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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2 23:35:15 조회 : 226         
위반의 선 누가복음 23:34 240702 이름 : 이근호(IP:112.165.4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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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15.♡.177.240) 24-07-16 20:36 
강남-누가복음 23장 34절 (위반의 선) 240702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3장 30절부터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는데 앞에 보면 29절에 보면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차라리 낳지 않는 것이 복이 될 정도로 이 세상의 그 진상이 다 드러날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면서 이 말씀은 언제 하느냐 하면은 지금 체포되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거죠. 예수님이 체포된 이유를 예수님이 먼저 그걸 제시를 해요. 내가 체포된 이유, 예수님의 제시된 그 이유가 뭐냐. 나는 세상을 파괴하겠다. 세상을 파괴하러 오신 분이에요. 다 부수러 오신 거예요. 세상이 파괴되면 거기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어떻게 돼요? 죽지요. 그러니까 차라리 죽는 게 복이 있다.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을 때까지 나의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일은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인간 세계를 없애러 왔다.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다 죽을 때까지 주님의 일은 중지되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게 이 세상을 다 파괴하는 방식은 뭐냐? 파괴하는 방식은 바로 선이예요. 선. 경계선. 경계선을 쉬운 말로 댐이라고 해요. dam. 여기 저수지 댐이 있는데 물이 가득 있어요. 밑에 아랫마을이 있습니다. 물의 댐을 터트리면 어떻게 돼요? 몰살하겠지요. 몰살. 댐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이 댐 안에 있는 것이 이게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한 거룩을 예수님이 죽으시고 깨뜨리면 이 거룩이 쏟아져서 이들은 저주받습니다. 산들이 무너지고 그 저주가 너무나 처참해서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복이 될 정도로 크게 다행이 될 정도로 쏟아지게 되어있다. 방금 이야기한 내용이 다 모아져서 뭐를 이루느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을 이룹니다. 십자가 사건을 형성한다. 사건 형성. 그럼 예를 들면 제사장 복장이 굉장히 거룩한 것으로 복장이 되어있지요. 그 복장에 보면 하나님께 성결, 거룩으로 덕지덕지 붙어 있잖아요. 그게 제사장의 연약함 때문에 이스라엘에 쏟아진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겠어요? 몰살하겠지요. 그 거룩에 의해서.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겁니다. 거룩이 화근이에요. 거룩한 율법을 받은 게 화근이고 거룩한 제사장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화근입니다. 훈장처럼 걸쳐있는 거룩이 밑으로 뚝 떨어지면 그것이 심판하는 전쟁이 되버리고 마는 겁니다.
 
 
예수님 자체가 거룩한 제사장인데 여기 23장 45절에 보면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댐이 중간에 터지는 거예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게 되면 우리가 들어간다 가 아니라 거룩이 이쪽에 쳐들어온다 이렇게 돼요. 거룩이 쳐들어오지요. 그러면 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44절에 “때가 제 육시쯤 되어” 12시쯤 된 거죠. 해가 항상 빛이 빛나야 될 그 시점에 해가 빛을 잃어버렸죠. 무엇이 해로 하여금 빛이 나는 것을 무색하게 만듭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서 제일 빛나는 물건 사물이 태양이죠. 태양도 그 심판과 저주 앞에서 빛을 잃어버려요. 그 정도로 무서운 저주요 무서운 심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이 사람 구실만 하면 되잖아 이게 성사가 성립이 안돼요. 지금 우리의 초점은 이 댐에 있어요. 댐. 제사장이 7월 10일 날 거룩한 복장을 하고 희생의 피를 가지고 그들이 1년에 한 번씩 제사장이 지성소에 가서 하나님 만나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근이 죄 용서함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거예요. 유지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러한 시간이 되풀이 된다는 말은 제사장이 그냥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기 때문에. 그 제사장이 죽으면 누가 합니까? 늙어 죽으면 아들이 제사장하고 그랬어요. 그 되풀이 되는 그 이어짐을 끊어버리고 단번으로 오신분이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한 거예요. 단번이라고 하는 것은 연약하지 않고 온전한 댐이라는 뜻이거든요. 온전하게 댐을 막았는데 댐을 누가 붕괴시킵니까? 인간들이 댐을 붕괴시키니까 쏟아진 거룩이 어떻게 돼요? 그대로 인간세계에 다 쏟아지지요.
 
 
그래서 36절에서 43절까지 그 내용은 뭐냐 하면은 딱 차이가 나요. 어떤 차이냐 하면은 여기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당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를 구원하라. 나를 구원하라는 말은 내가 현재 있는 세계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구원,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 받는 복된 세계죠. 복된 세계로 만들어 달라 라는 쪽으로 요구를 해요. 여기 35절에 보면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남을 구원하였으니 자기도 구원하라. 여기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장소가 구원되고 난 뒤의 장소가 우리 인간들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그 세계로 네가 오게 해봐라 이런 뜻이에요. 인간들의 생각은 이겁니다. 현재 내가 건재하고 있는 이 세계, 이 세계 너머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낙원이 있고 천국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 세계 너머에. 이 세상과 이 너머의 세상에는 뭐가 있다? 연속성을 갖고 있다. 이 세상도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유대 민족을 지켜준 것처럼 오는 세상, 죽고 난 뒤의 세계도 하나님께서 우리 세계를 지켜준 것처럼 지켜주기를 바란다. 이게 그들이 말하는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구원. 구원은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세계를 유지해주는 거예요. 인간의 희망과 기대와 포부를 만족시켜주는 그 상태를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37절에 보면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우리가 아는 그 구원을 목격하게 해 달라.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을 목격하게 해 달라. 그런데 42절에 보면 강도가 뭐라고 합니까? 강도가 말하는 구원은 뭡니까? 예수여 당신의 나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댐을 터뜨려 거룩으로 인간들을 전부 다 몰살해버리는 거예요.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죽이시는 그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 우리 인간을 죽이신 그 예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강도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강도로서 사형당하는 이것이 세상의 판결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일이 되게 하옵소서 이런 뜻이에요. 주님의 일에 의해서 내가 십자가에 달리게 하옵소서 이런 뜻이란 말이죠. 믿음 얼마나 좋아요. 더 쉽게 말해서 죽음의 뜻에 의해서 브레이크를 안 밟아서 9명 죽게 하옵소서. 시청 앞에 있는 9명 죽게 하옵소서. 과장급들 9명 죽게 하옵소서. 은행직원들. 지금 죽고 난 뒤에 밑에 부하들 좋아서 난리에요. 자리 비니까 승진하겠다. 과장급들 9명 죽었으니까. 그게 무슨 큰 사건이라고 하는데 큰 사건이 아니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벌써 진즉에 인간들은 벌써 죽었어요. 모든 인간이. 왜? 주님의 나라를 생각을 못하고 자기 살 궁리를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몰살의 대상이라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내가 심판의 대상, 비거룩이고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형벌과 저주를 받아야 될 대상이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어요. 생각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천국을 생각하면 천국이 천국이겠습니까? 아니지요. 구원을 생각하면 구원이 아니지요. 자기는 멀쩡한 채 구원받고자 하는 겁니다.
 
 
강도는 내가 멀쩡하지 않게 된 것이 주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강도 하나가 말하기를 39절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메시아라면 우리를 구원하라” 계속 지금 구원, 구원 말이 계속 나오는 이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굳건하게 유지하고 그 세계가 견고하게 해 달라 이 말이에요. 죽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 메시아의 나라의 계속 일원이 되게 해 달라 지금 그 이야기입니다. 자기 세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없다고 생각해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목사가 무슨 설교하든 간에 교인들도 문제에요. 교인들이 내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고 목사 설교를 안 들어요. 괜찮아진 나를 더욱 더 괜찮게 변화시키는데 거기에다가 구원이라는 말을 집어넣고 우리를 당신의 그 복음적 설교로 우리를 구원해 달라. 거기에 대한 돌아오는 답변은 뭐에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구원을 해줘 네가 뭔데. 너는 왜 차이를 몰라. 예수님과 너와의 차이를 왜 모르는 거야. 이렇게 핀잔을 실컷 들을 겁니다. 근원적으로 인간의 문제점이 뭐냐? 그 문제점이 3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더라.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이걸 더 깊이 내려가면 이런 뜻이에요. 그들은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근원적으로 인간 속에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이 행한 것,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그들은 빨리 훅 지나가기를 원하고 잊혀지기를 원합니다. 왜냐 하면은 나는 나를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는 나를 안다. 나는 나를 대충 안다. 완전치는 않지만 대충 안다. 대충 안다는 것은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은 오케이. 약간 미지로 남아있는 것은 예수님으로 채우겠다. 이게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이게 결합이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지금 이것까지는 내가 아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이걸 채우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냐. 너희들이 나를 알려고 하지를 않는다. 왜냐 하면은 예수님의 말 딱 들어보고 그들은 예수님을 기피했습니다. 거부했습니다. 왜냐 하면은 예수님은 이 세상을 유지하고 건설적으로 세우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합니까? 말살해요. 말살. 파괴 또는 말살.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아까 29절 30절 다 보셨지요. 산들이 와서 다 엎어버린다는 말은 눌려터져버리는 거예요.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약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처음부터 살아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 사실을 인간은 알고 싶지를 않아요. 나는 처음부터 살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꽉 쥐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주께서 너는 애초부터 살면 안돼 라는 예수님에 대해서 기피하게 되는 겁니다. 거부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죽임으로서 인간이 없는 인간을 생산하고자 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댐을 무너뜨릴 때 거룩이 쏟아져서 다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의 그 거룩한 세계로 주님께서는 귀환해버려요. 귀환해버리면 다 죽은 상태에서 새로운 생명이 새로운 성도가 생산됩니다. 만들어집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몸을 근거로 해서.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겨 그런 사람을 생산해내요.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사람. 무엇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고? 나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아요. 왜냐? 예수님이 이미 언지를 줬거든요. 너는 아나마나 상관없이 너는 진멸의 대상이기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는 알고 안 알고가 우리한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것을 충분히 이용하시죠. 그렇게 이용하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이지 아니하면 안 되게 만들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못 견디게 만들어요. 뭘 이용해서? 예수님과 화합할 수 있는 어떤 요소를 끄집어내려고 끝까지 기다리고 있고 들어보려고 했고 분석하고 파악하려고 하고 연구하고 탐구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만은 오히려 그런 행동이 주님 보기에 네가 나를 알고자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나를 알지 않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어떤 정신적으로 혼란한 사람, 자신의 무의식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 의식은 알겠는데 무의식이 있다는데 그 무의식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정신 분석가한테 찾아왔다고 봅시다. 이 무의식은 누구 것이죠? 남의 무의식입니까? 자기 무의식이죠. 자기 무의식을 알고 싶어 온 사람한테 정신분석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겁니다. 당신은 진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답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은 이 사람이 진리를 알려면 뭐를 떼어버려야 하면은 자기를 떼어버려야 해요. 자기를. 자기를 떼어버리면 자기 무의식도 이것도 자기가 알고자 하는 것도 포기를 해줘야 해요.
 
 
그러면 이걸 포기했을 때 그들이 아는 진리, 무의식이라는 진리는 뭐냐 하면은 본인이 알았던 의미 있다, 나에게 의미 있다가 날아가 버리고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하는 무의미의 말이 진리 쪽에서 계속 쏟아져 나온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이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나와 상관있는 말을 좀 해줘. 나 당신이 하는 말이 나는 하나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어. 왜? 나랑 상관이 없으니까. 그럼 상담가는 뭐라고 합니까? 당신과 관련 있다고 여기는 그것이 당신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당신의 본심을 지금 폭로하고 있는 거예요. 나의 무의식을 알고 싶은 목적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하나의 주체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상담가가 공격하는 것은 주체자 포기하라는 거예요. 포기하라니까 포기를 못해요. 뭐를 포기 못하는가? 이 자아, ‘나’가 상실되는 것을 용납이 안돼요. 당신 아니면 다른 목사 없나 이렇게 되는 거죠. 하여튼 목사만 찾아다녀. 자아를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아를 포기한 상태에서 주체라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은 나는 진리에 대해서 못 넘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식이 되어버려요. 당신 솔직하게 말해봐. 당신 진리에 관심 없지. 당신 자신에게 관심 있지. 그렇지? 그러니까 여기 진리가 하는 말이 당신한테는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보탬도 안 되는 무의미한 말로 받아진다는 것은 이미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기 위주의 의미가 체계를 자아라는 이름으로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얼추 나에 대해서는 알지만 조금 2% 부족한 것 한번 채우기 위해서 목사님 한번 찾아가볼까? 이런 식이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잘 오셨습니다. 이거 보충해드릴께요. 영양제 보충하는 겁니까? 하루 세 끼 잘 드시고 여기 영양제까지 보충하시면 책임집니다. 영양제 보충 소용없어요. 인간은 자기 문제 자기에게 의미 있는 것 외에는 다 무의미한 거예요. 하나 예를 들게요. 너구리 라면 있지요. 너구리 라면에 다시마 있잖아요. 그 다시마 먹어야 돼요? 버려야 돼요? 먹으라고 있는 겁니까? 버리라고 있는 겁니까? 맛만 내라고 있는 거예요? 국물 내라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이런 식이에요. 먹든 버리든 그게 뭐가 중요하냐 바로 그 점이에요. 인간은 자기 구원에 환장해있어요. 주님의 안목은 전혀 모릅니다. 자기 안목 고집하면서 주님 찾아간 거예요. 뭔가 도움 될까 싶어서. 예수님이 계속 폭로한 것은 너희들은 실상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있다.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 자아의 방어체제가 그렇게 견고해요. 그래서 인간의 자아는 뭐냐? 의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어느 설교에서는 사적 의미라고 했지요.
 
 
자, 여기서 문제는 이 의미가 어디서 주어진 것이냐? 의미가. 이것은 사회 체제, 사회 서열과 계층, 계급에서 의미가 주어진 겁니다. 주변 사회에서 의미가 주어진 거예요. 11살 먹은 소녀가 해수욕장에서 자기 동생하고 놀다가 자기 동생이 신발을 잃어버렸어요. 그러니까 11살 먹은 누나가 동생 신발 찾는 다고 해변에서 저 멀리 떨어져서 저 멀리 바다 깊숙한 데까지 갔습니다. 자, 그러면 동생에게 그 신발은 어떤 의미입니까? 동생 입장에서. 한 8살 먹은 아이에게 신발은 무슨 의미죠? 자기와 한 몸이죠. 한 몸. 사물이 아니고 사물과 자기 몸이 일체화된 거죠. 동질화된 거죠.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의미에요. 의미. 신발 없으면 못 살아요 동생은. 몇 년 동안 좋다고 신던 신발이 없으면 이거는 부모가 야 신발 또 사줄게 해도 신발 신은 나의 의미에 흠집이 생기기 때문에 신발 없는 나는 내가 아니므니다. 내가 아니올시다. 그 동생의 마음을 아는 11살 누나가 그냥 신발만 보고 가는데 일본까지 가요. 바다에 헤엄쳐서 도저히 건널 수가 없는 거예요. 낚시 배가 그 애를 건졌어요. 왜 먼 바다까지 나왔느냐. 동생 신발 찾으러 여기까지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인간입니다. 인간의 일상의 삶이에요. 일상의 삶. 너구리에 다시마 그거는 관계없어도 신발은 중요해요. 나에게 중요한 게 있어요.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그거 없이는 못 살아요. 그거 없이 못 살아.
 
 
주님의 뜻은 뭐냐? 살지 마라. 이게 주의 뜻이에요. 그 의미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나 신발 없이는 못 살아. 주님께서는 같이 죽어. 신발하고 너하고 죽여줄게. 거룩의 이름으로 죽여줄게. 이게 예수님의 말씀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해요? 예수님을 죽여야 뭐가 있어요? 사회체제가 유지가 되겠지요. 사회체제가 유지가 될 때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내가 그 사회에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뭐가 지켜지죠? 나의 의미가 지켜지죠. 나의 의미가. 나의 의미는요 나를 둘러싼 신발이죠. 나중에 더 크게 되면 신발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돈. 내 직장, 가족.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이게 전부 다 나한테 신발 같은 거예요. 그 의미, 그 층층의 의미들이 모여서 사회가 되는 겁니다. 이 사회가 하나님의 은총과 복으로 그저 잘 되가지고 그 속에 사는 나의 의미가 나의 소원대로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이게 인간 사는 거예요 이게. 그런데 오늘 본문 30절에서 산들이 와서 무너진다는 거예요. 이 사회를 완전히 싸그리 전부 다 무너지게 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체포되어 잡혀가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를 위해 울지 마라 너희 딸들을 위해서 울어라. 누굴 위해서 울어야 할지 분간도 못하고 있어요. 제자들은 그만큼 똑똑하느냐?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예수님의 말귀를 알아먹었느냐? 못 알아먹었어요.
 
 
55절에 봅시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향품과 향유.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추모기능이에요. 죽은 자를 추모한다는 말은 기존의 의미에 연속, 연장에서 나온 겁니다. 추모기능은 이것은 거짓입니다. 추모기능 해놓고 시체 보러 가니까 어?! 추모대상 자체가 없어져버렸어요. 예수님이 없어진 거예요. 예수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너희들 이 땅에서 없어져야 돼. 내가 없어지게 해줄께. 너희들도 나처럼 되게 해줄게. 이 세상 자체에서 무덤 속에서 시신이 없어지는 것처럼 내가 너희 시신을 없애줄게. 그러니까 너는 너 자신의 의미를 고집부리지마. 신발은 바다에 던져버리고 신발만 던지면 안 되겠지요. 너도 바다에 던져버려. 예수님에 대해서 운다? 주께서 하는 말은 뭐겠어요? 울어?! 너 뭘 알고 울어? 나하고 헤어지는 게 그게 섭섭해서 우는 거야? 우는 너희들을 내가 죽여줄게. 됐냐? 울음 그치게. 운다는 말은 죽은 자는 안타깝다는 의미잖아요. 아직도 추모의 의미를 아직도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말씀을 보면 근원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몰라요. 모르고 그 모르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합니다. 그게 뭐냐? 차이에요. 차이.
 
 
주님께서는 차이를 계속 유지시켜 줍니다. 그 차이를. 차이에 대해서 좋은 예가 뭐냐 하면은 지평선이에요. 지평선. 이상하게 같은 지표면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따라잡을 수가 없네요. 지평선이 그렇지요? 한 발자국 나아가면 한 발자국 멀어지고. 백지영 노래에 나오지요. 한 발짝 다가가면 한 발짝 멀어지는 거예요. 또 거리를 그 차이를 좁힐 수가 없어요. 실제로 자연세계에서 빛의 속도가 그래요. 빛의 속도가. 세상의 사람들은 빛의 속도가 무한하다고 여겼어요. 무한하고 절대적이라고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갈리레오 갈릴레이가 제자하고 둘이 높은 산에 가가지고 밤중에 둘 다 등불 들고 비췄어요. 너 비추고 나 비추고 서로 빛이 왔다갔다 할 때 시간이 너 비췄을 때 나 비췄을 때 얼마나 차이나나 보자. 아무리해도 차이가 안 나네요. 차이가 안나요. 빛의 속도가 무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차이가 안나요. 그런데 지금은 달하고 지구에다가 거울을 세 개 해가지고 지구에서 빛을 비추고 되돌아옵니다. 하는데 2.6초 차이가 나요. 그래서 현재 천문학에서는 지구과 달 사이를 mm단위로 매일같이 측정해요. mm단위로. 왕복 2.6이이요. 그러니까 1.3초. 지구와 달 거리가 30만km 좀 더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빛의 속도가 무한하게 아니고 1초에 30만km의 유한한 거죠. 유한한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유한하면 따라 잡을 수 있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주선 세대를 날립니다. 여기 우주선, 여기도 우주선, 우주선 있을 때 빛이니까 광자 앞에 달리면 광자는 30만km에요. 이 우주선은 1초에 15만km, 1초에 10만, 1초에 5만 이렇게 간다면 30만km를 따라갈 때에 여기서 보게 되면 15만km이게 얼마나 보이겠어요. 30만인데 15만 따라 붙이니까 얼마나 보이겠어요. 15km속도로 가는 것처럼 보여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쪽에서 봐도 30만이고 이쪽에서 봐도 30만이고 이쪽에서 봐도 30만이고 그냥 정지해도 30만이에요. 빛의 속도가. 왠 일이야 도대체 이게 무슨 이런 조화가 있냐. 과학자는 이렇게 하고 끝나면 안돼요. 이 이유를 밝혀줘야 돼요. 왜 이런지. 움직이는 속도를 따라잡아도 25만km같아도 그 앞에서는 30만km에요. 꼭 유령 같애 빛이. 꼭 귀신같아요. 사실은 예수님 같아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 세계하고 인간의 세계가 달라서 그래요. 인간의 세계. 인간의 세계라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안 받아요. 안 받는 분이 인간 세계에 와버리니까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생각 안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고 예수님에 대해서 평가할 생각만 하는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평가할 생각만 해요. 본인들이 인간 세계에서 아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 인간 세계 너머 하늘나라를 인간 세계, 이 시공간 세계를 염두에 두고 하늘나라를 그들이 구상을 한 겁니다. 그러나 실제 하늘나라에서 오신 예수님은 이러한 개념 자체를 저주해버리고 더럽다고 거룩으로 심판해버리는 안목으로 주님께서는 말씀을 해버린 거예요. 이게 의미가 없다고요. 과학적으로 차이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게 되면 여기 좌표라는 게 있거든요. 평면에 좌표. x축 y축. x가 15 y가 7. 하나의 좌표가 정해진다. 이걸 가지고 좌표계라고 하고 숫자 7, 15에 해당되는 것 15, 7에 딱 만나진다 이게 인간 세계의 좌표계입니다. 좌표계인데 이것을 y축을 이걸 시간으로 바꿔요. x를 공간으로 바꿔버려요. 그러면 광자가 30만km로 움직여나갈 때 평지 있는 사람은 30만km 가고 이쪽에 비행선이 15만km로 따라간다 합시다. 우리 보기에는 30만이고 15만이니까 차이가 15밖에 안 나는데 이 이유를 설명해야 돼요. 왜 이게 30만으로 보이는가. 인간이 볼 때는 좌표축이 이렇게 됐잖아요. 그러나 이쪽에서 보면 공간으로 보면 이렇게 돼요. 나란히 볼 수 있지만 우주선의 입장에서는 뭐냐? 빛의 속도에서 시간이 정해져버리면 시간도 휘어진 동시에 공간도 휘어져서 공간 휘어진 이 선과 평행해서 광자를 보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밑에서 보게 되면 광자라는 것이 현재에 속했다고 보지만 이쪽에서 보면 미래에 속한 거죠. 현재로선 미래에 보이지만 15만에서는 이게 현재의 평행선 이것과 평행된 이 안에서의 광자에요. 광자니까 미래에 아직 도달하지 않는 광자로서 계속 지평선에 남아있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이 축 자체가 이게 인간의 움직임 자체가 좌표계가 바뀌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성령 받았잖아요. 성령 받은 예수님이 세상을 볼 때에 성령 없는 인간들이 보는 것과 이 시공간 전체가 같지를 않아요. 같지를 않으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아무리 따라잡아도 이게 거룩이라는 차이가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다가가면 멀어지는 거예요. 다가가면. 지구가 둥그니까 쫓아가면 그 지점에 도달할 수 있어요. 지구에 지평선 생긴 이유가 뭡니까? 이거는 무한한 게 아니고 둥글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에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예수님의 경우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 미래가 예수님한테는 현재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예수님 축에서는. 예수님의 좌표계에서는. 예수님 분명히 유한한데 그 내용은 무한해요. 그리고 예수님한테는 착하든 악하든 상관없이 예수님한테는 다 죄인입니다.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착하게 살아도 그 때 그 죄인이고 더 죄 지어도 그때 죄인이고 달라질 건 없어요. 아무것도 안 달라집니다 주님한테는. 왜? 인간은 죽어야 될 대상이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냐? 이걸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위반의 선이에요.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인간의 좌표를 위반해버려요. 왜 위반했느냐 하면은 인간은 의미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의미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까 한 것처럼 인간들은 무엇이 돈독하다? 그 사회가 돈독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이유가 네가 뭔데 이 세상 질서와 제도 조직체를 한방에 무너뜨리려고 하느냐 그게 기분 나빠서 예수님을 살해하려고 한 거예요. 유대민족은 그냥 유구한 역사가 아니라 주님의 율법과 말씀으로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잖아요. 하나님이 함께 있는 거룩한 역사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유대민족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 네가 뭔데 이걸 한 방에 부숴버릴 때 그동안 유대민족이 살았던 그 의미 그리고 소망 기대 앞으로 잘 될 것이란 희망 메시아의 고대 하나님 사랑 이게 어떻게 됩니까? 그게 의미였잖아요. 그 의미 때문에 유대민족은 그나마 결속되어 살아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이 나라를 어떻게 한다? 묵사발 만들어버리면 당하느니 어떻게 해요? 죽여야지요. 당하느니. 만약에 예수님을 안 죽이면 어떻게 돼요? 우리는 그동안 수립했던 사회가 전부 다 무의미한 저주받은 사회가 돼요. 이거는 그 안에 우리 자신도 포함되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위반의 선을 넘어서 유대민족이 갖고 있던 성경 해석을 공격, 일부러 의도적으로 그들의 판단기준에 위반해서 넘어가는 것은 너희들이 언약을 깨었다는 것을 내가 너희들의 기준의 언약 위반자로 나서서 알려주겠다는 거예요. 계약은 누가 깨고? 인간이 깨고. 계약의 성사는 누가 시키고? 메시아가 하고. 그 정도로 누가 알아요? 그 정도로 유대인도 알고 있잖아요. 옛날 자기 민족이 언약을 위반해서 우상 섬겨서 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시는 역사의 교훈을 삼아서 하지말자 하는 거예요. 하지말자의 주님은 의도적으로 위반해버리는 겁니다. 기준 자체가 오히려 언약을 파괴하는 짓이 된다는 거예요. 언약대로 살겠다고 애쓰는 그 모든 것이 언약을 파괴하는 모습이 되는 거예요.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이 말씀을 파괴하는 게 돼요. 왜냐 하면은 그들은 말씀, 율법 하지만 그들은 율법보다 뭐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자아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자기가 더 소중하고 그리고 자기가 속해있는 이 유대 사회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이 강한 권력을 예수 네가 뭔데 함부로 건드려. 이게 한 방에 무너질 거야? 안되지. 안되지. 너를 죽임으로서 우리 질서를 지키겠다는 것이 그게 유대지도자들의 한결같은 염원이었고 아주 단결도 단합도 아주 참 잘됐어요. 아주 일사천리로 잘 되었습니다. 심지어 율법을 모르고 언약도 모르는 빌라도라는 외부 통치자가 왔을 때 그 앞에서 그들은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달려들었어요. 죽여야 된다. 누굴 죽여야 된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 된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하는 자를 죽여야 된다고. 그렇게 했습니다.
 
 
자, 첫째 시간 끝내면서 여러분에게 질문 던집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사회 속에 여러분들이 일원으로 살았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쪽을 하겠습니까? 첫째 예수님을 죽이고자 찬성한다. 두 번째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자 반대한다. 세 번째 기권한다. 몇 번입니까? 3번이죠. 3번이 여기 나옵니다. 누가 50절 51절 한번 읽어보세요.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가타부타 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기권표 던진 사람이에요. 나서지도 않았어요. 다 끝나고 난 뒤에 추모기능을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슨 날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럼 다른 유대인들은 하늘나라 안 기다렸어요? 맨날 메시아 하면서 하늘나라 기다렸는데. 그러니까 둘째 시간은 뭐냐? 인간의 추모기능이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게 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가. 그냥 예수님의 장래를 치루면서 예수님의 장래 치르는 그 모습을 기존의 다른 인간 장래 치르는 것과 결을 같이 해요. 우리라도 마지막 챙겨드리는 것이 주님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것이다. 그게 예수님의 심정을 아는 게 아니에요. 그건 뭐냐? 사회 위계질서를 따라가는 거예요. 사회 위계질서. 다시 말해서 유대민족 지도자들이여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장례하는 것까지 반대하지 않겠지요 라고 그들의 권력에 구걸하는 거예요.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자기의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 감정은 감정대로 풀 수 있는 그런 행동을 보여주면서 10분 쉽시다.
 홍민희(IP:115.♡.177.240) 24-07-16 20:36 
강남-누가복음 23장 34절 (위반의 선) 240702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1. 자기 죽음 너머 낙원 또는 천국 2. 자기 심판 너머 천국. 2번 이것이 예수님의 뜻이에요. 1번 이거는 종교에요. 유대교. 종교. 오늘날 한국교회 한번 보세요. 한국교회 목사설교 한번 보세요. 1번일까요? 2번일까요? 자기 심판 너머의 천국을 알려면 내가 자아라는 존재가 나라는 존재가 주님 앞에 곱상하게 굴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돼요. 핍박이 나와야 되지 내가 그냥 곱게 예예 하고 순응할 수가 없는 거죠. 인간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모든 역량을 다 거기에다 집어넣는단 말이죠. 아까 그것처럼 동생의 신발, 동생의 신발의 뜻이 우리 인생에도 신발같은 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존심, 자존감, 명예, 얼마 전에 할부로 구입한 차, 샀던 옷, 한정품 신발 이런 거. 우리나라에 몇 개 없는 옷 이런 거. 예를 들어서 엘레베이터를 탔는데 엘레베이터에 있는 사람이 전부 다 홈쇼핑 옷을 똑같이 입고 있다고 보세요. 얼마나 뻘쭘하겠어요. 대번 집어가서 옷 갈아입고 나올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자기 죽음 너머에 있는 이것을 고발하고 이걸 거룩으로 심판하고 자기 심판 너머의 세계를 알려주시는 그 기능이 무슨 기능이냐? 예수님의 선지자 기능이에요.


선지자 기능은 뭐냐 하면은 영웅시대의 종식이에요.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고만고만한 사람가운데 특출한 어떤 뛰어난 사람이 등장해서 이 혼란한 이 세계를 잠재우고 다시 평온한 세계로 전환시키는 그러한 신적 능력을 발휘하는 영웅이거든요. 이 영웅시대를 유대인들은 누구라고 했느냐? 메시아라 본거에요. 메시아. 그리스도.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유대인의 왕으로 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인간의 이런 자기 죽음 이후에 천국 간다는 것을 이걸 얼마나 조롱하고 있는지 몰라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의미를 갖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걸 주께서는 역으로 사용해버려요. 조롱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이야?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야? 내가 아들인데. 너희들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야. 자꾸 그들이 하는 그들의 의미 체계에 주께서 위반을 해버려요. 위반을. 의도적으로 위반을 해버려요. 위반할 때 예수님은 하나의 존재로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그냥 인구수가 만약에 28만 명이라면 예수님이 등장했다. 28만 명 더하기 한 명. 그냥 숫자로 28만 명 중에 하나일 뿐으로 그렇게 존재에 대해서 섞이는 존재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를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선으로 보죠. 선. 경계선.


아까 첫째 시간에 말한 것은 지평선. 아무리 따라잡으려 해도 따라잡을 수 없고 그것을 유지하면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유한한데 무한한 분. 이 역설. 우리같이 보통 인간인데 무한한 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설명할 필요 없어요. 그걸 설명하는 우리에게 문제 있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인간은 그렇게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가 실패자고 내가 엉터리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을 미워하고 아무리 부인해도 그 다음 대책이 없어요. 나 아니면 그럼 뭐?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나라도 붙잡아야 되는 거예요. 나라도. 성경공부해도 소용없다. 헌금해도 기도해도 전도해도 소용없다. ok ok ok 해놓고 그 뒤에 뭐가 남는데? 쉽게 말해서 우리들 있는데 여기 나도 있는데 주께서 여기 오셨다. 우리는 영접하자 이거거든요. 이게 아니고 예수님은 지금 볼링하고 계시고 우리는 볼링핀이에요. 스트라이크! 주님의 십자가는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버려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단한명도 살리지 않고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볼링핀이고 주님은 그걸 다 쓰러트리죠. 진짜 이거 다 쓰러트리고 쓰러트리는걸 좋아하는 사람은 개 밖에 없습니다. 스로보니게아 개. 개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말씀이 나보다 우선이다. 너무나 간략한 문장 하나에요. 말씀이 나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말씀대로 되게 하옵소서. 그것도 이방인이. 주의 말씀대로 하옵소서. 백부장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주님이 무릎을 쳤는지 안 쳤는지 모르겠지만 무릎을 탁 치면서 세상에 이런 믿음 내가 처음 봤다. 천국 다 나가! 이런 사람이 천국을 채운다. 주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에요. 다른 것도 다 주님의 말씀이지만.


문제는 말씀이 나보다 우선이라는 이것이 순수한 내가 아니라 고운 내가 아니라 발악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말씀이 나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이 발악을 하고 있는 나에 대해서 주께서 조치를 할 수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영웅시대의 종식, 마감이에요. 영웅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영웅시대를 마감한다는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뭐로 봤느냐 하면은 모험가로 봤어요. 정신적인 모함가로 봤어요. 밀어붙여서 안되면 죽으면 되지 하는 식으로. 모험가의 특징 영웅의 특징이 있어요. 개개인마다 이런 게 다 들어있는데 그게 안 들켜서 그런데 여러분 들키게 해드리겠습니다. 모험가의 특징은 뭐냐? 모든 행동이 승리가 아니면 패배. 승리가 아니면 패배에요. 그래서 그 모험가는 뭐냐 하면은 무엇을 이기기를 원하느냐? 시련과 시험과 어떤 유혹도 극복하는 그 자체의 즐거움과 기쁨을 느낍니다. 대표적인 것이 스포츠화 된게 뭐냐? 스카이다이빙. 2m에서 툭 뛰어내리고서 쨘!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어릴 때는 할 수 있지요. 친구가 가만있지 않습니다. 3m 할 수 있어? 여자들은 모르겠는데 남자들은 그런걸 많이 했어요. 그때는 학원을 안 갔거든. 어딜 가느냐? 마을 집터 근처에 가면 공사장 보면 있어요. 보면 약간 높아 보이거든요. 여기서 이제 객기 오기가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허풍 같은 거. 정상익, 박태진 나와요. 커넥션에 나오는 애들 있잖아요. 드라마 안보니까. 어릴 때 학폭 하면서 어울렸던 그 객기가 커서 마약하면서 재벌과 관련되면서 자기들끼리 암투와 질투하는 거 있잖아요. 그게 커서 그대로 간다니까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게 뭐냐 하면은 바로 어릴 때 경쟁상대를 늘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기의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겁니다. 이쯤에서 동창생한테 전화 한번 해 볼까? 전화 왜 하는데? 요새 너 얼마 벌어? 그걸 전화 왜 해야 됩니까. 자기는 모험가거든. 모험가가 추구하는 건 뭡니까? 승자가 되는 거예요. 승리자가 되는 거예요. 그건 뭐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영자야, 애 너희 반에서 몇 등해? 몇 등하는 걸 왜 물어요. 왜 묻느냐고. 5등쯤 해? 우리 애는 1등 했다. 뭐에요? 승자가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나름 모두 모험가이며 그 승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시련과 시험은 자기 자아를 구성하는 스토리텔링이 되는 거예요. 이야기가 돼요. 이야기.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아까워서도 자기 부인이 안돼요. 그동안 살아온 고생이 너무 힘들어서. 너무 힘든 거예요. 사랑의 반대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증오인데 그 증오가 사실은 사랑과 더불어 같이 있는 거예요. 이 모험가를 주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없앤다 했지요. 없애고 뭘 제시한다 했습니까? 선. 이 사건이 바로 무슨 사건이냐? 출애굽 사건. 홍해사건. 요단강 사건. 항상 뭐냐 하면은 선이에요. 어떤 선을 넘느냐 마느냐 예요. 어떤 선을. 하나님께서는 선을 주시고 그 선을 못 넘으면 안 된다고 요구하고 있어요. 누구한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럼 그 선을 넘으면 되지 않느냐. 막상 넘으려고 하면 갑자기 바다가 나온다든지 갑자기 홍수가 나가지고 건너가지 못하게 만들어요. 건너가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넘어가라고 할 때에 이것은 더 이상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뭐가 성사되지 않는다? 인간은 승리라는 것이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승리가 없다면 애초부터 인간은 뭐였습니까? 하나님이 제시한 그 기준과 선에 의해서 인간은 이미 날 때부터 패배자였던 거예요. 패배자.


그렇다면 패배자가 유지를 하게 되면 그 패배자에게 배풀어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계속 유지될 수 있겠지요. 왜냐 하면은 하나님의 자기 공로만 남으니까. 인간의 허세가 끼어들지 않으니까 주께서는 함께 동행이 성립되지요. 동행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는 긍휼 입을 자에게 긍휼 주고 자비 입을 자에게 자비를 준다는 그 내용이 계속 유지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떠날 이유가 없잖아요. 같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날부터 이게 선을 넘어서 약속의 땅에 도달을 했어요. 약속의 땅에 도달해 놓고 여호수아 이후에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는가? 그 이후에는 선이 없고 갑자기 존재가 되어버린 거예요. 존재. 우리 잘 나서 들어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호수아 이후에 사사기. 이 사사기에 하나님이 고군분투 노력해요. 여호수아 때 정신을 사사기에 그대로 유지시킬라고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이. 그중에 기드온, 드보라. 드보라가 남자에요? 여자에요? 여자 사사 드보라. 이 전쟁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투명한 전쟁이에요. 투명한 전쟁. 이건 제가 지어냈지만 그냥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서 제가 지어냈어요. 내장을 드러내는 전쟁. 겉모습 다 빼고 내장만 보여주는 거예요. 기드온, 여러분 기드온 보세요. 그 기드온이 군인 같아요? 군인 아닌 거 같아요? 어떻습니까? 기드온은 군인이라는 그 틀을 벗겨버리니까 투명한 내용물이 나오지요. 내장만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드보라. 전쟁은 누가 하게 되어있어요? 남자가 하게 되어있어요? 여자가 하게 되어있어요? 남자가 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드보라 전쟁을 통해서 내부가 드러나요. 발락이 해야 될 전쟁을 여자가 하고 마지막 최후에 목을 따는 그것은 누구냐 하면은 헤벨의 아내 야엘이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내장을 보여주는 거예요. 힘 없는 여자가 승리를 해요. 그것은 바로 기존의 존재 중심을 고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선이라는 것. 그 선을 지켜야 돼요. 선을 넘는 게 아니고 선을 지켜야 돼요. 선을 없애버리고 선이 존재처럼 그렇게 행세해버리면 더 이상 하나님하고는 벌써 관계 끝난 거예요. 주님이 지정해준 선이 내부에 있어줘야 그게 성도에요. 십자가가 뭐냐? 선입니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의 활동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이야기해준 거예요. 네 힘으로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를 날마다 묻는 선. 네 힘으로 더 살 수 있냐고 날마다 묻지요? 뭐 좀 잘됐다고 까불거리면 너 길 가다가 또 68세 된 남자한테 찡겨봐야 사는 게 내 뜻대로 사는 게 아니구나. 뭐 아들 은행 과장 됐다고? 시청 앞에서 한번 죽어봐야 내 기대와 희망과 내가 그동안 노력했다는 그것이 무산되봐야 우리가 또 선에서 뭐로 바뀌었어요? 존재로 바뀐 것을 우리가 파악이 되는 거예요. 내가 했다. 존재.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뭐냐 하면은 그 선지자 기능을 주께서 하신다는 그 내용. 구약에서 선지자 기능이 어떤 기능인가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래야 오늘 누가복음의 그 전체 내용이 파악이 돼요. 그리고 아까 누가복음 본문에서 이야기했듯이 갈릴리 여자들이 향품과 향유를 예비했잖아요. 이게 추모기능이죠. 추모기능은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이거는 기존의 인간 세계, 인간 계층에서 하는 이 세상이 아직도 의미 있음 이라고 주장할 때 일어나는 기능이지 예수님 십자가 의를 충분히 담아낼 수는 없지요. 죽음 자체를 추모로 덮으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죽음 그 날 것으로 그대로 나와야 돼요. 왜? 주님이 죽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은 한 사람도 살 수 없음을 알려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선입니다.


이 선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것이 민수기 22장부터 23장 24장까지 발람 선지자 이야기가 이렇게 길게 나와있어요. 완전 이스라엘 선지자도 아닌데 이방 나라 선지자가 이렇게 길고 자세하고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선지자의 구조는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모든 지배로 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그 지배로 부터 벗어날 때 발람 선지자가 그 발락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제물이었어요. 제물. 민수기 23장에 보면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라고 했지요. 자, 여러분 우리가 차분하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발락은 모압 왕입니다. 왕은 모압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에요. 그러면 발람 선지자는 뭡니까? 제일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죠. 그냥 자문위원이죠. 내가 왕이 필요할 때 자문해줘야 돼요. 목적은 이미 정해졌어요. 모압 왕이 하는 것도 목적은 뭐냐? 모압이라는 나라를 지켜내기 위함입니다. 모압의 선지자는 하는 일이 뭡니까? 어떠한 계시나 어떠한 신의 계시를 받더라도 누굴 위해야 돼요? 모압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 해야 돼요. 일단은 그러한 조건 안에서 발락이나 발람은 모압에 소속되어있습니다. 모압 공동체.


신의 계시라는 것은 공동체 유지에 도움 될 때만 후차적으로 신의 계시를 공동체가 고백하고 인정한다. 보세요. 얼마나 인간들이 일방적입니까. 신의 주는 계시라도 선별하는 거예요. 우리 공동체가 잘 될 때는 신이 도왔다. 우리 민족을 지켜주고 돕는구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를 지켜주는구나 할 때만 이게 신의 계시로 인정하는 겁니다. 신이 도왔다. 누굽니까? 이순신 장군. 조선말기에 정말 아이큐 높고 공부 잘하고 과거에 급제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이 이완용. 아주 똑똑해요. 천재과에요. 똑똑합니다. 그보다 더 천재가 누구냐? 이등박문. 이거는 수재에요. 일본의 최고의 수재에요. 신의 계시입니까? 안중근한테 총에 죽은 이등박문은 일본 나라에서는 영웅이죠. 그리고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한국에서 안중근은 뭡니까? 손바닥 팍! 차 뒤에 붙이죠. 대한국인. 이게 뭐냐? 영웅이죠. 뮤지컬 이름도 영웅이잖아요. 영웅. 영웅, 하나님의 도우심, 계시 이거는 뭐냐 하면은 역사가 그렇게 해석을 붙이는 거예요. 역사가.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뭡니까? 그렇게 붙인 이스라엘을 파괴시키는 게 주님입니다. 우리 교회를 파괴시키는 것이 주의 계시라니까요. 왜? 우리가 잘되면 주님을 잘못 되게 칭송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에. 우리 집안 잘되고 내 교회 잘되고 내 신상 잘 풀리기 때문에 주님 좋아요~ 세 번 네 번 좋아요 누르고. 내가 못한 것을 당신이 해줘서 고맙다는 거예요.


바로 이 사실을 이방 민족인 왕과 선지자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민수기 22장에 24장까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앞으로 광야 길을 가면서 마주쳐야 되고 약속의 땅에서 마주쳐야 될 그 이방민족의 의식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경험케 하는 거예요. 왕과 제사장 선지자가 이런 관계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와 왕 사이에 선이 생겼어요. 경계선이 생겼습니다. 시키는 대로 제물을 갖다 줬는데 제물 갖다 줄 때에 그 모압 발락은 은근히 기대한 게 있었어요. 너나 나나 우리 모압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누굴 저주하고 누굴 공격하는 계시를 줘라?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는 계시를 해라 라고 왕이 압력을 넣었을 때에 발람이 선지자죠. 선지자는 뭡니까? 왕의 지배를 벗어나는 거예요. 왕이 있잖아요. 모압 공동체가 있고. 여기 발람 선지자가 있다면 발람 선지자는 둘 다 모압 선지자예요. 왕이 발람에게 조언을 부탁하죠. 명령을 하는 게 아니고 조언을 부탁할 때 선지자는 신의 계시에 의해서 모압을 위해서 봉사하는 거예요. 신의 계시에 의해서. 이게 이원체제는 아니에요. 왜냐 하면은 나라의 권력은 왕에게 있기 때문에. 왕은 상설적이잖아요. 늘 있잖아요. 그러나 선지자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표현할 때마다 조언하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이 선지자의 존재는 없음이 되죠. 상설적으로 없음이 돼요. 계시가 있을 때만 생겨나는 존재. 이게 선지자입니다. 민수기 22장 18절에 보면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지금 이 말씀을 보면서 모압 선지자가 완전히 이스라엘 선지자처럼 그렇게 오해할만하죠. 지금 발람 선지자가 어떤 자기 자존심 채우기 위해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게 되느냐? 21절 그 다음부터 보면 자기가 타고 있는 나귀는 보는데 자기는 못 봐요. 나귀가 누굴 죽이려고 발람 자기를 죽이려고 한 겁니다. 이 모순을 발람은 소화를 못 시키는 거예요. 자기는 말로서 여호와께서 주는 이야기만 은금을 줄지라도 돈이나 밝히는 선지자 아니야. 여러분 많이 들어봤지요. 여러분 기존 교회에서 많이 안 들어봤습니까? 그래가지고 교회 목회하려는 사람들 한두 명이 아니거든요. 트럭으로 몇 트럭 될 거예요. 기존의 목사하고 내가 같냐? 나는 오직 말씀만 전하는 목사다.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인거에요. 왜? 이방인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민수기 22장 24장에서 뭐냐 하면은 선지자가 기존의 지배를 벗어났잖아요. 벗어났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여파, 이스라엘이 진행하는 그 주변의 에너지가 이미 모압의 왕과 선지자를 어떻게 해요? 지금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그 당시 선지자가 없으니까 모세밖에 없으니까 발람 선지자에게 압력을 가해가지고 전달하는 거예요. 내 길을 이스라엘 길을 막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이렇게 전달하는 거예요. 그 중간에 발람 선지자가 갖고 있는 중간의 모양새를 보자. 모양새를 봤더니만 이 발람은 허수아비에요. 발람은 허수아비입니다. 발람이 허수아비라는 이 모습이 선지자의 실체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발람이 22장에 보면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르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결국 이거는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을 어떻게 합니까? 발람 자체를 공격을 하지요. 발람을 공격하게 되면 발람이 이야기했던 내가 이렇게 선지자답다 하는 그 모든 것이 어떻게 돼요? 그게 아무 짝도 소용없고 무용지물이고 허세, 소위 기존의 의미 있는 인간세계에서 인간이 기껏 끄집어낼 수 있는 위대한 선지자 상이라는 허세, 허깨비에 불가한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뭐냐 하면은 선지자는 죽어야 돼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선지자가 죽을 마음 없으면서 살아있으면서 온갖 자기가 듣고 아는 상식 있잖아요. 선지자는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직 신의 계시만 말하고 다 맞죠. 다 맞는데 엉터리에요. 맞는 말을 하는데 그게 엉터리에요. 16장에 보면 13절에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런 평가 내리는 이유는 그들이 이미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면은 선지자는 이래야 마땅하다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있지요. 이제 중요한 대목에 들어섰으니까 좀 힘내세요. 뭐냐 하면은 우리는 이런 선지자를 선지자라고 제대로 규정하니까 우리가 산다는 의미도 하나님께서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우리가 말하는 것이 정답 맞잖아요. 정답을 내놓으니까 내가 존재하는 것도 옳다고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예수님이 이용하게 한 거예요.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레미야 또는 엘리야 또는 세례 요한. 좋게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그들이 가짜라는 거예요. 예수님께 좋게 이야기하는 그것이 다 아무 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분명히 선지자라는 것은 이론상은 하나님의 계시대로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외치는 것이 선지자다 알고 있습니다. 이게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단이 나느냐 하면은 이 정도로 알고 있으니까 알고 있는 나는 상당히 질적으로 우수한 존재다 라고 하는 것을 자부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왜 죄인이고 이것조차 엉터리냔 말인가 이렇게 반박하고 싶을 거예요.


이제 민수기로 돌아가봅시다. 지금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축복을 했잖아요. 저주하라고 했는데 축복을 했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발람 선지자에게 협조하거나 도와준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으니까 이 축복한 발람 선지자가 결국은 뭐를 알았느냐 하면은 이걸 알았어요. 이스라엘과 언약 이스라엘의 차이점을 알게 된 거예요. 누가? 발람이. 발람이 이걸 알게 된 거예요. 언약 안에 숨어 있는 이스라엘과 언약 받았다는 이스라엘과의 차이점. 안에 언약이 숨어있으면 숨어있는 언약이 발휘되면 그때 이스라엘은 필히 파괴되야 되는 거예요. 필히 부숴져야 돼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건 꿈에도 생각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 받았으니까 우리는 지금 멀쩡한 게 당연하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발람 선지자에게 이스라엘도 모르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발람 선지자 입을 통해서 미리 다 계시를 해버린 거예요. 누가 그를 건드리랴. 그 발람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그 축복한 대목을 한번 봅시다. 23장 8절에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하면서 누가 이야기했어요? 발람 선지자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발락이 화가 난거죠.


21절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 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죠. 이게 지금 이스라엘 속에 있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유대 민족이 깨어져야 돼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위반의 선을 넘어서야 돼요. 다시 말해서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결국 발람 선지자 같은 인식을 가지고 이스라엘과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사람은 결국은 다 무너지고 깨어져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를 깨트리는 거예요. 안다고 여기는 우리를 깨트리는 거예요. 그러면 깨트리면 우리 내장이 드러나죠. 속이 시원하죠. 속이 시원합니다. 목욕탕에서 옷 벗고 있으면 속이 시원하지요. 목욕탕에 외투입고 잠바 입고 들어가보세요. 답답하잖아요. 주님 앞에는 주님이 우리 허물을 보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허물을 우리가 감추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내놓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요? 허물을 보지 않는 나, 그 나를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누구의 공격이 되느냐 하면은 바로 저걸 어떻게 꼬셔볼까 하는 바로 우상 섬기게 해볼까 하는 발람 선지자의 표적이 됩니다. 가짜 선지자들의 공격 표적이 돼요. 목사 나쁘다고 하지 마세요. 교인들도 못지않게 나빠요. 자기 정당성을 그냥 움켜쥐고 안 깨지려고 하니까 자꾸 그러한 날파리, 여름에 날파리 알죠? 산에 가봤죠? 날파리 얼마나 달려듭니까 날파리 예방하는 방법은 모자를 사되 양봉하는 그 모자 면포 내려온 그런 거. 날파리 달려들면 신나요. 앞까지 오는데 못 들어가. 우리 내부에 담겨있는 것을 위하여 깨어지는 것이 우리가 날파리라는 것을 알게된 것이 정말 복음의 신나는 대목이에요. 이거 너무 감사해야 돼요. 내가 복음을 믿는 게 아니고 복음이 나를 깨뜨려준다는 이 은혜. 따라서 예수님은 선을 넘은 거예요. 위반해서 선을 넘으신 거예요. 이게 사랑이고 긍휼이에요. 내 백성 어디 있나? 자기 백성 그런 식으로 찾아내는 겁니다.


이제 끝으로 질문을 한번 던지면서 시작해봅시다. 질문은 이거에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복음과 무슨 관계있지요?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무엇을 알려준 겁니까? 갈라디아서 3장 1절, 2장 20절에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남겨준 것은 뭐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이 무슨 내용이 되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의 내용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의 선지자 기능은 본인이 죽는 거예요. 본인이 죽으면서 자기 백성을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자기 백성도 죽어요. 더 이상 마귀가 와서 죽은 인간을 유혹할 수 없지 않습니까. 죽어버렸는데. 죽었다는데 잘 하면 살 수 있어 그런 게 안 된다니까요. 죽고 새로운 백성을 뭐로?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생산해내면 되겠지요. 그러면 되겠지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 사건이 사도 바울의 몸, 성도의 육체, 육신 안에 사건이 들어옵니다. 사건이 들어오면 여기서 고린도후서 4장 10절이 성립됩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몸이 필요해요? 필요 안 해요? 필요하지요. 필요한데 이거는 내가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겁니까? 아니면 십자가 사건 때문에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예수님 죽었던 사건이 뭡니까? 이 예수님의 사건은 선을 위반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있으면 사회가 나를 지켜보고 기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여기서 의미가 생기지요. 우리가 내가 있다는 것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의미로 포장을 해서 의미를 몸에 부착해서 살자. 그 의미가 어디서 온 거예요? 살다보면 주어진 거잖아요. 사도 바울이 사도 되기 전에 사울로 있을 때 의미가 있으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지요 그 모든 것이. 그런데 그게 십자가 사건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안 거예요. 내가 내 몸의 의미 있고 의미를 붙인다 이 모든 것이 다 허깨비고 소용없는 짓인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예수님은 이 의미를 부수면서 우리를 저주 심판해버린 거예요. 저주 심판한 그 사건을 내 몸에 짊어짐은 성령이 와서 나에게 주어지게 되면 나는 더 이상 내 의미로 사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지신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의미로 나는 산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복음 전체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전체 내용이에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여전히 연결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안 보이지만 살아계신 겁니다. 살아계신다는 말은 모든 인간을 죽여버리는 거예요. 비를 내리든지 태풍을 하든지 전부 다 죽여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착실하게 자기 일을 지금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을 확장해나가는 십자가 사건을 확장해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산들아 내 머리에 덮쳐라. 주님을 애도한다고요? 애도해서 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특히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발람이 제물을 얻었다는 것.


자, 제물을 얻었다는 말은 끝으로 이것만 기억합시다. 이방인이 제물을 달라. 왕이여 나에게 일곱 송아지 일곱 양 제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혼령을 달래는 거예요. 혼령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죽은 자들의 세계에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죽은 자들까지 산 자가 죽을 자를 다루려고 하는 것이 이방 선지자의 특징이고 무당들의 특징이에요. 묘 한번 파볼까요? 이장해보고? 파묘. 우리는 기독교라 안하지만 그거 해서 만약에 자식이 잘되고 말기암이 낫는다면 해보고 싶어. 해보고 싶어요. 해보고 싶다는 말이 해서 되고 안 되고 문제가 아니라 해보고 싶다는 자체가 나의 의미를 내가 포기하기는 싫다는 뜻이에요. 어쨌든 간에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나의 의미를. 발람 같은 선지자를 오늘날 얼마나 교회에서 찾습니까. 뭘 해야 내 신수가 훤해지겠습니까. 교회에서 새벽 기도하는 거 7자로 뭐라고 했어요. ‘뽀빠이 살려줘요’. 맨날 기도가 뽀빠이 살려줘요. 남북통일이고 백날 딱 줄이면 살려달라는 거예요. 내 의미를 살려달라, 내 의미를. 주님은 선인데. 출애굽 할 때 선이거든요. 우리 그 선을 우리는 혼령을 다뤄서라도 죽은 자를 다루고 그리고 죽은 자의 신을 다뤄서 신의 계시로서 지금 나의 의미가 잃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발람 선지자고 그래서 발람 선지자는 자기가 안 당할라고 나귀를 친 거예요. 자기가 안 죽을라고 나귀를 때린 거예요. 나는 살아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몰라요. 그냥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께서 고맙게도 우리에게 저주라는 것을 복으로 바꿨구나 하나님 고마워요 끝이에요. 그 식대로 자기가 파괴되어야 자기 안에 자기가 죽인 예수님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 만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성령님이 올 때까지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전체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계속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그동안 몰랐는지 하나님하고 좋은 관계 이루면 내가 좋게 된다는 그런 헛된 망상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제는 예수님이 죽은 것을 우리가 짊어진 것을 생각해볼 때 예수님의 의미만 십자가만 자랑하고 의미를 드러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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