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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3 09:13:46 조회 : 2313         
할렐루야 120202 이름 : 이근호(IP:220.81.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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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IP:203.♡.40.73) 12-02-23 18:30 
가락교회120202-요한계시록19장(할렐루야)32강a-이 근호 목사
제 32강a

요한계시록 19장 할 차례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할렐루야‘, 신학에서는 ’할렐루야‘ 시라 하거든요.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할렐루야‘가 뭔 뜻이냐 하면 고난을 겪고 난 뒤에 지나간 모든 하나님의 일을 고난의 입장에서 해석할 때 나오는 시가 할렐루야입니다. 다시 할게요. ’할렐루야‘ 시라는 것은 유다나라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서 불렀던 노래, 돌아와서 불렀던 노래가 아니라 거기 있으면서 언젠가는 다시 하나님의 본향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예언으로 받아서 기뻐하는 노래, 이게 어렵죠. 어떻게 어렵냐 하면 이미 돌아와서 기뻐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다시 돌아간대.‘라는 데서 오는 기쁨, 그러니 현재는 고난가운데 있으면서 고난이 끝이 아니고 고난을 끝내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계시는 곳, 참 이런 게 어려워요. 약속의 땅이 내가 살던 고향이 아니고 그때 참 좋았다.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곳 이예요.

하나님이 함께 계시던 가나안 땅이다 이 말이죠. 옛날에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흘렀다. 그때 좋았다. 그게 아닙니다. 우리 살기 좋은 생전에 여유 있는 곳이 약속의 땅이 아니고, ‘하나님 어디 계세요? 하나님 있는 곳에 저도 합류하고 싶습니다.’ 그게 약속의 땅 이예요.

그래서 교회 가서 약속의 땅에 간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지금 주님이 어디 계신가, 그 소리 듣고 그쪽이 만약에 저쪽이라면 빨리 이쪽을 나는 목숨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고 이쪽을 떠나고 싶습니다.‘ 할 때 나오는 노래가 약속의 땅이며 약속의 땅을 고난 가운데 바라보며 부르는 노래가 할렐루야 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할렐루야’는 고난 없이는, 고난 가운데 있지 아니하면 나올 수 없는 시가 할렐루야 시인데 시편 114편~116편에 주로 많이 나오고 그 뒤에도 나옵니다만 주로 거기에 많이 나와요. 그래서 시편 114편~116편에 보면 할렐루야로 시작되는데 중간에 할렐루야도 있고 끝에도 할렐루야가 나오는데 그 할렐루야 시를 하면서 어떤 변화가 있느냐 하면 과거에 있었던 애굽에서 나왔던 출애굽을 애굽 그 당시에 출애굽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고난가운데 있는 이 처지를 앞당겨서 우리 선배들이 그런 경험을 당함으로써 후배들에게 미리 그걸 알려주는,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려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러한 과거로 재해석하는 겁니다.

‘과거에 그러한 애굽에서 나왔대. 아! 그러한 일이 있었구나. 지나간 일인데.‘ 이게 아니고 ’과거에 벌써 그들이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벗어났대.‘ 다시 이야기해서 애굽에서 벗어날 때 어떻게 벗어났죠? 벗어나는 사람의 힘이 개입됐어요? 개입 안 됐어요? 안 됐죠. 이게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옥에서 천국 가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돼, 헌금해야 돼. 봉사해야 돼.‘ 이렇게 되면 무슨 힘이 개입돼요? 우리가 구원 받는데 우리의 기도, 봉사와 헌신 교회 봉사, 이런 것이 개입돼서 그것이 밑천이 돼서 구원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원래 출애굽은 그게 아니고 그들은 뭐냐 하면 갈수록 난처한 입장에 처해버려요. ‘끝났어, 끝났어. 끝났어. 이건 우리는 더 이상 못해.’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나고 난 뒤에 회담이 결렬됐잖아요. 모세가 바로 앞에 갈 때 히브리인들은 은근히 뭘 기대했느냐 하면 모세는 우리가 부르짖는 여호와 하나님이 파견된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히 어떤 압력과 언질을 주었을 것이고 바로 왕은 그 말을 듣고 쫄았을 것이다. ‘아휴, 내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민족을 건드렸구나. 아휴, 진작 이야기하지 모세님, 아휴, 그러면 우리가 후다닥 보내드렸을 텐데, 아휴 제가 몰라 뵈었습니다. 예, 백성 모시고 빨리 이 땅을 나가세요.’라는 것을 은근히 기대했다 이 말이죠. 왜, 모세와 아론은 자칭 누가 보냈다고 합니까? 당신들이 기도했던 그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들의 기도를 응답해서 우리를 보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기대하는 게 시험이 돼요. 뭐든지 일을 벌일 때 기대하면 시험 들어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은근히 노리고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채워주기를 기대하거든요. 그런데 그걸 의도적으로 비껴가버려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협동하거나 도움을 하는 입장이 아니고 구원해야 될 입장이기 때문에 그래요.

저번에 엘도라도 증도에서 강의한 것 중에 강의 했는지 안 했는지, 목사님이 이야기해 주세요. 해방과 구원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거 어디서 했습니까? 광주 강의에서 했어요. 해방과 구원이 어떻게 다른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해방이라는 것은 이쪽 영역에서 이쪽 영역을 내다 볼 때에 A영역에서 B라는 영역으로 탈출한다는 것은 똑같은 말 이예요. B는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 것을 A에서 내다 볼 수 있으면 해방입니다. 이게 36년 일제 압박에서 하는 것은 ‘야, 빨리 일본 압제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자주 독립을 하자.’ 이것은 우리가 압박당하면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B죠. 그래서 A에서 B라 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해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A에서 B로 갈 때 우리는 은근히 A에서 B를 원했는데 주께서 실제 준 것은 B'를 줄 때 이것은 해방이 아니고 구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해방은 뭐냐 하면 내가 A라면 A를 둘러싼 이 환경, 이 자체는 나쁜 놈들이고 나는 착한데 착한 것만 쏙 빼낼 때 나는 해방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이 돼 버리면 은근히 B를 예상했는데 B'가 돼 버렸다. 이 말은 뭐냐 하면 B를 예상한 너 자신으로부터 니 자신의 오류를 니가 인정하라는 겁니다. 니가 환경만 탓했는데 환경이 이미 물들었다는 겁니다.

오이장아찌 같은 경우 오래 놔두면 맛이 있죠. 슬슬 바깥에 있는 물이 삼투압 작용에 의해서 소금물이 안에 스며들잖아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 교회 잘 다닌다 하지만 이 세상 분위기 속에 우리는 은근히 이미 물들었죠? 물들은 상태에서 은근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그것은 구원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괴로움에서 후다닥 벗어버리고 나 혼자 편안하게 살고 싶은 그런 욕망, 해방의식을 마치 구원인 것처럼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대 상 역대 하 열왕기 상 하를 해석하면서 사람들이 제일 큰 오류가 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당시 했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당시의 오류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우리 것이다. 잘 들어보세요. 순서를, ‘이스라엘은 우리 것이다. 우리 것인데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압제하고 있는 나쁜 이방나라를 물리쳐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사 긍휼히 여기사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이스라엘 되게 해주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당시 이스라엘이 세상을 해석을 해놨습니다. 틀렸습니까? 맞았습니까? 틀렸습니다. 그래서 멸망당한 거예요.

이거는 뭐 오늘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우리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그런데 옆에 이단 교회, 불교도 있고 많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셔서 저 사람들이 우리교회 와서 우리 교회 부흥됐으면 좋겠다. 이게 바로 오늘날 교회 기도하는 제목이잖아요. 그게 바로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서 오류가 잘못됐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누구 것이다 했습니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것이라는 그 출발점이 그게 잘못 되었어요. 성경 시편에 보면 비로소 그게 언제 알게 되느냐 하면 유다나라가 멸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기를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것이 아니었고 이스라엘은 소속된 백성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그 이스라엘은 너희 것이 아니고 따로 누구의 것이라고 넘겨준 분이 오는데 그 분이 앞으로 오실 메시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내 소유의 나라에 메시야가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 소유의 나라에서 나를 빼내어서 메시야 나라에 우리를 장소 이동시키는 이것이 해방이 아니고 뭐라 했습니까? 이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내 좋아라고 메시야가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런 오해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에 소속된 너라는 식으로 우리 입장을 바꾸어서 우리를 건져 줄때 이건 해방이 아니고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요한계시록 19장을 하면서 오늘도 역시 난해하기 때문에 쉬운 문제부터 먼저 하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시니까 할렐루야가 뭐라고요? 할렐루야라 하는 것은 고난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이 고난 가운데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앞으로 우리와 더불어서 새로운 세계를 약속했다는 그 약속을 보고 미리 앞당겨서 ‘할렐루야’를 하는 겁니다.

할렐루야라 하는 것은 할랄 +여호와, 이렇게 보면 돼요. 할랄이란 찬양하라는 뜻이고 여호와는 하나님이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인데 그 뜻 가지고는 그 의미를 모르죠. 할렐루야가 집중적으로 나왔던 시편의 시대적 상황을 보게 되면 할렐루야시라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빈틈없이 약속을 필히 이루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유다나라가 고난 받는 것도 어디에 포함되는 겁니까? 할렐루야를 이루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차질 없이 일을 진척하는 특징입니다. 건물을 새로 개축할 때 땅을 파잖아요.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는 침해 비슷하게 걸린 할머니가 ‘집을 지으면서 왜 멀쩡한 땅은 왜 파는데?’ 나온다면 ‘할머니, 좀 기다려 보세요. 한 2개월만 기다려 보시면 건물 섭니다.’ ‘안 된다. 이놈아, 어디 조상이 샀던 이 땅을 왜 포크레인으로 파는데?’ ‘아, 할머니 기초를 하려면 파야 됩니다. 기다려 보세요.’ 이처럼 우리 있는 자리를 파헤치고 우리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만들고 우리 밑둥치와 뿌리까지 완전히 거덜 내는 그 작업, 이 자체가 이미 새로운 구원의 작업을 이미 정상적으로 진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땅 파는데 ‘할렐루야’를 하는 거예요. 다 집 짓고 ‘할렐루야’ 누가 못합니까? 만약에 집 다 짓고 하려는 그것은 100% 가짜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짜 할렐루야 나라에 참석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보는 걸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들어가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까, 믿음으로 들어가니까 반드시 현장 보고 믿는 그런 가짜들은 다 도태시키고 보지 않고 믿은 자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 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고난가운데 말씀은 여전히 차질 없이 일이 아주 마무리 잘 되고 있고 잘 진척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 그것이 할렐루야가 되겠죠.

그런데 그 할렐루야가 나오는 이 대목에서 19장인데 이 19장의 내용은 할렐루야에 의하면 고난 가운데 기쁨이라면 이 19장의 내용은 뭐가 되느냐 하면 심판 가운데 기쁨, 또는 저주 가운데 기쁨 이렇게 되겠죠. 심판은 바로 현재 이스라엘, 성도를 괴롭히는 자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19장 전체 내용을 보면 이런 식으로 돼 있어요. 그런데 이건 별로 어렵지 않은데 뭐를 보고 어렵다고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19장의 할렐루야를 하려면 해방이 아니고 구원이 되려면 나의 기대, 나의 목표와 목적, 목표와 목적은 다릅니다만 비슷하니까 같다고 치고요, 나의 목표를 접어야 되고 무엇으로 만족해야 되느냐 하면 과정으로만 만족해야 돼요.

이게 일반 사람들은 과정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목표를 내다보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과정을 견디는 식으로 가죠. 그런데 세상사람 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막상 어떤 목표를 이뤄보니까 성도한테는 뭐냐 허탈과 허무가 밀려옵니다. ‘어이쿠, 이거 기껏 얻으려고 내가 그렇게 마음 조렸나, 이거 얻으려고 그렇게 예수님 붙들고 기도했나, 기껏 이거 얻으려고.’ 주께서 주시는 목표와 목적은 주님께서 알아서 주님의 자기 일의 소관으로 우리에게 그냥 무상으로 제공하는 건데 우리는 마음 조려서 그것이 내가 열심히 해줘야 비로소 그것을 획득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논리와 똑같은 논리로서 사실 이거 얻으려고 그동안 하고 싶은 것도 참고 견디는 위선 있잖아요.

사실은 세상 것이 더 좋으면서도 혹시 세상 것 좋아하다가 얻어 맞을까봐 얻어맞으면 나만 손해다 하는 자기 이익을 그때그때마다 챙기다보니까 나중에 목표 얻고 난 뒤에 내가 못한 것 마음껏 즐기지 하는 그런 흥정 같은 것, 일종의 하나님과 상대로 일종의 되도 않은 흥정을 했는데 막상 죽어보면 이것은 우리 노력과 상관없이 그냥 무상으로 주어지게 된 거거든요.

그럴 때 그동안 그 과정 속에서 항상 범사에 주님께 감사해야 되는데 우리는 감사커녕 조마조마한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하루하루 조마조마하게 산다는 말은 지금 과정 자체를 감사하고 기뻐하고 만족할 줄 모르고 내가 이렇게 자기 절제를 하게 되면 이 공로로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을 획득할 것이라는 뭔가 노리는 것 때문에 지금 억지로 내가 참는 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긴긴 세월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치 못하고 우리는 시험 든 채로 살아가게 되죠. 기껏 해봐야 결국 남는 것은 그때 그 과정 자체를 즐기지 못한 후회만 밀려오죠. 어차피 목표라 하는 것은 우리가 정해진 목표가 안 됩니다. 안 돼요. 갇혀있는 꼴 이예요.

안된다면 A에서 B로 가려면 B목표는 어차피 우리가 설정하고 우리가 계획하는 목표가 아니에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 성경 해석에 보면 이게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차근차근 찾아가면 만나는 게 구원이 아니에요. 구원은 우리가 이쪽 길로 가면 이리 당기고 이쪽 길로 가면 이리 당기는 당겨주시는 하나님의 그 구원 자체에서 나오는 자생적인 능력을 가지고 밧줄 당기듯이 고래작살 당기듯이 잡아당겨 주니까 도달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차피 과정 자체가 은혜고 결국 해봐야 이런 B라는 결과가 못 나올 봐에 이 하루하루 사는 것, 이 자체를 즐겨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걸. 이거 열심히 절제했기 때문에 이런 목표, 상품을 획득하는 게 아니고 이 주님의 사명이라는 것은 우리 행함과 아무 관계없는 거예요. 괜히 마음 졸이면서 살 이유가 없다니까요.

사람이 자기가 이 목표 하나 획득하기 위해서 애를 써버리면 나중에 목표를 딱 손에 쥐고 보면 파랑새예요. 하늘을 나는 파랑새는 아름답지만 손에 쥐어 보세요. 똥 싸고 더러우니까 갖다 버리죠. 행복이라는 것은 파랑새와 같아서 남이 갖고 있는 행복은 되게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쥐면 ‘에게, 요거야? 아이쿠,이런 거 얻으려고 그동안 딴 거 먹을 거 못 먹고, 나도 참 어리석다.’ 그동안 마음 졸이면서 허송세월한 게 아까워 미칩니다. 아까워도 지나간 거지만.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죠. 성냥팔이 소녀, 아시죠? 성냥팔이 소녀가 어느 창가에 서 있는데, 밖에는 눈이 오는데, 크리스마스이브에 어느 가족이 하~~ 웃으면서 케잌 자르면서 따뜻한 벽난로에 둘러앉아서 환한 조명 밑에서 가족끼리 둘러앉아 노래 부르는 것이 아름답다 이 말이죠. 그걸 어디서 봅니까? 창 밖에 있는 고아인 성냥팔이 소녀가 보죠. 겨울에 눈이 이만큼 쌓였고 성냥팔이 소녀가 호호 불면서 이렇게 서있고 창가에 불빛이 비치면서 이 안에서 하하 웃음소리가 들린다 이 말이죠.

이럴 때 행복이란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방안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불행은 어디 있죠? 바깥에 혼자 떨고 있는 이 애가 불행스럽죠. 이처럼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남이 바깥에서 보면 다 행복해요. 막상 이 집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죠. 지가 만약 식구가 돼서 이집에 들어가서 이 식구들과 같이 웃을 수 있습니까? 늘 웃을 수 있겠어요? 지금 이 집이 웃었던 것은 어제 애가 사법고시 합격되고 취직 잘해서 결혼 잘 해서 웃는 게 아니고 개콘 보고 웃는 겁니다. TV보고 웃는데, 그러니까 사람은 항상 남은 따뜻하고 남은 행복해 보이고 남은 웃음이 넘쳐 보이고 남들은 걱정근심이 하나도 없어 보이고, 모든 걱정근심을 지 홀로 지고 가는 것 같고 항상 남은 나보다 낫고 고생 덜하고 나는 직사하게 고생만 하고, 이걸 까발린 사람이 라캉이란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행복이 있어도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 행복을 버리는 바보 같은 인간 이예요. 지가 상대방보다 행복해도 상대방이 더 행복해 보이기 때문에 지가 갖고 있는 행복은 행복취급도 안하고 갖다 버리고 상대방, 남 쫓아가다가 지 행복도 다 갖다 버리는 바보 같은 인간이라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했잖아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성도는 어떤 경우라도 행복해야만 되는 겁니다. 왜, 그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미리 아시는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는 그 과정 속에 있거든요.

그래서 이 성냥팔이 소녀를 선으로 생각해 봤어요. 여기서 성냥팔이 소녀 인생을 선으로, 괘도, 도로로 보고 이쪽에 있는 행복한 가정을 도로로 해보게 되면, 성냥팔이 소녀의 치명적인 잘못은 자기가 이 도로, 진짜 이 가정은 예수님으로 행복하다면, 개콘 보고 행복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행복하다고 가정한다면, 이 성냥팔이 소녀의 문제가 뭐냐, 자기가 자기 도로를 점검하고 측정한다는 게 이게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진짜 행복하다면 이 노선이 자기가 만든 노선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냥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노선이라고 생각이라면 자기 노선을 자기가 측정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선물 위에서 자기가 그냥 지나가고 있다고 보는 그 관점, 그 관점이 이 집안 식구가 바깥에 나오면 이 가정은 저희끼리 행복해요. 그래서 이 성냥팔이 소녀가 타인의 것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불행해하다가 성냥 마지막 3개 남았는데 2개 켜고 마지막 켜다가 죽어서 하늘나라 가니까 지 엄마가 천사가 와서 마중 나왔다는 이야기.

우리교회 최 종훈 장로님이 엘로라도 강의 갈 때 차를 운전해 주셨는데 가면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대구에 가면 팔공산에 가산산성이 있거든요. 몇 십 년 전에 크리스마스 때 성가대 수고했다고 놀러 갔는데 오후에 등산하게 됐는데 길 따라 가면 되는데 젊은 애들 남녀가 눈이 맞아서 자기들끼리 앞장서서 가는 거예요. 결론은 뭐냐 하면 밤새 안 와서 나중에 119가 찾아보니까 둘이 얼어 죽었어요. 남자는 웃옷 벗어서 여자 살린다고 입혀줬는데 죽었다 이 말이죠. 성냥팔이 소녀가 생각나요. 그래서 생각해 보면, 둘이 마지막에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장렬한 사랑, 열정적인 사랑.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이 과정 자체를 행복해 하고 즐거워해야 될 이유가 이미 하늘의 약속이 목표라 하는 것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어진 겁니다.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목표를 따로 그 주어진 목표를 대체해서 나의 목표를 집어넣어 버리면 우리는 스스로 불행을 자처하게 되는 겁니다. 이미 주어진 목표가 확정된 상태에서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나름대로의 목표나 목적은 너무 기대하지 말고 이렇게 그 목표를 위해서 이런 과정을 주셨다는 그 과정 자체를 감사히 여기면 하루하루가 행복한 하류가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죠.

그러면 그 목표가 뭔가 여기 나옵니다. 1절 봅시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라고 찬양한다는 것은 목표가 확정됐기 때문에 확정된 목표를 보면서 좋다고 노래 부르는 거거든요. 여기에 사적인 개인적인 원한관계가 포함이 됩니까? 포함이 안 됩니까? 포함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여기 심판은 내가 사기당한 것을 받아주는 심판이 아니고 그거에 해당되는 심판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만 심판이 여기 주어지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됩니까? 우리는 내 편에 서지 말고 우리 자신이 어느 편에 서야 됩니까? 예수님 편에 서버리면 우리는 예수님을 해코지했기 때문에 주어진 심판에서 우리는 면제가 되는 거예요. 자꾸 ‘나 억울하다. 하나님이여, 주님 억울한 거 생각하지 말고 나 억울한 거 생각해 주세요.’ 자꾸 주님을 내 쪽으로 끌어당겨 버리면 주님께서 하는 목표는 내 사적인 복수를 들어주기 위해 일하시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도리어 누구한테 심판받느냐 하면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돼 버리죠. ‘니는 니 사적인 목표를 갖고 있느냐.’ 그동안 니가 교회에서 나오고 봉사하고 헌금한 것은 결국은 자기 개인적인 원한관계를 하나님께서 되갚아주기를 은근히 사적인 목표를 따로 가진 게 되죠.

사적인 목표를 따로 가져버리면 그동안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안절부절 하면서 ‘내가 얼마나 이렇게 나쁜 짓 안 하면 내가 갖고 있는 원한을 속히 달성이 되겠는가,’ 자기가 생각했던 목표 달성을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절제하고 희생하는 식으로 매진하죠. 결국 그것은 주님이 좋아서 반듯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한풀이하기 위해서 자기행동을 조절하는 것밖에 안 되죠. 우리 심보가 그렇죠.

대학입시 앞두고는 나쁜 짓 안 하고 나쁜 책 안 보고, 왜, 행여 나쁜 책 봐서 하나님께서 ‘왝’ 하면 시험에 떨어지면 안 되니까. 그리고 시험에 합격되고 난 뒤에는 마음대로 하다가 또 공납금 없다 하면 행동을 조절해서 바르게 하면 공납금 생길까 싶어서,..., 우리는 항상 사적인 자기의 목표, 목적 때문에 누려야 될 만족, 인생 자체를 즐겁고 감사하고 거저 준 것이라고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될 이것을 내가 원하는 목표를 위해서 힘 모으기 위해서 그것도 사적으로 전환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음행해서 음행으로 땅을 더럽힌 음녀가 심판받는다 했으니까, 이들이 어떤 짓을 했기에 음행한 짓이 되고 어떤 짓을 했기에 그들은 심판받아야 되는가. 그것을 여기서 설명을 해줘야 되겠죠. 참, 계시록은 하면 할수록 참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서 어려운지를 잠간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성경구절이 있잖아요. 19장 2절, 3절이 있다 합시다. 19장 2절이 있다고 할 때 우리가 내 안에서 해석하는 경우 ①, 여기서 보면서 바라보는 해석이 있겠죠. 우리가 내 자리를 확보하면서 내 자리를 유지하면서 이 성경구절을 바라보게 되면 이거는 뭐냐 하면 이것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겁니다. 실천!

이게 만약 버스(말씀)라면 나는 버스 정류장에 이렇게 서 있다면 버스가 지나가면 스톱해서 타야 되죠. 내가 버스에 손 안 들고 뒤 돌아보면 그냥 지나간다 이 말이죠.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버스가 올 때 ‘스톱’하듯이 성경 말씀도 ‘저 믿습니다. 성경말씀을.’ 이렇게 해줘야 올라탈 수 있다는 말이 되죠.

그런데 그걸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람은 이 버스에 이미 타고 있어요. 버스에 타고 있으면 이건 우리는 버스를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고 버스 안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 어떤 인간도 눈에 보이냐 하면 버스 정류장에서 ‘스톱’하고 손을 드는 인간도 보인다 이 말이죠. 저게 불신자들이거든요. 저게 교회 다니는 불신자 아닙니까? 성경 말씀 지켜서 내가 스톱 손들어서 내가 구원의 버스, 구원의 배, 구원의 기차를 내가 탔다고 우기는 사람들의 바깥 풍경이 다 보인다 이 말이죠. 소위 쉽게 말해서 행함이죠. 행함!

행함으로 구원받겠다는 사람이 안에 탄 사람에게만 보여요. 같이 옆에 정류장에 있는 사람은 안 보여요. 둘 다 발발거리며 ‘왜 안 오지?’ 하면서 어깨 깃도 올리고 머플러를 감고 이러죠. ‘야, 너 버스 오는데 뭐 했어?’ ‘십일조 했어. 십일조 했어.’ ‘나는 십의 이조 했어.’ 저희끼리 지금 봉사 싸움, 행함 싸움하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마침 버스타고 오는 사람은 ‘추운데 둘이 뭐하고 있는 거야?’ 버스 그냥 갑니다. 안 세워줍니다. 버스가 그냥 가고 난 뒤에 마귀가 탄 지옥 갈 버스가 와서 ‘자, 십일조 한 사람 타세요. 십일조 한 사람 타라고. 목사 섬기고 교회 봉사한 사람 타라고.’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걸 거부하는 겁니다. 이미 목표와 목적은 누가 정했다? 주님이 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왜냐하면 그 심판이라는 것이 인간들을 괴롭혔다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괴롭힌 자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주어지는 심판만 마지막 심판 이예요.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음녀라는 말이 나오죠. 음녀라는 말이 우리 집 양반, 남편 꼬였다고 음녀가 아닙니다. 꽃뱀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꼬이려고 했던 그 마귀를 두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세상에 모든 것이 ‘예수여, 그냥 여기 삽시다. 딴 나라 만들지 말고. 나한테 절하면 모든 부귀영화 주겠다.’ 이 세상을 그냥 살자고 했던 그런 식으로 음녀예요. 음녀라는 개념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어린양의 뭡니까? 혼인 기약이죠. 이사야 54장 5절에 보면,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나올 때 하나님이 내 남편 되라고 요구한 적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남편이라는 것이 내가 만들어 낸 목표입니까? 우리는 내가 목표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렇게 노력했습니까? 아니죠, ‘나는 너의 남편이다.’라는 것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내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고 어디서 나온 겁니까?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서 방출된 거죠. 약속이 우리 어깨위에 우리 영혼 위에 그냥 일방적으로 내 허락도 없이 그냥 쳐들어 온 거죠. ‘나는 니 남편이데이.’ ‘남편이 뭔데요?’ ‘혼인잔치 할 사람이다. 신랑이야, 신랑.’ 쳐들어 왔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내 쪽에서 어떻게 하면 신부가 됩니까?’ 물으면 주님은 뭐라 합니까? 내가 니 신랑이라고 단언하고 확정지은 것이 내 쪽이라면 니가 신부되고 말고 하는 그것도 어느 쪽에서 주신 겁니까? 신랑에서 나온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신부되게 하는 거예요.

성도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성도라 일러준 그분에 의해서 만들어져가는 것이 성도예요. 내가 만든 성도는 유사품 이예요. 유사품은 성도가 아닙니다. 교회 맨, 교인이 되겠죠. 성도 아닙니다. 성도와 교회의 차이점은 교회는 교회 사람들이 되면 되지만 성도는 말씀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성도에게는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직접 들어옵니다. 그 말씀 보니까 주님은 나의 신랑 이예요. 이사야 54장 5절의 말씀이 요한계시록에 이렇게 현실화되는데 그것도 고난가운데 있으면서 그걸 할렐루야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제 할렐루야 아시겠죠? 고난가운데 있다 보니까 나의 목표 나의 계획은 전부 다 잘리고 구원을 시키려고 하니까 우리는 만날 해방을 생각해요. 살기가 어려우니까 해방하기 위해서 내 해방에 하나님이 얼마나 보탬이 될까 그것만 죽도록 생각했는데 주께서 마지막 때 주의 성령이 오니까 ‘너는 해방할 필요 없어. 구원 돼야 돼.’라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목표는 내가 정하고 그 목표에서 쏟아지는 그 능력이 우리를 목표에 합당하게 끌어가는 식으로 성경 말씀이 이렇게 요한계시록에 적혀있다 말이죠. 그렇다면 이 음녀라는 개념, 그리고 할렐루야라는 개념은 우리가 이쪽에서 우리 자리를 유지하면서 해석할 문제가 아니고 같이 이 말씀 속에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에 들어온 데서 이렇게 다시 들어온 거예요. 있는 자리에서 내 있는 자리를 다시 보는 거예요. 내가 이 자리를 확보하면서 내가 앉은 확보를 어떻게 해서 이 자리, 내 자리가 주의 말씀의 자리가 내 자리를 돌이켜 다시 날마다 보게 하는 거예요.

어떤 분은 저보고 이런 이야기했어요. 이 근호 목사는 30년 동안 같은 소리만 하더라. 고맙습니다. 정말. 잘 보셨습니다. 내 있는 자리가 분명히 십일조 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내 행함의 자리가 아닌 것을 날마다 확인하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만든 자리가 아니야, 어떻게 내가 말씀의 자리를 내가 꾸밀 수 있고 내가 인테리어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사적인 목표와 계획이 따로 있는데,’ 왜, 살아가면서 원한 관계도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포부도 있는데, 날마다 그것이 잘리고 주변이 묵살되고 묵살되면서 내 사적인 목표가 가렸던 진짜 주의 목표를 주께서 내 목표를 제거하면서 그게 도드라지게 그게 분명히 뚜렷하게 드러나게 하시는 그 매일 매일의 삶을 우리는 그걸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죠. ‘역시 인간의 영화는 아무것도 아니고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말씀.

여기서 로마서 9장 11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거니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구절, 뭐라 돼 있죠? “.....서게 하려 하사” 아! 서게 하려 하사, 하나님께서 ‘너, 야곱 너 천국 와. 에서 너 지옥 가.’라고 할 때, 에서가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지옥 갑니까?’ 야곱은 ‘제가 무슨 착한 일했다고 천국 갑니까?’하고 할 때 주님의 답변이 이겁니다. ‘니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뭔가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너는 천국 가고 너는 지옥 가는 것은 오직 말씀이 말씀되게 드러나게 함이라.’ 너를 매개로 해서, 너를 중간 매개체로 해서, 그래서 중간에 택하심을 따라,.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택하지 아니하면 이뤄지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과정이죠. 그러면 우리 성도라 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 자리가 뭡니까? 택했다는 그 가치가 솟아 올라오는 거죠. 온천에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뜨거운 김이 올라오죠. 내가 거기서 전기 가지고 난로 피웠습니까? 아니죠. 그 온천 자체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잖아요. 선택하심의 김이 우리 몸에 서리는 거예요. 인생 전체를 80이면 80, 90이면 90, 전체를 주님께서 너를 선이고 악이고 행하기 전에 이미 선택했다는 선택의 효과가 하나의 수증기가 돼서 온 몸을 적시는 거예요.

그러니 결국은 내 인생은 나를 확인하는 일생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희생이 주신 말씀을 확인 차 우리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가는 겁니다. 이끌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해운대에서 바닷가에서 놀던 그 장면, 인천 앞바다에서 회 한사라 먹던 그 장면, 우리가 흔히 일상이라 여기는 모든 것도 선택에서 오는 수증기의 일종이었습니다. 물방울들이었어요. 내가 어디서 누굴 만났고 또 누구와 헤어지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이게 우리가 나쁜 짓해서 벌 받는 것도 아니고 착한 일해서 상 받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이전에 있는 다른 논리에 의해서, 다른 영향력에 의해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지 아니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처지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게 행복한 처지입니다. 이 목표가 바로 우리가 상대하지 않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결정해 놓은 목표를 위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말씀드리면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이 안에 있으면서 감사하다 보니까 이 차 안에 있는 사람이 요한계시록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이 보여 질 때 그 음녀라는 개념과 심판이라는 개념, 음행이란 개념, 이 개념은 바깥에서 보는 사람들의 개념과 확연하게 다르겠죠. 다르니까 바깥에 있는 사람이 버스를 향해 돌을 던집니다. 돌을 던지면 누가 맞습니까? 차에 같이 탄 사람이 맞죠. 이건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예요. 일부러 창문을 열어놨어요. 창문을 열어서 돌을 던지게 만든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의 고난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그리스도의 목 베인 영혼이라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됐다는 이유 때문에 당하는,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우리가 이 땅에서 얻어맞죠. 그러면 이것이 뭐냐 하면, 바깥에서 안에 말씀이라는 것은 환상처럼 보이고 추상처럼 여겨지겠지만 뭐는 실제냐 하면 이렇게 돌도 맞고 창가에 앉아서 위협받는 성도의 일상적인 삶, 이것은 안 믿는 사람에게도 실제적인 현실로 보입니다.

‘너는 뭐 복음만 외치는 교회가면 되겠느냐, 기도해서 복 받고 하는 그런 교회 가거라. 만날 십자가 복음만 전하는 그런 교회 가면 되겠어?’라고 미움 받을 때 이건 추상도 아니고 관념도 아니에요. 실제로 피부로 와 닿는 미움이고 실제로 그 미움으로 인하여 유산도 깎이고 평소에 돈도 못 받는 실제적인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이게 뭡니까? 하나의 역사가 되겠죠. 이 사람들은 역사만 갖고 있기 때문에 묵시를 모르기 때문에 ‘니가 복음만 공개하면 같이 사랑할 수 있어.’ 이렇게 되지만 실제로 얻어맞는 사람은 이 안, 예수 그리스도 안, 버스 안, 말씀의 안에 있기 때문에 이 버스 탄 사람만 알 수 있는 진짜 말씀의 진수는 따로 아는 거예요. ‘아, 이렇게 우리가 미움 받는 것은 다 그리스도 때문에 미움 받는구나.’ 본인만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 한해서 할렐루야가 나오는 거예요. 어떤 가운데서? 고난 가운데서. 고난이 없어진 가운데 할렐루야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할렐루야가 되죠.

이것을 요한계시록 19장 1절에서 이것을 “하늘에 허다한 큰 무리” 어떻게 보면 역사적으로 이미 구원 받아서 이제는 마음 놓고 할렐루야 같지만 이 할렐루야라는 말이 하늘나라의 사람만 아는 게 아니고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과 같이 합창할 수 있고 같이 노래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되는 겁니다. 할렐루야라는 것이 살아있을 때는 못하고 순교하고 난 뒤에 할렐루야 한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자, 본격적으로 어려운 거 들어갑니다. 뭐가 어려우냐 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그 문제, 안 믿는 사람들은 무슨 중심이냐 하면 공동체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여럿이 모이는 가운데서 사는데 왜 사람들은 혼자 안 살고 여럿이 같이 사는 것을 원하느냐에 대해서 해답은 간단해요. 외로워서 그래요. 그런데 외롭다는 말에 그치지 말고 분석해 보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자기 신세가 버림받았다는 그런 느낌을 되게 무서워해요. 애들 학교에서 왕따 당하면 자살하잖아요. 그게 알 수 없는 무서움 이예요. 다수에 안 넣어 주는 것, 같이 안 놀아 주는 것, 이건 유치원 애들의 행동을 보면 다 나와 있습니다.

애들이 안 놀아주니까 어린 애가 누굴 붙드느냐 하면 선생님을 붙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들한테 더 미움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귀찮아지죠. 선생님은 같은 애들과 함께 해야 되는데 자꾸 하나가 잡고 안 놓으니까 애를 떼고 ‘정신 차려라.’ 하고 불 끄고 가니까 애가 죽었잖아요. 유치원 지하실에서, 그런 경우도 사실 일어났잖아요.

이걸 한번 분석해 보자 말이죠. 버림받기 싫다는 겁니다. 이유가 뭘까요? 왜 우리는 남한테 버림받는 것을 그렇게 싫어합니까? 이유는 조금 있다 말씀 드리고, 여러분도 생각해 보시고, 사람이 버림받기 싫어서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권력이라는 게 나옵니다. 권력은 어떤 식으로 나오느냐 하면 처음에는 강제로, 법으로 해서 강제로 주어지는데, 처음에는 강제로 주어지지만 조금만 강제라는 것을 반복을 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자진해서 굴복합니다.

‘저분은 나보다 높은 사람이야. 따라서 저분을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내가 알아서 빌면 저분이 기뻐하겠구나.’ 그래서 이 권력자가 강요하지 않는데 지가 알아서 깁니다. 자기가 알아서 굴복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그 대상 사이에 틈이 이만큼 남죠. 틈이 점점 더 벌어지죠. 벌어진 사이에 권력을 여기다 채워 넣게 되고 나는 저분에게 자진해서 해놓고 이 생겨버린 권력에 보호를 받음으로써 나는 저분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안도감 같은 것을 가지고 사람은 살아가게 돼 있어요. 기 싸움에 눌리거든 그 다음부터는 자진납세 하라. 알아서 기라. 기면 도움은 받는다. 이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반복화 돼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습성이 돼서 그저 옳고 그름이 아니라 ‘꽥’ 하면 나를 혹독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악마가 이 수법을 쓴 거예요. 악마가 이 수법을 쓴 것은 악마가 뭘 노립니까? 인간은 버림받기 싫어한다는 이 속성을 캐치한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와요. 사단의 종이 고린도교회를 장악했는데, 목사들이 줄줄이 장악했는데, 그 목사들과 교인들이 합의를 본 게 뭐냐 하면 때려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뺨을 칠지라도 그들은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다는 거예요. 목사가 자기를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자기는 즐거워 죽어요. 행복에 도취돼 있는 겁니다. 메조키스트(masochist), 얻어맞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겁니다. 이게 반복적인 권력의 학습에서 된 겁니다. 이제는 명령을 안 해주면 허전해요. 짜증 나. 이제는 자기 것을 안 뺏어 가면 싫어. 나는 누구로부터 빼앗긴다는 걸 통해서 자기는 천사가 되고 나는 누구한테 희생했다는 그 기쁨 때문에 자진해서 꿇어앉아서 손드는 데서 자기가 그 행동으로 인하여 자기는 그분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다는 그 느낌 바깥에서 자기는 벗어나면 ‘어떻게, 어떻게 살줄을 몰라.’ 살아온 것이 인생 전체가 살아온 것이 눌리면서 행복을 만끽했기 때문에 혼자 살아가면 살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뭐냐, 항상 공동체인데 공동체가 주는 것은 바로 하나밖에 없어요. 인정(人情), 사람과 사람의 정입니다. 촌에 목사가 부임했다. 뭐 복음을 전한다? 성경 덮어야 됩니다. 성경을 덮어버리고 인정만 베풀면 돼요. 소외된 것, 서울에 간 자식도 돌보지 않는데, 젊은 목사가 일일이 다 노인네를 돌보아 주니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 은혜 받으러 나올게요.’ 라고 이야기하고 그러면 목회는 그냥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세 자로 공동체라 합니다. 공동체! 모든 이단이든 정통이든 모든 교회 모습을 띈 단체의 특징은 공동체 주의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권력이 자리 잡고 있고 그 권력 안에서 안도와 안심과 보호를 받는 느낌을 만끽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 그동안 그 단체에 돈을 그만큼 소비한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40.73) 12-02-23 18:37 
가락교회120202-요한계시록19장(할렐루야)32강b-이 근호 목사
제 32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공동체라고 했는데 공동체 자체가 뭐냐, 공동이거든요. 공동이라 하는 것은 큰 곳이고 나는 여기 일부가 됨으로서 큰 곳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데서 모든 불안감과 모든 불안정을 소멸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비하면 여기에 뭐가 단점이냐 하면 여기에 이 공동체 규칙을 따라야 돼요. 이걸 아까 제가 법이라 했는데 이 법은 바깥에 외부에만 법이 있는 게 아니고 우리 머릿속에 이미 따로 법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건 성경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법의 구조가 있는데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이라는 것을 이방인들도 양심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 이방인의 양심을 로마서 8장에서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이방인들에게서 뭐다? 율법이라 했죠. 앞에 ‘율‘자에 괄호를 하면 뭐가 남습니까? 법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법에 의해서 법을 따라서 법을 그때그때 만들어 내면서 스스로 법이 옳다고 우기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법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오라 할 때 그냥 법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법만 이야기하면 우리는 지켜줄 테니까 맞춰줄 테니까 법만 이야기하라 말이죠. 법만 이야기하면 법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뭐냐 하면 이 규칙을 예외적인 조항과 마주치게 만들어요. 법에 속하지 않는 법에 해당되지 않는 다른 법을 내세워서 마주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예외적인 조항은 이 기존의 법에 포함이 될까요? 안 될까요? 포함이 안 되고 바깥쪽에 나가있죠. 바깥쪽에 나가 있어 버리면 이쪽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바깥쪽의 예외적인 조항에 의해서 공격을 받게 되고 그것을 성경에서 심판이라고 합니다. 자체 내에서 나쁜 짓해서 심판 받는 게 아니고 인간이 만든 인간이 생각하는 법의식들을 모아서 공동체가 되는 거거든요. 공동체가 사람의 모임 아닙니까? 모이니까 사람마다 법의식이 있는데 거기 합의를 보는 거예요. ‘그래 동의 할게.’ 합의를 봐서 동의가 되거든요. 합의가 안 되면 딴 공동체로 뛰어나갈 게 분명하니까.

합의 봤는데 그것도 해석이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이질적인 거, 전혀 다른 법이 하나 툭 튀어나와서 너희를 향하여 심판한다 하니까 이쪽에서 인간들이 가만있습니까? ‘에라, 우리가 먼저 공격해서 심판한다.’ 왜? ‘우리 법에 의해서 너를 심판받아 마땅해.’ 나오고 주님은 ‘너희들 속에 속하지 않는, 너희들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법을 가지고 너희를 심판하겠다.’ 이렇게 해서 붙는 거예요. 거기서 희생과 십자가와 규칙과 규칙의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쉬운 거예요. 구원받는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규칙이 아니고 내 머리 속에 들어있지 않은 다른 법이 와서 나로 하여금 ‘니는 이쪽 공동체에 그만 살아도 돼, 그동안 산다고 고생 많이 했어. 이제 고만 시달려도 되고 이 세상에 대해서 정죄를 당할 만큼 많이 당했어. 이제는 거기에 대해서 구애받지 마. 거기에 대해서 시선 받지 말고 그런 것 의식하지 말고 니는 내가 준 법에 의해서 여기서 탈출하여서 구원받아서  내가 준 법에 의해서 너는 나와 함께 살자.’ ‘예수님의 알고 있는 규칙을 이제 너도 알게 되었어.‘라고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굉장히 간단하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 머릿속에 있는 나의 알고 있는 양심이라는 것, 양심이니까 아까 로마서 8장에서는 양심을 뭐라 했습니까? 이방인이 알고 있는 율법이고 앞에 ’율‘ 자를 빼버리면 법이다 말이죠.

만날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고 난 뒤에 ‘나한테 이런 것들로 인하여 그동안 내가 허접스럽게 살아왔었구나. 이런 쓰레기 같은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이런 법들이 가득차서 이런 것들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구나.‘를 다 파헤치는 그런 세월을 남은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겁니다. 이걸 지난 주일날 암세포라, 밀려나오는 고름이라 했거든요. 주의 은혜가 임하고 난 뒤에 뭐가 있지를 못하고 바깥으로 밀려나오는 거예요. 그 밀려나오는 것들이 뭐냐, 평소에는 주님 없을 때는 이런 것에 자존심 걸고 살아왔던 이런 것들이 바깥으로 밀려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네배로 갚겠나이다.‘라고 삭개오가 이야기 한 것은 그전에는 주님 오시기 전에는 이것 가지고 보람을 느끼면서 돈 가지고 나답게 살겠다고 버텼던 것들이 이제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걸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뭡니까? 내가 예수님을 알고 난 뒤부터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고상해서 나머지는 뭐가 됐다? 똥, 오줌처럼 배설물로 여겼다. 이제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는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도 똥, 오줌, 나의 의는 똥, 오줌에 불과한 거예요. 나의 의라는 게 없다 이 말이죠. 내가 기존의 공동체한테 들은 거예요.

이 공동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구조란 공동체라 하는 것은 전체에서 어느 하나에 속했다 할 때는 공동체가 적당하지만 우리가 어느 위치를 정하고 있느냐 할 때는 이런 육각형 사각형 구조가 좋아요. 내가 이 지점에 있다고 한다면 이 지점은 그냥 나를 위한 이 지점이 아니고 공동체에서는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보람으로 산다.’ 이렇게 되지만, 사각형, 육각형 구조가 딱 돼 버리면 ‘나’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요 일 어떤 지점의 요 일을 위해서 나는 지금 연계돼서 봉사해줘야 되는 거예요. 그들과 협력해서 일종의 나만이 할 수 있는 분업을 행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육각형 구조에서 나의 위치)도 이야기하고 공동체도 이야기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할 때 이 세상은 조직적으로 구조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공격하는데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한 역할들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군인은 군인으로서, 농부는 농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복음을 모독하는데 전부 다 같이 한 행세를 하는 겁니다. 서로 서로 협조가 돼 있어요. 같은 패로서 같이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요 위치, 위치 정하는 그 모습의 본질이 뭔지 알아야 되겠죠. 놀이기구인데 장기하고 바둑이 있다 합시다. 장기는 마(馬), 칸이 있으면 이렇게 가는, 여자 분들은 장기 잘 두잖아요. 이렇게 가서 이리 가로질러서 가는 게 마(馬)입니다. 포는 넘어가는 거고. 장기 알은 마(馬)라는 글자를 씀으로 말미암아 이 마(馬)는 항상 어디가든지 어느 위치든지 이렇게 자기 기능을 발휘해요.

그런데 바둑알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요. 쓰여 있지 않은데 바둑을 이렇게 두다보면 바둑을 처음 한 점을 놨을 때는 그 사람의 ..가 3밖에 안 되지만 다른 사람이 이렇게 같이 놓여있게 되면 3이 8이 될 수도 있고 16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3이 될 수도 있고, 이렇게  -되는 걸 악수라 하고 한 2500쯤 되는 걸 요수라 합니다. 이건 알 자체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누구와의 만남, 누구와의 접촉, 누구와의 연계냐에 따라서 그 사람은 스타가 될 수가 있고, 역적이 될 수 있는 겁니다.

히틀러 밑에서 유대인 500만 죽인 사람이 누구죠? 후스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착실한 사람이고 자기 행동에 책임지는 사람이고 어릴 때부터 자기 행동을 반듯이 한 사람이고 남한테 해코지 하지 않은 사람 이예요. 공직 생활을 아주 착실하게 한 사람 이예요. 쓸데없이 뇌물 받지 않고. 그런데 유대인 500만 죽이라 할 때 자기는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반복적인 학습이 주어지는 거예요. ‘나는 공직자야, 나는 공무원이야.’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나의 일이 아니고 하나의 국가라는 조직의 제 역할을 해야 되거든요. 내가 담당할 분야에서 나는 충실하게 다해야 되지, 내가 총통도 아니고, 나는 면 서기도 아니고, 나는 죽여야 하는 총살하는 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다해야 돼요. 그래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찌라는 대 독일 연방제국이라는 제국을 위해서 자기 역할을 다 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사적인 생각은 잊어야 되죠. 사적인 생각을 잊어야 된다는 말은 ‘내가 이런 행동하면 내가 얼마나 명예롭게 될 것이냐‘ 하는 것도 잊어야 되겠죠. 오직 ’내가 할 행동은 무엇이냐‘ 그것에만 충실하면 되지, 내가 이것을 해서 얼마나 이득을 얻고 얼마나 손해가 난다는 그러한 사적인 이득 같은 생각에서도 벗어나고 추월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냥 충실해야 되고 충실해야 돼요. 그래서 유대인 500만 명을 죽였던 겁니다.

문제점이 뭐죠? 한나 아렌트란 여자 정치학자는 말합니다. 그 사람은 동물처럼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생각할 줄을 몰랐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그 생각한다는 말은 생각 안 할 수 있습니까? 생각 한다는 말은 뭐냐 세상을 자기만 생각하지 말고 그 피해당하는 유대인 입장에서 생각할 줄을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히틀러의 500만을 죽인 책임 지도자는 그 조직원은 이 육각형위의 조직은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여기 유대인 포함돼 있어요? 없어요? 안 돼 있어요. 여기는 독일 인민들만 있죠. 그러면 유대인은 따로 조직이 있는 거예요. 저쪽에서 이쪽에 있는 사람을 헤아릴 필요 있어요? 없죠. 왜, 경쟁관계에 있으니까. 어디 사업이 자선사업이 아니잖아요. 라이벌 경쟁업체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누굴 생각해야 됩니까? 나를 생각해야 되죠. 심지어 라이벌 경쟁과 단합을 하고 가격 싸움을 한다 할지라도 결코 저쪽을 위함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누구 좋으라고? 유유상종, 우리 모두가 같은 인간끼리 같이 좋아지기 위해서 하나의 양보하는 것이지 결코 저쪽 입장을 먼저 생각해서 한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사람이 조직에 포함이 되고 이게 공동체라 하면 흐리멍덩하지만 조직이 돼 버리면 조직 자체를 위해서 본인이 하나의 밑거름이 돼야 되고 하나의 희생물이 되더라고 나는 죽고 뭐는 살아야 된다? 조직은 살아남아야 돼요. 이건 여러분이 교회 다녀서 많이 들고 많이 훈련 받았죠? 하나의 밀알 되어서 희생되어서.

공동체일 때는 그냥 소극적으로 어디에 속했음을 감사합니다. 이래 되지만, 이 공동체가 조직으로 변하면서 어떤 임무를 맡겨 줘 버리면 자기 존재라는 것은 임무를 수행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지 존재가 감히 유지되든지, 아니면 내 존재가 무가치한지를 자기 맡은 분야에 얼마나 충실하게 역할을 다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5분 동안 이야기한 걸 죽 들어보니까 이것이 세상 나라를 뭐 달리 표현할 필요 없죠. 이게 바로 세상나라잖아요. 어떤 애가 부모 밑에서 그냥 밥이나 주고 학교에 다녔다. 그때는 가정 공동체잖아요.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정 조직은 아니에요. 가정 공동체예요. 그저 못해도 사랑받고 잘 해도 사랑 받고 그래요. 그런데 막상 가정을 떠나서 본인이 자립하겠다고 회사 취직했다. 누가 사랑해 줍니까? 그때는 조건부예요. 니가 니 할 일 하면 누가 사랑해 주고? 조직이 너를 사랑해 주고, 니가 니 일 못하면 조직에서 잘려 나가야 되는 거예요. 너 때문에 조직이 와해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러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니는 니 한 몸이 아니라 니가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회사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한다.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해요. 심지어 주차해 주는 사람에게도 ‘당신이 주차를 잘못 해버리면 우리 회사가 무너져서 엄청난 손해를 본다.’

그러한 직무를 맡겨주지 아니하면 책임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책임감이 생기지 아니하면 어느 시절로 돌아간다? 공동체 시절로 되돌아가서 조직원이 아니고 마치 퇴행한 어린아이처럼 부모 밑에서 어린양하는 그런 시절로 되돌아 갈 수가 있어요. 이건 무상으로 혜택을 입잖아요. 그러나 조직은 자기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겁니다. 이 조직이 내 조직으로 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그 조직에서 쫓아내야 돼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조직적인 체제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 말은 어떤 인간도 이 사회가 짜놓은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나면 그 사람은 즉사하여 죽습니다. 서울역 앞의 노숙자예요. 아무도 써주지 않는 노숙자 됩니다. 그러면 이 추운 겨울에 얼어 죽습니다.

그러면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살기 위해서는 어릴 때 공동체에서 조직으로 들어와서 그야말로 자기보다 조직을 살릴 때 비로소 나는 그 부대현상으로 부대 동반현상으로 내가 사는 것, 조직과 운명을 같이 해야 되는데 이 조직이 바로 이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경쟁에서 지는 자들은 단순히 월급이 깎였다가 아니라 뭐가 날아갔느냐 하면 ‘내 자리는? 내가 있을 자리는? 내가 옛날에는 어느 회사 과장인데 지금은 어디 청소 일하고 있고 이게 내 자가 아닌데, 나다운 게 아닌데. 빨리 나다운 곳에 찾아가야 되는데, 아니야, 이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니야, 진짜 내 모습은 이게 아니야, 지금 부장의 모습이 내 모습이야.’ 라고 계속해서 환상을 꿈 꿀 때 그 사람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평생가도 꿈을 쫒듯이 쫒다가 그냥 넘어지죠.

어느 인간도 지한테 합당한 자리라고 만족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집사님도 이 정도가 아니고 수 천 명도 직원 더 늘여야 돼요.ㅎ 적어도 내 능력은 이 정도가 아니야, 모든 게, 언제? 경쟁 업체가 크게 될 때 약을 살살 올려요. 세상이 우리를 약을 올려요. 약을 올리면서 이 구조보다 더 큰, 이 구조가 하나의 은하계라면 이 은하계 같은 것이 우주에 약 천 억 개가 있습니다. 한 은하계 속에 별이 사천 억 개가 있어요. 요게 하나의 작은 태양계라면 태양계를 보다 크려면 은하계 속에 요 자체가 하나의 점으로 새로운 조직을 연결시켜야 돼요.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라는 사람은 누구와 엮이느냐에 따라서 내가 결정되는 거예요. 내가 홀로 나라고 외쳐봐야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습니다. 당신하고 엮여진 사람이 청와대 있는 사람이냐, 당신이 아는 사람이 의사냐, 판사냐, 이렇게 내가 엮여져 있는 엮임을 통해서 관계를 통해서 내가 다시 소급적으로 사회가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그런 시대입니다. 거미줄!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것을 전부 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조직에서 누가 탈출한 사람이 있어요.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 같은 인간 절대로 되지 마라 말이죠. 왜, 그건 배신자요. 배반자요. 배, 배, 배신자, 배반자야. 이게 유명한 영화 넘버3에서 현정화가 라면 먹고 뛰었다면서 그 제목에서 ‘그 인간은 배신자야. 배반자야. 우리 조직의 배신자고 배반자야.’

조직이 모여서 나라가 되잖아요. 인간 사회의 모든 조직에서 구성원들의 배신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도 모르고 예수를 믿겠다고 나섰어요. 이게 무슨 이야깁니까? 사실 우리를 믿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마귀가 웃을 일입니다.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아니야, 이 마귀가 알아. 너는 그냥 흉내나 내지. 니는 아니야 니는 내 쪽이야..’ 안다 말이죠. 이게 사도행전 19장에 나오죠. ‘나는 예수도 알고 내 손아귀에서 확실히 바울도 뛰쳐나오고 예수도 뛰쳐나온 걸 아는데 니는 안 뛰쳐나갔어. 니는 내가 놓은 덫에 걸린 거야.’ 이게 바로 예수님 위주가 아니고 뭐든지 공동체 위주로 가서 외로움을 달래고 하는 모든 조직이 다 마귀에 속합니다. 그중에 국가도 있겠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요한계시록에 가면 땅의 짐승, 교회입니다.

교회, 교회가 공동체 위주죠. 어릴 때 사랑, 어릴 때 용서받은 그걸 기억하면서 마치 따로 천국을 이룬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심어주는데 그 규칙은 익히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있잖아요. ‘착한 일하면 상 받고 나쁜 일하면 벌 받습니다.‘라는 우리가 익히 아는 안 믿는 사람도 다 아는 규칙 가지고 우리는 스스로 자위하면서 스스로 그걸 긍정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왔다고 안심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진짜로 나타난 예수님은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런 양심이나 율법이 아니고 율법 외에 뭡니까? 율법 외에 다른 법이 있다 말이죠. 그 법이 뭐냐, 그 법이 나옵니다. 8절에 봅시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 이 세마포는 요한계시록 7장14절에 보면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희게 되고 난 뒤에 하늘나라 보면 성도들이 나오는데, 그 혼인잔치 이르러서 여러분 잘 아시는 이야기니까 한번 해 볼게요. 예수님께서 혼인잔치 비유할 때에 먼저 아는 사람, 자기 본래 아는 사람을 초청을 하죠. 유대인을 초청해요. 아들의 혼인잔치, 메시야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세요. 하니까 어떤 사람은 지 장가가야 한다고 안 오고 어떤 사람은 밭을 샀다고 못 오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소를 새로 샀기 때문에 금 산다고 소 값 내려간다고 안 오고 그랬다 말이죠. 그러니까 임금님이 화가 나서 그렇다면 청첩장 다 취소시키고 사거리 가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쉽게 말해서 저주 받은 자예요.

그 대목을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공동체가 있습니다. 또는 이런 정 육각형 구조가 있는데 어떤 점으로서 자기 역할을 해야 되는데 알콜 중독이다. 알콜 중독 같으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알콜 중독자라 아무 일도 못하죠. 도박한다. 이런 사람은 한정 치산자라 해서 법원에서 사람 취급도 안 하잖아요. 그 사람은 어떻게 돼요? 그 사람은 누가 죽여도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법에 호소할 수도 없는 거예요.

어떤 외국 노동 이민자가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가는데 자전거 세우고 볼일을 보는데 자기 자전거를 가지고 애가 도망을 치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가서 애를 붙잡아서 파출소에 갔더니만 ‘실례하지만 주인은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티벳에서 왔습니다.’ 보니까 벌써 기간이 지났어요. 불법 이민자로 몰리고 처벌받고 자전거 훔친 애는 풀려나버리고, 이 나라 법에 저촉이 안 되니까 이것은 그 사람 자전거를 가져갔어도 어떤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거예요. 누가 죽여도 그 사람은 그 가족들이 ‘왜 죽이냐.’고 소리가 없는 겁니다. ‘니는 니 나라 가.’ 니 법이 적용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그 사람 속에 법의 구조가 있는데 이 법 구조하고 뭐하고 맞아야 돼요? 자기가 기거하고 있는 외국의 공동체 법 구조하고 일치된 법 구조가 된다 말이죠. 색깔로 봅시다. 바깥의 법은 뭐냐, 빨강이라 하면 이게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죠. 그러면 같은 고을 만약에 어떤 사람이 녹색이라면 자기가 속해 있는 바깥도 녹색이라면 이 사람은 이쪽에 포함이 된 거죠. 공동체 포함이 되죠. 그러면 여기서 전체라는 것은 정치 관리가 한 마디로 치안입니다. 치안이라 하는 것은 경찰들의 활동을 치안이라 하죠.

‘있는 법에 무조건 복종하는 조건으로 법에 의해서만 보호해 줄게. 니가 양심대로 산다고 보호 받는 것이 아니고 법에 맞을 경우에만 니 권리를 찾아줄게.‘라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거예요. 민주주의. 그렇다면 인간은 점차로 뭐로 변합니까? 점차로 어디에 딱딱 맞춰야 돼요? 날이 갈수록 법에 맞추어서 살아가야 돼요.

우리나라에 보컬 그룹에 부활이란 보컬 그룹이 있잖아요. 그 리더가 김 태원이라는 사람인데 김 태원이는 어릴 때부터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녔습니다. 그럼 뭐를 했습니까? 기타 쳤다고요. 그럼 걔가 왜 학교를 못 다녔습니까? 자기가 뭘 하고 싶다? 기타를 하고 싶은데 학교에서는 ‘학생은 수학대신 기타 쳐도 됩니다.’라는 법이 있으면 걔는 괜찮아요. 그런데 수학시간에는 수학을 해야 되고 영어 시간에는 영어를 해야 되는데 걔는 뭐를 쳤습니까? 기타를 쳤기 때문에 걔는 학교생활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애가 편하게 살려고 하면 뭐를 버리면 돼요? 기타 부수고 영어 수학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공동체에 하나 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민주주의라는 거예요. 그걸 법치주의 국가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시민들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한 거라 보는 겁니다.

시험문제 출제 잘못 해서 그걸 따졌더니만 학교 당국 성균관대학교에서 ‘당신은 교소로서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파면시키니까 그걸 법으로 호소해서 대법원까지 가서 결국은 파면됐어요. 파면되니까 김명호 교수가 석궁 들고 가서 ‘니 한번 혼나 볼래?’ 하다가 그게 잘못 쐈는지, 쐈는지 해서 4주 진단 나왔는데 판정을 4년 받았습니다. 그게 부러진 화살 영화에 나오는 주제거든요. 그럴 때 김명호 교수의 자리는 뭐냐 하면 수학에 보면 집합론이 있어요. 우리나라의 집합론의 최고 권위자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집합론을 발전시키고 학문을 발전시키려면 그 사람은 지금 놀아서는 안 되고 법이나 공부할 사람이 아니고 교원서 연구해서 집합론, 수학이 발전하지 아니하면 물리, 기술 발달도 안 되고 기술 발달이 안 되면 수출도 안 돼요. 이 모든 것이 자기 역할을 맡아서 해줘야 나라가 이 구조가 커져요. 이 구조를 성경에서는 뭐라 해요? 음녀가 커지는 거예요.

음녀의 특징은 뭐냐, 모든 머릿속에 있는 선악과 따먹은 그 법이라는 것, 아까 양심이라는 것, 법에 합당한 대로 나가는데 이게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규칙을 더욱 더 크게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 속합니까? 이 규칙에서 어떻게 됐다? 예외 조항으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뭐냐, 예수님께서 어쩌다가 바뀐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너희들이 생각할 수 없는 원칙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자꾸 보여주기 위해서 결국은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자꾸 비비는 거예요. 아휴, 그 당시 바리새인들 죽을 지경 이었어요. 만날 바리새인들 찾아가서 ‘너희 아비는 마귀다.’ 해서 점잖은 목사보고. 원래 바리새인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미워할 생각 없었어요. 그런데 성전을 부수고 채찍을 가지고 그러니까 도저히 한 사람 때문에 자칫하면 폭동이 일어나면 우리나라가 로마에 먹히겠다 싶어서 그런 거예요.

우리나라가 로마한테 먹히면 이스라엘이 망하는 거죠.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이스라엘이 누구 이스라엘이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다.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본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내가 이스라엘 12제자부터 새로 시작하겠다. 남은 자부터.’ 예수님은 남은 자, 예수님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고, 그들이 갖다 버린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면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갖다 버려줘야 돼요? 안 돼요? 그들이 돌을 갖다 버려줘야 되는 거예요. 그들이 버린 돌이 돼야 버렸다는 그것이 포함되어서 ‘나같이 버림받은 놈 다 나와.‘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성경의 원칙이예요. 원칙!

그러니까 마귀 없이는 일이 안 돼요. 악한 마귀가 없으면 주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 아니면 십자가, 가룟 유다는 십자가의 공로자예요. 음녀는 있어야 돼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느 누구도 음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제가 한 20분 동안 계속 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음녀에서 못 벗어나요. 벗어날 생각 하지 마세요. 벗어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벗어나요. 벗어났다는 사람이 수상해요. 우리는 예수 믿어도 마찬가지예요. 예수 믿는다 해서 누가 빵 주고 밥 주고 돈 주고 안 합니다. 자기 역할을 다 해줘야 돼요. 수출 역군이 돼야 돼요. 지하자원이 없는 이 시대에 수출 역군이 돼 줘야 돼요. 수출 역군이 되려면 교회 갈 시간에 상품 계속 만들려면 크레인 밟고 일하려면 교회 갔다 와서 휴대폰 보고 빨리 차 몰고 가야 돼요. 공장에 가서 빨리 일해야 돼요. 그러니 주문량이 들어오면 밤새도록 해서 해줘야 돼요. 그래야 신용도가 있어야 다른데 주문이 이쪽에 오지 저쪽으로 안 간다 말이죠.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포르투갈 일감이 없어서 브라질로 이민 간다고.

이 규칙은 뭐냐 하면 능력 있는 자는 살아남고 능력 없는 자는 능력 있는 자 옆에서 빌어먹어라 이 말 이예요. 그런데 여기 보면 8절에 보면 “그에게 빛나고” 그 다음에 어떤 세마포입니까? “깨끗한 세마포”죠. 깨끗한 세마포는 요한계시록 7장에서 흰 옷 입은 거예요. 어떤 피로? 어린양의 피로 깨끗해졌다. 그럼 깨끗하다는 말은 피가 있어서 깨끗하다는 말은 피 없이는 어떻게 된다? 똑같아요. 신자고 불신자고 교회 오나 안 오나 세상 이 구조에서 힘 밑에서 사는 것, 누구 힘 빌고 살고 누구 힘 의지해서 사는 것, 이건 반복된 학습이 돼서 우리의 체질화 되었어요. 이 몸 말고 다른 몸은 상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내가 노력해서 밥 먹고 사는 것 외에 다른 거 없어요. 우리 몸 자체가, 우리 생각 자체가. 이 몸을 굴려야 돼요. 돈 없으면 몸을 팔든지 해야 밥 먹고 살아요. 이건 어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세요.

음녀에서 뭘 끄집어낸다? 음녀가 여자 아닙니까? 여자에서 뭐가 나옵니까? 깨끗한 뭐가 나온다? 깨끗한 신부가 나와요. 누구 때문에? 자, 다 음녀입니다. 음녀라 하는 것은 하나입니까? 두 개입니까? 분명히 전체 합해서 바벨론 성, 마지막 성, 음녀죠. 그게 뒤에 보면 나와요. 음녀가 하나밖에 없죠. 음녀, 음탕한 여자에서 뭐가 나온다? 여기서 신부가 나오는데 여기 누가 개입해야 돼요? 이게 지가 알아서 깨끗하게 돼서 나옵니까? 여기에 어린양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다가오게 됩니다. ‘니는 더러운 여자인데 신랑 잘 만나서 니는 내 신부가 되었다.’ 그 이야깁니다.

음녀에서 신부되는데 여기에 신랑이 개입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성도예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성도입니까? 신랑을 자랑하는 게 성도예요? 신랑이죠. 그러면 자기가 신랑을 자랑하면 자기는 뭐로 행세해야 됩니까? 신부가 돼야 되겠죠. ‘나는 주님의 신부다.’는 근거가 있어야 돼요. 내가 신부라는 근거가 있어야 되지, 나는 주님의 신부라는 것은 아무라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 신부라는 근거가 되는 걸 가지고 옳은 행실이라 해요. 아! 기존 개념하고 개념 다르죠. 기존 개념은 ‘깨끗하게 행동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음녀가 무슨 깨끗하게 행동해요? 손님 받을 때 목욕하는 게 깨끗한 겁니까? 옳은 행실이라 하는 것은 행실을 옳게 하는 근거를 현재 기존의 음녀의 규칙에서 가져오지 않고 신랑이 이 땅에서 빠져나온, 신랑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빠져나왔을 때 신랑 자신에게 적용했던 그 원리 원칙을 같이 살 부부기 때문에 자기한테 적용시키는 사람이 그것이 ’옳다. 비로소 의롭다.‘는 원칙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쫓겨나가듯이 죽게 된 그 주장했던 그 주장을 신랑과 영원히 같이 살게 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원칙을 이제는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옳은 행실을 가진 신부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신부와 신랑은 서로 통하도록 돼 있어요. 아, 하면 알게 돼 있어요. 아! 그 원칙 말이죠. 이 원칙을 로마서에서 ‘율법 외의 한 의’가 되겠죠. 율법 외의 한 법이 아니고 율법 외의 한 의가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율법이라는 것은 뭐를 요구하느냐, 의를 요구하게 돼 있는데 율법에서 요구하는 의 말고 또 다른 의, 율법에서는 인간의 율법을 통해서 이게 (파이프)유리관이라면 인간의 율법을 통해서 올라오는 점점 더 올라오는 의 말고 올라갈 수도 없어요. 인간에서 나오는 의 말고 파이프를 인간에게 꽂아서 저쪽에서 율법 외의 한 의에서 쏟아오는 이 의, 의가 마중 나오는 의, 신랑의 의, 신랑이 신부를 맞이할 때 의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 의를 로마서 3장에서는 이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화목 제물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로마서에서 화목제물이라 한다면 화목제물이 처음에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나오잖아요. 화목제물이라 하는 것은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치르면서 하나님이 동참하는 제사예요. 보통 제사는 인간이 드리잖아요. 그런데 화목 제물은 하나님이 그 양식을 와서 먹어요. 하나님이 가담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면 화목제물이라는 것은 누가 우리를 보증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행동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고 화목에 가담하신 하나님이 친히 그 화목제물에 대해서 보증을 하고 인정해 준다는 뜻이 화목제물입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화목제물입니다. 뭔 뜻입니까? 하나님이 거기에 같이 참여하신 제사가 되는 거예요. 참여했기 때문에 거기서는 하나님이 하나의 당사자가 돼서 당사자가 참여를 했으니까 스스로 희생해서 스스로 화해를 하면서 화해하는 근거로서 본인이 들어간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만두라면, 주님이 나한테 오셔서 ‘야, 나 만두 먹고 싶어. 나한테 만두 줘.’ 주님이 먼저 주면서 ‘빨리 나한테 만두 주란 말이야.’ ‘주님 거 여기 있잖아요.’ ‘알았어.’ 이게 화목제물이잖아요. 율법 외의 한 의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그걸로 이미 끝나버렸어요. 끝난 동시에 그 안에서 뭐가 이루어지느냐 하면 그것이 십자가에선 끝났지만 그 십자가가 이 세상 전체에 대해서 어떤 식의 의미를 갖느냐 하는 그 세상이 화목 제물에 대해서 어떻게 반발하느냐, 어떻게 대드느냐, 그것에 따라서 그 효과가 점점 더 확대가 되는 겁니다.

말을 좀 어렵게 했지만 이렇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단독적으로 주님께서 다 됐지만 이 십자가라는 것이 어디에 쓸데가 있고 어디에 필요하고 어디에 유용하냐 하는 것은 이 십자가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십자가 없이도 우리는 산다.‘라는 그런 세력들이 많이 확장을 해줘야 돼요.

호떡을 만들 때 요런 기구가 있어요. 납작하게 눌러주는 금속으로 만든 기구가 있죠. 밀가루를 동그랗게 해서 시커먼 설탕을 넣고 여기 불판위에 올려놓고 프레스(press), 눌러버리면 바깥에 삐직삐직 나오고 설탕이 타서 나오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면 동그란 게 십자가예요. 그런데 요걸 딱 눌러 버리면 퍼지잖아요. 퍼지면서 요 부분 말고 퍼진 부분 가장자리에서 어떤 충돌과 어떤 다툼과 싸움이 벌어지느냐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모든 것은 호떡이 눌린 거와 같이 다 경험하게 돼 있어요. 그럴 때 이 바깥에서 호빵을 향해 저주하고 미워하고 모독하고 모멸하고 멸시하는 이런 요소들을 이걸 한꺼번에 보면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건 내 신부가 아니다.’ 신부가 아니기 때문에 더러운 여자니까 음녀가 되는 겁니다.

원래 음녀란 용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본래 하나님의 백성인데 자기 남편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긴다는 의미로 음녀예요. 그러면 음녀라는 용어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누구 나라였습니까? 이스라엘을 사모하면서 이스라엘을 어떻게든지 키워보고 유지하려고 누구 힘을 빌렸어요? 초반에는 말감, 몰렉, 아스다롯, 바알, 이런 이방신들을 섬겨서 어쨌든 저쨌든 간에 이 나라가 있어야 사니까 이게 아까 뭐라 했습니까? 나라가 있어야 산다. 공동체죠. 조직이고 공동체. 공동체가 죽으면 나도 같이 죽으니까 어쨌든 조직 하나 살리기 위해서 이방나라와 사귈 때 그때 이 이스라엘을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음녀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보면 돼요. 성경 해석할 때 세상 이방세계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이방 나라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구약의 이스라엘을 하나의 모델케이스로 삼는 거예요. 모델케이스로 삼아서 호떡처럼 꽉 눌러버리면 ‘그중에 진짜 남은 자는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음녀에 해당된다.‘라고 그 양면성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구약 용어들이 많이 나와요. 이스라엘이 있던 그 나라에 속했던 운명이 주께서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확산시켜서 전 인민들,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당했던 똑같은 운명을 여호와로부터 당하는 그것이 최후의 날입니다. 그게 마지막 광경이고 전경이라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아내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은 다시 이야기하면 근거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쫓겨날 때 한 근거를 자기도 동일하게 그것을 ‘내가 신부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라고 제시하는 거죠. 십자가죠. 주님이 쫓겨나게 만든 예외적인 조항, 세상 규칙 말고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다른 규칙을 적용했기 때문에 그 이유로 인하여 탈락 당하고 죽게 된 그 근거를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쫓아냈던 세상이 요번에는 누굴 미워하게 되죠? 바로 신부도 미워하게 되고 죽이게 되는 거예요. 똑같은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순교자죠. 여기 10절에 봅시다.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이렇게 돼 있어요. 천사한테 절하니까 천사가 ‘그러지 마라, 지금 당신, 천사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증거가 더 중요한 겁니다. 당신들이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에게 경배하세요.‘ 그렇게 돼 있거든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증거란 딴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추방되면서 갖고 있던 증거, 그냥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갖고 있던 증거가 아니고 예수님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만 비로소 얻어지는 증거들, 이질적인 세계에 살면서 받아야 됐던 상처들, 아픔들, 고난들, 그게 아까 무슨 시라 했습니까? 할렐루야!

다시 이야기할게요. 할렐루야는 어떤 때 나온다?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 내가 저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 똑같이 조직에 살면서 내 노동으로 밥 먹고 살면서도 주께서 나를 신부로 보는 다른 원칙, 내가 알고 있는 원칙 말고 다른 원칙으로 적용시키는 적용 대상자가 됐다는 사실, 그러면서 ‘할렐루야!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을, 음녀를 왜 구원하십니까?’라는 그 기쁨, 그게 할렐루야예요. 다시 말해서 땡 잡았다. 다른 말로 번역하면 땡 잡았다. 웬 횡재냐. 이런 거예요.

1절 다시 봅시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 있는 거예요. 나한테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할렐, 루야. 여호와만 영광 돌리는 거예요. 이게 여호와, 하나님, 이것은 구약적 용어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되겠죠. 구약 용어를 그대로 요한계시록에 사용하는 거죠.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서 완성됐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대로 사용하는 겁니다.

여기 10절에 보면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요한계시록의 한마디, 한마디가 뭔가 자체적으로 연결되지 않아요. 언어가 이렇게 있다면 자체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요한계시록은 위를 경유해서 연결되어 있어요. 위로 붕붕 경유해서 A, B, C, D 연결돼 있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을 A와 B도 예수님을 C와 D도 예수님을 경유해서 전부다 예수님을 경유해서 단어가 주어졌어요. 이 단어는 구약 적 단어로 연결돼 있어요. 예수님만 집어넣지, 모든 단어는 구약 적 단어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예수의 증거는 뭐라? 대언의 영이라. 이것도 구약 적 용어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뭐라 합니까? ‘내가 전하는 말은 내 뜻이 아니고 여호와의 신이 임해서 전하는 것이다.’라는 거예요. 신을 영으로 번역한 겁니다. 대영이니까 대신해서 전하는 영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증거는 예수님의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서 성령 받은 사람들이 예수의 증거를 가진 사람이다. 예수님의 증거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옛날 선지자와 똑같은 역할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럼 옛날 선지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구약 해석 다시 해 봅시다. 구약을 해석을 할 때 구약 이스라엘은 쉽게 말해서 1.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것이다 2. 선지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 갈등 아닙니까?

이스라엘 왕 아하스 왕은 이스라엘은 누구 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죠.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은 누구 것입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아들이 뭐가 돼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지자한테는 뭐가 없느냐 하면 ‘변화 없음’ 이스라엘에는 변화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1번, 이스라엘 왕들은 변화를 어떻게 묶어야 돼요. 선지자는 변화가 없기 때문에 뭐가 일어나요? 변화가 일어나도 괜찮아요.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변화 없는 분에 묶였기 때문에 맘껏 변화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눈에 보이는 나라가 자기 나라 같으면 이 나라는 잡혀가면 안 되고 망하면 안 되고 변화가 일어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기 뜻대로 내 뜻대로 목적대로 항상 변함이 없어야 되고 내 원대로 딱딱 돼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인생은 어떻게 봅니까? 변화가 있는 게 좋습니까? 없는 게 좋습니까? 이건 제 질문의 대답은 간단해요. 내가 내 몸은 내 것이라 생각하면 변화 있으면 안 돼요. 그런데 주께서 내 소원을 거부하고 난데없는 사태로 변화를 주어지게 되면 그때 다시 성령이 오면서 우리는 이미 신부로 확정되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변화는 고마운 변화입니다.

만약에 그게 변화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내 인생을 내가 꾸며 나가고 내가 책임지고 내가 생각하는 내 목표에 합당하게 일치되는 내 인생으로 얼마나 나한테 강요했겠습니까? 그리고 나를 학대하겠어요? ‘바보야, 바보야, 바보 같아, 바보 같아. 내가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었는데.’

목사 같은 경우에는 ‘아휴, 설교에서 그 말은 빼는 건데.’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면 구원받는 것은 누구 소관입니까?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6장 39절 말씀은 내가 감당할 몫 이예요? 누가 감당할 몫입니까? 주님이 하신 몫인데 내가 설교 잘하고 못한다 해서 구원받는 자가 탈락되고 탈락되는 자가 구원받는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설교하면서도 평소에 뭔가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진다는 옛날 구약 이스라엘 왕들이 하는 사고방식을 우리가 그대로 100% 하고 있어요. 걱정을 사서 해요. 씨잘 데 없는 쓸데없는 걱정을 따라 했어요.

우리는 과정을, 변화 많은 과정을 즐길 줄 몰랐고 그저 조마조마한 새 같은 쿵쾅 뛰는 가슴을 안고 부푼 가슴도 아니고 발발발발 떨면서 만날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기도해놓고 지가 가서 시험 다 들고 지가 시험 거리를 만들어요. 지가 지한테 과제를 내서 지 손으로 숙제 검사해서 못했다고 자책하고 때리고 하죠. 이 지경에 간다고요. 과정 자체가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아무 상관도 없는데, 상관도 없는데 우리는 너무 치어서 살아요. 너무 힘들게 사는 거예요.

부부생활 하면서 남편들은 오래 살았다고 아내를 알고 아내는 남편과 오래 살았다고 남편을 안다고 하지만 살면 살수록 모르는 게 배후자입니다. 아무래도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 제가 언젠가 이야기했습니다만 남편들이 이 정도 양보하고 이 정도로 남편이 희생하고 내 뜻 치워 버리고 아내 뜻을 수용했으면 기대하기는 이정도 했으면 보답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음, 전혀 없어요. 나중에 가서 ‘내가 이정도 양보했으면,’ 하면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한 걸 가지고 새삼스럽게 뭘.’ 반대로 이정도 내가 했으면 화낼 것이라 하면 화내지도 않아요. 그럴 때 그게 화가 나요. 뭔가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 내 예측대로 안 되는 게 화나는 거예요. 남자 분들 지금 공감하시죠?ㅎ

아까 가산산성에서 얼어 죽었다는 거 있죠? 자, 자기 옷을 웃통을 벗어서 자기는 얼어 죽고 여자도 얼어 죽었지만 자기가 웃통 벗어서 연약한 여자 입혀줬는데 만약에 죽어서 끝났지만, 안 죽고 구사일생으로 심폐소생해서 살아났다 해 봅시다. 그 여자가 남자 친구한테 얼마나 따지겠습니까? ‘내가 먼저 앞장서서 가지 말자 했잖아. 하여튼 그때 안 갔어야 했는데.’ 이렇게 이야기하지, ‘자기 웃통 벗어줘서 고마워.’ 이런 소리 안 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얼어 죽을 줄 알고 옷 벗어 줬잖아.‘ 하면 여자가 ’당연한 거 아냐. 남자는 원래 그래야 돼. 그렇게도 안 하면 나한테 사기 치려고 한 거 아니냐.‘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의 단어는 개개인이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음녀 될 사람은 음녀 되게 모이게 하고 신부는 신부끼리 모여서 그 모임을 만드는 그 연결 고리는 주님 쪽에서 제공되는 거예요. 예수님 쪽에서 제공된 거예요. 내가 남편을 잘해주는 것은 주님을 생각해서 잘해준다는 이것은 성도라면 이것은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 나왔던 대언의 영,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대언은 자기 자신 내 몸은 내 것이고 내 인생이라는 게 아니고 내 것은 따로 있고 주인은 따로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전도라는 것은 성령이 전도하는데 성령은 반드시 전하는 사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전할 수밖에 없게 만드신 배후에 봐주는 분, 든든히 봐주는 분을 증거 하는 겁니다. ‘나 이렇게 증거 해도 괜찮은 것은 내 뒤에 나를 봐주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분을 증거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신부의 증거다. 신부가 다른 것이 아니고 대언의 영으로 사는 게 신부다 이 말입니다.

또 그다음에 장면 바뀌면서, 아휴, 하다 보니까 쓸데없이 가산산성 이야기해서, 금방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후회해도 소용없죠. 강의 잘하고 구원받는 거하고 소용없는 거 이제 아시죠. 여기 11절 봅시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충신과 진실이란 말은 나 예수는 너희들이 믿고, 믿고, 믿고, 믿어도 손해 볼 분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진실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내 말은 헛된 말이 없고 헛되이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분이 우리의 신랑으로서 우리에게 오신 거예요.

그 말 탄 백마의 이름이 있는데 그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16절에 보면 있어요. 백마 탄 분이 오셨다는 이 말은 그럼 우리는 어디 소속돼 있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도 어디 소속 됐습니까? 그 백마 탄 분에 의해서 다른 신분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원하는 인생을 내가 만들고 싶어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아요. 왜, 주의 성령이 오게 되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의 증인이 돼야 될 그러한 입장에서 그러한 선지자 같은 그러한 처지에서 그분에 의해서 우리는 만들어지기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그 증거가 뭐냐, 이 말씀이 그대로 요한계시록 19장의 말씀이 그것이 현실로, 현실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 인정된다는 거, 동의가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만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낯선 현실이고 실제 현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감사합니다. 율법으로 구원시키지 않고 율법 안 되는 줄 아시고 율법 외에 십자가로서 우리를 신부로 만들었사오니 이제부터 우리의 자랑할 것은 우리를 신부 만들기 위한 그 용서하시고 사해주시고 은혜 주시고 의롭다 해주신 그 선물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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