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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4 01:23:00 조회 : 1959         
죄의 교환 150423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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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2.222) 15-05-03 18:00 
가락-요한복음6장45(죄의 교환)15042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6장 45절부터 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이 문장 하나, 하나가 굉장히 집약돼 있어요. 그 집약돼 있는 원리를 한 마디로 알기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살리느냐? 어떻게 죽이느냐? 또는 어떻게 구원하느냐? 그건 아니에요. 그 함축된 문장 하나, 하나가.

어떤 문장이냐 하면 사람이 위주가 아니고 영생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영생 얻기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주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은 우리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아버지가 하시는 일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의 도화지? 또는 메모지로 이렇게 쓰여 지는 거예요. 빈 메모지 있으면 여기다 글자 쓰잖아요? 이 메모지가 뭐냐, 인간이고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신대로 글씨를 쓰는 것처럼 우리 메모지에다 주님의 하신 일을 여기다 새겨버리면 주님은 우선 자기 임무가 끝나는 겁니다.

새김 받는 사람은 구원받고, 그런 주님으로부터 새김 안 받은 사람은 이거는 종교인이 돼 버려요. 평생 도 닦는 사람으로 끝나버립니다. 주께서 새겨줘야 되거든요. 새길 때 우리는 항상 종이가 하얗잖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뭐로 보시느냐 하면 우리를 죄인으로 바라봐요. 죄인으로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죄인으로 만들어놔야 예수님이 만들어주시는 영생이 거기서 의미가 떠오르게 돼 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작업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영생을 이야기하면서 잘났다는 사람을 뭐로 변경시키느냐 하면 죄인으로 바꾸는 작업을 병행해서 같이 실시를 합니다. 죄를 일부러 만들어지게 해놓고 그 만들어진 죄를 용서해주죠.

그런데 인간들의 본성은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대로 내가 죄인 되기보다는 나는 계속해서 ‘저는 착합니다. 착합니다.’ 하고 자
꾸 얼마나 내가 더욱 더 착해질 수 있는가. 더욱 더 완벽해질 수 있는가. 복 받을 만큼 내가 행동을 똑바로 잘할 수 있는가. 왜, 똑바로 하게 되면 남보다 복을 더 많이 얻어내니까 나한테 이익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만약에 복을 적게 받으면 남들이 손가락질 하니까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용할 때는 자기가 스스로 착하다 여기는 것을 죄인으로 만드는 작업에 해당이 되는 사람은 영생 얻는 사람이고, 그 주님의 이러한 작업에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 거기에 쓰여 지지 못한 사람은 영생 얻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영어로 Paper인데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아버지께서 이 페이퍼를 주신 자만 나는 적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준 자만 내가 그 자만“ 그 다음에 뭐겠어요?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 자 같으면“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하면 요한복음 6장 39절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리는 이것이라“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준다면 그 페이퍼에 관계없이 그 사람은 절대로 내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돼요. 내가 악착같이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반대로 생각하면 이건 큰 일 나는 소리입니다. 그거는 도를 닦아도 보통 닦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거는 정말 탈락될 사람 이예요. 그게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준다면 아버지가 보내줬다는 이유 때문에 아들은 반드시 접수하게 돼 있어요. “에이, 얘는 아닙니다.” 이렇게 거부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39절에 “그 마지막 날에 이를 내가 다시 살린다.“ 하는 여기에 대해서는 차질이나 빈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의 일에 오류나 시행착오나 이런 거 없어요. ”아이쿠, 내가 깜빡했다.“ 이런 거 없습니다. 완벽하게 합니다. 그 완벽한 것을 믿으시려면 주께서 하는 작업을 이해를 해줘야 돼요. 주님은 나를 더욱 더 뭘 만든다? 죄인 되게 만든다. 이 원칙을 잊지 않으면 돼요. 이 원칙을 자기가 놓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날 죄인 만들 때 어떤 식으로 죄인을 만드는지 이제 그게 궁금할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약간의 도표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 사람들의 오해 중에 하나가 인간이 신을 상상하고 신이 계신 나라를 하늘나라라고 보고, 자기가 거기 찾아가겠다는 식으로 소위 종교생활을 하죠. 흔히 신앙생활이라고 하는데 종교생활을 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뭘 모르느냐 하면 인간이 이렇게 가면서 이런 것도 누구의 따가운 시건, 또는 누구의 응시, 누구의 관찰, 누구의 주목 속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왜냐 하면 이런 시선과 응시 관찰 주목 여기에 주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에 타인의 욕망이 있거든요.

아까 사담하면서 했습니다만 우리집안은 아들이 많다. 이미 타인의 욕망 이예요. 타인의 시선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내 인생 산다 하잖아요. 아니에요. 이미 나는 누구 인생을 닮으면 나는 맘에 들더라, 본인이 이미 강요내지는 강요된 가운데 본인이 선택을 했어요. 나는 우리집안처럼 애기를 많이 낳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미 은연중에 그 정신세계를 형성합니다.

그 정신세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흔히 유명한 말로 이걸 ‘현실’이라고 해요. 현실인데 인도 사람 현실하고 대한민국 사람 현실하고 중국 사람 현실하고 다르죠? 왜냐 타인,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응시, 시선, 주목, 관찰, 이러한 질이 다르기 때문에 ‘너는 이렇게 사는 것이 옳아.’라는 것은 이미 강제로 세뇌를 당한 상태입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맘에 드는 걸 고를
뿐이지, 전적으로 내가 ‘나는 어떻게 인간일까?’ 그런 것은 내가 지어낸 게 아니에요.

내가 어떤 인간이 됐으면 좋겠느냐 하는 그 참조할 수 있는 상황들이 이미 가까운 부모로부터, 가까운 친척, 사촌들, 대한민국이라는 이런 환경이 이미 쫙 깔려있어요. 특히 20대에서 30대 중간까지의 남자들의 로망이 뭡니까? 옛날에서는 결혼, 여자였지만 지금은 차잖아요? 여자한테는 배낭여행이고 남자한테는 차라니까요.

그저 돈 버는 게 동기유발이 돼야 돼요. 영업하면서 힘들면서 이 힘든 영업을 어디서 해소하느냐, 스트레스를 ‘이번에 내가 바꾼다. 이번에는 내가 사륜으로 바꾼다. 그게 하나의 동기가 된다니까요.

그건 누가 그렇게 한 거예요? 북한에서 그렇게 합니까? 아니죠. 중국에서도 안 해요. 한국의 분위기가 이미 강요받은 분위기 속에서 나의 정체성, 나의 정신세계, 이미 익숙해진 거예요. 그중에서 자기가 맘에 드는 욕망이 타인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난 저 치 타고 싶어.’라는 욕망을 뚝 떼서 거기 나의 욕망이 들어오면서 그게 나가 되는 겁니다. 이게 에고가 되죠. ego, 프랑스 말로 모이. 내가 나가 되는 거예요.

주님은 이걸 아십니다. 지금 니가 나에게 신을 할 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소통되는 방식을 니가 그대로 수입하다시피 답습하다시피 이미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답습하는 이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게 바로 창세기 3장에 선악을 아는 지식에서 나왔거든요. 그 지식이 뭐냐 선악을 아는 지식 이예요. 세상에는 모든 과학과 생물 물리 화학, 여러 가지 경영지식이 있지만 그 모든 지식 지식을 뭐로 나누느냐, 가치관으로 나눕니다. 그러면 이게 옳으냐, 이게 나쁘냐, 좋으냐와 딱 둘로 갈라져요. 모든 게 갈라져요.

예를 들면 직업이다. 이게 내가 나쁜 직업이냐, 선한 직업이냐, 딱 갈라져요. 반드시 카메라가 좋은 카메라냐, 나쁜 카메라냐 항상 어떤 것도 인간의 가치관이 거기에 쏠리게 된 이유가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생을 다 살고 마지막 내 인생을 돌아다보면서 커텐이 걷히면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났을 때 마이웨이, 나의 방식대로 내 인생을 산다는 그 마이웨이 보게 되면 나는 잘 살았을까,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나는 못 살았을까, 아직까지 철이 없을 때는 ‘나는 부자로 살았느냐, 가난하게 살았느냐. 하지만 진짜 나이 많아서 곧 돌아가시게 되면 부자고 돈이고 인기고 명예고 관계없어요. 난 착하게 살았을까. 아니면 악하게 살았을까. 결국은 인간은 선악과라는 그 종교에서 종류와 관계없이 한 치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부자 청년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선한 선생이여” 앞에 뭐가 붙어요? “선한 선생이여” 호칭을 “선한 선생이여“ 부름으로써 ‘저도 주님도 같이 같은 레벨입니다.’라고 의식적으로 그걸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선한 선생님이여 선생님 찾으니 나도 선하죠?“ 이미 깔려있어요. 이걸 오늘날로 하면 ”주여“ 뭔 뜻입니까? 주여 부르는 나는 부르지 않은 사람보다 지금 제가 선한 쪽에 서 있는 거 지금 보고 계시죠? 찰칵 사진 찍으세요. 오늘 교회 나온 거. 이게 전부 다 모든 행동이 선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악입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메일을 보냈어요. 삼위일체에 대해서 메일을 보냈는데 삼위일체가 악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삼위일체가 악 이예요. 이게 선한 게 아니고 의를 빙자한 악이라니까요. 그게 더 못 된 악 이예요. 살인, 강도, 간음 이런 거 하고 차이나니까 선해 보이잖아요. 삼위일체.

그래서 교회마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요. 삼위일체 모르면 이단이고 이단이기 때문에 지옥 갑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 가려면 뭘 알아야 된다? 삼위일체를 알게 되면 구원받습니다. 이게 어지간한 교회들이 이야기한다고요.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던가요? 성경에는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실증 적, 실증이란 말 아시죠? 실제로 생겨버린 일. 실증적사건이라 하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는 거예요. 실제로 역사 속에 실제로 일어났다는 이 말이죠.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이 뭐가 되냐 하면 예수님은 아까 이야기한 타인의 시선, 주목 가운데서 뭐가 됩니까? 죄인이 된 거예요.

따라서 그 죄인이 된 분이 사형 당했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는 누가 뭐래도 예수님은 이미 위험한 인물로 이미 확증이 된 거예요. 없애야 될 정도로 그만큼 위험한 죄인 이예요. 제가 그런 말 하는 게 뭔 뜻입니까? 예수님을 그렇게 없오애야 될 죄인이란 그것이 이미 형성된 타인의 주목, 타인의 응시, 관심이고 시선이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지금 거부감을 나타냅니까? 안 나타냅니까? 전혀 거부감이 없잖아요. 오히려 남들이 부모가 '야야, 너 결혼하는데 잘살아라.' '잘 살고 있어요.' '야야, 돈보다 선하게 살아야 돼.' '지금 선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외부에서 나를 선하게 착하게 바르게 살아야 같은 한 그룹으로 인정해 주는 그런 분위기에, 우리는 그 욕망에 맞춰준다고 우리는 아주 애를 씁니다.

왜 우리가 일을 합니까? 놀면 부모가 싫어하니까. 우리가 성질대로 왜 함부로 못 삽니까? 보는 눈이 많아서 그래요. 걸핏하면 언론에 공개한다. 오늘 뉴스에 보니까 몰래 사적으로 남성들이 옷을 벗을 모양 이예요. 남성들이 옷 벗을 걸 카메라 찍어서 그걸 협박해서 `1만 명이나 돈을 뜯겼대요. 얼마나 많이 했으면 그건 난 잘 모르지만, 공개하면 어떤데? 왜 공개하면 안 되죠? 왜 내가 바지를 벗은 사진이 왜 공개하면 안 되죠? 왜 가족들에게 오빠, 누이동생, 아빠 할아버지한테 왜 자식들한테 왜 공개하면 안 됩니까? 그쪽에서 얼레리 꼴레리, 욕하죠. '인간 봐라. 이게 인간이 개지, 점잖은 놈이 먼저 부뚜막에 올라갔다더니만 니가 이런 짓을 하다니' 이게 지금 스스로 본인이 상상하잖아요. 상상하니까 협박에 돈을 주잖아요.

그런데 묻습니다. 그거 왜 상상하죠? 상상한다는 말은 잠재돼 있다는 말이고 그 잠재돼 있기 때문에 예상한다는 뜻이거든요. 그 잠재돼 있는 게 어디서 왔느냐? 어디서 수입했느냐 제가 묻는 거예요. 어디서 수입했어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였던 이 세상의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기서 나온 겁니다.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의 하는 일을 하는데 우리를 하나의 페이퍼로 사용한다 했죠. 그런데 이 페이퍼는 누가 준다? 아버지가 이 페이퍼를 주게 되면 예수님이 거기다 새긴다 했잖습니까? 그런데 우리 페이퍼라 하는 것은 우리는 선악적 입장에서 하얗게 깨끗해야 좋아하는데 주님은 나는 아버지가 보낸 페이퍼 이 사람이 모르는 죄까지 죄를 만들어가면서 죄를 씻어주는 방법을 사용해요.

왜 그래야 되는가 하는 거예요. 왜 구원받은 성도가 왜 자꾸 계속해서 죄가 나와야 되는 이유가 뭐냐? 또 그것이 반드시 그래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우리를 겨냥한 게 아니고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 자체로부터 예수님이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이 어둠 세계에 들어왔어요. 의도적으로 일부러 들어왔다고요. 잡아먹으라고. 의도적으로 들어왔는데 악마, 사단에게 지배받는 이 세상이 주님인 줄 알고 사단을 물었거든요. 물었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나오죠. 여자의 후손을 누가 뭅니까? 발꿈치를 누가 물어요? 뱀의 후손이 물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에 상처가 나야 될 게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뭐냐, 결국 상처에요. 상처를 실증 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다른 데는 하나님의 일이 없어요. 기도원에 백날 기도해봐야 하나님 뜻 안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미 실증 적으로 나타났어요. 만약 우리가 기도원에서 응답 받아버리면 그게 우리가 예수님을 그 십자가를 대체하는 다른 실증이 돼서 진짜 증거를 가짜 증거가 가리는 그런 마귀 짓을 하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죠. 그럼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으면 베드로는 지금 물 위를 걸은 거 가지고 믿지, 왜 자꾸 예수님을 따라다녀야 됩니까?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난 뒤에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있잖아요." 하고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자기가 기적을 체험했잖아요. 그럼 베드로 그 사람이 성령 받기 전에 베드로가 믿는 건 뭡니까? 결국은 자기가 체험한 이것은 아까워서도 못 버리죠. 너무 아까우니까 이거는 신의 계시니까. 심지어 베드로 후서인가 보면 내가 변화 산에서 직접 주님이 하늘나라 모세, 엘리야가 이야기하는 걸 봤죠? 그걸 어떻게 아까운데 버려요? 고이 챙겨야지. 사진기 없었나? 사진 찍어놨으면 더 좋을 뻔했는데.

그런데 사진 찍어서 그걸 내밀면 주님께서 그걸 받아서 "그래 내 성도 맞다." 라고 받아줍니까? 안 받아줍니까? 안 받아주죠. 방언한다고 안 받아줍니다. 병 고친다고 목사 했다고 안 받아줘요. 증거는 뭐냐 하면 상처가 나야 돼요.

그런데 상처란 증거를 대려면 두 가지 세력이 등장해요. 하나는 예수님 쪽이고 한 쪽은 숨겨져 있던 숨어있던 보이지 않던 악마의 세력이 현실로 드러나야 되죠. 그러면 악마의 세력과 주님의 세력 사이 있는 상처라면 우리는 누가 빠져야 돼요? 잘 들어보세요. 우리 구원에 있어서 구원의 당사자 우리가 빠져야 된다니까요. 좀 나가 계세요. 제발 좀. 사장님 의논할 때 우리 신입사원은 빠져야 돼요. 장그래는 빠져있어야 돼요. 계약직은. 부장들 회의할 때. 우리는 빠져있어야 돼요. 부를 때 와야지. 김부장이 부를 때 들어와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마귀가 자꾸 들어가라 해요. '니 들어가서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빌어. 간절하게 기도 능력 외에는 없다 했으니까 기도해서 내가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해.' 자꾸 밀어붙이는 거예요. 주께서는 "니 나가 있어. 우리가 회의해서 통보해줄게. 나가 있어." 안 나가는데 계속 가는 거예요.

그렇게 돼 버리면 바로 나에게서 일어난 나의 체험이 내 구원의 근거의 내용이 돼 버려요. 나는 언제 믿었고 나는 몇 월 날 며칠 은혜 받았고, 이게 계속 내 믿음의 내용이 돼 버려요. 또 교회 같으면 어느 장로가 땅 바쳐서 이 교회가 잘 됐다. 이게 교회됨의 하나의 자랑거리, 또는 근거가 돼요. 하나님이 살아있는 교회를 증명해 주는 증빙 재료가 된다니까요. 그런 식으로 그게 오독이 된다니까요.

참 12제자 잘 버렸죠. 다 떠나버린 게 정말 잘했어요. 만약에 누가 하나 남아있었으면 우리는 그 사람 되려고 애를 먹어야 됩니다. 다 떠났어요. 이 말은 뭐냐 똑같은 입장 이예요. 제자들이나 우리나 똑같은 입장 이예요. 우리는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체험한 것을 포기를 못하고 그걸 챙기기 급급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오늘 강의 제목을 제가 쓰겠습니다. 죄의 교환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죄는 선악과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죄는 죄가 아닙니다. 인간은 우리가 죄를 몰라요. 왜, 선악 지식이 하나님한테 통하지 않습니다. 선악 지식에서 아는 모든 지식은 이것은 구원에 방해가 될 뿐이지, 구원에 보탬이 된 지식들은 아니에요. 하지만 안다는 게 그것밖에 모르니까 그것 가지고 경건과 거룩함을 어떻게 조작을 해내야 되니까 그렇게 성화 론이 나오고 교회에서 그렇게 착한 일만 하고 이웃 사랑하라고 실천에 옮기라고 그렇게 한 거거든요. 그런데 그 많이 한 것은 유대교가 이미 실천을 한 거예요. 이미 구닥다리라니까요. 지금 개신교에서 하는 거 다 천주교에서 다 해본 거예요. 다 한 거예요.

요즘은 또 개신교에서 피정 비슷하게 천주교에서 하던 건데 부흥회 비슷한데 뭐냐 하면 참선하는 거, 세상을 피하고 정숙한 데 가서 하는데, 그걸 영성 훈련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이미 천주교가 중세 때부터 다 한 거라니까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출신이잖아요. 프란시스코 교단에서 그걸 주특기로 그걸 하나의 프로젝트로 뺑뺑 돌렸다니까요. 수련회 할 때. 도미니크 교단은 좀 학구적이지만. 프란시스코 교단은 전부 다 참선 쪽으로 간 거예요. 일종의 불교에서 교정이냐, 선종이냐, 그거와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 개신교가 점점 교인들이 젊은 교인들은 바쁘다고 안 나오고 늙은 교인들은 안 나오고 줄어드니까 양쪽에서 세대차 때문에 압축이 되니까 젊은 사람 현대인들이 뭣에 고민하는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구나. 그럼 푸는 방법은? 참선이지 뭐. 그것을 마케팅을 하는 거예요.

말씀이고 뭐고 없어요. ‘그저 여러분께 도움 돼 드리겠습니다.’ 그게 마케팅의 전략이라. 여러분들이 뭘 원합니까? 화목한 가정을 원하신다면 우리교회 와서 참된 아버지 되기, 이런 거 교육 받으시면 됩니다. 순 이런 식이라.

선악을 아는 사람은 몰라요. 죄를 왜 모르느냐 하면 이미 선악을 통해서 죄가 무엇이며 악을 안다는 그 자체가 선악 구조 범위 안에서나 폐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방법은 선악 구조 바깥을 탈출을 해야 돼요. 여기서 탈출을 한 분이 선악 자체가 죄라는 것을 비로소 이야기하시는데 인간은 선악 구조를 따먹었기 때문에 탈출 자체가 불가능해요. 그저 백날 마지막 가봐야 벽만 부딪혀요. 자기를 그 동안 폐쇄로 만들었던 그 구조, 완전히 공처럼 만든 천장만 손대고 그냥 내려오는 거예요. 거기다 낙서하다 내려오는 거예요. 갈 때까지 가보고 다시 튕겨져 나오는 겁니다.

플라톤이란 철학자는 동굴의 비유란 것에서 인간은 평생 살아봐야 그림자 밖에 안 보인다. 빛이 비취는 그 그림자의 그물을 보면서 죄로 묶여있어서 뒤를 못 돌아보고 앞만 보는 거예요. 앞만 보니까 온갖 그림자들이 다 있는 거예요. 시뮬라크르란 어려운 말로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모사, 모의, 모의  시험 있잖아요. 시뮬레이션. 그냥 가상만 천지 돌아다니는 이것을 모아놓고 그걸 현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왜 그걸 현실이라 하느냐? 그 눈에 감각적으로 오감으로 다 느껴지는 실제적이기 때문에. 그 실제적인 그 전체를 하나님 보시기에 선악과 따먹은 순간 뭐라 그랬습니까? 죽음이라 했죠.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상태, 선악과에 갇혀 있는, 공처럼 갇혀 있는 수많은 이걸 죽음이다.‘라고 다 외칠 수 있는 보이스, 목소리가 있었으면 참 좋겠죠? 이 선악과 안에 있다는 자체가 죽음 이예요. 애가 꼬물락 살아있어도 나이 100세라 해도 소용없어요. 이 자체가 죽음이다 말이죠. 왜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상태가.

따라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죽음을 여기다 새겨 넣는 방법을, 아이디어를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용하신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던 죄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택한 백성의 죄 때문에 죽었죠? 그 죄가 뭐냐 하면 택한 백성이 몰라요. 성도가 자기 죄를 몰라요. 모르는데 선악적인 걸로 봐서는 자기가 절대로 죄인 아니에요. 왜냐 하면 죄 한번 졌지만 착한 일 두 번 하게 되면 2+1 하게 되면 자기는 항상 차변 대변해서 단기 순이익이 선한 쪽으로 뭔가 남는 게 선한 쪽에 많이 남아요.

심지어 강도도 어릴 때는 부모에게 효도했다 하는데요. 강도도 강도질 하면서 돈 훔쳐 나오면서 거지한테 돈 만 원짜리 빼주는데요. 왜, 이 착한 일 보고 계시면 착한 일 했다고 하늘이 보면 경찰한테 안 잡힐 수가 있다는 거죠.

항상 인간은 선악적 이예요. 나쁜 짓했다 싶으면 반드시 그 나쁜 짓을 커버할 수 있는 선한 일을 꼭 흔적을 남기게 돼 있어요. 술 먹고 일찍 들어온다든지, 갑자기 성적표 들고 엄마 설거지 해준다든지, 성가대 연습 늦으면 헌금 천 원짜리 하나 더 보탠다든지 반드시 선악을 못 벗어나게 돼 있어요. 인간이 그게 지식의 전부니까. 영어로 all. 전부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이 선악에 의해서 차라리 죽어버리는 겁니다. 선악에 의해서! 선악 쪽에서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자들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이 그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래서 인자는 때가 있어요. 죽을 때가 따로 있어요.

어떻게?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선악이 가장 절정에 달할 때 예수님이 타이밍 맞춰서 돌아가셔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줘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 이게 확정되기 때문에 그래요. 바리새인은 자기 혼자 앞장서 있지만 그 뒤에 오늘날 이방인들, 유대인들 다 줄줄이 석차로 해서 다 죽죽 줄 서 있어요. 제일 앞에 바리새인이 있고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하니까 제일 앞자리에는 선도처럼 깃발 들고 바리새인이 있고 그 뒤에는 줄줄 모든 인간, 저 밑바닥에는 세리와 창기까지, 전부 다 거기 있어요.
다 공통점이 뭐냐, 선악 체제에 있어요.

만약에 창기가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그걸로 구원받습니까? 죄인이란 고백을 했다는 것 때문에 구원받습니까? 구원 안 돼요. "내가 보족합니다." 한다고 구원됩니까? 안 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와야 되지, 무슨 말을, 언어를 사용한다 해서 마음의 표현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어떤 표현을 하는 것은 구원 받은 자의 결과지, 효과지, 구원의 능력의 효과지, 아무 구원의 능력이 없는데 그런 말을 의도적으로 지어냈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그걸 선물로 봤어요. present, 선물로, 은사로 봤거든요. 선물이 오게 되면 내가 지어 만들어낼 수 있는 소망 사랑 믿음과 주께서 선물로 준 믿음 소망 사랑 사이에서 갈등과 대 충돌이 일어납니다. 한 쪽은 누굴 지시합니까? 나의 믿음 소망 사랑은 누굴 지시해요? 나를 지시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하늘에서 온 선물은 누굴 지시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지시하게 돼 있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은사는 하늘에서 하나님한테 오는 게 아니고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서 오기 때문에 십자가의 성질과 속성을 듬뿍 담고 와요.

황사가 되는데 눈 왔다. 그러면 눈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황사가 들어있죠. 이해되시겠죠? 은혜가 그냥 오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원하는 은혜가 안 옵니다. 진짜 구원받은 은혜는 반드시 황사 요소가 들어있듯이 십자가란 요소가 들어있어요. 십자가 요소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태어날 때부터 선악과 따먹을 때 너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너는 죽었고 네 안에 사는 것은 선악적인 차원이 아니고 생명나무 차원의 다른 분이 사시기 때문에 너는 나와 같이 살고 있는 거야.‘가 그게 복음 안에 담겨서 오는 거예요.

그러면 선악과의 지식은 부정당하겠죠. 그게 부정당한다면 교회에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도 교회 자체는 죄로써 부정당해야 돼요. 교회 자체가 교회 아닌 것으로 부정당할 때 그 현장에 드러나는 것이 뭐냐, 진짜 교회가 거기서 나타나게 돼 있어요. 진짜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부정당하는 그 교회 한복판에 나옵니다. 그 원리가 뭐냐 이 세상, 선악 세상 속에 뭐가 있다? 바로 십자가 죽음, 예수님 죽음이 유일하게 증거가 돼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예수님 십자가 죽은 거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했거든요.

그렇다면 교회가 교회 된다는 것은 교회가 무너지고 교회가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았구나.‘라고 고백한다면 그게 바로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게 교회라고 해서 사람들이 좋아들 하겠죠. 하게 되면 요거 며칠 갑니까? 한 2주가잖아요. 2주가면 그거 교회 아니에요. 또 무슨 일이 벌어져서 ’‘그래 우리는 교회임을 믿었어. 주님을 믿어야 될 걸.‘라는 어떤 그런 사건이 일어나요.

재정 봤던 장로가 돈 떼먹고 도망가는 일이 있어요. 멀쩡한 목사 차 바꿔달라고 나댈 때 그런 일이 있어요. 이건 교회가 영업장이지 이거 교회가 아니구나. 하고 다시 한 번 느낄 때 느끼면서 도대체 교인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괜찮은 교회 왔으니까 이제 구원받았다고 생각 자체가 이건 교회란 이름의 타인의 응시, 타인의 관심, 또 다시 거기에 빠져있는 거예요. 나라는 정체성이. 괜찮은 교회에 있기 때문에 나는 뭘 해도 구원받겠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육신의 버릇이 또 다시 자꾸 이게 발생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게 발생이 돼 줘야 돼요. 왜냐 하면 강의 제목이 뭐냐, 죄의 교환이잖아요.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미 주님께서는 십자가 안에 구원받는 사람은 다 구원받았어요. 십자가 달릴 때 이미 구원받을 사람 다 구원 받았습니다.

요걸 마술사 입에서 색종이 나오듯이 고걸 솔솔 풀어내요. 풀어내게 되면 예수의 십자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2000년 전에 누구 하나 태어나야 되고 그 태어난 자가 이런 짓해야 되고 그러다가 성령 받아야 되고 그래서 주님 때문에 구원받았다. 하는 고것도 십자가 지신 주님의 입에서 고게 솔솔 풀어 나오게 되면 고 과정이 바로 성도가 생기고, 생기고, 생겨나는 성도의 하나의 대열이 되는 겁니다. 행진.

성자의 행진이란 유명한 노래가 있죠. 루이 암스트롱이 불렀던 노래, 성자의 행진, 알죠? 오 엔더 세이~♬, 하는 게 있어요. 성자의 행진이거든요. 생각만 해도 얼마나 멋있습니까? 택한 받은 사람들의 집합에서 주님앞에 사열하는 것, 이게 흑인 연가거든요. 흑인들이 노예 생활하면서 얼마나 구박받았습니까? 희망은 뭐밖에 없다? 성자의 행진밖에 없는 거예요. 이 백인들에게 구박 받고 노예로 살아도 나중에 내가 죽고 나서 하늘나라 갈 때 그 성자들이 구박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성자의 이름으로서 주의 나라 갈 때 그게 유일한 희망이고 삶이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그 성자가 루이 암스트롱 노래에서는 멋있지만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멋있는 게 아니고 죄가 교환이 돼야 돼요. 내가 생각한 선악과의 죄에서 주님만 알고 있는 죄로 교환시키는 그 작업이 계속해서 일어나줘야 됩니다. ‘그건 죄가 아니야. 그건 죄가 아니야, 이게 죄야.’ 계속 일어나야 돼요.

45절 봅시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는 이 말이 선지자의 글에 죽 나와 있잖아요. 선지자들은 실제로 있었죠. 실제로 있는데 제가 실제란 말을 강조하는 이유가 실제로 있으면서도 그 주변사람들은 선지자의 말을 실제로 못 알아들었어요.

노아의 말을 누가 알아들었습니까? 아무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요. 그거는 노아가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노아가 페이퍼거든요. 아버지가 보낸 페이퍼에게 무슨 작용이 일어난다? 벌써 주님께서 노아 자신을 페이퍼로 교체작업, 교환 작업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죄에 대한 교환 작업 이예요. 노아나 노아 당시 사람들이나 아이큐를 비슷하게 보고요. 윤리적인 도덕도 비슷해요.

그러나 노아는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거든요. 은혜를 받았으니까 노아도 결국 늙어 죽잖아요. 이게 단순한 이야긴데 사람이 왜 죽습니까? 죄 짓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죄 졌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죄 졌기 때문에 노아는 자기가 죽는 이유를 알죠. 착한데 왜 죽죠? 노아는 착해요. 착하면 안 죽어야 되는데 왜 죽죠? 이게 선악적 차원에서 죽이는 게 아니고 생명나무 차원에서, 선악 체계에서 벗어난 탈출에 성공하신 분이 앞당겨서 자기한테 와서 너는 죽어야 될 세계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얼마나 선하냐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마트에 불이 났습니다. 마트에 손님이   100명 있다고 칩시다. 그중에 댓 명은 술 먹고 가정 폭력 일으키고 진짜 도박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칩시다. 나머지 70여 사람들은 뭐 파출소, 경찰서 모르고 살았어요. 그러면 불나면 어떻습니까? 나쁜 짓한 사람은 더 뜨겁고 착한 일한 사람은 화상 1도 정도 나오고 어떻게 됩니까? 아무 상관없죠. 그게 물 심판이고 그게 불 심판 이예요. 옛날에는 물로 심판 받을 때 물에 빠져 죽은 사람 가운데서 선악 과 쪽에서 나쁜 짓만 했습니까? 그 사람들이. 다 부모 효도하고 자식 넷 잘 키우고 다 그렇게 컸어요. 다 잘 키웠어요. 아버지 노릇 잘하고 다 그랬어요. 진짜 예수님같이 그렇게 성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뭘 모릅니까? 하나님 언약을 모르니까 똑같은 입장 이예요. 이게 사람에게 예수님이 살해당할 이유입니다. 똑같다는 거예요. 이게 사람을 화딱지 나게 만들었어요. 똑같다 해버리면 선한 사람에게 선의 동기가 안 돼요. 착한 일 한 사람만큼 상급을 받는다든지 하늘나라 면류관이 더 빛나는 광이 난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똑같은 입장이라는 자체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동기가 안 된다니까요. 그게 착한 일할 수 있는 윤리적인 동기로써 이게 오히려 반대가 되죠.

그러면 악하면 되잖아요? 그게 인간 심리가 참 이상해요. 악하면 되는데 왜 악하기를 인간은 싫어하죠? 왜 인간은 전적으로 악한 사람을 왜 싫어할까요? 선과 악이 같이 있게 돼 있어요. 선악과가. 선과 악이 같이 있어줘야 선이 있어줘야 마귀다워요. 마귀가 악한 일만 했습니까? 성경에 보면 마귀가 선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요. 그렇게 욥도 지적하고 여호수아도 지적하고, 마귀는 도사입니다. 뱀처럼 지혜롭다. 너무나 똑똑해요. 다 알아요. 다 알지만 마귀는 뭐까지 아느냐 하면 자기가 이미 멸망당한 것까지 알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귀가 사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겁니다. 마귀 가라고 만든 곳이 지옥 이예요. 우리 인간 가라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마귀로부터 거기서 못 벗어난 자만 마귀와 영원히 지옥 들어가는 겁니다. 그 벗어나느냐, 못 벗어나느냐의 차이는 인간의 보유 능력이 아닙니다. '열심히 왜 안 했어? 똑바로 왜 안 했어?' 이걸 묻는 게 아니에요. 책임을 묻는 게 아니고, 아버지가 보내지 아니하면 그 선악 구조 굴레에서 벗어날 사람이 없습니다.

벗어날 때 '저는 벗어났습니까?' 묻지 말고 이렇게 질문해야 돼요. '벗어났다면 벗어나게 된 그 증거가 뭡니까?' 이렇게 물어야지, '나는 벗어났습니까?'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왜, 나라는 것은 남, 타인과 대비해서 나거든요. 남이 아니기 때문에 나가 되는 거예요. 언제 그런 설명했는데.

내가 나라고 느끼는 것은 혼자 있을 때는 못 느껴요. 남이 내 앞에 등장했을 때 '옷 갈아입어야 돼.' 반드시 타인을 의식하면서 자기의식을 하게 돼 있어요. 밥을 먹을 때는 인간은 밥을 먹는다는 생각뿐이지 내가 앞에 내가 안 붙어요. '내가 밥을 먹는다.'가 하는 게 아니에요. 방금 그냥 밥을 먹어요. 그래서 명사보다 동사가 먼저라니까요. 대명사보다 동사가 먼저에요.

인간은 뭔가 가만히 있을 때도 행동하게 돼 있고 상상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똑똑 누구 계십니까?' 하면 후딱 일어나서 '가만 있자, 내 행동이 지금 어떠냐.' 갑자기 나를 바라보게 돼 있다니까요. 밥을 이렇게 먹다가 누가 오면 … 그래서 방에 혼자 있으면 옷 벗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누가 오게 되면 윤리와 도덕이 발생되는 겁니다. 누가 있을 때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걸 가정교육을 시켜서 그렇게 남 있을 때는 이렇게 해서 공공장소에 있을 때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죠.

그 공공장소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스며들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뭐하기 바쁘냐 하면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이게 바쁜 게 아니고, 우리는 주님의 따가운 시선이 우선이 아니라 바로 주변의 남들 나를 기대 걸고 있고 내가 제대로 살기를 바라는 우리를 잘 키워줬던 가까운 부모, 친척, 가족 자식, 남편, 아내, 이런 사람들의 요구조건이 비록 그 남편이 출장 가고 어디 간다 할지라도 항상 그것은 나의 정신세계에서 나를 옭아매고 있는 거예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우리 엄마가 얼마나 싫어하겠는가. 그래 도둑질 안 해야 돼.' 이것이 우리가 차곡차곡 쌓이게 되면 점점 더 뭐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거예요.

굉장히 착하고 반듯하게 사는데 생각해 보세요. 여기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 따라올 정도로 열심 같으면 보통 착한 사람들 아닙니다. 바리새인들 안 따라왔어요. 사두개인들 안 따라왔습니다. 얼마나 착해요? 메시야 한번 섬겨보겠다고 온 열심 있는 사람들 이예요. 나중에 다 가버렸어요. 다 지옥 갔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서 내가 오라할 때만 오라는 뜻 이예요. 너희들 우르르 몰려오지 말고 '가, 가, 가란 말이야.' 보내놓고 내가 성령 보낸 사람만 그때 와요. 그냥 와버리면 선악적인 착함을 가지고 그저 들이대는 수가 있어요.

그러면 자기는 의인으로서의 구원받겠다고 설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문제가 복잡한 게 구원이 안 된다니까요. 내가 부를 때는 '내가 죄인이군요. 더욱 더 죄인이군요.' '아니, 더욱 더 죄인이군요.' 하는 것을 계속해서 발견하면서 와야 거기에 오직 누구의 공로만? 십자가 지신 예수님 피 공로만 점점 더 거기에 더 빨갛게 달아오르게 돼 있어요. 빨갛게. 쇳덩이로 한 대 쳐야 벌겋지. 쇳덩이처럼 우리를 연단시킨다 하잖아요.

벌겋게 피 모습으로 벌겋게 피어오를 때 정말 누가 봐도 '핏덩어리네. 저 핏덩어리 가네.' 아마 이 정도가 되는 게 사도바울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이어도 괜찮고 결혼 안 해도 괜찮고.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나라도 저주를 받는다. 거의 예수의 십자가 복음 위해서 로마까지 가게 했다면 그건 그야말로 예수의 피와 연결된 핏덩어리죠.

그 죄의 교환 문제가 오늘날 성도의 평생을 통해서 그 작업이 실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실시되는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제발 네 자리로 가라. 믿는 척하지 말고, 복음 아는 척하지 말고, 항상 네 본성을 보여 다오. 우리 본성이 뭡니까? '나는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나는 착한 사람 맞다. 나는 착한 사람의 분류에 해당된다.'를 유지해라. 유지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주님께서 박살내 버리죠. 그 착함 박살내 버립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양쪽 다 알고 있어요. 선악 체계가 어떻다 하는 것도 알고 생명 체계도 알고 있어요. 선악 체계는 내 행함으로 선하게 되고 생명 체계는 53절에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원칙 가지고 구원하죠.

그러면 여기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는 어떻게 만들어내죠? 누가 찢어야 되고 누가 흐르게 해줘야 되겠죠. 그거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바리새인이 했다 하지마세요. 선악과 따먹은 사람들이 했어요. 선악과 따먹은 사람들이.

지난 어제 수요일 날 설교인데 잠깐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 15절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죽일 일이 없다 했죠. 하니까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일을 무슨 일이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라 돼 있죠.

그러니까 지금 사람들의 소원이 뭡니까? 예수를 자기 손으로 잡아 죽이는 게 소원 이예요. 자기 손으로 잡아 죽이는 자 때문에 예수의 피가 생겼고 살이 생겼잖아요. 그 살과 피를 내 구원의 능력이라고 그걸 먹을 수 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당사자입니다.'라고 인정하는 사람 이예요 그게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발생시키고자 하는 바로 생명나무 차원의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악에서 생명나무로 옮기려면 반드시 누가 있어야 돼요? 제 3자 너희 죄, 나의 죄 말고 제 3자가 등장해야 돼요. 예수님이 등장해서 예수님이 우리한테 못 쓸 사람이 돼야 돼요.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이유도 모르고 터무니없이 미워져야 돼요. 예수님이 터무니없이.

예수님을 가지고 선악적으로 따져서 미워지면 안 되고 터무니없이 미워야 돼요. 터무니없이, 이유도 없이, 괜히. 그리고 바로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평소에 내가 단란한 가정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는, 주님은 터무니없이 밀어내면서 우리 가족끼리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 바로 내가 누리고자 했던 행복이란 이름의 죄라는 것을 알 때 이게 성령 안 받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42.222) 15-05-03 18:02 
가락-요한복음6장47절(죄의 교환)150423b-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죄가 교환된다. 인간의 모든 선악과 윤리근성  자기에게 윤리를 가르치고 도덕을 가르치는 그 분을 의식하면서 “아빠, 나 잘 살았지?” “아빠, 나는 너무 나쁘지?” 항상 선과 악에 대해서 이미 익혀진, 우리한테 세뇌시킨 교육받은 그 교육범위 내에서 선과 악이 형성되어 있어요.

북한사람들의 죄는 뭐냐, 김일성을 찬양하지 않는 겁니다.  “아빠, 나 김일성 찬양하니까 좋지?” “아빠, 나 김일성 찬양 안하니까 나 벌 받지? 맞지?” 이게 윤리 도덕으로 체계를 잡는 거예요. 참,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잖아요. 인도 사람들 보세요. 힌두교 안 믿으면 안 되잖아요. 중국 사람은 자기 조상 안 믿으면 안 되고.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은 기독교 안 믿으면 안 되고. 그러니 인간이 갖고 있는 같은 선악을 알고 있는 사람이 선악 아는 사람에게 전수하고 또 전수를 하다보니까 거기서 선악구조 안에서 매일 새끼 까듯이, 독 속에 있는 쥐 가둬놓고 계속 새끼 까듯이, 그 안에서 오골 오골 하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거기서 탈출을 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공자도 마찬가지고, 석가모니도 마찬가지고,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고, 소크라테스야 솔직하지, 나 모르겠다고 하니까. 나는 무지한 사람이다. 무지한 사람이 아는 사람이지만. 솔직히 철학적으로 나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궁극적인 것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를 수밖에 없지요. 소크라테스가 나이 몇 살 먹었는데요? 인생을 몇 년 살았습니까? 인류 역사는 긴데, 지는 몇 살 안 되고. 그리고 살아도 돌아다닌 동네가 반경 몇 킬로에요? 당연히 모르지요.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욕심을 낸 게 문제지요. 전체를 다 아는 사람을 찾아보고 싶다. 니하고 나하고 다 똑같은 입장인데 뭘 전체를 다 알아?

전체를 다 몰라도, 인간은 몰라도 살아가는 이유가 선과 악을 알기 때문에 이 동물 이름이 뭔지를 몰라도, 이 식물이름이 뭔지를 몰라도, 선과 악을 가지고 인생에 그 토대를 잡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선악의 죄는 제3의 인물, 어느 타인으로부터도 너라고 지목받지 않는, 오직 아버지에게만 아들로만 오시는 분이 제3자가 너와 나 사이에 개입해버리지요.

나오는 말씀에 대해서 너도 못 알아듣고, 나도 못 알아듣고, 다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리고 무조건 유보에요. 그래서 못 박아 죽이라고 했고, 그 분은 정말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놓고 사형을 당했잖아요. 사형을 당했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에서 무죄가 아니고 유죄가 돼요. 죄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성도도 반드시 이 세상에서 죄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돼요. 어떤 관점에서? 선악적인 관점에서 따질 때, 반드시 죄인이 되어야 돼요. 죄인이.

왜냐 하면, 교환이 되려면 주님이 가신 경로를 그대로 따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야 돼요. 내가 곧 길이요, 했잖아요. 주님이.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하나 드시고 갔다면 우리도 천국가면서 뭘 잡숴야 돼요? 햄버거 하나 사들고 가야 돼요. 왜? 고 길이 그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햄버거 잡순 건 아니지만. 십자기 지고 가기 때문에 니도 니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고 이렇게 했거든요. 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이죠.

자, 그렇다면 두 번째 시간에 문제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해주신 것이 결국 뭐냐 하면, 생명에 관한 겁니다. 생명.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오해하지 말아야 돼요.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얻는가, 이 생명은 아니에요. 내가 있고 내가 생명 얻는 것은 이것은 무엇에 관한 것이냐 하면, 창세기3장에 있는 인간의 오류와 똑같아요. 뭐냐 하면, 오래 사는 겁니다. 주께서는 생명나무 못 따먹게 했습니다. 안돼요.

생명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이 목숨이 오래 사는 질질 끄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만드신 주의 생명이에요. 주의 목숨이에요. 주의 목숨으로 교환, 교체가 되어야 돼요. 주의 목숨으로 교체가 될 때에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 누가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이 돼요. 예수님 자신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라는 거죠.

내가 곧 생명이 되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라는 그 몸과 우리의 몸이 1:1대응이 안 됩니다. 1:1대응이 깨어져요. ‘나도 예수님의 목숨을 얻어야지.’ 라는 의미에서 생명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게 생명이에요. 나도 참 말을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의 목숨이 생명이라면, 나도 그 목숨 내가가지면 나도 생명 되겠네.’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몸도 한 몸이고 나도 한 몸이고 1:1로 대비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에요. 왜? 우리를 죽여 버리니까. 죽여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는 주님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가 되어버려요. 몸의 지체가 돼요. 하나의 돌출부가 돼요. 돌출부. 떡이 있잖아요. 떡이 이렇게 둥글지만, 한 쪽을 누르면 한 쪽이 삐져나와 돌출되지요. 그 돌출된 게 우리에요. 돌출된 게 성도라니까요. 지체라는 것을 알지만, 사실은 쉽게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때문에 우리를 누가 대표하느냐, 그리스도의 이름이 대표하지 내 이름이 대표하는 게 아닙니다. 그걸 앞에 붙은 게 있어요. 생명책 명단에 있어요. 생명책 명단은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그 명단에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하기 위해서 있는 이름들이 들어가 있어요. 그 이름들이 바로 생명책의 명단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적혀있는 사람만 영생을 얻지요. 왜? 이미 한 통속이니까. 이미 한 통속이니까 얻지요.

“요 안에 들어있는 네모진 스티로폴 안에 들어있는 떡만 구원받습니다.” 하면 “저는요!” 라고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주님과 나, 1:1로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지금 어디에 속해있나 보면 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교회 올 때 “아휴, 주님하고 나하고 어떤 차이가 나지.” 주님하고 자꾸 견주려고 하는데 견줄 대상이 안 됩니다. 우리는 죽은 존재이고, 주님은 살은 존재인데, 어떻게 죽은 자하고 산 것과 무슨 상대가 돼요? 토끼가 빠릅니까? 피아노가 빠릅니까?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피아노는 가만히 있는데 뭘 빠른 게 있어요? 말이 안 되지요.

죽었다는 말은 이미 고정돼있다는 뜻이고, 토끼는 까불, 까불거리면서 토끼야, 토끼야, 산토끼야 하면서 돌아다니고. 어떻게 달리기가 성립됩니까? 안 되지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 내가 너에게 너를 찾아가서 너를 살리리라. 가만히 있어라. 다리가 있어도 소용없어요. 우리가 팔이 있어도 소용없고 혀가 있어도 소용없어요. 우리의 기도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우리 다리가 열심히 달음박질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백날 해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의 하얀 스티로폴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예수의 이름에 속했다는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온 천지가 주의 이름이 박혀있는 몸을 갖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손톱도 주의 것이고 발톱도 주의 것이에요. 내 것 없어요. 내 거 아니고 주의 것이니까 주의 것이 자기 것을 데려가겠다는데 우리가 왜 구원이 안돼요? 지금 우리가 구원에 애쓰고 힘쓰고 하는 게 뭐냐 하면, 내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 것이 있다고.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육신은 뭡니까? 아직도 선악체계에 있지요. 선악체제는 주인공이 누구지요? 선과 악을 지식을 아는 주인공은 누굽니까? 내가 주인공이잖아요. 왜? 남들이 나라고 불러주기 때문에 그래요. 이거 설명해야 되겠어요. 

이거 요번 주일 설교인데, 당겨서 하게 되면 아담이 자식을 낳습니다. 아담이 자식을 낳게 되면, 자식하고 아담하고 차이나지요. 분명히 아담 몸 따로 있고 아담이 간지러우면 자식도 간지럽고 그렇습니까? 완전히 별개의 개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냐, 그걸 별개의 개체성이라고 언급하면서도 ‘아담 안’ 이라고 했거든요. 아담 안.

‘아담 안’이라고 했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아담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다 범죄 했다, 했지요. 이게 어떤 관계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뭔가 이 스티로폴이 물위에 떠있으니까 고 안에 있는 것도 같이 떠있다, 라고 했을 때 그 말이 성립되겠지요. 그러니까 아담에게 뭐가 있다? 어떤 바탕이 있는데, 그게 아담 안이에요. 아담 안에서 아담도 있고 하와도 있고 우리도 있고 같이 있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아담 안에 묶는 것, 한 묶음으로 묶는 것, 이걸 가지고 뭐냐, 이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언약. 언약 적 관점이거든요. 언약 적 관점.

지금 왜 갑자기 언약을 꺼내서 이야기를 또 복잡하게 만듭니까? 여러분이 한다면, 지금 영생이 무엇이냐 할 때에 나를 위한 영생, 내가 갖는 영생, 이런 영생은 없다는 자체를 지금 설명하는 겁니다. 이런 영생 없어요. 우리가 하나의 개체로 있을 때는 내가 살기 위해서 영생을 내가 가져야 살아요. 생명나무 따먹어야 살아요. 이건 아담 때입니다. 따먹어야 사는데, 지금은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제가 이거 시간이 가더라도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앞에 분명히 뭐가 붙어요. 내가 선하냐, 내가 악하냐 이리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선악과 자체가 이게 죄가 돼요. 인간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인간이 죄 안에 있다, 말이죠. 인간이 죄 안에 있는 거예요. 그걸 아담 안에 있다고 본 겁니다. 인간이 죄 안에 있는 거거든요. 인간이 죄 안에 있다면 아무리 선해도 선도 죄가 되는 겁니다. 설교하는 것, 기도하는 것, 전부 다 목회하는 것, 강의하는 것, 다 죄가 되는 것 맞아요.

자꾸 여기서 착한 일 끄집어내려면 안돼요. 착한 일은 어디 있느냐, 이걸 악하다고 보는 그게 착한 거예요. 이게 선한 거예요. 이게 영생이에요. 그게 누구의 안목이냐, 주님의 안목이다, 말이죠. 주님의 안목. 주님의 안목에서 놀라운 것은 살인죄도 간음죄도 이게 의가 돼요. 그게 영생이 된다니까요. 살인죄, 간음죄, 강도 짓 이런 게.

“내가 살인했는데 선합니까?” 라고 물어서는 안돼요. ‘내가’ 하는 것은 선악  적으로 있을 때는 나라 부르지만 주님 안에 있을 때는 뭐냐 하면, 주께서 하게 하셨다면, 그게 선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간음하게 하셨다면 그게 선인데, 그걸 간음이라 말하지 않아요. 주께서 사랑을 베풀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에 이스라엘 스파이가 왔느냐고 물었을 때 뭐라고 했어요? 여기 없다고 했지요. 거짓말했잖아요. 숨겨놓고 벌써 도망갔다고 했잖아요. 그게 의라니까요. 우리는 그걸 뭐로 봅니까? 그걸 거짓말로 보잖아요. 그런데 그게 의가 되는 거예요. 왜? 주께서 그걸 시켰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그걸 시킨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께서 거짓말시켰다는 말입니까? 거짓말을 시킨 게 아니고 주께서 시킨 일이라면 거짓말 이라는 것에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거기다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거짓말이라고 집어넣으려면 거짓말이 아닌 게 있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거짓말이 의미가 있으려면 거짓말 아닌 게 따로 있어야 돼요. 따로 있어버리면 그건 의가 되고 거짓말은 악이 되거든요. 그러면 어느 구조에 있어요? 역시 또 다시 선악구조로 되돌아 온 셈이 된다니까요. 선악구조로.

제가 지금 설명한 게 뭐냐 하면 성령이 왔을 때, 우리가 익히 아는 윤리, 도덕적 관념이 아니에요. 놀라운 것이 같이 섞여서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치열한 다툼과 경쟁이 발생돼요. 경쟁이. 나의 세상 관과 나의 사고방식과 나의 생활관이 어느 쪽을 따라야 되는가, 그 경쟁이 유발한다니까요. 우리가 그냥 편하게 생각하게 되면 자기가 착한 재미로 살아요. “주여, 나 왜 이리 착하지. 미치겠어. 너무 착해서.” 이런 재미로 사는데 진짜 생명나무를 따르면요, 어떤 재미로 사느냐 하면요, 나를 죄인 되게 한 재미로 살아요. 내가 죄인이라는 말은 주님 앞에 저주받아 마땅하잖아요. 그럼 뭐냐, 한 번 적어볼게요. ‘나는 아무 가치 없다.’ 이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라니까요.

여러분들이 세상 살면서 고민과 걱정이 어디서 생기는가 하면, 나는 가치 있다, 때문에 생기거든요. 나는 아무 가치가 없다. 목사가 목회하는데 교인들 2명이 있다. 그래도 좋아~ 싱글 벙글. 이게 얼마나 편한 겁니까?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애가 또 전교에서 꼴찌 했다. 아휴, 원래 가치 없는 부모 밑에서 가치 없는 자식 나온 게 당연한 거지. 이게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입니까? “이놈 자식이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고?”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건 아버지의 가치를 자식에게 강요한 셈이 되니까 그 가정은 그 다음부터 불란 나고 난리 나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지옥 되는 거예요. 애는 성질 나빠져 가지고 그날은 TV도 못보고 드라마도 못보고 분위기 다 싸늘해지는 겁니다.

남자들 군에 갔다 왔잖아요. 군에서 제일 기분 더러운 게 뭐냐 하면, 내 감정에 따라서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다는 거예요. 고참이 어떤 분위기에 따라서 고참이 술 몇 잔 먹느냐에 따라서 그 내무반 분위기가 달라져요. 이것은 내가 원치 않는 환경에 내가 살아야 된다는 이 기분 나쁨. 그걸34개월 견딘다고 해보세요. 폭파하고 싶어요.

모든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져서 내 잘못 내가 하면 조금도 억울하지 않아요. 그런데 고참이 술 먹고 들어와서 전라도 고참이 경상도 때리고, 경상도 고참이 술 먹고 들어와서 전라도 때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가 거기에 그냥 당하고 있다는 이게 나의 개체성, 독자성이 날아가 버린다니까요.

그런데 주님나라에서는 주님이 모든 죄를 담당해버렸거든요. 우리가 받을 모든 지옥 불을 누가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담당해버린 거예요. 왜? 우리는 왠지 모르죠. 그걸 알려주는 게 뭐냐, 니가 이 정도로 죄인이고 이 정도로 무가치하다는 것을 이미 구원시켜 놓고 평생 동안 죄를 교환시키는 겁니다. 선악적인 죄에서 주님이 죽어야 될 죄로 생명나무 차원에서 죄로 교환시켜 보면 그게 영생 안에서 같은 쟁반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 스치로폴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주님이 아니면 누가 나를 이렇게 살리겠는가, 그걸 늘 무가치한 가운데서 감격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또 다시 만끽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 뭘 그렇게 닦달내십니까? 뭘 닦달 내느냐, 선악적인 체제를 보고 닦달 내는 거예요. 하나님 뜻은요, 한결같아요. 선악과 따먹지 마라, 그걸로 끝났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선악과 그것가지고 윤리, 도덕으로 성화했다고 거룩하다고 지금 니도 거룩하지, 나도 거룩하다. 그 말씀에다가 그걸 막 집어넣어가지고 우리는 착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고 있다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이거하고 싸우는 거예요. 착하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이것, 내가 의로우면 복 받고 나중에 구원까지 받는다는 이것하고 싸우는 거예요. 우리는 내 가치를 높이기를 원하지 낮추는 것은 상상도 못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호락, 호락 주님의 그것에 우리는 고분, 고분하지 않습니다. 격렬하게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정말 격렬하게 하기 싫어요. 유해진이가 삼성카드 광고에 나오잖아요. 나,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우리는 내가 무가치한 것을 격렬하게 싫어해요. 왜? 선악체제에서는 누가 보는 눈이 있습니까? 타인의 시선, 응시, 나에게 기대 거는 부모님,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항상 주목하고 체크하시는 분들, 은근히 나를 떠난 여자 친구가 니 잘 먹고 잘사나 보자, 지금도 가끔 연줄, 연줄 소식들어가지고 니 버린 그 남자 망했단다. 이 소리 들을까싶어서 내가 또 인수인계해가지고 내가 또 상상하면서 거기서 벗어나기를 생각하는 꿈꾸는 나의 망상. 아우라. 그걸 타인의 욕망이라 하는데.

그 타인의 욕망이 우굴 우굴 거리는 그 폐쇄적인 나의 현실, 이걸 우리는 현실로 보거든요. 내 의미 위주의 현실. 그 현실에서 나는 보란 듯이 살아보려는 그것이 내 삶의 동기요, 힘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상상하고, 멋있는 차도 몰고 다니면서 고속도로 달리는 그 모습 상상하면서 참아야 된다. 이걸 스스로 격려하고 힘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그걸 버리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하고, 성령이 오게 되면, “주여, 이게 바로 제가 정말 주님보다도 나의 세계, 내가 신이 되는 세계를 더 좋아하는 이런 게 있기 때문에 나는 무가치한 사람 맞습니다.” 라고 인정하지요. “꿈만 꾸면 돈을 벌어가지고 저택에 가서 살고 차 서너 대 누리고 사는 그것을 나의 희망으로 삼는 이 정도로 나는 주님을 오늘도 힘들게 한 죄인 맞습니다.” 하고 기쁘게 자기가 한 현실을 즉각 망상으로 바꿔줄 수 있는 능력, 이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영생 안에서만 가능해요. 그래서 영생은 받는 게 아니고 영생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누리는 거예요.

영생이 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 선악과가 죄라하는 사실을 내가 아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일하시는 게 아니고 영생을 위해서 일해요. 우리는 하나의 빈 백지에 불과해요. 이 백지를 예수님의 자기가 짊어졌던 죄를 여기다 집어넣어요. 집어넣으면 선악과가 점점 퍼지지요. 선악과 가득 찬 이것을 주께서는 구원해내잖아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목회를 했는데, 오천 명을 목회했다. 선교사로 해서 이만 명을 선교지에서 구원했다. 그 사람이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이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무가치함을 아는 사람 같으면 마지막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선교사로 아무리 20년 봉사하고 아무리 목회해도 나의 구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뿐입니다.” 할 때 그 순간 자기는 뭐가 돼요?

“나는 지금까지 선악적인 것 가지고 이만큼 목회하고 이만큼 선교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이런 선악적인 나의 가치를 무가치로 보지 않고 나름대로의 가치 있다고 움켜쥐는 이 죄, 이죄로 인하여 내가 무가치합니다.” 라는 고백을 하면서 “나의 구원은 내가 십자가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내가 구원받습니다.” 고백하게 되겠지요.

그 작업이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영생 안에서 일어나요. 영생 바깥에서 들어오는 게 아니고 영생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들이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몇 명 전도했습니까? 지금도 아바그룹의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지요. 지금도 비틀즈의 노래가 계속 나오지요. 비틀즈의 미망인들은 지금도 저작권 받지요. 사도바울의 편지를 지금도 믿지요. 그럼 저작권은 누가 받아요? 그럼 사도바울은 몇 명 전도한 거예요? 엄청나지요. 그럼 사도바울은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전도 많이 해서 구원받았어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잖아요.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한 게 아니고 주님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한 거죠. 주님이.

그러면 영생은 누구 이름으로? 사도바울 개인이 소지하는 게 아니고 영생의 일에 일환가운데 참여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영생의 일에. 따라서 영생의 일에 우리가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십니다. 주께서 영생의 일을. 그 이야기가 여기에 나온 거예요.

48절 봅시다. 여기 46절에 보면,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무슨 이야기했느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믿는 자는 무엇을 가졌고? 영생을 가졌지요. 지금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예수님의 입에서 영생의 이야기 나오지요. 그럼 이 작업을 누가합니까? 예수님이 하는 거예요. 이 영생이란 작업을.

내가 곧 뭡니까? 생명의 떡이다. 영생의 떡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자기 개체로 이해했지요. 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숫자가 예수님이 1같으면 자기도 1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제로(0), 없어져야 되는데, 예수님이 하나 있으면 우리가 하나로 보는 거예요.

이리 되어버리면 영생을 가졌다, 이 말을 전부다 뭐합니까? 전부 다 곡해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주님은 영생 있단다. 영생 있단다. 야! 어떻게 뽑아내야지.” 이러면 이게 누구의 일이 돼요? 영생이 주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 됩니까? 그냥 주님은 영생을 딱 모아놓고 “골라! 골라! 골라!" 이리 되고 우리는 예수 믿고 영생이란 떡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 오해, 이게 바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그런 오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저의 해석은 뭡니까? 영생 자체가 선악과 체제에서 나온 영생은 영생이라고 할 수 없다. 영생이라는 말은 선악과 체제에서 바깥으로 탈출했던 분만 갖고 있는 게 영생의 개념이에요. 그럼 우리가 선악과 체제로 영생 개념은 엉터리 개념이라는 말이죠. 그럼 뭐에서 일어난다? 이게 교환이 일어나야 돼요. 교환이 일어나야 되는데, 우리 같으면 “그래, 내 영생 버리고 주의 영생으로” 이렇게 교환 되는 게 아니고 선악체제 자체가 죄로 규정이 되는 작업을 통해서 교환이 되어야 돼요. 선악체제 자체가 죄라고 규정한다는 자체가 영생이라니까요. 이제 이해되시지요.

지금 문제가 나라는 개최, 나 잘되기 위해서 했던 이 버릇이 선악과 따먹고 아담도 그랬거든요. 아담이 왜 따먹었습니까? 지 잘되기 위해서 따먹었잖아요. 그러니 내 잘되기 위해서 한다는 이것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를 복잡하게 할 수밖에 없어요. 우선 내 중심으로 했을 때, 성경해석은 이렇게 됩니다, 라고 하고 그것이 통째로 엉터리 해석입니다, 라는 설명을 또 거기다가 부여해서 붙여줘야 되고, 그리고 모든 일은 누가한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영생과 주의 영생은 이렇게 차이 납니다, 라는 것을 계속 설명을 해줘야 돼요.

자, 48절 봅시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 했지요. 처음에 광야에서 만나할 때, 위에서 뿌렸잖아요. 뿌려놓은 걸 누가 먹었습니까? 백성들이 새벽에 주워 먹었지요. 자, 제가 질문할게요. ①그들이 주워 먹을 때 새벽에 일어나는 수고를 했다. ②잠깨고 세수하고 옷 입고 만나있는 광야로 달려가는 수고까지 해서 먹었다. ③그냥 주워 먹었다. 그냥 ③번이지요. ‘에이, 그냥 주워 먹어? 그래도 옷은 입어야지.’ ‘그래도 아침에 알람해서 깨어나야 그걸 먹지. 오래 놔두면 그것도 썩는다 하니까.’ 왜 이런 생각들이 자꾸 끼어드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 몸이요, 어쨌든 간에 내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주의 말씀을 이렇게 왜곡시키는, 생명의 떡이라 하니까 “에이, 내가 먹어줘야 생명의 떡이지.” 자꾸 이걸 집어넣는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살해당한 거예요. 왜 우리 쪽에서 실시하는 모든 것을 전부 다 삭제하느냐 이 말이죠. 기분 나쁘게.

침례교처럼 이리하면 돼요. 십자가는 졌다. 이제는 믿고 안 믿고는 너희 마음대로 알아서 해라. 이랬으면요, 예수님 안 죽었어요. 예수님이 어떻게 죽었느냐 하면, 십자가 져도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 이래서 죽은 거예요. 화가 나서. 그럼 누가 구원받습니까? 구원 받는 것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믿게 한다. 이러니까 화가 난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노력은 필요 없다. 이러니까 더욱 더 죽여라! 이리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선악과 따먹었다는 사실을 자꾸 놓쳐요. 그걸 자꾸 이렇게 의식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와야, 복음이 와야, 이게 의식이 돼요. ‘아, 내가 이런 것 때문에 구원을 내가 나도 뭔가 협조가 됐다고 생각하고서 하는구나!’

재림이 뭐냐 하면, 재림에 대해서 사람들이 명확한 개념이 없어요. 재림이란, 오늘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인간이 한 게 아무것도 없다.’ 이게 재림입니다. 재림할 때, 인간이 사다리 놓아드렸습니까? 아니면 이쪽에 오라고 해서 폭죽 터트렸습니까? 재림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지요. 재림은 모든 것은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했지요. everything, 모든 것은 뭘 유발한다? nothing을 필히 유발하게 되어있어요. 재림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게 드러나지요. 재림 앞에서.

그 재림하실 분이 십자가지신 거예요. 재림을 내다보고 십자가지신 거예요. 그러니 십자가 믿을 위인이 있다? 없다? 아무도 없는 거예요. 재림을 염두에 두고 성령 주셔서 십자가주신 거예요. 십자가 믿게 하신 거예요. 재림은 우리 인간 쪽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 그게 재림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재림은 시간이 카펫처럼 둘둘 말아버려요. 둘둘 말아버리면 시간이 제일 먼저 펴질 때가 언제입니까? 창세기1장이죠. 요한계시록은 창세기1장에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은 겁니다. 창세기1장에는 예수님이 없지요. 예수 이름이란 자체가 신약에 오니까. 창세기에 예수님 없지요. 예수님 있는 창세기가 바로 요한계시록이라니까요.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nothing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낫싱이고 그리고 예수님만이 에브리싱, 모든 것, 모든 것이에요.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주께 돌아가는 거예요.

지옥은 주님의 속성입니다. 천국도 주님의 속성이에요. 자비의 그릇은 천국이고, 저주의 그릇은 지옥으로, 다 그것도 합쳐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거죠. 에베소서1장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

그것을 십자가라는 선악과의 구조 내에서의 흔적을 남긴다 했지요. 아까 바깥에 있는 죽음을 안에 들어왔다 했지요. 선악에서 벗어난 다음에, 탈출한 다음에 들어올 수 있잖아요. 들어올 때, 바깥에서 있는 죽었느니라, 하는 것을 말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기다가 어떤 상처를 낸다 했지요. 그 상처가 십자가라 했잖아요. 십자가가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이 인간이 만든 망상 그 전부의 세계가 십자가세계입니다.

내가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잖아요. 십자가는 넓어가지고 십사만사천 다 들어간다고.  잠수함의 입구는 좁은데 들어가면 넓지요. 잠수함 넓지가 않다마는, 예가 적당하지 않다마는, 어쨌든 잠수함 입구는 좁지만, 들어가면 좀 넓지요. 동굴입구는 작은데 동굴 안은 더 넓어요.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폭삭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나중에 응축이 돼요. 쭈그러져야 돼요. 이 세상은. 쭈그러지면 남는 게 뭡니까? 에브리싱(everything)모든 것. 전부 다가 있지요. 그건 누가 주인공입니까? 예수님이 주인공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몽상가에요. 몽상 바깥에는 몰라요. 사람들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유구한 인류의 역사, 그 이름에 갇혀있어요.

성경에 보면 시편에 보면 우리의 인생은 그냥 한 뼘에 불과한데 우리는 마치 그게 전부인줄 알고 하는데, 사실은 nothing이에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걸 요번 대전수련회에서 0이라 했어요. 제로. 우리는 제로라니까요. 그걸 야고보서 같으면 우리는 그냥 안개가 아니고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냥 안개 같으면 촉촉한 느낌이 들잖아요. 그게 아니고 안개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었냐? 없다!” 이 말이죠. 완전히 마술하는 것 같아요. “자, 보이시죠. 애들은 가! 없어요.” 없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나중에 늙어 죽으면 없어요. 전에 이 회사가 저쪽에 있었잖아요. 저쪽가보면 없어요. 잠깐 있다가 갑자기 없어졌어요. 이쪽으로 이사했지요.

모세와 엘리야가 주의 나라로 이사했듯이 우리도 이사를 합니다. 주께서 이사할 때 그냥 이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새로 만들어줘요. 천지창조 할 때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창조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창조의 마감은 우리를 집어넣어서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겁니다. 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야 되느냐, 새로운 인간을 만들 때, 그 새로운 인간, 새로운 피조물 중심에서 새롭게 시간과 공간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로 만들어져요.

썩어진 것은 썩어진 것에 부합되도록 옛 하늘이 있고 로마서8장에 보면, 썩어진 것은 썩어진 것과 함께 날아가고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면 거기에 하나님 아들의 맞춤, 예수님의 맞춤, 격에 맞는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새 하늘, 새 땅을 좋아하지 마시고 그게 누구의 격에 맞는가, 예수님을 좋아해야지 새 하늘 새 땅 좋아하면 안돼요. 예수님이 신부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합당한 드레스를 입는 겁니다.

그러한 교체가 되려면 반드시 교체되어야 될 근거를 우리가 확보해 있어야 돼요. 그것이 뭐냐, 선악과 바깥쪽에서 쏘아대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줘야 우리가 갇혀있다는 것, 내 망상에 갇혀있다는 거예요. 내 망상에 내가 갇혀 산다는 것을 내가 알 수가 있지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이것을 누가 알아듣습니까? 여기 성경에 보니까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했지요.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바보입니까? 바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생명 얻기 위해서 모세가 기다렸듯이 메시아를 기다렸다고 자부했던 사람이에요.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기다리게 되면 마찬가지로 똑같은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얻기 위해 되는 게 아니고 생명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 이미 그 자체가 생명이 된다고요.

주님이 우리를 활용해야지 우리가 주님을 이용하려고 자꾸 당기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여전히 내가 살아있으면 곤란해요. 그러면 십자가라는 게 선악과에 맞춘 십자가는, 선악과하고 생명나무하고 같이 있는 것은 에덴동산의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같이 있었던 뿐이고, 천국가면 무슨 나무밖에 없어요. 선악과나무가 없어요. 거기는 생명나무밖에 없어요. 완전히 가로수로 되어있다니까요.

이 말은 뭐냐, 선악과를 죽이지 아니하면 천국에 합류할 수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걸 미리 당겨서 지금 우리에게 선악과 요소를 없앱시다. 어떻게 없애는가, 안 없어지잖아요. 육신이 있는데 안 없어져요. 자아는 내 중심인데 나 잘되기 위함인데 안 없어지죠. 착한 거, 악한 거 다 알아요. 없어지지 않아요. 어떻게 하느냐, 나는 무가치하다는 것을, 왜 무가치한가, 무가치함을 위해서 선악과는 살아있어야 돼요. 선악과가 살아있어야, 이기주의가 되어야, 죄를 지어줘야, 그래야 우리가 생명나무 안목에서 무가치한 것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면 우리가 계속 뭐 해야 돼요? 죄인으로 살아야 돼요. 죄인으로 살면 우리의 가치는 완전히 바닥을 치지요. 바닥을 쳐요. 우리가 어디까지 바닥을 쳐야 하는가 하면, “주여, 이제 그만 데려가 주이소. 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정도 바닥을 쳐야 되는데 그게 꼭 아플 때, 당뇨 걸리고 뭐 아프고 그 때 아닙니다. 회사가 너무 잘되고 거짓말 아니에요. 목사가 교인이 너무 몰릴 때, 목사 입에서 성령 받은 사람은 나옵니다. “주여, 이 교회는 잘되고 차 사준다, 집사준다 하는데 정말 내가 나쁜 놈 맞습니다. 이럴 것 같으면 도망가고 싶습니다. 빨리 죽여주시옵소서. 왜 갑자기 주식 사논 게 백발 오르는지 나 미치겠습니다.”

자식을 낳았는데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이리 해가지고 시험 치는 게 공부하는 게 취미가 돼가지고 서로 오라 하네. IB에서, 유명대학에서. ‘주여, 이러다가 나 교만에 빠지겠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요. 집사님! 요새 또 그런 생각 드는 것 아닙니까? 일이 좀 잘 풀리는데.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데려가 주옵소서. 이래서 교만에 빠지겠습니다.”

잠언30장8절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왜? 부하게 되면 하나님을 잊을까봐. 왜? 잘사니까 잊을까 두렵고, 너무 가난하게 되면 죄를 지어서 도둑질해서 주의 이름을 명예를 훼손할까봐. 주여, 적당해 해주시옵소서. 적당히. 그런데 그 적당이가 한국에는 2,3만 불이고 아프리카에 가면 500불이고. 이게 또 환경 따라 달라져요.

그러니 인간이 말씀을 선악과 인식 가지고는 안 되고 그냥 예수님이 영생이라, 이게 끝이에요. 예수를 믿으면 영생이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영생이고 그 안에 있던 게 믿어지게 되면 그게 영생으로 있는 거예요. 그냥.

자, 만나 다시 이야기합니다. 만나는 뿌렸다. 사람들은 뭐했다? 그 영생은 그냥 주워 먹은 거예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영생을 뿌렸다. 택한 백성은 “어? 영생! 영생!” 그냥 주워 먹은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그래도 주서 먹었잖아. 그러니까 내 공로로 구원받잖아.” 이리 나오면 그것은 옛날의 그 실패한 사람과 똑같잖아요. 영생을 뿌렸다는 말은 주워 먹었다는 선악적인 사고방식이 뭐가 된다? 그게 내가 무가치한 존재로 발각되는 순간이란 말이죠. 고맙다고 주워 먹은 게 아니고, 그래도 남보다 일찍 일어나서 주워 먹었잖아. 이게 바로 내가 바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란 말이죠.

영생은 뭘 병행한다? 우리로 하여금 무가치한 죄인 만드는 작업과 병행해서 영생의 작업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만 높이는 그 작업이 주께서 실시하는 영생의 작업이에요. 이렇게 보시고 그 다음부터 보게 되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51절 봅시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또 이해를 못한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자, 떡을 우리가 먹어야지.” 이리 이해할 거예요.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그래, 내가 주워 먹어야지.” 내가 들어가는 게 아니고 반드시 주께서 이것을 먹게 하시는 작업을 하신다. 왜? 우리는 워낙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넣어주시는 거죠.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갑자기 살이 나오지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피가 나오지요. 이게 뭡니까? 죽임을 당한 자에게 내가 생명을 준다. 이 원리입니다. 나를 죽였던 자를 도리어 내가 생명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생명의 떡이라고 먹는 살과 피를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영생 얻는데 나는 아무것도 긍정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습니다, 를 고백하는 방식으로 오직 희생당하신 분의 희생의 은혜로만 내가 생명을 얻게 됐다는 고백을 그렇게 조치하시는 기준입니다. 그렇게 어렵던 이 말씀이 이제는 그냥 술술 풀리잖아요. 술~술~ 

54절 빨리 나갑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왜냐 하면, 아버지가 나한테 준 페이퍼이기 때문에. 종이이기 때문에. 거기다가 누굴 새겼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새긴 거예요. 그 페이퍼(종이)는 주님께 대들었고 대든 자에게 오직 살과 피를 줌으로서 교훈을 준 게 아니에요. 잔소리한 게 아니에요. 훌륭한 말씀을 안 게 아니고 살과 피를 줬다는 말은 니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그걸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일은 내가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작업은 바로 뒤에 나오는 내 살과 내 피는 내 양식이고 음료란 말이죠.

그 다음에 결정적인 것이 어디 나오느냐, 56절에 나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지금까지 생각한 스티로폴 이야기잖아요. 스티로폴 요 이야기. 같이 있어요. 같이. 쉽게 말해서 니는 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 생명은 없다. 그럼 함께 있으려면 선악과에서 빠져나와야 되는데. 왜? 주님은 빠져나왔는데 우리는 못 빠져나오잖아요. 못 빠져나올 때는 어떻게 합니까? 못 빠져 나올 때는 주님이 아예 우리 속에 들어오지요.

들어오면서 유일한 흔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라 했지요. 그러니까 살과 피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계속 살과 피, 십자가 이야기하는 이유가 그것이 우리에게 흔적이 되고 아예 우리는 선악과 속에서 생명나무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선악과 속에서.

57절에 봅시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여러분들이 오늘 강의를 잘 들었는지 복습하겠습니다.

사람은 왜 죽습니까? 선악과 때문에 죽었지요. 그러면 왜 삽니까? 생명나무로 살지요. 아시겠지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그 죄가 어디의 죄냐 말이죠. 선악과 자체가 죄고 그 다음에 그 죄답게 누가 찾아왔다? 주께서는 찾아오심으로서 하나가 됨으로서 그 자체가 생명이에요. 생명나무를 알아서 영생이 아니고 선악이 죄라는 것을 아는 자체가 생명이 찾아왔다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게 주와 함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할 게 없지요. 우리는 선악과 식으로 죄만 지으면 돼요. 윤리와 잘난 척만 하면 되는 거예요. 잘난척하는 것 어렵습니까? 늘 상 24시간 하는 일이 그것밖에 없는데. 뭐가 어려워요. 편한 거예요. 잘난 체 하세요. 중지하지 마세요. 하시는데 이것 때문에 주께서는 그냥 교훈이 아니고 살과 피를 흘려야 된다. 이것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한 거예요.

따라서 더욱 더 죄인 되면 죄인 될수록 나는 무가치하게 되지요. 무가치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주님의 영생에 가치 있는 존재로서 새롭게 달라지는데 그 고난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 고난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훌륭하다가 아니라 누가 훌륭하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훌륭하다는 권한을 주님께서 갖고 있습니다. 갖고 있는 것이 주의 이름으로 갖고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뭘 부릅니까?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 안에 말도 안 되는 나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지요. 그 이름을 의지함으로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이것은 나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겁니다. 내 행함에 대한 포기를 의미합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60절 요게 중요한데요.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이 말씀은 그 다음에 뭡니까? 어렵도다. 솔직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제자들도 사실은 여기에 참여해야 됩니다. 제자들도. 이 제자들이 어떤 제자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12제자도 여기에 포함돼 있어야 돼요. 사실은 솔직하게. 결국 그들은 다 떠났잖아요. 어렵지요.

어렵다는 말은 앞의 48절부터 나는 생명의 떡이니 부터 이것을 그들은 아직까지 알아들어먹을 만한 그런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그들은 고민할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떡을 내가 무슨 수로 먹지? 잘 때 갑자기 내 다리 살을 뜯어내나? 그럼 내 다리 내놔라 할 건데 이러면 안 되는데. 전설의 고향되는데. 그럼 피는 어떻게 하지? 주께서 각혈할 때, 그때  받아가지고 갈라먹기 하나? 지금도 천주교에서 그러잖아요. 천주교에서의 성찬식. 예수님의 피고 예수님의 살이라. 바로 그게 뭐냐 하면, 바리새인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에요.

이 살과 이 피. 이걸 먹고 마시는 것. 성찬식을 해버리면 뭐가 돼요? 선악과 체제에서 착한 일이 되어버려요. 그냥 살면 죄인 되는데 성찬식을 하다 보니까 착한 일로 되어버리면 착한 일이 되는 동시에 뭐가 나를 떠나요? 진짜 살과 피가 가려져요.

“나는 성만찬할 때 눈물 나더라. 은혜 되더라.” 이리 되면 뭐가 워험한가 하면, 반복해야 돼요. 전에 은혜 받게 한 그 방식을 내가 놓지를 못해요. 부정하지를 못해요. 자기를 부인하라 했는데, 그 때, 주님의 성찬식을 1년에 두 번보고 은혜 받았으니까 또 해야지. 또 하게 되면 은혜 안 되잖아요.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은혜를 조작해요. 또 지가 눈물을 짜네. 목사가 또 파이프 오르간으로 딩~ 낮은 음을 쳐서 유도해요. 그래서 스스로 연기를 해요.

교회가 예배시간이 연기하는 거예요. 위선 자 만드는 곳이에요. 나는 나밖에 모른다. 나는 욕심밖에 모른다. 그게 은혜인데, 내 죄를 아는 게 은혜인데, 죄 플러스에다 회개한 나의 멋드러진 모습을 내가 다시 내 모습으로 나의 자랑거리로 끄집어내는 그 연극요소까지 끄집어내려하니까 이 예배가 바빠. 정신을 바짝 차려야 돼.

은혜 받는 것은 자기가 무가치한 게 가장 은혜 받는 거예요. 무가치하면 그것보다 더 은혜가 없잖아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세상에 겁날 것 없잖아요. 어제 수요일 날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심 있는 사람은 남한테 협박받을 일이 없다고요. 주께서 이미 나를 죄인이라고 간주했는데 언론에 퍼뜨린다. 퍼뜨려라. 이미 주님이 다 퍼트려 놨는데. 하늘나라에 소문났거든요. 내가 죄인인 것을. 이미 예수님이 다 알려놨다고. 죄인인 것을.

다 알려놨는데 그걸 세상 언론에 퍼뜨리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세상이 두렵지 않으면 협박받을 일이 없습니다. 컴퓨터 하다가 이렇게 잘못되게 빠져가지고 음란물을 보여줬다. 돈까지 줄 필요가 없거든요. 왜 협박 공갈 당합니까? 아직도 내게 있기 때문에. 이걸 알면 부모님이 걱정하기 때문에. 그 부모는 내 부모고 내 가족, 내 가족이 나에게 아직까지 신경을 쓰고 기대하는 것, 니는 이렇게 살아야 돼! 이게 있고, 나는 그것에 본받아서 보란 듯이 찬란한 내 모습, 정말 당당하게 멋들어진 내 모습으로 그것을 내가 갖게 되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나의 종교성, 이것 때문에 벌벌벌 떨고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것이 우리의 본성이라면 성령이 오게 되면 그걸 버리라고 하는 게 아니고 “얼레리 꼴레리 그래서 내가 죽었잖아.” “주여, 이래서 내가 무가치하군요. 감사합니다.” 그게 바로 영생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주어진 모든 환경이 어디에 갇혀있습니다. 누가, 누가 잘났나, 그 경쟁하는 경쟁 속에 신나게 빠져있습니다. 주여, 성령이 오게 하셔서 그렇게 빠지고 노닥거리는 우리가 천하에 무가치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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