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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3 18:31:30 조회 : 3523         
12월 2일 요한계시록 7강 (요한계시록 6장)듣기 보기 읽기 이름 : 관리자(IP:221.139.13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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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101202요한계시록-7강a-(이 근호 목사)

제 7강a

우리가 오늘 강의 해야 될 곳은 요한계시록 6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6장에 관한 내용을 보게 되면, 6장 전체가 인을 떼는 첫째 인, 둘째 인, 이렇게 인이란 도장을 뗀다고 볼 수 있는데, 그 하나하나 첫째 인 둘째 인을 뗄 때마다 일어나는 낯선 현상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을 하나 뗄 때마다 있다는 말은 그럼 떼기 전에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났다는 뜻이죠? 여기서 일곱 인을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개 이걸 떼기 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인, 둘째 인, 셋째 인을 떼 가지고 인을 떼버리면, 첫째 인을 떼버리면 그 자체가 첫째 인이 없게 되죠? 첫째 인을 떼서 어떤 현상,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 사건을 가지고 뭉쳐서 첫째 인으로 되돌릴 수 있는 그런 입장은 못 됩니다. 첫째 인이 있을 때는 아직 둘째 인, 셋째 인에 대해서는 아직 떼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나오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죠? 근데 둘째 인을 막상 떼버리면, 더 이상 첫째 인, 둘째 인은 역사 속에서 있을 수 없죠. 물을 엎어버리면 되 담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섯째 인을 떼면서 이 전체가 1,2,3,4,5,6,7 전체가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돼버리죠? 이렇게 물처럼 돼버리면 여기에 대해서 누가 저항한다든지, 반발한다든지,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 미쳤습니까? 왜 이리 난리를 치십니까?’ 라고 말릴 수 있는 일들은 아니죠? 우리 인간이 나서서 말릴 수 없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보통 세상일은 인간이 행사하고, 인간이 계획하고 프로젝트 꾸미고, 자기가 일을 수행해서 자기가 거기서 조그마한 결실을 맺는 것을 가지고 사는 보람을 느끼는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건의 특징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물을 엎지른 이상 인간들이 주워 담는다고 해서 이게 달라질 게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섯 째 인 자체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창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손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막 시작하면서 분명히 정리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창조의 원리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죠. 못 벗어나는데 왜 우리가 고민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상만사가 주의 뜻대로 되는데 왜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구태여 고민하거나 걱정하거나 염려하거나 특히 두려워한다는 이것은 뭔가 착각을 해도 보통 착각을 한 게 아니에요.

제가 얼마 전에 전화를 받았는데, 안산에 계신 분이 전화를 했어요. 지금 안산에 있는 교회에서 어떤 예언자가 나타나서 곧 전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어쩌면 좋겠느냐는 겁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것은 관심사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소유가 없어 질까봐 내 것이 깨어질까봐 겁을 내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전쟁이라는 이야기가 안 일어났으면, 오늘 본문과 관련돼 있습니다. 전쟁의 소리가 안 일어났으면, 자기가 마치 믿음이 좋은 척하고 있었는데, 전쟁이라는 것이 유발되니까 자기의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평소에 우리는 하나님께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도 관심 없고, 오직 우리는 ‘내 것 손대지 마라. 내 것 갈구면 안 돼. 내 것은 없으면 안 돼.’ 여기에 연연한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1,2,3,4,5,6,7을 통해서 일으킨 게 뭐냐 하면 전쟁과 같은,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일으킨 사건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께서 일방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잖아요. 사건을 일으켜 보니까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우리의 본색이 나오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실 때는 어떤 인간도 창조의 원리 밖으로 못 나가게 돼 있어요. 갇혀 있는 겁니다. 가마솥이죠. 여러분 가마솥 아십니까?(가마솥 누룽지) 가마솥 손잡이. 우리 집에 있었거든요. 얼마나 무거운지 몰라요. 어린애가 이걸 들다가 미끄러지면, 발 다치고 큰일 납니다. 이 가마솥 안에 버글버글 끓고 있는 거예요. 이 솥 안에 있는 것이 창조의 원리예요. 창조의 원리 속에 인간은 갇혀 있습니다. 자기가 여기서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것이 그것이 뚜껑을 열어 제낄 수 있는 힘이 되지 못돼요. 염려하든, 걱정하든, 두려워하든, 우리는 창조의 원리 속에 포함돼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1,2,3,4,5,6,7, 8도 아니고 9도 아니고 7로 끝나버렸어요. 1234567안에 들어있습니다.

여리고 성 돌때 몇 바퀴 돌았습니까? 일곱 바퀴 돌았죠? 여덟 번째 바퀴가 없어요. 첫 날에 한 바퀴 돌고, 두 번째도 한 바퀴 돌고 마지막 날에 일곱 번 돌았습니다. 일곱 번 돌았다는 것은 여덟 번째 바퀴, 아홉 번째 열 번째 바퀴는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여리고 성 무너지는 것도 창조의 원리 속에 포함돼 있고, 그걸 무너뜨리고 들어가야 될 너희들도 너희들이 원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원리 따라 때가 되매, 무너져야 되고 때가 되매 인수인계를 해야 되는 겁니다. 여리고 성을.


그것을 하나님께서 ‘7’이라는 숫자를 이야기 한 거예요. 그 여리고 성 돈 것을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리고 성이 이래 있다 말이죠. 하루에 한 바퀴 돌았는데, 하루, 이틀, 삼, 사 오,육 일곱 번 째 날에 몇 바퀴 돌았어요? 일곱 바퀴. 합치면 사실 열 세 바퀴인데, 그게 의미가 없다 말입니다. 여기 하나, 둘, 셋, 다섯, 여섯은 한 바퀴 돌았고 일곱 번 째 돌았다는 말은, 여기에 있는 시간, 123456이라는 시간은 아무리 그담에 일곱 번째 하나 여덟 번째 하나해도 이것은 별 의미가 없고, 마지막 일곱 번째가 앞에 있는 123456를 총괄해서 이것을 흡수시켜 버리면, 이 날짜라는 게, 6일이라는 시간이, 시간은 반드시 어떤 완성을 내다보고 6이라는 시간이 밑에 먼저 깔렸다는 겁니다. 7일째가 없으면 123456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달리 말하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현재를 잡아당기고 과거를 잡아당기는 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겁니다. 마지막 날에 땅기는 힘이 오늘날 우리를 살게 하는 거예요. 2010년 2월 2일 날은 2010년 2월 3일에서 땅기는 힘에 의해서 이미 존재하고, 3일은 4일로 존재하고 5일은 6일로 존재하는데, 이러다가 시간 다 보낼 수 없고, 마지막 모든 시간의 의미를 완성으로 종결시키는 그날이 있고, 그날에서 회수하듯이 잡아당기니까 그 전의 세월들, 12월 2일이 존재돼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12월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마지막 때가 되면, 전부 다 철거가 돼 버리죠. 이거 없어지죠. 다 없어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은 여기 한 바퀴 돌았던 이스라엘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6일을 거쳐 왔던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마지막 7일을 7이라는 숫자로 강조한 마지막 일곱 바퀴를 돌게 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여리고 성은 접수가 된 겁니다.

그렇다면 여리고 성에서 얻은 노획물, 보물은 누구 손에 가야 돼요? 하나님께로 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아간이란 사람은 그것을 자기가 쳐들어갔다고 누구 몫으로 조금 떼 냈습니까? 자기 몫으로 떼 내 가지고, 그담에 아이 성 칠 때 피 봤잖아요. 어딜 감히 손을 대?? 그럼 내 몫은요?? 우리는 ‘하나님, 제 몫은요? 우리는 무슨 용이냐 하면, ‘소비용’입니다. 우리 것을 점거(축적) 하는 용도가 아니라 소비를 해야 돼요.

제가 지난주일 중고등부 설교할 때 이런 설교 했어요. 중등부 설교하면 기뻐요. 매주를 못하니까... 애들이 나와야 하죠.ㅎ 가끔 나오는데 기쁜데... 전도서를 하는데 전도서 내용이 이겁니다. 짐승하고 사람하고 차이점 없다. 왜? 다 같이 흙으로 돌아가니까. 그 대목이었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렸죠. 남자, 여자 그리고, 남자 여자는 지금 애들 보기에는 남자 여자가 다른 것 같지만, ‘통통 한번 두드려봐라.’ 그러면 거기서 흙 소리 난다. 남자같이 생긴 흙이고, 여자 같이 생긴 흙인데, 나중에 우리가 다 소비되고 다 깨지면 둘 다 흙이라는 무덤으로 변해버린다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개 무덤이나 고양이 무덤이나 인간의 무덤, 다 같이 흙으로 돌아가는데 차이점이 뭐가 있는가? 차이점이 없는 거죠.

차이점 없음을 우리가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겁니다. 왜냐하면 개나 소는 그걸 모르잖아요. 자기가 흙인지 모르지만, 인간만큼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알아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흙 맞습니다. 죄 지어서 흙으로 돌아감이 마땅  합니다.’ 라고 유일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어요. 그런 점에서 인간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마귀하고 싸울 때 개하고 싸우라 하지 않았잖아요. 인간 우리를 통해서 뱀의 후손과 싸우라 했기 때문에,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언약 속에서 하나님의 이런 뜻 속에서 다 이뤄지는데 그 뜻을 가지고 창조 원리 속에 인간은 갇혀 있다 이래 볼 수 있습니다.

한번 적어보면, ‘인간은 창조원리 속에 갇혀 있다.’ 솥뚜껑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소비용이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것은 너무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이고 주제를 모르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흑 흑 흑 우는 게 맞아요. 흙이기 때문에, ㅎㅎ 이거는 개그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개그인데 한번 해봤습니다.ㅎ 운다는 자체가 아직도 창조원리 말고, 딴 원리가 자기의 시간 속에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234567, 7 그 위에는 없습니다. 7일 동안 창조했기 때문에 1234567말고는 없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생겨난 기간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정리해 보면, 123456은 7에서 당기게 돼 있어요. 1은 2를 위해서 2는 3을 위해서 쭉 당기다가 여기에 전부 다 모아지면 없어지는 겁니다. 123456이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인류의 역사라는 겁니다. 7 여기를 위한 123456이 되죠. 그럼 여기는 7,1~6에서 창조원리는 하나의 바퀴가 되어서 123456 바퀴가 되어서 굴러가는 거예요. 계속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굴리고 자꾸 굴러가는 거예요. 온 천지에 세상에는 계속 이 원리가 돌아가는 겁니다.

1234567, 1234567. 그러면 1234567을 돌려버리면 여기서 또 뭐냐 하면 1234567이 나올 텐데, 여기 7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1234567 안에서 또 7이 나와야 돼요. 7안에서 7이 나온다 말이죠. 또 7이 되면 7안에서 또 1234567이 나와요.
123456⑦→123456⑦→123456⑦→123456⑦→123456⑦→


그래서 7인, 7나팔, 7대접인데, 전부 다 7나팔과 7대접 연결 부위가 123456과 연결된 것이 아니고 바로 7과 연결돼 있죠? 그러면 7이 없으면 234가 자기가 2인지 3인지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모르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그냥 살아요. 그냥 시간 때우면서 살아요. 취직해서 그냥 돈 벌고 자식 키우고 늙으면 노인정에 놀다가 그냥 죽고,  누가 잡아당기는 사람도 없고 인생이 왜 사는 것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 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7이 없으면, 1도 없고 2도 없고, 3,4 이건 운동회 때 가끔 붙이는 거지만, 그런 거 모른다 말이죠. 7이 딱 등장하매 소급해서, ‘아하, 나는2구나~ 3이구나~ 4구나~ 이걸 비로소 아는 겁니다. 그런데 7만 되면, 123456 전체가 인류의 행함의 역사로 바뀌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은 7 때문에 소모용으로 이게(123456)있어줘야 7하나 성립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7로 완성하기 위해서 결국은 우리를 이용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을 이용한 겁니다. 아이, 하나님 못 됐죠? 우리가 힘들고 울고 웃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완성의 의미를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사방놀이가 되는 겁니다. 사방놀이 알죠? 하나님께서 사방놀이처럼 던져놓고 마지막에 회수해 가면서 모든 것이 창조원리 따라 빈틈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7안에서 모든 게 된다면, 이 7이 갖고 있는 내용이 뭐냐 하는 데서 세밀하게 되면, 7에서 또 123456이 나타나요. 그러면 7을 세밀화 시키고 이걸 구체화 시키고 나오다가 또 7되면 또 7나와요. 그러면 이것이 또 구체화 되고, 점차, 점차 7에서 7로 진행되면서 뭐가 점차 나오느냐 하면, ‘천국’이라는 윤곽이, 새 예루살렘 윤곽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동시에 뭐가 소멸되느냐 하면, 이 좋던 것, 이 아름다운 세상, 이 돈 많은 세상, 금은보화가 가득한 이 세상은 점점 더 뭐로 끝납니까?  점점 더 쓰잘 데 없는 쓰레기로 변하는 그런 흔적을 보여주죠.

마지막 천국을 위해서 쭉 지나가면서 여기 처음에는 ‘ 이 세상없이는 못 삽니다. 우리는 이거 없이는 굶어 죽어요.’ 하던 것이 점점 더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오게 되면, ‘아하 천국이 있는데...’ 가볍게 이 세상을 포기해야 된다는 그런 식으로 인도 받게 되죠.

자, 이건 서론적으로 했고, 본격적으로 어려운 거 해 봅시다. 하나 정리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창조원리 안에 갇혀 있다. 갇혀 있기 때문에 창조원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의 장치로서 여러 가지로 등장했어야 했다. 이렇게 이야기 됩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7인을 떼는데,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요한이 울었잖아요? 7인을 뗄 사람이 없어서 울었을 때, 이 뗀다는 게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안에 어떤 인물이 있는데, 여기에 양파 껍질이 있다 합시다. 양파 껍질이 있는데 양파 껍질을 쪼개보면 제일 겉에부터 1,2,3,4,5,6, 요거 안에 7, 양파 껍질을 이렇게 벗겨보면 사실은 아무것도 안 나오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껍질을 하나 탁 벗겨보면 점점 더 어디에 가까워지냐 하면, 이 역사의 주인공 되시는 어린양에게 접근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요한계시록 어떤 주석, 어떤 책을 봐도 양파 껍질 안의 예수님을 보여주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으로 봐요. 7인, 7나팔, 7대접, 그래서 무슨 역사? 구약의 여기는 로마의 네로황제가 어떻고, 어떻고  이래 이야기 한다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 돼 버리면 우리가 만약에 이 시대(앞부분) 와 버리면 이 시대는 모르게 되죠. 왜? 이미 지나갔으니까. 이미 우리하고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앞으로 남은 시대만의 프로그램만 잘 눈치 채어 바짝  고 때만 잘 견디면, 천국에 쏙 들어간다는 고런 식으로 제공한 겁니다.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할 때 이렇게 시간적 개념으로 보는 것은, 이것은 인간 몸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 그래요. 인간은 말할 때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자기의 주체를 확인하는 습성이 있는데 인간이 원래 그래요. 내가 나이 몇 살이며, 나는 어느 동네 산다. 그 자기의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자기의 주체를 다듬어 나가는 식인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시간 개념이 있으니까, 인간의 시간 개념이 뭐냐 하면,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거든요. 흘러가는 인간에다가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니까,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아하 하나님이 내가 납득이 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계시를 주셨구나. 그러면 내가 잘 하나님의 계시를  시간속의 배열( 중국사람 마작하듯이)로 딱 순서대로 1234 포카 하듯이 스트레이트 숫자놀이 하듯이 딱 맞춰 가지고 딱 맞추면 ’아하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드디어 소화했으니까, 나는 피할 건 피 하고, 수용할 건 수용하면, 구원되겠다.‘라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게 교회 2000년 역사의 요한계시록 주석이 다 그래요. 다 엉터립니다...ㅠ 전부다 엉터리예요.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 구원용이 아닙니다. 사람이 구원 받고자 할 때는, 반드시 왜 내가 갇혀 있나 이유를 알아야 돼요. 내가 어디에 갇혀 있는가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가서 왜 우리는 갇히게 되었는가? 죄에 갇히고, 율법에 갇히고, 마귀에게 갇히고, 죽음에 갇혔는가? 저주에 갇혔는가? 왜 갇혔는가. 이유는 모르면서 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자체가 저주스럽고 고통스러운가? 왜 산다는 것 자체가 이 이렇게 허망하고 어려우냐 말이죠. 근본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근본을 모르게 되면, 구원받는 방식도 제각각 지 맘대로 예요.

무엇 때문에 갇혀 있는가를 안다면, 진짜 아신다면, 여러분들은 ‘나 구원 포기할래,’ 이 말이 나와야 됩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한다고 구원될 수 없는 지경으로 갇혀 있구나. 라는 것을 알고 포기하세요. 자기 구원을 포기해야 됩니다. 자기 구원을 포기해 줘야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게 의미가 나타나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고생이 많았죠? 그들은 뭘 몰랐느냐 하면, 왜 우리가 고생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왜 고생하는지는 모르고 몸은 되게 고단하고 힘들고 꼭 우리들 같아요. 현재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같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살기 힘든지, 몸은 왜 이렇게 피곤한지 이유도 모르고 어쨌든 짜증은 나고, 왕짜증!!, 짜증  나고 이유는 모르고 갇혔는데 나오지도 못하고 , 그것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경험했던 겁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왜 갇혔는지 이유도 모르고 다만, 이 고통에서 면제만 해 달라고 그렇게 닦달내고 안달을 내는 겁니다. 모세 아론 붙들고 그렇게 요구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냥 빼주지 않았습니다. 10가지 재앙을 내렸죠. 그 10가지 재앙 중에서 1~3번째 재앙은 이스라엘백성과 애굽 인들이 같이 얻어맞아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6인이고, 같이 얻어맞아야 됩니다. ‘니도 구원 없어.’ 같이 얻어맞는 겁니다.

얻어맞으면서 그 가운데서 4~10번째 재앙까지는 고센 땅에 사는 히브리인들과 애굽 땅이 하나님께서 구분해서 애굽 인들은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재앙을 안 내렸습니다. 이미 하나님 쪽에서 구분 했습니다. 뭔가 조짐이 있습니다. 니들만 특별 대우한다는 조짐이 있어요. 그것이 뭔가 하면 7나팔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어린양 딱  고 난 뒤에 저쪽의 장자들을 다 죽여  버리죠. 애굽 나라 자체를 통곡으로 몰아넣습니다. 그게 7대접입니다.

여기서 제가 이렇게 연결시키니까 여러분 뭐 떠오른 거 없습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이 양파 껍질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데 어린양을 가로막는 썩어빠진 양파 껍질을 하나, 하나 뜯어낼 때, 점점 더 어린양의 윤곽이 드러나죠? 뜯어내야 돼요. 뜯어내는데 뜯어내는 힘은 바깥에서 뜯어내는 게 아니에요. 어린양께서 발길로 차는 거예요. 발길로 차면 바깥 껍질부터 떨어져 나가죠. 발길로 차는 것이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꺼져, 저리가. 인간들은 저리가.’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밀쳐내시는 주님이란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냥 사랑 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오라고 하는 것만 생각하지, ‘저리가. 나 니하고 안 놀아. 너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 해. 저리라. 니가 언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어디 있느냐? 말이죠.  솔직히 말해서 우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생각 안하잖아요. 평소에 우리 24시간 누구 영광 생각합니까? 내 영광. 하나님의 영광 돌릴 마음이 아예 없는 거예요.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싫어하면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는 이거 구원해 달라고 닦달하고 대들고 말이죠.

하나님께서 추방시키는 하나님! 밀어내시는 하나님! 떨쳐내시는 하나님! ‘저리가. 꺼져. 너 싫어. 싫어.’라고 떼어내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아셔야 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정말 이걸.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왜 몰라요?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런 걸 이야기 안 하죠. 그저 사람 꼬실려고 신학을 해놓으니까 ‘어떻게 일하면 구원 받습니다.’ 이거만 있지, 주께서는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아예 눈만 뜨면 하나님의 영광은 생각하기도 싫고, 다 싫고 고만 하나님 영광은 다 싫고 바쁜데 하나님 영광이 무슨 영광입니까?

하나님 영광 이라는 마음먹는 것 자체가 싫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질대로 ‘나가잇~~ ’발로 차버립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발길질 당해서 떨어져나간 썩어빠진 이 껍질 속에서 주께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의 내용입니다. 떨쳐 내놓고 나자빠져가지고, ‘나는 끝났어. 나는 천국이고 뭐고 욕심이었어. 구원도 욕심이었어.’ 떨어져 나갔을 때, 그때 주께서 그 쓰레기 같은 더러운 오물 같은 곳에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냅니다.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사람의 겸손이나 자기 부인이나 자기 부정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 땅을 사시면서 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 흘리는 자리로 자기 자리로 만들은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구원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자기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들, 쉽게 말하면 단추라든지, 후크라든지 그걸 줍는 거예요. ‘요건 내거.’ 그러면 누가 누구 걸 줍는다? 주님이 자기 것을 줍는 방식으로만 구원이 됩니다. 그럴 때 구원 받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았지? 뭘 잘해서 구원 받았지?’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자기 내부를 쪼개봐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의 것이, 어떤 것이 주님의 것인가를 봐야 되죠.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피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기 피를 회수하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고린도전서 2장 16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담에요.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아~~~~~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얼마나 건방진 말입니까? 이거는 말도 안 되는 건방진 말이죠? 예? 그런데 이 마음이 고 앞에 있는 고린도전서 10~11절 보니까 이것은 사람이 건방져서 마음이 생긴 것도 아니요. 사람이 신학공부해서 된 것도 아니고, 성령이 들어오면 거지가 됐든,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든, 중학교 중퇴를 했든, 직업이 백수든 상관없이 그 사람은 누구의 마음을 안다고요?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이런 뜻 이예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우리 예수님이 뭔 뜻인지 우리 알아요.‘ 그 뜻이에요. 이게 뭐 때문에, 공부를 해서 그렇습니까? 성령이 오니까...  성경 공부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오니까, 이런 건방진 주제넘은 말도 안 되게 건방진, 총회장 앞에서 이 말하면 뺨 맞을 일이에요.ㅎ '총회장님, 저요 주님 마음 압니다.’ 버쩍 하고 싸대기 올라와요. ‘니가 어디 신학교 나왔어?’ ‘아니요, 성령 받으니까 압니다..’

그 마음을 세 자로 줄이면 뭐가 돼요? ‘십자가’ 십자가는 숨어있는데 그 숨어있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접근이 된다, 안 된다? 접근은커녕 십자가를 어리석다고 욕하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서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저쪽에서 납득이 되면 수상해요. 내가 말 잘못 했어요.ㅎ 분명히 십자가는 온갖 지식과 온갖 철학과 학문을 다 동원해도, 동양철학, 서양철학 다해도 십자가를 알면 안돼요. 그거 동원해도 그것가지고 덤벼든 사람이 납득이 된다 하면, 말씀 소통해서 문제가 있고 잘못 전한 거예요.

십자가를 전하고 나면 몽둥이로 맞아야 해요.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라는 소리를 들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밀어내는 것이거든요. ‘꺼져라.’ 이 말이죠. 우리가 주님 앞에 꺼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가 항상 살아있는 123456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등장한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발길질 당해서 ‘꺼져.’ 라고 해서 진흙탕에 나자빠져서 눕는 장소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으신 십자가가 흥건히 고여 있는 십자가 우물이에요. 십자가 바로 밑에, 주님께서 발길질 참 잘하시는데, 딱 치면 정확하게 ‘십자가’가 떨어집니다. 위에서 보면 십자가 죽어 마땅한,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인류를 대표해서 저주받은 거잖아요. 우리는 저주를 제일 싫어한다고요. 왜냐 하면, 저주 받은 자는 저주 받아야 되는 것이 창조의 원리기 때문에 저주 받은 자가 구원 받겠다고 나온다는 것이 깝죽대는 거죠. 자기 분수도 모르고. 저주 받은 자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제대로 저주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저주 받았는데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은 아직 저주를 덜 받았어요. 아직도 자기 분수를 몰라서 그래요. 진짜 저주 받으면, 욥처럼 입을 막고, ‘죽이든 밥이든 맘대로 하세요.’ 아예 입을 막고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욥은 그 전에 ‘내가 죄가 없는데 고난 받게 하십니까?’ 까불다가 막상 주님 나타나보니까, 입을 막고 고개 푹 숙이고 그랬었죠. 이사야와 같은 경우에도 뭐라 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제대로 성령 받은 겁니다. 성령 받으니까 아무소리 못하고, ‘예, 제가 바로 저주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럴 필요도 없으신 분이 바로 자기 백성 건지기 위해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 저주의 자리가 이게 우리 본래의 자리에요. 이사야에 보면 그런 말씀 나오죠. ‘너희들의 근본을 알아가라. 너희들의 근본을 찾아가라.’ 근본을 찾아가게 되면, 이사야 2장에 보면, ‘너희들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말라(사2:22).’ 왜냐 하면 의지하겠다는 것은 뭔가 기둥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자기 구원의 희망을 걸고 있는 거예요. 뭔가 믿겠다는 것, 의지하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아무것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죠. 의지하지 말고 축~ 늘어지라 말이죠. 그런데 축 늘어지는 그 자리가 주님께서 이 땅을 사실 때 마지막 123456 마지막 7을 완성할 때, 7과 7로 연결될 때, 7,7,7로 연결 될 때, 인간의 손을 못 대는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죠. 이 사건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이 어떻게 낮아져서 어떻게 높아졌는가를 보여주는 사건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어떻게 죄인의 모습으로 와서 ‘주’가 되셨는지를 그 과정.

그렇다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구원 받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말리다 보니까 덩달아 구원이 되는 거예요. 주인공은 예수님인데 그냥 거기에 보조 연기자로 들어가다 보니까 우리는 하나의 드라마에 이미 합류된 셈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끌고 가는데 주님이 끌려갈 때 뒤에 딸랑 딸랑 깡통 같은 것이 매달려 가는 그 깡통들이 우리들인 겁니다. 이게 바로 모세 때문에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모세가 지팡이 가지고 홍해 물을 안 가르면 그들은 몰살됐습니다. 따라서 그 말은 뭐냐 하면, 모세 말만 들어야 돼요. 이것은 뭐냐 하면 절대로 자기를 의지해선 안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뭐를 너가 의지할 때는 항상 실패로 끝나는 환경들을 하나님께서는 123456 이란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옆에서 막 일으키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럴 때 놀래서 누구만 의지 합니까? 주님만 의지하게 하는 거예요. 환난과 핍박과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 이런 것들이 예수 믿고 난 뒤에 계속해서 생기는 이유가 뭡니까? 보니까 전체 적을 계속 생겨나고 있어요. 이런 것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주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힘으로 의지했던 것이 전부 다 완전히 구멍이 나야죠. 내가 의지했던 모든 것이 실망스러운 결과로 다 드러나야 돼요. 환난과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통장에 돈 한 푼도 없고 몸은 되게 아프고 죽고 싶어도 못 죽고, 하여튼 참기름 바른 것처럼 다 미끄러져 내리고, 의지하는 것마다 다, ‘저 사람은 도와주겠지’ 하면 난 몰라 하고 가버리고, 붙들면 ‘손 놔’ 하고 가버리고, 항상 환난과 핍박과 곤고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항상 들끓게 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 의지할 수 있는 선을 가위로 다 끊어버려요.

 그 끊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의 버려져야 될 양파 껍질인줄 알고 우리가 나가떨어져 나갔을 때, 비로소 점선으로 보이던 이 예수님이 나로 하여금 발길로 차서 내 본래의 자리인 ‘십자가의 자리,’ 주께서 내 대신 함께 죽으셨던 그 자리가 원래 우리가 늘 기거해야 할 그 자리인 것을 123456은 7, 십자가 자리를 위하여 123456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깨닫게 한다 이 말이죠.

말은 이래하지만 우리들이, 성경 자체가 그걸 이야기 해줘요. 성경을 우리가 지킬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키는 용도가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덮치는 용도로 성경이 있습니다. 1인, 2인,3,4,5,6,  사건들은 우리가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면 하고 고대하면 안돼요. 고대하면 주께서 피해 버립니다. 사람이 어떤 사건을 고대하게 되면,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내 힘으로도 그런 정도 사건은 내 힘으로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고 사전에 대비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주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도를 내가 챙긴 내 방법을 내가 의지하기 때문에, 거기서는 양파 껍질이 하나 더 갖다 붙이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두 번 다시 그런 상황을 일어나게 하지 않죠.

늘 나가떨어져야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됐는지, 오긴지, 아니면 객긴지 모르지만, 우리는 7번 떨어지면 8번째 일어나요. 얼마나 못 된지 몰라요. 일어나면서 꼭 한 소리 하죠. ‘주님께서 이렇게 고난 주었지만 제가 믿음이 좋아서 일어났다고, 꼭 이렇게 자기가 가치 있다고 우기죠. 그걸 간증으로 듣고 싶어 하고, 또 간증의 주인공이 되어서 강단에 서가지고 많은 사람 감동, 감화시키는 존재의 가치를 한번 맛보려고 시도하죠. 사기꾼입니다.

진도 한번 나가봅시다. 7인, 7나팔, 7대접이 있는데, 7인은 신자고 불신자고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다 당해야 돼요. 이 세상에 살면서 ‘왜 신자인데, 성도인데 어려움을 당합니까?’ 라고 따지면 안돼요. ‘니는 죄인이야. 마땅히 받아야지,’ 하고 당하는 거죠. 이것이 떨어져 나갈 때, 전체적으로 양파 껍질 전체를 딱딱 떼게 되는데, 이 떼는 힘은 양파 껍질 속에 들어있는 어린양에서 떼게 돼 있어요. 뗄 때 떨어진 것, 하나, 둘, 셋, 넷, 다섯,..일곱 번째 떨어지는 고 양파 껍질만 떨어지면, 그때부터 무슨 일이 있냐 하면, 바로 구약 적 이스라엘 말고 신약 적 이스라엘이 나와요. 신약의 하나님의 택한 받은 백성이 나오는데 그 과정이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옵니다. 7장에 보면 유다지파 중에 일만 이천,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 총 합해서 십사만 사천 나오죠.

그러면 십사만 사천이라 하는 것은, 총 합이 십사만 사천이고, 십사만 사천이 되기 위해서는 12개가 몇 번 해야 돼요? 12개가 12번 해야 되겠죠? 12개가 12번 중첩이 된다는 말은, 처음에 12로 묘사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성립할 때 12지파로 성립한 겁니다. 12지파로 성립했던 이것이 드디어 예수님께서 마지막 정답을 공개해 보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신약의 진짜 이스라엘을 보여주는 모형으로서 보여준 거예요.

7인을 떼기 전에 마지막으로 7인 떼기 전에 그 사이에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서 그동안 내가 이 땅에서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부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우리가 이스라엘인데 왜 우리에게 어려움을 줍니까?’ 하는데, 원래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저주 받은 자리에서 주님이 만들어 나가지 저 이스라엘이 손들고,  아브라함이 손들고, ‘너 나와’ 하고 우리가 요청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언약 따라 12지파가 하나님의 언약 따라 그대로 언약이 적용되면, 어린양에서 적용되면 그대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힘으로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다.’ 라고 자기가 노력해서 이스라엘이 되려고 애쓴 반면에, 신약에서는 뭐냐, 어린양께서 이스라엘 되게 하면, 어느 누구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반드시 돼야 되요. 그게 바로 이마에다 도장을 찍어서 ‘니는 내꺼야.’ 라고 도장을 찍어주는데, 그 힘들이 바로 나중에 나오는데 어린양에서 나와요. 6장 16절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그담에 무엇의 진노에서 입니까?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이거는 왕이든 종이든 모든 사람에게 다 진노가 주어지는 겁니다. 여기서는 마땅히 성도니 성도가 아니니 구별이 없어요. 진노가 주어지고 난 뒤에 다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그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그 쓰레기 속에서 주님의 인 맞은 사람이 12에서 144000이 나오게 돼 있다 말이죠.

그렇게 되니까 이는 주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구약의 모든 노선을 이탈하지 않고, 구약의 노선 따라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담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옛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구약이 모든 사람이 저주 받아 마땅한데 애굽 나라에서 저주 받은 그 사람들이 그 심판 속에서 누가 생깁니까? 이스라엘이 생기고, 이스라엘이 실제로 나중에 멸망하죠. 멸망하고 난 뒤에 어린양에 의해서 새 피로 신약의 성도가 등장하죠. 이 과정을 요한계시록 전체에 그대로 다 7인, 7나팔, 7대접으로 중첩된 7의 노선대로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다 설명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보면, 지금까지의 주석들은 하나의 시간을 선으로 봤죠? 요한계시록의 7인, 7나팔, 7대접 을 하나의 선으로 봤는데, 사실을 이게 아니고요. 여기 전체 있고 거기서 뽑혀 나오고, 거기서 또 뽑혀 나와서 요 중심이 바로 어린양이신, 예수님 중심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거예요. 접근해 들어가는데 우리가 접근해 들어가는 게 아니고, 어린양에서 나오는 그 능력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쭉 그림을 만들어 나간다는 거예요. 점점 만들어 가게 되면, 7인, 7나팔, 7대접을 통해서 어린양이 쭉 뽑아져 나가는데, 뽑아져 나갈 때 인간의 힘으로서 이런 것을 언약에 접근을 못하죠. 왜 못하느냐 하면, 뽑아져 나갈 때마다 강하게 그동안 인간들을 주님을 믿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막아낸 힘이 있어요. 그 힘인 악마가 최후에는 악마가 정체를 드러내는데 초반에는 악마가 정체를 안 드러내요.


악의 어두움, 악의 세력이 강력하게 여기 버팁니다. 버티기 때문에 어린양께서 7인, 7나팔, 7대접을 뽑아 낼 때 뭐가 같이 등장하냐 하면, 그동안 인간 배후에서 숨어 있다가 인간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그 악한 세력들, 또 덩달아서 같이 노출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새롭게 들리지만 새로운 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함과 병행해서 그 주변의 이방민족들이 왜 여호와에 대해서 그렇게 저주 받아 마땅한가를 그 심판성도 같이 병행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게 되면, 병행해서 이스라엘만 구원하고 다른 쪽은 망해야 우리의 예상이 맞는데, 그게 아니고 누가 망합니까? 저쪽도 망하고 이스라엘도 망하는 거예요. 합치면 누가 망해요? 온 인류가 다 같이 망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누구 혼자 안 망해요? 어린양 되신 예수님만 안 망하죠. 그게 정답 이예요. 그걸 요한계시록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만이 주가 되시고 다른 인간들은 주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주께 도전하는 악한 세력 자들에 불과한가. 그 이야기하고, 그 죄인 가운데서도 어떻게 해서 구원 되는 자가 희한하게 나오느냐 한 거예요.

제 질문이 이상하죠?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가 아니고 어떻게 구원이 될 수 있느냐 이 말이죠. 이게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다시 할까요? 눈만 뜨면 하나님 영광을 안 좋아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 뭘 근거로 해서 구원이 됩니까? 뭘 잘했다고?? 우리는 그저 자기가 가진 것만 생각하는데...이거 다칠까 싶어서 노상 조마조마 하면서, ‘이거 다친 거 내건데, 이것만큼은 못 내놓습니다. 더 주세요.’ 이런 것만 생각하는 사람인데, 자기 주체를 세우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인간이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가요? 불가능한 일이죠. 가능치 않은 일입니다. 이렇게 이 불가능한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어떤 식으로 가능하게 되는가?

십분 쉬고 다음시간에 봅시다.


하나교회101202요한계시록-7강b-(이 근호 목사)

제 7강b

지난 시간에 한 것 요약해 보면, 하나님께서 7인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내린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릴 수가 없다 했습니다. 그리고 사건 하나하나가 우리 뜻대로 일으키는 사건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미 작정하시고, 아주 마음에 작심을 하시고 내리시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건을 당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는 원래 창조 안에, 창조 가마솥 안에 우리는 갇혀 있는 거예요. 1234567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갇혀 있으면서 왜 우리는 만들어졌으며, 뭣 때문에 존재하는가를 새삼 알아야 될 입장이지, 솥뚜껑 열고 알아서 ‘아이고 덮다. 여기서 탈출해야 되겠다. 이 땅에 못살겠다.’ 구더기처럼 기어 나와서 솥뚜껑도 없는 나만의 세계에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고 죄 짓고 난 뒤에, 우리 눈에는 솥뚜껑이 없어요. 창조원리가 없어요. ‘하나님이 어디 있어? 내가 하나님이지.’ 라는 의식으로 피어오르지, 뭐가 뭘 우리를 가둬 놓는단 말이냐? 어디 갇혀 있단 말이냐? 건방지게..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어. 하나님이 어디 있어? 있으면 보여줘?‘ 이런 식으로 나서게 된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그게 뭐냐 하면, 그게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공간 때문에, 그렇게 큰 소리 친다는 겁니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살아있으니까 큰소리치는 거예요. 땅이 있으니까 밭 갈고 농사짓고 곡식 먹어가면서 ‘하나님이 어딨어? 내가 열심히 애써서 얻은 거지.’라고 하고, 시간의 느낌이 있으니까 과거에 애썼으니까 그 댓가를 내가 받는 거야. 내가 애썼으니까 이만큼 살아도 나는 당당해.‘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개념이 있어서 그렇다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칠 수밖에 없죠. 치는 방법이 뭐냐 하면, 7인을 가지고 치는 거예요. 인을 하나 뗄 때마다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 사건은 우리가 의지할만한 것을 다 조져요. 꼭 연평도에 폭탄 터지는 것 같아요. 연평도에 폭탄 터지니까 연평도 주민 어디 가 있습니까? 뭐 찜질방에 가 있죠. 다음에는 경기도랍니다. 대구까지 오려면 아직 멀었어요.ㅎ

사람은 자기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살 수 있는 여건과 환경과 자연환경과 시간만 주어진다면, 하나님 믿는 걸 대체해서 자신의 행함을 믿게 돼 있어요. 문제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어디서 찾습니까? 누가 하는 말대로 ‘소는 누가 키우는데?’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어디서 얻어요? 근데 하나님은 뭐냐 하면, 창조원리라 하는 것은 이미 완료돼 있어요. 사람들이 ‘하나님! 하나님!’ 찾는다고 창조가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완성이 돼 버렸어요. 성부와 누구와 관계 때문에? 성자께서 십자가 지실 때 다 이루었습니다.

다 이루었는데 이것이 그동안 인간들이 의지하고 좋아라하는 자연환경 속에 이게 보쌈 당해가지고 숨어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뭐냐 하면 이 껍데기 안에 살면서, 안에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을 이룬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것은 7대접할 때 마지막에 나오고) 예수님이 어떻게 되든 모르고, 그냥 자기 좋은 환경, 텃밭 가꾸면서, ‘아이 이만하면 90까지 살았으면 많이 살았어.’ 라고 있다 말이죠. 여기에 초를 치시는 거예요.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살 수 있다는, 자기가 사는 그것이 자기에게 영광이 되니까. 다시 한 번 적어보면, 생존=나의 영광, 이 공식 이외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교회 나오는 것도 살기 위해서 나왔고,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교회 나왔고, 다 그것이 내 영광되기 위해서 나왔고, 우리는 자신의 영광과 자기의 ‘생존=영광’ 이 공식 외에 다른 공식은 모릅니다. 왜 사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우린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어도 그런 거 몰라도 잘들만 살고, 예수님 몰라도 박 지성 공만 잘 차고, 박 태환은 수영만 잘하고, 여기 참석 안 해도 아무 필요도 모르고, 바깥에서 술 잘 드시고 계시고 외상으로 긋고 카드 쓰시고 계세요. 요 위에 여기 지하 말고...

그것이 자연 환경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오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목적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목적이 뭐냐, 그 목적까지 이끄는데 있어서는 123456 이라는 기간을 통해서  그동안 인간들이 의지하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삭제가 되고, 제거가 돼야 되요. 다~~~ 제거가 되면서 사람들은 분통을 누구한테 터뜨리는가?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를 발하죠. 이 분노를 발할 때, 배후의 조종자가 있었더란 말입니다. 예. 마귀가 있었던 거예요. 근데 여기서는 마귀가 등장하지 않아요. 아직 7인 뗄 때는 마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누가 등장하느냐, 허수아비 같은 인간들만 등장해가지고 하나님께 원망소리를 내뱉는 거예요.

그런데 7인 떼면서 7인을 뗄 때마다, 깜짝, 가슴이 덜렁 내려앉는데, 7인 뗄 때 천사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사들의 순회재판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이견이 있어요. 상주하는 판사가 없을 때 돌아다니면서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때그때 법정 열어서 하는 것처럼. 이 의견에 약간 동의합니다. 왜, 재판하는 게 심판이니까. ‘니는 껍데기야. 사실을 껍데기이기 때문에 어린양이 안 보인거야.’ 자기가 껍데기인줄 모르고 자기 자신만 보니까, 사실은 세상에 껍데기 같은 것들이 있는 이유가 안에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예수님(어린양)은 안 보이고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힘대로 그냥 사는 거예요.

그럼 이걸 한 꺼풀, 두 꺼풀 벗겨 나가면, ‘누구야?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게 누구야?’ 예수님께서 ‘난 데 와?? 내다. 와?’ 이것이 바로 여섯 번째 인 뗄 때 마지막에 “누가 어린양의 진노에서 가릴 수 있느냐” 는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는 안 나옵니다. 다만 힘들어하죠. 왜냐하면, 여기 물가가 올라가고, 여기 6절에 보면 저울을 달았는데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그만큼 살기가 힘들다는 거예요. 그런데 살기가 힘든 이것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나가 저리 꺼져.’ 발길로 차버리는 겁니다. ‘ 이 껍데기야. 너 때문에 내가 안 보이잖아. 너는 목적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생존과 자기 영광밖에 모르지? 나가 꺼져.’라고 발길로 차버리는 겁니다. 천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담에 두 번째 천사가 보니까 전쟁을 벌이고, 네 번째 인을 뗄 때는 청황색 말..., 이것은 검으튀튀한 게 더러운 거예요. 뭐냐 하면 전염병 도진 겁니다. 하여튼 뭔가 불길해요. 사는 게 그렇게 수월하지가 않다 말이죠. 이러한 것들의 재앙의 모든 것의 원형은 10가지 재앙입니다. 여기 지중해가 있고 여기 가나안, 여기 이집트가 있고 여기 홍해가 있고 아프리카 소말리아가 있다면, 나일 강에 삼각주가 펴져 있고 여기 제일 좋은 땅 고센 땅을 요셉의 빽 때문에 히브리인들이 살게 된 겁니다. 그런데 10가지 재앙을 내릴 때, 4~10번째 재앙은 여기(고센)에는 안 떨어집니다.

첫 번째 재앙, 강물이 피가 되고, 두 번째 개구리가 올라오고, 파리, 이가 들끓는 이런 것은 다 같이 받아야 됩니다. 이렇게 받아야 여기에 따른 히브리인들이 ‘아,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뭔가 따로 구분하는 의미가 있구나.’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이 세상에 어떤 징벌이 왔을 때, 어려움이 왔을 때, 연평도에 포탄이 터졌을 때, 성도는 뭐냐 하면, 뭔가 따로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의미에 대해서 내가 왜 존재하느냐, 내가 왜 사느냐에 대해서 잊어버린 목적을 다시 한 번 회상하는 그런 사건들로 이해를 하게 하는 거예요. 성도는. 그게 십자가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연평도와 십자가의 관계는??백령도와 부활의 관계는?ㅎ 뭔가 세상의 연관을 한 번쯤은 회상케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거예요.

계기를 마련해 주면서 안 믿는 사람은, ‘왜 이렇게 힘들게 해?’ 이렇게 나오지만, 신자는 뭡니까? ‘이거는 우리가 진작 이런 일을 당해도 마땅한 거야. 이런 일이 연속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스러워.’ 라고 한 거예요. 이러한 일이 6장 8절에 보면 사분의 일, 25%. 연평도만 포탄 맞고 딴 데는 안 나오게. 한국 전체가 포탄 맞는 게 아니고 1/4 정도. 주께서 요정도로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9절에 보면 “다섯째 인을 뗄 때에 하나님이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뭐라 합니까?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라고 드디어 성도들은 누구한테 의지하죠? 비로소 이 모든 일어난 일이 바로 우리를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돋보이기 위해서 벌어지는 사건인줄 이해해서, 자기의 당했던 모든 어려움을 주님께 호소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죠. 그럼 결국 누굴 의지하지 않는단 말이죠?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죠. 그래도 아직까지 몇 분의 몇이 남았죠? 사분의 삼이 남아 있으니까, 약간 숨통은 고른다 말이죠.

온전하게 다 날라 갈 때는 요한계시록20장에 나옵니다. 그때는 아예 호소할 것도 없어요. 모가지 베 버렸으니까, 성도는 모가지 베었으니까 호소할 게 없죠. 하나님이 죽여주시니까, 고맙게도. 아예 끽 소리 못하도록 죽여주시니까.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일이 전부 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어난 일들은 이 땅 자체가, 이 역사라는 자체가 예수그리스도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가리는, 훼방시키는 그런 부정적인 기능들을 하고 있는 체로 이 세상이 지금 여전히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성도는 깨달으란 말이죠.

그럼 깨달으면 구원 받습니까? 깨닫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그건 제가 이야기 했죠?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있었던 그 사건을 성도 중심으로 이걸 재현시킵니다.

정리해 봅시다. 이 양파 껍질 속에 어린양이 계신데, 어린양께서 영역을 베푸시면 이 세상 사람들이 의지할만한 시공간은 짜개지고 무너집니다. 무너지면서 그 능력이 무슨 영역까지 무너지느냐 하면, ‘왜 나는 이 땅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나?' 그 이유까지를 말해주는 능력으로 성도에게 도달되게 되죠. 그러면 성도는 기대할 것이 뭐밖에 없습니까? 세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옵소서.‘ 라고 주님에게 직통 전화를 하죠. 7007 007인지...직접 통화하는 그런 기회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버티는 기회가 되죠.

피하고 도망치고 이러죠.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이것은 내가 의지하면 안 될 것을 의지했구나.’ 하고 생각하고 다 비우고, ‘주님이여~’ 나오면 되는데, 사람이 오기가 있어서 어려움을 당하면, ‘그래 하나님이 이만큼 퉁 가져가도 이만큼 남아 있으니까’ 끝까지 버텨보겠다고 사람이 자꾸 쪼그라들어요. 자꾸 오므라들고 쫄아 들고 이래요. ‘주여, 요거만큼은 손대시면 섭섭합니다.’ 자꾸 비실비실 숨어서 나오지 않는데, 누굽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울면서 공개적으로 나오면 되는데, 쪼가리 의지하고 ‘주님이여 옛날에 봉사 많이 했잖아요?’ 자꾸 숨어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숨는 그 곳을 쳐 버리죠. 이거 7나팔입니다. 째고 치워버리니까 더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그것마저 치워버리니까 그때는 어린양의 영광이 다 드러나면서 우리가 의지했던 것이 주님이 아니었고 마귀를 의지했던 거죠. 세상에 우리의 힘이 되고 능력이 되고 우리의 버팀목이 되는 것들이 마귀가 제공한 것들이었어요. 왜냐하면 어린양을 의지할 때는, 오직 어린양의 보혈의 피만 의지해야 될 텐데, 우리는 피를 믿는다는 핑계로 우리가 진작 갖고 싶은 것들을 제공해 달라고 했더니만 마귀가 그런 것들은 잔뜩 PX 물건처럼 잔뜩 안긴 거예요. 비상식량들을 안긴 거예요.

우리는 주님이 좋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가져왔다는 그것들을 갖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것을 치워버리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돼 보면, 이 양파 껍질 안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 밝혀집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가죠. 7인, 7나팔, 7대접으로 이렇게 나가는데,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하는 이유는 뭐라 했습니까?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재현한다 했죠? 다 잊어버렸죠. 벌써.

여기에 양파가 이렇게 있고, 껍질 속에 어린양이 계시다면, 우리가 이런 시제를 갖고 있다는 이 자체가 뭐냐 하면, 환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환상이라는 것을 그럼 없애면 되지 않겠나? 주님께서 환상을 제때 안 없애주고 환상을 유지시켜 줍니다. 이런 역사라는 환상이 있어줘야 묵시가 고위에 굴러 갈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밑에 있는 역사가 환상이라면, 실제는 뭡니까? 양파 껍질 안의 예수님이 실제죠?


7인, 7나팔, 7대접이 2010년 12월 2일 날 오후 5시 5분 5초에 한꺼번에 이게 다 와요. 이 전체가 다 온다고요. 여러분들이 성경 요한계시록 볼 때, 요한계시록 1장 봤다고 2장 생각 안 납니까? 2장을 안 본 사람은 생각이 안 나겠는데, 적어도 요한계시록 다 본 사람은 1장을 볼 때 뭣과 연관 시킵니까? 요한계시록 처음부터 끝까지 연관시켜서 혹부리, 혹 돋아나듯이, 멍게, 우렁생이 보면, 볼독볼독 혹이 튀어나왔죠? 혹 하나 있다고 전체가 분리되는 게 아니잖아요. 전체가 있고 혹이 나오잖아요. 요한계시록 전체를 알고 요한계시록 2장을 다시 보면, 2장만 보는 게 아닙니다. 전체 덩어리가 2장 내용이 한꺼번에 다 나에게 덮치죠. 요한계시록 1장부터 22장 전체가. 그러면 그것이 덮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해서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이 한순간에 우리에게 다 덮치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올 때, 그 찾아온 것만 아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왔지만 아브라함이 이미 뭘 알았냐 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가 다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거예요. ‘보고 싶어 하다가 드디어 봐서 기뻐하였느니라.(요8:56)

2천 년 전의 인물이 벌써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있더란 말이죠. 모세와 엘리야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변화 산에서(어떤 사람은 다볼 산이라고 하는데) (해발 600미터 되는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말을 하잖아요. 성령이 온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고 분명히 첫째 시간에 했죠? 주님의 마음을 아는데, 사람이 누구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 뭡니까? 부부 사이에 마음을 안다는 것이 뭐예요? 서로를 다 잘 안다는 뜻이잖아요.

부부 이야기를 하면, 여자들이 남편한테 잔소리를 하는데, 설거지가 서툴러요. 그러면 설거지가 서툴다고 말하면 되는데, ‘하여튼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알아요.’ 이러거든요.ㅎ 이것도 제대로 못하는데 뭘 할 줄 알겠느냐.‘ 이러는 거예요. 듣는 남편 되게 억울한 거예요. 그건 일부인데, 그런 부인은 점잖은 부인이고, 더 심한 부인은, ’하여튼 시가집 전체가 다 그래.‘ㅎ 가만히 있는 시가집까지 다 들먹이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마태복음 1장 내용을 알고 12제자 이름을 아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마음을 가져야 돼요.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 마음을 알게 되면, 왜 창세기 3장이 그래 되고, 왜 요한복음 7장은 그렇고, 마태복음 12장은 왜 그러하고, 이게 한꺼번에 다 들어와야 됩니다. 창세기 1장 했다고 2장 모른다하면 안 됩니다.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전체를 어긴 것이 돼요. 이 말은 율법은 하나를 모른다는 말은, 사실은 다 모른다는 뜻 이예요.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를 알면 다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 율법은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온 율법은 뭐로 이룬다? 사랑하면 다 이룬다.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 했죠.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하는가? 제가 분명히 이야기 했어요. 내가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다 ‘너 때문이야.’ 너를 만나고 난 세상 더 바라면 죄가 될 테니까(이 장우 목사님이 말했죠) ‘10월 어느 멋진 말‘ 가사 이야기 했잖아요.

반드시 사랑의 특징이 뭐냐, 자기 부인. 왜냐 하면, 나만 챙기다가 ’어, 너 챙기니 나 챙길 필요도 없이 나보다 더 나를 좋아하는 분이 있을 때는, 당신 좋습니다. 표현을 어떻게 해요? ‘ 나는 내 생각이 안 나거든요.’ 라고 표현할 수밖에 달릴 표현이 안 되잖아요. 이게 바로 양파 속에 있는 어린양에 대해서 사랑하는 겁니다.

이러면 성도는 누구만 의지하겠어요? 이 껍데기 같은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껍데기를 사랑하겠어요? 뭘 사랑하겠습니까? 오직 그 안의 어린양만 사랑하죠. 그러면 주님께서 7인을 떼시면서 이걸 하나하나 작살낼 때, 어떻게 겁나겠습니까?  두렵습니까? 공포스럽습니까? 전쟁이 일어났다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아니죠? ‘잘하셨습니다. 진작 포탄도 경기도까지 와라. 서울에도 폭탄 떨어져야 돼. 물 폭탄만 맞지 말고 딴 폭탄도 와야 돼, 잘하셨습니다. 내가 의지할 만한 것을 친히 부숴주니까 얼마나 고마운지, 내가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을 사랑하고 있음을 어떻게 잘 아시고, 내가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부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그 능력이 어디서 와요? 십자가 지신 주님의 능력으로 올 때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사실 의지하고 우리가 사랑한다는 대상이 사실은 나중에 7인을 떼보니까, 더 나가야겠어요. 그건 뭐냐 하면, 이게 어려운데요. 우리가 주변의 의지할 만한 것들을 철거시키는 그 작업을 하시면서 정작 주께서 치시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나 자신’을 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나 자신을 치는 거예요. 이런 말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의지할 만한 것들을 쳐 나갈 때, 주께서 하고 싶은 것은 결국 ‘내 니 쳐도 되나? 내 니 죽이려하는데 니 순순히 거기에 대해서 동의하겠어? 동의해?’ ‘그럼요.’ 라고 할 때까지 주께서는 차근차근 밟아서 우리를 치죠. 이게 한꺼번에 옵니다. 한꺼번에 오는데, 그 사람의 사정에 따라서 부합되는 점이 달라져요. 6대접, 어떤 때는 7나팔, 어떤 때는 7인.

어쨌든 간에 그 모든 능력은 어린양에서 왔다는 점에서 모든  7인, 7나팔, 7대접이 한꺼번에 다 주어지는 겁니다. 주어지게 되면 그동안 우리가 우리 사랑한 것은 우리 배후에 악마가 있었기 때문에 악마의 조정을 받아서 우리는 죽도록 우리 자신만 사랑해 왔다는 것을 들통 내는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 요한계시록을 받았던 사도요한이 어떤 형편이었습니까? 부잣집에서? 어떤 형편이었습니까? 밧모 섬에서. 누구 친구? 동창생? 뭐하고 있었습니까? 홀로 있었죠? 홀로 있을 때 그가 믿을 수 있는 건 뭐예요? 주님밖에 없죠. 그러면 주님 앞에 자기는 뭐같이 됐습니까? 엎드려서 죽은 자같이 됐죠? 그것도 혼자 있다고 ‘주님 저하고 악수 합시다.’ 이래 한 것이 아니고, 엎드렸죠. 그렇다면 엎드렸다는 말은 결국 엎드린 사도요한이 7인 봉인된 것을 봤을 때, 울었던 것은 결국 나에게 주셨던 주님의 영광을 속히 우주 전체에 퍼뜨려주옵소서. 라는 그런 소원을 담고 있죠. 한 구절 한 구절에. 나에게 나타났던 주님을 온 세계 다 나타나 주옵소서. 근데 주님께서는 내가 그렇게 실제로 그렇게 해 주겠다. 하시고 하나 둘씩 떼내는 겁니다.

떼 낼 때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벌이는 사건을 누가 말릴 수 없다 했습니까? 우리가 말릴 수도 없고, 말릴 필요도 없다. 왜냐, 뜯겨져 나가야 그 안에 누가 ‘누구야? 주인공이. 이런 사건 누구야’ 라고 홀로 일방적으로 아무 의미 없이 우리하고 사전 조율 없이 일방적으로 퍼뜨리시는 분은 오직 이미 주가 되신 어린양께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해 나가시는 겁니다. 목적은 뭐냐, 구약 따라 자기의 이스라엘을 만들어내시는 작업의 일할이라 말이죠.

애굽 나라에 있을 때, 애굽 나라에 10가지 재앙이 왔습니다. 자, 제가 물어봅니다. 이 재앙을 사전에 애굽의 바로 왕이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죠. 그리고 재앙이 10가지나 길게 갈 이유가 뭡니까? 이게 성경이 어려운데요. 바로는 재앙을 10가지 재앙을 받고 싶어서 일부러 재앙을 10 가지하면 내 줄게, 하는 생각이 없었으며, 바로가 내 주고 싶어도 주님께서는 오히려 바로로 하여금 강퍅케 하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시집 간 며느리가 교회 나가고 싶어도 주님께서 그저 밥해주고 심지어 제사까지 상 다 차려도, ‘어머님, 다음 주에는 교회 한번 나가겠습니다.’ ‘안 돼.’하고 더 강퍅케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자기 정성을 다 하면, 그러한 희생을 근거로 해서 교회 나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나가죠. 왜? 그렇게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니는 다음 주부터 절에 가.’ 라고 나오게 하시는 것이 진짜 정통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방식이고 그 외의 다른 방식은 다 거짓말입니다.

친구 따라 돈 주었다가 왔다가 은혜 받고, 그건 다 좋은데요. 앞으로 그 사람들이 갈 구원의 코스는 그런 인간적인 방법 때문에 뭔가 수월하게 되었다는 사태는 그건 다 거짓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런 건 없습니다. 갈수록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예수 믿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결국에는 뭐냐 하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불가능한 게 뭐냐 하면, 어린양의 공로만 구원의 능력이 돼야 되지, 구원 받으려고 애쓰고 있는 준비 단계는 절대로 거기다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가짜 구원이에요. 이것 있으면 안 돼요.

환경이 나쁘면 원망하세요. 괜히 원망 안하는 체 하는 것이 화를 부릅니다. 원망하시면 주께서는 ‘고거 참 들켰다.’고 주 앞에 홀딱 들킬 것입니다. 그 들키는 순간을 주께서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렸는지. ‘진작 그렇게 나한테 원망하지.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원망 안한 체 하느라 용이나 썼다. 하지만 니가 힘들다 사울아. 니가 나한테 핍박해봐야 니만 힘들지.’

이러한 요한계시록의 이 구원 방법이 제가 강조 안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세력에 의해서 우리는 이 구원 방법이 주께서 어린양의 피로 구원되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들이 자꾸만 만들어졌어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10가지 재앙으로 때렸습니다. 제일 마지막 재앙이 뭐냐 하면, 맏아들을 제거하는 거죠. 제일 끝에 직접 뭘 손댄다는 말입니까? 직접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재앙이 왔죠? 하나님께서 한 가지 재앙부터 열 가지 재앙으로 몰아넣는 것은, 목적이 뭐냐 하면, ‘너는 이미 내 앞에서 진작 죽을 목숨인데 왜 그걸 사전에 몰랐느냐?’ 이래 되는 겁니다.

10가지 재앙을 주는 목적은 ‘너는 벌써 죽어야 될 목숨이라’ 말이죠. 그러면 10가지 재앙에서 이스라엘이 면제 됩니까? 면제 안 됩니까? 이스라엘도 면제 안 돼요. 이스라엘이라는 혈통 때문에 안 죽는 게 아닙니다.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것은 이 목숨은 목숨대로 없어지고, 여기서 새로운 목숨이 등장하는데, 새로운 목숨이 뭐냐? 어린양의 고기를 먹고, 피를 바른 그 어린양의 생명이 무엇의 핵을 이루느냐 하면, 새로운 이스라엘의 중심의 핵으로 (찐빵 같으면 앙꼬) 장착되어야 그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렇죠? 제 말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그래서 유월절을 어떻게 한다? 한번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은 계속 되는 거예요.

그럼 유월절이 계속 된다는 말은 유월절 유도하는 10가지 재앙도 주변 환경으로서 계속해서 조성이 돼야 되죠. 제 말 뭔 뜻인지 아시겠어요? 첫 번째 재앙이 어디까지 이어진다? 열  번째 재앙이다. 열 가지 재앙이 뭐냐 하면, 직접 하나님이 인간의 목숨을 손대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는 어디 죽은 목숨이 깝죽 대냐 말입니다. 진작에 죽어야 될 목숨이었다. 죽여야 할 목숨 같으면 죽이지 왜 살렸는가? 이것은 너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지 않아야 될 생명 때문에 살린 거예요. 그럼 죽지 않아야 될 생명이 어린양이 되어서 언약궤 속에 담겨 가지고 이스라엘 형상을 이루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주인공이 누구예요? 주인공은 주변에 있는 진작 죽어야 될 목숨이 아니고, 그 목숨을 10가지 재앙 식으로 계속 살려내는 조건이 유지되는 선에서 살려내는 거예요. 그 조건을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죠. 하나님이 어린양의 피의 언약을 아는 사람만이 계속 유지되잖아요. 그건 여러분이 이해하시겠죠? 문제는 그 어린양의 10가지 재앙이 계속 반복되려면, 10가지 재앙이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런 10가지 재앙이 생기게 했던 7~9가지 재앙의 환경이  계속 같이 따라와서 병행 하는걸 , 이걸 놓치면 안 된다 말입니다.

그럼 애굽에서는 강퍅케 하는 역할을 누가 했습니까? 바로 왕이 했죠? 그러면 그 이스라엘이 어린양이 함께 했을 때, 유월절과 언약이 함께 할 때 강퍅케 하는 역할을 누가 해야 해요? 이스라엘 본인이 해줘야 아까 구약의 법칙,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건지시고 이스라엘이 곧 멸망당하고, 그 멸망당하고 그 멸망 속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나와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모형에 지나지 않았던 그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 과정을 구약의 이스라엘 지파를 통해서 그걸 되풀이 하는 겁니다.

그러면 10가지 재앙이 되풀이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철저하게 그 재앙이라는 환경 속에서,  솥뚜껑, 가마솥에서 우리는 벗어납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죠. 못 벗어나면서 성도는 즐거워하죠. 그 어떤 환경과 역경과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이겼노라.’ 그것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옵니다. 한번 봅시다.

12장 11절 36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죽어야 될 자가, 다시 이야기 합시다. 애굽에서 강퍅케 한 것은 바로 왕이라 했죠? 그러면 광야에서 강퍅한 사람, 하나님께 원망은 누가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맞아요. 애굽에서 구원받은 자죠? 애굽에서 구원받은 자가 무슨 역할을 한다고요? 하나님께 원망하는 바로의 역할을 하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40년 동안 여호수아와 갈렙 빼놓고 어떻게 됐습니까? 뺑뺑이 돌면서 다 죽었죠? 심지어 같이 죽은 사람이 있어요. 누가 죽었습니까? 모세도 죽었죠.

우리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죽으려면, 우리가 우리자신이 그동안 하나님 앞에 원망을 해댔는가를 혹독하게 평생을 통해서 실험과 실습을 해봐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원망을 충실히 감당해서 그래서 나는 더 살려달라고 말할 자격도 쨈도 못되는 존재임을 알 때, 그때 죽이실 때, 우리는 우리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야! 멋진 시나리오예요. 내가 말해도 멋진 시나리오예요. 그렇죠? 사람이 그냥 죽이면 아까워서 못 죽어요. ’주여 지금 죽으면 천당 갑니까?‘ 자꾸 천당 갈 생각만 하는 거예요. 여전히 본전 내놔라 하는 식으로...ㅎ 그 본전 내놔라 소리하면 아직도 더 살아야 돼요. 그 사람은. 죽으면 안돼요.

‘아휴, 저는 진작 죽을 목숨인데, 주께서 여태 버텨오셨는데, 제가 버텨오면서 주께 원망한 거 밖에 없습니다. 눈만 뜨면 내 영광! 눈만 뜨면 생존, 얼마나 이것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닦달 냈는지...’ 우리가 바로 바로 역할을 충실히 해줘야 되고, 가만히 있으면 바로 역할이 안돼요. 우리를 강퍅케 하려면 주께서 적절하게 재앙을 내려야 합니다.

‘10년 동안 공부해서 올해 재수까지 해서 올해 우리 애는 완전 수능 만점이다.’라고 했는데, 그날 저녁에 배탈 나서 시험도 못치고 왔을 때, ‘하나님,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왜 우리 애를 죽입니까?’ 고거 아직까지 9번째 재앙이에요. 열 번째까지 아직 못 갔어요.ㅎ 그만큼 우리가 이렇게 재앙 속에 들어와 보면, 우리는 절대로 우리 힘으로 하나님께 원망 돌리는 이 세력권에서 우리는 못 벗어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주께서는 여기 7인, 7나팔, 7대접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것이 우리보다 더 센 악한 세력, 이 숨어 있는 세력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7인이 아니고, 7인, 7나팔, 7대접으로 딱딱 이렇게 진도 나가게 되면, 숨어있는 것이 더 이상 숨어있지 못하고 슬~슬~ 기어 나옵니다. 슬~슬 기어 나와서 이제는 누구하고 붙느냐 하면, 인간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직접 주님과 맞상대하는 그러한 결과가 되죠.

양파껍질을 이래 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오해해서 ‘서기 200년에 하나 거치고 400년에 두 개 거치고..., 이게 아니고 한꺼번에 다 주어지게 되면, 성도는 뭘 아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께 영광 못 돌리고 내가 항상 나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바로 악한 영이, 악한 신이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악한 힘이 어떤 종류며 악한 힘이 뭘 노리고 있는가를 익히 다 알기 때문에,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행함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헌신과 봉사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기 고생한 걸 근거로 해서 구원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누구만 의지합니까? 나를 이렇게 발가벗기게 만든 그 능력으로 주신 그 주님의 마음, 십자가 능력이 와 닿기에 우리는 주의 피를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마음껏 마귀에게 쌓이시고, 마음껏 귀신에게 둘러싸이시기 바랍니다. 혹시 기도하다가 귀신 씌었거든 더 씌라고 기도하세요.ㅎ 무당 신을 이 순신, 강감찬부터 다 귀신 씌라고 하세요. 원래 그게 우리 모습입니다. 일곱 귀신 아니라 일곱 귀신보다 더 덮쳐있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주님 것을 회수하는 방법으로 구원하기 때문에 우리 속에 이미 그게 일곱 귀신인 걸 깨닫게 했으면, 이미 우리 속에는 십자가 능력이 도달된 거예요. 일종의 저기서 총알의 밝은 빛이 우리에게 와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 피가 있으면 피를 살살 잡아당기면 끌려온다니까요. 아주 엉망진창 돼가지고..., 내가 구원받은 것은, 이 면류관도 주께서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라고 우리가 어린양만 섬기면서 오는 거예요. 마치 홍해를 건너오는 이스라엘 사람처럼, 모든 걸 오직 어린양에게만 찬양하는 모습이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끊어줄 때 함부로 끊는 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순서 따라 끊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순서 자체가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 받았다가, 어떻게 멸망하고, 다시 신약에서 구원 받는가? 그 과정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중간, 중간에 모세의 노래가 나옵니다. 유리바다 건너가는 모습이 나와요. 그들이 부른 노래는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어린양께서 우리를 구원했다.’한 그 노래밖에 없어요. 이것이 이 시간에 한꺼번에 다 와야 돼요. 왜, 목사님 6장만 하지, 7장은 다음 달에 한 건데..., 그게 아니에요. 6장해도 전체가 나와야 되고, 5장해도 전체가 나와야 되고, 3장해도 전체가 나와야 되고..., 전체 다가 우리에게 그대로 다 와야 돼요. 다만 우리가 사태에 따라서 요런 게 어려운데, 한번 봅시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직선 아닙니까? 우리는 12살 때 기억나고 15살 기억나고, 20살 때 기억나고, 다 기억나죠? 우리는 항상 직선이다 말이죠. 직선에 뭐가 구른다 했습니까? 양파가 구르죠. 양파가 구르면, 선과 원의 만남은 어떻게 만나요? 정면으로 만나는 게 아니잖아요. 선하고 네모 납작한 탁자하고 만나면 전체 닿는 면적이 네모지만, 원하고 선하고 만나면 뭡니까? 점이죠? 요거 2초~3초갑니다.ㅎㅎ 돌아서면 또 뭐로 갑니까? 원( 양파)으로 가니까, ‘나는 2시간 전에 은혜 받았어. 아마 그 은혜 내일까지 갈 걸.’ 또 이러고 있다 말이죠. 또 어제와 2시간 전과 또 구분하는 거예요.

갑자기 주님의 영광 없어지고, 예수만 믿게 된 누구 영광??? 갑자기 내 영광 생각 난 거예요. 주님한테 관심 두다가 고개 쏙 돌려서 자기에게 또 관심 두는 겁니다. 그러면 고난이 오면 다행인데,  또 양파가 굴러갑니다. ‘그게 바로 마귀 짓이야.‘ 또 굴러갑니다. ’어린양이 안 보이지?‘ ’이제 보입니다.‘ 보이는데, 이게 구를 때, 7인, 7나팔, 7대접 구를 때 어떤 때는 여섯 대접에 접선되고, 어떤 때는 다섯 대접에 접선되고, 네 번째 인이 접선이 되면,(청황색 말) 이는 아플 때인데, ’주여 왜 아프게 하십니까?‘ 하고 건강해지면 헤헤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세 번째 인)는 갑자기 그렇게 사업이 잘 되다가 손님이 뚝 끊어지고 수중에 돈도 없고,..........., 이 둥치는 늘 굴러가요.

늘 굴러가는데, 적합하게 어린양을 바라보는 시점은 고 계기는, 요 양파와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라는 환상과 어떻게 조합을 짜 맞추느냐 하는 것은 어린양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때그때마다 사건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 속에 집어넣는 방법으로 하는 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죄밖에 없으니까. 죄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죄밖에 없는 인간을, 어린양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그 죄에 합당한 재료를 가지고, 우리에게 만남을 해서 우리가 이게 죄임을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어린양을 증거 하는 그 일을 주께서는 계속 해 나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 ‘7인이고, 7나팔, 7대접입니까?’ 라고 누가 물으시거든, 인간은 창조원리, 1234567로 끝나버린 창조원리 바깥으로 절대로 벗어나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면 그 말은 뭐냐, 7개의 창조원리가 굴러 가는대로 수레바퀴 속에 거쳐서 굴러가야 되는데,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뒤에, 마귀가 지배하고 나서, 우리는 갑자기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온데간데없고, 역사라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의 흐름, 그리고 내 땅, 내 땅이라 하는 나에게 소유물이 있다는 것을 꼭 움켜쥐고, ‘이거 손대면 하나님 침 뱉고 욕할 거야, 라는 식으로 버티는 고런 모습과의 접촉점 역할을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이런 접촉점 할 때, 애굽에서 히브리인이 나올 때, 10번째 재앙이 뭐였습니까? 어린양의 뭐죠? ‘어린양의 죽음’이죠. 그러니까 속에 있는 예수님이 바깥에 나올 때는 반드시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뭡니까? 어린양께서 우리대신 죽으셨다는 거예요. 그 죽음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죽음이고, 그 죽음 때문에 우리는 진작 죽어야 될 목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죽음이죠. 그래서 마귀는 바로 어떻게 하든지 어린양의 죽음이라는 것이 접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뭘 고수하는가 하면, 역사를 고수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서양 2천년 역사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서 뭘 고수하느냐 하면, 이 시나리오, 이 직선적인 시나리오를 그렇게 가르치도록 고수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속에 있는 시간적인 인쇄에다가 성경을 시간으로 조작해서 시간으로 이걸 평탄하게 두드려서, 양파를 다 두드려서 평탄한 역사라는 줄자로 만들었어요. 줄자로 만들어서 자기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아! 요거는 지켰고, 요거는 지나갔고, 아이고, 마지막 아마겟돈 남았네. 요거 전 천년 같으면 7년 대 환난 남았구나. 7년 대 환난을 대비해서 내가 준비할 건 뭐고? 아! 7년 대 환난 때 보니까, 666에 경제가 어렵구나. 그럼 팔아서 금을 사놀까?ㅎ 창고에 곡식을 채워놓을까? 마지막 환난 때 먹을 거 없다는데..., 여기 3번째 인을 보니까, 한 데나리온은 하루 성인 품삯이거든요. 하루 품삯이 기껏 한 끼 식사도 안 되는데, 이런 재앙이 왔을 때는 미리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으로 알려준 것처럼 미리 대비하라고 한 모양이다. 아, 평소에 아껴 써서 곡식을 지하실 파고 창고에 채워 놓으면, 마지막 요 사건 터졌을 때, 세 번째 인이 왔을 때 견딜 수 있겠다.’ 고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보입니까? 자기의 영광, 자기의 생존만 유지되고, 뭐는 안보여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 이루었다는 의미는 온데 간데 다 날아가 버렸어요. 누가 그렇게 했어요? 마귀가 그렇게 했죠. 마귀가 모든 성경 그렇게 해석하게 만드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 안 된 사람은 성경 해석을 할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되지를 않습니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뭔 뜻인지 알아요? 자기 부인은 자기 와이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은 ‘갇혀있다.’ 어디 갇혀있다? 창조의 원리에 갇혀있다. 달리하면, 하나님의 물 끓는 가마솥 안에 있기 때문에 밑에서 어떻게 물을 끓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 우리 인간의 입장이라 말입니다. 그런데 끓이는데 말씀으로 끓여보니까, 그 안에서 왜 우리가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없는가? 그 내력이 다 나오더란 말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 7장 중간에 나옵니다마는 쭉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인 맞은 자, 이게 뒤에 가면 책이 나와요. 책이 나오는데, 그 뒤에 생명책이 나오고, 예수님의 어린양의 책이라고 돼 있어요. 책이 나온다는 말은, 이미 어린양께서 이렇게 구원할 자가, 이미 책에 일방적으로 정해 놓은 사람에게만 이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이 양파 수레 속에 들어있죠? 그러면 우리가 어떤 순간에 주님의 성령이 와서 양파가 한꺼번에 덮치면, ‘그냥 나는 죄인이다.’ 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너는 책에 니 명단이 있음.‘도 같이 주어지겠죠.

아!! 책에 기록됐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런 재앙을 주셨고, 재앙을 통해서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우리가 의지했다는 것을 알게 만들고, 여러분! 알게 만든다 해서 그걸 버리는 게 아닙니다. 요 2초, 3초 지나고 돌아가면 마찬가지입니다. 고 순간은 과거, 현재, 미래, 은혜 받은 거 다 날라 가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짧은 순간 깨닫게 만들고, 그 가운데서 이것이 아무에게나 있는 게 아니고, 오직 주께서 생명책에 기록된, 명단에 있는 사람들만 구원하게 한 방침이구나.

그렇다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버틸 수 없는 악마의 힘, 악마의 힘보다 더 센 힘이 누구 힘이라고요? 바로 나를 찾아오신, 나를 침투하신 주님의 힘이 나보다 더 세죠. 그걸 그 짧은 순간이라도 아는 겁니다. 그러면 나오는 게 뭐냐? 감사죠. 고맙습니다. 정말 더럽게도 고맙습니다.ㅎ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하면 벌써 2초 지났습니다. 고맙습니다. 해 놓고는, ‘자 구원은 받아 놨고, 자 내가 슬~ 슬 돈은 벌어야 애는 먹고 살지. 그게 우리가 육신이 있는 한 계속 그렇게 앞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아이고, 내가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인데, 초과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정말 우리가 고맙다고 느낄 때가 언제 적이었는지 아득합니다. 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은 관심도 없고, 내 영광 내 생존에 집착하는 내 모습을 이 시간 다 들키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차라리 들켜버려서 진작 죽을 목숨인 것을, 목 졸라도 괜찮은 목숨인 것을 깨달아서, 지금 살게 된 것이 예수님의 피 증거 하라고 살려주신 은혜인지 알아서 주의 복음만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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