 요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걸 그냥 하면 손님 대접이 안 되니까 ’주께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써 헌금 드립니다. 성령의 감동 받아서 헌금합니다. 봉사합니다. 이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렇게 나오죠.ㅎ 그게 죄예요. 죄!!

다시 할게요. 우리는 원한다. 뭘?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욕망이 욕망답게 활개 치기 위해서 욕망의 대상을 고릅니다. 그래서 욕망은 내가 어제 원했던 걸 대충 챙겼다고 해서 욕망이 끝나는 게 아니에요. 홈 쇼핑에 중독된 사람 있잖아요. 몇 개 건지면 그 다음은 괜찮습니까? 음식 맛을 감미 하는 감별하는 그 재미로 사는 사람 보세요. 어지간한 음식은 음식도 아니에요. 그걸 풍자한 서양의 유명한 동화가 있죠. 어릴 때 들었던 동화인데 가면 갈수록 의미가 깊어요. 어떤 큰 무역회사를 하는 배를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부인이 욕심과 사치가 많아요. 인도에 와서 무역을 해서 한 몫을 봐서 큰 부자가 되었는데 남편이 잘 버니까 늘 잘 벌 줄 알고 온갖 사치를 했는데 어떤 사람이 밀을 선물 하니까, ‘밀 같은 것은 가져가.’ 그래서 갯벌에 갖다 버렸어요. 나중에 남편이 무역하다 배가 무너져서 알거지가 돼 버렸어요. 돈 빌린 거 갚지도 못하고 다 쫓겨났는데, 그때 걸레조각같이 완전히 미친 여자처럼 돼서 가는데 길 가다 보니까 밀이 있는 거예요. 저기에 ‘웬 밀이지?’ 하니까 ‘마나님이 갖다 버린 밀입니다.’

바로 인간은 인간이 욕망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욕망이 인간을 관리하기 때문에 지나간 욕망은, 지나간 대상은 욕망의 대상으로 쳐주질 않습니다. 계속 발굴해야 돼요. 뭐? 내 굶주린 욕망을 채울 때까지 발굴해야 됩니다. 마작도 그렇고 도박도 그렇고 모든 매사가 그래요.

어떤 서울 대학교 간 학생이 이런 소리 했어요. ‘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그거 여러 사람에게 약 올리는 일입니다. 공부가 뭐가 쉬워요? 아무리 책 봐도 머리에 안 들어오는데, 뭐가 쉬워요? ‘난 운전면허 한 번에 되었어.’ 이건 완전히 6번 떨어진 사람한테는 약 올리는 거예요. 제가 6번 만에 되었어요.ㅎ

사람은 본인이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고 욕망이 인간을 가지고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로 튈지를 몰라요. 럭비공 같아요. 그래서 남자들이 여자하고 결혼하고 난 뒤에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게 셀 수도 없이 많아요. 그 중에 한 가지 작은 거 하나, 수 천 가지 중에 작은 거 하나가 뭐냐 하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줘도 연애할 때는 감동을 받고 하던 아내가 어지간히 투자를 하고 어지간히 갖다 쏟아 부어도 별로 고마워하지를 않아요. ‘당신은 내가 안 고맙나?’ 하면 ‘남편이 당연히 해야지.’ ‘에이, 아이러니하게 도대체 알 수 없어요. 여자의 마음이란.’ 분명히 이제 감동을 받아야 하는데 감동은? 생일 됐다고 꽃꽂이 해주고 꽃 들고 오고 케잌 사오고 와서 ‘어떠냐?’ 하면 ‘작년에도 했는데.’ ‘어쩌라고? 당연히 해야지, 남편이 돼 가지고 그것도 안 해주는 남편이 어디 있나,’ ‘이미 욕망이 식었어.’ 욕망 체감의 법칙.ㅎ

인간의 욕망은 뭐를 쳐다보고 지향하고 가고 있어요. 그래서 이걸 인간은 영적 존재라 해요. 인간이 그냥 사물과 물건으로서 만족하면 인간은 그냥 세속적인 인간인데, 아니에요. 인간이 그냥 물건 대충 몇 개 가져가면 만족할 거 같으면 ‘야, 인간은 역시 세속적이구나.’가 되는데 그게 아니고 물건을 넘어서서 그것 말고 ‘내 욕망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온단 말인가.’ 그것이 궁금한 거예요. 이 끝없는 욕망이 어디서 오는가, 알 수 없어요. 이건 마네의 칠 같아. 알 수 없어요. 저 허공을 나는 떨어지는 오동잎인가 그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어요. 인간의 욕망을 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을 분석할 대상이 안 됩니다. 어디 감히 부분이 전체를 분석해요. 안 되죠. 그러니까 뭐하고 하느냐,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알 수 없다는 말은 불가능, 인식되지 않는다. 인식되지 않는 것에 갇혀있는 것이 인간, 그 인식되지 않으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으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에 나오는 용어와 개념과 단어들을 마구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구원의 욕망입니다.

어디서 내 구원의 욕망이 잘못됐는지 안 잘못됐는지 그것도 분간도 못하면서, 아예 처음부터 구원받겠다는 것도 잘못된 거죠. 그건 잘 잘못을 떠나서 내가 그걸 원하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여러분, 선악이란 문제는 일단 자기 것을 챙기고 난 뒤에 차후 문제입니다. 진짜 문제는 선과 악 이전의 문제, 나는 뭔가를 원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의 해답이 없어요.

‘내가 천국을 가려면 어떻게 됩니까?’ 이건 되는데 ‘내가 왜 천국을 찾지? 내가 미쳤어. 내가 왜 죽으면 곱게 죽지 왜 천국을 왜 찾아?’ 길 가다가 갑자기 엎어지면 교회 안 가는 인간이 ‘아이쿠, 하나님’ 하나님이란 단어는 도대체 어디서 들은 거예요? 전해들은 거예요? 알 수 없어요. 뭔가 인간은 내가 따라 잡을 수 없는 어른, 마스트, 어르신네, 나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여길 때 거기에 쫄따구, 종이 됩니다. 마귀입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인식론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심판을 통해서 흔적을 남겨요. 니가 좋아하는 것은 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다. 니가 세속적인 거, 의사, 판사, 변호사, 부자, 니가 딸 자식 잘 되는 거, 남편이 잘 되는 거, 모든 거, 그 모든 것들은 전부 다 하늘이 열리고 성전이 내려오면 전부 다 심판으로 바뀌어요. 심판의 근거는 뭐냐,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의 방법은 뭐냐, 아까 제사장이 모시고 가는 ‘하나님의 죽음’ 하나님마저 죽어버린 이 역사 속에, 이 대지 위에서 너는 이 죽음을 동참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도 나처럼 죽어야 심판받아야 마땅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럴 때 사실은 모든 인간은 아버지한테 이미 버림받아야 할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비밀)이 폭로된 거예요. 숨어있는 비밀이 폭로된 겁니다.

우리는 비밀 같으면 내가 소유하려고 하는데, ‘비밀이 어딨어. 비밀,’ 비밀이 있으면 내가 소유하고 싶은 거예요. 왜냐 하면 ‘나는 (  ) (  )다‘ 할 때 (  )안에다 비밀까지 집어넣으면 얼마나 멋있겠어요? 그런데 막상 비밀 뚜껑을 열어보니까 뭐가 날아가요? ’나‘라는 자체가 자격이 못 되고 애초부터 ’나‘는 없었어요. 욕망이 만들어 낸 ’나‘예요. 충동이 만들어 낸 ’나‘였지 ’나‘라 하는 그 숨어있는 배후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음흉한 어두운 영적 기운, 영적 힘 같은 것이 나로 하여금 자꾸 매몰차게 힘들게 나는 나밖에, 라고 이 땅에서 몰아놓고 채찍질해가면서 인생을 살게 만든 겁니다.

‘나는 나답게 살아야 돼,‘ ’나 다운 게 뭐지? ’ 몰라‘ 나 다우기 위해서 또 우리는 원하는 것을 신문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상상, 이미지, 어떤 사람이 노래를 잘 부르면 나도 옛날에 노래 잘 불렀지, 어떤 사람이 춤을 잘 추면 나도 춤 배웠으면 춤 선생인데, 어떤 사람이 달리기 잘하면 나도 달리기 잘 했지, 어떤 사람이 야구하면 ’야, 나도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야구 하라는 걸 괜히 공부 때문에 포기했는데 이건 공부도 아니고 야구도 아니고...‘ 모든 걸 눈에 띄는 대로 상상하고 시나리오와 소설을 매일 하루치 소설을 아침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걸 흔히 큐티라 하던가요.ㅎ 자기가 주인공이 돼서. 자기는 의롭고 다 죽을 놈으로 만들어서, 악한 놈으로 만드는 소설, 알 수 없어요.

그렇게 해서 이 모든 심판은 심판이 어디서 왔느냐를 전에는 ‘알 수 없어요.‘라는 인식론을 가지고 심판을 받겠다면, 지금부터는 어디로 방향을 트느냐 하면 바로 하늘이 열리고 성전에서 어린양이 있는 십자가, 일찍 죽임을 당한 예수님, 어린양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쳐부숴져야 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복음을 위하여, 십자가 복음 때문에 이 세상의 마귀든, 천사든 모든 것은 존재하느니라.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이한례(IP:203.♡.47.76) 11-10-29 23:46 
가락교회111020-요한계시록15장(주체에서 실체로)25강b-이 근호 목사
제 25강b

하늘이 열리고 성전이 있는데 어째서 거기서 심판(재앙)이 나오느냐, 거기에 이유가 있을 게 아닙니까? 하늘이 열렸다. ‘와! 저게 성전이구나, 하늘이고 천국이구나.’ 환영하고 영접하고 박수치고 이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좋은데 왜, 하늘이 열리고 성전이 열리니까 갑자기 7천사가 나타나서 전부 다 멸망시키고 파괴하느냐, 그게 이상하잖아요. 그거는 여러분이 평소에 생각했던 하나님하고 진짜 나타난 하나님하고 완전히 적대적 관계, 정 반대의 하나님을 너희들이 신봉했느니라.

그것은 정 반대의 하나님을 신봉하는 우리 자신의 자체를 거기다가 섞어 넣은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과 적이 되는, 원수가 되는 하나님 이예요. 내 가치를 인정해 주는 나의 소박한 가치나마 인정해 주는 하나님이라면 그건 잘못된 하나님 이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를 안 보고 누구의 가치를 보느냐, 그 성전이 어린양에서 나오죠. 어린양에서 나온다는 말은 하나님은 누구의 가치만 고집하십니까? 예수님의 가치만 고집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것에 참여한 자, 또는 예수님의 것이 들어있는 자만 구원받아요. 우리 속에 이질적인 것, 기적인데 내 속에는 우리 것만 있거든요. 평생 동안 살았던 실적과 업적, 애 쓰는 거, 공부한 것, 노력한 거, 고생한 거, 고생담, 이런 것들이 가득한데 그게 아니고 ‘내 교회 다니면서 예수 믿으려고 이런 고생했다.‘라는 고생담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돼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심판을 할 때 반드시 심판이 내가 원하는 쪽, 우리는 뭐를 원하느냐 하면 ‘나는 ( ) ( )를 집어넣기 위해서 세상에서 내 맘에 맞는 것을 다 집어넣어요. 골프를 약간 배운 사람 같으면 골프 배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야구, 축구가 안 보입니다. 그 다음에 최 경주가 어떠니 하면서 집에서도 비디오 사서 연습하고 하잖아요. 나는 적어도 에버리지 2오파 정도만 해도 72타를, 목표가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원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이 심판할 것에 대해서 내가 선택하고 거기에 딱 붙어서 그것에 죽고 못 산다는 말은 실은 내가 심판을 몇 번 받아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내가 재밌는 일을 하면서 발각되죠. 예수, 하나님, 찬송가에도  내 주예수보다 더 귀한 것 없네, ‘아이고, 그게 말이 되나, 나는 주 예수는 나중이고 그보다 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라고 우리의 본색을 들춰내는 거예요. 결국은 예수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막 살아온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고 어떤 인간도 막 살지 않는 인간은 한명도 없고 그것을 폭로되고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진짜 어린양께서 우리에게 들이닥치죠. 그러면 내가 믿는 예수는 가짜죠. 그래서 나는 가짜다.

나는 가짜다. 나는 가짜라고 들추어내는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나는 과거에 가짜였다. 하지만 가짜인 걸 알았기 때문에 오늘은 진짜다‘라고 우긴다면 그것도 가짜라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항상 주체는 뭐로 바꾼다? 실체로 바꿔지는 그런 경향이 있죠. 실체라 하는 것은 굳은 것, 단단한 것, 고정된 것, 질서 잡힌 것, 이걸 상징이라 합니다. 상상, 이미지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상징으로 바뀝니다. 항상 상상하고 그 상상이 현실화  되기를 고대하고,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 한번 천 번 해 보세요. 오!! 됐네. 이렇게 돼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천 번 하면 믿어지는 것 같아요. 랄라 룰루 랄라 룰루 천 번 하면 하면 방언 터지듯이.ㅎ

그게 뭐냐 하면 모방입니다. 인간은 모방을 통해서 자아의 정체성을 정립하죠. 그런데 요번 주일 낮 설교할 건데 미리 하면 이렇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특징이 뭐냐 하면 부자를 모방하지 않는다는 사실, 거지 나사로는 뭐를 모방하느냐 하면, 모방할 이유가 없어요. 왜 모방을 안 하느냐, 천국 갈 때 하등 소용이 없기 때문에, 말씀이 그렇게 거지 나사로를 그렇게 만든 거죠.

우리는 모방을 못해서 난리 나잖아요. 부비똥이니 무슨 똥이라 하면, 우리는 모방을 못해서 남 갖고 있는 걸 못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최고 자리에 올라가 버리면, 유행이라는 게 있는데 유행은 누가 따르느냐 하면, 항상 최고 자리에 있지 아니한 자들이 유행을 따라요. 진짜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은 그냥 살아요.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저처럼 살아야 같은 레벨 되는 줄 알고 계속 따라 보니까 그 사람들이 유행을 따르는 거예요. 유행 따를 때는 유행이 이미 뒤처졌어요. 이미 유행이 한물 가버렸어요.ㅎ

이처럼 인간은 모방을 통해서 통합합니다. 모방을 통해서 사회가 구성이 돼요. 같은 집안은 생활방식이 결국은 하나로 일치성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자연스럽고 이건 기적이 아니죠. 기적이라 하는 것은 동일성, 동질성, 일치성이 와르르 이것이 파격적으로 깨지는 어떤 접점 사건이 벌어질 때, 지금까지 나는 나답다. 이렇게 돼야 나는 우리 집안에서 나는 아들답다. 나는 장남답다는 이것이 죽 이어졌는데 그것이 어떤 순간에 그것이 맨홀에 빠지든지 해서 전혀 다른 노선으로 가서 거기 턱 등장할 때, ‘누구야? 누구십니까? 나를 엉뚱한 자리에 세운 자가 누구십니까?’ 그 자리는 하나님이 죽었던 자리에 니가 함께 지금 서있다. 하나님이 죽은 자리! 그게 바로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모실 게 있어야 돼요. 그 모시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라 하죠. 하나님이 죽었다. 하나님이 죽었다 앞에서는 그 다음부터는 뭐가 중지가 되느냐 하면 산다고 할 이유가 근원적으로 사라져요. 살아야 되는 이유는 더 이상 성립이 안 됩니다. 살게 하는 거죠. 살게 하는 건데 그 살게 하는 것이 내가 전에 원했던 대로 살게 하는 게 아니에요.

주체(나)는 어려우니까 나, ‘나‘가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서, 성령이 와서 새롭게 ’나‘가 되죠. 이 나는 전의 나로 되돌아가지 않아요. 새롭게 만들어진 납니다. 내일되면 새롭게 만들어지는 나예요. 우리는 자꾸 과거를 회상하는데 회상해봐야 그 나하고 나가 달라요. 안의 내용물이. 그 내용물이 뭐가 돼 있느냐 하면, 나는 바로 똥이라 이 말이죠. 이걸 배설물이라 하죠.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배설물이겠죠.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내가 예수를 알고 난 뒤에는 내가 고상하다고 여긴 것은 전부 다 뭐같이 버렸다? 똥, 오줌, 배설물같이 다 버렸다.

그걸 다시 한 번 분석해 봅시다. 전에 내가 고상하다고 여긴 게 있잖아요. ‘이거는 정말 경건하다. 고상하다. 하나님도 감동할 정도로 괜찮은 거다.‘ 라고 여겼다면 그럼 나라는 존재는 그동안 어디에 서 있었습니까? 내가 스스로 고상하고 경건스럽다는 그 자리에 자기 자리를 펴고 있었던 거죠. 그럼 그걸 배설물로 여겼다는 말은 그동안 나는 똥이었는데 누가 나로 하여금 똥을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만들었죠. 그러니까 나는 주님이 버리는 똥이죠. 그런데 그 똥이 끝없이 나와요.ㅎㅎ 하루쯤 나오다 안 나오면 좋겠는데 이건 설사를 계속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주님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똥이고 이런 것들이 하늘에 올라갈 거라고 주께서 계속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새롭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난 주께 구원받을 것이고, 새로운 피조물 되기 위해서 배설물로 취급받아야 될 나는 계속 주님에 의해서 생산되는 겁니다. 이 지상에서.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뭘 발견하느냐 하면, 주여, 내가 좋아했던 것을 주께서 심판해도 주께서 잘 하셨습니다. 내가 골프를 좋아하고 난 뒤에 골프에 미쳐 있을 때 그때 골프 하는 족족 돈 잃고 안 되게 하신 것 주께서 참 잘 하셨습니다. 내가 그것에 내 목숨을 걸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 전까지는 목숨을 걸었죠.

자식이, 손자가 2살 3살 때는 이쁘죠.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 할 정도로 이쁜데 그 애가 나중에 5살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자아가 성립되면서 ‘할머니, 우리 집에 왜 왔어요? 할머니, 우리 집에 왜 살아요? 나가세요.’ 자아가 성립되어서. ‘할머니 있으면 귀찮아. 할아버지 있으니까 공부 방해돼, 가세요.’ 문 탁 닫아버려요. 자식은 똥이다.ㅎ 주께서 그렇게 하셔요. 거기다가 내가 고상하다고 이것만큼은 내가 고상한 일을 한다고 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부터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더러운 것 이예요.

심지어 사도바울에게는 결혼마저도 꼭 해야 될 이유가 없다고 본 겁니다. 그래도 결혼하고 싶으면 하기는 하되 그 다음부터는 니가 고난을 받을 것이다. 왜, 주님 말씀이 결혼이 전부가 아니라 했는데 우리는 전부라고 보고 결혼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그것이 내가 모든 걸 걸었던 것에 의해서 내가 치어 살아요. ‘아휴, 내가 침해 걸린 배후자를 돌보면서 내가 당신하고 결혼 안 했으면 호강할 텐데 이게 무슨 짓인고. 아이고, 내 팔자야, 그러면 우리가 성경 공부할 때는 세상 모든 일을 잊어버려요. 복음을 들을 때는 참 좋아요.

그런데 그 공부가 딱 끝나고 난 뒤에는 다시 ’내가 소유한 게 몇 개지?‘ 그 다음부터는 자기 소유 성을 헤아리기 시작하면서 ’왜 내가 이걸 원했는데 엉뚱하게 이게 왜 들어갔지? 이게 들어오면 내 생활이 방해되는데, 아이고, 괜히 했어. 괜히 했어. 이거 내가 원치도 않는데 왜 자꾸 끼어들어와, 이거 팔자라 뺄 수도 없고, 자식이면 공부 잘하고 애먹이지 말아야지, 잘 키워놓으니까 만날 애나 먹이고 보증이나 서 달라 하고, 아이고, 내 팔자야, 왜 이리 엮여가지고 왜 이리 피곤하게 엮여서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주여, 그거 빠지면 예수 잘 믿을게요.‘ 하는데 그걸 빠질 필요가 없어요. 본인이 원해서 거기서 빠지겠다는 말은 예수님을 원한다는 말이 아니고 그거 빠지고 내가 원하는 관계로 재 엮어지기를 예수 보다고 새로운 관계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고, 이 꼴 보기 싫은 남편, 아이쿠, 저 남편만 죽으면 예수 잘 믿겠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키 되고 돈 되고 인물 되고 잘 되는 그런 남편 새로 만나고 싶다는 거예요.ㅎ 그런 뜻이라.

인간의 인식론에서는 계속해서 아침마다 배설하듯이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배설할 것이 생산됩니다. 그걸 가지고 ‘잉여’라고 하는데 넘쳐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이 넘쳐나는 게 아니고 원치 않는 게 넘쳐나요. 그래서 제가 어떤 글인지, 어떤 강의에서 그랬는가, 수요일 날 그랬어요. 우리는 매일같이 본의 아니게 구타당하고 있다고 했죠. 매일같이 끊임없는 세파에 얻어맞아요. 가만히 있어도 때려서 나의 인생을 힘들게 만들어요. 어떻게 해결책이 없을 정도로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사방에서 우겨 쌈을 당하고 있죠.

잉여가 넉넉해야 될 텐데 잉여가 뭘 만드느냐 하면 결핍을 낳아요. 모자람을 낳아요. 왜냐 하면 나만 있으면 내가 욕심을 줄여서 ‘그래, 이것도 하나님이 은혜야,’ 라고 감사하겠는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난 내가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고 뭐가? 욕망이 나를 매개로 삼아서 나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서 욕망이 자기의 끝없는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서 나를 부리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나는 그 가운데 내 욕망 하나도 감당 못해서 허우적거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 욕망은 뭘 원하느냐 하면 욕망은 남들 것을 원해요. 타인의 욕망이 나한테 와서 나한테 그렇게 힘들게 한다 말이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어렵지만 쉬운 말로 하면 뭔 뜻이냐 하면, ‘나는 이것을 원한다.’가 아니라, 이것은 내가 있을 때는 이것이 되는데,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가 나의 욕망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뭘 원합니까?’ 예를 들면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나의 성공을 못 보고 돌아가셨다. (지금 내 얘기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 무덤가에 일 년에 한번 찾아가서 소주하고 오징어 구워 가서 엎드려 절하면서 ‘아버지여, 지금 내가 성공했습니다. 지금 대기업 상무가 되었습니다. 이거 아버지가 보고 돌아가셔야 되는데,’ 그럼 그 인간은 지금 누구 삶을 산거예요? 자기 삶은 없어요. 아버지가 원했던 바를 들어준 겁니다. 이것은 그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내 것이 마련되지 않습니다. 내 것이 장만되지 않아요.

대표적인 게 뭐냐 하면, 당신은 목사는 목사답게, 회사의 사장은 사장답게, 직원은 직원답게, ( )답게, 답게, 주부는 주부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답게, 답게에 우리는 휘말리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 욕망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고 공동적인, 일반적인 욕망 속에 우리는 하나의 분여, 분배받고 있는 거예요. 아파트 분양 받듯이. 세상의 일부를 분양받고 있는 겁니다. 사실 이 모든 세상이 예수님을 죽였던, 하나님, 어린양을 죽게 만든 세상에 일괄적으로 심판이 오게 되면 거기에 분양받은 우리의 소박한 남아있는 공간도 심판의 대상이 돼서 쳐들어오죠.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느냐, 여기에 15장 8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그러면 여기에 인간은 어떠냐, 인간은 지금 뭐를 저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일곱 천사가 치르는 일곱 재앙, 마지막 그 심판을 우리가 저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휴, 힘듭니다. 고만 하소서. 우리는 감당 안 됩니다. 우리는 못 견디겠습니다.’라고 이렇게 하소연한다고 해서 그게 중지가 안 되죠.

그 이유를 설명을 해야 되는데요. 우리가 여기 있다면 우리는 속속들이 심판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죽으심과 모든 면에 있어서 연관돼 있다는 것을 심판 행위를 통해서 우리한테 새로운 인식론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된 겁니다. 내 손톱, 발톱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죽게 만든 이유들로 더덕더덕 층층이 우리에게 쌓여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한 꺼풀, 한 꺼풀 우리가 건드릴 때마다 이빨이 아프다든지 뭐 이렇게 엉덩이에 종기가 났다든지, 내 하는 일이 안 된다든지, 모든 일을 통해서 들춰낼 때마다 펄럭펄럭 무슨 냄새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 죽어라, 씨~ 하나님 죽어라, 씨!~’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이 먼지 나듯이 하나를 건드릴 때마다 풀석풀석 먼지 나듯이 우리는 하나님보고 원망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가 안 돼요. 감당할 수가 없는 겁니다. 옴팍 하나님의 심판이 뒤집어쓴 거죠. 그럼 누가 구원받습니까? 이런 일이 하나님이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그걸 믿게 된 사람이 구원받아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성전 되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으로서 심판 작업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받았음을 확인시키는 작업을 그걸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걸 알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원했던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마주친다 했죠? 그렇다면 내가 골프를 좋아하는데 골프가 너무 안 돼서 돈을 한 10만원 잃었다고 하면, 그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뭘 하느냐, ‘하나님, 씨! 기도하고 쳤는데 왜 안 되느냐,’ 이러면서 원망하죠.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성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증인으로서 작업에 합류시킨 대상이 돼요. 하나님이 그렇게 합류시키는 겁니다. 불신자들은 백날 이야기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기분 나쁩니다. 하지 마세요. 인격모독입니다.’ 이렇게 나오죠.

그래서 신자는 이 모든 것이 주님만 있고 누구는 없어요? 나는 없는 거예요. 주님의 심판과 구원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는 매일같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될 존재가 되는 거예요. 복음의 의미가 주님에게만 의미가 있어요. 심지어 나라는 것이 나를 위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복음에 의미 있기 위해서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겁니다. 나의 모든, 내 입에서 욕이 나오든지 뭐가 나오든지 간에 그것조차도 예수님에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래야 이게 불가능한 거죠. 이게 사람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되지를 않습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한 것에 대해서 자기 쪽으로 교환시키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오면서도 주께서는 마땅하게 합당하게 하실 일을 지금 현재도 진행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감지되고 느껴지는 것, 이것은 새로운 인식론입니다. 그 인식론에서는 ‘인식=존재’가 돼 버려요. 그때는 ‘있다, 안다.’ 가 하나가 돼 버립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그리스도 것으로 있는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안다.’ 가 내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는 성도로서 ‘존재한다.’가 되는 거예요. 내가 너희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영생케 하노라. ‘안다’와 ‘존재’가 예수님 때문에 같이 이렇게 일치가 되는 거죠.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는 작업이 뭐냐 하면 ‘십자가’ 하나님의 죽음이 여기에 개입이 돼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박 윤진 성도님 글 써놨는데 글 참 잘 썼어요. 그런데 그 쓴 글에 내가 댓글 하나 달았죠. 무슨 댓글이냐 하면 개인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공동체(교회)로 옮길 때, 여러분, 개인이 모이면 가족이 됩니까? 안 됩니까? 우리 상식으로는 돼요. 다섯 식구 모이면 한 가족이잖아요. 저녁 때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야 되는데 누구 하나 출장가고 없으면 ‘가족이 뭐야? 식구가 다 모여야지,’ 하잖아요. 식구가 모이면 가족이 된다고 보잖아요.

그 가족들이 모이면 교회가 된다고 보잖아요. 그런데 그 댓글에 뭐라 했습니까? 하나의 개인이 가족을 이루게 되면 가족이 돼서 개인이 배신감을 느낀다고 제가 적었죠? 댓글 못 봤습니까? ‘나는 죽도록 동생 공부시킨다고 나는 대학 포기하고 안가고 동생 공부 시켜 놨는데 내 동생은 대학교 가서 잘 됐는데 나는 누나가 돼서 평생 동생 뒷바라지 하다 시집도 못 가고 노처녀 42살이나 됐는데 이게 무슨 짓인고.’ 이건 뭘 느낍니까? 배신감을 느끼죠. 가족이 아무리 우선이라고 해도 개인은 생생히 살아있다? 안 살아있다? 생생히 살아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나의 종기처럼, 자기 고집을 포기 못하고 살아있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결국 가족을 위한 개인이라고 우기면서 사실은 항상 우선은 나 우선이고 내가 훌륭하게 이만큼 동생을 누나로서 잘 건사했다는 것을 알아주기 위한 용도로서 가족이기를 원하죠. 그럼 이것은 뭐냐, 가족을 위한 가족이 아니고 나를 위한 가족일 경우에만 가족이라고 그동안 나불나불 입을 놀린 거예요. 실은 그게 아닌데.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주를 위하여 섬긴다고 모여 놓고 ‘교회가 이게 뭐야? 씨, 교회다 이정도로 헌금했으면 복을 줘야지,’ 결국은 예수고 하나님이고 결국은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그러한 경우를 갖는 거예요. 이것이 아무리 조합을 하고 결합을 하고 교합을 해도 역시 내가 살아있는 한 그것은 교회도 아니고 전부 다 이건 하나의 망상이 되는 겁니다.

그럼 진짜 교회는 어떻게 되는가, 진짜 그리스도의 가족은 [개인->가족->공동체(교회)] 여기에 십자가가 들어가 버리면 우리는 가족이 되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돼요. 내가 죽어야 나의 가치, 나의 자존심이 여기서 이것은 죽어야 가족이 된다 이 말이죠. 죽어야 가족이 된다는 이 말은 쉬운 말이 아니고 어려운 말 이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2년 전에 가족이 됐으면 안 죽어야 됩니까?ㅎ 그건 아니거든요. 이 가족이란 속에는 개인은 항상 늘 죽는 원칙이 살아 있는 창고 같은 데, 체육관 같은 데, 늘 가족이 가족다우려면 그 안에서 개인은 늘 죽어있어야 돼요. 왜, 가족을 위해서. 마찬가지로 교회를 위해서 가족들은 늘 죽어있어야 되고, 그리스도 천국을 위해서 인간 개인은 죽어있어야 됩니다.

천국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 진짜 속한 자라면 십자가가 매일같이 우리를 죽이는 그러한 환경 속에 우리가 놓이게 되는 겁니다. 늘 죽는다 하니까 우리는 손해보고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데 이것이 기적이 있어야 돼요. 예를 들겠습니다. 아까 만두를 잡쉈는데 오늘 저녁 안 먹고 왔다. 만두를 먹으니까 기쁘죠. 아까 인간은 뭐라 했습니까? ‘나는 만두 먹는 사람’ 기대하잖아요. 그냥 기대가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만두는 ‘맛이 있다’ 하는데 그런데 만두를 먹어보니까 ‘아!’ 만두가 맛이 없는 거예요. 맛이 없을 때 갑자기 우리는 불뚝 성질이 나잖아요.

그러니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모든 마주침에서 내가 뭔가 기대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줄 때는 하나님 뜻을 섬기겠습니다.‘ 할 때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지 않는 것, 그 차이를 주께서는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 버려요. 그러면 내가 맛있는 만두를 원했는데 맛이 없을 때 갑자기 성질나죠. 성질나서 ’에이, 씨, 만두 다시는 안 먹는다.‘ 할 때 그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습니까? ’참, 내가 지금 만두에 죽고 사는 놈이 돼서는 안 되지 않느냐, 이 똥 같은 인간 또 똥 같은 행동했네. 만두 이게 뭔데, 북한 주민은 굶고 있는데, 이게 뭔데.‘ 할 때 아! 만두에 죽고 사는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그 기쁨과 감사는 만두로도 살 수 없는 겁니다. 만두로도 살 수 없는 걸 만두 줘서 만들어 내요.

우리가 성경공부 올 때 대부분 억지로 옵니다. ‘안 가도 되는데.’ 하고 이렇게 오는데, 교회도 ‘오늘은 쉴까, 인터넷으로 생중계나 듣지,’ 하다가 막상 와 보면 전에 게으름 피운 것이 미안스러워지고 ‘야! 세상에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내가 너무나 좀 상, 너무나 세상을 좁게 보고 이 큰 세계의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 모르는 너무 세속적으로 내 이익만 챙겼구나,’라고 생각하죠. 설교 할 때만.ㅎ 고거 몇 시간 안 갑니다.

그게 바로 예상 밖의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라는 기쁨이 ‘내가 맛있는 만두 먹어야지,’하는 그 기쁨을 월등하게 넘어서죠. 고런 기쁨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로서 ‘할렐루야’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는 아무나 나오는 게 아니고 그런 사건이 있어야 돼요. 저절로 찬송가가 나와요. 찬송가는 성경에 있는 찬송가가 아니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죠. 이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주님이 세상을 크고 넓게 보게,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이제는 죽어도 좋아. 죽어도 상관없어. 이제 죽어도 좋아. 차라리 죽는 게 좋아.’라는 큰 기쁨을 허락하신 것은 기적입니다. 그 인간의 불가능한 기적을 주께서는 이미 준비해 놓은 기적이죠. 그게 인식론이죠. 그게 존재와 인식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고 시간을 어떻게 냉동해 놨다가 초콜릿 마냥 먹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고 짧은 시간을 냉동해 놓으면 좋은데 그렇지가 않아요. 그게 바로 8절에 보면 여기 성전에 뭐가 찬다고 했습니까? 연기가 가득 차죠. 연기가 가득 찼다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저지하거나 훼방하거나 방해하거나 마리 거기에 대해서 눈치 챌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항상 맛있는 만두를 원했건만 맛없는 만두, 그러니까 항상 내가 생각한 일곱 가지 내가 머리 써서 그 중에 되겠지 하면 하나님께서 이 중에서 피해서, 내가 아마 12가지 생각해 놓으면 13번째로 내놔요. 하나님께서는 삐딱하게 내가 생각하지 않은 곳에 나타나셔요. 내가 생각하지 않은 곳에 일을 벌이시고 그 일을 내가 쥐려고 하면 어느새 도망가고, 나한테 붙잡히지 않아요. 붙잡히지 않아서 내가 낙담하고 있을 때 그때 찾아오셔요.

그래서 우리가 손에 주님을 쥐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늘 쥐고 있다는 것을 늘 상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그때 싸인 받고 발 잡고 손으로 붙들려했지만 홀연히 사라져버렸어요.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동행하는 동행의 방식이 그겁니다. 주님은 잡되 우리 쪽에서는 주님을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 왜, 우리는 소유성이기 때문에, 내 하나님이고 내 예수고 잡을 수 없고 주님에 의해서 소유를 당하는 식으로 동행을 하시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주님은 나의 세계에 필요한 분이 아니고 주님의 독자적인 세계에 그때그때마다 쓰여 져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약에 나의 세계에 소유하게 되면 내가 펼치는 내가 기대하는 나의 상상의 세계에 주님을 종 부리듯이 부리게 되는 거예요.

목사가 교회를 한다는 것이 그만큼 위험한 겁니다. 이는 교회를 지가 강제로 지어놓고 주님이 자기 교회에 사람을 몰아넣어 줘야 돼요. 막 그렇게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으로 되는 게 아니고 두 수레바퀴가 있는데 하나는 말씀과 기도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야 되는데 말씀과 기도로 교회 부흥돼야 돼요.ㅎ

인식론에 대해서 한마디 더 한다면 기존 교회에서 교회가 부흥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말씀하고 관계없고요. 평소에 인간이 갖고 있는 인식론이 제대로 아다리 됐을 때 그때 교회 부흥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갑자기 기도하고 난 뒤에 갑자기 부자 되었다. 그 사람한테는 목사도 못 말려요. 그 다음부터는 전도 하는데 전도 방법이 쉬워요. ‘나처럼 기도하면 니도 과거 보상받을 수 있다.’ 그거 하나 밀어붙이면 성경도 필요 없고 성경공부도 필요 없죠.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아주 독하게 마음먹고 기도 열심히 나가면, 교회 기도만 나가는 게 아니죠. 헌금도 하고 교회 봉사, 충성 목사 말도 듣고 하게 되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자꾸 지연되지만 ‘언젠가는 저 사람처럼 나도 과거의 명성을 날리는 날이 올 것이다.‘라는 것, 자기 집착이죠.

그래서 자아에서 자아로 나아갈 때 불신자가 생각하는 자아는 옛날에 지가 생각했던 그 자아로 돌아가요. 자기가 예상 못한 자아라는 게 없어요. 불신자한테는.

신자의 자아는 항상 예상 밖의 자아, 주체가 나예요. 어제 내가 생각했던 오늘의 나가 내가 아니고 어제 생각하지 않은 엉뚱한 나가 오늘 주께서 새로 만들어 내요.

중국에 경치 좋은 데가 뭡니까? 장가게. 장가게를 한국에서 미리 예상을 한다고 봅시다. 막상 가보면 내가 한국에서 예상했던 것하고 틀리죠. 새로움+잉여가 넘치는 게 있어요. 그런데 ‘새로움이 넘쳤다’를 예상하고 가 보세요. 또 실망스럽게 됐어요. ‘이거 뭐 설악산보다 못하네.’ 그래서 항상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보는 인식이라는 것은 누가 결정합니까? 자기 누적된 과거가 인식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어요. 남의 꿈을 따라가면 길을 잃는다는 말이 있어요. 모방하지 말라는 거예요. 괜히 남을 따라가면 길을 잃는다. 남의 꿈이 지 꿈이 아니거든요.

사람은 꿈을 꾸는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주님 만나면 인간 자체가 꿈이라는 거예요. 내가 살아온 것도 내가 살아온 것은 꿈이고 주께서 살려주는 나만 현실이지, 내가 살아온 나, 내가 꿈꾸던 나는 다 이거는 허망한 겁니다. 이거는 주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지가 지 맘대로 지를 평가하고 심판했던 착각이죠. 내가 생각한 나는 착각입니다. 사람은 자기 뒤통수를 모른다 하잖아요.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상상만 한 거예요. 지가 들었던 거, 남들이 이야기했던 거를 다 추려서 ‘아, 내가 이정도구나.’ 상상하는데, 그래서 부부사이도 평생 부부로 살아도 항상 내가 남편다운 남편인지 만날 아내한테 묻고 아내는 만날 남편한테 물어요. 둘 다 지금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ㅎ 물을 사람한테 물어야지 누구보고 묻습니까?ㅎ 아무리 요리조리 설명해도 ‘나 당신 알거든, 당신 이런 인간이야.’ 아무리 설명해도 본인이 그걸 실감을 못 느껴요. 남의 꿈이기 때문에, 자기 꿈이 아니기 때문에. 또 자기 꿈은 꿈으로 끝나버리니까.

이게 바로 연기, 성전은 그 누구도 터치할 수 없는 하나님이 그냥 자기 프로젝트를 실시하는 것이 남은 오늘날 현실,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 하나, 하나에 주님의 꿈이 있고 주님의 계획이 들어있는데 우리는 볼 때마다 착각하고 오인하고 잘못되게 해석하고 그게 나의 계시가지고, 나의 안목 가지고, 매일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되게 알고 있어요. 매일같이.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일방적으로 오도하고 잘못 읽고 있어요. 하지만 성경에 보니까 그 모든 것은 심판이었느니라. 그 중앙에 하나님의 죽음이 있죠. 그래서 오늘 15장까지 결론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따라서 세상도 죽어야 된다. 끝 그래서 그것을 천사가 와서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천사가 와서 끝장내는 작업을 한 겁니다. 그것이 끝장내시는 하나님을 모신 사람이 오늘날 왕 같은 제사장 이예요. 하나님의 죽음을 모시고 가는 사람, 지시하고 표현하고 모시고 가는.

16장 봅시다.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일곱 대접인데 앞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라 돼 있죠? 그런데 왜 일곱(7)이냐 하는 것은 제가 여러 번 했습니다마는 또 해 봅시다. 왜 7이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창조한 것을 자신이 뭉개버린다는 뜻 이예요. 7일 만에 창조한 것을 7, 일곱 단계를 거쳐서 뭉개버리는 겁니다.

지난번에 했죠. 1, 2, 3, 4, 5, 6일 동안에, 그 틈새 하나, 하나에 뭐가 들어간다 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간다 했죠? 창조 질서의 칸막이는 십자가가 개입되죠. 두 사람이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지옥을 간다. 그 개입에 두 사람 사이, 경계선에 뭐가 개입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가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우리와 같은 고난을 받은 사람이 누구십니까?’라고 찾는 작업 이예요. 확인하는 작업이고,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해야 돼요.

십자가 복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죽으심이죠. 세상의 모든 심판에서 7인, 7대접, 7나팔, 5에서 6, 6에서 7 4에서 5, 여기에 전부 다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죽으심, 심판의 의지가 다 개입돼서 하나님이 스스로 만든 것을 스스로 뭉개버립니다.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하나 올렸죠? ‘나눌 수 없는 잔여‘라는 글, 지젝이 썼던 건데 셸링이라는 학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말한 거예요.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몇 가지 자료를 가지고 철학적으로 논리를 생각했는데, 첫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 세계를 뭉갠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구원과 지옥을 예정하신다. 세 번째는 하나님 아들은 십자가 죽음으로써 사랑을 위했다. 이 세 가지로 철학적으로 이론을 만든 거예요. 지금까지는 신학에서는 이 세 가지를 조화를 못 시켰다는 거예요. 이걸 주장하면 이게 안 되고 이걸 주장하면 이게 안 되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데 하나님 스스로 세상을 뭉갰다는 말이 이게 모순되죠.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셸링이 보기에 신학이고 뭐고 잘못됐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을 뭔가 잘못 된 거라 본 겁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잘못된 원인은 뭐냐 하면 인간 존재 위주로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에 잘못됐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인간과 관련해서 하나님 스스로 나타났는데 이걸 셸링이 계시철학이라 했는데 하나님 스스로 계시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차후로 빌려오는 식으로, 하나님을 잡아당겨오는 식으로 ‘하나님, 저 구원돼 보고 싶은데 저 뭐하면 돼요?’ 하는 식으로 자기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데려오는 식으로 하니까 이게 하나님 스스로 뭉개버린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 모든 신학과 철학에 대해서 도전장을 낸 거예요. ‘너희들은 하나님을 몰라, 내가 알아.’ 이게 셸링의 주장이죠.

그러면 셸링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되죠. ‘하나님은 미쳤다.’라고 한 거예요. 그 표현이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느 누가 하나님한테 미쳤다고 해요. 왜, 셸링은 하나님을 미쳤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미쳐 있기 때문에 미친 인간을 만든 하나님은 분명히 미친 것이 분명하다. 왜, 하나님은 코끼리나 물고기로 완전히 계시하는 것이 아니고 누굴 상대로 계시한다? 인간을 상대로 해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인간이 정신적으로 분열이 일어나고 인간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말은 그렇게 만든 하나님도 같이 미쳤고 문제 있다고 본 겁니다.

세상에, 문제가 없으면 자기가 만든 세상을 저렇게 뭉개버립니까? 이거 미친 짓이죠. 그런데 그동안 신학과 철학은 ‘하나님을 어지신 분, 자애로운 분, 성질 푸근하신 분, 훌륭하신 분,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라 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멸망한다, 심판한다는 것을 숨기면서 하나님을 섬겨왔던 거예요.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속에 자기가 죄 짓고 있으면서도 구원받고 싶은 분열된 마음이 있잖아요. 이것을 감추고 ’하나님은 무조건 어떤 일이 있더라고 눈 감고 입 다물어 주시고 그냥, 그냥 구원해주소서. 나한테 문제 있는 것을 질금 눈을 감으시고 그냥 하나님은 어지신 분이시니까 그냥 천국에 넣어 주세요.’라는 식으로 믿음이 왔다는 거예요.

문제의 원인을 모르고 왜 하나님이 문제성 있는 인간을 만들었는가, 왜 하나님이 이 땅에 사기꾼이 많고 도둑놈이 많고 나쁜 놈이 많고 도가니가 많고 왜 그렇게 만드는가, 그 문제를 근원적으로 따질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질금 눈 감고 그냥 이런 놈 저런 놈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인간을 밟아죽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데 그냥 질금 눈 감고 구원해 주소서. 이런 식으로 어물정 넘어가버렸단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인간이 스스로 신자란 사람, 신학자, 철학자, 스스로 자기 문제를 감추는 식밖에 안 되지 않느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 솔직하다면 인간 문제를 근원적으로 다 뒤집어야 됩니다. 뒤집어서 인간이 통하는 하나님, 인간에게 그런 남김을 갖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를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쳤다는 겁니다. 미쳤는데 그 미친 이유가 뭐냐 하면, 왜 미쳤느냐, 하나님은 수축과 팽창의 변화 속에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미쳤다. 점점 더 오리무중이고 무슨 소린지. 수축이라는 것은 이것은 창조, 그런데 수축과 팽창은 항상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인간에서 출발했거든요. 하나님은 나중이고 인간부터 수축과 팽창이 있다.

인간이 수축한다는 것은 인간이 외부로부터 행위, 행함, 행위, 행함을 같이 이야기해줘야 돼요. 나누는 사람이 있어서.ㅎ 인간은 외부로부터 행위와 행함, 이건 언어, 말, 또는 삽질 하는 것, 농사짓는 것 다 포함되죠. 또 장사하는 것, 사업하는 것. 잠자는 것, 다 행위, 행함 아닙니까? 인간이 외부로부터 뭘 발산한다는 것은 발산함으로 말미암아 그걸 통해서 자기를 하나의 단단한 주체로, 주체에서 실체로 단단하게 수축, 단단하게 질서 잡게 하는 거예요. 남들이 봐서 ‘니 누구야?’ 하면 ‘나, 이거 하는 사람이고 직업은 뭐고 키는 얼마고 말할 수 있도록 수축되는 것, 단단하게 수축하는 그 현상이 있다 이 말이죠. 고게 인간인 동시에 인간은 정신적으로서는 너절하게 꿈에 하늘을 날다가 그리스로 하늘을 날고 있고 화산에 들어갔다 나왔다가 이것은 전부 해리, 완전히 쥐포 찢듯이 다 찢어져요. 자신이 노는 생각.

사람이 남과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을 내가 누구라고 긴장을 바짝 해가지고 ’저 사람한테 말 함부로 하면 안 되지.‘ 하고 자기를 수축하지만, 편한 사이, 그리고 어떤 자기 일에 몰두 할 때, 책 볼 때 혼자 있을 때, 코를 후비고 하잖아요. 왜 이렇게 코를 후비는 것은 흉측한데 남들이 있는 앞에서는 안하잖아요. 선볼 때는 코를 후비지 않잖아요. 수축되었다가 혼자 있으면 해이해지면서 팽창되죠. 그럴 때 자기가 편함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 이 팽창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남에게 자기를 내주는 것, 자기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마음대로 갖고 놀라고 내줄 때, 팽창! 남녀가 사랑할 때 어떻습니까? ‘아이구, 처음에는 부끄러워 하다가 사랑하게 되면 그냥 자기 온 몸을 보여주죠. 이렇게 자기를 남에게 내 주는 것, 수축과 팽창, 또 팽창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 죽으심, 사랑으로 내줌, 수축은 뭐냐, 이 세상을 심판함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을 화끈하게 보이는 것, 이거 둘 사이에서 하나님께선 갈등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아니 이렇게 이야기도 되고, 그리고 수축과 팽창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뭐하느냐 하면 무질서의 원형에서 신이 신답게 된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신이, 신이 아니었는데 이런 갈등을 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신은 신으로서 등장한 거예요.

‘나 신인데 이렇게 갈등해.’ 그 갈등의 절정이 뭐냐 하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에 서 있는 예수님의 갈등이죠.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그분이 바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너무나 인간적인 면목으로 갈등을 보여주는 이 모습이 우리 인간이 진짜 죄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힌트가 되는, 근거가 된다고 보는 겁니다. 거기서 출발해서 하나님과 같이 나갈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심판이란 부정철학이 있지만 그 부정철학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 수축에서 남에게 십자가 사랑으로 남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이 긍정적인 그것이 결국은 신이 신다운 모습이다. 우리가 성도가 성도다운 모습이다. 이리 이야기하는 겁니다. 긍정철학. 긍정신학. 상당히 개혁주의철학자들이 만세를 부를 이야기를 해놨어요. 제 글에 보면 어려운 글이지만 주로 그런 내용으로 써 놨어요. 이 셸링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우리에게 중요하냐 하면, 인간 내부에 기대하고 싶고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있지만 그게 되지 못한데서 오는 울분 같은 것, 울분을 터뜨리면 신앙인답지 못하다하니 이걸 어떻게 해야 돼요? 깊숙이 저장고에다 압축해서 집어넣어야 되죠. 이게 없으면 우울증 걸리게 되죠.

왜 이렇게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느냐, 죄 짓지 말라 하는데 죄 짓는 내 모습 볼 때 내가 한심스럽고 ‘내가 이런 모습이 아닌데, 내가 나다운 게 아닌데, 이건 하나님 자녀답게 못한데, 이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닌데.’라고 자꾸 자책하게 만든 데서 오는 울분, 뭔 뜻인지 아시겠죠? 그래 이게 왜 울분이냐 하면 ‘나는 원래 반듯하게 살아야 되고, 착하게 살아야 되고, 말씀대로 살아야 되고,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 원래 내 모습인데 그렇게 안 되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짜증나고 내가 나한테 울분이 있잖아요. ’원래 나는 착해야 돼.‘ 자체가 나에게 울분을 유발시키는 죄가 된다는 사실을 본인은 그걸 인정하기가 싫은 거예요. ’나, 원래 나쁜 놈이야,‘는 애초부터 인정하기 싫고 ’나 원래 나쁜 놈이야.‘라고 말함으로써 착한 사람으로 계속 남고 싶은 그런 충동과 욕망이 있는 거예요.

오늘 해결책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다시 착해지십니다.’라는 해답을 제가 제시 안 합니다. 지금 하늘에 연기가 자욱해요. 성전에. 심판 앞에 연기가 자욱한 거예요. 그래서 너희는 ‘마땅히 심판 받아야 됩니다.’를 증거 할 때 우리는 우리 내부에 하나님의 죽으심을 모시고 다니는 오늘날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보니까 주께서 홀로 다 하셨네요. 우리보고 물어보지도 않고 심판하시고 우리에게 허락 없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로 등록시키시고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그 깊이를 증거 하는 종으로 삼으셨네요. 우리가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 이 합당한 삶을 주께서 매일같이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증거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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