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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01:26:27 조회 : 2127         
예상 외의 일 130620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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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2.222) 13-07-01 22:03 
가락교회-70이레 논문(예상외의 일)130620-22강a -이 근호 목사

229페이지 [70년 포로 기간의 의미] 이렇게 돼 있는데 여기『다니엘은 인간이다.』라고 돼 있죠. 말 하나 마나 아닙니까? 다니엘은 인간이고 다니엘이 괴물도 아니고, 제가 이 말을 쓴 이유가 다니엘은 인간이다 하는 것은 다니엘은 다른 사람과 다른 선지자다. 그런 뜻이거든요. 다니엘은 선지자다, 라는 말하고 다니엘은 인간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육이다.』돼 있죠.

다니엘은 인간이다. 그 다음에 육이다. 이렇게 돼 있을 때 그 뒤에 『따라서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해명한다.』는 말이 따라 나옵니다. 집사님이 이 책이 어렵다 하니까 설명을 하나하나 해야 되겠는데요. 왜 우리 본인이 신자 돼야 됩니까? 이런 질문, 왜 우리가 신자 돼야 되죠? 그냥 인간으로 살면 안 되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뭔가 안 되고 신자가 되어야 구원 받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뭐 문제가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냥 인간으로 살면 안 되고 신자가 돼야 된다는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이건 본디 우리 모습이 아니다. 창조했던 그 자리는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다니엘이 등장했습니다. 그럼 다니엘은 우리하고 달라요. 그분은 선지자입니다. 그분이 선지자란 말은 그분과 우리 일상적인 우리와 다니엘과 차이점이 뭐냐 다니엘 뒤에는 어떤 분이 계셔요. 다니엘을 선지자 되게 만든 분이 연결돼 있고, 인간은 육으로 다 툭툭 끊어져서 개별자, 지밖에 모르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육이다. 다니엘이다. 역사로 해명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역사적으로 해명한다는 말은 인간이 신과 통한다. 신과 통할 때 그 방법이 어떤 방법으로 신과 통할 수 있습니까? 그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신과 통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역사적으로 해명해야 돼요. 역사적으로 모든 역사의 핵심은 뭐냐 하면 ‘신과 통하기’입니다. 서양의 역사, 동양의 역사, 모든 역사.

역사를 공부해 보면 그 원천을 뿌리를 캐보면 시시하게 왕이 인간하고 상대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다 지보다 못한 거니까, 지는 갑이고 을이니까 시시하다 하고 남아 있는 건 신만 남아있는 거예요. 천지자연의 가뭄과 비와 이런 모든 걸 관장하는 신, 신과 통하면 드디어 인생은 더 이상 미지의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미지의 것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신만 알면 드디어 유토피아가 돼요. 조 용필이가 노래 불렀던 ‘미지의 세계로~♬’ 이런 가사가 있어요. 옛날부터 왕들과 소위 고위직들은 신과 통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겁니다. 할 때 옆에서 다 조언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오는데 그 중에 첫 째는 꿈, ‘왕이여 꿈꾸죠?’ ‘꿈꾸지.’ ‘그 꿈이 신의 계시입니다.’ 요렇게 알랑방귀를 뀌는 인간이 많이 있어요. 왜 꿈을 신의 계시라고 간주했느냐 하면 해몽은 누구 담당이다? 자기 담당이잖아요. 해몽 해주고 자기는 고위직에 앉는 거예요. 그게 다니엘을 보면 느부갓네살 옆에 많잖아요. 박사들 있죠. 도사들 이런 사람들. 왕은 신과 통하고 싶고 왕이 신과 통해버리면 국민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할 수 있습니다.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잖아요. 그럼 부조, 부조는 돌출된 조각을 말하는데 부조에 앗수르를 대항한 것처럼 자기의 전쟁의 기념한 글이나 시들을 해놨어요.  해 놓을 때 꼭 거기 붙는 게 뭐냐 하면 ‘위대하신 신의 능력으로 내가 승리했다.’ 이 말이거든요. 그건 뭐냐 하면 나는 신을 통하기 때문에 내 자체가 곧 신의 뜻이다. 내가 내뱉는 말은 곧 신의 법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기 때문에 내가 나가는 전쟁은 승리케 하셔서 이 나라가 이렇게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나, 이 왕을 볼 때는 뭐처럼 섬겨라? 신을 섬기듯이 섬겨야 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궁금해 하는 영혼불멸이니까 죽어서 좋은 나라 천국 가는 것도 유일하게 통로가 있는데 통로가 바로 내 말을 듣는 것은 곧 너희들은 신의 말을 듣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서도 좋은 나라에 올 것이다. 라는 거예요. 아직도 이런 나라 가까이 있죠? 휴전선 너머에 유훈통치 하는데, 정신세계를 장악하는 거.

그리고 모든 민족이 다 그래요. 우리나라 민족들은 단군의 자손이라 하는데, 단군이라 하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단군은 우랄알타이 원어에 의하면 무당입니다. 무당이 곧 뭐냐 하면 왕 이예요. 왕이 무당이고 무당이 왕입니다. 이 말은 일반 사람들이 신과 통하지 아니하면 왕으로 간주를 안 해줍니다. 항상 대통령이든 지도자든 신기한 기적들이 있어야 돼요. 그걸 두 자로 신화라 합니다. 신화는 꿈, 이렇게 내려오는 전설이죠. 신화가 부족국가에서 전통적인 도시국가, 또는 씨족문화에서 도시국가가 확립되면 여기는 왕이 신과 통하는 사람 되고, 그렇다면 왕에 의해서 지배권이 행사하게 되면 그게 법전이 되고 법전이 뭐냐, 이게 신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도시가 정착되려면 농경시대가 돼야 돼요. 농경시대가 되면 제일 중요한 건  물을 대는 관개시설입니다. 관개시설이 되어 물을 잘 대면 노동을 투입한 것보다 잉여, 많은 곡식이 축적이 됩니다. 그러면 창고 져야 되죠. 그러면 곡식 축적한 거 계산하니까 수확이 발달하죠. 관개시설하게 되면 토목측정이 필요하죠. 그리고 그것을 일괄적으로 물 댈 때 지시, 명령, 통합하는 체제가 있어야 되는데 그 우두머리의 지시에 따라줘야 돼요.

유목생활은 자기 양 자기가 알아서 키우면 되지만, 농사라 하는 것은 같이 힘을 합쳐야 돼요. 힘을 합치려면 누가 지도자가 있어서 지시, 명령을 해줘야 되거든요. 그걸 옛날에 누가 했느냐 하면 왕이 한 겁니다. 그래서 도시국가가 생기면 왕은 자동적으로 누가 왕이 되기 마련이고, 그 왕은 가뭄과 비등을 관장하면서 신과 통할 때 그 밑에 있는 백성들은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는 겁니다. 괜히 독재가 아니에요. 그러면 힘은 어떻게 직결됩니까? 왕에게 직결되겠죠.

여러분들이 힘이 생기면 힘 가지고 뭐 할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돈 힘이나 권력이나 하여튼 힘이 세다, 그러면 그거 가지고 힘을 그냥 묵혀둡니까? 아니면 어디에 쓸 겁니까? 주변에 있는 힘들을 강탈하는데, 약탈하는데 사용되죠.

성경에 나와 있는,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전쟁은 이게 출발점이 힘 있는 데서부터 그 힘을 약탈하는데다 집어넣는 겁니다. 농사가 잘되니까 돈이 많아져서 돈으로 놀고 있는 용병들을 고용을 해요. 그 용병들이 하는 주특기가 뭐냐 하면 전쟁하는 겁니다. 전쟁하고 월급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용병 가지고 뭐하는 겁니까? 그냥 수비하려고 합니까? 방어하려고 용병을 사요? 그 힘은 주체할 수 없는 힘은 주변의 있는 힘을 약탈하고 강탈해야 이게 권력의 속성입니다. 약탈해서 본 국가에 더욱 더 모든 전리품들이 집약이 되는 그런 식으로 활용이 돼요.

저는 컴퓨터 게임이나 고스톱을 안 하는데 컴퓨터 게임할 때 사이버 머니(money)라 합니까? 돈 많은 사람이 그거 가지고 뭐하던가요? 계속해서 남의 사이버 머니를 강탈하는데 사용되죠. 그걸 현찰로 바꿀 수도 있고. 게임하다 보면 강한 자에게는 주춤하고 꼭 약한 것들에게는 있는 것도 다 뺏어요. 사이버게임에서 반드시 그래요. 이게 뭐냐, 힘 가진 속성 이예요. 모든 속성이 그렇습니다.

집사님이 회사 잘되면 나중에 옆 회사 인수 다할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돼 있어요. 힘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속성이 있어요. 힘은 남아도는 힘은 약탈을 해야 힘이 힘 값을 해요. 거기에 약자로 누가 치느냐, 이스라엘과 유다가 치고 그 치면서 당하기만 하는 게 누구냐,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

그래서 주의 이름이 당하기만 하는 게 아니고 발끈하죠. 발끈하면 인간의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고 주의 방법으로 그 강대국이 폭삭 망해버립니다. ‘어디 누굴 건드려? 어디 감히 인간이 신의 이름을 건드려?’ 그쪽도 신의 이름이니까. 그러니까 우상 신과 신의 전쟁에서 항상 여호와가 승리하게끔 하기 위해서 자기백성들을 약한 자로, 누구나 넘볼 수 있는 약자로 만들죠.

여러분, 강아지 키우면 힘 센 강아지, 큰 강아지가 꼭 삽살개 같은 개가 있으면 꼭 시비 걸잖아요. 뒷다리를 물든지. 이것이 악마의 본성입니다. 이게 육 이예요. 이게 역사고.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왕이 처음에 신과 내통할 때 주변에서 어떻게 하느냐, 첫 번째 꿈이라 했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왕만 내통하면 재미없잖아요. 어떻게 하느냐, 모든 사람도 다 같이 왕이 통하는 신과 통하면 왕은 더 신이 나겠죠. 왜, 자기는 우두머리니까. 그때 나온 것이 뭐냐 오감만족 이예요. 이건 옆에 있는 무당들이 다 해요. 신기한 거 보시면 신의 뜻입니다. 짜릿한 걸 느끼시면 그것도 신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약, 또는 엑스타지한 쾌락, 여기에 창남, 그리고 창녀들이 여기에 동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뭐도 준비 돼 있느냐 하면 대마초 같은 것도 준비 돼 있어요. 그리고 아주 자극적인 향도 준비 돼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찌들고 일상에서 오는 지루함과 권태로움이 쌓인다. 이런 장소는 주로 산 높은 데 있어요. 높은 곳이니까 옛날에 앗수르 신화에 보면 신은 항상 높은 곳, 하늘에 신이 있어요. 높은 곳에 있으면 신과 접촉하기가 쉽잖아요. 여기 있는 것보다는 태백산이나 설악산에 가면 뭔가 도를 닦는 것 같은.

높은 데서 일탈을 맛볼 수 있죠. 거기 가면 오감만족을 할 수 있는 자료들은 다 준비 돼 있습니다. 마약, 그리고 아름다운 남자들, 그걸 미동이라 해요. 아름다운 남자들, 그러니까 보통 열 살, 스무 살 먹은 젊은 20대 아이돌, 똥배 말고 초콜릿 복근이 있는 애들이 준비 돼 있고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미녀들, 쭉쭉 빵빵 아가씨들이 준비 돼 있고, 이건 그리스 로마도 나오고 모든 민족이 다 있어요. 구약에도 나와 있잖아요. 나와 있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뭐냐, 손님을 받아서 신이 여러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준비된, 이게 얼마나 신이 자비로운 신이예요? 일상에서 일탈을 해서 스트레스 받는 그들을 위해서 가끔씩 풀어주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참 하나님의 자비는 그런 쪽이야, 그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자비.

신과 어떻게 접촉하느냐, 그 방법을 했고, 처음에는 뭡니까? 왕 중심에 꿈 해몽이라든지, 신기한 거, 이게 더 확산되게 되면 이건 왕만 신과 내통하는 것이 아니고 이 왕이 신과 통하는 즐거움을 모든 백성에게 허락하기 위해서 높은 산에 산당이란 걸 져서 거기에서 무슨 만족했습니까? 오감만족! 눈으로 보는 것, 코로 맡는 것, 느끼는 것, 귀로 듣는 것, 이런 오감만족을 통해서 신과 접촉했다는 희열을 맛보게 해줌으로 말미암아 신과 통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나라는 everybody 하나님을 공히. 누구나 그 나라는 공히 그 신과 통하는 나라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질서가 잡히게   되는 겁니다. 도민을 벌해도 신의 이름으로 벌하고 상을 줘도 신의 이름으로 상을 주면 그 백성들은 납득이 되는 겁니다.

자,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는 어떻게 됩니까? 오감만족에서 더 나가면 그게 뭐냐, 법이 또 나와요.  첫 번째는 왕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기적들, 꿈과 해몽, 이것이 신과 통하는 방법이라면 두 번째는 오감만족 이예요. 쉽게 말하면 부흥회, 박수도 해병대 박수로 치고 오감만족, 세 번째는 법인데 신이 통하는 자가 내리는 법, 함무라비 법전 같은 겁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BC1700년경에 수메르가 망하고 그 다음에 아카드란 나라가 있었고 다음에 메소포타미아, 그 다음에 고 바벨론 나오고, 고 바벨론이 망하면서 앗수르가 등장해서 앗수르가 망한 것이 BC600년경이죠. 그 뒤에 신 바벨론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 메대 바사, 페르시아 나오고 페르시아는 이란이죠. 페르시아 다음에 헬라, 처음에 이라크, 에덴동산이 있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에덴동산 있던 자리를 계속 갈아치우기 하듯이 계속 누가 점령을 하는 거예요. 바벨탑 있던 그 장소를. 계속 그 중심으로 국가를 하면서 성경의 계시는 그런 역사적 모판위에서 성경의 계시가 기록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구심점은 세상 나라에서는 힘이 구심점이 되지만 정작 성경의 주인공, 주체가 누굽니까? 이건 애굽에서 올라온 아주 작은 나라, 성경에 보면 너희들이 숫자가 많지 않다. 의도적으로 숫자가 많지 않아요. 숫자가 적은 작은 나라, 작은 나라 수도 이름은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통하는 도성이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중심이란 말이 아니고 예루살렘이 나중에 어디로 가느냐 하면 살렘의 나라라 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위로 올라가 버려요. 위로 올라가면서 밑에는 필요 없잖아요. 필요 없으니까 불태워버린 거예요. 강대국이 와서 예루살렘을 불태워버리니까 전에 저희들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언약궤 있던 곳이고.’ 이렇게 주장했던 그것이 사실은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어떤 특정 공간과 특정 장소나 특정 법을 인간이 소유할 수가 없어요. 인간에게 소유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여호와를 특정 지점과 특정 공간 특정 법으로 이걸 계속 잡으려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신과 통하는 거니까. 아주 신기한 거니까. 그러니까 법궤를 만들면 법궤를 가지고 이용하려고 했고, 모세가 놋 뱀을 만드니까 놋 뱀을 섬기려고 했고, 기드온이 에봇을 입고 승리하니까 기드온에게 에봇을 입혀서 왕으로 삼으려 했고, 하여튼 눈에 띄는 이걸 고정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고정시켜서 국가적인 역사적인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놋 뱀도 불타 버리고 언약궤도 불타 버리고 거기에 있던 모든 것도 다 불타 버렸죠.

이제 신약에 와도 마찬가지에요. 신약에 와도 예수님이 마셨다는 성배, 다빈치코드에 나오잖아요. 성배 찾아 성배 했고, 동방교회 독일인가 어느 성당 거기 가면 예수님이 입었던 옷 조각 하나, 독일 어디에 가면 예수님이 찼던 창이 있고, 독일 쾰른 대성당에 가면 동방박사 유해가 거기 나오고, 스페인에 어디 가면 예수님의 어떤 유물도 있다 하고, 완전히 예수님을 분양한 모양이라. 아파트처럼 다 분양한 모양이라.

전부 다 그걸 쥐고 옛날 16세기부터 14세기까지는 소원이 뭐냐 하면 그곳 한 바퀴 순례 도는 게 소원 이예요. 그 순례 돌면서 도로가 발달된 겁니다. 그리고 그 순례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일으킨 전쟁이 뭐냐, 십자가 전쟁입니다. 귀족들이 돈을 아낌없이 제공한 것이 순례 코스가 이게 돈이 돼요. 순례 코스가 있는 그곳이 게스트 하우스에요. 모텔, 그게 장사가 된다니까요.

예루살렘을 누가 점거하느냐에 따라서 관광업계에 호황을 누리게 돼 있어요. 국가가 나서서 예루살렘을 보호해 줌으로 말미암아 종교, 교회로 봐서는 신앙심이 고조되니까 좋고, 귀족들은 장사가 되니까 좋고 투자한 밑천을 뽑아낸다는 걸로 보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 예루살렘에 뭐가 있겠어요? 솔로몬이 썼다던 황금, 솔로몬이 썼던 그 많은 거, 그런 것들을 하나만 건져도 국보급 이예요. 그리고 한 때 바티칸이 뭐가 됩니까?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수의 있잖아요. 그것 가지고 진품이니 가품이니 난리 죽이고 막상 동네사람 동원해서 조사해서 가짜로 드러났지만.

질문: 도로가 발달된 것은 예수님 오시기 위해서 신약과 구약 중간 세대…
답변: 로마 때 로마의 평화가 일단 성립됐습니다. 그 뒤에 로마가 국교가 되면서 유명한 곳마다 성당을 지어놓고 그곳이 순례 코스가 되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더 발달되죠. 역사적으로 말하면 로마에게만 했던 기독교가 이제 프랑스나 독일 같은 경우에 왕이 곧 교회 수장이 되면서 칼 대제 같은 사람, 기독교화란 말이 자기 통치 이데올로기였어요. 기독교를 옹호하는 겁니다. 왜, 신과 지상과 통하는 유일한 매개체가 누가 있는데? 자기가 있으니까. 그래서 자꾸 기독교를 권장할 수밖에 없고 거기에 대한 인프라가 구성돼야 돼요. 사회 간접 자본이 형성되어서 곳곳마다 성지 순례를 간 겁니다. 결국 …의 전쟁은 뭐냐 하면 그 중요한 성자인데 성자가 죽어도 그 죽은 것에서도 기대를 하기 때문에 왜, 성자는 죽어서도 하나님께 기도해주면 복을 받으니까, 성자 죽는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유럽에서는 영주들이 싸움을 벌이고 돈도 대주고, 서양역사가 그렇게 흘러갑니다.

어쨌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신과 어떻게 통하느냐,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신과 어떻게 통할 수 있느냐 이 말 이예요.

그럼 다니엘은 뭐예요? 다니엘에 등장한 존재의 이유는 뭐냐 하면 다니엘은 지난 시간에 언급했습니다마는 요것만 생각하면 돼요. 다니엘 존재 이유가 뭡니까? 누가 물어보면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다니엘은 언약이다. 하나님의 약속 이예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겁니다. 다니엘은 뭐 우리 같은 인간이고 볼품없는데 다니엘을 칭칭 감고 있는 게 언약 이예요. 왜냐 하면 다니엘 이름이 뭐라 했습니까? 人子(인자)니까 요 인자는 새 언약을 완성할 분이 인자로 오시거든요. 언약을 완성하러 인자로 오신다는 말은 다니엘에게 일어났던 상황을 그대로 성취하시면서 나타나거든 그분이 메시아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니엘이 인자기 때문에 다니엘에게 일어났던 것을 성취하는 차원에서 오신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메시아는 그냥 홀라당 오시는 게 아니고 미리 선지자를 보내고 오는데 선지자와 메시아가 연결돼 있어요. 이 연결 사슬이 뭐냐, 언약이라는 겁니다.

이 언약이 왜 중요하냐 하면 오늘날 성도는 자기가 알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옛날 다니엘이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에 합류된 것처럼 오늘날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언약 적으로 합류가 돼 있어서 이 언약이란 것은 우주 정거장에서 도킹할 때 통하는 게 있잖아요. 터널이 만들어 지면 우주인들이 기어가서 밥 먹고 오고 다시 와서 연구하고 하잖아요. 끊어지면 안 되잖아요. 끊어지면 ‘내 우주선이 날라 간다.’  하고 밥도 못 먹잖아요. 주님하고 우리하고 우주 도킹이 되는 거예요. 이 도킹 관계를 뭐라고요? 언약 적 관계에요. 언약 적 관계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것이 이게 쏟아져 내려오는 겁니다. 우당탕탕 하면서 쏟아져 내려와요.

냉커피 할 때 얼음조각 넣을 때 소리가 요란하잖아요. 우당탕탕 하잖아요. 주님께서 우리라는 몸에다 주님의 얼음조각이 들어온 거예요. 얼음조각을 넣고 그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우리 이름은 없어요. 우리가 인자로 다루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이름이던지 이 근호든 누구든 그건 묻지도 않아요. 주님의 이름으로 다루어지는 겁니다. 주의 이름!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위 돌에다 새 이름, 자기 이름을 새겨요. 우리는 일종의 문신을 갖고 있는 겁니다. 언약 적인 문신, 언약 적 문신은 문신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께서 이렇게 오시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다른 데 보면 이걸 인치심이라 돼 했고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그걸 성령의 인치심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소나 말의 주인이 내 것이라고 표시하기 위해서 낙인을 찍었죠. 불쌍하죠. 벌겋게 달군 것으로 지지직 찍었죠. 옛날 개척시대 보면 노예를 낙인찍잖아요. 그 낙인이 바로 예수님의 인치심인데 그 인 치신 144.000에 해당되는 사람만 표시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우리만 인 친 게 아니고 우리 말고 다른 사람도 낙인이 있어요. 짐승의 인, 666이란 짐승의 숫자도 있는 거예요. 이것은 666 숫자. 바코드가 문제가 아니라 노는 기능, 평소에 살아가는 삶의 패턴이나 지향점이 달라요. 그 자체가 이미 다른 데 도킹 됐기 때문에 죽기를 무서워하고 종노릇하는 것은 666, 이건 있으나 마나 딱 보면 전부 다 마귀의 아들들처럼 살아요. 그저 자기 공로만 내세우고 자기 의만 죽자고 마지막까지 붙들고.

우리는 날마다 우리 모가지 쳐야 돼요. 날마다 우리 모가지 쳐야 됩니다. 지 모가지 안치고 나서면 안 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가지 쳐서 목 없는 미녀, 모가지 쳐야 돼요. 항상 우리는 얼굴 있으면 안 돼요. 우리의 표정? 우리의 표정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표정 자체는 주님이 박아 놓은 그 표정이 표정이지, 우리 표정은 아무 씨잘 데 없는 표정입니다.

우리가 울잖아요. 주께서는 뭐라 합니다. ‘니가 왜 우나? 니가 무슨 권리로 우나? 니가 울 쨉도 못 되는 게 왜 우느냐, 왜 찔찔 짜느냐? 니가 왜 우는데?’ 말이죠. 우리는 울 권리도 없고 울 자격도 없어요. 집에서 가만히 울어보세요. 귀신인지 알고… 강아지는 밥 안 줄 때는 그때는 깽깽거리죠. 왜냐 하면 우리는 육신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다루어질 때만 울든지 웃든지 해야 되지, 본인이 알아서 본인이 생각해서 상상해서 울 입장도 못 됩니다.

요번에 수련회 때 전도서 할 거예요. 전도서 특징이 뭐냐 하면 울지 마라, 예요. Don't cry to me argentina 에요.  아르젠티나, 날 위해서 울지 마라. 울 일도 없어요. 그저 웃고 살아라, 이 말 이예요. 니가 뭔데 우나, 니가 이 세상 무슨 관계있다고 우느냐, 니가 운다는 것은 내 꺼 따로 챙기겠다는 뜻이거든요. 그걸 왜 챙깁니까? 반칙이지.

언약이라 하는 것은 결국 들어오게 되면 뭔 뜻이냐 하면 이겁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전부 다 새로 시작해요. 항상 매일같이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오늘 아침의 표정은 모가지 날라 가고 아침에 눈 뜨면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늘 새로 시작하는데 내가 하는 새로운 시작점이 아니고 우리가 모르는 시작점에서 우리를 매일같이 새롭게 시작하도록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예상한 게 아니고, 예상 못할 시작점을 또 다시 하루하루 과오로서 주시는 겁니다.

시작점을 잘 몰랐던 예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비유가 나오죠. 포도원비유가 아침 10시에 온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 생각에 모든 것의 시작점은 언제입니까? 아침 10시부터예요. 자기는 자기의 시작점에 주님이 동의한 줄 알았죠. 10시까지 왔기 때문에 자기는 계산하는 거예요. 10시, 11시, 12시,… 아르바이트 7시간 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부러 먼저 온 사람을 임금 주는 게 아니고 일부러 제일 나중 온 사람부터 하죠. 나중에 온 사람은 마지막으로 와서 1시간 일 했잖아요. 1시간 일하고 요새는 돈 만원 받았다 칩시다. 1시간에 만원이니까 첫 번째 온 사람은 계산하는 거예요. 한 시간에 만원, 오늘 7만원, 이렇게 생각했는데 제일 먼저 온 사람을 얼마 줬습니까? 달랑 만원 줬잖아요. 똑같이 줬죠. 똑같음이 그 사람한테는 불평등한 하나님으로 비취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잘못된 겁니까? 시작점이 잘못된 거예요. 언약을 모르는 거예요. 아침 10시에 왔잖아요. 그럼 11시까지 일했잖아요. 11시부터 새로 언약이 투입됐다고 보세요. 또 1시간 일했잖아요. 결국 똑같이 돼야 돼요. 결국은 우리는 놀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무익했는데 주께서 천국이라는 곳은 노동의 양만큼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라 하는 곳은 줄 필요도 없는 인간에게 그냥 무상으로 준다는 것을 가지고 1시간 일함으로서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이것은 내 쪽에서 시작점을 잡을 수 없고 시작점이 어디 있다? 저쪽, 주님의 천국에서부터 라디오 안테나처럼 죽죽죽 뻗어져 나온 거예요. 그래서 나의 가슴을 톡! 건드리니까 찌지직! 전기가 오죠. 톡 건드리면 톡 건드린 그것이 파이프가 연결돼 있고 그 위에서부터 오는 그 천국의 내용물이 얼음조각 내려오듯이 두르르 쏟아지죠. 쏟아져서 주님의 천국의 모습이 마구 쏟아지니까 우리는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고백을 매일같이 언약에 의해서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다니엘의 특징은 뭐냐 하면 다니엘이 꿈을 예상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의 하루, 하루의 삶은 본인이 과거에 있던 익히 아는 것을 무산시킵니다. 내가 이 정도 은혜 받았으니까 앞으로 내일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모든 예산은 다 부정당해요. 이것은 다니엘을 끌어가는 것은 과거에서 미는 식이 아니라, 미래에서 당겨주는 식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어려운 거 한번 해볼까요? 예수님이 출생했잖아요.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세례 받았죠. 그리고 성장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다음에 승천하시고 그 다음에 강림하시죠.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에서 사건의 순서죠. 여기서 시간이 정지된다면 이 시간은 인간이 자기 자력에 의해서 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들어가죠.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대신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은 이거예요. 내가 언젠가 어느 동네에서 어느 집에서 태어났다. 자기 출생. 나는 어느 학교 출신이다. 초등학교. 나는 중학교 어디 나왔고 고등학교 어디 나왔고 대학교 어디 나왔고 유학까지 갔다 왔다. 이렇게 되게 되면 요 시간에 흐르는 주체는 누굽니까? 오직 자기밖에 없죠. 그러면 자기의 시간에서 요 안에서는 자기의 존재가 지속성을 갖고 있죠. 그걸 존재의 지속성. 존재의 지속성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것이 시간관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느끼는 시간이라 하는 것은, 집사님 느끼는 시간이 달라요. 왜, 집사님 나름대로의 자기 실존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려면 거기에 맞추어서 집사님이 느끼는 시간이 따로 형성돼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주체의 연속성이 우선이기 때문에 시간도 각자, 각자 자기 시간, 또는 자기 역사관이 따로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올린 글인가, 종속된 세월이란 글을 십자가마을에 올렸죠. 종속된 세월이란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인생, 돌아볼 수 있는 자기 인생, 자기 역사가 있는 이상 그게 돌아보든가, 찔러보든가, 어떻게 하든 그 자체가 이미 근심 걱정을 유발하는 거예요. 나의 역사, 나의 인생이 있다는 그 자체가 주님께 종속을, 언약을 일단 끊어놓고 시작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게 의미가 없는데 우리는 자꾸 기대를 하게 돼요. 그리워하게 되면 언젠가 만나게 된다는 그 영화처럼,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겠지만~♬ 어느 영화처럼.’ 이게 자기가 영화를 찍고 있고 자기가 그 영화의 주인공 돼 있으니까 이게 자기한테 근심 걱정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는 언약 적으로 하게 되면 주님의 시간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는 강림이나 초림이나 재림이나 이거는 동시성 이예요. 왜, 언제 오시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실 분이 그분이라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분이라면 오시는 분도 그분 이예요. 그분이 오신다 하는 것이 중요하지, 언제 오시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이 언제 올까를 기다린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 해놓고 안 믿고 자기 역사, 시간대에다 주님이 참여하기를 고대하기 때문에 이런 기다림은 그야말로 기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의 기다림 이예요. 에이, 씨 2019년보다 1999년도 9월에 온다더니 에이, 씨, 안 믿는다. 자기 시나리오를 짜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천지고 구천지고 전부 다 한국교회가 자기 시간을 딱딱 마작 하듯이 숫자 맞춰서 다 해놓고 그 다음에 주님이 어느 때 오는가, 그걸 기다리는 거예요.

주님이 미쳤습니까? 개인 시간대에 참여하게. 어떻게 오는가? 그걸 피해서 오죠. 그걸 도적같이 오신다. 그걸 피해서 오는 거예요. 요새 도적같이 오신다 해서 가스관에 페인트칠해서 잡히는 수도 있다마는…ㅎ 우리가 예상한 것은 다 피해버려요. 우리가 오라고 기대한 건 다 피하는 이유가 그 우리가 계산한 것은 우리의 시간대, 나의 역사를 그냥 쥐고 있는 거기 때문에 그렇게 돼 버리면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합세하는 거기 때문에 구원자체가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고생했다 하잖아요. 고생할 것 같으면 출애굽이 필요가 없어요. 왜, 고생할 것 같으면 고생의 원인이 뭡니까? 바로가 압제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능력껏 바로 자리에다 히브리인 대통령 뽑아 세우면 돼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자기 백성이 고통이 없을 거 아닙니까? 멸절 시켜버리죠. 히브리인들이 관리자가 되고 그동안 애먹였던 애굽인들을 아예 노예로 부려버리면 그렇게 신나는 반전이 어디 있어요? 멋있지 않습니까? 구박주고 꿀밤 주고 ‘니가 우리가 이런 팔자 될지 꿈에도 생각 못했지? 우리 여호와 하나님 덕분이야.’ 이러면 신날 건데 주님께서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뭐라 합니까? ‘잊어라, 니는 따로 할 일이 있다. 나가자.’ 이러는 거예요.

나가자, 하니까 막상 주님의 원수가 누구였습니까? 고통스럽다고 주님께 부르짖던 그 인간들이 자꾸 어디로 돌아가려 해요? 자기의 시간대가 형성되었던 애굽 없이는 자기 추억도 없거든요. 자기 추억이 기다리고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애굽에서 옆집에 사는 아가씨하고 사귀었다면 사귄 머슴아가 출애굽 돼서 광야로 나갔다면 걔는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을 거예요. 왜, 자기 사랑하는 여인이 지금도 자기 돌아오기를 기다리니까. 나오면서 작별인사도 못하고 왔기 때문에. 아마 몰래 탈영해서 다시 애굽으로 갔을 거예요. 내가 천국 안 가면 안 갔지 너와 헤어질 수는 없다. 위대한 사랑의 승리 아닙니까?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거기다 제가 집어넣어야 한 것은 사랑하는 애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주께서는 처음부터 출애굽 이예요. 처음부터 뭔가 강제로 이렇게 분리시키는, 찢어버리려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우리는 옛날 추억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고수하고 그 안에서 진정 나다운 내가 거기서만 있으리라고 우리는 굳게 생각하는데 주께서는 찢어지니까 결국은 우리가 들통 난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우상 이예요.

우리는 백설 공주, 신데렐라를 보면서 얼마나 거기에 맞춤 남자가 나타나기를 얼마나 기다렸어요? 일부러 신발도 한번 던져 놓고, 왜 신발 찾아오는 왕자가 있나 해서, 신발 찾아오는 자가 나중에 꼽추이면 기겁을 할 텐데.ㅎ

모든 우리가 못 다한 한, 이 땅에서 그리워했는데 성취되지 못한 그 한을 드라마 같은 것으로 대충 때우고 하잖아요. 잘사는 집안에 아버지 죽고 난 뒤에 한꺼번에 몽땅 망해서 다 이혼하고 하는 드라마 있잖아요. 오로라 공주라고. 그걸 보면 우리가 드라마 같은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걸 가상세계. 우리는 결국 우리자신이 뭐다? 가상세계 주인공이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작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자신의 허깨비가 돼요. 그걸 성경에서는 안개라 해요. 우리 자신이 있다가도 없는 안개 같은 존재, 평생 꿈만 꾸다가 그야말로 꿈처럼 죽어버리면 처음에는 울고불고 하다가 몇 개월 지나버리면 엄마 죽었다고 좋다고, 아빠 죽었다고 좋다고 유산 갈라먹기 싸움한다고 그 모습이 훤히 보인다 이 말이죠. 잊어진 존재예요. 결국은 우리는 유명했다 하지만 돌아서면 다 잊혀지는, 나는 김대중 대통령 아직도 죽은지도 몰라. 기억도 안 나. 다 잊어진 존재예요. 사람이 기억할 때는 필요할 경우에만 기억에 남지, 필요 없는 것은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이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우리가 육신이기 때문에 이길 수 없는 너를 거기서부터 구출해줄게, 라는 약속이 언약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구출해줄게! 안 됩니다. 안 되는 게 분명하지?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구출해줄게. 니가 안 되기 때문에 내가 구출해줄게.’ 이게 구원입니다. 구출되기 전에는 우리는 철저하게 안 됨이 먼저 전제가 돼야 돼요. 나는 절대로 안 된다.

어제 수요일 날 뭐라 설교했습니까? 우리는 창녀라는 것, 세상으로부터 탈출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세상하고 잘 통하고 세상과 친밀하고 입만 열면 유행가고 어떻게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와 닿는지, 예수님은 변호 안 되고 같은 사람 앞에서는 변호하고 싶고 서로 통하는 게 있어.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을뿐더러 본인이 벗어나지 않으려고 해요.

만약에 이 땅에서 축구 좋아하는 사람이 만약 천국 가세요. 해도  천국에도 축구 없어요. 축구 없는 나라 같으면 내가 안 간다는 거예요. 축구 없는 나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야구 없는 나라 무슨 재미로 살아요? 박지성이하고 누가 결혼하면  그 재미로 사는데, 이 땅에서 연애 인 씹는 재미로 사는데 연애 인 없는 천국 같으면 무슨 낙으로 삽니까?

그만큼 우리 성경이라 하는 것은 얕잡아 보지 마세요. 철저하게 우리를 있는 대로 다 들추어내면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 세상이 너무 좋아서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새 기독교가 무슨 기독교가 됐느냐 하면 여러분, 클래식 반대말이 뭐죠? 대중가요죠. 지금은 대중문화가 주류가 됐는데, 기독교가 뭐냐 하면 요새는 대중 기독교예요. 세상적인 즐거움을 용납해주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 모임으로서 서로 낯짝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 그러니까 대중 기독교는 힘 있고 돈 있고 이런 사람들이 중요하죠. 하나의 쇠를 모으는 지남철이 되겠죠.

그러면 언약에서는 다니엘이 중심이죠. 그러면 다니엘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게 뭐죠? 지금 다니엘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타입 이예요. 다니엘에 언약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싫어버린 바 된 대우를 받는 이유가 다니엘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이 땅에서 분리돼야 될 세계에서 언약으로 이렇게 주입되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게 커피에다 얼음을 넣잖아요. 다니엘을 입 벌려 놓고 하늘나라 얼음 조각을 막 집어넣으니까 기존 세계에서 꿈을 꾸던 이런 짐승의 사람들한테는 이게 납득이 됩니까? 안 됩니까? 전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되니까 다니엘 주변에 누가 모이겠어요? 안 모이겠어요? 모여들지를 않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다니엘이 있으면 다니엘 속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70년 포로생활을 집어넣어요. 70년 포로생활을 다니엘 속에 한꺼번에 집어넣으면 70년 동안 이스라엘이 포로생활 해야 될 이유가 들어오는 셈이 되죠. ‘야, 다니엘아.’ ‘예’ 70년 포로생활 하는 이유가 들어와야 돼요. 그들은 당연하게 죄죠. 죄면서 죄가 성경의 모든 죄는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 죄가 뭐냐 하면 우상숭배예요.

우상숭배! 자, 마지막에 좀 어려운 거 나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우상숭배가 죄가 되죠. 그러나 우상숭배의 죄는 우상숭배 하는 사람은 자기가 우상숭배 했다고 전혀 생각을 못합니다. 자기가 우상숭배 했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우상숭배를 그만두죠. 저들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본 거예요. 최선을 다하여.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지, 예수 믿는 게 우상숭배라는 생각을 도저히 안 하겠죠. 이처럼 이스라엘, 유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죄 지으면서도 포로생활하면서도 당체 뭐가 죄인지 모르는 거예요. 뭐가 죄인지 모르는데 다니엘이 다니엘 속에 70년 포로생활을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다니엘이 차후 적으로 왜 우리는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할 정도로 우상숭배 자이냐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니엘을 둘러 싼 이 세력이 무슨 세력이냐 하면 짐승의 세력이거든요. 결국 그동안 짐승의 세력 속에 유다 나라가 이렇게 주먹이 있다면 편 손으로 주먹을 덮잖아요. 주먹이 앙꼬라면 진 빵으로 덮듯이 다니엘과 세 친구를 짐승이 덮어버리면 요 안에서 70년 포로 잡힌 이유가 나옵니다.

이유가 뭐냐, 이 바깥의 덮인 것을 짐승으로 다니엘과 세 친구는 알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 유다 사람들은 이걸 몰랐던 거예요. 이스라엘 유지하는 권력자들이 그게 짐승에 의해서 파견된 짐승의 일꾼이란 사실을 본인들이 몰라서 같이 한 통속돼서 놀아난 거예요. 유일하게 안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미가야. 선지자는 막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 왕하고 싸우는 거예요. ‘왕이여,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왕이여 화내십니다. 이건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라고 했지만 힘이 없어. 약해. 에이, 죽어버려. 사가랴 같은 사람은 억울하게 죽잖아요. 아벨의 피에서 사가랴의 피까지 너희가 담당한다. 많은 선지자를 보냈지만 미가야 같은 경우는 하늘나라 이야기한다고 뺨까지 맞고요. 마가야는 400명이 다 동의하는데 니가 뭔데 아니오, 냐, 이게 어디서 왕을 힘들게 하고 니가 뭔데 우리를 거짓 선지자로 만들고, 니가 뭔데. 이런 식으로 모독을 받고.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오죽했으면 예레미야가 ‘에잇 때려지고 나 안 하련다.’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오늘날 목사님?, ‘나 이거 안 할래.‘ 하고 접어야 돼요. 도저히 해도 먹히지도 않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내가 미쳤어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도 이야기 몇 마디 하다가 에이, 씨 내가 괜히 말 꺼냈어. 이런 감이 와야 돼요. 그냥 통장만 하지 말고. 감을 느껴야 돼요. 이게 포함될 때 심각한 상태입니다. 그냥 같은 인정 많은 이웃이 아니고 짐승, 새로운 감각, 언약 적 감각이 있어야 돼요. 짐승에 의해서 만두피가 앙꼬 싸듯이 싼 거예요.

그럴 때 여기서 짐승인 것을 드러내는 짐승에 포로 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조국이었고 이제는 그 짐승을 내 때, 다니엘 때에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짐승의 속성답게 낱낱이 밝혀내는 작업을 다니엘을 통해서 폭발하듯이 퍼지면서 짐승의 구멍이 뚫리죠. 사자 굴에 집어넣으니까 기어 나오고 불 속에 집어넣으니까 기어 나오고, 뭔가 짐승의 세력에 누수가 생기는, 펑크가 나는, 야! 그 구멍 하나, 하나가 세상이 우리를 어찌할 수 없다는 구원의 출구입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42.222) 13-07-05 23:41 
가락교회-70이레 논문(예상외의 일)130620-22강b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그 70년이라는 실제 역사적 기간만 지나면 필히 하나님께서 서언은 다시 본래의 자리에 건축되리라 믿었고 하나님은 다시 그 성전에 임재하리라 여겼다. 그렇다면 지금의 포로 기간은 그냥 자숙하면서 고난 속에서 잠잠히 있으면서 그냥 속히 지나가기만 고대하면 되는 자체적으로 무의미한 시간이 될 것이다.』그렇게 무의미하게 보내느냐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70년 포로 기간 동안에 포로수용소에서 가만히 있었습니까? 인간은 쉬었지만 하나님은 나름대로 굉장히 분주하죠.

그 예를 한번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5장 1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그거만 딱 봅시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갔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궤는 누구 손에 있습니까? 블레셋 손에 있죠. 블레셋 손에 여호와 궤가 지금 잡혀 있잖아요. 그런데 그 뒤의 진행 상황을 보면 분명히 블레셋이 언약궤를 잡았는데 언약궤가 도리어 잡은 블레셋 나라를 완전히 조져놓죠. 거기에 다곤 신이 있었는데 다곤 신 앞에 언약궤를 안치하니까 다곤 신이 마치 사람 같아. 이게 엎드러져서 손목이 다 부러졌죠. 여기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그런데 원래 이러한 결과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칠 때 그때 기대했던 결과잖아요. 이스라엘 인간들이 기대했던 것은 우상인 다곤 신을 박살내면서 우상의 허실한 점을 폭로하는 그 점인데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능해서 못하고 무능하다고 포기한 상태에서 언약궤가 알아서 스스로 전진에 투입해서, 꼭 007 같아. 본인 혼자 올라가서 적토마가 혼자 다 해치우는 것처럼 그 잡았던 것이 엉망진창 만들어버리니까 그쪽에서 감당이 안 돼서 ‘제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사정해서 빈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활동은 인간이, 자기 백성이 있어야 활동합니까? 없어도 하나님 스스로 활동합니까? 스스로 활동하죠. 이걸 믿어야 이게 신앙인이다 말이죠. 오늘날 이게 믿어져야 신앙인 이예요. 내가 말씀 지키고 십일조 하고 이래서 신앙인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가 돼야 돼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마귀한테 요만큼도 오히려 마귀한테 지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원된 것은 내가 해내지 못한 것을 주께서 적토마처럼 혼자서 설쳐서 그 효과와 그 열매를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심으로 그 효력 덕분에 십자가의 공로 덕분에 우리는 아무 한 것도 없이 구원받는 거예요. 그게 신앙이죠.

그럼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 할 게 뭡니까? 이거 설교 해야죠. ‘여러분, 헌금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거 구원하고 아무 관계없습니다. 봉사했어요? 그거 구원하고 아무 관계없습니다.’ 이렇게 설교해야 된다 이 말이죠.

어제 수요일 날 예배 끝나고 누가 이야기하던데 교회에서 헌금을 했던 모양이라. 그래서 우리 교회 나오는 분의 아버지가 따로 다니는 교회가 있는데 헌금을 했는데 가만히 그들이 헌금을 계산해 보니까 모자랐던 모양이라. 교육관을 짓는지, 장로들이 전부 다 전경들이 시위 막을 때 팔로 막아서 못 나오게 하는 것처럼 교회 출입구를 딱 막아서 ‘헌금이 모자라니까 이 자리에서 헌금을 작정하고 나가라.‘고 이렇게 했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나오는 청년의 아버지가 ’나를 밟고 가라‘는 식으로 장로들의 순교자적인 의지를 이기지 못해서 몇 푼 쥐어주고 나왔는데 시험 들었답니다.

그 교회가 무슨 교회냐, 순복음 교회랍니다. 전주에 있는 순복음 교회. 그런데 차라리 순복음 교회가 참 난 착하다고 봐요. 너무 노골적이니까 착하잖아요. 쉽게 드러나잖아요. 그런데 한국 개혁주의 교회, 장로, 침례, 감리, 성결, 이거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이거는 몰래 요 짓하니까 더 미워. ‘돈 밝히는 건 옳지 않습니다.’ 요런 소리 하면서 돈 더 밝히니까 더 미운 거예요.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전혀 내 구원에 내 위치를 1센티미터도 천국으로 움직이지를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는 게 이게 이미 언약의 자리에요. 이게 시작점입니다. 내가 아는 시작점이 아니고 주께서 아시는 시작점부터 시작되는 것이 언약의 시작점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내가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하는 그 시작점을, 그 우리의 시선을 주께서 아는 시작점으로 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우리를 무장해제 하는 그 기간이 70년 포로 잡힌 기간 이예요. 포로 잡힘으로서 만두피가 짐승이라는 거, 기껏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라는 거.

그러면 짐승은 뭐냐, 전에 설교했지만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반복해야 돼요. 짐승의 특징은 뭐가 없다 했습니까?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으니까 우리가 상대할 대상이 안 됩니다. 우리가 뭘 상대한다는 거, 카메라, 물, 책, 상대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놓고 우리가 상대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강아지야’ 하면, 이건 미친 사람이죠. 강아지가 없는데 왜 강아지라 해요. 이름이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짐승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없다고 여기는 자리에서 짐승이 튀어나오니까 그 출몰은 우리 인간이 호출하거나 기대하거나 예상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 있던 하나님의 시원, 시초, 언약의 처음 자리, 하나님만 아시는 하나님과 결부돼 있는 어떤 정체 모를 어떤 대상, 그 대상을 주께서는 포로 잡혀가게 하는, 이스라엘로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그 자리에 그들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짐승의 이름으로 등장했는데 그 사람이 느부갓네살 이예요. 아! 느부갓네살이 짐승이라는 안목을 볼 줄 아는 것은 바로 인자가 되는 다니엘뿐! 다니엘과 다니엘 세 친구뿐이죠. 다른 사람은 그냥 느부갓네살. 일반적인 여러 임금 중에 한 사람, 그런데 다니엘의 계시에 의하면 그것은 짐승의 원류, 원본, 원천과 엮여져 있는 인물로 보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게 되죠. 그 꿈은 평소에 꿈 해몽을 하는, 아까 했죠? 신과 접촉하는 방법은 밑에서 왕이 꿈을 꾸면 신의 계시라고 해몽을 함으로서 그게 그 나라를 지배하는 법이 됐다 했죠. 그런데 그 전문 자들이 박사고 점쟁이인데 일종의 고위 관리예요. 가뭄이 온다. 비가 안 온다 할 때는 그 사람이 나와서 기우제를 드려야 되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꿈을 꾸는데 아무도 주변에 꿈 해몽을 하는 사람이 없죠. 느부갓네살은 미칠 지경입니다.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니들이 풀지 못하면 전부 다 죽여 버린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일괄해서 다 죽이는데 죽는 사람에 다니엘도 포함돼 있어요.

그러면 다니엘은 그 꿈의 내용을 압니까? 또 해석도 합니까? 본인도 몰라요. 그러니까 다니엘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아까 블레셋 때 언약궤가 혼자서 활동한 것처럼 다니엘도 마찬가지로 다니엘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다니엘로 하여금 꿈을 알게 하고 해석하게 하시는 그분은 절대로 포로 잡힌 이스라엘이지만 비록 짐승한테 잡혔지만 홀로 그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은 마음 놓고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시는 분이 현재 다니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포로 잡혀 있으면서도 진정한 자유를 느끼죠.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제압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한 한, 복음에 관한 한, 언약에 관한 한, 그 누구에게도 꿀릴 게 없습니다.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문 활짝 열고 기도하죠. 꿀릴 게 없어요. 다니엘 세 친구 절하라고? 다니엘 세 친구는 보란 듯이 문 활짝 열고 절하지 않아요.

이게 뭐냐 하면, 언약의 효과입니다. 신약에 오면 이게 성령의 효과! ‘니가 왜 그런 짓을 하느냐?’ 고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묻거든 ‘그 일은 내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한다.’고 하세요. 내가 알고 해버리면 이건 나의 의가 돼 버려요. 그래. 다니엘 보니까 사자 굴이 없나 해서 동물원에 가서 들어가려고 하지 마시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지 마세요. 못 하는 건 못하는 것이고, 할 수 있는 건 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의 계시적인 차원은 내가 내 입에서 ‘내가 한 게 아닙니다.’라는 소리가 나올만한 것만 주께서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괜히 할 말 있는지 로또 사지 마시고요, 로또 사서 당첨되거든 내가 한 게 아니고 ‘난 번호도 꿈에도 받은 적 없습니다.’ 하면 주께서 ‘사기는 왜 샀느냐?’ 이렇게 되기 때문에 그런 짓 하지 마시고, 누가 로또 사준다? 받으세요. 그리고 일주일 동안 꿈을 꾸세요. 일주일 동안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로또는 그 재미로 사는 겁니다. 일주일 동안 희망으로 살 의욕을 느끼는 재미로 사거든요.

다니엘 세 친구의 70년이란 개념은 다니엘도 몰랐고 포로 잡힌 사람도 몰라요. 70일 지나면 본토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본래의 성전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본래의 성전으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그냥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너를 시험케 했던 짐승이 본질과 정체를 밝히면서 돌아가야 구원의 마감이 되는 거예요.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냥 돌아가면 또 쫓겨 나와요. 짐승을 알고 짐승의 정체를 밝히고 그 짐승을 밝힘으로서 돌아가게 되면 두 번 다시 짐승에 빠지는 일이 없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대신 돌아 갈 장소가 전에 있던 지리적인 공간도 아니고 그 시간도 아니에요. 짐승이라는 그 시원적, 원초적인 상대자, 하나님만 아는 상대자가 등장하면서 거기에 부합되는 그 구원의 작업에 부합되는 시간과 공간도 따로 같이 병행해서 새롭게 거기 가미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전은 뭐냐 하면 그냥 하늘이 아니고 이 땅에 인자로 오신 그분이 가는 나라가 하늘나라예요.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 아니고 예수님이 가신 곳이 새롭게 하늘나라로 규정이 돼요. 기존 하늘은 그건 지상에 속합니다. 처음 듣는 말이죠. 기존에 우리가 보고 있는 하늘 있잖아요? 그 하늘은 이제는 수명이 다해서 우리 육체로서 발견하는 하늘은 하늘이 아니고 천정에 붙인 도배지라고 보면 돼요. 우리는 도배지 뒤에 뭐가 있는지 몰라요. 도배지가 뜯기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데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뭐냐 하면 이 땅에 인자로 오신 분이 가시는 그 공간이 곧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지금은 새 하늘과 새 땅은 백날 봐도 모르죠. 죽으면 볼 거예요. 죽으면 우리가 거기 갑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거지 나사로가 어느 품에 안겼죠? 아브라함이 뭐냐, 언약이죠. 아브라함 품에 안기잖아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자기는 죽으면 어느 품에 안긴다 했습니까? 예수 안! 새 언약, 아브라함은 십자가 지기 전이니까 아브라함 언약이지만 이건 새 언약이죠. 사도바울은 지금 예수님 안에 있어요. 엘리야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역시 주님 안에, 모세는? 역시 주님 안에. 그러니까 변화 산에서 엘리야, 모세 나왔잖아요. 지금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전부 다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강림이란 그 당사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으면 곧 그곳이 강림이고 강림을 이미 맛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70이레를 풀어야 되는 것은 방금 이야기한 그 과제입니다. 짐승이 등장하면서 짐승을 짐승답게 티 나게 만드는 그런 시간과 공간을 하나님이 따로 준비해 놓았다는 거예요. 준비를 할 때 준비물이 뭐냐,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짐승과 더불어 끄집어 낼 때는 미리 준비물이 있어요. 깔린 배경이 있습니다. 그 배경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은 죄 졌다는 겁니다. 죄 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 졌는데 그 죄는 그들의 죄가 되면 안 돼요. 보편적인 짐승이 되려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는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죄가 돼야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유다 나라가 지은 보편적인 죄는 어떤 죄냐 하면 지존의 눈에 보이는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세계관을, 하나님을 생각한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예루살렘에 있다. 하나님 구경하러 갈까? 얘들아.’ 유다나 이스라엘이, 만약에 해변 가에 있으면 ‘얘들아, 다음에는 유월절 절기기 때문에 하나님 보러 갈까?’ ‘어디 있는데?’ ‘예루살렘에 있어.’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예수님 어릴 때 부모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죠. 사흘 동안이나 찾아다녔는데, 그게 무슨 절기였습니까? 유월절 절기였는데 왜 부모들이 왜 거기 갔죠? 1년에 3번씩 남자들은 절기 지키러 갔잖아요. 그게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두 발로 걸어서 양 몰고 예루살렘 성전이 눈에 보이잖아요. 지금도 붉은 황금 돔이 예루살렘에 있어요. 지금 이슬람 구역에 있지만. 예루살렘이 4구역으로 나눠졌다 했죠. 동방교회 부동산 있는 거, 유대교, 그 다음에 이슬람 마오메트 하여튼 4구역으로 나눠져 있어요. 이방인 구역도 있는데.

현재 이슬람 구역에 예루살렘이 있잖아요. 그럼 눈에 보이잖아요. 지금도 서편에서 모자 쓰고 경건한 사람들이 앞뒤로 흔들면서 통곡의 벽에서 울고 있잖아요. 언제나 오십니까? 그럼 하나님이 ‘니 인간이나 바뀌어라. 니가 바뀌어라. 성전은 여기가 아니고 니 몸이 성전 돼.’ 마지막 때는 우리 몸이 성전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 공간 바뀌는 이것이 옛날에는 그럴 수 없어요.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지만, 예루살렘에 성전 있고 눈에 보이고 저 해변 가에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어서 1년에 세 번씩 마음을 먹고 가야 거기까지 가고, 거기 감란 산에 누가 온다? 감람산이 둘로 쪼개지면 메시아가 거기 서게 되면 그 서는 날짜가 있을 게 아닙니까? 고 날짜에 누가 온다? 고 공간에 메시아가 온다는 개념으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고대했던 겁니다.

그런데 막상 오신 예수님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바로 죄다. 너희 애비는 악마다. 죄가 너로 하여금 바로 이런 식으로 결코 구출되지 못하고 심령 적으로 정신적으로 절대적으로 그 사고방식, 그런 율법의 사고방식에서 스스로 깨뜨릴 수 없는 이미 죄로 가두어진 상태로 완벽하게 가둬진 상태에 누가 오느냐, 인자 되신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아무도 몰랐어요.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을 받은 사람들, 백부장이나 수로보니게 여인 이런 사람들, 얼마 전에 요한계시록 해석 할 때 했습니다. 주일 낮에 자기를 개라고, 이방인이라 우리는 애초부터 지옥 갈 인간인데 주인이 먹다가 에이 씨, 먹기 싫다. 하고 혹시 버린 거, 안 갖겠다고 버린 거, 암표 나온 거, 예약했다가 취소한 거, 고거 기다릴 것 같으면 얼마나 지는 마땅히 못 간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전전긍긍했겠습니까?

참, 그 사람이 만약에 서울대학교 나왔다 합시다. 서울대학교 나온 사람이 지보고 개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제가 재정부의 국토부 장관이라면 장관이 에헴, 나 장관인데, 이러지 나는 갭니다. 이런 사람 봤어요? 교회 가서. 그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개 같이 사는 노선 같으면 개가 되는데 이게 아니고 지가 돈 좀 있고 이런데 개? 삼성그룹 임원? 개라고 하기가 어려워요. 성령을 안 받으면 안 된다니까요. 목사 하고 있는데 목사가 ‘나는 갭니다.’ 하는 이런 목사 봤어요? 물론 개 같은 목사가 또 기어이 목사 쥐고 있으니 문제라.

철저하게 7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짐승 밑에서 유린 시킵니다. 다니엘이 독립운동 한 적 있습니까? 변또 가지고 폭탄 넣어서 던졌습니까? 이봉창처럼. 제가 주일 낮인가 했는데 모세가 독립운동 할 때 그때 사고방식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된다 했죠? 모세가 독립운동 할 때 애굽에서 내가 이 민족의 지도자다. 이름도 모세다. 물에서 건진 자다. 나 아니면 지도자 없다.‘ 라고 할 때 그때 모세가 생각했던 구원 개념, 그거 알아야 됩니다. 왜, 그게 엉터리기 때문에.

이미 예상하잖아요. 야, 폭력으로 애굽 사람 죽이면 사람들은 자기를 믿고 ‘모세, 모세, 모세, 모세,’ 외칠 것이고, 그럼 내가 기타 들고 앞장서면 나는 잔다르크가 되는 거죠. ‘신의 계시를 받았다.’ 이런 그림이 나오잖아요. 재설, 재설해서. 레미제라블 나오듯이. 그래서 뮤지컬 한 편 나온다니까.

그런데 막상 하나님 오니까 완전히 쭈그리 돼 버렸어요. 그리고 모세가 하는 말이 ‘나 하나님 일 할 자격 못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성경에 출애굽기 4장 보세요. 참 희한한 일이 있죠. 자기가 데리고 살 사람을 숙소에서 죽여 버립니다. 모세를. 모세가 지 마누라 아니면 죽을 뻔 했어요. 모세가 죽을 때 마누라가 우황청심환 먹였습니까? 허준 불러서 침 놨습니까? 모세가 어떻게 살았죠? 보세요. 모세가 진맥한 게 아니죠. 얼른 ‘내 아들 할례를 안 했구나.’ 할례 해서 떨어진 피 묻는 표피를 가지고 모세 사타구니에 집어던지니까 모세가 살아났잖아요. 무슨 그런 치료법이 다 있어요? 출애굽기 4장 이야기예요.

이게 뭐냐 하면 할례라는 언약을 성취하는 용도로서 출애굽 되는 거예요. 그래서 12장에 출애굽 할 때 모든 사람은 조건이 있어요. 그냥 양 잡는다고 피 바른다고 되는 게 아니고 조건은 뭐냐 할례를 다 행해야 돼요. 이건 뭐냐 하나님은 사람 건지는 중심이 아니고 언약을 건지는 중심으로 구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 마누라가 아이고, 당신은 오나가나 할 수 없이 당신은 무슨 남편이다? 피 남편! 누구 남편은 아니다? 내 남편은 아니다. 당신 피하고 놀아. 당신은 피를 위해서 존재하는 남편이지, 나 행복하게 해주라고 있는 남편이 아니다. 아이고, 이놈의 팔자. 피 남편이라. 이거 드라마 제작해야 돼, 피 남편!

다니엘을 보면서 느낀 점은 다니엘은 지금 입술이 타들어갑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아무 예상문제를 주지 않아요. 다니엘 보고 어떤 사적으로 프로젝트를 세우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만날 1년 목회 계획 세우는 건 목사들이나 하는 짓이지, 주님께서 1년 목회 프로젝트를 제시한 적 없어요. 1월 달에는 신년 축하 예배해서 뽑기 하고 2월 달부터 대 심방하고 3월 달에는… 4월 달에는 전도대회하고 5월 달에는 누구 불러서 간증 집회하고 이런 거 없어요. 6월 달에는 목돈 나오는 부활절, 7월 달에는 맥추 감사절, 꼭 돈만 생각해서 11월 달에는 기분 좋아, 추수감사절 돼서 돈 나오고 12월 달에는 성탄절이라 돈 나오죠. 헌금 내라고 봉투 돌리죠. 목회 계획은 돈 밖에 더 있습니까? 마지막에는 헌금 쓰려고 기다리고 있고. 이게 매니저인지 도대체. 그런 것은 미국으로 가서 경영 배우면 돼요. 리더쉽.

무슨 모세가 리더쉽이 있어요? 모세 리더쉽은 하나밖에 없어요. ‘나 안 하렵니다.’ 그래서 제목이 뭐냐 하면 서울 의존교회서 한 강의 제목이 ‘안 돼. 나는 못 합니다. 저 주의 일 못합니다.’

블레셋에 언약궤가 있을 때 바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홀로 하듯이 소년 다윗이 그 뒤쪽에 많은 사울 군대, 그리고 그 대표자, 키가 3미터 30, 키가 3미터 30이 대적하려면 적어도 사울 계산은 이쪽 이스라엘 대표자는 키가 4미터 30은 돼야 돼요. 저기 자오민이 나왔으면 여기는 키가 더 큰 한 기범이보다 더 큰 농구선수가 나와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는 소년 다윗! 그래서 소년 다윗이 하는 말이 ‘이 전쟁은 우리들에 속한 전쟁이 아니고 만군의 하나님이 하신다.’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여러분 하시는 대로 하세요. 지금 만군의 하나님께서 마귀와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스러기, 그 효과만 우리는 지금 염치없이 넙죽넙죽 받아먹고 사는 거예요. 맨날 같이 우리는 살려냄을 당하고 있습니다. 살 자격도 없는데 주께서 일을 치르시고 그 효과로 우리가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남들이 ‘당신은 참 열심히 산다.’ 고 할 때 이렇게 하세요. ‘나는 이렇게 해서 잘 산다.’ 하지 말고 ’나는 살려냄을 당하고 있습니다. 살려주니까 오늘도 재밌게 삽니다.‘ 이렇게 하시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잘 삽니까? 라는 그런 질문은 정답이 없는 질문 이예요.

자, 그렇다면 살려내는 것이 결국 70년인데 포로 잡힌 이 기간이 이스라엘 죄를 아는 기간이라 했죠. 죄를 안다는 것은 여기 맞은편에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짐승을 배치해 놓죠. 그렇다면 요러한 구조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 언약의 파이프 속, 이 자체가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렇게 챙겨야 구원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 구원은 구원 작업 속에 있으면 그게 구원 이예요. 우리는 아파트가 건립되고 그것을 내 등기로 소유할 때는 내 아파트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파트 지을 때 어깨에 자갈 시멘트 지고 올라가면 그게 구원 이예요. 하나님 일에 참여하면 그게 구원이라니까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보고 뭐라 합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했죠. 그런데 베드로가 뭐라 하느냐 하면 딱 보니까 옆에 요한이 있거든요. ’쟤는요?‘ 이렇게 하니까 주님 하는 말이 약을 올리잖아요. ” 내가 올 때까지 있더라도 니는 상관하지 마라.“ 그런데 그 말은 전부 다 각자, 각자 할당 받은 게 있기 때문에, 제가 로또 당첨되는 기계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당첨된 것은 36번이고 쟤는 4번인 거예요. 36번역할 하면 되고 4번역할 하면 되고 7번역할, 시집 못하는 역할하면 되고, 시집가면 시집가서 두 번 가면 두 번 가는 역할 하면 되고,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옆에 보고 ‘쟤는요?’ 하거든요. 쟤가 부럽다는 뜻이거든요. 그렇다면 니가 원치 않는 길이 의미가 없다고요. 내가 올 때까지 있다 할지라도 니는 거기에 관심 끊어라.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모든 것이 주의 일이 돼야 되지, 독자적인 ‘요것은 나의 일, 요한아 니 일은?’ 이렇게 비교대상 할 게 못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70년이라 하는 것은 요렇게 함으로서 아파트 건설 작정이 있었고 그 건설 작정에 베드로가 시멘트 메고 3층까지 올라가고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다니엘 세 친구도 나름대로 삽 들고 섞고 있고 각자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뭔가 들고 하고 있는데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주께서 삽질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걸 하면서 뭘 느낍니까? 우리는 뭘 해도 죄고 그리고 우리가 죄인 이유가 우리는 짐승을 이겨내지 못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붙여놨다는 것은 이렇게 붙여놓고 주께서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니가 이미 짐승을 이겼다. 짐승을 짐승이라고 파악한다는 것은 이미 니는 짐승의 권세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의미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봐야 될 것은 230페이지 봅시다. 그러면 이 70년이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데 우선 공간은 나중에 하고 시간부터 이야기할게요. 70년이라는 이것이 죄가 짐승으로 나눈다면 이것이 실제로는 70년이 아니고 기존 자체가 짐승의 나라니까, 이것이 70이레로 바뀝니다. 70년이라 하는 것은 1년, 2년, 3년, 4년, 제가 환갑 됐다고 권사님이 이쁜 옷을 하나 선물해 줬어요. 그런데 다음에 이 옷을 받으려면 내가 60년을 더 기다려야 돼요. 그렇잖아요. 120살 때 요거 하나 더 받아요. 내년 6월 달에 이거 못 받아요. 왜, 60년이 안 찼기 때문에. 그러면 이 선물은 60년 단위로 주는 거잖아요.

그러면 주님은 몇 년 단위로 주시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몇 년 단위로 주는 겁니까? 이게 70년 단위로 주면 안 돼요. 이게 70이레로,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게 되면 1년, 2년, 요런 계산으로서의 이레는 아니에요. 이게 1년 연자로 계산해 버리면 지구가 태양 도는 계산으로 해버리면 70☓7=490년 돼요. 그러면 그 차원이 1년, 2년 차원에서 못 벗어나요. 이거 못 벗어나면 인간은 짐승의 존재의 의미가 없어요. 맨 우리는 기존의 시간 속에 갇혀 있어서 구원 못 받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지금의 장로교, 여호와증인, 세대주의, 개혁주의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70이레 계산을 전부다 모든 학자들이 요 계산을 해요. 한번 미리 볼까요? 236페이지 봅시다. 요한계시록 해석법 끝나고 나서 다과회 하면서 우리 교인 집사님이 떡으로 케이크도 가져오고 생일축가도 불러줬어요. 그런데 떡은 저희들이 다 먹어버리고 그런데 내가 일부러 성의 있게 했는데 내가 인사말을 안 할 수가 없어서 했어요. ‘지금까지 제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여러분 덕분인 줄 안다고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죠?’ 사실은 이건 그냥 기억으로만, 추억으로만 남기라고 했어요. 다른 사람도 다 하잖아요. 하필 나만 의미 있게 한다는 그 자체가 상당히 이상스러웠어요.

여기에 70이레 보면 236페이지 보면 최 만수 나오죠. 그 다음에 칼빈, 칼빈 들어본 적 있습니까? 카일, 류폴드, 몽고메리, 포르튀우스, 헹스텐베르그, 하젤, 영, 최영헌, 간하배, 이희락, 전부 다 이런 식으로 계산하는 거예요. 소위 정통, 보수 진리, 이런 사람들이 이러했다면 여호와증인들이 왜 이런 계산하는 게 왜 문제가 돼요? 여호와증인뿐입니까? 제 7 안식일, 전부 다 그런데 이 계산해 버리면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적인 시간 개념으로 그걸 사람들이 따지게 되는 거예요. 그럼 맨날 바뀌어요. 1992년 10월 28일에 이 장림이 이 계산했잖아요. 조 용기, 전부 다. 완전히 들통 다 났어요. 그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 시간 계산을 믿는 사람 이예요. 시간 계산을 잘 해놓으면 자기가 안자고 있는 사이에 주께서 오실 줄 알고, ‘깨어라’ 하니까, 도적같이 오신다니까 아예 이쑤시개로 눈썹에다 올려놓죠. 참, 기가 찰 이야깁니다.

예수 피를 믿으라고 그렇게 했건만 그들이 믿는 것은 자기가 만든 시간 계산을 믿고 있어요. 예수 피를 믿는 게 아니고. 그 계산력에 대해서는 자기가 ‘하나님 제 계산력만큼은 알아주세요.’ 마작 합니까? 여러분, 마작 알아요? 숫자 맞추기 하는 것, 포카 브릿치해요? 야, 7번이 빠졌네. 이런 거. 그래서 신학자들이 70이레를 구약의 늪이라고 생각해요. 한번 빠지면 못 헤어나오는, 나중에는 난감해진다고 겁을 집어먹고 있어요.

이 70년을 70이레로 넣을 수 있잖아요. 이건 70년 동안 포로 잡힌 것은 맞아요. 맞는데 70이레로 바뀐 때는 '년‘이 ’이레‘로  바뀌는 것은 이미 외부 환경이 우리가 아는 역사적, 공간적 그런 개념의 외부 환경이 아니고 짐승이라는 묵시적인 활동성이 지금 하나의 도배지처럼, 새 아파트 도배하잖아요. 새로운 도배지 안에서 70이레라는 의미로 확대될 때 비로소 메시아가 요 확대를 유발하시면서 일종의 빵빠래죠. 빵빠라빠빠~ 하면서 새로운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시간 차원이 주어지면서 덩달아 메시아가 그때 등장하게 되면 그때 우리 눈에 없다고 여겨졌던, 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짐승이 비로소 정체가 보여 지는데 그 짐승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철떡 같이 섬깁니다. 사도 바울도 어떠했습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그러니까 이게 짐승인지 악마인지 진짜 아는 기준은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모르면 그건 이유를 막론하고 얼마나 경건스러우냐. 얼마나 인품이 고상하냐를 막론하고 무조건 마귀에요. 무조건 마귀입니다. 마귀냐 아니냐 하는 것은 십자가로 결정하는 거예요. 왜 그건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인간의 신학으로서는 파악될 수 없는 하나님의 숨겨놓은 지혜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 앞에 보게 되면 우리는 처음부터 뭐다? 죄인이었다. 우리 죄인에서 난 모든 아이디어도 죄인인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소경 된 자보고 뭐라 합니까? ‘저 소경이 소경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자기 부모 죄 때문입니까?’라고 멘트를 그렇게 날리는 그자체가 뭡니까?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멘트 안 날리고 입 다물고 있으면 그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아버지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 외에는 아버지 아는 자가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나머지는 그냥 죄인 이예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 행세를 냄새를 푹푹 온 천지에 풍기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장모도 살리고 물 위까지 걸어줬던 베드로가 예수님 만낙 뭐라 했습니까? ‘나 저 사람 모른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삼 세 판이나. 한 번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닭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닭에 대일밴드 붙여놨으면 계속 베드로 입에서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하다가 어떤 사람이 닭 입에서 반창고 떼면 베드로가 ‘아이고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울 거예요.

어쩌면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나는 주님 모릅니다.’ 소리. 항상 닭 키우지 않더라도 주께서는 항상 아예 닭을 우리 집에 집어넣죠. 모른다. 할 때마다 ‘꼬기요.’ 울게 만들죠. 그걸 말씀에 의한 각성이라 그러는 거예요. 말씀은 항상 우리가 원하나 원치 않으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동할 때마다 닭이 울듯이 말씀이 울어요. 항상 휴대폰 소리만 울리는 게 아니고 항상 말씀도 같이 울려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전화 받아야 돼요. 울려서 보게 되면 ‘까불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항상 우리는 이렇게 통화료도 한 푼 안 내고 만날 하늘의 스마트폰을 항상 갖고 있어서 주께서 메시지를 보냅니다. 우리를 너무 잘 아니까. 그것을 다니엘은 자기 생애 가운데서 온 몸으로 받고 있다는 거죠.

230페이지 봅시다. 제일 밑에『이렇게 되면 70년 포로기간은 다시 역사적으로 유지되는 유대 나라와 연결되는 기간이 아니라 역사에서 비역사적 나라로 이전을 통해서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관성을 비로소 밝히 보여줄 수 있다는 사태와 관련된 기간이 되는 것이다.』여기서 보면 역사적이 아니라 비역사적 나라이기 때문에 역사 속에 비역사인 나라가 손에 잡힙니까? 안 잡힙니까? 잡힐 수가 없죠. 왜냐 하면 잡으려는 자체가 역사적 존재기 때문에 손에 잡힌 것은 무조건 비역사고 역사는 다 변하고 말아요.

옛날에 어느 나라에 임금이 있었는데 공주가 웃지를 안 해요. 그래서 임금이 현상공모를 했어요. 우리 공주를 웃게 하면 사위 삼아서 차기 임금 되게 해주겠다. 온갖 코미디, 개그맨, 다 동원됐거든요. 그래도 웃지를 안 해요. 그런데 우연히 어떤 애가 오리를 들고 가는데 사람들이 오리를 만지니까 황금으로 변해버리네. 그걸 보고 베란다 있던 공주가 웃었거든요. 지금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서 들으세요.ㅎ 그러니까 사위 됐거든요.

그래서 만지기만 하면 뭐가 된다? 금이 되든지 아니면 붙든지. 지금 이야기가 혼선돼서 알아서 들으세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이 뭘 하나님이 역사해도 내가 일단 소유화 시켜버리면 이게 비역사가 아니고 나의 역사가 돼 버려요. 야, 난 이런 일로 은혜 받았다. 나는 응답 받았다. 나는 이런 신앙적인 효과 봤다. 이러면 주님의 모습이 아니고 돌부처가 돼요. 하나의 우상이 된다니까요. 그래서 그걸 잊을 수가 없어서 어디가도 그 자랑하거든요. 이게 간증집회 아닙니까? 간증집회.

맨날 장로들은 처음에 자기가 예배당 지을 때 손수 벽돌 나르고 자기 집도 전세로 바꾸고 나머지 돈 가지고 여기다 투자했다는 이야기, 이게 뭐냐 젊은 놈들아 돈 좀 내라. 그 이야기죠. 그래서 얻는 것이 주일 낮에 대표기도 하는 거 하나 얻어서 …… 그리고 나라와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라니까 국가를 위해서 남북통일까지 다 아는 시사 다 끌어들여서…… 그게 역사라니까요. 그게 누구 역사? 자기 역사거든요. 자기 역사를 환등기로 비추니까 세상은 그래야만 되고 그럴 경우에만 예수를 사랑의 예수로 믿을 용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거 자체가 짐승이 되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생각했던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이게 로마에 갇혀 있잖아요. 로마에 갇혀 있으니까 구약을 맨날 연구하는 거예요. 구약에 포로 잡혀 간 상태가 어떻습니까? 어느 나라에도 지배 받지 않은 상태죠. 그러면 그들이 원했던 것은 로마에 압제돼 있잖아요. 로마는 짐승이라면 짐승에서 벗어난 상태는 어떤 상태입니까? 다윗이 다시 와서 옛날 다윗 시대처럼 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제사장 나라 되는 그것만 기도하면서 지금도 예루살렘 서편에서 이리 앞뒤로 흔들어 가면서 모자 하나 쓰고 군대 복무도 안 하고 맨날 나라 세금 축내면서 이 짓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사람들을 싫어해요. 정통파 유대인들! 안식일 날 되면 다큐멘터리 보면 나팔을 불어서 온 동네방네 하고 금요일 저녁 때 혹시 안식일에 어긋나는 거 파나 조사하고 이럽니다. 그러면 일반 사람들은 ‘어, 장사 좀 하자.’ 이렇게 해요. 코샤라 해서 율법에 어긋나지 않은 음식을 호텔가면 유대인들이 음식을 따로 팔아요. 그게 무슨 짓입니까? 그것이 짐승 이예요. 그렇게 경건스럽고 그렇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자기 완벽을 추구하고 남한테 해 끼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철저한 자기 관리하는 그것이 무슨 모습이다? 그게 짐승의 모습 이예요.

지금 그것을 그대로 한국교회가 교인들에게 그걸 숙달시키고 훈련시킵니다. 왜, 인간의 윤리는 반복된 학습에 의해서 되거든요. 반복된 학습이 몸에 익히게 되면 이게 자동적으로 나와요. 처음에는 힘들지만 너무나 학습을 많이 받게 되면 자동적으로 일어나요. 여러분들이 한 기도 하는 사람들 보세요. 치면 막 나와요. 안 말리면 두 시간씩 합니다. 사실은 그 이야기를 우리 교회나 여러분한테는 할 입장이 못 돼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해왔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교회 교인들 다 한 기도씩 했던 사람들 이예요. 지금은 기도하라 하면 다 도망가고 없어요. 그렇게 기도 유창하게 하던 분들이 기도하라 하면 생중계돼서 안 합니다. 방언들 했던 사람들 이예요. 한 방언 한 사람들 이예요. 방언은 바로 그것이 방언이 아니다, 하는 것이 방언 이예요.

방언은 뭐냐 하면 방언의 내용은 안에 복음적 내용이 있으면 이게 방언 이예요. 이사야에 나오는 방언에는 신약에 완성이 되지만 성령께서 알려주는 내용이 있으면 그걸 방언이라 하고 성령이 알려주지 않는 것은 방언이 아니라는 거죠. 초창기에 있는 모든 말씀은 통역이 없으면 이해가 안 돼서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 통역이 있어야 되고 나중에는 방언도 그치고 통역도 그치고 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바로 역사하는 거예요. 사도들이 아직 살아 있을 경우에는 계시가 확정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고린도전서에 보면 방언도 폐하고 예언도 폐하죠. 그거 전까지 과도기적으로 있는 거예요. 아직까지 계시가 있어야 되니까.

방언이라 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이 담겨있어야 돼요. 복음의 내용을 이야기하면 통역 안 해주면 못 알아들어요. 그게 무슨 뜻인데?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행위로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게 무슨 뜻인데? 그럼 교회서 헌금하는 것은? 그것으로는 구원 안 된다. 그게 무슨 뜻인데? 십일조가 예수님이 십일조다. 10분의 1을 내야 십일조지, 예수님 자체가 십일조다. 이게 무슨 뜻인데? 이러는 거예요. 그게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데. 그 뜻을 모른다니까요.

그걸 사도행전 2장에서는 뭐냐, 젊은 사람은 꿈을 꾸죠. 꿈을 꾼다는 말은 성령이 이 땅의 역사 속에 없는 비 역사 속에 있던 묵시 적에 있던 내용을 역사 속에 집어넣을 때는 역사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그걸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미쳤어, 미쳤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미쳤다 소리 듣거든 그걸 기뻐하라 이 말이죠. 미쳤다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주 예수만 믿기만 해도 구원을 받는다는 이런 소리를 해요. 어떤 행함도 없이 예수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거예요. 이거는 미쳤어요. 완전히 미쳤어요. 어떻게 외부인이 나의 구원을 성사시킵니까? 내가 주물럭대든지 내가 나한테 뭐를 하든지 내가 뭔가 노력을 하든지, 착하게 살든지,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고 내 구원은 내가 책임져야 되는 이게 보편적 상식인데 어떻게 아무 관리도 안 하고 내가 손 뗐는데도 불구하고 내 외부인이 어떻게 구원해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그런데 그 외부인이 주님이라는 거예요. 그거 가지고 예수 믿는다는 거예요. ‘믿습니다.‘가 믿음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분이 나를 구원한다는 그것을 믿음이라 하거든요. 왜냐 하면 기존의 믿음은 기존의 믿음을 차고 들어오기 때문에. 주의 주신 선물로 구원 받는다. 이게 믿음이거든요. 아까 언약적인 파이프. 그것이 꽂혔을 때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움직이는 것도 성령의 행동이다.‘ 그 자체를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빌립 집사가 여기 있으나 내시 만나러 가나 자기가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빌립 집사가 시계 차서 ’4시쯤 올 때 됐는데.‘ 이런 거 없어요. 4시고 3시고 안 와요. 주께서 그냥 ’가라‘ 하니까 가보니까 누가 왔고 오니까 마침 이사야 53장 펴놓고 해석해 달라 해서 해석해 줬고 도대체 이 세상이 내 맘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누구 맘대로? 주님 맘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다니엘도 경험했고 초대교회 교인들도 경험하고 지금은 우리 차례에요. 우리가 매일같이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왜 고백 못하느냐, 너무나 우리는 자기가 자기 관리하는데 너무나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은 기도 몇 시간 하고 성경 몇 장 읽고 너무나 훈련됐기 때문에 이것을 주의 일이라고 이렇게 잡다 보니까 고 사이사이에 개입되는 주의 일을 마치 놓치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안 될 때, 꼬일 때, 하나님 앞에 데모할 때, 비로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다 카운터에 집어넣지 않은, 세지도 않았는데 이미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동안 주께서 우리를 지금까지 일을 일으켜왔다는 거예요. 언약궤가 블레셋을 자동적으로 쳐서 그냥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언약궤가 자동적으로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왔듯이 주께서 지금 우리를 혼자서 다 처리하시고, 효과는 우리의 구원이라는 영생 얻는다는 효과로 그냥 매일같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70이레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전에 먼저 우리가 역사적으로 살면서 묵시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놓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그 자체가 주님의 활동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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