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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3 02:09:10 조회 : 3478         
요한계시록 13강 110421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 1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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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39.20) 11-04-28 15:25 
가락교회110421요한계시록10장-(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13강a-(이 근호 목사)
제 13강a

요한계시록 10장을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이렇게 보게 되면 상당히 비현실적인 내용이 나와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은 이걸 비현실로 보지 않고 현실로 봅니다. 그러면 이것을 현실로 본다면, 평소에 당신이 직장 다니고 당신이 평소에 가정을 꾸리는 것은 뭐가 되느냐? 환상이냐? 둘 다 만약에 현실이라면 둘 사이에 모순이 없어야 되고 충돌이 없어야 되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현실이라면, 만약에 우리의 일상도 현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의 현실이 일상 속의 현실 속에 어떻게 중간, 중간 틈새에 끼어드느냐는 그런 문제가 남겠죠.

이 성경책을 옛날 동화책이라 덮어버리면 남는 것은 일상적인 우리의 생활만 남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것을 철학에서는 ‘고름 판’이라 하죠. 고름 판이라 하는 것은 평평한 판, 고름 판은 성질이 ‘동일성’을 갖고 있어요. 동일성이라 하는 것은 이것이 나의 세계, 나의 영역이라면, 만약에 이것이 내 방이라면, 저기 있는 책꽂이에 있는 책 한권도 내가 어느 서점에서 샀고, 여기 있는 야구공도 내가 샀고, 이 범위 안에서는 어느 것도 내 관할 하에 있죠. 그렇다면 이 사각형 안에 있는 전부 다 내가 관여한다는 점에서 동일성, 다른 말로 하면 평평한 판, 고름 판, 판이 고르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고를까요? 안 고를까요?

실제로 예를 들게요. 이건 중요한 것이어서 예를 듭니다. 자, 여기에 엄마가 있어요. 엄마에게 3형제가 있다 합시다. 방이 4개, 엄마 아빠 방, 큰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 엄마 입장에서 자기 방에 먼저 들어가는 엄마는 없죠. 엄마는 동화에도 나오잖아요. 엄마는 밖에 나갔다가도 새끼 양을 잡아가는 늑대 이야기처럼 제일먼저 제일 어린 애부터 챙기죠. 학교 잘 갔다 왔나? 3번, 둘째는 아직 학교에서 안 왔어? 2번, ‘첫 번째는 직장 갔다 왔어?‘ 하고 나서야 자기 방에 가서 옷 갈아입죠. 그러면 첫째, 둘째 셋째 아들은 뭡니까? 엄마 보기에 뭐가 되죠? 고름 판이 되죠. 전부 다 자기 관할 하에 있다 말이죠. 지금 4명이 하숙생활 하는 게 아니죠. 하숙생활 하는 거라면 이 사람들이 어디 가서 사고 나면, ’나하고 무슨 상관  있느냐?‘ 하죠. 하지만 엄마 옆에서는 전부 다 고름 판이고 엄마에게는 동일성이죠.

그런데 두 번째 애가 장가를 가는데, 엄마가 원하는 아가씨는 거부하고 자기가 마음대로 연애해서 ‘엄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이래 돼 버리면 엄마는 여기서 싱글싱글 웃습니까? 어떻게 됩니까? 충격을 받죠. 왜 충격을 받습니까? 그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애들이 자기 고름 판, 자기 관할 하에 있잖아요. 관할 하에 있는데 엄마의 일방적인 생각이었고, 두 번째가 반란 아닌 반란을 일으켜서 엄마가 ‘언제부터 내 허락이 없이 사귀었어?’ 이러면 ‘내가 다 컸는데 왜 엄마 허락을 왜 받아?’ 이런다 말이죠. 그렇잖아요. 저 집사님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남의 사정을 모르니 그냥 예를 들어본 겁니다. 이렇게 됐을 때에 엄마가 일방적으로 자기 동일성, 자식은 내 말대로 할 때 나는 자식한테 어떤 사는 보람을 느낀다.‘ 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죠.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이 고름 판은 그야말로 억지가 많은 겁니다. 그래서 잠시 여기까지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 세상을 자기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해석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각자, 각자 자기 생각대로 전부 다 따로 있다는 겁니다. 다 따로 있죠. 그래서 두 번째 아들이 삐져서 둘이 살러 가버렸다. 동생이 결혼도 안 했는데 가버리니까 엄마는 사흘이 되도 울고 있고 이렇게 할 때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홈이 파였다.’ 판판한 판에 드릭 하고 드릴로 뚫으면 홈이 파이죠. 홈이 파이면서 궐이 생기고 고?판이 아니고 울퉁불퉁한 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이 대학에 또 떨어졌네, 이게 엄마 기대에 삼수 하는 판, 첫째 아들은 또 사표 냈다고 할 때, 이렇게 될 때 엄마는 ‘내가 평생 동안 뭣 땜에 살아가나?’ 하죠. 엄마는 엄마 본인만 생각하면 되는데, 왜 쓸데없이 자기 가정의 영역을 자기 뜻대로 돼야 된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기대가 크니까 뭐가 오죠? 실망이 크죠. 바로 홈이 파인다 할 때 엄마가 취할 시도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집에 나간 자식 집에 다시 돌아오고, 사표 취소하고 다시 공부 잘 해서 지가 원하는 대학 가고 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자기의 목표가 달할 때까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엄마 세계가 일단 중지가 돼야 됩니다. 만약에 중지를 안 시켜 버리면 이 애들하고는 원수지간이 돼요. ‘니 호적에서 판다. 내 자식 아니다. 이렇게 독하게 애 먹이는 자식은 처음 본다.’ 엄마가 남의 자식 다 연구했는지는 모르지만..... 맨 날 하는 소리가 ‘이렇게 말 안 듣는 자식은 처음 본다. 우리 형제간에는 너 같은 자식 있나 봐라’ 다른 자식도 마찬가진데..ㅎ 하지만 그 말은 엄마 자식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일단 기다리는 거, 중지하는 거죠.

요한계시록에서 이 세상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인간들끼리만 고름 판을 형성하는 겁니다. 인간들끼리 의견을 모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걸 우선 물어봅시다. 만약에 어떤 마을에 100명이 산다면, 100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의견을 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내지를 못합니다. 다만 각자, 각자 맘에 안 들 때는 일시적으로 중지를 시키죠. ‘이번에 대통령 맘에 안 들지만 다음 차기에 보자.’ 자기 양보, 정치적으로 일단 중지를 시키죠. 그래도 사람의 역사라 하는 것은 사람의 노동과 사람의 지혜와 의지로서 앞으로 점점 더 쭉~쭉~쭉~쭉 은하철도999처럼 전진해 나간다는 그 역사에 요한계시록 10장은 하나님의 계시는, 요한계시록은 거기에다 홈을 파버리죠. 쫙 갈아엎어버리죠. 그럴 때 주변에 있는 것은 일단 뭘 해야 하는가, 우리의 생각은 중지가 돼야 되는 겁니다. 현실 속에 다른 현실이 와 버리죠.

거기에 대한 증거를 보겠습니다. 10장 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네 입에는 꿀 같이 달고 네 배에는 쓰다.‘ 리 돼 있죠? 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나, 여기 내가 있다면, 우리는 뭘 원하느냐 하면, 내 입에도 달고 내 뱃속에도 달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평소에 기대했던 나만의 고름 판이고 나만의 동질성 속에 세상 보기입니다. ’세상은 나에게 불리하면 안 돼. 항상 세상은 나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거야.‘ ’전개 되었으면 좋겠다.‘ 를 되풀이하면 전개 될 거야, 그 다음에 한 자 더하면, ’암, 그렇게 되고 말거야.‘

이걸 가지고 희망이라 하고, 다른 말로 영어로 하면 비전이라 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소망이라 해요. 비전,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는 말이 있잖아요. 희망과 비전과 소망은 달성이 될까요? 달성이 안 될까요? 달성이 되면 큰일 납니다. 달성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살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희망은 계속 연기해야 됩니다. 계속 내용을 찾아서 연기해서 사람은 희망 없이는 도저히 살 수가 없게 돼 있어요. 이것은 희망으로 살지만 다른 말로 하면 미흡의 힘으로 산다. 다른 말로 하면 결핍의 힘으로 산다. 지금의 ‘나’가 있고 내가 기대하는 ‘나’가 있다면 요 사이가 뭡니까? 사이는 항상 결핍된 거예요.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계속 가면 아무리 따라 잡아도 잡히지 않아야 되는 겁니다. 만약에 잡히면, 그것은 자기 목적하는 것이 잡히면 그건 가짜라는 겁니다. ‘원래 내가 기대했던 희망은 아니야,’ 잡히는 순간 대번 부인해 버려요.

사랑하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해서 항상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투자를 하더라도 기어이 저 여자를 ‘내 여자로 만들어서 결혼하고 말거야,’ 해서 결혼에 성공했다고 합시다. 성공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끝났습니까? 아니죠. 뭐라고 다그칩니까? 막상 결혼하고 보니까 내가 연애할 때 생각했던 그 여인상은 현재 ‘너는 미흡해,’ 라고 또 다시 숙제를 제공하죠. 그러면 여자는 뭐랍니까? ‘누구는 그런 말 못해서 그러느냐, 마찬가지거든. 당신도 마찬가지거든요.’ 이래 나오죠. 어쨌든 둘 다 희망을 계속해서 지연시키는 겁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라는 유명한 연극에도 있죠. 고도라는 사람이 계속 오지 않는 거예요. 안 와야 되는 거예요.

입에는 달고 속에는 쓰잖아요. 쓰다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는 쓰다는 것은 죄를 져서 벌 받는 걸로 계산을 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모든 어떤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그걸 뭐에다 집어넣느냐 하면, '이것은 분명히 나한테 고생이 오는 것은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것이 있을 것이다.‘ 신에 대한 거라든지, 부처에 대한 거라든지, 이웃, 부모, 뭔가 조상님께 잘못 했든지 분명히 내가 잘못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이런 벌이 왔기 때문에 빨리 이 재난을 해소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죠. 내가 지은 죄보다 더 많은 양의 뭘 한다? 여분의, 잉여라 하는데, 여분의 착한 일을 나중에라도 해서 땜질해 버리는 거예요. 여분의 착한 일, 그렇다면 나에게 벌 내리는 그 분이 일말의 양심이 있으면, ’아, 인간이 이렇게 잘못했더니만, 어허, 반성하더니만 전에는 나쁜 짓을 5개 했는데 지금 착한 일을 10개 했으니까 10-5=5 여분의 5개의 착한 일이 있으니까, 벌주려던 것 철회하고 이제부터는 축복, 축복이 연결되게 하자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연구해보면, 사람이 아무리 죄를 져도 순수한 악을 져지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었으면 죄인 줄 모르고 져야 하는데, 죄 진 줄 알고 죄를 짓기 때문에 이것이 죄라고 아는 것은 죌까요? 의로울까요? 의로움이죠. 아무리 나쁜 죄를 져도 의도적으로 나쁜 짓을 짓겠다는 자체가 바탕이 뭐로 돼 있습니까? 이것은 죄고, 이것은 의로운 것이라고 구분한다는 자체가 자기 한 구석에는 뭐가 있습니까?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무슨 안목이 남아 있다? 의로운 안목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져도 무슨 죄에 이르지 못한다? 순수 죄를 인간은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죄를 순수하게 지을 수가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성폭행을 하고, 사람을 50명을 죽여도 안 돼요. 스탈린 같은 경우는 50명만 죽였습니까? 1500만 명을 죽였는데, 신경쇠약에 걸렸잖아요. 히틀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히틀러는 600만 명 죽였는데, 아무리 해도 인간은 순수 죄를 짓지 못합니다. 진짜 죄를 짓지 못합니다. 순수한 죄를 짓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지을 죄가 남아있다는 뜻이잖아요. 자기가 지을 죄가 남아있다면 뭐가 문제냐 하면, 그 남아있는 죄가 뭔지를 모른다는 것은, 현재 내가 의인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뭡니까? 인간이 죄 짓는 것이 뭡니까? 순수한 도대체 내가 누구란 말인가? 자기 자신이 뭔 줄을 몰라서 답답해서 계속 죄도 져보고, 또는 반대로 착하다는 것도 해 보는데, 반대로 해 봅시다. 착한 일, 고아원도 방문하고, 심장도 떼 주고 착한 일을 이렇게 해 보면 그 순수한 착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 그 순간, 누가 착한 일 했습니까? 내가 착한 일 했으면 상대적으로 남들은 나보다 더 착한 사람 되잖아요. 그럼 그게 뭐예요? 내가 남보다 우열하다는 것이잖아요. 이것은 무슨 죄에 속해요? 이것은 교만한 죄에 속하잖아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기 돈이 한 2천만 원 떨어졌는데, 어떤 사람은 그냥 가져갔는데,  2천만 원을 가져다 경찰서에 줬다. 그래서 포상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본 유학생처럼 어떤 노인네 일본 사람이 술 먹고 엎어졌는데 자기가 내려가서 건지고 자기는 전봇대에 받히고 해서 다쳤다고 합시다. 그래서 상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 사람 속에‘나는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야 될까요? 무슨 생각을 해야 될까요? 우연히 돈이 떨어지는 것도 자기 의사가 아니었고 우연히 술 먹은 노인이 자기 앞에서 떨어지는 것을 가서 자기가 건져 냈다면, 결국은 자기는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얹은 것 밖에 안 되는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착하다. 의롭다. 의사다. 의로운 사람이다.‘라 해버리면, 나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닌데 주위에서 의로운 사람이라 하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이게 바로 짜증이 나는 거예요.

또 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화가라 그림을 그리는데 고생해서 6일 동안 그렸어요. 6일 동안 그린 신경 쓴 것 따지면 그림이 한 5천만 원 돼야 하는데, 경매시장에 내놓으니까 기껏 2천만 원 준다는 거예요. 그것도 아주 칭찬을 하면서, ‘야, 이거는 우리나라 화단에서 10년 만에 나오는 걸작입니다. 2천만 원 드리겠습니다.’ 그럼 자기 기대는 5천만 원이잖아요. 얼마 빠져요? 3천만 원 빠지잖아요. 그러니 그 사람이 세상에 대해서 실망하겠습니까? 사람이 공부 열심히 해서 성적 오를 때, 열심히 해서 성적이 나온 것을 보면 항상 어느 누구도 실망을 해요. 자기 열심히 한 것에 비하면 성적이 덜 올라요. 그런데 우연히 아는 문제가 나와서 해버리면 ‘너 공부 많이 했구나.’ 하면 그것도 자기한테 부담이 돼요. 공부 안 했거든요. 그런데 우연히 아는 게 나온 거죠.

그렇게 보면 한번 정리해 보면, 인생이란 선하고 악하다는 것도 다 뭔가 여건이 조성될 때나 하는 이야기지, 내가 선하고자 해도 주변 상황이 안 받쳐주면, 안 도와주면 결국 그냥 내 시도에 불과하죠. 그럴 때 나온 것이 뭐냐 하면, ‘누가 뭐래도 나는 착해.’ 남들처럼 실적은 없고 자기가 내놓을 것은 없으니까 화가 나서 기껏 하는 소리가 ‘나는 늘 착할 수 있어.’ 이래 이야기하죠.




방금 이야기한 이것이 우리 입에는 달고 그리고 입에 들어갈 때는 달아서 쉽게 순응했는데, 배에 들어갈 때는 뭡니까? 이거는 내 속에 다른 세계가 홈을 파죠. 완전히 뒤집어놓는 거예요.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0장의 전체적인 의미는 뭡니까? 다 차려진 밥상이, 아까 다 차려진 밥상이라 이야기했죠? 만약에 다 차려진 밥상이 아니고 다 차려놓은 작두라면, 나로 하여금 힘들게 하는 작두라면, 무당들이 신 내림받아서, 이건 병원에 가도 못 고치는 병, 나중에 굿하고 나니까 나은 병일 때, 그거는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죠.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본인이 원했던 길로 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죠. 바로 그 이야기를 요한계시록 10장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우리는 자기 동질성, 나 위주의 고름 판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적어도 변치 않아야 되고 우리 아버지는 지금보다 더 배나 벌어 와야 되고, 내 친구는 잘 돼야 되고 내 동생은 이렇게 공부를 잘해야 되고, 그것이 항상 고름 판처럼 이렇게 되고 하는 동질성, 이 가정은 ‘내 식대로 돼야 돼,’ 했다가 하나 둘 식구들 전부 다 뜻대로 안 될 때, 누가 이렇게 내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느냐 말이죠. 어제 산에서 멧돼지 내려온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다지고 다졌던 이 채소밭, 나의 소박한 이 인생 밭을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이걸 밟아서 엉망진창이 되었느냐 말이죠.

그럴 때 사람들은 교회 와서 하는 제일 큰 실수가 뭡니까? ‘하나님, 목사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다시 내가 원했던 나의 고름 판, 나의 기대치였던 나의 소망은 이루어질 것이다. 기도와 금식을 하면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그런 사기 농간. 그런데 그걸 사기라고 보지 않죠. 왜, 사기라 하지 않는가? 목사가 이야기한 것은 차마 내가 나보고 얘기 못 한걸 목사가 고맙게도 대신 이야기 해줘서 그걸 반갑게 내 뜻으로 받아들인 거죠. 그런데 그걸 목사를 거쳤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신의 계시,  ’신의 뜻‘이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하죠.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계시는 뭡니까? 계속해서 내 입에는 다나, 속에는 뒤집어놓는 것, 분명히 요거 먹을 때 요게 원인이 돼서 반드시 괜찮은 결과 나온다고 생각하고 딱 먹었는데, 나중에는 보니 이것이 나의 굴레가 되고 내가 덫에 빠진 헤어 나올 수 없는 덫에 빠진, 누굽니까? 내 인생 엉망 만든 자가 누굽니까? ‘그때 선택을 잘할 걸,’ 한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결정한다는데, ‘아, 선택을 잘하는 건데...’

여러분, 선택이라는 것은, 우리 박 선생님, 결혼할 때, 남자 5천명 줄 세웠습니까? 아니죠. 기껏해야 선택은 반경 10키로 내(內)라 하거든요. 고 몇 명이예요. 몇 명, 그것도 한 명도 아쉬운 사람이 있겠지만...ㅎ 몇 명이라는 것이 이것이 15만 명 남자를 모아 놓은 것이 아니고 고 몇 명이라고 고른 것도 주께서 차려놓으신 밥상 이예요. 이것도 내가 후보감 고른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후보감 갖다 놓은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우연한 마주침이죠. 만남이란 마주침으로 봐야죠.

그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입에는 달아요. 하지만 항상 속에는 쓰게 돼 있어요. 누구 작용입니까? 천사의 작용이죠. 이 세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고름 판이 아니고 하나님의 고름 판, 하나님의 의도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렇게 침투된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교회 가서 신앙생활 잘하고 착한 일 많이 하고 선교헌금 내고 봉사 전도 많이 해서 이 팔자 고치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여전히 쓴 약을 더 쓰게 만들 뿐 이예요.

이건 약간 어려운 건데 어려운 거지만 그림을 그리면 쉽게 될 수 있어요.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몰라요. 사람이 있는데 이게 난데, 내 속에 나와 똑 닮은 ‘나’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돼요. 누가 지시합니까? 큼직한 ‘나’가 현실적인 ‘나’가 나를 항상 지시하고 명령하는데, 더욱 더 무서운 것은 누가 벌칙을 내리느냐 하면, 내가 나에게 벌칙을 내리고, 그 벌칙을 내가 짐작한 벌칙이 있는데 그것을 주변에서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왜 벌칙을 받아야 하느냐 하면, 죄는 벌칙이 오게 되면 죄가 사라진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벌 받은 죄는 더 이상 죄가 삭제된, 파일이 삭제된 걸로 그렇게 생각해요. 누가 그렇게 해요? 그런 법칙이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 법칙 없는데 인간은 그렇게 생각해요.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나쁜 짓하면 착한 일 많이 하려 한다고요.

이러한 인간들의 의식은 이것은 자기 안에 새끼(욕하는 거 아닙니다.ㅎ) 자아 안에 새끼 자아를 따로 키워 놓기 때문에 그런 현상 이예요. 새끼 자아라는 게 없습니다. 왜 없느냐? 인간의 몸은 하나밖에 없어요. 몸에서 나온 이미지라 하는 것은 그게 자아기 때문에 몸이 둘 같으면 두 개의 자아가 되는데, 한 몸을 가지고 이 자아가 맞는 건지, 새끼 자아가 맞는 건지, 어느 자아가 맞는 건지, 본인도 헷갈리는 겁니다. 요것은 24일 날 오후에 들뢰즈, 라캉 철학을 다루면서 이야기 할 거예요.

 왜 자기가 새끼 자아를 길들이고 왜 지가 벌칙을 내립니까? 심지어 나쁜 짓 했다고 지가 자기한테 동맥 끊어버리고, 스스로 자기에게 손 대고 자기가 자기에게 손드느냐 말입니다. 여기서 요한계시록은 자기에게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왜 그러지 말라는 겁니까? 이러한 자아 속에 쓴 게 들어왔다는 말은 이미 우리의 자아, 우리의 몸은 이미 소유가 나의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얼마든지 다룰 수 있는 몸이라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부모를 어린 아이가  자기가 선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요? 지 부모를 어떻게 선택합니까? 지가 부모를 어떻게 골라요? 큰 사람은 드라마 보니까 지가 골라요. ‘나 엄마 안 해,’ 하고 지 맘대로 고르지만,

근원적으로 부모하고 나는 같이 안 살겠다고 할 수 있지만, 자기의 DNA, 자기의 피부, 눈 색깔, 성격, 지병, 당뇨병, 이것은 그냥 물려받은 거예요. 물려받았다는 말은 이렇게 밀가루 반죽해서 쭉 늘어지면 수제비도 되고 또 수타하면 면도 되잖아요. 이게 엄마라는 반죽이 늘어난 것이 자식이기 때문에 똑같은 동질의 것이 연결돼 있어요. 뚝 떨어져도 그 몸의 성질을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걸 제가 제일 먼저 이야기 했죠.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혈육’이라 했죠. 혈육이라 하는 것은 끊어지지 않아요. 두 개의 혈육 가운데 ‘나는 너의 주인이다.’ ‘아니야, 내가 너의 주인이야,’ 라고 싸울 이유는 전혀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옛날에 노예 있었죠. 지금도 묵시적으로 노예가 있지만 고용주와 직원들 사이에 있지만, 원래 노예라는 것이 출애굽에 노예라는 것이 인간에게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노예하고 주인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금전관계가 있어요. 이게 레위기, 출애굽기에 나와요. 예를 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서 전사했을 경우에 토지를 일궈서 엄마의 힘으로 자식들은 많은데 키울 수 없습니다. 애들은 밥 달라고 난리치고 엄마는 그 생산물을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옆집 아저씨한테 빌리죠. 이걸 가지고 ‘소비차용’이라 하는데, 소비하기 위해서 돈을 빌려 줍니다. 그런데 애는 크면서 소비하니까 나중에 딸을 팔아 넘겨야 되죠. 돈 때문이 아니라 빚 때문에 팔아넘기는 거죠. 지금도 중국 오지에 가면 있고, 지금도 한국에도 있을 수 있어요. 팔아 넘겨 버리면 이 관계가 노예관계죠. 원래부터 옆집 아저씨는 딸하고 관계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딸이 옆집 아저씨의 노예가 된 것은 어떤 사건 때문에 그렇습니까? 방금 이야기 중에 아버지가 전사하셨기 때문이죠. 전사라 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야 하겠죠. 그럼 전쟁은 누가 일어나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일으켰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발한 상태 하에서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자가 된다. 따라서 가난한 자는 부자의 노예가 돼야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가 되는 것이 세상의 구조라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한 느낌이 들죠? 여기서 중요한 거예요. 그렇게 하더라도 그걸 억울해 하지 말라 이 말이죠. 부자를 지으신 것도 하나님이고, 가난하게 지으신 것도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의 하신 일에 자기 형편 따라서 원망하거나 짜증내거나 대들면 이 전체 구조가 너의 고름 판이고, 너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그러한 동일성이기 때문에, 내가 거기다가 홈을 파고 그걸 엉망으로 뒤집어버린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면 억울하지 않겠느냐, 그럴 때 하나님께서 부자한테 이야기 합니다. ‘부자 되거든, 49년, 7X7=49년 지나면 희년이라 하는데, 50년이 되면 전부 다 원인말소를 시켜 버려라. 원인말소, 말소 시키면 다시 ’엄마.‘ 하고 늙어빠지면 다시 돌아오지만 오겠죠. 이걸 가지고 교회서 개념상 흔히 많이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구원‘이라 하고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라 합니다. 천국에는 반드시 가고자 하면 천국은 갈 수가 없어요.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전부 다 천국에 안 넣어 줍니다. 어디를 거치고 와야 돼요. 어디에? 세상에 노예가 돼야 됩니다. 세상이라 하면 다른 말로 한자로 하면, 뭐가 됩니까? ’돈‘의 노예가 돼 줘야 돼요. 오랜만에 강의 제대로 바른 강의 하고 있습니다. ’돈‘의 노예라는 것을 본인이 인정해 줘야 됩니다. 돈을 초월해서 구원받으면 안 돼요. 그런 천국은, 그 다음에 지옥 갑니다.

어떤 인간도 돈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왜? 우리는 노예입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처럼.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애굽에서 나가고자 하는 아이디어가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는 누구 아이디어였습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아이디어지, 그들은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목적이지 나오는 게 아니에요. 교인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죽어서 빨리 천당 가려고 나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 빽 써서 이 땅에서 땅, 땅 거리면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어서 나온 거예요. 자기 야망 달성하려고 교회에 나온 겁니다. 세상에, 그게 무슨 축복이고 구원입니까? 이 세상에 그냥 사는 게 무슨 축복이고 구원 이예요? 그 사람은 결국 어디에 매여 있어요? 결국 노예 되죠.

그걸 지난 수요 설교 때 뭐라 했습니까? ‘강자의 노예’가 된 겁니다. 강자의 예를 들었죠. 강자에는 어떤 예가 있습니까? 남자한테는 장 동건, 여자한테는 이 영애, 어디 가서 주먹 자랑 하지 말고 여수 가서 인물 자랑 하지 말라 하죠. 어느 직장에 가도 자기보다 빠르게 승진하고 피아노 대회 나가도 자기보다 피아노 더 잘치고, 공부를 해도 자기보다 공부 더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고, 다이어트 해도 자기보다 더 많이 뺀 여자가 있고, 모든 부분에서 항상 인간은 강자한테 기죽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뭡니까? 태어날 때부터 뭐가 되요? 이미 노예근성입니다. 기죽으면서 한편으로는 부럽죠. 부러워하면서 그 밑에 똘마니 노릇을 철저하게 자진해서 하죠.

누가 노예보고 노예 하라 했습니까? 자진해서 해요. 특히 초등학교 때 구슬 따기 할 때 구슬 다 잃어놓고 비로소 2개 얻어서 하다가 그것도 잃고 딱지 놀이하다가 잃고 빌어서 2장만 빌려 달라 해서 그것도 잃고, 항상 고 연령이 다 그런 거예요. 40대는 누가 승진하느냐가 문제고, 30대는 누가 좋은 여자하고 결혼하느냐가 문제고, 50대는 누가 넓은 아파트에 사느냐 하고, 50대 중반 되면 누가 골프 잘 치느냐 하고, 심지어 80대 되면 누가 이 요양병원에서 침해 덜 걸리느냐 시합하고, 모든 인간은 스스로 강자를 찾고, 그 강자에게 자진해서 노예로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욕구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욕구에서 우리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 없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니고 안 벗어나려고 하죠. 사람이 라이벌이 없으면 살맛이 없습니다. 반드시 라이벌이 있어서 그게 경쟁의 자극을 받아서 살 때 라이벌도 살고 자기도 사는 거예요. 같이 성장하는 거예요.

강원도에서 맨 날 소나 키우는 애들끼리 저희 반에서 1등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죽자고 학원 다니는 애들끼리 붙어서 1등해야 자극을 받지, 강원도에서 소나 키우는 애들이 소 누가 더 잘 키우나 하면 그것 가지고 대학에 들어가나요? 안 되잖아요. 어느 인간치고 자기를 실패자로 간주하지 않고 모든 것에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돈은 많은데 애는 정박아 된다든지, 애는 건강한데 집에 돈이 없다든지, 돈 많고 애도 건강한데 시어머니가 침해 걸렸다든지, 항상, 모든 게 그래요. 따지고 보면, 모든 구석이 다 뭔가 노예가 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고리, 강자, 이 세상에 강자한테 걸려들 열쇠고리 같은 것이 전부 다 우리 온 몸에 다 있어요. 열 개가 되든지 20개다 되든지, 하여튼 많은 사람, 적은 사람이 있는데 하여튼 다 있어요.

그런데 돈의 노예가 돼야 되는데 바보 같은 인간이 돈을 초월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요. 그들은 그걸 신앙이라고 이야기해요. 기존 목사 설교하는 것을  그대로 이야기 해 볼게요.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는 어둠의 자녀가 아니고 빛의 자녀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바르게 살아서 세상에 주의 영광을 드러내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했으니까 썩어질 곳에 돈을 맡기지 말고 보물을 어디에 쌓아두라? 하늘에 쌓아두라 했으니까 여러분, 교회에 돈 내시기 바랍니다.’ 그 말은 그 뒤의 말씀으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니 보물이 있는 곳에 니 마음이 있다.’ 돈을 하늘에 쌓아두려면 하늘이 좋은 것이 아니고 지가 갖다 투자한 것, 지 돈이 있어서 좋아하게 돼 있어요.

그것은 인간의 약점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뒤의 말씀이 뭐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했는데 하나를 사랑하면, 한 쪽은 반드시 미워하게 돼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돈의 노예고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왜 사랑하죠? 아까 강의 중에 이야기 했죠. 인간은 왜 돈을 사랑합니까? 지 엄마, 아빠가 사랑하니까, 엄마, 아빠의 모든 교육이 결국은 뭐를 얻으려고 하는 교육입니까? ‘너는 커서 내가 못 다 이룬 한풀이, 결국 돈 없는 한풀이를 돈 벌라는 식으로 은근히 한 거예요. 심지어 동화책에도 보세요. 동화책에 나온 신데렐라가 결국 가난에서 가난으로 끝났습니까? 가난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부자로 바뀌었잖아요. 춘향이도 마찬가지고, 백설 공주가 난장이하고 살았어요? 끝났습니까? 백설 공주가 결국 누구하고 나옵니까? 옆 나라 왕자하고 뽀뽀해서 결혼 했잖아요. 그러면 일곱 난장이는 뭡니까? 헛물 킨 거죠.  그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면, 그 공주하고 왕자하고 결혼해서 일곱 난장이를 왕궁에 취직 시켰다. 이러면 돼요.

인간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은 필히 누굴 미워하게 돼 있어요? 교회 나오든 안 나오든 하나님을 미워하게 돼 있다는 이 구조, 이 구조가 바로 입에는 거창하게 예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속에는 뭡니까? 이런 구렁이 들어있다 말이죠. 하나님을 안 미워하고 사랑해서 구원 받겠다는 시도는 아예 하지 마세요. 그건 되지도 않는 해봤자 그건 사칭하는 겁니다. 사칭은 가짜로 그런 척하는 하는 것뿐이죠. 그렇게 주님 사랑한다는 그 목사는 왜 전별금 15억 받느냐,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하나님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스데반 집사처럼 돈이고 전별금이고 돌에 맞아 죽어야 돼요.

사도바울의 소원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거라고 했죠. 그 외 전부 다 거짓말쟁이예요. 전부 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닌 목사를 만나고 싶다.’라고 기대를 하지 마세요. 다니까. 그게 맘 편해요. 특히 부모 교육이라는 것은 결국은 집안 이기주의 아닙니까? 부모가 자녀 교육하는 것이 집안 이기주의라면 부모가 요구하는 효도내용이 뭐겠습니까? 오직 누구 집안만? 인류 평화를 위해서? 미쳤나? 누구 집안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 우리 뼈대 있는 집안!! 결국 주고받는 것이 뼈대 있는 집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뭐가 있어야 뼈대가 굵을 수 있습니까? 돈이 있어야 뼈대가 있는 거고, 뭐든지 돈 이예요. 돈!!! 병원에 가도 돈, 어디를 가도 돈 이예요. 돈, 사람 낳고 돈 있다는 말은 순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부모의 정신상태가  돈만 밝히는 정신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돈부터 먼저 있고 사람을 낳는 거예요.

자본주의를 비난하고 자본주의의 약점을 극복하려고 애썼던 나라가 쿠바 아닙니까? 세계 최고의 빈곤을 극복하려고 한 대통령, 카스트로............, 사람이 경쟁 안하고 그러면, 윤 집사님, 학교 시험 안 치러도 공부 잘 했겠습니까? 시험 없으면 왜 공부를 해요? 미쳤어요? 공부를 하게, 그러면 돈 가지고 뭐를 하나? 제가 입에는 달고 속에는 쓰다 했죠? 그럼 돈 가지고 뭘 하렵니까? 입에도 달고 속에도 달게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돈은 뭐를 하느냐 하면,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있다. 왜 인간은 즐기는가, 어느 책에서 보면 인간은 처음부터 일하는 존재가 아니고 인간은 처음부터 게임하고 노는 존재, 얼마나 잘 놀기 위해서 그만큼 수고를 많이 하는 거예요. 수고할 때 그냥 수고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아니고, 내일 스키장에 놀러 가는 것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애쓰고 명품을 사거나 갖고 싶은 가방하나 얻기 위해서 그 힘들고 어려운 일도 하고 자식들한테 과외비 대려고 엄마가 코피 터져가면서 일하죠. 자기 즐거움, 자기 최상의 즐거움은 바로 ‘나는 나다.’ 곧 내가 신이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상숭배라고 돼 있어요. 우상숭배라 하면 부처 섬기고 조상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우상숭배라 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신약 시대에.  구약 때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우상숭배라 하는데, 이방 신도 그런 개념이 아닌데, 신약 때에 우상숭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세상신이란 탐심이죠, 탐심!! 돈 탐욕, 따라서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세상에는 나에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나에게 훈계하고 가르쳤던 다시 말해서 나의 존재의 이유가 되는 그런 부모가 계시기에 부모 보란 듯이 부모가 평소에 잔소리 했기에 나에게 잔소리 한 것에 대해서 보란 듯이 ‘내가 부모의 잔소리에 부응합니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맺어진 연관이 혈육이죠. 이것은 바로 땅의 지체죠. 이 자체가 바로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나다.’가 결국 ‘나는 결국 우상숭배자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돈에서 못 빠져 나온다. 인간은 탐욕에서 못 빠져 나온다. 항상 나보다 더 좋은 옷 입은 사람을 보면 탐이 나죠. 그래서 인간은 결국 이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목사님 해결책을 줘야 하지 않습니까? 못한다, 못한다 하지 말고 해결책은 뭡니까? 해결책 이미 났어요. 이미 정해져 나왔다니까요. 아, 언제?? ㅎ그림 다시 그릴게요. 입(혓바닥)에는 달지만 속에는 뭡니까? 쓰죠. 쓰다 하는 것은 평소에 내가 있기에 돈의 노예 되고 나는 나밖에 모르는 여기와 이질적 성질이 맞다? 안 맞다? 안 맞는 이질적 존재가 들어오니까 평소에 단것을 원하는 우리에게 뭐가 되느냐, 쓴 존재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 주께서 어떤 일을 계시해서, 하나님의 일을 계시하시는 겁니다. 그 증거가 뭐냐, 뭔가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감을 잡은 일입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39.20) 11-04-30 16:59 
가락교회110421요한계시록10장-(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13강b-(이 근호 목사)
제 13강b

안에 쓰게 됐다는 이유가 8절 끝에 보면, 한 자로 돼 있죠. 왜 쓰냐? 뭘 했는데? 어떻게 씀바귀를 먹어서 쓴 겁니까? 뭘 먹어서 쓰죠? 뭘 먹었잖아요. 뭘 먹었습니까? 영어로 Book, 책, 책을 먹은 거예요. 캡슐, 제약회사에서 캡슐을 만들어 냅니다. 알약을 먹지만 이 안에 수많은 더 작은 알갱이, 365개의 알갱이, 감기약 같은 경우에, 이것이 위액에 녹으면 와르르 쏟아지죠.

 책이라는 분명히 한권입니다. 한권이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내용들이 여기 막이 깨지기를 기다리면서 우리 속에서 터져버리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무빙 북(Moving Book), 움직이는 책이 되죠. 그것도 본인이 전혀 원치 않는, 본인이 원치 않으니까 내 안에서 말씀이 움직이는 것을 누가 제일 먼저 급 저지하겠습니까? ‘안 돼, 안 돼,’ 누가 저지하겠어요? 본인이 가장 저지하죠. ‘아니야, 내 비전은 따로 있어. 내 비전은 부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내가 부모의 뜻을 따라야 돼, 그래야 부모의 뜻을 완전히 꺾어버리지. 평생 동안 잔소리 했는데 그래야 보란 듯이 ’부모님, 보세요. 제가 부모님 생각이상으로 능가했잖아요. 이젠 부모님, 잔소리 하지 말란 말 이예요. 이건 프로이드가 잘 이야기했죠? 보모한테 잔소리를 듣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부모를 능가해도 부모의 품에서, 의식에서,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그런 신세가 되죠.

그래서 부모가 죽으면 그 무덤가에 와서 절하면서 ‘어머님, 제 남자친구입니다. 이 친구 만나기를 어머니께서 그렇게 기도하더니만 이 친구가 거성그룹의 후계자, 이제 사 나는 구두 만드는 말단 사원에서 라이벌을 다 꺾고 온갖 모함을 당하면서도 기어이 지금 하늘나라 어머니기도 덕분에 이렇게 컸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엄마의 품을 못 벗어나니까, 제가 4번째 씁니다. 그걸 무슨 테두리라 했습니까? ‘혈육의 테두리’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으로 난 것은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 죽어가면서도 자기는 천국 가는데 부모가 지옥 가면 어떡하지? 걱정들을 늘어지게 하셔요.ㅎ 이거는 입장 바꿔서 부모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교회 가서 구원 받았는데 자식이라는 게 교회도 안 나오고 지옥 가면 어떻게? 걱정들을 늘어지게 하시는 거예요. 그걸 흔히 사랑이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사랑이란 너가 없으면 나도 없다. 라는 관계 방정식, 너가 없으면 나도 없는 사이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순애보가 여자 쪽에서 많았잖아요? 요새는 순애보가 남자 쪽에서 등장해요. 여자가 돈 보니까, ㅎ 항상 돈 많이 버는 쪽이 가장 노릇을 하기 때문에 너가 없으면, 다른 말로 번역하면 ‘너 돈이 없으면 그 다음에 내 쓸 돈도 없다.’ 이런 관계식이죠.ㅎ 모든 것이 돈 관계이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뭐라 합니까? 이걸 ‘사랑’이라고 굉장히 귀한 용어를 씁니다. 뜯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바로 이러한 사랑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그림을 그리면 우리의 껍데기는 바로 돈에 중무장된 돈에 환장한 그것은 부모로부터 교육받았고 그것이 출세고 인생 성공이라고 주변에서 그렇게들 학교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걸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쳤던 그 모든 인식 속에서 여기서 마치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본의 아니게 말씀이 태동하고 있는 겁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좋아 했겠습니까? 아니면 어처구니없어 했겠습니까? 말도 안 되죠. 처녀가 아이를 낳으라 하니 할 말이 없어요. ‘안 잤다. 안 잤다.’ 해도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친자 확인 조사해 보세요. 예수님은 마리아와 같은 DNA인데, CIA에서 조사 나와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그럴 때 결국은 마리아가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자포자기하죠. 자포자기.

이 자포자기를 두자로 줄이면 이걸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어렵지 않죠? 이제 알았으니까. 자포자기를 뭐라 한다? ‘신앙’이라. 반대로 ‘열심히 믿습니다.’라는 걸 신앙이라 하지 않고 ‘신념’ 이라 하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네 자로 ‘하면 된다.’ 는 거예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게 신념이죠. 그리고 신념은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계산력이 포함돼 있어요. 확률, ‘나는 저분 믿어서 이번 비행기 탈 때 비행기 조종사가 실력이 어느 정도, 초보인지, 베테랑인지, 아! 베테랑 같으면 확률 상 나는 이 비행기를 탈만하다.’ 그걸 가지고 ‘나는 비행사를 믿습니다.’하죠. 이건 결국은 비행사를 믿는 게 아니고 뭘 믿어요? 비행사를 믿는 나의 계산력, ‘나에게서 나온 것을 내가 믿습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신념은 항상 누구를 믿느냐 하면, 예수를 믿는 것 같지만, 그걸 경유해서 누굴 믿어요? 예수님을 믿는 나를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죠. 결국은 이것은 뭐냐, 자기가 우상 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침투해야 신앙이 생기기 때문에 교회의 대부분은 신앙인이 아니고 무슨 인입니까? 신념 인이죠. 교회는 신념 인을 양산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은 교회 안 가서 지옥 가지만 이 사람들은 교회 가서 지옥 갑니다. 하하~~ 아주 재밌는 현상 이예요. 맨 날 구하러 오는 거예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맨 날 구하러 오는 거예요. 얼마나 안 믿어졌으면, 새삼스럽게 이렇게 신앙인척을 해야 덜 허전하잖아요. 이런 착한 일을 했으니까 이번 한 주는 재주 없는 일이 떨어져나가서 내가 원래 원했던 뭔가 기대했던 축복이 주어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은 성경을 모르니까 내가 보는 나의 기준하고, 성경이 보는 기준하고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고 억지로 나의 기준에 하나님도 마치 동의하는 양 그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를 신념화 시키는 겁니다. 그걸 자아체면, 스스로 자기가 체면 거는 겁니다.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빨리 해보세요. 방언하죠.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r~Ꭿ~&Ꮫ@Ꭿ~ 방언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계속 자포자기가 신앙이란 말은, 내 속에 내가 요구하지도 않은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누가 침투했다는 겁니다. 그 침투한 능력이 뭐냐, 신앙이라는 것은 ‘자포자기’ 그런데 신념은 스스로 자기를 격려해서 ‘너는 여기서 좌절하면 안 돼, 너는 그런 너가 아니었잖아. 이만한 일에 좌절하면 너답지 못해, 너 부모님이 그렇게 안 가르쳤어. 너가 나약한 인간이 아니잖아. 힘을 내, 힘을 내란 말이야. 너는 할 수 있어. 일어설 수 있어.’ 의인은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난다고 잠언 서에 나와 있다는 것을 인용하면서 ‘할 수 있어. 목사님 설교 안 들어봤어?’ 주께서 은혜주시면 뭐든지 니가 피할 길을 주신다. 그 피할 창문이 열린 거야. 니가 못 찾아서 그렇지, 니가 기도를 안 하고 교회를 안 나오니까 못 찾아서 그렇지 나오면 보게 돼 있어. 하면 되는 거야.‘ 이게 다 뭐예요? 전부 다 신념이죠.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놀고 있네, 에이고,‘ㅎ 참 웃기지도 않아요. 자아도취에 빠져서 완전히 스스로 자아도취가 돼 버렸어요. 현실도 모르고 자기 망상, 망상 속에 자폐증처럼 갇힌 신세, 심하면 병원 가야 돼요. 정 답답하면 교회 안 가고 굿하고 다니지. 미래가 예측이 모호해서...

그런데 그것이 필요 없는 것이 2절에 보세요.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바다 밟고 땅을 밟았으면 뭐를 밟은 겁니까? 사실 전부를 다 밟은 거죠. 뭘 들고? 책을 들고. 그럼 책의 내용은 어디서 쏟아져야 된다? 책의 내용은 책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다도, 땅도, 바다와 땅의 모든 미래에 전부 다 적용될 거죠? 그 중간의 매개체로서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침투했다? 바로 하나님의 성도 안에 입에는 달고 하지만 속에는 쓴, 성도 안에 일방적으로 하나의 매개체로서 사용한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택배회사 직원이죠. 그걸 ‘운반자.’ 그걸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수님의 증인‘ 또는 목격자, 전도자라 하는 겁니다.

자, 이제 중요한 거 합니다. 지금까지도 중요했지만, 이 땅과 바다를 밟은 이 책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이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이 책을 이걸 ‘비밀(secret)’이라 해요. 여기서 우리가 교회 오래 다니고 신학을 하고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면서 늘 뭔가 풀리지 않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질문이 있어요. 무슨 질문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을 교회 다니는 사람은 믿는 척이라도 하죠. 그렇잖아요. 다음주일이 무슨 주일이라 하던데...? 부활주일, 그거 다 돈 거두기 위한 명목입니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다 목돈 내라는 거예요. 푼돈 내지 말고 목돈 내라는 거예요. 그래서 돈 내면 안 됩니다. 제가 설교에서 헌금 설교 했잖아요.

헌금은 우리가 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헌금 이예요. 사실은 우리보고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 안의 그리스도 보고 그리스도 일 하라고 주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전달자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집에 콩나물 사고 침대 들이고 애들 피아노 가르치는 거, 다 헌금입니다. 그걸 왜 교회 냅니까? 미쳤어요?ㅎ 자기 몸이 하나님 몸 같으면 하나님 몸 간수하기 위해서 벌어먹는 것도 하나님의 돈 쓰는 겁니다. 내 돈 따로 있고 하나님 돈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돈을 하늘에 쌓아두라 하는 것은 하늘에 냅다 던지는 게 아니에요. 교회 갖다 바치는 것이 하늘에 쌓아두는 게 아닙니다. 그거 사기꾼들이 하는 짓 이예요.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자신보고 맛있는 거 사 잡숫는 거, 그게 바로 돈을 하늘에 쌓아두는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시장에 가서 옷 사 입고 .., 지금 반대로 가르치는 것이 큰 문제예요. 노아 방주 크게 지었잖아요. 이거 몇 명쯤 들어가겠어요? 규모를 봐서 천명도 넘게 들어가요. 몇 명 들어갔습니까? 달랑 8명이예요. 주님께서 노아보고 ‘ 니같이 근무 태만한 너는 오지마라.’ 했습니까? 노아를 높이 추켜세웠습니다. 왜? 천국 갈 사람만 데려왔다고. ‘이 세상에서 제발 좀 못 올 사람을 교회 불러 모으지를 말라. 내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니가 알아서 왜 들어오느냐,’ 말이죠. 주께서 부르지 아니하면 어떤 자도,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어떤 자도 예수님께 올 수 없다고 요한복음 6장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안 보니까 자꾸 일반 종교성, 종교의 심리, 이런 것에 자극을 받고 하니까 이게 결국은 신앙이 안 되고, 신념이 되는 거예요.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내 입에는 달다. ‘아! 나 구원 받았구나!.’ 그런데 내 어머니는 교회 안 나온다. 그러면 뭐라 합니까? 내 배에는 쓰죠. 이것은 달고 씀에 쓰고 달음의 모순과 갈등이 있어야 됩니다. 이게 평생 있어야 돼요. 이게 만족스러운 상태가 돼 버리면 안 돼요. 만약에 우리는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복음을 못 전합니다. 나는 죄인이고 이래도 나는 의인되고 싶고, 이렇게 상충되는 속성이 같이 늘 있어야 돼요. 말씀 보면 말씀 하나도 못 지키고 소위 교회 몇 년 다니고 목사가 이런 말하면 말씀 하나도 못 지키고 이런 느낌이 와 줘야 돼요.

그래서  다윗이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 이라고. 입이 아니고 혓바닥이 아니고 상한 심령. 내가 주님과 함께 있으니까 ‘십자가 앞에서 나는 잘난 게 없습니다.‘ 하는 상한 심령을 주께서 유일한 제사로 받습니다. 다른 것은 돈이고 푼돈이고 안 받습니다. 오직 우리 몸 전체가 평생 사는 우리 몸 전제가 죄만 짓는 이 몸 전체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산제물이 되는 겁니다. 이걸 인간 만들어서 ’주님, 지금 담배 못 끊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급으로 가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가 알아서 인간 만들어서 가는 그런 것은 교회 가봤자 지옥 가는 겁니다. 소용없는 거예요. 빛과 소금? 요즘 소금 값이 올랐지만... 빛과 소금이 되더라도 우리가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되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식사기도 할 때 감사기도 하죠? 그게 바로 금식이라는 거예요. 처음 알았죠? ㅎ그게 금식 이예요. 밥 안 먹는 게 금식이 아니고, 그게 금식이라니까요. 이게 주께서 주신 음식이라고 감사하는 게 금식 이예요.

그 책을 밟고 있을 때에 4절에 보면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우뢰 소리 들을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자, 지금부터 상당히 어려운데, 쉽게 하겠습니다. 제가 모든 계시를 뭐라 했습니까? 비밀이라 했죠. 그런데 우리라 늘 모르는 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부활 하셨잖아요. 부활 했으면 이왕이면 동네방네 다니면서 ‘봐라, 봐라 나 이렇게 너희들이 죽였는데 살아났잖아,’ 그것도 모자라 미국 NBC, KBS에서 카메라 들이대고 ‘예수님 부활 하셨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 맞구나. 성경 말씀이 거짓말 아니구나.’ 하고 전부 다 혹해서 우르르 올게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그 방법이 악마가 쓰는 방법 이예요.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니 추종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전도하려면 그런 식으로 해야 교회가 부흥된다는 아이디어가 마귀한테서 나온 거뮈? 지금 한국 교회가 쓰고 있지만, 마귀에서 나온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전도하고 그런 식으로 비밀을 공개하지 않느냐 하면, 이거 진짜 어렵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고자 했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닮고자 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밖에 등장해 버리면 인간이 원래 생각했던 하나님이 돼 버려요. 그럼 놀랍게도 말씀이 뭐가 되느냐 하면, 육신이 돼요. 육신이 되면 로마서 8장에서는 그냥 육신이 아니고 앞에 뭐 형용사가 붙어요.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와 버려요. 사람은 같은 인간도 죄 지으면 외면합니다. ‘어이구, 인간아 봐, 사형 당했잖아. 십자가 사형 당했잖아, 아이구, 저 낳은 엄마, 참 골치 아프겠다. 왜 가만있으면 존경 받을 텐데, 왜 공연히 까불다가 대들다가 죽을 걸, 왜 몰랐어? 세상 권력이 현실인 것을 왜 망상으로 살아가는 거야, 분명히 죽는다는 게 현실인데 왜 현실을 애써 피하려고 했어? 바보 같은 예수야, 어이구,’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옆에 있던 강도가 뭐라 한지 압니까? ‘어이, 지금 남을 구원 한다고 남 이야기 할 쨉이 못 됩니다. 본인부터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당신 믿어줄게.’라고 이야기를 했다니까요.

지금 우리가 하고 싶어서 했던 말을 십자가에서 아마 우리 선배들이 다 했어요. ‘당신부터 내려 와 봐라, ’ 그러니까 옆에 있는 강도는 한 수 더 떴어요. ‘당신이 뭐 구원자라고? 뭐 우리를 살린다고? 당신부터 십자가 우두둑 분지르고 못 확 빼고 십자가로 로마 군병 찢고 십자가 들고 예루살렘 고소한 놈 다 멱살 쥐고 나귀 턱뼈로 3천명 죽이면서 ’봐, 누구야? 나보고 죄인이라고? 메시아 아니라고 한 자가 누구야?‘ 이렇게 혼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걸 누가 하려고 했어요. 누가 하려 한 줄 알아요? 베드로가 하려고 했어요. 뭘 들고? 칼 들고. 그때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베드로가 성질이 얼마나 급했는지, 칼로 종의 귀를 벴죠. 그러니까 귀 바퀴가 떼르륵 굴렀잖아요. 얼른 주워서 딱 붙여줬는데, 본드도 없이 붙었잖아요. 창조주란 뜻입니다.

창조주가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오느냐 하면, 죄인의 육신의 몸으로 온 그 창조주 외에 다른 창조주는 없습니다. 그러면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뭐냐? 인간이 전부 다 상상한 거죠. 지어낸 거예요.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그래서 비밀 이예요. 아버지는 육신의 예수님 안에만 아버지가 계시지, 그 바깥에는 아버지가 안 계십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이 성질 급해서 ‘아버지를 보여주시면 믿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는 말이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라는 말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자꾸 그 당시에 남들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하나님, 뭔가 멋지게 생기고 수염이 허옇고 그런 신선 같은 산타크로스 같은 인간이 지어낸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포이에르바하 철학자에 의하면 ’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투사다.‘ 투사라 하는 것은 투영. 인간을 화면에 확대시켜 보면 그 하나님의 입, 코가 어디서 나왔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내 코, 내 눈이고 내 입이고 내 혈육이고, 하나님이 자비롭다 하는 것은 내 속에 자비롭고 싶은 그러한 품성을 크게 넓히는 거예요.

우리나라 100미터 달리기가 기록이 어떻게 되죠? 기록이 얼마 전에 깨졌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그것까지 외울 필요는 없고, 하여튼 10초 4라 합시다. 10초 4인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합시다. 그러면 기도 제목이 뭐겠습니까? 기록 깨면 1억 준다 했습니다. 우리나라 육상협회에서. 그러니까 ‘난 돈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육상 미래를 위해 한다.’는 거예요. 미래라도 돈 안 주면 안 하거든요. 자기 청춘을 바쳤는데, 뭐 자기 청춘을 한국의 육상을 위해 미래를 바치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 기도하면 ‘하나님이여’ 뭐를 해 달라? ‘주여, 기록을 남들은 욕심을 내서 9초7하지만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10초1로만 땡겨 주세요.’ 어떤 마라톤 선수가 교회 오면 뭐라 기도하겠습니까? ‘올해는 그저 2시간 10분 내에 들게 해 주옵소서. 저 세리 같은 나쁜 인간은 2시간 3분을 하지만, 하나님, 저 양심 고운 것 알죠? 저는 소박하게 2시간 10분 정도,’ 그러면 개척교회 목사는 뭐라 기도하겠습니까? 새벽 강단에서 ‘어떤 사람은 수천명하지만, 저는 그런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260명 정도.’ 왜 260명이냐, 260명 정도가 돼야 생계가 보장되거든요. 그게 무슨 하나님이시며 지가 만들어 낸 우상이죠.

진짜 하나님은 빌립보서 2장에 나오죠. 모든 사람이 가기 싫어하는 길, 바로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이라. 그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땅, 땅, 땅, 국회라면, 선포합니다. 그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나타난 하나님만이 하나님인데 숨어있는 하나님이 나타날 하ご纛?될 때는 바로 반드시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언약 책이라 해요.

언약 책이라 하는 것은 한 사람, 단 한 사람을 뽑아 세워서 그 사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 사람을 저주하면 저주 받아서 축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을 전달자, 숨어있는 비밀을 간직한 한 사람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가지고 결정짓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인자를 존경하는 자는 마지막 때에 너를 기억할 것이다. 허나 인자를 부정하는 자는 마지막 때에 나는 너를 모른다 할 것이다. 딱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

그러면 한 사람인지 아닌지 하도 자기가 메시야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한 사람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바로 십자가 죽으심과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이것이 일어난 유일한 사람,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주께서 실제로 보낸 분이예요. 죽은 척하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으면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남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살아나면 고생이죠.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자기 죽음에서 부활한 게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 해서 백 날 우리가 만약에 죽었다고 살아나도 또 죽어버리면 소용없잖아요. 영원히 두 번 다시 이젠 죽음은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부활의 힘’이라 해요.

부활의 힘이 신앙이란 이름으로, 아까 신앙이란 뭐라 했습니까? 또 잊어버렸죠? 신앙은 뭐다? 자포자기!! 그 신앙의 힘이 우리 속에 와 버리면 이질적인 것, 내가 원하는 상상의 하나님과 내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진짜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는 ‘너는 죽어도 괜찮아.’라는 그것과 너무나 차별되는 이 다툼, 이 갈등이 내 속에서 쓴 약처럼 이제 시작이 된 겁니다.

다시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다? 사람은 신이 되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된 정도가 아니고, 아예 누구나 기피하는 인간, 누굽니까? 바로 죄 있는 인간, 같은 죄인이라도 죄인을 무시하게 돼 있죠? 사람들이 무시하는 무시당할 만한 그러한 죄인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많은 기적을 원했고 많은 기대를 했건만 예수님이 허약하게 그저 별 볼일 없이 체포되자 사람들은 그 기대한 만큼의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라는 재판관이 ‘여기에 흉악무도한 바라바라는 살인강도가 있는데, 명절날, 기쁜 날에 한 사람을 풀어주게 돼 있는데,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서, 바라바를 풀어줄까요? 아니면 여러분이 구원자라고 자칭하는 예수를 풀어줄까요?’ 사람들은 누굴 풀어주기를 바랐을까요? 바라바,

그만큼 예수님을 의식한 거예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님 풀어주면 또 잔소리 할 거잖아요. 그러나 바라바를 풀어주면 바라바를 볼 때마다 인간은 얼마나 자만심을 느끼겠습니까? ‘나는 아무리 망가져도 저 인간보다 낫다.’ 얼마나 사람 사는 보람을 느끼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신문지상이나 뉴스에서 흉악한 강도 나오면 그렇게 즐거운 거예요. 한진 그룹 콘테이너 배가 해적한테 잡혔을 때에 다른 사람은 안타깝지만 같은 경쟁 업체는 기분 좋은 겁니다. ‘자식, 까불 때 돈 빌려달라더니...’ㅎ 사람은 누가 이렇게 당해줘야 우리는 사는 즐거움을 느껴요. 누가 이렇게 망해줘야 됩니다. 꼭 연애 인들이 이혼을 해줘야 돼요.ㅎ 그래야 찜질방에서 밤새도록 이야기 할 거리가 생깁니다.

드라마라는 것이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 뭔데요? 드라마에 보면 곧 망할 자들이 자꾸 등장하는 거예요. 그럴 때 몰입될 수가 있는 겁니다. 정신없이 애 우유도 안 먹이고, 정신없이 빠져버리죠. 그만큼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남을 죽이고 싶은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들어있는 영 내 맘에 안 드는 이 자아를 이 손으로 죽이고 싶은데 차마 나를 죽여 버리면 모든 게 무의미해지니까 나를 죽이는 대신 남을 대신 죽임으로써 내 죽음을 지연시키는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는 그런 식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남한테 미룰 수 없는 사람 같으면, 큰 일 나요. 정신 병 걸려요. 자살하든지, 우울증 걸린다든지, 뭔가 괴로울 때는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돼요. 풀어준다는 말은 문제가 해결됐다는 말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자꾸 나중으로 미뤄주고 그 문제 해결의 대체물로서 두더지 게임을 한다든지 회사 사장을 욕한다든지 목사를 씹는다든지 하여튼 뭔가 풀어줄 때, 그럴 때 잠시 자아를 잊으니까 자아를 잊어버리면 이것은 일종의 자살효과죠. 자살효과가 뭘 느끼게 합니까? 내가 없으면 내가 품고 있는 뭐도 없어진다? 고통도 없어질 거니까 고통을 철회하지 말고 아예 고통을 갖고 있는 나를 몽땅 한 통에 집어넣으면 깨끗이 끝날 문제인 것을, 왜 그렇게 고민을, 그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바보같이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하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살을 하려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우리는 이미 자살이 돼 있어요. 내 안에 원치 않는 것이 있어서 자꾸 우리로 하여금 쓴 물이 자꾸 올라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맘대로 할 수가 없는 거죠. 여기 6절에 보면, ‘창조하신 이’가 나옵니다. 창조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근거가 한자로 無에서 창조예요. 그러니까 내 안에 누가 왔다? 창조하신 창조의 원리가 말씀으로 우리 안에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내 안에 창조했다는 말은 결국 나의 껍데기, 나의 세상적인 시선으로 쏴대는 남들에게 부응해야 된다는 압박감을 갖고 있는 나는 뭡니까? 한자로, 없는 자죠.  이걸 없는 자라 하지 말고 성경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이미 날마다 죽는 자.’가 되죠. 없는 것하고는 달라요. 없는 것은 아예 흔적도 없이 없는 것이고, 죽는 자는 시체라도 있잖아요.

그래서 죽는 자라는 말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뭘 해도 의미 없는, 뭘 해도 현실성 없는 존재들이죠. 우리는 눈 만 뜨면 뭘 해요. 하는데 그것이 입에 단 것만 골라서 해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가 뭐예요? ‘오늘도 좋은 일만 생기기를~~’ 가게 들어가 보세요. 천주교 가게에 가보면, ‘ 이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 평화를,’ 그게 뭔 뜻입니까? ‘주의 평화를.’ 좋은 것만, 이게 우리 껍데기는 항상 입에 단 것, 좋다는 기준이 어디서 들어오는 기준입니까? 과거에 누적된 것 중에서 좋은 거예요. 과거에 누적된 것 중에서 자기가 놓친 것, 아까운 것, 하여튼 명품 들은 것, 좋은 것이라는 것은 내 몸에 좋은 거죠. 내 몸에 좋다는 말은 그동안  좋다는 것이 이 몸에 정해졌다는 거예요. 정해진 것이 좋은 것이죠.

하여튼 부부를 만나보면 각자 처녀 총각 때 좋은 것이 따로 있어요. 그래서 부부가 같이 만나서 만날 때는 사랑으로 만났지만 막상 살아보면 서로가 좋은 것을 포기를 안 해요. 서로 좋대요. 개고기 먹으면 좋다고 먹으라 하고, 그렇게 몸에 좋다고, 음식을 약으로 먹습니까? 차라리 약이라면 즙으로 짜지, 하여튼 개고기 좋다. 또 이거는 정력에 좋다. 이상한 거, 뱀등..., 본인이 입이 짧아서 김밥이나 라면 좋아하는데, 여기다 개고기 푹 고은 거, 푹 고은 말말 들어도 싫은데, 서양 음식 좋아하는데, 한식 푹 고은 것은 싫고, 저는 뭘 못 먹느냐 하면 미나리를 못 먹어요. 제사 음식에 미나리가 들어가는데 제사 음식에 들어가지만 못 먹어요. 그런데 제 아내는 미나리가 맛있다고 뜯어 와서 해주는데 냄새도 싫어요. 좋다는 거예요.

서로가 좋아야 좋은 거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1번, 아내가 남편에게 양보한다. 2번, 남편이 아내에게 양보한다. 3번, 서로 양보 안 한다. 몇 번입니까? 서로 양보하지 마세요. 양보하지 말고 각자 속에 쓰신 분이 뭔가 인도하실 거예요. 서로 양보 한다는 말은 양보함으로써 효과를, 양보함으로써 부부관계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그런 기대는 뭐가 되느냐 하면, 의미 있는 게 돼요. 그런 의미 있는 계략을 우리는 할 자격이 있다? 없다?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전에도 나왔으니까 이번에도 나올 거야, 확률 상 이번에도 나올 가능성이 많아, 그래서 실제로 나왔든지 안 나왔든지 그건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새로운 허무와 허탈을 반드시 가져다줍니다.

못 먹는다던 남편에게 개고기를 줬는데 남편이 성령을 받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개고기를 좋아했다. 그때부터 아내는 잔소리 사항에서 하나가 빠지는 허탈함을 느끼죠. 잔소리 할 게 없어서 미치겠어. 뭔 잔소리를 해야 하는데 완벽해, 사람이 잔소리를 하게 틈을 줘야지, 부모가 자식한테 잔소리 할 때도 뭔가 잔소리 할 것을 찾죠. 신발을 던지지나 않나, 뭐가 있을 건데..? 그래서 그걸 가지고 생활의 발견이라 해요. 드라마를 볼 때, 줄거리를 안 보고 꼭 엔지 난 거, 핀 비뚤게 한 거, 화장 잘 안 된 거, 기미 낀 거에 주목하고...‘생활의 발견‘ 삼겹살 먹으면서 엉뚱한 소리 하는 거, 무슨 소린지 알아야지...ㅎ

여기 6절에 봅시다.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그러니까 책대로 실행해 옮기는데 그것이 항상 비밀로 주어진다. 왜 비밀이라 했습니까? 모든 인간이 이미 분위기가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계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일 하셔야 좋으신, 좋다는 이야기 했죠? 이렇게 해야 진짜 우리 인간의 맘에 쏙 드는, 정말 존경해서 자진해서 헌금을 갖다 바치는 ‘하나님답습니다. 하나님, 똑바로 하세요. 똑바로, 하나님이 똑바로 행동하면 우리가 다이아몬드라도 바치겠는데, 하나님이  나한테 해 준 게 없으니까 내가 안 바치잖아, 똑바로 하세요.‘ 라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비밀스럽게 십자가 자체가 비밀스럽다는 거죠. 그것을 지체하지 않고 이룬다 말이죠.

그리고 7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이것은 일곱째 나팔이죠. 나팔을 제가 뭐라 했습니까? 잊어버렸죠? 나팔은 뭐라고? ‘소집명령’이죠. 빰빠라 바 빰~ 빠라빠~ 소집명령, 소집명령이라 하는 것은, 계획 잡힌 스케줄이 실행에 옮기는 거예요. 자~ 실행 시작, 큐~. 감독이 각본대로 Q~, 하세요. 시작하는 거예요. 시작하게 되면 내 속에 씀이 개시되는 거예요. 개시가 되면서 우리가 계획 했던 거, 간절히 10년 동안 계속 기도했던 그런 것이 하나도 응답이 안 되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응답이 안 되는 즐거움!!! 응답 돼 버리면 뭐가 생긴다 했어요? 허무와 허탈로 주어져요. 하나님이 만약에 내 기도에 응답하면 하나님은 고작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신이예요.

옛날에 제가 몸이 아파서 기도를 하니까 곧 잘 나았어요. 얼마나 신기한지, 그래서 그때부터는 한번 했을 때는 ‘요행이겠지, 소 뒤 뒷다리 치다가 게 잡을 식이겠지, 그런데 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될 때는 아, 요건 고정된 규칙이 요 안에 들어있는 모양이다.’ 그때 내가 응답 받을 때 폼은 어땠었고 시간은 언제고 날씨는 어땠을까, 그때 마음가짐을 어땠을까, 그때 행동은 나쁜 짓을 안 한 상태이지, 참, 나쁜 짓을 했을 경우 손이 더러우면 기도를 안 받는다 했으니까 그때 응답 받을 때 내 손에 좌우로 이틀 동안은 나쁜 짓을 안 했을 거라는 계획 속에서 그러면 똑같이 나쁜 짓을 일 주일동안 안 하면, 일주일이 끝나는 그 시점이 기도에 응답 될 가능성이 많은 마일리지가 많이 쌓였겠죠. 마일리지 아시죠? 아시아나, KTX마일리지 쌓이듯이.

요대로 마일리지를 많이 품으면 쿠폰이라도 하나 더 생기는 혜택이 주어진다는 그런 계획 하에 있었는데, 그게 십자가 앞에서 바로 그것이 반드시 불의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 그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의 본질, 순수한 죄에 접근 돼 있다는 겁니다. 아! 죄라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선을 추구하고 악을 버리라가 아니라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가, 내가 선을 생각하고 악을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따먹지 말라는 나무를 따먹은 그 내림, 혈육적인 내림이 죄의 결과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이미 따먹을 걸 어떡합니까? 토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죄의 상태로 계속 어디까지 갑니까? 죽을 때까지 가야 되죠. 가면 가는 그 안에 누가 승선했죠?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승선해서 그 죄가 어떻게 십자가의 용서로서, 그 의로 바뀌는 작업을 죄 짓는 현장 가운데서 그때마다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새롭게 그 차이성을 느끼는 기회를 허락해 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비밀이죠. 그런데 남들은 몰라요. 이야기해도 ‘나 니 말에 설득 당하기 싫거든,’ 하고 떠나 버려요. ‘ 나 니한테 꼬시킴 당하기 싫거든,’ 그런 이야기로 끝나기 때문에, ‘그건 누굴 꼬시란 말이 아니고 난 그렇단 말이야, 그게 성경에 나와‘ 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굴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현상을 같이 고백할 수 있느냐를 찾는 사람 이예요. 이것이 원체 분류 작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 봅시다. 10절,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어, 우리는 책을 양식처럼 먹었을 때는 내 사적인 구원 농도로 주신 구원의 능력이라, 이렇게 생각했는데 얼래, 그게 아니죠. 택배회사 직원이죠. 택배회사 직원한테 물건 주니까 크리스마스 선물인 줄 알고 자기 집에 갖다 놓으면 큰일 나는 겁니다. 그러니 택배회사 직원들 보증금 받아 나야죠. 도중에 소포 얻어 챙길 지 모르니까.

그러니 우리 속에 들어있는 이 말씀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고정될 문제가 아니고 이게 ‘이동성’이 돼야 돼요. 이걸 영어로 Movement라 해요. Movement란 개념과 이동하는 개념이 다른데요. Movement란 개념을 그림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광장에 사람들이 있다 합시다. 무작위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 전부 다 서 있는데, 어느 한 구석에 이상한 유형의 그림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 있는데 이 안에서는 뭐가 움직이죠? 소용돌이? 사람들의 일단의 움직임이 있을 때 이걸 Movement라고 합니다. 다 같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차이 나게 ‘어, 그쪽에 뭐 웅성웅성하는데 시끄러운데, 일단의 움직임이 있을 때 15층 건물 위에서 보면, ’어, 다른 사람은 안 움직이는데 이쪽에만 뭔가 움직임이 생길 때, 그 움직임을 Movement라 한다 이 말이죠.

세상일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내가 중심이 돼서 누가 명령을 해야 움직이기를 원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嚥荑?이 사람들을 움직이라고 명령을 했습니까? 명령을 안 했습니까? 명령 안했죠. 자기는 자기 식대로 사는데 이쪽에 하니까 이 사람의 존재는 뭐냐, 이쪽 움직임에 종속되는 관계에 돌입되는 거죠. ‘나도 한번 저기 가볼까, 저기 마술하나? 서커스 왔어? 가볼까?’ 갑자기 이런 움직임이 없을 때는 ‘어,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랬는데, 움직임이 있고 보니까 여기에 관심사를 보이면서 접근 하게 되겠죠. 그래서 이 사람이 본래의 자리를 떠나서 이 Movement에 합세 하고 관심을 갖고 그 움직임에 대해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 방식을 쓰게 되죠. 이 Movement를 움직임을 원동력을 모른다는 점에서 이게 뭐냐 하면, 비밀이 되는 거예요.

그럼 진짜 교회, 지상 교회 말고, 진짜 교회에서의 Movement는 뭡니까? 바로 먼저 된 자가 아니고 어떤 사람이겠어요? 나중 된 자겠죠. 그렇죠? ‘나는 복음 안다. 신앙 많이 했다. 나는 목사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그게 과거사에서 근거된 지금의 토대가 과거의 Movement, 과거의 어떤 움직임 때문에 됐지만, 지금 계속해서 ‘에헴, 나는 목사다. 나도 과거에는 잘 나갔어. 옛날에 병 많이 고쳤어. 수만을 전도했단 말이야,’ 하고 있는데 주께서 현 움직임은 그쪽이 아니고 어느 쪽입니까? 일반 교인들의 어떤 움직임인데 그 주동자가 없어, 뭐가 있어, 뭐 있는데, 그게 뭐겠어요? 바로 어떤 뱃속에 말씀이 Movement를 주니까 ‘나도 그래, 나도 그래,’ 라고 일단의 새로운 움직임이 있을 거예요.

그럼 이 움직임이 있으면 이 사람은 계속 움직입니까? 안 움직입니까? 움직이다가 ‘휙, 휙, 휙 돌다가 피이~~ㅎ 휙, 성경 공부 좋다고 모였다가 2개월도 안 되어 피~이 하고 가면 딴 데서 뭡니까? 또 딴 데서 휙, 하고 움직이지만 모르죠.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서 나중 된 자로 하여금 먼저 된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먼저 된 자가 우쭐되지 말라는 거죠. 한 때 니가 그런데 있더라도 그것이 너의 권력의 기초로 내가 허락한 적이 없다. 옛날에 전도 많이 하고 옛날에 목사 하고 설교 많이 하고 강의하러 많이 돌아다니면서 강의 한 것을 절대 너의 advantage(유리, 장점)로 하나님이 인정한 적이 없어요. 언제 여기서 움직이다가 다른 사람으로 움직일지 그것은 하나님 맘대로 지, 우리가 거기서 ’주여, 계속 움직이게 ..‘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새로운 움직임으로 가면 되지, 지가 주인공 될 필요는 없잖아요. 이게 바로 어떤 움직임이든 이것은 우리 영적인 세계와 세상 이치도 그래요. 한 때 잘나갔던 조 용필, 지금은 조 용팔이가 더 잘 나가요. 한 때 잘 나가던 인기 배우들, 모델들, 연애 인들도 그렇고 정치인들도 마찬가지고, 한 때 잘 나가던 그것이 마치 원래 지가 잘 나가야 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자격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오만 떠는 사람들, 오만 떠나 안 떠나 관계없이 떠나 버리면 흡수 되는 것이지, 항상 새로운 움직임 속에 우리는 일단 낮아져야 되는 겁니다. 항상 어떻게 되요? 이 Movement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니까, 어떻게 해야 되요? 우리는 항상 나중 돼야죠.

늘 나는 ’처음 사랑,‘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을 이렇게 말씀을 심어준 처음 사랑을 기억하는 그것이 또 새로운 Movement를 누가 중심 할 것 없이 중심은 주님이 중심이고 우리는 그 Movement에 가담되자는 말이지, 내가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메시야도 교주도 아니고 그런 것은 없고, 다만 말씀에 대해 서 어떤 즐거움과 깊이에 대한 기쁨은 항상 유지돼야 되죠. 말씀 좋아하다 나중에 조직 좋아하고 말씀 좋아하다 나중에 교회 부흥되는 것을 좋아해 버리면, 그것은 이미 주님의 손밖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처음도 말씀으로, 쓰지만 말씀으로서 지금도 그것보다 더 쓴 말씀이 우리 속에 늘 있기를 바랍니다. 같이 쓰기 때문에 그래서 비밀이죠. 끝으로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같은 신세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잘 난체 하는 순간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사오니 그 말씀이 남을 두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오늘날 매일같이 우리보고 자책하고 책망하는 그런 말씀인 줄 압니다. 그 쓰디 쓴 말씀이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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