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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4 11:36:26 조회 : 3706         
110303 7나팔(10강)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110303 7나팔 (계 8장)

음성1  음성2

 이한례(IP:119.♡.121.61) 11-03-05 10:43 
가락교회110303요한계시록8장-(7나팔)-10강a-(이 근호 목사)
제 10강a

오늘은 요한계시록 8장부터 할 텐데 지난시간에 7장 끝부분에 빠진 게 있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7장 15절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여기 내용에서 보좌 가운데 계신 분의 명칭이 뭐라 돼 있느냐 하면, 명칭을 예수님이라 하면 되는데 여기서는 뭐라 돼 있느냐 하면, ‘어린양’으로 돼 있죠? 보좌 가운데 계신 분의 명칭이 어린양!! 어린양이라 하는 표현은 어떤 기능이 되풀이 될 때 어린양이 나오느냐 하면, 어린양은 ‘제사기능’이 할 때 어린양이 희생 제물로 들어가는 겁니다. 어린양이 죽는다. 구약에는 어린양이 죽죠? 그런데 어린양, 어린양이 짐승이죠? 그런데 어린양이 뭐로 달라졌느냐 하면, 어린양이 되신 분, ‘분’이라 하는 것은 사람을 말하죠.

어린양하면 ‘애앵’하는 양이고, 어린양이 되신 분이라면, 결국 이 분이 우리가 아는 예수님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것은 그냥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다 하면 안 되고, 앞에 기능을 포함시켜야 되죠.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어린양이라는 기능을 하시는 분으로서의 그 예수님을 믿는다.’ 이래 되는 거죠.

그러면 어린양의 기능을 예수님이 하시면,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님 빼놓고 다른 사람은 어린양의 기능으로 말미암아 혜택을 거저 입는 사람이 되겠죠. 만약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하나의 기도모임이 돼 버려요. 모델이 돼서  ‘아, 주님이 저렇게 기도하니까 구원이 받는구나, 아, 나도 저걸 본받아서 나도 이렇게 기도하면 되겠다.’ 라고 하실 거잖아요?‘ 예?. 지금 요점이 복잡하니까 다시 설명할게요. 제 의도를 설명할게요.

예수님의 기능이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린양이니까 우리도 어린양이 되자.’ 이런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어린양이 됐다는 것은 우리는 그냥 혜택을 입는 입장이지, 우리가 어린양처럼 살면 구원 받겠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냥 염치없지만 그냥 혜택만 입을 뿐 이예요. 예수님만 계속 어린양 되시고 우리는 그 어린양을  뒤따라가는 거예요. 뒤따라간다는 말은 뭡니까? 예수님만이 어린양이지, 우리는 결코 어린양이 될 생각이 있다 없다? ‘일체 어린양 될 생각이 없습니다.’ 하는 겁니다.

그 어린양의 기능이 뭐냐? 그 기능이 13절~14절에 나오죠. 흰 옷을 입게 됐는데 그 흰 옷은 처음부터 희었던 것이 아니고 시커멓던 것인데, 그 뒤에 검은 옷이 하얗게 변했죠? 그 변한 것이 어떻게 변했다고 했습니까?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으니 하얗게 됐잖아요. 그렇다면 혜택을 입은 사람의 특징들이 다 뭡니까? 전부다 어린양만 쳐다보는 그런 공통점이 있겠죠. 어린양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린양만 이야기하고 어린양 이외에 자신의 행함이나 자신의 권리 같은 것은 일체 어린양 앞에서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이 된 사람, 전혀 이야기할 필요가 없이 온전하게 된 사람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점점 어려워져요. 어린양이라 하는 것이 원래 옛날 성막에서, 성전에서 제사장이 제사할 때 어린양을 바쳤잖아요? 그때가 예를 들면 ,BC 1000년에 제사 드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기원전 1000년경에 제사를 드리면, BC500년경에 드린 어린양하고 그 어린양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한국 사람이 제사를 드리잖아요? 작년에 제사 드린 것이 작년에 죽은 아버지 제사 드리면, 그것이 올해에도 그것이 효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효험이 있다면 올해에 또 드릴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거기에는 은연중에 1년 치라 하는 의미, 작년에 드렸으니까 올해에도 또 드리고, 고 비슷한 의미가 부활절, 크리스마스잖아요. 부활절 한번 드렸으면 한 삼년 정도 먹히면 좋겠는데 그런데 매년 드린다 말이죠.

그렇다면 구약 때 제사제도는 결국 뭡니까? 속죄일 같은 경우는 일 년에 한번밖에 없다고요. 그러면 그 다음해에 또 드려야 되죠. 그렇죠? 그렇다면 만약에 BC 2세기경의 사람은 5세기경의 제사 혜택을 못 누리는 겁니다. 또 드려야 되요. 그럼 이건 문제가 됩니다. 제사 기간이 1년이라면 제사 드리고 난 뒤에 죄 지은 것은 어떻게 할까요? 대 속죄일인 경우는 1년에 한번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모아놓았다가 1년 후에 한꺼번에 처리해야 되잖아요? 바로 어린양이라는 것은 죄 있을 때마다 제사를 되풀이해서 어린양을 드려야 된다는 것이 구약적인 바탕인데,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가서는 어린양이라 해서 한분이 돼서 어린양이 동물이 아니고 어린양 기능을 하는 어떤 분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이 분은 매일같이 제사를 드려야 됩니까? 히브리서에서는 십자가에서 단 한번으로서 끝낸 것을 ‘다 이루었다’죠?

그러면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되풀이 해 봅시다. 지금 우리 성도라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어린양을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다. 이 말은 어린양이 모델이 돼서 어린양 돼야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뭐냐? ‘어린양은 한분으로만 족하고 혜택을 입는 분으로서 졸졸 따라가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했고 그 혜택은 뭐라 했습니까? 죄 있는 것이 뭐로? 죄 있는 시커먼 옷이 희게 됐는데 그것이 어린양의 피가 있으니까 죄가 희게 돼 있다고 했죠?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어린양의 피로 희게 되었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뭐라 되었죠?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으면 우리가 혜택을 입으면, 무슨 혜택을 받아야 되요? 조금만 혜택을 받는 겁니까? 다 이룬 혜택을 보는 거예요? 다 이룬 혜택을 보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평생 살아도 다 모르는 죄가 계속해서 잠재돼 있죠. 우리의 육이 있는 한 평생 살아도 뭔가 나오는 죄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야 아무리 죄가 나오더라도 어린양을 따라가는 사람한테는 어떤 혜택을 줘야 합니까? 어떤 죄가 나와도 ‘다 이루었다’를 알고 졸졸 따라간다 말이죠. 그러니까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가 믿는다는 거, 그게 포인트가 아니고, ‘다 이루었다’가 계속해서 자기에게 덮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 이루었다’의 그 효과가 어느 정도냐 하면, 16절~17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다 이루심에 있어서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여기 보면,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 이 세상을 뭐로 보느냐 하면, 광야로 봅니다. 이 광야에 가면서 “어린양이 저희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말은 생명수가 있는 곳은 천국이죠? 천국을 뭣과 비교합니까?  광야 같은 세상과 비교하는 거예요. 광야 같은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 하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고’ 보니까 어지간히도 많이 주렸어요. 어지간히도 주리고 어지간히도 목마르고 이 땅에서 상했고, 어지간히도 눈물 흘린 겁니다. 그러한 것이 다 이루었다 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러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말씀드립니다. 결국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눈물 날일이 생긴다는 뜻이고,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목마를 수밖에 없고 굶주릴 수밖에 없고 그런 일들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안 주어지면, 예수님을 졸졸 따라갈 이유가 없어요. ‘예, 이쯤 됐으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한다 말이죠. 계속 따라간다는 말은, 지속적으로 이렇게 목마르고 눈물 날일이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 발생시키는 거예요. 왜 발생시키느냐? 주님을 졸졸 따르라고....ㅎ

이 세상에 '다 이루었다‘는 오직 어린양 예수님한테만 돼지, 너 자신에게는 다 이루었다가 없으니까, 너 행함에서는 ’다 이루었다’를 제발 너의 행함으로는 시도하지 말라는 뜻 이예요. 예수 믿고 완전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델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졸졸 따라다녀야 되지, 예수님이 증거 하면 나도 증거 하겠다 하고 이렇게 예수님을 라이벌로 여기고 비교대상으로 여기면 안 되고, 내가 목표 삼으면 안 됩니다. 그냥 염치불구하고 혜택만 입을 뿐 이예요.

그 이유는 뭐다? 어린양은 누구만 하면 되신다? 어린양은 예수님만 한분으로 족한 것이지, 우리도 어린양 흉내 낸다고 따라서 어린양 되지 마시고, 우리는 어린양 될 필요 없어요. 어린양은 한분이면 됩니다. 문선명이나 그런 사람 되면 안 돼요.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가 합쳐져서 우리가 믿어져야 돼요. 너무 십자가의 아픔만 생각하면 지도 울고불고 하는데,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그 아픔 위에 ‘다 이루었다’ 가 받게 되면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다 이루었다’의 계획의 구조 속에 포함돼 있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7장에서 했고 이제 8장 들어가 봅시다.

이제 본격적으로 무지 어려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요한계시록 8장 봅시다. 8장에 “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자, 요한계시록에서 ‘7’이라는 숫자가 이건 빈번하게 등장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골프장에 가면 바닥이 전부다 뭐로 돼 있죠? 잔디로 돼 있죠? 잔디를 하나, 하나 뽑아보자 말이죠. 요한계시록을 하나 뽑아보면 ‘7’로 돼 있어요. 골프장에 바닥이 다 잔디로 깔려있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에도 다 ‘7’이 깔려 있어요.

왜 요한계시록은 모든 것이 ‘7’이 깔려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은 창세기하고 동그랗게 다시 만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때 천지를 며칠 만에 창조했습니까? 7일 만에 창조했죠. 천지창조를 7일 만에 창조했죠. 왜? 7일만이냐 말이죠. 왜 8일이 아니고, 9일이 아니고 10일이 아니고 ‘왜 7일 만에 창조했느냐’ 하는 겁니다. 참 이 질문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식이 부모보고, ‘엄마는 왜 나를 낳았어요?’ 하는 질문과 똑같은 질문 이예요. 엄마는 왜 나를 낳았어요? 이 질문의 정답은 뭐가 되겠어요? ‘고 따위 소리 들으려고 낳았지’ ㅎ 자식은 부모한테 질문 하지 말아야 되는 질문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왜 나와 의논하지 않고 나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질문의 잘못은 뭐예요? ‘왜 엄마는 나하고 의논해서, 키는 몇 센티로 할까? 아이큐는 얼마로 할까? 왜? 나한테 의논 안했어요? 왜 의논하지 않고 낳았습니까?’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창조는 반드시 ‘무→유’로 들어갈 때 여기에 창조가 들어가는 거예요. 유→유는 창조가 아닙니다. 이걸 가지고 제조, 만들어 내는 게 제조죠. 창조는 없는데서 있는 거예요. 없는데서 있기 때문에 방향이 無에서 有기 때문에 방향이 有에서 無로 다시 환원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거예요. 사람이 죽어도 흙이 되는 게 無가 아닙니다. 무에서 인간은 없는데서 인간이 만들어졌잖아요. 흙인데, 여기서 인간이 됐잖아요?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뭐로 돌아가느냐 하면, ‘예수님의 언약 적인 창조’로 돌아갑니다. 상당히 어렵죠?

사람이 이런 게 있어요.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엄마, 내가 없을 때 엄마가 나를 임신해서 낳았지?’ ‘낳았지’ ‘그러면 컸으니까 내 몸은 엄마와 떨어져 나왔으니까, 내 몸은 내꺼야,’ ’그래서?‘ ’이제는 내가 자살해도 엄마는 간섭하려 하지 마.‘ 이제 철없는 자식은 논리로 이게 돼요.  그런데 그 소리를 엄마한테 하면 곤란하죠. ’나 엄마보다 먼저 죽을 거야,‘ 이러면 화병으로 진짜 죽습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나무라잖아요. 왜냐하면 기회는 출발을 내가 없던 데서 현재 있는 이곳까지가 자기 영역이기 때문에, 내 바깥에 있는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왜? 부모는 자기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보다 먼저 있는 그의 마음과 마음가짐의 생각을 다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보다 먼저 있던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그저 있는 것은 현재 내가 여기 있음, 이게 전부 아닙니까? 잘 공부하던 교육학을 공부해도 공부한 내용이 뭡니까? 난 여기 있다. 나는 어디까지 일 할 수 있느냐, 어떻게 내가 많은 일을 하느냐, 출발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결국은 모든 인간은 누구한테로 갑니까? 나에게로 돌아가는 거예요. 나에게로 시작해서 나에게로 돌아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현재 있는 게 나이기 때문에, 여기서 만화를 그리면, 나로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그러면 자기는 누구를 위해 사는 겁니까? 앞에 ‘나’자가 붙잖아요. 나를 위해 살잖아요.

그러면 부모님이 계시다 말이죠. 부모님이 자식 낳고 난 뒤에 자기만 생각합니까? 성경에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는데 독 있는 전갈을 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부모가 악하더라도 남들한테는 사기치고 강도질하고 나쁜 짓을 할지라도 지 자식한테는 좋을 걸 줄줄 안다잖아요. 그 마음을 자식이 알까요? 모를까요? 몰라요. 왜냐하면, 자기는 부모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는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되지만 그것도 자기 소유, 자기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는 부모가 아니잖아요. 자기를 낳은 부모를 모르잖아요. 인간이 태어나고 난 뒤에, 다시 내가 흙에서 만들어졌다고, ‘그럼 나 죽어서 흙 될 거야.’ 하고 자살하면 그만이라 생각해요. 그러나 흙에서 만들어 졌다는 말은 나중에 더욱 더 성경을 깊이 신약까지 보니까, 흙에서 만들어진 것은 맞지만,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기에 우리는 그 누구? 우리는 흙에서 만들어 내준 분을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사실이 신약 책에 나오죠?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것이 주를 위하여 주께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만들어졌으면 더 이상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더 이상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자를 위해 살게 함이라.”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뭔 뜻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것, 즉 내가 나를 위해서 산 모든 것을 이제는 완전히 청산했다. 그런 식으로는 인생을 안 산다. 나는 어떤 분을 위해 살 분이 있다. 그 분이 예수님이다. 날 위해 죽으신 분을 위해 산다.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사울이란 사람이 나중에 사도바울이 될 때, 변한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 사는 것, 이것조차도 내 뜻이 아니었고 주께서 은혜라는 힘을 주니까 내가 주를 위해서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거든요.

그것이 뭐냐 하면,  흙으로 돌아갈 때, 흙에서 만들어졌지만, 성도라면 돌아갈 때 그냥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저를 이렇게 만드셨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죄를 짓게 되어서 우리는 흙으로 돌아갑니다.‘라는 이 내용, 그게 무슨 내용이라 했습니까? ’예수님의 언약 적 내용‘을 발산하면서 고린도후서 2장에서는 그것을 향기로 드러내면서 가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었지만 지금까지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오로지 나의 영광, 내 꿈만 이루기 위해 살았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죄가 됐군요.’라고 하면서 그것을 내뿜으면서 살아갈 때, 거기서 뿜어진 것을 모으고 모은 것이 바로 ‘언약’이 되는 겁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지만 언약을 누구를 경유해서 만들어낸다? 사람을 경유해서 만들어내죠. 그 경유하기 위해 뽑혀 나온 사람을 구약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 하죠. 이스라엘은 특수 민족 이예요. 이스라엘 민족 특징은 없는데서 그냥 만든 것이 아니고 없는데서 언약을 만들었어요. 그 언약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든 겁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는 언약이 없기 때문에, 이런 벌이 왜 오는지, 이런 재앙이 왜 오는지 모르지만, 이스라엘한테는 그걸 똑똑하게 주죠. ’아하, 여호와께 눈 돌리니까, 언약대로 이렇게 저주를 받고, 언약대로 징벌을 받는구나,‘라는 걸 분명히 나오죠. 그 나온 것을 모아 놓은 것이 구약 성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무엇의 역사다? 이스라엘 역사, 달리 말하면, 특수한 민족의 역사, 어떻게 특수하냐? 하나님께서 많은 민족 가운데 특별히 선택했던 민족의 역사가 구약이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그때 선택할 때 어떻게 선택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준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했죠.

그것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가지고 이스라엘 역사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구 언약이라 하고 구 언약을 두자로 줄이면 구약이 되죠. 그러면 이것을 신약하고 비교해봅시다. 신약에는 예수님 이야기와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 받은 사람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부름 받을 때는 옛날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됐다면, 신약에서는 무슨 언약에 의해서 그들이 부름 받았습니까? 새 언약에 의해서, 새 언약을 세 자로 이야기 하면, 십자가!! 십자가가 새 언약 아닙니까? 내 살과 피로 새 언약을 이루리니... 십자가 피로 부름 받은 사람이 신약 성경에 계시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 20장 28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그냥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 하죠? 그것도 일반 사람들이 들으면 희한하다. 무슨 하나님이 피를 흘리시나 이러겠죠. 아까 어린양 할 때 앞에 뭐가 붙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제사하는 기능이 어린양이라면, 교회는 앞에 뭐가 붙죠?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죠. 그래서 교회 목사, 감독은 뭐만 감독해야 돼요? 과연 그 교회서 하나님의 피 외에 다른 소리가 나오는지, 그 외 다른 소리 나오면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의 피 이야기만, 하나님이 죽었던 피 이야기만 나오면 교회가 되고, 그걸 감시 감독하는 게 감독자, 성령 받은 감독자의 할 일이다 말이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교회는 새 언약에 의해서 감시받아야 되고, 새 언약의 혜택을 받아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새 언약을 한 자로 이야기하면, 바로 ‘피’ 누구의 피? 우리의 피는 아니죠. 예수님의 피죠. 왜 우리 피는 안 됩니까? 강의 처음에 이야기 했는데, 왜 우리 피는 안 돼요? 우리는 어린양의 혜택을 입을 뿐이지, 우리가 어린양이 우리 삶의 모델이 돼서는 안 된다 말이죠. ‘어린양 같구나, 나도 어린양  같아야지,’ 이런 짓 하라고 교회 된 게 아니고, 우리는 한분으로만 족한 거예요. ‘다 이루었다’가 그분만이 다 이루었다가 되니까, 우리는 졸졸 따라가면 되니까.

다시 요한계시록 8장 처음으로 돌아오면, 제가 골프장에 잔디밭 이야기 했죠? 잔디밭 이야기 할 때에 전체 창조가 여기 잔디 하나, 하나를 뭐로 됐다? 7로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이 7로 돼 있는 일곱째 날에 했다 말이죠. 우리는 여기서 왜 7입니까? 8도 안 되고, 9도 안 되고, 10도 안 되고, 왜 7이냐고 질문을 해서는 된다? 안 된다? 이것은 해야 될 질문이 아니란 말이죠. 이 비슷한 질문 또 있죠. 천지를 하나님이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 그 질문을 우리 인간이 해서는 안 되죠? 왜냐하면 창조행위를 역전 시킬 수는 없는 것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게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는데, 집사님은 아침에 반찬 시금치 드십니까? 난 오늘 아침에 순대를 먹었는데, 같은 사람들끼리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 차이성을 이야기 할 수 있죠. 학생은 안경 썼는데, 집사님은 나이 많은데 왜 안경을 안 써요? 우리가 같은 인간들끼리는 그 차이성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말이죠. 왜 차이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느냐 하면, 집사님 때문에 이 학생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서로 인과관계가 형성이 안 되게 돼 있어요. 니 인생 따로 있고 내 인생 따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렇게 물을 수가 없는 것이 그런 발언을 하는 것,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미 하나님의 계획에 잡혀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런 말 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다 말이죠.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런 질문, 또 있죠. 선악과를 따먹을 줄 알면서 선악과를 왜 심어놨나? 이런 질문, 그런 질문은 이미 창조에 관해서 같은 창조자 같으면 되는데,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고 뭐다? 전체 창조된 속에 일부기 때문에 부분은 전체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자격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아유, 우리 아버지가 부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은 해서는 안 된다 말이죠.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아버지가 부자든 가난하든 간에 우리는 그냥 주는 환경 속에 받을 뿐이지, 우리가 뒤늦게 태어나서 ‘아버지, 왜 가난하게 됐는데? 책임지세요.’라고 역으로 되물을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되물을 수는 없는데, 우리 입에서,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 선악과는 따먹으면 안 되는 선악과를 왜 따먹어서 고생시키느냐?’ 이런 질문이 나온다는 자체는 우리는 뭣과 끊어졌다? 하나님과의 선이 끊어졌기 때문에 ‘너만 신이냐? 나도 신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학자예요. 학자가 신을 따질 때는 그렇게 따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뭐로 보느냐? 하나의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하나의 대상으로 봐 버리면 그 사람과 나와는 영적으로 이미 다 떨어져 나간 사이예요. 다 끊어진 셈 이예요.

내가 누구한테 이렇게 ‘ 저 사람 키가 작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그 사람과 연줄이 끊어졌기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우리가 신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이미 신과는 다 있는 대로 기타 줄이 끊어지듯이 따다 팅 팅 다 끊어져 버렸어요. 그것이 바로 악마가 그렇게 노린 겁니다.

이렇게 질문해야 되요. ‘주여 저를 왜 만들어 놨습니까? 이렇게 질문해야죠. ’이제 주를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이런 질문 하면 되는데, ’주는 어디서 생겼어요? 라든지, 부모에게 ‘왜 우리는 가난한데요? 기분 나쁘다. 다른 집은 다 부잔데, 집안 잘못 골라서 내 DNA가 잘못 골라서 엉뚱하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이 고생하고 있다’ 이러죠. 그게 재산이 넉넉지 않은 가정은 문제가 안 되는데, 유전병을 갖고 있는 집안 같으면 보통 심각한 게 아닙니까? 왜 우리 집안은 대대로 당뇨냐 말이죠. 왜 우리 집안은 다 간이 다 나쁘냐?‘라는 질문을 그 가정의 일부로서는 말을 하면 안 되죠. 그래서 이 가정이 이 가정이구나. ’형도 간 나쁘고 나도 간 나쁘고 그러니 everybody형제구나.’ 그렇게 돼야지, 그래서 관계를 끊으려 시도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 전부 다 잔디밭이 7로 돼 있다면, 여기에 인간도 포함돼 있고 , 개도 소도 다 있다면, 결국 인간이라 하는 것은 결국 ‘7’의 지배를 받는 거예요. 그럼 숫자 7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그야말로 기뻐했죠. 보기에 좋았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다 이루었다’ 예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제 7일 날에 일을 안 했어요. 누가 일 안 했어요? 하나님이 일을 안 했다고요.

왜 7일 날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면, 구약 때 안식일 날, 피로해서도 아닙니다. 쉬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음에 에너지 저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같은 가족이라면 하나님이 쉬신 날 같이 우리가 같이 쉬어줘야 우리가 그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결국은 그 이스라엘은 무슨 숫자에 놀아난다? ‘7’이라는 숫자에 예속을 받으면서 절대로 7이라는 숫자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다 이루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에 동참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강의 했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어요? ‘다 이루었다’ 했죠? ‘다 이루었다‘를 우리가 이것을 뚝 잡아서 내 것으로 만들면 안돼요. 우리는 ’다 이루었다‘에 어떤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다 이루었다‘에 뛰어들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간이 나쁘든지 위가 나쁘든지 간에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뭡니까? 다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게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명찰은 숫자가 뭐가 됩니까? ’7‘에 해당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전체를 ‘7’을 가지고 설명을 해야 돼요. 다른 말로 하면 ‘다 이루었다’를 가지고 설명을 하기 위해서 처음에 창조할 때, 7일 만에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란 그러한 평가가 압축된 것이 ’7‘이라는 숫자라면, 그 숫자를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결국은 서로 만나기 때문에 그래요. 창세기는 썩은 동아줄이고, 요한계시록의 밧줄은 생생한 밧줄로 이 자리에 진입 하지만, 어쨌든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만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7’이라 하는 것은 처음에 천지창조 때, 7일 만에 완성 하셨다 말이죠. ‘하나님, 왜 8일 만에 안 하셨습니까? 9일 만에 왜 쉬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7일 만에 완성했다니까, 하나님 내가. 그러면 왜 8일 만에 안 했느냐 말입니다. 내가 묻는 취지가. 피조물은 그런 거 묻는 게 아니야, 엄마, 엄마 얼굴을 왜 그렇게 못 생겼어요? 자식이 엄마한테 물을 게 아니고 니가 나처럼 못 생겼으니까 이래서 우리는 참 보기 좋은 한 가족이다 이 말이죠.

여러분, 고슴도치 어미가 고슴도치 새끼를 이뻐 할까요? 이뻐 안 할까요? 가시가 막 났는데?? 토끼는 보글보글한데, 어떻게 할까요? 이뻐하죠. 왜? 몸에 가시가 막 났는데 왜 이뻐해요? 토끼 같아도 아니고 멧돼지도 아니고, 고슴도치는 고슴도치다울 때 가장 이쁜 겁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어린양을 믿는 사람은 어린양다울 때 가장 주님 보시기에 이쁜 거예요. 예수님이 아무리 완전하지만 완전하기 때문에 십자가 안 거치고 그냥 천국 갔습니까? 아니죠? 죄가 없으신 분, 완전한 분도 뭐를 거쳤습니까? 십자가, 죽음이라는 걸 거쳐서 사흘 만에 부활 했잖아요.

왜 죄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죽어서 부활 했습니까? 십자가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자체가 고슴도치가 되기 때문에. 고슴도치의 엄마의 입장에서 어느 것이 가장 이쁩니까? 십자가를 경유하는 것이 가장 이쁜 거예요. 그래서 우리 생각에는 ’이 정도 죄 같으면 십자가 필요 없다.‘ 하지만 죄 있든 없든 예수님 가신 그 코스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코스입니다. 자기 아들 내어주신 그 자체가 의가 돼요. 그래서 자기 아들 내어주는 그 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도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없는 거죠.

하나님이 이뻐 하시는 새 언약의 ‘다 이루었다’가 빠져 버리면 그건 이뻐 할 수 없어요. 모든 신학이 저 소리가 안 나오는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누구 중심입니까? 인간 구원 중심으로 신학을 정리하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못 지켜서 죄 졌다. 하지만 기뻐하세, 하지만 성령 오니까 이제는 율법 지킬 수 있습니다. 전에는 성령 없어서 못 지키는 거, 이제는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제는 낙담 말고 쉬지 말고 말씀대로 사시면 하나님께 의인돼서 그 의인은 의인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구원 받으시는 의가 됩니다.’ 자꾸 이렇게 가르치잖아요. 결국 그게 뭡니까? 그것은 하나님, 예수님 중심으로 기뻐하는 걸 보지 않고 평소에 지가 그리던 내가 되고 싶은 완전한 인간을 자기가 꿈꾸면서 그걸 그대로 성경에서 성경에 맞추려고 억지를 부리다 보니까, 그런 피 없는 자기 자신의 언약이 돼 버려요. 어린양을 졸졸 따라가는 게 아니고 이제는 눈으로도 따라가지를 않아요. 자기가 이미 완전한 자 되었으니까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들이예요.

교회 특징이 뭐냐 하면, 기존 교회 특징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요. 자랑하러 온 사람들이예요. 어떤 사람은 고난 받는 것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금식한 것도 자랑하고 목사는 절기 지킨 것도 자랑하고 온갖 것을 자랑하는데,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피’ 이것이 ‘율법외의 의’기 되는 겁니다. 율법 말고 율법외의 의!!

자, 그러면 왜 요한계시록이 ‘7’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아셨을 거예요. 요한계시록 2장~3장에 보면 교회가 몇 개가 나옵니까? 7개 나오죠. 왜 8개가 안 나옵니까? 왜 9개 안 나와요? 충분하다 말이죠. 보기에 7개만 나와도 충분하고 완전하다 말이죠. 다 이루었으니까. 어떤 교회가 500개라도 7교회 중의 하나에 속할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시간’을 이야기 해 봅시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시간을 이야기 할 때는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 할 때 숫자로 표현할 때 7을 이야기 하죠. 7이라 할 때 7이라는 시간을 이야기 할 때 창조와 창조된 것을 유지하는 것을 배분을 해요. 창조를 7로 할 때 지속을 뭐로 하느냐 하면, 2분의 7(7/2), 2분의 7이 뭡니까? 3과½, 한때, 두 때, 반 때로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결국 한 때, 두 때 반 때로 표현한다는 것은 다니엘 같으면 ‘7이레’ 해놓고 7이레가 뭐로 시작합니까? 하나(1)로 시작하죠. 제가 다니엘 해석하면서 7이레라는 그 역사가 이레는 며칠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한분으로 지향 한다 그렇게 설명 했죠. 아까 잔디밭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어렵기 때문에, 잔디 하나, 하나가 7로 돼 있죠. 그러면 무에서 유로 돼 있는데, 인간이 없는데서 인간이 있잖아요. 돌아갈 때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없는데서 있게 하신 분이 누구지? 그분이 어떤 원리 가지고 우리를 만들었지?‘라는 쪽으로 다시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인생 살다 힘들면, ’아이고, 칵 죽으면 되지,‘ 보통 죽을 때 그냥 죽지 않고 앞에 붙여요. 칵, 칵, ’아이고, 살기 싫으면 농약 먹고 칵 죽으면 되지,‘ 하는데 칵 죽어보면, 죽은 자들이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산 자나 죽은 자나 우리가 알기에는 죽게 되면 누구의 음성을 듣습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듣거든요. 불교 신자든지 기독교 신자든지, 교회를 안 다녀도, ’그래, 니 혼자 천국가라, 나는 지옥 간다.‘ 한 사람도 결국은 죽어보면 누구의 음성을 듣습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말이죠.

이 말은 자기 입장에서 보면, 맨 날 거울 보면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 누가 제일 예쁘냐?‘ 자기 모습만 보니까 이것이 자기한테는 전부다 하겠지만, 그 자기가 자기에게 했던 보이지 않는 원리와 원리를 쥐고 있는 주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 죽게 되면(몸이 떠나고 나면) 누가 보입니까? 그 원리 되신 분이 보이죠. 그 원리 되신 분을 뭐라 하느냐 하면,  ’심판 주‘ 라 해요. 심판 주가 그때 보이는 거예요. ’이리 와, 이리 와, 내가 만들었잖아,‘ ’누구신지?‘ ’내가 예수님이야. 내가‘

마치 거지 나사로하고 부자 이야기에서, 부자가 지옥이 그렇게 고생 심할 줄을 몰랐죠. 그런데 그 사람이 세상에 있을 때 왜 지옥이 그렇게 무서운지 몰랐습니까? 그건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으니까 자기 주변의 보이지 않는 아우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배경을 치고 있는 원리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워낙 자기 일이 바쁘다 보니까, 종교하든지 성경이라든지 계시라든지 하늘나라든지, 그것에 신경 쓸 경황이 없어요. 그러면서 한가할 때만 성경 뒤적이고 그러지, 교도소 가서나 성경 보고 이러지.

여자들은 잘 모르지만 남자들은 알아요. 남자들은 세상에서 20대까지 술, 담배, 자기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언제 교회 가느냐 하면, 군에 가서 첫 번째 훈련소에서 교회 가자하면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때 빵 하나 얻어먹었다고 절에 안 가고 교회 가서 웁니다. 어머니 사랑 못 잊어서 울고, 앞으로 효도 할게요 하면서 울고, 울면서 나올 때는 초코파이 하나 입에 물고 나오죠. ㅎ제대할 때는 다 잊어버리고, 다시 술 구덩이에 빠지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표현하는 아우라, 후광을 그걸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그게 자기 영광이거든요. 이만큼 내가 고생하고 이만큼 성공했으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계시록은 無에서 有로 가면서 다시 無로 갈 때는 이 無가 그냥 無가 아니고 여기에 악령(惡靈)과 성령(聖靈)이 기다리는, 둘 중에 어느 쪽이 기다리는 無가 돌아가는 이것이 요한계시록 아닙니까? 다시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짐승, 옛 뱀, 용,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성령, 신부, 혼인잔치, 생명책에 기록된 자와 행위 책에 기록된 자, 영원한 지국과 영원한 천국, 이것을 양쪽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이 돌아가는 여기 중간에 있는 세상적인 변화, 이것이 요한계시록 4장부터 19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군데, 군데 악령과 성령이 여기서 침투를 해요. 그러면 구멍이 나죠. 그러면 이것을 증상, 징후. 증상이라는 것은 감기 기운이 있으면 코를 훌쩍이고 콧물이 나죠. 콧물은 뭡니까? 그냥 콧물일 뿐인데, 의사는 뭐라 합니까? '아하, 삼기 드셨네요.‘ ’콧물만 났는데요?‘ ’콧물은 감기 걸린 증상입니다.‘라고 하죠.

세상의 모든 찌그러진 것,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상 구조, 자연세계가 흔들리고 혼돈에 빠지죠? 이게 무슨 증상입니까? 인간이 꿈꾸고 있는 환상적인 세계관, 모든 세계관은 사실은 영적인 배경 안에서 잠시잠간 형성된 것뿐이라는 거, 다시 원래 언약대로 원래 창조했던 계획대로 돌아가는데, 그 계획이, 모든 창조는 예수님께서 개입하셔서 만드신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천지를 만들었으니 말씀이 없이는 된 것이 있다? 없다? 말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그 말씀되시는 예수님이 계셨던 거죠.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떤 징후가 있는데 그 말씀이 뭐가 됐습니까?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것이 하나의 징후, 증상이 되었어요. 그 육신이 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가 빛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이분이 오니까 졸지에 빛이 뭐로 변했습니까? 증상을 공개하는 어둠으로 변했죠. 그 어둠 때문에 생긴 현상이 뭡니까? 바로 십자가 피잖아요. 피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는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영적 사고를 가지고 세상 전체를 다 아울러서 본다는 뜻 이예요.

지금 그 십자가가 여자 목걸이 하는 십자가가 아니잖아요. 차에 달랑달랑하는 십자가가 아니잖아요. 사도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할 때는 그 십자가가 아니에요. 지금 너는 이미 죽은 사건이, 이미 예수님 죽었던 십자가 사건 안에서 지금 살고(놀고) 있다는 겁니다. 콧물 훌쩍이면서 감기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말도 안 되거든요. 그러면 그 증상이 되풀이 될 경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이 땅에서 또다시 되풀이해서 순교를 당하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옵니다. 두 증인!!

두 증인이 예수님이 당했던 그대로 당해요. 그럼 두 증인만 당합니까? 오늘날 성도도 같이 당해요? 성도도 같이 당하는 겁니다. 두 증인이 당했던 그 내용을 그렇게 십자가를 가지고 묘사할 뿐이지 그 껍데기를 떼보면, 평소에 우리가 예수님, 어린양을 따라가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 십자가 가신 그 길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7나팔을 불었다 말이죠. 7나팔을 부는데 7나팔이라는 것은 나팔의 의미가 무엇이냐? 나팔 불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현상을 유도하기 위해서 나팔을 부는 겁니다. 그 현상이 무슨 현상입니까? 5절~7절을 쭉 보면 이 세상이 큰 난리가 나고 살기가 힘든 형편이 되는 현상이 일어나죠. 여기에 보면, 8절, 9절 보면,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수목의 ⅓ 이 타고, 8절에 둘째 나팔을 부니까 바다의 ⅓이 작살나죠. 9절에 보니까 또 피조물이 ⅓이 죽죠. 또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큰 별이 떨어져서 강이 쑥이 돼서 써서 먹지 못하게 만들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동안 사람들이 그리던 세계관, 사람들이 생각했던 세상이라는 거, 과학적 세계란 것이, 결국 누가 뭘 참고로 해서 만들어 낸 것 이예요? 인간들이 뭘 참고로 했습니까? 하늘의 별과 달과 안정돼 보이는, 상당히 안정돼 보이잖아요. 오늘 해 떴죠? 내일은 해 뜰 가능성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몇 %입니까? 사람들은 100%로 보죠? 왜 100%로 봅니까? 이 99%를 100%로 보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안정돼 있다 이 말 아닙니까? 세상이 안정돼 있다는 말은 세상 속에서 안정된 세상을 정의하는 우리도 같이 안도하고 안정된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겠죠. 그렇잖아요. 집에 물이 새 보세요. 이번 추울 때 안 샜습니까? 우리는 공사 3번 했습니다. 무슨 벌을 받았는지,ㅎ 파이프가 터져서. 화장실은 다 파헤쳐났죠. 화장실을 동사무소까지 가서 볼일보고 왔어요.

자, 주변의 환경이 안정돼 있다는 말은 심적으로 안정이 되죠.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도 심적인 안정을 도모한다 말이죠. 그러면 세상을 안정되게 보고 세상이 안정될 때 그 속에 기거하는 나도 안정되면 나도 편하잖아요. 그 모든 이것이 결국 환상 이예요. 이것이 하나의 몽상(꿈)이라 말이죠. 뉴톤의 만유인력, 아윈스타인의 상대성원리, 전부 다 과학이나 모든 것이 하나의 망상 이예요. 망상!! 어떤 망상이냐? 필요한 것만 채택하고 나머지는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은 빼버리는 것, 개가 냄새를 잘 맡을까요? 사람이 냄새를 잘 맡을까요? 개죠. 그러면 개가 냄새 맡는 것을 우리는 냄새를 못 맡는가요? 그것은 필요 없다고 뺀 거잖아요. 독수리가 뭘 봅니까? 독수리는 위에서 보니까, 왜 우리는 독수리처럼 못 봅니까?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은 사람 좋으라고 구조가 있는 거예요. 개처럼 온갖 냄새 맡으면 못살죠. 왜 뒤통수에 눈이 없는 겁니까? 눈이 없어야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죠. 눈이 있으면 괴물이죠. 사람은 자기 편한 것 한계 내에서만 자기 세계의 전부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물위로 오라 할 때에 베드로가 웃기죠. 물위를 걸었잖아요. 이게 말도 안 되죠. 베드로가 ‘이건 말도 안 돼, ’하는 순간 물에 빠졌습니다. 어느 게 정상입니까? 물 걷는 게 정상입니까? 안 걷는 게 정상입니까? 안 걷는 게 정상인데 걸었다는 것은 그 순간만큼은 베드로가 어느 세계에 놓여있다? 베드로가 자기 세계에 놓여 있지 않고 어느 세계에 놓여있다?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예수님의 세계에 잠시 몸을 담근 거예요.

변화 산에서 모세하고 엘리야하고 예수님과 이야기 했잖아요. 베드로가 놀랐습니다. 잠시 그들은 뭘 봤습니까? 예수님의 세계에 잠시 몸을 담근 거예요. 이제 그 세계가, 예수님의 세계가 어린양을 따르는 우리의 세계입니다. 이게 바로 영적으로 기존의 과학적 세계관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러면 세상에 있는 모든 변화는, 아우성치는 것은 하나의 징후고 하나의 이 세상이 망한다는 증상이 되는 겁니다.

10분 쉬었다가 합시다.
 이한례(IP:119.♡.121.61) 11-03-09 13:20 
가락교회110303요한계시록8장-(7나팔)-10강b-(이 근호 목사)
제 10강b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자, 나팔을 부는데 나팔 숫자가 몇 개입니까? 7나팔이죠. 7은 뭐가 포함되었다? ‘다 이루었다’ 또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왜냐하면 ‘다 이루었다’는 것은 신약이니까 창세기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이고 이 두 개가 만나죠. 뭐로 만난다? 7로 만나죠. 7나팔을 분다는 것은 다 이룬 입장에서 나팔을 분다 이 말이죠. 여기에 나팔을 분다 할 때, 나팔을 부는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은, 어떤 현상을 유도하기 위해서 나팔을 불거 아닙니까? 그럼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살기에 불편하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안정된 자연환경 속에서 자기도 심적인 안정을 얻는데, 안정이 어떻게 됐습니까?  흔들리니까 살기가 불편하죠. 인간이 살기 불편한 환경을 뭐라 했습니까? 이 세상은 사실은 영적인 세계인데 인간들은 영적인 세계를 모르니까 단지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실은 환상에 속하죠.

환상을 환상되게 드러내기 위해서 나팔을 부는 겁니다. 나팔을 불게 되면 결국 이 세상이 사실은 환상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죠. 누가 압니까? ‘다 이루었다’의 혜택을 입은 성도는 알죠. 결국 7나팔은 뭐냐 하면, ‘성도야, 집합하라.’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은 집합해!’ 집합을 해서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껏 이 세상이 전부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워하며 그 당황스러움 가운데서 신에게 저주의 말을 하며 우리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신을 향하여 저주를 퍼붓는, 오직 자기만 사랑하니까 ‘우리를 이따위 식으로 힘들게 하면 내가 교회에 나갈 줄 알아? 하나님 믿을 줄 알아?’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훼방하는 그러한 본성을 드러내는 그런 계기가 되겠죠.

그 7나팔 부는 주체 자가 누구죠? 바로 천사죠. 천사는 어디 속합니까? 육에 속합니까? 영에 속합니까? 영물이죠. 결국 영에 속한, 세상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 이게 물질 세상이라면, 영의 원리가 뭐를 감싸고 있다? 세상의 물질적인 세상을 감싸고 있는데, 영이 여기에다 뭐를 붑니까? 나팔을 부니까 흔들리면서 이 가운데서도 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이 세상이 어떤지 같이 목격하고 집합하고 바라보자 하는 식으로 되겠죠.

결국은 이 원리가 전에 구약에도 이 비슷한 원리가 모델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겠죠? 바로 애굽의 나라에 있을 때, 애굽 나라에 몇 가지 재앙이 떨어졌습니까? 10가지 재앙이 떨어졌죠. 그걸 다시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자 애굽이 이겁니다. 애굽 나라는 뭐가 전부 입니까? 애굽 나라가 이스라엘 생각 합니까? 안합니까? 아브라함 생각해요 안 해요? 요셉도 생각 안 해서 그들은 히브리인들에게 압박을 가했잖아요. 결국 애굽 나라에서 전부라 하는 것은 무슨 나라만 전부 입니까? 애굽 나라만 전부죠. 그럼 그 나라가 크고 부흥했다는 것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자기 나라가 자기들의 마음이 굉장히 여유롭고 평화롭고 강건하고 살기 좋고 행복하다고 하고 있었죠.

그런데 여기에 누가 살게 되었죠? 히브리인이 살게 되었죠. 애굽 인들은 자기로 인하여 살게 되지만 히브리인들은 뭐로 인하여 사는 사람들입니까? 히브리인들은 전에 언약이 생겼죠. 무슨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과 이삭의 언약과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히브리인들이 생겼잖아요. 히브리인들이 여기에 침투했다는 말은 뭐가 같이 따라 들어온다는 말입니까? 아브라함의 언약과 이삭의 언약과 야곱의 언약과 함께 새로운 이질적인 민족과 함께 같이 살게 되었죠. 그런데 평화롭게 살면 되는데, 애굽 사람들이 욕심을 부려서 히브리인들이 자꾸 인구가 많아지니까 압박을 가했잖아요.

히브리인들에게 압박을 가한다는 말은 결국 뭐에게 압박을 가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압박을 가한 게 되잖아요. 압박을 가할 때 애굽 사람들은 자신만만했죠. 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는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입니까? 애굽 사람이 주인이고 누가 노예예요? 누가 쫄따구입니까? 히브리인이 쫄따구잖아요. 우리가 까불면, ‘입 다물고 있어.’ 이러는 게 정상적인 생각이었다 말이죠. 그런데 건드리니까, 누가 건드렸어요? 얕잡아 보고 히브리인들을 건드리니까 히브리인을 있게 한, 없는데서 있게 한 하나님이 어디를 쳐요? 애굽을 치죠. 구조가 똑같잖아요.

난데없이 10가지 재앙이 있는데 4번째 재앙부터는 구분되죠. 애굽인이 살던 동네와 히브리인들이 사는 동네와 구분해서 재앙이 떨어집니다. 결국 재앙이 구분되어 떨어져서 결국은 우리에게 재앙을 준 신은 어떤 신이다? 그냥 인간이면 다 치는 신이 아니고 인간 중에도 안 쳐야 될 인간 따로 있고, 쳐야 될 인간을 구분 짓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죠.

우리의 상식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누가 만들었다? 신이 만들었다. 그러면 사람은 누구 자녀다? 신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신의 아들 가운데서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저렇고 구분하면 그건 올바른 신이 아니겠죠. 예?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줄 경우는 어떤 경우죠? 울면 안 주잖아요. 울다가 그쳐버리면 선물을 줘야죠. 선물을 줘야 되잖아요. 왜?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애굽 인의 신에 의하면 어떤 신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랑한다. 따라서 우리가 비록 죄를 지어서 까불지만 회개하고 반성하면 주께서 구원해 주신다.’ 그런 하나님이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뭡니까?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따로 선택해서 선택의 효과,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서 즐겨 자신이 선택한 민족, 인간들 따로 있다는 그 자존심, 하나님의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민족에게는 구차 없이 징벌과 재앙이 떨어져야 되는 겁니다.

특히 재밌는 것은 홍해죠. 홍해는 바다 아닙니까? 사람이 바다에 들어가면 돼요? 안돼요? 안 되죠. 그런데 누가 바다에 들어갔습니까? 히브리인들이 먼저 앞장서 들어갔죠. 그러니까 애굽 인들이 자기하고 히브리인들이 같은 줄 알고 쟤들도 들어가는데 우리는 못 들어가느냐 하며 따라 오다가 물이 들어와서 다 빠져죽었잖아요. 왜 빠져 죽었습니까? 사람은 원래 바다에 들어오면 안 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쟤들을 왜 들어갑니까? 쟤들은 특별한 나라 사람이거든요. 그게 바로 ‘모세의 노래‘라고 요한계시록15장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건져 줄 때는 사람이면 다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니고, 특수한 사람만, 언약적인 사람만, 구원 받은 사람만, 들어가도록 자연세계조차도 조절한다는 이야기가 이 요한계시록 8장의 이야기입니다. 조절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인 맞은 사람한테는 때리지 말고 인 없는 사람은 때려라’라는 특별 지시가 주어지죠.

철저하게 사람 차별하는 식으로. 우리 하나님은 차별이 심하신 분입니다. 아주 심하신.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고 차별이 대단히 심하신 분인데, 그 차별은 인간의 착함과 고상한 것 없이 이유 없이 그냥 차별하는, 무조건 차별하는 거예요. ‘난 쟤는 무조건 사랑해, 그런데 쟤는 미워해, 미움 받은 사람이, ’왜 저를 미워합니까?‘ ’내가 밉거든.‘ 끝나버려요. ’저는 왜 사랑합니까?‘ ’내가 사랑스럽거든.‘ 그런 권한을 누가 갖고 있어요? 그런 권한이 예수님이 갖고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권한이 그러한 자격이.

그걸 되묻지 말라. 자식이 되어서 ‘엄마, 왜 난 남자로 태어나게 했어?’ 이렇게 되물으면 어디에 어긋납니까? 7에 어긋나죠. 7에 어긋난다는 말은 뭐에 어긋난다?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에 반기를 들고 ‘좋았더라.‘에 도전하는 셈이 된다니까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에 도전하는 세력이 누군지 알아요? 그게 바로 악마며, 인간 세계는 악마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다 틈만 나면 시도 때도 없이 모든 핑계를 누구 잘못으로 돌립니까? 신께서 사람 잘못 다뤄서 내가 이렇게 됐다.‘고.

제가 십자가 마을에 글을 하나 썼거든요. 왜 복음을 싫어하느냐? 복음이 결국은 사람들은 복음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이 돈이 되고 권력이 될 가능성을 내다보기 때문에 복음을 좋아하는 척 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복음에서 돈이 안 나오고 권력이 안 나오면, 이 복음을 사람들은 복음이 아니라고 단정 지어 버려요. 인간의 가능성은 뭡니까? 복음에서 돈 생기고 권력 나오면 인간의 가능성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참된 선지자는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 아니고 불가능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저 복음에서는 오직 예수님만 나오거든요. 그러면 복음에서 예수님만 나오는 것을 좋아 하는 사람,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데, 이 불가능이 되는 사람이 있어요. 성령 받으면 돼요. 성령을 안 받으면 복음에서 은근히 돈과 권력을 추구하게 돼 있습니다.

세상에서 방금 돌잔치 할 때 앞에다 실 놓고, 돈 놓고 책 놓고, 그 다음에 성경책 놓을 때, 성경책 쥐는 애는 정상이 아닙니다. 성경책을 갖다 놓지도 않을뿐더러  갖다 놓아도 애가 실수해서 성경에 손대면 ‘뗏치,’ 엄마가 강제적으로 ‘얘 큰일 날 애네. 나중에 집안 말아먹을 애네.’ 하고 잡지 못하게 하죠.ㅎ 오래 사는 실과 돈과 책 놓는 이유는 이 세 가지 모두가 다 힘이 되기 때문 이예요. 이 힘은 요한계시록에 바다에서 올라오는 힘이 육지의 힘을 이깁니다. 어두움이 육지의 힘을 이기는 거예요.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유도하죠. 어차피 흔들릴 세상이니까.

이러한 유도, 인간의 평소에 눈에 보이는 환상 같은 이 세상만 의지했다는 것을 발각시키는 그 작업을 누가 한다고요? 아까 누가 한다고 했습니까? 천사 7이 하죠. 이 말은 ‘다 이루었다’의 시나리오 속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세상만 보고 있다는 것을 발각하는 그 내용도 이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일부 담겨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다음에 봅시다. “첫째 나팔을 부니.....,” 나팔 불기 시작합니다. “땅의 ⅓이 타서 사위고” 땅의 ⅓이 사윈다는 것은 결국은 요한계시록 6장 8절에 보면,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 땅 ¼ 의 권세를 얻었으니까 ¾남죠? ¾은 아직까지는 자유로운 분위기잖아요. ¾이 요한계시록 8장에서는 ⅓이니까 약분해보면, ¾x⅓=¼ 그러니까 ¼이 작살나는 거죠.

이렇게 해서 7천사가 이렇게 하는 것이 ‘다 이루었다’ 하면 되니까 결국 7은 뭘 의지한다? 1, 한분 어린양의 한분 되시는 분에게 초점이 점차 모여지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믿을 것은 보이는 것밖에 믿을 게 없잖아요. 그렇죠? 수력발전 한다. 중력에 의해서 물이 떨어지면 거기에 전기 모터 돌리면 전기가 발생하잖아요. 그럼 사람이 믿을 건 뭐밖에 없습니까? 안정성으로 수량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때 전기가 있잖아요. 그러면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에너지를 공급하시는 분이 아니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자연세계가 ⅓이 깨져버리면 결국 수력발전 이런 것도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엉망진창 돼서 공급을 안 하죠.

그럴 때, 평소에 예수님 사랑, 예수님 찬양 이렇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정전돼 버리면 누구를 원망해요? 결국 예수님을 원망하게 돼 있다 말이죠. 사람들이 그걸 들추어내는, 인간의 본성을 들추어내는 일을 누가 하신다? 예수님 본인이 하시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 가짜 예수 믿는 것을 전부다 가짜로 들통 내는 일을 천사를 앞장세워서 일을 하신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됩니까? 그런 일조차도 누가 하셨다?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그 시나리오에 준해서 그런 것까지 다 이루어짐의 일환으로 주어짐을 알죠. 왜? 그들은 복음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안다 말이죠.

이 땅에서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 히브리인들도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폭격을 할 때 리비아 정부군에게 폭격을 해야 하는데 세상에 시위군에게 폭격을 하면 엉망진창 되잖아요.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이 안 되잖아요. 만약에 폭격을 한다면, 아직 폭격을 안 했습니다만, 주님께서 폭격을 하는데 성도와 비성도 구분 없이 폭격을 할 때, 진짜 성도와 불신자가 구분이 드러나도록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인 맞은 자에게 하시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인 없이 그냥 양쪽 다 같이 때리는 그런 경우도 있는 겁니다. 인 맞는 거 뒤에 나와요. 구분하는 것도 뒤에 나옵니다.

어쨌거나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자기의 유일한 살 궁리라 여기고 그것에다 모든 걸 다 거는데, 마지막 그들이 걸었던 자연세계 자체를 누가 손댄다? 주님께서 손을 대는 이유는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재앙을 보게 되면 수목의 ⅓도 타고 또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산과 같이 바다에도 ⅓이 피가 되고, 11절에도 이 별의 이름은 쑥이라. 쑥이 뭡니까? 쑥은 특징이 뭐예요?  쓰죠. 그럼 한 번 보세요. 쑥이 쑥보고 쓰다고 이야기 합니까? 안 합니까? 토끼가 우리 길다고 이야기 안하죠? 왜냐, 길어야 토끼다우니까. 그러니 쑥이 쓰다 안 쓰다 하는 것을 결국 누구보고 이야기 하는 겁니까? 쑥은 인간이 뜯어 먹죠.

하나님께서 쑥과 찔레, 가시가 돋아나게 하시는 것은 결국 누구를 공격하기 위한 용도죠? 인간이 살기 힘들게 하기 위한 용도가 되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가시와 찔레로 이마에 땀을 흘려야 살게 돼 있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이라는 것은 살기 좋은 세상입니까? 나쁜 세상입니까?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환경 이예요.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환경인데 인간들은 개간하고 문명, 문화를 일으켜서 사니까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한 원리에 위배돼요? 위배 안 돼요? 위배 되죠.

처음에 창조가 뭡니까? ‘선악과 따먹지 말고 생명나무만 따먹으면 영원히 복락이 유지된다.’ 그게 원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원리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는 죽으라고 있는 환경이거든요. 죽으라고 있는 환경에서 죽으면 되는데 자꾸 이곳에서 억지로라도 살아보려고 버티니까 결국은 그 원망과 그 불평이 누구한테 쏟아져요? 주님께 쏟아지고, 처음에는 하나님이고 그 원리가 더 가까워지면 나중에는 예수님이 개입했다는 것을 알죠. 말씀의 육신이 되신 분에게 모든 비난을 쏟아내잖아요.

결국 그들은 자기가 미처 몰랐던 죄가 예수님의 연이은 작업에 의해서 나중에는 극단적인 저주가 시작되죠. 벌써 시작됐습니다. 예수님 뭐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해가면서 특히 배웠다는 사람들, 작가들 소설가들, 시인들, 그리고 신학자들, 예수는 미친 사람이라든지, 예수가 이야기한 것은 과거 로마 신화 때 다 뺏긴 거라든지, 예수는 신화다라든지, 막달라 마리아하고 결혼해서 애 낳아서 지금 베르데 프랑스 관광, 그 피를 성배라 한다든지, 다빈치코드 있잖아요. 도마 복음이 어떠니,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은 평범한 보통 또라이고 그냥 목수지 결코 하나님은 이다? 아니다? 하나님은 아니다 말이죠.

이것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을 되풀이 한 것밖에 안 돼요. ‘당신이 메시야라면 구름타고 와야 될 거 아냐? 다니엘을 봐, 인자는 구름을 타고 와야 인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조금 후에 구름타고 올 것이다. 오는 것을 너희들이 볼 것이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믿으면 되는데 ’이게 미쳤구나.‘ 해서 죽이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잘 될 거라 여기던 12제자들이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 예외 없이 전부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죠. 베드로는 3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그렇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존재 한다 여기지만,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사건이죠. 주님이 이러한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에 동원된 사람들입니다. 12제자가 교육 받아서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결국 어린양은 예수님뿐이고 따라다니는 사람도 말짱 소용없더란 겁니다. 예수님을 밀고 당기고 그렇게 만져도 구원 받지 못했는데, 딱 한 사람 예수님 옷 가를 믿음으로 만진 사람은 구원을 받았잖아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구원을 받았잖아요.

그처럼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은 결국은 뭡니까? 예수님,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 될 수 없음을 지금도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받은 사람은 제가 뭘 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하여튼 예수님 자기 숙제이고 예수님의 자기 일의 결실의 열매가 가지에 열매가 튀어나오듯이 귤나무에 귤 열리고, 포도나무에 포도 맺히듯이 주님께서 훅 불면 유리막대에서 동그랗게 비눗방울이 나오듯이 주께서 훅 불어서 생긴 것이 누구다?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 가지에서 나온 열매가 우리들입니다. 성도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거의 미친 사람이죠. 사모님한테 그런 욕먹어도 당연한 겁니다. 왜냐, 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부터 챙겨야지, 예수부터 챙기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게 인간도 아니죠.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했으니까,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살 것이요.’ 어느 인간이 자기를 미워해요? 없죠.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결국 무너질 세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감기에 콧물 나오듯이 계속해서 못 살 세상, 소망을 둬서는 안 될 세상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도 숱한 사건 사건이 그렇게 터지는 거예요.

여러분도 리비아 뉴스 보면 알겠지만, 전 뉴스 볼 때 뭘 보느냐 하면, 난민들을 보거든요. 난민들이 떼를 지어 튀니지나 옆 나라로 피난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의 제일 심각한 문제는 저도 이번 겨울에 겪었지만, 화장실 문제, 식수 문제, 잠자리 문제, 식량 문제, 우리는 느긋하게 북한이 안 쳐들어와서 느긋하게 앉아 있는데, 저쪽은 난리 났죠. 얼마나 고생스럽겠습니까? 알라는 위대하다고 백날 외친다고 생수 하나 주지도 않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태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안정되었다고 여기는 어느 지점에도 다 그래요. 세상에 그 잘 사는 나라 뉴질랜드에 지진이 일어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세계 최고의 분출구가... 최고의 복지 국가인데,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거기 지진이 일어나서 그것도 지진의 중앙에 있는 Church(교회)가 무너졌잖아요. 그 교회 질 때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땅 밟기 하고 기도했겠습니까. 주께서 함께 성전에 계시니 무너질 리 없다고 했는데 무너졌으니...

그러니까 무너져도 괜찮다고 해야 성도가 되는 겁니다. ‘무너져선 안 됩니다. 내 세계 내 영역이기 때문에 딴 데는 무너져도 이건 손 못 댑니다.‘라고 나오면 그것이 불신앙 자고 그게 바로 악마의 종이다 이 말이죠. ’내 것은 손대지 마세요. 내 인생 손대지 마세요. 다른 사람은 다 당뇨병 걸려도 내 인생은 당뇨병 걸리면 싫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라 말이죠. 그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다 핑계고 사실은 그동안 쭉 누구를 믿어요? 자기 자신이 신이고 그렇게 온 겁니다. 그 자기 사랑, 그 자기 사랑을 인간들은 7일로 보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보기에 심히 좋구나.‘ 지 혼자 좋지, 지 집구석은 좋지.

주 하나님은 예수님 잘 되면 보기에 심히 좋은 것이고, 예수님 잘 되면 그게 다 이룬 겁니다. 이제는 무슨 작업을 합니까? 예수님과 나와 바꾸는 작업을 천사를 통해서 영적으로 흔들기 작업에 나선 것이 요한계시록 8장의 이야기입니다. 하여튼 살기 점점 힘들어 졌어요. 그 담에 봅시다. 12절, “네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여기서 낮과 밤 달, 이게 뭐냐 하면, BC 100년경, BC 50년경, 서기 10년경, 어떤 경우라도 사람은 그 시대 사람입니다. 그 시대 존재해요. 이걸 약간 더 설명하면, 옛날 우리 삼국 시대나 조선시대 이야기를 예를 들면 여자의 칠거지악이라는 게 있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이건 말도 안 되죠. 여권신장 당수 들었으면 기가 찰 일입니다. 그리고 옛날 여자들이야 정말 소나 키우는 사람이지, 여자로서 여자노릇을 못 했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시대를 앞장서서 조선시대 여자가 지금 21세기 사고방식을 하고 있다면, 그건 맞아 죽습니다. 큰일 나죠.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선지자라는 사람이 그 시대 사람이면 되는데, 미래의 이루어질 일이 미리 앞당겨서 자기 삶 속에 침투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참된 선지자 혼자 완전히 미친 사람 이예요. 세상에 미래에서 온 사람은, 미래소년 코난 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미래를 몰라요. 기껏 짐작하고 예상만 하죠. 그 시대 사람들이 비는 것은, 해와 달과 별의 안정성, 안정성이 중요해요.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이런 자연이 안정될 때 누구도 안정됐다? 내 마음도 행복하고 내 마음도 안정이 되는 겁니다. 지금 원자재 값 오른다 하죠. 불안정하잖아요. 국제 지수도 불안하죠. 기름 값 오르죠. 기름 값 오르는데 왜 내 마음은 평안 할까, 이게 안 되잖아요. 기름 값 오르면 다 불안정해요.

결국 사람 마음은 누가 흔든다? 외부에서 흔들어요. 외부가 안정될 때 같이 안정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연평도가 안 싸워서 그렇지, 지금 싸워서 포탄 소리가 퉁, 퉁 들리면 소화가 안 됩니다. 지금 여기 있으니까 소리도 안 들리고 좋죠. 퉁, 퉁 소리가 들리면 불안해서 못 살 거예요.

그러나 선지자는 그렇지 않다. 선지자는 완전히 까발렸어요. 남들 보기에는 넘어갈 일도 선지자에게는 전부 다 죄, 죄, 죄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후서에 보면 나오죠.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 마음이 상했다고 했죠? 같은 소돔과 고모라에 살면서 지는 왜 마음이 상해요? 조금 있다가 하늘에서 뭐가 떨어집니까? 조금 있다가 유황불 떨어지는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거예요. 박사네 판사네 의사네 부동산 해서 돈 벌었다니, 전부 다 세상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고, 그걸 자랑이라고 내놓고 골프치고 하는데, 자기 보기에는 ‘아이쿠, 인간들아 유황불이 안 보이나?’ 심령이 상한 거예요. 심령이 상하면, 미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현재 그 시대만 보는 사람과 대화가 소통이 될까요? 안될까요? 소통이 안 되죠.

지금 TV나 신문을 보세요. 전부 다 무슨 이야기 합니까? 현 시대 이야기하잖아요. 미래 주님의 계시 이야기 하는 그런 일은 없잖아요. 그래서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죽음을 다시 한 번 깊게 느끼는 것이 그 뒤의 13절입니다. 13절에 보면 하늘에 뭐가 날고 있죠? 독수리죠. 독수리가 날면서 뭔 소리 합니까? ‘끼욱, 끼욱 합니까? 까욱 까욱 합니까? 뭐라고 합니까? 사람 말하죠. 화로다, 화로다, 화로다. 분명히 그 시대는 아직까지 화가 다 아니에요. 그 시대는 아직까지 살 만합니다.




그런데 독수리가 와서 ’화로다‘ 한 것은 마치 폭격기가 폭격 한 거 같아요. 다시 말해서 이게 뭡니까? 전령사라 하는 것은 어떤 명령 하달 자와 명령 받아야 될 자 사이에 중개 역할을 하죠. 그렇죠? 독수리가 폭격한 것은 화, 화, 화니까 요새 말로 하면 죽음, 죽음의 전령사라 말이죠. 그러면 이 독수리의 전령사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그 시대에 누구밖에 없겠어요? 하나님의 성도만 독수리의 그 전령의 내용을 귀담아 들을 것이다 말이죠. 그러면 독수리는 뭐냐, 바로 독수리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되겠죠. 누가복음 21장 33절~35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여기에 35절에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뭐가 임한다는 겁니까? 이 덫과 같이 임한다고 했죠.

그래서 노아 홍수 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 갑자기 홍수가 났던 것처럼 인자의 날도 그러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대비하면 됩니까? 대비해야 되겠어요? 대비 안 해도 되겠어요? 대비하면 안 되죠. 대비하면 신자도 아니죠. 대비하면 큰 일 나는 겁니다. 그러면 마귀의 꾀임에 빠진 거예요. 대비를 무슨 수로 합니까? 왜 대비가 안 되느냐 하면, ‘다 이루었다’ 가 흔들거든요. 우리가 이게 배라면 우리가 배에 타고 있는데, 그냥 물결 흔들리면 붙잡고 안 빠지도록 노력하면 되는데, 물결이 아니고 ‘다 이루었다’가 흔들면 우리는 붙잡을 것도 없어요. 같이 떨어지면 돼요. 그 자체도 ‘다 이루어짐의 하나의 일환이 되는 거예요. 스케줄 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은 세상을 해석하는 거예요. 세상이 아무리 살고자 해도 이미 죽음의 폭격이 이미 죽음의 세상이라 말이죠. 그러면 세상을 왜 독수리가 폭격을 하는 겁니까? 독수리도 주님이 보낸 것인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예수님, 메시야를 죽였기 때문에. 그걸 제가 어제 글에 썼죠. 인간이 주님을 분질러 버리니까 주님도 인간을 분질러 버린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나한테 한 그대로 내가 되갚아 준다는 거예요. 되갚아 줘야 진짜 ‘우리가 죽였던 그 분이 진짜 메시야 맞구나!!’라고 우리가 알아듣기 때문에.

지난번에 중국에서 강의 했는데,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유대인이죠? 그런데 유대인이 베드로한테 설교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회개하고 죄 용서받고 구원 받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설명했죠.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는다면, 구태여 그들이 회개할 필요 없이 아파트마다 수도 물에 예수님의 피를 줘 보내서 ‘자 305동 수돗물 틀어놨습니까? 피 나옵니다. 피 받으면 구원 받습니다.’ 이렇게 피를 줘서 받으면 되는데, 그 피가 그냥 피가 아니고, 먼저 우리가 메시야를 분질러 버리고, 메시야를 죽였다는 그런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말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던, 그 우리가 죽였던 그분한테 우리가 용서받는 식이 될 때, 그게 바로 회개와 재용서가 된다 말이죠. 내가 간음하고 살인해서 용서받는 게 아니고, 이 죄는 인간이면 다 짓는 죄고 이것이 죄의 끝은 아니에요. 죄의 끝은 뭡니까? 결국은 ‘나는 나만 사랑하지, 예수는 싫어.’라는 죄, 그 죄가 죄라고 드러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더 간추리면 ‘나는 예수보다 나를 더 사랑해. 그런데 이게 바로 내가 지옥 갈 좌 맞구나.’라고 받아들일 때 그때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 이예요.

‘오늘도 마음속으로 간음했으니 용서해 주세요.’ 그 시시한 죄, 돈 좋아한 죄, 돈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 죄는 죄 축에도 안 들어가요. 진짜 죄는 진짜 악마의 죄는 뭐냐,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돼 있어요. 왜 예수님을 미워하느냐? 그건 내가 예수님보다 더 좋기 때문에. 여기 두 사람이 있는데 광림 씨가 ‘왜 집사님이 날 싫어해요?’ ‘널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더 좋거든.’ 이러면 할 말 없잖아요. 그럼 나도 ‘나도 당신보다 내가 좋다.’ ‘그래, 그래라.’ 그러니까 둘 다 막 쥐 박는 거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나는 너보다 내가 좋거든.’ 하니까 그러니까 ‘저도 제가 더 좋거든요. 그런데 집사님, 그게 죄였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기적이라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는 ‘ 예수님 앞에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 에 대한 도전하고 주님에 대한 저주스러운 죄가 되는군요.’라고 깨닫는 거, 이것이 바로 기적이고 그 기적은 바로 주님의 영, 성령이 와야 그걸 알 수 있는 겁니다. 비로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는 겁니다. ‘아, 우리는 예수 믿어도 예수 믿는 나를 더 사랑했구나,’라는 것을 성령이 와서 깨닫게 하죠.

모든 것이 다 이루었는데, 우리는 나만 사랑하다 보니까 아직도 미흡하고 모자란 게 있다고 ‘더 다오, 더 다오,’ 하는 것처럼 뭔가 나를 위하서 더 필요한 게 있습니다. 요구해서 다 이루심을 모독하는 그쪽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것이 매일같이 나올 수 있는 죕니다. 매일같이 우리가 사는 것도 다 이루심인데, 나는 예수를 잘 믿는데 뭔가 아직도 돈으로 아직 안 굴러들어 왔다고 삐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 하셨습니까? 인자는 뭐할 곳이 없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얼마나 인간이 예수님을 흉내 내고 모방할 수 있습니까? 못 합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겸손을 보여도 죽을 때까지 인간은 죄인으로 드러날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이 구원 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그냥 예수님 자신이 일방적으로 결정해 놓은 사랑으로 구원 받는 것이지, 죄가 예수님한테 타협하고 협상해서 구원 받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 예수님과 협상하고 타협하려고 와요. ‘이거 해 주시면 이거 드리겠습니다.’ 허 장강처럼, ‘김 마담, 이거 들어주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어?’ㅎ 허 장강이란 사람이 있어요. 나쁜 역할 하는 사람 있어요. 주고받고 거래하는 식으로.

우리는 이상하게 예수님만 떠올리면 ‘ 예수님, 오늘도 기도합니다.’ 항상 거래하는 식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거리하고 흥정하고 정치적인 타협을 시도하려 하고, ‘이만큼 할 테니까 주시겠습니까?’ 맨 날 이런 식으로 기도 하고 기도 끝. 이게 무슨 기도 끝입니까, 흥정 끝이지, 협상 끝이지.ㅎ 기도 끝 이예요?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아야 돼요. 응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미 ‘다 이루었다’ 응답 받으면 기도하지 마시고 일어서세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응답 받으면 일어서야 돼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는데 더 달라 하면, 그것은 대단히 수상한 사람 이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 이래 있으면 주변에서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경우는 일체 없습니다. 사람의 선택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수동적으로 사건이라는 상황 안에서만 일어나는 선택입니다. 그러니까 수동적이죠. 수동적으로 주어진 상황 안에서 ‘자,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돼? 뒤에서 세무서 들이치는데 정면으로 처리해야 돼.’ 주어진 수동적인 상황 안에서 지 나름대로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의 폭도 누가 정해요? 자가가 정하는 거예요.

남자가 여자하고 결혼할 때, 우리나라 2천 만 명 여자를 줄 세워 놓고 지가 뽑았습니까? ‘삼월이 들어와, 춘향이 들어와’ 라고 이렇게 자기가 뽑았습니까? 기껏 소개하는 3군데서 하나 뽑고 이러잖아요. 기껏.ㅎ 수동적으로 주어지잖아요. 자기가 결혼하고 연애하는 것도 전국에 있는 직장 돌아다니면서 골랐습니까? 기껏 매일같이 출근해서 맞대는 남자 직원들 몇 명 사이에서 뽑잖아요. 사내(社內)연애, 그렇잖아요. 그런데 직장도 없으면 연애할 기회도 없다니까요. 그래서 큰 교회 가는 거예요. 애인 찾는 가능성을 넓히기 위해서. 작은 교회, 이 교회 와 봐야 총각도 하나밖에 없고.ㅎ 큰 교회 가면 숱하게 있을 테니까 선택의 폭이 넓잖아요. 그런 자리를 교회가 마련하지 않습니까? 그래놓고 핑계 대기를 ‘주의 은혜로 왔다.’ 주님 은혜가 아니고 지 욕망이 수 없이 고른 거예요.

남자들이 하는 후회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괜히 결혼했다는 거예요.ㅎ 결혼 한 이유가 뭐냐 하면, 여자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결혼 했는데, 막상 결혼해 보니 궁금증이 사라지니까 그 다음부터는 원대복귀가 안 되는 거예요.ㅎ'이건 갈라설 수도 없고 이걸 물릴 수도 없고,‘ 여자가 세파트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물면 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라요. 꽉 물었다 하면 놓지를 않는 거예요. 꽃뱀이 따로 없다니까. 여자 자체가 (예전에 말했잖아요) 결핍이라고. 여자 자체는 여자라는 게 없어요. 마이너스(-) 남자가 여자예요. 남자의 모자람이 여자예요.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찾게 돼 있어요. 창세기 3장에 보면. 그래서 남자는 병신바보처럼 물리게 돼 있다니까요. 물려놓고 후회하는 거예요. ’괜히 했어. 괜히 했어.‘ㅎㅎ

그래도 다행스럽지. 여자가 자식을 낳게 되면, 남자로부터 떠납니다. 그때부터는 자식이 전부예요. ‘이젠 나는 죽어도 너는 살아나라.' 자식이 우상이라.’' 그래서 나이가 많아도 남자가 여자한테 사랑받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고 했죠. 남편 노릇 그만하고 아들 노릇하면 이제부터는 사랑받고 이쁨 받는다고. 남편 하지 말고 아들로 쳐주면 안 되느냐고. 그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마이너스(-) , 결핍, 나의 마이너스를 위해서 전능하신 신에게 기도를 하는 판국이기 때문에 결국은 뭡니까? 나라는 것이 어디서 발생 된 거예요? 이 마이너스를 어디서 찾는 겁니까? 남이 갖고 있는 프러스(+)에서 찾는 거잖아요.

결국은 인간 세계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서로 소통하는 그 언어의 세계, 황금만능 속에서 그냥 환상만 쳐다보다가 인생 늙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영적인 세계가 외부에서 와 버리면, 바로 이런 환각 세계가 가만히 있는 환각 세계가 아니고, 메시야에게 죽음을 요구한, 메시야를 죽여 버린 악한 악마의 세력에 의해서 그러한 환상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는 우리 몸이 있는 한 그 환각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 없다?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벗어났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못 벗어나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 거예요. 요 차이가 굉장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예수 믿고 새 사람으로 살련다. 못 살아요. 살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런 허황된 욕망을 내면 안돼요. 왜냐하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새 사람으로 산다는 새 사람의 이미지가 옛 사람, 나에게서 마이너스에서 여기에 보충된 프러스로 바뀐 결국 내가 나를 신봉하는 것밖에 안돼요. 멋지게 살고 바르게 살고 예수님답게 사는 그것도 어디서 만든 것이다? 마이너스 결핍으로 갖고 있던 내가 조작해 낸 거예요. 성경 말씀을 지 맘대로 채택해가지고. 결국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더 훌륭해진 나를 사랑한 거예요. 교회에서 기껏 훈련받고 성화 훈련받고 신자 교육 받는 것은 결국 예수님 사랑한 게 아니라 지금의 나보다 더 좋은 나에 대한 나의 애착과 거기에 대한 신봉, 거기에 매진, 그래서 멋있는 나를 과시하고 싶어서 전에는 마이너스 나인데 이제는 프러스 나로 교회 앞과 세상 앞에 나서려고 하는 야망의 표시예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그것을 훈련을 시킨다고 나를 훈련시키느라고 바쁘죠. 그야말로 가관이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피’를 믿으면 되는데, 예수의 피가 새 언약이잖아요. 아까 한 강의 처음부터 합시다. 어린양의 피가 우리 옷을 희게 했죠? 그것 믿으면 되는데, 왜 갑자기 자기가 파자마 갈아입고 자기 옷 갈아입고 매일같이 자기가 옷을 세탁기 넣어서 하이타이 넣어 지가 빨고 왜 그런 짓 해요?  ‘이제부터 새 사람 됐으니까 멋지게 살아보자.’ 결국 그 사람은 뭘 사랑하느냐 하면, 멋있는 예수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멋있게 된 자기를 계속 사랑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누가 할 거예요? 소는 누가 키울 건데?ㅎ 결국 자기를 신봉하는 자기 신자죠. 자기 성전에서 자기 신상을 세워놓고 매일같이 멋있는 나하고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거울아, 거울아 예수를 잘 믿는 이렇게 멋있는 존재가 또 있을까,’ 자기한테 반해 빠져 가지고... 그때 주께서 고맙게도 가정에 우환이 생기고 기름 값이 오르고, 리비아 사태로 흔들고, 북한 연평도 터져서 ‘미국으로 이민 가 버릴까 못 살겠다.’ 서서히 불안을 느끼죠. 이민 가려 하니까 돈은 없고, ‘하나님 뭐 하십니까? 돈도 안 주고,’ 이런 식으로 또 하나님한테 원망하고,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생활, 그런 생활 속에서도 주께서는 이미 그조차도 우리가 그렇게 망가진 것조차도 어디에 포함돼 있다? ‘7’ 뭡니까? 7나팔 속에 다 포함이 돼 있고 7나팔 속에 다 발각된 ‘다 이루었다’에 포함됐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이렇게 다른 장소에서도 계속해서 말씀을 보도록 기회를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우리가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가 얼굴을 볼 때까지 이 말씀 속에 있는 주님의 뜻을 많이 헤아려서 날마다 주님 앞에 우리가 회개하면서 주님의 공로에 대해서 다시 느껴지는 그런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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