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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9 09:41:46 조회 : 3451         
110407 요한계시록 12강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요한계시록 1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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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119.♡.121.61) 11-04-12 17:43 
가락교회110407요한계시록9장-12강a-(이 근호 목사)
제 12강a

오늘은 지난시간에 이어서 요한계시록 9장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해석이 요한계시록에 잘 안 통한다는 것을 우리가 감 잡아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 돼 했죠?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맞죠?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 구절로부터 출발해서 예수님만을 어떻게 증거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방금 대전제가 모든 성경은 움직이는 인물,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달리 이야기해서, 성경책이 있다면, 전부 다 내용들이 다 흩어져 나와서 예수님 한 인물의 움직임, 하신 일, 그분의 생애, 이것과 연관이 된다 말이죠. 그래서 성경 해석을 할 때는, 성경 문자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이것과 예수님의 하신 일에서부터 접근해 나가면 성경 해석이 풀린다. 이게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이나 또 구약의 모든 레위기나 해석할 때 다 통한다 말이죠.

그러면 요한계시록에도 그것이 통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가능하냐 말이죠. 제가 아까 집사님하고 이야기 하면서 ‘인간은 귀신이다.’라고 이야기 했는데, 이 말이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이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일리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서로 성경을 볼 때, ‘나’라는 것은 분명히 있는 거잖아요. 쉽게 갑시다. 사람이 눈을 감고 이렇게 누워 있습니다. 지금 잠자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편히 쉬는 것인지 잘 모르겠죠? 그런데 여기다 그림을 그려볼게요. 이게 무슨 그림입니까? 이 사람은 졸지에 죽은 시체가 되죠. 이게 뭐냐 하면 주변에 있는 관 그림을 입혀 보니까 이 안에 있는 사람이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바로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이것과 예수그리스도와 관련을 지음으로써 그 결과로 인간은 어떠하냐를 보여주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게 되면, 인간은 그냥 살아요. 그냥 사는데 이 땅에 사는 것이 빡빡하고 힘들어요. 그런데 힘들면서도 그 힘든 이유를 모릅니다. 요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왜 이렇게 힘들지? 좀 더 빡시게 해볼까. 왜 이렇게 힘들지? 헌금을 더 해 볼까,’ 자꾸 하나님하고 어떻게 직접 상대를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뭘 받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직접 상대를 하지 않는 것을 이걸 ‘종말의 현상’이라 합니다.

종말의 현상은 인간은 귀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귀신하고 상대를 안 해요. 인간을 둘러 싼 이 관,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악령입니다. 악령!! 그야말로 귀신이죠. 진짜 귀신이죠. 귀신 대장, 악마, 이런 것들과 예수님과 관계를 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인간은 설치나 안 설치나 그냥 그대로 그 구조 안에서 수동적으로 모든 것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입니다. 그것이 종말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한번 정리하면, 종말은 인간이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지 않는다. 다만 일방적으로 당할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의 그런 귀신들, 악마하고 상대해서 그냥 우리는 당할 뿐인 거예요. 마치 구약에 욥 같은 경우처럼. 욥이 고난 받고 싶어서 기도한 것 없죠? 그냥 당했죠. 그럼 욥이 당한 것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누구와 싸웠습니까? 사단하고 하나님하고 내기했죠? 그 내기에 욥은 그냥 말려든 겁니다. 욥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도 신앙생활 할 거냐? 하나님은 ‘한다.’ 사단은 ‘죽어도 안 한다. 포기합니다.’ ‘아냐, 신앙생활 할 거야.’ ‘아닙니다. 욥이란 사람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재산이 넉넉하고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기하자.’ ‘내기 합시다.’ 그래서 붙은 거예요. 그러니 욥의 입장에서는 억울하죠. 아무리 연약한 인간이지만, 어떻게 저쪽에서 놀아나는 대로 당하기만 하느냐 말이죠. 우리도 종말에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9장6절에 보면,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를 피하리로다. 마치 뭐를 보는 것 같아요? 욥을 보는 것 같죠. 욥이 죽여 달라고 그렇게 해도 죽음이 욥을 피해버렸습니다. 왜 죽음이 욥에게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사단과 하나님과의 내기에서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아, 딴 건 다 손대는데 절대로 죽음에 대해서는 네가 손쓸 수 없다.’ 그런데 욥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아요. 이런 꼴로 산다는 것이 창피스럽고 부끄러운 겁니다. 하나님 잘 믿는다고 소문난 사람이 저주는 있는 대로 다 받아버리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니가 죄졌다.’고 ‘은밀하게 니가 죄졌잖아. 그러니까 벌 받지. 이실 직고 해라. 솔직하게 고백해. 죄 지은 것 고백하란 말이야.’ 라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얕보고 그렇게 다가오죠. 본인은 죄 지은 것 생각도 안 나죠. 꼭 부흥회 하는 것 같아요.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부흥 강사가 ‘회개하라.’ 하니까 미칠 노릇이라.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뭘 가르치느냐 하면, 마지막 종말에는 ‘신앙의 재정립’입니다. 신앙은 종말 전까지는 내 행함, 나의 행함이죠. 나의 행함 여부에 따라서 신앙의 좋고 나쁘고가 결정되는데, 종말이 되면 ‘내가 수동적인 것을 수동적으로 받을 거냐? 아니면 내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설칠 거냐?’ 가지고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겁니다. 말이 어렵죠?

종말에 가면, 어차피 하나님께서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는 신앙이고 ‘하나님, 어떻게 나한테 조치해서 내가 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보겠습니다.’라고 설쳐대면 그건 믿음이 없는 거예요. 종말에는 대상을 우리하고 하지 않아요. 오늘 그 이유가 서서히 나올 겁니다.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제가 다시 한 번 쉽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종말에는 예수님께서 관여한다. 두 번째: 그런데 우리를 상대로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둘러싸인(우리에게는 보이지 않고 느끼지 않지만) 종말을 맞이해야 될 세상의 악한 분위기의 세력과 직접 상대하신다. 인간은 인간에게 보이지만 주변에 있는 악한 영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을 실체로써 이끌어 내어서 그것과 상관하는 그 모든 이야기가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이야기, 이것은 악마의 영적 세력과의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입니다. 인간은 육적인 인간과 인간과의 대화밖에 알지를 못해요. ‘하라, 하지마라, 이것은 알아듣는데 ’니 주변에 귀신이 어슬렁거린다.‘ 이 말은 못 알아듣습니다. ’ 니 안에 귀신 있다.‘ 이 말은 못 알아들어요. 우리는 안팎으로 귀신 있습니다.ㅎ 그래서 ’인간은 귀신이다‘ 말하는 거예요. 안팎으로 귀신이 있어서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 했죠.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믿음이 뭐냐? 안 당하는 게 믿음이 아니고, 당하더라고 그걸 염려하거나 불안해 떨 필요가 없을 경우가 바로 믿음이라 말이죠.

요한계시록 강의하는 사람들, 또 듣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미 처음부터 구원 받을까, 처음부터 벌벌 떨고 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입장에서는 더 좋은 거죠. ‘요거 믿음 없구나, 그럼 더 한번 떨게 해줘? 어이, 7대접 갖다 부어, 7나팔 불어, 7인 공개해,’ 그러니까 사람들은 더욱 더 떠는 거죠. ‘하나님, 너무 혹독합니다. 이런 가운데 어떻게 살라고,’ 하나님이 떡 보여줍니다. ‘너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너를 그동안 압축했던 그런 권력, 세력과 상대하고 있는데 떨기는 니가 왜 벌벌 떠느냐,’ 하시죠.

종말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이미 죄인으로 들통이 난 입장입니다. 죄인으로 들통이 났기 때문에 죄인이 살고 죽는 것은, 예수님의 그 다음 조치에 달려 있는 것이지, 죄인이 착한 일 해봐야 의인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맡기는 거예요. 종말의 조치대로 파도를 타는 거예요. 그냥 맡기는 거예요. 포악한 남자들이 제일 순한 순간이 언제인가 하면, 이발소에 가서 머리 깎을 때에요. 얌전합니다. 특히 더 순할 때는 여자 면도 사에 의해서 면도 당할 때. 그때는 가장 순하죠. 천하의 장사라도 특히 목 부분에 면도할 때는 덜덜덜 떨게 돼 있습니다. 그게 바로 종말의 현상입니다. 그냥 맡기면 돼요.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어떤 면도칼 3개가 춤을 춰도 그냥 맡기시면 그 자체가 예수님 중심으로 차분하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돼 있습니다. 종말을 느긋하게 맞이할 수 있어야 돼요.

과연 느긋하냐를 시험하기 위해서 또 알려 주기 위해서 세상사람 같으면 벌벌 떨 수밖에 없는 온갖 일들을 요한계시록에 다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이래도 안 떠는 사람 누구요? 이렇게 세상이 혼잡스러운데도 느긋한 사람 누구세요?‘ 하고 노리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볼 때 느긋하게 보시고 제발 다시 한 번 당부합니다만 내가 나를 어떤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조치를 우리 자신에게 하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사는 대로 사시면 그 살아가는 모든 것도 주님이 주신 조치의 혜택을 입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는 쉬운 이야기 했지만, 지금까지는 박 집사님 못 들었어도 괜찮아요. 아시는 이야기예요. 방금 이야기 한 것을 전체적으로 어렵게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 하셨습니다. 이 시기를 종말이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인간들은 이미 십자가 앞에서 뭐로 드러나느냐 하면 죄인으로 드러나죠.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죄인이라면, 이 전체를 죄 짓게 만든 이 세상은 죄악 된 세상이죠. 지금까지 인간은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인간이 살기 때문에 항상 눈에 보이는 세상과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가, 자기가 방어하기 위해서 정립해 왔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 하시면서 ‘손 떼라’고 합니다. ‘니가 이 세상과 싸운다, 이긴다,’이런 것에서 손 떼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죄악 된 세상에 대한 공개와 그 실체는 십자가 지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관여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죄악 된 세상을 왜 관여 못합니까?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 해요. 그야말로 우리는 그냥 귀신 들려서 내 마음도 어떻게 조치를 못해요. 그래서 죄인이니까. 죄인이란 말은 죄가 지배받고 있다는 뜻 이예요. 아담의 후손은 죄에 지배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귀신은 우리 밖에 있는 귀신을 다룰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누구하고 상대한다? 우리 인간하고 하지 않고 누구하고 상대한다?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고 귀신과 귀신의 두목 악마와 상대하러 오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도둑놈이 담을 타넘고 와서 가재도구를 훔쳐갈 때, 가재도구하고 의논하는 게 아닙니다. ‘가재도구야, 내 따라 오너라,’ 이러면 가재도구 안 나갑니다. 어떻게 합니까? 담을 넘어와서 가재도구의 전의 주인이었던 그 집 주인을 포박을 하죠. 꼼짝을 못하게 하죠. 그건 무슨 뜻입니까? 이 집에 있는 가재도구는 그동안 홀로 냉장고가 있다고 홀로 있는 게 아니고, 누구 허락 없이는 누구 지배아래 있었다? 옛날 집 주인의 지배하에 다소곳이 얌전하게 아무소리 못하고 있었다 말이죠. 아무소리 못하고 있는 냉장고에게 ‘야, 따라 나와’ 하면 따라 나올 사람 없어요.

신앙은 기적입니다. 주님을 어떻게 따라 나와요. 말도 안 되죠.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같은 인간, 나한테 이익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편 되면 그때는 필요하지만 예수님보고 무조건, ‘어이,’ ‘네’ ‘날 따라와.’ ‘따라가면 얼마 주시렵니까?’ 대번 이래 나오지, 그냥 ‘ 예, 주님 따르겠습니다.’ 할 수 없다 말이죠.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이 사람들도 처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고기 잡는 사람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따라 나오라 해서 따라 나왔잖아요. 그들이 따라 나올 때 그들은 뭔가 노리고 따라 나왔잖아요. 그 중에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고. 노리고 따라 나왔는데 3년 동안 따라 다녀도 그들이 얻는 게 뭡니까? 아무것도 없죠. 왜 아무것도 없습니까? 베드로가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사단이 베드로 너를 청구(저 애는 내가 다뤄서 지옥 보내겠습니다)할 때, 예수님께서 ’안 돼, 저 베드로의 영혼은 내가 관리하겠어.‘라고 주님께서 악마와의 베드로의 연계를 중간에 예수님이 잘라버리니까 그래서 베드로가 구원 받는 거예요.

가룟 유다가 구원 못 받는 것도 당연한 겁니다. 베드로가 구원 받는 것은 주님이 개입해서 구원 받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지금도 주님이 개입하신 거예요. 우리는 껍데기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돈만 주면 예수님도 다 버릴 사람 이예요. 그만큼 우리는 허약한 사람 이예요. 우리가 옛날 살아온 방식이 마귀한테 있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엄청나게 약한 사람입니다. 뭐 ‘어머니는 강하다 ’했죠? 자식이 출세 안 돼 보세요. 어머니는 자식의 출세를 위해서 뭐든지 다 해요. 자식이 우상이라. 육적인 자식도 하나의 우상이라면 그 자식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이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처나 자식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이것을 자력으로 성취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뭔가 잘라주는 게 필요해요. 주께서 개입하셔서 잘라주실 때 ‘주께서 잘라주셔서 개입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뭐를 고백하느냐 하면, ‘그전까지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고 마귀 힘으로 살아왔고 내가 자진해서 그 마귀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납니다.’ 라는 고백이 성립돼야 돼요. 그리고 유혹이 한번 유혹으로 지나가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와요. 나이 80된 노인도 한 40먹은 아줌마가 시집온다 하면 좋다 하죠.ㅎ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하죠.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 하죠. 그 말이 옳은 이야기예요. 자아가 늙어 본 적이 있습니까? 자아는 안 늙어요.ㅎ 자아는 항상 이팔청춘 이예요. 항상 청춘이지, ‘아, 내 정신이 늙었어.’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가끔 건망증 생길 때, ‘내 정신도 늙었나?’ 이러지만, 다시 새롭게 팔팔해요.

늙은 다윗한테도 보세요. 젊은 여자 넣어주는 거 보세요. 인간들이 하는 조치라 하는 것은 귀신과 연계되는 것은 생각 못하고, ‘귀신은 없다. 실수한 것도 내가 모자라서 실수한 거다.’ 항상 문제점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 역사의 실패예요. 실패의 이유가 그겁니다. 말씀을 누가 지킨다? 내가 지킬 수 있다는 거예요. 나중에 예수님께서 ‘너희 아비는 마귀다.’ 했다. 결론적으로 그게  뭐냐, 왜 내 물건은 내 물건인데 악마가 널 지배하는 게 왜 안 되느냐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예수님께 자진해서 나올 수가 없어요. 그만큼 악마의 힘은 인간보다 셉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선악과 맛만 봤을 뿐이지 설마 따먹는 그 순간 마귀의 지배아래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죠.

참, 가인도 억울해요. 가인도 동생 죽이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이 딱 보니까 가인 앞에 악마가, 죄가 가인을 덮치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덮친다, 덮친다 하다가 덮치니까 어쩔 수 없죠. 덮쳐버리니까 사람이 돌아버린 거예요. 동생한테 무슨 빚진 게 있다고 동생을 죽여 버립니까? 완전히 사람이 광기예요. 복음 전하면서 그런 것 많이 체험합니다. 광기(狂氣), 이유가 없어요. 그냥 광기처럼 다가오는 겁니다. 광기 현장을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뉴스 시간에 나와요. 북한 장군들, 훈장을 달 데가 없어서 위에서 밑에까지 죽 달고 나오고, 박수 치는 것도 보면 미친 사람들처럼 치죠.  그래서 어떤 학자가 이야기 했죠. 한국의 정신 상태는  2가지를 보면, 하나는 현재 남쪽에는 통일교과 순복음교회고 북한에는 북한의 정권, 이 세 가지가 한국의 샤머니즘의 대표라 볼 수 있다 했어요. 광기입니다. 광기. 요새 또 대순진리라고 하나 또 생겼어요.

광기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멀쩡해요. 멀쩡한데 그 집단에 들어가 버리면 사람이 미쳐버려요. 꼭 부흥회 하는 것 같아요. 완전히 이거는 제 정신이 아닙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인간은 철저하게 귀신한테 놀아난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어떤 점에서 좋은가 하면, ‘내가 그동안 누구한테 놀아났지?’ 그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계시록인데, 그럼 요한계시록에서 역사는 인간의 몸과 관련돼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몸이 떠나버리니까 인간의 몸은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역사로 설명을 못하고 묵시로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역사와 상관없이 적용되는 것을 묵시라 합니다. 저는 이것을 ‘떠도는 빙산’이라 해요. 빙산 한번 봅시다. 바다에 빙산이 이래 있으면 8분의 7은 물위에 뜨고 8분의 1은 물에 잠겨서 빙산이 떠다니잖아요. 빙산이 한 곳에 머물지를 않죠. 이게 바로 묵시적인 특징입니다. 옛날 일어난 사건이, 옛날 일어났던 종류의 사건이 이건 필요에 따라 지금도 일어날 수가 있는 거예요. 과거에 일어났는데 왜 일어나느냐? 그런 건 물으면 안돼요. 그때, 그때 달라요. 그때, 그때마다 계속 오는 거예요. 풍선처럼. 풍선이 바람에 날려서 어느 집에 내려올 지 풍선 맘대로 아닙니까?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같이’ 인간들의 역사의 원인과 결과들을 무시해버리는 거예요. 역사 무시는 무슨 무시냐 하면, ‘인간 무시’입니다. ‘아이고, 인간들, 다 내 쫄다구야.’ 마귀가 얼마나 무시하는지 몰라요. ‘아이고, 훌륭해, 훌륭하십니다.’이러면서 일곱 귀신이 들어와 버리면 ‘아 나 착하다고?’ 하면서 일곱 귀신이 친구들 모아서 그 속에 들어와 버리면 미쳐 버립니다.

사람이 기분 나쁜 것이 성경을 보면 기분 나쁜 것이, 사람이 성경을 봐도 기분 안 나쁜 것은 성경을 제대로 안 봐서 그래요. 성경에 보면 일곱 귀신이 내 허락도 없이 들어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들어온다는 거예요. 나오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간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도 이런 말씀 했죠. ‘그때 니가 세상 사람들에게 잡힐 때에, 니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니 속에 성령께서 말하게 하신다.’ 믿는 사람한테는 너무나 감격스럽죠. 안 믿는 사람한테는 너무나 인격모독 하는 거예요. ‘나도 배울 만큼 배웠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합니까?’ 주님께서 ‘니가 영적인 것을 얕잡아 보는구나. 니 조상부터 귀신한테 눌려 있는데 니 까짓 게 귀신한테 눌리지 그래, 노아도 그랬어. 모세도 시내 산 왔다 갔다 그랬어. 예레미야도 날 때부터 선지자 노릇할 때도 그랬어. 다윗도 은혜, 성신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성신이 개입되지 않으면 어떤 누구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죄의 종이 된 것을 어떤 누구도 고백 못해요.

 저 절에 가 보세요. 절에 가면 중들 얼마나 깔끔하게 살려고 애를 씁니까? 오죽했으면 무소유겠습니까? 법정 스님이 무소유라 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학자가 말했어요. 자기가 귀신한테 눌린 걸 모르기 때문에 죄가 된다는 거예요. 날 때부터 죄인인 걸 모르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이유 없는 징벌, 이유 없는 징벌을 구약 때는 몰랐습니다. 신약에 와서 종말 때,(신약이 종말입니다) 보니까, ‘하아~ 우리가 모든 살기 힘든 것은 그게 이유가 있었구나,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미처 몰랐는데 우리 주변을 둘러 싼 악한 마귀가 그만큼 시달리게 했구나.’ 그렇다면 그 마귀를 상대해서 처벌 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 받게 하시는 것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난 겁니다. 우리 손을 떠난 걸 가지고 이걸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 손을 떠났으면 누구 손에 있습니까? 예수님 손에 있죠. 예수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시는 겁니다. 이게 믿음 이예요. 어떻게 나한테 조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했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이 잘 아셨는가를 제가 문제를 내겠습니다. 6절에 보면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이러한 현상이 언제 일어나는 겁니까? 늘 일어나는 겁니까? 특정 시간에 일어나는 거예요? 둘 중에 하나다. 정답? 늘 일어나요. 전에부터 늘 일어났었어요. 사람들이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아이, 뭐 사업도 안 되고 콱 죽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그거, 니 맘대로 안 되거든’ 죽을 권리마저 있다고 여겼던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정말 자살해서 죽는다는 건  주께서 허락해서 죽은 것이지, 자살한다고 다 죽지는 않습니다. 주께서 허락이 없으면 참새도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시장에서 팔리지도 않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주님께서 또 인간무시예요. 세상에, 참새가 떨어지는 것, 죽는 것이 주님의 손에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이미 내 손에 잡혀 있다. 내 손에 안 잡혀 있으면 귀신의 종이 되고 평생을 귀신 따라 가다가 귀신과 더불어서 지옥 간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은 뭐냐, 요한계시록 마지막 제목을 하라면, ‘귀신과 더불어 일생’ ‘귀신과 더불어 지옥’ 요한계시록 21장 이야기입니다. 귀신과 더불어 살다가 더불어 가는 거예요. 귀신으로 말미암아 귀신을 위하여,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처럼, 귀신에 의해서 귀신을 위하여 귀신에 소유된 채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은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라.’ 예수님께서 ‘너희 귀신, 악마는 나와. 귀신 숨지 말고 나오란 말이야.’ ‘나올게,’ ‘이제 정상이네.’ 귀신과 직접 붙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직접 붙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직접 안 붙어요. 밑에 누가 있습니까? 미가엘, 천사를 동원 시켜서 옛날에 미가엘과 싸웠던 악한 천사와 선한 천사의 싸움을 지금도 미가엘 뿐만 아니고 천사들을 동원해서 우리의 인간 세계를 지배했던 귀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렇게 드러내는 작업에 갖가지의 사용된 그것을 7인, 7나팔, 7대접이라 하는 거예요.

시간적 순서가 아닙니다. 시간적 순서가 아니고 귀신과 악마의 실체가 더욱 더 고화질로 하는 거예요. 또렷하게 나오는 거예요. ‘희미하게 나오지 말고 또렷하게 나와, 더 숨어 있겠다고?’ ‘어이, 천사, 나팔 불어. 어, 희미해? 대접 갖다 부어’ 부을 때마다 그들은 또렷하게 나오죠. 한번 봅시다. 9장 20절 봅시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

버림을 하나님께 받아놓고 거기에 반발심이 극에 이르러서 하나님이 아닌 옛날에 하던 행세, 옛날에 자기가 즐겨 했던 습관화된 행세가 뭡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우상에게 저런 식으로 쏠려가게 돼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6절에 보니까 죽지도 못한 채 사는 게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럼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목사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신다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어요. 돈이 없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마음이 힘들지는 않습니다. 왜? 우리는 어차피 당해야 될 것이기 때문에, 죄인으로서 어차피 떠날 세계에서. 그러니까 성도는 작은 것에서 큰 은혜를 느껴야죠. 세상 사람들은 큰 걸 못 가져서 환장했지만, 우리는 허락하신 작은 것 속에서도(몸 중에서 이가 안 아프다든지, 남보다 피부가 윤기가 난다든지, 오죽 했으면 말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일, 나 시계가 아주 잘 가. 이런 것까지)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돼요.

사람이 세상 사람이 감사하는 것을 따라 가려면 우리가 다리가 찢어집니다. 누굴 하러 따라가요.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연애 인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뭡니까? 모든 자랑이 인기 위주로 살았기 때문에 인기 떨어지면 내가 누군지 몰라요. 인기 위주로 산다는 것은 뭐냐 하면, 단 한명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자기 힘이 되는 곳에 상대했지, 내가 저 편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진실 된 가수는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마지막 팬이 한사람이라도 남으면 나는 그를 위해서 노래하리라.’ 노래 해봐도 돈도 안 되는데.ㅎ

바로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그런 사랑 이예요. 부모는 자식에게 이익이 있다고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자식한테 사랑받으려는 것은 욕망의 불꽃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드라마를 안 보니 이야기가 ... 보고 오세요. 드라마에 나오는 악독한 아줌마 이야기지, 실제는 악한 부모라도 자식이 달라하면 좋은 것을 줄줄 안다 했죠. 이게 바로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종말 때 성경을 통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선물을 받았으면, 세상 살기가 힘들더라도 7인, 7나팔, 7대접 속에서 얼마나 힘들어요. 주께서 흔들어 대니까. 지진이고 방사능이고 흔들어 대니까 얼마나 고욕입니까. 하지만 이러한 흔드시는 분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참는 거예요. 이런 흔들림을 통해서 요한계시록을 느긋하게 보셔야 됩니다.

자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황충’이 나옵니다. 황충이 어떻게 행세하는가 보세요. 요한계시록 9장 해석하는 주석 봐도 소용없어요. 해석 자체가 안 돼 있어요. 황충이라 할 때 원리가 있어요. 이것은 요엘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요엘서에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마지막 때에 성신을 부어 주리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그 대목이 요엘에 나오는 겁니다. 베드로가 요엘 대목을 거명한 것은 요엘서에서 종말의 광경을 적나라하게 다 보여주거든요. 요엘 2장 32절인가 그렇죠? 그런데 앞장 1장과 2장 전반부에 뭐가 가득 찼느냐 하면 황충, 메뚜기로 가득 차 있어요.

그러면 제가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요엘서에 있는 내용을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세상이 있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고 나무가 있고 집도 있고 한데, 여기에 갑자기 종말을 알려주는 종말을 예고하는 뭔가 시커먼 먹구름인가 했더니 먹구름이 아니고 메뚜기 떼예요. 무엇을 차단하느냐, 구름은 빛을 차단하죠. 요한계시록 9장 2절에 보니까 어두워졌다. 하늘이 까맣게 어두워질 정도로 요엘서에 나오죠. 요엘서는 구약이고 여기는 구약인데 요한계시록은 신약에 속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은 ‘신구약 종합 판’ 이예요. 요한계시록은 구약과 신약의 위에 십자가에 띄워서 요한계시록 전체 장을 구약에서 신약으로 해석이 되는데 요한계시록은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이런 방향으로 받는 게 아니고, 구약이나 신약이나 바로 위로 받아 버려요.

요한 계시록은 왜냐 하면 예수님(어린양)이 이미 ‘주’로 계시기 때문에.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유월절 이야기잖아요. 유월절 이야기가 바로 올라갑니다. 십자가 이야기가 바로 올라가고,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죽은 장소가 뭐라 하느냐 하면, 애굽이라 하고 소돔이라 하고 또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곳이라고 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주님이 십자가 죽으신 곳은 지역상 같은 장소가 아니에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11장에서는 종합 판, 위로 올라가 버렸기 때문에 백날 그 세상이 위에서 내려온 세상 이예요. 위에서 보면 여기나 저기나 똑같은 세상 이예요. 어떤 장소든 마치 사람이 음식 잘못 먹으면 피부가 벌겋게 올라오잖아요. 열병나면 피부에 발진이 일어나듯이. 요한계시록에서 어디에서든 핍박 받는 곳에는 발진, 두드러기 난 것처럼, 멍게처럼 솟아나는 거예요. 이걸 솟아나는 것을 시공간을 초월해서 종합 판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 원인이 뭐냐, 귀신과 그리고 악마라 말이죠.

원래 귀신과 악마는 안 보이는 모습으로 차분하게 ‘인간들아, 너희들이 인류애를 위해 손에  손잡고 서로 도와주면 앞으로 2020년에는 훌륭한 나라가 될 거다.’ 이렇게 조용하게 이야기했던 그것이 인간 내부에서 주께서 살기 어렵게 만들어 버리니까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나와, 우리 살기 힘들게 만드는 하나님 나와, 차라리 여호와를 믿느니 부처를 믿겠어.’ 라고 속에 있는 본심을 마음껏 두드러기처럼 돋아나면서 당하기는 누가 당합니까? 앞집에 사는 복음 아는 사람에게 핍박이 가는 거예요. 직장에서 핍박받고, 복음 안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교인이 목사한테 핍박받고, 이게 두 증인 이예요. 스가랴에 나오는 두 증인, 스가랴에 나오는 두 증인은 역사적으로 십자가에서 보면 이쯤 되는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두 증인이 어디서 보나 두 증인예요. 이걸 가지고 두 증인 해놓고 스가랴에서는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라 해요. 감람나무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성전 안에 있어요. 두 촛대, 요한계시록은 역사와 공간적으로 우왕좌왕 이예요. 어떻게 딱 집어서 ‘이것이 이것이다.’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야, 어려운 것 나왔다. 이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요한계시록에는 ‘(  )는  (  )다.’가 성립이 안 됩니다. ‘목사님, 요한계시록에 이 뜻은 무슨 뜻입니까? 딱 집어서 이야기 해 주십시오.’ 그게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이것은 물 컵이다.’ 라고 하면 이것은 물 컵이 아니라는 뜻 이예요. 뭔 뜻인지 알겠습니까? 이것이 성경이다 하면 이것은 의자가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무엇이 무엇이다 하면 딱 한 사물, 하나에만 해당되지, 다른 사물에는 해당이 안 됩니다. 이것이 카메라이다 하면  이것은 강아지가 아니란 뜻 이예요.

우리 인간들이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야기 해 달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나다‘가 기반이 딱 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나는 나다.’ 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너는 언약의 몸이다.’ 희한한 몸이죠. ‘너는 아담에 속했다.’ 우리로 하여금 ‘너는 아무개야,’ 하는 게 아니고 ‘너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너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니라.’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주님은 우리 개인을 상대하는 게 아니고 우리를 지배했던 귀신과 상대하기 때문에 귀신에게 묶여 있는 자기 백성을 끄집어낼 때는 ‘너 구원 되었어.’가 아니라 귀신에게 묶여 있던 죄인을 내가 구원 했다고 해서 그 죄인 자체를 내 것으로 가지려는 나의 자리를 일체 허락을 안 합니다. 내 자리를 인정 안 한다니까요. 왜? 우리 자리는 없어요. 우린 그냥 그림자예요. 그냥 껍데기에 불과해요. 우리는 그동안 귀신을 모시는 껍질에 불과한데 성령이 들어와 버리면 귀신을 모셨기 때문에 귀신은 우리에게 친구가 됩니다. ‘너는 너다.’ 왜냐하면 나귀가 하나님께 대들 때 ‘나는 나다.’ 라고 대들었거든요.

‘나는 나다.’라는 말은 누구만 해야 되느냐 하면, 여호와께만 해야 돼요.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다. 그것은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떡이다. 나는 빛이다.’ 누구 이야깁니까? 예수님만 이야기해야 돼요. 그럼 우린 뭐가 됩니까? ‘나는 빛이 아닙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닙니다. 나는 생명이 아닙니다. 나는 (  )가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왜냐하면 나라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이왕 어려운 거 어렵게 해 봅시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았죠? 낳고 365년을 살았잖아요. 그러면 므두셀라 빼놓고 에녹을 따로 생각하는데(이건 내일 안양강의 할 건데 미리...실수) 구름다리 있죠. 정식 다리 말고 울렁, 울렁 하는 다리, 여기 밑에 인디아나 존스 영화에 나오는데 여기 안에 손잡이에 안 떨어지도록 철사(와이어)가 다 연결돼 있어요. 지금 성도님들 몇 분, 계시잖아요. 주께서는 하나, 하나를 보시는 게 아니고 와이어가 있어요. 그리스도 지체라는 와이어, 성령을 줘 버리면 우리도 살아도 같이 사는 거예요. 므두셀라, 에녹, 노아 전부다 같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는 겁니다. 이걸 언약의 노선, 갈라디아서에는 약속에 속한 노선과 혈육의 노선이 있다. 그 와이어를 발견해야 됩니다. 와이어를 발견하지 않으면 혼자서 신앙생활 잘하다가 혼자서 지옥가요. 우리는 내 혼자서 신앙생활해서 구원 못 받습니다. 그 와이어가 연결돼 있기 때문에, 욥하고 연결돼 있고, 모세하고 연결돼 있고, 변화 산에서 예수님하고 누구하고 이야기 했습니까? 모세하고 엘리야하고 예수님하고 이야기하고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구경했죠. 전부 다 여섯 명이 와이어에 연결돼 있어요. 언약으로 연결돼 있다 말이죠.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부활하면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고 부활이라는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주시는 그 와이어, 부활의 능력이 모두를 하나로 묶는 겁니다. 그래서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제식으로 하면 와이어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초대교회 때 왜 떡을 뗐겠습니까? 왜 나눠 줬습니까? 사람의 얼굴을 달라도 공통점이 있었어요. 그 공통점이 그들로 하여금 내놓게 한 겁니다.

역사적으로 말할 때는 두드러기가 난다 하는데, 역사에서는 지금 요한계시록은 이쪽에 있어요. 십자가 연결되어서 있다 말이죠. 십자가 사건도 사실 역사적으로 돋아난 사건이죠. 이걸 ‘특이성’이라 하는데, 그래프가 이래 가다가 쪽 올라가죠. 요 산꼭대기 지점에서 보면 이쪽과 저쪽 서로 기울기가 다르죠. 요걸 특이성이라 합니다. 특이성 특징은 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요 성질을 가져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십자가 목걸이 하고 흉내 내면 십자가 믿는 사람입니까? 안돼요. 왜? 흉내는 못내요. 고 특이성은 성령께서 일으켜 줘야 두드러기처럼 틀림없이 올라오는 거예요.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은 요엘 있죠. 요엘을 통해서만 이야기 하는 겁니다. 요엘의 특이성이 요한계시록 9장에서는 특이성이 그대로 요한계시록은 하나로 묶는 종합 판이기 때문에 묶을 수가 있어요.

아까 스가랴 두 감람나무, 두 촛대가 같이 연결 되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에서는 시공간을 떠나서 묶음으로 있는 거예요.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주님께서 특이하게 드러내는 겁니다. 이 특이하게 드러내는 것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은 신구약의 모든 특이성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종말’ ‘마지막 때’라 하는데 때가 마지막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 중에 하나가 메뚜기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요엘에서 보면, 실제로 메뚜기가 등장을 해요. 그 메뚜기가 등장하고 난 뒤에 마지막 때 메뚜기가 시커멓게 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한번 봅시다. 요엘서 봅시다. 페이지 1272페이지 알려줘야 돼요. 2장 28절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32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돼 있죠? 지금 요엘서 입장에서 특이성을 볼 때 여기 31절에 보세요.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돼 있죠. 이것은 앞에 메뚜기들이 싹쓸이, 메뚜기들이 와서 사람들이 먹을 것을 싹쓸이 한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사람들이 귀신한테 안 얽매이고 혼자서 자기가 열심히 농사짓겠다고 생각하는 그 안일한 생각, 그것이 종말이 되기 전까지는 허용이 되는데  종말 시기에는 그것이 용납이 안 돼요.

실상이 필요해요. ’어이구, 니가 어느 정도 잘 먹고 잘 살았지,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는 자도 여호와 인 것을 니가 언제쯤 믿겠느냐,‘ 그대로 가 볼게요. 메뚜기 보내서 확 거두죠. 거두니까 인간의 그동안 죄졌던 본색이 나오죠. ’누구야? 힘들어서 못 참겠어. 죽고 싶어.‘ 그럴 때 그 다음 조치가 뭐냐, 그 메뚜기가 자기만 파괴하는 게 메뚜기가 아니고 요한계시록 9장에서는 죽고 싶은 사람들을 안 죽게 만들면서 계속 쏘아대는 황충이라는 기능으로 작용합니다. 몇 개월 동안? 5개월 동안. 5개월이 뭐냐, 메뚜기 수명 이예요. 메뚜기 수명이 다할 때까지. 기능은 뭐냐, 메뚜기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냥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신자만 살기 힘든 게 아니에요. 세상도 살기 힘들어요. 그 사람들이 교회 안 나왔지만 그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만사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이 없어.’ 스트레스 받아서 한잔, 주식 값이 폭락해서 속상해서 두잔, 안 믿는 사람들이 술 마시는 이유가 다 속상해서 그런 거예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집에 오면 마누라 바가지, 자식은 안 놀아준다고 짜증내고, 부인은 부인대로 이런 식으로 살려면 결혼은 왜 했느냐고 짜증내고 서로 짜증을 내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회개 합니까? 천만의 말씀! 오히려 더욱 더 ‘이럴 것 같으면 나 교회 안 나간다. 드디어 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이럴 것 같으면 난 돈 기적 준다는 기적을 찾는 그런 교회 가겠다. 자기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에 있는 요엘이 이게 가상이 아니고 실제인데, 구약 때 있던 요엘에서 실제로 메뚜기 오는 걸로 해석을 했는데 잘못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 몸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악마에 푹~ 젖어들었던 악마 같은 마음을 쏘아댄다는 사실을 모르고 실제로 메뚜기 오는가 살피고 있는 그런 식으로의 해석은 곤란하다 이 말이죠.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39.20) 11-04-23 08:46 
가락교회110407요한계시록9장-12강b-(이 근호 목사)
제 12강b

언약적인 몸이라는 것은, 이 몸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겁니다. 참새 누가 키우죠? 하나님, 잡초를 주가 키웁니까? 하나님, 길에 있는 백합을 누가 키웁니까? 하나님, 솔로몬의 입은 옷이 뭐보다 못하죠? 백합의 입은 옷보다 못하죠. 그럼 백합한테 물어봅시다. ‘백합아, 백합아, 니 아름다운 신체는 누가 만들어줬지? 그러면 백합이 말을 합니까, 안합니까? 말을 안 하죠. 사실은 말을 해요. 우리는 그 말을 못 알아들어요. 산은 산에게 말하고 들은 들에게 말하는데, 우리는 그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요.

우리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인간의 소통함에서 얻어진 일반 언어는 소통하지 않습니다. 예외가 있죠. 당나귀, 발람의 당나귀는 ㈀맏린?이야기 했습니까? 발람보고, ‘주인님, 왜 때리십니까? 지금까지 잘 섬겼는데 왜 때리십니까? 주인에게 평소에 함부로 굴던가요? 특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굴었죠.’ 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심지어 창세기 2장에 보면 누가 이야기해요? 뱀이 이야기해요.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이라는 것은 이미 ‘나’라는 몸이 바깥의 사물을 객관적으로 사물을 규정을 해놓고 내가 어떻게 이용할까 하니까 저쪽에서 입을 다물어 버리죠.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아느냐, 소나 개나 키우는 것처럼 너희를 직접 키운다. 다만 인간과 개의 차이점은 뭐냐, 인간은 그냥 키우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인간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언약 적 몸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먹든지 마시든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될 몸이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아프다든지 날 때부터 키가 작다든지 날 때부터 당뇨가 있다든지 이런 것들은 우리가 ‘죄의 흔적, 죄의 징후‘라고 해서 그런 약한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새 언약을 이 몸하고 새로운 언약으로 주어진 흙에 속한 형상 말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내다보기 위해서 이런 병들고 약한 몸을 주신 겁니다.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자기 몸의 병을 위해 세 번씩이나 기도했는데, 이걸 사도바울은 사단의 가시라고 한 거죠. 나중에는 그 이유를 알아요. 왜냐하면 자만하지 말라고. 무슨 자만? 삼 층천을 갔거든요. 천국을 구경했을 때 얼마나 자만하겠습니까? 만약에 천국 보면, ‘천국 봤어? 봤어? 천국 봤어?’  안 보고 까불고 있어.‘ 얼마나 자만하겠습니까? 천국 봤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 받는데 천국 안 봐도 예수님 피로 구원 받는데 거기다 천국 봤다 하니까 마치 천국 본 것이 구원 받는데 효과 있는 것처럼 착각할까 싶어서 주께서 사단의 가시를 줘서 자고하지 않도록 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자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약한 몸으로 봐요. 언약 적 몸은 어떤 몸이다? 약한 몸으로 봤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 했느냐 하면, 예수님은 나보다 더 약하셨다는 것을 약한 몸이 될 때 알게 된 거예요. 십자가에 죽을 때 얼마나 약했을까..... 자기가 약한 몸이 되니까 주님은 자기보다 약한 거예요. 몸무게가 56키로 라면 주님은 48키로 예요. 몸무게가 40키로 라면 주님은 30키로,

천하에 아프다, 천하에 괴롭다 해도 주님보다 더 아프고 괴로운 사람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이 아픈 것은 우리가 아파야 할 이유를 몽땅 다 수집해서, 종합해서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유혹이나 괴롭고 허무하더라도 주님보다 허무하지 않고 주님보다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안에 다 들어있는 겁니다. 그 십자가를 끄집어내는 작업이 요한계시록 작업 이예요. *십자가* 십자가 저기에 뭐가 엉켜 있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뭐가 있기에 사람들은 마귀가 좋다고 거기다가 절하느냐, 뭐가 살기 힘들기에 뭐가 그렇게 괴롭기에 뭐가 하나님 앞에 불평스럽기에 그들은 주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고 말았느냐, 그걸 보이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 작업을 할 때 전체 성경 구절이 여기다 모든 약속의 이름으로 모든 말씀이 다 쏟아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9장을 시작하면서 먼저 질문의 정리를 해드려야죠. ‘육체가 영혼의 집이다.‘라는 것은 유명한 BC 4세기경에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제일 먼저 이야기했죠. 그 전에도 이야기한 사람 있죠. 그 전에 소크라테스도 이야기 했겠죠. 그 제자니까. ’육체는 영혼의 집이다.‘라는 이 말을 사용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슨 취지로 이 말을 했느냐가 중요하겠죠. 그게 뭐냐 하면, 육체보다도 영혼에 힘쓰면 구원 받는다는 플라톤 철학 때문에 유신론적 철학 때문에, 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이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나오죠. ’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하는 것 있죠.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을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사실은 영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있는 것은 뭐가 있느냐 하면 육체가 피워내는 이미지라 했어요. 그래서 육체가 건강할 때는 자기가 마치 천사처럼 느껴지고, 육체가 힘들면 자신의 마음은 어두워서 악마같이 느껴지는 겁니다.

사실을 말해서 더 솔직하게 말해서 인간의 육체는 법으로 하여 건전한 정신이 못 나오도록 가면 갈수록 힘들게 돼 있어요. 이빨 하나만 아파도 찡그리게 돼 있습니다. 사랑? 아픈데 무슨 사랑이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육체는 영혼의 집이라는 것보다도 육체가 영혼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까 천국가면 이 영혼도 없고, 천국가면 새로운 육체를 만들고 거기에 새로운 이미지가 나오죠. 하늘에 속한 육체에 속한 새로운 이미지!! 그 이미지가 바로 영원한 우리의 자아가 되는 겁니다. 자아가 없는 게 아니고, 주체가 없는 게 아니고 우리의 몸에서 피어나는 주체가 만들어 지는 겁니다.

영혼이 없으면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질문자) 주님은 몸이 있잖아요. 주님은 창조주잖아요? 창조주가 피조물 속에도 들어오고 밖에도 계시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맘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창조주는 백합을 키우시잖아요. ‘백합아, 니 주님은 어디 계시느냐?’ 물으면 안 되잖아요. 왜냐하면 백합을 키우시니까. 새롭게 기르시니까. 우리 인간을 그 나라 의를 위해 인도하시니까. 주님은 어디 계시냐고 묻는 것은 바로 평소에 내가 거울보고 ‘나는 어디 있지?’ 라는 묻는 버릇이 들어서 ‘나는 여기 있거든요. 주님. 그러면 주님은 내 겨드랑에 있습니까? 내 허파에 있습니까?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자꾸 장소를 묻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은 피조물의 사고방식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오류가 생기는 겁니다. 계속 생기 있는 것, 성경에서 우리가 움직이는 것, 활동 하는 것, 숨 쉬는 것, 전부 다 주님의 것이 아닌 게 없어요. 다 주님의 능력으로 숨 쉬고 일어나고 잠자고 일어나고 세수하고 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또 봅시다. 그래서 이러한 공부를 할 때 인식 자체가 우선 세상 사람들의 육적인 아이디어, 철학적인 것은 어떤 것이냐를 먼저 알고 성경과 어떻게 다른가 알아야 되기 때문에 철학 공부가 상당히 중요한 거예요. 육체, 영혼 이러한 것은 성경적이 아니고 철학적인 것이거든요. 성경에서는 언약 적으로 언약에 필요해서 다룬다는 거죠.

여기 요한계시록 9장 진도를 나가면 거기에 황충들이 있는데 황충들이 자세히 묘사돼 있죠. 황충하면 어려우니까 메뚜기라 합시다. 메뚜기의 형상을 묘사했죠. 메뚜기의 묘사는 딴 게 아니고, ‘기능’입니다. 이것은 지난번에도 여러 번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어떤 형상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하는 기능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인간 사회도 그렇잖아요. ‘ 당신 손 좀 봅시다.’ ‘아하, 손을 보니까 당신은 노가다를 하고 있네요.’ 나오죠. 손에 굳은살이   박히면 그 사람이 힘든 일을 육체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이름은 이스라엘 이름이든, 모세이름이든, 이름은 모세가 해야 될 일, 물에서 건져 내는 것, 노아 이름은 노아가 해야 될 일, 노아는 뭡니까? 땅을 안식하는 것, 땅을 평화롭게 하는 것, 아브라함, 만인의 아버지가 되는 것, 이삭, 약속을 구현하는 것, 모든 일의 형상은 그 사람의 기능과 관계 돼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름, 우리의 형상은 뭡니까? 언약의 몸이니까 언약의 몸의 형상은 죄인이죠. 다시 말해서 뭐만 끄집어내면 되요?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죄만 끄집어내면 되는 겁니다. 죄를 끄집어낼 때 거기에 도와주는 분들이, 분들 하면 곤란하지만, 그게 뭐냐 하면, 메뚜기예요. 메뚜기가 뭐를 하느냐 하면, 누구를 상대로? 안 믿는 사람, 인간들을 상대로 뭐를 하느냐?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메뚜기 모습은 마치 전쟁하는 모습으로 달려든다고 여기 나와 있어요.

여기 7절 한번 봅시다. “황충들의 모양은” 그 다음에 뭐라 돼 있죠? 모양은 뭣을 위하여? “전쟁을 위하여 예비 된 말들 같고.” 전쟁에 필요한 말들이니까 전쟁의 말들은 정신이 없어요. 이거는 자기 맘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주위에 누가 있습니까? 대장이 있죠. 대장이 지시하는 대로 대장이 갖고 있는 계획도와 목표대로 그냥 죽든 살든 그냥 할 일을 할 뿐 이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이 이렇게 살기 힘들고 갈수록 어렵다는 것은, 인간들을 어떻게 조치를 취하시는 게 아니고 갈수록 힘들 거예요.

우리 중학교 때 우리 고등학교 때, 우리 초등학교 때, 공부하기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어요. 선생님 만나고 친구 만나고 학교 가면 친구 만나 좋았고 선생님하고 인과관계 성립되고 그런데 지금은 애들이 즐겁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학원 3~4개 다니고 학교가면 자율? 말이 자율 학습, 자유 아닙니다. 타율학습, 강제로 시키고 그렇습니다. 엄마 아빠는 맞벌이해서 뒷돈 대주고, 이게 옛날에는 중학교 때부터 그랬는데 지금은 초등학교부터, 더 나아가서 유치원 애들도 뭐를 하느냐 하면, 스마트 폰 들고 3~4살 애들이 게임을 거기서 한다니까요. 그만큼 살기가 굉장히 심하고 빡빡해졌다니까요.

그런데 그 원인을 아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왜 원인이 없느냐 하면, 이런 말이 어렵다. 인간 자체가 결과물입니다. 인간 자체가 시대의 결과물이고 시대상의 흔적이기 때문에 원인이 있으니까 믿는 사람이 바보라니까요. 따라가야 되지, 따라가는데 급급해야 되지, ‘원인을 따져서 개선을 해보자’ 이러는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낙후된 사람입니다. 사업할 때도 마찬가지잖아요. 옛날에는 사업을 비겁하게 안 했는데, 그건 옛날이야기잖아요. 지금 비겁 하냐 따질 문제가 아니고 지금 살아남아야 돼요. 어쨌든 간에 살아남아야 될 거 아닙니까? 경쟁 시대에 시대상을 따라가야 될 게 아닙니까?

그래서 애들한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 엄마가  잘못 이예요. 그런 것 안 묻습니다. 양적으로 공부 잘했나, 몇 등 했나 그거 묻지, 영어 단어 몇 개 외웠나 묻지, 영어 못하면 안 되지, ‘너 이거 모르면 거지 돼,’ ‘거지 되면 어떤데?’ 그 다음은 엄마가 화나죠.‘ ‘거지 되면 나 죽는다.’ ‘너 키우려고 이렇게 고생하는데 엄마 마음 못 알아주느냐,’ 이래 나오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돌진해서 공격하는 그 마인드, 그게 황 충이죠. 그럼 메뚜기를 말로 사용해서 전쟁에 나가게 하는 있을 게 아닙니까? 그 두목이 누구죠? 11절에 봅시다.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저희에게 뭐가 있다 했습니까? 임금이 있느니. 특이하게도 메뚜기를 진두지휘하는 왕! 왕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름이 나오는 것은 묵시적 이름 이예요. 묵시적 이름은 항상 무엇과 대비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라는 어린양 되신 그 이름과 대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요한계시록 해석이 어려운데, 온 우주는 예수님 십자가 지셔서 예수님이 온 우주의 ‘주’가 되셨죠. 주 예수님 됐죠? 우리 같으면 믿는 사람이 ‘주 예수님, 구원 감사합니다.’ 이러면 이야기가 끝난 게 되잖아요. 이것은 우리 구원이 예수님의 일하신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이용된 거예요. 우리는 무슨 쪽으로? 구원 되는 쪽으로 이용된 것이고, 저쪽은 구원이 안 되야 되는 쪽으로 이용된 거예요.

예수님의 주되심은, ‘주’라 하는 것은 구약의 뭐냐, 여호와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여호와는 뭐하십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예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세계를 선과 악, 그러니까 죄와 벌, 이것을 어떻게 구별하고 구분 짓고 심판하고 한쪽은 영광스럽게 천국의 복락과 축복과 저주를 주느냐, 그걸 모두 관여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나온 언약이 기준 되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가 갈라지게 돼 있어요.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 받는다” 구약에 노아의 같은 아들인데 같이 방주 구원 받아놓고 함과 가나안은 저주를 받고 셈과 야벳은 복 받죠. 그러면 하나님의 일, 기능은 뭐예요? 그렇게 축복과 저주를 갈라놓는 그분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때, 주되심의 기능 이예요.

우리 피조물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하여 존재하지, 우리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뻔뻔스럽게 이야기하죠. 삭개오가 하는 말이 ‘나같은 키 작은 인간도 주께서 우리 집에 구원을 들여놓으셨다.’라는 고백처럼, 나 같은 키 작은 삭개오라면 나 같은 당뇨 걸린 너, 나 같은 간질병 걸린 너, 다 마찬가지예요. 오직 구원은 어디서 온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이 말은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겁니다. ‘주께서 찾아오지 아니하면 절대로 구원이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라는 걸 같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작업이 일어나서 주님의 심판, 심판이니까 심판은 누굴 겨냥합니까? 죄를 겨냥하죠. 죄를 겨냥하기 위해서 심판을 행사해야 될 그러한 천사를 부르는데 천사의 이름인데 그게 황충의 임금인데 이름이 아바돈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파괴, 그 다음에 아볼루온은 헬라 음인데 같은 의미로 파괴자, 아주 작살을 내는 거죠.

그러니까 요엘서에서는 누가 작살냅니까? 메뚜기가 완전히 사람 먹을 것을 다 뜯어먹죠. 그런데 이 묵시적 이름인 파괴, 파괴자라는 것은 바로 안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살리신다.’라는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는 그 환상을 깨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름 자체가 파괴자예요. 직접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나중에 보면 사람을 3분의 1을 죽여 버리는 역할을 해요. 사람을 3분의 1을 죽인다는 말은 몇 분의 몇이 남아있다는 말입니까? 3분의 2가 남아있죠. 그러면 둘 중에 누가 더 슬프겠어요? 죽은 사람이 슬프겠어요? 살아있는 사람이 슬프겠어요? 산 사람이 슬프죠. 죽으면 그만이죠.

집에 자식이 9명 있는데 3명 죽으면 6명 애들이 슬프죠.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사실은 먼저 죽은 3분의 1이 모델이 되어서 너도 똑같이 마찬가지로 파괴자야, 다시 쉽게 말해서 파괴자가 된다는 말은 ‘나는 마땅히 지상에서 잘 살아야 돼,’라고 생각하는 이 모든 오해를 부숴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은 지금 뭡니까? 종말 이예요. 그리고 나는 뭐예요? 나는 ()()다. 가 우리 인간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살려주면 사는 거고, 살려주면 사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일용할 양식이겠습니까?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 이 말이죠. 오늘 밤으로서 니 생명이 다음으로 연기 될지 안 될지는 누구 손에 달렸다? 하나님 손에 달린 겁니다. 오늘 밤에 니 영혼 데려가면 소유가 누구 것이 되겠느냐 했잖아요. 꼭 성경에 없는 소리 하는 것처럼 돼서...ㅎ 성경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학교나 가정에서 교육 받기를 ‘딴 집은 다 망하고 죽어도 나는 오래 살 거야’라는 그런 선입관이 아예 우리에게 철저하게 세뇌시켰어요. 내가 나에게 세뇌시킨 겁니다. ‘딴 사람은 다쳐도 내 몸은 다치면 안 돼, 일본에 지진이 나도 한국은 안 돼, 일본에 방사능 아주 갖다 붜도 한국은 세슘이나 요오드가 날아오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다른 교회 부흥 안 돼도 우리교회는 부흥돼야 되고, 다른 집에 밥 못 먹어도 나는 밥 먹어야 되고, 라면 사재기하고 설탕 사재기하고, 그게 바로 귀신에게 들린 귀신에게 그동안 배웠던 교육 효과입니다.

무조건 ’나는 살아야 돼, 나는 다치지 않아야 돼,‘하는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나팔을 불어서 우리를, 성도는 아니죠, 성도 아닌 사람을 성도 아닌 사람이 자기밖에 모르니까 괴롭히고 죽이고 하는 사건들을 주위 옆 사람을 끼워 놓는 겁니다.) 실제로 죽고 한마디로 사는 것이 힘든데 힘든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이게 뭐냐, 공격적인 전쟁에 돌입된 겁니다. 누구를 상대로? 소위 나는 인간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인간, 이 집단과, 하나님이 보내서 사용하는 파괴자라는 천사가 부리는 영적인 것과의 대 전쟁이 돌입된 것은 이미 창세기부터 시작됐다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시작된 것이 어디 있느냐? 14절에 봅시다.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된 천사, 이건 마치 개 키우는데 세파트 키우는 집에 자기 빚 받으러 오는 집에 빚 받으러 빚쟁이가 오니까 ’어이, 세파트, 왔다. 왔다. 왔다. 세파트 놔 줘라.‘ 세파트 묶인 것을 놓아주니까 빚쟁이가 빚 받으로 왔다가 어떻게 됩니까? 4마리 세파트가 왕하고 물려고 달려들겠죠. 평소에 무슨 뜻입니까? 평소에 개 주인은 얼마나 빚쟁이를 싫어하고 항상 적대시하고 있다는 자기 의사를 표현한 거죠.

그러니까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동안 묶고 안 풀어놓은 거예요. 이 시기가 언제냐? 이 시기는 또 설명을 안 해도 되죠? 이 시기는 요한계시록 자체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를 묵시적으로 도드라지는 것, 발진 되듯이 다 벌겋게 튀어나오듯이 다 모이는 거예요. 어느 시점 없이 다 이루어가는 겁니다. 창세기 2장 보면 에덴동산에 강이 있는데 4번째 강이 유브라데 강 이예요. 에덴동산에 있는 강줄기에 그 강 이름을 여기다 거론한 것은 바로 그 천사는 창세기부터 주께서 부릴 수 있는 그때에 사용하기 위해서 세파트처럼 양성된, 훈련된 거예요. ‘물어, 물어, 물어,’하면 무는 거예요. 물게 되면 그 4마리(천사를 4마리라 하면 뭐하지만)의 천사는 뭘 하느냐 하면, 전쟁을 예비하여 있는데 16절에 봅시다. 마병대의 수가 이만만이죠. 이만만이니까 10000✖10000은 뭡니까? 1억이 되죠. 이것은 억수로 많은 거죠. 숫자를 셀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걸 해석하기를 뭐냐,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 말 맞아요. 근데 이스라엘 역사만의 전쟁은 아니고 모든 인간들의 전쟁을 말합니다.

모든 인간들의 전쟁에서는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이기게 돼 있습니까? 군사의 수가 많은 쪽이 승리하고 숫자가 적은 쪽이 지게 돼 있죠. 단지 특이점, 이스라엘 전쟁에서는 어떻습니까?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또는 여호사밧 왕이 찬송 불러서 이긴 것처럼(브라가 골짜기), 또 여리고 성 무너질 때, 언약궤 들고 돌면서 나팔 부니까 무너지는 것처럼, 그런 이스라엘 언약적인 특이성을 빼놓고 모든 전쟁은 숫자 전쟁입니다.

인간의 힘, 그들 힘에 익숙해 졌던 인간 세계에서 같은 인간의 숫자 가지고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포를 주는 똑같은 방식으로 유브라데의 세파트 같은 천사가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거죠. 이것은 바로 인류에 나타난 인간 대 인간, 동족 대 동족의 전쟁을 의미하는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전쟁, 그 전쟁은 결국은 사람들이 외부에서 보면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이지만,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어이, 물어, 물어,‘ 하고 뒤에서 부추긴 전쟁입니다. 왜? 이 세상은 살 곳이 못 된다.

여러분들이 문학책 보면, 그 문학책을 보고 드라마를 볼 때, 가장 비극적인 드라마는 전부 다 전쟁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쟁이 뭐냐, 기존의 자기가 닦아왔던 모든 투자했던 모든 자존심을 끌었던 그것이 전쟁이라는 이유 때문에 한꺼번?다 날아가 버리죠.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보다 뭘 원하느냐, 평화를 원하죠. 사사기 같은 경우에 사람들이 말을 안 듣다가 이스라엘이 언제 말 듣던가요? 전쟁에서 질 때, 그때서 뭐라 합니까? ‘여호와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죠. 그러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도들이 언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합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칼, 총, 무슨 전쟁입니까? 쩐의 전쟁, 돈 전쟁 아닙니까? 돈 전쟁에서는 집안에 은행 잔고가 다 바닥날 때, 그때 뭡니까?  ’주여, 애가 밥을 못 먹습니다. 공납금이 없습니다.‘ 그때 기도하는 거예요. 노량진 근처 교회가 부흥 잘 되는 이유가 지금 취직이 잘 안 돼서 그래요. 취직이 잘 돼 보세요. 교회 안 나옵니다. 군에 갔을 때 초코파이 먹으려고 엉터리 세례 다 받습니다. 그만큼 의지할 데가 없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결국 인간은 누구만 위해서? 인간은 자기만 위해서, 왜 남은 아니니까. 왜 나라는 말은 항상 자기가 이겨야, 안 져본 적이 없어요. 꼭 ’나는 나다, 예요.

심지어 하늘에서 비가와도 영어에서는 ‘It is raining.'하죠. 뭡니까? 앞에 그것이라고 주어가 붙죠. 그것이라고 붙이는 것처럼, 항상 인간은 ’믿는다, 내가 믿는다, 잘한다, 내가 잘한다. 꼭 자기를 집어넣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언약은 이 자리에 뭘 집어넣습니까? ‘나는 나다, 자리에 누구를 집어넣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육만 대군을 내 앞에 등장했다 우리가 할 것은 찬송하면 된다. 이겼잖아요.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보냈다, 우리가 할 것은 주의 이름으로 나가면 된다. 이겼잖아요. 이스라엘은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이기 때문에 승리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종합적으로 보면, 여기 이스라엘이 승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뭐가 튀어나오느냐 하면, 순교자가 있었어요. 희생타가 있었어요. 이 점만 모아 모아서 이게 천국이 되는 겁니다.

모세, 예레미야 이사야, 이사야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이사야 전설에 의하면 톱에 켜서 죽었다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어떤 사람은 톱에 켜서 죽었다는 사람 있죠. 유대인은 그를 이사야로 보는 거예요. 아모스, 미가, 12제자들, 전부 다 순교한 사람이잖아요. 세상 적으로 거기서 제외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비참하게 죽었어요. 특히 스데반 집사 같은 사람은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이건 무슨 승리자인가 하면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가지고 주님의 승리를 보여주는 데 철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라 고백하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에 돈의 전쟁이라면, 사도바울이 한 5백억 가지고 간 뒤에 ‘주여, 이렇게 5백억 된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라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주께서 5백억 줘놓고 그 다음날에 뺏어 가면, ‘왜 이러십니까? 주여, 왜 이렇게 하십니까?’ 라고 벌벌 떨 거예요. 바로 고런 인간들, 줬으면 그냥 주시면 되지, 내 소유지, 왜 가져가십니까. 하는 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 세상적인 전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누가 이기는가? 적이 이기는 것이 아니고 전쟁이죠. 요 말이 의미 있어요. 전쟁을 하잖아요. 그러면 최후의 승리자가 누군지 알아요? ‘전쟁했음‘이 승리자가 돼 버리고, 이긴 자든 패배자든 전부 다 패배자예요. 그래서 제발 전쟁하지 말라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전쟁하면 전쟁 자체가 승리자고 승리자든 패배자든 다 박살나요. 승리했다고 히히덕거리는 그런 시도는 아니에요. 전부 다 상처받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고린도전서에서 제발 성도가 돼서 사기 당했거든 사기 당하고 고소하지 마라, 그러면 누가 승리해요? 마귀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자입니까? 고소해서 이겨도 패배자요. 고소당해서 패배자요. 이상하게 세상에서는 인간은 항상 패배자예요. 살아온 것 자체가 패배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 산 것 자체가 패배자입니다.

요새 딸 가진 부모는 고민입니다. 시집을 안 가요. 그럴 때 누구 나이 적은 후배가 시집 한번 가 보세요. 나이 많은 노처녀가 직장 생활 할 때 스트레스가 대단합니다. 지가 건방지게 뭔데 내 이상형 타입인데 내 후배하고 하느냐, 내 타입인데, 왜 내 후배하고 결혼하느냐, 뿔따구 나서 하는 거예요. 특히 자매간에도 그래요. 지 타입인데 남자가 자기 언니하고 해 보세요. 언니가 미워서 죽습니다. 신데렐라 따로 없어요. 콩쥐팥쥐가 따로 없습니다. 그게 다 어디서 나온 이야깁니까? 전쟁 이야기예요. 전쟁이라 하니까 국가 간의 전쟁인 줄 압니까? 자매간 전쟁이고 형제간 전쟁 이예요. 아버지 죽고 유산 한번 분배해 보세요. 며느리 간 전쟁하지, 아들끼리 전쟁하지, 니 죽고 나 죽자 전쟁을 벌입니다. 그 모든 전쟁을 통해서 인간은 처음부터 전혀 영적이 아니고 육적인 것을 들춰내는 작업을 요한계시록 스줄?나와 있는 거예요. 내가 이런 스케줄로 해서 너희들은 전쟁의 희생물이요. 저희끼리 붙이는데, 어렸을 때 둘이 부딪히게 해서 꽈당 하잖아요. 둘이 헤딩시키는 장난 끼, 그 장난 끼를 파괴자, 바로 천사가 한다는 이야깁니다. 모든 것에 걸쳐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 부부사이에 다정하게 사는 방법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 오직 한쪽이 죽었다~~ 하고 살면 돼요. 어느 한쪽이 남자가 해야 하는데 죽었다~~하고 살면 되는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랬잖아요. 아내가 아들만 사랑하니까 남편이 아들 되면 돼요. 옛날에 여자들이 고추가 맵다 해도 3년 동안 죽었다 했듯이 요즘은 남자들이 결혼하면 죽었다 치고 잔소리도 하지 말고, 예~~~. 예~~하면 애들이 ‘우리 엄마, 아빠는 사이가 너무 좋아.’ 애들 교육을 위해서도 한쪽이 찌그러져줘야 해요. 칼빈에 의하면 누가 찌그러지는가? 남자, 여자 그런 것이 아니고, 남성상이 지배하고 여성상이 지배받는다 했어요. 여자는 여성상이고 여자라도 남성 같은 성정이 있는 사람이 있고, 남자라도 여자 같은 성정이 있는 게 있는 사람이 있는데, 여자 같은 성정은 찌그러진 것처럼 가만히 있는 거예요. 남자 같은 여자는 밖에서 돈도 잘 벌고, 돈 못 벌면 가만히 있는 게 낫죠.

자본주의 사회서 돈 버는 게 최고죠. 전쟁 이예요. 전쟁!! 쩐 전쟁, 돈 버는 사람이 승리자고 못 벌면 패배자죠. 간단한 문제예요. 그 전쟁이 계속 됩니다. 18절에 보면, 사자같이 입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죠. 불과 연기와 유황이라는 것은 이 지상에서 인간들의 삶의 구조에서 제외되는 요소예요. 이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지옥 가서나 경험해야 될 것을 이미 지상에서 경험한다는 것은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사는 것 자체가 문제예요. 사는 것 자체가!!  죽으면 되잖아요. 죽지 못하고 안 죽는다니까요. 안 죽으니까 문제 아닙니까. 자식 애 먹여 보세요. 저거 나가서 안 죽나, 특히 침해 걸린 시어머니, 시아버지, 어디 비행기 타다 보상금 타게 하지, 버스 타다 영천 골짜기 떨어져서 보상금 타게 하지, 평생 똥 싸고 오줌 싸니 침해 걸려 안 죽나, 백날 안 죽어요. 왜? 안 죽어야 자기가 실컷 고생을 당해야 되죠. 그리고 이 고생이라 하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게 아니고, 나는 절대로 남한테 지기 싫다는 전쟁 본능, 남한테 이겨야 된다는 전쟁 본능 때문에 더욱 더 천사가 ‘요거 손 봐야 되겠다.’ 더욱 더 잘해줘요. 특히 유 집사님 같은 경우에는 지금 처지가 찌그러져야 될 처지예요.ㅎ 옛날 과거 생각만 하고 이러면 안 됩니다. 집 명의 아내한테 넘어가면 끝났어요.ㅎ 집 쫓겨나면 갈 데 없어요.

불과 연기 유황은 지옥에서 나온 거예요. 지옥이란 것은 뭐냐 하면 지옥 가서 지옥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미 지옥은 시작이 된 겁니다. ‘어디 감히 니 주제 파악도 안 되고 죄인인 주제에 어디 이 땅에서 출세하려고 해, 신나게 지옥 한번 맛 봐라,‘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지옥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강의 하면서 말씀 전하면서 느낀 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져도 되고 패배해도 되는데 이상하게 사람의 이 성질 때문에 참으면 되는데, 성질나면 성질부리다보니 나중에 수습이 안 돼요. 그냥 안 깨지는 것 휴지 있으면 던지면 되는데, 공연히 TV 깨서 20만원 나가고 왜 그렇게 객기를 부립니까? 이걸 광기, 그 광기가 인간의 본능 이예요. 개도 밥 먹을 때 건드리면 물잖아요. 애도 물어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안에 귀신같은 광기가 다 포함돼 있어요. 순한 애도 때리면 꿈틀해요. 부모가 초등학교 애를 귀때기 때려보세요. 그 애 상처 입어서 공부 안 합니다. 그 애가 누구냐 하면 김 태원 이예요. 부활의 멤버, 그래서 공부 안 하고 기타만 치고.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인간 맘대로 놔두지 않는 세상, 여기 9장의 주제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20절에 나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형제가 3분의 1이 죽고 살아남은 자는 괴롭고 한 그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디에 가서 전에 자기가 믿었던 그 신, 그 신은 무슨 신입니까? 인간이 믿는 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신은 허수아비예요. 신을 믿는 것은 내가 신이라는 뜻 이예요. ‘내가 이 땅에 신처럼 만들어 봐라 말이야, 그러면 헌금할게, 내가 신이 되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도 있고 신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령도 있는데, 왜 하나님은 내 요령과 내 뜻을 비는 대로 안 해주는 거야,  헌금도 했었고 충성도 했는데  내 작은 소망도 안 들어주는 거야?’ 이래 나오죠. 결국 우상이라 하는 것은 예수 믿어도 우상이요, 하나님 믿어도 우상이요. 뭐냐 하면 내가 신이 돼야 된다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종교 행위도 그건 우상 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금식 이야기가 나옵니다. 금식 할 때 중요한 단어가 튀어나오는데,  은밀한 곳에서, 두 번 나와요. 금컸?때 금식한다고 티내지 마라, 은밀한 분이 보고 계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야기 끝난 거예요. 인간은 뭡니까? 자기 일을 자기가 생각하기 위해 하는 겁니까? 은밀한 분이 우리와 관련돼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 살아가는 겁니까? 바로 금식하고 기도하고 뭘 해도 이 사실을 떠나버리면 자기가 신을 빼앗아 버려요. 그런데 은밀한 의미가 뭐냐, 다른 사람이 너를 볼 때 보는 판단과 거꾸로 가면 돼요. ‘아이구, 김 집사님 금식하시네요.’ 할 때 어떻게 하라? ‘금식 한 적 없는데요.’ 하고 머리에 기름 발라라. 이게 뭡니까? ‘나, 니하고 안 놀아,’란 뜻 이예요.

나의 주인은 은밀한 분이지, 나는 남들 눈치보고 남들 시선 따라가는 그런 인간의 가지, 인간 대 인간의 전쟁에 끼어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걸 오늘날 교회 적용시켜 버리면 교회에 반란이 일어나죠. 누가 누구에게 의미를 두는 게 아니라 주님 앞에 자기를 세우는 거죠. 십자가 앞에서!! ‘주여, 나는 왜 삽니까?’ ‘내가 연약했어도 나는 부활했다.’ ‘져라’ ‘아! 성질나는데요.’ ‘니 성질 나, 그러면 아볼루온 보내줘? 황충 보내줘?’ ‘아니요.’ ‘알아서 해. 마음을 낮춰. 오늘밤 니 영혼 데려가. 내일? 내일은 생각하지 마, 오늘밤 니 영혼 데려가면 뉘 것이 되겠느냐? ’ 항상 은밀하게 하시는 분이 은밀하게 일하심과 맞닿는 것, 그게 늘 주고받고 교제가 되는 것, 이런 사람에게는 세상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걱정이 없습니다. 두려운 게 없죠.

이런 사람을 성경에서는 4절에 보면,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박힌 사람, 이런 사람한테는 세상의 돈의 전쟁, 그 사람한테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는 그만큼 살아온 것도 이것은 덤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나는 승리자가 돼야 된다는 생각은 안 가질 거라 말이죠. 조금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그 다음 20절을 봅시다.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이래 돼 있죠? 설명하겠습니다. 금 은 동 목석은 말을 합니까? 말을 안 합니까? 말을 안 한다고 돼 있죠? 그러면 말을 하지 못하는 금 은 동 나무, 이것을 섬기면서도 종교가 된다는 것은 누가 말하고 누가 섬긴다는 말입니까? 바로 섬기는 본인이 신이에요. 자기가 신이라는 것은 신을 자기가 만드는 겁니다. ‘예수여~, 예수여~’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도 만들어 내는데 예수는 못 만들어내요?

SBS에서 무슨 방송 했습니까? 길 자연 목사 한 기총 비리를 파헤쳐서 방송했죠? 지난 금요일인가 했는데 본 적 있습니까? 못 봤어요? 길 자연 목사 나오고 왕성 교회 나오고 돈 봉투, 콘도에서 하는 활동 나왔잖아요. 이 사람들이 이렇게 교회가 돈을 밝히는 것이 다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런 목사를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목사는 허깨비 예요. 바로 목사 자신을 위해서 돈 주는 인간은 없어요. 목사는 주의 종이라 하니까 목사는 돈이 밑천이 되어서 결국 30배, 60배, 100배가 되어서 누구한테 돌아온다? 돈 준 누구한테 와요? 돈 준 나한테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투자해서 내가 받는 거예요. 중간에 믿음으로 바치면 복 받는다 하니까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악착같이 아무지게 마음먹고 믿음과 기도로 믿음이 없다고 금식까지 해가면서 기적을 보고 싶어서, 기적이 뭐예요? ‘내가 신이 되고 싶은데, 드디어 신이 되었구나,‘이 기적 말고 다른 기적 사람들이 애초부터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집사님, 갑자기 20대로 변해 보세요. 기적이라 하죠. 예수님, 하나님의 기적은 인간이 생각하는 기적을 피해가서 주신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서양 독일 동화에 보면 나와요. 보석, 금반지 목걸이 황금,... 이런 것만 차고 있던 어떤 귀족 부인이 남편이 무역을 하는데 인도에 갔다가 배가 홀랑 뒤집어져서 거지가 되었어요. 그 전에 거지 될 줄을 몰랐죠. 늘 잘 나갈 줄 알았죠. 어떤 사람이 밀가루를 선물했는데 ‘이따위 밀가루를 뭣에 써. ’ 하면서 버리라 해서 바닷가에 버렸어요. 나중에 거지 되고 난 뒤에 돌아다니다가 보니까 밀이 보이는 거예요. ‘어이, 이 밀을 누가 이렇게 자라게 했나?’ 하니까 ‘귀족 부인이 버렸잖아요.’ 그때부터 내가 버린 것이 귀한 것을 버린 것이라는 것을 알았죠.

그러니까 그게 바로 주께서 피해서 우리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머리 확 돌려서 ‘봐!! ’ 하고 보여주는 기적은 우리가 ‘이건 뭐야’ 하고 쓰레기처럼 버린 것이 귀한 보석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애 공부 안 한다고 그렇게 나무라다가 애 아파서 입원해 보세요. 엄마가 뒤집어지죠. ‘얘야, 공부고 뭐고 건강만 해라.’ 그 다음부터는 건강이 얼마나 귀한지 알죠. 돌아서면 마찬가지예요.

그렇지만 지금 미리 사람들이 어떤 보이지 않는 것을 주워 모은募?것은 누굴 향하여? ‘나는 나다.’ 내 자체가 내 안에 귀신 들었어요. 인간은 귀신 이예요. 내 안에 있는 악마가 ‘지금의 것을 자꾸 이렇게 끌어 모아야 너는 신이 될 수 있어.’ 마치 선악과 따먹으면 뭐가 된다? 너는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그 똑같은 멘트, 요한계시록에도 악마가 똑같은 멘트를 합니다. ‘목사야, 이러면 부흥될 수 있어. 목사야, 이러면 큰 교회 당회장 될 수 있어.’ 똑같은 모습 이예요. 지금 모든 개척교회 목사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집사님도 마찬가지고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남편 만날 수 있다. 명 짧은 만나 부자 될 수 있습니다.'ㅎ 이게 늘 찾아오는데 몸이 썩어빠져서 그래요. 그런데 그때마다 누가 개입을 한다? 베드로를 악마가 청구해도, 악마는 꼭 같아요. ’ 베드로야, 이러면 취직할 수 있다.‘이럴 때 예수님께서 기도해서 ’베드로는 이미 끝까지 사랑하기로 했다.‘ 해서 베드로는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해서 순교의 길로 가게 해서 이런 베드로도 기어이 구원 받았다는 승리자, 오직 예수님만 승리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용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에서 자존심을 상해가면서 안 지려고 아등바등 애썼는지, 하지만 그것까지 괴롭히는 것이 다 주의 뜻인지 알았습니다. 이제 주의 뜻을 알았사오니 우리가 낙관하면서 작은 것에서 은혜와 큰 감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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