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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6 01:28:06 조회 : 1846         
다윗언약 130905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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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2.222) 13-09-20 15:30 
가락-70이레 논문(다윗 언약)130905-25강a -이 근호 목사


233페이지에 중간 위에서 여덟 번째 줄에 보면 『보편적 인간성은 느부갓네살을 정점으로 하여 포로 잡혀온 유대민족마저 현실 안에다 잠가둔다.』 갇혀 있다는 수동적이고, 감가 둔다는 능동적이 되겠죠. 느부갓네살한테 누가 잡혀 있습니까? 유대민족이죠. 유다민족이 느부갓네살한테 포로 잡혀 있잖아요. 잡았으면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누구를 잡았다고 생각하겠죠. 그런데 그 느부갓네살이 누구한테 잡혀 버리면 어떻게 돼요? 자기는 저쪽을 잡았는데 그 잡았다고 여기는 느부갓네살이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누가 잡았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자기는 누굴 잡은 거예요? 누구한테 잡힌 거예요? 분명치 않죠.

자기는 유대 나라를 잡은 동시에 마르둑 신이 여호와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블레셋 다곤 신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블레셋 민족들의 그 착각이 지금 여기 다니엘에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요.  느부갓네살 왕에게 유다나라가 포로 잡혀 오고 성전에 있는 불쏘시개 같은 기구들 중에서 귀한 금 같은 건 다 벗겨가고 금잔 같은 것들은 다 가져갔잖아요. 싸그리 전부 다 실어왔던 거예요. 이제는 여호와 흔적도 없죠. 성전은 불 질러서 다 태워버렸고 여호와에 대한 흔적은 없어요. 유다나라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모든 매개체는 날라 가 버린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영원히 유다민족과 여호와를 잡은 것이 되는데 성경에서는 느부갓네살이 누구한테 잡히느냐 하면, 느부갓네살이 짐승이 되죠. 여기 밑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12달 만에 짐승이 된다고 하죠. 자, 짐승된다는 이 예고를 누가 하느냐 하면 느부갓네살이 잡았다고 여겼던 그 유다나라 민족 가운데 한 사람,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꿈 해몽을 해주면서 ‘당신은 짐승 될거야.’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호와는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여호와가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있죠. 자, 방금 이야기한 것을 논리적으로는 복잡하니까 간단하게 처리해 봅시다. 느부갓네살이 유다민족을 잡았습니다. 유다민족을 잡았을 때 유다민족이 여호와를 믿는다 했죠. 느부갓네살이 마르둑 신이 여호와 하나님부터 다 잡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중에 하나 다니엘이 튀어나와서 ‘당신은 짐승이 될 것이다.’라고 언급을 했죠. 그러면 이 다니엘은 자기 생각이 아니고 누가 계시를 해준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해준 거예요.

그러면 느부갓네살이 여호와를 잡았다고 생각한 여호와께서 결국 누굴 잡은 거예요? 느부갓네살을 이렇게 잡은 게 되죠. 잡혔다고 생각했는데 잡아버렸죠. 이것은 바로 블레셋 군대가 다곤 신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잡았는데 오히려 언약궤를 다곤 신상에 놔두니까 어떻게 됐어요? 분명히 우세하다고 여겼던 다곤 신이 마치 패배자의 모습으로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절하듯이 고개 숙이듯이 ‘아 졌습니다.’ 식으로 모가지, 발모가지, 전부 다 문지방에서 다 깨지잖아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다루시는 방식이 아주 독특하고 이것이 나중에 일관성 있게 우리한테도 적용이 되는 겁니다. ‘내 백성들아.’ ‘예, 잡혀라.’ 간단한 거예요. ‘내 백성들아.’ ‘예, 잡혀라.’ 누구한테? ‘짐승한테 잡혀라.’ ‘왜요?’ ‘그래야 여호와가 누군지를 비로소 그 현실에 드러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유다 민족이 알고 있던 여호와는 진짜 여호와였습니까? 가짜 여호와였습니까? 가짜 여호와죠. 이제 그러면 지금까지 한 논리를 한번 정리해 보면 여호와께서 가짜 여호와를 잡는 식이 돼요. 다른 말로 하면 진짜 예수님께서 가짜 예수를 잡는 식으로 구원의 작업에 나서시는 겁니다. 그리고 진짜 여호와께서는 유다민족으로 하여금 여호와라는 신을 양성하도록 이렇게 유발시킨 거죠. 인간에서 나온 것은 여호와가 되던 예수가 되던 전부 다 가짜기 때문에.

요 방금 234페이지 읽었던 문장은 이 유다민족에 대표하는 자는 다니엘이 아니라는 거죠. 다니엘은 여호와 편에 서신 다니엘이고 유다 민족의 대표자는 누구냐 하면 바로 느부갓네살이 되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은 12개월 뒤에 뭐가 된다고요? 짐승이죠. 결국 짐승한테 새끼 짐승이 잡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유다민족은 자기가 짐승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는 여호와를 잘 믿는 여호와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는 인간들이 사실은 가짜 예수(마귀)한테 잡히도록 진짜 예수님이 그렇게 유도하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상당히 말이 복잡하죠.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안 찾고 여호와를 안 찾게 하는 게 아니고 찾게 만들어요. 만들고 ‘그게 가짜이니라.‘ 하는 거예요. 왜, 우리 몸 자체에서 가짜만 양성되는 그런 속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프킬라 뿌리면 뭐가 나오죠? 안에 에프킬라 모기약이 나오죠. 간단한 논리잖아요. 우리가 만약에 에프킬라 든 통이라면 우리 눌려 버리면 뭐 나옵니까? 죄 나오는 거예요. 나오라고 하나님께서 율법과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때 그 죄의 양상이 뭐냐 하면 고상하기 그지없이 여호와가 나오고 예수가 나오고 삼위일체 성경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전부 다 죄에요.

그렇게 해봤자 세상 적으로 힘 센 그 세상 앞에서 우리는 꼼짝 못하고 포로 잡혀가는 겁니다. 우리는 포로 잡힐 때 우리는 여호와가 내 인생에 대해서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나게 만들어요. 그리고 뭐가 부럽습니까? 우리보다 더 많이 가진 자, 우리보다 더 권력이 센 자가 그렇게 그립죠. 그 그리운 것을 하나님께 속한 성령 받은 다니엘이 이걸 가지고 뭐가 합니까? ‘너희들이 그동안 짐승을 좋아했느니라.‘라고 하죠. 유다민족은 ’우리는 짐승, 세상 민족을 좋아한 적 없습니다. 흠모한 적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만 흠모했습니다.‘라고 변명들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변명을 듣지 않고 현실적으로 힘의 논리와 관계 속에서 같이 엮이게 만들어요. 엮여 버리면 우리는 예수한테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고 돈한테 고개 숙이는 우리의 본모습을 이 세상을 살면서 드러내게 하십니다. 성경말씀에 굴복하는 게 아니고 돈과 권력에 굴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케 하십니다.

그리고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우리도 미처 몰랐던 우리는 내가 이성적으로 이렇게 살아야지, 하고 별도로 우리의 감성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여러분 이성은 다룰 수 있지만 다루지 못합니다. 전에 언젠가 그런 강의했죠. 저 사람을 사랑해야 된다는 건 알지만, 진짜 사랑하는 거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사랑과 미움의 문제는 감정에 속한 문제지, 이성과 논리로 이걸 달성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이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우리 한계의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주를 사랑하는 거예요. 사랑이란 말이 제일 어렵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을 것이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어제 수요 설교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안식일 했죠. 안식일 날 나무를 했잖아요. 안식일 날 나무를 했을 때 우리 같으면 개도(開導)를 거쳐서 ‘다른 나라는 나무 하더라도 안식일에 나무하지 마세요.‘ 하고 나무라고 타일러서 그 다음에는 안식일 날 두 번 다시 안 하도록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민수기 19장에 보면 안식일 날 나무하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죽여 버리죠. 죽이는데 벼락 맞아 죽입니까? 안 그러면 모세가 몰래 혼자 데려가서 사형 시킵니까? 어떻게 죽입니까? 회중들에게 돌을 들고 쳐 죽이도록 만들죠. 그래서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만약에 약혼자가 안식일 날 어길 때 돌을 치겠느냐? 자기 자식이 안식일 어길 때 돌로 칠 수 있느냐? 그게 무슨 큰 죄라고 돌로 칩니까?

결국은 안식일 날 위반자는 아예 나무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만이 아니고 돌로 치라고 명령한 저 사람들도 안식일을 애초부터 위반했던 사람들 이예요. 안식일 날 나무하지 마라. 그건 지키기 쉬울 것 같지만 안식일 날 나무한 사람을 돌로 쳐라, 라는 명령을 어느 인간이 이룰 수 있습니까? 그게 아는 사이라면. 감정적으로 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토록 꿈에 그리던 짝사랑 했던 어떤 여자라면. 또 어떤 남자라면. 장차 자기 남편감이라면. 또 아내감이라면. 바람 난 남편 같으면 잘 됐다 싶어 돌을 던지며, 차라리 잘 됐다고 때려 죽여 버리지. 어디, 씨 바람나서 안식일까지 어기느냐, 에라.‘ 내가 먼저 죽이죠.

그런데 그게 아닌데, 내 생활비를 대주는 남편인데 그가 죽으면 내가 과부되는데? 거기다 예를 하나 더 들었죠. 어떤 예를 들었습니까? 안식일 날 나무 한 사람이 한 명이 아니고 그게 천 명이고 안식일 지킨 사람은 자기 밖에 없다면 하나님이 나보고 하는 말이 ‘돌로 쳐서 천 명을 죽이라.’ 하면 그 천 명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게 어디 씨, 어디서 도로 죽으려고?’ 이렇게 나올 거라 말이죠.

그러니까 안식이란 말은 어느 누구도 안식일을 지킨다? 못 지킨다? 지킬 수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안식일을 어겼다고 사람을 죽입니까? 그 사람이 죽인 것은 나무를 죽인 것이지 사람을 죽인 게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피해 준 것은 나무한테 피해 줬는데 나무한테 피해준 것이 죄라면 평소에도 나무를 하지 말라 말려야 되죠. 나무가 있어야 홍수가 안 난다. 이런 식으로.

그래서 율법이라는 것은 지킨다고 지키는 것이지, 어떻게 위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하는가, 그걸 통해서 네가 제대로 율법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판정이 되는 겁니다. 위반자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율법의 위반자가 되셨어요. 얼씨구나, 하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죠. 아주 얼른 처리했어요. 표결이 238:14인가 뭐 후딱 처리했어요. 표결 나온 지 3시간 만에 체포했습니다. 얼마나 꼴 보기 싫었으면! 아마 바리새인 중에서 이런 소리 할 사람 있을 거예요. ‘이게 어디 등에서 비수를 꽂아.’ 바리새인 중에서. 어디서 대한민국에 비수를 꽂느냐 하는 그 이야기는 요번에 누가 한 이야기 한 겁니까? 김 한길 민주당 최고위원이 이야기한 거죠.

안식일 법은 모든 인간은 인간 본인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뭐라고 오인하느냐 하면 ‘나는 안식일 법을 이 정도 하면 지켰습니다.’ 라고 하는 그러한 너무나 현실성 떨어지는 소리를 인간들은 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하도록 누가 유도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유도하는 거예요. 안식일 날 노동을 안 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아주 정상적으로 좋은 관계라고 착각하게 만드신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더욱 더 더하게 함이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뭐가 투입돼서 그게 확정됩니까? 바로 율법과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냥 의인 없는 정도가 아니고 전부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니까 사람들은 ‘그래요. 내가 부족합니다.’ 부족한 게 아니고 저주받아야 된다니까요. 부족하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앞으로 잘할게요.’ 그 뜻이거든요. 그게 아니고 당신은 지금 저주받아야 돼. 애 수능인데 수능이 며칠 안 남았는데 어디서 저주받을 사람이 그걸 걱정하느냐? 마치 사형수가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앞에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으니까 그냥 가면 될 텐데 폴짝 뛰어간다고요. 왜, 발에 물 안 적시려고. 지금 죽어가는 마당에 발 안 적시면 무슨 의미 있어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저주 아래 두는 거예요. 왜, 우리가 흠모하기 짝이 없는, 우리가 진짜 사랑하고 흠모하는 그 인간도 뭐였다? 저주받아야 될 짐승이기 때문에! 이러한 그림을 하나님께서는 그리는데 성공했습니다. ‘너희들은 처음부터 짐승한테 갇혀 있었어. 갇혀 있기 때문에 흠모하는 거예요. 큰 나라를. ’아이쿠, 바벨론 좋겠다. 잘 먹고 잘 살고. 앗수르 좋겠다. 잘 먹고 잘 살고. 우리는 여호와 믿어도 이 모양 이 꼴이고, 이게 뭐고? 이거 하나님 믿는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이런 식으로는 나는 여호와 안 믿을 거야, 나 그쪽 신 믿을 거야.‘ 해서 바알 섬기고 마르둑 섬기고 아하스 왕은 앗수르 신 그걸 똑같이 베껴서 자기도 성전 만들면 앗수르처럼 큰 나라 되는 줄 알고 그렇게 한 거예요. 앗수르 제국은 천 년이나 지속된 큰 제국입니다. 그러니 그게 역사와 전통이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전통은 불과 몇 백 년 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부럽겠어요?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이란 천 년 이상 가는 제국이니까 거기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아슬아슬하잖아요.

그래서 233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이렇게 해서 여기에 보면 『다니엘로부터 꿈 해석을 들은 후 12달 만에 느부갓네살 왕은 꿈의 내용대로 짐승이 되어버린다.』그 다음에 어렵습니다. 아! 제가 생각해도 정말 어려워요. 그 다음에 뭐라 돼 있어요? 『미래란 미리 대처하라고 알려 준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 과거란 다시 되돌아갈 수 없고, 수정시킬 수 없는 불가역적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묵시적 미래는 현재를 누리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바로 그 현재가 미래에 의해서, 미리 불가역적 영역으로 지정받은 상태인 것을 통고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방금 했던 이 문장을 간단하게 말하면 미래란 네가 만드는 게 아니다. 그런 뜻 이예요. 미래란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그럼 미래라 하는 것은(어렵더라고 참으세요.) 이미 과거를 알고 현재를 아는 나에게 미래란 끊어져 버리죠. 그러면 이 미래는 현재 과거 있고 현재 있으면 미래는 자동적으로 오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미래는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해버리면 지금 과거와 현재 이걸 소급해서 이걸 파괴하는 거예요. 파기 처분 하는 거거든요.

자, 예를 들면 대구역에 기차선로가 두 개 있습니다. 두 개가 있는데 두 개가 밖에 나갈 때는 하나로 모아져요. 모아지기 때문에 이 기차는 언젠가는 이 밑으로 와야 되고 요 기차도 요리로 와야 되는 거예요. 빠른 것부터 먼저 가고 그 다음에 무궁화 갔으면 이번에 대구역에 차 안 박았습니다. 그런데 요 노선에 서로가 들어가려고 들이밀다 보니까 무궁화가 튀어나가 버린 거예요.

이 미래는 우리가 무궁화라면 우리는 과거 있고 현재 있으니까 우리의 미래가 이렇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미래는 자기 미래 과거가 없거든요. 그런데 이 미래는 어디서 오는가? 이 미래가 바로 다윗 언약에서 나오는 미래입니다.

자, 지금부터 오늘 강의가 그 어렵다는 다윗 언약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KTX, KTX, 무궁화 사건 아시죠? 하도 안 보시는 것 같아서. KTX가 우리 머리에는 없어요. 우리는 무궁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이것 밖에 없어요. 사실은 이 KTX 자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KTX가 없죠. 현재 있는 이것이 역사가 돼 버려요. 그것도 유일한 역사고 이것이 뭐냐, 하나님의 만드시는 하나님의 구속사, 역사라고 이렇게 오해들을 하시는 거예요. 나의 시나리오죠.

그런데 주님께서 이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은 우리는 몰랐습니다. 더 들어가기 전에 아까 한 거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유다 민족이 자기는 안 망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 계시죠. 성전 있고 다윗 언약 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유다 민족은 여호와 찾고 찾았잖아요. 찾으면 뭐합니까? 찾았는데 성전 다 빼앗기고 다 불타 버리고 기구들 다 빼앗겨 버리고 어디로 갔어요? 느부갓네살에게 잡혀서 바벨론에 갔죠. 제가 분명히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의도하셨다고 했죠. 그것은 바로 느부갓네살을 짐승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짐승한테 사로잡히니까 이것도 짐승 이예요. 그럼 그동안 여호와 섬긴 것이 짐승으로서 짐승의 하수인으로서 여호와 섬긴 게 되는 거예요.

잡혀가지 전까지는 미처 몰랐어요. 자기는 여호와 잘 섬긴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렇게 느부갓네살이 등장하고 그것이 짐승으로 될 때는 뭔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미처 모르는 다른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포로 잡혀 가면서 비로소 깨닫는 기회를 부여받은 겁니다. 구원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구원은 이렇게 하면 구원되겠다가 아니라 이렇게 해도 그게 말짱 소용없게 만드는 그 현장이 비로소 내가 몰랐던 구원의 능력이 거기에 나오는 겁니다. 지식도 버리세요. 기적도 찾지 마세요. 하나님 믿는 재미가 지식과 기적 얻으려고 하는데, 기적도 찾지 말고 지식도 버리라면 그러면 우리 쪽에서 해서 가는 길 없겠네. 라는 순간 바로 십자가가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아! 기적도 어리석고 지혜도 어리석고 오직 참된 지혜는 오직 십자가뿐이구나. 그럼 십자가에서는 나의 지혜와 나의 기적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서는 연결된다? 안 된다? 끊어지죠. 그럼 끊어졌는데 등장했으니까 이거는 내 노선 말고 다른 데서, 저는 언약이라고 이야기했고, 지금부터 다윗 언약이 어떻게 느부갓네살이 짐승 만들고 유다 나라가 잡혀가게 했는가. 그 내막을 이제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렵고 복잡하지만 제가 그냥 일방적으로 딱 내달려볼게요. 느낌 아니까! 한번 죽 해볼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러분은 성경만 찾으시면 되죠. 역대 상 15장 28절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각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하죠. 주인공이 누구에요?  다윗입니까? 언약궤입니까? 주인공은 언약궤죠. 역대 상 16장 37절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그 다음에 뭐라 돼 있어요?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섬기게 하되” 자, 이들이 하나님 섬기는 겁니까? 언약궤 섬기는 거예요? 이 본문대로 16장 37절에 의하면. 언약궤 섬기는 거죠. 추상적인 하나님 섬기는 것이 아니고 언약궤 섬기는 겁니다. 약속했던 그 상자에요. 정관사 붙여서 the box, 약속했던 그 상자에요. 약속했던 그 상자가 무슨 상자다? 언약궤! 언약 상자를 섬기는 겁니다. 언약 상자 누가 만들었을까요? 그거야 장인들이 만들죠.

언약궤 어떤 상자를 섬기는 것하고 여호와 섬기는 것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는 언약궤보다도 여호와를 섬기고 싶은데? 우리는 마땅히 그렇잖아요. 상자보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거보다도 하나님이 더 멋있어 보이고 더 믿음이 깊어 보이지 않습니까? 구체적인 사물보다 물체보다도 하나님을 섬기면.

역대 상 15장 아까 읽었던 28절에 있어서 다윗이 언약궤를 메고 올 때에 여기에 그걸 지켜보던 아주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 한 사람 등장합니다. 29절에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남자도 아니고 남자 아니면 누구겠어요? 여자죠. 그 여자 이름이 나옵니다. 29절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어다보다가 다윗왕의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더라” 현명하죠. 똑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무궁화의 노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지, 언약궤 들어온다고, 언약궤가 찜질방에 불가마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언약궤 들어온다고 그 앞에 춤을 춘다? 뭔가 이상해도 좀 많이 이상하죠. 왜 미갈이란 여자가 똑똑한 게 뭐냐 하면 미갈이 볼 때 남편 다윗은 직책이 뭡니까? 유다나라에서 이스라엘 왕이죠. 왕 같으면 그냥 왕이 아니고 왕 뒤에 미갈의 무궁화 노선, 미갈의 과거 현재에 의하면 왕은 왕다워야 되겠죠. 왕답다는 게 뭡니까? 체통을 지켜야 되는 거예요. 사극 봤죠? 왕이 폼 재는 거 봤잖아요. 더운데 머리에 무거운 관모 쓰고 그리고 용 그려진 도포 입고 정승들 앞에서 목소리도 내시같이 하지 않고 무게 있게 하도록 세자 때 다 배워요. 백성들은 무조건 ‘통촉하옵소서.’ 이렇게 나오고. 이게 권위와 체통 카리스마 이런 걸 고루 갖출 때 백성들은 그 사람을 왕답게 보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나쁜 거예요? 백성들이 나쁜 거예요. 백성들은 왕은 이러해야 된다는 관행과 관습이 있을 게 아닙니까?

여기에 미갈도 거기에 동참했고 거기에 맞춰서 자기 남편이 왕이니까 왕이 옷 벗고 춤추고 하는 그런  여기 언약궤가 노래방도 아니고 한데 거기서 탬버린 칠 일 있습니까? 거기서 춤을 추는데 옷 벗고 이게 무슨 짓 이예요? 이건 아주 저작거리에 무식한 쌍놈들이나 하는 그 짓을 왕이라는 작자가 왕은 때려 쳐버리고 그야말로 언약궤 앞에서 이건 낮아도 보통 낮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졸지에 그 남편의 아내인 왕비라는 본인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미치면 혼자 미치지 나까지 뭐야? 니가 왕이 그렇게 좋으면 왕비 체면이 어떻게 돼?‘ 분명히 이런 계산 나올 거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 현재에서 나오는 왕은 이러 이러해야 왕답다는 그러한 관성에서 그냥 그대로 줄기차게 오는 미래상이 되는 거예요. 그 미래상에 무궁화하고 KTX가 박아버렸어요.

언약궤 앞에서는 인간이란 존재는 가치도 없습니다. 살 가치도 없고 뭔가 챙길 가치도 없고 언약궤는 언약궤 스스로가 미래를 만들어 나갑니다.

자. 그럼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역대 상 18장 13절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죠. 다윗이 이긴 거예요? 여호와가 이긴 거예요? 결국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는데 그 못난 다윗을 데리시고라도 항상 이기게 하셨더라. 그러면 여호와 떼버리고 다윗은 항상 이기더라, 해버리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다윗은 이길 만한 능력을 함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오해가 되죠.

성전 미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하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오해했습니까? 앉은뱅이를 낫게 한 능력이 어디서 나왔다 합니까? 사도에게 나왔다고 오해했죠. 그러니까 사도가 이야기합니다. ‘나는 무궁화입니다. KTX 아닙니다. 왜 자꾸 내가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눈에 안 보입니까? 주님께서 그 사람 낫게 하신지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낫게 할 때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낫게 했다는 것과 사도들은 주님께서 낫게 했다 할 때 그 차이점이 뭐냐 하면 베드로와 요한은 언약을 집어넣는 거예요. 언약 앞에 벌거벗고 춤춰도 괜찮아요. 어쨌든 언약이 미래를 만드는 거예요. 나의 현재에서 기대한 것이 나의 미래가 되는 게 아니고 그건 나의 미래가 될 뿐이지, 주님의 미래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항상 내가 기대하는 미래에다 주께서는 주님의 미래가 차고 들어오는 거예요. 언약을 앞장세워서. 그러니까 언약이라 하는 것은 항상 어떤 자리가 먼저 선행돼야 되느냐 하면 나름대로의 내가 은근히 노린 게 있어야 돼요. 요번에 수능 며칠 안 남았는데 내 딸은 수능 점수가 적어도 400점 만점에 390 될 거야. 은근히 기대가 있어야 돼요. 아마 390 될 거야, 했는데 나중에 수능 치고 난 뒤에 보니까 390이 아니고 그냥 90이다. 답을 내려 써서. 그걸 미리 알아차리고 우리 애는 수능 400점 만점에 90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해보니까 40 나왔어요. 미리 예상해도 소용없어요.

무조건 언약의 사람의 미래는 본인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낯설게 들어옵니다. ‘왠지 낯설다.’ 낯설게 들어와요. 낯설게 들어와야 우리의 과거, 현재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확신시켜요. 주께서 시킵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그냥 믿는 게 아니고 뭐는 ‘믿지 못하겠다.’를 전제로 깔아야 돼요. ‘내가 이거 믿으면 나는 개다.’ 하는 게 있어야 돼요. ‘내가 나를 믿으면 난 진짜 개다.’라는 게 있어야 그게 믿음 이예요. 기도해 놓고 ‘내 기도 내가 믿으면 내가 개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야고보서는 그렇게 안 돼 있거든요. 믿고 기도하면 의심치 말라.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그 말이 기도해놓고 기도 곱빼기로 해야 된다니까요. 기도를 했잖아요. 기도를 일단 끝내놓고 ‘이 기도에서 나는 반드시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를 또 해야 돼요. 그걸로 끝나면 안 되잖아요. ’믿습니다. 기도도 될 줄로 믿습니다.’ 또 해야 돼요. 이건 무한급수라. 둘이 약속해 놓고 약속 안 되니까 안구 검사 다하고 복사 다하고 지장 찍고 백날 다해도 온갖 보완장치를 다해도 몽땅 다 소용없다니까요.

요번 수련회 때 아직도 기억납니다. 인생의 변곡점을 갖고 있다고 했잖아요. 변곡점 그려본다고 요렇게, 요렇게 하는데 주님의 변곡점은 거기 그림에다 구멍을 뚫어버려요. 실컷 변곡점 그려놓아서 ‘아마 요렇게 되면 요렇게 될 걸.’ 하는데 구멍 뚫려 버리면, 종이 자체가 휴지조각 돼 버리죠.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에 대해서 다윗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다윗은 오금을 조립니다. 무서워요. 누가요? 하나님이 무서워요. 남들은 좋다 하겠죠. 하나님이 무서워요. 이제는 언약궤 앞에서 춤출 때는 웃통 벗고 춤췄지만 하나님께서 늘 이기게 한다면 웃통이 아니라 다 벗어야 돼요. 그래도 무서워! 나의 존재감보다 더 무서운 게 내 존재성을 실감하는 것보다 더욱 더 확실한 게 하나님의 존재성입니다.

나의 현재와 미래와 상관없는 분이 나의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니까, 주관하는 분이 나보다 더 실감나게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 입장에서는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입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너희는 하나님을 섬길 때 어떻게 섬겨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왜? 나의 존재보다 더 확실한 존재가 나를 존재케 하는 그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일하심 때문에.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그분은 언약 적으로 존재하고 나는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고 나는 그 언약을 무식하게 언약에 대해서 아는 바 없이 존재하고 있고. 했다하면 깨져야 되니까. 나는 내가 기도하고 내가 계획 잡았다 하면 다 깨져야 돼. 왜, 이건 나의 과거 현재에서 나왔던 나의 무궁화 열차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시니라” 여기에 대한 다윗의 대책을 여러분한테 한번 물어봅시다. 자, 이렇게 두렵고 떨릴 때 여러분이 만약에 다윗이라면 대책을 한번 세워보세요.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할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자기하고 떼 내야 되겠죠. 왜, 같이 있으니까 그게 너무 무서운 거예요. 같이 있으면서 내 뜻대로 안 해주시고 누구 뜻대로 하신다? 아버지 뜻대로! 그냥 나는 부림만 당했을 뿐이니까.

직장 생활하는 직원들이 휴일 때에도 사장님 전화 지시 기다립니까?  아니죠. 제발 휴가만큼은 회사에서 뚝 떨어진, 그냥 삼겹살 구워먹으면서 모든 걸 계곡에서 잊고 싶어. 다시 며칠 후에 기어들어가겠지만 어쨌든 며칠만큼은 제발 좀 눈에서 사장님도 안 보이고 오붓한 우리가족만 보이는 이제는 나의 과거, 내가 기대했던 나의 현실, 내가 꿈꾸던 내가 가장으로서 오붓한 우리들만의 세계를 지리산 계곡 가서 한 풀듯이 캠핑가고 하잖아요. 해봐야 사흘 만에 감기 걸려서 와서 피곤한 눈을 해서 기어들어오지만.

다윗의 방법은 뭐냐 하면 이 무서운 하나님을 떼놓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지시하셔서 안 거예요. 그게 뭘까요? 떼놓는 방법은? ‘하나님 그냥 여기 계세요.’ 그게 뭐냐 하면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어드리겠습니다. 그 안에만 그냥 갇혀 계세요. 제발 귀신 붙듯이 날 따라오지 말고 그냥 갇혀 계시고 그 다음에 내가 전쟁한다. 싶을 때 이곳에 와서 물을 테니까 그때는 그냥 조언만 하시고 후원만 해주시면 내가 나서서 선제해서 승리해도 니가 쫓아와서 ’엄마, 나 100점 맞았어. 하는 식으로 성전에 와서 100점 맞았다고 해줄 테니까 제발 여기 좀 그냥 계세요.’ 한 거예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그래, 니 소원이니까 해줄게.’ 이랬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게는 안 되겠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 성전에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 방법이 간단한 거예요. 뭐냐 하면 언약궤를 한 곳에 모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궤 따라다니니까. 언약궤를 모시면 되는 거예요.

야, 여기서 참 어렵다. 뭐가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언약을 통해서 일하시죠.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 앞에 춤을 췄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하여 언약궤를 한 곳에 모셔놓으면 하나님께서 ‘에이 참, 내가 안에 갇혀 있어서 할 수 없네. 나중에 내가 필요하면 호출해라.’ 이런 식입니까? 언약궤 따로 하나님 따로 노시겠어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니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나는 니가 지은 성전 나는 필요 없어.’

그러니까 다윗 입장에서는 입장이 더 난처해진 거죠. 남자들이 여자한테 프로포즈  할 때 주저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냥 해보는 것 같으면 천 번이고 ‘우리 결혼해 볼까? 싫어? 싫으면 다음에 할게.’ 이러면 되는데 남자는 결혼할 때는 굉장히 마음의 준비를 하게 돼요. 만약에 ‘당신 나하고 결혼할까?’ 할 때 ‘아니, 나는 결혼하기 싫어.’ 하면 그 다음부터 헤어져야 돼요. 그냥 못 먹는 감 찔러보는 식이 아니고 그냥 헤어져야 된다고요. 이제 두 번 다시 전화하면 안 돼요. 그동안 자기의 쌓아놓았던 자기의 신사다움이 다 깨지니까. 그러니 얼마나 떨리겠어요. 한 목사님 프로포즈 할 때 그렇게 했습니까? ‘주시겠습니까?’ 할 때 만약에 싫다 하면 ‘아! 저 사람과 헤어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남자는 다 가질 건데. 남자가 정신 차려서 ‘마지막으로 한번 물을게. 진짜 네 마음에 나 없나? 끝났나?’ 여자가 ‘끝났어.’ ‘그렇다면 내가 착각했었나.’ 그러고 나가버려요. 오로라 공주에 나와요.

제가 말씀 드린 것은 다윗과 다윗 언약이 일치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다윗이 메시아가 아닙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다윗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다윗 언약이 다윗을 이용할 뿐이지, 절대로 언약 받았다고 해서, 언약궤 앞에서 춤췄다고 해서 다윗이 메시아가 아닙니다. 다윗은 언약 앞에서 춤추고 겸손해도 죄인으로 드러나는 기간이 요구됩니다. 성전 지어드리겠습니다. 이게 뭔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니는 언약을 몰라.’ 그런 뜻 이예요. ‘나 안 해, 니가 만든 성전에 안 있어.’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늘 이기게 하게 하시지만 그걸로 인하여 니가 나를 안다고는 할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열 두 제자와 더불어서 권능을 베풀 때 제자들이 진짜 신났습니다. 세상 전부를 가진 것 같아요. 왜냐 하면 귀신이 나가는데 제자들 표현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귀신이 쫓겨나니까 귀신이 나가는데 그걸 하늘에 별이 떨어지는 거와 같다고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그 당시의 세계관은 하늘의 별들이 신화적 존재로서 박혀 있다고 본 거예요. 하늘의 별이 떨어지듯이 사탄이 떨어집니다. 라고 할 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그래, 너희들은 훌륭한 나의 종이다.’ 이랬습니까? 아니죠. 하늘의 사탄이 떨어지는 걸 좋아하지 말고 니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 된 걸 좋아하라. 주께서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면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사탄이 별과 같이 하늘에서 떨어질 때에 예수님한테 그 말 듣기 전에 먼저 본인들이 ‘아니야, 나 이런 거 좋아하면 안 돼,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걸 좋아해.’라고 생각한 제자들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한 명도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요, 우리가 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통해서 알아가도록 하게 하시는 그 미래의 언약 적 작업이 이렇게 항상 동반돼야 돼요. 우리는 미리 해답을 알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강의 하면 사람들은 이럽니다. ‘이제 복음 다 알았다.’ 합니다. 복음은 어느 날 아는 게 아니고 지금 뭐가 아는 거냐 하면 복음을 알아간다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아는 게 복음 아는 거예요. 우리가 복음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 복음이 소유했다고 여기는 그것을 죄로 드러내는 식으로 복음 사람 되게 하는 작업에 계속 우리를 다루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의 사람 되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우리가 복음 아는 사람 되는 게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소유하는 사람 되면 안 돼요. 주께서 복음을 알아가도록 하시는 거예요. 우리 주체도 복음 아는데 포함시켜서. 우리는 맨날 ‘알았다. 알았다.’ 하면서도 해놓고 돌아서면 우리는, 다윗은 엉뚱한 짓 한다고요.

다시 이야기 계속 이어가 봅시다. 다윗이 하나님을 한 곳에 모시겠다는 거예요. 모시고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백성을 대표해서 ‘다윗 왕님, 지금 가물었습니다. 어떻게 조치를?’ ‘가만 있어봐. 내가 물어볼게.’ 성전에 가서 ‘하나님이여, 지금 비가 안 온다고 원망인데 언제 쯤 비가 오겠습니까? 두 달 뒤에 온다고요? 알았습니다.’ ‘여러분 두 달 뒤에 온답니다. 나 어때요? 나는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메시아 맞죠?’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허락했어요? 안 했어요? 허락 안 했어요.

그럼 다윗에게 허락된 건 뭡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부터 이미 죄인이었다.’ 그러니까 왕 이예요. 그러니까 다윗 언약 앞에 제대로 왕 다운 것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이 그게 왕 다운 거예요. 안다고 했는데 ‘사실은 내가 하나님의 언약을 언약대로 사는 사람 우리야를 죽였던 그 죄인이 바로 접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걸 위해서 우리야는 전사해야 됐고 그걸 위해서 밧세바는 뒤태가 잘 빠져야 됐고. 이뻐야 돼, 이뻐도 너무 이뻐야 돼.

다윗이 여자 사냥하는 그런 바람둥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했잖아요. 인간의 이성보다 뭐가 앞선다고? 인간의 감성이 앞서죠. 그런데 내 감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자기도 몰라요. 확~ 뭔가 땡기는 사태가 벌어져야 아! 그동안 내가 안다는 모든 이성은 아무것도 아닌 거구나. 하는 걸 발견하게 되죠.

다윗이 성전 짓는다 할 때 하나님은 성전 짓지 않겠다. 그러면 성전 이야기는 마무리 된 거잖아요. 천만의 말씀, ‘성전 짓겠다.’를 근거로 해서 성전 계획을 내놓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작 내놓지. 진작 내놓으면 다윗이 그 계획대로 순종해 버려요. 순종하게 되면 다윗은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는 식으로 마치 하나님을 믿은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쑤시는 거예요. 자, 첫째 시간에 요거 예 들고 쉽시다. 저는 이것을 쉬운 예로 제모, 제모란 말은 쉬운 말이죠. 털을 제거하는 거예요.

자, 다리에 털이 나왔다. 여자들이 수영복 입기 전에 다리에 제모 할 때 제모 하는 방법은 모르지만 예를 들어서 파스 가지고 한다 합시다. 털이 이렇게 있는데 거기에 파스를 이렇게 붙여요. 그러면 털이 파스를 땡기는 겁니까? 파스가 털을 땡기는 겁니까? 파스가 털을 땡겨서 털을 뽑아버리죠. 이 털은 다윗에게 있는 거예요. 다윗으로 하여금 털 나오게 해놓고 주님께서는 파스를 붙여서 그 나왔던 털을 혹 뽑아버리면 다윗은 피부 째 홀라당 까지죠. 까지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죄가 출렁이는 것이 지가 목격하게 되겠죠. 그 방법을 주께서는 사용하시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42.222) 13-09-27 09:14 
가락-70이레 논문(다윗 언약)130905-25강b -이 근호 목사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의 장군들은 다윗의 나라가 좋지, 다윗의 언약의 나라는 원치 않았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늘 이기게 하니까 그 이기는 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언약 앞에서는 죄를 이겨야 돼요. 그렇죠? 십자가가 죄를 이기거든요. 십자가는 죄를 이기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죄를 이기려면 뭐를 알아야 돼요? 죄를 알아야 되죠. 그러면 언약이 우리한테 오는 것은 ‘네 죄가 너를 이겼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이 왔는데 다윗이 부하들은 관심이 딴 데 가 있는 거예요.

아이쿠, 죄를 이기던 어떻든 간에 이 나라가 부강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자신의 무궁화 노선, 자기의 과거, 현재, 그리고 과거 현재가 원인이 되어서 얻어지는 그 결과, 내가 기대한 결과. 다윗의 입장에서는 내가 죄인이 된 것은 내가 죄인 되고 싶어서 죄인 된 게 아니에요. 이건 언약이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가 나는 바로 날 때부터 죄인이다. 벌써 이게 다윗을 중심으로 한쪽은 다윗 언약의 반대파가 생기고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다윗 언약 편에 서게 되고, 이런 상태가 나중에 등장하겠죠. 역대 상 말고 역대 하에 들어가면 그게 죽 나오겠죠. 사무엘하에 보면 그게 나오거든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다윗은 구원받았습니까? 그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고 다윗 언약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관심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윗 언약이 무엇인가? 역대 상 21장 보겠습니다. 사실은 그전에 잠간 언급하고 가실게요.^^ 여기 역대 상 11장에 보게 되면 그 전체 내용이 뭐냐 하면 11장 10절에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두목은 이러하니라” 해서 다윗의 용사들이 나와요.

또 역대 상 11장 26절에 보면 “또 군중의 큰 용사는 요압의 아우 아사헬과 …” 죽 군대장관들 이름이 나오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다윗 옆에 뭐가 자꾸 모인다? 용사들이 모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아시면 되고요.

그 다음에 역대 상 15장 1절에 보면 이번에는 “다윗이 다윗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위하여 장막을 치고” 그 다음에 3절 죽 나오는 게 뭐냐 하면 거기 레위지파도 나오고 제사장들 나오죠. 그러면 한번 봅시다. 다윗 주변에 뭐가 있다? 용사들 포진돼 있고 또 하나님의 언약궤 주변에 뭐가 있다?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모였죠.

그러면 다윗의 나라 언약의 나라는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용맹한 무사들도 있고 그 다음에 언약궤에 제사를 지내야 될 하나님의 제사장들도 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 낸 취지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국가가 어떻게 발생되느냐 하는 거예요. 국가가 어떻게 발생되느냐, 이거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발생되는가와 같은 이야긴데 국가가 어떻게 발생되느냐 하면 정답은 이거에요. 전쟁입니다. 전쟁!

세상 나라도 마찬가지고 전쟁이 없으면 나라가 안 돼요. 전쟁이 없으면 계속 외부에서 전리품이 투입되질 않습니다. 그러면 국가가 자체적으로 이룰 수 있는 걸 자체적으로 생산해야 되는데 그게 사람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자체적으로 그게 안 돼요. 치과 병원이 잘 되려면 옆에 있는 치과가 망해주면 돼요. 망해주면 그쪽 가는 손님이 이쪽으로 오는 거예요. 그쪽에서 노리는 것도 ‘니가 망해라.’ 이렇게 되는 거죠.

자체적으로 아무리 기술이 늘어도 저쪽 가서 뺏어오지 아니하면 자체적으로 생산이 안 됩니다. 세상 국가도 마찬가지에요. 국가는 전쟁을 통해서 생기는데 더구나 다윗의 나라는 이 전쟁을 누가 유발시키느냐 하면 아까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죠. 이 다윗은 들러리라. 하나님께서 뭔가 전쟁을 자꾸 유발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쟁을 유발시킬 때 뭐가 생긴다? 이스라엘이라는 다윗 왕국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점을 다윗이 알고 다윗은 그걸 누구 공로로 돌립니까? 언약궤 중심으로 해서 ‘이건 하나님의 공로입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만약이 아니고 실제지만 사탄이 있다고 합시다. 악마는 하나님의 전쟁 때문에 투입된 개념이고 또 실제로 그런 게 실체죠. 그럼 악마는 방법이 뭡니까? 하나님은 전쟁은 승리해서 언약의 나라를 만든 거라면 사탄은 반대로 그 나라를 부수는 것이 사탄의 일이겠죠.

자. 그러면 사탄이 늘 이기게 하시는 그 이스라엘을 무슨 수로 그 나라를 부숩니까? 역대 상 21장 봅시다. 지금 제가 하는 주제는 다윗의 언약이 무엇이냐, 그걸 지금 파악하는 거예요. 다윗의 언약은 이겁니다. 이건 안 되고 다윗의 언약이 원인이 돼서 생긴 게 나라거든요.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냐를 통해서 언약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지금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21장 1절에 보면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이스라엘 숫자를 헤아리게 하는 거예요. 참, 사탄이 하는 일이나 하나님이 하는 일이나 하여튼 인간 쪽에서는 종잡을 수가 없어. 뭐 사탄이 와서 ‘너 다윗 따르지 말고 다른 나라로 가.’ 이래야 우리가 야, 이스라엘 나라 망했다. 이게 우리 방법이거든요. 우리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사탄이 뭘 알고 있어요? 이게 사탄이 뱀 같아. 똑똑해요. 사탄은 하나님이 뭘 싫어하는가를 미리 땡겨서 아는 존재가 사탄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도록 하나님이 다루시는 사람에게 격동시키면 그건 사탄의 전략은 성공한 게 되겠죠. 사탄은 다윗 보고 뭘 하게 하느냐 하면 인구조사를 시키는 거예요. 자기 백성 숫자 헤아리는 거예요. 계산기가 어디 폼으로 있습니까? 계산기는 계산하는 게 계산기잖아요. 주판은 계산하려고 있는 거잖아요. 백성들 숫자 세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누가 답변해 보세요. 자기 백성의 숫자를 세는 것이 그것도 왕이 자기 백성 숫자 세서 군대와 세금 문제를 통계를 내야 되니까 그게 뭐가 나빠요? 아예 처음부터 우리는 모를 일입니다.

그것과 다윗 언약이 무슨 관계있느냐? 그것을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숫자를 헤아릴 때 다윗이 숫자를 헤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없는 거예요. 없는데 사탄이 와서 중간에 개입해서 ‘너는 숫자 셀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이렇게 격동을 시킨 겁니다. 그럼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이스라엘 나라가 다윗 언약의 나라인데 사탄이 임해서 이 나라가 다윗, 나의 나라라고 간주하게 만들죠.

그런데 좀 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만 하나님께서 사탄으로 하여금 그렇게 미혹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그것을 이미 예상을 하시고 조치를 하신 거예요. 왜냐 하면 다윗의 나라를 다윗 언약의 나라로 만들려면 이 다윗부터 해서 이 나라가 망해야 됩니다. 망하는 데는 사탄이 제격 이예요. 욥기에도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사탄보고 지시하죠. ‘어이’ 가서 누굴 미혹하라? 욥을 미혹하라고 지시를 내리잖아요. ‘해봐. 해봐. 해, 해봐.’ 지시를 내리잖아요. 지금도 사탄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왜, 천사이기 때문에.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미혹해야 돼요. 우는 사자와 같이 택한 자라도 미혹을 해야 됩니다. 이건 사탄의 본인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 이예요.

그래서 아까 동영상 할 때 정답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완성’이라 했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성된 게 정답 이예요. 예수 안에서는 아니오, 가 없고 모두가 예수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예, 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윗의 나라가 다윗 언약의 나라로 옮길 때 언약의 주인공은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다윗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나라로 옮길 때는 반드시 필히 뭐가 들어가야 된다? 사단이 개입을 해줘야 돼요. 이 사단이 개입을 하는데 이게 바로 사단이 뭐냐 짐승입니다. 이제 느부갓네살하고 연결되죠. 느부갓네살이 짐승 돼야 될 이유가 이게 다윗 언약의 체제 안에, 시스템 안에서 똑같은 원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다니엘에서 풀어서는 안 되고 다윗 시대 때 사탄이 어떻게 작용하느냐를 그걸 찾기 위해서 지난 시간 내내 이야기한 거예요. 원형이 다윗 시대에 이미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게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이 시대 2013년 이 시대 , 우리 시대 이야기에요. 지금도 사탄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활동한다고 하면 안 되죠. 어떤 원리에 의해서, 어떤 체제에 의해서, 어떤 원칙에 의해서 움직이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되죠. 그걸 알아야 복음을 전할 게 아닙니까? 사탄? 이건 이러해.

다시 한 번 돌아가서 다윗은 자기가 백성의 숫자를 셀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 숫자를 헤아리겠어요? 안 헤아리겠어요? 안 헤아리죠. 자기는 왕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다윗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 되게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숫자 헤아릴 권한이 다윗이고 뭐고 우리한테는 있다? 없다? 아예 없는 거예요. 원인이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냥 결과물이죠.

그런데 다윗은 차고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이 다윗이 나빠서가 아니라 누가 그렇게 했다? 사단으로 하여금 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신 것이죠. 왜냐 하면 다윗은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다윗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러면 목사님, 다윗 빼고 예수님 바로 오죠? 다윗 빼고 예수님 바로 와 버리면 다윗이 저지른 죄가 누락이 되는 거예요. 다윗이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죄를 드러내 줘야 그래야 백성들이 ‘아! 더 이상 내가 내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게 맞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수긍이 돼야 되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하는 거예요.

예수님 앞에 있던 엘리아, 아브라함 이 사람들이 다 필요 없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이 했던 그 죄들이 지금 겹겹이 켜켜이 우리 안에 지금 차곡차곡 쟁여 있어요. 뜯어보면, 제모해보면 털 뽑아보면 아브라함 털 나오고 이삭 털 나오고… 우리는 다윗도 들어있고 바리새인 털도 들어있고 온갖 털이 다 들어있어요. 구약에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것이 우리 안에 꽉 적체(積滯)돼 있다니까요. 전부 다 겹겹이 눌려져 있어요.

그래서 엘리야(세례요한) 보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남자 중에 최고다. 하면서 엘리아 들으면 기분 좋겠지만 그 다음 이야기가 엘리아 기분 나쁘게 만들죠. 천국의 어린아이라도 너보다 더 많이 안다. 엘리아는 엘리아 시대만큼 죄를 알지만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그보다 더 깊은 죄를 알죠. 깊은 죄! 세례요한 당시에는 가능성이 있지만 신약에는 아예 가능성이 없어요.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서 이미 땅! 땅! 땅! 확정난 거예요.

놀라운 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겁니다. 어디를 치면 이스라엘이 무너진다는 걸 알아요. 몇 명 죽었느냐 하면 역대 상 22장 14절, 7만 명 죽었어요. 7만 명 죽은 그 시점도 사실은 다윗이 그만, 그만해서 죽은 거예요. 왜, ‘잘못은 내가 했는데 왜 저 죄 없는 사람을 죽이십니까? 그만해 주세요.’라고 하니까 ‘됐다. 어이, 천사’ 그걸 망나니라 해요. 칼 들고 막걸리 먹고 칼에다 거품 물고 무조건 미쳐서 사람 모가지 치는 사람 있잖아요. 망나니, 망나니 역할 하는 천사들이 ‘그만 해라. 많이 먹었다. 그만해라.’ 그래서 그친 게 7만 명이예요. 다윗 하나 때문에 7만 명 날라 간 거예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벌 줄 때 3지선다형으로 골라잡으라 했어요. 골라잡을 때 3년 동안 기근이 있든지, 네가 3달 동안 대적에게 패하여 가든지 온역이 사흘 동안 유행하든지, 니 맘대로 하라 했죠? 참, 하나님께서 이런 게 어려운데 하나님께서 이미 사탄에게 말려든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냐 하면 ‘니 맘대로 하라’ 니 맘대로 하라 하는 것은 자유 의지를 선택하는 그 말이 아니고, ‘어떤 걸 선택해도 니는 이미 사탄에게 말려든 그 면면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죠.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실 때 다윗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가치가 없죠. 다윗은 그냥 이기게 하는 목격 자에 불과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여기 와서 숫자를 본인이 헤아렸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게 아니고 하나님 잘~ 믿는 내가 왕이기에 얻어진 결과라고 본 거예요. 메시아도 아닌 게. 그냥 메시아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지금 예수님께서 활동하는데 뭔가 앞에 불쑥 허락도 없이 ‘까꿍‘ 하고 기어 나온 거예요. 그래서 ’에이 씨‘ 하고 눌러버린 겁니다. 이거 눌러 버릴 때 7만 명 싹 죽은 거예요.

그렇다면 다윗은 뭐냐 하면 나의 행동이 뭘 유발했다? 이 땅에서 죽음인데 그냥 죽음이 아니고 처벌에 입각한 죽음을 유발한 거죠. 그렇다면 이 땅에서 인간들이 죽은 이유가 뭡니까? 아담의 죄 값으로 모든 인간은 전부 다 홍수에 쓸려가는 벼 이삭처럼 한번 홍수가 확~ 오게 되면 전부 다 벼들이 한쪽 방향으로 쫙~ 쓰러져 있죠. 큰물이 그렇게 했죠. 바로 지금도 우리 위에 큰물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동일한 방향으로 죽어 마땅합니다. 그게 바로 아담의 힘입니다. ‘내 안에 아담의 힘 있다.’ 이 말은 ‘나 죽어야 된다.’ 그런 뜻 이예요. 우리 안에 아담의 힘 작용합니다. 우리 힘을 이길까요? 못 이길까요? 못 이깁니다. 그럼 누가 이깁니까?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다른 말로 하면 진짜, 진짜 아담을 성경에서 두 자로 뭐라 하느냐 하면 ‘아들‘ 아들이 이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기신 분이여, 죄를 이기신 분이여, 죄를 이겨서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여, “사망이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 내 사망과 상대해서 예수님 이름으로 우리는 이긴 거예요. 내가 예수 이름으로 이긴 게 아니고 주님의 이름이 내 이름을 차고 들어와서 죽어가는 내 이름을 살려 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 이름을 부르면 안 되죠. 누구 이름 불러야 됩니까?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 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죠. 다윗은 자기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 숫자를 헤아린 거예요. 그러면 사탄의 전략은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을 내 인생에서 한 순간이라도 삭제하고 지워버리는 전략, 그것이 우리가 알고자 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해결을 내 이름으로 내 명예로 내 자존심으로 해결하겠다. 요거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순간.

그런데 성령께서 주의 이름을 들이대시면 ‘아하! 내가 사탄의 종이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그 다음에 봅시다. 드디어 다윗 언약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다윗이 오르난에 가서 타작마당을 돈 주고 사죠. 사고 거기서 뭘 드립니까? 제사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징벌을 거두었다 이야기합니다.

자, 다윗 언약의 결론은 뭐냐, 질문이 다윗 언약의 결론은 뭡니까? 라는 질문도 되지만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가지고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기게 하셨습니까? 와 같은 질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힘으로 이겼다고 생각했죠. 다윗이 용사가 많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힘으로 다윗을 이기고 또 이기게 한 것이 아니고 장차 다윗이 드려야 될 하나님 앞에 번제의 힘, 죽음의 힘, 다윗은 그 자리에서 의인으로 투입됩니까? 죄인으로 투입됩니까? 죄인. ‘나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 내가 들어서 삭제시켰습니다. 숫자 세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죽여 버렸습니다. 숫자가 확 빠졌습니다. 다 나 때문입니다.’ 하는 그 죄인이 남을 죽게 만든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 바로 죄인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체결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가 없어져요. 죄가 없는데 육신의 죄를 누구한테 짊어지게 했다? 육신의 죄를 그 아들에게 짊어짐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으로만 모든 것이 응축이 돼요. 그래서 언약의 혜택을 받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때부터 아들이 돼요. 물론 양자지만 아들 이예요.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지옥 가죠. 왜냐 하면 그 나라는 천국은 아들만 모이는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그래요.

이 이야기가 로마서에만 덜렁 나오면 안 돼요. 이게 구약이 있어줘야 돼요. 로마서에만 달랑 나오면 ‘예수 믿으면 아들 된대.’ 이게 뭐야? 사탄이 개입되고 다윗은 숫자 헤아리게 되고 다윗은 ‘나 때문에 백성 죽었습니다.’ 하고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내가 죄인입니다.’ 할 때 그 죄인의 입장에서 값을 가지고 할 때 그 모습이 십자가 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다윗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죄인의 모습으로서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데 그 기능을 위하여 언약이 다윗에게 미리 덮친 겁니다. 우리는 나중에 덮쳤고 십자가 이후에 우리는 언약이 덮쳤고 다윗은 미리 덮쳤죠.

자, 그러면 여기서 빠진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언약궤가 뭐냐? 여기 역대 상 21장 끝에 보면 거기에 “장막과 번제단이 그 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으나” 이렇게 돼 있죠. 거기서 번제를 드리는데 언약궤는 다윗의 죄를 충분히 나타났을 때 비로소 언약궤가 한 곳에 모읍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다윗을 통해서 다윗 언약의 정체가 나타났죠. 다윗은 죄인으로서 이스라엘 왕이었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 나서서 이스라엘 왕으로 삼을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될 경우에만 그걸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의 예정된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그 다윗 이후에 성전은 어디로 가느냐? 산으로 올라가 버려요.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장차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그쪽 노선으로 KTX처럼 날라 가 버려요. 다윗은 성전을 지었습니까? 못 지었습니까? 성전을 못 지은 거예요. 성전을 못 짓고 성전은 장차 오실 예수님 소관으로 이미 연결돼 버렸습니다. 참 오늘 골치 아프다. 여러분 이거 이해하려고 하는데 난 모르겠고….

그 다음에 언약궤가 안치되는 것은 그 다음에 솔로몬이 태어나서 솔로몬이 언약궤를 한 장소에 성전에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 언약궤를 여기다 안치를 했습니다. 자, 하나님은 고정됐죠? 이 하나님이 고정된 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그림자’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그림자를 그림자로 보지 못하고 이걸 성전의 실체라고 오해를 한 거예요.

그럼 실체는 어디 갔습니까? 실체는 어디로 갔죠? 실체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어요. 하늘로 올라가면서 장차 그리스도가 와서 성전을 만들잖아요. 올라가면서 여기서 꽃가루인지 뭔지 모르지만 뭘 떨어뜨려요. 떨어뜨린 중에 하나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그리고 예레미야, 이사야, 이쪽(밑)에는 성전이 고정됐다고 생각하니까 여기서 나온 것은 뭐냐, 왕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올라가서 떨어진 것은 누구냐 하면, 이건 선지자들 이예요. 그럼 그 다음부터는 무엇과 무엇의 전쟁입니까? 아까 전쟁할 때 했죠? 다윗은 항상 이기죠. 누굴 이겨요? 다윗에게 언약이 있기 때문에, 언약궤가 있기 때문에 다윗은 항상 이기게 하잖아요. 그렇잖아요. 언약궤는 고정되면 안 돼요. 하여간 이건 하나님이 스스로 고정해야 되지, 사람이 고정시키면 안 돼요. 하나님이 스스로 고정되는 것은 지상에 고정되는 것은 고정해봐야 그림자입니다. 실체로 고정되는 것은 건물이 아니고 가건물도 아니고 벽돌로 된 건물이 아니고 인격 이예요. 인격!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고정된 성전입니다. 뭔 뜻인지 여러분 대충 감은 오죠?

지금 솔로몬들이 오해한 것이 오늘 날 교회가 오해한 거와 똑같은 거예요. 역사와 전통, 무궁한 과거 현재를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다윗이 고생해서 성전 못 지은 거 우리가 지었다. 그러니까 이 성전을 아끼세. 이거는 인간들이 아는 과거 현재 그대로 땅겨온 미래입니다. 미래는 누가 만들어요? 언약이 만들지 우리가 만들지 않아요.

그런데 성전이 분명히 있었고 성전에 누가 왔습니까? 주의 이름이 오셔서 분명히 약속을 했어요.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면 병도 낫고 가뭄도 해소되고 전쟁을 이기게 해주겠다. 회개하면 해주겠다는데 회개를 누가 합니까? 회개할 인간이 있어야지. 회개해서 네 죄를 알고 기도하면 응답해주겠다는데 죄를 아는 사람이 없어요. 죄를 아는 위인이 없다니까요.

죄를 안 사람은 있어요. 스스로 아는 사람은 없어요. 죄를 알게 한 사람은 누구냐 하면 유명한 요나지만, 요나는 어느 계열에 속합니까? 왕의 계열이 아니고 누구 계열이죠? 선지자 계열 이예요. 예레미야가 성전에서 울었죠. 예레미야는 천상회의를 본 사람 이예요. 무슨 계열 이예요? 선지자 계열 이예요. 세례요한이 예수님 올 때 뭐라 합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했죠. 세례요한은 왕 계열 이예요? 선지자 계열 이예요? 선지자 계열입니다. 오실 엘리야가 세례요한 이예요. 말라기도 마찬가지고.

이 선지자는 천상회의를 본 사람입니다. 미가야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에 나오잖아요. 넌 보지도 못하고. 꼭 서울 안 가본 인간들이 서울 가본 사람한테 이긴다고. 세상이 그래요.

세상은 고정중심입니다. 고정된 게 있어서 힘의 구심점이 있어야 돼요. 왕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왜, 권력의 핵심이 있어야 단결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선지자는 땅에서 고정된 걸 찾습니까? 하늘에 고정된 걸 찾아요? 하늘에 고정된 걸 찾아요.

이왕 어려운 거 해봅시다. 히브리서 4장, 어제 설교할 때 언급했지만 이건 시간 관계 상 자세히는 못했어요. 히브리서 4장 3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돼 있죠. 그 다음에 “믿지 않는 사람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 다음에 “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세상이 창조할 때부터 일이 이루어졌다.” 이 말이 무슨 말 이예요? 이미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완성됐다. 이 말이거든요. 이거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요. 선지자에게 성전은 우리 보기는 오실 예수님이지만, 선지자한테는 이미 그것이 오실이라는 말은 역사 속에서는 통하지만 묵시에서는 이미 그 자체가 창세 때 이미 완성된 걸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가 눈 꿈쩍도 안 하는 거예요. 돌을 던져도. 니가 오늘 밤에 어디 간다? 낙원에 간다.

이미 구원은 완성된 거예요. 완성된 것이 역사 속에서는 이렇게 시간적 흐름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시간적 흐름 속에 있으면서 완성을 쳐다보는 것은 선지자들에게 성령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미 아셨고 이미 부르셨고 이미 의롭다 하시고 이미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를 우리는 이미 알게 되었죠. 이미 우리는 그 신분이기 때문에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자.‘ 가 아니라 이미 우리는 그걸 알고 있죠. ’알고 있다.‘를 확인하기 위해서 환란과 핍박과 기근이 들이닥치게 되죠. 스데반 집사처럼! 다윗처럼! 그럼 다윗도 이미 구원받았네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사탄에게 유혹 받아서 숫자를 세고 죄인의 입장에서 그 오르난 타작마당에 서야 되는 겁니다. ’저 때문에 백성들 죽었습니다. 그런 죄인입니다.‘ 하고 서는 그것이 이 지상에서의 언약체결 현장입니다. 매일같이 언약체결 하세요.

자, 더 나아가 봅시다.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나는 모친의 죄 중에 잉태했습니다.’ 이게 하늘로 올라간다고요. 이게 선지자로 가버립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뭐라 합니까? ‘하나님 나 이 일 안 하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그대로 본 걸 하니까 남들이 나보고 욕한다고 하던데요. 내가 미쳤다고 욕 얻어먹어가면서 이 일 못하겠습니다.’라고 할지라도 나는 해야 되겠죠? 그렇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주여 왜 자꾸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 그런 뜻 이예요. ‘좀 정상적인 생활하게 해주시옵소서. 왜 저를 힘들게 합니까?’

제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할게요. 남쪽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이름도 안 나와요. 그 사람이 북쪽에 와서 여로보암한테 예언하죠. ‘장차 요시야 왕이 당신을 죽인다.’ 하고 후딱 말하고 내려가려고 하니까 붙잡잖아요. 아이크, 재산 줄게. 모든 걸 다 원하는 대로 줄 테니까 계속 예언해 달라. 나는 당신(왕)을 도와주기 위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내려갔거든요.

그 말이 뭐냐 하면 앞으로 장차 오실 선지자는 왕과 좋은 나라, 이 다윗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그런 이스라엘 되라고 선지자 온 게 아니라는 것을 남쪽 선지자가 와서 언급을 해요. 그런데 북쪽의 선지자라 하는 것은 왕을 도와서 하나님 앞에 복 받는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이 그것도 북쪽 선지자, 가짜 선지자의 특징이라 말이죠. 그러니까 가짜 선지자가 뭐라고 꼬시느냐 하면 ‘나도 같은 신학교 나왔습니다. 나 총신 나왔어요. 나도 안수 받았습니다.’ 이렇게 꼬셔서 하나님의 계시에 당신 오게 되면 물과 떡을 주라고 했습니다.‘ 하니까 남쪽 선지자가 하는 말이 ’그래요? 내가 너무 교만하면 안 되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했는데 맞아 나만 계사 받은 게 아닌가보다. 예, 주의 뜻이라면 할 수 없죠.‘ 하고 가는데 난데없이 그 근처 동물원이 있었는가 동물원에서 탈출한 사자가 와서 뜯어먹었는데 이 사자가 배고파서 먹은 게 아니고 사람을 죽여 놓고 서울 멧돼지와 똑같아요. 먹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어요. 그 사자가 주의 사자입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앞으로 올 선지자는 절대로 왕과 타협해야 된다? 안 된다? 타협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대립된 관계를 이어나갈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어렵더라도 참으세요. 나라가 둘로 남쪽, 북쪽 갈라졌잖아요. 북쪽에서 보면 우리는 북쪽, 너희는 남쪽이라고 보잖아요. 그게 오해라니까요. 북쪽도 아니고 그 다음에 남쪽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북쪽이고 남쪽이고 간에 둘 다 고정된 성전을 주장하는 한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날라 가는 이 성전을 모르는 한 그 사람은 둘 다 나중에 멸망될 나라입니다. 그 사실을 남쪽에서 올라 온 선지자 그걸 알았어야 돼요? 몰랐어야 돼요? 그런 사명을 감당해야 돼요. 나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다. 엘리아가 그 사명을 감당했잖아요.

좀 더 이야기 해봅시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언약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이걸 뭐라 했다고요? 이게 바로 그림자죠. 자, 여러분 물어볼게요. 그림자를 추적하면 실체 알 수 있다? 없다? 없죠. 그게 딜레마에요.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그림자라고 했으면 지상에 있는 그림자는 얼룩이잖아요. 지상의 그림자는 얼추 맞출 수 있어요. 그림자가 가만히 있으면 ‘서 있구나.’ 까불락 대면 ‘춤추고 있구나.’ 이렇게 얼추 맞출 수 있는데 그림자는 2차원이고 평면에 있고 실체는 3차원이기 때문에 맞기는 확실히 맞지는 않지만 요새는 컴퓨터가 발달했으니까 2차원 가지고 3차원 뽑아낼 수 있잖아요. 그래픽으로.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이 그림자는 실체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어제 수요일에도 했지만 시간 관계상 그걸 설명을 못했는데 여기서 해볼게요. 안식일은 뭐라 했습니까? 안식일은 그림자다. 자, 안식일이 그림자라면 안식일은 무슨 개념이냐? 시간개념이죠. 안식일은 시장에서 2근에 500원에 안 팔죠? 안식일이라 하는 이것은 실체가 없죠? 시간이니까. 그런데 안식일을 가지고 그림자라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그림자의 실체는 뭐냐, 안식일의 실체는 뭐냐? 우리가 성경에는 벌써 해답이 나와 있는 걸 압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이 그림자라면 실체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 몸이 되는 거예요.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정답입니다.

그럼 한번 맞춰 봅시다. 참 곤란하다. 곤란해. 특정 시간은 그림자다. 그런데 실체는 뭐냐 하면 어떤 몸이니까 육체 아닙니까? 육체죠. 시간이 그림자와 실체를 이렇게 우리는 이게 납득이 되는데 삼각뿔이 있다면 여기 그림자가 있고 이렇게 이해가 되는데,  시간과 어떤 33살 먹은 아저씨의 신체와 어떻게 연결되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 세계에서. 없죠. 없으면서 믿기는 뭘 믿어?? 이해도 안 되면서 그냥 막 들이댔습니까?

어떤 메카니즘 때문에 어떻게 그림자가 일치된 거예요? 해결의 힌트는 있습니다. 힌트는 아까 이야기했어요. 그림자에서 실체로 갈 수 있다? 없다? 안 되죠.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인간이 있잖아요. 인간 속에 시간 개념이 있으니까 시간 자체가 이게 그림자가 될 수 없고 시간 자체가 우리를 대변하는 이게 이미 실체에 포함이 돼 버려요. 우리는 늘 과거 현재 미래 항상 우리 안에 포함을 시키고 있어요. 시간 따로 뽑아낼 수 없다니까요. 그림자라 하는 것은 뭡니까? 실체에는 그림자가 없고 땅에 얼룩이 질 때 그림자가 되는데 시간을 그림자 만들려면 이 그림자를 얼룩을 담아 놓는 짐이 따로 있어야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제가 수요일 날 설교하는데 권사님한테 ‘권사님 이해됩니까?’ 하니까 권사님 말이 참 현명한 대답을 하셔요. ‘집에 가서 또 들어볼 거예요.’ 그래서 음성 녹음하길 잘했구나 생각이 드는데. 이게 제가 애먹이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지금 성경 골로새서 2장 16절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안식일은 그림자니까 그 뒤에 나온 말이 “믿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고 싶어. 왜, 이 몸이 시간이 포함돼 있으니까. 차라리 안식일 주일 날 하루 쉬고 구원받는 게 편하지, 아휴, 하루 쉬고 구원하고 얼마나 수월합니까? 하루 쉬고 구원받고 천국 가고,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그게 더 낫지 않습니까?

오늘은 일요일 시작, ‘오늘 아무 노동하지 마라. 11시 59분, 땡! 구원받았다. 얼마나 쉬워요? 바로 그 방법을 했던 것들이 바로 너희 애비가 뭐다? 사탄이다. 사탄은 뭐를 안다? 사탄은 예수 주의 이름을 못 믿게 만드는 것, 그 대신 뭘 믿게 하는 것? 내가 시간 지키고 내가 율법 행하는 이걸 계속 고수함으로서 이스라엘을 와르르 무너지게 하는 방법을 사탄이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사탄의 종들이 교회를 장악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 뜻 이예요. 진짜 안 믿는 사람은 ’나가라. 귀찮다. 하여튼 안 믿으면서 천당 오는 것 귀찮으니까 내가 마귀 쫙 깔아줄 테니까 다 따라 가.‘ 그래서 주일 지켜서 구원받고 십일조 해서 구원받고, 선교회비 내서 구원받고, 회개해서 구원받고.

여러분, 시간에서 예수님 밑으로 건너올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시간을 지켜봐야 내가 내 지킨 게 되니까 나의 육체를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 2장에서 방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육체로부터 그림자를 보여주는데, 그림자부터 실체가 안 되니까 예수님이 육체로부터 그림자로 날라 가는데 날라 갈 때 어떻게 날라 가느냐, 여기 세 자, 십자가에 우리를 죽여 버립니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니고 죽여 버려요. 날마다!

골로새서 2장 한번 봅시다. 내가 목 아픈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이거 풀어야 돼요. 나만 답답한가? 여기 2장 11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여기 몸을 벗는다는 말은 육체를 죽여 버려라 이 말 이예요. 그러니까 ‘말씀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죽은 놈입니다.’ 죽은 놈이 시간을 계산한다? ‘오늘은 주일이고 오늘이 안식일이다.’ 그것도 죽여 버려라 이 말이죠. 왜 그 자체가 주의 십자가의 늘어진 그림자 속에 얼룩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일 지킵니다. 십일조 지킵니다.’ 이 자체가 십자가의 늘어뜨린 그림자에 속하거든요. 그런 짓 하는 그림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고 맨날 주일 생각하고 십일조 생각하는 나는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방금 그 말 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십일조 하고 주일 성수하는 나는 죽었고‘ 하니까 이건 되게 좋아해요. 왜, 이제는 교회 안 가도 되고 이제 헌금 안 해도 구원받으니까 그런데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건 뭡니까?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데 지가 살았네. 십일조 안 하는 지가 살았고 교회 안 가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지가 살아버렸어요. ’나는 십일조도 안 하거든요. 교회도 안 가요.‘ 자랑이라.

주님이 살아있어 나는 다윗처럼 ‘나는 항상 나 때문에 피해보는 사람 많습니다.’ 하는 죄인으로 살아야 그게 언약체결이 되는데 이거는 언약이 체결되는 게 아니고 언약을 알아버렸어. 정답을 외워버렸어요. 뭘, 우리 모습입니다만 또 성령께서 또 가만 안 두시니까 천만다행입니다. 성령께서 그걸 완전히 ‘에이’ 하고 파스 붙여서 그 털을 확 뽑아버리죠. 하면 고따위 식으로 생각하는 그것도 죄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하시죠. 깨닫게 하시는 것은 성령의 몫이지 우리가 스스로 우리 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니엘까지 와야 되니까. 아까 얼른 했는데 다시 해봅시다. 성전은 고정돼 있고 언약궤 있죠. 사람들은 뭘 믿는다? 눈에 보이는 걸 믿죠. 왜, 구체적이니까. 법궤니까. 상자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약속하기를 ‘이 성전에 와서 회개하고 기도하면 응답하겠다.’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상자 있죠. 성전 있죠. 이건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누가 지킨다? 하나님 자체가 지킨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홀라당 불타버렸네. 그러면 성전 짓겠다는 시편의 약속, 다윗은 어디 갔느냐? 이건 다니엘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지죠. 주어지게 되면 선지자의 내용이 뭐냐 하면 다윗 자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다윗 족보, 다윗 가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어떤 건물에 속하지 않고 내가 친히 만들은 성전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다윗 자손, 다윗 후손 이예요. 그러면 솔로몬이겠네요. 왜냐, 다윗의 아들이 솔로몬이고 솔로몬 다음에 누구? 르호보암이고 그런 사람이겠네요. 아니에요. 후손은 후손부터 먼저 만들어 놓고 소급해서 따라옵니다.

다윗의 자손이 누굽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 누구에요? 오실 메시아죠. 메시아부터 그게 실체니까 그림자를 추적해 나가보면 흔히 다윗 자손이라고 여겼던 것은 육적이었고 영적인 자손은 따로 소급해서 나오는데 그건 우리가 알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알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숨겨놓았으니까. 그건 족보에 나타나지 않아요.

여기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보면 “바벨론 이거한 후에“ 하고 스룹바벨 나오죠. 몇 개 나오다가 그 다음부터는 안 나와요. 그 다음에 마리아, 요셉이 등장해요. 그걸 로마서에서 ‘남은 자’라 해요. 남은 자!

왜 몰라요? 역사적인 과거 현재 이 노선을 고집하는 사람에게 어떤 특정 인간을 알아버리면 그걸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하거든요. 그건 가짜죠.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은 우리의 족보에다 억지로 집어넣을 수 있는 대상이 안 됩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우편의 양아, 네가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 할 때 양이 뭐라 합니까? ‘아, 그때 제가 물 줄 때 이렇게 했습니다.’ 합니까? 아니면 뭐라 합니까? 경상도 말로 ‘어데예? 언제?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상하다. 저는 한 기억이 없는데.’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은 지금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제가 언제 주를 위해 살았습니까? 저는 죄 진 것밖에 없는데.’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할 때 우쭐댔겠습니까? 자기가 멋있다고 여겼겠습니까? 다윗을 항상 이기게 하실 때 다윗이 좋았겠습니까? 무섭습니다. ‘제가 뭔데 제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이렇게 사용하십니까?’ 그 고백이 스데반 집사와 같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우리가 믿지만 돌아서면 뭔가 내가 뭐라고 뭔가 할 수 있다고 가치 있다고, 주께서 저를 반드시 들어 쓰셔야 된다고 고집부리는 교만을 부립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언약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그동안 쓰게 하신 것도 주께서 십자가를 알게 한 것이 하나님의 묵시적인 십자가의 능력인 것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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