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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4 01:20:03 조회 : 2501         
땅에 대한 폭격 111103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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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7.76) 11-11-12 06:15 
가락교회111103-요한계시록16장(땅에 대한 폭격)26강a-이 근호 목사
제 26강a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명령을 하는데 일곱 대접을 어디다 쏟으라 했습니까? 쏟는 장소가 어디죠? 땅이죠. 일곱 사발이 1, 2, 3, 4, 5, 6, 7, 일곱 대접이 쏟아 붓는 장소가 , 목적지가 하늘이 아니고 땅에다 쏟습니다.

땅에다 쏟으라 한 것은 땅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땅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땅이 뭐냐 하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믿음의 대상! 인간들이 땅만 믿고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안 좋은 분위기가 이미 땅에 충만하게 있는 겁니다. 그럼 땅만 믿는 사람들은 뭘 지금 잊어버리느냐 하면, 땅은 일곱  대접에 의해서 작살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어버리고 애써 그 소식을 안 들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겁니다. 타고 나면서 자기는 땅의 것으로 인하여 자기가 살고 땅으로 돌아간다는 그것으로서 자기들은 만족하고 충족하고 싶은 거예요.

여기서 이런 말이 어렵기 때문에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릴 때 여러분들이 고향에 있다 합시다. 여러분들이 뒷동산 올라가면 저 멀리 산들이 보이잖아요. 그런데 어릴 때는 저 산 넘어 길이 끊어져 있다 말이죠. 이 길 넘어 뭐가 있는지를 어릴 때는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모르죠. 그러니까 어릴 때는 꿈이고 비전이고 자꾸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거예요. 저 산 넘어 저 고개 넘어, 소녀 같으면 장날에 갔던 오빠가 고무신 사들고 온다는 오빠생각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뜸북뜸북 뜸북 새 논에서 울고, 라는 노래가 있어요. 요게 뭐냐 하면 요 어린아이의 세계의 한계가 되는 겁니다. 요 바깥의 세계가 꿈의 세계고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미지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이 길 끝나는 너머에 신비로운 세계가 뭐냐 자기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 이야기에서 자세히 보세요. 현재 이 선, 지평선 바깥의 세계를 이 소년 소녀가 안다 했어요? 모른다 했어요? 모르죠. 결국 이 바깥의 세계를 안 가 봐서 모른다는 말은 현재 이 안의 세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모른단 말입니까? 파악해 봐야 그게 한계가 있죠. ‘나는 저 꼬부라진 길 넘어서 나는 멋진 공주님 될 거야, 또는 연속극에 나오는 재벌 2세가 돼서 성공할 거야, 봄 되면 성공한 내가 자가용 몰고 늙으신 어머님 모시고 아버지 모시고 산소 가서 절하고,’ 이런 꿈들을 꾸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장성해서 산 넘어 도시로 가서 살아보세요. 도시 가서 장성해서 어른이 돼서 다시 고향에 올 때는 고향에서 살겠습니까? 안 살겠습니까? 재미없고 지긋지긋하고 여기서 한 달 수입이 몇 푼이 나오겠나, 빨리 떠나야지, 추석 때 후다닥 이틀 만에 가버리잖아요.

바깥세상에서 볼 때 그 어릴 때 꿈은 그냥 개꿈이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말이죠. 인간이란 것은 그냥 눈에 보이는 세계가 그게 전부로 보는 거예요. 만약에 이 소녀가 12살 반쯤 될 때 죽었다 합시다. 그런 이 사람이 죽을 때 소녀가 꿈꾸던 머릿속에 갖고 있는 두뇌 영상 이미지 세계는 이 길 바깥의 세계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껏 뭡니까? 이 세계 더하기 자기가 꿈꾸는 미지의 세계, 그 미지의 세계는 여기서 동화책 보면서 생각하는 백설 공주가 왕자님 생각하는 그런 세계뿐이라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다른 사람보기에 철없이 죽은 거죠. 세상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이게 바로 구약 성경 전도서 내용 아닙니까? ‘인간아, 니가 뭐 아노, 니가 뭘 알아, 니가 몇 년을 살았다고 알겠느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니가 살아서 공부를 해봤자 니가 책을 많이 써봤자 피곤한 일이고 니가 부귀를 누려봤자 그것이 더 나은 부귀 앞에서 니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볼 것이다.’ 잘 먹고 잘 살면서도 더 나은 부자 앞에서는 기죽고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이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결국은 우리가 전체 우주 창조의 전체 세계, 공간적으로 전체 세계, 시간적으로 긴긴 세월을 그걸 우리가 어느 세월에 다 알겠습니까?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여기서 결국 무지한 채로 살아가면서 나오는 세상 관, 이것은 믿을 것은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세계밖에 믿을 게 없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를 폭격을 해요. 누가? 일곱 천사를 통해서 일곱 펜텀 기가 폭격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에 두 종류의 떠남이 있어요. 첫 번째 떠남은 죽는 거예요. 죽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어른 세상 떠났습니다.’ 하죠. 죽을 때 이건 본의 아니게 세상을 떠나고 남은 식구들은 떠나보내는 의식을 행하잖아요. 그게 장례식이죠. 돌아가신 고인을 세상에서부터 격리시키는 작업, 주로 태우든지 아니면 태워서 연기로 보내든지 아니면 땅에 묻어서 안 보이는 곳에 두면서 ‘떠났다’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시키고 고인이 남겼던 흔적들을 태워버리죠. 이젠 없다.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떠났습니다. 어디로? 그건 모르죠. 그냥 자기 주위에서 떠나면 그만 이예요.

두 번째 성경에서는 떠난 것도 죽음이지만, 미련두지 않기, 사실은 두 번째가 더 중요하죠. 이 세상에 미련 두지 않음으로써 너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는 골로새서 3장의 말씀을 우리한테 적용 시킵니다. 니 생명은 이미 이곳에 어디 봐도 니 생명은 없어. 현재 니 갖고 있는 니 목숨은 생명이, 생명이 아니고 그건 헛방이고 헛 다리야, 그건 닳아 없어지는 양초 같이, 양초에 불 피우면 나중에 아침에 보면 어떻게 돼 있습니까? 남아 있는 건 뭐밖에 없습니까? 퍽 퍼져있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양초 물밖에 없죠. 그리고 시커먼 타다 남은 심지밖에 없죠. 그게 인간 아닙니까?ㅎ 그런 양초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주워 모을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누가 이야기했잖아요. 불꽃처럼 피우리라‘ 했잖아요. 윤시내의 열애,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생명나무가 없는 곳에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명나무가 있는 곳은 천국이고, 제가 교회 봉사나 목회하는 취지는 하나밖에 없어요. 누가 구원을 받을 자인가, 그거 확인해 주는 일 이외는 다른 게 없습니다. 목회라 하는 것은 ’당신은 천국 갈 사람이다.‘라는 확인인데 그 확인 방법은 뭐냐, 폭격 이외는 아무것도 없어요. 내 것이 아니니까 나만의 것이라는 것, 나 됨, 나의 됨됨이, 이걸 폭격 해버리는 거예요.

나의 됨됨이가 어디 있습니까? 다 같은 아담인데 똑같은 인간인데 나다움이 어디 있습니까? 나다움이라는 것은 하나의 고집이고 개성인데 그게 산 넘어 길 돌아서면 무슨 세계가 있는지 무지한 상태에서 조립된 거 아닙니까? 인생을 살면서 자기 기억을 수집하고 만나는 사람들 모아놓고 그렇게 해서 수집된 게 뭐냐 하면 나다움이잖아요. 노인들 노는 노인정 가보세요. 그 사람들 나이 많다고 겸손한 줄 압니까? 고집 세요. 평생 지는 나다움을 유지해 왔다는 거예요.ㅎ

나다움을 폭격할 수 있는 그것이 오늘 분문에 나오는 일곱 천사의 일곱 대접의 취지입니다. 천사들을 동원시켜서 폭격을 하는데 왜 폭격을 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셨다 가셨던 그 취지를 못 믿게 만들은 능력에 대한 폭격이에요. 나는 나다움을 유지하다 보니까 예수님다움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고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이것을 폭격을 시도해 버립니다. ‘누구야? 나다움을 이렇게 황폐화 시킨 게,’ ‘나다, 왜?’ 이거거든요. ‘누구십니까? 나로 하여금 말에서 떨어지게 한 사람이 누구십니까?’ ‘나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누구십니까? 내 눈을 완전히 멀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글을 썼지만 무슨 글을 썼습니까? [목소리와 현상]이라는 글, 쟈크 데리다의 글을 썼잖아요. 거기에 이렇게 써 놨어요.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나다움을 구축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꾸 ‘Who is this' 이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무엇이냐, 자꾸 물어요. 이것이 무엇이냐, 이 버릇이 교회와도 마찬가지예요. 구원이 무엇이냐, 천국이 무엇이냐, 성도가 무엇이냐, 중생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누구시냐, 물어요. 이걸 알게 되면 이걸 아는 지식을 자기 나다움에다가 자꾸 집어넣어서 나다움을 더욱 더 융성하게 해서 나다움을 확대시키고 카우려는 시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구원받은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누굴 만났어요. 누굴 만났으면 문을 똑똑 두드리면 ‘저 문이 무엇일까’ 이렇게 묻지는 않죠. 똑똑 치면, 우리 마음을 치면 ‘내 가슴은 무엇일까’ 이러지 않죠. ‘누구십니까’ 묻는 거예요. 방문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 배치돼 있는 세간살이와 같아서 도둑놈이 담타고 와서 우리 세간을 완전히 보쌈 해서 데려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것은 나다움을 키우기 위해서 상대방과 경쟁관계에 있어요. 소위 Battle, 시합, 경쟁과 시합, 시합과 경쟁,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고 인물이고 뭐고 진짜 성형 수술을 해도 누가 더 쌍꺼풀이 더 잘나왔나, 모든 것이 눈만 뜨면 시합이고 눈만 뜨면 경쟁이라니까요. 누가 손자 잘 키우나 경쟁하고,ㅎ 모든 것이 눈만 뜨면 시합이죠.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부족 돼 있는 신이 어느 정도 발견될 수 있는가, 그걸 타인을 통해서 측정을 하려고, 남과 비교해서, 혼자서는 다 도사니까 진짜 붙어봐야 ‘아! 내가 이거밖에 안 되는구나, 몰라봤습니다. ’ 하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오늘 다음(Daum)에 사진을 보니까 이런 게 있어요. 현대 자동차에서 비정규직 사원들이 정규직 사원들이 출근을 하니까 나란히 죽 서서 큰 절을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비정규직 사원들이 데모할 때 같이 협조해 달라고 큰 절하고 있는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 그렇게 묻지를 않는 거예요. 이건 왜냐 하면 아무도 자기를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살아도 내 힘으로 살아야 되고 버텨도 내 힘으로 버텨야 되지, 큰 절해서라도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어서라도 어떻게 정규직 옹호해서 큰 절한 게 아니고 종이라서 큰 절한 게 아니고 나 살기 위해서 내 절 받고 절 값 해 달라 이말 아닙니까?

사업할 때도 뭔가 손 내미는 것도 내가 이정도로 양보하니까 양보한 값을 당신이 치러 달라 그 이야기잖아요. 목사가 교인들 신방 뻔질나게 할 때는 ‘신방 한만큼 다음주일에는 교회 좀 나와 줘’ 그 이야기 아닙니까? 이게 다 목사는 목사다움, 사장은 사장다움, 나다움을 치중한다는 거예요. 나다움을 치중하다 보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녀온 것이 당체 믿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나다움이 동그라미 세계라면 예수님은 어디서 오셨느냐 하면 나다움의 바깥에서 오셨거든요. 나다움의 바깥에서 이렇게 오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나다움에 도움이 되는 예수님이냐, 아니냐, 해서 나다움을 훼방하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추방시켜 버려요. ‘나가’ 추방시키고 두 번 다시 안 봅니다.

복음이라는 것도 어제 수요일 날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복음도 자꾸 들으면 권태롭다고. 왜냐 하면 복음도 나다움을 키우기 위해서 복음을 듣다가 복음도 자주 들으면 이것도 싫증나서 ‘나가 잇’ 복음도 추방시켜 버려요.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수시로 우리 허락도 없이 이것(나다움)을 폭격을 시킵니다. 뭐로, 일곱 대접이라는 그 말씀을 가지고 나다움의 내가 구축한 영토를 허락 없이 들어와서 아예 폭격을 해서 싸그리 황폐화 시켜서 우리가 그것을 나다움을 믿을 가치가 전혀 없음을 우리한테 자꾸 보여주는 거예요.

제가 주일 아침에 그런 설교를 했죠.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손 놓으면 물에 뜬다 해도 안 믿는 거예요. 계속 발을 땅에 딛고 있는 거예요. 땅에서 발을 떼라 해서 떼면 이번에는 뭘 하느냐 하면 강사님을 붙드는 거예요. 물에 안 빠지려고.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평소에 내 힘으로 살았던 그 버릇이 교회 나와도 그 버릇이 어디 갑니까?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옛날 방법을 그대로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자기한테 성과 화 시키는 거예요. 그걸 제가 반복학습이라고 했죠? 자꾸 교회에서 반복학습 시켜서 그걸 축적하고 정체를 하면 그게 자기한테 쌓이면 그게 쌓인 나로 인해 내가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이런 말 할 때만 이해가 돼요. ‘아! 교육의 효과로 구원을 받는구나. 내가 목사한테 교육을 안 받았구나.’ 자꾸 이것만 유지하는 거예요. ‘그 따위 교육 받은 그것을 버려라‘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겁니다. 사람이 교육받은 것이 자꾸 누적돼 버리면 그건 결국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나다움, 자기다움을, 자기를 믿는 것이 돼요. ’나도 내 안에 복음 들어있다. 뭐 들어있다. 뭐 들어있다.‘ 좋은 거 다 들어있죠. 다 들어있는데 무거워서 물에 뜨지를 못해요.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있어서 뜨지를 못해요.ㅎ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가벼운 존재가 되지를 못해요. 존재가 얼마나 무거운지, 이렇게 뜨지를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가거든요. 그래서 목사가 목회하면서 오직 생각하는 건 하나밖에 없어요. ‘저분이 뜨겠느냐. 저분이 뜨겠느냐.’ 헌금 해놓고도 ‘헌금 제가 안 했습니다.‘ 할 정도로 헌금한 자기 나다움도 버릴 수 있는 전도하고도 ’주님이 했죠.‘라고 자기 무게를 토하고 비워낼 수 있는 사람, ’내가 나 된 것은 은혜고 내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주께서 살려주니까 삽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과 관련돼 있어요. 어떻게 관련돼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서의 땅 개념은 구약개념과 연관시켜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곱 대접에 나오는 모든 재앙들이 이미 구약에서 나왔던 재앙들입니다. 일곱 인은 하늘의 4분의 1이 작살나고 일곱 나팔은 3분의 1이 작살났는데 완전히 일곱 대접은 모든 게 작살나버려요. 이렇게 4분의 1이 작살났을 때는 하나님께 원망을 안 해요. 3분의 1이 작살나도 하나님께 원망이 덜합니다. 그런데 모든 게 작살났을 때는 비로소 감춰진 본색이 나와요.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하나님이면 다냐,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깡패 하나님이냐, 왜 내 걸 건드려, 내 인생 내 곱디고운 내 인생 왜 건드려,’ 고왔던 나다움.

옛날에 이런 노래 있잖아요. ‘꽃이 지면 같이 울고 꽃이 피면 같이 웃고,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 꽃이 지면 같이 울고 꽃이 피면 같이 웃는다는 이 말은 그것이 자연과 더불어서  이 땅과 더불어서 꽁꽁 그 안에서 만든 묶여져 있는 그 바깥으로 절대로 나갈 수 없는 그 안에서만 나다움이 있는 모습을 그 유행가 가사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낙엽 발길로 툭툭 차면서 눈물 흘리고 바바리 깃 팍 세우고 몇 개월이 지나면 새싹이 피어오르고, 슬픔  조차도 내가 내 안에서 조성된 슬픔으로 사람들은 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야기해요. ’너는 너 때문에 울지 말고 진짜 울려면 나 때문에 울어라,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오나니, 그때 금식하고 그때 울어라.‘ 이 말 이예요.

나 때문에 울고 웃어도 나 때문에 웃고 그러니 이런 일 저런 일 전부 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이미 주께서는 요한계시록의 이 원칙을 적용시켜 왔었어요. 요한계시록의 이런 입장에서 보지 못하니까 마태, 마가복음도 그게 해석이 안 돼요. 예수님께서는 떡을 줬다가 떡을 줬으면 영생도 줄 일이지, 왜 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쓸데없는 이야기해서 다 쫓아내 버리고 왜 이러나, 그러니 성경 해석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생성된 나다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녀간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그것을 안 믿어지는 것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구약에 있었던 재앙은 신약에 그대로 주어지는데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그 관계성, 구약과 신약의 관계성을 따져봐야죠. 이게 좀 약간 복잡한데 여러분이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거지만 정리할 테니까 여러분도 정리해 보세요. 구약에 초점이 있어요. 그건 없는 나라입니다. 없는 나라가 생겨요. 문제는 없는 나라가 어디서 생기느냐, 있지도 않은 나라가 생기는데 어디에서 생기느냐 하면 애굽 나라에서 생겨요. 그러면 없는 나라는 없는 나라 이전에 무슨 나라가 있어야 됩니까? 애굽 나라가 먼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애굽 나라 먼저 있고 거기서 없었던 나라가 생기면서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죠.

그렇다면 애굽 나라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나라 생기는 요러한 장치, 과정을 통해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언약을 이야기하려고 하고요.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언약은 땅과 관련된 거예요. 하늘에서는 언약이라는 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언약은 꼭 땅에서 만들어지는데 애굽이 있어야 만들어 져요.

사단이 가룟 유다한테 들어가지 아니하면 예수님 십자가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꼭 십자가에 사단이 관여를 해줘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라고 동의가 돼야 돼요. 우리는 십자가 아니면 못 빠져 나온다는 말은 그동안 사단에게 매였습니다. 또는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매였습니다. 또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때는 진노의 자녀라 불순종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가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다 수용을 해줘야 돼요.

애굽 있고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데 이스라엘 나라가 이겼다. 이러면 언약이 안 돼요. 나  집에 있었는데 교회 나와서 구원되었다. 이러면 그건 성도가 아닙니다. 나 집에 있었는데 교회 가서 성도 되었다. 교회 등록해서 성도 되었다. 이건 성도가 아니에요. 성도라 하는 것은 우리 집에도 없었고 나에게도 없었고 교회도 없었어요. 다만 교회라는 애굽에 가서 ‘아! 성도는 교회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성도 되는구나’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필히 교회를 거쳐야 돼요.ㅎ

지금 이 모든 세상이 교회 화 됩니다. 왜냐 하면 교회란 이 세상에서 달리 부름을 받은 모임을 교회라 하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그 교회가 이제는 세상을 대변해주는 단체가 돼요. 세상의 대표자는 교회, 마귀가 있는 곳은 교회, 예수님을 대적하는 곳도 교회, 이렇게 돼요. 그것도 일곱 교회, 일곱 교회를 분석해 보니까, 일곱 교회를 뜯어보니까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바로 사단이 들어있죠. 일곱 교회는 다 망하잖아요. 뭐 대충 찾겠다. 소용  없어요. 완벽하게 흠이 없어야 되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선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가만 두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계속해서 이 세상은 애굽이 돼야 되기 때문에.

다시 보겠습니다. 애굽 나라에서 없는 나라가 생겨서 이스라엘이니까 결국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이 나온 게 아니고 어디서 나왔습니까? 애굽 나라에서 그 다음에 그냥 나왔다 하면 안 되고 애굽 나라에 언약이 투입되니 이스라엘 된 거예요. 이 언약의 완성을 무슨 언약이라 하느냐 하면 ‘새 언약’이라 하거든요.

제가 어려운 대목을 다시 이야기할게요. 어려운 대목 나오는데 애굽 나라에서 언약이 들어가니까 이스라엘이 나왔죠. 그러면 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이니까 새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십자가 들어오게 되면 이 나라에서 애굽 나라 새로 생겨야 되고 거기서 나왔던 이스라엘이 새로 발생돼야 됩니다. 이것(구약 때)은 무효예요. 이 애굽이나 이스라엘은 무효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유대인이 원래 사단의 나라예요.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나와요. 그들은 유대인이라 하나 사단의 회라‘ 그 자칭할 것도 없어요. 그 당시 유대인이라는 자체가 이미 유대인이라는 구분 자체가 예수님 이후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참된 이스라엘이고 나머지는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단체가 되겠죠.

그래서 여기서 어렵다는 게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의 모든 개념은 십자가에 준해서 애굽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내느냐와 관련된 요한계시록의 개념이 투입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언어는 해석하기가 정말 어려워요. 그래서 성령 없이는 해석이 안 됩니다. 구약에서는 땅 덩어리 있으면 애굽 아닙니까? 나일 강 있고 삼각주 있고 카이로 있고 그러면 애굽 이잖아요. 거기서 벗어나면 애굽에서 벗어난 거로 돼 있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 새 언약 이후에는 우리가 애굽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왜, 새 언약 자체가 전 우주를 커버하기 때문에 전 우주를 커버하면서 애굽에서 나온 최초의 인물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을 최초로 탈출시킨 그 세계가 이유 없이 무조건 애굽으로 풀이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전에는 애굽 땅 안에서 따로 모세가 이끌고 나오면 고것만 이스라엘인데 새 언약 시대에서는 예수님이 탈출했던 그 땅 자체가 애굽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애굽이 되면서 그 땅이 애굽이어야 하는 이유를 추가적으로 요한계시록 개념들이 한 트럭으로는 안 돼요. 여러 덤프트럭으로 계속 갖다 붓는 거예요. 이건 소돔이라 하고 애굽이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그래서 모든 개념들이 이것은 역사를 초월해서 묵시적으로 하늘에서 우박 떨어지듯이 묵시적 개념이 우박 떨어지듯이 쏟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묵시는 진화를 거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진화한다는 말은 차곡차곡 변천하는 것을 진화라 합니다. 다윗의 진화론 나오잖아요. 그런데 묵시는 진화를 거치지 않아요. 처음도 묵시고 끝도 묵시예요. 숨겨진 의미가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는 뭐라 합니까?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사람들이 지혜로는 발각되지 않는 곳에 있죠. 그렇죠? 그런데 그 십자가가 가만히 있습니까? ‘날 잡아봐라’ 하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아니죠. 분명히 인간 속에서는 발각되지 못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발산하고 드러내 보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나는 십자가를 알려고 연구 안 했는데,’ 가만히 있는데, ’내 자리 지진이 일어나라.‘ 그래서 지진이 일어난 게 아니거든요. 가만히 회사에 있는데 뭔가 갈라져서 보니까 땅이 갈라지듯이 내가 있는 자리가 들썩들썩해서 솟구쳐 올라온 거예요. 물론 석유 터지면 부자 되겠죠. 석유나 온천 터지면 좋겠는데 십자가 터져서 영생을 얻었죠. 십자가 터지니까 그때부터 이 사람은 무슨 꼴이 됐느냐 하면 혼자 보물을 발견한 농부 꼴이 돼 버려요. 이게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농부가 혼자서 밭을 갈다가 척척 금속소리가 나니까 파보니까 그 안에 보물이 들었다 이 말이죠. 농사 질 마음이 나겠습니까?ㅎ 살짝 덮어놓고 그 다음부터는 편안한 마음으로 출근길이나 퇴근길이나 편안한 마음이죠. 이게 성도의 남은여생이 이래야 됩니다. 봤거든, 신 봤다. 이미 신 봤기 때문에 남은여생이 꼴아 박든 거지가 되었든 노숙자가 되든 상관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거예요. 할거 다 하면서 즐길 거 다 즐기면서 편안하게, 그렇다고 술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되고,ㅎㅎ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는 거예요. 싱글싱글 벙글벙글 하면서.^_^

그런데 성령 받아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눈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구원을 받으려고 십자가 믿으려고 ‘십자가’ 외치는 그 안타까운 못 볼 인간을 보게 되죠. ‘아이고, 인간아, 집요한 오락이다.’ 십자가 믿고 행함을 해야 될까, 말아야 될까, 연구하고 난리가 나 버려요.ㅎ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행함 갖다 붙이면 교인들이 돈 더 줄줄 알고, 자기 나됨을 유지하려고.  농부가 나의 나됨으로 보물을 얻은 겁니까? 이제는 나의 나됨도 기억도 없어요. 왜냐 하면 나는 농부에 불과하니까. 농부하고 보물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어요. 강도하고 천국하고 관계없죠? 강도 짓해서 구원받은 건 아니잖아요. 아무런 상관없는데 창녀하고 천당 가는 거하고 관계없죠? 아무 관계없는 거예요.

나의 나됨과 내가 구원받는 것은 밑에서 온천 터져서 석유 터져서 구원받은 것이지, 나의 나됨과 나의 노력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세전에 이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주께서 택했다는 거예요. ‘창세전에 미리 아시고 예정하사 나를 택해서 나를 주의 사도로 삼으시니,‘ 이 말들이 무슨 뜻 이예요? ’내 밑에 온천 터졌다. 이 뜻이거든요. ‘난리 났다, 난리 났어.‘ 웬 기적이다 이 말이죠. 온 몸으로 기적 받은 거예요. 내 대신 돌아가셔서 그 피로 말미암아 그 피가 작용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아주 편안하게 할 수 있어요. ’이거 당연한 거 아니야,‘ 당연한 거거든요. ’나 남자‘가 당연하듯이 ’나는 성도‘ 당연한 거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 당연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항상 우리는 누구하고 거래하는 거예요. ‘누구십니까? 날마다 내 것을 매일같이 와서 이런 말씀으로 권면하시고 또 다시 돌아서면 내 것이라 챙기는 것을 때려 부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마네 시 같아요.ㅎ

이제 좀 어렵습니다. 애굽 나라에서 없는 나라 이스라엘이 생길 때 없다는 말을 왜 이렇게 강조하는가 하면 이것이 언약 자체가 이 땅에 없었기 때문에 없다는 거예요. 언약이 있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생겼기 때문에 언약이 없다면 이스라엘도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언약이 온 게 아니고 언약이 이 세상에 나타나기 위해서 그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있다고 하지 말고 ‘언약이 있었구나.’하면 돼요. ‘나 구원받았다.’ 이야기하지 말고 ‘예수님 다녀갔다.’하면 돼요.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래서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했잖아요.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 이야기를 설명 했잖아요. 누가 바깥에서 음성이 나면 그분이 현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이들이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말은 지금 지구상에 모든 이들과 더불어서 누구도 현존하고 계시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이가 내 음성을 들을 때, 산 자나 죽은 자나 상관없이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지금도 그 음성이 The Sounds of Silence, 침묵의 소리, 침묵의 소리로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달과 별은 알아듣는데 우리는 몰라요.

애굽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애굽 나라에 내장된 것이 아니고 애굽 나라에 이스라엘이 옴으로서 애굽 나라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먼저 있어야 될 나라로 여기에 등록이 된 겁니다.

이걸 신약에 와서 보면 새 언약을 위해서 멸망돼야 될 땅이 필요한 거예요. 귀신도 필요하고 악마도 필요하고 새 언약을 위해서 필요한 거예요. 선악과도 있어야 되고 선악과 따먹기 위해서 선악과도 있어야 되고 생명나무도 있어야 돼요. 여러분, 선악과 따먹은 것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모세가 40일 동안 하나님 만나고 가져 온 것이 뭐죠? 돌 판이죠. 그 돌 판 어떻게 됐습니까? 돌 판 밑의 사람은 구경도 못했습니다. 모세가 깨어버렸어요.

모세가 들고 온 돌 판이 깨어졌다는 말은 처음부터 땅 밑의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언약 적으로 깨어진 언약 적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거든요. 밑에는 여호와 축제 벌이고 난리가 났어요. ‘여호와, 여호와,’하고 있는 거예요. 막상 여호와가 내려 올 때는 여호와가 내려오는 게 아니고 언약을 들고 온 거에요. 신약에는 새 언약,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오는데 그들은 신약도 모르고 새 언약도 모르고 그냥 ‘여호와, 하나님.’하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고.

그럴 때 그들에게 보여줄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엉터리라고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새 언약에서는 뭡니까? 십자가로 구약 때는 깨어진 돌 판이죠. 공통점은 둘 다  피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피를 출애굽에서 애굽 나라에서 이스라엘이 갈라질 때 여기 뭐가 개입됐느냐 하면 바로 피가 개입됐습니다.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대목이니까 잘 들으세요. 우리는 애굽 나라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아니죠. 언약이 와야 이스라엘이 된다니까요. 내가 구원 못 받아요. 뭐가 밑에서 온천 터지듯이 석유 터져야 돼요. 그게 뭡니까?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우리는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애굽 나라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이미 뭐로 결정 났습니까? 만나는 접선 지점은 뭐로 결정 났느냐 하면 바로 ‘피’를 통해서만 만난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피를 통해서만 만나고 그 외에 만나는 길이 없습니다. 찬양, 기적, 암에서 낫는 것, 헌금하면 복 받는 것, 전부 다 거짓말 이예요. 전도 많이 하는 것, 방언 한 것, 아닙니다.

오직 접선 지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피로만 만납니다. 그리고 그 피는 우리보고 ‘넌 죽어야 될 사람’이라고 알려주는 피요, 그 피는 죽어야 될 너 때문에 같이 죽었다는 피요, 같이 죽었던 네가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피가 되는 거예요. 피 안에서 하나로 묶여야만, 하나로 묶인 그 사람만 부활의 날에 참여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메시야라 하는 것은 한 자로 이야기하면 결국 자신의 피를 앞장세웁니다.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교회라 하는 것은 이 피만 증거 돼야 돼요.

사람들은 피를 비껴가려고 해요. 왜, 나의 나됨을 포기 못해서, 나의 나됨을 평생 동안 키워왔기 때문에, 평생 집에서 키운 개를 누구한테 도둑맞아 보세요. 얼마나 아깝다고요. 애정과 정성으로 키웠는데. 모든 애정과 정성, 내 사랑이 모두 거기 가 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만날 때 어떻게 만났습니까? ‘아들을 죽여라. 피로 죽여라.’ 그래서 만났어요. 그 아들을 죽이라는 말은 뭡니까? 그는 자기를 대신하는 거예요. 정성과 사랑과 애정과 그것도 사랑하는 독자, 미운 독자, 이스마엘 같으면 얼른 바쳤을 거예요. 그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독자, 그 하나를 니 손으로 죽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들 이외는 아무 가치가 없는 거예요. 너의 정성, 애정도 가치 없고 너희 열심도 가치 없고, 너희 헌금, 기도 가치 없어요. 가치 있는 것은 아들의 피밖에 가치 없어요. 주께서는 피 안에서만 사람과 만나고 피 안에서만 구원하십니다. 온 사방의 벽이 다 피다 이 말이죠. 그게 ‘피’라는 책에 나와요.

그 다음에 진도 나가봅시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애굽 나라에 이스라엘이 혼자 있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뭐가 머물고 계십니까? 어린양의 피가 떠나지 않고 함께, 피와 함께 동행 하죠. 지난 수요일 날에 했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라고.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와 동행하는 사람과 또 한사람은 뭐라 했습니까? 돈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이라 했죠. 돈이 함께 동행 하면 돈이 나의 가치를 대변해 주잖아요. 이쪽에서는 피가 나의 가치를 대변해 주는 거예요. 피와 함께 동행 하면!! 태진아가 그런 노래 불렀잖아요. 돈 보다 사랑이 더 좋다고. 거짓말 하고 있는데.ㅎ 여자 돈 없어 보세요. 남자가 좋아하는가, 반대도 마찬가지, 돈 없는 남자하고 어떻게 삽니까? 그건 철딱서니 없는 20대에 낭만적일 때나 하는 이야기지, 30대만 접어들어도 돈 없는 남자는 결혼도 못합니다. 그래서 30대 넘으면 결혼을 못하는 이유도 있어요.ㅎ 이제 철이 났거든요. 사람은 남편과 동행하는 게 아니고 돈과 동행하거든요. 돈 없이는 못 살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떤 누구도 피와 동행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언약이 들어오고 보니까 그때부터 희한한 현상이 일어났는데 피와 동행하는 희한한 민족들이  생겨났는데 그 이름이 네 자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죽어도 산다는 거예요. 자꾸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는 이유는 니가 죽어도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이는 거예요. 돈이 없어 죽을 지경이고 자식이 애먹여서 죽을 지경이고, 사업 안돼서 죽을 지경이고 자꾸 죽이는 거예요. 매일같이 확인 작업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누구십니까’ 물을 수밖에 없죠. ‘누구십니까?’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알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서 등장하게 되면 신약으로 옮겨 버리면 새 언약 시대에 모든 세상이 애굽이라 했습니다. 자, 애굽에서 첫 번째로 빠져나온 이스라엘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빠져 나왔죠. 그래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이라 하고 또는 야곱이라 하죠.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하잖아요. 요한복음 1장 51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이것은 뭐냐 하면 나다나엘에게 ‘내가 바로 야곱이다.’ 언약의 구심체고 중심체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세상에 복이 없다 이 말 아닙니까? 이건 그야말로 언약으로 투입된 것이기 때문에, 언약으로 투입됐다는 말은 무엇을 예상할 수 있습니까? ‘하아! 없는 나라 만들 수 있구나.’ 내가 생각도 못하고 내가 기약도 못하고 내가 예상치도 못한 나한테도 낯선 나도 예상 못한 농부가 이쯤에 보물이 있을 거라고 예상 했습니까? 그냥 파다가 보니까 보물이 튀어나온 거예요. 그게 횡재한 거죠. 그 횡재를 주시는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어렵다는 게 뭐가 어려우냐 하면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빠져나왔으면 뭐가 어려우냐 하면 애굽이 계속 애굽화 되어줘야 계속 애굽이라는 게 예수님 때문에 건졌다면 옛날 이스라엘의 그러한 모션과 티를 흠뻑 젖는 성도들이 나와야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철저하게 애굽 돼야 된다는 거죠. 애굽 돼야 될 이유는 애굽 될 때 비로소 요한계시록에 옛날에 애굽의 재앙의 의미를, 같은 개념을 이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일곱 대접을 통해서 할 때 ‘아하, 내가 애굽에 살고 있구나, 그리고 떠나야 될 곳이구나.’

만날 나이 많아서 여행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여행 백날 해봐야 그 동네가 그 동네고 그럽디다. 아테네 가봐야 데모하느라 바쁘고 일본 가봐야 경제 어려워서 애로가 많고 미국 가봐야 월가 데모하는 것 똑같이 어디 가도 항상 돈 없이는 못 산다는 법칙은 이건 알래스카 가도 돈 없이는 못 살아요.ㅎ

이 세상은 애굽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어요. 참 제가 본의 아니게 유럽에 갔다 왔습니다마는 가면서부터 실망했는데 올 때까지 실망했어요. ‘내가 뭐하려고 왔던가, 왜 내가 뻔히 애굽인데 뭐 이리 좋다고 라인 강이 뭐고....’ 그래서 내가 느낀 것은 사람은 돈 없으면 못 산다는 그것, 아무리 좋은 나라도 돈 있어야 좋은 나라지. 돈 없으면 그거 나쁜 나라고 힘든 나라예요.ㅎ 그것은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땅에서 익혀온, 땅에서 철저하게 배워온 그 감각, 삶의 감각, 생활 감각, 인식 감각,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온 몸에 염색됐어요. 자본주의 독성이 팍 몸속에 퍼졌어요. 이거 안 빠집니다. 이 독성이 양잿물로 해야 빠지지 않아요. 자본주의 때가 죽을 때까지 들어있어요. 안 빠져도 걱정하지 마세요. 매일같이 폭격합니다. 매일같이 말씀대로 폭격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우리는 삽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41.206) 11-11-21 01:01 
가락교회111103-요한계시록16장(땅에 대한 폭격)26강b-이 근호 목사
제 26강b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6장에 첫째, 둘째, 셋째 이렇게 돼 있는데 요건 전에도 했습니다만 어렵기 때문에 한 번 더 하겠습니다. 7이라는 게 뭐냐, 7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느냐, 왜 8대접이 아니고 9대접이 아니고 6대접도 아니고 왜 7대접이냐, 신명기 15장1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 끝, 7은 단절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땅과 하늘은 확실하게 차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늘 것이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땅은 하늘과 섞이지 아니하고 7이라는 숫자를 앞장세워서 확실하게 단절시켜주는 거예요. 구멍 난 정도가 아니고 단절이라니까요. 구멍 난다는 것은 바로 옆의 경계에서 여기도 있고 여기도 이렇게 있지만 단절이라는 것은 여기 있어도 없는 것이 돼 버려요. ‘내 옆에 누가 있는데? 내 옆에 예수님이 어디 있어? 나밖에 없지.’

단절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가려고 해도 있어야 가지 아무것도 없는 세계예요. 없는 세계가 7의 세계예요. 그런데 신명기 15장에서 7이라는 게 어디 가 있습니까? 바로 없는 나라 없었던 나라, 이스라엘에게만 7의 작용이 일어나는 겁니다. 7년마다 히브리 종들은 무조건 해방시켜라. 7, 8년째 하지 말고 7년이 끝이야, 왜, 나는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그러니 이건 이스라엘은 뭐의 정보를 이렇게 이동시키는 역할을 하느냐 하면 창세기에 담겨있던 창세기의 정보를 계속해서 역사 끝 날까지 이전시키는 택배회사 비슷한, 2424, 779-2424와 같은 이삿짐 회사처럼 뒤에 컨테이너에다 뭔가 7이라는 걸 안고 이동하는 거예요. 고 뒤에 실린 7을 끄집어내면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창조 때에 미처 드러나지 않던, 창조의 숨겨진 창조의 비화, 창조의 비밀 이야기가 이스라엘 컨테이너 안에 포함되어서 이동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건드리는 것은 남들 보기에는 그냥 엉뚱한 ‘어디서 굴러온 뼈다귀야,’ 하는 것처럼 같은 민족으로 치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을 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치는 것은 그들이 담고 있는 하늘나라 정보를 치는 거라니까요. 그 정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은 종친다. 끝났다. 이 세상은 멸망해야 된다.

그게 민수기 23장에 보면 나와요. 언젠가 제가 7에 대해서 글을 한번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23장 1절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 하소서 하매” 여기 7이 몇 개 나오죠? 7단에다 7소에다 7양을 준비하라 하죠. 왜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나 발람 선지자에게 이야기 한 것만 이야기할 겁니다. 당신이 아무리 뇌물 갖다 바쳐도 난 당신 말 안 들을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한테 이야기 한 것만 이야기 할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7일 만에 창조한 그 창조의 비밀만 나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되비쳐서 당신한테 알려드리겠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비밀이 발락 당신이 지금 저주하려고 하는 저 이스라엘 속에 담겨있다는 사실이 진짜라면 진짜 여호와께서는 창조의 비밀을 이스라엘이라는 그런 컨테이너 트럭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그걸 트럭을 내가 열어 제치고 당신에게 이야기해 줄 것입니다. 아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발람이. 모압 선지자 이방선지자 발람이.

모압 땅에 이스라엘이 통과하니까 자기를 침범하는지 알고 자기의 선지자 용한 선지자 발람을 통해서 많은 재물을 주고 신에게 빌어서 신에게 저주하라고 기도하라고 부탁할 때, 자기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단을 세웠는데 그 단도 자기 마음대로 세우는 게 아니고 여호와 시키는 대로 일곱 단, 일곱 소, 일곱 양을 세워놓고 거기다가 여호와의 지시를 받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 지점은 그 당시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움직임이 곧 언약 적 움직임이고 언약이 움직임이 곧 언약의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의 움직임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아십니까? 그래서 발람이 하나님 지시를 받고 했는데 그 지시받은 내용이 뭡니까? 이게 꽤 유명한 건데 그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그 자체 내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는 왕이 있어서 아무리 바깥에서 저주의 화살을, 최종병기 활을 아무리 쏘아대고 저주의 활을 쏘아대도 그 저주가 먹힌다? 안 먹힌다? 저주가 안 먹힌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이 갖고 있던 축복된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들이 자기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 한 외부에서 아무리 저주하려해도 그것은 저주가 뭐로 바뀝니까? 축복으로 바뀌는 거예요. 복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그 당시의 축복뿐만 아니고 창세기 안에 담겨있는 정보 속에 이미 포함돼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창조 속에 포함이 된 것이 이스라엘이 나왔다면 결국 이것은 뭡니까?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의 철저한 단절을 의미하는 겁니다. 단절 의미를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단절이라는 것은 옆에 있어도 없는 걸로 취급받는 게 단절 이예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희망이 없다고 이젠 자기 볼일 보겠다고, 12제자는 아니고 다른 제자가 내려갔는데 그때 어떤 제 3의 사나이가 불쑥 뛰어들어서 ‘어디 가십니까?’하고 이야기 했죠. 그러니까 그분이 누구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죠. 부활하신 예수님인데 저는 그걸 보고 놀란 것은 그 예수님을 나중에 식사하는 가운데 알아봤죠. 제가 놀란 것은 그 다음에 그 제자가 예수님을 붙잡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부활한 예수님을 내가 소유해서 이제부터 내가 서서히 북치고 약 장사 해야지. 동업하면 내가 크게 되겠다.’ 이렇게 될 수가 없어요. ‘예수 믿고 교회 만들어서 크게 부흥돼야지,’ 이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야기해놓고 예수님은 떠나버리죠. 떠나버리면 남는 것은 뭘까요? 남는 것은 뭡니까? 흔적이죠. 어떤 흔적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흔적, 십자가가 바로 흔적이죠. 갈라디아서 6장에 ‘나 건드리지 마,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십자가 피만이 진짜 성도가 하나님과 지금 사귀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중심밖에 없어요. ‘어찌하든지 십자가에 죽으려 함이라.’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한 이야기예요. 아까 김 집사님이 ‘십자가 죽음이냐?’ 십자가 죽음은 아니에요. 십자가가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환원해서 해석을 하면 그게 안 되는 이유가 그게 다시 죽었다 살아나면, 부활돼 버리면 십자가는 있으나 마나 이미 과거사가 돼 버려요. 그러면 계속해서 십자가가 유지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땅에 피를 남기는 거예요. 피는 뭐냐 하면 생명이기 때문에. 이 생명은 죽음과 상관없는 생명 이예요. 죽음과 단절된 생명! 죽고 난 뒤에 생명 없고  죽으면 없어지는 생명이 아니고 계속 죽음을 죽음으로 확실하게 그걸 돋보이게 만드는 생명 이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가죽옷을 입었을 때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었잖아요. 가죽옷을 입었다는 말은 그전에는 내가 뭘 착용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까? 무화과나무 치마를 입었었었다는 그것을 두고두고 가죽옷을 입을 때마다 그것이 생각나게 만들어요. 왜냐 하면 심판 이후에 입은 옷이 가죽옷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치수재서 가죽옷을 입혀준 게 아니고 인간이 하는 행세 다 하게 만들고 고 죄를 확 벗겨버리고 가죽옷을 입혔다는 이 말은 우리는 이 옷을 입었다는 자체가 나는 그 옷 안에서 영원히 죄인이라는 거예요.

주께서 입혀주지 않는 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영원한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 죄가 낳은 이 죽음은 생명이 찾아왔기 때문에 드러나는 죽음, 생명이 나타났기 때문에 나타나는 죄, 이것은 우리가 윤리적, 도덕적 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윤리적 도덕적 죄라는 것은 사실은 의로움 이예요. 왜냐 하면 내가 죄를 안다는 것 자체는 의가되기 때문에 내 죄를 내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내가 의롭고 착한 사람이냐를 보여주기 위한 재료가 돼요. 내가 나쁜 짓하고 나서 반성해 버리면 뭐가 됩니까? 내가 반성한다는 착함을 위해서 나쁜 짓이 동원됐으니까 나쁜 짓은 일종의 의로움을 돋보이기 위한 불쏘시개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의 재료로 남는 게 자꾸 ‘역시 나는 내 죄를 아는 착한 사람이야.’ 요게 바로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 이예요.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니고 그건 교회서 말하는 성화주의, 개혁주의 신학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죄예요. 무조건 죄예요. 이유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요. 무조건 죄예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조건 죄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내가 속해 있는 환경이 잘못됐기 때문에 무조건 죄예요.

그 죄를 좀 더 어렵고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바로 있음이 죄가 되는 거예요. 있음 자체가. 그러면 있음을 뭐로 바꿔야 됩니까?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어놓고 없음에서 주님께서 의를 집어넣어서 의인을 의인되게 하거든요. 있음에서 그냥 의인돼 버리면 우리는 있는 의인 돼 버려요. 의인을 소지한 사람이 된다니까요. 보통 한국 교회서 이렇게 주장하죠. 일단 당신이 있는데 당신 속에 죄가 들어있다. 이 죄를 씻어주면 당신은 그대로 있고 당신은 그때부터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뀐다. 그러면 뭐가 있는 겁니까? 계속 나는 남아있으면서 안의 내용물만 바뀌어서 죄인에서 의인 되는 거예요. 이건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입니다. 이런 건 없어요.

현재 내가 있다는 자체가 사실은 뭡니까? 없는 거예요. 이해 안 되시는 모양인데 아까 이스라엘 이야기 또 해야 될까요? 우리는 전부 애굽 사람 이예요. 애굽 사람뿐 이예요. 그런데 뭐가 왔을 때 이스라엘 됩니까? 애굽에 언약이 와서 언약은 어린양이죠. 어린양하고 우리하고 바꿔치기가 되는 거예요. 나는 혈육의 자식 이예요. 우리 아버지, 엄마의 자식인데 그런데 바꿔치기하면 누구의 자녀가 됩니까? 하나님이 소유가 된다니까요. 이게 출 애굽할 때 이미 결정했어요. ‘너희 맏아들을 내게 돌리라. 이제부터 니 집안의 아들이 아니고 니 집안과 하늘과 소통하기 위해서 하나의 전력용 노릇을 하는 맏아들이 되는 거예요. 맏아들이라 하는 것은 하늘의 정보를 우리 지상에 있는 이 가정에 골고루 축복주기 위해서 중간 중보자적인 역할을 하는 입장이 맏아들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맏아들 아닙니까? 하늘의 복을 땅에서 증거 하는 역할을 하거든요. 이 자리에 우리가 성도가 들어와 버릴 때 이 성도는 소유가 혈육에 속한 소유가 아니고 예수님께 속한, 하나님께 속한 소유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요 맏아들이 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없는 맏아들을 되게 했으니까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데 그냥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사실은 언약이 내 안에서 살아있죠. 주님이 살아 있잖아요. ‘나는 내 안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나는 항상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살아있고? 그리스도가 살아있죠. 그게 새로운 피조물로 있는 거예요. 백날 이야기해봐야 이게 상식으로 돌아서요. 고마운 것은 말씀을 볼 때, 복음을 들을 때에 다시 한 번 이게 회상되고 기억난다는 거예요. ’아! 또 나 있음부터 슬슬 했구나, 나 있고 예수 끌어당기고 이렇게 하는구나.‘ 성경은 그게 아닌데, 성경은 그게 아니거든요. 항상 나를 게워내죠. 항상 나를 없애버리고 내가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있게 만드는 있음만 있게 하는 거죠. 나의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값 주고 산, 주님의 것으로 내가 있게 만드는 거죠.

회사 직원들 앞에서 내가 사장이라 해도 주님의 것으로 사원들 앞에 있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주님의 것으로!! 이게 구약을 무시하면 안 된다니까요. 제가 아까 한 것을 다시 할게요. 7이라는 것은 뭘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창조죠. 창조라 하는 것은 무에서 있음인데 그냥 있음이 아니고 여기에 뭐를 집어넣어야 돼요? 언약이 있을 때 무에서 있음이라 말이죠. 원숭이, 코끼리, 이걸 누가 만들었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누가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이 만들은 거예요. 그런데 과학자는 거꾸로 하죠. 원숭이부터 추적해 나가서 창조주를 찾아가니까 창조가 나오는 게 아니고 DNA가 나오죠. DNA는 무엇의 경계선에 있느냐 하면 무기물과 유기물의 경계선에 있어요. 무기물은 뭐냐, 생명이 없는 것, DNA를 거치면 생명이 생물이 돼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선이 DNA이니까 과학자들이 현재 말하는 게 이게 창조조예요.

과학자들은 항상 뭐냐 하면 있음에서 있음이 나와요. 모든 동물이고 식물이고 하나의 세포에서 나왔다고 보는 거예요. 기적적으로 남아있는 하나의 세포에서. 아주 독한 환경 가운데서 살아남은 그야말로 산소도 없고 소금 끼 속에서 살아남은 플랑크톤 같은 것, 예를 들어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도 세포가 나왔다고 보는 겁니다. 무기물이 섞여 있는 죽 같은 것, 그걸 코러세러베이트라 해요. 유기물질 암모니아 이런 것들과 강한 벼락같은 전기를 줘버리면 암모니아가 생기고 암모니아 생기면 DNA 생기고 DNA 생기면 자기 스스로 자기를 복제해서 생명체가 발생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현재 학교에서 그렇게 배워요.

 출발이 뭐냐 하면 있음에서 출발한다고요. 그래서 내가 과학을 탓하는 것이 아니고, 문제는 신앙이라는 것도 나 있음에서 출발하면 신앙이 아니라니까요. 그냥 나다움에서 출발하면 나 됨됨이로 가버려요. ‘나는 전에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 덕분에 의인됐다.’ 의인된 나를 믿어요. 그러면 안 되죠. 어렵지 않습니다. 참 쉽습니다. 어렵지 않아요.^_^

 어떻게 어렵지 않느냐 하면 마태복음 6장에 ‘그날 염려는 그날에 족하니라.’는 말을 어디에 적용하느냐 하면 낮이 되고 밤이 되죠? 그러면 밤에는 잠을 자잖아요. 잠 잘 때 자기를 생각합니까? 그건 불면증 걸린 환자고요.ㅎ 잠 잘 때는 뭣까지 잊어버립니까? 놀랍게도 내가 잠잔다는 생각까지도 잊어버리죠. 평소에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면 얼마나 맘 편하겠습니까? 잠 잘 때만, 그것도 안식할 때만 온 심신이 쉴 때만 내가 여기 쉬고 있다는 것도 모르거든요. 쉰다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그 자체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게 되는 그 상황이 안식이죠. 그 안식의 때가 천국 아닙니까. 천국에서 쉬는 이유가 더 이상 나한테는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죠. 목회가 뭡니까? 바로 목회라 하는 것은 ‘자기한테 신경 안 써도 되는 분이 누구십니까’를 찾는 생이 목회예요. 제발 당신이 아프고 안 아프고 간에 거기 좀 신경 쓰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고통스럽게 가신 이유는 죽음 된 육체를 갖고 아픈 것은 당연하다는 거예요. 지금 발이 많이 아프시죠? 예수님이 죄인 된 육신의 몸이기 때문에 아파요. 십자가는 아프고 고통스럽고 할 수만 있으면 이 고통에서 면하게 해달라고, 육신의 몸 때문에 그렇잖아요. 하지만 한 순간입니다. 육신의 몸을 갖고 아픈 것은 우리가 현재 그 몸이 있는 이상 흙에 속한 몸, 육에 속한 몸, 쇠약한 몸, 후패한 몸이 있는 이상 이 후패가 가만 놔두지 않고 우리를 괴롭게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는 살기 힘들고 거기서 돈까지 벌어야 되니까 힘들고 정규직한테 절해야 하니까 그것도 기분 나쁘고 다 모든 게 기분 나빠요. 모든 게 짜증나요. 하루도 짜증 없는 날이 없어요. 그 짜증나는 일을 할 때마다 주님께서 ‘힘내라, 힘, 힘내라, 나도 거기를 갔다. 내가 긍휼히 여기고 너희 고통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자다.’

그런데 그 고통을 뭐로 승화시키느냐 하면 믿음의 증거로 승화시킵니다. 고통 안에 언약의 정보를 새겨버려요. 그게 노아한테는 방주가 되고 에녹한테는 안 죽는 것이고, 야곱한테는 어긋맞게 기도하는 것이고 아브라함한테는 세상에 지 자식을 죽이고 모세한테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포기하고 광야의 길에 나선 것이고 이사야한테는 톱을 키는 것이고 다윗왕한테는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것이고, 고통의 의미를 주는 겁니다.

복음 때문에 고난 받으면 성령이 너와 함께 있다. 기뻐하라. 너희 선지자들도 그렇게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느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것은 새로운 환란과 함께 새로운 기쁨을 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어렵지 않아요. 쉬운 건데 뭐냐 내 몸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두자로 ‘걸레’ㅎ 누더기, 세상에 시달리고 주님한테 시달리고 심지어 나에게도 시달리고 이래 시달리고 저래 시달리고 다 찢어졌어요. 죽죽 청바지 찢어지듯이 다 찢어지고 다 구멍이 났어요. 인생이란 돌아보면 뻥~ 뻥~ 뻥, 뻥 이건 완전히 총 맞은 것처럼 항상 총 맞은 상처가 있어요. 이렇게 상처 날 것을 이렇게 아파할 것을 왜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길을 왔던가, 하는 노래 있잖아요. 무정한 사람아, 하는.ㅎ

과학이라는 것이 납득이 잘 되는 이유는 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회자들이 노리는 것은 ‘있음 가지고 활용해라.’ ‘당신 몸 둥이 있잖아, 활용해라. 달란트 가지고 뭐 하노, 달란트 쓰지 않으면 악한 종 되어 지옥 갑니다.’ 하려면 똑바로 해야 하늘나라 복 받는, 상급 받는 보너스 받는 사람 되지. 그런 이야기가 먹혀들어가는 이유는 항상 기본이 뭡니까? 나는 ‘내가 여기 있다.’죠.

그래서 말씀은 너는 애굽 땅에서 없느니라. 그런데 어느 날 나에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은혜로 다가온 순간 ‘아~! 나는 주님의 것 되기 위해서 찾아오셨구나.’ 주님의 소유라는 의식을 갖는 순간 그 사람은 새로운 있음, 이건 내가 전에 예상한 있음이 아니고, 나 홀로 있음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음, 오히려 더 나아가서 ‘주님만 있음’ 나는 주님의 종으로 있음, 그런데 내 머리는 주님뿐이고 나는 그의 지체죠. 사실 말이 지체지만, 오징어의 뭡니까? 문어 오징어의 팔 다리죠. 머리 되시는 것은 예수님이 있음이고 예수님의 머리되심이 진짜 있음이고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누가 떼먹어도 그만인 그냥 달려있는 10개 달려있는 오징어 다리에 불과한 거예요. 구워 먹으면 맛있다니까요.ㅎ 왜 맛있느냐 하면 머리에서 내려오는 그 생명 때문에 맛있어요.^_^

그래서 오징어 다리에서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이야기할 때는 그냥 이야기하지 말고 반드시 머리를 거쳐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생명의 노선은 생명의 흐름을 따라야 되기 때문에 서로서로 이야기할 때는 ‘예수님 덕분에 내가 당신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이렇게 사람과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라는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이 전제된 생각에서 행동에 나서야 되겠죠. 만약에 그렇지 않고 예수님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제가 안 돼 버리면 내가 있음을 거쳐서 죽은 없음이 되고 없음은 새로 나와야 되는데 그냥 있음이 돼 버리면 ‘나는 이렇게 너한테 사과했는데 니는 나한테 뭐를 했느냐‘ 하고 있음이 죽음 없음을 안 거치고 그냥 있음으로 하기 때문에 타인은 나의 있음을 키우는 하나의 재료로 활용될 뿐 이예요. ‘내가 너를 만나면 너를 이용하기 위함이다.‘ 라는 그 소리밖에 안 돼요.

이런 이야기, 복음 안다 해놓고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어야 돼요. 다가올 때 자기 있음을 확대시켜서 위해서 왔기 때문에 ‘나는 있는 게 아니고 나 자체가 없군요.’ 이렇게 오게 되면 복음을 이해하는데 그게 아니고 있음을 더 키우기 위해서 더 완벽한 나됨을 위해서 오다 보니까 결국은 복음을 자기의 경계선 밖으로 획~ 던져 버려요. 십자가 안 들리는 곳으로, 말씀이 없는 곳으로, 그러니 결국은 피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남은 것은 돈과 동행할 수밖에 없죠.

그런 단절, 그런 단절을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 2절 봅시다.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애굽을 볼 때에, 여러분들이 출애굽기를 자세히 보면 나옵니다. 애굽에 재앙을 내릴 때에 애굽 사람들에게만 재앙을 내린 게 아닙니다. 애굽 신들에게 재앙을 내렸다고 성경에 보면 몇 번 나와요. 여러 번 나와요. 내가 애굽의 신들에게 벌을 내렸다. 이게 진짜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애굽 사람들에게 벌을 내렸다 하면 우리가 이해가 되는 게 실제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벌을 내리면 ‘아야, 아프다, 괴롭다.’ 이렇게 되는데 애굽의 신들에게 벌을 내려 봐야 신들이 말도 못하고 그냥 돌부처 이름 비슷한데 돌이 뭘 괴로워하겠습니까? 애굽 신들에게 벌을 내린다는 말이 당최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죠.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구약을 봐도 몰라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보면 보입니다. 어디 나오느냐 하면 16장 13절 봅시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사람들은 구약을 보면서 이 세상은 사람들만 사는 곳인 줄 알았어요. 하나님이 인간들만 닦달내고 인간들만 멱살 잡고 흔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다른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구약의 역사적 바탕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껏 이렇게 나타납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역사적 재앙들은 평소에 사람들이 의지해서 그걸 신으로 격상시켰던 대상들을 향하여 10가지 재앙이 떨어졌습니다. 강 같으면 강신, 하늘이면 하늘 신, 이처럼, 그런데 우리 보기에는 우리가 하늘의 신을 섬긴다는 말은 사실은 하늘에 있는 신이 있어 믿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뭔가 신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세상 질서를 이해하는데 그게 합리적이다 싶어서 그렇게 하나 붙인 개념이고 용어다 이렇게 생각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 그렇다는 거예요. 실제로 이 세상에 주관을 쥐고 있는 악한 영이 있다는 거예요. 너희들은 그냥 ‘아이고, 그냥 살지, 신이 있습니까? 제사 지내는 것도 우리 먹으려 하는 것이지, 친척들 모이려고 하는 것이지, 뭐 조상님 와서 먹고 그렇지는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ℒ(플러스, 알파) 잉여, 여분의 것, 인간들 사귐 그 이상의 것을 항상 인간의 주체는 그걸 표출하게 돼 있습니다. 그것을 라캉과 지젝은 그걸 밝혀내는 거예요. 인간이 ‘나는 나로서 전부다.’라고 하기에는 뭔가 더 있는 거예요. 차마 말은 못하는데 알 수 없는 두려움, 어떤 지식을 알면 그 지식을 아는 것으로 인하여 뭔가 안정감을 얻어야 되는데 지식을 아는 그 이상의 뭔가 +ℒ(플러스, 알파), 욕망 같으면 욕망으로 끝나야 되는데 욕망 말고 뭔가 아직도 남아있는 더 추가되는 어떤 야망과 욕망과 충동, 알 수 없어요. 그걸 ⓐ라고 표현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실체는 없는데 어떤 구멍처럼 역할을 해서 없는데 이걸 아무리 메우려고 해도 내 힘으로 메워지지 않고 항상 그 구멍은 구멍으로 남아있죠. 가슴이 뭔가 허전함을 느끼는 거예요. 맛있는 걸 먹고 맛있어야 되는데 ‘아니야, 뭔가 더 있을 거야.’

히딩크가 뭐라 했습니까? 4강하고 난 뒤에 ‘아직도 배고프다.’ 아직도 인간은 늘 배고파요. 인도의 부자가 2조원 되는 주택을 지어놓고 안 들어가서 살아요. 왜, 풍수지리설에 의해 재수 없다고 안 살거든요. 그러면 풍수지리설이 뭡니까? 풍수지리설이라는 것은 자기한테 남아있는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서 끌어당긴 하나의 이론이 되는 겁니다. 풍수지리라는 증거는 없어도 그런 것들이 있으면 구멍이 메워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걸 두 자로 종교라 하고 그러한 종교의 마음을 신앙심이라 합니다. 이게 바로 불교나 모든 종교의 원리예요. 항상 미지의 것을 남겨요. 다 포섭하는 것이 아니고 남보다 더 앞선 뭔가를 남겨놔요. 내가 살아가는 저 멀어져 가는 대상을 항상 만들어 놔요. 그래야 거기서 그 간격만큼 희망이 생기기 때문에.

부처가 다 되면 안 돼요. 부처되기 직전에 돌아서야 돼요. 왜, 마저 부처되면 그 다음부터는 절망이 와요. 희망이 없기 때문에 절망이 와요. 희망을 남겨두기 위해서 부처 앞에 굴복해서 항상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높여줄 때 내가 살아요. 부처가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살아요. 나보다 더 위대한 분 앞에서 내가 산다니까요.

그 인간의 심리와 인간의 정신구조를 현대의 정신 분석학자는 그렇게 밝혀낸 겁니다. 주체라 하는 것은 항상 ⓐ(유사 자아)에 의해서 조정 받는 입장이다. 이야기한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주체를 주저주저하면서도 내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그러한 주체다 이 말입니다.ㅎ

나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서 일하고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서 매일같이 백설 공주 못 된 계모처럼 거울보고 이렇게 하지만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것이 ‘내가 누구냐’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 하느냐 하면 ‘니가 피조물이다. 니는 애들이고 어른들 노는 데는 낄 수 없어.’ 어른들이 누굽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미 인간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게임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저 멀리 산 언덕너머에 있는 길을 몰라요. 그게 요한계시록에서 한꺼번에 다 나온다니까요. 그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구약 때는 어디서 보여준다?  애굽에서 보여줘요. 애굽에 10가지 재앙 내릴 때 제일 처음에 재앙 줄 때 바로 왕하고 모세가 만날 때 바로 왕이 유명한 말 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군데 나는 그를 모른다.’라고 했어요. 여호와가 누군지 모른다는 겁니다. 모른다. 그래야 돼요. 몰라야 돼요. 우리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는 분이예요. 여호와는 몰라요. 숨어있는 분이고 십자가 뒤에 숨어있기 때문에 십자가는 인간과 단절돼 있죠.

단절의 예가 성경에 무수히 나옵니다. 엘리야가 제단 쌓을 때 여기 불이 내려 떨어져야 되는 그곳에 뭘 부었습니까? 불 대신 물을 부었죠. 물에서 불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되죠. 이게 단절이라니까요. 이건 다음 주 낮에 설교할 건데 미리 땅겨서 해보면 ‘니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져라’해도 빠질 것이다. 따라서 니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실제로 니 행하는 행동이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면 믿음이 있다고 해줄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고 해줄게. 그게 안 되면 너는 믿음이 없다고 봐라 이  말 아닙니까? 결국 무슨 이야기예요? 인간이 자기가 믿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 일이다? 아니다? 하나님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이 하는 소리가 ‘예수 당신은 할 줄 아나? 예수님은 해내거든요. 결국은 예수님이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일이고 인간이 믿는 믿음은 지가 해낼 수 있는 것만 믿는 인간의 일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의 경계선 바깥의 일을 제시해버린다니까요.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뜨리면 믿음이 있는 걸로 해줄게.’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니가 믿음이 없는 거야. 따라서 니는 하나님과 상관없어. 니는 평생 동안 줄 창 니 일만 한 거야. 그런데 니가 하나님 일을 했어. 그것도 못하면서.’ 신앙 Battle에서 완전히 박살내 버리죠.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단절 이예요.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결국 어떤 인간도 십자가 질 수 없는 어떤 인간도 결국 하나님 일을 한다? 못한다? 못해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가 누구관대? 모르는 분이예요. 모르는 분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모르는 분이 우리를 구원한 거예요. 어떻게 하면서? 우리가 아는 세상을 뭐로 만들면서? 애굽으로 만들면서. 애굽으로 만들어줘야 여기에 뭐가 나옵니까? 10가지 재앙을 7대접을 가지고 마구잡이로 퍼붓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제일 처음에 이야기했죠? 구약에 있는 애굽의 언약이 이것이 새 언약되면 새 언약을 위해서 새 언약의 본뜻을 부가하기 위해서 세상은 졸지에 전체가 뭐로 된다? 애굽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애굽에서 구원받을 자는 있을 수 없고 다만 새 언약이 가미될 때만 그 사람은 없는데서 새롭게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그래서 7인, 7나팔, 7대접의 특징이 뭐냐 하면 거기는 주체가 없어요. ‘너는 이렇게 살아라.’라는 주체가 없습니다. 없고 그냥 당하면 당하는 대로 당해야 돼요. 그게 우리의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가 이 어려움을 피하려고 우리가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느냐,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이 어려움 피하려고 하면 우리가 어떤 대책이 있느냐,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주체적인 행위 같은 것은 이것은 무용지물 만드는 것이 폭격의 특징입니다.

이라크에 나토군이 폭격할 때 하수구에 숨어 있잖아요. 카다피가 총질했습니까? 그냥 숨어 있다가 얻어맞아서 죽었잖아요. 주님이 함께 하면 우리는 할 게 없습니다. 할 게 없다는 게 신자는 너무 기분 좋은 이야기고 불신자는 너무 기분 나쁜 이야기고 사장님이 복음 이야기하면 직원들은 인격 모독한다 하고, 할 게 없다니까요.

밤에 여러분이 잘 때에 뭘 할 게 있습니까? 밤에 잘 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그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심장도 간도, 간 중요합니다. 차 두리가 뭐라 했습니까? ‘간 때문이야.‘ 간이고 신장이고 뭐 콩팥이고 잘 때 다 놔버리세요. 오늘 염려는 오늘에 족하고 오늘과 내일은 어떤 관계다? 단절이다. 내일의 참새는 내일에 키우고 오늘 참새는 오늘 키우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은 오늘까지 키우는 분이 아버지 아닙니까? 내일의 들풀의 운명은 불쏘시개로 들어가는 거예요. 내일 들어갈 때 들어가더라도 오늘은 키워주듯이 주께서 불쌍히 여겨서 우리를 키워주신다는 것이 왜 그게 기분 나쁘다 합니까? 기분 좋은 일이죠.ㅎ 제발 힘을 놔란 말이죠. 니 몸이 내 몸이라 하는데 니가 끼면 되겠어요? 엄마가 잡채 하는데 3살 먹은 어린애가 잡채 한다고 달려들면 ’니는 놔라, 니는 뽀뽀뽀나 봐라.‘하고 저리가라 밀치듯이 주께서 주님의 증거 되기 위해서 우리를 지금도 키우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했잖아요.

참새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안 떨어지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예수님이 엄연히 살아계셔서 너희들을 친히 키운다. 키울 때 어떻게 키우는가, 언약 사람으로 키우는 거죠. 언약 사람이 뭐냐, 복잡하게 하지 말고 한 마디로 뭡니까? 세상은 애굽이다. 애굽이 무슨 의미입니까? 폭파 대상이다. 누가요? 천사가. 어떤 원리로? 창조한 원리로서.

창조의 원리가 무엇이냐, 바로 창조했던 원리 안에서, 원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피조물을 통해서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것을 만들어내는 작업, 내 백성 끄집어내는 그 원리 때문에 이 세상을 미련 두고 있는 사람은 떨어지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생명이 없다고 아는 사람은 기어이 건져내시는 하루하루가 우리의 매일 매일입니다. 매일같이 건져주시고 그럴 때 우리는 사람이 떡으로, 요새 말로 하면 사람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거예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뭐냐, 말씀 공부하면 돈을 주느냐, 이건 돈으로 사는 것이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돈 주는 것이 아니고 돈이 없더라도 산다는 의미가 돈 관계없이 말씀으로 이미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삶이죠. 예를 들면 우리는 뭐다? 안개라 할 때 그게 바로 말씀 안에 사는 거예요. 안개에서 안개 안 되려고 돈 없이 사는 게 아니고 돈이 있든 없던 우리는 뭐다? 안개라는 것을 깨달을 때 ‘하아! 내가 말씀 안에 헤엄치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주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 16장의 7대접은 주체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없는 주체를 만들어 내는데 6절을 봅시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이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한국말로 딱 한자가 나오죠? 중요한 것, 여러분 아시죠? 뭡니까? 피죠. 어떤 사람이 이 근호 목사는 피밖에 모른다고 하는데, 저한테는 영광스러운 칭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피로 만나요. 선지자는 뭐 내는 사람입니까? 피 내야 될 사람이고 신약의 성도는 뭘 내야 될 사람입니까? 피 내야 될 사람이고 십자가, 애굽, 소돔, 이런 것, 개념들을 보여줘야 될 역할을 본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주체가 없으니까 누가 합니까?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요대로 만들어 내요. 피 흘린 성도, 피 흘리는 선지자 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피는 죽음 이예요? 죽음이 아니에요? 피는 죽음이 아니죠. 피를 낸다. 이 피는 뭐를 냅니까? 생명이죠. 이게 레위기에 나오죠. 피 안에는 생명이 있다. 이건 설명을 해야 되는데 어렵기 때문에 창세기 9장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창세기 7장, 8장은 홍수 이야기인데 9장은 홍수 이후의 이야기죠. 홍수 이후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땅에서 피 흘리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라고 돼 있어요. 언제? 홍수 이후에. 그러면 다른 말로 하면 ’심판 이후‘라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심판 이후에 다시 원상복귀 되는 거예요? 안 된 거예요? 원상복귀 안 됐죠. 심판 이후에 심판의 의미가 하나의 핵심으로 잡고 있죠. 심판 이후에 심판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심판이 하나의 본부 되는 중심 제를 차지하시면서 이렇게 심판받아도 마땅한데 어떻게 한다? 이렇게 너희들을 살려둔다는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8장에 보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어릴 때부터 모든 생각하는 것이 악하기 때문에’ 그 뒤의 말을 우리보고 집어넣으라 하면 ‘항상 때린다.’ 이렇게 될 텐데. ‘악하기 때문에 물로서 너희를 심판하지 않겠다.’ ‘심판하지 않겠다.’ 앞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 이 말 아닙니까?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은 물로서 심판받아 마땅한 자였다. 이 말이거든요. 마지막이니까 정신 바짝 차리세요. 물로서 심판받아 마땅한데 그 마땅한 이유를 너희는 앞으로 이 물 심판 이후의 세계에서 왜 물로서 심판받아 마땅하냐를 보여주는 사건들로 드디어 채워지는 것이다. 그게 뭐냐 하면 ‘피 흘리지 마라.’ 생명은 피에 있나니, 그러면 이 생명은 누구 생명입니까? 바로 예수님 생명이죠. 너희들이 심판 이전에 노아 때 모독한 것은 결국 누구를 모독한 거예요? 이것이 이 세상이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유지되는 은혜를 준 세상을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이 십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모르고서 벌어진 일 때문에 너희들은 물로서 심판받아야 됐다.

이제 심판받아야 될 이유를 이제는 구체화 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이 심판의 한가운데 생명이 되는 피를 얕잡아보고 무시한 사람은 이제는 심판 이후라도 죽인다. 이겁니다. 그러면 이 죽음은 뭣과 대비되는 죽음입니까? 생명 되는 피와 피를 보여주기 위해서 쌍으로 들어가야 될 하나의 대상이 돼야 될 그 죽음이  되겠죠. 그 죽음이니까 이스라엘에서 죽인다는 것은 어떤 죽음입니까? 안식일에 나무하면 죽여 버리고, 우상 섬기면 죽여 버리고 박수와 무당도 죽여 버리고 이렇죠. 그게 뭡니까? 결국은 죽여도 그냥 죽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생명 덕분에 그동안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사형제물, 죽음의 처벌이 있을 때 그 처벌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우리 가운데 누가 계시다? 진짜 영원히 살려주시는 생명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공동체로서 그들은 이 세상에 등장해야 됩니다.

‘아이고, 공부 못하면 죽어라.’ 이게 아니고 ‘에이 세리는 죽어라.’ 이게 아니고 ‘창기니까 죽어라’가 이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모독하니까 죽어라.’ 이것이 오늘날 이 시대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미리 앞선 사람들이 선지자이고 지금 이 시대는 누가 그 역할을 해야 합니까? 성도가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핍박받는 것은 성도가 나빠서 핍박받는 것이 아니고 뭣 때문에? ‘이 세상은 애굽입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나는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습니다.’라는 이 복음 때문에 피를 흘렸다는 말은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피를 흘렸다는 말은 결국 핍박을 받아서 하나님의 생명 차원에서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우리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줘라 이 말입니다.

그럴 때 요한계시록은 다 이해가 됩니다. 아! 십자가 복음위주였구나. 그런데 이렇게 해석 안 하면 이렇게 돼요. ‘여러분, 이 땅에서 살기 힘들죠? 여기 첫째 대접, 둘째 대접 보니까 강물이 피가 되고 하니까 강물이 오염 됐죠? 깨끗한 물 마시세요. 청호 나이스로 깨끗한 물 마시세요.ㅎ 하늘의 별들이 우수수 떨어지죠. 마지막 때 인줄 알고 정신 바짝 차립시다.’ 이건 결국 뭡니까?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상황을 연장하기 위한 생명이죠. 그건 죽은 겁니다. 그건 예수님하고 관계없고 지 나됨을 유지하기 위한 악바리, 또는 마지막 몸부림, ‘나는 딸 시집도  안 보냈는데 난 살아야 돼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보니까 벌 내린다 하는데 교회 가서 충성해서 벌이 지연돼서 딸 시집도 보내고 난 뒤에 재림하든지 말든지, 구름타고 오든지, 난 그때 보면 된다.’ 자꾸 사람들이 통 밥, 통 밥이란 말 아시죠? 꼼수, 자꾸 남들은 죽든지 말든지 지만 살면 그게 행복 이예요. 왜, 나 나됨이니까, 그거 챙기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달달 외우고 난리를 죽이는 겁니다.ㅎ

그러니 요한계시록을 백날 해석하고 해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나는 나다.’ 그것만 남는데, 천상천하 유아독존, 불교신자이지 이게 뭡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성도의 피를 냈기 때문에 그 피에 대해서 보복으로 이 세상은 작살나야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생리는 성도를 반드시 핍박하도록 돼 있는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땅에서 미련을 두지 않는다면 당연시 할 텐데 만약에 우리가 이 땅에 미련을 둔다면 우리는 원망을 누구한테 합니까? ‘하나님, 성도인데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하면 나는 예수 못 믿어요.’ 자꾸 불평과 짜증을 내요. 물론 처음에 그렇습니다만 나중에 성령이 오게 되면 ‘아! 내가 상식으로 돌아섰구나. 복음으로 시작해서 상식으로 돌아섰구나.’

내가 끝내면서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있어도 밤 되면 없어집니다. 내가 내 생각 못하니까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요. 곤한 잠에 빠져요. 어떤 사람은 그것도 안 돼서 술 먹고 자는 사람도 있지만.ㅎ 어쨌든 간에 잠에 빠져버리면 자기가 본의 아니게 자기를 놔줘야 됩니다. 아침이 되면 주께서 살려주시는 ‘나’가 등장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몸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날마다 복음으로 ‘니는 니것이 아니고 오늘도 내 복음 증거 하기 위해서 오늘을 살게 하시는 삶이 저와 여러분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애굽이고  미련 떼야 되는데 우리는 내가 살아왔던 생활 습관 때문에 여기서 성공한 사람으로 남고 싶고 여기서 나의 나됨을 확대하고 싶고 남에게 기죽지 않고 싶고 남한테 으스대고 싶고 과시하고 싶은 그런 우리 자신밖에 모르는 저희들, 지금도 복음 주셔서 그 때문에 십자가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이제는 언약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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