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가락강의
2011-02-12 13:25:56 조회 : 3463         
110210 상징어 해석 (9 강)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110210 상징어 해석
 링크 :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1하나교회/하나교회110210a.MP3, Hit:465
 링크 :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1하나교회/하나교회110210b.MP3, Hit:436
 이한례(IP:119.♡.121.61) 11-02-16 23:55 
하나교회110210요한계시록(상징어 해석)-9강a-(이 근호 목사)
제 9강a

시작해 봅시다. 지난 시간에 요한계시록 7장 1절에서 9절까지 이야기 했고, 오늘 이 시간에는 10절부터 17절까지 할 차례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한 내용을 개괄적으로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 되는 것이 아니다. 144.000이라는 제한적인 사람에게만 혜택이 돌아간다는 말이죠. 혜택이 돌아간다는 말은, 구원이 사람 쪽에서 챙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구원을 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구원을 당해보면 구원을 당하기 전에는 보통 사람이었는데, 구원을 당해보니까 유다지파고, 구원을 당해보니까 갓 지파고, 구원을 당해보니까 아셀 지파가 된 거죠.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나도 있고 다른 사람도 이렇게 있잖아요.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견주어서 내가 이 정도 된다는 것을 파악을 하는데, 저 사람은 수입이 얼마고 나는 얼마인데, 저 사람은 집이 몇 평이고 하는데, 이렇게 알고 있는 나는 다른 여러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죠.

만약에 흑인이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면, ‘어, 이 나라는 내 나라 아닌 것 같아,’ 왜? 전부 다 흑인이 아니니까, 그런데 자기 나라 가면 모두가 흑인이잖아요. 여기서 차이가 나죠. 흑인이냐, 황인종이냐 차이가 나듯이, 사람은 자기 주변을 통해서 파악하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지게 되면,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신분 자가 됩니다. 새로운 신분 자가 되어서 성경에 있는 개념, 성경에 있는 용어가 나한테 해당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너희는 144.000중에 한 사람이다, 라고 해당이 되는 겁니다. 해당이 되고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이것을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결정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되고 난 뒤에는 성경 말씀이 나와 관련성 있게 새롭게 다가오는 거예요. 이것은 이미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성경 의미가 새롭게, 새롭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성령이 오지 않고 구원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형성된 내가 성경책대로 실천에 옮김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을 얻겠다고, 구원을 챙기겠다고 내가 나설 수밖에 없죠. 여기에 구원의 목표, 구원의 표적이라는 것은 하늘이 주신 그런 의미가 아니고 주변 사람들과 섞여 살다가 거기서 뭔가 튀어 보려고 구원 받아보려고 애쓴 자기 흔적이 담겨 있는 그런 구원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경의 의미하고 다른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영이 임해서 아는 십자가와 자기가 인생이 너무 서글프고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살면서 아는 십자가하고 의미가 다르겠죠? 어려울 때 힘들게 살면서 그런 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나는 맞아. 십자가 졌어.’ 그 십자가는 자기가 주변보다 못 사니까 다 잘 사는데 못 사니까, 주변은 다 양친 부모가 있는데 자기는 없으니까, 이게 고난의 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만약에 어느 나라에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없으면 그 부모 안 계신 것을 고난이라 하겠습니까? 고난이라 하지 않겠죠.

그래서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주변을 살피면서 그들과 대비하면서 내가 이쯤 되겠다 싶어서 그렇게 정해보는 겁니다. 오류죠. 잘못된 거죠. 주위에서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줄 알고 있다 이거죠.

그런데 실제로 성경대로 하나님이 오시면 그 하나님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는 어린양에 의해서 하나님이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7장 전체가 뭐냐 하면, 땅의 이야기예요.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이런, 이러한 사람입니다. 라고 소개하는 겁니다.

그러면 땅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그것은 바로 어린양의 혜택을 입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바로 혜택을 입는 사람이 아니고, 이 지상에 먼저 오셨던 하나님,  그 분을 이 7장에서는 ‘어린양’이라 하죠.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하나님께 구원을 당한 사람은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고 누굴 거론하겠어요? 어린양을 거론하면서 어린양을 보내신 하나님을 거론하겠죠. 하나님 먼저 알고 어린양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이 지상에 오신 하나님이니까 어린양과 더불어서 하나님을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주변의 사람들은 뭡니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전부 다 하나님을 알고 있을 게 아닙니까? 심지어 불교신자할지라도, 심지어 교회 안 가본 사람이라도 엎어지면,‘아이쿠, 하나님,’한다 말이죠. 그래서 저는 잠시 실험을 하고 싶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A4용지를 나눠주는 겁니다. 어떠한 하나님이 가장 하나님답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한 페이지 정도 작성해 보세요. 물론 앞에서 성경책도 펴주고 이거 참고로 해 주시고, 그러면 그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죄를 용서해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도 필요하고 등등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제출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다 시험지를 100장쯤 다 걷은 그 하나님이 예수님이 아는 하나님과 같은 답안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한명도 없어요. 왜 한명도 없어야 되느냐 하면, 한명도 없어야 어느 누구도 예수님 몰라도 구원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 몰랐는데 구원이 되더라. 예수님 몰랐는데 그들은 하나님은 알고 있더라.’라고 여기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비밀이라 하고 이 비밀은 창세전부터 숨겨온 건데 모든 사람한테 숨겨온 건데, 오직 예수님 나타나면서 비로소 공개된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공개된 그 비밀도 예수님을 주물럭거리고 옷을 만지고 예수님을 따라 다닌다고 예수님을 아는 게 아니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떡을 얻어먹은 자가 무려 오천 명입니다. 오천 명을 마당에 한번 세워보세요. 얼마나 많은지, 오천 명 떡 먹을 때, 떡 먹고 있는데, ‘이 중에서 예수님 떠날 사람 손들어 보세요.’하면 한명도 없었을 거예요. 자기들도 떡 먹으면서 고마운 줄 알고,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위하시고 자비로우신지 알잖아요. 그 자비가 며칠 가지도 못했어요.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먹어라. 떡 먹어야 소용없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셔야 돼.’ 이런 소리 할 때, 다 떠나버리고 오천 명 가운데 다 떠나버리고 단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하고 싶은데 죄송합니다만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 오천 명은 뭐였습니까? 들러리였죠. 인간들이 낸 하나님이란 것은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었습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 직접, 예수님께 직접 떡을 먹는 놀라운 기적을 받았습니다만 그 기적 받은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기적은 받았는데. 사실 지금도 우리는 기적을 받고 있습니다. 햇빛과 공기와 기적을 받고 있잖아요. 불신자도 같이 기적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선한 자나 악한 자가 다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알까요? 모르죠.

결국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창세기 3장에 의하면, 그게 당연하고 정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모르는데 가인을 제사를 드렸을까요? 가인이 제사 드린 하나님은 가인이 이 땅에 살면서 육체적으로 힘들고 고단하고 인생이 허무하고 이러한 주변의 환경 속에서 만들어 낸 하나님에게 가인은 정성껏 제사를 드린 겁니다. 그러고 우리는 그 후예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생명나무를 모르는 체 따먹지도 못한 채 생명나무 맛이 어떤지도 모르는 채 추방된 입장에서 조작된 거죠.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자비로운 하나님 쪽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 하나님답지 않습니까? 라는 원망이 담겨 있는 거죠. 사람이 힘들지 않으면 원망할 게 없잖아요. 힘드니까, ‘왜? 누구 땜에 내가 힘든 거야? 그 탓을 따지고, 따지고 올라가 보니까 결국은 그 탓은 누구 탓 이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답지 못한 탓으로 지금 내가 고생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불만, 원망들이 하나님이름으로 오신 어린양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어서 그분을 의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는, 단 한사람이라도 자기 의로 구원될 수 없는 그러한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살해당했습니다. 그 살해당한 것을 예수님이나 하나님은 바로 제사 율법의 모세율법의 완성이라고 봐서 그걸 표현하기를 ’어린양‘이라고 하는 겁니다. 앞에 단어가 붙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이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서 자기 죄를 지고 가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자기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고난 받는 것도 모르고 모든 양들은 그분을 싫어했죠. 왜냐하면 자기가 제출한 A4용지에 있는 하나님하고 실제로 오신 어린양하고 일치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 한명도 같은 것이 없었어요.

왜 같은 게 없는가? 그것을 사도바울은 한글로 다음 두 자로 이야기합니다. 제가 크게 쓸게요. 뭐죠? ‘대신’  대신 죽으셨다는 겁니다. 대신 죽으셨다는 의미가 뭘까요? 너는 어떤 몸부림이나 어떤 시도를 해도 그것은 영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음을 대신 침투하시는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는 행위 말고, 대신 침투된 행위가 그걸 말해주는 겁니다. 대신 죽었다는 겁니다.

만약 어떤 부인네가 설거지할 때, 길 가던 부인네가 비키라 하고 자기가 설거지 한다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것도 설거지라도 하느냐, 그 뜻이잖아요.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그걸 두 자로 뭐라 한다고요? '대신‘한다고 해요.

그러면 대신 한다는 수용한다는 것은 뭡니까?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 고백하는 거죠. ‘죽어 마땅한 죄인을 위해서 대신 살게 하시는 분이 저에게 침투했군요.‘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구원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당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뭐만 자랑하느냐 하면, 내가 뭘 했다. 내가 예수 믿어줬다. 예수 날 사랑했다.’를 자랑하는 게 아니고, ‘나는 뭘 해도 죽어 마땅한 존재인데 대신 처리하신 분이 있었고, 대신 해주신 분이 계셨다는 그분만을 자랑하겠죠.

만약에 대신 해 주시는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뭐만 자랑하겠습니까? ‘최선을 다했다.’만 이야기 할게예요.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 니가 내 최선에 대해서 모독하고 무시하느냐, 나 기분 나쁘다,’ 이래 나오겠죠.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대신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고 한다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신해도 구원 못 받는대’ 하고 예수님에 대해 놀리는 사람, 그 놀리는 그 사람에 대해 열 받죠. 그게 아닌데, 그것은 복음이 아닌데, 그건 이단인데.

그럼 한국교회 보자 이 말이죠. 한국 교회 설교를 들여다보자 말이죠. 대신입니까? 최선입니까? 어느 쪽 이예요? 대신 죽으심 앞에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입니까? 말 무시하지 말라 쪽 이예요? 어느 쪽 이예요? 날 무시하지 말라 쪽 이잖아요? 헌금한 나를 무시하지 말고, 전도한 나를 무시하지 말고, 예배 참석한 나를 무시하지 말라 그쪽이잖아요. 대신이란 분을 내놓을 수 없잖아요. 왜? 지가 열심히 설거지 하는데, 자기가 오늘 설거지 하는데 누가 설거지하면 ‘손 닦아라. ’ 나오겠죠. ‘나도 한 설거지 하거든. ’ 이래 나오죠. 그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믿어주고 최선을 다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요.

그러면 뭐가 입에서 나올 수 없습니까? 대신, 몽땅 대신이죠. 일부만 대신이 아니고 ‘몽땅 대신’이 입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그렇게 나오려면, 나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도 이것은 구원하고는 상관없는 헛발질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저 큰 소리 치는 것 외에는 그 뿐이라는 것을 그걸 자인한 셈이 되는 겁니다.

다시 봅시다. 인간이 이래 있으면 인간은 어떻게 안다고 했습니까? 주변의 사람과 비교해서 인간을 알겠죠. 주변의 사람을 비교한다는 말은 그냥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어느 정도 레벨이야? ’너는 5야? 나는 6이야. 너는 수준이 어디야? 나는 이 정도인데.‘ 이 사람들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습니까? 같이 비교하는 주변 사람에게 가 있겠죠? ’넌 교회 숫자가 얼마야? 나는 얼마야. 한 주 헌금 얼마 나와? 이 만큼 나와. 너는 자식이 어느 대학 나왔어? 나는 이 대학 들어갔어. 이거 되겠죠?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신 분이 침투해 버리면, 이 사람의 눈 꼬리와 눈총이 어디로 가겠어요? 대신 죽으신 분에게로 가겠죠. 그러면 그동안 자기가 평생 살면서 비교하면서 해온 모든 것들이 멀리서는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이지 않는 성경대로 하면 안개죠. 장충단 공원에 핀 안개 아닙니까? 장충단 공원에 있는 안개 만져보세요. 가까이 가면 없는데 멀리서는 보이는 안개, 희미한 안개, 가까이서 만져보면 없는 허깨비죠. 이런 허깨비보고 비교했다는 말은 본인은 무슨 게임이다? 본인도 그동안 허깨비 노릇을 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묻지도 않는 것을 자기는 심각한 거예요. 그거 아니면 자기는 죽을 지경이라. 남 앞에 내놓을 게 없다고 자살하고 싶은, 남 앞에 내보일 게 없다고 자살하고 싶은.

그럼 하나님의 기준은 뭐를 내세웠다? 어린양을 내세웠죠. 어린양은 대신 죽으신 분이죠. 대신 죽으셨다는 말은 이쪽의 인간들의 어떤 설치는 것은 일체 받지도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지도 않죠. 니가 목회 얼마나 했는지 보지도 않죠. 주님께서는 대신 죽으심만 보죠. 그 앞에서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은 뭐냐 하면, 땅을 이야기 하면서 하늘을 이야기 한다는 말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질서가 이미 구축돼 있는데, 땅의 질서는 하나님께서 일절 인정하지 않고, 하늘의 질서만 인정한다는 그 경계선에 서 계신 분이 누굽니까? 어린양이잖아요. 어린양이 멀쩡히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어린양이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통해서 무엇의 질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땅의 질서는 결국은 어린양,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질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일체 받지 못하겠다. 철딱서니 없이 자기 기준만 제시하는 그것 때문에 억울하게 대신 죽으신 그분의 대신 죽으심을 수용하는 자만이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잉여라는 거예요. 수용하는 것,

그럼 수용하려면, 하나님을 위해서 이 세상의 기준이 일체 인정받지 않는 것을 구원을 당하게 되면, 누가 알게 됩니까?  구원을 당한 그 사람도 하늘과 같이 동감하면서 ‘이 땅의 기준은 쓸모가 없군요.‘ 같이 동감할 때, 그 사람은 뭐만 자랑하고 뭐만 바라보겠습니까? 어린양의 대신 죽으심만 바라보고 그것만 기뻐하죠. 그것만 기뻐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 7장 후반전의 이야기입니다. 기쁩니까? 여러분 구정 때 그런 사건 나고 기쁩니까? 기쁘십니까?

어떤 사람이 그런 질문 했죠? 류 OO한테 당했다고 억울하다고 할 때 제가 어떻게 답변했던가요? 류 OO집단한테 억울한 거 본인은 억울하겠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우리 손에 당한 그 억울함에 비하면, 억울하다 소리하지 마라.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죽었어도 오히려 뭐라 했습니까? 저들을 용서하라 했죠.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땅의 돌 던지게 만드는 질서를. 그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하늘의 기준을 모르니까 돌을 들고 나를 때렸다고 보는 겁니다. 때리면서 그 때리는 사람은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아마 1대 때리고 돌아서려다 2대 때렸을 거예요. ‘아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지만 잘난 체 하네,’ 하면서 또 던졌을 거예요. 그때 하늘이 열리면서 예수님이 보이면서, 스데반 집사는 누굴 쳐다봅니까? 돌 던지는 사람을 쳐다보지 않고 누굴 쳐다봅니까? 하늘 우편에 서서 반기는 예수님 쳐다보잖아요. 그걸 성령 충만 이라 하죠. 그게 어떻게 역사적 언어로 목회 적 언어로 표현해 내겠습니까? 말이 안 되죠.

어떤 사람이 세 살 먹은 아들을 부모가 합세해서 때려죽였습니다. 구타해서 죽여서 쓰레기통에 버렸죠. 그래서 경찰이 와서 잡아갔어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놈의 나라는 내 애를 내 맘대로 못 때려죽이나? 이렇게 할 거예요. 이게 뭔 뜻 이예요? 내 애를 내 맘대로 못 때려죽이나? 무슨 이런 나라가 다 있어?’ 현재도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시골에 가면, 자기 딸자식을 자기 부모가 죽일 권한이 있습니다. 만일 내 자식인데, 내가 낳았어.

내가 창조했어. 내 물건인데 내가 내 물건 부수는데 경찰이 왜 잡아갑니까? 예? 이야기 해 보세요. 왜 잡아가요? 누가 한번 이야기 해 보시렵니까? 그게 왜 잘못 됐는지, 집사님, 내가 남의 자식 죽였습니까? 내가 낳은 자식 내가 애써서 키운 자식, 이제 그만 키우고 싶어 죽였단 말이죠. 내 집에 있는 강아지 내가 죽였는데, 집에 키우는 고양이 내가 죽였다. 내 강아지인데, 그게 뭐가 잘못입니까? 내가 키운 자식 내가 죽였는데 뭐가 잘못 이예요? 그거 깊이 생각 안했죠?

보세요. 우리는 은연중에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기준을 마치 그게 옳은 양 그대로 수용 했잖아요. 그 사람 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다는 기준을 내세우는 이유는 우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미처  주변을 아무리 두리번거려 봐도 알지 못하는 기준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죽이게 만든 또 다른 기준, 그게 영적 기준인데, 세상 신이 준 악한 영의 기준을, 우리는 그걸 마귀가 준 줄을 몰랐던 거예요. 우리는 알지 못한 거예요. 우리는 주님이 오시면 주님을 영접할 줄 알고, 주님이 산상설교하면 지키는 줄 알았지, 주 예수님을 거부하고 싫어하고 오직 예수님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악한 악마가 들어있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서로 싸웠어요. 그들이 언제 짝짜꿍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죽일 때죠. 사람들은 강도를 싫어해요. 강도는 미워요. 그런데 언제 강도를 풀어줬습니까? 누구를 만났을 때? 예수님!!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예요. 예수 믿는다 하면 그 사람 다시 봐야 돼요. 이 사람 미친 거 아닌가, 저 사람이 뭐라고 자기 악마를 이겨서 예수님을 믿어? 이건 말이 안 돼.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다시 의심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입에서 ‘나는 죽어 마땅하고요. 오직 죽어 마땅한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냥 혼자서 대신 일을 다 처리했습니다.‘라고 예수그리스도만 증거 한다면 그 사람 진짜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 믿거든요.’ 하면 가짜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인간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게 돼 있어요. 인간은 예수를 믿는 것도 자기 의가 되고 자기 행함이 되게 돼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예수 믿으니까 비교해서 나도 그딴 예수  나도 믿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밀고 나가서 누가 믿음이 좋은가, 누가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가, 성화의 삶을 사는가, 비교하는 거예요. 이 재미로 사는 거예요. 대신 죽으심의 의미를 몰라요.

그래서 제가 물의 색깔에서 이런 이야기 했죠. 예수 믿는 사람은 의를 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예수 믿기 전의 생각했던 생각이었어요. ‘말씀대로 살아서 이제 의의 종이니까 의롭게 살아야지,’(로마서6장) 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를 때 하는 이야기예요. 성경대로 실천에 옮기면 구원될 줄 알고, 그런데 막상 성령이 오니까 내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을,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의 의가되기 때문에. 무슨 짓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대신 하는 짓 이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우리를 살리고 죽이고 하는 짓이 내 짓이 아니고 주께서 임의대로 살리고 죽이고 병들게 하고 낫게 하고 예수님 지 맘대로 하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도록 사전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이미 의견이 끝난 문제예요.

제가 지난 주일에 그런 설교 했습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어떻게 구원 받을까 애를 쓰다가 막상 성령이 와서 구원 받고 난 뒤에 보니까 이미 창세전에 구원되기로 명단이 돼 있는 사실을, 주께서 다 만들어 놓고 탕자가 밖에 나가서 어떤 탕자 짓을 해도 관계없이 아버지가 어떤 짓을 해도 관계없이 사랑하면 이미 소 잡을 준비하고(그 동네엔 구제역도 안 걸리는 모양이라) 좋은 옷 다 만들어 놓고 이제 돌아올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와 보니까, 왔다는 행위가 상 받을 짓이 아니고, 행위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행위라 하는 것은 창세전에 있던 이미 사랑한 것을 미처 철딱서니 없이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한 자기반성이죠.

주님 선에서 주님 레벨에서 하는 일을 세상의 내 레벨에서 이해한 그 자체에 대한 반성, 내가 착한 일하면 의가 되고 나쁜 일하면 악 되는 줄 아는 고 수준에 대한 회개,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것이 오류라 하는 것을 깨닫는 회개,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용어 자체가 이제부터 좀 어렵게 합니다. 뭐가 어려우냐 하면 ‘상징적 언어’예요. 상징적 언어는 사건화 돼 있고 역사적 언어라 하는 것은 형식화 되어 있어요. 어렵죠? 우발적 사건은 상징으로만 표현이 되고 인간들은 상징화 된 것을 고정화된 형식화, 다시 말해서 내가 지킬 수 있는 법으로 형식을 변화 시키는 거예요. 이 동영상 찍잖아요. 이 파일이 커서 변환해야 돼요. 몰랐는데 오늘 아침에 배웠어요. 관리자가 없어서 제가 다 해야 돼요.ㅎ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쉽게 가겠습니다. 예를 들면 비가 오잖아요? 비가 오는 사건을 우리는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일기 예보를 보면, 오늘 서울에 비 왔습니다. ‘비 왔습니다.’ 말 하면 비 옵니까? 비보고 비 왔습니다.‘ 하면 비가 말을 알아들어요? 아무 상관없어요. 비가 내리는 것은 우리 말 듣고 오는 게 아닙니다. 비가 내리는 것은 누구 말 듣고 내립니까? 조용하네요.ㅎ 갈릴리 바다에 풍랑일 때에 누구 말 들었어요? 풍랑과 바다가 누구 말 들었습니까? 예수님 말씀 들었죠? 누가 놀랬어요? 제자들이 놀랬죠. 놀랠 것 같으면 왜 깨워요. 이상하죠. 도움 청하려 깨워놓고, 잔잔 하라는 아이디어는 그들은 미처 생각 못 한 거예요.

비는 주님 말씀 듣고 오는데, 우리는 주님이 일으킨 사건을 우리는 내 좋아라고 내 편하라고, ‘오늘은 서울 지방에 비가 5미리 왔습니다.’라고 그걸 문장으로 만들어 형식화 시키는  거예요. 그걸 역사적 언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사건 뭉치예요. 사건은 누가 일으킨다? 우리 주님이 일으키죠. 아까 오신 분은 못 들으셨지만, 구원은 누가 일으킨 사건 이예요? 구원은 챙기는 게 아니고 구원은 비 오듯이 우리가 당하는 거죠. 꼭 이런 말까지 해야 돼요? 우리가 강간당하는 거와 똑같아요. 왜 이러십니까? 강력한 힘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강간당하는 거예요.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착한 사람 되고 싶어요. 하지만 주께로 온 사건은 뭐를 해도 ‘너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규정시키는 강력한 강간이죠. 대신 죽으심이니까. ’니가 오죽 못났으면 내가 대신 죽겠느냐‘는 사건으로 온 것이 우리가 구원 당하는 거죠. 구원 당하는 순간 우리는 완전히 옆 사람과 결별이죠. 왜? 그들은 강간을 안 당했으니까. 주님이 얼마나 힘이 센지 모르잖아요. 자기는 자기 힘만 세다고 우기는 거예요. 우리는 맥없이 당했는데, 졸지에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 돼 버렸어요.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성화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이 통합니까? 말이 안 통하니까 오해가 일어난 거예요. 지가 아는 죄와 의의 기준, 지 맘대로 집어넣고 하니 말이 안 통하는 거예요. 다른 불신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끼리의 이야기예요. 한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 교회 다니는 사람, 한 사람은 말씀 때문에 강간당한 사람.

믿음은 어디서 난다? 들음에서. 들음은 어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씀자체가 사건으로만 주어져요. 신학자들은 사건의 말씀을 뭐로 자꾸 전환 시키려 합니까? 형식적인 역사적 언어로 전환시키려 하는데 이 역사적 언어로 바꾸려 하는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이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역사적 해석과 문법적 해석, 이 두 가지로 하는 거예요. 이 두 가지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알아듣는 말로 변환하는 것이 신학자와 목사가 하는 일이라고 주장을 해요. 왜 그렇게 주장을 해요? 그래야 그 사람들이 법으로 실천에 옮겨서 구원 받아 내려고 하는 거예요.

요 일에 선배격인 사람이 누군 줄 알아요? ‘왜 십자가 마을을 공격하고 싶어 하는가?‘에 나와 있어요. 누굽니까?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그냥 칼 들고 자살한 것이 아니고, 누가 죽였다? 죽인 사람이 있다. 그 정체를 대라. 누굽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뭐 놀았던 사람들입니까? 백정이었습니까? 킬러였습니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취미였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뭘 믿는 사람 이예요? A4용지에 뭘 제출했던 사람입니까? 구약 성경 전체를 참고로 해서 하나님, ’진짜 하나님은 이래야 마땅한 하나님입니다.‘라고 제시했던 그 사람들이예요. ’성경 말씀 언약에 의하면 이렇게 오셔야 메시야답습니다.’라고 자기 나름대로 정답을 작성해서 A4용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출하면서 다른 사람한테, ‘나처럼 제출하란 말이야,  나처럼 하란 말이야.’ 라고 율법을 가르쳤던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주동이 되어서 백성들이 거기에 동조를 해서 일으킨 사건이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 그런데 그 십자가 사건을 우리가 믿는다는 의미가 뭐예요? 만약에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순종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뭡니까? 우리가 더 이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이것이 죄인 줄 우리는 수용합니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사건을 뭐로 전환 시키고자 한다? 사건을 우리는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역사적 율법적 언어로써 바꾸는 작업을 했던 그 사람에 의해서 예수님은 어린양이 되어서 희생당했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 하면 영지주의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 영지주의에 대해 연구 많이 했어요. 영지주의라 하는 사람이 많아서 영지주의가 뭔지 연구 많이 했어요.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3:27) 누가 이야기 했죠? 세례요한이 했죠. 이거 영지주의 아닙니까? 만약에 세례요한이 했다는 말 지워버리고(장난 끼로)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고 말만 써서,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를 현판 만들어서 집 현관이나 거실에 걸어두면, 신방 오는 분들이나 목사님들이 보면, ‘그럼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그러면 인간이 할 도리는 뭔데? 누가 이런 잘못된 영지주의 이야기를 해서 신앙을 혼란케 하는 그런 소리를 했느냐?’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성경 요한복음 딱 대보면, 뭐 할 말 있습니까? 세례요한이 했는데. 아마 무리한 사람은 이런 이야기 할 거예요. 세례요한이 복음을 아직 몰라서 그런 거라고.

제가 아까 아들 죽인 아버지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기준이 다르면 먹히질 못합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 내가 낳은 자식 내 맘대로 죽이는데 왜 그러느냐? 왜 말이 많아?’ 라고 기준을 추정한다면, 그 아버지가 징역을 살 수 있어도 인간은 바뀌지 않습니다. 징역 살면 뭐합니까? 인간 안 바뀌는데... ‘맞습니다. 아들 죽인 것은 살인죄 맞군요.’ 이걸 수용 안하겠다는데 징역 5년, 10년 살고 나오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또 애 낳으면 또 죽일 텐데.

바로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어린양을 연구해도 인간의 기준은 안에 악마가 있어서 자기 힘으로 자기가 옳다는 걸 바꾸지 않는 거예요. 바뀌질 않습니다. 그런데 바뀌지 않으면 문제가 뭐냐 하면, 목회자 입장에서 바뀌지 않으면 교회에 교인 수가 없어요. ‘안 바뀌어도 됩니다.‘라고 했어야 교회가 교회를 모독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뭐가 돼야하느냐 하면, 절이 돼야 해요. 사찰이 돼야 되요.

제가 어제 KBS에서 나왔는데 대구 동화사 이야기가 나와요. 대구 동화사에서 뭘 했느냐 하면, ‘폴 니트’라는 세계적인 미국의 신학자, 유명한 종교 학자를 초청해서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다.’라고 같이 동조하는 일종의 심포지엄을 KBS에서 했어요. 제가 안들은 척 하면서 뜨문뜨문 다 들었어요. 그 폴 니트라는 그 유명한 사람 책도 여러 권 나왔어요. 감리교 쪽에서는 아주 좋아하는 사람 이예요. 그 사람 하는 이야기를 보면서 지금 한국 교회가 폴 니트라는 중이 이야기하는 거와 다른 점이 뭐냐, 다른 점이 없어요. 다른 점이 일체 없다니까요. 똑같아요.

그 사람한테는 뭐가 안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 안 나와요. ‘우리가 마음만 낮추면 서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가 나오더란 말이죠. 모든 종교가 관계없이.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이미 그 중들이나 폴 니트가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들이 납득 될 수 있는 인간들이 태어났다 하면 가질 수 있는 그 기준이 있잖아요. ’그 기준은 조금만 오해를 풀면 그 기준은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그 기준들이 서로 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하는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납득이 되는 소리를 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의 기준에 동의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복음을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왜 말을 구태여 삐딱하게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까요? 예수님이 이야기 했죠. 살과 피를 이야기 하니까 오던 사람도 다 떠나가죠. 왜 그 사람들이 떠나가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구원이란 문제는 사람의 기준을 파악해서 자기의 현재의 기준을 자기가 스스로 변경해서 그 기준에 맞추어서 그렇게 구원되는 절차가 아니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절대로 구원될 수 없다. 그 정도로 너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라고 밀치는  힘 자체가 기준이 되는 거예요.

한번 적어 볼게요. 쓰레기에 보물 있는 게 아니고 쓰레기를 쓰레기 되게 하는 그 능력 자체가 보물이다 이 말이죠. 쓰레기에 보물 있는 게 아니에요. ‘아, 쓰레기다.‘라고 들추어내는 그 능력에 대해서 동의하면 되는 거예요. 맞습니까? 쓰레기입니까? ’예 얻을 거 없습니다.‘ 라고 동의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대신 죽으심’ 오죽 니가 못났으면 내가 대신 해야 되느냐, 오죽 못났으면. 그래서 이 땅에서는 하나님, 하나님이 A4용지에 써봤자 다 찢어버리고 하나님이 직접 내시는 것은 우리가 원했던 A4용지에 썼던 ‘이런 하나님이었으면 좋겠습니다.’는 일체 안 받아들이고 일방적으로 누굴 보냈습니까? 어린양을 보내신 거예요.

어린양을 이해하면 그것이 정답이죠. 그분이 대신 죽으신 것을 이해하면, 왜 대신 죽으셨는지를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을 챙긴 것이 아니고 구원을 당한 사람이죠. 강간당하듯이 구원을 당한 사람. 그렇다면 그것은 일방적으로 누가 결정하는 겁니까? 우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우리가 두리번거리면 뭐가 따라온다 했습니까? 이야기 해보세요. 무슨 기준이 나오죠?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이 나오죠. 이 기준은 상징입니까? 역사적 언어입니까? 역사적 언어죠. 역사적 언어라 하는 것은 쉽게 이야기 하면, 과거에 이렇게 해먹었더니 먹히더라. 요 고대로 하면 먹히겠지.

사도행전에 교회 상이 4가지 있죠. 양육과 교육과 교제와 예배로 돼 있죠. 요걸 고대로 우리가 역사적으로 반복하면, 똑같은 성령의 혜택이 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그것을 바라고 믿고 행하는 것, 그게 바로 역사적 언어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뭐예요? 역사적 언어가 아니고 상징이죠? 상징이라는 것은 무엇의 뭉치? 우발적인 사건의 뭉치!!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내가 구원 받고자가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몰랐었는데 구원 되고 보니까 본인이 144.000이고 구원 되고 보니까 하나님의 의의 인, ‘인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 되고 보니까 전에 있던 내가 사람들을 살피며 알았던 기준은 전혀 하나님 나라에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죠. 주위 사람과 비교해서 얻는 기준, 의논해서 얻는 기준, 의논해서 얻는 기준을 이 세상, 이 땅에서는 그걸 가지고 진리라 하고, 그걸 도덕이라 하는 겁니다. 이 글에 대해서 제가 ’도덕론의 발달‘이라는 글에서 제일 마지막 대목으로 나와요. 하보먼스가 이야기하기를 공론화 시키는 것, 미래의 취지는 바로 혼자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의견을 공론할 수 있는 그런 장을 만드는 것이 진정 오늘날 국가가 국민들에게 해야 될 것이다. 그걸 두 자로 ’소통‘이라 합니다. 그 소통의 정치를 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노무현 대통령이죠. 우리 다 납득 되잖아요.

자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 했냐 하면, 상징은 사건의 뭉치다. 상징은 뭐로 환원되면 안 된다? 역사적 언어로 가선 안 된다. 요한계시록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지난번 시간에는 상징을, 역사적의 반대는 뭐죠? 묵시라고 이야기 했죠. 묵시적이라는 것이 뭐냐? 김성환 목사님의 글 속에 있죠? ‘십자가에 무슨 시간이 있느냐, 라는 글이 있죠. 묵시라 하는 것은 역사와 반대기 때문에 여기는 흐름이 없죠. 흐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우리의 인생에서는 뭐라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걸 수명이라 하고 더 쉬운 우리말로는 나이 먹었다.

몇 살 되었어요? 물으면 시간이 태어나서 몇 년 경과 되었습니까?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시간을 본인이 가졌습니까? 제가 보니 한 40(마흔) 돼 보이시는데, 40년을 가졌습니까? 안 가졌잖아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세월이 40년이 거쳐 지났죠. 그런데 40년 지난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우리 몸이 무엇에 기준해서 하느냐 하면, 지난 40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지난 40년을 거쳐 살았기 때문에, 내가 40살 먹었다고 하는 자아는 시간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 몸은 ‘나는 40 싫어, 30 되고 싶어,’ 아무리 우겨도 이 몸 자체가 40년을 경과한 몸 이예요. 나이 80넘은 할아버지가 ‘나는 이래도 마음은 청춘입니다.’라고 백날 큰 소리 쳐도 소용없습니다. 몸은 본의 아니게 이미 80이라는 세파를 거쳤기 때문에 몸은 80이고 지 생각은 20대고 그렇죠. 왜 20대가 되고 싶습니까? 왜 몸의 지시를 안 따라요?

인간의 자아의 기준은 묵시적인 시간이 아니라 자기가 따로 구축한 나의 역사를 챙기고 싶은 거예요. 이걸 간직하고 싶은 거예요. 갖고 싶은 역사를 가지고 뭐를 하느냐 하면, 시간 속에서 나를 어떻게 조작해서 나를 구원해 내느냐 거기에 열중하는 거예요. 하지만 몸은 말을 듣습니까? 안 듣습니까? 자기는 구원 받고 싶어도 몸은 내 말 듣지 않고 누구 말 들어요? 예수님 말씀 듣거든요. 아이, 불신자도 몸은 예수님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 알았어요? 그 사람 지옥 갈 때 지옥 가고 싶어서 지옥 가는 거 아닙니다. 지옥 갈 몸이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그 몸, 주께서 만든 지옥에다가 ‘너는 여기에 적합해. 이 자리가 니 자리야.‘ 하고 집어넣는 거예요. 몸이 안 갈래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원래 안 가려 해서 간사람 없어요. 지옥이 좋아서 간 사람이 100%입니다.

이 자아라는 것이 그래서 자아가 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속에 있는 악마에 의해서 자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걸 공중 권세 잡은 악한 권세 잡은 진노의 자녀...(엡2:2)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더니, 왜요? 우리가 나쁜 짓 많이 해서? 아니요. 우리보다 더 센 영이 진노 받을 영에 우리가 꼼짝 못하고 매어서 못 빠져 나오고 있었더니 내 선에서 해결 안 되는 것을 대신 해결하기 위해 대신 오신 분에 의해서 우리는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이미 우리는 시간이 없는 묵시 세계에 앉았다고 그렇게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있어서 믿음조차도 내 자아(악마)가 만들어 낸 믿음이 아니고 누가? 하나님의 선물로 하늘에서 택배로 온 믿음이기 때문에 내 행위로 전환 되지를 않아요. 믿음이 나의 행위로 전환되지를 않기 때문에 믿음과 더불어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창세전에 준비된 모든 축복도 믿음과 더불어서 함께 다 같이 내용물로 다 우리에게 주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거 뜯어보느라고 정신없죠.ㅎ 그러니까 우리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오직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 말이죠. 받아 보지도 않은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죠. 하지만 받아 본 사람은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의 차이를 압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는 어디서 온 겁니까?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다? 세상에서 왔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어디 경계에 있습니까? 세상으로 오는 것과 하늘에서 오는 것에 성도가 그 경계선에 서 있는 겁니다. 이래서 양쪽을 다 아는 거죠. 아, 이것은 세상에서 온 것이고, 이건 하늘에서 온 것이고, 그런데 하늘에서 온 것은 내 공로도 아니고, 내 실천력도 아니고 내 기도해서 온 것도 아니고, 전부 다 대신 죽으신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거예요. 세상 것은 누구 이름으로? 내 이름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획득하려고 애써서 얻은 것이고, 저쪽의 공짜로 주신 것은 내 이름은 조금도 개입되지 않고 내 노력도 개입되지 않고 오직 전부 다 예수님 노력으로 주어진 거죠.

다음 시간에.........
 이한례(IP:119.♡.121.61) 11-02-18 16:19 
하나교회110210요한계시록(상징어 해석)-9강b-(이 근호 목사)
제 9강b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두 번째 시간은 그 사건들이 어떻게 상징으로 뭉쳐지느냐 그 과정을 설명할게요. 사건들의 뭉치가 여러 가지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들이 있잖아요.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시고 또는 베드로는 재밌죠.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이 자기 능력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은 자기는 땅위인줄 알았어요. 물인지 땅인지 구분도 못하고 누구만 쳐다봤습니까? 예수님만 쳐다보니까, 예수님만 쳐다본다는 자체가 중요하지 내가 지금 땅에 있느냐, 물에 있느냐는 의미 없거든요. 그런데 순간 바람이 부니까 폭풍이 부니까 폭풍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대처하지? 폭풍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대처하지? 하고 눈 꼬리를 자기에게 보는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바닥을 보는 순간 풍덩 빠진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은 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이상은 절대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끄집어내는 어떤 고상하고 대단한 기적도 내가 나를 쳐다보는 이상은 그런 기적은 주님께서 일으키지 않는 기적입니다. 주님의 기적은 얼마나 대단하고 요란스러우냐가 아니라 어떻든 내가 나를 안쳐다보는 순간이 있느냐, 그게 기적 이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만 쳐다보도록 살게 돼 있는데, ‘내가 미쳤지, 내가 왜 내 몸을 안 쳐다봐, 내가 주님을 바보같이 쳐다봤을까,’라는 그 짧은 순간이 기적의 순간 이예요. 고거 한 2초갑니다. 고거 후딱 지나가버려요. 고 순간 자기 몸을 통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 그 사건은 역사적, 문법적 사건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건 우발적인 사건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상징, 요한계시록을 상징으로 묘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언어를 읽으면 이걸 전부 뭐로 번역한다 했습니까? 역사적 문법적으로 다 번역하는데, 왜 번역합니까? 우리가 이것을 고대로 실천에 옮기려고 그런 시도를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책이 다 그래요. 사실은 다 상징 이예요. 성경은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뭐를 쳐다본다? 여전히 나 자신이 이것 지켜서, 그 다음에 어떤 반대급부가 나한테 축복이란 이름으로 들어오느냐를 내다보고 하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7장 12절 봅시다.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할 때 여기에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 이라는 용어 하나, 하나가 자기를 쳐다보지 않을 경우에만 나오는 용어들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려고 한 순간 이 용어는 실천되지 않습니다. 자기를 잊어버렸을 때, 나는 어느 정도 레벨이며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의 인간인가를 그걸 몰라요. 그저 눈앞에 뭐만 보이느냐 하면, 어린양만 보일 때.

나는 죽어 마땅하고 대신 모든 것을 처리하신 그 어린양이 너무 고마울 때, 너무 즐거울 때, 그러한 자태가 남들에게 그대로 비취는 것이 바로 능력이고 감사고 경배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육의 힘으로 이게 가당치 않죠. 그러면 그렇게 사건을 일으키면 그 사람은 누구 소속이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그 순간만이 아니고 늘 그렇겠지만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 사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겠죠. 소속이 나는 더 이상 내 소속이라는 것이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누구하고 비교해도 ‘나는 이렇다’고 안 나오고 ‘우리 주님은 이렇다’고 이야기 하겠죠. 주님은 그렇다는 것이 결국은 대신 죽으심의 사건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했다 이렇게 되죠. 대신 죽으심!! 그냥 구원했다 하면 증거가 십자가로 안 모아지잖아요.

제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성경 구절 전체가 뭐로 이어져 해석해야 된다고 했습니까? 십자가로 이어져야 돼요. 이거 하는 작업을 아무도 안 하고 있어요. 못하고 있어요. 십자가 마을에서 목사님들이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여기에 신경 써야 해요. 아가 서를 통해서 사무엘상하를 통해서 역대기를 통해서 디모데 전 후서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성경 하나, 하나가 어떻게 십자가와 연결되어서 오직, 왜,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에만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지혜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인지, 왜, 인간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숨어있는 비밀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육으로는 알 수 없고 영이 와야만 알 수 있는지 모든 성경 구절이 다 그렇게 돼야 되겠죠.

잠시 요 하는 방법을 제가 힌트를 말씀드리면, 인간들이 이렇게 있잖아요. 인간들에게 먼저 하나님 쪽에서 뭔가 주어져요. 그 주어진 것이 언약입니다.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언약은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 한 것처럼, ‘강한 손과 편 팔’로 오죠. 언약이 내장 돼 있어요. 언약이 강한 손과 편 팔이 오게 되면, 이것은 인간이 언약을 붙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 붙든다? 포크레인 같은 언약이 인간을 붙들 때, 그걸 강한 손과 편 팔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걸 붙들면서 속에 숨어있는 죄가 드디어 슬그머니 나오게 됩니다. 저 강한 손과 편 팔을 아예 내 것으로 챙겨서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필요할 때마다 강한 손과 편 팔을 내가 소유한 것을 발휘하면 나는 얼마나 대단한 신앙 인 행세를 할 수 있겠나 하는 노림수가 있죠.

주신 것을 덮친 것을 내 것으로 전환 시킬 때, 그때는 뭐가 깨집니까? 언약이 깨어버리죠. 그러면 언약에 따라서 저주(멸망) 당하죠. 주님의 것이 주님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나와야 할 텐데, 이 사건을 내 손에서 뭐로 전환 했습니까? 역사와 법으로 내가 언제든지 요 고비만 넘기면 그 능력은 그대로 계속해서 언제든지 되살아나는 그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 언약을 내 안의 언약으로 붙잡으려고 시작할 때, 이미 그것은 언약에 의해서 저주 받아야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걸 종교라 하죠. 종교 생활이라 하죠.

언약이 주어지면 우리 속에는 언약이 우리를 겨냥한 것처럼 이렇게 오해합니다. 지키면 축복이고 안 지키면 저주인줄 알죠. 그런데 언약은 누굴 겨냥했습니까?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투과해서 우리 속에 악마와 겨냥해서 준 율법이었습니다.

요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과 싸우는 대상이 누굽니까? 뱀의 후손이죠. 뱀의 후손이라는 상징을 구성하기 위해서 우리 몸은 뱀의 후손이라는 것은 묵시적인(상징적인) 것이잖아요. 뱀의 후손이 2010년도에는 뱀의 후손이고, 2011년도에만 뱀이 후손이 아니고, 시대를 초월해서 뱀의 후손이잖아요. 우리가 아담 안에 있는 것처럼. 사람이 아무리 자식을 많이 나도 다 같이 아담 안에 있는 것처럼. 묵시적으로 하나의 동일 선상에 포함돼 있다 말이죠.

그렇다면 묵시라는 것을 사람들은 육을 통해서 뭐로 전환 시킵니까? 역사로 쫙 깔아버리는 거죠. 그러면 누굴 낳고, 누굴 낳고 누굴 낳고 이렇게 된 거예요? 조상숭배하고 아브라함은 우리 아비이고 우리는 아브라함 혈통이니까 우리는 죄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요한복음 8장에 나오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합니까?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 아니고 너희 아비는 누구다? 마귀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뭐를 겨냥한 거예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마귀가 낳은 마귀의 새끼들이다.

그걸 가지고 저는 ‘물의 색깔’에서 인간들은 마귀의 피부요. 마귀의 살결이요. 마귀의 혓바닥이요. 마귀 혓바닥이 야고보서에 나오죠? 색깔의 실체가 물이다 말이죠. 악마가 울렁거릴 때마다 성질나오죠. 악마를 보고 겨냥하면 악마는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독촉했던 그 상대잖아요. 그러면 우리보고 어떻게 대처하라 합니까? 선악적으로 대처하라 하죠. 선악적으로 대처하는 게 뭐예요?  ‘나는 악은 줄이고 선은 행했습니다.’라는 그것으로 대처하겠죠. 이게 바로 언약이 주어지면, 이렇게 나오는데 이걸 신명기 9장에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 내가 너희에게 약속의 땅에 간 것은 너희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고, 너희들이 의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맹세로 인하여 들어가게 하신다. 이제는 아브라함의 맹세로 들어오고 언약이 오면 그들은 결국 멸망할 때까지 가나안 땅에서 그들은 맘껏 오해 속에서.

오해가 뭡니까? 언약은 우리가 지킨다 생각한 거예요. 하지만 언약은 스스로 지키는데 그것은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열심‘ 이라 했고 그 하나님이 열심에 주인노릇 할 건데 그가 바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임마누엘 되시는 분이예요. 그분의 원래 열심에 원수를 뽑아내는 숨어있는 주인공이었어요. 이렇게 하면 이사야의 모든 말씀을 가지고 이사야의 모든 말씀은 우리 속의 있는 죄(교만, 우상숭배)를 들추어내는 힘, 쓰레기 속에 보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보물이 있어서 온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안개고 쓰레기고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을 맘껏 들추어내는 그 능력이 축복 이예요. 그게 축복이요. 자비요. 사랑입니다.

사람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순간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합니다. 고 몇 초 안 가지만, 그 순간 행복해요. 어떤 사람은 3초가는 사람도 있지만, 아이고, 너무 짧다 싶은데.ㅎ 내가 아무것도 아닌 순간, 우리는 순간 행복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아가 버리죠. ‘난 니한테 지기 싫어.’ 이렇게 자기한테 눈 돌려버리면 무거운 쇠 덩어리가 자기한테 도달되죠.

모든 언약은 이처럼 인간을 인간 속에서 주어진 언약 안에서 해명하면서 결국 여기서 뭐가 드러납니까? 죄라는 죄는 죄다 다 드러나서 결국 이 죄가 벌(honey)이 있으면 벌이 흩어져 있는 게 아니고 벌이 날 때 한꺼번에 날죠. 말벌 같은 경우에. 한꺼번에 뭉쳐져서 어디를 쏘게 돼 있어요? 바로 예수님을 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세력이 생명나무 자체를 공격하는 형식이 됩니다. 공격할 때 그때에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너희를 책망하시리라.

그 기준은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가지고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비로소 규정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은 죄다. 왜?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해야 돼요.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이미 죄라고 규정지었기 때문에 뭘 해도, 설교해도 강의해도 기도해도 죄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죄를 지을 필요가 없어요. 그 규정을 어느 규정에서 합니까? 언약 적 규정에서 하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그것이 창세기3장15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대결 구조아래 우리가 멋도 모르고 거기에 끌려들어가는 입장에서 졸지에 우리는 죽게 돼 있죠.

앗수르 군대가 185.000명 죽었죠? 그 대목 기억나십니까? 그 185.000명 인적 사랑 카드 한번 보세요. 다 자기 집에서는 효자고 자기 직장에서는 훌륭한 사람이고, 그 185.000명 아이 하나, 하나 병력 하나 하나 군사 하나, 하나 개인적인 가정환경 다 조사해보면, 다 나름대로의 존재가치가 있을 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천사에 의해서 한꺼번에 앗수르 군대 다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 왜 죽었습니까? 언약 때문에 죽었죠. 누구한테 대들다가?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에게 대들다가 왜 언약의 주인공에게 대드느냐는 이유 때문에, 각자 살아온 환경 다르고 과거 다르고 부모 얼굴 다 다르고 형제 다 다르고 사는 집 다 다르고 형편이 다 다른데 한날한시에 천사한테 다 죽었습니다.

그게 꼭 미래 모든 인류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미국 살고 어떤 사람은 이태리 살고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해적질해도 죽기는 미국에 있는 대통령이나 해적질하는 해적이나 전부 다 언약 때문에 지옥 가야 되는 거예요. 검사나 의사나 판사 됐다고 동네에다 누구 집 합격 했다고 떠들썩했지만, 언약 앞에서는 그거는 처음부터 죄인이었고 그 죄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판사 되기 위해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죽을 때 판사로서 지옥가게 되는 거예요. 지옥 가서 판사 노릇 하는 게 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인 차이를 없애버립니다.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왜 사건이 상징적 언어에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옛 ‘의미론 적 단위’로 단절돼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렵죠? 하도 어렵게 해놓고 쉽게 한다 해서 들어보니 아무것도 아니라 하는데.ㅎ ‘의미론 적 단위’는 사람이 손을 못 대요. 단위는 센티미터, 키로 미터거든요. 요 단위는 분해하면 단위가 없어져요. 몇 평 몇 평 있잖아요? 33평, 34평, 그 평이 3.3제곱미터잖아요. 그런데 미터법 나오기 전에 평으로 할 때는 평을 또 나눕니까? ㅍ + ㅕ+ ㅇ 이렇게 나눕니까? 아니죠? 최소한의 분할되지 않은 단위죠?

주님께서는 사건을 사건으로 뭐를 하느냐 하면, 상징적 언어를 만드는데, 그 언어는 의미론 적 단위가 되는 거예요. 그 단위라 할 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죠. 언어를 사용할 때 단절, 분절이란 말이 어렵기 때문에 단절이란 말을 쓰는데, 이쪽과 이쪽을 단절 시키는데, 끊어서 단절. 여러분! 이번 설이 저한테는 인상적이었습니다만, 이번 설에 강정 드셨죠? 강정 만들 때 큰판에다 쌀 튀기고 엿을 넣고 깔아서 그 다음에 무슨 작업 합니까? 격자 구조로 잘라내죠. 그 잘라내는 작업에 인간이 관여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 잘라낸 하나, 하나가 단위가 되는 거예요. 그게 힘이란 단위, 영광, 지혜, 감사, 존귀, 능력, 주여, 어린양, 피, 십자가 피. 전부다 성경을 잘라낸 강정의 단위, 단위가 되는 거예요. 고 하나, 하나에 뭐가 들어있어요? 사건의 뭉치가 들어 있는 겁니다. 그 단위에 기준해서 풀어내면 그게 뭐냐, 사건의 만개, 펼쳐짐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우리 손으로 단절이 안 되고,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16장의 말처럼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누가 우리를 책망하신다? 성령이 와서 우리를 책망하죠. 책망할 때, 죄, 의, 심판에 대해서 우리 나름대로의 역사화 된, 우리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죄, 의, 심판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죠. 우리 나름대로의 죄, 의, 심판이 있는 거예요. 이것은 어디서 만들었습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폴 니트와 동화사 주지가 이야기 한 것처럼 인간들이 이미 갖고 있는 그 기준, 그 기준은 내부에 있는 악마의 노림수, 악마는 뭐를 싫어한다? 바로 생명나무를 공격하는 것이죠. 생명나무의 대신 죽으심을 싫어하는, 그 대신 생명나무의 대신 죽으심 말고,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경건해지고자 하는 우리 행위에 기대를 거는 그러한 기준을 가지고 의와 죄와 심판을 이걸 잘라낸 거예요.

그 잘라낸 작업에 최고 수준에 있는 사람을 예수님도 인정했어요.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 그 바리새인들이 잘라낸 강정속에 뭐도 포함돼 있다? 그 속에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의롭다는 의가 들어있겠죠. 그 의에서 누구 의를 친다? 그 의에서 인간들이 만든 아래 질서의 기준의 의를 하늘나라의 어린양의 기준이 책망하는 것이 성령이 책망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서 우리는 그동안 헛짓하고 왔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익히 아는 기준을 마치 성경의 참된 해석인 줄 알고 오해했던 겁니다.

그 의와 죄와 심판은 누구를 지향하게 돼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예수님의 공로!! 대신 다 이루심과 관련된 그런 언어들인데, 우리는 그 성경적 언어를 뭐로 해석합니까? 예수 믿어주는 것도 내가 믿고 예수 위해 사는 것도 내가 살고 그 초점이 어디로 옵니까? 나에게로 오죠. 그럼 아까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때, 왜 걸었습니까? 자기에게 초점을 둬서 ‘내가 물위를 걸어볼까’ 해서 걸었어요?  뭘 봤기 때문에 물인지 불인지 땅인지 구분도 못했어요. 예수님을 쳐다보니까 분간도 안됐잖아요. 그런데 자기를 쳐다보는 순간. ‘내가 미친 짓이지, 뭐하는 짓이야?’ 하고 빠졌죠. 어느 게 정상입니까? 사람이 물위를 걷는 게 비정상 이예요.

그래서 하늘의 소식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것이고 비정상적인 기준이라고 미쳤다고 그렇게 욕을 얻어먹게 돼 있어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법적인 명령을 내놔라 하는 거예요. 명령에 대해서 지난주일(2011.2.06)날 아침에 내무반 검렬 이야기로 이야기 다 했어요. 이미 군인 된 자가 내무반 사열할 때 막대기 딱 들고, 군에 구타 없다고요? 억지로 끌려온 사람 안 때리면 말 안 듣거든요. 그리고 ‘야, 야, 야 군화 이게 뭐야, 이게, 이래 가지고 총알 나가겠어? 이거 봐, 총대 손질 한 것 좀 봐. 베개는 왜 저기 가 있어?’ 나무란다는 게 뭡니까? 너는 사회인이 아니고 뭐다? 군인으로 다 이뤄졌다. 깰 때마다, 나는 군인이지, 깰 때마다 ‘나는 구원받았지.’와 똑같은 이야기예요.

성경의 모든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들은 속속들이 우리를 벌거벗겨서 우리의 뼈와 숨어있는 모든 것들을 죄를 죄 되게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그냥 쓰레기를 쓰레기답게 들춰내는 게 뭐라고요? 그게 보물이듯이, 죄를 죄 되게 드러내는 그 능력이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증명하는 능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내가 사람의 신분으로서는 흠이 없지만 나는 주님 앞에서 죄인 중에 괴수라’ 이야기 하죠. 이게 어떻게 성령 받지 않고서 이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좀 더 의미를 봅시다. 의미론 적 단위가 되게 되면, 진짜 이제부터 어려운데, (나도 골치 아프다 어려운 걸 하려하니), 왜 자꾸 어려운 걸 하려고 합니까? 따지신다면, 다시 할게요.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챙기는 걸로 바꿔요.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 그것마저 내 속에 들어오면 난 누구보다 더 센 사람이 돼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보다 더 센 존재가 돼 버리죠. 그게 바로 마귀의 노림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의미론 적으로 담겨있는 사건의 뭉치가 의미론 적인 단위가 된다 말이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기 문이 있잖아요. 똑같은 문에 글자를 씁니다. 여기 문에  ‘신사’ 라고 쓰고 ‘숙녀’ 라고 쓰면, 이 신사라는 문은 신사라는 화장실이 되고, 이것은 숙녀 화장실이 되겠죠. 이걸 ‘기표 밑에 기의(의미)가  미끄러진다.'는 말을 해요. S에 새끼를 쳐서 작은 s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의미론 적 단위를 주게 되면, 의와 찬송과 존귀를 주게 되면, 이 찬송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S : S 예요. 다시 말해서 한 가지의 표시는 오직 한 가지의 사물에게만 해당이 된다고 보는 거예요. 이 꽃이 장미라면 백합은 장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사고방식의 해석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찬송과 영광, 여기서 찬송이란 말이 나오면 우리는 뭐를 보느냐 하면 노래를 찬송이라 하잖아요. 노래 부르면 찬송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밑에 의미가 돼 버리면 우리가 길을 걷는 것도 찬송이 돼 버리고, 남에게 구제하는 것도 찬송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까. ’여호와는 나의 찬송이시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라 돼 있잖아요. 그러면 여호와 떼버리고 밑에 남아있는 작은 s들, 이 작은 s를 ’기의‘라고 해요. 큰 글자(S)를 기표라 하는데, 작은 새끼(s)들끼리 모아 놓으세요. 돌맹이 넓적한 거하고 구원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주님과 연관돼 버리니까 ’여호와는 나의 찬송이시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가 된다 말이죠.

교회에 의사가 오나 판사가 오나 지가 잘났다고 할 것 없이 이게 하나의 돌출 부분이니까 이게 하나, 하나가 살 가치도 없는 존재인데 누구 때문에? 의사건 판사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신 죽으심의 의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한 몸이 되는 거예요. 몸의 지체가 되는 겁니다. 찬송과 영광만 예를 들었죠? 그러면 여기에 지혜와 감사가 들어간다 말이죠. 그러면 찬송이라는 단어, 의미론 적인 단위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뽑는다면, 감사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면 이 의미는 작은 s들, 새끼s들, 의미가 같이 겹칠 수도 있겠죠. 어떤 때는 감사가 되고 어떤 때는 찬송도 되고, 어떤 때는 창조도 되고 어떤 때는 구원이 되죠. 왜 이렇게 의미가 다양하게 되는가? 그 의미가 여러 가지의 인간들의 기표(표시하는 ㄱ, ㄴ등) 상관없이 통할 수 있는 것은 그 통하게 하는 피가 흐르기 때문에, 새 언약의 완성이 ‘피’입니다.

언약이 흐르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이 흐르기 때문에, 한 자로 말하면, ‘피‘가 흐르기 때문에. ’찬송만 해도 구원 못 받고, 감사해야 구원 받습니다.’라는 말이 잘못 된 거예요. 왜냐하면 찬송하고 감사하고 그 다음에 예배해도 구원 못 받아요. 그건 뭐를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게 통하는 새 언약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기 때문에 감사해야 되고 바빠요. 성부도 섬겨야 되고 성자도 섬겨야 되고 성령도 섬겨야 되고 왔다 갔다 바빠요. 결국은 한 자로 모든 것이 통하는 것은 ‘다 이루었다’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한 자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 해석을 해내야 돼요. 그거 누가 합니까? 십자가마을 목사님들이 하셔야 되죠. 한 윤범 목사님이 하셔야 돼요. 그 해석!!

라캉의 공식:

이런 공식이 있어요. 또 있는데 더 복잡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언어를 다룰 때, 요 한계를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어떤 신학자든 어떤 철학자든 신문을 같이 봐도 요 한계에서 벗어나서 읽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거예요.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 문자를 아무리 원어로 해석해도 소용없어요. 왜 소용없느냐 하면, 옛날 고대 언어는 언어의 범위가 넓지 않아서 한 가지 용어가 여러 가지로 써먹었어요. 요새 언어는 세분화 되잖아요. 물건 하나, 하나에 언어가 붙잖아요. 옛날 고대 문화적 입장에서 그 언어를 오늘날 언어로 사용한다는 자체가 거짓말 이예요. 다만 성경에서 이 뜻은 이 뜻이라고,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함께 있습니다.’라고 하면,  임마누엘이라는 그 한 가지 일만  성경의 의미가 아니고 그것을 하나님의 함께 있음이라고 표시하신 그것조차도 성령께서 주신 하나님의 상징적 언어로 받아들이는 고정도로 그쳐야 돼요. 성경보다 더 나가면 안돼요. 성경 모든 언어에서 더 나가면 객기입니다. 신학자들 신학생 기죽이려고 언어 막 쓰죠.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언어의 오브 라이트, 구약의 최고라 하죠. 그 사람이 다 이야기 한 거예요. ‘언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언어는 내가 최고다. 언어는 깨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말장난 이예요. 그걸 분석해서 뭐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럼 뭐가 나오느냐? 고백이 나오죠. 어떤 고백? 그 고백에 대해서 13절에 나옵니다. 아, 이 고백도 어려워요. 이 고백이 누구는 OO다 . ’아무개 누구누구는 O다.’라는 식의 고백이 안 나오게 돼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바리새인보고 뭐라 했습니까? ‘너는 메시야냐? 했을 때 뭐라 했습니까?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너는 그럼 선지자냐? ‘선지자 아니다.’ ‘제사장이냐?’ ‘제사장 아니다.’ 세례요한이 왜 그렇게 한 거예요? 나는 선지라라 말해도 되는데...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의미론 적 단위를 푸는 기준이 예수님 쪽에서 푸는 것을 인간 쪽에서 풀어버리면, 인간 쪽에서 오해해요. 왜냐하면 풀어진 그것이 어디에 들어갑니까? 자기 기준 속에 들어가 버려요. 자기 기준 속에 들어가 버리면, ‘난 오늘 세례요한한테 선지자, 제사장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어. 세례요한은 선지자 아니야. 완전 사기꾼이야.’ 지 맘대로 생각해요. 지 맘대로!!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뭐? 세례요한이 선지자 아니라고?’ ‘나 들었어.’ 녹음하면서 다시 전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입니까? 지금 녹음 됩니다. 말만 하면 거짓말하니까 못 살겠어. 당신 선지자야? 선지자 아니야? ’ ‘나 선지자 아니야.’ 끝, ‘거봐, 녹음 됐잖아.‘ ’세례요한 선지자 아니다.’라고 해석을 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무슨 기준을 노출 시키는 겁니까?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기준을 유지하고 있음을 노출시키는 방식이죠. 그 방식이. 그럼 세례요한이 ‘난 선지자 아니다. 제사장 아니다. 난 메시야도 아니다.’ 그걸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거예요? 본인이 한 거예요? 누가 시킨 거예요? 예수님이 시킨 거죠. 하나님이 시킨 거죠. 하나님의 의로 시킨 거예요.

너희들이 말하는 체제하고 질서하고 이야기하는 주님의 이야기하는 체제자체가 너희들은 너희 몸 사랑, 내 사랑, 어화둥둥 내 사랑, 결국 내 사랑 돌아오는 그런 식의 해석 체제하고, 베드로처럼 자기 자신을 몰라요. 물인지 땅인지 몰라요. 자기를 잊어버리고 예수님만 진짜 몸으로 보이는 그 기준하고 같을 수가 없죠. 그래서 여기 13절에 보면, “장로 하나가 응답하여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할 때 14절에 뭐라 합니까?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압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그런 질문 했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예수님 발에 향유로 닦을 때, 그 우는 것 자체가 바리새인 너희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몰라. 왜? 사랑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분이 하는 말이 ‘그 누구 때문이냐, 예수님 때문이라고 똑바로 왜 말 못하느냐, 저는 답변 했죠. ’ 그 눈물 자체가 그 모든 것들 다 충분하게 설명해 줬다. 왜? 그들은 울지 않으니까. 그리고 울면서 기뻐하지도 않으니까. 기뻐하지도 않을 인간이 울지도 못하는 인간이 예수란 말을 들은들 이게 예수겠습니까? 자기 이해대로 지 맘대로 해석한 예수겠죠. 엉터리 예수죠.

“주여 당신이 누구십니까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가로되.” 지금 장로가 몰라서 묻는 게 아니죠? 이미 알죠? 장로가 뻔히 알죠. 알면서 뭘 묻느냐 하면, 답변을 누가 합니까? 이미 구원 받은 장로가 마침 구원 받아서 오고 있는 사도요한과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 거예요. 결국은 질문의 답을 얻어내겠다는 게 아닙니다. 가르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뭡니까? 양쪽 다 작은 새끼s들이 결국 뭘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구원되게 하신 그분의 하신 일을 다 같이 쳐다보는 거예요. 쳐다보게 한 밑에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우리는 다른 분에 의해서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걸 보이기 위한 주고받음의 대화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주인공이  14절에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양이 피를 흘리는 것은 언제 피를 흘리죠? 어린양이 토실토실 하면 더 이쁠텐데 왜 피를 흘리죠? 어린양은 뭘 위한 어린양입니까? 대신 죽어야 될 어린양이죠? 대신 죽어야 될 어린양의 피가 묻혔다는 말은 사실은 죽을 분은 어린양이 아니고 누가 죽을 사람입니까? ‘바로 내가 죽을 사람입니다.‘ 라는 고백을 마구 쏟아내면서 쫄랑쫄랑 누구 뒤따라가요? 우리 대신 죽으신 어린양을 뒤따라 갈 때, 그들이 ’나는 죽어 마땅하고 사실 죽을 자는 납니다.‘라는 말을 장로나 이쪽이나 서로가 고백할 때, 누구의 영광과 누구의 감사만 높아져요? 어린양만 높아지는 그 체제 시스템, 그것이 이 지상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의 보편성이고, 공통성입니다. 그 외에는 없어요. 그 외에 다른 일체가 없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그래도 전도는 해야지, 당신은 피만 이야기 하고 부활은 왜 이야기 안 해? 재림은 이야기 안 해? 봉사는 이야기 안 해? 당신이 그렇게 가르치니 구원 받았다 해놓고 교회 한 푼도 안내고, 헌금도 안하고, 교회 꼴이 좋지,

제가 주일 날 아침에 이런 이야기 했죠. 교인들이 헌금 안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만큼 싫고 안 좋아서 헌금 못 내겠다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요. 목사가 교인들 관리할까요? 그래서 앞에 권사님한테 이야기 했어요. 권사님, 헌금관리 제가 해 드릴까요? 원천징수로 해드릴까요? 지갑 저한테 맡기시죠. 제가 초반부터 십일조 다 떼버릴 테니까... 그렇게 할까요? 주고받는 대화 속에 뭐가 섞여 있어야 됩니까? 피가 있어야 되죠. 피가 저쪽에 흘러가면 돈 내는 행위가 될 것이고, 피가 이쪽에 흘러가면 예배하는 행위가 될 것이고, 피가 이쪽으로 흘러가면 고아원 방문하는 구제하는 행위가 될 거예요. 하지만 구제를 자랑하지 않고 헌금을 자랑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그 구제와 헌금 안에 뭐가 흐르기 때문에? ‘바로 나는 헌금할 자격도 없고 구제할 자격도 없고 예배할 자격도 없는데,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내 안에 흐르기 때문에 나는 구제라는 돌출 행동을 하고 있고 헌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베드로 같은 경우는 말도 안 되는 물위를 걷는 이 짓을 하고 있단 말이죠.

그럼 헌금을 하면서 누구를 안 쳐다봐요? 날 안 쳐다봐요. ‘저게 얼마냐? 안 본다니까요.ㅎ 주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면서 예배하고 헌금하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전부다 상징적 언어기 때문에 이것이 돌발된 사건의 묵시잖아요. 사건의 뭉치죠. 그런데 헌금할 때 나를 안 본다가 역사적, 문법적으로 뭉쳐 버리면 그때부터는 무슨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까? 이걸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해괴한 짓이 시작되는 거예요. 아!! 이거는 진짜 어렵죠?

예수님의 피를 생각하는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그 순간을 우발적인 사건으로 차후 적으로 확인하면 되는데, 아! 내가 지금 그런 지경, 환경에 있구나.’ 확인하면 될 걸,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걸 새삼스럽게 실천에 옮기려고 시도한다 말이죠. 어떻게? 주여 딴 것은 생각하지 말고 피만 생각하게 하소서,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그럼 어떻게 돼요?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를 몇 번 했더라. 2번 더 해야 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29번, 이제 됐어. 주여! 피로 예배드립니다. 이 짓을 하고 있죠.

작은 s가 큰 의미가 큰 기표 아래서 F란 함수거든요. 이 기표의 함수라는 것은 밑에 뭐를 누르느냐, 억압인데 뭐냐 하면, 이미지가 인간의 모든 의미를 눌러버린다는 겁니다. 눌려서 계속 다른 것으로 치환 되고, 치환 되고 넘어가고 넘어가는 거예요. 치환의 두 종류가 있는데, 환유라 하는 은유로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말실수나 또는 자기가 강조하는 것에 따라서 방향성, 자기의 관심사, ‘내가 지금 똑같은 예수를 믿습니다. ’이 말과 ‘예수를 믿습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남은 몰라도 본인은 ‘예수를 믿습니다.‘ 할 때 ’예수님 좋아요.‘ 하는 경우가 있고, ’ 예수를 믿는데 누가 나를 무시해?‘ 라고 똑같은 말을 해도 상대방을 의식해서 ’나도 믿음 있단 말이야‘ 라는 식으로 똑같은 글, 똑같은 발언을 해도 그건 이 공식에 의하면 뭔가 억압을 하고 있는 거예요. 관심사와 방향성은 똑같은 말을 해도 똑같은 글을 봐도 다 달라요. 관심사와 그들의 추구하는 바가.

그러니 사람 속을 성령이 아시죠. 그 성령의 열매가 뭐냐 하면, 바로 나의 정과 욕심을 주께서 가만두지 않고 날마다 정과 욕심을 죽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나타난 것이 갈라디아서 5장이죠. 내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온유,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죠. 그런데 십자가가 없이 십자가 피가 관통되지 않고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시기와 질투와 미움,(내가 니 밉다니까 왜 말이 많아, 이건 내 마음이야 그 질문 자체를 하지 마, 내가 그냥 미워) 다툼과, 다툼의 종류 중에서 안 다투는 게 있어요. 안 다투는 게 다툼 이예요. 왜? 뭐가 다르기 때문에? 관심사. 방향성, 십자가에 자기의 정과 욕심을 못 박지 않으면, 안 다툼으로 자기가 다툼과 차별되는 괜찮은 사람인양 돼 버려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되죠. 이게 바로 사건의 뭉치를 마치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문법적, 역사적 해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우리 육적인 기준이 이런 큰 오해와 오류를 야기 시킨 겁니다.

천국에 갔던 사람들, ‘어린양 이리와 봐. 피 묻었나 이리 와봐. 너 성경 몇 장 읽었어? 어떤 사람 ’저는 두 번 읽었어요.‘ ’너는?‘ ’ 전 100번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게 하실 때 그 관통할 때 뭐가 흘렀지?‘ ’핍니다.‘ ’넌?‘ ’핍니다.‘ ’똑같네.‘ 예수님 피 때문에 2번 읽었고 예수님 피 때문에 100번 읽었고 숫자는 관계없어요.’ 결국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그들은 움직인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물의 색깔’처럼 예수그리스도의 피부요. 예수님이 활동이요. 예수님의 얼굴이요. 예수님의 모양새가 되는 겁니다. 특별히 어떤 행동을 한 것이 모양새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던 그 자체가 ‘이미 다 이루었다’의 차원에서 능력에서 나온 거예요. 그걸 가지고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사건의 뭉치가 성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그 안에 흐르게 되죠.

그래서 여기 성경에 보면 어디서 오든지 간에 수많은 사람이(9절) 각 나라와 각 족속에서 각 백성에서 각 방언에서 아무라도 오더라도 그들이 내뱉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저스(Jesus) 어떤 사람은 예수, 기표는 다르죠?  용어는 달라도 그게 지저스(Jesus)가 되고 예수가 되도 용어가 관계없이 주님은 아시죠. ‘주님의 피가 나를 구원했습니다. 강간 하듯이. 나는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주께서 구원하겠다는데 나는 저항 할 수 없었으며 구원이 닥치니까 그냥 파도처럼 덮쳐진 겁니다. 절대로 제가 구원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구원 챙기지 않았습니다. 이걸 가지고 로마서 4장에서는 ’일한 것도 없이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의 행복과 축복에 대해서 두 자로 그걸 ‘ 믿음’이라고 하죠.

믿음이란 믿음의 행위란 없습니다. ‘아무 일한 것도 없습니다.’ 자체가 뭐가 돼요? 그걸 두 자로 믿음이라 하고 그 믿음의 위선에서는 은혜라 하고 그 위선에서는 약속이라 하죠.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약속의 자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그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예수 안 믿더라도 사회 나가서 얼마든지 사람대우 받고 오히려 예수 안 믿음으로 말미암아 술 잘 먹고 인간성 좋고 성실하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인간인데 졸지에 주님의 어린양의 피 앞에서 살 가치도 없는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저희 속에 있는 악마를 주께서 손수 이기셔서 기어이 우리의 구원 받았음을 알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대신 죽으심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